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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약혼식 (8/31)

07. 약혼식


 

사실 아직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알려진 것은 너무나 없었다. 아버지의 허무하고 비구체적인 답안에 캐런이 제일 처음 느낀 감정은 어이없음이었으니.

하지만 지금 캐런은 고민하기보다 좀 더 색다른 감정에 취했다.

그것은 희망이었다.

마침내 얻을 수 있는 안식에 대한 희망.

자신보다 먼저 겪은 선배가 있다. 캐서린이 정말로 자신과 같은 경험을 했다면 캐런 또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 같은 자가 이 세상에 또 있었던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달콤한지.

캐런은 산뜻한 마음으로 쳄발로에 앉아 건반을 두드렸다. 누가 나오기에는 이르지만 연주가 잠을 방해하는 시간대는 아니다. 이른 아침의 선선한 공기가 방 안을 감싼다. 아침에 어울리는 경쾌한 곡을 치면서 캐런은 옆에 선 톰에게 말을 건넸다.

“드디어 죽을 수 있다는 희망이야. 이 얼마나 기쁜 일이니?”

캐런은 기쁨에 웃으며 톰에게 말했다. 소년은 믿든 안 믿든 입을 다물고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캐런은 톰이 벙어리가 된 것이 가끔 아쉬울 때도 있었다. 좀 더 재미있는 반응을 원하건만 벙어리 소년이 할 수 있는 표현에는 한계가 있다. 톰은 입을 다물고서 고개를 끄덕이거나 저을 뿐이다.

“내가 죽으면 너한테는 잘된 일 아니니?”

“…….”

“이런, 짓궂게 굴 생각은 아니었는데.”

터지는 웃음을 참으며 캐런은 박자를 더 빠르게 눌렀다.

“난 복수를 긍정한단다. 인생이 원래 그래. 불공평하지.”

이 소년의 얼굴을 보고 누가 나이를 짐작할 수 있을까? 톰은 저잣거리에서 굴러다니던 때와는 다르게 한결 깔끔한 모습이었지만 열리지 않는 입 안이 어떨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얼굴 표정이 달랐다. 골목의 아이들이 그러하듯 당장의 처참함에 취한 눈빛이 아니라 좀 더 고도화된 고통을 겪은 자의 눈빛이었다. 사실 평생을 그리 살면 다른 삶에 대한 갈구나 불만도 없는 법이다

“흐음….”

이제 슬슬 죽여 버릴까?

캐런은 날짜를 계산해 보았다. 본래대로라면 얼마 되지 않아 톰은 앓다가 죽을 것이다. 하지만 톰은 안색이 좋지 않으면서도 쓰러지거나 하지 않았다. 직접 간호해도 일찍 죽어 버렸던 예전과는 다르게 제법 잘 버티는 이유라.

캐런은 소년의 뺨에 오른 생기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표정은 좋지 않으나 육체는 전에 없이 활기를 띠고 있다. 보기에는 당장 죽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재밌는데.

“보통 이런 전개에서는 이런 어린애를 살려 두면 복수하러 나타나곤 하던데.”

캐런은 건반을 세게 눌렀다.

“놀랐니?”

말은 할 수 없어도 히익거리는 숨소리는 난다. 캐런은 꺄르륵 웃으며 사과를 했다.

“미안. 그런데 생각보다 건강해 보이는구나. 신기해서 그래.”

톰이 표정으로 답을 했다. 불안해한다.

캐런은 다시 연주를 이었다. 곡은 발랄하고 캐런의 심정 또한 그렇다.

죽일까? 죽이고 싶어. 그냥 죽여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차피 죽을 애잖아? 하지만 죽지 않으면 그건 더 재밌을 것 같은데. 낸시를 죽인 것으로 시작해 이렇게 일이 풀렸으니 죽을 톰을 살리면 또 일이 어떻게 될까. 혼란스럽다. 어렵다. 이번에 살려 주고 다음에 죽일까. 무엇이 더 좋으려나?

“아가씨!”

고민이 깨졌다.

“치장도 안 하시고 이렇게 나오시면 어떡해요오.”

“내 외모야 언제나 완벽하거든.”

“와… 자신감….”

도나가 졸음이 역력한 모습으로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을 들고 왔다. 캐런은 얼굴을 닦으며 건반의 뚜껑을 내렸다.

“요즘 재미 들렸나 봐.”

“연주요?”

“음, 뭐.”

캐런은 자신이 자연스럽게 또다시 살인을 즐겁게 떠올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재미를 목적으로 한 행위였지만 새삼스러워진다. 해답이 사랑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도 행동 원칙에 변화를 주고 싶어지지는 않는다.

“참아야지.”

“아프시다면서 꾀병이셨군요? 그래도 밤에는 연주하시면 안 돼요. 백작 부인이 오신다고 했어요.”

“알아… 안다구.”

빌어먹을 사건과 전개여. 책 속의 노동자들에게 애도를.

“어서 몸단장 준비를 하셔야 해요.”

“어째 네가 더 들떠 보인다?”

“헤헤. 어제 재단사가 옷을 가져왔는데 엄청 예쁘더라구요.”

“전날에야 완성하다니 손이 너무 느려.”

이셀라 다음으로 맞춘 옷일 테니 어쩔 수 없겠지만. 사소한 불만을 속으로 털어놓는다. 사정을 모르는 도나는 들떠서 종알댄다.

“그래도 정말 예뻐요.”

“알겠어.”

“아가씨. 남은 천도 같이 도착했는데, 머리 리본 만들어도 될까요?”

“에반스가와 거래하는 사람이라더니 그런 것에서도 철저하네. 좋아. 마음대로 해.”

도나는 발랄하게 탁탁 소리를 내며 먼저 방을 나갔다. 저리 좋을까. 캐런은 도나가 건넨 수건의 온기에 취해 눈을 감았다.

복도 저편에서 도나가 목욕물을 받아 놓았다는 소리를 하는 것이 들린다. 캐런은 한숨을 쉬면서 그 뒤로 발걸음을 이었다. 치장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역시 귀찮은 건 귀찮은 일이다. 백작 부인 말고도 신경 써야 할 일이 한 가득인데. 그래도 이제까지 얻은 것이 많은 것처럼 앞으로도 얻을 정보는 많으리라는 희망을 갖는다.

캐런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물었다.

“참. 톰. 아버지에게 편지는 잘 전해 드렸니?”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캐런은 자신의 방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프시다 들었어요.”

이셀라가 방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셀라.”

목욕물이 식겠군. 캐런은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이셀라는 인상을 썼다.

“그리 아프지도 않아 보이는데.”

이셀라의 눈썹이 찌푸려져 있다. 무엇이 못마땅한지. 이번처럼 약혼식을 이리 성대히 여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셀라에게 더없이 좋은 기회이건만 이셀라는 캐런을 향해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캐런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인사를 건넸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이셀라 양.”

“…….”

웃음을 한번 지어 주는 것도 좋지.

이셀라는 잠시 대화를 멈추다가 캐런이 자리를 뜨려 하자 황급히 큰 소리로 캐런을 불렀다.

“캐런!”

“네.”

부르고도 다시 침묵이 이어진다. 머뭇거리다 다시 입을 연다.

“제 약혼식에 참가하세요.”

“몸이 안 좋을 것 같은데요. 아직 기운이 그리 나지는 않네요.”

“아침부터 피아노는 잘만 치시면서 그런 소리 하기에요?”

“손가락 놀리는 데는 그리 큰 힘이 필요치 않아서요. 그리고 쳄발로랍니다.”

“지금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이셀라 양, 말투가 어색해지고 있어요. 캐런은 입술에 힘을 주어야 했다. 괜한 공격이었나? 캐런은 아침부터 시비를 거는 이셀라를 어찌 대해야 할지 고민했다. 모처럼 상쾌했던 기분이 처진다. 캐런 자신에게도 희망이 보이는 행복한 아침이요, 이셀라 저에게도 행복할 시간에 왜 이러는 거야.

“백작 부인이 오늘 오시는데 빠지실 건가 봐요? 그렇게 아프면.”

“…나가야겠죠.”

아무렴, 엘바 백작 부인인걸. 그 베르딕이 줄을 대고자 안달복달하는, 재무부 장관을 남편으로 두고 있는 그 젊은 부인은 성격 또한 만만치 않다. 자신을 백작 부인과 동일시하는 이셀라가 우습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도 실수를 범해 자신의 밑천을 드러낼까.

“오늘밤에는 참석하면서, 이틀 뒤에는 빠진다니, 너무하지 않나요.”

“이셀라?”

이런 식으로 말이다.

캐런은 약간 기가 차서 이셀라를 쳐다보았다.

내가 안 가는 게 너한테도 좋을 텐데 왜 이리 구니?

캐런이 레이몬드의 눈길을 끄는 것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던 이셀라였다. 앞에서 웃으면서 악기나 그림을 같이 그리더라도, 같이 차를 마시는 시간을 보내더라도 그들은 친구가 아니다. 남자에 있어서는 경쟁자요, 사업에 관해서는 피해자와 가해자다. 최소한 이셀라도 그 정도는 알 것이다.

하지만 왜 캐런에게 참석을 강요하는가. 본인도 원하지 않으면서.

“베르딕 씨께서 요구하셨나요?”

이셀라가 원하지도 않으면서 요구하는 이유는 부친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원하는 걸 들어주는 사람도 그뿐이지만.

“아뇨! 제가 바라는 거예요. 반드시 제 약혼식에 참석하시길.”

이셀라는 고개를 흔들며 강하게 부정했지만 캐런은 믿지 않는다.

“하아. 알겠어요.”

이셀라가 부채를 살살 부치며 눈을 가늘게 뜬다. 내심 웃는다.

“이참에 듈란 님과의 약혼식도 하면 좋구요.”

아, 그런 생각이었어? 캐런은 이제야 그녀의 생각이 이해가 갔다. 이건 알겠다. 이건 베르딕의 생각이 아니군. 캐런은 내심 웃었다. 이런 식으로 그녀를 레이몬드에게서 확실히 떼어 놓고자 하는 수작이다.

하지만 어쩌나.

캐런은 어깨를 과장되게 으쓱이며 대답했다.

“음, 전 듈란과 약혼을 파할 생각이에요.”

“네?”

“그렇게 됐어요.”

이셀라는 한번 코를 세게 쥐어박힌 표정으로 변했다. 우습다.

“서, 설마…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나요?”

여기서 ‘네, 레이몬드 경이요.’ 이렇게 대답하면 머리채를 뜯을까? 하지만 캐런은 아직 그 정도까지 정신을 놓지는 않았다.

“글쎄요.”

애매모호하게 답하자 이셀라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는다.

“당신 참으로 나쁜 사람이네요?”

“대체 거기서 어떻게 해야 그런 결론이….”

“약속을 깨다니요!”

“듈란도 동의했는걸요?”

“네에?”

“서로 아무것도 모를 때 부모님들의 의견으로 결정된 일인걸요. 아직 우린 서로를 너무 몰라요.”

새빨간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캐런이 웃었다.

“당장 아버지가 돌아가신다거나….”

그러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까. 벌써 돌아가셨다면.

“하는 것도 아닌데, 저도 이셀라처럼 도시에 나가 보고 싶어요. 지난번에 이셀라 양이 꼭 데려다준다고 하셨잖아요? 수도의 오페라하우스요.”

이셀라는 사람의 얼굴색이 이리도 다양하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나중에 봐요 이셀라. 저도 치장 준비를 해야 해서.”

치장은 훌륭하게 마무리되었다.

“몸이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네. 아직도 좀 피곤해요.”

한 번쯤은 이셀라에게 져 주는 것도 괜찮으려나? 혹시 모르잖아. 우정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둥 뭐 그런 것.

캐런은 이셀라를 곁눈질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캐런은 좀 더 가련해 보이기 위해 한껏 힘을 썼다. 얼굴은 더욱 창백하게 만들기 위해 코르셋을 졸라매었고 분칠은 평상시 보다 한톤 더 밝게, 입술의 색은 죽이고, 눈 아래에는 살짝 어두운 색을 깔아 영락없는 병자의 모습을 만들었다.

“…아침만 해도 멀쩡해 보… 이시더니….”

이셀라의 표정이 재밌어서 캐런은 슬쩍 레이몬드 쪽으로 몸을 기댄다. 자연스럽게 그는 캐런을 받았다.

“콜록콜록.”

“괜찮으십니까?”

물론 가짜 병자다. 저 편에서 듈란이 지랄, 하는 눈빛으로 이를 악문다. 캐런은 슬쩍 주먹을 들었다. 꺼져.

보웬이 영주와 함께 홀 안으로 들어와 외쳤다.

“백작 부인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캐런은 부친에게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제 편지에 대해 생각해 보셨나요?”

영주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것이 의아해 캐런은 더욱 부친 옆으로 바싹 붙었다.

“안 보셨어요?”

“보았다. 준비도 했어…. 하지만 난 널 이해 못하겠구나.”

영주는 모자를 벗어 백작 부인이 들어오길 기다리며 작게 속삭였다. 손끝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왜 넌 내 죽음을 바란단 말이냐?”

“정말 이유를 모르시겠어요?”

캐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영주가 전혀 짐작도 못 하겠다는 듯이 답하자 의아했다. 영주는 당연히 자신이 죽어야 하지 않느냐고 묻는 듯한 딸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목소리가 잠긴다.

“그래. 난 도무지 모르겠구나.”

캐런은 부친의 얼굴을 멍하게 쳐다보다 더듬거리며 대답을 했다.

“음, 아, 네에. 죄송해요. 제가 너무 예의 없었네요. 제게 너무 친숙한 일이라 다른 사람에게는 어떻게 들릴지… 으음, 네… 그렇죠.”

캐런은 정말로 미안해 보였다. 죽어 달라고 했으면서 편지가 불친절하다고 사과한다. 영주는 순간 드는 생각을 지우려고 애를 써야 했다.

“난 이제까지 널 위해서 그 모든 일들을 해 왔어. 내가 없으면 넌 앞으로 대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

“이유는 몇 가지 있지만… 우선 아버지, 전 보호가 필요 없어요. 그때도 말했지만 제가 원하는 건 안전한 환경이 아니랍니다.”

캐런은 영주가 전혀 짐작조차 못하는 것이 약간 실망스러웠다. 캐런이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은 감싸면서 그 칼이 자신에게도 돌아오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걸까. 사람이란 원래 그런 것일까.

캐런이 원하는 것은 좀 더 다양한 환경의 변화였다. 낸시를 죽이는 것으로 이 정도까지 변한다면? 영주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어차피 죽을 사람이니 더 일찍 죽는 것은 무리가 없다. 그러나 죽는 시기가 당겨질 테니 분명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이다. 여러모로 안전한 관측 대상이다.

그리고 이유는 그뿐이 아니다.

“제가 무엇보다 보고 싶은 건 사랑의 확인이에요.”

캐런의 얼굴은 순진해 보였다. 그 나이대의 얼굴로 보였다. 궁금해서 부모에게 물어보고 귀 기울이는 자식의 얼굴이었다. 그래서 영주는 멀거니 그 얼굴을 보며 되물었다.

“사랑?”

“네.”

“그것이 지금.”

아직도 추론하지 못하는가? 하지만 캐런은 당장 답을 주는 대신 손가락을 들어 입을 막았다.

쉿.

“아버지, 레이디 엘바가 왔어요.”

캐런이 말을 끊었다. 영주의 표정은 불안하고 초조해 보였지만 어쩌겠는가. 지금은 부친의 죽음을 요구하는 이유보다 일이 더 중요한 상황이다.

캐런 스스로도 상황이 우스워 입술을 깨물고 평정을 가정했다. 조소, 고소, 폭소. 온갖 웃음. 웃으면 안 돼. 일에 집중하자.

레이디 엘바 피트제럴드. 돌로 깎아 만든 듯한 얼굴의 그녀는 화통 같은 목소리로 남편을 누르고 살았으며, 충동적인 기질도 강했다. 심약한 남편을 정계에 밀어 넣을 정도로 귀족 부인의 야심을 보여 주었으나, 도박을 지나치게 좋아했다.

“오랜만이군, 베르딕 에반스.”

“제 청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디 엘바 피츠제럴드.”

부채를 탁 소리 나게 펼치며 눈을 내리깐다. 근처라고는 해도 휴양지에서 이곳까지 오게 한 것은 베르딕의 압박이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도박에서 진 그녀는 베르딕에게 거금을 빌렸고, 억지로 피츠제럴드 백작과의 만남을 주선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나중에 베르딕의 코를 꽉 눌러 주렴.”

영주가 조용히 속삭였다.

베르딕은 영주와 캐런, 레이몬드 보다도 아래쪽 줄에 서 있었지만 백작 부인이 제일 먼저 알아보고 눈인사를 건넨 것은 베르딕이었다. 그것이 영주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아버지에게 그런 것이 의미 있어요?”

죽는다면 의미가 사라지실 텐데 말이지요. 캐런은 뒷말을 삼켰다.

레이몬드가 지나치게 가까이에 있다.

“…확고하구나.”

영주가 쓰게 웃었다.

“나중에 더 이야기하자. 궁금하구나. 왜 내가 …할지.”

“지금은 일부터 해요, 아버지.”

레이디 엘바가 영주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캐런은 레이디 엘바가 베르딕을 지나치자마자 표정을 굳히는 것을 보며 웃었다. 채무자의 입장은 쉽지 않은가요, 부인? 부인도 이렇게 일찍 만나는 건 처음이군요.

레이디 엘바의 어린 딸 리안은 종종걸음으로 모친의 뒤를 따르다가 캐런의 얼굴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어린애들은 편하다. 예쁜 것을 좋아하고 이에 호의를 보내며, 속이 쉽게 드러난다. 톰은 벌써 지나치게 과묵해져서 재미가 덜했는데. 캐런은 그런 생각을 하며 생긋 웃어 주었다. 레이디 리안도 활짝 웃는다.

영주가 엘바 백작 부인의 손에 입을 맞추고 간단한 인사를 건넸다.

“레이디 엘바께서 이곳까지 오시다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축제가 꽤 볼만하더군요. 리안이 재밌어 해서 저도 즐거웠어요.”

“즐기셨다니 기쁩니다.”

아직까지 이 땅의 주인은 베르딕이 아닌 하이어인 것이다. 하지만 백작 부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 다음의 차례인 캐런에게로 눈을 돌렸다.

“…모친을 닮았구나.”

매번 들었던 소리지만 이번처럼 새롭게 들리는 일은 없었다. 캐런은 약간 우울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만나 뵙게 뵈어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레이디 엘바.”

그녀는 생전의 캐서린도 봤겠지.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캐런은 데어를 죽인 것이 어느 정도 감정적이었음을 다음날에서야 깨닫고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다. 이제는 데어 부인 대신 레이디 엘바가 그녀의 조력자가 되어 주길 기대한다.

“그녀도 참 고왔지. 후에 수도로 와서 데뷔한다면 내 살롱에 오거라.”

“감사드립니다.”

이제까지 캐런은 지금까지 삶을 반복하면서도 죽은 모친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것도 낸시가 지운 것일까? 이번 생에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다음 생에는 물어봐야지.

이셀라의 인사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엘바 부인의 태도에 이셀라가 분통을 터트리는 걸 구경하며 캐런은 앉아서 부채질을 했다. 엘바 부인의 어린 딸은 캐런의 화사한 미모에 혹해서 모친의 팔을 잡고서 조잘거리고 있었다.

이셀라와 베르딕이 영락없이 기분 나빠 하는 것이 보였다. 천금보다 더 귀한 얼굴이다. 참으로 모친에게 감사하기도 하지. 삶과 얼굴과 죽음을 같이 주셨으니 거의 전부를 준 것이라 하겠다. 그들을 구경하던 캐런은 부친이 옆에 앉는 것을 알고 몸을 돌렸다.

“그럼 이젠 내가 이유를 들어야 할 때가 온 것이냐?”

영주가 시선은 백작 부인과 레이몬드의 대화를 보며 캐런이 앉아 있는 테이블 옆에 앉았다.

“이유요.”

“그래, 얼마나 인생이 바뀔지 궁금해서 그런 것이냐?”

“아까 제가 말했잖아요.”

“…좀 더 친절하게 말해 주련.”

캐런은 스스로 투정을 부리는 아이처럼 대답했음에 놀랐다.

확실히 반복과 책이라는 둥의 이야기를 실제라고 믿는 사람이 생기니 이리 유치하게도 나오는구나. 정말 아버지한테 투정 부리는 딸처럼.

물론 그 내용은 그리 귀엽지 않지만.

“아버지의 보호 아래 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도 좋지요.”

“난 네 행복을 바란단다.”

“음… 아버지, 전 ‘그런 것’에 취미가 있는 게 아니랍니다. 전 좀 더 다양한 변수와 진실, 그리고 끝을 원해요. 죽음이든, 삶이든.”

영주의 얼굴이 황망하게 변했다.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리시겠지만… 그래요, 아버지.”

캐런은 지나가는 하인을 잡고 샴페인 잔 두 개를 건네받았다.

“목이 마르네요. 아버지도?”

“그래.”

금빛 액체가 잔을 채운다. 하인이 멀어지자 캐런은 음악 소리보다 목소리를 작게 깔고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믿으신다고 하셨죠.”

“그래.”

“어머니는 아버지의 사랑 덕에 마법에서 풀려나셨고요.”

스스로도 단어의 가벼움에 치가 떨린다. 하지만 영주는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하지만요 아버지, 전 말이에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굉장히… 회의감이 들어요. 정말로 그런, 일시적인 감정에 목숨이… 그걸 100년을….”

캐런은 참지 못하고 술을 넘겼다. 이번 생에는 자꾸만 감정적이 된다.

“너무나 추상적이고 모호해요.”

“어찌 사랑이 모호하단 말이냐. 완벽한 믿음과 사랑이 널 구원할 것이야.”

닥쳐.

“아버지는 제가 아니잖아요. 100년 동안 머리에 구멍 나면 그런 소리 하기 힘드실 거예요. 별별 일로 다 죽어 봤다구요.”

“…….”

“어려워요. 100년이라구요, 아버지. 한 사람이 만날 수 있는 사람에는 한계가 있어요. 1년도 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만나고, 인연을 쌓고, 결혼까지 이어질 만한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몇십 번을 레이몬드 경과 이어졌는데 저 사람이 제 운명의 상대가 아니라면 전 이제 와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진정한 사랑을.”

“제 진정한 사랑이 저 백색산맥 너머에서 눈먼 총탄에 맞아 죽어 가고 있을지 어찌 아나요. 아니면 병에 걸려 죽어 가고 있는 거리의 부랑자일지 어떻게 아나요. 제가 진짜로 책을 읽었는지도 확실치 않은 이 와중에.”

운명의 사람은 누구일까. 만약에 그의 사랑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면 누구를 만나야 하는 걸까. 레이몬드 말고도 만났던 몇 명의 사람들은 레이몬드보다 턱없이 부족했다.

“사랑의 강도가 문제인걸까요. 제가 만난 사람들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한 것처럼 절 사랑하지 않았던 걸까요…. 궁금하네요.”

왜 아버지는 어머니의 사랑이었을까. 아버지는 얼마나 어머니를 사랑했을까.

영주는 잔을 쥔 캐런의 손끝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보며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가 널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캐런은 영주의 얼굴을 보면서 무표정하게 말했다.

“사랑의 증거를 보여 주세요.”

“어떻게?”

“진정 믿으신다면, 그렇게 사랑하신다면, 죽음이 두렵지 않으시겠죠. 제가 다시 죽으면 아버지는 또다시 살아나실 테니까요. 그리고 설령 정말 죽으셔도 아무것도 무섭지 않으시겠죠. 어머니와 만나실 수 있을 테니까요.”

“…아.”

“물론 어디까지나… 확인을 위한 것이랍니다. 아버지가 거부하시면 전 방도가 없어요.”

캐런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택의 모든 하인들과 듈란을 쥐고 흔드시는 아버지에게 제가 강제할 수 있을 리가요.”

영주의 회색 눈을 마주한다. 그의 눈에서 아내를 그대로 빼닮은 딸의 얼굴을 본다.

“하지만 어떤 선택을 하셔도 확인은 할 수 있겠죠. 아버지의 사랑의 강도를.”

캐런은 비워진 잔을 들었다. 멀리서 하인이 다시 다가와 잔을 채웠다. 영주도 잔을 들었다. 부녀는 그렇게 잔을 들고 홀의 구석에서 잔을 부딪쳤다.

“아, 역시. 약 없이 먹으니 모든 것이 맛이 좋네요. 듈란, 이 나쁜 놈.”

“너무 그러지 말렴. 다 네 몸을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

“그래도 너무 과해요. 약물 과다로 죽었던 적도 분명 있을 거야. 그리고 전 다른 곳에서 더 높은 미식을 경험해서 별로예요.”

“어디가 제일 좋더냐?”

“책 밖이요…. 이러면 오답인가요?”

영주는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이 안에서 순위를 매긴다면 어떻겠니.”

“레이몬드 경의 주방장이 훌륭해요. 크레이 씨라고, 대머리죠. 아, 지금은 없어요, 3개월 정도 뒤에 새로 오겠죠.”

“그렇구나.”

시답잖은 잡담을 이어가면서 캐런은 영주가 테이블 위의 식기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을 눈치챘다.

“저, 이건 사소한 이야기지만… 그런 식기 나이프로는 힘들어요. 제가 해 봤거든요.”

“그, 이걸로 할 생각은 아니었단다.”

영주는 약간 민망해하면서 시선을 돌렸다.

“처음은 좀 무서울 수 있어요. 저도 영 익숙해지지가 않아서 여러 번 실패했거든요. 절대 손목은 긋지 마세요. 거의 동강 낼 정도로 베어야 하는데다가, 너무 추워서 정말 죽는… 죽었죠.”

캐런은 스스로도 웃음을 참을 수 없어 고개를 돌려야 했다. 영주는 웃어야 할지 알 수 없어 그저 잔을 들었다.

“내가 예전에도 죽었느냐?”

“네.”

“음… 그렇구나. 어쩌다가?”

“베르딕 씨에게 당한 게 너무 분해서 아닐까 생각해요.”

캐런이 기억을 더듬었다. 영주가 무조건 죽은 것은 아니었다. 가끔은 살아서 캐런이 죽기 전날까지 곁에 있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아니었다. 베르딕에게 제대로 당한 영주는 충격을 받고 앓아누웠고,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사업 실패가 좀 힘드셨던 것 같아요.”

캐런이 목소리를 낮췄다. 다행히 베르딕과 레이몬드는 이쪽이 아니라 이셀라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아내가 죽고 나서 모든 것이 덧없다고 생각했다. 영지도 사람도 그 모든 것이. 자신에게 그런 열정이 남아 있단 말인가. 영주는 약간 심란해졌다. 캐런은 그런 부친의 팔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다변적이더라구요. 하지만 그래도 다음 생에서는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시는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볼게요.”

“고, 고맙구나.”

“뭘요.”

쨍그랑.

저 편에서 이셀라가 백작 부인에게서 비웃음을 사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셀라는 당황하면 동작과 목소리가 더욱 커져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고를 친다. 캐런은 그녀의 사랑스러운 라이벌을 애틋하게 쳐다보았다. 베르딕은 차마 보지 못하고 손으로 자신의 눈가를 가렸다.

“베르딕의 표정이 재밌구나.”

“전 이셀라의 표정이 재밌네요.”

부녀의 상기된 얼굴들을 또 다른 부녀가 구경하며 술을 마신다. 영주는 잔을 내리고 일어났다. 캐런이 물었다.

“어딜 가시려구요?”

“베르딕 씨에게 널 부탁하려고.”

“윽.”

캐런은 이셀라의 시녀가 되어 고생할 자신을 생각하자 머리가 아팠다. 이번에는 이런저런 일이 많았으니 더더욱 신경질을 부리리라.

‘이셀라부터 죽였어야 했는데.’

이제 와서 후회해서 무엇하리. 그래도 자신과 가까운 낸시가 죽음으로써 일이 이렇게 풀렸으니 결국은 잘된 일이다. 사소한 일로 우울해지지 말자 다짐하며 캐런은 다가오는 이셀라를 향해 떨떠름히 웃었다.

“이셀라 양.”

“캐… 런.”

“앉아서 브랜디라도 마시며 진정해요.”

“고마워요.”

말과는 다르게 살인이라도 할 것 같은 얼굴로 술을 들이킨다. 캐런은 지금 둘이서 살해 현장에 서 있다면 분명 이셀라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녀가 범인으로 지목되리라 생각했다.

이셀라는 저 편에서 레이디 엘바를 노려본다. 그녀가 한 실수는 사소하지만 컸다. 레이디 엘바가 아닌 레이디 오르펜, 그녀의 성을 부른 것이었다.

“우욱….”

“레이디 엘바에요. 레이디 오르펜이 아니라. 성이 아니라 이름을 불러야 해요. 그녀는 오르펜 백작의 부인이자 로누아 남작의 딸이거든요.”

“어디가 틀린 건데요?”

“성을 붙이는 건 그녀를 무시하는 행위이니까요.”

“대체 그게 왜요!”

“…목소리를 낮춰요, 이셀라. 레이디 엘바는 로누아 남작의 딸이지만 로누아 남작은 귀족 작위가 몰수됐다가 십여 년 전에 복권됐어요. 레이디 엘바가 아닌 레이디 오르펜이라고 하는 건 그녀의 치욕스러운 과거를 되새기게 하는 짓이니까요.”

“…예에? 그게 또 왜 치욕스러운가요?”

여기선 원래 그래.

캐런은 이셀라의 얼빠진 얼굴에 울고 싶어졌다. 그렇지. 넌 아무 생각할 필요가 없겠지. 저 레이디 엘바가 돈을 빌릴 정도의 거부인 베르딕 에반스의 딸이니 무엇이 문제겠어. 아무 생각할 필요가 없지. 명예나 평판이나 사소한 예의범절을 무시하며 살았어도 괜찮았겠지. 베르딕의 금화는 그 모든 치부를 가려줄 테니. 사소한 말 하나하나에 신경 쓸 필요가 없겠지. 그래도 괜찮으니까.

“레이디 뒤에 이름이 오는 경우는 그 여성의 출신이 귀족의 아버지가 아닌 평민인 경우랍니다. 그녀가 데뷔할 때는 오르펜 백작의 어머니의 시녀로서 입장했어요. 그때는 심지어 레이디의 칭호도 붙일 수 없었죠. 그리고 결혼 후에도 그녀는 레이디 엘바가 아닌 레이디 오르펜이었어요. 로누아 남작이 복권된 후에야 레이디 엘바가 되었으니 더욱 신경 써야 할 일이에요.”

“하….”

하지만 캐런은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는 말하지 않았다.

이셀라가 실수를 했더라도 잘 배운 부인들은 못 배운 사람들의 실수에 저리 화내지 않는다. 캐런이 먼 옛날에 실수했을 때 그녀는 그냥 난처하게 웃었고 사색이 된 그녀의 시녀가 종종걸음으로 뛰어와서 일러 주었다.

‘같은 실수를 해도 주인공과 조연에게 돌아오는 대가는 다르지.’

캐런은 웃었다.

그녀가 화를 낸 것은 베르딕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이 더 크다. 베르딕의 재산이 그녀를 얽매고 있으니 캐런과 이셀라의 입장은 전혀 다르다. 즉, 이셀라는 백작 부인에게 있어 처음부터 곱게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인 것이다.

“당신은 레이디 캐런이 아니에요?”

캐런은 벌써 수십 번은 지적해 준 내용을 관성적으로 되풀이했다. 한 60년 전쯤에는 몇 번이나 말했는데 왜 못 알아듣냐고 이셀라에게 화를 내다가 뺨을 맞은 적이 있었다. 이제는 다른 생각을 하며 주어진 대사를 줄줄 읊는다.

“전 지주 계급이지만 귀족의 작위는 받지 못했으니 그저 하이어 영애랍니다.”

이셀라의 얼굴이 황망했다.

“당신도 레이디의 칭호가 안 붙는다구요?”

“예. 지주 계급이라 하더라도 오등작 안에 들어야 해요. 하이어 영지는 과거에는 독립국이었지만 점령 후에는 오르펜 백작령 아래에 있어요.”

그러니까 잘 보여야지. 이야기가 계속된다는 가정 아래선 말이야.

“제가 귀족가의 자제분과 결혼하면 레이디 하이어… 정확히는 남편의 성이 붙는 것이죠. 그건 이셀라도 마찬가지에요. 결혼하면 레이디 이셀라가 되는 것이 아닌, 레이몬드 경의 성을 따라 레이디 세이어테스가 되는 것이지요.”

“난 레이디 이셀라가 더 좋은데… 아니면 에반스나. 아쉬워요.”

“예에….”

캐런의 얼굴에서 웃음이 스쳤다.

“말이 왜 그렇죠?”

이셀라의 목소리가 날카롭다.

“아뇨. 모를 수도 있는 것이죠.”

“지금 제가, 당신처럼 지주 계급의 딸이 아니라고 비웃는 건가요?”

“확대 해석하지 말아요, 이셀라. 전 그럴 수도 있다고 했을 뿐이에요.”

“웃었잖아요!”

“모를 수도 있는 것처럼, 웃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정 그렇게 기분이 나쁘다면 사과할게요.”

“이, 이….”

“미안해요 이셀라.”

“지금 날 가지고 놀려요?”

응.

캐런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이셀라를 보면서 얼굴 표정이 다양한 것이 꽤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왜 베르딕은 이런 것을 가르치지 않았을까? 상인 계급의 한계인가. 이런 예절은 대부분 데뷔 전에 끝낸다. 사소한 실수가 남을 헐뜯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대역죄처럼 커진다.

‘그럼 나에게 가르친 것은… 낸시가 아닌 데어 부인이었겠군.’

반복이 진실이라면, 책속에 들어온 것도 진실인가? 그것이 어렵다. 이성과 광기가 섞이고 진실과 허상과 거짓과 착각 그 모든 것이 혼재하여 어지럽다.

가장 큰 문제는 너무 오랜 기간 동안 「캐런」으로서의 삶만을 누려 왔기에, 캐런이 아닌 책 밖의 사람으로서의 자각이 희미하다는 것이다.

‘검증할 방법이 있을까?’

캐런은 눈썹을 찌푸렸다. 캐서린의 말이 있었지만 그녀 또한 책이나 마찬가지라고 했기에 확신이 없다. 그리고 캐런을 넘어서 캐서린이 망상증에 걸려 자신의 딸에게도 망상을 강요한 것일 수도 있다.

“캐런!”

“잠깐만요.”

한 서른 번은 반복해서 이셀라에게 가르쳐 주다 보니 누가 한심한 것인지 모르겠다.

캐런은 자신이 시녀로서 이셀라에게 하나하나 사교계에 대해 가르쳐야 했던 기억을 떠올리니 암울했다. 이셀라는 성격 자체가 남에게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나마 수를 셈하는 것은 능했지만 이런 예절이나 대인 관계에 있어서는 아는 것이 바닥이나 다름없었다. 흥미도 없고, 관심도 없고.

“부모가 애를 망쳐서.”

“…예?”

아, 무심코 말이 튀어 나왔다. 캐런은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에 혀를 찼다. 이어지는 손바닥에 이를 악문다.

짜악!

“감히… 감히…. 너 따위가…!”

뺨이 얼얼하다. 이번 생은 참 고생이 많군. 캐런은 뺨을 문지르며 한숨을 쉰다.

“계급은 내가 더 높아요, 이셀라 에반스.”

“당신이…. 네가… 뭐가 그렇게, 잘, 났어?”

계급 말고라면.

“…얼굴?”

“뭐, 뭐?”

아, 참아야 하는데. 하지만 캐런은 자신의 상념을 사소한 일로 방해한 이셀라에게 진심으로 짜증이 치밀었다.

“이런 식으로 큰 소리 내는 것은 좋지 않아요, 이셀라 양. 아버지의 얼굴에 먹칠을 할 생각이신가요?”

“이 거렁뱅이 같은….”

“그만 하십시오, 이셀라.”

레이몬드가 이셀라의 손을 잡았다.

“저 여자가 감히, 무엇이라고 했는지…!”

“이셀라 에반스.”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차갑게 깔렸다.

“부디 이성을 찾으시길.”

이셀라의 힘찬 손길이 어찌나 소리가 컸던지 홀 내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악과 흥미로운 얼굴로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캐런은 한 번의 손길로 대중의 시선을 받는 그녀에게 광대의 기질이 있다고 칭찬해 줄까 고민했다.

“괜찮아요.”

재미는 있었으니까.

이셀라는 눈물을 터트렸다.

“레이몬드 님!”

캐런은 자신이 괜찮다고 하는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이셀라에게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이셀라 양.”

이셀라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레이몬드에게 몸을 기대며 울었다. 하지만 눈물이 나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이셀라는 소리로라도 울면서 쓰러졌다. 레이몬드가 어색하게 받는다.

“전 억울해요, 레이몬드 님…!”

“이셀라 에반스 양, 보는 눈이 많으니 눈물은 좋지 않습니다.”

레이몬드가 손수건을 건넸다. 베르딕이 사색이 된 얼굴로 급히 다가왔다. 그리고 레이몬드와 캐런에게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하고는 딸의 어깨를 잡았다.

“죄송합니다. 하이어 양, 레이몬드 경.”

“괜찮아요, 베르딕 씨.”

베르딕은 억지로 이셀라를 끌어냈다. 이셀라가 레이몬드에게 달라붙었지만 베르딕이 더 강했다. 이셀라가 반항하다가 이내 입으로 계속 울며 떨어진다.

“…….”

“…갔군요.”

“…그러네요.”

베르딕과 이셀라가 멀어지자 레이몬드가 캐런을 보며 짝짝 박수를 쳤다.

“대단하시군요.”

“약혼녀 관리 좀 잘해요.”

캐런은 레이몬드에게 투덜거렸다.

“그녀의 인성은 그녀 자신이 만든 것입니다. 왜 저에게 단속을 요구하십니까?”

“맞는 말인데, 사실 레이몬드 경이 아까 절 보다가 이셀라 양을 말릴 순서를 놓치지 않았으면 뺨을 맞을 일은 없었을 테니까요.”

물론 그건 아니지만. 알 것이 뭔가? 그러면 그렇다고 하겠지. 어차피 그런 건 사소한 일이다. 중요한 건 캐런이 이셀라에게 맞았다는 것이고. 레이몬드는 그걸 싫어한다는 것이다.

레이몬드는 머뭇거리다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캐런 하이어 양.”

그리고 캐런은 지금 그가 다가오는 것이 귀찮았다.

“더 이상 제게 간섭하지 말아 주세요. 전 이미… 충분히 힘들어요.”

그러니까 더 이상 다가오지 마. 이번 생에서 당신은 별로 필요 없으니까. 진실을 알기 위해 또 다른 시체를 고대하며 캐런은 레이몬드에게서 등을 돌렸다. 레이몬드는 쫓아오지 않았다.


 

한밤중에 캐런은 서재의 책들을 모조리 꺼내며 산을 쌓고 있었다.

“어머니의 일기장 같은 특별한 게 나오면 좋겠는데.”

그녀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왔는가, 무슨 방법으로 이 삶의 굴레에서 벗어났는가? 캐런은 그것이 너무나 궁금했다.

영주의 서재는 복도에서 들어오는 문은 하나였지만 안이 넓어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다. 캐런은 안쪽의 서재에서 사다리까지 이용하며 자료를 뒤지고 있었다. 오래된 책들의 냄새가 났다.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깃펜 같은 걸 쓴 거야?”

지난 세기의 글씨들은 휙휙 넘기면서 캐런은 좀 더 사적인 자료를 찾아 헤맸다.

끼이익.

“어머니가 일기 같은 것은 남기지 않으셨나요?”

캐런보다 더욱 늦게까지 만찬에서 자리를 지킨 영주는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서재에 들어왔다. 캐런이 손짓하자 톰이 문을 닫았다.

“난, 잘 모르겠구나.”

사랑한 거 맞아?

캐런은 자신이 어떤 얼굴로 영주를 보아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눈을 돌렸다.

역시 별다른 도움은 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믿는다 하셨으면서 모르시는 게 많으시군요.”

“모름에도 사랑하는 거란다.”

영주는 밧줄로 올가미를 만들었다.

“도와드릴까요? 몇 번 해 본 적 있어서 자신 있는데.”

캐런은 자살을 시도했었던 과거를 반추하며 권했다. 하지만 영주는 그런 딸을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매듭을 단단히 묶었다.

“아니다. …매듭에 다른 사람의 흔적이 남으면 안 되지.”

“아.”

딱히 자신이 범인으로 끌려가도 그리 큰 상관은 없는데. 캐런은 나름대로 신경을 써 주는 것에 감명을 받아야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아까 만찬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건 지나치셨어요. 자살을 예고하는 것 같잖아요.”

영주는 베르딕과 레이디 엘바 앞에서 캐런에 대한 부탁을 했었다. 자신의 몸이 좋지 않으며 캐런이 수도에 가고 싶어 하니 그녀를 부탁한다고. 베르딕은 마지못해 승낙했고 레이디 엘바는 흔쾌히 증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게 낫지 않겠느냐.”

“그런가요.”

“그렇다.”

“저, 그럼… 음… 나가 있을까요?”

“…그래.”

캐런은 문밖에 나가서 톰과 함께 문에 귀를 대었다.

“저기 톰.”

“…….”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 네 소원이 이뤄질지도 모르겠구나. 내가 아버지를 잃고 고난에 빠지면 고아가 되는 셈이니 네겐 복수가 되는 것 아니니?”

“…….”

톰은 입을 열었지만 언어는 나오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서 생각을 읽으려던 캐런은 그만두었다.

“그렇지 않으면 말고.”

그리고 캐런은 기다렸다.

덜커덩, 하는 소리를.

한참 동안.

달의 각도가 변할 때까지 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설마.

끼익.

문을 열었다. 영주는 눈물을 흘리며 목에 밧줄을 건 채였다. 하지만 발은 의자 위에 있었다.

아.

그렇구나.

“무서우신 거군요?”

“…아니, 아니야.”

하지만 얼굴은 그렇지 않았다.

“죽음이 무서우신 거군요.”

영주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영주의 감각을 너무나 잘 이해했다. 익숙해졌어도 닥치면 무섭고 괴로운 그 감정, 직전에 오는 그 절망감, 마지막까지 드는 생각.

정말로 끝나면 어떡하지?

숨이 멈추고 살면서 쌓아온 모든 가치가 의미 없어지고, 길거리의 돌멩이와 똑같이 되는 감각. 자신이 없어도 세상은 흘러가고 그렇게 억만 년이 지나고 사람 하나는 아무런 가치가 없으리라는 예상. 몇 번이고 드는 생각. 그 거대한 흐름 아래 짓눌리는 공포.

하지만 캐런은 그 공포를 극복했다.

100번을 죽으면 강제로 극복할 수밖에 없어진다. 억지로 납득할 수밖에 없어진다.

이제 캐런이 죽기 전에 맛보는 공포는 죽으면 끝날 것이라는 두려움이 아니다. 삶에 대한 공포다.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머리를 가득 메우는 그 두려움.

이번에도 또 살면 어떡하지.

그래서 그녀는 고독하다. 결국 영주는 그녀를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오래전에 기억조차 남기지 않고 죽어 버렸다. 캐런은 캐서린을 추억할 수조차 없다.

“괜찮아요.”

하지만 영주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어도 캐런은 영주를 이해할 수 있다. 영주는 알 수 없지만 캐런은 기억하기 때문이다. 두려웠던 그 과거를 기억한다. 너무나 옛날이지만. 그녀도 기억한다. 처음의 죽음을. 그 두려움을.

“하아….”

그래서 그의 눈물로 얼룩진 자괴감을 이해한다. 절망감에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고통에서도 더 큰 고통은 생에 대한 열망의 고통이다. 사별의 슬픔과는 별개로 죽고 싶지 않다는 마음. 원초적인 공포와 거부감.

“나, 나는….”

절대적인 사랑을 스스로 면죄부로 삼아 온 자다. 그리고 사랑을 저울에 재었고 그 결과에 스스로 무너진다. 자식의 머리를 멍하게 만들고, 살인도 수습해 주는 모든 행동에는 사랑이라는 명분이 있었다.

자식과 아내에 대한 사랑, 사랑하니까. 하지만 결국 그 사랑도 자신의 목숨보다는 중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것이 문제되지 않는다 할지 몰라도, 영주에게는 아니다. 캐서린의 사랑만이 중하다고 여긴 사람에게는 아니다. 자신의 사랑이 목숨보다 가볍다는 사실에 영주는 절망했다.

“나는 괜찮아요. 이해하니까.”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는 또 다른 감정이 스며든다. 어쩔 수 없는 감정이었다.

“하하….”

캐런은 허탈하게 웃었다. 하하 이것 봐요, 어머니. 당신의 사랑을. 당신의 남주인공을 봐요. 너무 무서워서 울고 있군요.

“아버지의 사랑과 믿음은 그 정도군요. 아, 비난하는 것 아니에요. 아버지, 사람은 누구나 그런 거죠. 자신의 죽음이 다른 사람과 같다는 건 말이 안 돼. 죽음을 초월한 사랑 같은 건 없어요. 그건 답도 아니에요. 다른 것이 있을 거예요. 아버지는 아니었으니까! 그 정도의 사랑이라면 괜찮을 거예요. 그 정도 믿음은 괜찮아요. 분명 난 답을 찾을 거예요. 아버지 추측은 틀렸어요. 하, 영원한 사랑이라고 그걸로 극복하라니, 참.”

“나, 나는… 난….”

영주의 얼굴은 처참했다. 캐런은 그것이 씁쓸했다.

“필요 없어요. 아버지. 괜찮아요. 아버지의 사랑을 부정하는 건 아니에요.”

캐런은 웃었다.

“평범한 사랑으로도 극복 가능하다면, 감정이라는 애매한 방법이 아닌 또 다른 해결 방안이 있다는 것 아니겠어요?”

그녀는 영주를 위로하고 싶었다. 진심으로 그러했다.

“괜찮아요, 아버지. 정말이에요!”

캐런은 그렇게 말하면서 활짝 웃었다. 유쾌하게 웃었다.

“전 아버지의 시체를 보고 싶어서 안달 난 패륜아가 아니랍니다. 아, 맞나요? 아무튼 그래요. 상관없어요, 그렇군요. 당신은 생을 선택하셨군요!”

짝!

그러곤 손뼉을 쳤다.

“생은 위대해요! 증오도, 사랑도, 권력도 결국 죽음 앞에서는 의미 없지요! 그중에서도 사랑이라! 예, 아버지. 삶을 선택하셨군요! 제 한마디에 숨을 끊는다면, 그건 생을 모독하는 행위죠! 그래요!”

캐런은 손뼉을 치며 웃었다. 이리 유쾌할 수가!

“정말이지, 아버지가 그대로 돌아가셨으면 레이몬드 경에게 약을 먹이고 사랑에 빠지라고 최면을 걸어야 하나 했다구요. 음, 그래요. 어디까지 가야 하나 확인하고 싶었어요.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되겠군요.”

한결 편해진 얼굴인 캐런과 다르게 영주는 참담했다.

“나는… 캐서린.”

“후후, 전 기뻐요. 정말이지… 그런 일시적인 감정에 100년의 세월이 엮였다는 건 정말이지 끔찍하거든요? 전 정말 기뻐요 아버지!”

캐런은 부친에게 다가갔다.

그의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는 목에 올가미를 넣었지만 의자를 차지는 못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시체를 수습하고 사람을 죽이고 딸에게 최면을 걸고 약을 먹인다. 그 바닥에는 맹목이 있었다.

“나는….”

영주는 아내를 믿는다고 하고, 딸 역시 믿는다. 믿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아내는 다른 세상에서 왔고 딸도 그렇고. 그녀들은 진정한 사랑을 찾기 위해 생을 반복한다. 캐서린은 자신과 진정한 사랑에 빠져 마법에서 풀려났으며 진정한 사랑을 찾지 못한 캐런은 가엾게도 온갖 짓을 하고 만다.

“여보.”

캐서린의 유언을 그는 기억한다.

“…내 말을 믿지 않죠? 당신도 황당할 거야.”

그럴 리가 캐서린. 내 아내여. 내 사랑하는 연인아. 나의 여신. 난 당신의 모든 것을 믿어. 난 당신의 신도고 당신은 신이야. 하물며 마지막 신탁을 내가 어찌 믿지 않겠어.

“그렇다면 캐런을 믿어 줘요. 그 아이도 결국은 사랑을 찾을 테니까. 무슨 짓을 하더라도 믿어 줘요.”

알 수 없는 병에 걸린 캐서린의 온몸이 가벼워졌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처럼 희미해졌다. 몸은 뼈가 드러날 정도로 마르고 우윳빛 피부는 회색에 가깝게 변했다. 영주는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캐서린은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드디어 죽음을 맞이하는군요.”

그는 죽음은 그녀의 오랜 친구라 이야기하는 아내에게 울며 매달렸지만 그것은 의미가 없었다. 사랑할 수 있는 기간이 짧음에 한탄해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영주는 캐서린이 아닌 것이다. 믿고 사랑해도 캐서린과 그의 시간은 같지 않았다. 캐서린은 그녀가 시간을 되돌려서 그를 오랫동안 봐 왔다고, 이제는 죽음과 동행해도 무섭지 않다고 다독였다.

“낸시의 처방이 그 아이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는데.”

“약은 얼마든지 더 먹이겠어.”

“더 먹이지는 말아요. 맛도 없는 거.”

캐서린은 쿡쿡 웃었다. 웃음조차 힘겨워졌다. 기침에 피가 섞였다.

“날 믿어요?”

“그래.”

“당신은 믿지 않아요.”

캐런이 웃는다.

“그것이 난 기뻐요.”

베르딕은 이셀라를 거칠게 끌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셀라는 베르딕의 손을 밀쳤다.

“미쳤느냐?”

“그것을 가만두지 않겠어요.”

이셀라는 분노로 이를 갈았다.

“그 얼굴을 뭉개 버리겠어요. 머리카락부터 잘라 버릴 거예요, 머리에 타르를 잔뜩 부어 버리고 얼굴에는….”

베르딕은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렸다. 질투로 이성을 잃은 것인가. 중얼거리며 험악한 말을 하는 딸을 억지로 눌렀다.

“네가 제정신이냐? 레이디 엘바 앞에서 그게 무슨 추태야? 으응? 아무리 우리에게 빚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백작 부인이야! 네 하녀가 아니라고! 그녀가 있는 만찬에서 캐서린 하이어의 뺨을 치다니!”

하지만 이셀라는 주눅이 들기는커녕 눈을 치켜뜨고는 대들었다.

“아버지는 레이디 엘바라고 잘도 부르시네요?”

“뭐?”

“그렇게 잘 아시면 제게도 가르쳐 주지 그러셨어요? 아버지가 제게 해 준 것이 뭐가 있나요? 지금… 조금 전에, 제가, 캐런에게 무슨 창피를 당했는지 아세요?”

베르딕은 답답해서 가슴을 쳤다. 지금 그런 사소한 일 때문에 어떤 실수를 했는지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질투와 분노로 어쩔 줄을 모르다니.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느냐? 넌 귀족 앞에서 어찌 굴었는지 자각이 없는 게야?”

그가 고함을 질렀다. 이셀라는 분노와 부끄러움에 차서 대들었다.

“그 잘난 귀족이 되셨어야죠! 아버지가 귀족이 아니라서 제가 어떤 창피를 당했는지 아시냐구요!”

“이셀라!”

그는 결국 분노로 손을 올렸다. 이셀라는 순간 움츠려들다가 이내 발악을 하며 대들었다.

“쳐 보세요! 아버지도 결국 돈만 있는 졸부라구요!”

쨍그랑!

“꺄악!”

베르딕은 이셀라 옆의 화분을 딸의 발치로 던졌다. 그러고는 기겁한 딸을 무시하고 화분을 자근자근 밟으면서 심호흡을 했다.

“내가 네게 손대지 않음은… 네 약혼식이 코앞에 있기 때문인 걸 명심해라.”

화가 지나치면 사람이 침착해지는 법이다. 베르딕은 분노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분노에 비해 말은 평범하게 할 수 있었다.

“네 결혼에 얼마나 많은 계약과 사람들이 엮여 있는지 명심해라. 더 이상 징징거리면 그 다음은 흔적이 남지 않게 처벌하겠다.”

“흑….”

“네 방에 가라. 그리고 캐런 하이어 양과 엘바 백작 부인에게 제대로 사과해라!”

이셀라는 분노와 울분에 차서 히끅거렸지만 베르딕이 진정으로 화가 났음을 알고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딸에게 물질적으로 많은 것들을 쥐여 주는 만큼 그대로 움직이기를 요구했다. 이번에도. 예전에도.


 

이셀라는 복도를 걸었다. 이 저택을 어서 떠나고 싶었다.

“…추워.”

양 팔을 모아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이곳은 너무나 춥다.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냉기가 온몸을 찌른다.

“…집에 가고 싶다.”

그녀는 이 저택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춥고, 힘들다. 여기서는 이상한 일만 일어난다. 다시 따뜻한 자신의 본가로 돌아가고 싶다. 운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허상이었다. 아버지가 역사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셀라가 보기에는 촌스럽고 기분 나쁜 것에 불과하다.

“사과? 누가 누구에게!”

이셀라는 캐런의 순간적인 말 한마디에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의 경멸과 짜증을 마주했다. 예절과 상냥함으로 가장했지만 그녀는 결코 자신을 같은 사람으로도 보지 않았다.

“부모가 애를 망쳐서.”

“감히….”

감히 제 까짓게! 이셀라는 캐런의 머리카락에 타르를 부어 버리겠다고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스스로의 난폭함에 조금 놀랐지만 이셀라는 머릿속으로 캐런을 온갖 방식으로 난도질했다. 약간은 기분이 나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걸로 만족해?”

“…아니.”

어?

무심코 대답하고서는 그 목소리가 캐런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영주의 집무실이다. 이셀라와는 상관이 없는 방이었지만 캐런의 목소리가 그녀를 끌어당겼다.

‘문을 열까, 말까.’

그녀도 부친에게 혼나고 있을까? 아니면… 이셀라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저열한 호기심과… 알 수 없는 온갖 의구심이 꺼멓게 피었다. 죽은 시녀. 사라진 시체. 환상. 음침한 성직자. 약을 달고 사는 여자.

끼이… 익….

문을 조그맣게 열었다. 그리고

“아… 아?”

목을 매단 시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시체를 캐런이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이셀라를 쳐다보던 그 눈빛으로.

영주의 우는 얼굴은 미미하지만 묘한 파문을 일으켰다. 새삼스럽게 친애의 감정이 치솟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의 바닥을 보았을 때의 미묘한 불쾌감과 희열. 그리고 당신도 역시 별수 없다는 안도 섞인 탄식이었다.

캐런은 사랑의 조건이, 어디까지나 답이 사랑이라는 가정 아래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절대적인 믿음이 아니라는 결론에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안도감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미묘한 씁쓸함이 입 안을 감돌았다.

“뭘 그렇게 우세요? 웃어요. 아버지.”

캐런은 그를 대신해 웃었다. 슬픈가? 자기 스스로에게 좌절하는가? 그래도 웃어야지. 나도 웃는데. 그리고 앞서간 선배에게 약간의 비웃음을 던져 줘야지. 어머니가 말한 사랑의 답은 이 정도군요.

“아버지는 어머니를 믿지 않아요. 그냥 어머니는 핑계였을 뿐이지. 믿는다면 결코 주저하지 않았을 거야. 있잖아요. 정말로,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믿는다면 왜 죽지 않아요? 안 죽을 이유가 없지 않겠어요? 그 사랑이 없는 세상은 흑백이지 않나요? 의미 없지 않나요?”

그렇지? 그게 사랑이지 않겠어? 그렇지 않으면 너무 억울하잖아.

“최소한 내가, 어머니가, 어쩌면 더 많은 여자들이 죽어야 할 정도의 사랑이라면 그 정도의 가치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 정도로는 사랑해 줘야 하지 않아요?”

“…캐서린을… 난.”

사랑한다는 말은 더 이상 음성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전 그렇게 생각했어요.”

캐런은 가볍게 손을 마주하고 눈을 감았다.

“절대적인 그러한 감정 말이에요. 으음. 그래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말이에요. 아버지, 아버지. 저는 말이에요.”

그녀는 춤을 추던 몸을 가볍게 돌려 초상화를 가리켰다.

“우선 아버지와 어머니 덕분에 희망을 가지게 됐어요. 감사해요. 한 권마다 죽었다 살아나는 이 기이한 현상을 어머니께서 먼저 겪고 해결하셨으니, 전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됐어요. 좋아요. 희망차네요.”

그러고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사랑은 별 필요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찡그린 얼굴로도 웃을 수 있다.

영주는 목을 여전히 밧줄에 걸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밧줄을 붙들고 있었다. 캐런은 한숨을 쉬며 영주에게 말을 걸었다.

“죽지도 못할 거면 그냥 내려오시든지 하세요. 목이 아프네요.”

“아… 아냐, 아니다. 난 믿는다.”

영주는 황급히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발을 떼지 못했다. 캐런은 눈썹을 찌푸리며 한숨을 연거푸 쉬고는 말을 이었다.

“이미 늦었어요.”

“늦지… 않, 았어.”

“늦었어요. 머뭇거린 그 순간, 아버지는 늦었어요.”

그렇게 죽고 싶으면 내가 도와주지. 캐런은 이를 악물고 답을 했다.

“이제 와서 급하게 목을 맨다고 해서 그 망설임이 지워지지 않아요. 답은 나왔어요. 최소한 사랑이라면, 그래요. 그리 거창하지 않군요.”

영주의 떨리는 몸 옆으로 가서 다독이듯이 툭툭 친다. 어깨를 두드리려고 했지만 너무 높아 다리를 두들긴다. 그것에 오히려 영주는 휘청이며 밧줄을 꽉 쥔다. 그리고 결국 목을 매지 못하는 자신을 다시 본다.

“아버지.”

“…….”

“아버지가 이번에 목을 매셨으면 제가 무엇을 할 생각이었을 것 같아요?”

답을 잠시 기다리고는 캐런은 바로 입을 열었다.

“전 우선 마약부터 구할 생각이었어요.”

“…….”

“나중에는 낸시에게 최면이라도 배울까 생각했죠.”

대답은 없다.

캐런도 개의치 않는다.

“감정의 척도가 그 해답이라면 어느 정도일까요. 적어도 제가 이제까지 죽었던 것처럼, 남주인공도 그래야 할 거 아니에요? 그럼 자살을 기꺼이 할 수 있는 사람이겠죠. 그래야 최소한….”

캐런은 영주 책상의 촛불을 훅 불었다.

초가 꺼졌다.

“최소한의 동등한 가치가 있지.”

그녀는 은촛대를 빼냈다. 무게가 있고 날카로웠다. 예전에 읽었던 소설에서 비슷한 상황이 나왔었지. 아니, 아직 읽지 않았던가? 캐런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기억을 더듬었지만 헷갈렸다. 아무렴 어떠랴. 내려치든. 찌르든. 좌우간에 이 정도면 죽을 것이다.

“같이 침실에서 뒹구는 것도 육체적 사랑이라 하고 빈민을 구제하는 성인들의 모든 것을 베푸는 사랑도 사랑인데, 부부의 사랑이라면 어느 정도 가치가 있을까요? 제가 결혼 생활을 그렇게 오래 해 본 적이 없어서 궁금하네요. 후후, 전 만일 아버지가 자살하셨으면 전 그 진정한 사랑에 박수를 치며 상대방에게 약을 먹이고 최면을 걸어 나만 보게 만들려고 했어요. 그리고 내 말이 진리이고 진정한 가치이며 신의 언어처럼 여겨지게 만들어야죠. 아버지가 어머니의 말을 듣고 살인을 방조하는 것처럼 레이몬드가 제 말을 믿고 반역을 일으킨다면 그것도 재밌겠네요.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이번 생에서는 괜찮을 것 같아요. 이번에 어떻게 살 건지 제 삶의 법칙은 제가 정했어요. 전 쾌락 살인마가 되기로 결심했거든요.”

그의 얼굴은 이미 회색빛이었다.

“아버지, 죽고 싶으시죠?”

“그… 렇구나.”

스스로 느끼는 혐오감에 견딜 수 없어하는 영주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캐런은 상냥하게 제안했다.

“도와 드릴게요.”

영주는 그 말을 구원처럼 느낀 것 같았다. 영주는 스스로 죽지 못했어도 캐서린의 얼굴을 한 캐런의 손을 거부하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사람이란 참 복잡오묘하기도 하지.

우습게도 약간의 만족감을 드러낸 영주의 얼굴을 보며 캐런은 웃었다. 자살할 용기는 없어도 그는 딸을 살인자로 만들 용기는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좀 더 궁금한 것들이 있어요. 어머니가 아버지를 만나기 전에 구혼했다던 남자들에 대해서라거나, 특이한 유품 같은 것이 있나요?”

“난….”

덜커덕.

그 순간 영주가 눈을 부릅뜬다. 다리가 흔들거린다. 얼굴이 일그러진다. 커억, 하는 소리가 이어진다. 하지만 그것도 길지 않다. 톰은 캐런보다 빨랐다. 분명 끼어들 순간을 재고 있었으리라. 캐런이 은촛대를 빼내고 몸을 돌리는 순간, 소년은 달렸다.

“커…어억….”

문가에 서 있던 톰은 재빨리 달려가 영주의 다리를 잡아당겼다. 발에 채이면서도 톰은 자신의 온몸을 이용해 매달렸다. 영주가 서 있던 책상은 몸부림쳐지며 밀려났고, 밧줄은 목에 제대로 걸려 영주의 목을 졸랐다. 숨이 끊어지는 건 생각보다 빠르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다.

죽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왜?”

캐런은 당황스럽다 어째서? 대체 왜? 당황스럽다 지금, 네가 왜 여기서?

“무슨 짓이니?”

너무나 순식간에, 어이없게도 일어난 살인이었다.

그 순간 캐런은 정말로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건 정말로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었던 일이었고, 예측하지 않은 사건이었으며, 유희로 즐기기엔 너무나 큰일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캐런은 뒤늦게 은촛대를 들었지만 이미 부친은 숨이 끊어졌다. 거기에 더 찌르는 것은 그저 고깃덩어리를 흠집 내는 것에 불과하다. 캐런은 눈을 깜빡였다. 자신은 지금 허무한 건가? 분한 건가? 모르겠다.

고민했다.

“톰!”

알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톰이 영주를 죽였다.

“…대체.”

캐런은 톰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응시했다.

톰도 캐런을 바라보았다. 톰은 분노하는 것도 아니었고, 기뻐하는 것도 아니었다. 조금 전의 담대한 행동과는 달랐다. 그 얼굴은 자신의 행동에 겁을 먹은 얼굴이었다. 캐런은 그 얼굴을 보자 맥이 탁 풀렸다. 왜? 왜 그런 얼굴을 하지? 그럴 거면 왜 그런 짓을 했지?

“…난, 잘.”

모르겠다.

캐런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음, 어, 그래. 난 잘 모르겠어. 넌 주요 등장인물이 아니었고… 나 진짜 잘 모르겠어. 넌 그러니까 톰은 지금 여기서 이러면 안 된단 말이야. 넌 이제까지는, 그러니까 원래 내게 은혜를 입고 탄복하고 내 사랑의 디딤돌이.”

캐런은 스스로 역겨움에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

결국 캐런은 톰을 중요히 여기지 않았다. 톰을 살리면서 여느 책 속의 주인공들이 그러하듯이 연출을 하고 싶었던 것에 불과했었나.

“이러면 되나요?”

징그러울 정도로 강렬했던 삶에 대한 집착. 스스로 입 안을 불로 지지는 행동력을 본 순간 캐런은 직감했다.

자신은 스스로의 죄로 인하여 이번에도 죽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럴듯한 이야기이니까… 캐런은 납득했다.

캐런은 자신이 죽을 것을 내심 각오하고 있었다.

“각오가 아니지….”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괜찮은 이야기 아닌가. 흔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권선징악에 걸맞는 이야기. 부모의 원수를 갚는 이야기. 미친 살인자를 죽이고 마침내 행복해지는 이야기. 캐런은 톰을 내심 주인공으로 만들려 했던 자신의 연출을 생각했다.

괴로운 삶을 주고, 협박을 하고, 그 삶을 비웃으며 악행을 저지른다. 소년은 점차 건강해지고… 그래도 1년은 너무 짧다. 좀 더 이야기가 길었으면 자신은 악당으로 퇴장했을까?

캐런은 궁금했다.

“네가… 누굴 죽인다면, 날 죽일 줄 알았는데.”

“…….”

잘린 혓바닥은 하악거리는 신음만 낼 뿐이었지만 소년의 분노를 표현하기에는 충분했다. 톰은 온몸으로 자신의 분노를 표현했다. 캐런의 모든 악행을 지켜본 톰은 캐런을 제대로 알았다. 그녀의 광기와 믿음을 알았다.

“…날 엿 먹이는 법을 제대로 아는구나.”

캐런은 톰에게서 부친의 시체로 시선을 돌렸다. 한때 미남이었던 남자의 얼굴은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도 몇 번이고 죽음을 각오했겠지만 이런 죽음은 아니었으리라.

“이걸로, 만족하니?”

궁금했다. 이걸로 만족하니?


 

캐런의 경험은 결국 극히 한정적이다. 캐런은 과거의 톰을 돌이켜 보았다. 톰은 거리의 부랑아였고, 강간범인 아버지를 두었다. 캐런은 여주인공으로서 톰을 돌보았다. 결국 톰은 죽었지만 그의 죽음은 소설에서 훌륭하게 쓰였다.

“…복선 회수 괜찮은 건가? 부제를 무슨 엑스트라의 반란, 이런 걸로 달아야 할까? 그런 이야기 좋아하니? 톰. 토머스. 얘. 어떻게 생각하니? 이건 뭐, 「이야기」에 반항하는 엑스트라 반역의 장이라도 되는 거야?”

“…….”

하지만 답은 없었다. 톰은 벙어리였으니까. 그 스스로 살기 위하여 입을 지졌으니까. 그리고 톰은 이 순간 캐런에게 침묵으로 복수했다.

“말… 을….”

고개라도 끄덕이거나 저을 법하건만 톰은 답하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캐런을 노려보며 입꼬리를 일그러뜨렸다.

하하 캐런은 허탈하게 웃었다.

한 방 얻어맞은 느낌이다. 캐런은 자신의 느낌을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생은 도무지 예상대로 흘러가질 않는다니까.”

캐런은 인칭이 바뀌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면, 영주를 죽이고 캐런을 두려워하면서도 노려보고 있는 저 소년을 이해할 수 있다면 자신이 느끼는 이런 갑갑함을 해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상관없나.”

“……!”

인기척이 느껴졌다.

젠장할.

캐런은 톰이 뛰쳐나오면서 문을 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제대로 엿 먹이는구나, 네가.

캐런은 눈을 가늘게 떠서 문가를 응시했다.

물 빠진 금발머리가 보인다. 이 저택에서 저런 머리색은 하나뿐이다. 캐런은 그나마 이셀라라서 다행인가, 한숨을 내쉬며 문가로 다가갔다.

이런 상황은 몇 번이고 있었다. 영주가 톰에게 죽은 것은 처음이지만 영주가 죽은 건 처음이 아니다. 이셀라가 영주의 죽음을 본 것도 처음이 아니다. 아직은 이야기의 안이다. 수습이 가능하다. 그녀가 컨트롤할 수 있는 범위의 이야기다.

캐런은 문가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녀는 또다시 일을 해야 한다. 캐런은 평범한 표정을 떠올렸다. 이런 상황에 어울리는 얼굴. 웃으면 안 된다. 화를 내서도 안 된다.

다시 한 걸음을 내딛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보고 충격받은 딸의 모습을 한다. 머리를 헝클어뜨린다. 눈가를 문질러 화장을 번지게 한다. 자연스럽게 눈물이 툭툭 흘렀다.

또 한 걸음 나아갔다.

캐런은 늘 하던 대사를 이셀라에게 건넸다.

“이, 이셀라… 어떡해요. 아버지께서, 아, 아버지가.”

마지막 한 발짝으로 문 앞에 다다랐다.

캐런은 문을 열었다. 거기에 이셀라가 서 있었다. 캐런은 투둑투둑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이셀라는.

“아.”

그 탄식 하나면 충분했다.

그 탄식 하나로.

캐런은 이셀라가 그녀를 안 믿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셀라 또한 캐런이 그 사실을 눈치챘다는 것을 알았다.

베르딕은 한숨을 쉬며 파이프를 품에서 꺼냈다. 속을 채워 불을 붙인다. 연기가 타오르고 기분이 가라앉는다.

“딸자식 키우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원.”

캐런 하이어처럼 다소곳하게 있는 딸이 편하긴 할 것이다. 베르딕은 이셀라의 모든 면을 사랑했지만 오늘밤의 행동은 도를 지나쳤다.

“…빌어먹을.”

헬라이온 광산의 다이아몬드 채굴권은 그의 딸과 레이몬드의 결혼을 보증으로 받아 낸 것이다. 차근차근 밟아 놓은 그 수많은 계약과 일정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다. 하마터면 안 그래도 복잡한 일이 더욱 꼬일 뻔했다. 아니지, 이미 꼬였나? 백작 부인은 조금이라도 베르딕의 단점을 캐내려고 애를 쓸 것이다. 일면식도 없고 배경도 없는 캐런 하이어에게 벌써부터 친절하게 굴지 않는가. 베르딕은 그 면전에서 캐런의 뺨을 친 이셀라가 너무나 한심스러웠다.

“…쓸데없는 것에만 관심이 많아서는. 계집애가 적당히 물러날 때도 알아야지. 거기가 어디라고….”

분노로 인한 흥분이 가라앉고 나자 밀려오는 건 씁쓸함이다. 이셀라에게는 좋은 것만을 물려주고 싶었다. 이셀라는 왜 자기에게 지분을 주지 않느냐며 떼를 썼지만 베르딕은 진정으로 주고 싶지 않았다. 이셀라는 적당히 몰라도 된다. 그것이 딸의 특권 아닌가. 지저분하고 폭력적인 일은 남자들의 일이다. 이셀라는 그럴 필요가 없다.

베르딕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고운 옷을 걸치고 음악을 들으며 잘생긴 남자를 흠모하다가 울고는 하다가, 또 아이를 낳아 기르는.

“셀리나는 대체 이셀라를 어떻게 기른 거야.”

아내를 탓하며 베르딕은 뻐금거리는 파이프를 내렸다. 그와 그의 아내는 그럭저럭 수십 년을 잘 살았다. 그녀는 아들과 딸을 고루 낳아 주었고 남편의 정부도 너그러이 눈감아 주었다. 그녀는 언제나 현숙한 아내라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이셀라는 달랐다. 질투도 많았고 투정도 잘 부렸다. 대체 이셀라는 누굴 닮은 거지?

“…하아.”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누르며 베르딕은 눈을 감았다. 돌아가는 대로 새로운 여자라도 사야겠다고 다짐하며 그는 창문과 문을 걸어 잠그고 다시 눈을 감았다.

이셀라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들켰어. 들켜 버렸어.

“…이셀라.”

“캐, 캐런. 여… 영주님이 돌아가셨, 다구요….”

안타깝게 여겨야 해. 불쌍한 여자잖아. 어서, 가엽게 여기라고. 그렇게 진심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들킬 거야!

“그, 그렇군요, 캐런… 그거 너무나 안된 일… 인데.”

안 돼. 목소리가 떨려.

그녀는 얼굴을 억지로 펴서 웃으려고 노력했지만 얼굴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캐런이 마주 보고 웃었다. 그녀의 웃음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캐런이 말했다.

“뭐에요, 이셀라 양.”

“예, 예?”

“능청스럽긴.”

캐런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풍성한 소맷자락에 감추어 둔 은촛대는 정확하게 이셀라의 관자놀이를 노렸다.

“꺄아아악!”

“언제부터 보고 있었어요?”

캐런이 쓴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쉬이… 소리가 너무 커요.”

“아악! 아아악! 꺄아아악!”

“소리가 크다니까.”

캐런의 하얀 치아가 어둠 속에서 빛이 났다. 혐오스럽고 징그러운 웃음이 드러났다. 뒤집혀진 벌레의 다리들 같은 웃음이었다. 고운 거죽 아래로 꿈틀거리는 광기였다. 뒤로 물러나야 해. 그 순간 급소를 피할 수 있던 것은 한껏 긴장했던 덕분이었다. 긴장 덕에 연기는 어색했지만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이셀라는 뒤를 돌아 달렸다.

“아무도 없어요! 아악!”

캐런은 이셀라의 뒤를 �i았다.

“이셀라! 잠깐만요!”

“아아아악!”

이셀라는 순식간에 멀어졌다.

“잠깐이면 되는데….”

잠깐만 기다리면 금방 끝나는데. 아까워라. 한밤중에 이게 다 무어람.

거기서 빗나갈 줄이야. 캐런은 혀를 찼다. 아직도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캐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이셀라가 도망간 쪽은 사람들이 잘 쓰지 않는 북측 복도였다. 그리고 그 끝에는 계단이 있다. 캐런은 저택의 구조를 머릿속에서 그려 보았다.

“…돌아가야겠네.”

하지만 저렇게 소리를 질러 대면 사람이 오는 것은 시간문제다. 사람이 적은 쪽으로 우선 유도를 해야 한다. 캐런은 촛대를 움켜쥐고 이셀라를 향해 뛰었다.

“살인이야! 살인이야! 꺄아아아악!”

“이셀라 양! 진정해요…. 잠깐만요, 내가 설명할 수 있어요! 이셀라 양!”

적당히 겁을 주면서.

본격적으로 뛰어서 힘을 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어느 정도 위협해야 원하는 곳으로 가겠지. 그리고 그녀가 올 길로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자.

캐런은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는걸 알았다. 아까 영주 앞에서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이래저래 이번 생은 웃을 일이 많다. 그리고 그녀의 핏자국을 보자 약간의 안타까움에 탄식했다. 불쌍하니 한 번에 죽여 줘야지.

“이셀라 양… 칠칠맞지 못하게 피나 흘리고는.”

이셀라의 걸음을 따라 피가 점점이 떨어졌다. 사냥감의 흔적이다.

몇 번이나 찔러야, 혹은 내려쳐야 숨이 끊어질까?

“이셀라 에반스. 당신이 그랬죠…. 부친의 죄는 자식이 물려받게 된다구요. 고백할게요. 사실 저 그때 거짓말을 했어요. 저도 동의해요. 당신은 날 죽이지 않았지만 베르딕 씨는 나를 몇 번이나 죽였거든요. 그래서 말이에요. 베르딕 씨가 죽는 건 꼭 보고 싶어요. 그런데 독을 타는 거보다 더 재미있는 게 생각났어요. 당신이 죽으면 베르딕 씨가 괴로워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부모의 죄는 자식이 대속하는 거죠. 음… 아니려나? 아님 말구요. 사실 지금 생각한 거에요. 하하. 들려요, 이셀라?”

왠지 흥분되는걸.

캐런은 촛대를 휘둘러 보았다. 묵직한 무게감이 마음에 들었다. 이게 사냥하는 즐거움인가? 사냥은 남자들의 유흥이었다. 캐런은 언제나 사냥터에서 앉아서 식사를 준비하고 레이몬드가 잡아오는 여우를 보며 환성을 질러야 했다.

그런 것보다 훨씬 재밌다. 다음에는 사냥터에서 더 무거운 총을 써 봐야겠다. 캐런은 권총 외에는 다루지 못하는 것이 아쉬워졌다. 멀리서 스코프로 탕, 하고 끝을 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 레이몬드는 그런 것을 잘하겠지.

“사냥이라는 취미도 꽤… 흥분되는 거군요. 이셀라.”

심지어 죽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 아닌가.

일생일대의 승부? 아, 이런 거 재밌어. 역시 환상이냐 실제냐보다 훨씬 단순하고 즐거운 오락이다. 좋은 선택이다. 다음 생에도 살인을 해 볼까?

“아… 중독되면 안 되는데. 나도 참.”

긴박감이 심장을 기분 좋게 두들긴다. 캐런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굽을 벗었다.

사냥은 몇 번 시도해 보았지만, 캐런은 짐승들과 상성이 잘 맞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은? 두근거리는 마음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콧노래를 부르고 싶어질 정도로.

“허억 허억, 허억.”

한참을 뛴 것 같은데, 아직도 끝이 없는 복도였다. 어둠 속을 끝없이 헤매는 것 같다. 여기는 어디지? 저택이야. 어떻게 나가지? 몰라. 계단, 계단으로 돌아가야 해. 저택 안은 몰라. 여기서 당장 나가자.

하지만 이셀라가 복도 끝의 계단을 달려 내려가고 나서 이셀라는 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할!”

이셀라가 뛰어 내려온 계단의 일층은 잠겨 있었다.

이셀라….

멀리서 타박타박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아마 캐런일 것이다. 이상하게도 이셀라가 달려가면서 소리 지르는 동안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녀들이나 하인들이 있을 법도 한데.

“길을 잘못 들었어….”

쓰지 않는 복도를 내내 달린 것이다. 낡은 저택은 익숙하지 않아 달려도 달려도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여기가 이렇게 넓었던가?

이셀라는 얼굴을 감싸고 이를 악물었다.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진다.

결국 다른 복도로 뛰어가야 했다.

“역시… 역시 그년이었어.”

그녀의 얼굴을 본 그 순간 이셀라는 알았다.

캐런이 영주를 죽인 것이다. 직접적인 살해 현장을 보지 않았어도 그 순간 이셀라는 깨달았다. 그녀가 모든 일의 원인이었다. 그녀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화사한 얼굴과 상냥한 태도로 모두를 속이며 목에 칼을 박아 넣었을 것이다.

분명 하녀를 죽인 것도 캐런이리라.


 

“허억, 허억… 허억.”

이셀라는 달렸다.

신기하게도 캐런이 살인자라고 인지하고 나니 이셀라를 스물스물 얽어매던 기분 나쁜 감각은 사라졌다. 알 수 없으니까 더욱 무서웠던 것이다. 환상과 현실이 애매하니 더욱 겁났던 것이다.

“살 수 있어…. 살 수 있어.”

이를 악물었다.

광기를 벗고 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렵기 그지없지만, 캐런은 결국 17세의 어린 처녀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총도 없었다. 그녀가 가진 것은 은촛대 하나뿐.

캐런의 속이야 어떻든 힘이 괴물일리도 없었고, 하물며 남자도 아니다. 이셀라보다도 완력은 약해 보였다. 무척이나 가냘픈 몸이니.

“감옥에서 푹 썩게 만들어 주지.”

이셀라는 다짐했다. 아니, 캐런은 사형을 당할 것이다. 그녀는 희망에 차서 킬킬 웃었다. 자신은 영웅이 될지도 모른다. 캐런은 아버지를 죽인 천하의 패륜아이자 몇을 더 죽였을지도 모르는 살인마다. 그녀를 잡고 나면 분명 레이몬드도 이셀라에게 탄복하여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행동을 참회할 것이다.

“후우.”

그전에 살아야겠지.

주위를 확인하고 이셀라는 눈앞에 보이는 방문을 밀었다.

“젠장.”

잠겨 있었다. 쓰지 않는 복도이니 잠가 둔 건가. 혀를 차려다 숨을 죽이고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캐런은 그녀보다 느린지 발자국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짠.”

“…어?”

누군가가 어깨를 눌렀다. 숨을 참으며 작게 웃는 웃음소리가 귓가에 속삭이며 들린다.

“내 집에서 내가 당신을 놓칠 리가 있겠어요?”

악몽처럼 캐런이 웃었다.

“아… 아, 아아악!”

이셀라는 캐런이 붙잡는 걸 뿌리치고 캐런의 발을 강하게 밟았다. 우득, 하는 끔찍한 소리가 들리자 이셀라는 속으로 환호했다.

“행동력 장난 아니네.”

그녀가 발에서 피를 뚝뚝 흘리면서 웃었다. 아픔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다시 이셀라를 향해 다가왔다.

“꺄, 꺄아아악!”

이셀라는 징그러움에 비명을 질렀다. 저 여자는 괴물이다.

캐런은 비척비척 걸어오며 미소를 건넸다. 마치 정원에서처럼, 아니면 음악실에서처럼. 그녀는 교양 있는 숙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발에서는 피가 흐르고 손에는 촛대를 들고 다가왔다.

캐런은 웃음 띤 얼굴로 말을 건넸다.

“이셀라… 우리, 다음 생에는 친구 할래요?”

“…하?”

예상치 못한 말이, 정말 이상한 상황에서 튀어나왔다.

“역시 예상대로 비명소리가 멋져요.”

이셀라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미친년.”

그렇게 쏘아 붙이고는 몸을 돌렸다. 안전한 상황이었다면 손짓까지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거 아쉽네…. 하지만 다음번에는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당신은….”

“꺼져!”

멀리서 캐런이 아쉽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쫓아오고 있었다. 다리를 질질 끌면서. 그것이 소름끼쳐 이셀라는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또다시 어두운 복도가 이어졌다.

“하아, 하아, 하아.”

숨이 턱까지 올라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체력에도 한계가 밀려온다. 이셀라는 끝나지 않는 복도를 저주했다.

혹시 전부 다 꿈은 아닐까. 이대로 쓰러지면 모든 일은 해결되어 있고 자신은 침대에서 눈을 뜨지 않을까.

“…….”

그럴 리는 없겠지. 이셀라는 뛰면서 자신에게 조소를 날렸다.

“하아…. 헉….”

하지만 그것도 한계다. 이셀라의 몸이 쓰러지기 직전에 사람을 발견했다.

“아.”

어둠의 저편에서 사람들이 있었다.

“혹시….”

아니다. 여자가 아니다. 이셀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부터 확인한 다음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다가 분명 남자다. 절대 캐런이 아니다. 드디어! 이셀라는 환호성을 질렀다.

“도와줘! 사람 살려요!”

이셀라는 인영을 향해 전력을 향해 달렸다.

“허억, 헉, 헉…. 살, 살인, 살인이…!”

이셀라는 전력을 다해 그들에게 달려가 무너졌다. 온기다. 사람이다.

“무슨 일입니까.”

그들 중 한 남자가 이셀라를 붙들고 물었다. 사람이다. 현실이다. 드디어 사람을 만났다.

“살인… 살인 사건…. 캐런 하이어가…. 살인마에요. 사람을 죽였… 자기 아버지를….”

“그게 무슨….”

다른 남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허억, 하고 신음을 한다. 믿을 수 없는 일이겠지. 하지만 어떻게든 이젠 끝이 난다. 자신은 안전하다.

“영주님이?”

“전부…. 전부 그년이….”

사람을 만났다는 안도감에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다행이다. 사람을 만났어. 저 미친년. 넌 이제 끝이야.

이셀라는 잠기는 목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들었다. 아니, 들려고 했다.

“…컥.”

새하얀 손가락이 이셀라의 목을 쥐었다. 이셀라는 발버둥치며 그 손이 자신의 몸을 천천히 들어 올리는 걸 느꼈다.

왜?

“…그러니까.”

이셀라의 눈앞에 어둠이 깔리고

“몇 번이고 말했잖습니까.”

저음의 목소리가 귓가에 음울하게 내려앉았다.

“쓸데없는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캐런은 은촛대를 두 손으로 붙들어 잡고는 벽에 몸을 기댔다. 울고 싶었다. 그래서 울었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무도 없다. 왜? 자신의 손을 피해 도망치던 조연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녀는 이 복도를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이셀라… 어디 갔어요?”

이셀라가 사라졌다. 분명 있어야 할 곳에 이셀라가 사라졌다. 마치 낸시처럼. 그날의 그녀처럼.

“이셀라. 이셀라. 이셀라 에반스 양….”

사랑하는 연인처럼 몇 번이고 간곡하게 부른다. 제발 나타나 줘. 사라지지 말아 줘. 내게 죽어. 어서 나타나서 비명을 질러. 이제 무리야. 또다시 광기의 세상은 싫어. 이셀라를 죽이는 건 캐런 자신이어야 한다. 복도를 몇 번이고 돌아도 그녀는 보이지 않는다.

“이셀라 에반스!”

소리 높여 비명을 질러도 사라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캐런은 복도에 쓰러졌다.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제발 나타나 줘. 내게 죽어 줘. 아니면 날 죽여 줘. 아무래도 좋아. 난 비이성적인 이 세상이 너무나 싫어. 명확한 건 아무것도 없고 진실은 어렴풋한 이곳은 너무 버거워.

“제발 나타나….”

캐런은 기다시피 천천히 움직였다. 괜찮아. 진정해. 아직은 괜찮아. 생각하자. 의심하자. 의심이 자신을 구원할 것이다. 이셀라가 어디로 갔을까 생각하자. 하지만 괜찮지 않았다.

“…아파.”

발에서 통증이 밀려 올라온다. 캐런은 복도에 웅크리고 엎드렸다.

“너무 아파….”

죽을 것 같다. 캐런은 그런 고통이 싫었다. 하지만 고통보다 더 싫은 건 이셀라가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또다시 이셀라가 사라졌다. 그녀가 도망치는 것에 성공했다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다. 상황은 너무나 무겁고 기분 나쁘다.

“…이러지 마.”

진짜 싫다, 이런 일은.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히고 썩히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기를 바라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었나? 캐런은 눈물을 훔치고 다리를 질질 끌며 서재로 돌아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괴롭다. 최소한 금은 갔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캐런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이 고통이었다.

“…….”

이셀라가 사라지고 패닉에 빠진 캐런을 유일하게 구원하는 것은 그녀가 남긴 통증이다.

“…돌아가자.”

이미 몇 바퀴를 돌았다. 여기서 더 도는 것은 시간낭비다. 캐런은 더 중요한 확인을 해 보기로 결심했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캐런은 혹시, 혹시나. 중얼거리면서 서재로 다시 발걸음을 향했다.

“이제 와서 이러는 건 너무하잖아.”

간신히 뭔가가 나오려나 싶었는데 또다시 이렇게 이야기가 망가지는 건 너무 하다고! 캐런은 비명을 억누르며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부어오를 발로 움직이는 것은 너무나 시간이 오래 걸렸고 고통스러웠다. 캐런은 최소 다섯 배는 더 시간이 걸려서야 간신히 서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캐런은 눈을 감고 기도를 했다.

“제발….”

제발 사라지지 말아 주세요, 아버지. 전 싫어요. 환상도 싫고 신비도 싫어요.

문을 열기 전에 심호흡을 한다. 캐런은 무너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달칵.

서재의 문을 열었다.

“…하.”

다행이었다. 영주는 목을 매달고 공중에서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아까와 같은 상황이었다. 캐런은 시체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아버지는 역시 죽었구나.

“아버지.”

시체는 그대로 매달려 있었다. 이셀라는 사라졌어도 아버지의 시체는 이렇게 남아있다. 그렇다면 이셀라는 도망치는 것에 성공한 것일까?

“톰… 있니?”

캐런은 촛대를 꽉 쥐고서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어쩌면 이셀라도 있을지도 몰라. 시작으로 돌아간다는 말도 있잖아? 어쩌면 말이야. 설마 여기로 돌아오겠어, 하는 마음으로 이셀라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캐런은 책상 아래를 들여다보고 책장 사이사이를 돌아다녔다. 발이 아파 비틀거리며 쓰러지곤 하면서도 소파와 조각상들 사이를 살폈다. 웅크리고 숨어 있는 작은 머리통을 기대하면서….

톰은 없었다.

“다른 곳으로 도망갔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캐런은 그 사실에는 놀라지 않았다. 그 정도의 결단력, 실행력이 있으니 이미 도망갔겠지. 그 상황을 틈타서.

“복수하고 싶으면 지금 나와 줘…. 죽어 줄 수도 있어.”

하지만 방 안은 조용했다. 적막감 가운데 이미 사물이 되어 버린 영주만 시계추처럼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비명 소리와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하인들이 사람들에게 무어라고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가장 큰 목소리는 보웬의 목소리다. 그가 사람들에게 저택에서 나가라고 하고 있었다.

“아….”

끝났구나.

캐런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수습은 불가능해졌다.

사람들에게 살인을 들키고 수감된다.

그건 괜찮다.

아주 최악은 아니다.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사라지고 이셀라가 사라지고 전부가 사라지고 시간의 감각, 시각, 촉각 그 모든 것이 엉망이 되는 것보다는 훨씬 깔끔하다.

지금의 상황: 살인을 들키고 감옥에 간다.

물론 차악이긴 하지만. 캐런은 허탈하게 웃었다. 수감되고 나면 더 이상 정보는 얻지 못하리라. 잘되어 봤자 정신병자로 기록에 남고…. 그리고 정신이상자이자 아버지를 죽인 사람으로 기록에 남겠지.

이셀라는 그런 식으로 증언할 것이다. 톰이 죽였다고 증언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셀라가 그렇게 증언할 테고 캐런은 이셀라를 공격했으니 발뺌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딱히 그것에 억울함을 느끼지는 않는다. 부친을 죽이고자 했던 건 엄연한 사실이다. 아니, 사실 오히려 사냥감을 빼앗긴 것에 분통이 터지지 않았던가?

“이셀라가 성공했다면 난 이미 틀렸네.”

수습은 불가능하다. 거기서 이셀라를 즉사시켰어야 했다. 이셀라가 그걸 피할 줄이야. 이셀라가 낸시의 시체를 봤으면서 잘못 봤다고 넘긴 것도 어쩌면 캐런을 속이기 위해서 그렇게 군 것일까? 캐런은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영주는 몇 번을 죽었었고 그때마다 캐런은 신물인지 알 수 없는 억지 눈물을 짜냈어야 했다.

이셀라는 단 한 번에 자신에게서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그녀에게 박수를, 그리고 캐런에게는 비웃음을. 이 한심한 살인마야.

“이제 어쩌나….”

캐런은 바닥에 주저앉아 신발을 벗었다. 발이 너무 부어올라 신고 있는 것조차 고통이었다. 왠지 머리가 뜨거워졌다. 아니, 온몸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냥 화덕에 머리 박고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이셀라가 성공해서 사람들을 모아서 온다면 자신이 있을 곳은 축축하고 어두운 감옥이 될 테고, 더 이상 이번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복잡한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것은 빠른 자살이 최고다.

“그것도 성공한다면 말이지….”

이제까지 자살도 그날이 오기 전에는 실패하지 않았는가. 아니, 성공한 적도 있었다.

“있었나? …없었나? 헷갈리네?”

캐런은 그것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뭐 그것도 의미 없지만….”

캐런은 감옥에 갇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곳에서 맞는 죽음은 불쾌하고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죽음이었다. 다른 것보다 생리적인 문제였다. 캐런은 창문을 열었다. 바람에 눈가가 시렸다.

“자살로 봐 줘요. 그거보단 이게 낫더라.”

바람에 머리가 세게 휘날렸다. 캐런은 창가에 걸터앉아 땅을 내려다보았다. 시간이 충분하다면 약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텐데.

“아, 그래도 왠지 분해 죽겠네.”

약혼식 선물로 캐런과 영주의 시체를 이셀라와 베르딕은 기쁘게 받을 것이다. 이셀라는 너무 무서웠다고 말하면서 눈물짓고 레이몬드는 그녀를 다시 보겠지. 영지는 베르딕의 손에 순조로이 넘어갈 것이고 그는 크게 이득을 볼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캐런은 다시 정원에서 눈을 뜰 것이다.

“내 동전….”

동전을 손에 쥐었다. 그 세월 동안 유일한 위안. 자신이 생각하기 위한 처음의 시작. 제정신을 차릴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증거. 온몸에 열이 오르는데 동전만은 싸늘히 현실을 일깨운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캐런은 창가에서 몸을 던졌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동시에 누군가가 성난 목소리와 함께 캐런의 팔을 붙들었다.

레이몬드였다.

그는 이번에도 그녀를 구하러 왔다.

“무슨 짓입니까!”

레이몬드 경, 너무 갑자기 튀어나오니 짜증 나요.

무슨 짓인지 보면 몰라요? 자살 시도하는 중이잖아. 캐런은 한 팔이 잡혀 대롱대롱 매달린 상태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꼴이 우습다.

“놔주세요…. 레이몬드 경. 전 더 이상 살 희망이 없어요.”

캐런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몸에 힘이 쭉 빠졌다. 하지만 레이몬드가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악력에 이미 그 계획이 틀렸다는 것도 알았다. 또 구해지는구나. 재미없는 일이다.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합시다. 사람 힘 빠지게 하지 말고.”

역시나 그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는 그녀를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최소한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무겁군요.”

“…….”

대꾸할 힘조차 나지 않는다. 레이몬드도 입을 다물었다.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역시나 말과는 다르게 레이몬드는 별 힘들이지도 않고 캐런을 한 팔로 들어 올려 안았다. 하지만 그는 서재로 바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창가에 서 있었다. 캐런이 눈썹을 조금 찌푸렸다. 눈이 매웠다.

레이몬드가 서재를 응시하면서 캐런에게 물었다.

“영주님은 어떻게 된 겁니까?”

“자살하셨어요.”

캐런은 순간적으로 대답했다.

“이유는… 아닙니다. 그것보다 살아서 나가는 것부터 생각합시다.”

레이몬드의 대답은 짧았지만 캐런은 거기서 추측할 수 있었다.

그는 이셀라를 만나지 못했다.

영주가 자살했다는 것은 그리 이상한 상황이 아니다. 권리는 대부분 베르딕 에반스에게 넘어갔고 영주에게 희망은 없었다. 딸이 뺨을 맞아도 그는 항의하지 못한다. 마치 캐런의 편을 드는 것처럼 보였던 백작 부인도 그렇다. 그 순간 그녀가 화를 낸 것도 캐런을 생각해서가 아닌 베르딕의 약점을 잡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었다.

흔한 일 아닌가. 누구나 납득할 일 아닌가. 자식조차 지키지 못하는 가장이 자진한다는 이야기. 캐런이 과거에 겪었던 그 수많은 자연스러운 자살들처럼 모멸감을 견디지 못한 그가 죽는 이야기.

“영주님이….”

레이몬드가 매달린 영주의 시체를 본다. 그리고 무너진 책상과 캐런이 헤집어 놓은 방 안을 본다. 표정이 굳는다.

“그렇군요.”

이제까지 레이몬드는 영주의 죽음을 납득했다. 그리고 캐런을 가련하게 여겼다. 이번에도 표면상의 죽음은 같다. 그는 납득할 것이다.

“…흐흑.”

이번에 달라진 것은 이셀라. 조금 전까지 캐런은 자신이 이셀라를 놓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셀라를 만났다면 내게 왜 그랬느냐는 식으로 추궁을 했겠지.’

레이몬드가 캐런을 추궁하는 것이 아니라 영주의 자살에 대해 묻고 납득했다는 말은 아직까지 이셀라를 만나지 못한 것이다.

빠져나갈 상황이 될까?

캐런은 잠자코 안겨서 침묵을 유지했다. 잠시 동안의 침묵이 지나자 그녀 대신 레이몬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택에 불이 났습니다.”

“예?”

캐런은 문가를 보았다. 불길이 넘실대고 있었다. 어느새? 캐런은 자신이 방 안을 뒤지는 동안 시간이 얼마나 흐른 것인지 어안이 벙벙해졌다. 불이라니, 이 무슨. 코끼리보다 더 어이없는 변화다. 이셀라 죽이는 걸로 마무리 지으면 안 되는 일일까?

레이몬드가 마저 입을 열었다.

“…불이 잡힐지 모르겠습니다. 다들 소리를 지르고 정신없이 빠져나와서 확인을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과… 이셀라 양이 보이지 않아서….”

이건 또 뭔 일이람. 하지만 머릿속으로 어떻든 간에 캐런은 그녀가 할 만한 행동을 했다.

캐런은 레이몬드에게 손을 뻗어 어루만지고는 처연히 미소를 뗬다.

“레이몬드 경 혼자 가세요. 저는 이제 살 희망이 없어요.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캐런은 비탄에 잠긴 얼굴로 마음에도 없는 애원을 했다. 그리고 레이몬드는 이를 악물며 굳건한 의지를 보여 주었다.

“최소한 지금은 안 됩니다. 내가 당신을 구하러 왔으니까.”

감동적이군. 한 70년 전쯤이었다면 정말 품에 안겨 울 만하겠어. 캐런은 답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은 당신이나 저나 선택권이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야 그렇지. 캐런은 고개를 숙이고 생각했다.

“불이요.”

캐런은 불이 났다는 것에 마음이 쓰였다. 그녀는 과거에 저택에 몇 번 불을 지른 적이 있었다.

‘난 한 번도 성공 못 했는데.’

이상한 호승심이 일었다. 과거에는 불을 질러도 재빠르게 불이 꺼졌는데, 이번에는 불이 크게 번졌다. 똑같은 사람들이 관리하는데 변했다?

‘듈란이 손을 댄 것일까.’

영주가 죽은 이 시점에서 하인들을 통제하고 수를 쓰는 건 그뿐이지 않는가. 캐런은 납득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듈란은 어디까지 처리를 할까, 그리고 이셀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결국 그녀가 나타나면 불을 지른 것은 아무 의미가 없지 않은가. 이셀라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녀는 어디에 있는 걸까?

“일단은 나갑시다. 거절은 듣지 않을 겁니다. …젠장!”

문가에 불길이 치솟았다. 이미 복도는 불로 뒤덮여 있었다. 방 안은 한 낮처럼 훤해졌다.

“…아버지!”

영주의 시체에 불이 붙었다.

“캐런!”

툭.

영주의 시체의 밧줄이 끊어져 떨어졌다. 불이 영주 신체의 면적만큼 더 크게 방 안에 번졌다.

“아버지!”

정말이지 도움이 안 되시는군요! 캐런의 원망 섞인 외침을 무시하며 시체는 빠르게 타오르며 장작의 역할을 했다. 부모는 자식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위험합니다! 이미 틀렸어요!”

캐런을 꽉 끌어안고서 레이몬드는 뒤로 물러났다. 아버지, 뼈는 남기세요. 가능한 한 어머니 곁에 묻어 드리려고 했는데. 매장이 아닌 화장이 되겠군요. 그래도 얌전히 타시기를 바라요. 나중에 뼈를 수습할 수 있다면 그리 해 드릴 테니.

‘아니, 그거보다 불이 이 정도로 번진 건… 그 자식이 날 죽이려고?’

약간 자존심이 상했다. 자신은 실패했던 방화가 이렇게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단은 살아야겠다.’

캐런은 거기까지 판단을 내리고는 레이몬드의 말대로 당분간 자살은 접어 두기로 결심했다.

“이셀라는… 어떻게.”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럽다. 레이몬드가 캐런에게 반문했다.

“에반스 양을 못 보셨습니까? 분명 당신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베르딕 씨께서 당부하셨습니다만.”

이셀라를 여기서 보았다고 하는 것과 못 봤다고 하는 것, 어느 것이 더 이득일까? 캐런은 순발력이 필요한 판단이 괴로웠다. 이런 큰 판단을 빨리 하기에 자신은 너무 나이 먹었다. 이셀라를 대할 때처럼 손에 레이몬드 머리에 박아 줄 뭔가가 있으면 몰라도.

“그것이….”

캐런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자 레이몬드는 눈썹을 찌푸렸다.

“못 보셨습니까? … 아무튼, 그것보다는 나가는 것부터 생각합시다.”

그것.

그것이 된 약혼녀라.

이셀라는 이미 캐런보다 아래 순위인 상황이다. 캐런은 스스로 안도감을 느끼면서 기분이 저조해지는 것 또한 동시에 느꼈다. 그건 캐런이 더 중해서일까 아니면 당장 살릴 수 있는 사람이라서일까. 그것을 레이몬드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할까. 하지만 상념에 빠지는 것은 이 순간 사치다.

캐런은 머리를 흔들었다.

“캐런.”

“네.”

레이몬드가 창밖을 내려다보면서 캐런에게 물었다. 사람들의 고함소리, 비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지끈, 어디선가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도 들렸다. 창가에서는 연기가 짙게 보였다. 캐런은 레이몬드의 얼굴이 불길에 비춰서 환하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착각이겠지만, 표정까지도 밝아 보였다. 레이몬드는 캐런에게 말했다.

“우리 큰일 났습니다.”

“그런 것 같네요.”

“불이 생각보다 많이 번졌습니다. 타고 내려갈 만한 배관이 있습니까?”

“배관… 이요?”

거기까지는 모른다. 캐런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자 레이몬드가 캐런을 내려놓았다.

“캐런 하이어. 약속 하나만 하죠. 오늘은 자살하지 말아요. 여기까지 온 저를 위해서라도. 지킬 수 있겠어요?”

“…예.”

“기왕이면 내일도.”

그건 좀.

하지만 캐런은 그 말을 육성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그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여기서 지붕으로 이동할 수는 있습니까?”

“이 방 안에서는 불가능해요. 최소한 복도로 나가야 하는데”

복도는 도저히 탈출하기 불가능해 보였다. 레이몬드는 혀를 차고는 창문 밖을 내려다보았다. 캐런이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높았다.

“이 높이면….”

레이몬드가 높이를 가늠했다.

“가능하실 거예요.”

캐런은 안다.

레이몬드 혼자라면 이 정도의 높이라도 충분히 무사히 뛰어내릴 것이다. 그녀는 이미 그가 그러는 것을 과거에 보았다.

“…너무 제 능력을 높이 평가 하시는군요.”

“혼자면 가능하실 거예요.”

그녀로서는 흉내 낼 수 없는 익숙한 동작들. 하지만 그녀를 데리고 뛰어내린다면?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시체가 둘이 될 뿐이다.

“그런 말 하지 않기로 했잖습니까. 의지를 좀 보여 주시죠.”

“하지만 레이몬드 경이라도.”

캐런은 스스로 말하면서도 낯간지러워 주먹을 쥐었다. 다행히 그것은 보기에는 비장한 각오를 한 선한 여성처럼 보이리라.

캐런이 어떻든 레이몬드는 방 안을 돌아다니면서 고민에 빠졌다.

“방 안에서는 알 수가 없고… 불 번지는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지붕으로라도 올라가 확인 할 수 있다면. 여기서 가장 높은 창이 어디죠?”

“서재가 복층이라… 서재 쪽 저 작은 창문이요!”

레이몬드는 캐런을 안고 사다리 앞으로 뛰었다.

불길이 더욱 세게 번졌다.

“먼저 올라가겠습니다.”

레이몬드가 훌쩍 올라가 창을 열려 했지만 채광을 위한 작은 창이라 열리지 않았다. 그가 창을 깨는 동안 책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곤 아쉬움에 젖었다.

‘아직 어머니의 단서를 하나도 찾지 못했는데….’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어쩔 수 없다. 빌어먹을 방화범. 불을 지를 때는 필요한 건 다 빼놓아야 할 것 아닌가. 캐런은 정체를 확인하는 즉시 머리에 바람구멍을 내주고 싶다 소망했다.

‘저건?’

손이 닿지 않는 서재의 한구석에 표지가 없는 노트가 꽂혀 있었다. 캐런은 손을 뻗었다.

“캐런!”

우지끈. 사다리가 부서졌다.

캐런이 떨어질 뻔한 것을 간신히 끌어 올린 레이몬드는 창문 밖으로 그녀를 꺼냈다.

“죄송해요. 어머니의 유품이….”

솔직히 말하자면 유품일지 아닐지도 모르는 노트 하나지만. 혹시 모르지 않는가. 레이몬드는 대놓고 타박하지는 않았지만 약간 어이없어 보였다.

“됐으니까 입 다물고 나갑시다.”

휘이이이.

불꽃과 바람이 섞여 하이어 저택을 와그작와그작 씹어대고 있었다.

캐런을 들쳐 안은 레이몬드는 지붕위에서 몇 번 발을 굴리더니 낮은 지붕으로 뛰어 내렸다.

퍼서석.

“꺅!”

캐런이 레이몬드의 목을 끌어안았다.

젠장, 제대로 좀 해요! 속으로 욕을 내뱉었지만 이를 악문다.

“혹시나 묻는데 저 지붕 위에서 혼자 균형 잡고 가로지를 수 있습니까?”

레이몬드가 고갯짓으로 가르친 지붕은 불에 타서 약간 기울어져 있었지만 벽은 석재라 멀쩡한 곳이었다. 그럼에도 발을 디딜 만한 곳은 한걸음의 폭이나 마찬가지였다.

전부가 당신처럼 괴물은 아니거든? 캐런은 고개를 저었다.

“제 발이 멀쩡해도 안 돼요.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못해요.”

노력의 문제가 아니다. 레이몬드도 그저 말이나 해 본 것이었는지 표정의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숨도 쉬지 말고 매달려 있어요.”

그리고 캐런은 그렇게 했다.

레이몬드는 캐런을 안은 채로 허리를 숙였다.

남자의 몸에서 익숙한 화약의 냄새가 났다. 레이몬드는 뛰어내리는 것이었지만 그 모습은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붕, 하는 소리가 나는 것을 느낀다. 그 감각은 소름이 끼친다. 몇 번이고 겪었던 추락의 감각이지만 지금 옆에는 사람의 온기가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레이몬드다. 캐런은 그래서 무섭지 않았다. 그가 옆에 있으면 죽을 일은 없다. 적어도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가볍게 올랐던 몸이 지붕 위로 내려앉고 바람소리가 들릴 정도로 빠르게 달린다.

“……!”

캐런은 귀를 막고 싶었지만 레이몬드를 잡느라 할 수 없었다. 캐런은 달리면서 창문이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저 안에 누가 있든 살아남기란 어려우리라.

타악.

마침내 땅에 구르듯이 도착하고 나서야 레이몬드는 캐런을 내려놓았다.

“윽.”

캐런은 일어서려고 하다가 발에서 밀려 올라오는 통증에 다시 주저앉았다.

“아가씨!”

도나가 달려왔다.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다.

“세상에 어떡해요, 대체 이게 무슨… 영주님은 어떡하시죠. 못 나오셨어요…. 흑, 으흐흑…. 아가씨는 괜찮으세요?”

“…….”

캐런은 대답하기가 힘들었다. 지금은 농담조차 할 기운이 나지 않는다. 한계다. 너무 많은 일들이 하룻밤동안 일어났다. 힘이 빠져 도나에게 몸을 기대며 쓰러진다.

“어떡해요….”

도나는 캐런을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캐런은 도나를 토닥이다가 이내 그것조차 귀찮아졌다.

“이셀라는….”

그리고 그가 다가왔다.

“제 딸은 어떻게….”

베르딕이 끔찍한 얼굴로 캐런에게 다가왔다. 캐런은 고개를 숙였다. 나도 그것이 궁금해. 이셀라는 어디에 있을까. 어떻게 된 것일까. 이 상황은.

“왜….”

하지만 그럼에도 베르딕의 얼굴을 보는 것은 불편했다. 캐서린이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그 후로 이셀라를 본 사람은 없다는 것.

“어째서.”

캐런 스스로도 기쁜지 슬픈지 안도감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베르딕은 레이몬드의 웃음을 보았다.

베르딕은 레이몬드를 보았다.

그는 웃는 것 같았다.

제발 이대로 눈을 뜨지 않았으면. 언제나 잠들 때마다 기도하곤 했다. 이대로 영원히 생각조차 하지 않고 끝이 났으면.

그것은 부질없는 희망이다. 눈을 뜨면 또다시 하루가 시작되겠지. 안다. 안다고. 매일 같은 사람들, 같은 웃음들, 같은 눈물들. 암흑 속에서 의식을 찾고 또 의식을 찾는다는 것 그 자체에 절망한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그나마 매번 시작하던 정원이 아닌 따뜻한 이불 속이라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정원은 항상 싸늘했다. 몸서리쳐지는 그 추위가 아니다. 이번에는 춥지 않구나.

이번에 날 죽인 건 누구더라? 아니야. 이번에는 내가 죽였어. 내가 죽였다구. 아무도 날 죽이지 못할 거야. 종이 위의 잉크, 희미한 피아노 소리. 아니야. 이번에는 아니었어. 아직 아니야.

“아가씨.”

저 목소리는 누구지? 뭉근하게 발음을 흐리는 저음의 목소리가 아닌 좀 더 어린 여자.

아, 맞아. 낸시는 내가 죽였지. 저 여자는 그녀가 아니야. 저 목소리는 도나다. 조금 더 어리고, 발랄한 소녀의 목소리. 지금까지와는 다른. 캐런을 죽일 만큼 영향력이 없던 목소리다.

“괜찮으세요?”

“…으.”

캐런은 눈을 뜨려 했지만 눈이 떠지지 않았다.

이젠 장님인가? 다행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손을 드니 눈에 무언가가 내려앉아 있다. 얼마나 잠이 든 거지?

“…으.”

입을 열려 했지만 메마른 목과 입술은 버석거려 목소리를 자아내지 못했다. 캐런이 몇 번 입술을 달싹거리자 도나는 물에 적신 수건으로 입술과 눈가를 축였다.

또다시 살아나고야 말았다. 눈이 부시다. 캐런은 얼굴을 부드럽게 닦는 도나의 손 너머로 천장을 본다. 화사한 크림색의 벽지. 자신의 방이 아니다.

“…물.”

“여기 있어요.”

“내가… 얼마나 정신을 잃었니?”

“삼일이요. 정말이지 아가씨도 돌아가시는 줄, 알고…! 흑….”

도나가 울음을 터트렸다.

“나도?”

캐런이 물었다. 도나는 히끅거리다가 앗, 하면서 입을 막았다.

“사람들이 많이… 다쳤니?”

“아… 아가씨.”

도나가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놀라지 마세요…. 실은, 영주님께서… 그만….”

그거 말고.

캐런은 짜증이 난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여야 했다. 머리카락이 침대 위로 쏟아져 내렸다. 이미 알고 있는 거 말고. 그리고 바로 잠들기 전에 넌 이미 아버지가 못 나오셨다고 했다고. 기억 못 하는 거야? 네겐 며칠 전이니까 벌써 잊은 거니?

캐런은 무표정이었지만 하지만 도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영주의 죽음을 슬퍼했다. 일자리가 잘린 것을 슬퍼하는 것이라기엔 과한 슬픔이었다. 적어도 캐런이 보기에는 그랬다. 남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는 건가? 훌륭한 하녀를 고용하셨네요, 아버지. 일은 좀 못하지만.

도나가 진정할 수 있는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캐런은 다시 물었다.

“…천천히 말해 봐. 여긴 어디니?”

천장은 크림색이었고 벽지는 꽃무늬가 가득했다. 햇살은 부드럽게 방 안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고 테이블에는 차와 간식이 올려져 있었다. 말 안 해도 알겠군. 캐런에게는 처음이지만 처음이 아니었다.

“내 집이오. 하이어 영애.”

“…베르딕 씨.”

가장 불편하고 껄끄러운 남자가 나타났다. 캐런은 도나가 굳은 것을 느꼈다. 캐런은 슬며시 자신의 목을 더듬었다. 아직 붙어 있다. 이셀라는 어떻게 된 걸까. 아무튼 자신의 목이 붙어 있고 저 중년이 도끼를 들고 있지 않은 것을 보면 이셀라는 결국 그 저택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걸까?

“도나, 나가 있어.”

캐런은 침대 밑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네.”

도나가 나가자 베르딕이 침대로 가까이 왔다.

베르딕은 잠시 침묵했다.

“…상황은 알고 있겠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구요.”

“그렇소. 매우 안타깝게도 말이지.”

퍽이나. 캐런은 예전에 베르딕이 짓던 그 웃음을 기억한다. 그는 웃었다. 말을 건네면서.

“하이어 양. 영주님이 목을 매셨소. 애도를 표하겠소.”

눈을 내리깔고 너무나 즐겁다는 듯이.

“그분의 부탁을 받아… 내 딸에게 도움을 주는 건 어떻겠소? 아무래도 또래 여성이 말동무를 해 주면 좋을 것 같아서 말이지.”

캐런은 기억한다.

하지만 이번에 베르딕은 웃지 않았다. 그는 침묵했다. 손을 모으고 고개를 잠시 숙이고, 얼굴을 찡그렸다.

이셀라에게 무슨 일이 나긴 났나 보군. 캐런은 약간의 통쾌함을 느꼈다. 기왕이면 그녀의 잘린 목을 그에게 던져 주고 싶었는데.

침묵이 이어졌다. 견디지 못한 캐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베르딕 씨?”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예.”

“내 딸이 되어 주겠소?”

떨리는 손으로 파이프를 내려놓았다. 눈가가 아렸다.

세상이 무너진다. 고함을 지르고 머리를 뜯어도 현실은 변함이 없다.

“…베르딕 씨. 약혼식과 의회 관련으로 백작 부인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나가! 날 좀 내버려 둬!”

쨍그랑.

베르딕은 고함을 지르면서 잉크병을 내던졌다. 하지만 하인은 계속 문가에 서 있었다. 검은 잉크가 바닥 카펫에 스며들었다. 그녀의 하인은 문 너머에서 고저 없는 목소리로 용건을 전했다.

“바로 뵙겠다고 하십니다.”

그는 눈물을 닦았다. 개 같은 년. 내 약점을 잡았다, 이거지. 약혼식을 눈앞에 두고서. 나의 딸아. 마지막에 했던 대화가 고함이라니. 베르딕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심호흡을 했다.

“…잠시 후에 뵙자고 전해 주시오.”

베르딕의 가슴은 찢어지고 있었다.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끔찍한 것은 딸만을 위해 울 시간조차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셀라와 레이몬드의 결혼을 담보로 잡아 둔 그 수많은 계획들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얼굴을 덮었다.

베르딕은 일을 해야 했다. 손수건을 꺼내 잉크를 닦는다. 하지만 잉크는 이미 스며들었다. 손수건마저 더러워졌다. 베르딕의 눈물이 그 자국 위로 떨어졌다.

슬퍼하는 것조차 사치다.

“이셀라! 이셀라! 어디 있느냐!”

“아가씨…!”

울고 있는 하녀를 붙잡아 다그친다

“둘 다 없어?”

“방은 어디야!”

“불길이 너무 거세다, 들어갈 수 없어!”

“놔!”

불길 속에서 영주의 저택이, 베르딕이 손에 넣고자 했던 저택이 타오른다. 무너진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아직 베르딕의 딸이, 이셀라 에반스가 저 안에 있다.

“위험합니다, 베르딕 씨.”

“레이몬드 경… 레이몬드 님…. 제발 제 딸을 구해 주십시오.”

베르딕은 레이몬드의 팔을 붙들었다. 금을 얼마든지 쳐 줄 용의가 있었다. 전재산이라도 달라면 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본 레이몬드의 얼굴은.

“…베르딕 씨. 전 불을 끄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레이몬드의 얼굴에서 희미한 웃음을 보았다.

그것은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잘못 본 것일지도 모른다. 레이몬드는 바로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어서 그렇게 말했다.

“저는 이곳을 잘 모릅니다. 하인들에게 마저 상황을 들어야 합니다.”

맞는 말이다. 레이몬드는 기사다. 군인이다. 심지어 이곳의 집주인도 아니다. 이치에 맞다. 상황에 맞다.

하지만…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어찌 그렇게 되던가?

레이몬드가 여자를 끌어안고 나올 때 베르딕은 눈을 크게 뜨고 주저앉았다.

딸이 너무나 동경하고 손에 넣고 싶어 하던 그 남자는, 이셀라가 아닌 캐런 하이어를 데리고 나왔다. 그것이 베르딕에게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쓸모도 없는 번지르르한 개새끼.”

이셀라에게 준 것은 불량품이었다. 베르딕은 레이몬드를 생각했다. 딸을 구하지 않은 기사를 생각했다.

딸을 데리고 나온 것은 듈란이었다.

이 어두운 남자는 이셀라에게 그런 수모를 당했으면서도 이셀라를 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비록 이셀라는 연기를 너무 마셔 혼수상태였고 목에는 큰 화상을 입었으며 여기저기에 타박상이 있었지만, 그래도 살아는 있었다.

“하지만…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베르딕이 살아남은 딸을 부둥켜안으려고 하자 듈란은 무리가 갈 수 있다며 저지했다. 대신 손가락으로 숨을 쉬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듈란은 이후 그의 저택에 머물며 이셀라를 돌보겠노라 베르딕에게 말했다. 베르딕은 사이도 좋지 않던 듈란이 기꺼이 이셀라를 위해 저택에 머물겠다고 한 것에 대해 감사했다. 그는 볼품없는 외양과는 다르게 진정으로 의술과 선을 행하는 성자로다.

“안 됩니다.”

“비키는 게 좋을 거요. 이셀라 양에 대한 이야기니.”

바깥에서 실랑이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

베르딕의 고함 소리와 함께 검은 옷을 입은 신관이 천천히 들어왔다.

“…듈란 님.”

제발 무사하다고 해 줘. 내 아이가 제발 다시 웃을 수 있다고. 하지만 듈란이 전한 소식은 절망적이었다.

“상황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베르딕 씨.”

“그… 그렇습, 니까.”

“아직 살아는 있습니다. 신께서 은총을 내려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베르딕 에반스.”

“살아 있으면 언젠가는 깨어나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신관님?”

베르딕은 간절히 쳐다보았지만 듈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가 천천히 말을 했다.

“확답을… 드릴 수 없군요. 곁에서 돌보도록 하겠습니다. 저… 도 그러길 바랍니다.”

하지만 역시나 이셀라의 상황이 심각한지 듈란은 얼굴을 미세하게 찡그러트렸다.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신관님. 약소하나마 교구에 헌금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택에서 머무시는 동안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그렇군요.”

듈란은 바닥을 내려다보며 베르딕에게 말했다.

“…그럼, 제 부탁을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베르딕은 그가 천금을 요구해도 기꺼이 내 줄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그가 말한 것은 뜻밖의 이야기였다.

상속법에 따라 영주의 자리는 듈란에게 넘어갔다.

영주의 자리 대신, 그가 남긴 재산은 본디 캐런 하이어의 몫이었지만, 화재로 그녀가 가질 수 있는 재산은 전부 재가 되었다. 캐런에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캐런」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상황이겠지만.

“당신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거요. 내 양녀가 된다는 것은 말이오.”

“…그런가요.”

아버지는 이번에도 돌아가셨고 듈란은 영주의 자리에 올랐다. 차이라면 그 전에는 「캐런」이 듈란과 결혼하기 싫어서 이셀라의 시녀 자리라도 좋다며 이 에반스 저택으로 왔지만, 이제는 에반스가의 양딸로서 온 것이다.

캐런은 눈앞에 놓인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거부할 이유는 없다. 베르딕이 말한 대로 캐런이 손해 보는 일은 하나도 없다. 굳이 따지자면.

“이제 전 캐런 에반스가 되는군요.”

어감이 마음에 안 든다. 베르딕은 그것을 눈치챘는지 눈썹을 씰룩였다. 빈털터리가 되었다 하더라도 하이어는 하이어, 에반스는 에반스. 서로 계급이 다르다. 캐런은 엘바 백작 부인이 베르딕에게 할 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돈으로 역사를 사려고 하는 장사치쯤 되려나.

“어차피 여자의 성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오. 결혼하면 남편을 따라 바뀌는 것.”

하지만 당신의 딸은 그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

“…그렇군요.”

캐런은 펜을 들어 사인을 했다. 이제 그녀는 캐런 하이어가 아닌 캐런 에반스가 되었다. 고민해도 어쩔 수 없는 이야기다. 고민할 만한 다른 선택지도 없었다.

“일정은 어떻게 되죠?”

“내일. 최소한의 사람만 부를 테니 특별히 준비할 건 없소.”

“그런가요.”

캐런은 자신이 앵무새가 된 것 같았다.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베르딕은 간략하게 약혼식의 일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캐런은 과거의 이셀라의 약혼식을 떠올렸다. 그때는 초가을이었는데 이번에는 초여름이다.

이야기가 이렇게 또 흘러가는 건가. 다시 레이몬드와 결혼하는 걸까. 흥분되는 일은 이제 끝난 걸까. 캐런은 그건 좀 재미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약혼식을 올리고 그냥 결혼을 하는 이야기. 이번에도 결국 레이몬드와의 결혼인가. 이번에도 결국 순탄하다. 베르딕의 양녀로서 레이몬드와 결혼이라니, 지나치게 매끄러워 미끄러질 것 같다. 짜증 날 정도로.

“내 딸의 옷을 입고, 앞으로도 내 딸로서 참석하면 될 것이오. 당신이나 내 딸, 그러니까 진짜 내 딸이나… 정식으로 사교계에 데뷔하진 않았으니.”

그리고 난 당신 딸의 약혼자와 결혼하게 되겠지. 베르딕은 이 이야기가 그리 내키지 않아 보였다. 그것은 캐런도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불편했지만 물질적인 안락함이 캐런을 안온하게 했다. 첫째로 식사였다. 캐런은 양질의 식사를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빨리 즐길 수 있어서 기뻤다.

“…맛있네.”

따뜻한 수프를 입에 밀어 넣으며 눈을 감고 혀 위에서 움직이는 따뜻함을 즐긴다. 잘게 간 감자 사이에 볶은 양파의 향이 배어 있다. 닭고기로 국물의 기초를 냈는지 담백하면서도 든든했다. 과거에 먹던 거친 귀리죽을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셀라는 하녀들이 먹는 식사를 줬었지. 그것도 나중에는 상한 것을.

“…이 상황에서도 음식이 맛있다니.”

“윽… 흑….”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도나는 숫제 입을 틀어막고 어깨를 떤다. ‘그래도 우리 살아야 해요’, ‘힘내요, 아가씨’ 등의 이야기를 한다. 낸시라면 좀 더 쓸모 있었을까? 캐런은 그것이 궁금했다. 그래, 다음에는 낸시를 살리는 거야. 그리고 그때 본 노트가 무엇인지도 궁금하고.

혹시나 제대로 풀릴 수 있는 이야기가 전부 적혀 있는 그런 노트라면 정말 좋을 것이다. 캐런은 그것이 너무나 아까웠다. 그냥 불타 죽더라도 노트를 보는 선택을 했어야 했다. 목숨이 뭐 그리 중한 것이라고.

“돈은 아깝지 않은데, 어머니의 유품이 아까워.”

“…아가씨!”

결국 왈칵 울음을 터트린다. 도나의 등을 토닥였다. 먹는데 방해가 되니 저리 가 줬으면 좋겠다. 하녀를 바꿔 달라고 베르딕 씨에게 부탁을 할까. 그 정도는 해 줄 것 같은데.

“흑, 흑…. 불쌍한 우리 아가씨 어떡해요….”

결국은 잘된 일 아닌가? 캐런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 아버지가 죽었지. 그건 슬픈 일이다. 캐런은 새삼스럽게 눈물을 떨궜다. 하지만 도나가 우는 것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가씨, 나중에 밝혀졌는데… 사실은….”

도나가 캐런의 눈치를 보았다. 채근하자 머뭇거리며 대답한다.

“이셀라 아가씨가 살아 계세요.”

두근.

캐런은 심장이 강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레이몬드와의 약혼 따위보다 훨씬 자극적인 일. 이셀라가 살아 있다고.

“지금 눈을 뜨지 못하고 계시지만… 듈란 님이… 베르딕 씨에게, 흑….”

두근.

“무슨 소리인지 똑바로 말해 줘, 도나.”

아랫입술을 핥았다. 일이 재밌게 흘러간다. 캐런은 표정을 굳히기 위해 애써야 했다.

“아가씨가, 훌륭한 간호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 몸이 낫는 대로 이셀라 아가씨의 간병을 들게 하라고….”

“뭐….”

“매일 몸을 씻기고, 약을 먹이고 하는 일을 누구보다 잘할 것이라고…. 아무리 아가씨에게 차였다고 해도 그렇지! 너무하세요 정말!”

두근.

그건 마치 예전처럼.

또다시.

이셀라의 시녀가 되는.

캐런 그녀의 기억처럼.

정말로 이 모든 게 책인 것처럼.

“신관님… 좋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손해 볼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왜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하십니까?”

베르딕은 진심으로 그것이 궁금했다. 듈란은 천천히 그 얼굴을 들어 베르딕과 얼굴을 마주했다. 닳고 닳은 베르딕이지만 그가 보기에도 듈란의 얼굴은 심히 기괴해 보였다.

“…제가, 그녀를, 증오… 하기 때문입니다.”

“하.”

베르딕은 생각하지 못한 대답에 입을 벌렸다.

“그, 그녀가 호, 혼수상태가 된 이셀라 양을 간병하도록 하십시오. 그녀의 운명은 피와 고름을 돌보는 하녀의 역에 걸맞습니다. 최대한 괴롭게 하십시오.”

너무나 싫어서 못 견디겠다는 얼굴, 혐오스러워서 어쩔 수 없다는 얼굴. 베르딕은 그런 얼굴을 너무나 잘 알았다. 레이몬드를 생각하면 거울에서 볼 수 있는 자신의 얼굴이었다.

“그것이.”

듈란의 뺨이 상기된다. 이를 악물면서 말을 하고 있었다.

“절 버린 그녀에 대한 복수입니다.”

그래서 베르딕은 기꺼이 듈란에게 손을 내밀었다.

캐런은 이셀라의 드레스를 입었다. 극도로 화려한 드레스는 캐런의 몸에 꼭 맞았다. 제 주인을 찾은 것처럼. 이셀라의 몸집은 분명 캐런보다는 클 텐데 옷은 이셀라가 아니라 캐런이 진정한 주인이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축하를 건네지… 축하할 일인지는 사실 모르겠지만. 최소한 눈물 하나와 웃음 하나가 같이 온다는 것은 위로가 되는 일이지. 하이어 영주에게 위로가 되는 일이길.”

엘바 백작 부인이 와서 캐런과 손을 잡았다. 그녀의 참석으로 약혼식은 공식적인 일이 되었다. 그녀의 딸인 델리아가 캐런에게 선물을 건넨다. 캐런은 의례적인 감사의 인사를 한다. 이셀라와는 다르게 너무나 자연스럽고, 공손하다.

엘바 백작 부인은 그것이 흡족해 보였다.

“역시 네가 더욱 어울리는구나. 레이몬드는 훌륭한 청년이지. 상인 가문에 어울리는 남자가 아닌데. 그나마 캐런 양 같은 훌륭한 여성과 약혼해서 다행이구나.”

엘바 백작 부인은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캐런은 일부러 들으란 듯 크게 말하는 것이 분명한 엘바 백작 부인이 불편했다. 주위의 시선에 얼굴이 따끔거렸다. 반은 그녀에게 동의를 하는 채무자들이었고, 반은 불쾌하게 생각하는 베르딕 측 사람들이었다.

“…참석에 감사드립니다.”

정형화된 예의란 이런 때 편하다. 누구에게도 흠 잡히지 않을 법한 각도와 목소리로 물러나자 그녀의 남주인공이 다가왔다.

“아름답군요, 캐런.”

“…고마워요, 레이몬드 경.”

그는 과거에 봤던 것처럼, 그야말로 신화 속의 남신처럼,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캐런의 손을 잡는다.

“마치… 당신이 제 진정한 운명처럼 느껴집니다.”

캐런은 입을 다물고 그의 팔을 잡았다. 캐런은 운명이 싫었다. 이번에도 반복되는가? 그렇게 살인을 저지르고 시체를 토막 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가?

“그리고 캐런.”

속삭이듯이 레이몬드가 말한다.

“이셀라 양의 구두 굽은 역시 너무 날카롭지 않습니까?”

“…예?”

그가 부드럽게 손으로 캐런을 감쌌다.

“발이 많이 아파 보입니다. 제게 더 기대도 좋아요. 힘들어 보이는군요.”

“…네?”

“너무 움직이지 말아요.”

캐런은 그 순간 쓰러지지 않기 위해 레이몬드를 더 강하게 붙들어야 했다.

“지금….”

“베르딕 씨.”

베르딕이 억지로 웃는 것이 분명한 얼굴로 캐런과 레이몬드를 맞았다. 그는 두 팔을 과장되게 벌리면서 레이몬드에게 웃음을 건넸다.

“좋아 보이는군, 레이몬드 경. 즐거운 날에는 웃어야지.”

“어찌 그러겠습니까. 전 다만 약속을 행할 뿐입니다.”

“캐런 하이어… 이제는 내 딸인 캐런 에반스 양 덕분이지.”

“무엇보다 베르딕 씨의 판단이 우선 아니겠습니까. 제 형이 전보로 걱정하더군요. 정말이지, 아직도 저를 열 살 짜리 아이로 착각하는 것 같더군요.”

“남작은 아직도 그러한가?”

캐런은 아무런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이 남자는, 자신이 기대고 있는 이 기사는 무엇을 알고 있는 거지? 자신이 이셀라의 구두에 다친 것을 어떻게 아는 거지? 단순히 떠보는 건가? 하지만 왜? 무엇을 알고? 무엇을 위해?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캐런은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었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베르딕이 둘 앞에 서 있었고, 레이몬드는 식이 끝날 때까지 자연스럽고 극도로 예의를 갖춘 대화만 나누었다.

하늘은 청명하고 저택은 호사스럽고 약혼자와 약혼녀는 아름답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약혼식이었다.

캐런은 궁금해졌다.

“캐런, 안색이 창백하군요. 괜찮습니까?”

“…감사해요. 전 괜찮아요… 레이몬드 경.”

가정해 보자.

답이 사랑이라고, 캐서린이 이 지독한 저주에서 풀려난 것이 정말로 아버지의 사랑 때문이라고. 만일 사랑이라면, 해답이 사랑이라면, 그것도 절대적일 필요가 없는 지극히 상식적인 감정정도라면 레이몬드가 자신에게 품었던 감정은 무엇일까? 그리고 지금 품고 있는 감정은 무엇일까? 정말로 캐런이 생각했던 것처럼, 사랑이 맞는가?

캐런은 생각했다. 아버지의 사랑은 자신이 보기에 부족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사랑으로도 충분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랑이 해답이되 자신이 받은 것들은 사랑이 아니었던 것이 아닐까.

레이몬드가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라면? 그래서 자신이 풀려나지 못했던 것이라면? 레이몬드뿐 아니라 다른 남자들 전부가 그랬던 것이라면?

레이몬드는 이제까지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품었을까. 그리고 레이몬드는 지금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을까.

캐런은 레이몬드의 머리를 열어 보고 싶어졌다.

대화재로 전소된 하이어 저택에서는 시체 두 구가 발견됐다. 톰은 결국 불이 난 저택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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