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5. 헌팅 시즌 (6/31)

05. 헌팅 시즌


 

속죄를 위한 재의 3일.

번영을 위한 물의 4일.

첫째 날은 속죄제.

둘째 날은 속건제.

셋째 날은 면죄제.

무의식으로 지은 죄, 연약함으로 지은 죄, 무지로 지은 죄는 속죄 제사를 드리며 소제를 하되, 수입과 지위에 따라 제사의 규모를 달리 한다.

남의 것을 탐한 자, 성물을 더럽힌 자, 거짓 맹세를 한 자는 죄를 고하고 손해를 열 배로 갚으며, 재의 날에 피가 있는 제사를 드려야 한다. 이는 성법에 따른 것으로 각 정부의 법률과는 별도로 한다.

도둑질한 자는 어린 양 한 마리를 바친다.

간음한 자는 어린 암소 세 마리를 바친다.

폭행한 자는 어린 암말 한 마리를 바친다.

살인한 자는

  • 일부분은 찢어져 보이지 않는다. 새로운 규례지침서를 신청 요망.

여름이 시작했다. 하이어가의 영지는 일교차가 심하지만 기본적으로 선선한 날씨라 캐런은 여름이 좋았다. 싱그러운 여름의 초목과 바람. 빛나는 태양은 열정을 노래하며 가끔의 폭우도 즐겁다.

생을 거듭하면서 인간관계는 캐런에게 염증을 일으키고 고문과 같았지만, 이런 풍경만은 세월이 지나도 위안을 준다. 그래서 캐런은 자신이 있는 곳이 끝없이 눈만이 지배하는 설원이나 아니면 작열하는 태양만이 있는 저 남부가 아닌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기왕이면 이런 시골이 아닌 사람이 많고 자극적인 대도시가 배경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캐런은 오늘도 이셀라를 봐야 하는 일상이 지겨웠다.

“말도 못 타나요?”

“사냥터에는 항상 마차로 갔거든요. 사실 승마에 그리 능하진 않아요.”

“캐런이 못하는 것도 있군요. 그리 먼 거리도 아니라던데. 요즘 승마는 숙녀의 기본이에요.”

“충고 고마워요. 다음부터 배우도록 하죠. 하지만 오늘은 아니에요, 이셀라. 저는 초심자의 승마 실력보다는 숙련된 마부의 솜씨를 믿는답니다.”

일하기 싫다. 하지만 해야 한다.

사순절이 다가오고 있다.

베르딕이 영주를 부추겨 이번 사순절은 유례없이 대규모의 축제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100년간 매번 유례가 없는 규모라는 소리를 들었기에 캐런은 시큰둥했으나, 구체적인 숫자와 예산을 듣고는 기함을 했다.

베르딕은 사업과 캐런에게 닥친 사고 등, 갖가지 일이 겹쳤다며 좀 더 큰 제사를 원했다. 양 37마리, 칠면조 70마리를 준비해야 했고, 비둘기 70마리로도 모자랐다. 심지어 그는 번제물(燔祭物)의 종류도 신성한 숫자인 칠에 맞추는 것이 좋지 않겠냐며 제안을 했고, 영주는 받아들였다.

그 제물들을 최소한 종류별로 한 마리씩은 잡아서 번제를 올려야 하는 듈란은 자신이 신관인지 도축자인지 정체성의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러게 왜 쓸데없는 짓을 해서는.

듈란이 차기 영주로서는 정말 쓸데없는, 심지어 치부에 가까운 재능을 드러내고 난 다음에 베르딕은 듈란을 거의 삼켜 버리고 싶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곤 했다. 그 눈빛을 참을 수 없는지 듈란이 짜증스럽게 먼저 일어나 버렸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반항으로 베르딕의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평범한 제물로는 안 된다면서 멧새와 사슴을 더 잡기를 요구했고, 덕분에 캐런은 소풍 대신 본격적인 사냥 준비를 해야 했다.

직접 사냥하는 건 캐런이 아닌 사냥터지기들이지만. 그래도 책임은 귀찮다. 청소를 직접 하지는 않더라도 하녀들의 일을 확인해야 하는 것처럼, 캐런은 여주인으로서 일을 해야 했다.

이럴 때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찾아가고 싶은데. 캐런은 상황에 짜증이 났다. 빌어먹을 신분. 빌어먹을 권위. 개 같은 책임.

지배 계급은 할 일이 너무나 많고 홀로 있는 시간이 너무나 적다. 캐런조차 새벽에 도나의 시중을 받고 일어나 단장을 하고 오전에는 이셀라를 상대해야 하며, 점심을 지시하고 오후에는 하녀장과 집사와 같이 에반스가의 손님들 관리와 대접에 힘쓰며, 매일의 일과를 검토해야 한다.

그나마 일이 적은 캐런이 이런데 영주는 더더욱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았다. 캐런은 의문이 생긴 이후로 친부와 단독으로 만나기가 이리 힘들다는 것에 역정이 나 새벽에 일어나 베개로 침대를 내려치거나 종이를 벅벅 찢고는 했다. 왜 아버지는 재혼을 안 해서 고작 열일곱인 자신이 저 많은 일을 해야 하는지. 울컥, 하는 심정을 풀 곳이 없다. 그냥 빨리 이유를 알아내 죽거나 살 방법이나 찾고 싶은데. 일상은 너무나 지겹다.

캐런이 마차에 다가가자 톰이 마부석에서 내려왔다. 몸에 맞게 줄인 마부 제복이 퍽 어울려 인형 노릇에 걸맞았다. 나쁘지 않다. 톰 정도면 마차 시동을 하기에 적절한 나이다. 하지만 톰의 귀염성 있는 얼굴은 오히려 이셀라 에반스에게는 불쾌감을 일으켰다.

“캐런, 저것을 데려갈 예정인가요?”

“네. 저 아이 일인걸요.”

“그럼 전 마차를 타지 않고 말을 타겠어요.”

“이셀라.”

“마차는 답답해요.”

후, 캐런은 얼굴을 숙이는 톰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여기서 톰의 편을 드는 것은 맞지 않다. 캐런은 이셀라를 마구간으로 안내했다. 톰은 계속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어머나… 말들이 멋져요.”

새하얀 말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것을 보고 이셀라가 눈을 반짝였다. 아무리 관리해도 짐승들의 냄새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특유의 냄새가 확 올라왔다.

‘옷에 냄새가 배겠는걸.’

불쾌하다. 하지만 이셀라는 냄새 같은 것은 맡지 못하는 듯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저 애가 저러는 걸 보니 그가 있나 보군. 시선을 따라가자 역시나 레이몬드가 있었다.

“…어쩌면 저렇게 잘생기셨을까요.”

“네에, 그렇군요.”

캐런은 빤히 쳐다보던 고개를 돌려 시선을 레이몬드에게로 향했다. 마구간의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그의 금발을 돋보이게 했다. 말에 대해 마부와 말을 나누는 그의 목소리가 말들의 콧김 소리, 발굽 소리, 먹는 소리 사이에서도 확실하게 들렸다.

아마 그는 듈란보다 더 설교를 잘할 것이다. 얼굴과 키와 몸의 선, 목소리까지 잘 훈련된 배우처럼 완벽하여 가끔은 신화 속의 남신이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게 하는 것이다. 캐런은 그래서 이셀라가 조금은 가여웠다. 저 걷잡을 수 없는 열렬한 선망과 동경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신앙처럼 보여서. 자신이 반복해 온 100년간 그의 애정은 단 한 번도 그녀를 향하지 않았다는 걸 기억하기에.

“정말….”

캐런은 이셀라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걸 보았다. 레이몬드가 잘생기긴 했지. 하지만 몇십 년간 본 얼굴을 보는 것보다 그를 바라보는 처녀의 얼굴을 보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도 궁금하고 말이야.’

“아.”

“레이몬드 님이 절 보고 계셔요.”

그가 얼굴을 돌려 숙녀들과 마주한다. 거리는 있지만 그의 초록빛 눈이 선연하다. 시선이 부담스럽다. 이셀라는 저 눈을 선망했지만 캐런은 불편했다. 그의 과거를 기억하기에. 그리고 지난번 보여 준 태도는… 그의 입술이 위로 올라갔다. 웃는 듯, 비웃는 듯, 기묘한 느낌의 표정을 하고 살짝 목례를 하더니 다시 말에 집중하였다.

“부끄러움 타시는… 걸까요.”

“네.”

아닌 것 같은데요,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참고 대답했다.

아직 이셀라는 캐런에게 본격적으로 적의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씩 보이는 우울감과 질투보다 더 짙은 절망감은 같이 있는 캐런을 불편하게 했다. 하지만 그 불편함조차 새로운 자극으로 느끼는 캐런으로서는 이셀라를 굳이 달래 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질투 때문에 캐런에게 나중에 고문에 가까운 괴롭힘은 하지 않도록 친분을 유지하며, 지나치게 친밀해서 합동결혼식을 올릴 정도까진 아닌. 그냥 그 정도의 관계.

그런 긴장감은 이 저택의 모두가 조금씩 느끼고 있었다. 남녀의 문제란 이다지도 즐겁다. 킥킥 웃으며 캐런은 말들을 둘러보았다. 성체의 말들은 하얗고 윤기가 흘러 보기 좋았다.

“얼마에 파세요?”

“말은 팔지 않아요. 가끔 한 마리씩 선물은 한답니다.”

“하긴… 저 정도의 품종이면 교배 비용만 하더라도 상당하겠어요. 절대 외부로 반출하지 마세요. 상당히 탐이 나네요.”

하이어저의 말들은 대부분 성체가 되면 하얗게 변하는 종이어서, 이셀라 또한 말들이 마음에 들었다. 하얗고 똑똑하니 동화에나 나올 법한 말들 아닌가.

“예쁘기도 하고, 체격도 좋군요. 이 정도면 일반 경매장에는 당연히 내놓아서는 안 될 테고…. 매우 참… 탐이….”

이셀라의 눈은 계속 레이몬드를 향해 있었다. 교배의 주체가 말이 아니라 저 남자인 것처럼. 캐런은 이셀라의 입에서 침이 떨어질 것 같아, 재빨리 말을 걸었다.

“이셀라의 박식함은 참으로 놀랍네요.”

레이몬드가 문제가 아니라, 이셀라가 과연 제대로 된 연애를 할 수는 있을까? 캐런은 그것이 궁금했다. 이셀라의 가장 큰 단점인 눈치 없음은 가끔 이렇게 캐런조차 짜증나게 만들었다.

“에반스 양은 꽤나 말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승마도 그런가요?”

이셀라가 말에게만 관심 있는 척하면서 레이몬드의 주변에 다가가자, 그가 이셀라에게 말을 건넸다. 이셀라의 관심이 그에게 집중되자 캐런은 슬쩍 몸을 빼냈다.

“네? 네. 자신 있어요. 어릴 적부터 승마에 재능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저런 자기자랑은 그리 좋지 않을 텐데. 이셀라는 저렇게 관계에 능숙치 못하다. 캐런이 쯧쯧 혀를 찼다. 어쨌든 100년간 반복해 왔듯이 이셀라가 얼굴을 붉히며 레이몬드에게 자기자랑을 늘어놓는 동안 캐런은 마차에 오르기 위해 기다렸다.

캐런은 아직 말을 타지 못한다는 설정이다. 게다가 말보다는 마차를 타고 편히 가는 것을 더 선호하는 캐런으로서는 승마 실력을 자랑하는 이셀라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오죽 자랑할 것이 없으면…. 사냥터로 가는 길은 마차 안에서 봐도 충분히 아름답다.

레이몬드는 이셀라에게 붙잡혀 있도록 내버려 두고, 캐런은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 마저 하인들이 가져온 짐을 점검했다. 사냥을 하려면 하루 종일, 아니 목표를 채우려면 며칠은 걸릴 것이다. 자신들이야 저택을 오고 가겠지만 사냥꾼들은 그곳에서 계속해서 일을 해야 하니 총탄과 덫 등의 개수를 확인해야 한다.

실질적으로 가장 중노동을 해야 하는 제논은 말이 아니라 마부의 옆에 편하게 앉아 담배를 피우며 잡담을 하고 있었다. 제물용 짐승보다는 여우가 잡혔으면 좋겠는걸. 캐런은 덫을 보며 소망했다. 늦가을의 도시는 꽤나 쌀쌀하여 한 겹의 얇은 옷 위에 모피를 걸치는 것이 유행할 것이다.

“덫은 충분해요?”

“어, 아, 예. 남아돕니다.”

“그럼 곤란한데.”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적당합니다.”

“그럼 다행이고.”

캐런이 말을 걸자 제논이 당황하며 대답했다. 총탄과 도시락까지 훑어보며 캐런은 이제 출발하자는 신호를 보냈다. 마부가 톰에게 손짓하자 톰이 그에게 다가왔다. 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마부는 그를 퍽 귀여워했다. 제논도.

아이에게 보내는 순수한 애정. 캐런은 자신이 톰을 거둔다고 말했을 때 하녀들이 은근히 그에게 보내던 혐오감을 기억하기에 그런 행동이 묘하게 느껴졌다. 같은 성별에게 갖는 감정은 또 다른 것인가. 자신과 이셀라 사이에는 그런 감정이 없었는데.

“이런… 발판이 부서졌구먼요.”

“관리 제대로 안 하지?”

아는 바니 그리 놀랍지는 않다. 마부가 머리를 긁적이며 ‘그럴 리가 없는데…’ 하며 변명하는 것을 한 귀로 흘리고, 툴툴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아.”

캐런은 허공을 바라보았다. 손이 없었다. 원래는 레이몬드가 와서 부축을 해 마차 안으로 들어가는데. 심지어 그와 결혼하지 않았어도 한 번도 부축을 안 받은 적은 없었기에 기분이 이상했다. 약간 불쾌하기도 했다.

‘왜지?’

분명 변화는 즐겨야 할 텐데. 캐런은 자신이 불쾌함을 느낀다는 것이 불쾌했다. 레이몬드가 옆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다.

캐런은 멀뚱히 서 있는 톰을 손짓해 불렀다. 레이몬드가 없으니 이런 때는 마차 시동이라도 써야지. 하지만 캐런은 자신보다도 조그만 소년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다시 마부의 도움을 받아야겠군.

“톰, 다시 래리에게 가.”

“…….”

“톰?”

“엎드리지 않고 뭐하지?”

차가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레이몬드 경?”

그는 캐런을 보고 있지 않았다. 서늘한 눈동자는 캐런이 아닌 톰을 향하고 있었다. 저 치가 웬일이지. 그는 본디 저 소년과 말도 섞지 않았는데. 톰이 흠칫거리며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동작이 굼뜨군.”

이해는 캐런보다 톰이 빨랐다. 캐런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뒤늦게 이해했다. 톰이 마차의 입구에 몸을 숙였다. 톰의 어깨가 긴장으로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왜지. 캐런은 기사를 그 순간 이해할 수 없어 쳐다보았다. 레이몬드는 고개를 돌려 캐런과 눈을 마주쳤다. 두 눈이 보기 좋은 호선을 그었다.

“어서 타세요, 캐서린 하이어.”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기사는 그녀가 아홉 살의 몸을 짓밟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

“어서요.”

캐런은 레이몬드의 손을 잡았다. 캐런은 톰을 밟으려고 하다가, 이내 발을 마차 안으로 더 높이 올렸다. 레이몬드가 이제까지 안 하던 행동을 하더라도, 캐런은 가능한 전에 맞춰야 한다. 그는 자신에게 반해야 한다. 캐런이 무리해서 발을 올리자 몸이 살짝 휘청였다. 그 몸을 레이몬드가 다시 잡아 올렸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감사를 받은 레이몬드는 미소를 띠며 마차의 문을 닫았다. 안쪽에서. 그는 캐런을 태운 뒤 그대로 몸을 숙여 마차에 몸을 실었다. 약혼녀를 밖에 두고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아직 우리는 이런 관계가 아닐 텐데? 캐런은 기가 차서 레이몬드에게 물었다.

“이셀라 양은요?”

“그녀는 승마가 좋다더군요.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 즐기도록 배려했습니다.”

얼씨구. 캐런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을 이셀라의 얼굴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창문을 보기가 무섭군. 머리의 타르는 당첨이다. 이제 썩은 음식까지 감안해 봐야 할 것이다.

“공간은 충분하니 축객령을 내리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레이몬드 경은, 왜 말을 타고 가지 않으세요?”

“제가 말을 못 탑니다.”

당신 기사거든? 캐런은 그의 미소에 할 말을 잃었다.

“…요즘 군대는… 말을 못 타도 되나 봐요?”

거짓말은 입에 침이라도 좀 바르고 하지 그러니. 레이몬드는 편하게 자세를 취하면서 웃었다.

“제가 부끄러움이 많아 처음 보는 말은 못 탑니다.”

“…네에.”

“내성적이지요.”

“…그러시군요. 캐런이라 불러 주세요. 캐서린이라는 이름은 거의 쓰지 않아 어색하네요. 어머니의 중간 이름이라서요.”

“예.”

캐런은 유달리 친숙하게 구는 그를 보며 떨떠름히 웃고는 창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

레이몬드가 이리 빨리 편하게 대하는 사람이던가. 캐런은 그가 사랑에 빠졌을 때 얼마나 바보 같을 정도로 굳는지 잘 알았다. 너스레를 떠는 레이몬드라니. 그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위치의 사람이다. 자신을 깎는 농담을 던질 필요가 없는 그런 사람.

“날씨가 좋군요.”

캐런은 레이몬드를 이전의 기억으로 판단하는 걸 접어 두었다. 이번 화두는 7점. 지나치게 무난하다. 캐런은 레이몬드의 옷으로 시선을 내렸다. 짙은 남색의 사냥복이 멋들어지게 어울렸다. 저건 또 누가 골라 준 걸까.

“그러게요. 기사님은 여름이 좋으신가요?”

“전 겨울만 아니면 다 좋습니다.”

“백색산맥의 겨울은 꽤나 혹독하지요.”

“정말 끔찍하게 추웠습니다.”

예전에 레이몬드가 침대에서 먼 과거를 회상하듯 중얼거린 적이 있었다.

“손가락을 잘라 버리고 싶더군요. 어딜 봐도 새하얀 눈밖에 없어서, 피를 내면 조금 낫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캐런의 새빨간 붉은 머리카락 끝을 들어 입을 맞추었다.

“전 당신의 머리색이 아주 마음에 들어요.”

“잘 아시는군요.”


 

“여성이 어디 갈 곳이 있어야죠. 그저 집 안에 앉아서 귀를 기울이거나 책을 읽는 것이 전부랍니다.”

캐런은 어깨를 으쓱였다.

“위험한 시대에는 안전한 곳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위험한 시대라. 지금도 백색산맥 너머의 나라들에서는 전쟁들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건 이 나라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차라리 캐런이 전쟁에 휘말리는 저 먼 곳의 사람이라면 자신의 지루함을 달랠 수 있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이런 생각을 말한다면 레이몬드는 화를 내겠지.

그러나 결국은 남의 일. 저 머나먼 곳에서 일어나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오후에 수를 놓으며 햇살 아래 금빛으로 춤추는 먼지를 보고 있다 보면 저 산맥 너머 어디서 누군가가 고통받고 있다든가 하는 일은 신경을 쓰지 않게 된다.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자들이 어떻든 그것은 이제 자신에게 유흥이다. 유흥으로 삼을 이야기가 종류가 희극이든 비극이든, 그녀에게 그 둘은 결국 무게가 같다.

캐런은 그에게 말하지 않았어도 그렇게 생각해 왔다. 사실, 자신은 백작 부인의 살롱에서 수군거리던 사람들의 의견에 더 무게를 둔다. 레이몬드가 참여한 전쟁은 명예로울 것도 없었고 이 나라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전쟁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산맥 너머 나라들이 지원을 요청하자 등 떠밀려 나간 군인들. 죽건 말건 상관없는 자들을 모아 놓은 것이 레이몬드가 속한 군대였다. 대부분 그랬다. 귀족가의 삼남, 또는 사남들, 몰락한 중류층의 자제들, 그리고 이 기회에 좀 더 큰 기회를 얻고 싶어 하는 청년들, 돈이 없어 지원하는 하류층의 사내들.

나라로서는 적당한 체면치레를 할 수 있는 수준의 병력만을 보내면 되는, 그 정도의 전투. 남의 나라의 전쟁.

베르딕은 그 전쟁으로 큰 이득을 얻었지. 로튼 백작 부인도 은근슬쩍 채굴권을 얻었고, 노링 남작은 전투들을 놓고 대규모의 도박을 열었다. 이 나라에서는 그 정도의 무게. 그뿐인 비극.

하지만 레이몬드는, 당사자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으리라. 자신이 속한 전쟁이 그런 소수의 이득과 체면을 위한 것이라는 말을 듣기는 원하지 않을 것이다. 캐런은 그가 원하는 것을 값싸게나마 주기로 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기사단의 노고로 이 땅의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었어요. 고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테니까.

“그냥 사람들의 죽음이 쓸모없는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너무나 기사 같은 당신은.

“그래서.”

캐런은 고개를 들지 않고 생각을 정리했다.

어디까지 의심하고 있을까?

그날 밤 자신이 어디까지 말했더라. 어디까지 봤을까 어디서부터 지켜보고 있었을까. 쓸데없는 걸 말하지는 않았을까. 얼굴을 들키면 안 됐는데. 톰을 거둔 건 괜찮은 판단이었나? 그날 얌전히 그냥 당할 것을 그랬나.

의심은 한번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간다. 물에 잉크를 탄 것처럼. 캐런은 레이몬드가 이제는 예전처럼 순수하게 그녀에게 반해 다가왔다고 볼 수 없었으며, 레이몬드 또한 캐런이 그러리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을, 어디까지 의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에 대해 잘 아시는군요.”

“이 표정으로 잘도.”

“왜 그러셨어요?”

“무엇을 말입니까?”

“왜 제가 톰을 밟기를 원하셨나요?”

캐런은 레이몬드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하지만 잘 만들어진 미소는 곧 멀쩡한 귀족의 얼굴을 하고 이어졌다.

“당신에게 바란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톰에게?”

“그 아이는 무슨 착각을 하는 것 같더군요. 캐런, 저도 베르딕의 의견에는 동감합니다. 원한을 가질 수 있는 관계는 안 맺는 게 좋습니다.”

“그거에 대한 답이라면 이미 했다고 생각해요.”

전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어요. 원한은 선의로, 악의는 용서로. 캐런은 그 말을 되풀이했다.

“눈빛이 당신의 선의에 감복하지는 않은 것 같더군요. 정 베풀고 싶다면 부엌으로 보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부엌이 더 위험하지 않겠어요?”

캐런이 웃자 레이몬드가 약간 얼굴을 돌렸다. 시선 너머에는 소년이 있었다.

마차의 창 너머를 응시하며 레이몬드가 말했다.

“전 집안의 일은 잘 모르지만, 남자는 곧 강해지기 마련입니다. 4년만 지나도 당신보다 강해질 겁니다.”

한 달만 지나면 죽을 테니 상관없어.

“사람이 죽으려면 무슨 일로도 죽지 않겠어요? 호의에는 감사드리지만 이미 결정한 일을 이렇게 빨리 번복하고 싶지는 않아요. 이 이야기는 이걸로 그만하기로 해요, 레이몬드 경.”

캐런은 말을 잘랐다. 그리고 곁눈질로 레이몬드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히 그는 기분이 상해 보이지는 않았다. 선의를 베푸는 어린 아가씨의 역할을 무사히 해낸 캐런은 살짝 숨을 내쉬었다.

이 대화는 예전과 비슷했다. 톰은 몇 번 거두어져서 설거지하는 잡역 소년으로 일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레이몬드는 캐런에게 괜한 일을 하지 말라고 말했었지만, 그런 말과는 다르게 선하게 행동하는 캐런에게 탄복했었다.

“전쟁터에서는 아무도 믿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더욱 기대하게 됩니다.”

조금 울적한 얼굴을 하던 그를 기억한다.

“사람의 선의라든가, 용서라든가 하는 것들을요. 더욱 기대하게 됩니다. 같은 전우들 사이에서의 그런 게 아니라, 적군을 용서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을요.”

그건 절박할 정도의 갈구였다. 그리고 캐런은 그가 원하는 역을 충분히 해 주었다. 언제나 용서하고, 사랑하고, 따뜻이 마주해 주는 아름다운 소녀. 그럼에도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적절한 위치의, 괜찮은 계급의 여성.

“다음 생에도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못해요. 당신은 이미 …번이나.”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그냥 잘생겨서 봤어요.”

“…그렇군요.”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그렇게 맞추어 주었는데도 그는 그녀가 원하는 답을 주지 않았다. 삶도, 죽음도. 옛날에는 이 남자가 자신을 구해 주리라 생각했었지. 심해에서 높은 곳의 태양을 쳐다보듯이 자신도 그렇게 레이몬드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캐런을 구하는 것은 그가 아니었다. 태양은 그냥 태양이다. 시대는 변했다. 태양은 신이 끄는 마차에 의해 뜨고 지지도 않았고 신의 눈동자도 아니다. 그냥 빛과 열을 낼 뿐이며 그 빛은 심해의 생물에게는 너무나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캐런은 그의 앞에서 그가 원하는 역할을 연기할 것이다. 그에게 죽음을 선물하기 위해.

“거의 다 왔네요.”

“그렇군요.”

캐런은 이번에도 톰을 밟지 않고 내리려다 거의 넘어질 뻔했다. 자신을 보는 레이몬드의 시선을 느끼면서 자신의 행위가 어느 정도 의심을 가리길 바랐다. 그리고 다년간의 경험으로, 그가 이미 자신에게 끌리고 있음을 확신했다.

그 후 혼자 말을 타고 달린 이셀라가 부은 눈으로 자신을 노려본다든가 하는 건 사소한 일이었다. 이미 레이몬드는 그녀에게 거의 눈길조차 주지 않았으니까.

베르딕은 서류를 탁탁 치며 계산을 했다.

‘생각보다 지나치게 예산이 드는군.’

자신에게 이런 격정적인 면이 있을 줄이야. 자신도 모르게 들떠서 예산을 더욱 쓰고 말았다. 이래서는 하이어 영주만 좋은 꼴이다. 쯧. 베르딕은 혀를 차고는 당장 끌어당길 수 있는 자금을 살폈다.

“이건 좀 과하군.”

영주가 주름을 깊게 만들며 신음했다.

“우리 영주민들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텐데. 들인 돈의 원금도 회수하지 못할 거야.”

저 둔한 영주가 알아차릴 정도라니 자신도 갈 때까지 갔군. 베르딕은 자조했다. 하지만 나름의 대안은 있었다.

이셀라에게도 아직 말하지 않았지만. 이번 기회에 전부터 벼르고 있던 백작 부인도 끌어들일 것이다. 그녀도 마침 마차로 하루 걸리는 곳의 휴양지에 있을 터이지.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 정도의 귀족이 참석한다면, 약혼의 공증이나 다름이 없다.

“이건 어떻습니까?”

“이건… 아직 좀 이르지 않나?”

“영주님의 허락만 있다면 무엇이 이르겠습니까. 기쁘기 그지없을 겁니다. 이참에 영주님께서도 같이 하신다면 어떻습니까?”

이미 주객이 전도되었지만 최소한의 예의로 묻자, 다행히 영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직 너무 일러. 하지만 자네의 딸은 축복하겠네.”

“감사합니다.”

영주는 턱을 쓰다듬으며 기획안을 쳐다보았다. 큰 상관은 없는 일이다. 아니, 상징적인 것이나, 기분의 문제는 있다. 하지만 영주는 이미 자신이 반대를 할 입장이 아니라는 건 알 것이다. 베르딕은 그걸 알았다.

베르딕은 영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계급을 생각하면 상당히 무례한 짓이지만 영주는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아니, 지적할 수 없으리라. 이미 베르딕은 영주보다 더 큰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영주도, 베르딕도 그것을 안다. 그래서 베르딕은 이 상황이 재밌었다.

“괜찮을 겁니다.”

축제가 끝나는 마지막 날. 이 지역에서, 영주의 축복을 받으며 영주민들에게 진짜 지배자가 누구인지 보여 주면서. 베르딕은 울먹이던 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다시 웃는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레이몬드는 이셀라와 약혼을 해야 할 것이다.

이셀라는 사람들이 안 보이는 나무 뒤로 가서 코를 훌쩍였다. 말을 타고 너무 달려서인지 코가 시큰했다. 숨을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흡….”

하지만 눈물이 날 것 같다. 참아야 한다. 하지만 레이몬드가 이셀라와 같이 말을 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캐런과 마차를 탔다는 사실이 너무나 분했다.

“나쁜 년.”

이셀라는 입술을 물었다. 남의 남자에게 꼬리치는 나쁜 년. 레이몬드는 자신의 약혼자다. 아직 제대로 된 약혼식을 올리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서로 약혼이 예정되어 있었고, 가족끼리도 전부 약속한 사이였다.

이셀라의 아버지인 베르딕이 레이몬드를 위해 얼마나 많은 빚을 탕감해 주었던가. 어린 시절 어른들의 사정에 의해 맺어진 사이라 해도 레이몬드는 이제까지 내색하지 않고 그녀에게 맞춰 주었다. 이셀라를 존중해 주었으며, 생일이나 특별한 날이 있을 때마다 선물을 보내고는 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기가 높았지만, 스캔들은 하나도 없었다. 그 사실은 이제까지 이셀라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저 분과 결혼할 사람은 나밖에 없어.

레이몬드는 사람들이 없을 때는 이셀라의 손 한번 잡지 않았어도, 일이 없으면 자신을 따로 보지 않아도,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유일한 여자는 자신 하나고 그와 결혼하는 것이 자신이라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되뇌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왜 저 여자 앞에서 저렇게 노골적으로 친근하게 군단 말인가?

“…설마.”


 

이셀라는 괴로웠다. 캐런 하이어는 여자인 자신이 봐도 눈에 띄게 아름다웠다. 레이몬드가 위험에 처한 캐런을 구했다고 한 뒤로, 이셀라는 계속 불안한 눈으로 그들을 봐야 했다. 레이몬드는 눈에 띄게 자주 캐런 앞에서 소리 내어 웃었다. 자신보다 캐런과 같이 있는 시간이 이상하게 더 많았다.

이셀라가 마차를 타지 않고 승마복을 입고 말을 탄 것은 레이몬드의 옆에서 말을 타기 위해서였다. 이 저택에 오고 나서, 레이몬드가 자신보다 자꾸만 캐런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신경 쓰였던 것이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이셀라의 옆에서 말을 달리는 것 대신에 캐런과 마차를 타고 왔다.

캐런이 그를 유혹한 것이다. 마차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무슨 행동을 했을까. 이셀라는 신경이 쓰였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갖가지 망상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오늘 내에 전부 끝날 겁니다.”

“장담하지 마세요. 보통 일주일은 걸려 잡을 양인걸요. 너무 허세부리시다가 부끄러워하실걸요?”

멀리서 캐런과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셀라는 바로 끼어들려고 하다가 자신의 눈가가 부어 있을 것 같아서 다시 나무 뒤로 숨었다. 그리고 심호흡을 했다.

‘넌 네 말더듬이 약혼자나 껴안으라고!’

이셀라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캐런에게 어울리는 남자는 그 정도 아닌가. 왜 그 남자는 캐런과 같이 오지 않았는지 이셀라는 모든 일 하나하나에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덫은 충분한 거겠지?”

“가까이 오지 마십쇼. 위험하니까.”

캐런은 어느새 레이몬드가 아닌 제논과 이야기를 하면서 덫을 살펴보고 있었다. 이셀라는 바로 나가기가 아직 힘들어서 나무 뒤에서 엿듣고 있었다.

“덫이 너무 작아 보이는데… 이걸로 충분할까.”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발목을 채면 그 뒤로 다 같이 총을 쏘면 되는 문제니까요. 너무 크면 짐승들이 눈치를 잘 채서 걸리지가 않습니다.”

“제사용인 거 잊지 마. 가능한 상처 없이 잡아야 해.”

“이런… 그건 깜빡했는데. 노력하겠습니다요.”

캐런은 덫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이셀라는 사냥에 그리 관심이 없었기에 덫이나 총기 하나하나를 점검하고 다니는 캐런이 이상해 보였다. 사냥은 여자들의 몫이 아니다. 비교적 활달한 편인 이셀라도 승마 정도는 즐기고, 여우 사냥 정도는 같이 따라가고는 했지만 사냥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자신들은 남자들이 사냥감을 잡아 오면 열심히 칭찬하고, 모피를 선물해 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아니면 하녀들과 같이 식사 준비 하는 것을 돕는 정도였다. 하지만 캐런은 사냥 그 자체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지역의 유지 정도 되면 저런 것도 신경 써야 하나?’

이셀라는 캐런이 묻는 행동을 힐끔거리며 보았다. 지금은 캐런이 영주의 딸로서, 땅의 주인으로서 행동하고 있지만 조만간 저 몫은 이셀라의 것이 될 터였다. 베르딕은 영주의 권리는 죄다 가져오더라도 일종의 얼굴 마담으로 그들을 살게 할 생각인 것 같았지만, 이셀라의 생각은 달랐다.

철저하게 전부 쫓아내야 한다.

그리고 캐런을 볼수록 그 생각은 굳어졌다. 캐런 하이어를 여기에 내버려두면 안 된다. 저런 여자를 옆에 두면 레이몬드를 빼앗길 가능성이 높다. 레이몬드가 성실한 남자라고 하더라도 캐런 같은 여자가 유혹하면 누가 넘어가지 않을까. 이셀라는 자꾸만 꿈에 나오는 캐런이 무서울 지경이었다. 자신이 질투하는 것이 너무 심해서 그런 것일까. 점점 캐런에 대해서 생각을 깊게 하게 된다. 불쾌한 일이었다.

“이셀라, 거기서 뭐 하세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셀라는 자신을 부르는 캐런에게 놀랐지만 그래도 급하게 정신을 차리고 얼른 나무 뒤에서 나왔다. 생각을 깊게 하느라 어느새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레이몬드 경은 어디로 가셨나요?”

“숲으로 사람들과 같이 사냥하기 위해 가셨어요. 출발한 지 좀 됐는데 계속 거기 있었나요? 아까 찾았는데.”

“…그랬군요.”

거짓말. 아무리 그래도 이셀라가 그 주변에 있었는데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못 들었을 리가 없다. 캐런은 분명히 레이몬드에게 꼬리칠 시간을 늘리기 위해 이셀라를 빼놓은 것이다. 이셀라는 캐런을 흘겨보면서 나와 캐런의 옆에 섰다.

내가 네 속셈을 모를 줄 알고? 이셀라가 자신을 노려보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캐런은 하녀들이 테이블 위에 차리는 것을 확인하면서 동시에 주변의 덫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셀라는 캐런에게 다가갔다.

“캐런 양은 사냥에 관심이 많나 봐요?”

“예, 아주 많은 건 아니지만… 이 지역이 산이 울창해서 짐승들도 많이 나온답니다. 축제 때마다 대규모로 사냥 준비를 해도 꼭 매년 다치는 사람이 나와요.”

“어떤 동물이 있는데요?”

“다 있지요. 곰, 늑대, 여우…. 이 시기의 곰은 아주 성격이 더러워서 잘 잡아야 해요. 사람을 습격하는 일도 많아서.”

“그럼, 이 장소도 위험하지 않나요?”

이셀라는 약간 오싹해져서 주변을 보았다. 숲은 아주 울창했다. 울창하다 못해 길이 나 있지 않은 쪽은 빽빽하게 나무들이 나 있어서 밤처럼 어두웠다. 캐런과 이셀라가 있는 곳은 나무들을 전부 베어내어 공터를 만들었지만, 이셀라는 어둠 저편에서 곰이 나올 것을 생각하면 진저리가 쳐졌다.

“충분히 덫을 설치해 두었고 여기를 지킬 사람들도 충분하니까 괜찮아요. 그렇게까지 위험하지는 않답니다. 동물들도 위험한 곳에는 잘 오지 않으니까요.”

동물들도 사람들을 피하려고 하기 때문에 괜찮다. 캐런은 그렇게 말했지만 이셀라는 레이몬드가 없자 영 불안한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지금 이곳에 있는 하인과 하녀들은 전부 캐런의 사람들이지 이셀라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에 불안해하는 것도 지나친 망상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셀라는 담대해지고자 애썼다.

“동물들이 오면 바로 덫에 걸릴 테니 그렇게 무서워하지 말아요.”

캐런이 이셀라를 보며 웃는다. 이셀라는 그 얼굴이 마음에 안 들었다. 자신이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시선이었다. 이셀라는 돌아서 나무 뒤쪽으로 향했다. 옷매무새를 다듬고 싶었다. 승마복 안에 코르셋을 너무 조였는지 답답했다. 끝의 매듭만 살짝 풀어야지.

“안 무서워해요.”

“그렇군요. 하지만 너무 나가지는 말아요.”

“캐런, 남의 일에 신경 쓰지 말아요!”

이셀라가 짜증스레 외쳤다.

“거기서 더 나갔다가는 발목이 썰릴 텐데요?”

“……!”

이셀라는 발걸음을 멈췄다. 자신의 한 발짝 앞에 흉흉한 덫이 있었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요? 위… 위험하게!”

“말했잖아요?”

캐런은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이셀라는 웃을 수 없었다. 덫의 칼날은 무척이나 날카로워 이셀라의 발목을 정말 아작낼 정도였다. 정말 이셀라는 발목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가벼울 수가 있지? 하지만 이셀라는 주변의 시선에 더 말하기가 힘들었다. 하녀들은 전부 자신을 곁눈질하면서 한심하게 보고 있었다.

“…마차 안에서 옷을 좀 고쳐 입겠어요.”

“알았어요, 도와줄게요.”

캐런은 이셀라의 뒤를 따라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타악.

마차 문이 닫히고 이셀라의 등 뒤에 캐런이 섰다. 캐런의 손가락이 이셀라의 승마복 뒤의 단추를 풀었다. 하나하나 풀어내자 손가락이 이셀라의 등에 닿았다.

“…….”

기분 나빠.

차가운 손가락이 등에 닿는다. 세심한 손가락인데도 이상스럽게 불쾌했다. 이셀라는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캐런이 싫은 걸까. 레이몬드가 그녀에게 관심을 보여서? 물론 그것도 맞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이셀라, 코르셋 끝만 풀었다가 다시 묶을까요?”

“…예, 그렇게 해 주세요.”

이셀라는 참았다.

어쩌면 그날이라서 그럴지 모른다. 이셀라는 유독 생리통이 심한 편이었다. 그 전날만 되면 두통과 요통에 시달렸다. 기간 내내 복통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이었다. 이제 할 때도 되었다.

“…좀, 살살… 부탁드려요.”

“네에.”

이상하다.

이셀라는 소름이 끼쳤다.

이셀라는 생리 주기가 규칙적인 편이었다. 그리고 이제 곧 생리를 할 때가 되었다. 자신이 익숙한 생리통에 시달리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피가 비치는 것을 생각하자 있어서는 안 될 피가 생각났다.

“침대와 치마에 피가 묻었군요?”

어라.

캐런이 말해서 이셀라는 납득했다. 자신이 잘못 본 것이었다. 갑작스럽게 피가 묻은 것이었다. 분명 자신의 치마에 묻은 피를 보지 않았는가. 하지만….

“다 끝났어요.”

이셀라의 치마에는 피가 묻었지만, 침대에도 피가 묻었지만, 속옷에는 피가 묻지 않았다. 검은 하녀의 시체를 본 그날, 자신이 시체를 보았다고 생각한 그날 밤이었다. 깨끗하게 세탁된 치마를 보면서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때 이셀라는 자신이 생리통에 누워있었다고 생각했지만 그 다음날 옷에는 아무 흔적이 없었다. 생리 주기도 때가 맞지 않았다. 자신은 그것이 생리혈이라고 억지로 생각했지만 아니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피는 자신의 피가 아니었고 누군가의 피가, 자신의 옷과 침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누군가라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단 한 명이다. 캐런과 항상 함께 있던 낸시라는 여자다.

“…캐런, 그… 도나라는 애는 어떤가요? 새로 당신 곁에 있는 하녀 말이에요.”

“도나요?”

캐런이 왜 그것을 묻냐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빙그레 웃었다.

“괜찮은 아이죠.”

왜?

이셀라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전담하녀는 하루 종일 붙어 있다. 아침을 깨우고 옷을 입히고 단장을 돕는다. 사소한 일 하나하나 옆에서 도우며 자기 전까지 주인의 비위를 맞추어야 한다. 그리고 분명 캐런은 그날, 불편했던 저녁 식사에 낸시가 갑자기 그렇게 나가다니 서운하다고 했다. 그녀도 낸시가 사라졌다는 것을 공식적으로는 처음 듣는 것이다.

왜 괜찮지?

자신과 하루종일, 몇년 내내 붙어다닌 여자가 말도 없이 사라졌는데 별다른 소동도 없이 하녀를 바꾸고 끝낸다고? 이셀라는 목걸이 하나가 없어져도 그렇게 난리를 피웠다. 당연히 사람이 사라져도 그럴 것이다. 하녀는 자신의 소유물이니까. 재산이니까.

“도나는 꽤 착하고 귀여워요.”

캐런은 웃으면서 마차의 문을 열었다. 밖에 서 있던 시종이 그녀를 부축해 내렸다. 이셀라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신의 수발을 오랫동안 든 하녀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도 아무 상관없는 여자.

그냥 냉정하다고 하기에는 저 서투른 하녀에게도 더없이 친절했다. 캐런은 모든 사람들에게, 사용인들 하나하나에게도 친절했다. 그런데 왜… 낸시가 사라진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일까.

이셀라는 속이 불편해졌다.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네.”

“…….”

듈란은 의자에 널브러져 앉아 있다가 캐런을 보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축제가 이어지는 7일간 그는 매일 번제물을 한 마리씩 골라 대중 앞에서 목을 따고, 피를 내고, 불을 붙인다. 피와 약에 찌들어 있는 그와 달리 캐런은 화사했다. 듈란은 그런 캐런을 못마땅한 얼굴로 보며 말했다.

“…하, 한가해 보이는군.”

“레이몬드 경이 워낙 능력이 좋아서.”

캐런은 어깨를 으쓱이며 해부된 토끼를 보았다. 신관은 축제기간 동안 도살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 신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신자가 손에 피를 묻히다니 아이러니했다. 꽤나 긴 준비 기간이 필요해 보였던 제물 준비는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이주 정도를 예상했던 준비 기간이 레이몬드와 제논의 합세로 3일 만에 끝나 버린 것이다. 남은 준비 기간 동안 부친을 만나 낸시에 관해 흔적을 뒤질 예정이었던 캐런은 예상치 못한 일정 변화에 그 계획을 접어야 했다.

물의 네 번째 날, 이셀라와 레이몬드의 약혼식이 열린다.

그 일정은 저택 전부를 뒤집어 놓았다. 일은 몇 배로 많아지고 고용인들, 하인들은 거의 뛰어 다닐 정도였다. 그렇지 않아도 예년보다 성대한 축제에 약혼식이라니.

캐런으로서도 예상치 못한 약혼식이었다. 이 기간에 약혼이라니. 그것도 이셀라와 레이몬드의. 이제까지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다. 어떤 부분에서 베르딕이 이셀라의 투정을 들어줄 정도로 무리하게 만들었나 생각하니, 더욱 흥분이 되는 것이다.

낸시의 죽음이 이셀라를 무섭게 하고, 레이몬드의 냉담은 그녀를 더욱 불안에 쫓기게 만들었으며, 베르딕은 그녀를 달래기 위해 100년간 없던 무리를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흥분이 되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 가 결혼할 것이 아쉽나?”

“약간은.”

캐런은 킬킬거리며 듈란의 어깨를 주무르다가 목에 팔을 감았다.

“잘생겼잖아? 능력도 좋고, 부자고.”

팔에 힘을 주었다. 이대로 목 졸려 죽지 않으려나. 물론 그 미약한 기대는 듈란이 그리 큰 힘도 안 주고 부숴 버렸다. 캐런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듈란은 캐런의 팔을 가볍게 풀어 버렸다. 나름 강하게 힘을 주었는데도. 남자와 여자의 힘은 정말 큰 차이가 난다.

“내 포옹을 거부하다니. 슬퍼요.”

“…미친.”

듈란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리 기분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이번 회의 듈란은 지난 기간보다, 심지어 결혼을 했을 때보다도 묘하게 여유가 있어 보였다. 그것이 캐런은 그리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몸을 섞은 남자들이 보이는 미묘한 여유가 우습기에. 슬슬 질투를 좀 더 보여 줬으면 좋겠는데. 오히려 레이몬드와 이셀라의 약혼식이 그의 신경을 무디게 만드는가. 그렇다면 매우 마음에 안 드는 일정이다.

“…재… 의 4일 동안은 몸을 정, 정결히.”

무슨 기대를 하는 거야? 캐런은 듈란의 머리를 세게 잡아당겼다. 약한 신음이 들렸다.

“윽.”

“머리에 새치는 없구나.”

“너, 너 진짜.”

좀 더 질척이는 감정을 보여 주길 바라는데. 하지만 지금은 더 흥미로운 일을 찾은 캐런으로서는 듈란의 질투보다 더 급한 것이 있었다. 레이몬드가 일을 빨리 끝내 주었으니 이 틈에 아버지의 서재와 낸시와 관련된 일들을 뒤질 수 있으리라.

그건 레이몬드의 약혼식보다 더 흥분되는 일이었다.

“지금 빈둥거리는 건 너거든? 아무튼, 아버지가 너무 바쁘신지 볼 틈이 없는데. 시간 좀 내 달라고 해 줘. 식사시간에도 안 나오시니 볼 수가 없잖아?”

“…영주님은 바쁘시다.”

“그러면 서재 열쇠 좀.”

“…왜?”

“헬렌이 안 가지고 있다던데? 대체 가정부가 안 가지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니?”

“서, 서재는 열려 있을 텐데.”

“그 서재 말고, 아버지 개인 서재 말이야. 아버지 것 말고 다른 하나는 네가 가지고 있다던데.”

듈란이 머리를 짚으며 인상을 썼다.

“…거긴 왜?”

하지만 이미 대답을 준비한 캐런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어머니 초상이 보고 싶어서. 이 집에서는 다 치워 버렸잖아.”

“…괜히 물건 없어지면….”

“너 뭘 착각하는 거 같은데, 결국 내 집이거든?”

듈란은 눈동자를 한 번 굴리더니 책상 서랍에서 열쇠 하나를 꺼냈다. 복잡하게 생긴 것이 복제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듈란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캐런은 바로 열쇠를 아래로 내리고 그에게 물었다.

“내일도 도살?”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라. 신실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미안.”

듈란은 캐런이 사과로 말을 잘라 버리자 좀 더 입을 뻐금거리다가, 설교를 포기하고 말을 이었다.

“…저, 정확히는, 내일부터. 오늘은 곡식 제사였으니까.”

“그럼 저건?”

“…연습.”

“냄새 장난 아니다. 아냐, 굳이 지금 씻을 필요는 없어. 내일은 나갈 거야. 그걸 말하려고 왔어. 레이몬드와 에반스 양과 함께. 아, 레이몬드 경. 체리목 마차는 쓰지 말라구. 내일 쓸 테니까.”

“꽤, 나 친숙히 부르는군.”

“질투하니?”

좀 해라.

하지만 듈란은 캐런의 기대를 배신했다. 그는 그저 인상을 쓰며 캐런을 비난했다.

“…그, 그렇게 단순히 취급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뇌가 있다면 말이야. 캐런 하이어. 에반스 양도 약혼식 준비… 를 해야 할 터.”

“그녀가 내게 기회 좀 만들어 달라던데.”

물론 거짓말이다. 이셀라는 그녀에게 축제 구경하기 좋은 곳을 추천받고 나서는 절대 같이 있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었다. 같이 나가서는 따로 돌아올 계획이었다. 그럼 그녀만이 저택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이기 쉬우리라. 그러니 듈란은 같이 나간다고 아는 편이 캐런으로서는 편하다.

“네게? 부탁을?”

듈란은 이셀라가 부탁을 했다는 부분이 이해가 가질 않는지 얼굴을 돌려 의문에 찬 표정을 보여 주었다.

“레이몬드 경은 그녀가 영 마음에 안 차는 모양이더라.”

“…그러던가?”

“남에게 티낼 정도는 아니지만. 당사자들이 그런 걸 어쩌겠어. 아무튼, 축제 기간 때 레이몬드 경이랑 나갔다 오려고. 우울해 보이는 손님을 돌보는 것도 내 의무 아니겠어? 둘을 맺어 주는 것도 우리 영지에 도움이 될 테고.”

“…오히려 죄의 불씨를 던져줄 계기가 될 것 같군.”

그럼 더 좋고. 어깨를 으쓱하며 씩 웃자 듈란은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그도 너무 피곤했던 것이다.

“아니, 왜 또 너희는 따라오는 건데?”

“네? 아가씨, 듈란 님께서 레이몬드 님과 에반스 님이 같이 시간을 보내면 아가씨가 혼자일 테니 같이 있으라고….”

귀찮아 죽겠네. 캐런이 인상을 쓰자 도나가 울상을 지었다. 보웬은 먼 곳을 바라보았다. 이래서는 혼자 먼저 저택으로 돌아가 서재를 뒤지는 것은 무리다.

“이 좀생이가….”

“돈은 넉넉히 주셨습니다.”

캐런은 보웬의 다리를 양산으로 툭툭 쳤다.

“몇 번이고 말하지만 말이야. 듈란은 아직 영주가 아니란다?”

도나가 눈치를 보며 뒤로 살그머니 빠졌다.

“그리고 난 안주인이지. 그 돈을 듈란이 주었다는 듯이 말하지 말라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하인들은 안주인인 캐런의 소속이 아니라 그런지 하녀들과는 달랐다. 보내는 시간도 적었고 동선을 파악하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보웬을 타박한 그녀는 도나에게 웃는 얼굴로 말을 건넸다.

“그럼 우리 데어 부인에게나 가볼까?”

새로운 마부는 전임자의 사례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였다. 딱히 사고를 칠 생각도 없는 캐런은 그저 얌전히 데어 부인의 집으로 가는 마차에 앉아 있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고용인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도망 안 간다니까.”

“안 믿어요.”

“어휴.”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도 도나는 입을 앙다물며 고개를 저었다.

“데어 부인 이야기나 해 봐.”

“저보다는 아가씨가 잘 아시잖아요.”

그러게. 머리끝을 꼬았다.

“뭐라 말하지?”

마차는 너무나도 빨리 그녀의 집에 도착했다. 여기가 그렇게 고생을 하고도 도착하지 못했던 데어 부인의 집이군. 고풍스럽지만 영주의 가정교사가 사는 집이라기엔 좀 볼품이 없었다.

“왜 이리 낡았어?”

“…아가씨. 그래도 이만하면 꽤 좋은 집이에요…. 시내와도 가깝고.”

“시내랑 가까우면 시끄럽잖아.”

“마차를 탈 필요가 없이 바로 이동할 수 있잖아요. 치안도 더 낫고.”

“그런가….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치안이 더 좋은데?”

“서로 감시가 되니까요.”

“고용인들이 많은 게 낫지 않나?”

“음… 그… 돈이….”

두 소녀가 수군거리는 걸 듣다 못한 보웬이 말을 끊었다.

“들어갑니다.”

“자, 잠깐”

그러고는 보웬은 캐런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문을 두들겼다. 남루한 하녀 하나가 나와서 정체를 묻더니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급하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중년 부인 하나가 나왔다.

도나가 먼저 예를 표했다.

“안녕하세요.”

이 여성이 데어 부인인가. 캐런은 양산을 접고서는 치마를 들어 인사를 했다. 인사를 하며 발끝부터 머리까지를 훑었다. 지난 기간 동안 한 번도 본 기억이 없는 여성이었다.

그리 중요한 인물도 아니니 어쩔 수 없나. 하지만 인상조차 평범한 건 약간 실망스러웠다. 기대를 깨는 것은 좋지만 예상외라고 해서 항상 흡족한 것은 아니다.

데어 부인은 발그레한 볼과 흰머리가 약간씩 비치는 갈색 머리의 통통한 중년 부인이었다. 평범한 인상이 오히려 의외였다. 비밀이라거나 음모 같은 단어와는 아주 멀어 보였다.

“캐런?”

“네….”

“세상에….”

부드러운 인상의 중년 부인이었다. 가정교사를 하기 그럴듯한 인상.

데어 부인은 거의 뛰다시피 캐런에게 달려왔다. 그러고는 말할 틈도 없이 캐런을 끌어안았다.

“캐런? 너 맞구나.”

당황해서 밀어내려던 손을 멈췄다. 숨이 막힐 정도로 세게 끌어안은 여인은 한참 뒤에야 캐런을 풀고 감격에 젖은 얼굴로 캐런을 바라보고 손을 마주잡았다.

“정말 오랜만이구나.”

처음 보는 캐런으로서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날 기억하니?”

대답이 어려운 질문이었다. 이번에도 그저 웃기만 할 수밖에. 캐런이 웃었다.

“하긴 오랫동안 못 봤으니까.”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는걸요.”

도나는 분명 나간 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고 했지.

“캐런.”

“네. 데어 부인.”

“날 기억 못하는구나.”

데어 부인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온화하던 인상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 얼굴은 분명 어떠한 뜻을 포함하고 있어 캐런은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아직도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니?”


 

“너는 기억을 잃었다.”

가까이에서 도나나 보웬에게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꺼낸 한마디는 캐런의 뇌를 거침없이 헤집었다. 기억을 잃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무슨 소리지. 너는 기억을 잃었다. 이제까지의 모든 기억을 뒤집는다.

누구지, 이 여자는. 왜 이제까지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으면서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이 여자는 자신이 던진 말이 어떤 건지 알까.

“어서 들어오렴. 너무나 오랜만이야. 정말”

데어 부인의 발걸음을 따라 어두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외관은 낡았지만 안은 깔끔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관리할 수 있는 정도로 깔끔하다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면 벽지도 빛이 바랬고 나무로 된 바닥은 오래되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삐걱였다. 그 소리는 더욱 캐런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온 적 없는 장소, 처음 보는 사람, 그 모든 것이 불편했다.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차를 마시고 싶었다.

“어서 차를 내오렴, 가장 좋은 찻잔으로!”

부인이 지시하자 하녀가 허둥대며 부엌으로 사라졌다. 캐런은 문가에 서 있는 보웬과 도나에게 손짓했다.

“도나, 보웬. 나가서 축제를 즐기는 것이 어떻겠어?”

“아가씨를 어떻게 믿고요.”

도나가 볼멘소리로 답했다.

하지만 캐런은 얼굴을 굳혔다. 지금 너희들에게 신경 쓰고 싶지 않아. 그럴 여유가 없단 말이야.

“사제 간에 나눌 말이 많아. 워낙 오랜만이란 말이야. 손님방에 머물고 있으면 되잖니.”

“…미안하다만 캐런, 우리 집에는 손님방이 없어. 하녀가 쓰는 방에 같이…?”

도나는 부인의 하녀가 입고 있는 더러운 옷을 경멸스럽게 쳐다보며 기겁했다.

“저, 절대 싫어요. 그렇다면 그냥 같이 시중을 들게요.”

예의 없는 소리까지 하며 도나가 거부를 했지만 다행히 큰 소리가 나기 전에 보웬이 도나의 어깨를 잡고 끌었다. 저택에 돌아가면 헬렌에게 도나의 태도에 대해 일러두어야겠군. 캐런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보웬이 볼 수 있도록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나가.

“오후 티타임 무렵에 오도록 하겠습니다. 도나, 나와.”

“히잉….”

“어서.”

둘을 쫓아내자 하녀가 한결 풀린 표정으로 차와 다과를 담아 나왔다. 그 이유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찻잔이 모자랐던 것이다.

데어 부인이 손을 맞잡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캐런은 그제야 자신이 해야 할일에 집중했다.

“넌 날 기억 못하는 거니?”

이 여자에게 어디까지 말해야 하지? 캐런은 입을 다물고 눈을 깜빡였다. 불안했다.

“그럴 줄 알았어. 역시 하이어 부인이 돌아가시고 나서 이 모양이라니까. 영주님은 영….”

지금 이 여자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데어 부인 쪽으로 눈이 돌아간다. 물어야 한다.

“어머니가 왜 나오죠?”

생각보다 목소리가 더 날카롭게 나갔다.

“어디까지 알고 있니?”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그녀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아쉬운 건 이쪽이다. 캐런은 주도권을 잡기 위해 말을 돌렸다.

“부인, 전 지금 굉장히… 당황스러워요.”

캐런은 눈을 내리깔았다. 지위와 집을 보면 이 중년 부인은 영주에게 제대로 된 연금을 받지 못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일반적으로 시집가지 않은 가정교사는 일이 끝나면 다른 집으로 소개를 받는다. 영주 정도의 입지가 있는 자라면 더더욱. 만일 적당한 곳을 구하지 못했다면 연금을 주며 머무는 것이 당연하다. 같이 사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 집의 상태를 보면 평범한 경위로 집을 나오지 않았음을 유추할 수 있었다. 영주의 외동딸을 가르쳤던 가정교사가 이런 생활을 한다는 것은 사정이 있음이 뻔하다. 영주의 눈 밖에 난 것이다.

“절 캐내려고 하지 말고, 당신이 아는 걸 말해 줬으면 좋겠군요.”

“네가 어디까지 아는지를 알아야 내가 말하지.”

“부인.”

당황해도 수십의 하녀를 부리며 100년을 살아온 캐런이다. 캐런은 눈을 똑바로 뜨며 데어 부인을 쳐다보았다.

“난 기억이 끊겨져 있어요. 알고 있는 것을 말해 줘요. 난 지금 굉장히 괴로우니까. 그리고 절 도와주신다면 전 반드시 그 보답을 하겠어요.”

“…그런 부분은 여전하구나.”

데어 부인은 찻잔을 내리고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녀도 긴장한 것이다.

“어릴 때부터 넌 그랬지.”

그리고 캐런은 모르는 과거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조숙한 감이 있었어. 머리가 좋았지만… 그렇다고 학자 같은 총명함은 아니었지. 또래의 귀족 아이들과도 좀 달랐어. 캐서린이 키워서 그랬나.”

“어머니와 친분이 있으셨나요?”

“캐서린은 기억하니?”

“잘… 아뇨, 아예 기억할 수 없어요.”

데어 부인은 먼 곳을 그리듯이 몽롱하게 눈앞의 캐런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통해 어머니를 그리는 듯한 그 눈빛이 불쾌했다. 영주가 가끔 그녀를 그런 식으로 보고는 했다.

“레이디 노라 캐서린 하이어. 처녀적 성은 에니드였지. 사실 캐서린이… 그래, 미안하다. 하이어 부인이 된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었지. 솔직히 이런 지방에서 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캐런은 떨림을 감추기 위해 잔에 입을 댔다. 익숙한 맛이 아니었다. 결국 씁쓸함에 이내 입을 떼었다.

“남자들에게 언제나 둘러싸여 있었으니까. 분명 좋은 곳으로 시집가리라 생각했거든. 내 말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그러니까 물질적으로 말이야.”

캐런이 데어 부인의 집 안을 슬쩍 곁눈질하자 그녀가 얼굴을 붉혔다.

“굉장히 엉뚱했고, 절대 남의 말을 듣지 않았어. 언뜻 보기에는 유약해 보였지만 고집이 굉장히 셌지.”

캐런 입장에서는 별 관심이 없는 말이 길어졌다. 캐런은 조금씩 조바심이 났다. 그녀가 궁금한 것은 「캐런」네 부모의 연애담 따위가 아니다. 하지만 데어 부인은 계속 캐서린, 「캐런」의 모친에 대해 늘어놓았다.

캐서린이 얼마나 아름다웠으며, 인기가 많았고, 수많은 구혼자들이 그녀에게 사랑을 늘어놓았는지. 자신이 그 옆에서 그걸 지켜봤다는, 캐런으로서는 알 수 없는 자부심이 가득 찬 얼굴로 일화들을 늘어놓았다.

캐런은 그녀가 자신이 기대하던 해답을 제시하는 선지자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망스러웠다. 그녀는 그저 수다를 좋아하고 지나간 자신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중년 여성처럼 보였다.

“캐서린과 정말 많이 닮았어. 초상화도 내가 아직 가지고 있단다. 저기 벽에 보이지?”

벽에는 캐런과 무척 닮은 아름다운 여성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내가 죽더라도 낸시는 절대 저런 짓 못하게 해야지. …아, 내가 죽으면 이 이야기는 끝이니까 저런 짓은 못하려나. 저게 뭔 꼴이람. 자신의 것이 아닌 영광을 자랑하듯 떠드는 중년 여성이 점점 부담스러워졌다.

“그런 말은 많이 들어요.”

캐런은 예의 차려 웃느라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았다.

“그런 것보다 전 제 기억에 관해 더 말을 하고 싶어요.”

“아, 그러니.”

데어 부인은 어색하게 말을 끊었다.

“넌 어릴 적부터 무척 맹랑했지. 예쁘고, 똑똑하고…. 그리고 적어도 이 지역에서는 가장 좋은 집안의 외동딸이었고.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많이… 아팠지.”

“데어. 더 이상 간섭하지 말아요.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니.”

떠오르는 기억에 데어의 눈이 아련해졌다.

“그럼 동양의 문화는 말이야… 캐런, 캐런?”

데어는 울고 싶어졌다. 그녀가 가르치는 어린 소녀는 또 온몸을 떨며 발악을 했다. 총명하고 영악스럽기까지 하던 발랄함은 일곱 살 이후로 사라지고 아이는 하루 종일 두려워하고 눈물을 흘렸다.

몸을 뒤트는 소녀를 몸집 좋은 하녀들이 달려와 제압했다. 곧 병색이 완연한 캐서린이 부축을 받으면서 캐런에게 다가왔다. 오늘도 공부 시간은 이렇게 망쳐졌다. 수업을 하기는커녕 달래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해야 했다. 데어는 자괴감을 느꼈다.

“부인. 이대로는 안 돼요.”

“…….”

캐서린은 캐런을 꽉 끌어안았다. 소녀는 모친에게 안겨서도 몸을 떨었다.

“괜찮아, 캐런. 엄마가 있잖아. 괜찮아…. 쉬이… 모두 괜찮아질 거야. 응? 우리 과자 먹을까?”

눈을 바로 한 소녀는 모친에게 매달려서 한참을 꺽꺽거리면서 울다가 말했다.

“엄마, 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어요? 내 인생이 그렇다면….”

열 살의 생일이었다. 캐런과 친척인 듈란의 약혼이 결정되었다.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약혼이었다. 캐서린은 병이 점점 심해져 도저히 더 이상 임신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친척들과 지인들 앞에서 그녀는 말했다. 나날이 몸이 약해져 수명이 길지 않을 것 같으니, 딸의 약혼이라도 보고 싶다고. 모두들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부모들이 진행하는 약혼에 딱히 반대하지도 않았다. 어른들의 동의하에 약식으로 약혼이 진행되었다.

캐런은 벌레를 씹은 것 같은 얼굴을 했고 그걸 본 듈란의 얼굴도 썩은 것처럼 변했다. 듈란은 열여덟 살이었고 캐런은 열 살이었다.

“너, 너… 죽어, 진짜….”

“그래 보든가.”

캐런은 운명에 저항한다는 걸 보여 주었다. 듈란을 개떼가 풀린 방에 밀어 넣고는 문을 닫은 것이다. 그러고는 듈란이 문을 열지 못하도록 문 앞에 의자를 끌고 와 앉아 있었다. 그걸 이상히 여겨 캐런을 치우고 잠금장치를 부숴 하인이 문을 열지 아니었다면 듈란은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캐런, 듈란에게 제대로 사과해!”

이미 아이가 한 장난으로 치부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듈란의 부모는 심히 가난했고, 학비뿐 아니라 모든 것이 주어질 차기 영주 자리를 놓치려고 하지는 않았다. 듈란의 부모는 살이 뜯긴 듈란이 아니라 정신을 놓은 것 같은 캐런에게 더 신경을 썼다.

이런 집안에서 제대로 된 어른 역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데어는 가슴을 펴고 엄중하게 캐런을 다그쳤다. 하지만 캐런은 데어에게 질질 끌려간 후 듈란의 침상에서 첫마디를 이렇게 떼었다.

“야, 그냥 그때 죽지 그랬니? 네 인생도 알 만한데.”

“캐런!”

데어는 경악에 차 캐런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늦었다. 듈란은 눈을 이글거리며 캐런을 노려보며 음산하게 맹세하듯 말했다.

“…내, 내가 너 안 죽이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도 충격은 컸는지, 듈란은 그 뒤로 캐런을 보면 말을 더듬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부터 단 한 번도 영주의 저택에 방문하지 않았다.

데어는 더더욱 캐런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수업을 늘리고 캐런이 흥미 있어 하는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캐런의 발작은 늘어났고 캐서린 또한 병색이 짙어졌으며 영주는 침묵했다. 데어가 아무리 손을 쓰려고 해도 다들 피할 뿐이었다.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교사 대신 의사가 캐런과 같이 있는 날이 대부분이 되었다. 공부방에는 데어 혼자 앉아 있는 날이 많았다. 가정부인 헬렌은 데어의 월급을 줄였다. 하는 일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않냐는 말에 데어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러던 날이었다. 검은 집시 여자가 데어의 역을 대신하던 날.

캐런이 열네 살이 되던 해였다.


 

“큰 도움이 되는구나. 고마워.”

“제게 이런 좋은 일자리를 주신 것에 고마울 따름이죠. 안녕?”

“…내가 말을 걸지 않았으면 먼저 말을 걸지 마.”

낸시는 웃으며 캐런의 손을 잡았다. 처음 본 검은 여인에게 손이 잡히자 캐런은 순간 표정을 구겼으나 모친의 질책에 억지로 표정을 풀었다. 그럼에도 눈초리는 곱지 않았다.

그런 캐런에게 낸시를 데려온 캐서린은 엄하게 말했다.

“캐런, 낸시는 엄마가 데려온 사람이야. 그렇게 봐서는 안 돼.”

“저런 더러운….”

“데어! 당신도 절 존중하듯 낸시를 존중해 주세요. 캐런에게 도움이 될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데어가 있음에도 낸시를 데려왔다는 것은, 그녀의 영향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의미였고 데어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데어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행히 캐런도 낸시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자꾸만 낸시를 피해 데어에게 오고는 했다. 캐런이 올 때마다 데어는 안도했다.

데어는 단둘이 있을 때 캐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캐런이 낸시를 거부할수록 그녀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낸시가 자장가를? 말도 안 되지. 잘 거부했어, 캐런.”

“…….”

“집시는 분명히 이상한 노래를 부를 것이 분명해.”

“그렇겠죠?”

“그럼. 어서 자렴.”

검은 피부의 여성, 그것도 다른 명망 있는 부인이 소개한 것도 아닌 그저 떠돌이 점치는 여성이라니. 격이 맞지 않는다. 데어는 자신의 제자에게 그런 시녀를 붙인다는 것이 지극히 불쾌했다.

시녀란 그런 여성이 가질 직업이 아니다. 깔끔한 외모로 여주인을 부끄럽지 않게 해야 하며, 모시는 사람의 옷매무새를 잘 가다듬어 주어야 하고, 항상 정숙한 태도와 무거운 입을 지녀야 하는 법이다. 캐런 정도라면 최소한 중류층의 교육받은 숙녀를 하녀로 삼아야 하거늘 검둥이 점쟁이라니. 데어는 분개했다. 하지만 영주는 데어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데어, 당신의 학식을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캐런에게 지금 필요한 건 교육이 아니오. 낸시에게도 좀 맡기는 게 어떻겠소?”

“하이어 씨, 그러면 안 돼요. 어떻게 저런 사술을 부리는 여자를 들이실 수가 있어요? 계속해서 이상한 소리만 캐런에게 늘어놓는다구요.”

영주는 손으로 머리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데어, 캐런은 당신 딸이 아니오. 아이에게 무엇이 좋은지 판단하는 건 우리지. 당분간 다른 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건 어떻겠소?”

데어는 발끈해서 반문했다.

“영주님, 요즘 캐런에게 제대로 된 관심을 쏟는 건 저뿐이에요. 마님에 대한 이야기 말고 캐런과 얼마나 대화를 했죠?”

“그만 하시오. 당신은 말이 너무 많소. 지금은 아이보다 더… 중한 일이 많으니 날 좀 내버려 두시오.”

“마님이 돌아가시면 캐런은….”

쾅.

데어는 영주가 안타까웠다. 그는 아픈 아내 때문에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한다. 병자인 캐서린도 마찬가지다. 캐서린에게 몰두하지 않고 순전히 캐런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데어뿐이었다.

부모가 신경 쓰지 않는 아이는 사용인의 손에 자란다. 그리고 사용인은 결코 부모와 같은 애정을 쏟지 않는다. 데어는 너무나 그런 자들을 많이 봐 왔다. 그리고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뭘 하긴요. 아가씨를 돕는 약이죠.”

“캐런에게 뭘 먹였어? 의사에게 확인받은 거야?”

데어의 추궁에 낸시는 코웃음을 쳤다.

“제가 말하면 뭔지는 아세요? 그런 멍청이들과 절 동일시하지 말아요, 선생님. 그들에겐 그들의 방식이 있고, 우리들에게는 우리들의 방식이 있어요. 아가씨에게는 이것이 더 맞을 뿐이지.”

영주 부부는 이상한 곳에서 어리숙했다. 사춘기의 아이들이 공상에 빠져 자기만의 세계를 만드는 건 흔하다. 정도의 차이가 심하지만, 캐런의 발작이나 공상 또한 그 나이 또래에게는 그리 드문 것은 아니다.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교정을 해 주어야 한다. 그런 판국에 이상한 이야기와 수상쩍은 약을 먹이는 집시를 데려오다니, 데어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낸시가 온 이후로 캐런의 발작은 명백히 줄었다. 캐서린만으로도 벅찼던 저택은 캐런이 조용한 것을 반겼다. 하지만 캐런은 침묵 속에서 조금씩 이상해지고 있었다.

“못 먹겠어요.”

“아가씨?”

“낸시, 이거 맛이 이상해요. “

데어는 큰 충격을 받았다.

“캐런, 사용인들에게 그리 말을 공손히 하면 안 돼.”

“네? 아.”

시작은 말이었다. 캐런은 점점 이상해지고 있었다. 검둥이 시녀를 둔 것을 부끄럽게 여기던 그녀가 가끔은 그녀를 상전처럼 어려워하는 태도를 보였다. 낸시는 점점 기고만장해졌다.

캐런은 명백히 얌전해졌다. 하지만 데어가 보기에 그것은 약으로 재우는 것과 진배없었다. 감정은 점점 둔해지고 기억은 점점 사라졌다. 특히 심했던 것은 사람에 관한 것이었다.

캐서린이 가끔 기운이 날 때마다 캐런을 불렀지만 그 만남은 일주일에 한 번, 격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으로 점차 줄었다. 반면에 낸시는 아침부터 밤까지 아이를 대하는 시간이 늘어났고 그녀의 영향력은 강해졌다.

“캐런은… 요즘 어때요?”

“안 좋아요. 낸시는 계속 이상한 동화나 읽어 주고 알 수 없는 것들을 먹이더군요.”

“그래도 더 이상 자해하거나 발작하지는 않죠?”

“…네.”

“그러면 됐어요.”

캐서린은 백탁이 낀 눈으로 데어를 바라보았다. 이미 시력을 잃은 두 눈은 거의 예의상 뜨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살아만 있으면….”

캐런은 지난번 만남에서 자신의 모친을 알아보지 못했다. 흡사 더러운 것을 보듯이 기겁하고는 낸시의 손을 잡고 뒷걸음질 쳤다.

“마님, 요즘은 캐런이 거의 낸시를 마님인 것처럼 따르더군요.”

“…그래요?

“당장 내쫓아야 해요.”

“데어.”

캐서린은 해골처럼 말라 젊었을 적의 미모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새하얀 내의는 나뭇가지에 걸쳐져 있는 것처럼 보였고 목소리도 목재 가구의 삐걱임과 다를 바 없었다.

“데어. 우린 정말… 오랫동안 같이 있었군요.”

“…하이어 부인.”

“내가 죽어도 캐런은 괜찮을 거예요. 낸시가 잘 돌봐 줄 테니.”

“고작… 하녀가.”

데어는 목이 메었다.

“하녀가 당신을 대신할 수 있을 리 없잖아요.”

“내 이름을 불러줘요.”

“하이어 부인.”

“그거 말고.”

“…에니드.”

캐서린은 표정을 지으려고 했다. 웃으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캐서린이 죽었다.

그녀는 죽기 전까지 딸의 초상화를 만지고 있었다. 캐서린은 딸을 무척 그리워했지만 만나지는 않았다. 캐런이 자신을 차라리 잊는 것이 좋다는 그녀의 의견이었다. 어차피 죽을 사람 오래 기억해서 뭐하겠냐는 의견을 영주는 수용했다. 그러나 그는 한 달 동안 캐서린의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캐런을 보는 것도 피했다.

“캐런?”

“…아, 네. 안녕하세요.”

“캐서린이 죽었어.”

“네?”

캐런은 약간 멍한 표정을 하고 데어를 바라보다가 이내 낸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데어는 이어진 캐런의 그 말을 다시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캐런은 낸시에게 물었다.

“캐서린이 누구죠?”

악몽 같던 그 한마디를.

캐런을 얌전하게 만든 것은 그녀를 백치로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데어는 경악했다. 하지만 영주의 방문을 두드려도 그는 나오지 않았다. 자식의 광증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아내의 죽음에 비하면 사소하기까지 한 그런 일.

데어가 영주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추방령을 받을 때였다. 끌고 나간 것은 아니었지만 적은 연금이나마 받고 싶다면 나가야 했으니 다를 바 없었다.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네. 데어 부인.”

처음 느낀 감정은 불쾌함이었다. 캐런은 자신의 표정을 살피는 데어 부인의 얼굴부터 그녀의 말 내용 전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괜찮니?”

“네.”

지독하게도 괜찮았다. 데어가 말한 것은 이미 캐런이 예상하고 있던 일이니까. 캐런의 모든 인생이 자신의 망상이라는 것까지. 몇 번이고 생각했으니까.

“왜?”

데어 부인은 의문에 찬 얼굴로 캐런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째서 괜찮니? 괜찮으면 안 되잖아.”

그 오만한 대답에 캐런은 입 안이 씁쓸해졌다.

“당신의 말을 정리하면, 내가 겪는 혼란이 일종의 사법 때문이라는 거군요.”

“매우 불쾌하겠지만, 그게 사실이야. 집시들은 온갖 사술을 다루고 있지.”

캐런은 코웃음을 쳤다.

“그 정도로 능력 있으면 왜 그들이 떠돌아다니겠어요? 세계 정복도 하겠네.”

데어 부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입을 열었다.

“그야 넌 정신이 약하잖니.”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어도, 타인의 입으로 들으니 그리 유쾌하진 않았다. 하지만 캐런은 한 번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자신의 감정 표현을 끝냈다.

100년의 세월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자신의 광기로 인한 착각이라는 것도 이미 염두에 둔 사항인 것이다. 그러므로 데어 부인에게서 들은 진실이라는 것은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 하는 무덤덤한 판단이 먼저 들었다. 낸시에게 죽어 준다는 약속을 지키기 이전에 적당한 처벌부터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덕분에 하나는 확실해졌네요. 아버지는 제가 제정신이 아닌 걸 알고 계신다는 걸요.”

그리고 시체를 숨긴 것이 집에서 도왔기 때문이라는 것도 말이지. 캐런은 그녀의 푸석한 머릿결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제가 아니에요.”

머릿속의 수많은 기억을 그저 망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길고 구체적이다. 캐런은 그리고 데어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전부 믿는다고 하더라도 정보가 너무나 적지 않은가. 결국 이 여자는 부외자다. 아는 것이 적다.

“제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니죠. 하물며 낸시는….”

괜히 죽였군.

“지금 제 곁을 떠나 있으니 당신 말을 입증할 수 없네요.”

그 말에 데어는 눈에 띄게 화색을 표했다.

“떠났다고? 어떻게 된 거니?”

“일을 그만뒀어요.”

“잘됐구나. 역시, 그래서 네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구나. 그녀가 계속 일하고 있었다면 네가 여기까지 올 일이 없었겠지.”

그래요. 내가 죽였죠. 약을 먹이고 목을 졸랐어요. 그리고 이셀라를 놀라게 해 주는 용도로 쓰려고 했죠. 지금은 시체도 찾을 수 없어요.

“그럼… 내가 다시 네 가정교사로 돌아갈 수 있지 않겠니? 응? 캐런, 영주님께 말해 줘. 넌 날 잘 따랐잖니. 넌 기억 못 하겠지만, 그랬어.”

없는 기억과 친분을 강요하는 그녀가 징그러웠다. 돈 많은 남자가 사별하면 온갖 여자가 달라붙는 법이다. 가정부인 헬렌처럼. 하지만 캐런은 분수를 알아야지, 하면서 데어 부인을 내칠 마음까지는 없었다. 이미 눈앞의 그녀는 내쳐졌다. 게다가 자신의 어머니 노릇을 하고 싶어 하는 여자들은 이미 여러 번 봤다.

“당신은 내게 말하지 않은 것이 너무나 많군요.”

“난 거짓말한 것이 없어.”

“그럼 왜 쫓겨났나요?”

캐런은 데어에게 물었다. 데어의 낯빛이 변했다.


 

“그건 낸시가 네게 헛된 생각을 계속 집어넣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야.”

“데어 부인, 당신이 낸시를 반대했다는 건 처음부터 말했어요. 그리고 수업을 하지 않는 가정교사가 된 지 오래됐는데도 꽤나 오랫동안 집에 있었구요. 갑자기 나와서 이런….”

캐런은 그녀의 낡은 집을 과장스럽게 고개를 흔들며 쳐다보았다.

“곳으로 거처를 옮기신 것에 어떤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네요. 왜 그런 부분은 얼버무리시죠?”

캐런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 자기 자신조차 믿지 않는데 누구를 믿겠는가. 눈앞의 여자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이 광증을 앓고 있다는 건 이미 오래전부터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의 100년의 세월을 거부하라고? 캐런은 그것은 인정할 수 없었다. 자신의 인생을 고작 추상적인 과거 한마디로 읊조리고 끝이라고 인정하라니.

“제 어머니가 되고 싶으셨나요?”

“그 집은 다들 제정신이 아니야. 난 널 위해서…!”

“오, 미친년 하나 떠맡기 위해서 그렇게 숭고하게 항의하시다가 쫓겨나셨다. 난 안 믿어.”

캐런의 목소리가 희극처럼 발랄해졌다가 한순간에 갈라졌다. 캐런의 목소리에 데어가 다가오려다가 멈췄다. 그리고 얼굴에 조금씩 두려움이 올라왔다.

“캐런?”

“안 믿는다구요. 내 인지 능력이 어느 정도 되나 검증하기 위해 시체를 토막 내고 그 아들을 데려와서 확인시켰는데, 갑자기 튀어나와서 하는 말이 넌 미쳤으니 아무것도 믿지 마라?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서 말하는데, 그딴 반전 난 거부해요.”

“캐런, 무슨…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내가 지금까지 한 게 있는데! 이게 뭐냐구요! 약 먹이고 토막 치고 불로 지졌는데! 내가 이걸로 만족할 것 같아요? 고작 당신같이… 갑자기 등장한 사람에게?”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구나.”

“모르는 척하지 마시구요.”

캐런은 이를 갈았다. 캐런은 자신이 혼란스럽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정리해야 한다. 처리해야 한다. 자신을 몰아라. 행동해라. 동전은 이미 던져졌다. 머뭇거릴 이유는 없다.

“그리고 당신이 최소한의 머리가 있다면 제가 지금.”

철컥.

“당신을 살려 둘 생각이 없다는 건 잘 아시겠죠?”

“캐런! 진정해…! 낸시가 널 괴롭힌 거야, 네가 여기까지 온 것만 봐도 모르겠니? 네가 아기일 때부터 얼러 온 날 이제까지 기억 못 한 것만 봐도 모르겠어? 이제 왔으니까, 괜찮아. 응? 영주님이 그년을 내쫓은 걸 보면 영주님도 아시는 거야. 자신이 잘못됐다는 걸. 이제 날 데려가면 괜찮아. 전부….”

데어가 다급하게 말을 쏟아 냈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탕!

“악!”

머리를 노렸지만 빗나갔다. 데어의 머리에서 피가 주루룩 흘러내렸다. 얼굴이 피로 범벅이 되었다. 캐런은 재장전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방금의 탄환은 두피를 스치고 바닥에 박혔다.

“레이몬드는 한방에 끝내던데, 생각보다 사람의 머리뼈는 미끄러운가 보네요.”

“캐런, 정신 차려. 응?”

캐런은 데어에게 다가갔다. 조금 전까지 의기양양하게 과거를 늘어놓으면서 자신을 지배하려 들던 중년 부인이 구석에 처박혀 덜덜 떠는 꼬락서니는 꽤나 볼만했다.

“낸시는 내가 이미 죽였어요.”

캐런은 웃었다. 이가 오후의 햇살에 하얗게 빛났다. 데어는 뒤로 물러났지만 더 공간이 없었다. 웃는 얼굴이, 이가 점점 다가왔다.

괜찮아요.

괜찮아.

슬픈 건 모두 책 속의 일.

아가씨는 꿈을 꾸고 있는 거야.

이 세상은 당신에게는 꿈이나 마찬가지야.

조금 있으면 기사님과 당신은 사랑에 빠지고

모든 고난은 끝이 날 거야.

“조금 있다가 제가 데리러 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보웬.”

“제발 얌전히 있어 주세요. 듈란 님에게 혼나는 건 저 같은 아랫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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