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그 기사
레이몬드 세이어테스. 캐런이 생각하는 남주인공.
레이몬드는 지금의 캐런과 같은 나이였을 때 군사 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2년 뒤 전쟁터에 참가했다. 레이몬드의 나라는 전쟁 중이 아니었지만, 가끔은 그런 일이 생기는 법이다. 다른 나라에 파병을 보내서 나라 대 나라로 체면을 세워 줘야 하는 그런 일들.
“하지만 전 명예롭게 생각합니다.”
명예로운 전쟁이라고. 캐런은 머나먼 이야기처럼 들리는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었다. 위로하기도 했었고, 그 이야기에 눈물짓기도 했었다.
하지만 좋은 이야기도 몇 번씩이나 듣고 나면 질리는 법이다. 캐런은 10년 만에 지겨워졌다.
어차피 캐런에게는 책 속의 일이다. 심지어 「캐런」과 상관 있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전쟁은 저 높은 백색산맥 너머의 일이었으며, 레이몬드를 꾸며 주기 위한 비극이었을 뿐이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용맹한 기사님이 있었답니다, 하는 이야기. 전설이나 신화보다는 가깝지만 매주 듣는 예배시간의 설교보다 먼 이야기.
용과 악마가 나오는 시대면 더 좋으련만. 옛날의 기사들처럼 창이나 칼이 아닌 총을 들고, 용을 쓰러뜨리는 것이 아닌 사람을 쓰러뜨리는 것이 재미없었다. 결국 동화책 속 이야기보다 재미없는, 그 정도의 무게였던 것이다.
“사랑을 하고 싶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이요.”
레이몬드는 가끔 밤중에 헐떡이며 일어났다….
“어떻게 생각해요, 이셀라?”
캐런은 이셀라의 몸을 닦으면서 물었다. 이셀라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캐런은 그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캐런은 은근히 이 새로운 고민 인형을 받은 것에 약간의 위안을 얻었다.
톰보다도 더욱 반응이 없는 식물 같은 이셀라였지만, 그녀는 톰보다 캐런에게 여러모로 의미 깊은 사람이었으니 나름대로 희귀품이라 하겠다.
“레이몬드 경이랑 커플로 나란히 두면 볼 만하겠네. 둘이 웨딩도 딴딴, 딴딴. 둘이서 아주 색깔도 맞추고 그러면 베르딕 씨도 만족하시겠지요.”
“…….”
“생각해 보니 둘 다 금발이네요. 레이몬드 경은 전쟁터에서 굴렀다면서 머릿결이 참 좋지요. 신기하기도 하지. 아, 남자들은 머리가 짧아서 그런 게 분명해요. 여자들은 머리카락이 기니까 그만큼 관리도 힘들고….”
캐런은 이셀라의 두피에 손을 넣어 거품을 만든다.
“…레이몬드 경은.”
그 남자에 대해 생각한다.
캐런은 그 뒤로 그를 계속 생각했다. 레이몬드 경은 명백하게 단둘이 있는 시간을 피했다. 사실 캐런도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주로 이셀라와 있는 이 시간에 넋두리를 늘어놓으며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대부분의 일과였다.
“머리에 금을 바른 것 같죠. 좀 재수 없던 게, 한번 내가 무슨 용품 바르냐고 물어봤는데, 황당한 얼굴로 ‘저는 아무것도 바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거 있죠? 그런데 그 눈빛이 어떻게 남자가 그런 거 하느냐. 이래서 참… 여자들도 머리를 짧게 자르는 게 유행이었으면 좋겠어요. 산맥너머 나라들에는 머리 짧은 여자들도 꽤 있다던데….”
캐런은 말하면서 남자처럼 머리가 짧은 귀부인들과 자신을 상상해 보았다. 너무나 현실성 없는 것 같았다. 전쟁이 아닌데 그냥 머리가 짧은 여자들이 많다니.
“하긴 좀 이상하려나. 단발이 유행하면 나중에는 막… 대머리도 유행하고 그러겠네.”
킥킥 웃으며 이셀라의 머리에 더운물을 끼얹는다.
“이셀라, 인형 놀이 해 봤어요? 난 했는지… 기억에 없네요. 모르겠어요. 기억이 안 나요…. 어릴 때 일은 정말 너무 옛날이라. 당신은 분명 많이 했겠죠. 당신이 쓰던 방에는 아직도 인형이 많더군요. 하나같이 고급품이었어요. 인형의 집은 대단한 골동품이더군요. 300년 전의 저택을 그대로 복원해 냈던데. 세세한 소품들도 정말 훌륭해요. 내부 장식은 현대식이어서 정말로 귀족의 집 같더군요. 그림들도 명화들의 복제를 작게 만들어 내었고, 심지어 책꽂이에는 그 작은 책에… 정말로 글과 그림까지 쓰여 있을 줄이야. 아이에게 쥐여 주는 용도가 아니라, 예술품으로서 유리함에 넣어 전시해야 할 것 같더라구요.”
“…….”
“실은 좀 꺼내 봤어요. 허락 안 맡아서 미안해요. 하지만 인형 맨몸이 어디까지 구현되어 있을지 궁금해서. 전부터 궁금했는데 기회가 안 났거든요. 예전에 만져 보다가 이셀라 양이 머리를 뜯었… 음… 그건 좀 아팠어요. 아무튼, 세밀하긴 했지만 거기까지 구현은 안 했더군요. 당연한가. 후후.”
캐런은 그 안의 인형들을 생각했다. 자신도 그 안의 인형 같다는 진부한 생각이었지만, 진부한 것이 보편적인 감상 아니겠는가. 자신과 레이몬드와 이셀라 전부 누군가의 손안에서 놀고 있는 인형이나 마찬가지라고. 상황이 움직이는 대로 만나고 헤어지고 사랑한다.
파란 유리알이 박힌 남자 군인 인형을 보면 레이몬드가 생각이 났다. 옷까지 레이몬드의 군복과 닮아서 더더욱 그가 생각났다. 실제 기사의 옷을 재현한 것이니 그럴 법했다.
“눈 색은 조금 다르긴 하지만요. 레이몬드 경과 많이 닮았더군요. 정석 미남이라 좀 전형적이긴 해요. 인형 같죠. 이목구비 뚜렷하고 키 크고 피부 좋고 몸도 좋고.”
그래서 캐런도 그가 남주인공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이제 와서는 자신이 정말로 「책」을 ‘읽었는지’조차 의문이지만. 캐런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사실 어머니로부터 비롯된 정신병에 대한 가설에 힘을 더 주고 있었다. 캐서린이 책 밖에서 왔다고 스스로 믿고, 자신의 딸인 캐런에게도 그런 식의 망상을 주입한 것이라는 가설.
그리고 낸시와 듈란은 영주의 적극적인 동조 아래서 자신을 정신병자로 만들었다는 말.
“스스로 이런 식으로 가정한다는 것도 웃기죠. 뭐라더라, 광인은 스스로를 광인이라 인지하지 않으니 광인이라 의심하면 광인이 아니라고 하는 거 진짜 웃기지 않아요? 개인적으로 갖는 의심 같은 게 뭐 그리 의미 있어? 하루에도 몇백, 몇천, 몇만의 생각을 하는지 알게 뭐야? 자신 스스로 생각하는 결론이 철학자들의 생각과 같다고 어떻게 생각하죠? 일반적인 대중과 광인의 생각의 기준을 어떻게 같이 놓나요. 철학자들은 광인이 아니잖아요. 그것을 어떻게 보장해요…. 그러니까 내가… 어머니 때문에 미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요.”
캐런은 무엇보다 그 확신이 필요했다. 누구라도 자신처럼 삶을 반복한다면 이 고통은 사라질까. 누구라도 자신과 같이 인생을 반복한다면 이 고통이 사라질까. 한결 고통이 덜할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하는 이 세상을 견디기엔 너무나 지독했다.
“…아니면 제가 죽으면 다 끝이죠.”
캐런은 이셀라의 머리를 수건으로 꾹꾹 눌러서 물을 짜냈다. 그리고 향유를 발랐다. 아르간 오일을 머리에 바르고 다시 더운물을 아래에 가져다 대어 증기를 쏘여 주었다.
“이렇게 열심히 다듬었으면 머릿결이 좀 개선되어야 만지는 사람이 보람이 있을 텐데…. 좀 힘내 봐요, 이셀라.”
“…….”
“이걸로 좀 나아지면 좋겠는데.”
캐런은 푸석하고 지저분한 색이 도는 이셀라의 머리를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장미수를 꺼내 이셀라의 얼굴에 바른다.
“이게 장미수 삼만 송이를 농축한 거라는데 진짜일까요?”
“…….”
“음. 그래도 이런 데서 당신이나 베르딕 씨가 속지는 않겠죠…. 아마도.”
“…….”
“당신이 외모로 내게 질투한다는 건 잘 알지만.”
캐런은 잠깐 일어나서 어깨를 두드렸다.
“으으, 온몸이 쑤시네. 결국 이번에도 시녀야. 이셀라는 아가씨고. 뭐, 그렇다고 베르딕 씨의 진정한 딸이 되고 싶은 건 물론 아니지만요.”
“…….”
“이셀라, 레이몬드 경을 사랑해요?”
캐런은 그것이 궁금했다.
“정말로 사랑해요? 온 힘을 다해? 그 사람이 아니면 죽을 것처럼? 아니면 그 사람과 같이 늙고 아이를 보고 서로 같은 날 눈을 감기를 소망해요?”
“…….”
이셀라는 대답하지 않는다. 캐런은 이셀라의 진정한 감정이 궁금했다. 부모님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진다. 사랑. 어쩌라고. 일시적인 감정이 얼마나 강렬하면서도 덧없는지 캐런은 잘 알았다.
자신이 광인인 걸 인지하는 것이 정말로 광인인지 아닌지 판단할 잣대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사랑 또한 캐런에게는 그러했다. 알 수 없다. 자신의 사랑이 남들의 사랑과 동일한지 어찌 안단 말인가. 답을 찾았다는 캐서린의 감정이 일반적인 사람과 같은지 어떻게 확신한단 말인가.
“사실은 사랑… 음… 그래요. 그… 저도 아버지가 있었죠. 어머니도요. 기억도 안 나지만… 이셀라 양의 어머니는 딱 한 번 만났죠. 그래도 이셀라 양이 어머니보다는 예뻐요. 이건 칭찬이랍니다. 아무튼 말이에요. 아버지가 말하기를, 사랑이 저를 구원할 거래요. 진정한 사랑이… 나를… 이 지옥에서 구할 거라고. 그런데 전 아직 지옥에 있어요.”
“…….”
“부모님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고 레이몬드 경과 저의 사랑은 사랑이 아닌 걸까요?”
“…….”
수액이 똑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조용한 방 가운데 그녀와 이셀라만이 존재한다.
이 공간은 지극히 평화롭다.
캐런은 눈을 감은 이셀라 옆에 엎드렸다.
“별 대단한 사랑도 아니더만.”
픽,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캐런에게 영주의 사랑은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랑이었다. 캐런은 동등하기를 원했다. 죽음과 동일한 무게를 갖는 사랑을 원했다. 완전한 이해와 믿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을 원했다.
이셀라는 저택에서 제일 조용한 공간인 맨 위층에서 잠이 들었다. 병적으로 새하얗고 조용하고 깔끔한 공간. 아무 반응도 없는 이셀라는 톰보다도 재미없는 대화 상대였지만 캐런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이셀라… 레이몬드는 당신을 싫어했어요. 아마 지금도 싫어할 거구요.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예전부터… 100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어요.”
캐런은 그 생각을 한다. 레이몬드는 철저하게 그녀를 위한 기사였다. 그리고 이셀라를 포함한 다른 여자들에게 잔인했다. 이번에도 역시 그랬다. 소녀들은 누구에게나 친절한 남자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만 친절한 남자. 모든 것을 다 가진.
“과연… 어떨까요. 정말로 내게만… 「캐런 하이어」에게만 상냥한 남자란…. 세상 전부에게 총을 들이대면서까지 하나만을 위한다면, 두 가지 중 하나겠죠. 그 하나가 너무나 소중하거나.”
캐런은 이셀라에게 겉옷을 입혔다.
“아니면 하나가 중요한 것처럼 보이기를 바란 것이라거나.”
그는 나에게 거짓 감정을 고한 것일까? 캐런은 레이몬드가 그렇게까지 자신을 위했던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정말로 한눈에 반해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했던 것일까? 그런 게 정말 가능할까?
“…어떨까요?”
눈을 감고 잠만 자는 여성이라 하더라도 매일같이 가꾸면 티가 난다. 캐런은 베르딕이 오는 시간에 맞추어서 화장까지 시켰다. 베르딕은 이셀라가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과연 어떨까요.”
이셀라의 목에는 큰 화상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큰 흉 덕분에 캐런이 내리친 상처는 가려졌다.
“…….”
“…….”
캐런은 조용히 이셀라의 얼굴에 베개를 덮어 보았다. 이대로 몇 분간 누르면 그걸로 끝이다. 방 안은 고요하다. 햇살이 방 안을 비추니 아름답다. 밝고 화사한 병동은 그야말로 천국 같은 조용함이 있었다.
“여기서 당신의 목을 조르면….”
베개를 들었다. 입술이 호선을 그린다.
“내 목이 잘리겠죠?”
그녀는 일어나서 창문을 열었다. 여름 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상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캐런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름다운 세상이다.
“날씨가 좋네요.”
캐런은 한밤중에 레이몬드의 방을 두드렸다.
“…숙녀의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캐런… 에반스.”
레이몬드가 말끝을 조금 더듬었다.
“이 이름은 아직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는군요.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내일 밤 정찬에 만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최소 열 명이 넘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슨 말을 하라는 건지. 캐런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잊은 것처럼 행동하는 레이몬드에게 기가 찼다.
“이만 문을 닫아도 되겠습니까? 좋은 밤 되시기를 바랍니다.”
“레이몬드 경, 사실 전 당신을 사랑해요.”
문이 열렸다.
레이몬드 세이어테스.
레이몬드가 문 사이로 찌푸린 얼굴을 내밀었다.
“그런 말까지 하면서 꼭 이 시간에 대화를 해야 합니까?”
“계속 피하시니까요.”
캐런은 레이몬드를 노려보며 문을 밀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감격에 젖어 눈물이라도 흘리려고 했더니. 표정에 상처받는군요.”
“눈물이라도 흘리면 이해할게요.”
“눈물에 젖은 차라도?”
“한 잔 주세요. 밤이 늦었으니 우유를 타서.”
문을 닫았다.
레이몬드는 몸을 돌려 물을 끓였다. 방 안에는 별다른 짐이 없었다. 옷장 안에는 옷이 세 벌 있을 것이고, 그 외에는 가방 하나에 전부 들어갈 짐들이었다.
탁자에는 시계와 장갑과 서류 몇 장, 워머에 싸인 뜨거운 물통이 있었다. 이셀라의 별장에서 쓸 만한 것이 아닌 둔탁한 형태의 군대용이었다.
무거운 짐은 제논이 든다 하더라도 지나치게 적었다. 그는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셀라의 별장은 그의 집이 아니니까. 언젠가 떠날 곳이니까.
이런 것까지도 분명 자신의 기억과 같은데. 아닌가. 익숙한 공간에 있는 사람은 익숙지 않았다. 캐런은 자신이 보고나서 생각을 끼워 맞추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기억하는 것에 대한 기시감인지 자신이 없었다. 멍하니 쳐다보는 시선을 다르게 해석했는지 레이몬드가 찻잔을 건네며 말을 했다.
“별다른 이유는 아닙니다. 이런 사소한 영역에서 베르딕 씨를 못 믿는 것도 아니고. 다만 휴대하기 편해서.”
묻지도 않은 변명을 하면서 뜨거운 물에 차를 우린다. 딱히 좋을 것도 싫을 것도 없는 무난한 차였다. 늘 즐기던 것이 없으니 약간 아쉽긴 했지만 대중적인 것들이 늘 그러하듯이 나쁘지는 않았다.
대화의 운은 레이몬드가 떼었다.
“요즘 베르딕 씨는 커피 사업에도 관심을 보이시더군요.”
“힘들걸요.”
캐런은 자신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 사업은 베르딕에게 그리 성공적인 일이 아니었다. 살롱에 이셀라가 가져갔었던 적이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몇몇 귀족들과 중산층들의 새로운 기호품 수준이었지 대중을 상대할 사업에 적합하지는 않았다.
레이몬드는 그런 캐런의 대답을 듣고는 의아한 듯이 물었다.
“왜죠?”
아, 이런. 캐런은 또 무심코 대답한 자신을 책망했다. 쓸데없이 아는 척했다. 어차피 이 대화는 중요한 것도 아닌데. 괜히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지적이나 하려고 들고. 결국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려워하지만 지적은 좋아한다는 말이 사실이었나. 자신에게 약간의 환멸을 느낀다.
“어두운 색이라 저급한 다른 것들과 섞어 팔기 쉬우니까요. 맑게 우러나는 차에 비해 속이기가 쉽죠. 대중들은 쉽게 신뢰하지 않을 거예요.”
“그건 자신에 대한 비유입니까?”
“아뇨, 그냥 잘난 척이에요.”
갑자기 허를 찌르면 놀랄 줄 알았니? 캐런은 덤덤히 대답했다. 레이몬드는 씩 웃으며 차를 입에 댄다.
“안 넘어오시는군요.”
“새삼스럽게 그러지 마세요. 제가 고백까지 해 가면서 문을 열었는데.”
“…대단하시군요. 손뼉이라도 치고 싶습니다.”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박수는 하지 않고 뜨거운 차를 마신다. 레이몬드는 먹는 것에 있어서는 그다지 까다롭지가 않았다. 이셀라는 꽤나 까다로웠지. 어쩌면 그런 것도 눈 밖에 났었던 걸까. 당신같이 곱게 자란 여자는 별로야! 하는 그런. 아니, 그럼 난 험하게 커서 좋은 거였어? 캐런은 잠시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표정이 재밌군요.”
“입맛이 까다로운 여자는 어떠세요?”
“…전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예의와 유머 속에 하고 싶은 말이 겉돌았다. 캐런은 장난스러운 대화 사이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시선을 느꼈다. 레이몬드가 저런 식으로 구는 건 그리 좋은 것이 아니다. 웃음 속에 칼이 있는 법이고 가벼운 사람과 가볍게 구는 사람은 전혀 다르다. 후자는 위험하다.
‘의심하고 있구나.’
무엇을? 어디까지?
캐런은 그것이 궁금했다. 캐런과 레이몬드는 한 공간에서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는데도, 서로 총을 머리에 대고 있는 것 같은 긴장감을 느꼈다.
탁.
찻잔을 내려놓고서 레이몬드는 일어섰다.
“한잔 더 하시겠습니까?”
“…….”
캐런은 아직 입에도 대지 않은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레이몬드도 약간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잔에 두 번째 물을 부었다.
“흠, 아무래도 좋습니다. 하도록 하죠, 대화.”
“그때 하셨던 얘기는 어떻게 된 거죠?”
“무슨 말이신지?”
역시나 레이몬드도 능청스럽다. 캐런은 자신이 했던 행동을 반복하는 레이몬드를 노려보았다. 캐런은 이런 장난을 계속 받아주기에 지쳤다.
“시치미 떼지 마세요. 이셀라 양에 관해 말씀드리는 거예요.”
캐런은 찻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어디까지 아는 걸까?
그리고 안다면 무엇을 원하는가?
왜 레이몬드는 지금까지 캐런이 알던 레이몬드와 다른가?
궁금한 것은 너무나 많았다. 캐런은 할 수만 있다면 레이몬드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었다. 자신이 여자인 것이 이럴 때는 너무나 화가 난다. 무력이라도 사용하고 싶은데 신체적으로 남자들이 우위에 있는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이런, 사랑을 속삭이는 밀회라고 하시더니. 그런 것이 궁금하셨군요.”
“…….”
“상처받았습니다.”
아직도 그런 헛소리를? 캐런은 결국 인상을 팍 쓸 수밖에 없었다.
“원하시면 옷이라도 벗을까요?”
“두 팔 벌려 환영하겠습니다…. 아니, 아니 됐습니다. 진짜로 벗을 필요는 없습니다.”
듈란이라면 냉큼 말없이 환영할 텐데. 결국 이 남자는 말은 뻔뻔해도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무른 점이 있었다. 최소한 캐런에게는.
“이셀라 양과 싸우셨지요.”
“…싸우긴요. 제가 일방적으로 맞았죠. 보셨잖아요. 이게 다 당신이 약혼녀 관리를 못해서….”
“그리고 발은?”
“그날 밤에 이셀라 양에게 밟혔죠.”
“결국 마지막으로 이셀라 양을 본 것은 당신 아닙니까. 마지막으로 언제 보셨습니까.”
이런 어설픈 유도를. 캐런은 긴장감이 식는 것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제가 아니죠. 듈란이에요. 왜 저에게 그 말을 하면서 의미심장한 척하시는지. 불쾌하네요.”
“…척이라. 재밌네요. 듈란 신관님은 그렇게 말을 하지 않으셨는데요.”
“…네?”
레이몬드가 과장되게 웃는다. 목소리가 껄끄럽다.
“하하, 그 표정, 재밌군요. 마치 둘이서 계략이라도 짠 것 같잖습니까.”
아니야. 잠깐만, 너무 빨라. 대화가 종잡을 수 없어. 듈란 이름을 꺼낸 건 실수였나? 그 뒤로 그는 직접 나타나지 않았다. 보웬이 말을 대신했다.
이셀라를 돌보며 속죄하라 하는 짧은 전언이었다. 그걸 중간에 가로챘나? 도청했나? 아니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 둘이 대화를 나누었나. 그게 그럴듯해. 듈란이 날 넘겼나? 말했다면 어디까지? 캐런은 머리를 숙였다. 어지러워.
“……!”
어깨가 세게 짓눌렸다.
“머리 굴리지 마십시오.”
레이몬드가 허리를 숙여 캐런과 눈을 마주했다. 녹빛 안광은 날붙이의 반짝임과 닮아 있었다. 입술은 여전히 호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그건 결코 웃음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제가 어디까지 아는지, 어떻게 말을 돌릴지 머리를 굴리지 마십시오. 취조하는 사람은 당신이 아닙니다.”
여기서 증거 없으면 취조할 생각 마라, 라고 하는 건 캐런에게 득이 아니다. 캐런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미 레이몬드는 확신하고 있다. 증거싸움을 하는 것을 원하는가? 하지만 그에게는 즉결 처분권이 주어져 있다. 그뿐 아니라 그저 재판석에서 증언하면 끝일 문제다.
레이몬드가 어디까지 아는지 모르니 이건 캐런에게 불리하다. 무엇보다, 뭘 원하는 거지? 캐런은 그것이 궁금했다. 이 남자는 지금 무엇을 얻어 내고자 하는가?
“이미 레이몬, 드 경이 답을 내리셨으면… 제게 왜 이러시는지 궁금하네요.”
“쉿.”
눈을 접으며 웃는다. 손가락이 캐런의 입술에 닿는다.
“…레이몬드, 경.”
“전 숙녀에게는 예의를 지키는 걸 좋아합니다.”
하지만 범죄자에게는 그런 게 필요치 않지요.
음성이 되어 나오지 않았지만 캐런은 그의 뒷말을 들은 것만 같았다.
레이몬드가 다시 몸을 세워 캐런을 내려다봤다. 그는 정말로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캐런도 마주 보고 웃으려고 했지만 웃음은 나지 않았다.
생각하자.
레이몬드를 생각하자.
전쟁에서 돌아왔고 이셀라를 싫어했고 캐런을 사랑한다고 했던 그를 생각하자. 불면증에 시달렸고 언제나 입 안에 자살하기 위한 독약을 넣고 다녔던 저격수를 생각하자.
그녀는 레이몬드를 안다. 지금 레이몬드를 잡기 위해 가장 좋은 제안을 해야 한다. 사랑 말고,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 같은 저 남자를 붙잡기 위해 가장 그럴듯한 것은 무엇일까?
캐런은 답을 내렸다.
“베르딕 씨를 증오하시는군요.”
지금 그에게 통할 가장 좋은 주제는 이것이다.
레이몬드는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차를 홀짝였다.
“딱히 그렇지는 않아요. 뭐… 제 인생을 아주 저당잡고 있는 분이죠. 유쾌하지는 않지만. 당신과 마찬가지일 뿐입니다. 얻어 낼 것도 많구요.”
“제가 왜 전쟁을 하고 있는 거죠?”
“왜 나만 살아 있을까요?”
“증오합니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증오합니다. 제 자신도.”
“사랑만은 내가 선택할 겁니다.”
복수만으로는 부족하다. 개인의 복수만으로는 그를 끌어내기 힘들다. 그의 증오는 좀 더 포괄적이고 더 넓었다. 그가 가장 듣고 싶어 할 말. 절대 거부하지 못할 제안.
“레이몬드 경. 백색산맥의 소모전은 끝낼 수 있어요.”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베르딕 에반스 씨가 루트엘라 공작가에 자금을 대 주고 계시니까요.”
“음… 캐런 에반스.”
레이몬드가 웃었다.
“전 알지 못하는 사람이 함부로 떠드는 걸 싫어합니다.”
검지가 캐런의 이마로 향했다.
“머리 굴리지 말라니까요.”
“베르딕 에반스 씨가 파산하면 그뿐 아닌가요? 전 그분을 증오해요.”
캐런은 그럴듯한 이유를 내놓았다. 버석버석 말라 버린 증오의 감정을 끌어 모았다. 몇 번이나 날 죽였지. 내 목을 몇 번이나 내리쳤지. 일부러 녹슬고 날이 안 드는 도끼를 가져왔었지.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제 아버지는 베르딕 씨 때문에 자진하셨어요.”
캐런은 눈을 깜박이며 레이몬드를 바라보았다.
“제가 어떤 사람이든,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둘의 공통점은 하나 아닐까요?”
레이몬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캐런은 레이몬드를 잘 알았다. 머리 굴리지 말라고 했지만, 이 말이 나온 이상 레이몬드는 캐런을 일방적으로 잡고 흔들 수 없다.
“베르딕 씨에게 복수하고 싶어요. 절 어쩌시려면 그 후에 해 주세요.”
당신이 원하는 것은 그것이었지.
당신이 내게 준 사랑은 그런 사랑이었겠지. 나를 사랑하고 베르딕을 증오하고, 이셀라를 혐오하는 것이 당신에게 합당한 일이니까. 순수한 사랑을 갈구했고 캐런은 꽤나 괜찮은 사랑의 대상이니까. 아름답고 가련하고 순수한, 레이몬드가 캐런에게 그러하듯이.
“…캐런.”
대답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레이몬드는 잠시 방 안을 오갔다. 저벅이면서 땅바닥을 쳐다본다. 그리고 캐런을 본다. 눈이 마주친다.
“당신이 해야 할 답을 알려드리죠.”
“하.”
“당신은 절 사랑하는 겁니다. 당신이 말했듯이.”
“…재밌네요.”
“그렇죠?”
“예, 저는 여자를 볼 때 얼굴밖에 보지 않습니다.”
“…….”
“그러니까 전 당신에게 반한 겁니다. 그래서 당신을 구한 거구요.”
“괜찮네요…. 제 얼굴이 설득력이 있죠.”
“그리고 당신은 절 사랑하는 겁니다. 당신이 말했듯이.”
“네.”
둘은 그렇게 사랑을 고백했다. 별이 빛나는 밤이었다.
아침의 새소리와 종소리가 괴롭다.
“아가씨, 아침이에요.”
“…응.”
“캐런 아가씨.”
“알아… 안다구….”
“그럼 베개에 얼굴 파묻지 마시고 일어나세요.”
“…….”
캐런은 욕을 삼키며 눈을 뜬다. 이런 식의 하루가 가장 싫다. 어찌할 수 없는 화, 육체적인 피로에 젖어 망치는 기분,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일들. 캐런은 이럴 때 자신이 순수한 잉크가 아닌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자각한다.
“너무 거창한 생각이야. 잠이 덜 깼어.”
“네?”
“사람이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역하다고 해야 하나.”
“네?”
“왜 사람은 태어나서 일을 하고 피곤함을 느끼고 죽는 걸까.”
“아가씨… 정신 차려요.”
“응.”
캐런은 도나가 건네는 물수건에 얼굴을 비빈다. 졸려서 죽을 것 같다. 요즘은 너무 일이 많아서 매일이 피곤하다.
“그냥 죽었으면.”
“…아가씨, 저 같은 하녀들은 한 시간 더 먼저 일어나는 거 아시죠?”
어이없다는 듯이 말하는 도나의 얼굴을 보며 캐런은 한숨을 푹푹 쉬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체력은 도나보다도 약한 것이 분명하다.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엄살 좀 받아 줘. 요즘 정말 피곤하거든.”
“네에. 어서 아침 식사부터 하세요.”
“진짜….”
캐런은 눈을 떴다.
푸른 새벽의 빛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서러움이 밀려온다. 이게 다 레이몬드 경 때문이야. 안 그래도 이 시기는 피곤한데. 베르딕의 집은 한 번도 편안한 적이 없었다. 이번에는 레이몬드가 도움을 주기는커녕 짐을 더해 주고 있으니, 더욱 힘들다. 캐런은 힘이 쭉 빠졌다.
“으, 추워.”
도나가 창문을 열자 싸늘한 공기가 밀려들어 온다. 얇은 잠옷만 입고 있던 캐런이 몸을 움츠리자 도나가 당황한다.
“창문 닫을까요?”
“아냐, 잠 깨야지. 창문 연 채로 먹을게.”
“네.”
도나가 트레이를 끌고 온다. 이셀라의 시녀로 있을 때는 상상하기 힘든 사치였다. 이것에 만족해야겠지. 캐런은 아침 만찬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눈앞에는 아침 치고는 꽤나 호화스러운 식사가 놓여 있었다.
메이플 시럽을 듬뿍 뿌린 두툼한 핫케이크는 신기할 정도로 부드러웠다. 접시 또한 일부러 데운 것이 분명한데, 그 증거로 아직도 따뜻했고 막 녹고 있는 버터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핫케이크 이외에도 먹을 것은 많았다. 방금 구워 낸 것이 분명한 스콘에는 큼직한 블루베리가 가득 박혀 있었고, 바삭한 토스트에는 과일 설탕 절임이 얹혀 있다.
“…살찔 텐데.”
“한 입씩만 드세요.”
“넌?”
“아가씨가 남기면 그걸 먹으려구요.”
“…응….”
“아, 아니에요, 다 드셔도 괜찮아요! 에반스 가문에서 먹을 것으로 돈을 아끼지는 않더라구요.”
“그래?”
캐런은 자신의 기억과 다른 것에 의아했다. 본인이 먹는 것이면 몰라도 하인들에게까지 그리 후했던가? 자신은 언제나 적고 볼품없는 식사를 했다. 남은 음식과 거친 음식들.
“네. 먹는 것은 잘 줘요…. 다른 게 힘들어서 그렇지.”
“예전에는 아꼈는데.”
“네? 어떻게 아세요?”
“…아니야. 그냥, 그런 이야기를 들었었어.”
어디서 이야기가 또 어떻게 달라졌을까. 캐런은 아침 식사를 내려다보았다. 이건 맛이 아니라 살을 걱정해야겠어.
가난한 집안이라면 한 가족이 일주일은 버틸 만한 양이었다. 또한 마실 것으로는 우유와 두 종류의 주스, 레몬을 띄운 물과 따뜻한 홍차도 있었다.
“…이 식사를 내가 하게 될 줄이야.”
이것이 에반스의 딸이 하는 식사다. 호화로운 식사를 한두 입씩만 먹는 것. 비록 하는 일은 이셀라의 간호라 할지라도 먹고 입고 자는 것은 지극히 호화스럽다,
“이런 것에 만족해야겠지.”
캐런은 차에 우유를 타서 들고는 창가로 다가갔다. 아침의 안개가 어슴푸레 차올랐다.
이 에반스 가문의 별장은 수도 외곽에 있었다. 하이어저가 있던 곳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호화스러운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밑을 내려다보자 애완용 백조가 호수에서 유유히 헤엄치고, 하얀 말들이 호숫가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어머나, 저기 기사님이네요?”
“…….”
캐런은 억지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냥 무시하고 싶었는데. 레이몬드가 먼저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역시 처음 보는 말에게 부끄러움을 탄다는 것은 거짓말이었어.”
에반스 가문의 것임이 분명한 말들의 등을 쓰다듬는 것을 보는 것을 보자 웃음이 나온다. 도나가 물었다.
“무슨 소리예요, 그게?”
“레이몬드 경이, 나한테 부끄러움이 많아서 처음 보는 말을 못 탄다고 했거든.”
“네에? 푸, 그게 뭐예요!”
“그래서 나와 마차를 같이 타야 한다고 우겼지.”
도나가 입을 떡 벌린다.
“세상에, 세상에, 그거 완전… 그거네요.”
“그치?”
그런 이야기야.
캐런은 밀크티를 마셨다. 설탕이 들어 있어서 달콤했지만, 차를 너무 우린 것인지 미묘하게 쓴맛이 감돌았다.
캐런의 일상은 바빴다. 낮에는 이셀라의 간병을 하고 밤에는 레이몬드에게 시달린다. 영양가 없는 나날들이 흘러간다.
“그러니까… 요즘은 말이죠. 고난의 장이에요.”
“…….”
캐런은 더러워진 천을 갈면서 이야기했다. 고약한 냄새가 난다.
“당신의 시중을 이런 식으로 들게 될지는 몰랐지만.”
“…….”
“결국 이 옷이라니.”
캐런은 거친 천으로 만들어진 하녀복을 내려다보면서 자조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진한 남색의 얇은 하녀복을 덮고 있는 새하얀 앞치마 천 위로 땀이 뚝뚝 흘렀다. 아침에는 서늘했는데 이제 낮은 완연한 여름이다. 캐런은 이셀라의 수액과 바늘을 갈기 위해 새것을 빼냈다.
“아얏!”
“…….”
앞치마 위로 피가 튀었다. 캐런은 자신의 손가락 끝을 세게 눌렀다. 피곤했나.
“…이건 못쓰겠네.”
캐런은 바늘을 버렸다.
“왜 표정이 그렇습니까?”
“베르딕 씨에게 바늘을 낭비했다고 혼났거든요.”
“너무나 가슴이 아프군요.”
“웃지나 마시죠.”
“…죄송.”
하지만 기사의 얼굴은 유쾌했다. 캐런은 짜증이 나서 들고 있던 지팡이로 바닥을 쿵 소리 나게 내리쳤다. 집 안에서는 몰라도 나갈 때는 아직 지팡이가 필요했다.
“언제쯤 낫습니까?”
“글쎄요. 이렇게 다쳐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요.”
“신관님께 가 보지 그러시죠.”
“…….”
“깜박했습니다. 진짜예요.”
캐런이 기가 차서 노려보자 레이몬드가 두 손을 들었다.
“하아.”
“아가씨, 오늘은 엘리엇 홀에서 열리는 자선 연주회에 참석해야 합니다.”
“거긴 계단이 많아서 싫은데.”
캐런은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 홀은 계단이 많아서 아직까지 지팡이를 써야 하는 캐런에게는 고문이나 마찬가지다.
“가 보셨습니까?”
“…들었어요.”
어떻게 알았냐는 물음에 가 봤으니까, 라고 대답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레이몬드는 집요했다.
“누구에게요?”
“길거리 요정에게요.”
“그것 참 신비롭군요.”
“그렇죠? 어서 타기나 해요.”
캐런이 마차에 오르는 것을 레이몬드가 잡고 올렸다.
‘피곤해.’
캐런은 매일같이 낮에는 베르딕에게서 일과를 검사 받고, 밤에는 레이몬드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약혼녀로서 같이 동행을 해야 할 곳이 너무나 많았다.
“내일 가야 할 곳은 어디였죠?”
“내일은 달튼 공작이 낭송회를 엽니다. 자작곡을 발표한다더군요.”
“그렇군요.”
“예.”
“…….”
“그리고 더 할 말 없습니까?”
레이몬드가 다리를 꼬며 웃는다.
“어떻게 할 건가요?”
“하아.”
“당신 말이 허세가 아니란 걸 증명해 보시죠.”
“아직은 때가 아니에요.”
“좋은 변명이군요.”
진짜거든. 지금은 정말로 할 것이 너무나 없었다. 고난의 장이란 말이다.
고통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고문은 친숙해지지 않는다.
그것이 더욱 괴로움이었다.
매일 쓸모를 증명해 내야 한다.
베르딕은 낮에 이셀라의 시녀로서의 쓸모를 보이게 했으며, 밤에는 이셀라의 대타로서의 역할을 강요했다. 거기에 레이몬드는 이미 힘든 그녀에게 거기에 하나 더 얹어 줘도 괜찮겠지? 그렇게 웃으며 턱하니 짐을 얹는다.
‘죽이고 싶다.’
아니다.
‘죽고 싶다.’
이대로는 시간이 없다. 낮밤으로 일만 잔뜩 하다가 1년이 끝나는 것은 너무나도 아쉬운 일이다.
‘원래의 이야기’라면 이 시기 동안 고난을 당하면서 레이몬드와 사교계의 인사들에게 동정을 사며 차근차근 사랑을 쌓아 나가야 하는 시간이다.
그것만 해도 시간은 훌쩍 지나가는데, 레이몬드는 베르딕의 몰락을 요구하고 있다.
‘솔직히 베르딕 씨 따위가 내 관심사는 아닌데.’
캐런은 이를 갈았다. 지금 캐런은 레이몬드고 베르딕이고 전쟁이고 광산이고 전부 내던지고 싶었다. 자기만의 이야기를 찾기에도 시간이 없는데 귀찮은 일이 너무나 많다. 이셀라와 시간을 보내야 했던 것처럼, 서커스장에 억지로 내려가야 했던 것처럼.
‘다 때려치우고 싶은데!’
어떤 방법이 없을까?
캐런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이셀라의 얼굴에 베개를 누르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야 했다. 자신의 참을성이 이렇게 약할 줄이야.
필사적으로 시간을 견뎌 내는 캐런과 달리 레이몬드는 그다지 참을성이 없었다. 쪽수로 치면 몇 장이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레이몬드는 캐런을 찌르고 있다.
“어머나… 고백 뒤로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잖아요? 너무 진도가 빠르시네요.”
“요즘 들어서 반지보다 팔찌가 눈에 들어와서 말입니다.”
“…….”
“은팔찌 좋아하십니까?”
그러니까 네 쓸모를 증명해 봐.
레이몬드가 웃는다. 캐런은 그의 얼굴에 총알을 박아 넣고 싶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말이죠, 지금 할 수 있는 건 딱히 없는데.”
“하하하.”
표정이 안 좋다. 캐런은 지팡이 손잡이를 잡고 마차에 등을 기댔다. 정말 이모저모 귀찮게 하는군.
“좋아요, 쓸모 하나를 보여 드릴게요.”
레이몬드가 손가락을 턱에 대며 물었다.
“연주라도 하실 생각이십니까?”
음악홀에 도착했다. 캐런은 레이몬드의 손을 붙잡고 내리면서 대답했다. 역시나 계단은 너무 높다.
“오늘은 말구요.”
정말 피곤하단 말이야.
그리고 캐런은 연주회에서 깊게 잠들었다. 어찌나 곤히 잠들었던지 연주가 끝난 후 레이먼드가 그녀를 툭툭 쳐서 깨울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요즘 들어서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제논은 레이몬드에게 탄창을 건네면서 말했다. 이셀라 에반스와의 약혼이 캐런 에반스와의 약혼으로 변하면서 레이몬드의 얼굴은 확연히 달라졌다. 제논은 지난 10년보다 최근 며칠간 그의 웃음을 더 많이 보는 것 같았다.
레이몬드는 캐런과 매일같이 시간을 보냈다. 그들을 부르는 곳은 많았고, 레이몬드는 누구든 거절하지 않고 캐런과 함께 방문했다.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철컥.
“그럴 리가.”
“정말입니다.”
하지만 캐런이 없으면 다시 원래대로의 모습이었다.
제논은 그것이 사랑에 빠진 남자의 모습인가, 생각하기로 했다. 그녀가 없으면 전과 다를 바 없든가, 아니면 더 말수가 적어지는 것 같았지만.
“남자가 사랑에 빠지면 얼간이가 되더군요.”
“제논, 자네는 내가 얼간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꼬마 레이라고 부르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나이 먹고 풀죽지는 말고… 쉿.”
철컥.
레이몬드는 총을 장전했다.
탕!
새들이 요란하게 소리를 내면서 날아간다. 털썩, 사냥감이 쓰러진다. 큰 숫사슴이다. 뿔이 굉장히 훌륭했다.
“빗나갔군. 내 실력도 죽었어.”
“맞지 않았습니까.”
“즉사는 아니잖나…. 쓸데없이 고통만 주게 되었군.”
“어차피 총을 맞으면 죽고, 고기는 먹히는 게 당연한 것을 뭘 그리 신경 쓰십니까.”
“실력이 떨어진 건 확실해.”
레이몬드는 중얼거렸다. 사슴보다 다른 곳에 집중을 하고 있었다. 제논은 그 이유를 짐작할 만 했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여자를 만나신 것 아닙니까. 흐흐, 이제까지 달라붙던 그 많은 여자분들이나 이셀라 님이나 다들 장난 아니었습죠.”
“제대로 된 여자?”
레이몬드가 제논의 말을 반복했다.
“캐런 아가씨 말입니다.”
“…하하.”
레이몬드가 제논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빤히 쳐다본다. 신기한 얼굴로 웃는다. 명백히 캐런과 있을 때의 화사한 웃음은 아니었다.
“아, 아닙니까?”
실수한 건가? 제논은 식은땀을 흘렸다. 제논은 레이몬드를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언제나 괜찮은 상관이었고, 괜찮은 귀족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자네가 그렇게 볼 정도면 뭐… 그게 맞겠지.”
“죄송합니다.”
“화를 내려던 것은 아니야. 그냥 내가 잘 하고 있다는 이야기지. 그녀도.”
둘은 쓰러진 사슴을 향해 다가갔다.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헐떡이는 사슴의 큰 눈이 왠지 부담스러웠다. 제논은 칼을 꺼냈다.
“…역시 숨이 덜 끊어졌군.”
“제가 하겠습니다.”
“아니, 내가 하지. 내 실수니.”
“예.”
레이몬드는 숨을 헐떡이는 사슴에게 다가가 머리를 끌어안았다. 몸을 단단히 고정시키고 속삭인다.
“쉬… 착하지.”
우두둑.
저 정도 크기의 사슴이면 힘이 상당할 텐데도 레이몬드는 별 힘도 들이지 않고 사슴의 목을 꺾었다. 짐승의 눈이 까뒤집더니 전신을 경련하다 점차 가라앉았다.
“털과 뿔의 상태가 상당히 괜찮군요. 머리는 장식으로 써도 될 것 같습니다.”
레이몬드가 사슴의 뿔을 보면서 레이몬드에게 물었다.
“제논, 사슴 머리는 괜찮은 선물인가?”
“설마 베르딕 씨에게 말입니까?”
안 그래도 이것저것 갖다 바친 게 많은데 뭘 그리 더 얹어 주시려고 하십니까. 제논은 베르딕의 탐욕스러운 미소를 생각하자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요즘 들어서 그는 식사에 더욱 집착하고 성격 또한 더욱 더러워지고 있었다. 레이몬드가 그에게 숙이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그럴 가치가 없는 남자다.
“그 사람에게는 고기로도 충분하지.”
그럼 설마 그 가냘픈 약혼녀에게 사슴 머리를 잘라 주겠다고? 제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역시 아직 청년이라 뭘 모르는군.
“…아닐 겁니다. 여우털이라면 몰라도 말입니다.”
“뿔이 이렇게 큰데.”
“어린 처녀에게 어울리는 선물은 아닙죠. 왜 전에는 잘 하시더니…. 이셀라 아가씨에게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냥 보석점에 가서 제일 비싼 걸로 고르십쇼. 가장 잘나가는 디자인으로, 거기에 꽃도 얹으면 완벽할 겁니다.”
레이몬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왠지 그 순간 어려 보여서 제논은 웃었다. 어설픈 것 같은 모습이 조금은 인간적이었다.
“왠지 그 여자는 이런 걸 좋아할 것 같더군.”
“…그러지 마십시오.”
이제까지 계속 괜찮은 선물을 고르고 매너를 지켰으면서, 캐런에게는 왜 이런 엉뚱한 짓을 하는 거지? 이것도 사랑에 빠진 남자의 특징인가? 자신은 젊었을 때 안 이랬는데. 제논은 머리를 긁적였다.
“사랑에 빠지신 것 같습니다.”
그럴 것이다. 그러니까.
이상할 정도로 웃고, 서로 속닥이고… 다치게 내버려두고?
제논은 머리를 흔들면서 잡념을 지웠다. 종자는 주인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레이몬드는 이제까지 한 번도 그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다 생각이 있는 것이겠지.
“본가에 전보를 부쳐 둘까요? 결혼하시면 더 이상 에반스 가문에 있지는 않으실 것 아닙니까.”
“음… 맞아. 시간이 흐르면 그렇게 되겠지.”
“남작님의 몸도 편찮으시니 레이몬드 님의 결혼을 고대하실 겁니다.”
“그 사람이? 글쎄.”
“형제시니까요.”
레이몬드는 어색하게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턱을 더듬는다.
“어이구, 정말 제대로 빠지셨나 보군요, 하지만 태도를 확실히 하는 게 여자들에겐 더 좋습니다. 괜히 기다린다거나, 머뭇거리는 건 안 좋습죠. 남자답게,”
“확실한 걸 좋아한단 말이지.”
“예.”
계속해서 정신이 약간 빠진 것 같은 레이몬드가 어색해서 제논은 고개를 돌렸다. 이런, 지나치게 멀리 나왔다. 묶어 둔 말이 너무 멀리 보인다. 저기까지 들고 가긴 귀찮은데.
“그런데 왜 여기까지 사냥을 나오셨습니까? 여긴 꽤 먼데요.”
둘이 서 있는 사냥터는 에반스 가문의 별장과는 꽤나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여름이라 사슴들에게 토실하게 살이 올랐지만, 별장 근처의 사냥터와 비교해서 유달리 좋은 곳은 아니었다. 대체 왜 여길 온 거지? 연애 상담이라도 할 줄 알았더니 레이몬드는 계속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는다. 눈치 보는 것도 지친 제논은 한숨을 쉬며 레이몬드를 향해 불평했다.
“이걸 들고 가려면 한참을 더 가야 할 텐데, 영 수지가 맞지 않습니다요.”
그리고 고작 사슴 한 마리라니. 제논은 뒷말을 삼켰다. 레이몬드의 사냥 치고는 처참한 성적이었다. 오늘 사냥을 가자면서 새벽부터 깨우더니 하루 종일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다.
“…확인할 것이 있어서.”
레이몬드는 장총을 들고 계속해서 숲과 풀밭 사이를 서성거렸다. 무엇인가를 찾는 것처럼 보였지만 도무지 무엇을 찾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제논은 하루 종일 자신이 대체 왜 여기 있는가 고민했다. 역시 사랑에 빠지면 저렇게 되는 건가?
“그 아가씨 말입니까? …헉.”
제논은 숨을 멈췄다.
비릿한 냄새에 처음 든 생각은, 명중.
하지만 그 사냥감을 잡은 것은 제논의 주인이 아니었다. 한 붉은 머리의 여자가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제논도 레이몬드도 일정 거리 이상 다가가지 않았다. 이미 다가가서 구해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피는 흥건했고 비릿한 냄새뿐 아니라 역하게 썩은 냄새가 났다.
시체다.
“윽”
“냄새가 지독하군. 얼마나 됐을 것 같나?”
“최소 3일? 의사에게 물어보아야 정확하겠지만, 그 전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렇지.”
레이몬드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총구로 여자의 시체를 뒤집었다.
꿈틀.
“지, 지금.”
“진정해라, 제논.”
여자의 입가가 찢어져 있었다. 명백하게 살해당한 여자다. 눈알도 사라져 있었다. 옷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고 배 부분이 푹 꺼져 있는 것이 옷 아래의 상황도 알 만했다.
꿈틀.
시체가 꾸물거리며 입을 쩍 벌렸다.
“뭐, 뭡니까?”
시체의 입 안에서 쥐가 튀어나와 찍찍거리는 소리를 내며 튀어나왔다.
퍽.
레이몬드가 돌을 집어 쥐를 맞췄다. 단말마의 비명 소리를 지르며 여자의 혀를 먹어치운 듯한 쥐가 죽었다. 제논은 역겨움에 속이 거북해지는 것을 느꼈다.
“제논, 노트를 줘.”
“대체, 이건,”
“진정해. 늘 보던 거잖아.”
“하지만 그건.”
전쟁터 였다. 그러나 여기는 그런 장소가 아니다. 평화로운 곳이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아.”
마치 시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온 것 같은 레이몬드다.
대체 눈앞의 기사는 왜 이곳에, 무엇을 알고 왔는가?
“제논, 아까 뭐라고 했지?”
“예, 예?”
“캐런 에반스 양 말이야.”
“네, 네.”
레이몬드가 총을 집어넣었다. 그 행동으로 제논은 레이몬드가 이곳까지 온 이유가 처음부터 이 시체를 염두에 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레이몬드의 입에서 나온 것은 생각지 못한 소리였다.
“내가 사랑에 빠진 것 같아.”
“그, 그러시군요.”
레이몬드가 사슴을 챙기면서 제논에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확실히 말해 두지. 그녀에게 접근하지 마.”
질투하십니까, 라는 농담은 죽어도 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