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불편한 저녁식사
100년간 반복되는 잔소리는 지루하기 짝이 없다.
가정부인 헬렌은 아침부터 도나 옆에 서서 엄한 목소리로 화를 냈다. 이 시간이면 하녀 전부를 모아 놓고 오늘 해야 할 일을 통보하는 시간이건만.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도나의 얼굴이 허옇게 질리고 눈 밑이 까맣고 부은 것을 보면 전날 밤의 상황은 뻔했다.
“다시는 마음대로 그렇게 사라지시면 안 됩니다.”
“응.”
“도나는 아가씨를 모시기에는 모자란 것이 확실해졌으니 누굴 데려올지 고민해 봐야겠군요.”
“허어….”
낸시일 때는 캐런만 혼내더니. 역시 연륜의 차이인가 싶어 캐런은 옆구리를 문질렀다. 아침을 깨우는 것이 어린 소녀가 아닌 나이 지긋한 중년의 목소리라니 유쾌하지 않네.
캐런은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보고 이번에는 깔끔히 처리된 처치에 다행스럽게 여겼다. 앞으로도 다치는 사건 전까지는 듈란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네글리제를 제쳐 환부를 확인하자 역시 레이몬드의 말대로 깊게 찔리지 않았지만 두 땀 정도 꿰맨 자국은 남아 있었다. 벌써부터 이렇게 이마는 깨지고 옆구리도 꿰매지니 1년이 지나면 어느 정도일지 궁금하다.
“코르셋은 역시 고래 뼈 코르셋이야. 구입해 두길 잘했어.”
“아가씨.”
“너무 뭐라 하지 마. 별로 안 다쳤어”
“그 서커스에서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레이몬드 경이 아니었으면 죽었을 수도 있어요. 아니, 무조건 죽었을 거예요.”
변명을 하기가 궁색해졌다. 여성 사용인들 중 가장 높은 위치의 가정부 헬렌은 아직 어린 캐런 대신 가정일의 대소사를 책임지고 있었다. 남성인 보웬은 그녀의 소관이 아니기에 어떤지어떤 처분을 받을지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으나, 헬렌은 캐런의 철없는 행동에 도나가 한 달간 봉급이 반으로 줄고, 다시 빨래 하녀로 내려갈 것이라 전했다.
“그건 싫은걸.”
무엇보다 도나처럼 입이 가벼우며 활달하고, 사고를 잘 치는 하녀는 드물었다. 그 점이 캐런에게는 더없이 매력적이기에 도나에 대해서는 양보를 할 마음은 없었다.
“내 잘못이니까, 도나는 다시 일을 하게 해.”
“아가씨.”
헬렌이 단호하게 말한다. 도나는 눈을 빛냈다.
“지금 또래가 많지 않으니 정을 주시는 건 알겠지만, 이런 식이시면 좋지 않아요.”
안주인처럼 구는군. 캐런은 아침의 차를 잔소리와 함께 마시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캐런은 이제 인물의 선악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으나, 헬렌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헬렌은 여주인이 힘이 없는 집안의 여느 가정부들이 그렇듯이 자신이 안주인인 것처럼 행동했고, 캐런을 어린아이처럼 통제하려고 했다.
자신은 그것을 도덕심이나 책임감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 캐런에게는 유쾌하지 않았다. 선한 자들은 사랑스러우며 악한 자들은 흥미로우나, 자신이 옳다고 여기며 어정쩡하게 짜증 나게 구는 인간은 영 지루하며 불쾌감만 유발한다. 이래서 헬렌과 만나는 날은 가능한 피하고 싶었건만.
“헬렌.”
주제넘어, 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으나 참는다. 헬렌 같은 가정부는 그만한 권한을 가진다. 17세의 어린 아가씨가 멋대로 말하는 걸 듣는 사용인들이 얼마나 된단 말인가. 캐런은 까마득한 예전을 기억한다.
안주인처럼 행동하는 그녀가 불쾌해 금식을 해 가면서 내쫓은 때가 있었다. 그리고 이내 그것을 후회했다. 관리해야 할 사용인과 일은 너무나 많았고 영주의 딸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돌아가는 건 동화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집안을 관리하려면 새벽마다 모든 사용인들을 모집해 할 일을 검토하고 밤늦게까지 확인해야 한다. 경리와 인사, 총무의 일을 전부 해내야 했다. 헬렌 대신 내세웠던 낸시는 수에 약하고 까막눈을 간신히 면한 정도라 그런 일들을 처리할 수 없었다.
“안 돼요.”
“부탁해.”
유용한 자들은 달래고 어르고 졸라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갑자기 사람이 막 변하는 건 불편해… 그럼 헬렌이 나랑 같이 놀아 줄 거야?”
“전 일이 많아요.”
“그렇잖아. 헬렌이 내 시중들어 주는 것도 아니면서.”
외롭단 말이야. 친밀감을 표하며 추켜올려 준다. 캐런이 속상한 시늉을 하자 헬렌은 마음이 약해진다. 역시 자신이 친모 같은 줄 아는 여자다.
“다시는 그러시면 안 돼요.”
“응응, 안 그럴게.”
“안 그래도 낸시 때문에 요즘 일이 얼마나 꼬였는지….”
“낸시는 언제 와?”
“…모르셨나요? 낸시는 도무지 일을 견딜 수 없다면서 그만두었어요. 역시 태생이 떠돌이라 어쩔 수 없네요.”
그런 식으로 처리되는 건가. 낸시는 휴가를 갔다가 일을 하기 힘들다고 그만둔다라. 캐런은 찻잔을 내렸다. 헬렌이 빗을 가지고 온다. 빗질은 가정부인 헬렌이 할 만한 일은 아니라, 캐런은 헬렌에게 물었다.
“헬렌이 하려고?”
“저도 젊을 때는 아가씨들의 옷을 맡는 시녀였답니다. 오늘 같은 날에는 도무지 도나에게 맡길 수 없군요. 낸시가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오늘이 무슨 날인데?”
“레이몬드 경이 참석하는 첫날이죠. 얌전히 구셔야 합니다. 영주님과 에반스 씨도 참석할 테니까요.”
“아.”
“예뻐 보여야죠?”
그렇다는 건 하루 종일 향유에 잠기고 머리는 내내 곱슬거려야 하며, 화장에만 한 시간, 머리 손질에 세 시간이 걸린다는 뜻이었다. 평상시에는 모두 낸시가 하거나 낸시가 없을 시간에는 세라가 하고는 했다. 다른 미용사의 손을 타는 것 또한 즐거움이다. 캐런은 ‘이런 거추장스러운 건 하기 싫어!’ 하면서 투정 부리기엔 너무 나이 들었다.
“그래도 역시 과하단 말이지.”
“뭐가요?”
“장미유라거나, 이 옷 같은 거?”
“그래 봤자 에반스 아가씨에 비하면 그리 사치품이라 할 수 없어요. 격은 맞추어야 영주님이 부끄럽지 않으시겠죠?”
무리하게 고급품을 걸치는 것과 고급품을 걸친 사람들 사이에서 저렴한 옷을 걸치는 것, 어느 것이 더 부끄러운 일일까. 흔히들 후자가 더 부끄러운 일이라 하겠지만 그건 체면에 가치를 두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일이다.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으며, 그 기준이 남들보다 높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예의와 검소와 사치의 경계가 혼란스럽다. 그리고 캐런은 그 사이를 판단하는 것보다 다른 곳에 중점을 두었다. 중요한 것은 소설의 끝이고, 남주인공의 취향이다. 레이몬드의 기준이 중요하지 캐런의 가치판단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시키셨어?”
“아니요.”
헬렌은 눈을 찡긋거리며 마사지사를 들인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옷을 벗게 하더니 나무 침대에 눕혀 장미수로 적신 천으로 온몸을 닦아 낸다.
“으아.”
상처가 고통스러워 캐런은 신음 소리를 냈다. 결국 헬렌은 그녀의 몸을 닦아 내는 걸 멈추고 말했다.
“아무래도 목욕은 무리겠군요.”
“그렇지?”
“그럼 향유를 바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겠네요.”
상처가 벌어질 것 같다.
머리를 넘겨 도나가 두피와 머리카락을 물로 씻어 내고 다시 기름을 발라 틀어 올린다.
“빨랫감 다루는 것은 잘한다더니, 머리도 잘 감기는구나.”
“헤헤”
“내가 레이몬드 경에게 그렇게까지 잘 보일 필요가 있을까?”
“그야 있죠! 첫째, 이셀라… 에반스 양보다 아름다워 보이면 뿌듯하잖아요. 둘째는… 뭐 그야….”
“왜?”
“그….”
벌게진다. 헬렌과 마사지사가 쿡쿡 웃는 소리가 들린다. 대답하지 않지만 그 침묵 사이의 웃음소리에서 캐런은 답을 알았다. 듈란은 환영받지 못하는 영주다.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헬렌은 대놓고 레이몬드에게 잘 보이기를 원한다.
그건 듈란을 캐런의 남편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캐런에겐 좀 부족한, 일종의 예비품으로서 본다는 것이었다. 캐런은 그녀의 오만함이 불쾌하지 않았다. 듈란을 옹호하거나 싫어하거나 둘 중 어느 감정도 들지 않기에. 다만 판은 깨고 싶은 충동이 든다.
캐런은 듈란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걔 그래도 밤일은 그럭저럭 괜찮더라. 크기나 지속력은 뭐… 중상이지만 수도복이란 게 꽤 자극이 되던걸?’이란 말을 내뱉으면 어떨까 궁금했다. 참아야 한다. 상황을 뒤집어 보고 싶지만 참아야 한다. 마치 위험할 것을 알면서도 말벌을 건드리고 싶은 것처럼 캐런은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듈란은….”
“위, 위에 좀 걸치는 게 어때.”
“꺄악! 듈란 님?”
타다닥.
약간의 소란이 일어났다. 신사는 못 되는군. 갑자기 방문한 듈란에 당황한 도나는 거의 넘어질 뻔했고 헬렌은 무표정으로 당황을 감추었다. 마사지사는 재빨리 천을 건네고 뒤로 빠졌다. 그리고 캐런은 약간 안도했다. 호기심에 져 입을 열기 전에 불청객이 들어와 잡념은 끊겼다. 그가 들어오지 않았으면 말을 했을까? 그랬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뭐니?”
“사, 상처….”
“이미 처치 끝났잖아.”
“무, 물이나 기름이 들어가면 안 된다고.”
“…그거 말하려고 왔어?”
“…….”
아니지, 여기서는 「서로 감정이 더 대립되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듈란이 자신에게 더욱 집착하기를 바라고 있으니 적당히 구슬리고, 꼬여 내야 한다.
“탓하는 게 아니라 그냥 진짜 물어보는 거야.”
“염증 정도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나마 일과 관련된 건 덜 더듬거리는군. 네글리제를 젖히자 솜으로 소독을 한다. 알코올 향이 장미 향과 섞이자 캐런은 술을 강렬히 마시고 싶어졌다.
“밤에 위스키 마셔도 될까?”
“미쳤군.”
분명 오늘은 가장 좋은 술이 나올 텐데. 캐런은 우울해졌다. 만들어진 지 60년이 된 그 위스키는 하이어 영지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고작 70여 병이 있을 뿐이다. 이번에는 그 맛을 즐길 수 없는 건가. 빌어먹을 한스, 머리를 잘라 술에 담가 줄 테다.
“로제 와인 한 잔은 괜찮겠지.?”
“물에 탄 맥주도 안 돼.”
“이런.”
쓸데없이 세심하게 굴려고 하는구나. 혀를 차며 몰래 밤중에 꺼내야겠다, 다짐했다.
“그럼 이제 나가 줄래?”
“뭐, 뭐야.”
“응? 난 마저 마사지를 받아야지.”
“이… 이건 꽤나 비싼 향유… 인데…. 넌 내면은 전혀… 가꾸지 않고 다, 다른 것만 신경 쓰지.”
“중요한 손님들이 많잖아. 예의라고.”
“…이, 이제까지… 내가 있을 때는 이런 걸 하, 하지 않았으면서. 머릿속에….”
듈란은 캐런이 외모를 가꾸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하긴 그 목적이 그가 생각하는 것과 딱히 틀리지는 않았지만, 캐런은 듈란이 저렇게 구는 것이 좀 어이가 없었다. 이번 생에서는 유난히 자신에게 귀찮게 들러붙는다. 잠자리를 같이 한 것이 실수였나.
“레이몬드 세이어테스 경은 남작 가문이고, 베르딕 에반스 씨와 관계도 깊은 사람이야. 무엇보다 날 구해 준 은인이고. 잘 보여야 하는 건 당연하지 않겠니?”
“…이제까지… 그, 그런 적 없으면서. 넌… 이미….”
입술을 씰룩이며 비난한다.
“음탕….”
“야, 너… 아.”
이러다가 설마 발목 잡히는 건가? 캐런은 듈란을 노려보았다.
왠지 억울하다. 왜 남자는 동정을 잃어도 티가 안 나는 것일까. 남자들도 매번 아래의 그곳에 상처가 나야 공평할 텐데. 캐런은 듈란을 씹어 먹을 것처럼 노려보았다. 헬렌이 재빨리 일어나 듈란을 재촉했다.
“듈란 님, 시간이 없기에 캐런 아가씨는 마저 손질을 해야 합니다.”
“지… 금이 오, 전이다만?”
“여성은 남성과 다르지요.”
“하, 쓰, 쓸데없는 곳에 시간을 버리는군, 그… 런 건 허영에 불과해.”
그 소리에 방 안의 여자들이 하나같이 표정이 험악해졌다. 네가 뭘 안다고. 감히.
“그런 허영, 너도 해 보겠니?”
“쓸, 데없는 짓을… 난 저녁 축도 기도문을….”
“입 좀.”
입술을 손가락으로 집어 다물리고 마사지사를 불렀다. 레이몬드는 오늘 엄청나게 잘생길 것임이 분명한데, 다이아 옆의 돌덩이이라도 흙은 떨어내야 할 것 아닌가. 헬렌과 도나와 마사지사는 긴장을 하고 듈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꽤 시간이 흐르고 세 명의 여자는 지쳐서 나가떨어졌다.
과연 듈란, 예상을 깨뜨리지 않는군.
“보통은 확 미남이 되거나… 음… 뭐 그런 거 있잖아?”
헬렌과 도나와 마사지사는 좌절했고, 캐런은 시큰둥했다. 그저 흙을 떨어낸 것에 족하기에. 듈란에게 거는 기대는 그 정도다.
“사, 사람의 가치는 외모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야.”
그럼 넌 외모 말고 다른 가치가 뛰어난가? 성품, 무력, 지식 무엇도 레이몬드에게는 미치지 못하지. 하지만 캐런은 말하는 대신에 눈꼬리를 휘며 이젠 내 차례니 비켜 줘, 라고 말하며 자신의 몸을 여자들에게 맡겼다.
그리고 듈란은 예쁜 소녀가 기가 막히는 미녀로 바뀌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셀라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이것도 별로야! 다른 걸 가져와! 좀 더 피부가 하얗게 보일 옷이 필요해!”
“그럼 이 아이보리색은 어떠세요?”
“칙칙하잖아! 지금 장난해?”
“…네.”
베르딕은 딸의 패악을 옆방에서 듣다못해 문을 두들겼다. 이셀라는 악몽을 꾼다면서 베르딕의 옆방을 고집했으나, 아버지 입장에서도 여간 고문이 아니었다.
“이셀라, 적당히 하거라.”
“아버지마저 그러시는 건가요?”
“내가 뭘….”
“흑….”
베르딕의 한숨 섞인 말에 이셀라가 눈물을 터뜨렸다. 그걸 본 베르딕은 피로가 한 번에 몰려오는 걸 느꼈다.
“…하아.”
모처럼 부른 에반스가의 시녀도 영 도움이 되질 않았다. 본디 귀하게 키운 아이 특유의 이기심은 있었으나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이곳에 오고 나서 영 감정 조절이 되질 않는다.
베르딕은 딸이 목매다는 기사를 생각하자 골치가 아파졌다. 그가 머리 굴리기 전에 빨리 밀어붙여야 한다. 쓸데없이 능력이 있어서 다루기 힘들어진 것만으로도 골치 아픈데 딸마저 내내 우울증 환자처럼 굴고 있다.
“이셀라.”
“네.”
“대체 뭐가 문제냐.”
“레이몬드 님이 하이어 영애를 구해 왔어요.”
“그래, 기사의 본을 보였지.”
“하이어… 는…. 엉… 저보다 예쁘잖아요.”
“그게 뭐가 문제지?”
“레이몬드 님이 그 여자애에게 반하면 어떡해요.”
“그렇게 치자면 레이몬드 경은 여자들로 하렘을 차려도 될 거다. 아, 남자들도.”
“아버지!”
“네가 약혼을 한 게 언젠지 기억하느냐?”
“… 다섯 살 때요.”
“그 나이의 애가 진지한 감정을 논할 수 있으리라 보느냐?”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동화는 집어치우라고 하는 거다. 나도 네 엄마와 결혼하기 전까지 얼굴 한 번 봤다. 네가 말한 캐서린 하이어도 듈란 로이드와 그 나이쯤 약혼했을 터다. 너와 레이몬드 경도 그렇고 나도, 그리고 하이어 영주 또한 그랬다.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는 건 저잣거리의 놈팡이들이나 노래하는 거야. 사랑은 결혼한 후에 쌓이는 거다.”
“전 레이몬드 님을 본 그 순간 사랑했어요!”
“넌 지난번 생일에 받은 블루 다이아와도 본 그 순간 사랑에 빠졌었지.”
“아버지.”
“적당히 해라. 여기 와서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구는구나. 귀족인 그가 갑자기 파혼을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남의 약혼녀와 결혼한다니,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들구나.”
하지만 아버지. 아버지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과 합리에 따라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하시죠. 하지만 그런가요? 정말 그런가요? 레이몬드 님은 이익에 따라 저와 결혼할 것이고 의무적으로 아이를 가지고, 전 귀족의 성을 가진 외손자를 아버지에게 선물하기 위해 그분과 결혼해야 하는 걸까요?
“푸른 드레스가 제일 낫겠구나.”
“아가씨, 팔을 들어 주세요.”
이셀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자신은 의무가 있다. 에반스의 이름을 달고 태어나 먹여지고 재워지고 입혀진 보답을 해야 한다. 이셀라는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던 푸른색의 옷을 입었다.
“아직도 악몽을 꾸느냐?”
“…가끔요.”
“대체 뭔 악몽이냐?”
이셀라는 창문에서 약간 빛이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시체가 있는 악몽이어요.”
“왜, 네 엄마나 내가 죽기라도 했느냐? 사람은 죽기 마련인….”
“아니어요.”
“말 끊지 마라.”
말을, 해야 해. 아버지가 들으실 때.
“여기, 하이어가의… 하녀, 검은 피부의 하녀 시체를 보는 악몽이에요.”
“그런 하녀도 있었나?”
“…우리가 온 지 두 번째 날부터 휴가를 받았어요. 그녀의 시체가 계속 꿈에 나와요.”
“그럼 뭘 고민 하는 것이냐? 그 하녀를 불러 살아 있는걸 보면 그 웃기지도 않는 악몽은 끝날 것 아니냐. 설마 네가 예언자라도 된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아니어요, 그게 아니라….”
침을 삼켰다.
“그 뒤로 계속 휴가 중이어요.”
옷매무새를 보며 인상을 쓰던 베르딕은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의아함을 표현했다.
“뭐? 우리가 온 지 꽤….”
“아버지. 전 그 악몽 이후로 그녀를 본 적이 없어요.”
왜 검은 하녀는 그 뒤로 사라졌을까. 자신이 시체를 본 것이 환영이라면 그 다음 날 나타났어야 하지 않은가. 이셀라는 자꾸만 몸이 떨렸다. 그날 밤, 그 방에서 보았던 환영이 떠올랐다. 잘린 하녀의 얼굴에는 상처가 있었다. 지나치게 선명한 환영이었다.
그것이 너무나 무서웠다.
정찬은 시작부터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레이몬드 님, 미식도 분명 쾌락의 일종인데 가장 훌륭한 포도주들은 수도원에서 나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와요?”
핑크빛 푸아그라와 어울리는 아름다운 로제 와인의 색을 보며 이셀라가 말했다.
“그런 것은 저보다 듈란 신관님이 잘 아시겠군요.”
레이몬드는 부드럽게 넘겼다.
“…글쎄요.”
와인을 들고 있던 듈란은 간신히 삼키고서는 대답을 했다.
듈란은 거의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몇 마디가 오가기도 전에 주눅이 들고, 어깨는 움츠러들었다. 듈란이 계속 말을 더듬자 레이몬드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오늘따라 듈란의 말더듬증이 심해 보는 사람이 불편해질 정도라, 레이몬드는 더 이상 듈란에게 대화를 넘기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을 깨고 영주가 캐런에게 말을 건넸다.
“캐런, 다친 곳은 괜찮니?”
“네. 감사해요, 아버지. 별 상처 아니었어요.”
“고맙소, 레이몬드 경.”
레이몬드가 눈을 휘며 답했다.
“제때 저지하지 못해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영주님.”
“정말 감사드려요, 기사님.”
캐런도 제비꽃을 닮은 눈으로 웃으며 레이몬드를 보았다. 레이몬드는 마주 보며 웃었고, 이셀라는 이를 깨물고 다시 말을 꺼냈다.
“그래서 듈란 신관님은 어떻게 생각하시와요?”
“…무, 엇을 말입니까?”
오오, 저 당당함. 저 뻔뻔함. 캐런은 이셀라의 꿋꿋함에 다시 찬탄을 하며 말없이 식전주 대신 물을 주문했다.
그냥 닥치고 다음 요리나 먹으면 안 되나? 왜 오늘의 식사는 세 시간이나 걸려서. 이셀라의 하이힐 질, 그것도 식탁 밑의 하이힐 질이 아니라 구두를 손에 쥐고 명중시키는 종류의 것을 견뎌야 하는 건가.
게다가 베르딕의 야심을 맛보며 시무룩해져야 하고 레이몬드의 호의를 눈치채야 하는가. 심지어 그 시간 동안 술도 없이. 캐런은 거위의 간을 잘근잘근 씹으며 대화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얹은 소스의 버섯 향이 꽤 괜찮다는 것이다.
“미식과 죄악의 관계에 관한 신관님의 견해가 궁금했사와요.”
듈란 대신 영주가 나이프를 내리고 대화를 이었다.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 죄지, 다만 미식 자체가 죄라는 것은 인정하기 힘들군. 어린 에반스 양, 그렇다면 우리는 매일 죄를 짓는 것인가?”
자신이 목표로 한 듈란이 아닌 나이가 지긋한 영주의 말에 이셀라는 잠시 멈칫했지만 다시 말을 이었다.
“지나친 미식은 죄가 되지 않나요? 전 그저 궁금할 따름이에요. 미식은 분명 우리에게 큰 기쁨을 주지만, 절제도 분명 필요하지 않겠어요?”
“그렇다면 ‘지나치다’의 기준을 정하는 것이 문제겠군. 이 식사가 지나치다는 것 같이 들리는데, 어떤 근거로 그런 말을 하지?”
“가장 확실한 것은, 지배자는 항상 피지배층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 아니겠사와요?”
나이 꽤나 먹은 영주는 젊은 여성이 보이는 명백한 적의에 눈썹을 살짝 움직였지만, 그뿐이었다. 아버지 앞에서 딸을 혼내기는 힘들었다. 심지어 그 아비는 딸의 행태에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흠, 그렇다면 이셀라 양이 보기에는 오늘의 식사가 우리 영주민들을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단 말인가?”
꽤나 신경 쓴 식사였다. 하나밖에 없는 딸의 생일 파티 때보다 훨씬 호화로운.
베르딕과의 계약을 기념한다고 쳐도 확실히 호화로운 식사. 고작해야 애피타이저와 수프만이 나왔을 뿐이었는데도 명백히 알 수 있었다.
애피타이저만 하더라도 몇 가지나 되었다. 푸아그라뿐 아니라 부추와 봄 양파가 들어간 라비올리에는 민트와 마늘 소스가 곁들어져 있었고, 바다 소금에 절인 캐비아도 있었다. 가니시는 삶은 달걀을 으깨 파슬리와 양파에 버무린 것과 설탕과 소금을 약간 뿌린 단호박이 함께 있었으며, 하나같이 모양새와 식감이 훌륭했다.
에반스 가문이 레이몬드에게 대접하던 것을 생각하면 평이했으나, 하이어가에서 먹던 것을 생각하면 유례없이 호사스러운 식사다. 이셀라는 그것을 지적하고 있었다.
“네.”
“하.”
불쾌함을 감추지 못한 영주의 표정에도 이셀라는 꿋꿋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이번 사업을 통해 개선하고자 하는 상업 구역을 보니, 상태가 말이 아니었어요. 위생뿐 아니라 평균 영양 상태도 그렇고, 체계적인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사와요.”
“허어. 그것은 근거 있는 말인가?”
“물론이에요. 전 한동안 몸이 아파 외출을 하지 못했어도 서류를 통해 충분한 조사를 하였고, 그것으로 얻은 결론을 말하고 말씀드리는 거와요.”
하이어 영주는 약간 얼굴을 굳히고 당돌한 소녀의 부친에게로 말의 방향을 바꾸었다.
“베르딕, 자네 딸은 여간내기가 아니구먼.”
“하하, 영주님, 부디 곱게 봐주시길. 우리 막내딸은 얼굴만 예쁜 것이 아니라, 지식도 풍부하고 호기심이 많답니다.”
그러나 누가 모르겠는가.
저 무례함을. 캐런은 조용히 물 잔을 내밀어 채웠다. 이셀라는 평상시에 생각을 안 하는 척하기를 즐긴다. 가볍고 쾌활한 소녀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이셀라는 레이몬드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손바닥을 뒤집듯이 태도를 바꾸었다.
그저 순전한 소녀의 상으로는 더없이 아름다운 캐런이 있는 데다 심지어 꽤나 로맨틱한 사고까지 당했으니 오히려 비교될 것이고, 그렇다면 부인으로서의 미덕을 보여 주는 것이 나으리라 계산한 것이다.
군인인 레이몬드가 자리를 비울 때, 여주인으로서 자신이 얼마나 적합한가를 보여 주고 싶었겠지. 비록 무례해 보이더라도, 사랑받는 애인으로 부족하다면 최소한 부인으로서의 역량은 충분하다는 것을 알리려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것이 레이몬드에겐 적절하진 않을 텐데.
레이몬드가 캐런을 곁눈질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 이번에도.’
베르딕과 이셀라는 서로 재고 맞추어 결혼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고, 캐런 역시 어느 정도는 그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사는 걸 누가 비꼴 수 있을까. 공주가 마구간지기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요즘엔 동화에서도 쓰지 않는 이야기 아닌가.
에반스가는 좀 더 단순히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레이몬드는 귀족이고, 능력 있고, 부드럽게 말하지만 베르딕이 아니다. 그는 상인이 아니며 득실을 따지는 데에 크게 능하지도 않았다. 그는 아직 20대인 청년이며 저 고운 얼굴로는 상상하기 힘든 기간을 참혹하게 보낸 남자다.
심지어 캐런은 마구간지기의 딸이 아니라 준귀족이고, 이셀라의 갑절 이상 아름답다. 그리고 레이몬드는 남작의 자리가 예정되어 있으니 말을 뒤집으면 오히려 이셀라는 제공할 수 있는 것이 재물밖에 없다.
“하아.”
캐런은 살짝 한숨을 쉬고, 식기를 내려놓았다.
「캐런은 무안을 당한 아버지를 보자 속이 상했다.」
그녀는 이셀라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당신이 절제를 미덕으로 삼는 줄은 몰랐네요.”
「캐런이 약간 기분이 상한 얼굴로 이셀라의 치장을 보며 말했다. 이셀라는 웃으면서 캐런의 팔을 친다.
“어머 캐런,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난 수도승처럼, 실례, 무조건 참으라는 것이 아니에요. 적당한 소비와 문화의 선도는 필요한 법이니까요. 내 드레스와 장신구가 절대 지나친 소비라고는 할 수 없어요. 레이몬드 님은 어떻게 생각하시와요?”
“에반스 양. 저는 형님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지만 하나는 확실히 배웠습니다. 여인들의 소비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지요.”
이셀라는 까르르 소리 높여 웃었다.
“물론, 배우자라면 간섭해야겠지만요.”
웃음이 멈췄다.
“에반스 영애를 탓하는 건 아닙니다. 베르딕 에반스 씨는 가족에게 너그러운 신사니까요.”
“…네.”
“물론이죠. 레이몬드 경. 전 언제나 가족에게 관대합니다.”
베르딕이 두 팔을 과장되게 벌리면서 말했다. 넌지시 그가 자신의 가족이 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님을 강조하면서.
“그래도 전 기쁘네요.”
캐런이 끼어들었다.
“지금 에반스 양이 그렇게 말한다는 건, 우리 집의 식사가 에반스 양이 보기에도 훌륭하기 때문이겠죠. 즐기신다니 기뻐요.”
이셀라 에반스는 물 잔을 들었다. 눈가가 분노로 살짝 떨리고 있었다.」
투둑.
“이셀라?”
“보웬.”
“아, 죄송… 죄송해요, 이런.”
이셀라가 물 잔을 떨어뜨렸다. 다시 물 잔이 채워진다, 이셀라는 물 잔을 들고 캐런에게 말했다
“제 말은 무조건 참으라는 것은 아니에요. 아까도 말했지만 적당한 소비는 필요하니까요. 그저… 이 식사가, 매우 훌륭해서 차마 죄가 아닐까 걱정이 되는 것뿐이에요…. 저, 레이몬드 님은 어떻게 생각하시와요?”
갑자기 약해진 태도다. 레이몬드는 역시나 부드럽게 답했다.
“아주 즐겁게 즐기고 있습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전 어지간하면 모든 음식이 호화롭게 느껴지더군요. 이틀 정도 총알이 날아오지 않을까 바위 사이에서 떨고 나면 모든 일에 감사를 느낍니다.”
캐런은 자극이 콕콕 눈을 찌르는 감각을 느꼈다. 이셀라를 바라본다. 눈가가 떨리고 있었다.
이셀라는, 물 잔을 들어 물을 마셨다.
물 잔의 물은 마셔져야 한다.
약간 예민해진 공기를 바꾼 것은 메인 요리였다.
그 향기를 맡자 식탁에 앉은 사람들 모두가 고기를 해체할 식기를 들었다. 각자 앞에 놓인 접시 위의 뚜껑을 풋맨들이 열자, 그 뚜껑 크기에 비해서는 너무나 작은 새 하나가 요리되어 있었다.
두어 달 동안 무화과와 포도만을 먹인 새는 그 살결부터 향기롭다. 일반적인 멧새의 대여섯 배는 됨 직하게 살찌운 새였다. 털이 뽑히고 살을 잔뜩 찌운 새는 날기에는 너무나 둔탁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오터런(Ortolan)을 먹을 때는 머리에 두건을 쓰는 것이 전통이라던데, 음식의 종류가 미묘해졌군요? 어떤가요, 에반스 양.”
“네, 네?”
레이몬드가 처음으로 먼저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이셀라는 그 사실을 기뻐할 수 없다. 조금 전에 자신은 탐식에 대해서 연설을 늘어놓았다. 하필이면 그 다음 나온 음식이 탐식을 대표하는 요리라니.
“천을 쓰시겠습니까? 신에게 식욕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말이죠.”
웃으면서 말하지만 내용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딸을 위해 베르딕이 나섰다.
“하하, 레이몬드 경, 너무 짓궂게 굴지 말아 주게. 아직 어리지 않은가.”
“에반스 양은 이미 충분한 식견과 판단력을 지녔고 전 그걸 존중합니다.”
“음, 과연.”
베르딕은 끄응, 하다가 마저 말을 이었다.
“사실 우리 딸이 말이야, 요즘 신경 쓰이는 일이 많아서 말이지.”
“허어, 정말이지 사업가의 기질이 다분한 딸이구먼. 우리 캐런은 그런 것을 하기보다는 경전을 읽거나 다른 이야기를 탐하는데 말이야. 사실 저 나이 대의 소녀는 그거면 충분치 않은가?”
“뭐, 그런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만.”
갑자기 말하는 영주에게 주도권이 뺏긴 베르딕은 영주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면?”
“그, 제 아이에게 한 하녀가 실수를 저질렀다는군요.”
“낸시 말인가?”
베르딕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님도 아시는군요?”
“도통 시끄러웠어야지.”
영주의 타박에 베르딕이 딸을 슬쩍 노려봤다. 하지만 이셀라는 영주의 입을 쳐다보느라 부친의 눈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 전에 말이야. 자신이 아직 멀었다면서 사표를 썼지 뭔가.”
“…그렇습니까? 전 휴가를 즐기는 중인 줄 알았는데요.”
“휴가를 끝내고 나서 말일세.”
그리고 영주는 어깨를 으쓱이곤 작은 새를 포크로 찔렀다.
“며칠 전에 직접 와서 도무지 못하겠다고 하고는 가 버렸네.”
으드드득.
새가 씹히면서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누구를 보셨나요. 누구와 대화하셨나요. 당신이 보고 대화하고 보낸 그녀는, 나의 시녀는 죽었는데. 내가 그녀를 이 손으로 죽였는데.
의문은 넘친다. 그러나 캐런은 입 안을 맴도는 의문을 뱉지 않았다. 의혹을 보이지도 않았다. 경험은 평정을 만든다. 캐런은 그저 아버지를 보며 말을 이었다.
“낸시가 그렇게… 좀 서운하네요.”
영주는 음식을 삼키고 나서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어쩌겠어. 원래 떠돌이들이 그렇지.”
맛이 썩 괜찮은지 약간의 미소를 띠우며 베르딕을 보았다.
“어떻소, 에반스 씨. 괜찮은 답변이 되었소?”
“물론입니다 영주님. 그런 것보다는 지금은 요리를 어서 맛보고 싶군요.”
“집주인으로서 자신 있게 권할 수 있소.”
식사는 이어진다. 집시 여자 하나의 행방은 요리보다 값싸다.
베르딕이 이어서 고기를 입에 넣었다. 센스 좋은 요리사가 목 부분에 칼집을 내어, 깔끔하게 고기를 입에 넣을 수 있었다. 베르딕은 이 멧새 요리를 매우 좋아했다. 맛에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는다.
혀와 처음 만나는 으깬 감자에는 버터를 섞어 고기 위에 살짝 올려놓았는데 입에 넣자 사르르 녹는 듯했다. 포슬거리는 입자를 헤치면 나오는 기름이 목구멍을 적시고, 고기를 씹자 과일의 달콤한 향이 물씬 풍겼다.
그 살 사이사이에 듬뿍 스며든 포도주의 농후한 맛은 혀를 황홀히 간지럽혔다. 고온에 약해진 작은 뼈가 이 사이에서 바스러지는 감각은 씹는 즐거움을 더해 준다. 그리고 그 안의 작은 폐와 심장이 이빨 사이에서 터지자 감미로운 육즙이 입 안 가득히 퍼졌다.
‘오오, 이 맛은.’
본가에서는 하루에 한 마리라는 전통을 비웃으며 두세 마리씩 먹고는 했다. 세심함이 필요한 이 배덕적인 요리는 에반스가 전부가 매우 좋아했다. 멧새 구이는 누구나 호사스러운 음식으로 여겨, 어디서나 고급 요리로서 오르곤 했다. 그래서 베르딕은 이 요리의 갖가지 양념과 굽기부터 어울리는 가니시까지 모두 꿰고 있는 마니아라고 자부했다.
‘대체 무엇을 쓴 거지?’
고기와 가니시와 포도주의 조화는 무엇보다 감미로웠지만 진미는 이어지는 쓴맛과 신맛의 조화였다. 고기에 신맛을 더해 상큼한 맛을 더하는 건 이전에도 경험했지만 혀끝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쓴맛은 처음이었다. 베르딕은 혹시 탄 것이 아닌가, 했으나 이어지는 조화에 경악했다.
혀를 농락하는 맛이었다. 미각이 폭행당하는 듯한 충격. 그 맛은 불쾌한 것이 아니라 다른 맛을 더욱 살리면서 또 그 자체로서의 맛이 더욱 오묘했다.
‘이것을 쓰다고 표현할 순 없어. 뭐지, 뭐가 적당하지?
“정신 차리게, 에반스 씨.”
베르딕은 눈을 떴다. 약간의 눈물이 눈가에 스쳤다. 너무나 감미로웠다. 어떤 미녀와 잠자리를 하는 것보다 더 큰 쾌락. 베르딕은 하이어 영지를 차지해야 할 의무감을 느꼈다. 이건 그 어떤 학자의 연구보다 위대하다.
“대체… 정말이지, 이제까지 이걸 안 내놓으신 이유가… 아, 정말, 아닙니다. 오늘 전 이걸 맛보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이 들 정도군요.”
베르딕의 찬탄에 영주는 만족스럽게 수염을 쓰다듬었다. 이어서 레이몬드와 이셀라도 입 안에 넣었고, 역시나 표정이 변했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그 미묘한 맛의 차이가 낯설어 그저 상투적인 칭찬을 짧게 던졌다. 그에 미식가라고 자부하는 베르딕에게는 못마땅함을 느꼈다. 저렇게 음식을 제대로 즐길 수 없는 미숙한 자들과 동등한 양을 주다니, 불합리하다.
“머무는 동안 또 맛볼 수 있을까요?”
“허헛, 이젠 남은 것이 한 마리도 없어서 이걸 또 맛보려면 꽤나 기다려야 할 걸세.”
“그동안 맛을 못 본 게 안타깝군요.”
“섭섭히 생각하지 말게나. 우리 영지엔 좋은 사냥꾼이 없어서 저게 전부였네.”
“그럼 부디 더 좋은 사냥꾼들을 고용할 기회를 주십시오, 얼마든지 제가 돈을 내겠습니다. 정말이지… 주방장을 불러도 되겠습니까? 찬탄을 금치 못하겠군요.”
잠시 뒤 통통한 중년 남자가 땀을 닦으며 베르딕의 앞에 섰다.
“정말 훌륭하군, 자네. 내 이제까지 다른 요리에서는 자네의 진가를 몰라봤지만, 자네의 손이 더욱 섬세한 요리에 걸맞음을 이제야 알았네.”
“감사합니다, 어르신.”
“대체 어떻게 그런 맛을 낸 건가?”
“얹은 감자에는 소금과 버터를 녹인 것을 1대 1의 비율로….”
“아니, 아니 그것보다 고기를 어떻게 했는지가 궁금하네.”
“한 달 동안 무화과와 사과만 먹인 멧새를 포도주에 익사시키고 높은 온도의 화덕에….”
“아니, 그것보다, 음… 미안하군.”
베르딕은 조급함에 헛기침을 하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 양념의 조합이 궁금하군, 도무지 무슨 향신료인지 감을 못 잡겠어. 내가 아는 허브가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저….”
주방장이 머뭇거렸다.
“부탁하네. 레시피가 그렇게 비밀인가? 영주님, 합당한 가격을 치르겠습니다. 전 저 맛을 도무지 잊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으음, 그것이 말일세. 실은 그 허브는….”
“…제가 얹었기 때문입니다.”
듈란이 작게 답했다.
“…….”
“…….”
“정말 훌륭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신관님.”
침묵 속에 레이몬드만이 대답했다.
차기 영주인 듈란이 요리에 손을 댔다는 것은 그리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영주의 옆에서 행정을 하고, 또한 신관으로서 영주민들의 경조사들을 담당하는 것이다. 칭찬을 하는 것도 미묘해졌다.
“듈란 신관님이 계셨던 애번 수도원에서는 무엇보다도 의료를 중시해서, 탐식을 금하기보다 충분한 영양의 공급을 권장한다 들었습니다. 저와 제 기사단원들도 많은 도움을 얻었죠.”
“어머, 아까 말씀하지 그러셨어요.”
이셀라가 잽싸게 조잘거렸다.
“다양한 견해를 듣고 싶었거든요. 절식을 통해 그만큼 아랫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다는 에반스 양의 견해도 그르지 않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요.”
“베르딕 씨는 동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요.”
이셀라의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이 그리 열렬히 하이어가를 비난했건만, 베르딕의 탐욕은 말이 맞지 않았으니까.
“저도 상당히 즐겼습니다, 신관님. 제 부족한 견해로는 그 위에 얹은 것이 약재로 추측되는데, 어떤가요?”
“…맞, 습니다. 제가 항시 요리에 간섭하진 않, 않지만… 가끔 필요하다 생각할 때 개입하곤 합니다.”
“덕분에 입뿐 아니라 건강도 얻었군요. 감사합니다.”
과연 영주 꼭두각시나 하기엔 너무 아까워. 베르딕은 듈란이 달리 보였다. 그는 그저 방해물이었다. 듈란과 캐런이 결혼한다면 실권을 아무리 베르딕이 독차지한다 하더라도 최종 결정권자는 하이어가가 계속 차지하게 된다.
다행히 경영에 무능하고 말더듬이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 정도의 솜씨라면 구슬려서 계속 자신의 요리와 건강을 맡기고 싶다. 베르딕은 혀로 입 안의 기름을 핥았다.
“…….”
아직 캐런은 멧새를 입에 넣지 않았다. 베르딕은 내심 그녀가 먹지 않고 양보하지 않을까 하며 쳐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캐런이 살짝 웃었다.
민망함에 시선을 떼려 했지만 캐런은 쳐다보면서 입을 벌려 새를 넣었다. 오물거리는 모습에서 눈을 떼었다. 불쾌했다. 그리고 레이몬드가 캐런을 쳐다보는 것을 보자 더욱 불쾌해졌다. 빌어먹을 기사, 이제까지 네놈에게 얼마를 들였는데!
레이몬드의 시선을 알아챈 이셀라는 바로 심통을 부렸다.
“흐응, 누구 아픈 사람 있나요? 맛이 좋긴 하지만 신관님이 굳이 할 정도의 일은 아니잖….”
베르딕이 딸의 구두를 지그시 밟았다. 그만 좀 해라.
“내가 몸이 좀 안 좋거든.”
영주가 거의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러니 듈란을 그만 괴롭혔으면 좋겠군, 에반스 양.”
삭막한 분위기 속에 주방장이 슬그머니 간식을 준비하겠다며 사라졌다. 그리고 영주는 큼큼, 소리를 내며 잠시 각자 볼일을 보자며 해산을 선언했다.
정찬은 세 시간이 넘게 이어지기에 영주는 흡연실로 발걸음을 옮겼고, 베르딕도 급히 영주를 따라나섰다.
이셀라는 눈물을 닦고 화장을 고쳤다.
거울 안의 여자는 엉망이었다. 화술도, 화장도, 그 모든 것이.
“이래선 싸구려 악당이잖아….”
왜 그 여자는, 그렇게 예쁜 거지?
힘없는 금발을 본다. 금빛이 아니다. 뿌리 쪽은 갈색으로 어두웠고 돈을 들여 결은 부드러웠지만 그건 저 캐런에 비하면 빗자루 같았다. 아름답게 낳아 주지 못한 어머니를 욕하다가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돈이라거나, 그토록 쌓아 온 상업적 능력, 서류를 구분하고 그 안에서의 수의 차이를 구분하고 법적 허점을 노려 돈을 버는 능력은 너무나 귀한 것이라 자부하였는데, 그 모든 것이 캐런 하이어의 타고난 거죽 앞에서 바래는 것을 느꼈다.
‘사랑해서 결혼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 같아?’
하지만요, 아버지. 아버지는 정부가 있죠. 제가 다섯 살 때 아버지와 입 맞추는 가정교사를 봤어요. 아버지는 항상 어머니를 존중하지만 유일한 여성으로 대하진 않으시죠. 물론 어머니는 그걸 알고 조용히 가정교사를 바꾸셨지만. 제가 제일 슬펐던 건 어머니도 집사와 다정히 있는 걸 보았을 때였어요. 사랑을 꿈꾸는 것이 뭐가 잘못된 거죠? 무엇이 잘못이죠?
퍼억.
거울을 향해 주먹을 질렀다. 하지만 거울은 깨지지 않았고 손만이 아팠다.
손자국에 더러워진 거울을 통해 흐릿한 인상이 더 흐려졌다.
“하….”
끝없이 서류를 분석하는 사이사이 간간이 읽던 동화에는 언제나 완벽한 사랑을 하는 공주와 왕자가 나왔다. 그들은 절대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 왕자는 항상 공주를 사랑하고, 그녀를 지키고, 함께 행복해졌다.
이셀라는 레이몬드를 처음 만난 날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는 동화 속의 왕자님이었다. 소녀의 꿈이었다. 그는 처음 본 순간부터 이셀라를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처음 만남이 그저 그렇더라도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이야기들이 훨씬 많다. 시간이 지나면 그도 자신의 장점을 볼 것이고, 그리고, 그리고…
“그럴 리가, 없지….’
헛웃음을 흘렸다.
자기가 태도를 바꿔서, 가련한 척한다? 하, 이셀라는 스스로의 나약함을 비웃었다. 캐런은 편하겠군. 예쁘고 돈이 없어 가련해 보이니 얼마나 편한가. 이셀라가 그 흉내를 내? 돈 있는 자가 없는 흉내를 내다니 가증스럽다.
중요한 것은 여성의 언변이나 능력은 외모에 가려진다는 사실이다. 재녀가 자신의 능력으로 많은 수익을 내어도, 그건 미녀의 미소보다 값이 떨어진다. 상인들이나 부리는 자로 재녀를 원하지, 연인으로서의 선호도는 한없이 낮았다. 이셀라는 그런 경우를 너무나 많이 봐 왔다. 지긋지긋하게.
하지만 레이몬드는 다를 줄 알았다…. 아버지가 그랬으니까. 어느 순간 이셀라는 아버지의 정부들이 언제나 어머니보다 젊고 아름다웠다는 것을 알았다. 뒤늦게 진실을 깨달았지만 너무 늦었다. 아니, 알아도 어쩔 수 없었다. 그건 변명이다.
오히려 그런 공부조차 하지 않았다면 더 비참했을 것이다. 그리고 공부뿐만 아니라 이셀라는 아름다움을 위해 돈을 엄청나게 쏟아부었다. 얼굴과 머리에 바르는 갖가지 화장수들과 몸에 걸치는 맵시 좋은 옷들이 그나마 그녀를 괜찮아 보이게 했다. 하지만 타고난 얼굴과 몸의 비율과 형태라거나, 피부의 색과 모발의 색 같은 것을 어찌 바꾼단 말인가.
사람의 가치는 외모에 있지 아니하며, 우리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꿔 신께서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길… 어쩌고저쩌고, 빌어먹을.
자신이 말을 하지 않고 그저 앉아서 주위를 살피고 캐런처럼 어쩌다가 한두 마디를 던진다면, 더더욱 비참해질 것이 눈에 선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 말라 죽는 잡초같이 되어 버릴 것이 뻔하다.
화장을 고쳤다. 입을 악물었다. 레이몬드 님, 그래도 당신은 나와 결혼해야 해. 당신은 우리 가문에게 팔렸어. 에반스는 결코 빚을 떼먹히지 않아.
“…하하.”
테라스 너머에서 레이몬드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언뜻언뜻 그의 빛나는 금발이 아른거린다. 저렇게도 웃는구나. 그는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조금씩 캐런의 목소리도 들렸다. 즐거워 보였다. 이셀라는 당장 달려 들어가 머리채를 잡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귀를 기울였다. 대화를 나누는 것이 희미하게 들린다.
“아닌가요?”
“와… 기사님, 엄청나게 자신만만하시네요.”
레이몬드가 캐런을 보며 웃다가 이셀라를 발견했다. 이셀라는 그가 분명 자신을 봤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캐런과 대화를 이었다.
“전 꽤나 인기 있는 신랑감이거든요.”
잔인하게도, 이셀라와의 약혼은 그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처럼.
“…그 말을 스스로 하다니 참… 대단하세요.”
“아닌가요?”
“제가 어떻게 알아요? 전 그날 밤 당신을 처음 봤는걸요.”
레이몬드는 허리를 살짝 숙여 캐런과 눈을 마주쳤다.
“거짓말이죠?”
“네?”
“당신은 절 알고 있잖아요.”
이셀라는 숨을 죽였다.
잠깐의 휴식 시간 동안 캐런은 장식용 꽃을 하나하나 뜯으며 계산을 했다. 엉킨 머릿속을 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아버지가 본 그녀는 누구일까.
분명 낸시는 캐런이 목을 졸랐다. 하지만 확실히 숨이 끊어졌는가? 아니, 아니다. 만일 그녀가 죽지 않았다면 분명 다른 사고가 또 터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가 환상이 아닌가? 캐런은 자신의 사고를 의심하고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스스로를 괴롭게 했다.
“…하아.”
서늘한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머리가 약간 맑아지는 것 같다. 테라스의 난간에 기대 달을 바라보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의 감각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가?
캐런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광인이 스스로의 광기를 알고 있다면 자신의 감각을 어디까지 확신할 수 있을까.
결국 캐런은 스스로가 아닌 타인을 통해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누구보다도 더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없다. 자신의 시야와 감각보다 타인의 말을 생각하자. 그것조차 환상이라는 가정은 우선 배제하자. 조금이라도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캐런.
이셀라는 낸시의 시체를 봤다. 공통적으로 동일인의 시체를 보았으니 낸시의 죽음은 어느 정도 확실하다. 그리고 낸시를 연모하던 마부는 도나에게로 그 방향을 바꿨다. 이 부분은 접어 두기로 한다. 감정은 여기서 아무런 확신이 없다. 대화, 증언이 중요하다.
자신이 시체를 가져다 둔 후 이셀라가 보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캐런은 시체를 감출 생각이 없었기에 그저 올려 뒀었다. 목걸이를 걸어서. 누군가가 시체를 토막을 낼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
과정이 어떻든, 지금 확인해야 할 것은 단 하나다.
영주가 말하는 건 사실인가?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불쑥 어둠 속에서 레이몬드가 테라스로 나타났다.
귀찮아 죽겠군.
캐런은 상념을 방해하는 레이몬드를 향해 표정을 관리하느라 안간힘을 써야 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꽃잎을 뭉개서 집어 던졌다. 귀찮다. 이 인생이 허울 좋은 환상이라면 레이몬드는 그중에서도 1등급 악몽이다. 겉은 번지르르하면서 결코 답을 주지 않는다. 그의 사랑은 의미가 없다. 그의 얼굴과 재능과 부, 모든 것은 캐런의 의문 앞에서 소용이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면, 같이 아무것도 아닌 시간을 보내고 싶군요.”
“놀리지 마세요.”
“죄송합니다. 한잔하시겠습니까? 당도가 높아 기분 전환에 좋습니다.”
제대로 약 올리고 있군. 짜증이 난 캐런은 잔을 노려보며 답했다.
“상처 때문에 알코올은 못 마셔요.”
“그럼 제가 두 잔 마셔야겠군요.”
얼씨구.
“아예 병으로 들이켜지 그러세요?”
기왕이면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죽는 것도 괜찮지.
“…하핫”
레이몬드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소리 내어 웃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시는군요?”
“좋을 일이 뭐가 있겠어요? 칼도 맞고….”
네가 늦는 바람에.
눈꼬리가 올라가는데도 레이몬드는 청량한 웃음을 지으면서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저를 구경하는 건 꽤 좋은 일 아닌가요?”
“예?”
“절 보기 위해 전쟁터에 간호 봉사를 지원한 영애도 있었습니다.”
“아 예… 그러시군요.”
장난스럽게 미소를 띠면서 눈을 마주친다. 소년 같은 얼굴이다.
“아닌가요?”
“와… 기사님, 엄청나게 자신만만하시네요.”
잘난 척 보게. 캐런은 피식 웃었다. 하지만 크게 우습지는 않았다. 레이몬드는 항상 자신이 넘쳤다. 저런 남자는 어디서나 호감을 얻는 법이다. 저 정도의 미남이 겸양을 떠는 건 오히려 기만이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별로 좋지 않아요.”
“제게 겸손을 권하는 건가요?”
“아뇨,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이런 거 말이에요.”
레이몬드는 어느새 캐런의 손을 잡고 들어 올려 살피고 있었다. 캐런이 손을 빼려 했지만 레이몬드는 단단히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런 거라니, 어떤 거요?”
“에반스 양… 이 있으시잖아요.”
쯧, 캐런은 이셀라의 인기척을 눈치챘다.
“그저 손이 다치지 않았을까 보는 중입니다.”
“…놔주세요.”
“잠깐만 부탁합니다.”
젠장, 이셀라가 듣든 말든 상관 안 하는 레이몬드 덕에, 나중에 이셀라에게 꽤나 괴롭힘당할 것이 확실해졌다. 이셀라가 가까이 있는데, 이러는 건 좋지 않은 징조다. 이전에 이셀라는 질투에 휩싸여 캐런에게 타르를 부었었다. 아, 머리에 타르가 부어지는 건 정말 싫은데. 캐런은 좀 더 은밀한 방식을 선호했다.
“정말 싫은 얼굴이시군요.”
응. 네 덕에 내 머리의 길이가 변하리라는 미래가 확실해졌거든. 캐런은 레이몬드에게 짜증을 부리고 싶어졌다. 그녀의 속내가 어떻든, 레이몬드는 사근사근 말하면서 캐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난 당신이 호감을 가지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
“착각도 그 정도면 병이시네요. 제가 왜죠?”
“전 꽤나 인기 있는 신랑감이거든요.”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이 말하면서 레이몬드는 캐런에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이번 사업은 꽤 에반스 가문에게 유리하더군요.”
“…그런데요?”
찬찬히 레이몬드의 눈이 손톱 끝부터 손목과 어깨를 훑고 옆구리에 머물더니 캐런의 눈동자를 향했다. 저음의 미성이 귓가에 울렸다. 캐런의 목이 살짝 떨렸다.
“날 에반스 영애에게서 뺏으면 그건 정말 완벽한 복수가 될 테니까요. 그래서 생각해 봤습니다. 제 몸을 노리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절 전부터 아시는 것 같기도 하고.”
“하아, 제가 당신을 어떻게 알아요? 전 그날 밤 당신을 처음 봤는걸요.”
레이몬드는 허리를 살짝 숙여 캐런과 눈을 마주쳤다.
“거짓말이죠?”
“네?”
“당신은 절 알고 있지 않습니까.”
두근.
그럴 리가 없어.
그렇잖아.
“무슨… 당신이, 전쟁 영웅으로 유명한 거야 알아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만.”
그럴 리가 없어.
예전에도, 몇십 년 전에도, 거의 100년 전에도, 첫 만남에서부터.
나는 당신에게 몇 번이나 말했었어. 나를 모르겠냐고. 내가 기억이 안 나냐고, 어떻게 나를 잊을 수 있냐고 물었어.
“…제가 당신을 일부러 유혹하려고 작정했다는 건가요?”
그리고 당신은 기억하지 못했어.
“그날 밤에, 당신이 내 이름을 말하는 걸 봤습니다. 거리가 멀었지만, 내 이름을 확실히 말했어요.”
“…….”
아. 역시나.
캐런은 실망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도 기대했다. 혹시나, 혹시나 그가 앞의 생을 기억할지 모른다고. 자신 혼자 거듭된 삶을 살지 않는다고. 순간 기대를 했다. 무엇을 기대한 걸까. 이미 그 정도의 확인은 옛날에 끝낸 것을.
“아… 그래요, 한번 떠봤어요. 이셀라 양이 하도 명사수인 당신을 자랑해서, 당신이 워낙 유명하니까….”
몸을 비틀어 빼낸다.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그래, 이번에도 난 당신을 은근히 좋아했었던 순진한 소녀 역, 부끄러움 타는 말괄량이 역을 해야 하지.
“왔다는 소문을 듣고… 여기까지 유명하니까, 혹시나 해서….”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그것이 전부에요.”
어차피 그가 달려온 건 꽤나 시간이 흘러서였다. 그렇다면 꽤 거리가 있었을 것이고, 밤이었으니 레이몬드도 자신의 입 모양을 확실히 판독했을 리가 없다. 그래 봤자 겨누다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것 같아서 떠보는 것이리라. 캐런은 잠깐의 열기와 기대가 식는 것을 느꼈다. 밤공기가 서늘했다.
“뭐, 좋습니다.”
거리가 멀어졌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다시 손을 잡았다.
“당신 정말 안 놀라는군요.”
“뭐가요?”
“그 밤에, 당신의 입을 읽었다고 했는데… 왜 놀라지 않습니까?”
“네? 그야, 당신은 눈이 좋으니까….”
저자가 항상 자신을 사랑하던 기사가 맞는가? 레이몬드의 얼굴에서 온화하던 빛이 사라지고 기묘한 의심이 피어올랐다. 입술이 비틀린다.
“보통은 그저 사격 실력에 감탄을 할 텐데.”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가다가 다시 놓는다.
“감탄도 아니고, 의혹도 아니고, 날 이미 너무나 잘 아는 것 같은 분위기를 폴폴 내면서”
“…….”
“얼굴을 보면 연모와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만.”
“무슨… 레이몬드 님, 절 너무 몰고 가시네요. 그래요. 전 집안을 위해서라도 당신이 제게 반하면 편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억측하지 마세요.”
“날 유혹하려고 했습니까? 이 표정으로?”
캐런은 명백히 같잖다는 얼굴을 하는 레이몬드에게 조금씩 밀려오는 당황과 어색함을 느끼며 몸을 뒤로 빼내려 했다. 하지만 더 이상 공간이 없었다. 캐런은 부담스러운 그의 눈을 피해 마저 말을 이었다.
“전 아까부터 그런 식으로 말했어요. 이제 들통났으니 부끄럽기 그지없네요. 됐어요?“
레이몬드의 몸을 밀어냈다. 하지만 단련된 몸은 움직이기는커녕 오히려 그녀를 압박하듯 붙박여 있었다. 입술에는 여전히 미소를 띠우고.
“레이몬드 경, 제 약혼녀에게 지나친 관심은 자제해 주시길.”
어느새 다가온 듈란이 레이몬드의 팔을 잡았다.
“실례.”
손을 뗀다.
“…들, 어가자.“
캐런은 잡힌 손목을 문질렀다. 이 시간에 듈란이 오진 않았는데, 듈란이 이 정도로 자주 접근한다는 건 좋은 징조다. 죽이기 쉬워지니까. 반면에 레이몬드를 죽이는 건 꽤나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그러기에 가치가 있다. 죽일 것이다. 당신을. 반드시. 당신이 내게 사랑을 구걸하는 그 순간 당신에게 독이 든 잔을 건네주지. 레이몬드, 나의 기사. 이렇게 반발해 주다니. 이렇게 의심을 하면서 칼을 들이대다니. 당신을 죽이기 점점 힘들어지겠구나. 캐런은 속으로 다짐을 되새겼다.
캐런은 레이몬드를 죽이고 싶었다. 그는 남주인공이었으니까. 자신만 계속 죽는 것은 불공평하지 않는가. 사람을 죽이면서 이야기가 달라진다면, 레이몬드를 죽이면 어떤 엔딩이 나올지 생각만으로도 오싹오싹했다. 분명 재밌을 것이다.
캐런은 계속 죽일 것이다. 그는 캐런 혼자만의 정찬 요리다. 조리해 통째로 씹어 삼키리라. 그 순간에도, 캐런은 그것이 궁금했다. 그는 언제나 그랬다. 어떤 끝에서도. 이번에도 그럴까. 그녀는 그것이 궁금했다.
이번에도 당신은 날 사랑할까.
“자, 이제 실험 시간이야.”
이제 조금 있으면 아버지가 거짓말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겠지. 토막 난 시체를 보면서 시계를 올려 두었다. 이 방법이면 확실하겠지. 어디 하루 뒤에 시체가 사라지나 볼까.
“다른 데 보지 말고 똑똑히 보고 있어?”
소년은 그것이 하기 싫은지 눈물이 고인 눈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캐런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깨를 꽉 움켜쥐고 얼굴을 가까이 하며 웃어 주었다.
“알았지? 똑똑히 보라구.”
캐런은 자신이 납치한 소년을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