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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스페이드의 여왕 (10/31)

01. 스페이드의 여왕


 

“어차피 보이지도 않을걸.”

“안 보이는 부분까지 꼼꼼히 꾸미셔야 태가 나는 법입니다.

“…발가락 끝은 좀.”

새벽부터 식사도 못하고 이게 무슨 짓이람.

캐런은 간지러워서 자꾸만 움츠러드는 발끝을 움찔거렸다. 관리사가 따뜻한 수건으로 발을 감쌌다. 달튼 공작이 여는 낭독회는 좀 더 신경을 써야 한다. 「캐런」의 일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에반스」로서. 베르딕이 보낸 관리사는 캐런의 발끝을 마치 있을 수 없는 것을 보는 듯이 응시했다.

“금가루를 올릴까요, 아니면 그냥 물만 들이시겠어요?”

금을 발끝에 칠하다니 좋긴 좋구나. 호사스럽기도 하지. 낮에는 오물을 만지더라도 밤에는 발에 금을 칠한다. 마법 같은 변화를 캐런은 매일같이 겪다 보니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도나가 옆에서 부채를 부치면서 캐런의 모습을 부러운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예전에는 캐런이 저기에 서 있었는데, 그럼 나중에는 도나가 주인공이 되나? 캐런은 그런 상상을 하며 실없이 웃었다.

“에반스 아가씨?”

“금으로 해 줘.”

“금 위에는 무슨 장식을 올릴까요?”

“무엇이 있지?”

“작은 다이아를 올리실 수도 있고, 루비를 부순 것도 있어요.”

발이 아프지 않을까? 캐런은 약간 두려웠다. 아직도 발은 낫지 않았다. 구두를 신는 것도 힘이 드는데. 발등에는 구멍이 나 있는데 발끝에는 보석을 얹는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어차피 구두 안에 들어가는데 필요 있겠니?”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안 보이는 부분까지 꼼꼼히 챙기셔야 진정한 아가씨의 모습이 되는 거랍니다.”

“나보다 더 잘 안다?”

“…….”

이제는 대꾸도 안 하는군.

이셀라는 매번 이걸 다 했을까. 시녀로 있을 때 그녀가 관리를 받고 꾸미는 것은 보았지만, 이셀라는 그런 일들에 항상 익숙했고 지시를 내리는 것이 취미이자 일상이었다. 캐런은 레이몬드나 다른 귀족 남자들의 애인 노릇을 하며 갖가지 사치를 누렸지만 에반스 가문에 있을 때처럼 피곤한 적은 없었다. 다른 때는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됐으니까. 더부살이가 이렇게 힘들다.

“내가 양녀라고 무시하니?”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피곤하긴 한가 보다. 나이도 먹었으면서 구슬리지 못하고 말이 자꾸 뾰족하게 나온다. 미리 잠을 많이 잤어야 했는데, 캐런은 한숨을 쉬었다. 캐런은 피곤으로 움찔거리는 눈가를 문질렀다.

“발끝을 치장하는 동안 얼굴에 팩을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냥 너희들이 알아서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도록 말이야. 하지만 에반스 가문에 고용된 관리사들은 냉정했다.

“뭘 모르시는군요. 주인이 모든 것을 관리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러니?”

캐런은 주인의 태도에 대해 가르치는 관리사의 말이 재밌었다. 전에 시녀로 있을 적에는 그럭저럭 잘 지냈던 여자들이다. 다들 이셀라 에반스의 짜증과 신경질에 지쳐 서로를 위로하고 술잔을 기울였던 여자들. 그런데 위치가 변하니 이렇게 다르다.

“그렇구나.”

그렇다고 뭘 어떻게 할 엄두도 나지 않지만.

캐런은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그냥 지금이라도 좀 더 자고 싶은데. 하지만 그 소박한 소망은 또 다른 피부 관리사가 와서 캐런의 얼굴에 약초를 섞은 팩을 얹자 깨졌다.

“…차가워.”

“눈 밑이 어두우시군요. 좀 더 관리가 필요할 것 같아요.”

“…응.”

캐런은 피부 관리사를 기억한다. 제인이었나? 술을 좋아하고 알코올이 피부를 좋게 해 주는 것이 분명하다는 이론을 펼쳤지. 나이도 꽤 있어서 업계에 잔뼈가 굵었고 베르딕에게서 가게를 받아 관리하기도 했었다.

“피부도 거칠고, 머리도 붉은 머리라니… 가발을 쓰는 것은 어떨까요?”

사람이 이리 재밌다. 캐런은 명백하게 자신을 누르려고 드는 여자를 바라보며 힘없이 웃었다. 나중에 독약을 탈까? 하지만 집 안에서 그러면 바로 베르딕과 레이몬드에게 들킬 것 같다. 이제는 어떻게 놀지? 여기는 사람이 정말 너무 많단 말이야.


 

“그 입 좀 조심하시죠?”

도나가 입을 삐죽이며 제인에게 화를 냈다.

너도 참 열심이다. 베르딕의 별장에 있는 하녀들 사이에서 도나와 세라 등, 캐런 밑에 있던 하녀들은 이리 저리 치이고 있음이 분명했다. 원래대로라면 하녀들은 에반스 가문에 올 필요도 없는데.

캐런은 약간의 책임감과 죄악감을 느꼈다. 남자 하인들은 듈란의 목사관으로 갔지만, 하녀들은 대부분 잘렸고 캐런과 가까운 몇몇 하녀들은 에반스 가문에 재취직되었다. 하지만 명백히 필요 없는 과잉 인력인지라 열심히 눈칫밥 먹으며 부려 먹히는 것이다.

“친정에서 데리고 온 하녀인가요?”

관리사는 도나의 얼굴도 보지 않고 물었다. 모를 리가 없는데 모르는 척하면서 묻는다. 온 지 벌써 꽤 됐는데 유치하다.

“응.”

“이제까지 보던 시녀 중 가장 경박하네요. 원래 시녀는 저런 아이가 하는 것이 아닌데.”

도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뭐, 뭐라구요? 이봐요!”

“그만, 그만.”

캐런은 한숨을 쉬면서 손을 내저었다. 피곤하기 짝이 없다. 정말이지 한 번에 한 이야기로 집중을 했으면. 레이몬드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아픈데 하녀들의 알력 싸움에까지 얽히는 것은 사양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아가씨!”

도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나 진짜 졸려 죽을 것 같아. 레이몬드 경 올 때까지는 아무도 날 깨우지 마. 오늘은 정말 피곤하면 안 된단 말이야.”

하지만 관리사는 입을 비죽였다.

“하지만 에반스 아가씨, 이 시간 이후에도 에반스 아가씨… 그러니까, 진짜 에반스 아가씨를 돌보러 가셔야 하는데요?”

도나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캐런 아가씨를 좀 쉬게 내버려 둬요. 가정부에게 내가 말할 테니까!”

모범이 되는 하녀다. 하지만 그녀의 외침이 별 소용이 없음을 안다. 돈이라도 더 얹어주고 싶건만 캐런에게는 자신이 쥘 수 있는 돈도 없었다. 전부 베르딕의 것이니. 이번 일이 끝나면 돈이라도 쥐여 줄까? 그러고 보니 도나는 이제까지 어떻게 됐었더라.

“…에반스 아가씨. 저 여자에게 간호를 할 만한 지식은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주인님이 확실하게 캐런 에반스 아가씨가 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캐런은 한숨을 쉬면서 가운을 벗었다. 그리고 하녀들이 입는 거친 천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었다. 밤에는 또다시 화려한 드레스를 입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래.”

다 죽어 버려라.

“대체 뭘 보여 주실 건지 궁금하군요.”

“그것보다 드레스부터 칭찬하셔야죠.”

“당신의 안목에 매일 감탄합니다.”

사실 입히는 건 전문가들이었지만. 캐런은 고를 정신도 없었다.

“드레스만요?”

레이몬드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웃음을 참는 건지 화를 참는 건지 어려운 얼굴이었다. 어서 연인처럼 굴어야지. 옆에서 도나가 닭살 돋는다는 얼굴을 하고 있잖아. 관객의 기분을 맞춰주라고.

레이몬드가 캐런의 손등을 들어 키스했다.

“아름답습니다. 언제나처럼… 이라고 하고 싶지만, 많이 피곤해 보이는군요.”

“…진짜요? 도나.”

옆에서 비슷하게 피곤이 역력한 도나가 재빠르게 물건을 건넨다. 낭만적이라면서 호들갑을 떨 만도 하건만 이제는 역력히 노동에 지친 모습이 신경 쓰인다. 설마 자신도 저런 모습인가? 캐런은 자신이 아름답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안다. 하녀는 조금 못생겨도 괜찮지만 자신에게 가장 큰 무기는 얼굴 아닌가. 조금도 아니고 많이, 라니. 눈 밑이 새까맣고 화장은 떠 있는 그런 상태란 말인가.

“여기요, 아가씨.”

캐런은 급하게 손거울을 꺼내 거울을 바라보았다. 화장은 완벽했다.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매일매일 달라붙는다. 그다지 큰 문제는 없었다. 캐런은 자신의 외모를 객관화할 줄 알았다. 언제나처럼 화사했다.

뭔 시비야? 캐런이 짜증이 역력한 얼굴로 레이몬드를 노려보자 약간 변명하듯이 말한다.

“화장의 문제가 아니라, 기색의 문제입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어요. 목소리는 지나치게 들떠 있고.”

그런 문제였나. 캐런은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거울을 도나에게 건넸다. 그런 문제는 큰 문제가 아니다.

“안 자려고 커피를 너무 마셨거든요. 괜찮아요. 이 정도는 별문제 아니에요.”

“차라리 그냥 들어가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낭송회가 끝나고 들어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제대로 된 결과를 보지 못하면 의미가 없습니다.”

“상냥도 하셔라.”

캐런은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애써야 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캐런은 치맛자락을 들고 웃었다.

답안지를 미리 보고 온 사람은 시험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패를 아는 도박사는 돈을 걸길 주저하지 않는다.

“기대하세요. 사실 전 마법을 부릴 줄 알거든요.”

“캐서린?”

그때와 조금도 변화가 없는 모습이었다. 언제나 아름답고, 우아한. 새빨간 머리가 눈에 선하다. 그 모습 그대로. 유월의 장미, 여름의 신록, 요정, 여왕, 그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저 여자 앞에서는 어색하지 않다. 언제나처럼 다가와 상냥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다. 옆의 남자가 아니었다면 하마터면 아인은 실수를 할 뻔했다.

“오랜만입니다, 아인 남작님.”

화려한 금발의 남자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아인은 젊은 청년의 악력을 느끼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레이몬드 경, 오랜만이군. 알았으니 놓아주게나. 손이 아프다네.”

“어머나.”

붉은 머리의 미녀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쿡쿡 웃는다. 아인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저 나이대의 여자는 이제 자신의 딸뻘이다. 약간 우울해진 아인에게 그녀가 인사한다.

“어머니와 닮았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어요. 캐서린 에반스입니다.”

“아, 아아. 그, 그렇군. 그… 소문의.”

아인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다. 땀이 흐른다. 아, 젠장. 이게 무슨. 그럴 리가 없지. 세월이 얼마나 지났는데. 자신은 이제 그런 나이가 되었다. 추파를 던지면 주위에서 가벼운 비웃음을 떠나 진지한 경멸을 당하는 나이.

“참으로 닮았지요? 저도 보면서 깜짝 놀랐다니까요.”

“그렇군요, 레이디 엘바.”

“낭송회에서 졸지는 않으셨나요?”

“어찌 그런 소리를. 공작님의 자작시가 훌륭했습니다. 물론 지난번보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말하시는 부인이야말로 홀로 어쩐 일이신지?”

아인 남작과 검은 머리의 백작 부인. 둘은 오랜 지인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원수였고, 가끔은 한패였다. 그 줄을 묶어주는 공통된 취미만 아니었다면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둘은 도박 중독자들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엘바는 지난번에 크게 파산한 적이 있었지만 아인은 그렇게 실패한 적이 없는 꾼이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둘이 같지는 않지. 아인은 엘바 부인이 딸과 남편 없이 나온 것을 지적했다. 유부녀가 혼자 다니는 건 결코 미덕이 아니니까. 유부남과 유부녀는 다르다.

“남편은… 아이가 아파 홀로 왔어요.”

“그런데 나오셨군요?”

아이가 아픈데도 말입니다. 엘바의 얼굴이 약간 굳었다.

“…….”

“어머나, 심한가요?”

얼굴이 점점 벌겋게 변하는 백작 부인에게 재빨리 캐런이 근심을 표현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엘바 백작 부인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캐런, 나중에 우리 집에 방문해 주겠니? 아이가 보고 싶어 하더구나.”

“물론이죠. 어서 건강해졌으면 좋겠네요. 언제쯤 방문하는 게 좋을까요?”

“후에 전보를 부치도록 할게. 네 엄마를 닮아 상냥하구나.”

“어머니에 대해 잘 아시나요?”

“나보다는 아인 남작님이 잘 알 것 같은데?”

“정말요? 잘 아시나요?”

소녀가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웃는다. 아인은 손을 잡았다. 제 모친을 쏙 빼닮은 캐런은 도박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리 잘 아는 건 아니란다.”

“어머나, 모르는 척하시긴. 그때 꽤나 쫓아다니던 거 기억하거든요? 귀즈 왕세자님만큼은 아니었지만 당신도 꽤나 집요했죠.”

엘바 백작 부인이 참견을 하며 웃는다. 저 여자는 나이 먹어서 집 안에 처박힐 생각은 안하고 오만 곳에 주둥이를 내민다. 빌어먹을. 아인은 머쓱하게 대답했다.

“젊었을 때 일이지요.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그때 캐서린을 쫓아다니지 않은 남자는 없을 겁니다.”

미녀를 마다하는 남자는 없지만, 그래도 그중에서 아인은 빨리 현실을 받아들이는 남자였다. 캐서린 같은 화려한 여자보다 좀 더 수수하고 가진 것 없는 부인을 맞아들여서 자존감을 채우는 것이 자신 같은 남자의 행복이니까. 그리고 그의 선택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하긴, 지나치게 예뻤죠. 아깝구나, 캐런. 레이몬드도 괜찮지만 여자는 자고로 여러 남자를 거느리면서 골라야 하는데 말이야.”

“어머나, 그러게요.”

캐런이 꺄르륵 웃는다. 반면에 레이몬드는 굳은 얼굴을 했지만, 어디까지나 가벼운 장난 정도였다. 씩 웃더니 캐런의 팔짱을 끼며 과시한다.

“절 앞에 두고 너무하십니다.”

“어머나, 레이몬드 경. 당신은 행복한 줄 알아야 해요. 캐런이 캐서린처럼 데뷔했다면 적어도 열 번은 결투 신청을 받았어야 했을걸요.”

캐런이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로 엘바 백작 부인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결투에서 이기셨나요?”

“네 아버지는 더욱 현명하셨단다, 캐런. 총과 돈이 아닌 웃음을 주었지. 아인 남작은 너무나 잘 알겠지만.”

아인은 불쾌감이 밀려왔다.

“그건 동의 못하겠습니다. 엘바.”

엘바가 꼬리를 잡았다는 표정으로 접이식 부채를 소리 나게 펴며 입을 가렸다.

“졌으면 더 이상 말하는 거 아니에요. 캐런, 나중에 아인 남작님께 어머니에 대해 더 물어보렴. 많이 알려 주실 거야.”

이년이.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자 젊은 남녀가 눈치를 본다. 아인 남작과 엘바 백작 부인은 서 있는 곳이 뒷골목이었다면 서로 총을 들고 머리통을 쏴 버렸을 것이다. 결국 뒷정리는 레이몬드가 시작했다.

“전 운이 좋군요. 평화롭게 캐런의 사랑을 얻었으니 말입니다. 아인 남작님 같은 분들이 많다면 도무지 자신이 없어집니다.”

“어머나, 레이몬드 경도 참.”

“…하하, 레이몬드 경. 자네는 뭘 좀 아는군. 하지만 나도 이제는 캐서린 같은 타입의 여자는 취향이 아니라고. 자네도 알게 될 거야. 여자의 미모는 한철이지.”

“캐런은 얼굴만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완벽하죠.”

“그, 그만해요. 레이몬드 경.”

캐런이 레이몬드의 팔에 매달려 그의 자랑을 말렸다. 주변 사람들이 부끄러울 정도의 찬사에 수줍어 어쩔 줄을 모른다.

“그건 자네가 뭘 몰라서….”

아인 남작은 말을 멈췄다. 결국 자신을 변호하면 캐서린을 깎아 내리게 되고, 이어서 캐런과 레이몬드에게 모욕을 주는 셈이 된다. 젠장, 더 이상 말을 못하겠군.

“풉.”

엘바 백작 부인이 비웃었지만 사실이었기에 더 이상 반응하지 않았다. 머리가 아프다.

“저 아이는?”

“제 친정 하녀예요. 이제는 시녀 노릇을 하고 있지요.”

“그렇군.”

이제는 저런 쪽이 더 좋다. 아인은 화려한 캐런 옆의 주눅 든 하녀에게 눈을 돌렸다. 소녀 같은 매력이 있었고, 화려한 저택에 주눅이 들어 있는 모습이 풋풋했다. 나이가 들수록 화려한 미인보다 저런 아이가 눈에 들어온다.

“…윽.”

아인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시선을 피한다.

“후후.”

여자는 적당히 수줍음을 타는 게 제맛이다. 엘바 백작 부인처럼 자신이 대단한 여장부인 것으로 착각하는 도박 중독자가 아니라.

“아인 남작님?”

“으, 응?”

머릿속으로 온갖 상상을 하던 아인에게 캐런이 물었다.

“어머니는 참으로 유명하셨나요?”

“그렇지….”

“아인 남작님도 좋아하셨어요?”

“아인 남작님. 득남을 축하드립니다. 그저께 신문에 실렸더군요.”

“보았나? 하하, 좀 부끄럽군. 아내 나이가 워낙 많아서 말이지.”

유부남인 아인에게는 실례되는 질문이다. 레이몬드가 끼어들어서 그 사실을 일깨우자 캐런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이 든다.

“앗… 죄송해요!”

“괜찮아.”

그렇다고 화내기도 머쓱한 세월이다. 그녀의 딸이 다시 그녀처럼 사교계에 데뷔할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그나마 아인에게 실수한 것이 그녀로서는 다행일 것이다. 또 다른 구혼자는 세월이 선물하는 여유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아인은 세월이 선사하는 심술을 부리고 싶어졌다.

“나보다는, 귀즈 왕세자께서 유명했단다. 널 보면 꽤나 좋아하실지도 모르겠구나.”

캐런이 시선을 홀로 돌리면서 물었다.

“귀즈 왕세자께서는 이번에도… 오늘 오셨나요?”

“낭송회는 그분의 취향이 아니거든.”

“귀즈 왕세자에 대해 아십니까?”

“레이몬드 경은 아세요?”

“잠시 참전하셨던 적이 있으셨습니다.”

레이몬드의 얼굴이 약간 굳었다. 알 만하군. 하지만 그가 끼면 재미없는데. 다행히 그 순간 엘바 백작 부인이 끼어들었다.

“귀족의 귀감이죠. 누구누구와는 다르게.”

퍽이나.

귀즈 왕세자의 아랫도리가 어떻든, 그의 취미가 어떻든, 그런 것은 부인들에게는 그리 알려지지 않는 이야기다. 아인은 엘바 백작 부인의 평가에 웃음이 나오는 걸 참기 위해 애써야 했다. 남자의 의리다.

문제는 레이몬드가 자신의 약혼녀를 막을 것인지 정도인가? 아인 남작은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는 캐런을 보며 캐서린이 그대로 서 있는 것 같은 섬뜩함을 지울 수 없었다. 귀즈 왕세자 또한 그럴 것이다.

“언제 그분을 뵐 수 있을까요?”

“…캐런.”

“네?”

레이몬드가 캐런의 팔을 살짝 당겼다. 저런, 안 됐군. 아인은 내심 킬킬 웃었다. 여기서 자신이 밀어 붙여 줄 필요가 있다. 아인은 자신의 옛날 연적에게 선물 하나를 주고 싶었다. 상원 의원의 자리가 하나 비어 있었다. 저 정도면 괜찮은 선물이 되겠지.

“음, 그럼 이건 어떻겠니?”

“네?”

“나와 게임을 하자꾸나. 오늘은 영 심심해서 말이야. 날 이기면 널 데리고 가마.”

“아인 남작님.”

레이몬드가 나직이 불렀지만 아인은 캐런만을 쳐다보았다.

“제가 지면요?”

넌 이길걸?

아인은 웃었다. 널 데려가서 던져 주면 좋아할 텐데 내가 왜? 이기든 지든 캐런은 귀즈 왕세자에게 갈 것이다.

“너는… 글쎄.”

아인은 캐런의 화려한 장신구를 보았다. 에반스 가문으로 입적된 것을 자랑하는 듯한 옷차림이었다. 저 정도면 분명 돈 몇 푼 정도는 기꺼이 걸겠지.

“약간의 돈을 걸자…. 어디보자, 시작은 이 동전 하나로 할까?”

아인은 은화를 꺼냈다. 이 정도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겠지.

“네! 좋아요.”

무엇이 좋을까? 아인은 캐런의 얼굴과 뒤의 하녀를 훑었다.

“캐런, 도박은 좋지 않습니다.”

“흠, 흠.”

엘바 백작 부인이 헛기침을 했다. 바로 그 ‘좋지 않은 행위’의 찬양자가 그를 노려본다. 엘바 백작 부인의 눈초리에 레이몬드는 차선책을 제안했다.

“정 원하신다면 제가 대신 하겠습니다.”

“세상에, 레이몬드 자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도박에 대타가 어딨어?”

“아직 어립니다.”

레이몬드를 밀고 캐런이 들뜬 얼굴로 나섰다.

“괜찮아요, 레이몬드 경. 저 카드 게임 잘해요.”

“오오, 멋지군. 역시 새로운 시대에는 캐런 양 같은 여자가 필요하지.”

아인이 두 팔을 벌려서 새로운 얼굴을 환영했다.

어째서?

아인 남작은 눈앞의 카드를 보았다.

붉은 스페이드의 여왕이 놓여 있었다.

“게임이 끝났습니다.”

공작가의 하인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끝을 고했다. 200점의 차이가 났으니 게임은 끝이 났다.

“그렇게 큰 소리 치더니.”

누군가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어머나….”

엘바 백작 부인은 알 수 없는 탄성을 질렀다.

“어, 어떡해요 아가씨.”

시녀는 울먹거렸다.

“저런….”

“도… 도나. 어떡해?”

캐런은 당황한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울먹이는 소리와 한숨, 찡그림이 이어졌다. 소녀 둘은 울상이 되었다. 동동거리는 얼굴이 보는 사람의 애처로움을 자아낸다. 하지만 아인은 그저 멀거니 카드만을 쳐다보았다. 아직도 아인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결과는 났다.

캐런은 졌다.

“하아.”

레이몬드는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는 오히려 약간의 안도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캐런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소란은 잔잔하게 홀 안으로 퍼졌다. 탄식과 비웃음이 공간을 감돌았다. 그 비웃음은 몇몇은 캐런을 향한 것이었고, 대부분은 아인 남작을 향한 것이었다. 그녀 또래의 몇몇은 재밌어 했지만, 대부분의 귀족들(특히 아인에게 돈을 잃은 적이 있는 자들)은 아인 남작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열일곱 살짜리 영애에게 저 거금을 따내다니.”

“정말이지 너무하네요.”

“못 봐줄 정도군요.”

아인은 40대의 유명한 도박꾼이었다. 그 같은 자가 자신의 정체를 속이고 게임에 참가하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다. 심지어 상대가 아인의 애송이 시절 쫓아다니던 캐서린의 딸. 열일곱 살의 갓 데뷔한 캐런을 이긴다는 건?

“정말이지 너무 하네요, 아인 남작님.”

“그러게 말입니다.”

엘바는 만족스럽게 부채질을 했다. 캐런이 큰돈을 잃었어도 에반스 가문의 막대한 재산을 생각하면 극히 사소한 돈이었다. 그래서 엘바 백작 부인은 가볍게 캐런을 위로하고는 기꺼이 아인의 비난에 동참하며 즐거워했다.

“어떠신가요? 돈을 얻어 내서 즐거우신가요?”

“전….”

아인은 멀거니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그 속삭임들이 귀에 울려 퍼졌다. 아인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아인은 이겼다.

분명 지려고 했는데.

“마법을 보여 준다더니.”

“기대에 못 미치나요?”

“예.”

“실망시켜서 죄송해요.”

캐런은 고개를 숙이고는 발코니의 난간에 올라앉았다. 여름의 밤하늘은 별빛이 쏟아질 것처럼 화려하고 아름답다.

“위험하니 내려오십시오.”

“왜 절 걱정하세요?”

“그야 눈앞에서….”

캐런은 레이몬드의 얼굴을 보았다. 레이몬드의 등 뒤의 홀 안에서는 연회가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다. 음악소리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레이몬드의 얼굴은 그 빛을 등지고 있어 잘 보이지 않았다.

“난간 너비가 두꺼워서 괜찮아요.”

그리고 어차피 그 전날까지는 어지간해서는 죽지도 않고 말이지. 캐런은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래에는 잘 관리된 정원수가 있었다.

“여기서 떨어져도 저 나무에 걸리지 않을까요?”

예전에는 그랬는데.

“쓸데없는 모험은 하는 거 아닙니다.”

“아니면 레이몬드 경이 구해 주려나?”

“캐런, 궁금하면 시도해 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음….”

캐런은 그만두기로 했다. 레이몬드의 얼굴을 정확하게 볼 수 없었지만 괜히 시험했다가 가슴이 아플 것 같았다. 그냥 쿵, 하고 머리가 깨져 죽는 거지. 캐런은 킬킬 웃으며 난간에서 내려왔다.

“아야.”

“그러게 뭐라 했습니까.”

“으….”

캐런은 내려오던 중 높은 구두 탓인지 발목을 접질렸다. 눈물이 핑 돌았다. 의지로 막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캐런은 신음을 참으며 주저앉았다.

“도무지 서 있기가 힘드네요.”

“…발목을 삐셨습니까?”

“네. 부끄럽지만 구두를 벗어도 될까요?”

“부디 편하실 대로.”

캐런은 조심조심 황금빛 구두를 벗었다. 그리고 스스로도 악취에 얼굴을 찌푸려야 했다. 여느 아가씨들이라면 부끄러워서 끝까지 참고 있을 만한 냄새였다.

“심하군요.”

“안 씻어서라고는 하지 말아요.”

“그 정도가 아니라….”

레이몬드는 캐런의 발을 보더니 한 쪽 무릎을 꿇고 몸을 숙였다.

“‘그’ 상처입니까?”

“이셀라 에반스 양의 구두는 강철로 만들어져 있었던 것 같아요.”

“…음.”

“저, 발을 내려 주시겠어요?”

좀 부끄럽다. 상처가 심한 부위라지만 평상시 보여 줄 만한 곳은 아니다. 캐런은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에도 약간 놀랐다. 그러고 보면 막 나가 본다 하더라도 길거리의 취객처럼 옷을 벗고 돌아다니는 짓은 하지 않았다. 역시 자신은 아직 멀었나. 속으로 온갖 망상을 하며 웃음을 참는 캐런과 달리 레이몬드는 꽤나 심각한 얼굴이었다.

“뭐가 그렇게 심각해요?”

“이 구두는 당신에게는 너무 큰 것 같습니다, 캐런.”

“이셀라 에반스 양의 것이어서요.”

“…베르딕 씨가 사소한 것에 아끼는 분은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그 베르딕 씨가 얼마 전에 바늘 하나 버렸다고 굶겼던 그 베르딕 씨인지 궁금하군.

“딸을 잃은 것이 큰 충격이었나 봅니다.”

이셀라 양 안 죽었거든요? 캐런은 반박하고 싶은 마음을 눌러야 했다. 차라리 그녀가 죽었으면 얼마나 편할까. 지금 캐런은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판이었다. 캐런을 탓하는 그의 말에 왠지 서운해졌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당신은 받아 줘야 하는 거 아냐? 하지만 그런 투정이 지금 상황에 맞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캐런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이런 사소한 것보다… 좀 더 잔인한 사람인데 말입니다.”

“알아요.”

“당신은 모릅니다.”

아니, 알아. 하지만 캐런은 굳이 말싸움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약간 우울해 보였다.

“마법을 보여 준다더니.”

“어떨 줄 알았는데요?”

“도박에서 멋들어지게 이길 줄 알았습니다.”

“그래요?”

“예. 그런 식으로 당신의 가치를 증명할 줄 알았죠.”

“뭐… 그것도 괜찮은데.”

캐런은 손가락을 들어 레이몬드 옆의 얼음통에 담긴 샴페인을 가리켰다. 하지만 병만 있다.

“위로주나 주세요.”

“…잔이 없군요.”

“그냥 줘요.”

하인을 부르려는 레이몬드를 저지하며 캐런은 레이몬드에게 손짓으로 열기를 요구했다. 듈란이라면 술은 작작 마시라고 했겠지.

“병째로…?”

“네. 도무지 술이 없으니까 살 수가 없어요.”

“그 나이에….”

레이몬드는 약간 한심하게 쳐다보고는 캐런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코르크 마개가 퐁 소리를 내며 빠진다. 캐런은 병을 들고 바로 목구멍으로 넘겼다. 알코올이 목구멍을 타고 넘기는 감각이 좋았다. 한동안 너무 술을 못 마셨다. 약간 기분이 나아진 캐런은 레이몬드에게 물었다.

“아인 남작님을 이겼으면 했어요?”

“글쎄요. 그것보다는 그냥 그럴 것 같았다는 겁니다. 호언장담하고, 도박판에 의기양양하게 뛰어들고, 말리는 사람을 무시했으니까요.”

“…설마 삐쳤어요?”

캐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레이몬드를 바라보자 레이몬드는 눈을 피했다.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마십시오. 기가 찰 뿐이니까.”

“아하하.”

캐런은 웃었다.

그와 동시에 홀 안에서도 웃음이 터졌다. 괜찮은 타이밍이다.

“무능해 보여요?”

“약혼을 취소할까 생각할 정도로요.”

너스레 떨긴. 어차피 캐런과 레이몬드의 약혼은 이어진다. 그들의 관계는 한번 이어진 이상 떨어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갈라놓지 않는 이상 레이몬드는 캐런을 놓지 않는다. 감정 때문이든, 대외적인 일 때문이든.

“…당신은 생각보다 평범해 보입니다.”

대체 어느 정도를 상상했는지 궁금하군. 캐런은 손가락을 들어 병을 톡톡 쳤다. 술이 어느 정도 남았나 가늠해 보기 위해서였다. 한꺼번에 너무 마셨는지 약간은 어지러웠다.

“아인 남작님을 이기면 제가 뭐가 될까요?”

“훌륭한 도박꾼의 재능을 입증하겠지요.”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 이야기도 좀 듣겠네요.”

결국 그뿐이다. 캐런은 씩 웃었다.

아인 남작이 제시한 귀즈 왕세자와의 만남보다 더 급한 것이 있다. 그리고 만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나기 마련이다. 귀즈 왕세자와는 아인 남작을 통하지 않더라도 만난다. 하지만 그는 이제까지 캐런에게 별다른 답을 주지 않았다. 모친에 대해 좀 더 캐야겠다고 결심한 이상, 만나기는 하겠지만 그는 결국에는 탈락자다. 하이어 영주나 아인 남작보다도 가치가 떨어지는 인물이다.

“귀즈 왕세자님에게 어머니에 대해서는 나중에도 물어볼 수 있구요.”

캐서린에게 가치 없는 남자는 캐런에게도 가치가 떨어진다. 그가 왕세자라는 위치에 있어도 캐런에게는 부차적인 인물.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일을 좀 더 효과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손이 필요하다. 지금 같이 이셀라의 역할을 동시에 떠맡으면 시간만 흘러가 버리고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캐런에게 최악은 그런 것이다.

“레이몬드 경, 저는 마법을 쓸 수 있다고 했죠?”

“카드 하나 못 맞히는 마녀는 굶어 죽습니다.”

“보여 드릴게요.”

그동안 레이몬드는 캐런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다면 어떨까? 차라리 다른 것을 보여 주지.


 

“저요, 그동안 밤마다 레이몬드 경과 동행했지요?”

“예.”

“낮에는 일을 하고, 그 외의 시간은 언제나 하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구요. 그것도 다 베르딕 씨 쪽 하녀들이 대부분이고.”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군요.”

“제가 마법을 부린다는 거요.”

캐런은 레이몬드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이 말을 내뱉으면 그의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다.

“오늘 아침에 하천에서 발견된 창부가 있지요? 자궁은 도려지고 눈은 뽑힌 시체 말이에요.”

카드에서 압도적으로 이겨 봤자 그저 솜씨 좋은 도박사.

그녀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그리고 캐런은 자신을 부정하는 것을 부정한다. 캐런이 무엇보다 거부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다

그녀가 다시 살아나 생을 반복한다는 것조차 캐런의 착각이라는 가정.

캐런은 그 가정을 철저하게 거부한다.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모독이다. 그리고 그것부터 검증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검증할까? 캐런이 알고 있는 카드를 내서 이기는 것과, 캐런이 도박에 능해서 이기는 것을 어떻게 구분하는가? 낸시에 대한 마부의 감정이 도나에게로 옮겨 간 것은 캐런만 아는 사실 아닌가. 캐런 혼자만이 아는 증거는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그녀를 도울 검증인은 내부인이어서는 안 된다. 캐런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도울 수밖에 없는 레이몬드가 적절하다. 캐런은 손가락을 펴서 네 손가락을 들었다.

“앞으로 한 달 간 세 명의 여자가 더 죽을 거예요. 별명 붙이기 좋아하는 신문에서는 범인을 스페이드의 잭이라고 할 테구요. 심장에 단도를 꽂은 모양이 스페이드를 연상케 한다나 뭐라나?”

캐런은 즐거웠다. 그의 얼굴은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정말로 유쾌하기 그지없다. 평범하다? 재밌네. 어디 미래가 어긋나나 보자고.

“그리고 오늘 아침에 발견된 창부는 처음 죽은 여자가 아니에요. ‘연습’하기 위한 첫 번째 여자는 에반스 영지에 속한 동서쪽의 자작나무 숲에 있어요. 가 볼래요?”

캐런은 그날 밤 혼자서 마차를 타고 돌아가야 했다. 레이몬드는 캐런이 그의 표정을 더 감상하기도 전에 바로 빠져나갔다. 캐런의 손을 잡고 불안에 떠는 것은 도나였다. 도나는 캐런이 돈을 크게 잃은 것에 무서워하고 있었다.

“주인님이 분명 크게 화내실 텐데… 어떡하죠.”

캐런은 도나의 불안에 떠는 몸을 보며 턱을 괴고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베르딕은 화내겠지. 사실 그건 베르딕에게 그리 큰돈은 아닌데도. 그는 화를 낼 것이다.

레이몬드는 그렇게 말했었지.

“당신은 베르딕 씨를 모릅니다.”

아니, 잘 안다. 캐런은 베르딕이 오늘 밤 부를 것을 잘 안다. 캐런을 죽인 그 수많은 사람들 중 유난히 베르딕을 더 잘 기억하는 것은 그가 단순히 자신을 죽인 횟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베르딕은 그나마 깔끔한 편이다. 그는 이셀라 에반스, 자신의 딸을 사랑하고 캐런을 싫어했으니까. 캐런을 욕정의 눈으로 쳐다보지 않는 것만으로도 꽤나 깔끔한 관계다.

“도나, 오늘 아침에 시체가 발견되었대. 우리 나이랑 비슷하다는 거 아니?”

“그런 건 우리랑 상관없잖아요….”

오늘 아침의 죽은 여자는 신문에 나왔었어. 「지금」은 아니지만 모레 석간에 더욱 자세한 이야기가 나오겠지. 그녀는 아무 상관없는 배경이야. 옆 마을에서 죽은 사람이지.

나이는 같지만 그녀는 열세 살 때부터 몸을 팔았고 열여덟 살에 하수구에서 난도질당해 죽었어. 얼굴은 꽤 예쁘장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지. 얼굴도 찢어 놨거든. 신문에 등장하는 여자와 소설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의 차이는 얼마나 날까? 그녀나 우리나 내겐 아무 차이가 없다는 걸 넌 모르겠지.

“그런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잖니.”

“…….”

도나는 입을 다물었다. 캐런도 입을 다물었다. 결국 캐런에게 자신에게 일어날 일이나 옆 마을에서 죽은 여자의 일이나 고만고만한 일이란 것을 눈앞의 시녀는 평생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괜찮아.”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캐런은 자신의 일상이 노동에 잠식되는 것을 견디기 힘들었다. 시간의 낭비도, 이해받지 못하는 상황도 힘들었다. 그래서 캐런 안의 일이 아닌 외부의 일을 가지고 왔다.

스페이드 잭의 연쇄 살인 사건.

캐런은 사건을 ‘알고’ 있다. 신문에 났으니까. 하지만 그건 캐런에게 그리 상관있는 일이 아니었다. 매해 살인 사건은 일어난다. 전국으로, 대륙으로 확장하면 하루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은 없다. 캐런에게 그것은 활자 안의 일, 남의 일이었다. 범인은 잡힐 것이며 그 연관자도 잡힐 것이다.

레이몬드 경에게 고백해야지. 기왕이면 믿어 줬으면 좋겠다. 도나처럼 레이몬드도 지금은 캐런을 이해 못하겠지만 결국에는 이해할 것이다.

캐런이 그렇게 만들 테니까.

동도 트지 않은 새벽이었다, 베르딕은 캐런을 불렀다. 도나는 두려움이 명백한 얼굴로 캐런을 깨웠다. 캐런은 잠옷 차림으로 지하실로 내려가야 했다.

“캐런 양.”

“베르딕 씨.”

베르딕은 정장을 차려입은 채였다. 두툼한 덩치에서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손에는 채찍이 들려 있었다.

“내 돈을 멋대로 썼더군.”

“…죄송합니다.”

짜악.

차가운 돌바닥을 채찍이 때렸다. 큰 소리가 위협적으로 지하실에 울려 퍼졌다.

“그것도 도박하는 곳에 말이야.”

“…….”

“아인 남작과 멋대로 얽히고, 허락도 없이 멋대로 도박에 돈을 걸고, 거기에 지기까지.”

“…….”

“내가 당신에게 뭐라고 해야 하지?”

“죄송합니다.”

캐런은 연거푸 용서를 구했지만 머릿속으로는 레이몬드가 시체를 찾았을지가 궁금했다. 그리고 등짝을 맞고 나면 등의 상태는 그 시체와 별 차이가 없을 것임을 예상했다.

베르딕의 잔인함을 내가 모른다고?

캐런은 레이몬드의 말을 비웃는다.

“그녀를 잡아라.”

“네.”

캐런의 양팔은 덩치가 거대한 하녀들이 힘주어 잡고 있었다. 그녀는 강제로 꿇린 무릎에 바닥의 냉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캐런 에반스, 당신은 뭘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군.”

“죄송해요.”

“당신은 내 딸로 들어왔지만, 내 재산을 이셀라처럼 쓸 수 있다는 뜻은 아니야.”

“…….”

“그렇다면 벌이 필요하겠지.”

“…….”

베르딕은 캐런의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아 보였다. 여기서는 오히려 발악을 하며 울부짖어야 그가 만족하리라. 하지만 캐런은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틀을 잡게 해라.”

여름이 한창인데도 이 지하실은 추웠다. 여기는 몇 년 만에 끌려오는 거였지? 이 와중에도 졸음이 밀려온다는 것이 우습다. 그리고 잠은 곧 깨겠지.

“…흐윽.”

같이 끌려온 도나는 입을 막고 눈을 감았다.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다. 저 아이는 겁이 많구나. 이셀라도 저랬지. 하지만 이셀라는 처음에는 무서워했어도 곧 웃었어. 그게 하녀와 여주인의 차이지.

“도나, 울지 마.”

울고 싶은 건 난데 네가 왜 우니. 맞는 것은 난데. 캐런은 그런 의미였지만 그조차도 베르딕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누가 멋대로 말을 하라고 했나?”

“…….”

캐런은 하녀들의 팔을 밀었다.

“놔, 내가 할 수 있어.”

익숙한 일이니까. 부디 비명을 지르지 않기를. 부디 평정을 잃지 않기를. 기절하기를. 캐런은 등을 드러내고 틀로 다가갔다. 지하실의 문이 닫혔다.

하지만 비명을 지르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군.

베르딕은 욱신거리는 어깨를 두드리며 피가 묻은 옷을 벗었다. 하인이 새 옷을 가져왔다.

“어깨는 어떻습니까? 영 욱신거려서 말입니다.”

“…그저 근육통일 뿐입니다.”

“그렇습니까? 원. 요즘 들어서 몸을 움직이는 일이 드물다 보니 그 정도 일로도 영 개운치 않지 뭡니까, 신관님.”

듈란은 베르딕의 어깨를 한번 만져보더니 베르딕이 별다른 소리를 하지 않자 하인에게 옷을 갈아입히도록 지시했다.

“이셀라는… 언제쯤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죄송합니다.”

“신관님.”

베르딕은 말채찍을 가지고 왔다.

짜악!

책상이 부서지는 것처럼 흔들렸다. 원목으로 만들어진 책상 위로 흠이 파였다. 듈란은 무표정한 얼굴로 책상을 내려다보았다.

“딸을 가진 부모는 말입니다. 예민해집니다.”

“…….”

베르딕은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졌다. 이셀라는 눈을 뜨지 않았다. 몸의 상태는 갈수록 좋아져도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 베르딕은 듈란에게 점점 화가 났다. 감사의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지고 의심이 피어오른다. 마음 같아서는 듈란에게도 채찍질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요즘은 말입니다.”

베르딕은 피가 떨어지는 채찍을 곁눈질하는 듈란의 얼굴을 보았다.

“말을 덜 더듬으십니다?”

“…정, 정신적인 것입니다. 긴장하지 않으면… 괜찮습니다.”

“제가 놀라게 해 드렸군요.”

듈란은 고개를 숙이고 답했다.

“아닙니다.”

“전에 말씀하셨던 것 말입니다.”

“예.”

“캐런은 지나치게 건방집니다.”

“…그렇지요.”

듈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감히 제 돈을 탕진하려고 들지 말입니다. 듈란 신관님의 복수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신관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그런 건방진 계집은 철저하게 부숴 놓아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지나치게.”

“신관님?”

베르딕이 채찍의 손잡이를 잡았다.

“설마 말입니다.”

“…….”

듈란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창백했다. 베르딕은 듈란의 얼굴을 보면서 물었다.

“아직도 캐런 에반스에게 마음이 있는 건 아니겠지요?”

시간이 지날수록 의심은 짙어진다.

식물인간이 된 이셀라와 다르게 캐런이 겪는 고생은 기껏해야 간호일. 그리고 밤마다 이셀라의 약혼자였던 레이몬드와 시시덕거리며 사교계를 누빈다. 베르딕은 분노를 참기가 힘들었다.

그가 전부를 주려고 했던 이셀라는 쓰러져서 시체나 마찬가지인데, 딸이 질투로 어쩔 줄을 몰라 하던 캐런은 이셀라의 모든 것을 누리고 있다. 부와 남자와 미모 전부. 그것도 이셀라의 아버지인 베르딕의 돈으로!

“예의가 없는 것은 알았지만 말입니다. 자식이 저렇게 되면 부모는 미치는 법이라서 말입니다.”

심지어 전날 밤 캐런이 멋대로 아인 남작과 도박을 한 것을 알고 베르딕은 눈앞이 뻘게질 뻔했다. 감히, 네가. 그리고 캐런에게 그녀의 위치를 제대로 알려 주기 위해 채찍질을 했다.

그리고 생각한 것보다 조금 더 쳤다.

치면서 느낀 것은, 주변 하녀들의 동정어린 눈빛이었다. 캐런의 하녀야 이해를 하지만 자신의 오랜 하녀들조차 약간의 불쾌감을 가지고 그 광경을 지켜보는 것을 알았다. 마치 악당을 보는 듯한 그 눈들.

베르딕은 지독한 불쾌감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상인은 손익에 민감하다. 지금 베르딕은 듈란조차 의심스러웠다. 캐런을 양녀로 들인 것이 과연 베르딕에게 괜찮은 조건인지도 의심스러웠고, 캐런을 동정하는 시선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채찍에 익숙한 오랜 하녀들조차 그녀를 동정한다면, 눈앞의 듈란은? 그가 무슨 감정을 가지고 그 제안을 한 것일까.

묻고 싶었다.

둘은 어릴 적부터 먼 친척으로서 관계가 있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자신을 배신한 남자의 분노보다, 오갈 곳 없는 혈족으로서의 애정이 남아 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그 착각, ‘캐런 에반스가 누릴 혜택’을 철저히 부숴 버려야 한다. 부모의 분노라도 풀어야 한다.

“제가 너무 심하게 쳤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베르딕은 듈란의 눈이 행여 동정으로 덮이지 않을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듈란의 눈은 너무나 어두워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는 거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듈란은 그러면서 손을 뻗어 베르딕에게 얹었다. 차갑지만 위로의 의미가 담긴 손길이었다.

“전 그녀가 행여 죽더라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아, 아가씨?”

“…….”

“괜, 괜찮으세요?”

괜찮아 보여?

누워 버티는 것조차 힘이 든다. 도나의 부축을 받아 방으로 돌아온 캐런은 침대에 엎드려서 눈물과 욕설을 삼켰다. 한동안은 똑바로 누워서 잠들지조차 못할 것이다. 내내 이렇게 엎드려 있어야 하겠지.

도나는 덜덜 떨면서 캐런의 등에 달라붙은 옷을 벗겼다. 피에 젖은 천이 피부에 쩍 달라붙었다가 떨어지는 감각이 소름끼쳤다. 그렇다고 그대로 두면 딱지가 엉겨 붙어 천을 떼어 내지조차 못할 것이다. 캐런은 베갯잇을 물고 신음을 참았다. 도나는 저가 맞은 것이 아님에도 훌쩍거렸다. 하지만 캐런은 그 동정 섞인 울음조차 성가셨다.

“세상에… 이게 무슨….”

“…어때?”

“흐흑….”

안 들리니? 어떠냐고 묻잖아. 캐런은 패악을 부리고 싶었지만 그것조차 참아야 하는 현실이 화가 났다. 착하게 있어야 한다. 착한 여주인공. 착한 여주인. 착하게… 착하게?

‘내가 왜?’

사람을 이미 죽였으면서 왜 아직도 책 속 이야기의 굴레에 갇혀 있는 걸까. 캐런은 패악질을 부리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자제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지금 패악질 부려서 얻을 득이 없다.

자신이 선택한 일에 대해서 징징거리는 것은 꼴사납다. 자신 스스로가 그렇다. 사람이 짜증을 내고 그 짜증에 자신이 더욱 짜증이 난다. 화와 짜증은 다르다. 표출할 수 없는 신경질적인 감정은 사람을 좀먹는다.

“…세상에 피가….”

“흐윽….”

동이 막 트는 새벽, 푸른빛이 방 안을 감싸고 있었다. 우울하기 짝이 없는 새벽이다. 사람이 죽어나가고 폭동이 일어났으면. 혼란에 휩싸이는 세상에서 정신이 안온하게 되기를.

“…아!”

아파, 아파, 죽어, 그만둬, 젠장! 등에 소독약을 바르자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캐런은 이를 악물었다. 노곤한 우울감은 고통에 날아간다. 도나가 소독약을 바르자 거의 경련하듯 몸이 떨린다.

“괘, 괜찮으세요?”

“…….”

‘내가 잘한 걸까?’

도박에서 이긴다고 하더라도 채찍은 맞는다. 캐런은 이셀라를 대신해서 카드를 걸었었다. 하지만 그때는 단 두 대였다. 이토록 베르딕이 심하게 매질한 적은 없었다. 자신의 딸이 누운 것에 어지간히 배알이 꼴린 걸까. 매질에 의한 상처는 어느 때보다 심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뭐예요?”

도나가 베르딕 가문의 하녀장을 보고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정보를 전했다.

“옷을 갈아입으신 후에 이셀라 아가씨의 방으로 가라는 전갈입니다.”

그녀의 말에 도나가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지금 저 꼴을 보고도 일하라는 말이 나와요?”

상사에게 저 꼴이라니. 하지만 꼬락서니라는 말이 더없이 어울리긴 하지. 캐런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신음이 절로 나온다. 자신은 이 기간이 정말이지 싫었다.

이셀라의 자리를 차지하면 좀 안락하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거늘, 일만 더 늘어났다. 신음과 한숨을 푹푹 쉰다. 캐런은 엎드려서 하녀의 말을 듣는다. 그녀가 하는 말도 여느 때와 같다. 달라지지 않는다.

“주인님의 명령입니다.”

“내가 대신 하겠어요.”

차이라면 도나가 있군. 감격스러워 해야 하나? 도나는 지금까지의 하녀 중에 눈에 띄게 선한 사람이었다. 순하고 착한, 평범한 듯하면서도 뜯어보면 흔치 않은 사람. 어쩌면 그것은 도나가 이제까지 인생 중에서 이토록 가까이 지낸 적이 없었던 사람이기에 그렇게 판단할 수도 있겠지.

헤집고 보면 그녀에게도 어둠이 있고 저열한 바닥이 드러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녀는 아직까지 그런 면을 보여 주지 않았다. 그녀는 겉으로 보이는 그녀의 성품대로 캐런을 불쌍하게 여겼다.

“…….”

감동은 역시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신기하기는 하다. 도나 이전의 세라 역시 캐런을 불쌍하게 여겼지만, 이렇게까지 반발하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결국은 힘없는 하녀. 도나의 동정은 캐런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녀장은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캐런 아가씨의 일입니다.”

“아니, 글쎄… 저 꼴을 보라구요….”

도나는 캐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캐런의 등은 말 그대로 걸레짝이 되어 있었다. 베르딕은 채찍으로 열 번 내려쳤다.

“캐런 아가씨는 십분 이내에 이셀라 아가씨의 방에 가셔야 합니다.”

“등이 걸레가 됐는데 어떻게 일을 해요? 지금 아가씨가 간호를 하는 게 아니라 간호를 받아야 할 처지인 거 몰라요?”

새하얀 등가죽에는 붉은 선이 좍좍 그어져 있었다. 이 흉은 죽고 다시 태어나기까지 없어지지 않을 것을 안다. 채찍 맞기 전에 등이 파인 드레스를 입어보고 싶었지만 이제는 다시 태어나기 전까지 불가능할 소원이다.

“전 분명 전했습니다. 주인님의 명입니다.”

“그렇게 굴지 말고… 적당히 눈감아 줘요. 나중에 그만큼 보답할 테니까.”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캐런은 여기서 자신이 해야 할 답을 안다.

“…도나. 내가 해야 할 일이야.”

목소리가 갈라지더라도. 원하지 않더라도.

“난 괜찮아.”

“사실 괜찮을 리가 있겠어요?”

캐런은 잠든 이셀라의 방에 서 있었다. 평상시 보다 조금 더 일찍 도착해서 방은 아직 어두웠다. 지금쯤 레이몬드는 시체를 발견했을까? 캐런은 여전히 그것이 궁금했다. 그는 그녀에게 선물을 가져다줄 것인가.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에서 위로가 될 텐데.

“솔직히 말해서 나보다 당신 처지가 훨씬 좋아 보이네요. 눈 감고 잠만 자면 되니까요. 아픈 것도 없고 괴로운 것도 없겠죠.”

“…….”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모르고 또다시 시작하겠죠.”

캐런은 등에 아직도 피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쓰라려서 눈물이 난다. 도나가 서투른 솜씨로 소독하고 미라처럼 힘주어 말았지만 고통이 가시지는 않았다.

“이셀라. 난 당신의 부친이 싫어요.”

당신보다도 더더욱.

괜찮을 리가 없다. 고문에 사람이 익숙해질 리가 없다. 당장 와 닿는 채찍에 익숙해지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살갗이 찢기는 와중에 상념에 젖을 수 있는 사람이란 거짓이다. 환상이다.

채찍 앞에서 고고하게 있기란 불가능했다. 애원하지 않기란 불가능했다. 캐런은 다섯 번째에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살려 주세요. 잘못했어요. 하지만 채찍질은 멈추지 않았다. 버틸 수 있는 건 이제까지 겪었던 수 만큼이었다.

“내가 왜 아파야 하죠?”

순수한 분노가 치솟았다. 자신이 왜 이렇게 반복해야 하는 거지? 왜? 무던할 리가 없다. 괜찮을 리가 없다. 베르딕에 대한 분노가 희석될 수 있었던 건 그 말고도 자신을 죽이는 사람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그 하나뿐이 아니기에 그의 얼굴을 보고도 버틸 수 있다.

“당신이 죽으면 베르딕 씨는 울겠죠.”

캐런은 챙겨두었던 가위를 들었다. 베르딕은 왜 자신을 이셀라의 시중을 들게 했을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아니면 이것조차 노린 것일까. 이셀라에게 조금이라도 흠이 있으면 크게 힐난했으니까. 하지만 이토록 채찍질을 해 놓고서도 자신이 인내할 것이라 믿은 걸까?

툭.

이셀라의 손에 있던 링거 줄이 잘렸다. 캐런은 침대를 적시는 액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셀라의 목을 보았다. 여전히 의식이 없어 가위를 들이대고 있는 이 상황에서도 천천히, 평화롭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이대로 목을 찔러도 이셀라는 계속 잠을 잘까? 아니면 비명을 지르며 일어날까.

캐런은 가위를 집어 들었다. 이대로 목을 찌르면 이셀라는 퇴장한다. 그녀가 퇴장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캐런은 물었다.

“…이셀라 양을 사랑해요?”

“…….”

“레이몬드 경.”

그녀의 손목을 잡은 남자에게 물었다. 캐런의 시도는 이번에도 실패로 끝났다. 그래, 이럴 줄 알았어. 캐런의 팔을 레이몬드가 잡았다. 급하게 뛰어온 듯한 얼굴이었다. 약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레이몬드가 상기된 얼굴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만두십시오.”

“…네.”

캐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렇게 기대를 한 것은 아니다. 이셀라를 죽여도 좋고, 아니어도 좋은 정도. 그녀를 죽이려고 했으면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로 달려가 목의 울대를 자르려고 했겠지. 이것은 어느 정도의 보여 주기 용이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손목이 아팠다. 캐런은 재차 설명했다.

“이미 내 손을 잡아서 막고 계시는걸요.”

“…….”

“그러니까 놔 주세요. 알았다구요. 못한다는 거.”

지금 벌써 못한다는 걸 알았다고.

“진정했으니까 놔요.”

캐런은 자신의 얼굴이 눈물로 얼룩져 있음을 알았다. 레이몬드는 캐런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캐런의 손에 쥐어져 있는 가위를 앗아갔다. 레이몬드는 캐런을 의자에 주저앉히고 캐런의 손을 묶었다.

“이렇게 하실 필요 없어요.”

“지금 그걸 믿을 것 같습니까?”

자신이 생각해도 안 믿을 것 같다. 캐런을 눈물을 흘리다가 픽 웃었다. 레이몬드는 캐런을 묶고 나서 이셀라의 침대 시트를 갈기 시작했다. 귀족답지 않게 능숙한 솜씨였다. 그가 시트를 갈고 이셀라의 링거 줄 또한 새로 가는 것을 보며 캐런이 물었다.

“확인하셨나요?”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는 그가 알리라. 레이몬드는 대답했다.

“…예. 당신이 말한 곳에 시체가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캐런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도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좋아요. 그거 다행이네요.”

이제 확신할 수 있다.

자신은 과거를 반복한다.

낸시가 자신의 기억을 주물럭거렸어도 이는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그랬군요.”

캐런은 그것이 너무나 기뻤다. 드디어 확신할 수 있다. 머릿속으로 내내 의심만 반복하는 것은 너무나 힘겨운 일이다. 안도의 웃음이 나온다.

“레이몬드 경. 고백할 것이 있어요.”

“…….”

“저는요, 이 세상이 책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어요.”

“…음.”

레이몬드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웃으려는 얼굴일까? 하지만 농담을 던지기에는 상황이 너무나 피비린내 난다. 캐런은 울면서 웃었다. 실성한 것처럼 보이면 안 되는데. 다행히 레이몬드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캐런을 보았다. 캐런은 말을 이었다.

“이건 비유도 아니고 은유도 아니거든요. 어떻게 들릴지 알아요. 그런데 저에게는 사실이에요.”

도움이 필요해. 하루의 반, 밤의 시간은 철저하게 레이몬드의 몫이다. 이대로 일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지.

“전 이제까지 계속해서 죽는 꿈을 꿔요. 솔직히 말하자면… 꿈이 아니에요. 전 이제까지 백 번도 넘게 죽었어요. 그건 책을 다 읽고 나서 처음으로 돌아가는 거죠.”

“캐런, 잠깐만요.”

“믿어 줘야 해요. 내가 어떻게 태어나서 처음 와 본 곳에서, 전문 간호인보다도 더 능숙하게 이셀라를 돌보죠? 왜 일어날 살인 사건을 알죠? 만일 이걸로 모자란다면, 못 믿는다면, 더한 짓을 하겠어요.”

“다시 만난다고 하더라도 분명 당신을 사랑할 겁니다. 무서워하지 말아요. 내가 당신을 지켜 줄게요.”

그는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괜찮습니다. 이제는 다 괜찮아요. 전 당신을 믿습니다.”

이번에는 어떨까?

캐런은 등을 의자에 기댔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이 아직도 느껴진다. 캐런은 묶인 손목을 들어 손가락으로 강하게 옷을 젖혔다. 상처가 너무 심해 가볍게 입은 옷이라 쉽게 벗겨진다. 캐런은 등을 드러내놓고 레이몬드에게 말했다.

“저는 이제까지 백 번이나 베르딕 씨에게 죽었어요.”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아마도 안다.

이번에는 당신이 날 사랑하기 힘들겠지.

“절 도와주세요.”

그렇다면 그에게 동정이라도 사야 하지 않겠는가.


 

시체를 발견했다.

제논에게 현장에서 휘갈긴 편지를 맡기고 레이몬드는 서둘러 에반스 저택으로 향했다. 그리고 달리면서 소음이 비교적 적은 권총을 꺼낸다. 목적은 확실하다.

그 여자.

캐런 하이어, 이제는 캐런 에반스. 이셀라 에반스 대신 그의 약혼녀가 된 붉은 머리의 여자. 아직은 소녀가 더 어울리는 여자.

“캐런 하이어.”

그냥 시체를 자신이 발견했다면 이렇게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문제는 캐런 하이어. 이제는 캐런 에반스. 열일곱 살의 소녀. 레이몬드는 총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어디까지 얽혀 있는가? 어디까지 무시해도 좋은가. 아니, 이제는 무시할 수 없다.

무시해야 할 것을 무시하지 못하는 것은 캐런이 그의 동업자를 자처했기 때문이다. 사실 레이몬드는 캐런에게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외모가 무척이나 아름다운 것으로 충분했다. 재치가 있어 대화하는 것이 즐겁기도 했다.

처음에는 사랑을 하려고 생각했지.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처음 캐런을 품에 안는 그 순간, 약간은 전율했던 것 같다. 그 미모에, 그리고 그녀의 광기에.

그리고 그녀는 손을 잡자고 했지.

그 큰 눈 가득히 눈물을 흘리며. 애달아 끓는 목소리로.

“베르딕 씨는 제 원수예요.”

그래서 손을 잡자고. 레이몬드는 동의 했다. 하지만 눈앞의 여자의 시체를 본 순간 그 마음은 접었다. 캐런은 그를 조종하려고 들고 있다.

“웃기는군.”

더 큰 목표를 위해 손을 잡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캐런이 자신을 쥐고 흔들려고 한다면 말이 다르다. 최소한 자신과 손을 잡기로 했으면 그 동안은 협력해야 한다. 그것은 자존심이라거나 정의와는 다른 일이다. 일의 우선순위의 문제다. 휘둘리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베르딕… 에반스.”

레이몬드는 캐런이 순수하게 베르딕을 증오하는 것조차 믿지 않았다. 처음부터 영주는 자살하지도 않았으니까.

영주가 자살했다고? 상황은 그럴 듯 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신발 한쪽이 벗겨진 것을 보았다. 자살을 한 사람이 발버둥 치다가 한 쪽만 벗겨지는 건 흔하지 않다. 발버둥은 흔히 치지만 미리 신을 벗어놓는 것이 아닌 한 신겨져 있기 마련이다.

편한 슬리퍼도 아니었고 끈으로 고정하는 형태였다. 신겨진 나머지 한쪽의 구두는 단단히 묶여 있었다. 긴장한 사람이 마지막에 다듬은 것처럼. 하지만 나머지 한쪽이 벗겨져 있다는 것은 반대의 결론을 만든다. 영주는 자살을 준비했을지 몰라도 누군가가 그의 다리에 매달렸었다.

캐런은 어떠한 형태로든 연결되어 있다. 그녀가 직접 죽인 것은 아닐지라도 그건 분명하다. 레이몬드가 그녀와 마주한 마차. 그 마차가 머문 저택에서는 두 여자가 실종되었다.

“그리고 실종된 또 다른 여자와 이셀라 에반스….”

레이몬드는 그 순간 캐런을 잡아 넘기는 것보다, 이것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을 후회했다. 캐런을 적당히 압박하고, 베르딕에 대한 공통된 증오만 있다면 잘 쓸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 맞는 걸까? 오히려 그때 그녀를 더 눌렀어야 했다.

이대로는 캐런에게 휘둘릴 뿐이다. 그리고 레이몬드가 이 순간 해야 할 것은 신고가 아니다. 먹힐 리도 없다. 그것은 제대로 된 증거가 아니다. 군대와는 다르게 도시에서는 법의학적인 제도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레이몬드는 군인이지 수사관이 아니다. 여기는 전쟁터가 아닌 수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것까지 계산한 것일까?

“…귀족은 생각해야 할 것이 너무 많군.”

살인 사건. 어쩌면 연쇄 살인 사건. 레이몬드는 탐정이 아니고 경찰이 아니다. 조금 있으면 군인도 아니다. 하지만 캐런이 그에 대해 알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가 캐런과 손을 잡는다 해도, 그는 다른 의무감이 있었다. 공의를 원했다. 캐런을 처리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보다 살인 용의자를 잡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더 컸다. 만일 그녀가 최소한의 원리 원칙도 지키지 못하는 쾌락 살인마라면, 컨트롤이 불가능한 총이라면 그는 책임을 져야 한다.

“이제 두 달.”

그가 상원 의원으로 정식 입장하는 날은 두 달 후였다. 이미 내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이럴 때가 제일 위험하다. 위험한 일에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그의 직위 8할이 베르딕의 자산에 의한 것이다. 그가 능한 것은 멀리 있는 사람의 머리통을 날리는 것이다. 의회장에서 권력가들의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

그래도 상관없다. 만일 캐런이 계속해서 살인을 한다면, 심지어 그를 이용한다면, 그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눈앞의 악행은 막아야만 한다. 그의 부와 명예가 사라진다 하더라도.

에반스 가문에 도착했다. 레이몬드는 고개를 들어 캐런의 방을 보았다. 불이 꺼져 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걸까? 그렇다면 더욱 좋다. 레이몬드는 품 안에 권총과 수갑을 넣었다. 그리고 캐런의 문을 노크했다. 우선 잡고 나서 그 후에 생각하는 것이 좋겠군.

“…캐런?”

답이 없다. 설마 아직도 잠자고 있는 건가?

똑똑.

다시 문을 두드렸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레이몬드는 한 손에 권총을 꺼내 들었다.

끼익.

“…….”

레이몬드는 문을 열었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대에는 피와 붕대가 널려 있었다. 알코올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누구의 피지? 출혈량은 상당했다. 캐런의 방에 이 정도의 피가 흐를 일이 무엇이 있지? 왜 피뿐 아니라 붕대와 알코올이 있지. 누군가가 크게 다치고, 수습했다.

“…….”

씨근거리는 숨을 진정시킨다. 레이몬드는 자신이 좀 더 진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손으로 머리를 헝클이고는 품 안의 권총을 꺼내 입 안에 넣어 본다.

달칵, 달칵, 달칵.

총알을 넣고 굴려 본다. 그리고 관자놀이에 대어 본다. 싸늘한 금속이 머리를 맑게 한다. 이대로 당기면 죽겠지. 생각해서는 안 된다. 레이몬드는 저격수로 보내진 것이 차라리 편했다. 다른 사람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귀족은 생각해야 한다. 생각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레이몬드의 계획은 아직까지 나쁘지 않았다.

정말로?

“히이익!”

“……!”

“레… 레이몬드 님?”

베르딕가의 하인이었다. 레이몬드는 총을 거둔다. 마치 수음을 들킨 듯한 부끄러움이 들었다.

“지금 대체.”

하인의 말문을 질문으로 막았다.

“캐런은?”

그러자 하인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분께서… 는.”

살인과 연루되어서 체포되었나? 일이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는 거지? 아니면 누군가 그녀를 살인하도록 돕고 있나? 레이몬드는 깊이 의심하고 있던 가설 하나를 다시 떠올렸다. 캐런이 베르딕과 처음부터 손을 잡고 있을 가능성. 그렇다면 모든 것이 이어진다. 만일 그렇다면.

“말해라.”

하지만 대답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하인은 덜덜 떨면서 대답했다.

“이셀라 아가씨의 방에서 일을 하러 가셨습니다.”

맥이 풀렸다. 그녀가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간 것은 아니었다. 지나치게 생각한 건가. 레이몬드는 방 안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일을 하러 갔다. 그런 평온한 일을 하기에는 너무 거친 풍경이다.

“이 피는 누구의 것이지?”

“그, 그것이.”

“…….”

“베, 베르딕 주인님이 벌을 내리셨습니다.”

“벌?”

“아가씨가… 도박을… 하셔서.”

피는 캐런의 것이었다. 그런데 왜 이자는 이렇게 불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이지?

“넌 무슨 연관이 있나?”

“저, 저는 힘이 없습니다. 그저 일개 고용인일 뿐입니다. 무, 물론 주인님이 너무하셨다고 생각하지만….”

레이몬드는 하인이 심하게 떠는 이유를 알고 약간 허탈했다. 이 하인은 캐런이 다친 것에 자신이 분노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럴듯하다. 그럴 것이다. 그와 캐런은 최근 가까이 지내는 것처럼 보이도록 행동했으니까. 베르딕의 앞에서 밤마다 움직이고, 웃고, 식사할 때 대화를 나누었으니까. 하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후.”

레이몬드는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것을 느끼며 이셀라의 방으로 올라갔다. 발소리를 죽인다. 방 안에서는 캐런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이 죽으면….”

레이몬드는 문을 열었다. 캐런은 가위를 들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그 순간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움직였다. 자신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캐런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캐런은 놀라지도 않고 레이몬드를 향해 물끄러미 쳐다보며 물었다.

“이셀라를 사랑해요?”

이 순간에 택도 없는 농담을 하는가? 이 여자는 제대로 미친 모양이군. 레이몬드는 캐런을 묶었다. 그리고 이셀라를 보았다. 영양액과 피가 방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급하게 시트를 걷어 이셀라의 몸을 살폈다. 하지만 이셀라의 몸에는 아무런 상처가 없었다. 피는 캐런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녀가 다친 것은 캐런이라고 했었다.

“…….”

캐런은 그저 이셀라의 링거를 잘랐을 뿐이었다. 그리고 눈물로 얼룩진 얼굴과 등을 보였다. 악의로 가득찬 등이었다. 그는 이런 것을 많이 봐 왔다. 저건 결코 훈육의 의미가 아니다. 완력을 가진 성인 남성이 있는 힘껏 내려친 것이다.

젠장, 일이 도무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거지? 베르딕이 미쳤나? 도박을 한 것이 저렇게 팰 일인가? 레이몬드는 그리고 그 분노에 스스로 좌절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은 그녀에게 총을 겨눌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나.

“우린 좀 더… 대화가 필요할 것 같군요.”

스스로 말하면서도 좀 우울해졌다. 자신이 느끼는 이 감정은 분명, 동정심이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캐런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믿을 수 없는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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