00. 열일곱살의 소녀
시작은 언제나 똑같다.
회색빛의 하늘, 질척이는 가랑비, 아직 아무것도 나지 않은 진흙의 정원. 오싹한 공기와 더러워진 잠옷. 목에 난 상처가 쓰리다. 저택으로 곧 돌아가지 않으면 정원사가 발견할 것이다. 발 근처에서 차이는 밧줄을 대충 밀어 놓고 하녀들이 쓰는 통로로 향한다. 이번에도 실패했어. 춥다. 이번에도. 이가 갈린다. 이번에는 무엇이 잘못된 걸까.
축축한 복도와는 다르게 방 안에는 벽난로의 불이 타오르고 두툼한 모피들이 냉기를 막아 주어 공기가 훈훈하다. 더러운 옷을 벗어 벽난로에 던지자 젖은 옷 탓에 불기가 사그라든다.
욕설을 퍼부으며 침대 발치에 놓여 있던 등잔을 연다. 그 안의 기름을 벽난로에 붓자 불길이 다시 타오른다. 거울 속 나신의 여자를 노려본다. 이번에도 실패했다.
나무 의자에 걸터앉는다. 탁자 위에는 종이와 잉크가 있다. 한참을 노려보다가 펜을 잡는다. 펜촉에 잉크를 묻혀 종이 위에 적어 내린다.
- 내 이름은….
펜촉은 힘을 잃고 멈춘다.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름조차 의미가 없다. 허탈하다. 이번에는, 이번에야말로! 10년 동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다음 30년간은 적응하고자 했다. 그다음 20년은 어떻게 죽을까만 생각했다. 5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에만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리고.
캐런 하이어.
그녀는 책 속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117년간 벗어나지 못했다.
책은 그냥 그저 그런 연애소설이었다. 소영주의 외동딸인 캐런은 영지 유지를 위해 친척인 듈란 로이드와 결혼이 예정되어 있었다. 진정한 사랑을 꿈꾸는 소녀인 캐런은 여느 여주인공들이 그렇듯이 약혼을 깼다.
냄새나고 비쩍 말랐으며 비열한 눈빛을 가진 그를 도저히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 집안이 몰락해 부잣집 딸의 시녀로 일하게 된 캐런은 그녀의 약혼자 레이몬드와 사랑에 빠져 온갖 역경 끝에 결혼하게 된다. 소설 속에서 1년에 걸쳐 진행되는 이야기이며 그녀도 그 방식을 그대로 밟고 레이몬드와의 결혼에 성공했다. 해피 엔딩. 해피 엔딩.
그리고 책의 마지막 장이 끝나고 그녀는 다음 페이지에서 살해당했다. 독주였다. 목이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니 또다시 새벽의 정원이었다. 두려움에 떨었다.
그 다음에는 조심스럽게 레이몬드와 다시 사랑에 빠지고 두려워하는 그녀를 레이몬드가 끌어안고 잠들었다. 그리고 눈을 뜨니 똑같은 정원이었다. 두 번째는 이유도 알지 못했다.
세 번째는 레이몬드를 멀리했다. 레이몬드는 다른 여자와 결혼했고 캐런은 결혼식의 하객으로서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그 결혼식의 행사 행렬에서 말에게 밟혀 죽었다. 끔찍했다. 온몸이 으스러졌다. 그 뒤로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이유는 매번 달랐지만 끝은 언제나 같았다. 자신의 죽음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 년 전에는 그대로 약혼을 이어 나갔다. 듈란과의 약혼은 깨지지 않았고 안정적으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그리고 깨어나니 다시 정원이었다. 죽어야 돌아가는지 아니면 그냥 1년의 시간이 지나면 돌아가는지 알 수도 없었다.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몇 가지 법칙을 알 수 있었다.
기간은 1년. 항상 비가 내리는 정원에서 시작한다.
1년이 지나면 캐런은 무슨 이유로든 죽고 같은 시간으로 돌아간다.
죽을 때 손에 쥘 수 있는 물건은 가지고 시작할 수 있다.
세 번째 법칙 덕에 그녀는 자신이 꿈을 꾼 게 아니라는 약간의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납작한 금화에 116이란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끝을 7로 바꿔 새기고 나서 천장을 본다. 이제는 본래 그녀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100년도 더 넘게 캐런으로 살았다. 정신이 육체보다 갑절은 더 나이를 먹으면서, 책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기대도 버렸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어.”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에요 아가씨. 난 아가씨가 없는 세상은 상상도 하기 싫어요.”
검은 피부의 하녀 낸시가 가볍게 타박하며 머리를 빗는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부인이 검은 피부를 가지고 있던 세계를 기억한다. 100년도 더 지난 일이던가. 가물거리는 기억은 차마 기억이라 부르기에도 우스울 만큼 어렴풋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이 하녀를 볼 때면 캐런은 자신이 이곳 사람이 아니란 걸 인지했다. 처음 고개를 숙이는 그녀를 볼 때 어찌나 거부감에 몸서리가 쳐졌는지.
하지만 이제는 하녀가 나갈 때 허리를 숙인 채 뒷걸음질 치며 나가지 않으면 기가 막혀 매질을 지시한다. 검은 피부의 사람은 노인이라도 하대한다. 117년은 그런 세월이었다. 사람의 모든 가치관을 바꾸는 시간.
“듈란 님이 그렇게도 마음에 안 드세요?”
마음에 들 리가 있나. 너희 모두는 내게 종이 위의 잉크와도 같아. 아무 의미 없고 덧없고 그러면서 잉크처럼 무해하지도 않지. 마시면 죽을 거야. 독이 섞인 잉크라고 해야 하나. 남아 있는 건 그냥 잠깐의 즐거움이지. 그게 비록 한 페이지도 안 되는 짧은 즐거움이라고 해도.
속으로 킬킬거렸다. 듈란은 생긴 것처럼 잠자리에서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랑 잔 게 몇 년 전이더라. 그는 언제나 어설프고 못난, 젊은이의 패기도 없는 말더듬이었다.
“못하게 생겼잖아.”
“…세상에.”
“네 애인 아래랑 바꾸면 생각해 볼래.”
“…그런 말을 어디서 배웠어요? 어느 하녀들인가요?”
“빡빡하게 굴지 마. 남자도 모르는 17세의 소녀의 성기 발랄한 농담이라고.”
“대체 지금 아가씨를 젖먹이 때부터 얼러 온 절 두고 무슨 소리를 하세요? 내가 이렇게 안 키웠는데…. 어차피 결혼 10년 후에는 그런 거 말고는 할 것도 없어요.”
그건 아니야.
“듈란이 10년이나 가겠어?”
“한 1년 뒤려나요? 그럼 더더욱 시간은 많겠네요. 어서 일어나서 허리부터 졸라맵시다. 가냘픈 허리로 듈란 님보다 더 좋은 남자를 낚을 기회라도 있나 봐야죠.”
“…흐윽!”
빌어먹을 코르셋만 아니라면 조금은 즐길 수 있을 텐데. 욕지거리조차 졸라 버리는 고래 뼈 코르셋은 가는 허리를 와작와작 씹어 삼킬 것만 같다. 숨이 턱 막힌다. 이때가 싫다.
“낸시, 난 기왕이면 풍만한 여성이 인기 있는 시대가 좋아.”
“그런 시대라면 아가씨는 천하 박색이겠네요. 입도 짧으신 분이 무슨.”
아니야, 낸시. 사실 난 먹는 걸 좋아해.
기름진 고기들, 달콤한 간식들, 입 안에서 살살 녹는 그 온갖 음식들. 하지만 이 세계의 모든 음식들은 입에 맞는 게 없었어. 빵에는 돌이 너무 많았고 고기는 지나치게 비렸어. 소금은 너무나 비싸서 레이몬드와 결혼하기 전에는 난 일주일에 한 번만 소금 친 음식을 먹을 수 있지.
내가 레이몬드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가 그거야. 맛있는 음식을 먹게 해 주거든. 좋은 식사와 좋은 섹스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남자라니까. 내뱉을 수 없는 말들을 삼킨다.
“오늘도 예배 참석은 하지 않으실 건가요?”
“기도 같은 건 결혼하면 하루 다섯 번씩 들을 텐데 뭐 하러.”
듈란은 신관이고 이 지역의 교구와 함께 하이어가의 영지도 받을 예정이다. 신혼 첫날부터 신의 이름을 읊조렸던 듈란을 생각하니 토할 것 같았다.
“멋지군요. 어렸을 적부터 아가씨를 봤지만 오늘은 좀 많이 다르시네요. 결혼하기 전에는 다들 그러시지만 곧 괜찮아지실 거예요.”
난 안 괜찮아, 낸시.
117년간 한 번도 괜찮았던 적 없었어.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여식의 17세 생일이야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다. 그것도 이미 혼인이 거의 반쯤 확정되어 있는 캐런이라면 더욱 그렇다. 영지는 교통도 불편해서 가장 가까운 다른 영주의 성도 마차로 하루는 가야 했다. 그래서 홀은 꽤나 한산했다.
어정쩡하게 서신으로 교류를 나누는 혈연들과 사업적으로 관련이 있는 자들이 홀을 어슬렁거렸다. 그리고 의무적으로 끌려온 어설픈 음악가들은 ‘빨리 끝내고 돈 받아 가고 싶다’는 얼굴을 하면서 박자도 안 맞는 곡들을 의욕 없이 연주하고 있었다.
그런 장소에서도 캐런은 주위를 빛내고 있었다. 무도회의 주인공이기 때문이 아닌, 그녀의 미모 덕이다. 낸시의 야무진 손끝이 다듬은 붉은 머리칼은 자연스럽게 물결치고 있었다. 꽉 조인 코르셋은 가냘픈 허리와 대비되는 가슴을 강조했다. 17세의 몸인데도 숨 막힐 정도로 성적인 매력이 가득했다. 시답잖은 대화로 시간을 죽이던 자들도, 캐런이 눈에 들어오면 활기를 띠고 목소리가 커졌다.
캐런은 그런 사실을 일일이 보지 않아도 다 알 수 있었다. 잠정적 유부녀이기에 대놓고 접근하지는 않지만 이들 대부분이 캐런이 한번만 ‘이대로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하면서 울먹거리면 흥분해서 옷을 찢으며 달려들었으니까. 한 7년은 남자와 뒹굴다가 다 보냈다. 생각보다 빨리 질렸다. 대부분 냄새가 났고 털은 관리하지 않아 거칠었다.
이번에는 뭐 하면서 보내지. 레이몬드랑 결혼하기도 귀찮고, 영지 사람들을 돌보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귀찮고, 구할 수 있는 책들은 거의 다 읽었고 음식은 맛이 없다.
“캐, 캐런 하이어. 네 남… 편이 와도 그런 얼굴을 할 텐가?”
“아직 아니잖아.”
“…약, 혼.”
“아무튼 아직 아니래두.”
듈란, 캐런의 약혼자.
명색이 약혼녀의 생일 파티인데 검은 사제복을 입고 온 것이 기괴했다. 이제는 익숙하지만, 옷차림과 모습을 보고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것이 불쾌해 캐런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캐런이 진정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은 수군거리는 주위가 아닌 눈치 없이 주위를 노려보는 그의 태도다.
부끄러움. 좀 전에 도착한 그에게 맞는 옷은 없었고 그의 옷은 장소에 어울리지 않았고 바지 끝에는 진흙을 닦아 낸 물기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역한 약 냄새와 포도주 냄새, 비 비린내가 풍겼다. 커다란 눈은 생기가 없었고 눈 밑은 검은 그늘이 내려앉아 어린아이들은 보기만 해도 울었으며 하녀들도 가끔 흠칫 놀라곤 했다. 그리고 그 눈은 캐런에게로 다시 꽂혔다. 물론 백여 년간 익숙해진 캐런은 딱히 감흥이 없었다.
“네가 무슨… 생각인지.”
“알면서 뭘.”
키는 멀대 같이 크지만 비쩍 마른 몸에 돈도 없고 잠자리 기술도 없는 매력 없는 놈. 캐런을 사랑하지 않지만 욕정은 느끼고 거만하며 예의 없는 남자. 캐런은 그가 싫었다. 그리고 그 싫은 감정을 느끼는 자신도 싫었다. 고작해야 종이 위의 잉크에게 화를 내는 자신이 우스워졌기 때문에.
네가 매력 있는 남자였으면 소설 내에서 갈등이 일어날 리도 없었잖아!
이런 생각조차 우습다. 대체 이 남자가 뭐라고. 이 남자와 그냥 결혼도 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듈란과 함께한 삶을 끝내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을 때 그 화는 절정에 달했다. 모든 것이 의미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 연민도 해 봤고 수녀처럼 아무도 가까이하지 않고서도 살아 보았다.
“사는 게 의미가 없어.”
“결… 혼하는.”
“‘결혼을 앞둔 모든 여자들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좌절하지만 그 대부분은 결혼 후에 사라지지. 네가 동화 속의 공주라는 생각은 그만둬 하이어 영애…’라고 하려 했지?”
“…비슷.”
그냥 그대로면서 뭘. 속으로 고소를 흘리면서 대꾸했다. 이건 네가 몇 번이나 말을 더듬으면서도 내게 했던 말이었어. 넌 나랑 결혼할 테니 꿈 깨, 라는 말.
“그런 거 아니야.”
그 정도의 푸념이었으면 좋겠단다.
난 그냥 나이를 먹고 싶어. 아니면 그냥 죽고 싶어. 아니… 그냥 여기가 싫어. 이젠 지겨워. 비슷한 대화, 비슷한 상황을 100번은 돌았어! 빌어먹을 말더듬이야.
비명을 삼키며 캐런은 적당히 입을 삐죽이는 17세의 소녀를 흉내 내었다. 25세의 듈란은 그 미모에 약간 감탄하며 비아냥거리는 걸 그만두었다. 듈란은 캐런을 철부지로 생각했고 그건 맞았다.
한 100년 전에는. 어쩌면 지금도. 캐런을 117세로 대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녀는 자신이 117세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자각도 없었다.
캐런, 아름다운 아가씨, 붉은 머리, 보랏빛 눈이 인상적인 영원한 소녀.
댄스곡이 시작되었다.
캐런은 부루퉁한 얼굴로 듈란의 손을 잡았다. 무난한 시작이다. 듈란은 춤이 서툴렀지만 캐런은 발이 걸려 넘어지는 것까지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능숙하게 듈란을 잡고 이끌었다.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대략 예순아홉 번째쯤 듈란과 추는 춤이었다. 허리를 잡고 회전을 한다.
이번에는 누가 날 죽일까?
이제는 죽음이 가장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사건이 되어 버렸다. 캐런은 이제 어느 정도는 자신의 죽음을 연출하기까지 한다. 죽음을 반복하니 기억은 섞였고 사람들도 헷갈렸다. 지난번에 얘랑 이런 대화를 했던가 하는 사소한 문제부터 원한을 쌓아서 살해당하는 문제까지.
어떻게 살든 끝에서는 죽고 다시 시작할 텐데. 아무렴 어때. 하지만 비슷하게 반복되는 일상, 같은 대화가 가장 지긋지긋하다. 캐런은 가능한 새로운 반응을 원했고 전쟁도 없는 산골에서는 치정이 그나마 자극적인 일이었다.
뭐든지 좋으니까 날 재밌게 해 줘.
이번에는 뭘 할까?
17세이자 117세의 생일이었다.
레이몬드와 만나려면 한 달은 더 기다려야 한다. 몇 장 안 되는 그 서술, 중요할 것 없는 이 시기가 너무 지겨웠다. 이 시기에 중요한 일이란 듈란이 얼마나 매력 없는 남성이며 무례한가, 그리고 그와 결혼하기엔 캐런이 얼마나 아름답고 재치 있으며 귀한 여성인가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곡이 끝났다.
“사, 사랑하라고까지는 하지 않겠어. 캐런 하이어. 우린… 친척이고 새삼… 하, 하지만 우리가 결혼하지 않으면 영지는 국가에 귀속… 그걸 막기 위해 결혼이 피, 필요….”
“너와 나 둘 다 아는 걸 굳이 그렇게 충실히 설명해 줄 필요는 없어.”
“…그, 그럼 최소한 웃어. 이 저택의 전… 부가 날 비웃고 있으니까.”
손목에 통증이 밀려온다. 멍청아 너무 세게 잡고 있잖아. 멍들 것 같아. 캐런은 아픈 게 싫었다. 아무리 겪어도 싫었고 죽음은 미루고 싶었다. 밀려오는 짜증을 밀어 두며 캐런은 듈란의 가슴에 다른 한 손을 얹었다.
“그런 게 아니야 듈란.”
“나, 날 바보 취급하는 건 견딜 수 없어.”
으르렁거리는 그가 우스웠다. 너에게 바보란 귀여운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데. 자존심은 높은데 자존감은 낮다. 이런 모습도 꽤 봤었다. 이 속 좁은 청년의 태도는 캐런과의 결혼이 성사되어도 바뀌지 않는다. 이건 그의 천성이다.
그가 본 이야기에서 캐런의 짝이 아니기에 그런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몇십 년은 더 지나서 아이를 키우고 또 그 아이가 아버지가 될 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에 성숙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캐런이 아는 건 열등감에 시달리는 눈앞의 청년이고, 시간이 흐르는 것을 본 적이 없으니 의미가 없다. 캐런의 시간 속에서 그는 바뀌지 않는다.
캐런은 혹시 원약혼자인 듈란 로이드와의 무탈한 결혼이 열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캐런도 어렸던 것 같다. 아닌가? 얼마 전인지도 모른다. 100년을 넘게 어린아이로 살아온 머릿속은 아무렇게나 꽂아 놓은 책꽂이 같았다.
캐런이 사랑을 속삭여도 그는 의심한다. 먼저 다가와 무조건적인 헌신과 대가 없는 사랑을 맹세하는 레이몬드와는 전혀 반대인 듈란을 처음 공략할 때는 꽤나 신선했었다.
그때는 어땠더라. 캐런은 이번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했다. 지난번에 반 정도 읽었던 책은 레이몬드의 저택에서 주문했다. 지금은 출판되지도 않았다. 그 책을 마저 볼까. 하지만 레이몬드와의 만남은 아직 멀었다.
이 시기는 그저 듈란과 어떻게 잘 깨지는가만 중요한 시기였다. 듈란을 골려서 망신 주는 방법을 캐런은 서른 가지도 넘게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넘어가면 결혼하지만 그것도 몇 번 하니 재미없었다.
이때 뭘 안했지?
사건이 일어날 시기가 아니었기에 캐런은 이 시간 대부분을 적당히 보냈다. 아직 추운 계절이라 정원에 나가기 힘든 시기. 흥미진진한 사람들은 오지 않는, 하녀와 하인 몇몇과 못난 약혼자만 있는 시간. 초반에는 언제나 허탈감에 잠겼다. 이번에는 열일곱 살에서 100년이나 더 지난, 그녀 혼자만이 아는 기념비적인 시간이다. 무엇이든 색다른 일을 하고 싶었다.
“오늘 밤 내 방에 찾아와.”
생각해 보니 오늘 듈란과 한 적은 없었다. 이 시간은 그냥 흘러가는 시간이었으니까. 듈란은 긴 여행에 피곤하고 퉁명스러웠고 그런 듈란에게 서운한 시간. 그리고 어린 시절보다 더 못생겨진 듈란에게 실망하는 시간이다. 이번에는 한 번 듈란을 묶어 놓고 채찍으로 때려 볼까.
하지만 듈란은 캐런의 말에 눈썹을 찌푸렸다. 화를 내려나, 음탕한 여자라고 욕하려나, 두근거리는 캐런에게 한 말은 뜻밖이었다.
“…방문을 잠그고 개 떼를 풀어 두려고?”
“어머?”
“빌어먹을, 네가 열 살 생일날 그랬잖아.”
그런 설정이? 밀려오는 신선함에 약간 기분이 좋아졌다. 「캐런」에게 그런 과거가 있는 줄은 몰랐는걸. 결혼 생활 할 때도 말 안 하더니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구나. 아주 좋아. 이런 사소한 즐거움. 캐런은 유쾌해져서 진심으로 웃었다.
“그럼 지금 춤이 끝나고 바로 가자.”
“왜?”
“뭐긴, 결혼식을 좀 일찍 하자는 거지.”
“…이해를 못, 하겠군.”
옷 위의 가슴팍을 꼬집는다. 약한 신음이 들린다.
사랑은 없어도 성욕은 있잖아? 난 널 알아.
“이런 아내는 싫니?”
아니잖아.
웃으면서 풍성한 옷자락으로 그의 하반신을 가려 주었다. 숙녀의 매너다.
왜 성과 죽음은 맞닿아 있는 기분이 드는 걸까. 두려움에 몸서리처질 때는 몸을 섞으면 조금 나았다. 안을 긁는 감각은 꽤나 좋고 몸에 닿는 온기가 위안을 주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생의 가장 격렬한 부분이 잠시나마 우울한 건 전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 것 같다.
그러나 그건 죽음을 미리 경험하는 듯한 의사 체험 같기도 하다. 하늘 끝까지 밀려 올라갔다가 땅끝으로 처박히는 기분. 물론 허공에 나뭇가지 젓는 것처럼 의미 없는 몸동작만 하던 남자들도 있었지만 듈란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화사하게 아름다운 캐런과는 달리 비쩍 마르고 매부리코의 창백한 그는 성격도 음울했고 캐런의 사소한 한마디를 부풀리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다른 사람을 깔보는 태도는 사람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되기 일쑤였으며, 영지경영에도 능력이 없어 캐런의 부친에게 대부분 의지했고 어깨를 옹송그리고 다녀 자세도 좋지 않으며 허리도 구부정했다.
고정된 세월을 돌고 돌다 보면 나름의 매력이란 게 보일 법도 한데. 듈란도 그럭저럭 귀엽게 볼 수 있던 건 상당한 세월이 지나서였다. 그즈음에는 거의 모든 이들이 비슷해 보였기에. 듈란보다 더 나이를 먹고 나니 그의 음울함과 비열함과 그렇게 자라게 된 환경과 천성이 눈에 들어왔다. 이젠 나름대로 귀엽게 봐줄 만하다.
“…아, 파?”
그렇게 물으면서도 전혀 걱정하는 투가 아니라 오히려 즐거워하는 것 같다. 듈란은 캐런의 혈흔을 보고 나서 눈에 띄게 격해졌다. 캐런은 그런 그를 보며 코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았다.
어련하겠어. 인기 없는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인기 없음에 약간 의기소침해 있으면서도 그걸 인정하기 싫어하지. 그런 남자일수록 여자의 처녀성에 집착하는 법이고. 자신의 어설픔을 들키고 싶지 않거든.
캐런은 듈란이 동정일지 궁금해졌다. 수도원에서 학업을 밟고 돌아왔지만 캐런은 그런 곳에서도 얼마든지 동정을 뗄 수 있다는 걸 잘 알았다. 더욱이 듈란은 그리 모범적인 성직자도 아니었다. 레이몬드랑은 다르게.
듈란도 자신을 누군가와 비교할까? 캐런은 자신의 처음이 언제였나 돌이켜 보았다. 까마득하게 예전이었다. 레이몬드였나? 상념은 잡음에 깨졌다. 밖에서 하인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찾고 있었다. 파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캐런은 자신이 이러고 있다는 걸 들키면 어떻게 될까 궁금했다. 분명 약혼한 사이인데도 대부분 듈란을 석연치 않아 했다. 그들에게 이 침실의 꼴을 보여 주면 어떨까. 캐런을 흠모하는 하인이 경악에 빠지는 꼴도 보고 싶었다. 이 시점에서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을 손꼽아 보았다. 듈란이 당황하는 것도 보고 싶다.
캐런은 듈란의 허리 놀림이나 어설픈 애무나 대부분이 싫었지만 신음하면서도 절박해 보일 정도로 자신을 끌어안고 놓지 않는 것은 마음에 들었다. 그것 때문에 자세가 흐트러져 감각은 떨어졌지만 아래의 마찰만이 잠자리의 즐거움은 아니다. 하지만 포옹의 목적을 알고서 캐런은 당황했다.
화를 내려다가 자신이 정말 화가 나는가 생각해 보면 그것도 아니어서 그만두었다. 이것도 나름대로 자극적이다. 지난 기간 동안 한 번도 없었던 일이기도 하고. 첫날부터 듈란과 뒹굴다니. 결혼식 날에 바로 침대로 간 적은 있지만 그때 그는 엄청나게 버벅거리다가 신을 찾지 않았던가.
지금 보면 꽤나 변태임이 분명하다. 나중에는 진짜 촛농이라도 떨어뜨려 봐야지. 생각에 잠겨 가만히 있는 캐런이 충격받은 것이라 생각했는지 듈란은 더듬더듬 변명했다.
“나, 날 끌어들인 건 너야.”
왜 아주 내가 강간했다고 하지그래. 캐런은 속옷이 더러워지는 건 싫었다. 아직 파티는 끝나지 않았다. 또 씻어야 하나. 정욕에 잠깐 들떴던 육체는 욕구가 해소되자 빠르게 식었다. 불안해 보이는 듈란을 쳐다보던 캐런은 듈란에게서 냄새가 나자 인상을 썼다. 얘, 비 맞고 머리도 안 감았구나. 힘이 빠지는지 듈란은 캐런이 미는 대로 밀려났다.
“씻고 와. 냄새나.”
“…어? 많, 많이?”
“…….”
뭐 할까 이번엔.
캐런은 침대에 홀로 누워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전 재산을 주민들에게 줘 버리기도 했고, 책만 본 적도 있고, 유부남들과 즐기다가 칼 맞은 적도 있다. 레이몬드와 이셀라의 결혼을 지켜보기도 하고 듈란과 얌전히 결혼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세월 동안 간 곳이라고는 하이어가 저택과 이셀라의 별장, 그리고 레이몬드의 저택이 대부분이었다. 그마저도 레이몬드의 저택에는 소설의 끝부분에 가기 때문에 짧은 기간밖에 있지 못했다. 그 안락한 침대에서 유유자적하게 보낸 기간은 백여 년 동안에도 날짜로 치자면 얼마 되지 않았다.
이 시대의 여성이 갈 수 있는 곳은 너무나 적어서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캐런은 이번엔 이셀라를 꼬드겨서 멀리 여행을 갈까 생각을 해 봤지만 그마저도 그만두었다. 여자 둘이 여행을 퍽이나 보내 주겠다. 하인 다섯은 기본이요, 책임질 성인 남자로 레이몬드나 듈란 등이 붙을 것이 뻔했다. 신경질이 났다. 누가 누구를 책임진단 말인가.
캐런은 상기된 표정으로 나오는 듈란의 매무새를 대강 정리해 주며 당부했다.
“제대로 에스코트해.”
세 곡은 더 춰야 하니까. 그리고 넌 한 번은 하인의 발에 걸려 넘어져서 그에게 화를 내고 머리에 포도주를 뿌리며 비웃을 예정이거든. 난 그걸 보며 네 난폭함에 충격을 받을 예정이고.
“…으.”
“다리에 힘 잘 주고.”
“…….”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오히려 캐런이 에스코트를 해야 할 판국이다. 캐런은 혀를 차면서 듈란을 부축했다. 그리고 듈란은 발을 헛디뎌 하인에게 넘어졌지만 화를 내고 머리에 포도주를 뿌리지는 못했다.
“아가씨 뭐하세요?”
“응, 내 미래에 대한 고민.”
낸시가 아침 식사를 나르다가 도통 식사에 집중하지 못하는 캐런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낸시는 캐런이 지나치게 머리를 쓰는 것을 싫어했다.
“너무 오래 생각하지 마세요. 지나가는 시간이 아깝잖아요?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으니 그냥 즐겨요. 네?”
한 100년쯤 지났는데 안 괜찮던데.
“응….”
“손에 그건 뭐에요?”
“이거?”
만지작거리던 동전을 숨겼다가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다시 꺼냈다. 이런 것에 의미를 두는 사람은 결국 캐런 혼자다. 남에게는 가치가 없다.
“그냥 이런 거야. 부적 삼아서 가지고 다니는.”
“너무 복잡하면 그냥 그 동전이나 던져요. 오래 고민해도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 아니에요? 자, 어서 어서 고민을 마치고 식사나 해요. 코르셋을 다시 조여야 하니 많이는 말고.”
괜찮은데? 캐런은 동전을 쥐었다. 117년간 함께한 건 고작 동전 하나. 어차피 갈피 못 잡는 인생인데 이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숫자가 나오면 이번엔 그냥 듈란과 뒹굴거리거다 신학 공부나 해 볼까. 뒷면이면… 낸시가 낚아채서 동전을 튕겼다.
“자, 뒷면 나왔어요. 어서 먹어요.”
그럼 이번엔 나쁜 짓을 해야지.
나쁘게 살기로 인생의 목표를 잡은 캐런은 찻잔에 채워지는 뜨거운 물을 보며 원대한 야망을 꿈꿨다.
캐런은 사는 것이 지루해 미칠 것 같았다. 몇 십 번의 시도 후 레이몬드와의 결혼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자 갖가지 방법에 매달렸다. 선행도 그중 하나였다. 자산을 팔아 베풀기도 했고, 모금 운동도 했다.
그럼에도 결과는 똑같았다. 아니, 더 좋지 않았다. 자신이 도운 노숙자에게도 죽임을 당했으니까. 하지만 선행은 꽤 중독성 있는 것이었다. 답이 아니기에 포기했지만 한동안 캐런은 어떻게 하면 남들을 돕고 자신도 행복해질 수 있을까 고민했었다. 잠을 자지 않았고, 발이 부르트게 돌아다녔다. 보람차게 헛된 짓이었다.
선행이 그렇게 재밌다면 악행도 분명 재밌을 것이다.
악행을 하려면 엄청나게 나쁜 짓을 하고 싶었다. 무엇이 좋을까? 캐런은 세계 정복을 하고 있는 자신을 떠올리고 킥킥 웃었다. 하지만 캐런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과 가지고 있는 돈을 생각하면 세계 정복 같은 야망은 포기해야 했다.
하인들은 스무 명 남짓하며 그나마도 부친의 말을 듣지 캐런의 말에 살인을 불사할 정도는 아니다. 누군가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많은 공을 들여야 했다. 캐런은 당사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대신 목숨을 바쳐 충성하곤 하는 이야기 속의 수많은 시녀들과 하인들, 기사들을 생각하며 혀를 찼다. 기한은 고작 1년이다. 결국 사고를 치며 시간을 보내려 해도 할 수 있을 게 큰 건 불륜이요, 작은 건 하인 괴롭히기다. 하찮다.
규모 크게 나쁜 짓을 하고 싶다. 불을 질러 본 적도 있으나 정원사들이 발 빠르게 금방 꺼 버리고는 했다. 덕분에 자진을 목적으로 했던 몇 번의 방화 시도는 언제나 실패했다. 자해해도 소용없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그날까지는. 계단에서 몸을 굴렸다가 온몸이 마비된 적도 있다. 말 한마디 못 하고 누워서 욕창을 달고 살다가 죽을 때는 오히려 안도마저 느꼈다.
그때를 생각하니 약간 입맛이 돌았다. 식물인간을 성심껏 돌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 다음 해에 눈을 떴을 때 자신을 죽였던 사람들에게 복수나 할까 했지만 그마저도 의미 없어 그만두었다. 만나지도 않은 사람을 처벌할 명분도 없었고 복수하려고 든다면 복수 대상이 너무 많았다. 낸시만 하더라도 자신의 목을 비튼 적이 있다. 그때 갑자기 캐런의 생각이 멈추었다. 복수? 복수, 복수라.
“…아.”
그녀는 한동안 자신이 할 만한 일은 다 해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건 틀렸다. 첫날부터 듈란과 한 적이 이제까지 없던 것처럼 그녀가 하지 못한 선택지는 수도 없이 많다. 삶의 불확실성에 찬사를 보내며 그녀는 왜 한 번도 자신이 복수를 시도 안 했던가를 기이하게 여겼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건, 세상을 변화시키는 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 읽고 행했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그걸 반복했다. 사랑을 해야 했다. 100년간 사랑을 찾아 떠돌았다. 지루한 나날이었다. 의미 없는 나날이었다.
사랑은 답이 아니었다. 문자들은 지긋지긋해졌다. 이제는 복수의 시간이다. 재미없는 문자들은, 답이 없는 문자들은 독자의 복수를 받아야 한다.
“아!”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던 일!
캐런은 새로운 소일거리를 떠올렸다. 그리고 희열감에 휩싸였다.
왜 아직까지 안 했던가.
사람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건 사랑이 아니다.
죽음이다.
캐런은 117세의 생일을 맞이하여 살인마가 되기로 결심했다.
새로운 계획은 캐런에게 활기를 주었다.
캐런은 왜 아직까지 자신이 한 번도 먼저 죽이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들떴다. 100년간 죽고 죽고 또 죽어 왔는데 왜 먼저 실행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녀는 항상 당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리 쉬워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래서 기뻐. 고난은 사람을 빛나게 한다더니.’
가느다란 팔은 닭 한 마리도 비틀기 힘들어 보였다. 책보다 무거운 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예배당에 갈 때도 마차를 타고 움직였으며 높은 계단이 있는 곳은 하인들이 안아서 옮겼다. 그리고 기한은 1년. 근력을 기르려고 했다간 아무것도 못 하고 끝날 터였다.
젖먹이라면 손쉬울지 모르지만 저택에 유아는 없었다. 임신한 하녀는 일을 하지 않으니 저택에 그렇게 어린아이가 있을 리가 없다. 그나마 어린 것이 정원사가 부리는 꼬마인데 그 아이는 이미 캐런보다 강할 것이 분명했다. 저택의 도서관에 있는 서재는 꽤나 컸지만, 그중 살인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은 없었다. 작은 마을에서 마지막으로 일어난 살인은 캐런이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었다. 결국 캐런은 자신의 손으로 하는 살인은 좀 힘들 것 같아 잠깐 우울해했지만 이내 그것조차 즐겁게 여기기 시작했다.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그녀가 겪은 죽음의 수만 세 자리 수다. 자신이 교과서요, 산증인이니 해답은 자신이다.
캐런은 지루함 말고는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다. 잡혀도 영생하는 그녀로서는 다시 시작하면 그뿐이다. 그리고 그녀는 온갖 사람들의 버릇이나 과거 취향을 꿰뚫고 있었고 시간은 끔찍하게 많다.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제일 처음은 누가 좋을까? 캐런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생각했다.
먼저 이셀라가 떠올랐다. 레이몬드의 약혼녀인 그녀는 캐런의 경쟁자적 위치에 있었다. 캐런은 이셀라가 자신에게 망신 주려 애쓰던 모습을 떠올렸다. 레이몬드를 뺏길까 전전긍긍하며 캐런을 괴롭히던 그녀는 그만큼 허점도 많았다. 무엇보다 나중에 시녀로서 함께할 일이 많을 테니 비교적 쉬운 상대였다.
“…바로 잡히겠군.”
연적에 하녀라니. 누가 보아도 용의자 1순위 아닌가. 길게 버티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사형 같은 건 두렵지 않다. 어차피 죽으면 다시 시작. 만일 진짜 죽으면?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원하는 안식. 하지만 초장부터 실패한다면 흥이 식는다. 흥미진진하게 진행시키기 위해서 가능한 오랫동안, 많은 사람을 죽이고 싶다.
자기가 이제까지 당한 것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도 뿌듯할 것이다. 캐런은 가장 손쉽게 죽일 수 있는 사람이 누군가 생각했다. 가장 어려운 건 레이몬드일 것 같다. 레이몬드는 자신의 이름에 경을 붙인 남자였다.
캐런은 그가 장정 여섯을 손쉽게 상대하는 것을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캐런에게 반한 레이몬드라면 캐런이 건네는 잔에 무엇이 들었든 기꺼이 마시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약간 김이 빠졌다.
그라면 그래도 오래오래 자신을 즐겁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한여름의 그가 말을 타고 어디로 지나갈지도 아니, 그 길목에 풀을 엮어 두기만 해도 낙마시킬 수 있다. 운이 좋으면 목이 부러지리라. 캐런은 레이몬드를 잘 알았다. 아니 등장인물들을 다 잘 알았다.
그렇다면 자신의 약한 몸은 오히려 재미 요소리라. 캐런은 그리 생각하면서 주먹을 쥐어 보다가 웃으면서 다시 풀어 장신구를 머리에 달았다. 레이몬드는 나중이다. 레이몬드를 만나기 전에 캐런은 그의 현재 약혼녀인 이셀라 에반스를 만나야 한다.
캐런 하이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캐런은 위험에 처하고, 또다시 레이몬드는 자신을 돌아보겠지.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것은 당연한 전개 수순이다. 너무 뻔한 사랑 이야기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달라질 것이다. 캐런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거울을 본다. 발그레한 볼, 기대감에 반짝이는 눈. 사랑에 빠진 듯한 모습의 소녀가 그 안에 있었다.
몇십 년만의 모험. 캐런은 백여 년 전에 레이몬드를 처음 보던 날을 생각했다.
소녀의 꿈.
진한 황금빛 머리의 기사님. 부자에 잘생기고, 완벽하게도 다른 여자들에겐 잔인했다. 캐런은 쿡쿡 웃으면서 머리를 빗었다. 소녀들이 원하는 건 모든 여자에게 상냥한 남자가 아니라 자신에게만 상냥한 남자였다. 그래서 그는 완벽했다.
캐런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기사.
캐런은 언제나 미래를 바랐지만 특히 보고 싶었던 미래 중 하나는 그녀의 죽음 이후의 레이몬드였다.
내가 죽으면 당신은 어떻게 하나요. 나의 기사님. 나를 죽인 자들에게 복수하나요? 눈물을 흘리면서 실의에 빠지나요? 아니면 나를 잊고 다시 다른 사람을 만나나요?
캐런은 그의 여러 반응 중 가장 선명하고 그럴듯한 행동은 첫 번째라는 걸 확신한다. 죽기 전에도 그는 캐런이 무슨 일을 당하면 참지 않았다. 그렇다면 캐런이 죽는다면? 그것을 보고 싶은데 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캐런이 몇 번 레이몬드의 방에서 베르딕에게 죽은 적이 있었다. 이셀라의 부친인 그는 캐런과 레이몬드의 혼인식 날 몇 가지 조건이 맞으면 캐런을 죽이는 데 성공한다. 캐런은 베르딕을 생각하자 살짝 목이 따끔거렸다. 숨이 끊어지던 몇 번의 순간 중 베르딕이 레이몬드에게 잡히는 순간도 있었을 터다. 레이몬드는 베르딕을 어떻게 했을까? 아니면 어떻게 할까? 캐런은 레이몬드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캐런이 레이몬드와의 「해피 엔딩」에 답이 있다고 생각하고 레이몬드와 다양한 방식으로 지내던 초반의 일이다. 지금은 죽일 만도 한가, 하며 심드렁하지만 당시에는 꽤 무서웠다.
그는 손도끼로 캐런의 목을 내리쳤다. 도끼는 날이 무뎠다. 하, 하는 신음만 지르다가 근육이 짓이겨지고 목뼈가 부서질 때까지 죽지 못했다. 베르딕의 이동 패턴을 완벽히 파악하기 전까지 캐런은 한동안 베르딕의 도끼날을 잘 갈아 두고 머리를 틀어 올려야 했다. 한 번에 베어지길 바라면서.
“정말 가지가지 잘도 죽였군.”
하지만 이번에 죽는 건 나만이 아니야.
캐런은 웃었다. 향기가 퍼질 듯한 환한 웃음을.
“…그러므로 죄짓지 마라. 죄짓는 자는 영원한 지옥의 구렁텅이에 빠져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비둘기같이 순결할 것이며….”
캐런은 터져 나오는 하품을 참으며 눈을 감지 않도록 노력했다. 지루한 설교만큼 좋은 수면제는 없다. 몇십 번이고 반복해서 들은 설교 내용. 캐런의 기도는 닿지 않는다. 캐런은 기다렸다. 초월자의 음성, 환상, 예언자의 출현 등의 신비들을.
무언. 답은 없었다. 그녀가 그렇게 간절히 원했던 음성은 들리지 않는다. 그녀는 이해를 원하고 납득하길 원했다. 그러다가 삶이 반복될수록 포기만 거듭했다. 언제 돌아갈 수 있나요? 이 꿈은 언제 끝나죠? 난 언제야 이 지옥에서 벗어나나요. 증거를 보여 주세요. 내가 이런 고통을 겪을 이유를 말해 주세요. 내가 왜.
“신, 신성한 시간을 모욕하… 지 마. 캐런 하이어.”
네가 저 강단에 서는 게 더 모욕 아닐까. 말더듬이의 설교를 참고 들어야 할 사람들을 생각해 봐. 캐런은 듈란에게 면박을 주려다가 뒤에서 오는 여성을 보고 그만두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셀라도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신가요. 그동안 격조했지요. 호호. 무성의한 대화와 웃음이 오간다. 캐런은 성전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은빛 드레스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너도 참 발전이 없구나. 이번에는 살인을 저지르며 충실히 1년을 지내기로 한 캐런의 머릿속에는 저 은빛 드레스를 입은 채 목매달린 이셀라가 떠올랐다. 종 손잡이 같을 것이 분명하다. 그 밑에서 다리를 잡고 매달리면 종처럼 소리를 질러 주려나. 궁금해진다.
“하이어 영애. 제 목걸이가 마음에 드시나요?”
“네. 부친께서 사다 주신 건가 보군요. 참으로 아름다운….”
교수형 밧줄감이네요.
“후훗, 제 아버지가 아니랍니다. 이건 제 약혼자께서 선물해 주신 거예요. 하이어 영애도 이제 곧 결혼하신다고 들었는데, 받은 것이 있나요?”
“…….”
얘, 기죽지 마라 좀. 캐런은 얼굴이 벌겋게 물든 듈란을 보면서 왠지 한숨이 나왔다. 시골 영주의 데릴사위로 오는 남자가 어떻게 귀족과 갑부들이 할 만한 값비싼 선물을 준비하니. 하지만 누구나 아는 사실을 일부러 말하니 분위기가 냉해진다.
“어머, 죄송해요. 제가 눈치 없이 행동했네요. 부디 용서해 주셔요.”
“무슨 말씀을. 아름다운 목걸이군요. 나중에도 부디 또 보여 주시길.”
그가 반지는 내게 주겠지만.
“기꺼이요.”
이셀라. 이셀라. 그러니까 네가 안 되는 거야.
네가 날 괴롭히려고 해도, 안 된다고. 넌 부자지만 그럼에도 계급이 나보다 낮단 말이야. 그리고 주위를 보렴. 지금 다들 가련한 날 동정하고 있잖니.
캐런은 그 분위기에 편승해서 살짝 눈물을 보였다.
“물, 물욕에 신경 쓰는 건… 옳지 못, 한 일입니다.”
“…….”
넌 왜 다 된 일에 찬물을 또 끼얹고 그래.
듈란은 힘겹게 말을 이어 가면서 이셀라를 비난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분위기는 싸해진다. 캐런은 눈썹을 찌푸렸다. 왜 이리 귀찮게 굴지. 캐런은 이셀라의 별장과 레이몬드 저택으로 들어가야 하는 목표에 차질을 빚기 싫었다.
“이만 물러가겠어요.”
뾰로통하게 삐친 이셀라를 보면서 듈란은 캐런에게 미적대면서 그 정도는 자기도 살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캐런은 자신이 미망인이 되면 레이몬드를 유혹하기 좀 더 쉽지 않을까 고민했다.
캐런을 처음 보는 사람은 누구나 잠시 숨을 멈추고는 했다. 하이어 부인이 타계한 뒤 한동안 실의에 빠져 있었을 때도 다들 마음씨 고운 하이어 부인에 대한 슬픔보다 나날이 아름다워지는 캐런이 우는 모습을 더 안타까이 여길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어린 나이에 이미 약혼했음에도 불구하고 호기심 어린 자들이 종종 찾아오고는 했다.
하지만 하이어 영주는 그때마다 그들의 눈길에서 캐런을 지켜 내곤 했다. 다들 입을 모아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고 하는 한 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혼담은 깨지지 않았고, 은근한 원성은 영지에 깔렸다.
그리고 오늘, 화창한 봄꽃과 함께 웃는 캐런을 본 자들은 듈란에게 살심마저 품었다.
타는 듯한 붉은 머리는 활짝 피어난 장미 다발을 연상시켰다. 뛰어가는 그녀의 얼굴에서 예의상 웃음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이 터졌다. 그 발걸음은 마치 봄의 여신이 춤을 추는 것과 같았다. 봄이 왔다. 그 발은 꽃잎 한 장 으스러뜨리지 못할 것처럼 가벼웠다.
눈동자는 곧 다가올 여름 하늘처럼 청아하게 빛나고 경쾌한 발걸음에 모두들 일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아가씨가 저리 웃다니 몇 년 만이지. 기념할 만한 날이었다. 봄이 오긴 오는구나. 꽃향기가 풍긴다.
하늘은 맑고 푸르며 가장 아름다운 소녀는 즐거움에 취해 웃는다.
캐런은 첫 살인에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