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부정, 부정, 부정
“아가씨도 참, 여기서 총을 쏘시면 어떡합니까. 덕분에 저만 이렇게 일이 많아졌잖아요.”
보웬은 뒤에서 캐런의 팔을 잡아 권총을 빼어 냈다. 그리고 장갑을 끼더니 널브러진 데어의 몸을 살폈다. 놀라기는커녕 당황하지도 않은 손길이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신의 광증을 알고 일들을 처리한 건가.
“이건 제가 맡아 두겠습니다. 래리 씨가 마차를 가져왔으니 나가서 기다리세요.”
“넌 또 뭐니.”
보웬은 안경을 추켜올리더니 한숨을 쉬었다.
“우선 일부터 좀 하고 나서 이야기합시다.”
“도와줘?”
“…아뇨, 아닙니다.”
캐런의 말에 보웬은 질린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 이 대답이 아닌가. 보웬의 얼굴은 어처구니없어 보인다. 캐런은 그렇게 말한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그녀는 어떻게 행동해야 자연스러울지 자신이 없었다. 익숙하고 가장된 친절은 이 상황에서 부적절했다. 다행히 보웬은 머뭇거리는 캐런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캐런을 문 밖으로 떠밀었다. 캐런은 터덜터덜 마차로 다가갔다. 래리는 본디 영주가 업무용으로 쓰던 마차를 모는 자였다. 캐런의 치마에 여기저기 피가 묻어 있어도 중년의 남자는 그저 마차 문을 열 뿐이었다. 도나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지친다. 캐런은 눈을 감았다. 피로감에 온몸이 너덜거린다. 옷은 여기저기 피로 물들어 있다. 좌석에 앉자 어느새 노을이 진 것이 보인다. 핏빛으로 물든 방 안과는 대조되게 너무나 따뜻하고 활기에 넘쳐 보였다. 왁자지껄한 군중들의 소리가 들린다.
“얘, 톰.”
소년이 옷 위에 걸칠 얇은 모포를 건넸다.
“내가 미쳤나 봐.”
“…….”
톰은 당황하여 천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 얼굴을 보며 캐런은 힘없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자신이 미쳤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렇게까지 했는데…. 전부 소용없는 짓이었나.
웃기지 말라고 총알을 얼굴에 박아 넣었지만, 사실 그녀의 말을 전부 부정하기도 힘들었다. 광증이란 본디 그런 것 아닌가. 자기 스스로 입증하기 힘든 것.
정말로 그녀의 모든 인생이 망상이고 자신의 행동은 그저 정신병자의 발악이라면.
허탈하다. 허무하다. 실험은 헛것이었나. 노력은 부질없는 것이었나. 자신의 모든 노력은 그저 광증이라는 한마디로 귀결되고 세뇌라는 편리한 수단에 해결이 된다. 이성과 합리의 세상은 이미 엊저녁에 끝난 것을.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속이 쓰렸다.
“그럼 이제 양손에 쇠고랑을 차고 듈란 앞에서 고해성사 한 다음, 목에 밧줄 걸고 낸시와 인사하면 되는 건가?”
… 나쁘지 않은데?
캐런은 웃음이 푹 튀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자신의 머릿속 고문은 이제 끝이 나고 안식이 찾아온다. 그걸로 좋다. 나쁘지 않은 결말이다. 아니, 정말로 죽을 수 있다면 오히려 해피엔딩 아닌가.
정신병자에게 걸맞은 엔딩.
하지만 그녀는 납득을 미뤘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이다. 데어에게 말했듯이 그녀에게 기억은 너무나 많다. 100년 치의 기억은 너무나 촘촘히 쌓여 올라와 있다. 당장 내년의 사업에서부터 소소하게는 남의 잠자리 버릇까지. 자신이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할 방법은 지금부터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미쳐서 한 일이라도 상관없었다. 사형을 당한다거나, 정신병원에 갇힐 것이라거나. 그 정도의 각오는 엊저녁에 끝난 것을.
당황할 것 없다.
“죽지 뭐.”
“영주님이 그 고생 하셨는데 좀 더 근성을 보여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안녕, 악당 조수?”
낄낄 웃자 보웬이 한숨을 내쉬더니 큰 가방 두개를 마차 안으로 집어넣었다. 데어 부인의 몸이라기에는 꽤나 부피가 크다. 보웬이 변명을 했다.
“하녀가 위층에 있었거든요.”
“굳이 죽일 필요가 있었니?”
“…아가씨가 할 말입니까? 다리나 좀 치워 보세요. 짐 마차가 아니라 공간이 적군요.”
“도나는?”
“혹시나 해서 일부러 공연장에 밀어 넣고 왔습니다.”
“그래.”
“아쉽습니까?”
“응?”
“도나를 죽이지 못해서 아쉬우십니까?”
“글쎄.”
시체가 담긴 가방 위로 다리를 쭉 펴자 피곤함과 안도감이 밀려온다. 구두는 발이 불편하다. 현실감이 몰려온다. 캐런은 손가락의 마디마디를 누르면서 보웬을 쳐다보았다.
“그런 것보다 뭐 말해 줄 거 없니? 난 지금 출생의 비밀과 인생의 반전, 뭐 그런 것들에 심취할 준비가 되어 있어. 육하원칙에 맞춰서 부탁해.”
보웬이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그런 말 하셔도 말입니다. 저도 돈 받고 하는 입장이지만… 참 아가씨도 어지간히 제정신이 아니군요.”
“낸시를 자른 건 너니?’
“갑자기.”
“너지?”
보웬이 얼굴을 찡그리더니 마지못해 대답했다.
“…네.”
“왜 잘랐어?”
“사람이 너무 많아서요. 급하게 처리할 곳이 필요했습니다.”
“뭘 처리합니까?”
갑작스럽게 끼어든 목소리에 캐런은 순간 욕을 할 뻔했다. 순수한 놀람에.
레이몬드가 창문 너머에서 쳐다보고 있었다. 마차 바로 옆에 서 있는 레이몬드를 보며 보웬이 숨을 들이켰다.
“레이몬드 경, 여기서 뭐 하세요?”
“익숙한 마차가 보여서 합석을 부탁하려 했습니다만.”
“보다시피 제가 사치를 좀 많이 했어요.”
레이몬드는 여우같이 웃으며 마차 안의 큰 짐들을 보았다. 캐런은 웃으면서 보웬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그는 표정을 굳히고 평범한 하인으로서 물러나 있었다.
“정말… 많이 하셨군요.”
“그렇죠?”
“그래서 자네는 무슨 처리를 그렇게 했지?”
“어머… 레이몬드 경, 그런 건 묻는 게 아니에요.”
캐런은 미소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보웬이 거기까지 처리를 해 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이건 자신의 몫이다. 자연스럽게 보웬은 대화에서 빠졌다.
“남녀의 문제는 치부가 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저희 집안의 문제니 그렇게 헤집지 말아 주세요. “
“아무한테도 말 안할 테니 그 무시무시한 비밀을 제게도 공유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캐런은 웃는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았다. 지금은 좀 빠져 줬으면 좋겠는데. 기왕이면 영원히. 데어 부인과 같이 총 맞고 닥쳐 줬으면.
“이건 비밀인데요. 낸시와 보웬이 눈이 맞았어요. 아셨나요?”
“몰랐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낸시가 사라진 건 몸을 풀기 위해서 잠적한 거였다고 하더라구요. 급하게 해산하기 위해 도망갔다네요.”
“그것 참 무시무시하군요.”
“그렇죠?”
보웬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캐런은 멈추지 않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괜히 구입한 물건을 보자는 식이 되면 난감해 진다. 지금은 총도 없다. 있다 치더라도 성공할 거라는 확신은 없지만.
“에반스 양은 어쩌시고 이렇게 나와 계시나요?”
“에반스 양의 발이 너무 아픈 것 같아 마차를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마침 친숙한 인장이 보이길래, 그만.”
지나치게 높은 굽을 신고 부산을 떨던 이셀라가 기억난다. 캐런은 유들거리며 웃는 레이몬드를 보자 식은땀이 나는 걸 느꼈다. 이제 그녀는 그저 헛소리를 늘어놓는 수상쩍은 여자 정도가 아니라 기사 앞에서 시체를 깔아뭉개고 앉아 있는 살인범이다.
“그러셨구나.”
“아직 축제가 한창인데 벌써 들어가십니까?”
“제가 지금 무시무시한 진실을 파헤치려고 가거든요.”
“살인, 강간, 강도, 절도, 사기, 무단취식?”
캐런은 심각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런 정도가 아니에요, 아주 무시무시한 이야기에요.”
“과연?”
“출생의 비밀.”
“저도 한동안 출생의 비밀이 있지 않을까 고민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황제의 사생아가 아닐까 하는 그런 거요?”
“잘 아시는군요.”
시답지 않은 농담은 분위기를 급격히 부드럽게 만들고 대화의 목적을 흩뜨려 놓았다.
그런 특기는 레이몬드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캐런은 생글생글 웃으며 약혼으로 이야기를 돌렸다.
“백작 부인이 오신다니 저도 긴장이 되어서요.”
“그건 그렇지요.”
캐런은 발밑의 트렁크를 발로 툭툭 치며 생각했다. 출생뿐이 아니지. 여전히 레이몬드는 잘생겼고 의뭉스러웠으며 귀찮을 정도로 캐런에게 간섭한다. 여전히, 여전히. 캐런은 그 말을 곱씹었다. 캐런의 기억 속에서는 이제까지 이렇게 빨리 약혼이 진행된 적이 없었다. 일은 좀 더 느긋이 진행됐었다. 백작 부인의 참석이라니, 그건 이미 결혼이나 다를 바 없다.
“레이몬드 경을 노리고 있었는데, 아쉽네요.”
“하하, 그거 안타깝군요.”
“소녀의 꿈이니 진지하게 받으시면 안 돼요, 알죠?”
꿈은 깨야 한다. 물 잔의 물이 마셔져야 하듯이.
지금 캐런에게 레이몬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캐런은 스멀거리는 불쾌감을 느꼈다. 자신이 머릿속의 혼돈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총으로 사람을 쏘아 죽이는 동안 레이몬드와 이셀라는 원하지 않는 결혼이니 계약 관계니 하는 달콤한 고민을 하고 있겠지.
그럼 레이몬드는 이대로 이셀라와 결혼하는가? 캐런은 왠지 배알이 뒤틀리는 감각을 느꼈다. 그건 좋은 남자와 결혼하는 다른 여성에 대한 질투와는 명백히 달랐다. 자신은 이대로 죽느냐 감옥에 갈 것이냐 하는 암울한 미래를 계획하고 있는데, 만일 진실이 자신의 광증으로 끝이 난다면.
이들은 그냥 행복하게 그럭저럭 잘 살겠지.
그것이 못 견디게 부러워 캐런은 입 안쪽 살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저 순수하게 커플을 축복해 줄 마음이 전혀 안 드는 것을 보면 자신은 악당임에 분명한가보다. 약간 돈.
바로 감금되지 않을까 했지만 의외로 보웬은 캐런을 서재로 인도했다. 총은 압수했지만 그래도 캐런이 보기에는 너무나 안이한 처사처럼 보였다.
“전 무조건 보호하라는 명만 받았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받니?”
“들으시면 놀라실 걸요. 영주님이 아가씨를 보호하고, 아가씨의 행동을 지지하는데 쓰는 비용은 장난이 아닙니다.“
어디서 예산이 또 새나 했더니, 이런 짓을 저지르고 있었단 말이지. 캐런은 기가 차서 서재의 서랍들을 죄 꺼내면서 훑어보았다.
“왜 그런 미친 짓을 하신대?”
“…그러게 말입니다. 전 돈 받고 하는 짓이라서.”
“그래서 낸시를 토막 낸 거나 마저 말해줘. 얼마나 잔인하게 처리했던 거야? 그리고 문은 왜 안 잠갔어?”
캐런은 마차에서 물었던 질문을 다시 이었다. 질문에 보웬은 캐런을 떨떠름하게 보면서 뒷통수를 잠시 긁적이더니 대답했다.
“뭐, 개인적으로 그 여자가 좀 싫기도 했지만.”
보웬은 서재를 한 바퀴 둘러보더니 다시 문 쪽으로 향했다.
“여기는 제대로 잠기는군요. 급하게 치우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그 방이 문이 안 잠기지 뭡니까. “
그런 거였군. 캐런은 데어 부인이 말했던 듈란을 가두고 개떼를 풀었다는 일화를 기억해 냈다. 그래서 그 후로 그 방은 정말 잠기지 않았던 걸까. 진실은 언제나 알고 보면 시시하다.
“그 방이 그 방이었나. 앞으로는 제대로 수리하게 해. 나가 봐.”
보웬이 불안하다는 듯 기웃거렸지만 캐런은 더 이상 그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인은 하인. 자신의 사정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자는 의미 없다. 캐런은 방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곳에는 좀 더 잘 아는 사람이 있다. 「캐런」의 아버지다.
방 안에 쓸 만해 보이는 것들은 별로 없었다. 서류, 서류, 서류. 재판 기록이나 예산서 등이 대부분이었다. 캐런은 오래된 책장들로 눈을 돌렸다. 이 서재는 영주의 개인 서재여서 캐런이 그다지 출입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몰래 들어왔었던 과거에도, 만일 캐런이 기억하는 과거가 환상이 아니라면 읽을 만한 것들은 거의 없었었다. 그리고 그 책들 사이에는 과시하듯이 거대한 캐서린의 초상화가 있었다.
그 느낌은 데어 부인의 집에서 느낀 것과 비슷했다. 망자에 대한 집착. 캐서린은 죽어서도 여러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캐런에게서는 배경에 불과했던 여자의 얼굴을 보는 느낌은,
“아름답지 않느냐.”
“…네.”
약간 소름이 끼쳤다.
캐런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부친인 영주가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군요. 참 아름답네요.”
캐서린의 초상화는 데어의 집에 있던 것보다 훨씬 거대했다. 실제 사람보다도 더 큰 초상화는 서재의 높은 곳에 걸려있어 공간 안의 사람들을 압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데어와 달리 그는 남편이었으니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정말로 아름다웠지. 나의 부인은.”
캐런은 영주의 늙은 얼굴을 쳐다보았다. 젊었을 적에는 꽤나 미남이었을 것 같은 얼굴이지만, 지금은 그저 늙고 어수룩한 중년일 뿐이다. 그러나 그 이면은 딸의 살인을 방조한 이 지역의 권력자다. 캐런은 판단을 하기 어려웠다.
“네 엄마이기도 하지만 말이야.”
부모라 하더라도 캐런은 눈앞의 영주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나 없었다. 그는 중요 인물이 아니었다. 캐런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중요 인물」이라. 이제는 적절한 표현인지도 모르겠군. 그리고 중요한 건 그것보다 다른 것이다.
“이미 들으셨겠지만, 전 지금 굉장히… 혼란스러워요 아버지.”
목소리는 약간 떨렸다. 목을 가다듬었다. 사실 당장이라도 부친의 목을 잡고 진실을 토해 내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참는다. 오래 기다렸다. 그 정도는 할 수 있다며 다시 가다듬는다.
“그래… 데어 부인이 죽었다고.”
“네.”
캐런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영주는 그리 크게 놀라 보이지는 않는다. 무슨 생각일까. 어디까지 감안한 걸까. 자신은 누구일까.
“그래, 그랬구나. 부조금을 내야지.”
영주는 눈가에 자글자글한 주름을 문질렀다. 그의 손 사이에서 약간의 땀이 보였다. 땀을 흘리기에는 서늘한 온도였기에 심정을 약간은 짐작할 수 있었다.
“이미 보웬에게 들으셨을 거 알아요.”
“…….”
“제 앞에서 그만 말 돌리세요. 그녀는 제가 죽였어요.”
당황한 영주가 입을 잠시 뻐끔이다 물었다.
“…왜 죽였느냐?”
“기분 나빠서요.”
성의 없지만 그 대답은 사실이었다. 길고 긴 이유를 가져다 댄다 하더라도 결국 본질적인 이유는 단순하다. 기분을 거스른다는 이유로 죽인 것이나 다름이 없다. 죽이기 좋은 상대도 아니었다. 그 순간 보웬이 적절히 나타나 돕지 않았으면 수습하기가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죽였어요.”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데어는 캐런에게 계기에 불과하다. 열쇠에 불과한 인물이다. 캐런은 영주가 무슨 대답을 할지가 궁금했다. 영주는 딸의 대답에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녀는 분에 넘치게 간섭하는 사람이었지. 많이 거슬렸나 보구나.”
그녀를 위한 치졸한 변명이었다.
캐런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도 어떻게든 자신을 감싸려고 드는가. 그것도 자신의 눈앞에서. 이런 대답을 예상하지는 않았다.
“괜찮을 거란다.”
영주는 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힘을 주어 눌렀다. 그건 캐런보다는 자기 자신을 북돋우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차라도 마시면서 대화를 하지. 오늘 저녁은 각자 축제를 즐기기로 했으니, 우리 둘이서 대화를 할 수 있겠구나.”
그렇지. 우리에게는 대화가 필요하지. 아주 많이. 캐런은 의자에 앉았다. 노을이 지는 창 너머에서 흐릿하게 축포 소리가 들렸다. 본격적인 축제의 시작이었다. 금욕의 기간이 지나고 레이몬드와 이셀라의 약혼식이라는 행사에 거부는 아낌없이 물질로 축복하고 있었다. 정작 이 땅의 주인들은 이렇게 이상한 대화를 하고 있지만 저들에게 이 방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유리벽 하나로 완전히 유리된 다른 이야기들.
현실의 방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온화하기 짝이 없는 취조실이다. 영주는 캐런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에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았다. 이것도 그저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것일까. 자신이 정신병을 앓고 있으니 다 무마시키고 달래고 숨기고 약혼자를 만들어 준 것일까.
“올해는 차 농사가 좋을 것 같구나. 날씨가 괜찮아.”
“그렇게 좋지는 않을 거예요.”
무심코 대답하고 입을 닫았다. 캐런은 지금 아무것도 확신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런 발언과 생각은 독이다.
“아, 아니. 확실치 않네요. 절 믿지 말아 주세요, 아버지.”
“네가 그렇다면 그렇겠지.”
무슨 뜻이지?
바짝 마르는 입 안에 넣을 따뜻한 차가 필요했다. 캐런은 의자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보웬이 준비해 둔 찻잔을 짚었다. 차를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몸은 괜찮고?”
“…네.”
붉게 물든 홍차가 목을 적시자 조금이나마 마음이 진정되는 듯한 착각이 든다. 캐런은 영주의 얼굴을 살폈지만 그 얼굴에서 무엇인가를 읽기란 힘들었다. 의미 없는 안부 인사가 오가는 시간을 견디기가 힘들다. 혀끝이 또 마르기 시작한다. 연거푸 차를 들이켰다.
“데어 부인에게서 몇 가지 말을 들었어요.”
“그게 그렇게 무례했느냐?”
그녀를 죽일 정도로 무례했지. 캐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제 인생을 통째로 부정했으니까요. 그녀는 제가 미쳐서 기억을 잃었다고 하더군요.”
“정말 무례하고 경우 없는 여자지.”
진저리 난다는 듯이 영주가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싫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캐런과 이유가 같을까?
“그렇고말고.”
캐런은 짐작되는 이유를 굳이 내뱉지는 않았다. 데어는 그녀의 모친이 되고 싶어 했다. 그 말은 영주의 안주인이 되고 싶어 했다는 말이다. 그녀는 캐서린과 캐런에게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영주와 캐런은 성가심만 느꼈다. 약간은 안됐군. 캐런은 그녀에게 이셀라 에반스에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영주는 그녀를 혐오하고 있었다. 그녀가 딸에게 목숨을 잃은 이 순간에도 어떠한 안타까움을 보이고 있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 화나지 않았어요. 음… 그때는 좀 그랬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리 싫지 않네요. 사실 약간 편하기까지 해요.”
“왜 그렇지?”
“죽으면 끝날 테니까.”
한숨과 웃음이 동시에 나온다.
“이 고문과 같은 삶이 끝난다면 너무나 기뻐서.”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이유가 아니다. 그녀가 어떻든 그리고 아버지라 일컫는 당신이 어떻든 그런 것은 캐런에게 중요하지 않다. 전부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캐런이 미친 것이라면. 정말 모든 것이 환상이라면 말이다. 그래서 캐런은 영주가 확답을 내려 주길 원했다.
“그냥 전 끝내고 싶어요.”
영주는 물끄러미 캐런과 눈을 마주했다.
“증오나 혐오도 하지 않느냐?”
“네.”
진실로 그러하다. 그녀는 사람의 선함과 악함을 너무나 많이 봐왔다. 그저 한마디만을 바란다.
“죽음과 삶이 네겐 너무나 가볍구나.”
“종잇장보다 가볍죠. 세월이 쌓이지 않으니 가벼울 수밖에요. 사실 약간은 미안한가 싶기도 하네요.”
“…….”
영주는 또다시 침묵했다. 그 침묵이 버거워 캐런은 입을 열었다.
“우리 깊은 대화를 나눠 볼까요, 아버지.”
내장을 토할 정도로.
“데어는 입이 가볍더군요. 그래서 내보내셨나요? 아, 대답해 주실 필요 없어요. 이미 죽은 사람이죠. 그녀의 인생이나 과거 같은 것보다 제겐 제 이야기가 훨씬 흥미로우니까. 전 캐런이 맞나요?”
“한 번에 하나씩만 질문하는 것이 어떻겠니?”
“…네.”
캐런은 심호흡을 했다. 의혹은 너무나 많다. 밀려오는 질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지만 입은 하나다. 드디어 이 자리에 도달했다. 하나하나 시작해도 된다.
“제가, 어릴 적부터 문제가 있었다는 말이 진짜인가요?”
“…그래.”
“낸시가 제 기억을 지우고 다른 기억을 넣었다는 것도?”
“잘도 알아냈구나.”
캐런은 가장 궁금한 질문 하나를 꺼냈다.
“전 캐런인가요?”
“넌 하나뿐인 내 딸이지.”
그런 의미로 한 것이 아니거늘. 캐런은 눈썹을 찌푸렸다. 캐런이 「캐런」인가. 자신이 돌아갈 장소가 있는가. 아니면 그것은 그냥 환상인가.
“그런 게… 아니에요. 제가 당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합당할까요?”
“음, 초상화를 보면 네가 엄마의 판박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을 거다.”
이쪽을 물어서는 안 되겠는걸. 캐런은 초상화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살아 있었으면 좀 더 대화가 쉬웠을까? 왜 당신이 아니라 이 외부인이 내 눈앞에 있는 거지?
“결혼하기 전까지 사람들이 얼마나 날 질투했는지 생각하면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지. 정말이지 구혼자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지금 당신들의 연애담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캐런은 어이가 없어 그를 쳐다보았다. 역시 아내가 죽고 정신을 반쯤 놓았다는 세간의 비아냥댐이 어느 정도는 맞는 것인가.
캐런이 빼닮은 캐서린은 데어가 말했듯이 굉장히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이런 시골로 내려와서도 겨울마다 초청장이 여기저기서 날아왔다는 말을 들었었다. 누가 그랬더라. 캐런은 자꾸만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을 억누르기 위해 애를 썼다. 모른다.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며 확신하지 않는다.
아, 총이 있었으면.
당장 영주의 머리통에 한 발 넣어 버렸을 텐데. 아니지, 바로 끝내면 안 돼. 위협부터 시작해서 진실을 들을 수 있을 텐데.
“아버지.”
“그래서 얼마나 치열했는지….”
“제가 낸시도 죽였어요. 이것 또한 아시겠지만.”
“…….”
“왜 시체를 숨기셨나요?”
“에반스 양에게 들키면 내가 보호해 주기가 힘드니까.”
영주가 대답했다. 캐런은 그 해답에 안도와 짜증을 동시에 느꼈다.
“정말이지 무대 위 인형이 된 기분이에요. 이 세상에서 홀로 구경거리가 됐어요. 대체 제가 하는 걸 보며 무슨 생각 하셨어요?”
“너를 보호하기 위해서였어.”
“그럼 최소한 말은 해 주셨어야… 이거 스스로 말하고도 웃기네요.”
손가락으로 툭툭 탁자를 쳤다.
“낸시가 죽긴 한 거 맞나요? 데어 부인은 내 손에 죽은 게 맞나요? 지금 제 눈앞에 아버지 당신이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을까요?”
눈앞의 모든 현실이 뒤틀리는 감각은 지긋지긋하다. 캐런은 총을 빼앗긴 것이 원통했다. 자신의 고통의 원인이 눈앞의 이 남자, 자신의 아버지라면 총알을 잔뜩 먹여 주고 말 것이다. 세상에 하나 남은 혈육이라도 상관없다. 유흥이나 호기심을 넘어 반드시 죽여야 할 원수 아닌가.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거짓으로 만드는 지독한 짓거리 아닌가. 부정으로 그 짓을 감싼다고. 캐런은 납득하지 않았다.
“낸시는 네가 죽였지.”
영주는 캐런에게 단언했다.
“그리고 난 지금 네 앞에 있다.”
그가 캐런의 손을 잡았다. 온기가 느껴졌다. 안도감이 퍼졌다. 톰을 통해 시체가 사라지지 않은 것을 확인했을 때와 마찬가지의 느낌이었다. 역시 그렇구나. 사람을 죽이고 사람이 죽었다. 시간은 어제에서 오늘로 흐른다. 세상은 안정적이고 미친 것은 자신 하나라면. 이처럼 안정적인 진실은 없을 것이다.
“왜 시체를 치우셨어요.”
왜 내게서 진실을 빼앗았나요. 그게 내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아시나요. 분함에 눈물이 났다. 자신에게서 진실을, 이치를 앗아가고 광기와 비이성이 지배하게 내버려 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건 사랑이나 보호가 아니었다.
“일이 커지면 너도 힘들지 않느냐. 자식의 행복이 부모의 행복이지. 캐서린과 난 네 행복만을 바랄 뿐이다.”
“제, 제 행복을 바라신다면.”
목소리가 잠긴다. 캐런은 눈앞의 중년 남성이 싫었다. 속 시원히 말해 주지 않는 태도도, 말없이 자신의 뒤처리를 하는 행동까지 진저리치게 기분이 나빴다.
“절 잡아서 다 말하지 그러셨어요. 넌 미쳤다고.”
“내가 어떻게 해야 네가 만족했을까?”
“사람을 죽였으면 그러지 말라고 하셨어야죠. 감옥에 가두셨어야죠. 심판을 하고, 사형을 내리셨어야죠.”
“네 행복이 어떻게 감옥 안에서 이루어지겠니. 아직 넌 인생을 시작도 안 했어. 남자를 만나고, 결혼하고 아이를 가지는 삶을 살아 봐야지.”
기가 차서 발을 동동 구르고 싶다.
“제 광증이 유전이라면 분명 아버지에게서 이어진 게 분명해요.”
영주는 그 소리에 쑥스러운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는 대답하는 것이 가관이다.
“넌 나보다는 엄마를 더 닮았단다.”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계신 건지 아세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제 인생을 망쳤어요. 최소한의 사고도 스스로 못 하는 거예요. 지금 절 보세요. 전 지금 믿을 수 있는 게 없어요. 이건 사람을 믿느냐 안 믿느냐, 누구를 사랑하고 이런 문제가 아니라구요. 기억을 지우고 안정된 생활을 시켜 주겠다면서 머리를 망치로 부숴 버리신 거나 다름없다구요.”
결혼이라니, 사랑이라니, 대체 무슨 꿈꾸는 소리인가. 약으로 재워 놓고 자, 이제 평화롭구나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지금 나한테 그런 게 중요할 리가 없잖아요.”
“중요해.”
영주는 단언했다.
“매우 중요하단다, 캐런.”
“이봐요. 영주님.”
이대로라면 대화는 이어질 필요가 없지 않은가. 캐런은 잡힌 손에 힘을 주었다. 손톱을 세웠다. 영주의 손에 붉은 자국이 났지만 그뿐이다.
“무슨 짓이냐.”
“…화가 나야 할 텐데. 그것도 제대로 안 되네, 기가 차서. 하… 마음대로 해 보세요. 전 계속 살인을 할 테니 막으시려면 막아 보시든가요. 그러다 수틀리면 레이몬드 경에게 자수할 거예요.”
“못하게 할 거다.”
“그럼 감금하세요. 절 막고 팔다리를 결박하고 낸시를 대신할 만한 다른 최면술사를 구해 보시든가요. 이번에는 책 속에 빠져서 100년 동안 죽고 또 죽는 환상보다는 좀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길 바라요. 눈 뜨니 황제의 침실 안에 떨어져 성노가 됐다든가, 머나먼 과거로 떨어져 세계를 바꾼다든가, 그런 것도 재밌겠네요.”
캐런은 비아냥대기 위해 애썼다. 부친의 비통함을 보고야 말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을 것이다. 그 정도를 각오하지 않고 시작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자신의 각오와 인생과 투쟁에 대한 예의다.
하지만 영주는 그녀의 각오보다 단어 하나에 집중했다.
“100년?”
“어쩌면 그 이상, 새로운 기억이라면 아예 싹 지워 버리고 천치로 만들든가.”
허무해 죽을 것 같다. 온몸을 불살라 버리고 싶다. 캐런은 눈앞의 부친을 태워 죽여 버리고 싶었다. 갈가리 찢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격하게 자신이 혐오스럽다. 자신의 노력은, 세월은, 기억은, 모두 의미가 없는 것인가? 한낱 환상에 불과한가? 가치가 없나? 광증이라는 결론은 참으로 편하기도 하다.
차라리 죽여 주지.
“…100년. 그것이 네가 살아온 시간인가.”
이젠 됐다. 길다. 전부 다 끝내고 싶다. 캐런은 현실도피를 위한 자살 방법을 떠올렸다. 목을 매달까, 독을 먹을까, 총으로 머리를 쏠까.
역시 독인가?
“너에게 제대로 된 답을 줄 수가 없어 미안하구나.”
“그냥 괜한 짓 말고 다함께 손잡고 수도원 유폐 생활이나 하는 게 어떨까요?”
“캐서린은 네게 가능한 네 인생에 간섭하지 말라고 했었지.”
“기억도 안 나는 엄마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네요.”
영주는 캐런에게서 손을 뗐다. 그녀의 말에 조금 충격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전부 다 정신병자 소굴이었어. 한숨이 절로 나오는 가족 아닌가. 하지만 영주는 낙담한 얼굴로 캐런을 쳐다보았다.
“캐서린은 널 사랑했단다. 아주 많이.”
“제가 지금 그걸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제가 그런 사랑에 감격할 수도 없게 아버지는 제 기억을 지웠어요. 대체 뭘 바라시는 건데요? 지금까지 하셨던 것처럼 제 살인이나 계속 도와주실 건가요? 재밌겠네요. 아주 좋아요. 그게 제가 바라던 거예요. 기왕이면 당장 저 베르딕을 죽여 주세요. 이셀라는 덤이구요. 레이몬드 경까지 죽으면 아주 멋지겠어요. 당연히 그래 주시겠죠?”
“캐런.”
“왜 안 하시는 건가요? 대체 뭘 어떻게 하시고 싶으신 건가요?”
캐런은 영주를 노려봤다. 답답했다. 자신이 아는 것은 너무나 적었고 영주는 감추기만 했다. 그래놓고 지금 자신을 저렇게 본다. 누가 누구를.
“…이젠 나도 지치는구나.”
“동정을 표할게요.”
“캐서린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렴. 캐서린은 네 행복을 위해 그런 거야. 하지만….”
영주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이, 이젠 지쳐.”
“…….”
그리고 영주는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렸다.
“캐서린은 널 정말 사랑했어. 그리고 너와 같았단다.”
“제 광증이 엄마에게서 유전되었나 보군요.”
“캐서린을 비꼬지 마라. 그녀는, 네 엄마는….”
영주는 대답을 잇기 어려워했다.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그는 잠시 숨을 몰아쉬더니 말을 이었다.
“그녀도 너처럼 말을 했었지. 이 세상은… 자신에게는 책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리고 자신은 실제로 보이는 것보다 나이가 더 많다고.”
캐런은 숨을 멈췄다.
“그리고, 너도… 자신처럼 살 것이라고 했단다.”
“캐서린, 그러니까 어머니께서 저와 같은 증세를 겪으셨다구요?”
“그래.”
“…확신할 수 있나요?”
캐런의 의심 찬 물음에 영주는 불쾌한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내 아내의 말이다. 어찌 의심할 수 있겠니.”
설마 내 부친이 천치는 아니겠지.
캐런은 속으로 패륜적 상상을 했다. 지금까지 겪은 여느 삶 같았으면 죽어서 나오지도 않았을 모친 캐서린과 무능해서 갈등을 일으켜 주던 부친이다. 그들은 언제나 그 정도의 비중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의 그 말, 자신뿐이 아니라는 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내가 무엇을 말해야 정확할지 모르겠구나. 그리고 결국 넌 모든 것을 의심하지 않겠느냐. 그럴 바에는 차라리… 그녀의 말이 맞았어. 처음부터 다 잊고 시작하게 해야 했어.”
“캐서린 부인이.”
“어머니.”
이 와중에 자신의 말을 정정하는 영주에게 형용하지도 못할 말을 내뱉을 것만 같아 참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영주가 이런 사람이었나.
“네, 제 어머니께서.”
초상화를 곁눈질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 영주가 아니라 캐서린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한숨이 절로 난다. 왜 살아 있는 것이 제3자인 영주라서. 저 말이 맞다면 이 세계에서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죽은 모친뿐 아닌가.
“저와 같은… 반복된 삶을 살았다는 증거가 있으신가요?”
“결국 넌 의심을 하는구나.”
“…….”
“네가 그 증거가 아니냐.”
당신처럼 순진무구하게 믿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 하지만 캐런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가 힘들었다.
“다른 사람이면 모르겠지만 넌 의심할 수 없을 거라고 했다.”
“그걸로 끝인가요.”
“설명이 필요한 현상이 아닐 테니까. 내가 할 수도 없을 테고.”
결국 그 말이 맞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이해하려고 하니 괴롭다.
캐런 자신이 그 증거다. 직접 알면서, 자신이 반복되는 종이 위에서 살아왔으면서 어찌 이를 의심하겠는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걸 이치로 알아내라면 100년은커녕 만년의 세월 동안 고뇌하며 탐구하여도 다다르지 못할 것이다. 캐런은 깍지를 낀 손에 이마를 대었다. 머리가 뜨거웠다.
“그 말이 옳아요.”
무슨 답을 들어도 자신이 납득하기는 힘들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갑자기 부친이 자기 스스로가 신이라면서 하늘을 찢고 벼락을 내리는 얼토당토 않는 전개가 일어나도 캐런은 신이 강림했구나, 하고 경악하는 것이 아니라 엊저녁에 먹은 약에 환각 성분이 있었던가부터 고민할 것이다. 세월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 세월 동안 의심만이 그녀의 친구였다.
“그렇지.”
“…논리로 해결될 일이면….”
그랬다면. 캐런은 씨근거리는 숨을 가라앉혔다.
“왜 숨기셨죠? 말하셨으면… 제가 더, 더욱… 편하지 않았을까요?”
까마득하게 긴 시간 동안 책장 안에서 생각만을 곱씹는 나날들이 이어졌었다. 최소한 자신과 같은 문제를 겪은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희망 하나가 있었더라면 그 세월이 그리 괴롭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영주는 가정을 부정했다.
“이미 열 살 적에 넌 그에 대해 듣고 버티지 못했다. 예정된 삶은 의미가 없다고.”
“그럼 처음부터 무지한 아이로 내버려뒀으면,”
“그 결과가 이렇지 않느냐.”
또다시 침묵이 방 안에 내려앉았다.
“어머니도 그러셨다면 제 외할머니께서도 그러셨나요? 이것은 대대로 이어져 오는 건가요?”
“그것까지는 모르겠구나.”
“…그렇군요.”
그 정도의 대화도 부부가 서로 나누지 않았다고? 원하는 만큼 답이 나오질 않아 답답했다. 그나마 그녀와 마찬가지로 영주도 초조해 보이는 얼굴이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다. 만일 그가 여유롭게 그녀를 관찰하고 있다면 그것처럼 화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가 불편함을 깨달으니 대화가 잘 이어지지 않는다. 아는 이야기가 다른데 서로 자신의 불만을 이야기하려 하니 대화의 박자는 어긋난다. 100년간 단절되었던 대화는 이상하다. 어색하다. 괴롭다.
“어머니가 책이라고 비유하셨죠.”
“그래.”
“로맨스 소설이었나요.”
“음?”
“장르가 뭐래요? 제 인생 말이에요.”
이성의 세계가 그녀를 버리고 환상의 세계가 그녀를 맞이했다. 그럼 그에 맞게 해 줘야지. 캐런은 의심을 페이지 구석에 밀어서 접고는 물음표를 그렸다. 어떻게 벗어날까.
“어떻게 해야 이 이야기가 끝이 나죠?”
영주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 같은 사람을 만나거라.”
“…네?”
“캐서린이 그랬단다. 나를 만나고 자신의 진정한 인생을 살았다고.”
받아들이기로 했는데도 쉽지가 않다. 캐런은 영주에게 느끼는 감정을 갈무리하기 위해 애쓰며 질문을 골랐다.
“…그건 결혼을 통해 끝이 났다는 건가요?”
“사랑이지.”
자신의 인생이 소설이라는 걸 육성으로 말하고 듣는 건 꽤나 부끄러운 일이었다. 현실성 없고, 이상하고, 망상을 진지하게 믿는 광신도들의 대화 같은 어구다. 하지만 그래도 믿어야 한다.
사람의 인생을 지배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죽음이다.
하지만 캐런의 인생을 지배하는 것은 또다시 사랑이 되었다.
캐런은 속에서 신물이 나는 것 같았다. 지긋지긋한 활자들이 또다시 올라온다. 사랑을 해. 넌 지금 잘못 가고 있어. 사랑을 하렴! 닥쳐! 캐런은 소리를 삼켰다. 눈에 피가 몰린다. 영주의 눈에는 맑은 눈물이 맺혔지만 캐런의 눈에는 핏방울이 맺혔다. 캐런의 상태가 어떻든 영주는 말을 이었다.
“날 만나서 자신이 책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 더 이상 반복해서 ‘읽을’ 필요도 없다고.”
“…그런 식으로 말했나요.”
영주는 자신을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그래. 내가 그녀의 남자 주인공이라고. 그 어떤 남자도 그녀에게 맞지 않았던 거야. 란던 백작도, 귀즈 왕세자도, 펜케이르 후작도 아니었지. 오직 나만이 그녀의 진정한 사랑이었던 거지.”
영주의 입에서 줄줄이 권력가들의 이름이 나왔다. 캐런은 기억을 더듬어 그들이 캐서린과 염문이 났었다고 말하던 호사가들을 떠올렸다. 세대가 달라 마주한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귀즈 왕세자는 기억한다. 호색한으로 유명하기에.
“내가 그들보다 더….”
영주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넘쳤다. 그 얼굴은 그가 혐오하는 데어와 약간 닮아 보였다.
죽은 사람에게 집착하는 모습. 그것은 단순히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추억한다기보다는 고인을 통해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는 모습이었다. 영주가 다른 구혼자들을 제치고 캐서린과 결혼했노라 말하는 모습은 데어가 캐서린의 초상화를 보면서 짓던 표정이었다.
“그녀의 사랑은 결국 나였던 거란다.”
캐서린과의 결혼을 통해 자신이 승리자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은 데어보다는 당위성이 있었고 당당했다. 하지만 캐런은 그의 모습에 감동을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들었다.
‘읽은 소설들에서 남자 주인공들은 비슷한 나이 중 가장 지위 높고 잘생긴 사람이던데.’
하이어 영주가 그리 처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캐서린에게 구혼하던 다른 자들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하지도 않았다. 이제 와서 진정한 사랑은 저 먼 곳에 이러면서, 전쟁터의 죽어 가는 사람 중 하나가 남주인공이다 따위의 결론이 나면 어떡하지. 기가 막히는 결론이다.
“사랑… 이요.”
“사랑이지. 아직 못 찾은 것이 아닌가 싶다. 네 어머니처럼… 진정한 사랑을.”
고개를 끄덕이는 영주를 보며 캐런은 주먹을 쥐었다. 현실성 없고 짜증 나고 기분 나쁠 정도로 달달한 이야기 아닌가. 사탕으로 만들어진 망치로 머리를 내려치는 기분.
“네가 스스로도 믿지 않았던 그 더러운 꼬마에 대해 말한 감정과는 다른 정말로 순수하고 고귀한 감정 말이다.”
“아시면서 뭘 그러세요.”
캐런은 입꼬리를 억지로 끌며 웃었다. 결국 수습한 건 당신의 아랫사람들이니 전부 알면서.
“그러니 아직도 네 남자 주인공을 찾지 못해 이렇게 방황하는 것이 아니더냐.”
지독하게 환상적이고 동화 같은 말이 이렇게 기분 나쁘기도 쉽지 않다. 영주는 캐런의 고운 뺨을 훑고 여기저기 나 있는 상처와 피가 약간 묻은 옷을 쳐다보았다. 어찌나 사랑스럽고 가련한가 하며 한탄하는 눈길이었다.
그 안에서 조금 전 살인을 저지른 딸에 대한 고뇌는 없었다. 그 안에는 죽은 아내에 대한 열망만이 드러났다. 그래서 캐런은 부친의 얼굴을 보면서 약간의 메스꺼움을 느꼈다. 사랑이라. 사랑이라. 지금의 자신에게는 살인보다도 더 기분 나쁜 이야기다.
이제 와서 이 무슨.
“아버지는 이 세상이… 책이라는 말에 아무렇지도 않으셨나요?”
“네가 괴롭다니 슬프구나.”
“아뇨. 그런 말 말고요. 아버지, 그런 이야기 말고.”
자식이라거나, 아내라거나. 그런 것 말고. 남에 대한 이야기 말고. 그런 부차적이고 사소한 이야기 말고. 좀 더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이야기.
자기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캐런은 그것이 궁금했다. 자신은 괴로웠다. 돌아갈 세상이 있었다. 그 희미한 기억, 여기와는 다른 가족들, 친절한 세계들, 좀 더 황홀한 음식과 색다른 문화와 동물과 꿈이 넘치는 그 세계. 캐런은 어렴풋한 그 환상을 더듬는다. 진정한 인생. 진정한 세계. 만일 정말 돌아갈 수 있다면, 이 모든 것이 한순간의 꿈이라면.
입을 달싹이다가 다시 다물었다.
결국 그 말은 열 살배기 아이의 고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생각해서 달라질 것이 없으면 생각하지 말자.
“진정한 사랑… 이요.”
자신의 입으로 내뱉으니 이 얼마나 기괴한지.
“제가 평생… 100년 동안… 의심과 두려움 속에서만 살았다면 뭐라고 하시겠어요?”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 세계의 모든 것에서 유리되어 허공 안을 헤매는 떠돌이의 심정을. 어디에도 자신 같은 자는 없고 증거도 없고 확신은 희미해지는 그 느낌을. 고통만이 존재하는 고문의 나날들을.
영주는 안쓰럽게 보면서 답을 했다.
“사랑하는 내 딸아. 너는 인생을 헛살았구나.”
그 순간 캐런은 결심을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믿으시나요.”
“그래. 그녀를 믿듯이 너를 믿는다.”
그리고 날 100년간 내버려 두었지. 캐런은 초상화를 찢어발기며 화풀이를 하고 싶었다. 사랑이라니. 그리고 격렬한 질투가 깊은 곳에서 끌어 올랐다. 죽음을 맞이한 모친에 대한 시기심이었다.
죽어서 좋겠군요, 어머니. 당신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갔나요? 진정한 자신의 가족들에게로 떠났나요? 나도 어서 죽었으면. 캐런은 부러워서 어쩔 줄을 몰라 떨리기까지 하는 손가락을 잡았다.
“…전 당신보다도 나이가 많아요. 이제야… 본격적으로 제 사랑을 찾, 아야겠군요.”
거북스러워서 목소리가 떨린다. 하지만 영주는 캐런의 목소리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남자는 누구더냐? 남주인공 말이다.”
캐런은 잠깐 머뭇거리다 답했다.
“…레이몬드 경이요.”
“음, 역시. 그럴듯하구나. 흠… 그럼 베르딕이 꽤나 약 올라 했겠군. 그건 좋구나.”
약 오르다 못해 제 목을 도끼로 쳤었죠. 재밌다는 듯 말하는 영주에게 더 이상 말할 힘도 나지 않았다. 베르딕이 어떻든 그게 무어란 말인가. 중요한 건 그녀의 남주인공인데.
“어머니를 믿으신다구요.”
“그래. 온 마음을 다해 믿는다.”
그래야겠지. 믿지 않으면 당신은 그저 미치광이들의 살인을 도운 것밖에 더 되겠어. 자신의 부친은 광신자다. 죽은 캐서린은 그의 신이고 자신은 그녀의 성물이다. 그녀의 영광과 신성을 나타내 주는 증거물일 뿐이다. 자신이 입고 있는 몸을 준 자가 이런 자라니.
“벌써 어두워졌구나.”
“저녁 식사는 전 굶겠어요. 도저히… 할 수 없네요.”
부친에게서 얻어 낼 수 있는 정보는 더 없을 것 같다. 처음부터 그는 당사자가 아니다. 그가 말하는 것이 정확한지 자기 자신도 모른다. 사지를 결박해 손발톱을 뽑는다 하더라도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 이제 그는 그녀에게 필요 없다. 대화는 필요 없다. 캐런은 좀 쉬고 싶었다. 저녁 식사에 참가하면 또다시 그들과 함께해야 할 것이다.
“내일은 참석하거라. 백작 부인이 그녀의 딸과 함께 올 거야.”
“…예.”
캐런은 눈썹을 찌푸렸다. 좀 쉬고 싶었다. 환상과 현실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소화하기가 힘들었다. 정신이 체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질문은 해야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책 밖에서 왔다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영주는 그 말을 듣자 웃었다. 그 순간 그는 청년처럼 보였다. 순수와 열정과 확신을 담아 웃으며 자신이 빚은 성물에게 답을 했다.
“정말 로맨틱하더구나.”
‘캐런이 없네?’
이셀라는 기분이 좋았다. 캐런 하이어가 눈에 띄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심신이 평안하다. 온종일 캐런을 마주치지 않고 레이몬드를 독차지한 이셀라는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듯이 만족스러웠다. 레이몬드는 하루 종일 이셀라의 잡다한 요구를 전부 들어 주었다.
“레이몬드 님, 약혼식 이후에는 말이와요.”
이셀라가 약혼식 뒤의 일정에 대해 들떠서 말을 건네자 레이몬드는 바로 물었다.
“베르딕 씨가 제 처지에 대해 언급을 했습니까?”
좀 더 자신의 비위를 맞추어 주길 바란 이셀라는 약간 불편한 티를 감추지 않았다.
“네에, 군에서는 더 이상 고생할 필요가 없으실 거예요.”
“…그런가요. 최전방에서 물러나게 되는 건 그 전부터 오가던 이야기였습니다만.”
“아니요오, 최전방에서 물러나시는 건 당연한 거구. 이 나라에서 군보다 훨씬 중요한 일들을 맡으셔야죠.”
에반스 가문에 좀 더 이득이 될 만한 일들 말이어요.
아버지의 말이 맞다. 레이몬드는 자신에게 팔렸다.
꽃도 한철이다. 남자의 눈이 잠시 다른 곳으로 머무는 것까지 막을 방법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베르딕이 잠시 다른 여자들과 즐기고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웃어도 그들은 결국 같은 방에서 잠자리에 들며, 가정 내의 대소사를 의논한다. 중요한 건 결혼이라는 큰 계약이다.
“제 평생을 기사단에서 보냈습니다.”
“어머 어머, 아직 젊으시잖아요? 결혼할 신부를 두고 무슨 흉악한 소리를 하시는 것이와요?”
이셀라는 신경질적으로 콧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녀는 더 이상 레이몬드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자신에게 관심 없는 남자의 애정을 갈구하는 것은 너무나 비참하다. 목에 줄을 걸고 먹이를 먹이며 레이몬드가 자신에게 아양 떠는걸 보는 것이 그녀에게 어울리는 입장이다.
“갑자기 있던 곳을 떠나려니 긴장이 돼서 그렇습니다. 좀 어색하군요. 평생직장이라 여겼는데.”
레이몬드가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인다.
“저와 아버지께서 무엇이든지 지원해 주실 테니 걱정하실 필요 없사와요.”
이셀라는 레이몬드의 손을 잡았다. 그는 이셀라의 손을 내려다보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렇군요, 하며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는 이제까지처럼 결국 자신을 도와줄 것이다. 원하는 건 무엇이든 사 줄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남편감조차. 그리고 이셀라는 자신의 약혼자가 자신을 휘두르길 바라지 않았다.
“레이몬드 님, 엘바 백작 부인께서 참석하시면 결혼이나 마찬가지겠사와요?”
“…그렇군요, 이셀라 양.”
“레이몬드 님도 기쁘시죠?”
눈을 가늘게 뜨고 황금빛 미남자를 응시했다. 그는 그림처럼 웃으며 답을 했다.
“네. 경사스러운 일입니다.”
조금의 머뭇거림도 보이지 않고 나오는 긍정의 대답은 오히려 거짓처럼 보였지만 그런 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가 불쾌감을 보일 입장이 아니라는 것. 그 속마음이야 이셀라가 알 바 아니다. 그는 이셀라를 향해 웃고, 같이 홀에 입장하며, 같은 침대에 들 것이다.
“후훗.”
웃으세요, 나의 기사님. 비싸게 값을 치른 나의 신랑.
이셀라는 레이몬드가 감히 아버지처럼 멋대로 살게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이셀라는 어머니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적당히 맞추고 계약에 따른 아이를 가지고 애정과 육욕은 알아서 채우는 그런 관계.
아무리 잘생기고 좋은 혈통의 자제라 하더라도 그는 결국 팔린 종마. 주인은 에반스 가문. 귀족의 혈통이라 하더라도 그는 가문을 잇지 못할 것이며 그의 형은 나날이 명성을 더해가는 동생과 재산을 나누지 않을 것이다.
3일 후 레이몬드가 돌아와서 웃음을 나누는 것은 결국 에반스 가문일 것이다. 비록 그 웃음이 진심에서 우러나지 않더라도 최소한 그가 멋대로 굴지는 못하도록 해야지.
“레이몬드 님. 전쟁터에서 공을 많이 세우셨다 들었사와요.”
“…예.”
“얼마나 많이 해치우셨는지 궁금해요.”
캐런이 미모로 고삐를 쥔다면 자신은 재산으로 고삐를 쥘 것이다. 그리고 고작해야 이 작은 지역의 영주 딸은 여기서 살다가 그녀의 말더듬이 약혼자와 결혼해 시시한 인생을 마칠 것이다.
“…다행히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그걸로 됐지요.”
하루 종일 레이몬드를 독차지한 이셀라는 더없이 즐거워 보였다. 질리지도 않는지 입이 쉬지를 않는다. 반짝이는 눈을 보니 부모로서 어찌 아니 좋을까. 자신의 고명딸을 보며 베르딕은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얘야, 그것은 또 무엇이냐?”
“예?”
너무 좋아 정신도 잘 못 차리는가. 베르딕이 웃자 이셀라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손목의 팔찌를 부친에게 내밀었다.
“레이몬드 경이 주신 거니?”
“네에. 예쁘지요?”
그래 봤자 그녀가 가지고 있는 패물들에 비하면 소소한 것이지만. 중요한 건 레이몬드가 주었다는 것이겠지. 그리고 레이몬드에게 미리 하인을 보내 적당한 장신구에 대해 추천을 한 것도 좋은 선택이었다. 딸에게 말하지 않을 소소한 비밀들을 삼키며 베르딕은 뒤로 물러났다. 영주가 은근히 그에게 속삭였다.
“에반스 씨. 여식의 기분이 좋아 보여 다행이군.”
“영주님이 그런 것까지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영주가 그의 딸이 며칠간 예의 없이 굴었음을 비꼬았다. 그의 말을 대놓고 무시하며 베르딕은 딸과 그녀의 약혼자에게 흐뭇한 시선을 보냈다. 이셀라가 지나치게 예민했던 것이다.
캐런이라는 지나치게 아름다운 또래 여성이 주위에서 사라지자 에반스는 그녀의 약혼자 앞에서 다시 발랄하게 변했다. 그리고 레이몬드 또한 잘 자란 귀족 집안의 영식답게 이셀라의 대화에 적당히 어울려 주면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끌고 있었다. 그 정도의 재치는 있는 자였다.
베르딕은 그가 이셀라의 바람처럼 굴기를 바라진 않는다. 다만 조금이라도 자식의 환상을 지켜 주고 싶었다. 지난번처럼 윽박지르면서 헛된 꿈을 깨는 것도 필요하지만 냉혹하게 계산기를 두들기기보다는 다소 덜떨어져 보이더라도 잘 웃고 잘 우는 딸을 가지고 싶은 것이 결국은 그의 바람인 것이다. 이제까지 딸을 그렇게 키웠다. 가끔 지나치게 눈치 없어 보이는 것도 나이가 더 차면 나아지겠지.
여느 부모처럼 자식에 대한 갖가지 감정을 정리하며 베르딕은 영주에게로 몸을 돌렸다.
“자네 여식은 모친을 닮았는가?”
“그보다는 절 더 닮은 것 같군요.”
“내 딸은 자기 엄마를 똑 닮았지. 자네도 들어 본 적 있는가?”
“레이디 캐서린에 대한 명성이야 널리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그분의 옷을 저희가 제공하길 그토록 바랐지요.”
그래 봤자 사교계 데뷔 후 1년 만에 은퇴하여 이런 시골로 처박혔지만. 그리고 처박혀 있다 죽었다. 베르딕은 캐서린에 대해서는 별다른 감정이 없었지만 그녀를 빼닮았다는 캐런에 대해서는 유감이 많았다.
“나중에 내 딸이 데뷔할 때 옷에 도움을 주면 고맙겠군.”
“…명심하겠습니다.”
베르딕은 이를 갈았다. 신분이란! 베르딕이 영지의 온갖 권리를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에반스 가문은 하이어 가문에게 처진다. 그것이 신분이다. 귀족과 왕족이 있는 나라다. 허리를 숙이고 예를 표해야 한다.
“후에 따님과 제 여식이 같이 데뷔하는 걸 보고 싶군요.”
그런 하이어가의 딸이 에반스가의 시녀로 등장한다면 꽤나 볼만할 것이다.
베르딕은 킬킬거리며 영주를 향해 잔을 들어 보았다.
그의 딸과는 전혀 다른 영주의 자식은 미모뿐 아니라 침묵과 미소를 장신구로 쓴다. 나이답지 않은 현숙함은 역경이 만들어 준 것일까. 그렇다면 그 역경의 상당 부분은 자신이 만들어 준 것이리라.
이셀라처럼 캐런의 인격에도 자신이 상당히 영향을 주었겠지. 베르딕은 어린 나이의 치기를 믿는 사람이었다. 10대의 여아는 자고로 이셀라 같아야 정상인 것이다. 캐런같이 지나치게 속을 가다듬는 10대는 속이 깊은 것이 아니라 치여서 수그러든 것일 뿐.
“영주님의 따님께서는 몸이 안 좋으신가 봅니다.”
몸도 영 부실한 것이 이셀라보다 못하다. 영주는 고개를 숙이고 우물거리면서 답을 했다.
“…음, 좀 몸이 약해져서 말이지. 아무래도 여러 일이 겹치니까 말일세.”
영영 나오지 말아라. 베르딕은 속으로 빌었다. 술집 여자나 집안의 하녀가 예쁜 것은 좋지만 딸의 경쟁자가 아름다운 것은 정말이지 짜증 나는 일이다.
캐런이 이 자리에 없으니 이다지도 평화롭지 않은가. 베르딕은 어린 여자 하나가 그리 분위기를 장악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별다른 이유도 아닌 고운 얼굴 하나 때문에 딸이 우울해하고 계약이 흔들린다. 베르딕은 아무 탈 없는 계약을 원했다.
“하이어 영애가 편찮은가요?”
어느새 레이몬드가 영주에게 다가와 물었다.
“레이몬드 님, 그런 것보다….”
레이몬드가 영주에게 묻자 이셀라가 바로 달라붙었다. 두 중년은 동시에 기분이 나빠졌다. 하나는 딸의 아픔을 가벼이 여기는 태도에, 다른 하나는 그녀가 매달리는 것 같은 태도에 그러했다.
베르딕은 곁눈질로 영주를 흘겨보고는 이셀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셀라, 나중에 하이어 영애의 방에 방문을 하는 것이 어떻겠니?”
“예에?”
이해를 못하겠다는 얼굴을 하는 딸에게 영주를 힐끗 쳐다보고서는 이셀라에게 재차 권했다.
“많이 편찮은가 보구나. 식사에도 빠지고 말이야.”
“어… 음… 네, 그런가 보네요.”
이셀라가 떨떠름한 얼굴로 한 손에는 레이몬드의 팔을 꼭 쥐고는 불안한 눈빛으로 부친과 영주를 쳐다보았다. 큰 눈이 순진해 보인다.
“가서 괜찮은지 들여다보고, 사흘 뒤의 약혼식에는 반드시 참석해 달라고 요구하거라.”
부탁이 아닌 요구.
마치 주인이 손님을 돌보는 것처럼 그렇게 해 주거라. 더 큰 실례를 저지르고 있는 건 하이어 양이니.
아직도 자신이 이 땅의 주인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으니.
“굳이 아픈 사람을 데리고 올 필요가 있을까요?”
보다 못한 레이몬드가 나섰다.
“후후, 레이몬드 경. 인기가 많아 좋겠습니다.”
“베르딕 씨.”
“아무것도 아닙니다.”
베르딕은 영주의 굳은 얼굴을 즐겁게 감상했다. 캐런이 정말로 아픈 것인지, 아니면 레이몬드가 약혼하는 것이 속상해서 이러는 것인지는 상관이 없다. 여기서 더 말을 하면 후자로 상황은 굳어진다.
“백작 부인께서 참석하시는 결혼, 아니지. 약혼식에 빠지면 꽤나 섭섭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이셀라도 이 지역에서 꽤나 오랫동안 신세를 질 텐데. 여러모로 확실히 보여 주는 것이 좋지요.”
“흠, 이야기가 재미있게 흘러가는구려.”
“예에.”
영주는 무엇이라 더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다시 웃음을 띠고는 물러나 듈란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잠깐의 신경전에 악사들이 눈치를 보느라 음악이 느려졌다. 베르딕은 영주를 대신해 악사들에게 왈츠를 연주케 했다.
다시 음악이 시작되고 어색한 웃음 섞인 식사가 이어졌다.
약혼식을 앞당긴 것은 적절한 처방전이었다. 베르딕은 딸의 안색이 눈에 띄게 좋아진 것을 보고 다시 식기를 들었다. 축제를 맞이해 최고급 식재료를 들여온 것답게 모든 음식은 각각이 오묘한 맛을 뽐내고 있었다.
‘음…. 그래도 그날만 못하군.’
무엇이 문제일까. 레이몬드와의 약혼식은 결혼식이나 다름없고. 사업도 순조로우며 백작 부인을 통한 의원직도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일이 순조롭다. 하지만 약간 부족해. 단 하나. 무엇일까 그건.
그의 혓바닥은 그날의 황홀함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베르딕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베르딕은 이 집 안에서 즐길 수 있는 미식의 정도를 극한까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 백작 부인의 방문이 다시 그 미식의 향연을 재현해 줄 것인가.
한쪽에 영주를, 다른 한쪽에 레이몬드를 거느리고 백작 부인과 협상하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니 절로 배가 부른다. 베르딕은 눈을 가늘게 뜨고 딸의 웃는 얼굴을 보았다.
모든 것이 순탄하다.
영주는 벙어리 소년이 가져온 편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발신인은 자신의 외동딸이었다. 한참을 뚫어지게 쳐다보아도 안에 담긴 글씨가 변하는 일은 없었다.
한숨을 토해 냈다. 그동안 그는 충분히 괴로웠다. 아내가 죽은 그날 이후로 하이어 영주는 세상 모든 것이 회색으로 보였다. 영주로서의 의무도 하찮은 것이었고 아내를 빼닮은 딸조차 그에게 위로가 되진 않았다.
캐서린이 뛰어다니던 숲 너머를 흐느끼며 쳐다보고 있으니 세월은 순식간에 흘렀다. 눈을 떠보니 어느 순간 베르딕이 갖가지 권리를 앗아간 후였지만, 베르딕에게 그리 큰 분노가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더 이상 없기에.
하지만 편지의 내용은 그로서도 약간은 충격이었다.
손바닥을 비벼 눈가를 문질렀다. 피곤했다.
연거푸 한숨을 토해 내고는 깍지를 꼈다. 그리고 한번 아내의 초상화를 올려 보았다.
“… 난 당신을 믿어.”
그러니까 그 모든 일을 했어.
일어나 편지를 화롯불에 집어넣었다. 종이는 순식간에 일그러지며 불에 사그라졌다. 하지만 그 내용은 문신처럼 영주의 뇌리에 새겨졌다.
“그 안에 약이 얼마나 들었니?”
캐런이 음식을 거부하자 결국 듈란이 직접 식사를 들고 침실로 끌려왔다. 눈을 굴리는 모습이 도마 위 생선의 눈 같았다. 그 모습에서 듈란이 이미 보웬과 영주에게서 자초지종을 다 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쭈뼛거리는 태도로 결국 입을 열어 답을 했다.
“…많이.”
“아주 훌륭한 주치의야. 칭찬하는 거니 고맙게 들어.”
듈란은 침묵했다.
캐런은 침대에 일어나 앉아 약에 절은 음식을 노려보았다. 그래서 그랬군. 듈란이 자신의 약혼자인 이유. 차기 영주 자리에 앉아서 배운 것이 정치가 아닌 의학인 이유.
하는 일은 도살과 요리. 요리안의 향신료 사이사이에 얼마나 많은 약들이 감추어져 있을지 궁금했다. 하이어 저택에서의 식사가 레이몬드 저택에 비해 한없이 끔찍했던 것도 이래서였나. 얼마나 자신의 식사에 약을 밀어 넣었을지 떠올리면 분통이 터졌다. 그녀는 무엇보다 그것이 화가 났다. 짧은 인생에서 먹는 즐거움을 앗아가?
“그래,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것이 맞아 떨어지네.”
캐런은 자신의 기억과 어머니의 구혼자들을 통해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기회가 있을지 알았다. 자신은 이 영지의 유일한 상속녀이다. 그리고 외모는 정말로 압도적이었다. 시간이 좀 더 있었더라면, 더 많은 남자들 중에서 고를 수도 있었겠지. 유산과 작위를 이어받지 못하는 귀족가의 차남들, 지위를 얻고자 하는 신흥 부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하면 캐런에게 기회는 많았다.
“어머니가 왕족과 결혼했으면 해외여행도 많이 했을 텐데. 아쉽다. 어떻게 생각해, 주치의님?”
“… 네, 네가 정상이… 었, 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하지. 다른 집, 에서 태어났다면.”
“얼씨구.”
말은 잘해요. 캐런은 듈란이 가져온 식사를 밀었다. 도무지 식욕이 돌지 않았다. 비쩍 마른 친척의 뺨을 본다. 역시 좋게 봐 줘도 미남과는 거리가 멀었다.
“생각해 보니 해외에서 태어났으면 또 거기서도 반복했으려나, 어머니에게서 이어진다면.”
자신은 대부호, 더 나아가 귀족들과의 만남이 결코 불가능한 위치의 여성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이미 모친인 캐런이 입증했다. 오히려 그녀는 귀천상혼이었다. 귀족의 딸이었고 왕족에게서도 구애를 받은 여성이었다. 여성의 미모는 고대적부터 지금까지 아직도 높은 평가를 받는 것.
서로 적절한 계약 조건을 따져 가면서 맞추는 것이 통상의 결혼이다. 캐런 자신은 수도의 모든 미혼 여성들을 통틀어서 가장 아름답고 심지어 지위가 미천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왕족처럼 너무 높지도 않으니 이 얼마나 좋은 조건인가. 하지만 영주는 미리 캐런을 듈란과 약혼시켰다.
“수도원에서 8년이니?”
“…그래.”
“의료만 8년을 공부했는데 차기 영주라니, 말도 안 되지. 하하. 참 나.”
캐런은 코웃음을 쳤다.
가난한 친척을 데려다가 의료 공부를 시키고 차기 영주 자리에 앉혔다니. 자신의 부친은 캐런의 광증을 치료하기 위해서일 뿐 아니라 언제든 적절히 치워 버릴 수 있는 대용품을 설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듈란은 처음부터 영주가 진짜 ‘남주인공’과의 만남 이전에 준비한 대리인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꽤나 재밌는 거래를 했구나.”
캐런은 영주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수많은 구혼자들을 거느리던 캐서린은 그중 하나와 약혼까지 갔었다가 약혼을 파하고 하이어 영주와 결혼했다. 영주는 자신의 경우처럼 듈란이라는 장애물이 있어도 그런 장애물을 뛰어넘는 진짜 남자 주인공이 나타나길 기다린 것이다.
「플롯」의 반복이다.
“너는 그 말을 믿니? 부모님의 말과 내 말 말이야.”
“내, 내 생각은 중요하지 않… 을 텐데.”
“뭐 그리 귀한 생각이라고 입 다물고 있는 건데?”
“…….”
냉정히 보자면 결코 듈란도 손해 보는 일은 아니다. 영주가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듈란은 교구를 담당할 수 있는 지위가 주어진다. 또한 단순한 성직자가 아닌 의료를 익힘으로서 추후 팽 당하더라도 보장책이 생긴다. 더욱이 병이 있는 캐런을 바로 옆에서 관리할 수 있으니 권력은 한층 더 강화된다. 계산하면 서로에게 나쁘지 않은 거래다.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너도 아버지처럼 믿니? 어머니와 내 말을 믿어?”
듈란은 눈을 끔벅이고는 간신히 답을 했다.
“…믿, 믿어.”
“너 의사 자격 가져다 서커스장 코끼리 발밑에 버리는 건 어떠니. 자근자근 잘 밟아 줄 거야. 가는 길에 신관 자리도 내려놓고.”
캐런의 힐난에도 불구하고 듈란은 말을 이었다.
“믿, 믿지 않으면 달라지나?”
“믿는다고 달라질 것은 또 뭔데?”
침묵이 또 이어졌다. 기다리다가 슬슬 짜증이 밀려 올라올 쯤에야 대답이 나왔다.
“…위, 안.”
“뭐?”
“…….”
캐런은 이마를 짚었다.
“아니, 잘 못 들었는데 따위의 헛소리는 안 할게. 기가 차서 그래. 그래 위안 좋지, 응.”
캐런은 전혀 생각지도 않은 대답을 한 듈란에게 기가 막혔다. 믿는다라…. 여기서 네가 그걸 믿는다고? 캐런은 믿느냐 묻기는 했지만 돌아올 대답은 반대로 예상하고 있었다.
“차라리 이 집안 다 미쳤다고 대답해 주는 게 그럴듯할 텐데…. 이 말을 내 스스로 한다는 것도 웃기네.”
아직도 그녀는 자신과 모친이 동시에 미쳤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나마 그것은 아마 세상 모든 사람들이 증명하지 못할 수준의 것 같다. 마치 이 세상이 이데아의 그림자 같은 것이 아니냐 따위의 것처럼 현실과는 좀 상관없는 그런 이야기이어서 그녀에게 더 이상 크게 파문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듈란이 의사라면, 신관이라면, 그녀의 회귀를 부정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아버지와는 다르게 캐런 자신이 망상증 환자이며 이것이 너의 인생이고 더 이상 반복하지 않는다고. 그런 달콤한 말을 바랐거늘.
“네게도 네 인생이 있겠지. 응.”
그렇지 않으면 네 인생이 그냥 시정마밖에 더 되겠어. 적당히 흥을 돋워 주는 그러한 인생이란 걸 확인받는 기분은 끔찍하겠지. 캐런은 짐작할 수 있었다. 위치는 다르더라도 그러한 질투는 보편적이다. 조연의 인생이라 함은 얼마나 이기적인 표현인가. 누구라도 각자의 인생에서는 자신이 주연이거늘, 영주 부부는 조연의 인생이라는 것을 실제로 만들어 버렸다.
“듈란, 위안이 필요해?”
그럼 여기서 레이몬드가 아닌 듈란을 선택하면 그것이 진정한 사랑으로 인정이 될까?
그럴듯한 이야기 아닌가, 아버지처럼. 잘생기고 매력 있는 구혼자를 마다하고 진정한 사랑을 찾는다든가, 수수한 사랑이 진짜라든가, 마음의 파랑새라든가 말이지.
“응?”
캐런은 손을 뻗어 듈란의 볼을 쓰다듬었다.
이성적으로 보자면 듈란에게도 나쁜 거래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보자면 받았던 것을 뺏기는 것과 다름이 없다. 캐런은 일반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알았다. 그런 욕심들. 본디 자신의 것이 아닌 대여한 것일 뿐인데도 없어지면 상실감에 몸부림치는 것이 사람의 욕심.
더욱이 관계를 진전한 남녀라면 더욱 그렇지.
캐런은 듈란이 레이몬드와 싸움이라도 하기를 바랐다. 네 사랑을 증명해 줘. 끝을 내기 위해서.
“위, 위로가 필요한 건 너겠지.”
“…그래. 맞아.”
하지만 캐런은 듈란과의 끝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필요 없어.”
기억났다.
그도 그녀에게 답을 주지 않았다. 듈란과의 결혼은 그냥 그런 것이었다.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미 갖가지 선택을 해 본 캐런이다. 그나마 캐런은 듈란이 왜 결혼 후에 불안에 떨며 신을 찾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계약 위반이라는 거겠지. 자신의 것이라며 빼앗아 올 배포도 없는 남자인 것이다.
손을 내렸다.
“듈란, 너와 약혼을 파할 거야.”
듈란의 얼굴은 일그러졌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그래.”
그것이 또 재미가 없었다. 주어진 것에 욕심을 내고 받았던 것을 뺏기면 부루퉁해하지만 나서서 외칠 용기는 없는 자의 태도였다. 주역이 될 수 없는 조연의 태도. 불만이 있어도 혁명할 의지는 없으며 주어진 역에 순응하는 범인의 모습이다.
캐런은 듈란의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을 쥐었다. 흠칫 피하는 그의 손을 꼭 쥐고서는 듈란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저기, 듈란. 역시 그때 그냥 죽지 그랬니?”
듈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새카만 눈에 자신의 얼굴이 비추어졌다. 그리고 캐런은 그 눈에서 자신의 얼굴 외에 아무것도 읽지 못했다.
“그럼 진짜 인생을 살았을 텐데.”
너도. 나도.
듈란의 입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싸늘한 새벽공기가 뺨을 할퀸다. 서늘한 여름의 풀밭을 헤치며 캐런은 발걸음을 옮겼다. 싸늘한 공기가 머리를 맑게 한다. 가끔 즐기는 이런 시간. 사람들의 관심을 피하고 나온 새벽 산책은 마음을 들뜨게 했다. 이 시간이 캐런은 좋았다.
“약간 춥구나.”
“…….”
톰의 옷은 더 얇기에 캐런은 더 이상 불평하지 않았다. 정원에서 더 떨어진 하이어가의 무덤가는 양지에 있음에도 더 추웠다.
“무덤이라서 더 춥게 느껴지는 걸까, 아니면 실제로 더 온도가 낮을까?”
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답을 원한 건 아니어서 캐런은 마저 발을 옮겼다.
그녀가 찾는 무덤에는 동상이 있어 눈에 띄었다. 다시 한 번 묘비에 적힌 이름을 읽었다.
“이 상이 캐서린, 「캐런」의… 아마도 내 어머니야.”
캐런은 그 세월 동안 한 번도 찾지 않은 모친의 묘를 보며 잠시 감상에 젖었다. 동상은 머리카락이며 옷의 주름이며 꽤나 공들였지만 새하얗고 차가웠다. 아무리 뛰어난 예술가가 재현해도 피부의 색은 사라지고 움직임은 고정되며 형태는 기억과 달라진다.
영주의 머릿속 캐서린은 어떤 모습일까.
동상의 뺨을 만져 보았다. 예상처럼 싸늘했다. 석재가 나타내는 죽음의 감촉.
“관을 열어 보고 싶은데.”
톰이 다가왔지만 장정 여럿이 간신히 옮긴 돌덩이가 소년소녀의 손으로 옮겨질 리 없었다.
“…됐어.”
무덤에 누웠다. 여름의 하늘은 맑았고 별은 쏟아질 듯이 보였다.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 환하게 빛나는 별들 사이로 수억 개의 흐릿한 별들이 한 번 더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별의 바다. 이 지상의 싸늘한 바람은 별빛을 더 빛나게 하는 장치에 지나지 않았다. 별이 빛나는 새벽이었다.
별이 보여 주는 그 영속성에 취한다. 별이 저렇게나 아름답다. 하늘과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지난 100년처럼. 어쩌면 앞으로도. 책이라는 세계 안에 갇히기에는 너무나 광활하고 소름끼칠 정도로 오래된 저 세계들.
“어머니는 정말 죽었나.”
캐런은 왠지 울고 싶어졌다.
“부러워 죽겠네.”
레이디 노라 캐서린 하이어.
마침내 평온한 잠을 자게 된 것을 축하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