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마탄의 사수
“아, 안 됩니다.”
마부가 기겁을 한다.
“언제부터 네가 내 상전이 되었지?”
“주인 어르신이나 듈란 님이 아시면 저만 죽습니다요….”
그건 내가 알 바 아닌데. 캐런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사실 캐런도 딱히 사건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다. 이건 캐런에게 노동이다. 책 속에서 원래 있었던, 일어나야 하는 일.
캐런은 마을로 내려가야 했다. 「캐런」이 나가야 할 이유는 많았다. 마을에 에반스 상단이 부른 서커스나, 유명한 악단, 기기묘묘한 물건들을 파는 상인들이 도착했다. 「캐런」은 집안의 마부를 구슬려서 마을 밖으로 혼자서 나가 구경을 하고 싶었다. 최근엔 에반스 상단 때문에 마차가 수시로 오가니 그중 마차 한 대가 늘어난다고 티 날 리 없다는 것이 계획이었다.
아버지나 약혼자나 바쁘고, 이셀라는 기분이 안 좋다며 상대도 안 해 주고. 사용인들도 바쁜 이 시기에 「캐런」은 늘어져 있을 생각이 없었다. 캐런은 사실 늘어져 있고 싶었지만, 그녀도 여주인공으로서의 일을 해야 한다. 그래야 상황이 쉬워지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캐런은 갑갑함에 견디지 못하고 살짝 가출을 감행한 아가씨의 역할을 하는 중이다.
머리는 단정히 땋아 올렸고 꽃무늬가 점점이 박힌 원피스는 깨끗했지만 낡았다. 그 위에 거친 천으로 만들어진 망토를 걸쳤다. 지나치게 남루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유한계급이 입을 만한 옷은 아니었다.
나이가 들어도 딱히 낡은 것이 좋아지지는 않는군. 불평을 감추고 캐런은 취향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동행인 없이 마을로 내려가겠다고 했다. 역시나 마부는 숫제 더러운 것이라도 입에 밀어 넣은 얼굴이다. 스스로도 몰래 나간다고 하면서 아랫사람을 부리는 것이 우스웠지만, 길은 하나고 경사가 심해 진정으로 몰래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숲으로 모험이랍시고 나갔다가 멧돼지에게 창자가 뚫렸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마부를 구박했다. 어차피 요즘 들어 계속 일이 많아 왔다 갔다 하지 않느냐, 돌아올 때는 시내의 마차를 이용하겠다고 의미 없는 회유를 해 봤지만 역시나 소용이 없었다. 캐런은 구두 끝을 탁탁 내리치며 으름장을 놓았다.
“너, 월급은 누구에게 받니?”
“영주님입죠. 아가씨가 아니라.”
이젠 숫제 손까지 휘젓는다. 캐런은 입꼬리를 당기며 손을 내민다.
“이건 어때?”
돈을 내민다. 마부는 잠깐 눈을 크게 뜨더니 다시 감는다. 탐은 나지만 위험 부담이 크다고 여기는 듯했다.
“잘릴 수도….”
말꼬리를 흐리는 것이 돈을 더 주면 감수하겠다는 것이지만, 캐런은 오늘 정말로 외출을 나가서 소비도 하고 싶었기에 그 선택을 무시했다.
“에이, 그런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
“하지만 만일 아가씨 혼자 갔다가 일이 생기면 확실히 잘리겠구먼요.”
성인이 된지 얼마나 됐다고. 고개를 젓는 마부에게 입꼬리는 당기면서 눈썹은 찌푸리고 구두굽을 탁탁 내리 쳤다. 난 나가 놀 거야! 하는 투정이 섞인 몸동작이다. 마부는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사고 치지 않고 조용히 돌아오면 되잖아? 난 기분 전환하니 좋고, 넌 부수입을 얻으니 좋고. 그리고 솔직히 여기… 촌구석이잖아.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오겠어?”
“촌구석이라도 곱게 자란 아가씨가 보면 안 되는 건 많은데요.”
“뭐, 여자가 나오는 술집 같은 거?”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리고 이런 촌구석인데도 신기한 거 요즘 많이 들어왔다고 다들 보고 싶어 해.”
“듈란 님이랑 같이 가시던가요.”
“싫거든!”
질색하는 캐런을 보며 마부가 혀를 찬다.
“여자 혼자는 위험하니까 절대 안 됩니다. 뭐… 음, 정 그러시면 아랫사람들과 같이 가시던가요.”
“다들 너무 바쁘잖니.”
그걸 알면서 나가려고! 하는 눈빛에 캐런이 그러니까 몰래 가려고! 란 의미가 담긴 표정으로 뻔뻔히 턱을 쳐들었다.
“그, 오히려 너무 바쁘니까 뭐… 가끔 쉬는 것도 괜찮지 않습니까. 뭐, 아가씨 시녀라면 청소 담당이나 부엌 소속도 아니니 비교적 빠져도….”
어라.
비슷한 대화를 몇십 번이고 반복해 왔는데 위화감이 느껴진다. 뭔가 거슬린다. 아, 맞다. 여기서 늘 하는 대화는 이렇게 이어진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없다. 떨리는 심장을 누른다. 어떻게 이어질까. 다음 카드는? 도박을 한다. 어떤 식으로 나올까.
“너… 도나 좋아하지?”
“예?”
마부가 눈에 띄게 당황한다. 피부가 달아오른다.
“아, 아닙니다! 아니 그것보다 무슨, 갑자기….”
“싫어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어머 어머, 얼굴 빨개졌다. 얘”
“…전 아가씨보다 나이를 열 살도 더 먹었습니다.”
“그리고 도나보다도 10년은 더 늙었잖니!”
부글부글 끓는 듯한 얼굴을 향해 씩 웃는다. 마부의 표정이 풀어진다. 미인과 상사에게 강하게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미안 미안, 놀리는 게 아니라. 요즘 워낙 바쁘잖아.”
“…….”
“그래서 애들에게 선물해 주려고 그래, 그리고 요즘 들어서 새로운 물건들도 많이 유통된다던데 구경도 좀 하구.”
“…혼자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래그래, 도나 일에서 빼 올게. 같이 놀다 오면 되지 뭐.”
“그래도 여자 둘이서는 안 됩니다.”
“알았어, 알았다고”
손을 들고 항복 표시를 했다.
“남자 하인도 데리고 가지. 참 여자는 살기가 힘들어.”
벌겋게 얼굴이 달아오른 마부를 뒤로하고 캐런은 고참 하녀들의 눈을 피해 하녀방 구석에서 졸고 있을 도나를 부르러 발걸음을 돌렸다.
적당한 대화, 보통인 유머, 평범한 투정, 무난한 마무리.
가정부인 헬렌이 ‘해야 할 일도 많은데 넌 놀러나 가는구나!’ 하는 탄식 섞인 눈빛으로 도나와 캐런을 전송했다. 보웬은 잠시 시간을 확인하더니 저녁 식사 전에는 돌아와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모자를 썼다.
“빨리 와!”
들뜬 목소리로 하인과 하녀를 부르며 마차로 향했다.
몇 번이고 반복한 외출하는 길, 산뜻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간질인다. 공기가 쾌청하고 신선하다.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오르면서 들뜬 얼굴로 달려오는 도나와 천천히 점잔을 빼며 걸어오는 보웬을 본다.
웃음기 섞인 소녀답게 밝은 목소리가 마차 가까이에서 들리자 캐런은 입꼬리를 올리려고 노력했다. 변화는 즐거운 거야. 웃자. 몇 번의 노력 끝에 간신히 도나가 마차에 올라타기 전에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도나는 앉아서 기대된다며 호들갑을 떨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캐런도 창밖을 바라보면서 기대된다고 중얼거렸다.
이야기가 변했다. 기뻐할 일이다. 이 외출은 항상 낸시와 함께했다. 동행하는 하녀가 달라지는 것만으로도 대화가 얼마나 달라질까. 새로운 대화가 이어지리라. 어쩌면 새로운 곳으로 갈지도 모른다. 바라던 바다.
이 외출은 중요하다. 「사건」과 「만남」이 일어나는 외출이다. 그 후 마부가 혼이 나고 잘린다거나 하는 건 참으로 사소한 일이다. 마부의 이름이 무엇이더라. 캐런은 기억나지 않는 그의 이름을 굳이 떠올리려 하지 않았다. 잠깐의 대화를 끝으로 더 등장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하나는 안다. 캐런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단 한 번, 숨을 길게 내뱉었다.
저 마부는 원래 낸시를 보며 얼굴을 붉히던 자였다.
백여 년간 항상.
사업이 진척되고 있다.
이 지역에서 나고 자란 도나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러지 않았다면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기에는 저런 도로가 없었는데, 저기는 그저 쓰레기장이었는데,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곳마다 감탄사를 터트린다. 정비가 미친 듯이 빨리 진행되고 있다. 과연 오랫동안 에반스가가 공들인 사냥다웠다.
“저길 봐요, 세상에… 이런 동네에까지 저렇게 큰 서커스단이 오네요.”
“그러게.”
에반스가는 하이어가에서 단물을 뽑는 것이 아닌, 영지 자체를 가지려고 하고 있다. 그러니 영지는 에반스가에서 퍼붓는 막대한 재력과 수완에 힘입어 미친 듯이 발전하고 있었다. 영주민들은 얼떨떨해하면서도 그들이 제공하는 유흥과 부에 눈을 떼지 못하고 은근히 에반스 가문에 호의를 보낸다.
에반스가에 적대감을 품는 도나도 그런 구경거리에는 들뜨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보웬을 졸랐다.
“저기요…. 보웬 씨….”
“…….”
“…네.”
소녀 둘이 눈을 빛내면서 보웬을 쳐다보자 보웬은 어쩔 수 없이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한 번 너무 늦으면 안 된다고 하며 표를 구매했다.
“아직 멀었으니 더 시내 구경이나 하자.”
“네.”
사람들은 더 늘어나고 사업에 밝지 못한 늙은 부친과 어리숙한 약혼자는 도시의 교활한 상인들에게 송두리째 먹힌다. 캐런은 그런 사실들을 알고 있었지만 이번 생에서 어찌 간섭할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이어가는 순조롭게 망하고 있었다. 그런 것은 이번 캐런에게 있어서 사소한 일일 따름이다. 집안이 파산하고 모든 물건이 차압당하고, 식사는 비루해지고 듈란은 다시 산의 수도원으로 돌아가고 절망한 영주는 시름에 잠겨 숨을 거둘 것이다. 여주인공에게 가련한 아름다움을 더해 줄 괜찮은 비극이다.
“정말 거리가 엄청나게 북적여요!”
거리의 사람들 사이에서 달리듯 쏘다니는 소녀들을 보웬이 허겁지겁 뒤따랐다. 캐런과 도나가 이것저것 집으면 보웬이 값을 치르고, 물건을 든다. 그리고 주위를 보면 어느새 저 멀리 다른 가게에서 기웃거린다. 하인은 금방 질려 버린 눈치였다.
“쯧쯧, 역시 편한 일만 하는 남자는 저렇게 체력이 약하다니까요.”
도나가 웃으면서 먼저 모자 가게에 들어가고 캐런이 뒤를 잇는다. 보웬은 가게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기다린다. 여성용품만 파는 곳이라 들어가기 머쓱한 모양이다. 하늘거리는 천들과 장식용 조화들과 갖가지 모자들이 가득 찬 가게는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장소였으며 모자 외에도 저렴한 장신구들과 바느질 도구 등을 팔았다.
캐런은 영주의 딸이라 이런 가게에서 파는 것들은 사지 않는다. 가장 좋은 것은 먼저 영주에게 바쳐지며 재봉사들도 솜씨 좋은 자들은 이런 가게를 여는 것이 아니라 저택에 소속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렇게 돌아다니면 물건의 품질과는 상관없는 독특한 매력이 있어, 색다른 재미를 주었다. 캐런은 자신의 것이 아닌 하인들의 것을 고르거나 구경했다. 천들 사이에서 도나가 가게 밖을 보며 속삭인다.
“남자 하인들은 하는 일도 별로 없으면서, 폼만 잔뜩 재서 재수 없어요.”
“그래?”
“네.”
“하지만 몸 쓰는 일은 다들 하인들이 하잖니?”
“차 따르거나 손님 오면 짐 나르거나 문 여는 거요?”
“왜 그리 심통이 났니?”
“할 일은 산더미인데, 보세요. 저야 아가씨 덕에 이렇게 나왔지만”
모자를 쓰고 뱅그르르 돌아 본다.
“그건 아닌 거 같아.”
도나가 시무룩해져 다른 보닛(bonnet)을 집어 든다. 하늘색 천으로 만든 챙이 큰 보닛은 도나의 갈색 머리에 꽤 어울렸다. 본인도 그걸 아는지 거울을 보며 웃었지만 캐런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 여름은 꽤 더울 텐데, 그런 천으로 된 보닛보다는 보터(boater)가 좋을 거야. 얼굴을 가리기 위한 챙도 좋지만 그 천은 더워서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달라붙을걸.”
“이번 여름이요?”
「다른 여름」을 모르니 비교할 수는 없지만 말이야. 하지만 사용인들이며 상인들이며 다들 슬쩍슬쩍 늘어져 있고 소매는 걷어붙이고 속바지는 안 입다시피 하고 다닐 것은 알고 있지.
“그럴 것 같다는 거야. 아무튼, 보웬이 어떤데?”
“딱히 보웬 씨가 싫은 건 아닌데요.”
하늘색 보닛과 밀짚으로 만든 보터를 비교해 보면서 도나는 보웬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냥… 우리 저택에는 하녀 수에 비해 하인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실질적으로 하인들이 하는 일은 여자들에 비해 적잖아요? 하녀들은 설거지, 식사 준비, 청소, 침대 시트 갈기 등 하루 종일 할 일이 넘친다고요. 그렇지만 하인들이 하는 건 고작해야 옷 빼입고 문을 열어 주거나 짐을 옮기는 것뿐인데, 흥흥. 돈은 더 많이 받고, 흥흥.”
“그렇구나.”
아버지의 허영일까, 아니면 그런 것조차 연애소설다운 장치일까. 캐런의 인생을 묘사했던 그 글자들은 재가 날릴 정도로 오래된 기억 속에서도 남아 있다. 불에 그슬린 것처럼 뇌에 박혀 백여 년의 세월이 지나도 욱신거리며 자기의 존재를 드러낸다.
하녀 수 같은 것은 적혀 있지 않았던 것 같은데. 킥킥 웃자 이상하게 쳐다보는 도나에게 손을 내젓는다. 이런 걸 오류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아버지의 경영 실수를 신의 오류라고 생각하는 건 정말이지 너무 거창한 것 같단 말이지.
“얼마 전에 세라가 편지를 전해 주다가 또 이셀라 아가씨에게 꾸지람을 들었다지 뭐예요. 나 참, 자기가 우리한테 월급 주는 것도 아니면서!”
몇 개월 있으면 걔가 네 월급 줄걸. 킥킥 웃었다. 도나는 시녀를 하기에는 입이 경솔한 경향이 있다. 나이도 어리고 원래 하던 일은 세탁 담당이어서 그런 걸까. 하지만 그래서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자주 조잘대며 지루함을 잊게 하니 더 만족스러웠다. 굳이 도나를 데리고 나온 것 또한 그런 수다의 보상이었다.
“어땠는데?”
“편지를 건네면서 은 쟁반에 담아 주지 않고 손으로 건넸다고 혼냈데요.”
“어머.”
“우리랑 닿는 것조차 싫다니 참 나.”
“그러게, 우리는 편지 담을 때 쓸 은 쟁반도 없는데 말이지.”
“우… 그, 그런 건 아닌데요…. 어… 죄송해요.”
백작 부인과 지내봤던 캐런은 몸에 손을 대는 것을 예의 없게 생각하는 주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알지만, 굳이 그것을 도나에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캐런은 너그러이 계급 차를 알려 주는 대신 자신의 가난함을 탓했다. 시골에서는 시골 나름의 법칙과 관례가 있는 법이고 그런 충고를 해 봤자 의미는 없기에.
“농담이야.”
“우….”
“웃어.”
“…호호호.”
어색하게 발음하다가 둘이 실없는 웃음을 터트린다.
결국 가장 친밀히,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결국 동성이다. 심지어 대화를 나눈 시간을 비교하면 소설의 반 이상을 레이몬드보다 이셀라와 더 함께 했을 것이다. 하지만 등장인물의 중요도는 낸시나 도나 이셀라보다 당연하게도 레이몬드가 높았고, 심지어 듈란이 하녀들보다 더 높겠지. 이건 로맨스 소설이니까.
“대신 장식 천을 그 천으로 덧대서 하자. 덧대는 건 꽃 말고 리본으로.”
하지만 이번엔 낸시가 중요해졌다. ‘지금’은 레이몬드보다도 더 강렬하게 일상을 사로잡는 것이 그녀인 것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면 낸시가 아닌 도나의 얼굴이 보이면서 성취감에 휩싸인다.
어차피 하녀는 다 비슷하니 의미 없다 생각했지만 전담 시녀 일을 하지 않고 그저 세탁 하녀였던 탓에 손끝이 낸시처럼 야무지지 못하고 센스도 좀 떨어졌지만 더 발랄하고 18세 소녀다운 천진함이 있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캐런은 자신이 등장인물을 갈아 치운 것에 꽤나 뿌듯함을 느꼈다.
그래서 캐런은 낸시나 도나에게 애정을 가지고 이렇게 시간을 내주면서도 언제든지 칼로 배를 가를 생각을 하면서 즐거워했다. 스스로도 음흉하다 여기면서도 예뻐하는 마음이 거짓은 아니니 고민하지는 않는다.
“그건 아니야.”
“네….”
하지만 도나가 그 다음에 집은 머플러는 정말 어울리지 않아서 캐런은 순수하게 그 선택을 말리고 싶어졌다. 노파나 쓸 법한 디자인이었다. 하지만 도나는 그 머플러를 놓지 않았다.
“설마 그걸 고르려고… ?”
“네? 아, 괜찮지 않아요?”
“전혀 안 괜찮아.”
“실은 데어 부인에게 드리는 게 어떨까 싶어요.”
“응?”
“네?”
“데어 부인이라는 사람 싫어해?”
“아뇨, 딱히 그렇지는… 아가씨, 데어 부인이잖아요.”
대체 누구를.
캐런은 혼란스러웠다.
왜 모르냐는 도나의 얼굴에 캐런은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캐런은 머릿속으로 저택의 사용인들부터 알 법한 마을의 사람들, 더 나아가 도나가 알 리 없는 사교계의 사람들도 훑었으나 데어 부인이라는 사람은 없었다. 캐런이 당황하자 도나는 놀리려는 듯 웃는다.
“어우, 아가씨. 아무리 그래도 8년이나 아가씨의 가정교사셨잖아요.”
“가정… 교사?”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황한 캐런의 얼굴을 보고 도나가 더 놀란다.
“데어 부인이요… 그, 아가씨에게 예법이나 춤이랑… 전 잘 모르지만… 이것저것 가르치셨는데. 정말 기억 안 나세요?”
“아, 아아. 아… 데어 부인.”
“네에, 이 근처 사시니까 일부러 오신 줄 알았어요.”
기억이 날 리가 있나. 이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건 캐런이 아닌데. 백여 년간 「캐런」으로 살아왔지만 결국 반복되는 건 1년뿐이기에 캐런은 살짝 당황했다.
가정교사라. 아이 방과 연결되어 있는 가정교사의 방은 안다. 비워진 지 오래라 들어갈 필요도 없었고 이미 백여 년 전, 「캐런」이 아닌 자신이 캐런이 되고서는 가정교사 같은 건 있지도 않았다.
영주의 딸이 가정교사도 없이 하녀들과만 지낼 리가 없지 않은가. 남자들처럼 수도원이나 대학에 보내서 학업을 쌓지는 않아도 교양은 가르쳐야 한다. 저 이셀라나 도나와 같은 하녀들이 가르칠 수도 없는 것을.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항상 계시던 분이 안 계시니까 기분이 이상하더라구요. 아가씨는 매일 보시던 분이니 더하시죠?”
“그래, 벌써 한 100년은 된 거 같아.”
“네에?”
꺄르륵 넘어가는 도나를 보면서 캐런은 자신이 기억 못 하는 건 당연하다고 말했지만, 역시나 도나는 아무렴요 하면서 웃었다.
캐런은 100년간 데어 부인의 이름을 들은 적이 없었다. 열일곱 살이 되기 전에 하이어가 저택을 나갔으니까. 낸시와 이 가게에 온 적도 없었다. 도나에게는 몇 년 전의 일이라도 캐런에게는 백여 년도 더 전의 일, 경험한 적도 없는 일이다.
8년이나 저택에 있었는데도 그 후에 중요한 인물이 아니니 다시 회자되지도 않았다. 캐런은 예상할 수 없는 사람의 인생은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소설은 고작 소설일 뿐이다. 그 수많은 만남들과 셀 수없는 사건들은 중요하지 않은 나날이기에 캐런에게 더욱 중요했다. 캐런은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얼굴을 굳혔다.
“그래, 어떤 게 좋을까?”
“나이가 아직 젊으시니 분홍색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래?”
캐런은 말을 아끼면서 이것저것을 고르며 데어 부인에 대해 물었다. 도나는 별다른 의심 없이 데어 부인에 관해 잔뜩 수다를 떨었으나, 생각보다 얻은 것은 적었다.
캐런의 모친과 친구인 그녀는 몰락한 중류층의 여성이었으며 8년간 캐런의 가정교사로 일했다. 대부분의 가정교사들이 그렇듯이, 하녀들과는 벽이 있었으며 주로 캐런과 영주 부부와 시간을 보냈다. 모친이 죽고 나서는 일을 그만두고 연금을 받아 근근이 살고 있다고 한다. 낸시와는 사이가 유독 안 좋았다고 했다.
“낸시가 하녀 일을 하기 전에 집시였다고 하잖아요?”
“음…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더럽다고 내쫓으려고 하셨어요.”
“어머나.”
“그래서… 아, 차라리 바로 옆집인데 보고 가는 게 어떨까요?”
하필이면. 캐런은 약간의 긴장으로 몸이 굳는 것이 느껴졌다. 8년 내내 본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는 건 캐런이 그 어떠한 대비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상하게 보이겠지. 하지만… 변명거리가 생각나지 않아 머뭇거리는 사이 다행히 보웬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입장해야 할 시간이다.
“진짜 못생겼다.”
“그러게요.”
“도나, 조용히 해라.”
보웬의 말을 무시하며 캐런은 도나와 유인원의 못생김에 대해 열심히 말을 나누었다. 저렇게 못생긴 동물이 다 있다니. 캐런은 그동안 이 ‘외출’ 사건 때 서커스장에 온 적이 없었다.
낸시와 함께할 때는 이 날짜가 아니었고, 그때는 모자 가게와 서커스가 아닌 음악 공연과 거리의 악사들을 보곤 했었다. 캐런은 역시 낸시를 죽이기 잘했다는 생각을 했으나 눈앞의 신기에 다음 생에는 낸시와 서커스를 오기로 결심했다. 꽤나 즐거운 볼거리 아닌가. 낸시에게도 보여 줘야지.
“낸시… 낸시도 이런 걸 좋아할까?”
“네?”
“낸시 말이야.”
“저런 구경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요? 어, 그래도 낸시는 모르겠네요. 원래 집시 출신이니까 저런 것도 해 보지 않았을까요?”
“조용히 즐기는 것이 어떻습니까?”
“됐네요, 피.”
생각해 보니 자신은 낸시에 대해 아는 것이 적었다. 그렇구나. 저런 일도 해 보았을까?
하지만 캐런은 낸시가 하녀복이 아닌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공중에서 재주를 부리는 여자들 사이에 있는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녀는 언제나 똑같은 하녀복을 입었으니까.
백금발로 탈색한 여성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든다. 얼굴은 진한 화장으로 빛나지만 캐런은 두터운 화장 밑의 얼굴이 어떨지 상상하며 울퉁불퉁한 근육에 시선을 던진다. 여자가 허공으로 몸을 던진다. 높이가 3층은 될 법한데 망설임이 없다.
자신도 언젠가 저렇게 몸을 던졌었다. 저 정도의 높이였다. 제발 한 번에 죽기를 기도하면서. 여자가 나풀나풀 떨어진다. 떨어지는 모양새가 퍽이나 아름답다. 그녀는 웃고 있다. 자신은 울면서 떨어졌다.
“꺄악!”
덜컹.
곧 한 바퀴를 돌더니, 아래쪽에 매달려 있는 남자가 그녀를 받아 다시 위로 날렸다. 하얀 새처럼 빛이 난다. 또다시 위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받는다.
캐런은 끝없이 추락했었다. 추락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저런 부활이 아닌 지저분한 피 냄새와 책장이 덮일 때까지의 끔찍한 기다림이었다. 잡아 주는 손은 없었다. 자신은 끝없이 추락만 한다.
“정말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나도.”
사실은 기대했었다. 머리가 깨지기를, 다시 비극이 시작되기를.
어차피 「사건」은 오늘 일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저 여자가 추락하는 사건도 괜찮지 않은가. 캐런은 아쉬웠다. 그리고 자신이 서커스에 감정을 이입해서 질투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 생소했다. 저렇게 죽음을 연출하는 구경거리와 그것을 보는 사람들과 자신과 단원의 웃음이 섞인다.
“…으”
생각하지 말자. 눈앞의 구경거리를 즐기자. 처음 보는 것이니 즐기지 않으면 손해다. 바로 지난번 회와는 다르게 가출이 아닌 하인들을 대동한 외출인지라 캐런은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서 음료를 즐기며 구경을 할 수 있었다.
“낮부터 그렇게 강한 술은 안 됩니다. 그리고 특히 도나, 넌 돌아가서 일도 더 해야 할 텐데.”
“와…. 이… 너무한….”
“그럼 맥주로.”
“네.”
보웬이 지나가는 판매원을 불러 잔에 맥주를 가득 담아 건넸다.
“저는요?”
도나가 보웬에게 물었다.
“안 되지.”
“하하….”
“그 다음은, 우리 서커스의 자랑입니다! 큰 환호 부탁합니다!”
“와….”
“저게 뭐래요?”
육중하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환호성이 퍼졌다. 기이한 동물이 들어왔다.
회색빛의 거대한 동물이었다. 이야기 속에서나 본 짐승이었다. 입이 절로 벌어졌다. 상아로 만든 호화품이야 가져 봤지만 살아 움직이는 짐승이라니. 심지어 상아의 빛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회색 덩치다. 막연히 크고 우아한 동물일 것이라 상상했던 캐런의 환상이 깨졌다.
“이 동물은 코끼리라고 하는 짐승인데, 코를 마치 손처럼 씁니다. 물도 코로 마시지요! 코로 물먹기로는 따라올 생물이 없을 겁니다. 어디 시도하실 분 안 계신가요?”
“접시 물에 코 박고 죽어는 봤는데 말이지.”
“네? 어느 멍청이가 그렇게 죽어요?”
“…조용히 하고 구경이나 하자.”
영지에 주로 나타나곤 하는 사슴이나 새, 멧돼지 같은 동물과는 전혀 다른 기상천외한 동물이었다. 심지어 털도 없었고 귀는 거대한 북보다 더 컸다. 상상했던 우아한 빛깔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이한 매력이 있었다.
머리도 꽤나 좋은지 갖가지 묘기를 해내는데, 코를 이용하여 다른 동물들과는 전혀 다른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 코끼리가 코를 움직여 물건을 움직이고 건넸다. 환호하는 관객들 사이에서 캐런도 손을 내밀어 보았다. 긴 코를 만져 보고 싶었다.
“위험하니 그러지 마십시오.”
보웬이 캐런의 손을 당겼다.
짜증이 난다. 사건은 일어나기 마련이고 사람은 죽기 마련이다. 캐런은 당연히 위험하다. 죽음을 무서워하는 건 캐런에게 하찮은 일이다. 캐런을 방해하는 자는 유흥을 막는 방해물에 지나지 않았다. 잡힌 손을 내치고 동물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코끼리와 눈이 마주쳤다. 캐런은 그 거대한 짐승의 눈이 그리 작다는 사실이 재밌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잠깐의 순간 동안 웃었다. 큰 코끼리가 캐런을 향해 다가온다. 캐런은 손을 내밀었다. 코로 악수를 하는 걸까.
쿵.
쿵.
쿵.
쿵.
“이 자식이!”
그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이상을 알아차린 건 조련사였다. 그는 작은 창으로 코끼리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어느 여자가 흘러나오는 피를 보며 비명을 질렀다. 두터운 가죽을 뚫었는데도 코끼리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조련사는 창을 다시 찔렀으나 곧 나가떨어졌다.
걸음은 이어져 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관객석으로 걸어온 짐승은 그녀에게 다가왔다. 캐런은 환희에 젖었다. 맨 앞의 관객이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지만 늦었다. 조련사가 고함을 지르며 그 앞을 막아섰다. 주의를 돌리려고 하는 행동이었지만 무의미했다. 그는 더 이상 코끼리를 막을 수 없었다.
쿵.
“안 돼!”
“아아악!”
콰직, 콰직.
끔찍한 소리와 핏물이 튀겼다. 창을 휘두르던 남자가 짓이겨졌다. 그 충격적인 광경에 관중들은 몇 초간 기이한 침묵에 빠졌다.
단장이 일어나서 고함을 지를 때까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당장 나가시오! 어서!”
비명이 삽시간에 번졌다. 사람들은 조그만 출구를 향해 달려 나갔다. 하지만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엉키고 넘어져서 순식간에 서로가 서로의 발목을 잡았다. 의자들이 넘어져 거기에 깔리기도 했다. 극장 안은 아비규환이 되었다. 살아 있는 지옥이었다.
“아가씨! 이쪽으로!”
보웬이 캐런과 도나를 일으켜 앞을 가로막은 의자를 치웠지만, 구경에 좋은 자리는 탈출구에서는 너무나 멀었다. 의자나 사람은 코끼리에게는 너무 작아 그 큰 짐승은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캐런을 향해 걸어왔다. 앞을 막으려는 극장의 직원들을 코로 던지고 발로 으깨면서 걸어왔다. 무엇도 막지 못한다. 캐런은 코끼리를 바라보았다. 저 코는 꽤나 힘이 좋구나, 감탄이 일었다.
“아”
“꺄아아악!”
코끼리가 다가오자 들떠서 코끼리를 손가락질하던 아이의 뼈가 부서졌다. 소리를 지르며 아이를 빼내려던 여자의 몸에도 그 육중한 발이 내려앉았다. 의자들이 부서졌다.
코끼리가 다가온다. 캐런은 고개를 들었다. 보웬이 캐런과 도나의 앞을 막아섰다. 둔중한 몸이 천천히 내려와서 눈을 다시 마주쳤다. 코끼리가 무릎을 꿇는다. 캐런은 아직 손을 거두지 않았다.
캐런은 웃었다.
누군가가 캐런의 눈을 가렸다.
끔찍한 굉음에 캐런은 눈을 가린 자를 손톱으로 할퀴고 싶어졌다. 귀를 막아 줘야지, 이 멍청아! 하지만 고막을 찢는 진동에 할퀴기는커녕 바로 자신의 두 귀를 막아야 했다. 그럼에도 이명이 그녀를 괴롭혔다. 삐이, 하는 높은 음이 뇌를 흔든다. 그리고 다시 연사되는 총소리가 들린다.
시끄러워, 그만둬, 시끄럽다고! 내버려 둬. 그냥 내버려 두란 말이야!
들리지 않을 고함을 마음속으로 외친다.
화약 냄새가 코를 강하게 찔러 콜록거리며 눈을 떴다.
“아….”
역시나. 그렇지. 코끼리는 그 거대한 몸집이 무색하게 쓰러져 있었다. 회색 몸에는 여기저기 구멍이 나 피가 흘러나왔다. 역시 너도 어쩔 수 없구나. 캐런은 다가갔다.
이렇게 큰 동물도, 그렇게 큰 힘을 가지고 있어도, 물건을 들어 올리거나 남을 태우거나 하며 재롱을 피우다가 그 생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총알이 수십 발 박혀 있지만 정수리를 정확하게 뚫어 첫 발걸음을 멈추게 한 상처를 보았다.
누군지 뻔하다. 이런 역할은 지나가는 엑스트라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캐런은 코끼리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직 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치료해서 살 것 같지도 않았다. 낫고 안 낫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을 해친 짐승은 살려 두지 않는 법이다. 피부는 두꺼웠다. 총알은 이런 피부도 뚫는구나. 닿지 않아도 온기가 느껴진다. 캐런은 손을 내밀었다. 그 긴 코를 쓰다듬어 보고 싶었다.
“뒤로 물러나!”
누군가가, 아니 캐런은 누군지 안다. 그가 거칠게 캐런의 팔을 잡아챘다. 캐런은 휘청거리면서 뒤로 물러나야 했다. 귀족들은 이런 데서 흥을 상하게 한다. 그는 레이몬드의 종자였다. 제논. 그가 여기 있다는 건, 역시 그렇군. 이번에도 그가 왔구나… 재미없는 일이다.
처음의 총소리가 난 곳을 쳐다본다.
그가 왔다. 금빛 악마. 마탄의 사수.
레이몬드.
백여 년간의 연인. 그녀의 남자 주인공. 그녀의 기사.
지금은 얼굴도 모르는 자.
거리는 꽤나 멀지만 그를 못 알아볼 리 없다.
그도 캐런을 못 알아볼 리 없다.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그에게 큰 관심을 쏟을 때가 아니었다. 가까이에서 도움을 준다면 캐런이 고마움을 표할 때이고, 멀리서 도움을 준다면 캐런은 모르고 그만 아는 순간이다. 이번 회의 첫 만남은 이런 식이군. 캐런은 레이몬드보다 눈앞의 동물이 죽기 전에 코를 움직이는걸 보고 싶었다.
턱. 캐런의 어깨를 제논이 거칠게 잡아챘다. 캐런은 그의 손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놔.”
“제길… 물러나라고, 이 여자야.”
“…당신의 무례를 용서한다. 하지만 물러나야 하는 건 그쪽이야.”
보웬이 헐레벌떡 뛰어와 제논과 캐런의 사이에 섰다.
“수습에 감사드립니다. 아직 아가씨가 어려서….”
“빌어먹을, 교육 잘 시켜야 할 것 아니오! 비키시오!”
제논은 사용인의 태도에 자신이 거칠게 다루면 귀찮아질 소녀라는 걸 알고 더 말하지 않고 총을 장전했다. 그리고 캐런은 다시 귀를 막고, 제논은 끝을 냈다.
“하이어 저택의 풋맨(footman) 보웬 레위스입니다.”
“제논이오.”
“아….”
“그저 일개 사냥꾼이니 신경 쓸 것 없소.”
“그런 말씀 마십시오. 아가씨를 구해 주시고 상황을 수습해 주신 것에 영주님을 대신해서 큰 감사를 드립니다. 부디 초대할 영광을 주십시오. 합당한 대가를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 말은 당신네 아가씨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넌지시 비꼬는 말에 보웬은 황급히 캐런을 찾았다. 그러나 서커스 천막 안 어디에서도 캐런은 찾을 수가 없었다.
“도나! 도나! 아가씨는 어디 갔어!”
“하이고, 이젠 미아 찾기까지…. 가지가지 하는 아가씨구먼.”
제논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주인이 서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제논은 그를 잘 볼 수 없지만 그의 주인은 그를 잘 볼 것이다. 눈이 아주 좋은 저격수니까.
“하아….”
캐런은 미로 같은 골목을 빠져나왔다. 몇 번이나 복잡한 길을 돌았던지. 지금이 아니면 단독으로 움직일 수 있는 기회를 잡기가 어려울 것이니 몸을 급히 움직여야 했다. 할딱이는 숨을 가라앉히고 어두워진 골목을 걸었다.
레이몬드와 멀리 떨어져 있었고 보웬이 정신이 없는 사이 사람들에게 뒤엉켜서 밀려 나올 수 있었다.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당분간 단독으로 움직일 수 있는 미래는 없을 것이다. 데어 부인이라는 여자를 혼자서 만날 수 있을까.
“어쩌면 오늘은 달라질 수도 있어.”
100년 동안 본 적 없는 동물을 본 하루니까.
거대한 동물의 최후를 생각한다. 옛이야기에서나 나올 법한 신기했던 짐승. 머나먼 더운 나라에 산다던 그 기이한 동물의 발길질 한 번에 뭉개지는 사람들, 그렇게 죽어 가는 모습은 억지로 종이 사이로 끌려 들어와 압사당하는 벌레 같은 자신처럼 보였다.
“…웁.”
구역질이 났다. 죄책감은 아니다. 하지만 기이하게 기분이 나빴다. 동질감? 감정이입? 캐런은 단어를 골랐다. 하지만 무엇도 성에 차지 않는다.
그래도, 확실한 건 오늘 하루는 많이 달라졌다. 보지 못한 걸 보고, 죽지 않을 자들이 죽었다. 낸시의 부재로 이렇게까지 변한다면, 어쩌면 지금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알아볼 수 있있는 기회일지도 몰랐다. 그 가정교사라는 사람의 집은 모자 가게 옆이었지. 새로운 갈래가 나뉜 오늘이라면, 다음의 내용이 결정되기 전에 데어 부인의 집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
걸음을 멈춘다.
더 가면 자신이 ‘강간의 위험에 처하는’ 골목이다. 아직 시간대가 아닌가? 달을 쳐다보았다. 아직은 아니다. 캐런은 자신의 이야기 중, 차마 인생이라 부르기 힘들지만 비슷하게 흘러가는 시간들을 통해 책 속의 미래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 이리저리 비튼다고 해도 결국은 자신이 죽고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자신이 외출을 하는 이 시간 동안 캐런은 위험에 처하고, 레이몬드가 구한다.
가장 가볍고 평범한 이야기는 캐런이 보웬과 낸시와 같이 거리의 공연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캐런의 둔부를 더듬거리고, 그것을 레이몬드가 잡아서 저지한다. 그리고 좀 더 무겁게라면, 이 골목 안에서….
“꽤나 삼삼한데? 몇 살이야?”
이런 식으로 집적거린다. 진부함에 진저리가 쳐지는 대사를 읊는 남자를 보았다. 한동안 이 골목으로 오는 일은 없었으니 12년?, 아니 13년만인가?
“이러지 마.”
“이러지 마아? 내가 뭘 했다고?”
벽으로 캐런을 몰고 간다. 캐런의 고개를 잡는다. 입 냄새가 역겹다. 남자의 오른쪽 다리가 캐런의 허벅지를 누른다.
“오, 꽤나 상태가 좋네? 치아도 좋고, 피부도 곱고. 아래도 그렇겠지?”
“잘 먹고 잘 자고 잘 씻으니까.”
“이년 입 터는 거 보게.”
낄낄대면서 다른 남자가 캐런이 도망칠 수 없도록 골목을 막아섰다.
“야, 이거 진짜 잘사는 집 딸인가 본데?”
“나도 맛 좀 보자.”
하반신이 꽤나 부풀어 있다. 왠지 아까의 코끼리가 생각났다.
“풉.”
“왜, 좋아?”
“상황 파악 안 되는 년인가.”
코끼리, 코끼리라! 캐런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킥… 키키키킥.”
“정신 나갔나 보군.”
“아무렴 어때, 마누라도 아닌데.”
옷을 찢는다. 캐런은 제일 싸구려 옷을 입고 나온 것이 만족스러웠다.
예전에 숲으로 모험을 감행한 적이 있었다. 레이몬드를 만나는 것조차 두려웠던 때였다. 사랑하지 않기를, 만나지 않기를, 죽지 않기를 고대하면서 숲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후 다시는 숲으로 가지 않았다. 숲에서의 위험이란 도시에서의 위험과는 종류를 달리했다. 캐런은 그때 멧돼지의 어금니에 배를 찔렸다. 그리고 그걸 레이몬드가 구했다.
당시 캐런은 소총을 겨냥하는 그를 보면서 안도를 하는 것이 아닌 저 인간이 왜 도시에 있지 않고 여기서 이러고 있냐면서 속으로 짜증을 부렸다. 자신의 속이 어떻든, 캐런은 결국 진통성 마약이나 실컷 먹고 죽기 위해 레이몬드에게 손을 건넸다. 결국 그때는 뚫린 상처가 도져서 죽었다.
“아, 생각하니 짜증 나네. 일이 이렇게 되다니. 다음에는 이쪽 말고 다른 곳으로 가야겠어.”
“다음? 늦었어. 아가씨.”
캐런의 말을 남자가 비웃는다. 다음이라니. 남자는 캐런에게 다음의 기회를 줄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캐런은 부정했다. 격식이 없다 못해 혼잣말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응? 아, 아냐. 아직 안 늦었어.”
남자는 종잡을 수 없는 대화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손가락으로 머리를 툭툭 쳤다.
“뭐라는 거야 이 미친년이?”
“어이 어이,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빨리 끝내, 나도 해야 하니까.”
캐런은 뚫렸던 상처가 도졌던 때를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생각해 봐 한스, 너라면 화나지 않겠니?”
“뭐, 뭐? 내 이름을 어떻게….”
“아니 아니, 그런 거에 신경 쓰지 말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뭐야 한스, 너….”
“네 아내 있잖아. 네가 총 맞아 죽어도 별로 신경 안 쓴단다? 한 달 뒤에 재혼해.”
“뭐?”
“그치, 열 받지? 생각하니까 나도 열 받아. 듈란 이 좀생이가, 내가 다른 남자랑 키스하는 거 보고 나서 파혼했거든? 근데 그건 그거고, 자기가 의술을 배웠으면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의술을 베풀어야 할 거 아니야. 그런데 얘가 내가 자기랑 결혼 안 한다고 삐져서 그때 염증 치료도 제대로 안 해 준 거야, 글쎄. 결국은 어떻게 되어도 죽었겠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아무튼 조금이라도 고름 덜 생기고 그럼 좋잖아. 초기 진료가 중요한데 레이몬드가 아무리 좋은 의료진 데려와도 뭐하냐구, 이미 늦었는걸. 그놈은 딴 남자의 여자 된다고 바로 포기해요, 어휴.”
“하, 한스, 이거 진짜 미친년이야….”
“입 닥치게 해!”
빠악.
남자의 주먹이 캐런의 머리를 쳤다.
아프다. 하지만 캐런은 머리를 한 번 흔들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말하고 싶은 욕망을 멈출 수 없다.
“아, 토머스, 네 아들은 우리 집 접시 닦이 소년이 될 거야. 그런데 걔 진짜 못 하더라. 지난번에, 아, 여기서 말하는 건 지난 권생(卷生)을 말하는 거야. 지금은 네 아들 빵집 주인에게 봉사하느라 바쁘거든. 불쌍하기도 하지. 그래서 내가 걔 노리고 있어. 성병 걸려서 얼마 안 가 죽을 거거든.”
“뭐, 뭐? 이 씨발….”
머리채를 잡는다.
“한스, 이 머릿결 관리하기 얼마나 힘든지 알아? 난 낸시의 역작이란 말이야.”
“죽여!”
노력해 보렴.
캐런은 귀를 막았다. 이 타이밍쯤에 총소리가 들릴 것을 예상하기 때문이다.
“…끄윽.”
“허, 헉.”
“어서….”
어라?
총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캐런은 벽에 머리를 박히면서 토머스가 작은 칼을 빼내는 것을 보았다. 시간 계산이 잘못됐나? 보통 낸시랑 헤어지고 나서 길을 잃고 여기 오면 이쯤이었는데…. 역시 낸시가 아니라 도나로 바뀌니까 시간 계산하기가 힘들군. 항상 낸시가 옆에 있었으니까 낸시의 행동에 따라 기억하기가 편했는데. 캐런은 투덜거렸다.
“…히익.”
옆구리에 끔찍한 통증이 느껴졌다. 칼이 박혔다. 캐런은 비명을 질렀지만 한스의 손에 막혔다. 아파! 아프다고! 아! 아아! 죽나? 나는 죽나? 이렇게 빨리? 정말?
“하… 아아….”
칼날이 비틀린다.
타앙.
그제야 총소리가 들렸다. 너무 늦잖아. 이런 식이다. 캐런은 약간의 안도를 느꼈다.
얘네는 이제까지 날 강간한 적은 있지만 고문한 적은 없었는데. 가족을 건드리면 이렇군. 신기하네. 사람을 죽이거나 강간한 자들이 자기 가족에게 애착을 느끼다니. 가족을 그리 사랑하는 것도 아니면서.
“저, 어느 부분에서 화가 났니…? 아, 벌써 죽었나.”
캐런은 한스의 동공이 풀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하찮은 자의 하찮은 죽음이다. 이렇게 버러지처럼 죽는 것이 그의 인생이다.
한스, 넌 매일 네 아내를 패고 결혼도 이런 식으로 강간해서 했잖아. 그래도 재혼한다는 말이 배신 같니? 그래서 이렇게 화를 냈던 거니? 네가 죽고 난 다음에 아내의 인생이 밉니? 보지 못할 미래가? 아니, 그냥 내가 기분 나빠서인 걸까. 근데 너랑 하기는 싫더라. 입 냄새 너무 난단 말이야.
그리고 한스의 이빨 사이의 음식물을 보자 역겨워서 눈을 감았다. 캐런은 눈을 감고 즐거운 일을 기억하고 싶었다. 무엇이 좋을까. 이번에는 코끼리를 보았다. 직접 본 것은 처음이다.
혹시 나, 동물 훈련에 재능이 있는 걸까. 그럼 재밌을 텐데. 캐런은 다가오던 코끼리를 생각했다. 결국 그 코끼리가 자신을 해쳤을지 어쨌을지 모르니 알 수 없었다. 캐런은 코끼리가 이번 생에 어떻게 영향을 끼칠지 예상할 수는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번에는 캐런 자신이 위험에 처하리라는 것. 이셀라를 만나 교류를 하고, 이셀라가 레이몬드에게 서신을 보내 와 달라고 조르면 레이몬드는 우선 거절하지만 역시 마음에 걸려 이곳으로 몰래 온다.
여기까지 단계를 충실히 밟았으니 캐런이 오늘, 마부와 투닥거리고 보웬과 낸시와 같이 마을 구경을 하다가 위험에 처할 것은 예상이 가능한 일이다. 다만 이번에는 낸시가 아닌 도나와 왔다. 호기심이 많은 도나가 음악에 관심이 많은 낸시와 달리 서커스를 고집했고, 그렇다면 위험은 서커스 중이나 서커스 후에 일어날 것이라 생각했다.
결과는 두 번 다 위험에 처했다. 이 정도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레이몬드와 만나는 것 이상으로 행동하니 이렇게 부작용이 생겼다. 처음 서커스에서 구해지는 것으로 이 날의 일정을 끝냈어야 했던 걸까. 의욕이 과했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인 레이몬드와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했다.
“…아으.”
옆구리가 아프다. 서커스 쪽을 선택하는 건 다음부터는 피해야지. 그래도 그 코는 만져 보고 싶었는데, 역시 미련이 생긴다. 역시 지나친 욕심을 부리니 몸이 상한다.
몰래 그 데어 부인이라는 사람도 살펴보고 싶었는데, 일정이 이렇게 꼬일 줄은 몰랐다. 그래도, 신기한 구경이었다. 그런 것을 계속 볼 수 있다면 여러 번 더 죽어도 괜찮을 것 같다.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괜찮습니까?”
캐런은 눈을 감았다. 너무나 익숙한 그를 지금은 보고 싶지 않다.
“야경단 중 당신 같은 분은 본 적이 없는데요. 사냥꾼 같지도 않으시군요.”
“…적당한 의심은 귀족의 의무이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캐런은 찢어진 옷을 여미며 눈을 뜨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려 애를 썼다. 100년간 본 남자를 처음 보는 것처럼, 의심하는 것처럼, 상처받은 양 의심하려 하지만 칼에 찔린 옆구리가 아파서 아이처럼, 오랜 연인처럼 매달려서 투정 부리고 싶다. 너무 늦었잖아. 너무해.
의식하거나 연기하지 않아도 울음이 새어 나온다. 찔린 곳이 아프다. 숨을 쉬기가 힘들다.
“보다시피 귀족이라 할 만큼 제 피는 푸르지 않아요. 구해 주신 것에 감사… 합니다. 다만 제 상황을 보셨던 것만큼…. 흑, 흐윽, 어… 상태가 좋지 않… 흑….”
레이몬드의 손이 옆구리를 눌러 지혈한다. 손을 뻗어 캐런의 등을 토닥이며 히끅거리는 숨을 가라앉힌다. 그는 우는 여자를 싫어하지만 부상자는 군인으로서 돌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누르고 진정시키고. 그러다가 자신이 달래는 것이 자신의 휘하 군인이 아닌 젊은 여성이라는 것에 놀라지만 손을 뗄 수도 없다.
“곧 제 휘하의 사람이 지혈제를 가지고 올 겁니다. 하이어저의 마차도 연락되었습니다.”
“…제가 누군지 아시는군요.”
“비공식적으로 방문을 하려 했습니다만. 어쩔 수 없군요. 레이몬드 세이어테스입니다. 갈가마귀 기사단의 단장직을 맡고 있으며, 이곳의 방문은 개인적인 호기심입니다.”
귀족이란 참으로 귀찮은 것이다. 그냥 아파 죽겠다면서 울고, 괜찮냐며 의사를 부르고, 이렇게 끝나면 될 것을 이런 상황에서도 서로의 위치와 이름과 방문 목적이나 묻고 있다니. 캐런은 짜증과 고통과 지겨움에 다 놓고 싶어졌다.
“하이어 양, 오늘 외출은 즐거우셨습니까?”
“저 칼 맞았거든요?”
“…죄송합니다.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말재간이 떨어지니 적당한 위로가 어렵군요.”
기사 레이몬드가 멍청해지는 것은 캐런 하이어 앞에서만. 그것은 당연하다. 캐런은 한숨을 쉬었다. 비슷한 대사는 재미없다. 그가 위로하려고, 달래려는 것은 알지만 마음 같아서는 그저 눈앞의 금발을 쥐어뜯고 싶어지는 것이다.
“괜히 외출했다며 한 10년은 모험을 감행하지 않고 곱게 안에 박혀 계시겠군요.”
끔찍한 소리에 캐런은 반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와서 좋았어요.”
“그래요. 무엇이 가장 즐거우셨습니까?”
“코끼리를 봤어요.”
“그래요.”
“…신기하고, 좋았어요.”
“그건 다행이군요.”
한 번도 본 적 없던 동물을 눈앞에서 봤다. 그런 경험이면 몇 번이고 죽을 수 있다. 재밌는 건 너무나 적은 인생이니.
“당신의 권속들이 많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돌아가시죠.”
“…네, 그래요. 웃음을 나누는 건 미덕이지만 걱정을 나누는 건 도리에 어긋나니까요.”
레이몬드는 한 손은 옆구리를 누르면서 다른 팔로 다리를 들어 올렸다. 거친 천으로 된 드레스 안에서 풍성하고 비싼 레이스들이 아름다운 모양으로 떨어진다. 레이몬드는 그렇게 고안된 아름다움 속에 휘감긴 캐런을 들어 올려 마차로 향한다. 마치 사랑하는 신부를 안고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는 신랑처럼 그는 캐런은 인도한다.
“…하.”
비록 그는 100년간 단 한 번도 자신과 함께 미래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모양은 그럴싸했다. 그를 믿는 건 의미가 없는데, 자꾸만 기대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눈을 마주친다.
달빛 아래 순금을 녹인 듯한 금발은 빛이 났고 그 두 눈동자도 기묘한 안광이 서렸다. 걸음걸이는 우아하고 캐런을 안고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손에 든 것이 물병 하나인 것처럼 가볍다. 캐런은 묘한 표정의 그를 보다가 기절한 듯이 눈을 감았다.
그는 그녀에게 이 순간에 반한다.
그리고 캐런은 자신이 아끼는 레이스가 찢어지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하이고, 결국 또 그 징징거리는 약혼녀님과 지내야 하는 겁니까?”
“그렇게 됐군.”
무슨 표정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레이몬드가 답을 했다. 애초에 그다지 오고 싶어 하지도 않았고, 베르딕 에반스의 행동을 그리 탐탁히 여기지도 않았던 그가 왜 이곳에 왔는지 제논은 알 수가 없었다.
집안의 몰락과 관계없이 타고나길 귀족이라, 레이몬드는 자신의 약한 면을 절대 아랫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면이 한동안은 좀 서운했다.
이내 그는 이 젊은 기사가 그런 약점이나마 있는 걸까 의구심이 들었고, 질투와 같은 감정을 품기보다는 어쩌다 신이 내린 기적의 산물로 여기기로 했다. 그런 자신의 사견을 빼놓으면 레이몬드는 꽤나 괜찮은, 아니 상당히 훌륭한 상사였다.
레이몬드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리고 베푸는 것에도 아낌이 없었으며 공정했다. 귀족들이 원하는 기사도를 실천하지는 않지만 평민들이 원하는 이상을 보여 주는 기사였다.
그는 저격수였다.
제논은 레이몬드의 종자지만 자신만큼 기사와 먼 종자도 드물 것이라 생각했다. 제논이 가까운 거리에 있는 물을 가져다주는 것도 레이몬드는 꺼려했다. 레이몬드는 언제나 퇴각할 때 지친 기사에게 물과 영양을 직접 보급했으며 혼자서 임무를 수행했다.
저격수란 본디 귀족이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숨어서 남들을 노려서 죽이는 일은 적뿐 아니라 본국의 귀족들에게도 불명예스러운 일이었다.
더러운 일. 귀족들의 전쟁이란 서로의 전략을 겨루고 말 한 마디 한 마디로 수많은 장정들과 재산을 도륙 내는 일이다. 레이몬드의 전쟁은 그저 홀로 엎드려 있는 일이다. 그가 전투 둘째 날에 적진을 향해 기어가 기스띤 백작의 첫째 아들의 목을 뚫었을 때 다들 비난했다.
그자는 유명 인사였다. 유명한 작곡가였으며 물론 아내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숙녀를 위해 출전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분노한 백작의 머리를 뚫었을 때는 다들 침묵했다. 한 달 뒤, 홀로 적군 300명을 눈감게 했을 때는 열광했다.
여섯 명의 남작, 백작급의 기사들을 죽였다. 악마와 계약한 것이 분명하다며 비아냥댐이 섞인 별명은, 전설과 선망이 섞인 부름이 되었다.
마탄의 사수.
그가 첫 출전한 전쟁에서 얻은 별명이다.
그는 눈이 좋았다. 성격과 인내력과 체력 모든 것이 뛰어났지만 시력은 사냥꾼 출신인 제논이 보기에도 경이로운 것이었다. 레이몬드의 시력은 흡사 하늘의 매와 같았다.
심지어 그는 빛이 반사되어 들킬 위험이 있다면서 스코프도 쓰지 않았다. 서커스단에서 문제가 생겼다며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자 그는 바로 뛰어 들어가 사태를 수습했다. 귀족의 귀감이로군, 내심 그를 모시는 자로서 제논은 으쓱한 마음이 들었다.
“흑… 아가씨, 눈을 뜨세요.”
그래서 제논은 하이어가의 철없는 소녀가 꽤나 끔찍한 꼴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그가 분명 보았을 텐데 이런 꼴이라니.
“어엉… 제가 잘못했어요”
“…도나, 조용히 하자.”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 쓰러져 있는 소녀는 엄청난 미색이었다. 레이몬드는 제논이 본 적 없는 얼굴로 그녀의 옆구리를 지혈하고 있었다. 한쪽 옆에서는 남자 하인이 초조하게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었으며, 시녀는 눈물 젖은 얼굴로 하이어 영애의 손을 잡고 말을 걸었다.
귀한 집 딸이 저 모양이 됐으니 자기들에게 떨어질 불똥을 걱정하는 거겠지. 제논은 혀를 차며 철없는 소녀 때문에 경을 치게 될 그들을 동정했다. 꽤나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사이가 친밀해 보이기도 했으나, 상하 관계란 복잡한 것이기에 제논은 그들의 태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관심이 있고 신경 써야 할 것은 그들처럼 자신의 기사인 레이몬드다.
“…저, 기사님. 이셀라 님께는 안 간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그랬지.”
“…….”
그럼 왜 오셨습니까, 라고 더 물을 수가 없었다. 정말 그냥 와 보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아니면 약혼녀의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온 것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백색산맥 너머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나라에 관심이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혹은 든든한 자금줄이었던 베르딕의 요구를 맞춰 주기 위해서라거나, 그것도 아니면 미모로 유명했던 에니드의 딸의 얼굴을 구경하러 온 것일 수도 있다. 생각보다 어려 보여 놀랐지만 과연 에니드의 딸이었다. 그보다 더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했다. 만일 그렇다면 생각보다 그는 인간적인 상사의 모습에 오히려 호감을 가질 것이다. 아름다운 이성에 대한 호감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병자가 있는 마차 안은 불편했다. 제논은 레이몬드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지만 말을 꺼낼 수 없다. 다른 이들이 많은 것도 있지만, 단둘이라고 하더라도 묻지 못할 것이다.
“흐으….”
“아가씨, 괜찮아요?”
“아니.”
“으… 엉….”
“…코르셋 때문에 깊게는 못 들어갔으니 괜찮을 겁니다.”
“…….”
“우선 푸시는 게 어떻습니까?”
“…어머, 엉큼해라.”
“아, 아가씨!”
“농담이에요. 하지만 거의 다 와 가니, 들어가서 마저 치… 흐윽.”
하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괘, 괜찮을 거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목숨에 지장이 있다는 건 아니다. 다만 종이에 베여도 쓰라린 법이지.”
보웬을 진정시키려는 레이몬드를 보며 캐런은 울컥했다.
“와, 역시 기사. 당신에게 이 정도 찔린 건 아무것도 아니라… 하, 하아.”
“…비꼬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위독함과는 별개로 통증은 강할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저도 딱히 비꼬는 건 아니었… 네요, 아파서 정신이 없음을 용서합….”
“그냥 가만히 계십시오.”
제논은 그 가벼운 대화의 흐름에 차마 끼질 못했다. 종자의 의무는 의심하지 않는 것. 하지만 사냥꾼으로서의 판단과 이해는 어쩔 수가 없다. 혹여나 해서 약혼녀의 이야기를 꺼내도 그의 주인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소녀의 다친 부분을 지혈하고, 적당히 위로하고, 소녀는 불한당에게 칼을 맞은 와중에도 하인들을 위로하며 기사에게 감사와 농담을 건넨다. 둘의 미색과 유연한 태도는 연극을 보는 것처럼 보여 위급한 상황임에도 미묘하게 평화스러웠다.
흡사 어린 시절에 듣던 귀부인과 기사 같은 모습이다. 옆의 하녀마저 동경하는 눈으로 보니, 잘 짜인 애정극 같았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분명 소녀가 몰래 뛰어나갔을 때부터 보고 있었을 것이다. 소녀를 찾아야 한다는 말이 나오자, 곧 높은 건물로 올라가 방향을 살피고 위치를 확인했다. 제논이 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서 하이어 영애가 남자 둘에게 둘러싸였다.
하이고, 저거 경치겠군. 욕을 하며 달려갈 준비를 하던 제논은 주인의 태도를 보고 자신이 서둘러 내려갈 필요가 없음을 눈치챘다. 살려 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총을 꺼내고, 호흡을 죽였다.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레이몬드 경도 어쩔 수 없이 뒷골목 불한당들의 목숨보다 귀한 집 여식의 정절이 중한 것이군. 자신이 말리면 끝날 일을 죽음으로 해결하는 그를 보자 입맛이 썼다. 저런 면은 귀족답다. 많은 이들은 그가 참된 기사라 생각하겠지. 감히 저런 짓을 한 자는 죽어 마땅하다며.
제논이 약간 가라앉는 기분으로 먼저 뛰어간 주인의 뒤를 따라가자 역시나 사태는 이미 해결된 뒤였다. 레이몬드는 총을 쏘고는 제논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다가가서 그녀를 들고 왔다.
“… 후, 뭐. 내 처지는 이렇지. 니들도 원한 가지지는 말아라… 응?”
어쩔 수 없다며 투덜거리면서 시체를 수습하려던 그는 그 레이몬드가 데려오는 소녀의 상태를 보자 기겁했다.
그의 주인은 그 소녀가 일부러 다치게 내버려 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