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아무도 울지 않는 장례식
“…마지막으로, 전 재판관이나 영주가 아닌, 불미한 일을 당할 뻔한 여성의 아버지로서 감사를 드립니다.”
판사의 관을 벗고 영주가 고개를 숙였다.
톰은 바닥을 기어가는 개미를 보며 지겨운 시간이 드디어 끝났음을 알았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법정 안을 뒤덮었다. 톰은 무심코 박수를 탁탁 치다가 자신은 그럴 때가 아니란 사실을 깨닫고 그만두었다.
저 분위기는 자신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다. 작은 재판장이지만 그래도 참석한 사람이 서른여 명은 되었다. 재판장의 분위기는 흡사 축제와도 같았다. 다들 흥분이 섞인 웃음을 짓고 있었다.
판결은 명쾌했다. 두 강도 미수범이 길을 잃은 영주의 딸을 죽이고 재물을 훔치려다가 지나가던 귀족 청년에게 심판당했다. 판사는 영주였고 피고인은 귀족 청년이었다.
죽은 한스와 토머스의 강도 건에 대한 판결은 십 분도 되지 않아 끝났고, 이어서 살인을 한 레이몬드 경에 대한 판결은 판사가 그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참관인들은 정의가 실현된 것에 기뻐했으며, 청년의 수려한 외모에 관해 수군거렸다.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끝났으니, 여기서 본 것들에 대해 논하며 도시락도 먹을 것이다.
“저것 봐요, 자기 부친이 죽었는데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네요.”
단 한 명, 톰만 제외하고는.
영주의 따님을 강간하려다가 기사에게 죽은 남자인, 토머스는 톰의 아버지이다.
“울면 그것대로 문제지. 어떻게 영주 따님을… 어휴.”
“참 잘 죽었어요.”
아버지와 이름이 같아 애칭으로 불리는 톰은 그런 수군거림에 고개를 숙였다. 자신은 참으로 잘 죽은 남자의 자식이다. 그 말은 ‘너도 어서 죽지 그래’라는 말처럼 들렸다. 아마 그들의 속내는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
“끝까지 말 안 하다니, 참 잘했다. 용감하구나.”
말을 안 한 것이 용감한 건가? 톰은 그것이 궁금했지만 그것보다 신사가 주는 것이 더 중요했다. 재판 전에 받은 것은 너무 적었다. 고작해야 사탕 하나. 그는 퍽이나 귀한 것처럼 굴었지만 빵집 주인 데일과 매주 거래하는 톰에게는 별것 아니었다.
그리고 사탕 하나에 즐겁기엔 나이가 꽤 들었다고 자부한다. 톰은 망치가 세 번 울리고 사람들이 재판장을 나갈 때 받은 사탕을 입에 밀어 넣었다. 꽤 달았다. 빵집 주인인 데일이 가끔 입에 넣어 주곤 하던 딱딱한 설탕과는 또 다른 향긋하고 상냥한 맛이었다.
신사는 재판을 하는 동안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했다. 심심하면 먹으라며 사탕을 쥐여 주고는, 착하게 잘 있으면 보상을 준다고 하였다. 톰은 그래서 착하게 있었다. 이제 보상을 받을 것이다.
톰은 대가가 있으면 참는 건 자신 있었다.
“이제 끝났나요?”
“그래, 여��다.”
빛나는 금화 하나가 톰의 손바닥으로 떨어졌다. 톰은 생전 처음 보는 금화를 만지작거렸다. 신사는 장갑을 낀 손으로 톰의 손가락을 그러모았다.
“남에게 보여 주지 마라.”
다른 손으로도 한 번 강하게 힘을 주어 잡았다.
“이젠 너 혼자 살아야 하니까.”
“톰, 톰, 있니?”
익숙한 목소리였다. 톰은 다급히 일을 끝내고는 고개를 들었다. 씩씩거리던 빵집 주인은 거칠게 톰을 밀어내고는 급하게 옷차림을 추슬렀다.
“무슨 일이에요?”
한스의 아내인 로나였다. 늘 얼굴에 멍을 달고 사는 그녀는 가끔 톰을 불러 넋두리를 늘어놓거나 멀건 수프를 나누어 주곤 했다. 톰은 그녀를 보며 도망간 어머니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로나는 실질적으로 토머스의 아내와도 같았으니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빵 떨어졌어요?”
오늘은 양이 적어서 나누기 싫었는데. 톰은 슬그머니 빵을 탁자 아래로 밀어 넣었다. 빵집 주인은 어느새 뒷문으로 사라졌다. 그래도 값은 치렀으니 다행이었다.
“아니야, 톰. 큰일 났어.”
아버지가 죽었다
로나는 재판에 참석하지 않았다. 재판에 서야 할 토머스와 한스는 나란히 머리에 구멍이 났으니 설 수 없었고, 누군가는 서야 한다면서 중절모를 쓴 신사가 톰을 데리러 왔다.
“네 아버지가 맞니?”
톰은 재판장을 나왔다.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아홉 살은 일하기에 나쁘지 않은 나이다. 도시로 가면 다들 일을 한다. 도시뿐 아니라 마을에서도 모두들 일을 한다. 아랫집 래리도, 대장장이의 아들 케리도 전부 일을 했다. 톰만이 일을 하지 않았다.
‘그치만 난 너무 약한걸.’
아버지 토머스가 제대로 된 일을 하지 않아, 아무도 톰에게 돈을 주고 일을 시키지 않았다. 톰이 실수를 하면 토머스에게 돈을 받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냥 놀 수도 없었다. 다섯 살 아래의 아이들이나 뒷골목에서 노는 것이다. 아홉 살은 놀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다. 그래서 톰이 시작한 일은 결국 로나가 하던 일이었다.
아버지가 죽은 후 혹시 로나가 자신을 책임져 주지 않을까 했지만 그녀는 톰에게 들뜬 얼굴로 남편과 토머스의 죽음을 알리고서는 대장장이 늙은이와 살 것이라고 전했다.
“아는 척은 하지 말아 줘.”
“네. 축하해요 로나.”
로나에게 축하를 보냈다. 로나에게 배운 것은 몸이 약한 톰이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었으며, 빠른 현실 파악이었다. 얇은 팔과 불량한 아버지를 둔 조그만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지금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그나마 어린 나이인 덕이며, 조금만 더 커서 목소리가 굵어지고 수염이 나기 시작하면 팔리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술집에서 일했던 로나는 은화 다섯 개 아래로는 절대 안 된다고 했지만 어린 남자아이에게 그 돈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톰에게 돈 대신 빵이나, 약간의 소금, 아니면 토머스와 한스의 술집 외상으로 그 값을 치렀다.
톰은 오늘 빵이나 소금, 술이 아닌 제대로 된 돈을 처음 만져 보았다. 묵직한 무게감에 기분 좋았다. 잠시 동안 조용히 한 값이라면 얼마든지 조용히 할 수 있겠는데.
하지만 앞으로 이런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이제 토머스는 죽었는데.
“저, 아저씨.”
“응?”
“전 이제 어떡해요?”
톰은 신사의 손을 잡았다. 아버지가 죽었다. 그것도 영주의 딸을 강간하려다가. 톰은 거리 출신의 아이답게 필사적으로 살길을 찾아야 했다.
“어쩌긴, 혼자 살아야지. 아까 말했잖니?”
신사는 불쾌한 기색을 보이며 톰의 손을 떼어 내려 했다. 톰은 더 강하게 매달렸다.
당장 오늘 밤부터 문제였다. 아버지가 없으면 최소한의 값조차 치르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을 수없이 봐 왔다. 토머스는 한량이었지만 톰의 몸이 축나면 집 앞에까지 찾아가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부쉈다. 그런 아버지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죽었으니 톰은 당장 오늘 밤부터 누가 찾아올지 몰라 떨면서 벽장 안이나 혹은 화덕 안에서 몰래 숨죽이고 자야 한다.
“저… 저, 갈 데가 없어요. 몸도 안 좋아요.”
“어머나, 웨더 씨, 재판도 끝났는데 식사 안 하세요?”
재판장의 잡역 하녀가 변호사를 보며 알은체를 했다.
“아 이 녀석이… 감사합니다. 영주님이 주시는 건가요?”
“네, 정원에서 모두에게 베푸신다 해요. 얘, 너도 어서 가렴.”
“아… 안 돼요, 변호사 선생님. 제발 저 좀….”
“끄응.”
신사는 모자를 고쳐 쓰고는 톰을 밀쳤다.
“살고 있는 집을 처분하고, 신문을 보면서 일자리를 찾아라. 다들 그렇게 사는 거야.”
“집을 처분하라구요? 어떻게요?”
“서류를 들고 와서…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야. 동네의 서기장에게 가라.”
“선생님!”
신사는 성큼성큼 정원으로 향했다.
집을 처분하라고? 서기장? 집을 팔라는 건가? 그럼 그 다음은? 어디서 살고 무엇을 먹지? 집을 팔아서 계속 살 수 있나?
눈앞이 새카매졌다. 아홉 살에게 세상은 너무 복잡했다.
“넌 식사하러 안 가니?”
“응?”
“영주님이 무료로 식사 제공해 주신다는데, 넌 안 가?”
예쁜 소녀였다. 하지만 톰보다는 나이가 많아 보였다. 톰은 눈을 돌려 땅바닥을 바라보았다. 재판을 구경하러 온 아이인가. 얼굴을 모르니 아마 멀리서 놀러 온 상인 아이인가.
“내가 가면 이상할 거야.”
“네 아빠가 살인자라서?”
“우리 아빠는 살인자 아니야!”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소녀는 겁먹기는커녕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응. 살인자는 아니고 강간범? 아니 강간 미수범이지.”
“…안 죽였잖아.”
눈물이 날 것 같다. 톰은 눈을 크게 뜨고 안 울려고 했다.
“안, 안 죽었잖아. 그, 그리고 결국 강간도 안 당했잖아.”
“사실 적시니, 아니면 네 부친을 위한 항변이니?”
“항, 항?”
갑자기 알지 못하는 소리를 하는 소녀에게 톰이 덜떨어진 소리를 내자 소녀가 인상을 썼다.
“기왕이면 참신한 답을 해 줘.”
“어?”
“답이 마음에 들면, 금화 다섯 개를 줄게.”
금화 다섯 개. 톰은 머릿속으로 답을 짜냈다. 금화 다섯 개라니. 어지간히 부자인가 보다.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톰은 어떤 대답을 해야 금화를 얻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어, 어… 둘 다? 결국 아가씨는 죽지도 않았고, 강간도 안 당했잖아. 그런데 왜 우리 아빠가 죽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그리고… 어, 강간이 왜 나빠?”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엉망인 대답인데?”
“아니, 우리 아빠가… 응, 결국 보면 우리 아빠랑 아저씨 시체만 있잖아. 아가씨가 길거리에서 하는 걸 좋아했을 수도 있잖아.”
“그건 아닐… 거야. 솔직히 너네 아빠는 더럽고 못생겼잖아. 어리고 부자인 여자가 왜 너네 아빠 같은 사람이랑… 으음.”
톰은 토머스의 장점을 생각하다 그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걸 기억해 냈다. 그의 자랑.
“아래는 커.”
“아.”
예상치 못했다는 듯 소녀의 얼굴이 얼빠진 것처럼 변하자 톰은 신나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결국 모르잖아. 남은 건 시체 두 구뿐이잖아. 그리고 왜 강간이 살인보다 나쁜데? 결국 귀족이라서 그런 거 아니야. 어차피 귀족들은 잘 먹고 잘 살 텐데.”
틀렸다. 이런 말을 저런 부잣집 여자애들이 이해할 리가 없다.
톰은 금화는 포기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욱하는 심정을 참을 수는 없었다. 자신은 매일 한다. 매일같이 먹기 위해서 한다. 하면 얼마나 한다고, 보통 백까지 세면 끝나는 일 아닌가. 톰은 그것이 너무나 화가 났다.
그까짓 게 뭔데? 길거리에는 몇 명의 창녀와 남창이 있는데, 그냥 다리를 벌리거나 입을 벌리면 끝나는 일인데. 그게 죽을 일이라면 그럼 마을 남자 쉰 명은 죽어야 한다.
“…좀 참신한 대답을 원했는데.”
“너는 내가 이러는 게 재밌어?”
“약간은.”
입을 가리고 소녀가 웃었다.
톰은 눈앞의 그녀를 때려눕히고 싶었다. 그리고 달려들었다.
“왜 여기 나와 있습니까. 하이어 양.”
“어머, 안녕하세요. 레이몬드 경, 재판에 참여해 주셔서 고마워요. 재판이 끝났잖아요? 딱히 방에서 할 것도 없고.”
그 노력은 어이없이 끝났다. 재판장에서 본 금발의 기사는 어느새 톰의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그리고 넘어진 톰은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 서 있던 붉은 머리 소녀의 몸을 살폈다.
“우, 우….”
넘어지면서 까진 얼굴이 아팠다. 서러움이 밀려 올라온다.
“…괜히 나와 있지 말고 들어가 계십시오.”
“전 딱히 큰 충격 안 받았어요, 레이몬드 경. 난 괜찮아요.”
소녀는 생글거리면서 답하고는 톰을 일으키며 속삭였다.
“새벽에, 영주 저택의 뒷문 중 세 번째 뒷문으로 들어와. 금화는 줄 테니까. 그리고 네 아버지에 대해 말해 줄 것이 있어.”
톰은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머리에 고통이 느껴졌다. 머리카락 사이로 축축이 흐르는 피를 느낄 수 있었다. 따갑다
재판이 끝나고 영주 저택의 뒷문을 찾아갔다. 갑자기 뒤통수를 맞고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뜨니 어느새 손과 다리는 묶여 있었다. 입 안에는 천이 물려서 읍읍, 하는 작은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단단히 묶여져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톰은 캐런 하이어를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저편에서 캐런이 톰이 깨어난 것을 보고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일어났니?”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톰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곧 하던 일을 계속했다. 힘든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캐런은 톱질을 하면서 작은 소리로 말을 이었다. 톰은 확실히 깨달았다. 속았다.
“……!”
“내 감각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줄톱으로 고기와 뼈를 써는 소리가 스산하게 들렸다.
톰은 사람을 썰 때도 다른 고기를 썰 때와 똑같은 소리가 난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은 고기나 마찬가지였다.
톰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입이 막혀 있었다. 귀라도 막고 싶었다. 하지만 팔다리가 단단히 묶여 있었다. 톰이 할 수 있는 것은 꿈틀거리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저 고기는, 고기가 된 사람은 자신이 아는 사람이었다. 톰은 자신이 왜 여기로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저 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증인이 있어야겠더라구.”
톰은 그 무언가의 증인이 자신임을 알았다. 캐런은 살점이 붙은 톱을 버리고 새로운 톱을 꺼냈다. 땀이 뚝뚝 떨어졌다. 꽤나 벅차 보였지만 일을 멈출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빛내며 노동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후, 내가 직접 낸시를 본 게 아니니 얼마나 나누어야 할지 모르겠어. 보통 음… 팔, 다리, 목 이렇게 6등분인가? 그치? 설마 6등분은 인정 안 합니다. 이런 건 아니겠지.”
입을 열 수 있다면 톰은 고함을 질렀을 것이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시체의 머리를 확인하자 톰은 실금했다. 캐런이 썰던 머리를 간신히 떼어 내어 톰의 옆에 두었다.
“그래서 오늘 하루 좀 봐 줬으면 해. 잠자면 안 된다?”
잠은 잘 수 없을 것이다.
갈색 고수머리를 쓰다듬는 감각은 좋았다. 캐런은 톰이 똑바로 앉도록 자세를 고쳐 주었다. 하루를 꼬박 버텨야 하니 나름의 준비는 해 두었다. 손발은 묶고 입을 막았다. 기절했을 당시 물을 삼키게 했고 약도 먹였다.
“날씨가 이젠 춥지 않으니까 불까지 넣을 필요는 없을 거야.”
눈을 불안하게 굴리던 톰은 시체의 얼굴을 확인하자 몸을 급격히 버둥거렸다.
“쉿쉿, 가만히 있어. 어차피 죽은 시체잖니? 널 건들 수 없어. 안전해.”
톰, 네가 경계해야 할 건 시체가 아니라 나야. 하지만 톰은 발작하듯 시체에서 떨어지려고 해서 캐런은 다시 나무토막을 위협적으로 들이밀어야 했다.
모르핀이라도 먹일 것을 그랬나. 캐런은 투덜거렸다. 하지만 아홉 살의 몸은 너무 작아 캐런은 적절한 양을 알 수가 없었다. 안정시키기 위한 약 때문에 일찍 죽으면 그녀만 손해다. 혼란스러워하는 톰의 반응을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지만, 나름의 변명거리는 있었다. 애초에 쉽게 구할 수 있는 시체는 정해져 있었다.
딱히 널 괴롭히고 싶은 건 아닌데. 캐런은 작은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내가 힘낸다고 해도 기회가 나야 말이지… 그 남녀의 신체적 차이라거나… 더 죽이려고 해도 다들 바쁘기도 하고, 혼자 있지도 않고, 나도 약하고… 결국 죽일 만한 건 너처럼 어린아이뿐인가 봐. 나도 완력이 좀 더 있었으면 좋았을걸. 응? 미안, 울지 마. 어차피 넌 오래 못 살아.”
그러니까 네가 제일 만만해. 캐런은 톰에게 모포를 둘러 주었다.
“등장 시간도 그렇지만 말이야. 현실적으로 넌 병에 너무 많이 걸렸어. 고수머리라 머리카락은 덜 빠졌는지 모르겠지만. 손발에 물집도 그렇고 입 안의 궤양도 심하고… 일을 너무 열심히 했구나?”
생각보다 네 몸의 시세가 별로 높지 않았구나. 캐런은 소독을 하며 말했다. 필요 없는 처치일지 몰라도 약한 동지애가 그녀를 움직이게 했다. 아이의 몸 곳곳은 물집이나 염증이 심했다. 연약한 부위가 염증에 의해 기괴하게 변했다.
정상적인 성장은 불가능할 것이다. 아니지. 캐런은 기억을 더듬었다. 결국 캐런이 거두어도 톰은 한 달 만에 죽었다. 성장을 가정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결국 이건 너무 쉬운 선택이다. 실험을 하기 위해서 이미 죽은 시체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고아를 이용한다. 약간 자존심이 상하지만 그뿐이었다.
“굳이 장점을 덧붙이자면… 네 아빠니까 자식인 네가 제일 잘 볼 것 아니겠니.”
토머스는 다행히 온전한 축이었다. 범죄자의 시신은 재판 전 검시관에 의해 보고서가 작성되고 간단한 방부 처리가 되어 내장이 비워져 있었다.
그리고 재판이 끝나고 산의 거름으로 적당히 버려져 있는 것을 캐런이 주웠다. 처음에는 나름의 분풀이로 칼로 찌른 한스를 골랐으나, 이내 톰이 집중하기 위해서는 그 부친인 토머스가 더 나을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그나마 토머스가 한스보다는 가벼웠다.
“그래도 아직 많이 안 썩어서 다행이네.”
문을 닫았다.
톰은 토머스의 잘린 머리와 눈을 마주쳐야 했다. 눈을 감았다. 차라리 죽고 싶었다. 토머스의 눈은 죽은 동물의 눈과 똑같았다. 비워져 있는 그 눈이 너무나 징그러워서 톰은 캐런이 어서 실험을 끝내고 돌아오기를 기도했다.
온몸이 결박되어 있었지만 눈을 뜨고 감는 건 자유였다. 오기 전까지 잠을 자야지. 잠을 자면서 다시는 깨지 않았으면, 잠자는 동안 그냥 죽었으면 하고 빌었다.
하지만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는 차가운 현실을 일깨워 주었고 모포를 둘러도 한기는 가시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상해요, 아버지.”
베르딕은 점점 귀찮아졌다. 일은 막바지에 이르렀는데 왜 자꾸 쓸데없는 일에 매달리는 건지. 이셀라의 공격적인 발언에 영주는 크게 불쾌해했다. 그럼에도 불안감을 달래 주려고 답을 받아 내었는데 왜 저러는 걸까.
“무엇이 문제냐. 하이어 씨가 확답을 했지 않느냐.”
“결국 본 사람은 영주님 하나뿐 아닌가요? 영주님이 진실을 덮으려고 거짓말을 하는 걸 수도 있잖아요?”
“그만 좀 하거라. 대체 왜 그런단 말이냐. 안 그래도 네 약혼식을 어떻게 할 것인가 때문에 머리가 복잡한데.”
“우… 만일 영주님이 살인을 했다던가, 아니면 하인들끼리 살인을 저질렀다던가, 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 거라면 그걸 아버지께서 이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이상해요. 전 분명 그날….”
쾅.
이셀라는 움찔거리며 물러났다. 베르딕은 인상을 썼다.
“내가 아무리, 이권을 다 가져와도 영주를 이 집에서 쫓아낼 수는 없어. 자연스러운 합병을 위해서는 입 다문 허수아비가 필요하다. 이셀라, 적당히 서로 폐를 안 끼치고 살아야 해. 특히 그런 사소한 일은.”
“그게 무슨….”
“이셀라, 그만 좀 해라. 하녀 하나, 그것도 검둥이 집시 출신 하녀가 죽든 말든 그건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영주는 그 부분에서 답을 했고, 우리가 그 이상 추궁할 권리는 없어. 그만해라. 행여….”
숨을 가다듬었다.
“영주가 그 하녀를 죽였다고 해도, 뭐 그리 큰 문제란 말이냐?”
하얗게 질린 딸이 조금 안쓰러워졌지만 그에 반해 실망감과 분노가 동시에 혼재했다. 지금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쓰는 이셀라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녀 하나가 사라지든 말든 베르딕이 할 일은 너무나 많았다.
“차라리 그 시간에 레이몬드 경에게 더 잘 보일 준비나 해라. 계집애가 쓸데없이 아는 척이나 하지 말고. 그런 여자는 아무도 안 좋아해.”
“아버지, 전, 전 아버지를 도우려고….”
“그만, 넌 말이 너무 많다. 가끔 네게 지나친 교육을 시킨 것 같아 후회되는구나. 레이몬드 경이 캐런 하이어에게 한눈을 판다고 분노할 필요는 없어. 레이몬드 경도 바보는 아니야, 파혼은 그에게도 추문일 테니 어지간하면 너와 결혼할거다. 알겠느냐?”
“…네.”
“아직도 모르는 것 같구나. 어지간하면, 이라고 했다. 꼬투리를 잡을 구석을 주면 안 된단 말이다. 적당한 교양은 좋은 대화 상대감이지만, 네가 쌓은 쓸데없는 지식은 널 교만하게만 만들고 있다.”
“제… 가 공부한 것이, 싫으신가요?”
“아니, 그런 말이 아니다. 그게 아니라 넌….”
베르딕은 숫제 울먹거리는 딸에게 더 말할 필요를 느낄 수 없었다. 더 이상의 충고는 귀에 들리기는커녕 자신을 괴롭히는 소리로 치부해 버릴 딸이었다.
탁.
이셀라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복도로 나왔다. 저택 4층의 동쪽 복도는 비슷비슷한 손님용 방이 늘어서 있었다. 특징이 없고 비슷한 방들의 연속은 이셀라의 취향에 맞지 않았다. 다 똑같이 하얗거나 미백색 천을 이용했고 비슷한 카펫과 똑같은 가구로 꾸며져 있었다. 그래서 이셀라는 자신의 방을 찾기 위해 순서를 다시 세었다.
하나, 둘, 셋. 셋째 방으로 까딱거리면서 들어가자 이셀라의 방이었다. 이셀라는 자신의 옷장을 열었다. 서른일곱 벌의 고급스러운 드레스들이 위로하듯 이셀라를 반겼다. 이셀라는 옷들을 끌어안았다. 위로하는 듯한 부드러운 감촉이 좋았다.
“흐으윽….”
그래도 흐느낌은 참기 힘들었다. 어젯밤에는 방에서 이상한 소리까지 들렸다. 환청에 시달리다니. 밤새 이셀라는 귀를 막아야 했다. 무서운데 무엇이 무서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죽은 자가 살아 움직이든가 말든가. 이셀라는 레이몬드에게 최소한의 매력, 파트너로서 약혼을 깨지 않을 정도의 매력은 유지해야 하는데 그것조차 너무 어려웠다. 드레스를 하나하나 끌어안으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다가 껄끄러움에 눈을 떴다.
“뭐야 이건.”
자신의 옷장에 있을 리 없는 거친 천이었다. 이셀라는 인상을 찡그리며 그 옷을 빼내 내팽개쳤다.
“이딴 옷을 누가… 아.”
그날, 목걸이를 찾느라 낡은 옷을 가져오게 한 날이었다. 그때 입은 옷을 세탁해서 실수로 넣어 둔 모양이다. 이셀라는 찡그리며 그 옷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참 나, 재수 없게”
그때 생리혈에 더러워진 옷을 캐런에게 주고 갈아입었었다. 이런 옷을 자기 옷장에 넣어 두다니, 여기 하녀들도 영 못쓰겠군. 내가 주인이 되면 우선 세탁 하녀들을 갈아야겠다. 그러다가 이셀라는 무언가 마음에 걸려 인상을 썼다.
‘뭐지?’
하녀 옷은 그때 생리혈에 더러워졌다. 이셀라는 자신의 몸이 예민해져서… 어라.
“그때… 묻은 게 그 피가 맞나?”
그 다음 날 이셀라는 생리통에 하루 종일 누워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그때 이셀라는, 치마는 갈아입었지만 속옷은 갈아입지 않았다.
‘어라, 어? 말이 안 되는데?’
분명 치마는 피로 흠뻑 젖었었다. 캐런이 가기 전에 갈아입으라며 인상을 쓸 정도로.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날 이셀라는 속옷까지 빌리지는 않았다.
그 말은 그때 묻은 피는 이셀라의 피가 아니라는 말이다.
‘아.’
이셀라는 치마를 펼쳤다. 이미 깨끗하게 세탁되어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았다. 이미 시간은 너무 지났다.
그리고 그 사실은 새삼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그래, 그렇지. 이셀라는 옷을 노려보았다.
‘하녀 하나 죽든 말든 내가 상관할 바 아니야.’
이빨을 꽉 깨물었다. 그녀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잊자. 잊자. 생각하지 말자.
하지만 그날 밤 이셀라는 또다시 들리는 희미한 울음소리에 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저기요.”
이셀라는 속으로 욕을 하며 듈란의 방문을 두드렸다. 새벽 미사 준비를 하던 듈란은 방문을 열었다가 얼굴을 사정없이 일그러뜨렸다. 나도 오기 싫거든? 이셀라는 욕지기를 참았다. 이자가 매력 있었으면 캐런은 바로 이자와 결혼했을 것이고 자신과 레이몬드의 사이도 큰 문제가 없었을 텐데.
“제가, 요즘… 그, 잠이 잘 오지 않고.”
“…네.”
듈란은 눈썹을 찡그리면서도 앉아서 필기를 했다. 글씨조차 악필이군.
“밤마다 누군가 우는 소리가 들리는 거 같고… 이상한 걸 보고, 저 안 미쳤어요.”
자신을 하찮게 보는 듯한 남자의 눈을 찔러 버리고 싶은 욕망을 참으며 이셀라는 말을 이었다.
“요즘 이상하게 자꾸 더 화가 나고.”
“기, 기도나 묵상이 더 도움이 될 겁니다. 특히 당신 같은 사, 사람에게는.”
뭐라는 거야. 이셀라는 욕설이 나올 것 같은 것을 자제해야 했다. 숙녀답게. 이셀라는 되뇌었다.
“그냥 안정에 도움되는 약이나 주세요.”
듈란은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결국 서랍을 열어 무언가를 꺼내 한 묶음을 이셀라에게 건냈다.
“자기 전에 복용하면 도움이 될 겁니다.”
이셀라는 안정을 취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며 주는 약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캐런이 매번 차에 넣었던 말린 보랏빛 꽃이었다.
“캐런이 매일같이 마시는 거군요.”
“…예. 진정 효과가 있습니다.”
“그녀는 항상 침착하던데 왜 이런 걸 마시죠?”
이셀라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캐런은 언제나 상냥했고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심지어 칼에 찔려 실려 왔을 때조차 농담을 건넬 정도였다.
“네?”
듈란이 얼굴을 굳히는 걸 보고 이셀라는 이상함을 느꼈다.
“…더, 진정하기 위해서 입니다.”
“말 잘 못 하는 건 알겠는데, 좀 알아듣게 말하시는 게 어떨까요?”
듈란은 얼굴을 붉히다가, 이내 펜을 내려놓고는 일어섰다. 생각보다 큰 키에 이셀라가 당황했다. 듈란은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에반스 양,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단호하고 떨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캐런은 사라지지 않는 시체를 보고 역시나, 하는 마음으로 뒤적였다. 냄새가 조금씩 났다. 방 안에 둔 시계도 사라지지 않았고 가져온 다른 시계와 어긋나지도 않았다. 감정 같은 사소한 건 바뀌더라도 이런 물리적인 법칙까지 무시되지는 않는다. 낸시가 사라졌을 십여 시간 동안 이 시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캐런은 영주가 자신을 위해 거짓말을 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뻔한 부정 때문인가. 내심 눈에 나타나는 이적(異跡)을 원했던 캐런으로서는 약간 김이 새는 일이다.
“수고했어. 힘들었지?”
벌벌 떠는 톰도 사라지거나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염증은 많이 가라앉았다. 캐런은 아이의 살갗에 손을 대며 자신이 살아 있음을, 그리고 피부에 와 닿는 현실임을 느꼈다. 자신의 감각을 믿을 수 없으니 같이 볼 타인이 필요했고 톰은 적당했다.
“고마워. 너도 사라질까 봐, 무서웠어.”
캐런은 톰을 도울 약들을 챙겼다. 캐런은 희미한 동정심을 느꼈다. 아홉 살. 끔찍하게도 어린 나이. 자신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옛날.
캐런이 영주의 밑에서 편안하게 살고 이셀라나 듈란과 노닥이고, 레이몬드와 백작 부인을 만날 동안 이 소년은 마을의 밑바닥에서 구르는 생을 살았다. 그리고 이제 한 달 즈음의 시간이 흐르면 이 조그만 소년은 온갖 병이 악화되어 죽을 것이다.
그러기에 더더욱 죽여야 한다. 동정심은 집어치우고.
동정심에 죽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낸시는 죄가 있어서 죽은 것이 아니다. 극장 안의 사람들은 단순히 운이 나빠 죽은 것이 아니다. 심지어, 이 소년의 아비인 토머스와 한스 조차 캐런이 그곳으로 걸음하지 않았다면 죽지 않았을 자들이다.
그러니 캐런은 공평해져야 한다. 자신을 움직이는 것은 그저 가능성과 흥미여야 한다. 캐런은 자기 스스로를 의무적 쾌락 살인마로 정의했다. 그녀에게 쾌락은 의무다. 이 인생에서 쾌락마저 없다면 캐런은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죽일 수 있으니까 죽인다. 그리고 톰은 죽이기 너무 좋은 상대다.
캐런은 칼과 밧줄과 권총을 가지고 있었지만 총은 처음부터 논외의 대상이었다. 소리가 울릴 것이다. 캐런은 약을 통해 톰을 눈감게 하려 했으나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아… 이런, 주사기를 잊었네.”
입을 벌리면 소리를 지를 것이니 주사기를 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난번에 쓴 주사기는 이미 녹이 슬었다. 잠깐 고민하던 캐런은 톰의 목에 손을 대었다. 가녀린 어린 목에 펄떡이는 정맥이 느껴졌다.
사람은 잘 죽지 않는다. 토머스는 이미 장의사가 피를 뽑아 처리를 하였으나 이 지하실에서 피를 잘 처리하려면 정맥을 잘라 하루 종일 매달아야 할 것이다.
“아, 어차피 죽을 건데 내가 무슨.”
캐런은 혀를 찼다. 녹이 슨 주사기가 무슨 상관이랴. 목을 툭툭 치고 녹이 슨 주사기에 모르핀을 넣었다. 치사량을 주입하려면 나눠서 넣어야 할 것이다.
“윽, 진정해… 무린가.”
혼잣말을 들은 톰이 몸을 격하게 흔들었다. 모르핀이 든 병이 떨어졌다. 캐런은 한숨을 쉬면서 주사기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래도 찔러 넣을 수는 있다. 새 병을 꺼내 녹슨 주사기를 꽂았다. 톰이 다시 움직여서 병을 떨어뜨리려 했다.
뻐억.
캐런은 발버둥 치는 톰의 몸을 붙잡았다. 캐런은 손 안에 톰의 가는 어깨가 느껴지자 더 괴로워졌다. 아홉 살의 몸은 무엇보다 너무 작았다. 철저하게 약자를 뭉개는 기분. 낸시를 대할 때와는 역시 달랐다. 너무 어리다. 미약한 거부감을 느끼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이렇게 괴로운데.”
대체 왜 자신을 그렇게 다들 죽였을까. 캐런은 눈물이 날 듯한 기분을 눌렀다.
살인을 하면서 자기 연민이라니 역겹다. 이미 자신은 살인자다. 하지만 일방적인 폭력, 일방적인 살인은 이렇게나 괴롭다. 그러나 머뭇거릴수록 더 괴로울 것이다. 서둘러 주사기를 집어 들었다.
푸욱.
부들거리는 몸이 가라앉았다. 캐런은 톰의 몸을 쓸어내렸다. 이미 목격했으므로 살려 둘 수는 없다. 그리고 캐런은 이 소년을 죽이고 나면 누구를 죽이든 별 상관이 없을 것임을 알았다. 아홉 살. 자신보다도 더없이 약하고 아무도 찾지 않을 길거리의 소년. 동정의 여지가 너무나 많은 어린애.
“따뜻하면 조금 나을 거야. 약효가 빨리 들 테니.”
소년의 떨림이 약해졌다. 모포로 두르고 캐런은 벽난로에 불을 켜기 위해 다가갔다. 여름이 다가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벽의 지하실은 꽤나 서늘했다. 잘 쓰지 않는 지하실이었지만 그래도 땔감용 나무는 구석에 쌓여 있었다. 캐런은 큰 도막 두 개를 골라 벽난로로 다가갔다.
불을 붙인다. 하지만 잘 붙지 않는다. 종이나 잔가지 같은 것으로 먼저 더 불을 키워야 했다. 캐런은 꺼질 듯 말 듯 약불이 붙은 나무토막 가장 안쪽으로 던져 놓고 안쪽에 타다 남은 잔가지 같은 것이 있나 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보였다.
“어라.”
벽난로 안에는 까맣게 탄 시체가 있었다. 캐런은 얼굴을 찡그렸다. 이건 또 누구지? 새카만 재투성이의 해골을 뒤적이자 재가 날렸다.
“엣취!”
시간이 얼마 없다. 캐런은 얼굴을 닦고 도나가 오기 전에 방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자꾸만 일이 생긴다. 이 벽난로를 누가 썼다. 분명 여긴 아무도 안 쓰는 곳인데… 누가 했지? 이 시체는 누구지? 언제 죽었을까?
의문이 대롱대롱 떠오른다. 캐런은 재투성이의 해골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읏!”
뒤늦게 벽난로에서 불이 솟구쳤다. 캐런은 뒤로 물러났다. 나중에 다시 확인을 해야 할 것이다.
“…잘못했… 어요.”
“저런, 재갈이 풀렸구나. 더 할 말 있니?”
평안을 가장했지만 순간 당황했다. 다행히 약 기운이 도는지 목소리는 크게 나지 않았다. 이 지하실은 그렇게 소리가 울리는 곳이 아니었지만 비명을 지른다면 모를 일이다. 캐런은 안도하며 재갈을 다시 물리려 다가갔다.
“살, 살려 주세요….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톰이 헉헉거리면서 캐런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응? 네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아….”
“네가 무슨 잘못을 했니?”
“아가씨한테 말 함부로 한 거요.”
캐런은 톰의 짐작에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게 죄야?”
“예, 예…. 잘, 잘못했어요.”
“아니야. 그런 건 죄가 아니야. 그런 건 잘못일 수가 없어.”
“예?”
캐런의 눈은 이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톰을 보면서도 그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았다.
“세상에 죽을죄라는 것은 없어. 죽을죄는 누군가를 죽였을 때뿐이야. 자식이 무언가를 뺏겼다고 해서, 원하는 남자가 다른 곳을 봤다고 해서, 자신의 사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게 사람을 죽일 이유가 돼? 잠을 잘 못 자서, 넘어져서, 어쩌다가 그곳에 있었다는 게 죽을죄가 돼?”
캐런은 중얼거렸다. 그것은 독백에 가까웠다. 분노 섞인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그렇게… 편하게… 탓할 수 있으면… 내가 하나를 잘못해서, 말을 잘못해서, 그래서였다면.”
캐런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더니 톰과 눈을 마주쳤다.
“아니야. 그런 건. 사실 네가 뭐라 말하든 그게 네가 죽을 이유는 아니지. 괜찮아 톰. 난 화 안 났어. 아… 확실히 네 아빠는 진짜 별로긴 하지만. 그리고 난 거리에서는 좀 아니라고 생각은 하는데, 뭐, 그렇다고 그게 네가 죽을 이유는 아니야. 그냥 운이 나쁜 거지. 내가 천하의 나쁜 년이고. 그래, 이번에는 내가 나쁜 년이고, 죽이는 년이 되는 거지. 이제는 계속 그럴 거야.”
“그럼 살려 주세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타닥타닥 불꽃이 타올랐다.
“살려… 주세요.”
“안 돼.”
캐런은 톰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손은 부드러웠다.
“어차피 넌 오래 못 살아, 톰. 지금 죽는 게 너에게는 더 좋을 거야. 이 약도 꽤 비싸거든. 넌 손에 못 넣어. 그러니까 지금 죽는 게 더 나을 거야.”
톰은 바싹 마른 입을 열기 위해 더 노력을 해야 했다. 혀가 점점 무거워진다. 하지만 말해야 한다. 자신이 말을 멈추는 순간 죽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어요.”
불이 타올랐다. 캐런은 고개를 저으며 토머스의 토막 난 머리를 집어 난로에 밀어 넣었다. 시체의 지방이 떨어지는지 불꽃이 지저분하게 변했다.
혀를 차며 뒤집었다. 다행히 이 벽난로는 부엌을 거치니 그리 큰 티는 안 나겠지만 불은 역시 다루기가 어렵다.
“아, 톰. 차라리 화형은 어때? 예전에 죽어 봤는데 잠깐은 고통이 심하지만 칼 같은 것보다 훨씬 빨리 끝나.”
“저… 말 안 할게요! 진짜예요! 제발!”
“아직도 그런 소리야?”
캐런은 한숨을 쉬면서 톰의 옷을 끌어당겼다. 톰은 반항하려고 했지만 늘어진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더 할 말은 없니?”
“정말 말 안 할게요… 네?”
캐런은 눈을 감았다. 자신도 이랬지. 하지만 끝은 같다. 그리고 지금 이 아이를 살려 두면 더 힘들 것은 뻔했다. 다음번에는 살려 줄게.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제가 말 못 하면 되나요?”
치이이익, 하는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캐런은 손을 떼었다.
“이건 생각 못 했는데….”
“사, 사여, 주세요, 말 아 하께야.”
톰은 불타는 나무 조각을 입에 넣었다. 말하지 않겠다는 표현이었다. 불은 순식간에 입 안을 태웠다. 이제 톰은 더 이상 혀를 놀릴 수 없었다.
퍽.
캐런은 톰의 뒤통수를 세게 내리쳤다. 까만 조각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이미 고기가 익은 냄새가 강하게 났다. 캐런은 눈살을 찌푸렸다. 부질없는 노력이다.
넌 어차피 죽을 텐데. 한 달 만에 죽을 텐데. 버러지처럼, 네 아버지보다도 못하게. 지금 죽여야 해. 이 애는 지금 죽이는 게 오히려 도와주는 거야. 그리고 지금 죽일 수 있어. 캐런은 주사기를 집어 들었다. 톰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식식거리는 신음만이 이어졌다.
“지금 널 살리면 분명 귀찮은 일이 이어지겠지.”
안다. 더없는 진실이다. 캐런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 이 소년은 기회를 틈타 언제든 캐런을 죽일 수 있다. 저잣거리의 개도 캐런을 죽일 수 있다.
“…….”
하지만 캐런은 자신이 소년을 죽여야만 하는 정당성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깨달았다. 판단을 하면 안 된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죽여 주는 것이 더 나으리라) 이유로, 그리고 지금 안 죽이면 더 불편할 것이라는 이유를 붙여 가며 의무적으로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았다. 불편하다.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으니 불편하다. 캐런은 판단을 미뤘다.
“그래. 넌 어차피.”
죽겠지. 아니면 이번 일로 내가 너에게 원한을 사던가. 캐런은 자신의 죽음을 확신하는 것처럼 톰의 죽음을 확신했다. 어차피 죽을 거야. 너도 나처럼.
캐런은 눈을 감았다. 조금 울고 싶어졌다. 이번에도 자신은 죽을 것이다.
“음, 캐런 하이어 양. 전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군요.”
침묵 속에 첫말을 꺼낸 건 레이몬드였다. 그조차도 캐런의 말에 들고 있던 아침 식사를 중단해야 했다. 이셀라는 기가 차서 캐런을 쳐다보았다. 전원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캐런은 눈을 감고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영주로서 고아들에 대한 의무가 있어요.”
“그 아이는… 안 돼.”
영주는 씹듯이 말을 이었다. 아침 식사 자리에서 폭탄선언을 한 딸에게 영주는 숟가락을 집어 던지고 싶다는 얼굴을 했다. 실제로 숟가락을 세게 내려놓는 것으로 보아 주위에 눈이 있지 않았다면 실행했을 기세다.
“의무를 다하세요. 아버지는 영주세요.”
“건방지게 굴지 마라, 캐런.”
“…미쳤군.”
듈란조차 말을 거들었다. 베르딕도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캐런은 지금 강간범의 아이를 자신이 거두겠다고 선언했다.
“얼굴이 귀여우니 마차 시동을 하는 것도 괜찮겠어요. 접시닦이도 생각해 봤는데….”
“캐런, 같은 여자로서 말하겠어요. 당신 미쳤어요?”
이셀라조차 말을 이었다. 이셀라는 감정은 거의 분노에 가까웠다. 착한 척도 정도가 있지. 어이가 없다 못해 멱살을 잡고 정신 차리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였다. 그냥 범죄자도 아니고 강간범에 자신을 칼로 찌르기까지 한 남자의 아들이라니.
“아이는 죄가 없어요.”
“참 나, 아이도 죄가 있어요, 캐런. 모든 사람은 부모의 영향을 받아요. 유산을 받고 이름을 받는데 왜 범죄는 안 받는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런 자 밑에서 컸으면 뻔해요. 저 아이도 범죄자가 될 거예요.”
베르딕도 턱을 쓰다듬으면서 딸의 말을 거들었다.
“그리고, 하이어 양. 원한을 가질 수 있는 관계를 굳이 만드는 건… 좋지 않소. 연장자로서 충고하지. 그건 아니오.”
캐런은 단호하게 턱을 들었다.
“전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어떻게 생각해?”
“…뭘.”
“내가 저 애를 거둔 거.”
“돌았군.”
“오, 확실한 대답.”
“…농, 담은 아니야.”
“흠.”
톰의 입 안은 심하게 망가졌다. 캐런의 지식으로서 돌보기엔 한계가 있었다. 결국, 톰을 데리고 듈란에게 찾아갔다. 듈란은 바쁘다면서 거절하다가 거듭된 강요에 결국 진찰을 시작했다.
잔뜩 찌푸린 얼굴로 톰의 입 안을 살피고 주사와 약을 밀어 넣고 환부 일부를 잘라 내었다. 서걱거리며 까맣게 탄 살이 잘려 나가도 고통은 없었다. 톰은 그것이 더 무서웠다.
“어떨까?”
“…더, 더 두… 고 봐야지. 그리고 앞, 앞으로는 밀턴에게 가라.”
밀턴은 듈란의 보조를 돕는 의사였다. 나이는 듈란보다 많았지만, 확실히 실력은 듈란에 비해 부족했다. 캐런은 명백한 거부가 약간은 언짢았다.
“넌?”
“바빠.”
살짝 까진 상처에도 미사를 접은 건 어디의 누구더라.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듈란은 경영에는 무능력해도 나름대로 차기 영주이자 신관이며 의사다. 그중 하나만 해도 일은 상당히 많다. 일뿐 아니라, 시동 하나를 붙들고 있기엔 그 고매한 자존심이 허락지 않을 것이다.
톰을 껄끄러워하는 사람은 듈란뿐만이 아니었다. 캐런은 그날 사람들의 얼굴을 생각하자 웃음을 참아야 했다.
다들 하나같이 입에 더러운 것을 문 것처럼 표정이 변했었다. 약간의 동정심과 명백한 혐오가 떠올랐다. 하지만 체면이 그들의 입을 막아서, 분위기만 싸늘해졌다.
결국 그 분위기를 바꾼 것은 캐런이었다.
캐런은 톰의 심한 상처를 보여 주며 연극을 한바탕해야 했다. 캐런은 전날을 회상하자 조금은 기분이 나아지는 걸 느꼈다.
“이걸 보세요.”
“웩.”
이셀라는 구역질을 했었다.
키득거리고 싶은 욕구를 참으며 캐런은 톰의 입을 강제로 벌려 보여 주면서 말을 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한 짓이에요.”
“저건 좀….”
“심하군.”
“이것뿐이 아니에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어요.”
캐런이 입 안과 손바닥의 염증, 그리고 등의 상처를 보여 주었다. 톰은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자신의 편이 하나도 없음을 알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캐런이 자신의 옷을 벗겨도 아무도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아.”
여기에 자신을 보호해 줄 사람은 없다.
길거리에서 자라 눈치는 빠른 톰은 그걸 알고 절망했다. 아무도 자신을 안타까이 여기지 않는다. 약간의 혐오와 분노, 호기심들만 있다. 자신의 위치로는 동정조차 살 수 없는 것이다.
캐런은 움찔거리며 입을 뻐끔거리는 톰을 강하게 누르면서 영주를 응시했다.
“아버지, 전 영주의 딸이 아니라, 피해자로서 관용을 베풀고 싶어요. 용서로 더 나은 미래를 바라는 거예요.”
캐런의 호소에 영주는 코웃음을 쳤다.
“적당히 해라. 치료하고 돌려보내.”
“이 아이는 고아에요. 결국 교구나 아버지가 거두어야 하는데, 왜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으셨죠?”
베르딕도 영주를 거들었다.
“하이어 양, 서류가 접수되지 않았기 때문이오. 교구에서 일을 하게 두시오. 다시 말하지만 가까운 곳에 적을 두는 건 그리 바람직하지 않소.”
“글도 모르는 아이가 어떻게 서류를 작성하나요. 홀로 남은 아홉 살짜리를 누가 돕나요? 며칠 만에 이렇게 된 몸을 보세요.”
닥치고 가만히 있어. 캐런은 히익거리는 톰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톰은 몇 번 입을 열었지만 그 입에서는 ‘하’ 정도의 신음 밖에 나지 않았다.
“말할 수 있을까?”
캐런의 질문에 톰이 매달리는 눈빛으로 듈란을 쳐다보았다. 신관님, 알아주세요. 제발, 눈치채 주세요. 최소한 제가 다시 말할 수 있다고 해 주세요. 하지만 듈란은 톰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무리야. 앞으로… 평생.”
“고마워.”
톰은 절망했다.
캐런은 흡족했다.
말을 할 수 없는 동지라는 건 꽤나 매력적이다. 문맹이니 글을 적지도 못하고, 말을 할 수도 없고, 그리고 수명도 얼마 남지 않았다. 최고다. 캐런은 자신이 꽤나 괜찮은 선택을 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 몸을 하고서도 사내는 사내였기에 시녀의 역할은 할 수 없지만, 어리니 동행하기 쉽고 병자니 다루기 쉽다.
그리고 며칠 뒤 또다시 시체가 사라졌을 때 캐런은 당황하지 않았다. 놀라는 것은 톰의 몫이 되었다.
“이것 봐, 역시 그렇지?”
시체가 또다시 사라졌다. 캐런은 텅 빈 벽난로를 가리켰다.
“분명 토머스랑 이름 모를 A 씨가 있어야 하는데. 아, 누군지 예상은 가지만.”
고작 하루가 지났다. 그 전날 종일 있었던 시체 두 구가 사라졌다. 캐런은 일부러 문을 살짝 열어 두었다. 하지만 아무도 시체에 관해 떠들지 않았다. 누가 했든지 간에, 시체는 은밀히 처리되었다.
“어머나 세상에!”
짝, 하고 손바닥을 마주친다.
“시체가 사라졌어요!”
웃으라는 건가? 톰은 억지로 입 끝을 당기려고 했다.
“아….”
톰이 입을 벌렸다가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혀와 입천장에 구멍이 났다. 가장 심한 것은 염증 때문에 부은 목구멍이었는데, 고름이 흘러 구취가 지독했다. 캐런은 톰이 입을 벌리자 흘러나오는 악취에 코를 막았다.
“말하지 말고 고개를 끄덕이든지 젓든지 해.”
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사라진 부친의 시체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톰이 할 수 있는 건 고갯짓이 전부였지만 캐런은 그런 반응이라도 돌아온다는 것이 기뻤다. 자아가 붕괴되지 않기 위해서는 적절한 대화가 필요하다.
살인과 관련해 계속 생각하다 보니 슬슬 한계를 느꼈다. 머릿속으로 혼자 되뇌는 것도 한계가 있고 혼잣말도 너무 늘었다. 말을 하면서 정리해야 했고, 청자가 필요했다. 혼잣말에 가깝더라도 눈앞에서 반응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생각을 정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캐런은 자신의 말을 듣는 벙어리 소년이 썩 마음에 들었다.
“난 일단 이렇게 생각해.”
캐런은 목탄 조각을 들어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뭐, 어디까지나 추측이니까. 응… 틀릴 수도 있지만.”
귀가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다 틀리면 어떡하지. 청자가 있다는 건 약간의 부끄러움과 긴장을 동반하는 일이다. 그렇지만 탐정 놀이를 하는 것 같아 즐겁다.
“봐, 주택은 L자형으로 되어 있어. 긴 쪽의 남향이 주축이고 4층부터는 침실로 이루어져 있지. 게스트 룸도 이쪽에 배치되어 있고. 이셀라의 방도 여기.”
내 방은 층수는 같아도 이렇게 떨어져 있고. 캐런은 꽤나 거리가 먼 것에 집중했다. 비슷한 방들이 늘어서 있는 대저택은 충분히 무서울 수 있다. 하지만 이셀라는 낸시 사건 이전에는 그 어떤 무서운 일도 이곳에서 겪은 적이 없으니, 그것이 환상일 가능성은 적다. 낸시를 봤다는 그녀의 말은 진실이리라.
“내 방은 여기서 좀 떨어져 있고, 서쪽으로는 하녀들의 방이 있고… 서쪽 3층은 하인들의 방인데, 네 방도 아마 이쪽으로 배치가 될 거야. 마부인 데인 씨도 이쪽에 살거든. 아무튼, 거리가 꽤 돼서 내가 낸시를 죽인 다음에… 뭘 그리 놀라?”
눈이 휘둥그레져서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는 톰을 다시 진정시키기 위해 캐런은 부지깽이를 들어야 했다.
“내가 살인을 좀 했는데 말이야. 음, 아무튼. 이셀라를 놀라게 해 주고 싶어서 이 방에 가져다 뒀거든. 마비 약을 먹인 후 목을 졸랐어.”
톰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가 스스로 입 안에 화상을 만들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었다면, 캐런은 톰 또한 아무렇지도 않게 죽였을 것이다. 처음에 톰은 캐런이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순전히 동정심 때문이라 생각했으나, 며칠 만에 그것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인지 깨달았다.
이 아가씨는 미쳤다. 그것도 체계적으로.
캐런은 자신이 한 살인을 즐겁게 늘어놓으며 정리했다. 톰은 정신을 다잡으며 그녀의 말에 집중하려 애썼다.
“내가 낸시를 그 방에 둔 시점이 오후 4시경. 이셀라가 시체를 발견한 시간이 거의 10시 정각. 물리적으로 시체의 목을 자를 시간은 충분해…. 하지만 하녀들의 휴식 시간을 아는 나 정도나 시체를 가져다 놓을 수 있지. 복도가 완벽히 비는 시간은 고작 30분이야. 내가 가져다 놓은 것만으로도 시간은 다 지났어. 이 말은 그 뒤로는 사용인들이 계속 오고갔단 말이지.”
그녀는 새로운 가지를 들고 사람의 선을 그어 가며 위를 뭉갰다. 그러고는 복도의 그림 위에 선을 주욱 그었다.
“자정에 이셀라가 복도로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서 내가 대기하다가 나갔지. 그리고 같이 방 안으로 찾아갔단 말이야?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시간은 십분 정도일거야. 다 합해서. 이 사이에 하인들 눈을 피해 시체와 방을 치운다는 건 불가능해.”
캐런은 즐거웠다.
톰은 반짝이는 캐런의 눈을 보았다. 그녀는 아주 흥미진진해 보였고, 즐거워 보였다. 입가에는 미소가 맴돌았고 목소리도 높아서, 따라서 웃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도 마주 웃었다. 그러면 덜 무서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울 것 같지는 않았지만, 상관은 없었다. 톰이 어떤 얼굴이든 캐런은 저렇게 웃고 있을 테니까. 밝은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그 다섯 시간 사이에 시체를 발견하고, 손상을 가했어. 이셀라가 말한 걸로는 목이 잘렸다고 했는데. 그걸 이셀라가 보고 나와 같이 갔어. 그런데 방 안은 이상하리만큼 깔끔했지.”
벽난로로 다가갔다.
“이제 여름이 올 텐데 지하실은 왜 이리 추운 걸까. 네 방은 괜찮니?”
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여러 번 죽고 살고 하다 보니, 이 부분에서 좀 놀랐거든? 갑자기 현실이 꿈으로 변해 버리는 것 같아서. 너무 놀라서 무섭더라. 그런데 천천히 생각해 보니 답이 단순해지더라고.”
캐런은 여자의 그림을 그렸다. 긴 머리의 여자.
“내 상황이 좀 특이하잖니? 아니… 그렇게 보지 마. 말했듯이 난 계속 죽고 다시 산다구. 진짜라니까. 그래서 갑자기 시체가 사라지고 그러니까 너무 당황했는데. 천천히 생각해 보니까 단순한 거더라고.”
캐런은 자신이 그린 낙서를 보면서 말했다. 사실 이렇게 설명할 필요도 없는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었다. 이셀라는 하루 종일 목걸이를 찾아다니느라 지쳐 있었다. 그리고 이셀라의 방은 손님들이 머무는 복도의 중간이었다.
“다섯 번째 방으로 들어갔어야 했는데, 여섯 번째 방으로 들어간 거야. 안쪽의 그 방은 안 써서 잠가 둔 줄 알았는데.”
캐런은 똑같은 모양의 문들이 있는 복도를 가리켰다. 외부인이 머무는 곳의 복도는 어떠한 특징 없이 똑같았다. 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방에서, 그러니까 원래는 비어 있어야 할 여섯 번째 방에서 이 머리카락을 발견했거든? 어때?”
톰은 캐런이 내미는 머리칼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이 애는 낸시를 모르지. 이 머리는 낸시의 머리카락이었다. 이런 식의 검은 곱슬머리는 저택에서 낸시 하나밖에 없었다.
“낸시라는… 내가 죽인 하녀의 머리카락이야.”
다른 인종은 이 저택에서 그녀 하나뿐이었으니까.
캐런은 그 머리카락을 들었다. 자신은 이셀라의 방, 다섯 번째의 방에 낸시를 두었다. 하지만 이 머리칼은 여섯 번째 방에 있었다.
“그러니까 시체는 여섯 번째 방에 있었을 거야. 누가 이셀라의 방에서 옆방으로 옮겼어. 그런데 이셀라가 옆방으로 실수로 들어가서 이 사달이 난 거지.”
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보기에도 저택의 복도는 헷갈렸다. 저택 내부의 문들은 비슷했으며 숫자가 쓰여 있는 것도 아니라 구분이 어려웠다.
“이셀라는 실수로 여섯 번째 방에 들어갔었고, 다시 왔을 때는 나와 같이 자기의 방에 맞게 들어갔으니 시체가 없었던 거야. 그날 뭐… 피곤했으니 그럴 만해. 뭐야, 풀고 나니 별거 아니잖아. 시시해.”
캐런은 불이 꺼진 벽난로에 얼굴을 넣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톰은 동화처럼 그녀를 벽난로로 밀어 넣으면 자신이 자유롭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사악한 마녀를 죽이고, 소년은 도망갔습니다. 하지만 캐런은 곧바로 몸을 빼냈다.
“그럼 용의자는 확 줄어들겠지. 짧은 시간 동안 낸시를 토막 낼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있는 사람, 그리고 여섯 번째 방이 잠기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던 사람. 하녀들은 아니고, 하인들 중에서도 늦게 들어온 사람.”
캐런은 떠오르는 단 세 명의 남자들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이 왜 자신을 위해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캐런은 그 이유를 하나밖에 추정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돈을 주는 이 땅의 주인이다. 자신의 아버지, 하이어 영주.
“이유야 뭐… 아버지가 거짓말을 한 건 확실하니까. 아버지가 날 위해 그런 거 아닐까? 자식이니까…. 사실 잘 모르겠네. 보통의 부모들은 자식을 위해 어느 정도로 할까? 베르딕이 이셀라를 위해 날 죽였으니, 아버지도 날 위해 수습을 하시는 건 당연한 걸까?”
하지만 왜 지금 또다시 시체가 사라졌단 말인가. 이상하다. 토머스가 사라졌다. 그리고 낸시로 추정되는 누군가의 시체도. 톰이 텅 빈 벽난로를 가리키자 캐런이 어깨를 으쓱 올렸다.
“글쎄, 두 번째로 시체를 옮긴 것은 누구나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 안 쓰는 지하실에 들어와 시체를 치우고, 여기서 발견한 다른 시체도 조용히 치운 사람. 처음과 동일한 사람이겠지. 어쩌면 아버지가 계획하고, 몇 명의 다른 사람들이 행동했을 수도 있고.”
침묵했다. 험한 거리에서 닳고 닳았다 하더라도 아직은 어리다. 사실 톰은 캐런의 말을 반은 이해 못하고 있었다. 어렴풋이 이해한 건 그녀는 시체를 훼손했을 뿐 아니라 이미 다른 사람도 죽였고, 누군가가 그녀를 보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사람을 죽여도 처벌받지 않는다.
톰은 생각을 멈추기 위해 캐런의 말에 집중했다.
캐런은 톰에게서 몸을 돌리고 벽을 손으로 더듬었다. 지금이라면 캐런을 급습할 수 있을까? 톰은 캐런의 등을 노렸다. 자신은 캐런보다 작고 어리지만 급하게 달려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는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하지만 그녀는 곧 몸을 돌렸다. 톰은 엉거주춤하게 다시 앉았다. 다행히 캐런은 톰에게서 큰 이상함을 느끼지는 못한 것 같았다.
“여기서 피우는 연기는 분명 부엌으로 빠질 텐데…. 며칠 전에 불을 피웠을 때 연기가 그쪽 라인 지붕에도 나더라. 그럼 벽난로가 이어져 있다는 게 맞다는 거겠지? 이 구멍이 그 구멍인거 같아. 너, 자기 전에 약은 꼭 바르고 자야 한다? 화상은 좀 낫기 힘들대.”
자신이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하지만 캐런의 얼굴은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톰은 더 기분이 이상해졌다. 톰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캐런은 벽의 틈 사이를 더듬으면서 손짓으로 톰을 불렀다. 마치 선한 아가씨가 거지에게 과자를 꺼내 주려는 듯한, 들뜬 얼굴이었다.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서 무언가를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난 마법을 믿지만… 이 경우는 마법이나 신보다 차라리 사람이 했다는 것이 더 말이 돼. 내가 직접 이상한 일을 겪어서 더 헷갈렸던 거야. 그래도 혹시나 했는데, 이것 봐.”
캐런은 벽의 부서진 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보여 주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응시하던 톰은 이내 그것이 사람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알고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두 구나 되는 시체는 사라졌는데, 숨겨 둔 부분은 남아 있어.”
이건 분명 누군가가 치운 거야.
톰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그녀와 부친의 일부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 알겠지?”
캐런이 손가락뼈를 이용해 더 안쪽에 있는 것까지 빼냈다. 썩은 살이 딸려 나왔다.
“네 아빠의 아래는 안 커. 썩었지만 그건 확실해. 부패돼서 이게 커진 거란 말이야.”
다짐하듯 말했다.
“알겠어?”
재판 날 자신이 한 말에 대한 반박임을 깨달은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웃을 수 없는 농담이었다.
톰은 새벽에 자신의 뺨을 건드는 차가운 손에 눈을 떠야 했다. 캐런이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궁금해서 안 되겠어.”
무엇이.
캐런이 눈을 빛냈다. 어둠 속에서 파르라니 두 눈동자가 짐승처럼 빛이 난다.
“내가 생각한 대로라면 아마 그 벽난로 안의 시체가 낸시란 말이야?”
톰은 내려앉는 눈꺼풀을 들어 올려야 했다.
“그런데 언뜻 보기에도 그냥 떨어뜨린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 조각난 것도 아니고.”
숯덩이가 된 사람의 시체는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례라도 치러 준 것처럼…. 누가 장의사라도 불러 꿰맨 걸까? 너도 봤듯이, 불에 탔는데도 뼈가 가지런했단 말이야. 그럼 네 아빠도 그런 식으로 수습해 줬을 가능성이 높겠다. 얘, 잘됐구나.”
“…….”
“토막 냈는데도 누군가가 수습해서 장례를 치렀을 테니 잘된 일 아니니?”
원래 네 아빠는 그냥 거름용 시체가 되는데 말이야. 캐런은 진심으로 축하했다. 톰은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시체가 사라진 건 뭐… 아버지가 명령해서 치웠다고 하자. 그런데 말이야.”
캐런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톰은 긴장했다. 캐런의 기분은 하루에도 몇 번씩 널을 뛰었는데 다른 사람의 앞에서는 결코 그 기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벙어리인 자신의 앞에서는 그 흉포함과 광기를 드러냈다. 캐런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진다.
“내가 사람을 죽였는데, 일처리가 너무 깔끔하지 않아?”
캐런은 허공을 노려봤다.
“자식이 사람을 죽였다. 그래서 권력자인 부모가 수습했다. 있을 수 있어. 납득할 수 있다고. 그런데 말이야.”
빠득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에게 말도 없이, 사용인들 사이에 소문도 없이 수습하다니. 지나치게 깔끔해.”
“…….”
“마치 이미 예상한 것처럼.”
캐런은 분노하고 있었다. 화를 참으려고 노력해야 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났다. 침대 위에 핏방울이 투둑 떨어졌다.
“아버지는 무엇을 알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