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1. 이셀라의 목걸이 (2/31)

01. 이셀라의 목걸이


 

“히이잉.”

숨 막히도록 붉은 꽃으로 유명한 하이어 영주의 저택은 길 입구부터 엄청난 오르막길로 이셀라의 발을 고통스럽게 했다. 시작부터 좋지 않았다.

저택에 오는 길은 도로가 덜 정비되었는지 마차는 거칠게 흔들렸고 마부는 마부석에서 떨어져서 엄살을 떨었다. 게다가 말 한 필의 발목이 부러졌다. 나머지 말로는 도무지 급경사를 오를 수가 없어서 이셀라는 다리가 배기는 걸 느끼며 산을 타야 했다.

“이딴 시골, 어디가 좋다고.”

이셀라는 아버지를 따라 조그만 시골로 온 것부터 심통이 났다. 하이어가가 소유한 영지는 신의 축복을 받았다고 할 정도로 봄이면 온 영지에 꽃이 만발하고 가을이면 열매들이 풍족했다. 험악한 산지 위의 분지였지만 귀한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고 거주민이 적어 관리 비용도 많이 필요치 않아 면적 대비 수입이 상당히 괜찮은 지역이었다. 간단히 말해 효율이 좋기 그지없는 곳이다.

물론 그건 그 땅을 이익 대상으로 본 아버지의 눈이었고 지금의 이셀라에게는 그저 욕을 쏟아부을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여기는 우리 땅이 될 거야”

베르딕은 웃으면서 딸의 손을 잡았다. 주요 도시들과는 퍽 떨어져 있어 귀족들의 관심에서 영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자식은 딸 하나뿐. 이 영지는 대상인 베르딕 에반스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하이어가는 심지어 은둔한 지 오래되어 뒷배를 봐줄 만한 인연들도 적었다.

“걱정 마렴, 이셀라. 우리도 이제 귀족이 될 것이란다. 왕이 영지를 내려 주는 시대는 지났어. 이제 영지도 돈으로 살 수 있어.”

보다 편히 영지를 가지기 위해 하이어가 주변의 광활하기만 하고 쓸모없는 땅들을 사들이느라 이셀라의 보석들까지도 몇 개는 팔아야 했다. 이셀라는 그것을 생각하면 입술이 뒤틀렸다. 그중에는 외할머니에게 물려받은 장신구도 있었다. 다른 나라 왕족에게 빚 대신 받았다고 한 아름다운 것이었다.

이셀라 에반스는 그 보석 자체보다 빼앗은 물건이라는 것에 만족했다. 에반스가는 귀족과 왕족과 성직자들을 혐오하며 사랑한다. 타고나길 귀족으로 태어나서 그저 땅에서 나는 이익들만 취하는 돼지 같은 귀족들에게서 온갖 방법을 통해 재물이나 명예를 뺏는 것이 가문의 영광이었다.

우리는 빼앗는다. 우리가 가져야 더 잘 관리할 수 있어. 우리가 진짜 위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야.

“그래, 지난번에 예배당에서 하이어가의 상속녀를 만났다면서? 어땠느냐?”

“흥, 별로였어요. 촌티 나는 것이.”

“이번에 초대를 받은 것이 다행이구나.”

“토 나와요.”

웩.

이셀라의 뒤틀린 속내는 캐런의 얼굴을 보고 토기마저 느꼈다. 과연 이런 산골에 처박혀 살면서도 미모로 소문이 날 만했다.

아니다. 그 소문은 턱없이 부족했다.

끔찍하게도 아름다웠다.

“약혼자랍시고 데려온 남자를 아버지가 보시면 얼마나 하이어가가 전전긍긍 중인지 아실 텐데.”

“하하, 레이몬드 경과 비교하면 어디 괜찮은 남자가 있겠느냐.”

“말 병신이에요.”

이셀라는 지난 만남을 회상했다. 캐런의 얼굴을 보자 내장을 쑤시듯 질척거리던 고통은 캐런 옆의 약혼자 듈란을 보자 씻은 듯이 사라졌다.

‘저 꼴 좀 보라지! 어떻게든 영지를 유지하려고 저런 남자와 결혼하려 하다니!’

“그렇게 하자 있는 혈연과 일찍이 약혼시킬 정도면 어지간히 영지 유지에 혈안이 되어 있나 보구나. 그렇게 간절한 사람들일수록 거래가 쉽지.”

“다행이에요.”

듈란을 보고 이셀라 에반스는 편해진 속으로 캐런의 수수한 드레스와 싸구려 장신구들을 비웃었다. 그리고 레이몬드가 준 목걸이를 바라보는 캐런의 시선을 확인했다. 그녀는 역시나 부러운지 이셀라의 목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살며시 미소마저 지었다.

이셀라는 그런 눈빛이 좋았다.

기대 섞인 반짝거리는 눈빛.

“초대해 주셔서 기뻐요, 하이어 영애.”

“별말씀을 에반스 양. 부친들끼리 어려운 이야기를 할 동안 부디 즐겨 주시길. 여긴 또래의 아가씨들이 없어 에반스 양의 방문이 무척이나 반갑답니다.”

나긋하게 웃는 캐런 하이어와 대비되게 헐떡이는 목소리를 감추며 이셀라는 짐꾼에게서 선물을 건네받았다. 바로 벗겨질 포장용 천마저 한 땀 한 땀 자수가 놓여 있었다.

“부디 이것을.”

“보웬.”

이셀라가 가지고 온 물건은 자연스럽게 옆의 시종이 받아 들었다.

“요즘 수도에서 유행하는 차를 즐기려고 가지고 왔어요.”

차를 담은 작은 나무 상자에는 정교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이런 촌구석 아가씨는 구경도 못 해 봤음직한 무늬와 세공 기술이 돋보였다. 아름다움에 시종이 감탄하기도 잠시, 곧 그는 열지 못해서 당황해하였다.

그런 시종의 반응을 즐기면서 이셀라는 뽐내듯이 이렇게 여는 거라며 잠금장치를 풀었다. 달그락거리며 돌아가는 톱니의 소리가 아름다웠다. 그리고 티 캐디(Tea caddy)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드러났다.

“눈으로 즐기고 귀로 즐기고 코로 즐기는 것이 다과의 즐거움이죠.”

그건 차 상자가 아닌 차 자체에서 나오는 즐거움을 말하는 것이었지만, 캐런은 반박하지 않고 웃으면서 상자를 바라보았다. 이셀라는 상자를 열면서 캐런에게 건넸다.

“이런 곳에서는 아무래도 스트레이트로만 즐길 것 같아서 다양하게 준비해 보았답니다.”

그 안에는 온갖 향신료들이 들어 있었다. 가득 찬 향신료 병들이 칸에 나뉘어져 색색별로 곱게 정리되어 있었고 뚜껑의 뒷면에는 향신료의 이름과 추천하는 블렌딩 레시피들이 금세공으로 작게 쓰여 있었다. 차 상자라기보다는 차라리 보석 상자라고 하는 것이 어울릴 법한 호사품이었다. 캐런이 가진 물건 중 이 정도로 값나가는 물건은 없을 터였다.

“그래요, 이런 산골에서는 다양한 향을 즐기기 힘들지요.”

“어머,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드리겠어요.”

당연히 기분 나쁘라고 한 말이다. 이셀라는 곧 괜찮다는 말이 들려오길 기다렸으나 캐런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미소만 띠고 있었다. 반응이 없자 이셀라는 곧 심드렁해져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조용한 테이블 옆에 끓인 물을 시종이 들고 오자 다시 활기가 돌았다.

“향이 무척 좋군요.”

“스트레이트도 각 지역의 향이 살아나 좋지만 역시 전 다양한 향을 즐기는 게 좋아요. 한 가지만 즐긴다면 티타임이 너무 따분하지 않겠어요?”

“동감이에요 이셀라 양. 한 가지 향만 즐기기에는 너무 따분하죠. 꼭 완벽하지 않아도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이 사람이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해요.”

캐런의 대답에 이셀라의 표정이 떨떠름해진다.

“그건 너무 거창한걸요, 하이어 영애.”

“티타임에서부터 인생이 시작되는 것 아니겠어요.”

캐런은 봄 향기가 흘러나오는 미소를 지으면서 차에 약간의 꽃을 더 넣었다.

“이셀라, 당신이 와서 지루한 일상에 변화가 오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진심으로.


 

“으응.”

이셀라는 눈을 떴다. 머리가 아프다. 여기는 어디지? 지난밤 회의가 지나치게 길어졌다. 하이어 저택에서 머무르기 위해 손님방을 안내받았다.

“여기는 손님방조차 싸구려야.”

허리가 배긴다. 지푸라기로 속을 채운 침대는 이셀라가 쓰던 푹신푹신한 침대와 달리 몸 여기저기에 통증을 유발시켰다. 아직 어슴푸레한 새벽이다. 창문을 열자 싸늘한 공기가 머리를 식혀 주었다. 정원에는 막 피우기 시작한 꽃들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은 언젠가 우리 집안의 것이 될 거야. 그렇게 생각하자 이셀라는 하이어 영지에 애정이 솟는 것을 느꼈다. 난 좋은 안주인이 될 거야. 그리고 레이몬드 님에게 어울리는 신부가 될 거야.

“어?”

목이 허전했다.

“어어?”

레이몬드 님이 선물해 준 목걸이.

안 돼. 내 것. 레이몬드 님이 실망하실지도 몰라. 내 목걸이. 모처럼 사 주신 건데.

이셀라는 허둥지둥 침대 머리맡을 뒤졌다. 없다.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안 돼. 하이어 년이 내 목걸이를 가져갔으면 어쩌지. 안 되는데. 아니면 혹시 하녀나 시종들이 챙겼으면? 잡아서 죽여 버릴 거야. 하지만 잡아떼면? 이미 도망갔으면? 그건 평민이 평생 벌어도 못 만질 귀한 것인데. 아아, 내 목걸이.

이셀라는 엎드려서 바닥을 기었다. 떨어뜨렸나? 어쩌지. 안 돼 내 목걸이를 누가….

똑똑.

“누구야!”

“…씻을 물을 가져왔습니다.”

문이 열렸다. 검은 하녀가 더운물을 가져왔다. 이셀라는 도무지 씻을 기분이 아니었지만 하녀를 붙잡고 물었다.

“어제 날 누가 데려왔지?”

“…제가 옮겼습니다. 졸음에 취해 잘 움직이지 못하시기에….”

“내 목걸이는 누가 챙겼어?”

“네?”

“내 목걸이가 없어졌단 말이야!”

“옷은 옷장 안에 넣어 두었습니다만.”

허겁지겁 옷장 안을 뒤졌지만 목걸이는 없었다. 울화통이 치밀어 올라 하녀의 뺨을 쳤다.

짜악.

검은 피부에 이셀라의 손톱이 할퀸 자국이 생겼다.

“당장 찾아내! 반드시!”

이셀라는 분노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하녀가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뺨을 잡고 이셀라를 쳐다보았다. 이셀라는 기가 막혔다. 하녀가, 웃는다. 하녀는 눈을 파랗게 뜨고 이셀라를 보고 입꼬리를 끌며 웃는다. 웃는다. 이셀라를 저 하녀가 비웃는다.

“안 보인다면, 어쩔 수 없지요.”

이셀라는 하녀의 머리카락을 잡아챘다. 그 순간 방문이 열렸다. 잠옷 차림인 캐런이 놀란 얼굴로 이셀라와 하녀를 쳐다보았다. 캐런이 이셀라에게 물었다.

“…무슨 소란이에요?”

“내 목걸이가 없어졌어!”

“네? 이셀라 양, 천천히 다시 말해 봐요. 목걸이라니요?”

“그러니까, 제 목걸이가 없어졌어요. 옷장 안에 두었는데 사라졌다구요. 당신 하녀가 의심스러워요.”

이셀라는 손톱에 낀 하녀의 살점을 숨기면서 말했다.

“네. 하녀와 하인들을 총동원해서 찾아야겠군요. 아직 새벽이니 우선 몸단장을 하도록 해요, 이셀라.”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셀라는 입을 다물었다. 소란을 듣고 온 이들은 캐런뿐이 아니었다. 하이어가의 시종과 하인들이 경멸 섞인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아랫사람들도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터지는 속을 참으면서 이셀라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하녀라도 낸시는 제 곁을 오랫동안 지켜 준 이라는 것을 알아줬으면 해요.”

명백하게 신경을 긁는 말에 이셀라는 분노를 느꼈지만 고개를 떨궜다.

그날 내내 저택을 이 잡듯이 뒤져도 목걸이는 나오지 않았다. 이셀라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정원과 하인들의 방부터 캐런의 방까지 전부, 카펫 밑부터 나무 아래까지 구석구석을 다 뒤져도 나오지 않았다. 이셀라는 영주의 방도 뒤져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베르딕의 황급한 제지에 울상을 지었다.

“아버지, 어떡해요….”

“그깟 목걸이 하나 간수 못 한 걸 왜 내게 와 이러느냐?”

베르딕은 딸을 사랑하지만 아침의 소란에 눈썹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까다로운 사업의 초기 작업을 해야 하는 순간에 이런 일은 달갑지 않다.

한 걸음, 한 마디가 조심스러울 시기에 별 의미도 없는 목걸이 하나에 이리 소란을 피우다니. 반지도 아니고 그저 선물한 물건 중 하나 아닌가. 베르딕은 레이몬드가 무뚝뚝한 얼굴로 가게에서 ‘가장 비싼 것을’ 하고 주문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레이몬드 님이 주신 거란 말이에요….”

베르딕은 이셀라를 불쌍히 여김과 동시에 그녀의 철없음에 한탄했다. 늦은 나이에 어렵게 얻은 딸이다. 곱게 키워서 좋은 남자와 결혼시키고 싶었다. 베르딕은 풀 죽은 딸을 보며 비난을 삼켰다.

꾸짖는 건 쉽다. 바로잡기가 어렵다. 비난과 포기는 자식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 베르딕은 자신이 영주에게 했던 말을 되뇌었다.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좋은 배우자야말로 부모가 자식에게 가장 주고 싶은 것이다. 레이몬드는 베르딕이 이셀라에게 주는 최고의 자산이다. 지나치게 상등품인 것이 오히려 문제일 정도로.

재물과 명예의 맞교환으로서 괜찮은 결합이 될 수 있던 약혼은 레이몬드의 거듭된 성공에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더불어 남작가의 장남이 병에 걸리면서 레이몬드가 차기 남작으로서 거론되자 레이몬드는 몰락한 남작 집안의 차남에서 사교계에서 가장 탐나는 남자 중 하나가 되었다.

약혼자가 지나치게 성공하는 것은 오히려 관계에 악영향을 끼친다. 약혼은 약혼일 뿐. 결혼과 다르다. 그 약혼이 한쪽에게 별 이득이 없을 경우는 위태롭기 짝이 없다. 에반스가는 레이몬드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결국 급을 맞추려 무리하게 영지를 사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 철없는 딸은 목걸이에 자지러지고 있다.

“레이몬드 경이 선물한 것이 고급이긴 하지만 그리 아쉬우면 같은 것으로 구해다 주마. 여기서 괜히 하이어 영주의 눈 밖에 나서 일을 그르치면 안 된단 말이다.”

“모양이 같아도 그분이 주신 게 아니잖아요.”

“결국 네 실수다.”

“…….”

이셀라는 시무룩해져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따악따악.

그녀의 발걸음에 따라 오래된 석조 건물 안에서 쥐들이 지나가듯이 후다닥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셀라는 이 저택이 지긋지긋해졌다. 결국 못 찾았다.

종일 목걸이를 찾느라 옷은 더러워진 지 오래였고 손도 더러웠다. 이미 구두 대신 하인들이나 신는 질 낮은 작업용 신발로 갈아 신었고 그마저도 지저분하다. 꼴이 이게 뭐야.

“레이몬드 님… 실망하실 텐데.”

그 목걸이를 하고 레이몬드 님을 만나고 싶었는데. 여기서. 이 저택에서. 내 것이 될 이 저택에서 레이몬드 님이 지칠 때 이곳에서 쉬시길 기다리면서. 이제 나도 영지를 관리하는 귀부인의 자격이 있음을 입증하면서.

문을 열었다. 이셀라는 목걸이를 발견했다.

저기 있잖아. 내 목걸이. 역시 저년이 가지고 갔잖아.

목걸이는 하녀의 목에 걸려 있었다. 하녀는 마치 싸구려 거치대처럼,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호사스러운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이셀라의 의심대로 역시 저 하녀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셀라는 하녀에게 더 이상 화를 낼 수 없었다.

하녀의 목 아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셀라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아버지 절 도와주세요. 신이시여, 전 잘못하지 않았어요. 안 돼.

헝클어진 머리를 풀어 헤치고 미친 듯이 방을 나와 복도로 달려 나갔다. 눈은 아무 곳도 향해 있지 못하고 그저 달렸다. 시체다, 죽었다, 목이 잘렸다, 누가 죽어서 내 침대 위에 있다!

“…아악!”

이셀라는 미끄러져서 바닥에 넘어졌다. 통증이 밀려오고 냉기가 온몸으로 전해졌다. 부르르 떨면서 이셀라는 히익거리는 신음을 내뱉으며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달도 안 뜨는 어두운 밤이다. 저택 안은 너무나 어둡고 복도에는 불도 하나 켜져 있지 않다. 경악이 가시고 공포가 밀려들어 왔다.

“으, 어, 어, 엉… 우….”

차가운 돌벽이 강제적으로 이셀라에게 이성을 찾아 주었다. 꿈을 꾼 건가? 그런 참극은 연극 무대 위에서도 보지 못했다. 자신이 본 것은 무엇이었지? 현실이 맞는 건가?

진정하자. 진정하자. 지금 일어난 일을 다시 생각하자. 어제 이곳에 도착해서 하이어 영애와 시간을 보내다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목걸이를 잃어버리고 하이어저의 하녀에게 화를 냈다. 그리고 지금 그 하녀는 지금 목이 잘려 침대 위에 있다.

대체 왜?

마지막 두 문장의 연결이 되지 않는다.

“히….”

모르겠다. 벌써 막혔다. 이래서는 정리가 되지 않는다. 죽은 하녀는 오늘 아침 이셀라가 화낸 하녀다. 이 하녀는 시체가 되어 이셀라의 침대 위에 있다.

이셀라는 아무리 해도 두 문장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고작해야 목걸이, 아니 중요한 목걸이. 자신은 피해자다. 그리고 이 저택에는 온 지 고작해야 만 하루. 왜 자신의 방에 잘린 하녀의 목이 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오늘 처음 본 하녀, 이름도 모른다.

이 상황은 연극이 아니다. 예고가 없다, 하지만 단순히 사고라 하기엔 너무나 수상했다. 그런데 감이 잡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한참 동안 보고 있던 코미디극이 갑자기 등장한 살인마의 등장으로 끝난 것과 같다. 비극조차 되지 못한다. 저잣거리의 공연도 이것보다는 낫다.

왜? 왜? 왜?

대체 왜 자신이 묵는 방에 놓았단 말인가? 대체 무엇을 했다고?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녀는 일평생 이곳의 사람들과 마주한 적이 없다. 어제 도착해 목걸이를 잃어버리고 분노해서 집 안을 뒤졌고, 그것이 끝인 인연이다.

그깟 천한 하녀에게 험한 말을 했을 뿐인데, 그 사람은 차갑게 변해 고깃덩어리가 되어 있다. 대체 누가 죽이고 왜 이셀라에게 이런 짓을 행한단 말인가?

“내가 왜….”

신음 섞인 울음이 터져 나온다.

“내 탓 아니잖아….”

이셀라는 자신이 이런 심적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에 화가 났다. 자신은 피해자다. 자신이 고통당하는 것은 부당하다. 자신은 결백하고 무고하며 피해를 입었고 보상받아야 한다. 그 사실을 조사관과 하이어 영주가 밝혀내야 한다. 이런 일은 자신의 몫이 아니다.

하지만 이셀라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모든 일이 그렇게 흘러가리라 믿을 만큼 어리지는 않았다. 이셀라 에반스는 속이고 뺏고 승리하는 집안의 막내딸이다. 개입하지 않더라도 사회의 부조리한 면은 숱하게 보아 왔다.

어서 사람들, 아니 아버지에게 알려야 한다. 우선 아버지에게 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은 다음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논해야 할 것이다. 자신보다 언제나 옳은 아버지. 이셀라는 문을 닫았다. 그렇지 않아도 어두운 성안은 밤중에까지 복도에 불을 켜지는 않아 어둡고 축축했다. 비틀거리고 더듬으면서 아셀라는 아버지의 방으로 향했다.

“…어머, 이셀라?”

왜.

하필.

네가.

지금.


 

“얼굴이 시체처럼 창백해요. 어디 아파요?”

“하, 하이어….”

“이런 밤중에 무슨 일이에요? 설마….”

안 돼. 아직은 아니야.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아직 준비되지 않은 머릿속은 까맣게 물들었다. 이셀라는 순간 그저 자신이 죽었으면 했다. 지나친 긴장감에 죽을 것 같았다. 캐런은 등을 들고 있었다.

이셀라의 머릿속에서 시체를 발견한 캐런이 자신을 향해 비명을 지르는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을 범인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캐런의 모습. 이셀라는 숨을 헐떡였다.

설마 아니겠지 들켜도 그러진 않을 거야. 내가 그럴 리가 없다는 건 다 알잖아. 연약한 여자가 그런 힘이 어딨어.

“저런, 피가 묻으셨네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말투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안 돼. 내 치마를 보고 있어. 안 돼. 그럴 리는 없지만, 설마.

“…무엇이 말인가요, 전 그저….”

“그걸 제 입으로 말해야 할까요? 전 예의를 안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덜덜 떠는 이셀라의 손을 캐런의 하얀 손이 잡고 부드럽게 이끈다.

“이리 제 방으로 오세요.”

“…….”

“어서요. 비밀은 지켜 드릴게요.”

캐런은 살포시 웃으면서 이셀라를 방 안으로 끌어들였다.

“침대 옆의 종 울리는 줄이 바로 하녀실과 연결되어 있는데, 많이 당황하셨나 봐요.”

캐런은 말을 제대로 못 하고 뻣뻣이 움직이는 이셀라를 어미 새가 알을 감싸듯이 살며시 감싸 안았다. 옷을 갈아입히고 준비한 브랜디 섞인 차를 낸다.

“정말이지, 아버지들 때문에 예민할 필요 없어요. 아직 우리는 더 가벼이 교류를 즐길 수 있는 나이 아니겠어요, 이셀라?”

“하, 하이어 영애… 그런, 것이 아니라.”

이셀라는 잠시 고민했다.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 좋은가? 아버지에게 말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이셀라는 캐런에게 가는 길을 들켰다. 그리고 어떤 결론이 나든 이 만남은 후에 영향을 끼칠 것임에 분명했다. 그럼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가? 캐런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 오랜 시녀가 살해당했다면, 분노하며 자신에게 푸는 것이 아닐까. 심지어 하이어 영주와 아버지의 거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이 예민한 관계에 어떻게 파장을 끼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무서운 것이라도 보셨나요?”

“네, 네!”

시체를 봤어요. 목이 잘려 있었죠. 방은 피바다였고 눈을 뜨고 있는데 목에는 제 목걸이가 걸려 있었어요.

“워낙 오래된 건물이라 때때로 귀신이 나온답니다.”

캐런은 웃었다. 덜덜 떨며 찻잔을 부여잡고 눈을 부릅뜬 이셀라의 꼴은 꽤나 재밌다.

“환각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많아요. 그래서 저도 무서운 걸 많이 봤는걸요?”

환각.

이셀라는 그 단어에 빛이 내리쬐는 것 같았다. 맞아, 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본 걸 수도 있잖아? 너무 말이 안 되는 광경이었어. 악마의 장난질도 아니고. 정말로 저에게 앙심 품은 하녀의 장난일수도 있다. 감히 주인의 손님으로 온 저에게 말했던 것을 보아하니 예사 성격도 아니었다.

“캐런 영애. 제가 방에서 무서운 걸 봤는데….”

“저런.”

캐런이 안쓰럽다는 듯이 이셀라를 다독인다.

“실, 실례지만 같이 가 주지 않으시겠어요?”

캐런은 살짝 눈썹을 찌푸리면서 이셀라를 일으켜 세웠다.

“그럼요. 하지만….”

“……!”

치마에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 전에 치마를 갈아입는 게 좋겠어요.”

입을 벌린 이셀라를 위해 캐런은 말을 덧붙였다.

“월경이 시작됐나 보군요.”

“역시 처음은 네가 좋아.”

캐런은 잠든 낸시를 지켜보며 웃었다. 입은 천으로 막혀 있고 몸은 묶여 있다.

“나 비밀이 많은데, 네가 들어 줬으면 했거든. 넌 내 어머니처럼 날 지켜봤잖니? 오랜 세월 동안 아침에는 내 머리를 빗겨 주고 밤에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던 낸시야. 역시 처음은 네가 좋겠어. 사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이 순간, 기념비적인 처음이 너라서 나 기뻐. 비밀은 털어놓고 싶지만 사실 사람 일이란 게 그렇잖아? 비밀을 털어놓고 싶어도, 정작 입 밖에 내기가 힘들어. 비밀이 지켜진다는 보장도 없고…. 그러니까 네가 좋아.”

후후, 의자에 앉아 차를 스스로 따르며 향을 즐겼다. 이셀라의 선물은 꽤나 상등품이다.

“응… 어디서부터 해야 하지. 사실 나, 누구라도 상관없었어. 그러게 왜 내 방에서 그렇게 유혹을 해 대니?”

맞지? 넌 내가 유혹당하길 바란 거 맞지?

캐런은 깔깔거리면서 낸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검은 생머리가 풀린다. 검푸른 눈을 마주친다. 아름답다. 이 하녀가 이렇게 아름답게 보이다니. 역시 살인은 옳은 선택이었다. 한 사람의 여러 면을 다 즐길 수 있지 않은가.

“일이 지쳐 휴가도 낸다고 하고, 덕분에 다른 하인들은 네가 떠난 줄 알고, 내가 주는 것도 다 먹고… 바로 잠들어 버리고.”

“…….”

그러니까 이건 네 탓이야.

얼굴을 끌어안는다. 따뜻하다.

“있지, 낸시. 난 꿈을 꾸고 있어. 100년 동안.”

“…….”

입이 막힌 낸시의 표정은 알기 힘들다. 눈만으로 감정을 알아차린다는 건 역시 어려운 일이다. 안구는 그저 빛을 받고 표정은 결국 근육을 통해서 나타난다. 하지만 낸시의 입은 막혀 있었고 눈가의 주름을 통해서는 말하고자 하는 걸 추측하기는 힘들었다. 캐런은 낸시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지만 참았다. 소리를 지르면 곤란해진다.

“응…. 100년 동안 난 죽고 또 죽었어. 모두 날 죽이려고 하고, 죽이고. 그니까 나도 이젠 해 보려고. 나 죽이는 건 처음이라서 잘 못할 것 같은데 노력할게. 당하기는 많이 당해 봤으니까 할 수 있을 것 같아.”

낸시를 넘어뜨린다. 두툼히 깔려 있는 양탄자는 소음을 흡수했다. 그녀가 꿈틀거린다. 캐런은 자신의 머플러 중 하나를 꺼냈다. 기회가 너무 좋았다. 낸시는 오후에 캐런에게 휴가를 냈다 하고 이셀라의 무례함에 대해 하소연을 했다.

그리고 오늘 당장 나가 시내에서 술을 샀다 했다. 약한 술 냄새가 났다. 물건을 놓고 온 것이 있어서 가지고 가려고 들린 낸시는 이제 일주일은 내리 놀 것이라면서 부탁할 것이 있는지 물었다. 부탁할 것은 단 한 가지였고.

너무… 너무나 죽이기 좋았다.

“몇십 년 전에 네가 날 죽인 적이 있었지. 왜 그랬어? 아, 탓하는 건 아니야.”

힘내라면서 캐런은 듈란의 약품 몇 가지를 섞은 음식을 주었다. 낮에 이셀라의 행패에 식욕이 없다 하자 다른 하녀가 넣어 둔 음식이다. 원래 남는 음식을 자주 먹던 낸시는 별 의심 없이 입에 음식을 넣었다.

“그냥 궁금해서. 꽤 아팠거든…. 그 뒤로도 많이 궁금하더라고.”

하지만 지금 들을 수는 없겠지….

“다음에는 말해 줄래?”

낸시의 몸에 올라탔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느껴진다. 탄력 있는 몸이다. 캐런은 허벅지 사이에서 느껴지는 낸시의 몸이 꿈틀거리는 데 흥분을 느꼈다. 고양감이 치솟는다.

“보답으로 다음에는 네게 죽을게.”

캐런은 낸시의 목을 졸랐다.

캐런은 그 순간을 떠올리며 흥분에 몸을 떨었다. 그 순간은 정말이지 사랑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천 너머로 닿는 그 떨림, 남을 지배한다는 그 감각. 운명이 자신을 100번이나 죽인 건 필히 그 감각이 너무나 즐겁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또 다른 여자가 자신을 즐겁게 해 주려고 하고 있다. 기대감에 이셀라에게 키스하고 싶을 정도였다. 이 등장인물들 전부가 이렇게 사랑스럽다. 어떻게 할 거니, 응? 비명을 지르려나? 그 잘난 아버지를 찾으려나? 없는 레이몬드를 찾으며 울려나?

“무서워하지 마세요.”

“…네.”

이셀라는 캐런의 손을 잡고 의지해 걷고 있었다. 깔깔! 무서워할 것 없어! 지금 내가 널 죽일 건 아니니까! 왜냐면 난 나중에 네 저택에 가서 더 많이, 더 많이 죽일 테니까! 이 집에는 사람들은 너무 적어서 안 된다고…. 비싯비싯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저… 정말이어요. 전 이상한 것을….”

“네에.”

캐런은 이셀라에게 상냥하게 대답했다. 웃으면서.

그 웃음은 이셀라에게는 겁 많은 어린아이를 돌보는 마음씨 좋은 언니처럼 보였다. 이셀라는 상대방을 유치하게 취급하며 자신이 우위에 있으려는 여성을 싫어했지만, 이 순간 그녀는 캐런의 그 웃음에 매료되었다. 캐런의 미소는 정말로 이셀라에게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다고 약속하는 여신의 웃음처럼 보여서.

“무서워할 것 없어요.”

두려움을 잊게 된다.

방문을 열었다.

“정말이지, 무슨 환상을 보았는지 모르겠네요.”

생리혈로 더러워진 옷과 침대는 환상을 만들었다. 생리로 예민한 몸과 베개, 목걸이와 하녀가 실수로 놓고 간 모자 등이 어우러져 이셀라를 속인 것이다. 아버지를 찾아가 꾸지람을 듣거나 비명을 질러 다른 사람들에게 창피를 당하지 않을 수 있어 이셀라는 안도했다.

이셀라는 한숨을 쉬며 침대에 앉았다.

자신이 아무래도 피를 보고 당황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목걸이와 모자도 놓여 있었다. 이셀라는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자신의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하루 종일 피곤하고 피까지 흘린 탓에 잘못 본 것이다. 그런 것이 분명했다. 이셀라는 목걸이를 꽉 쥐고 캐런에게 몸을 돌렸다. 자신이 잘못 본 것이다. 전부. 이셀라는 안도했다.

“사과하겠어요. 하이어 영애.”

“…….”

“다른 방에서 자고 싶은데 옆방으로 가도 될까요?”

“.......”

하지만 캐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캐런은 약간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셀라는 캐런을 불렀다.

“하이어?”

“다행… 이군요. 네, 물론이에요. 옆방이 비워져 있으니 그리로 가셔도 좋아요. 내일 하녀들을 시켜 이 방을 정리하도록 할게요.”

타악.

캐런은 옆방 문을 열어 이셀라를 안내했다.

“이 방을 쓰도록 하세요.”

“고마워요.”

공포가 가시고 안도를 찾은 이셀라는 캐런에게 친밀감을 느꼈다. 더 말을 나누고 싶었지만 캐런은 밤이 늦었다면서 문을 닫았다. 이셀라는 목걸이를 소중하게 손에 쥐고 눈을 감았다.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을 거야. 레이몬드 님. 언제쯤 볼 수 있으려나. 불안하고 힘들어서 그래요. 보고 싶어요.

“........”

역시 그 하녀는 목이 잘리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이 손톱으로 그어 놓은 것이 신경 쓰였던 걸까. 그 하녀에게 사과로 무엇이라도 주라고 해야겠다면서 이셀라는 잠을 청했다. 너무나 피곤하고 괴로운 하루였다.

캐런은 문을 닫고 조금 전의 이셀라처럼 주저앉았다.

시체가 사라졌다.

캐런 하이어는 항상 자신이 미쳤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래서 그 사실은 새삼스러운 반전이 될 수 없었다. 백여 년간 정체된 시간을 산 사람이 제정신일 리 없다는 자연스러운 생각과, 자신이 단순한 망상병자일 수도 있다는 것까지 염두에 두었다.

케케묵은 인식론에 넋이 나가 있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캐런이 시체가 없다는 사실에 제일 먼저 느낀 것은 공포라거나, 당황이 아니었다.

“…감히.”

분노였다.

내 것인데! 누가 감히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어떻게 이리 잔인하게 구는가! 왜 이리 재미없게 만드는가!

캐런은 공포에 질려 기절하는 이셀라를 보고 싶었다. 고작해야 남자 때문에 질질 짜는 것이 아니라, 원초적인 공포에 질리는 이셀라를 보고 싶었다. 추하게 일그러져라, 빌어라, 경악해라, 매달려 봐라. 나처럼! 그런데 누가, 무엇이 방해를 해? 아무런 계시도 조언도 없으면서!

캐런은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먼저 화를 내고 그 다음은 자신에게로 돌렸다.

신이나 타인, 다른 외부 요인이 아니라면 자신이 미쳐서 환상을 보는 것이라면 자신에게 벌을 내려야 한다. 자신의 머리를 탓해야 한다. 캐런은 스스로에게 화를 풀었다.

쾅!

머리를 벽에 찧었다.

피가 흐른다. 통증이 느껴진다. 미쳤다고 하면 최소한 자신이 원하는 환상을 보고 싶었다. 만일 이게 환각이라면, 망상이라면 결국 자신에게 줄 수 있는 벌은 자해뿐이다.

쿵!

이마의 피부가 찢어진 게 느껴졌다. 이대로 자진해서 끝을 내 버리고 싶다. 그래 봤자 결국 얼마 전의 정원으로 돌아가겠지. 아니, 자진이 성공한 적은 없으니 결국 1년을 침대 위에 있다가 다시 돌아가겠지.


 

새카만 바닷속으로 백여 년간 침몰하고 있다. 캐런은 자신의 목에 바위를 달고 한없이 추락하는 자의 꿈이다. 머리의 공기는 사라지고 감정, 철학, 사고 모든 것이 희박해지는 공간에서의 환상. 아무래도 좋다. 그런 가정은 캐런에게 더 이상 아무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눈앞의 모든 것이 헛것이고 어딘가의 이데아가 있든 말든 상자 안의 고양이가 죽든 말든 동굴 안의 그림자건 구름이건! 지금 당장의 끝없는 초조함, 답답한 절망감. 백여 년의 망상인지 모를 기억이 목을 조르는 것만이 현실.

퍽.

피가 계속 흐르니 머리가 좀 맑아지며, 흥분이 가라앉았다.

“흐윽… 흑…. 젠장….”

머리에는 피가 흐른다. 울음이 흘러나온다. 복도를 터벅터벅 걸으며 피와 눈물을 흘렸다.

그냥 다 죽어 버려.

제발.

날 죽일 수 있는 전부를 죽일 거야.

그럼 이번엔 아무도 날 죽일 수 없을 거야.

불을 지르자. 전부 태워 버릴 테다. 그래도 망상인지 법칙인지 모를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나 보자. 일가족 전부를 죽이면 어쩌려나? 탐정과 경찰들이 와서 수사극을 벌이려나? 그런 게 보고 싶었는데 누가 방해한 걸까. 다음번에는 낸시를 죽이고 계속 이셀라의 방 안에 있어 봐야겠다. 역시 그래야겠어. 아, 그렇게 되면 다음번에는 ‘낸시에게 죽겠다’는 약속을 못 지키는데.

“아가씨?”

“…….”

“다치셨습니까?”

“…넘어졌어.”

시종인 보웬이 당황한 얼굴이 보인다. 자해하다가 시간이 초과되었다. 캐런은 아무도 없어야 할 복도에 보웬이 있는 것을 보고 시간이 꽤 지났음을 알았다. 창 너머로 어슴푸레하게 동이 트는 것이 보였다. 시간이 꽤 지났다. 하인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니. 귀찮군. 캐런은 붙잡는 보웬의 손을 쳤다. 그냥 자고 싶다.

“피가 흐릅니다.”

“알아.”

“…얼굴이 상합니다.”

귀찮게 집적거리긴!

보웬은 달아오른 얼굴로 캐런의 손목을 잡았다. 주제넘다. 캐런은 이마를 찌푸렸다. 이자도 내게 연심을 품었지. 하지만 ‘지금’은 이런 자의 욕정과 애정까지 신경 쓰고 싶지는 않다.

“…하, 칠… 칠맞지 못하군.”

익숙한 말더듬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것 봐. 귀찮게 된다니까. 캐런은 굳은 보웬을 뿌리쳤다. 듈란이 새벽 미사를 위해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보웬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이셀라 양은 아침 식사에 나오지 못할 테니 방으로 식사를 가져다주도록 해. 그리고 오전에는 혼자서 쳄발로를 칠거야. 만일 이셀라 양이 일어나면 음악실로 데려와.”

캐런은 빠르게 보웬에게 지시하고 보냈다. 더 있어 봤자 듈란이 미적거리는 시간만 늘어날 것이다. 피곤했다. 캐런은 욱신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눌렀다.

“꽤나, 그를 가, 감싸는군그래?”

“그러고 싶니?”

툭.

질투하려면 제대로 하던가. 한숨 나오는 자다. 결국은 시종이 걱정해서 손목을 잡은 것을 안다. 그러니까 ‘감히 내 약혼녀에게!’ 이런 식의 말도 하지 못하는데 질투는 난다. 결국 듈란은 캐런에게 엉뚱한 화살을 돌리는 것이다. 시종에게보다 약혼녀에게 툴툴거리는 행태가 참 발전이 없다.

“빨리 가. 난 네 방에서 연고 좀 찾아서 붙이고 잘 테니까. 방문 잠갔어?”

“아, 아니.”

“알았어.”

방으로 걸어가는 캐런을 듈란이 잡았다.

“나 위치 알아.”

“…넌 배운, 적 없잖아.”

너보다 공부 훨씬 더 많이 했는데. 캐런은 증명할 수 없으니 입을 다물었다. 듈란은 캐런을 잡고 방으로 향했다. 그의 얼굴을 보니 ‘아침 미사나 보러가지그래’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는 다친 약혼녀를 돌보고 가리라고 마음먹었다. 캐런은 조금 한숨이 나왔다. 어쩌지. 얘 나한테 점수 따고 싶나 봐. 귀찮게 됐다.

“… 너랑 하는 게 아니….”

“쉬, 쉿.”

당황하고 있다.

캐런은 당황한 듈란을 툭툭 쳤다. 이번에 너랑 관계를 맺는 게 아니었어, 란 후회 섞인 행동이었지만 그가 알 리 없다.

“…아파.”

“…….”

여기서 아프니, 괜찮니라고 하는 게 어떨까. 쯧. 듈란은 캐런의 이마에 연고와 약재를 말 그대로 처바르고 있었다. 팩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양이었다.

서툴게 묻어나는 연정에 캐런은 꽤 재밌게 일이 풀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캐런은 이미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을 봐 왔다. 뜻했던 건 아니지만 듈란과 관계를 급진시키는 건 일을 더 흥미롭게 만들 향신료가 될 것이다. 이미 낡은 심장에 와 닿지는 않지만 뇌는 흥분시킬 정도인 어설픈 마음.

“흉, 질지도… 모르겠군.”

“그래?”

“…….”

그렇다면 레이몬드 꼬실 때 문제가 되려나? 캐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거울을 쳐다보았다. ‘레이몬드의 목을 치겠다!’는 원대한 꿈을 고작 화풀이에 날리고 싶진 않은데. 그는 얼굴에 꽤나 예민해서 살이 찌거나 화상을 입으면 이뤄지지 않았다. 역시 남자란.

“그래도 예쁘지?”

“…뭐, 뭐?”

“아니야?”

“…하.”

말은 필요 없다.

캐런은 듈란의 옷을 당겼다. 얇은 입술에 입술을 겹친다. 꽤나 차갑다.

“대, 대체 왜…?”

“…….”

듈란은 아직도 혼란스러워 보였다. 다시 입을 맞춘다. 혀로 살짝 핥는다. 입을 맞추면서 시체가 된 그를 상상한다. 넌 집착은 하지. 그렇다면 날 뺏어 봐. 남자 주인공에게서, 레이몬드에게서.

…그리고 죽어 줘.

“아니야?”

난 네가 내게 반했으면 좋겠어.

지독하게.

“어머, 세상에나, 괜찮으셔요?”

“네, 보기보단 심하지 않아요.”

“너무 늦게 들어가셔서… 세상에나.”

이셀라는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성정상 남에게 관심 두는 것보다 곧 자기 자랑으로 넘어갔다. 캐런은 연주하던 쳄발로의 곡을 큰 기교를 필요로 하지 않는 단순한 곡으로 바꾸어 배경음악 삼았다.

이셀라는 캐런의 옆에 앉아 열심히 이야기했다. 다시 찾은 목걸이와, 그걸 준 약혼자에 대해서. 아침 공기는 신선하고 이셀라는 목걸이를 다시 찾은 안도에 즐겁게 말한다.

레이몬드 님이 이걸 줬어요, 이것도 줬어요. 재잘재잘거리는 소녀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새의 지저귐 같아 들을 만했다.

그러니. 그렇게 좋으니. 나도 레이몬드가 좋았단다. 백여 년 전 즈음에는 너처럼 말이야. 캐런은 눈을 감았다. 한때는 널 불쌍히 여기기도 했지 이셀라. 그것도 의미 없었지만. 듈란과 전혀 다른 모습과 어투와 배경이었지만 그녀도 듈란과 닮았다. 초조함.

“참으로 좋으시겠군요.”

“그럼요. 제 부친께서도 어쩜 하나같이 이리 품질 좋은 것이냐면서 감탄을 금치 못하셨어요.”

상인다운 칭찬. 아마 그는 자기 딸이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랐을 것이고 이셀라도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 선물들이 가지는 의미를 깨닫고 싶지 않을 것이다. 목걸이, 드레스, 천, 하나같이 값나가는 물건들이었지만 결혼을 약속하는 반지는 없었다.

레이몬드와 이셀라의 관계는 약했다. 지방에서 꽤나 수완이 좋은 베르딕이 자금난에 시달리는 레이몬드의 형에게 약혼을 제안했고, 남작가의 차남은 조용히 그 명에 따랐다.

정확하게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는 것이 맞으리라. 사람들 앞에서 언약을 하거나 반지를 주거나 하는 일은 없었으니까. 다만 이셀라와 베르딕이 약혼자, 라고 소개할 때 정정하지 않았다.

그 정도의 관계.

물론 지금의 시점에서 캐런이 알 만한 내용은 아니다. 지금은 그저 부럽다는 듯이 이셀라를 쳐다보는 것이 필요했다. 비웃거나 가련히 여기거나, 혹은 둘 다거나. 속마음은 어떻든 눈을 맞추고, 이셀라의 옷과 장신구들을 바라보고, 눈을 깜빡이며 가끔 입을 벌려 준다. 철저히 계산된 부러움의 표시.

“역시 남작가는 달라요. 이번에 아버지께서 새로 주신 것도 좋지만….”

가련한 이셀라. 선물에서 애정을 찾는 모습은 허영에 들뜬 멍청한 여성의 모습으로 비춰지고, 부친의 부정과 잔혹함을 눈감는 모습은 어리고 무지한 모습으로 비춰질 터.

“캐런, 캐런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이미 부르고 있잖니. 캐런은 눈웃음을 치면서 부채를 폈다.

“그럼요, 이셀라.”

그리고 이셀라가 똑같은 짓을 나중에 백작 부인의 딸에게 했다가 망신을 당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가 기대된다. 이셀라는 캐런의 웃음에서 아무것도 읽지 못하고 기뻐하며 바로 허물없이 대한다.

“그러고 보니 왜 아직도 쳄발로를 치세요? 요즘에는 다들 피아노를 치던데.”

“아무래도 음색이 다르니까요. 어릴 때부터 치던 것이라 계속 이것만 쓰게 되더라구요.”

진실은 쳄발로를 치는 것은 음색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피아노를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자람은 없어도 굳이 사치품을 더 살 수는 없는 가문. 노골적이고 천박하게 표현한다면 ‘우리 가문엔 돈이 없어서 그런 거 못 사요’. 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는 것이 품위와 예의다. 이셀라는 그것을 눈치챌 정도의 눈썰미는 있었지만, 배려할 정도의 마음 씀씀이는 없었다. 아니,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리라. 그녀는 자신이 캐런보다 낫다는 것을 어떻게든 확인하려 하니까.

이셀라는 피아노와는 다른 쳄발로의 건반을 만져 보며 묻는다.

시대가 흘러 아직도 남아 있는 쳄발로는 보통 값비싸고 고풍스러운 것들로 호화로운 무늬와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 대부분이건만, 이것은 그저 낡았을 뿐이었다.

“흐응, 하나 선물해 드릴까요? 이런 산골에 쳄발로 조율사가 오기도 힘들지 않나요? 음색도 들으면 전체적으로 음이 약간….”

“괜찮아요. 전 이게 편해요.”

아무렇지도 않게 무례한 말을 하는 것도 대단하다. 캐런은 이셀라의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돈을 쓰면서도 미움 사기라니, 쉽지 않은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낸다. 백여 년 묵은 노파는 새삼 어린 소녀의 사소한 실수에 감정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앞으로 위험한 짓을 할 예정이라면 더더욱. 큰 거짓말쟁이는 안색이 부드러운 법이다.

“에반스 양. 지루하시면 같이 영지나 거닐까요.”

이셀라는 두말없이 동의했다.

시종인 보웬이 짐을 들고 멀찍이서 따른다. 이셀라는 남성인 그가 따라오는 것이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정확히는 보웬이 아닌 자신이 때린 하녀가 신경 쓰였다.

“그러고 보니 어제 말이에요.”

“네”

“무서운 것을 봤어요.”

“그렇군요.”

“저… 그 하녀, 말이에요. 어디 있나요? 그, 검은 하녀 말이에요.”

“음… 이셀라, 그만하면 그녀도 충분히 반성했으리라 봐요.”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구두 신은 발을 초조히 부딪쳤다. 캐런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녀는 휴가를 신청했어요. 당분간 쉬겠다더군요.”

“아… 다행이에요.”

캐런은 잠시 고민했다. 여기서 캐묻는 것이 좋은가, 모른 체하는 것이 좋은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묻어 두는 것이 맞다. 캐런이 처음으로 낸시를 택한 것은 무엇보다 좋은 타이밍이었으며, 그녀가 앞으로의 이야기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도 자신과 많은 일상을 보내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사라져도 캐런이 이셀라의 별장에 간다든가, 레이몬드를 만나든가, 하는 큰 틀이 흔들리지는 않으니까.

그러니 그녀가 캐묻지 않는다면 그저 무난히 다음 살인을 진행할 수 있을 터였다.

“어떤 걸 봤나요?”

캐런은 호기심을 택했다.

“그 하녀가 목이 잘려 있는 환상을 봤어요.”

“네?”

“뜬금없죠…? 같이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침대도 깨끗하고 목걸이도 놓여 있었는데 말이에요.”

“목이… 요?”

“네, 생각해 보면 참 어이없죠.”

이렇게. 쓱, 하고 자르는 흉내를 냈다.

“뭘 잘못 봤을까요.”

“그거 참….”

이상하네, 난 목을 자른 적이 없는데.

“괜찮나요, 그 하녀?”

재밌네.


 

“읏,”

“죄, 죄송해요.”

휴가를 받은 낸시 대신 캐런의 시중을 들게 된 갈색 머리를 땋아 내린 도나는 아직 어렸다. 캐런보다 고작 한 살 위였으니 일반적으로는 잔심부름이나 하며 일을 익힐 처지였다. 캐런은 낸시는 언제 오느냐고 하려다 곧 자신의 건망증에 한숨 쉬며 입을 다물었다. 시간이 뒤죽박죽이다.

“괜찮아. 빗을 먼저 물에 적셔 주련.”

어설픈 손길의 도나가 이리 오다니. 군식구들 덕에 어지간히 일이 늘어났다 보군. 야무진 낸시가 벌써 그리워진다. 에반스가와의 회의가 이리 길었던가? 어차피 끝을 아는 캐런으로서는 귀찮은 일정이다. 에반스가 원하는 대로 도로를 정비하고 사람이 밀려들면, 하이어 영지는 그 인원을 감당하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십여 년간은 족히 걸릴 사업이 이미 주변 지역을 포섭한 에반스가에 의해 몇 개월 만에 추진되고, 부족한 세금을 무리하게 걷다가 파산하여 하이어가의 온갖 권리가 넘어가게 된다.

악독하다고 할까. 캐런은 눈을 감았다.

딱히 베르딕 에반스에게 분노가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저 손놀림이 꽤나 빠르다는 감탄 정도. 열일곱의 하이어 캐런. 누구나 그만한 나이로 보지만 그 속은 100년을 겪은 노파다. 그렇다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다 알고 있다고는 빈말로도 할 수 없다.

17세의 1년의 시간을 100번 반복한다고 위대한 발견을 하는 학자들보다 더 고매한 지식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선천적인 문제요, 환경의 문제요, 노력의 문제다.

남녀 간의 눈치야 훤하지만 저런 사업의 경우는 또 다른 문제라. 몇십년 동안 같은 일을 반복한 후, 부친을 말리고 사업에서 훼방을 놓고 해 보았지만, 결국 가장 좋은 방법은 이 지역을 줘 버리고 나중에 레이몬드를 통해 압력을 가하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캐런이 할 수 있는 복수는 결국 그런 식이었다.

한때는 에반스가의 압력으로부터 하이어가를 지키고자 노력하던 때도 있었지. 이번 생은 넘길 터니 부질없지만, 그래도 제 몫을 뺏긴다고 생각하면 그리 유쾌하지는 않다.

“에반스가에서 얼마나 사람이 왔지?”

“저… 베르딕 에반스와 따님인 이셀라 에반스, 그리고 관련 전문가 셋과 하인 둘, 하녀 하나구요. 또 그 전문가들이 각각 하인 하나씩을 데려왔고, 전담 마부들이 둘이에요.”

“입이 퍽 늘었구나.”

“네.”

“힘들겠네.”

“…네.”

도나는 적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순간 약간 거북했으나 그녀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레이몬드 저택의 하녀들이 아니며, 어미처럼 돌보던 낸시의 반응이 아닌 것에 대한 어색함임을 알았다.

그래, 이 하녀나 하인들 다 하이어가의 사람들이지. 그리고 에반스는 이 가문을 차지하려는 자들이고. 이 영지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니 당연한가.

“손님으로 신경 써야 할 사람들만 다섯이니 평상시에 비해 일을 세 배는 해요. 요즘 눈을 세 시간도 채 못 붙입니다. 대체 언제 떠나는지 아세요?”

“글쎄. 나도 얼른 떠나길 바라지만 말이야.”

그들은 이 가문을 차지하기 전까지 사라지지 않을 거야.

차가운 세숫물에 얼굴을 담그자 다시 또 하루가 시작됐음을 자각한다. 아직 어둡다. 전날 밤을 새운 캐런은 덮쳐 오는 피로감에 괴로웠다. 죽을 만큼 괴롭구나 생각하다가 곧 이내 그 표현이 우습게 여겨졌다. 살인자가 죽을 만큼 피곤하다고 불평하다니 사치스럽다.

“이셀라의 시중은 누가 들고 있니?”

“세라인데요.”

도나는 영 좋지 못한 얼굴로 답했다. 그 표정이 재밌다.

“어떻대?”

“…….”

“왜, 솔직히 말해 봐.”

살짝 웃으면서 말하자 도나는 샐쭉한 얼굴로 투덜거린다.

“식사가 입에 맞지 않는다고 불평한대요.”

“음.”

사실 그건 맞지 뭘. 캐런은 동의했다. 교통이 불편하니 고급 식자재는 들어오지 않고, 영지의 주력 작물은 관상용 나무들이 대부분이라 식사를 즐기기에는 마땅치 않다.

더욱이 농사보다 나무 공예 등 수공예품에 더 큰 비중을 둔 탓에, 평민들뿐 아니라 영주의 집안마저도 식사란 단순히 허기를 때우는 것의 의미가 강하다. 고급스러운 산해진미만 즐기던 대부호의 막내딸에게 이곳은 고문이겠지.

“가지고 온 옷들을 제대로 관리 못 했다고 뺨을 얻어맞았대요.”

“저런.”

“건방지지 않나요? 결국 자기도 우리처럼 노동자 계급 출신이면서.”

결국 너와 같은데 잘난 척하는 게 불만이구나. 캐런은 그저 웃었다. 에반스는 하이어를 가지고 싶어 하고 우리는 그걸 막지 못할 텐데. 우리가 비웃는 것이 무슨 상관이랴. 침묵을 지키는 캐런을 보며 도나는 자신이 주제넘었음을 알았다.

“…죄송해요. 제가 주제넘었어요.”

“뭘. 신 앞에서 사람은 결국 평등하지 않니.”

아마도.

“에이, 신 앞이라 하더라도 다르죠. 저나 이셀라랑 다르게. 아가씨는 귀한 신분이잖아요.”

결국은 그저 신분. 공작, 백작, 남작 등의 대영지를 가진 것도 아니고. 세상의 잣대로 판단하자면 결국 에반스가는 어지간한 귀족들보다 영향력이 강하니 도나 같은 하녀와 비교하는 것이 어불성설이다. 재력으로는 하이어가보다 몇 갑절은 위인 것이다.

도나는 캐런의 심드렁한 얼굴에 자기가 더 나서서 이셀라와 캐런의 차이를 강조한다.

“그래도! 달라요. 아가씨는 신의 축복을 받았잖아요.”

태어났을 때 넌 세계에서 가장 복 받은 여인이 될 것이라 했다는 그거? 캐런은 코웃음을 쳤다. 그딴 덕담을 뭘 진지하게 여기는지.

도나는 선망 섞인 눈으로 캐런을 바라본다.

“아가씨의 미모는 축복을 받은 증거래요.”

“으응….”

민망할 정도의 칭찬에서 평생 자라왔으니 그런 행동을 하는 것도 당연한가. 캐런은 ‘이야기 속의 캐런’을 생각하니 착잡해졌다.

분명 평생 저런 눈빛과 기대 속에서 자랐겠지. 그러면 자신도 그렇게 꿈꾸는 게 당연해질 테고.

저잣거리의 집시들도 할 수 있는 축복이건만. 태어날 때 받는 축도는 도시에서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캐런의 경우 눈에 띄는 미모는 시골 사람들의 좋은 수닷거리가 되고 신성시 되었다.

평생 치켜세움만 받은 소녀에게 듈란은 눈에 찰 리가 없지…. 캐런은 「캐런」을 비웃고 싶지 않았다. 결국은 환상. 자신도 결국은 극 중 인물과 같다. 극본은 극본, 배역은 배역. 하지만 그렇게 똑같은 흉내를 몇 번이고 반복하면 우스워지면서 냉소적이 되는 것이다.

「캐런」처럼 얼마나 많은 소설의 여주인공들이 현실 너머의 저 빛나는 미래를 꿈꾸는가. 너무나 흔해서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원초적인 욕망의 글들이나, 그런 것들을 비웃는 자들 또한 수없이 봐 왔다. 허영과 몽상을 통제하지 못하는 여자들을 비웃는 자들은 비웃음을 가장한 동정을 베풀며 위안을 얻는다.

결국 캐런에게는 사랑을 찾겠다면서 도망가는 「캐런」이나 그녀를 비웃는 「듈란」이나 동등한 무게를 갖는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감정이며 주요 등장인물들에 대한 감상이고, 때로는 가끔 긴 한숨을 쉬면서 주어진 배역에 한탄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가끔 사회라는 탈을 쓴 일반 배역의 사람들, 예컨대 도나 같이 환상을 입은 채로 캐런을 바라보는 자들을 보면 마음이 조여 오는 것 같았다.

저들은 옷만 바꿔 입고 똑같은 역할을 하며 비슷한 대사를 한다. 낸시는, 도나는, 세라는. 결국 바뀌는 건 없다. 그러다 보면… 결국에는 자신 또한 그저 배역을 흉내 내는 인형에 지나지 않음을 자각하고… 그건 너무나….

“아가씨?”

“으응, 아니야. 잠시 졸았어.”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죄송해요. 낸시 선배님이 휴가가 길어져서….”

…그렇게 처리되는 건가. 캐런은 언제까지 휴가라는 이름으로 대체가 될지 궁금해졌다. 시체는 사라졌다. 말이 안 되는 방식으로. 하지만 단순히 외부의 힘이라 단정 짓기에는 이셀라가 캐런이 하지 않은 시체의 훼손에 대해 언급을 했다. 누군가가 손을 댔을까.

짝.

“아, 아가씨?”

“졸려서 그래.”

“안 돼요! 얼굴… 얼굴에 어찌….”

“졸려서.”

생각의 바다에 침전되지 말자, 캐런. 알 수 없는 건 알 수 없는 거야. 그렇다면 계속 실험해 보면 알겠지.

“도나.”

“네?”

“힘들면 휴가 가지 않을래?’

“헤헤, 아니에요. 다들 일이 너무 많아서 저까지 빠지면 정말 힘들 걸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다가 날짜를 확인한다.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구나.”

이제 슬슬 그가 나타날 때가 되었다. 캐런은 잠시 동안의 휴식을 접고 남자 주인공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허리를 조이고 피부를 가꾸고 머리를 손질해야지. 그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돈이 많을 필요도 없고 무력을 휘두를 필요도 없지만 단 하나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무조건 예뻐야 한다.

“뭐야, 대체 언제 오는 건데?”

“글, 글쎄요…. 적어도 2주 동안은 휴가를….”

“무슨 하녀가 휴가를 2주나 받아!”

이셀라는 괴이쩍음에 세라를 붙들고 역정을 냈다. 그렇지만 진짜란 말이에요, 하면서 울상 짓는 하녀를 붙들고 성을 내다가 곧 지쳐 주저앉았다. 역시 그 기간이라 그런가. 아랫배가 조여든다. 배를 잡고 누웠다.

“…….”

오싹, 하고 소름이 돋았다.

“여기서 봤는데.”

이상한 환영. 목이 잘린 여자. 그것이 꿈이다, 환상이다, 라고 확정짓기 위해서는 확신이 필요했다. 살아 있는 하녀를 직접 눈으로 보는 것. 하지만 그녀는 휴가를 받아 그날 나갔다고 한다.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하니 ‘아닐 거야. 아닐 거야.’ 하면서도 괜스레 초조해지는 것이다.

하녀가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휴가를 그리 길게 받는다고? 이상하다. 귀족의 말벗 시녀도 아니고 고작해야 시골 영주 딸의 전속 하녀다. 그것도 피부색이 어두워 급이 낮은. 캐런을 돌보는 것 말고도 온갖 잡일을 해야 하는 일손을 자신과 같은 외부인 때문에 일도 한창 많을 시기에 그저 휴가를 간다고 해서 보내 준다니. 납득이 가지 않았다.

무시하고 싶지만 꺼림칙한 의심이 깔린다. 마치 월경통같이 진득하고 마음이 놓이지 않는 불쾌감. 칠칠맞지 못한 꼴을 캐런에게 보여 주다니, 새삼 부끄러운 감정과 과연 정말 그런 것일까 하는 의심이 뒤섞인다.

전부 다 환상일까. 이셀라는 이제까지 그런 것에 시달린 적이 없었다. 달거리에도 짜증과 통증은 있었지만 이런 식의 극단적인 환각은 없었다. 환각은커녕 환청이라거나, 하다못해 악몽도 좀처럼 꾸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도 항상 곁에서 무서움을 잊게 하는 하녀들이 있었고, 자신의 침실은 향과 장식과 베일로 가득 차 있어 즐거운 잠자리를 약속했다. 즐거운 날의 다음 날에는 더 좋은 일들이 일어났고, 아버지의 사업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당당한 귀부인이 될 미래만이 남았다. 그런데 왜.

“아니야….”

이셀라는 자신이 불안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행복한 미래를 의심하지 말자. 자신은 에반스 가문의 귀한 딸이다. 항상 행복만이 있을 것이다.

“목걸이….”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은 깔끔하고 화려한 목걸이. 여기에 정말 피가 묻었던 걸까? 이셀라는 목걸이의 보석을 손으로 굴렸다. 그런 악몽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보석은 고요하고 영원한 평화를 약속하는 것 같았지만, 육체를 지닌 이셀라는 보석을 보자 더 무서워졌다. 보석은 영원해도 자신은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이 영지는 뭔가 이상해.”

“네?”

“넌 느껴지지 않니?”

“…….”

이곳의 하녀에게 말해 무엇하랴. 의심과 짜증이 섞인 세라의 얼굴을 보고 이셀라는 탐문을 그만두었다. 뭔가 이상하지만 이곳의 하녀들은 자신의 손발이 아니니 알 수 없다. 그 ‘뭔가’조차 가닥을 잡기 힘들다. 혀를 차고 눈을 감는다.

여기는 대체 뭘까. 난 여기의 주인이 될 텐데, 괜찮은 걸까? 이런 건 무시해도 되는 일인가? 대체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하지?

“이셀라 에반스 님.”

“응?”

“레이몬드 경에게서 전보가 왔습니다.”

하녀에 대한 생각은 어둠 저편으로 밀려나고 이셀라는 기뻐하며 전보를 읽기 위해 편지를 낚아챘다. 그리고 울상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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