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 그녀와 그의 내기 (11/31)

02. 그녀와 그의 내기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경찰들은 레이몬드의 방문을 드러내놓고 불편해했다. 그는 여러모로 유명했고, 아직은 군의 소속이었다. 경무청은 그의 간섭을 불쾌하게 여겼다. 권한의 침범이라 여기는 것이다.

“그냥 일반 시민의 신고로 받아 주지 그래.”

“기사님, 이러시면 정말 좀….”

“네 할 일을 하라는 거다.”

“이봐, 일반 시민이면 진술서 쓰고 이미 나갔어.”

레이몬드는 날 선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에게 그렇게 굴 만한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알버트.”

“오랜만이군. 얼마 만이더라?”

갈색 머리의 콧수염이 멋들어진 청년이 나와 레이몬드와 악수를 했다. 같은 학교를 나온 알버트 스트레이더 경감이었다. 레이몬드에게 성질 죽이지 않으면 넌 바로 죽을 것이라는 악담 섞인 충고를 건네던 학우였다.

그는 군사학교를 나와서 군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경찰청으로 배속되었다. 그의 아버지를 따라 간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만나 둘 것을 그랬다는 생각을 하며 레이몬드는 알버트가 내민 손을 잡고 악수를 건넸다.

“용케도 살아는 있네.”

알버트가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웃는다.

“난 네가 성질 못 이기고 금방 머리에 총 맞고 뒈질 줄 알았거든. 뒤통수에 말이지.”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해서 미안하게 됐군. 뒤통수에 총알이 박히진 않았지만 별꼴은 다 봤으니 위안 삼아도 좋아.”

“…농담도 못하냐?”

레이몬드는 친근한 척 구는 그의 태도가 조금 불편했다. 이런 식으로 회유하려고 드는 것은 거절의 의미를 내포할 때가 많았다. 레이몬드는 인사를 끊고 바로 본론을 던졌다.

“알버트, 네가 여기 책임자인가? 오늘 아침에 발견된 시체에 관해 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네가 왜?”

적당한 인사를 주고받지 않고 바로 본론을 꺼내자 알버트가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레이몬드는 자신을 가리키며 대꾸했다

“그거 신고한 사람이 나야. 먼저 하인을 보냈는데 제대로 접수가 안 됐더군.”

알버트는 눈을 크게 뜨고 조금 전까지 레이몬드에게 쩔쩔매던 부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냐, 접수했어. 어이, 거기. 그 7번가에 배 갈린 여자 시체. 응, 했지?”

“예? 예, 예 그러믄요.”

알버트가 묻자 경찰이 급하게 대답하는 것이 보였다. 레이몬드는 그 성의 없는 반응에 바로 반박했다.

“내가 말한 건 오늘 아침에 보낸 숲에서 발견된 시체였어. 그리고 얼마 전에 발견된 여자는 하수구였고. 7번가는 또 누구지?”

알버트는 대놓고 눈썹을 찌푸리며 손을 들어 불쾌함을 표시했다. 볼멘소리가 흘러나온다.

“이봐, 레이몬드. 이거 월권이야. 네가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압력을 줄 수는 없어. 이젠 우리에게 맡기고 빠지도록 해. 일단 진정하고…. 자넨 지금… 거의 망상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네가 말한 것은 지금 지난번 그… 뭐더라, 아무튼 그 여자와.”

“죽은 사람을 말하는 건가? 신문에는 온통 상관없는 이야기들뿐이더군. 열세 살부터 몸을 팔았다거나, 열여덟 살에 죽었다거나, 죽었을 때 빨간 옷을 입고 있어서 문제가 됐다거나.”

“평범한 신문 기사 아닌가. 시민들의 궁금증을 적당히 해소해 주고 있지.”

“그럼 시체를 발견하고 불안에 떠는 증인에게 그 정도도 못 알려 준단 말인가?”

“젠장, 작작 좀 해.”

“알버트.”

“나도 내 이름 알아, 레이몬드.”

실내의 공기가 급격하게 험악해졌다. 두 남자는 거의 박치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고 주변의 사람들은 당장 이 공간에서 나갈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젠장, 고작 그 정도로 연쇄 살인인 것 같다고 주장하지 마.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아. 그리고 창녀들은 도시에서는 수시로 죽어. 넌 군인이지 경찰이 아니야. 괜히 일 벌이려고 하지 마라.”

“내게 보여 줘.”

“말이 안 통하는군.”

“검시관이 기록을 남겨 둔 것을 확인하고 싶어. 내가 보낸 스케치와 연관점이 있을 거야. 칼질을 할 때는 버릇이 남아. 협력하고 싶다는 거다.”

“그만 좀 해. 네가 배운 건 나도 배웠어, 그리고 여기는 내가 더 잘 알아. 그런 버릇으로 사건을 해결 할 수는 없어. 증인이 있어야 해.”

“알버트.”

알버트는 신음을 내뱉으며 자신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레이몬드를 노려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네가 일반 사람이면 제1용의자는 너야.”

“…하.”

“귀족인 걸 고맙게 여기라고. 네 평판과 위치 덕분이니까.”

“고마워 죽겠군.”

“네 멋대로 할 수 있는 아랫사람들이 바글거리는 군대가 아니야. 여긴 도시라고. 절차라는 게 있어. 우리도 이제까지 쌓아 둔 노하우가 있다고.”

알버트는 억지로 웃으면서 레이몬드의 양 어깨를 꽉 잡았다. 한 번 큰 소리를 치고 나자 기분이 좀 풀린 것 같았다.

“나 좀 살려 줘라.”

“…….”

“여긴 전쟁터도 아니고, 너도 이제 곧 의원 자리 찰 것 아니냐. 좀 기다려 봐, 창녀들의 시체는 한 달에 한 번꼴로 들어와. 대부분은 남자들에게 두들겨 맞아 죽는 거지. 그리고 범인은 못 찾아. 이번에도 뻔해. 어디 괴팍한 신사와 잘못 얽힌 거지.”

“창녀라서 죽어도 된다는 건가?”

“말꼬리 잡지 마. 한도 끝도 없다는 거야. 너라는 귀족이 발견했다는 이유로 갑자기 이 사건만 집중적으로 특별히 다룰 수 없다는 이야기야. 원한다면 나중에 우리 쪽으로 예산 좀 많이 들어오도록 힘써 보든가.”

“…….”

“의원 선출이 두 달 뒤던가? 부탁한다, 좀.”

별 소득이 없군. 시간만 낭비했어.

레이몬드는 옷을 여미고 문을 밀었다. 뒤에서 알버트가 큰 소리로 외쳤다.

“재미없는 일은 그만두고 시간 될 때 한번 보자. 아버지가 보자시더라. 너도 그러는 게 좋잖아?”

“…….”

“알았지?”

“어디 가냐?”

“가련한 시민은 두려움에 떨면서 방 안에 처박혀 울려고.”

“전보 부칠 테니까 시간 내도록 해! 알았지?”

“…그래.”

레이몬드는 마지못해 대답하고는 거리로 나왔다. 제논이 건너편 길가의 벤치에 앉아 있다가 레이몬드를 발견하고 손을 들었다.

“레이몬드 님, 어떻게 되셨습니까?”

“별 소득은 없어.”

“뭐라 하던데요?”

“말 그대로야. 들은 얘기도 없어. 괜히 간섭하지 말라더군.”

“뭐… 거기도 사정이 있을 테니까요.”

“…자네가 나보다 더 사정을 잘 아는 것 같아.”

제논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물었다.

“음, 저, 지나친 참견이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시체를 발견하실 때는 음… 저… 예상한 것처럼 침착하시더니, 지금은 굉장히 당황하시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러시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레이몬드는 잠깐 고민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사실 내 약혼녀가 연쇄 살인과 연관이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서 지금 미치겠어. 그렇게 대답해야 할까? 레이몬드는 쓴 웃음을 참으며 한마디로 일축했다.

“지나친 참견 맞아.”

“…예에.”

레이몬드는 머리를 헝클이고는 한숨을 쉬었다. 말해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사실 자기 자신조차 믿지 않는데. 그녀의 말에 휘둘리는 자신 스스로가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저는 책 밖에서 왔어요.”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믿는 건 머리에 총을 맞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무시하는 것 또한 힘들다. 레이몬드는 처음에는 캐런을 다독이려고 했고, 그 다음에는 어이없어 했으며, 최종적으로는 혼란에 빠졌다. 레이몬드는 경시청으로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알아 낸 것이라고는 없지만….”

“레이몬드 님은 최선을 다해 노력하셨습니다.”

“위로 고맙군.”

얻은 건 없지만.

레이몬드는 눈가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피곤했다. 믿지 않더라도 단서가 있다면, 살인이 일어난다면, 방관할 수 없다. 비록 자신의 일이 아니라도. 심지어 자신이 막을 수 있었던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전쟁터가 아닌데도 시체는 끊임없이 눈에 띄는군.”

“…그러게 말입니다. 그만 돌아가 쉬시지요. 레이몬드 님은 할 만큼 했습니다.”

뎅그렁.

저녁 무렵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어이구, 벌써 시간이 이렇게… 식사는 돌아가서 하시겠습니까?”

거리는 해가 지고 있었다. 노을 진 거리는 여름답지 않은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그나마 서가 있는 이 대로에는 여기저기 사람들이 보였지만 조금만 골목으로 돌아가면 말 그대로 아무도 없었다.

대로를 따라 이어지는 곳에는 대성당이 있었다. 모든 길은 성당으로 이어진다. 신의 위세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 시대에도 여전했다. 레이몬드는 습관대로 성호를 그었다.

“레이몬드 님?”

“다음 시체는 7번, 그 다음은 17번.”

“17번가는 어디지?”

“예? …저 아래로 가면 나옵니다.”

“잘 아는군.”

“…에반스 씨 저택은 워낙 불편해서요. 하녀들도 어찌나 까다로운지, 맥주 한잔 편하게 마실 수가 없습디다.”

“저런.”

“그래서 자주 나가서 먹습니다. 그리 멀지도 않아서 걸어갈 만하구요.”

“자네 말고 다른 하인들도?”

레이몬드와 제논은 17번가로 걸어가면서 이야기를 했다. 제논은 에반스 가문에 대한 불만을 잔뜩 털어놓았다. 중년 남자답지 않은 수다스러움이었다.

“예. 뭐… 몇몇 어린 하인들이나 하녀 애들은 주말만 되면 튀어나와서 다른 곳에서 먹더군요. 덕분에 추천 많이 받았습니다. 요 주변에서는 저 안쪽 골목에 닭 요리가 기가 막힙니다. 닭 껍질이 바삭한데 속은 부드럽고 소스가 아주….”

레이몬드는 고개를 들어 17번가의 거리가 잘 내려다보일 법한 곳을 찾았다.

“그냥 저기로 하지.”

“…왜 물으셨습니까?”

툴툴거리며 제논은 레이몬드를 따라 선술집에 들어섰다. 음침하고 시끄러웠다. 몇몇 남자들과 여자들이 레이몬드를 노골적으로 쳐다보았다.

“어머, 미남이네.”

“제논? 누구예요?”

“상사.”

“그럼… 소문의?”

“잘생겼네.”

레이몬드는 추파를 던지는 지저분한 옷차림의 여자들에게서 눈을 돌려 위층으로 올라갔다.

“올 만한 곳 아니라고 했잖습니까. 괜찮으십니까?”

“…전부터 생각하는 건데, 자네는 날 너무 어린애로 알아. 괜찮아. 그보다 창가 쪽이 좋을 텐데.”

레이몬드는 눈을 찌푸렸다. 자리에도 앉기 전에 익숙한 인영이 나타났다.

“저건….”

레이몬드가 쳐다보는 방향을 보고 제논이 고개를 돌렸다.

제논도 아는 얼굴이었다.

“캐런 아가씨의 시녀인 도나군요. 같이 한잔 하자고 부를까요?”

“잠깐만.”

도나는 남자에게서 잔뜩 찌푸린 얼굴로 쪽지를 건네받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도나의 입을 보았다. 도나는 쪽지를 받고 항의하듯 말을 하다가 이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문을 밀고 밖으로 나갔다.

“어라, 나가 버렸군요.”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험상궂은 주방장이 제논과 레이몬드의 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주방장이 아닌 도나를 보았다. 저 시녀는 왜 여기 있는 거지?

“제논, 천천히 먹고 와라.”

“레이몬드 님?”

레이몬드는 제논을 자리에 앉히고는 계단을 급하게 내려갔다.

“도나?”

그새 거리는 어슴푸레한 어둠이 깔려 있었다. 멀리서 도나의 머리가 보였다. 레이몬드는 골목으로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에서는 캐런이 한 말이 떠올랐다.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은 아인 남작님이에요.”


 

도나가 들어간 곳은 17번 골목이었다. 그리고 캐런이 다음 살인이 일어날 곳이라 예언한 곳이었다. 레이몬드는 걸음을 빠르게 하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도나와는 열 발자국 이내의 거리를 유지한다. 그녀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믿느냐?

캐런의 말은 지금까지는 일치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홀로 저택을 나오지 않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에 시달렸으며 그것은 그녀를 증오하는 베르딕이 입증한다. 밤에는 레이몬드와 에반스 가문의 상속녀로서 사교계에 참석한다. 연쇄 살인과 연관될 만한 구석은 한 톨만큼도 없다. 그녀가 미래를 안다는 주장은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믿기에 레이몬드는 너무 나이가 많았다. 10대 초반의 소년이면 모를까. 이 세상이 소설이라고. 그리고 자신은 계속해서 반복해서 산다고. 그런 사춘기적 망상에 어울려 줄 정도로 자신은 한가하지 않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캐런은 어떻게든 연관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

도나가 멈췄다.

레이몬드도 멈췄다.

그녀는 왜 여기에 있는가. 도나는 캐런의 시녀다. 하이어 저택부터 따라온 하녀였고 지금도 가장 많은 시간 동안 캐런과 함께 있는 사람이다. 그녀 또한 살인에 연루되어 있는가? 레이몬드는 여자들의 친밀감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녀들은 서로서로 너무 많은 것을 거리낌 없이 공유한다. 레이몬드는 총을 꺼내야 할까 고민했지만, 도나의 평소 모습이 그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평범하고 무지한.

“아, 진짜, 싫다구요!”

“…….”

누구지?

레이몬드는 숨을 죽였다. 도나의 앞에는 얼굴을 가린 남자가 무어라고 말을 하고 있었다. 너무 어둡고 도나가 가리고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도나는 짜증을 내고 있었고, 앞의 남자는 약간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분명 나쁘지 않은….”

“아, 됐다구요! 이런 식으로 불러내지 마세요! 짜증나게 진짜!”

“건방진 년!”

“꺄악!”

남자가 손을 올리자 도나가 비명을 질렀다. 레이몬드는 바로 손의 총을 꺼냈다. 철컥, 남자가 손을 멈췄다. 어두운 골목 안에서 긴장이 맴돌았다.

“…어? 기사님?”

“물러나라.”

“…무슨 생각하시는지 알겠지만 그런 것 아닙니다.”

남자가 얼굴을 찡그리며 도나의 머리를 향한 손을 내려놓았다.

“손들어. 도망치거나 반항하면 바로 쏘겠다.”

“…….”

철벅철벅, 더러운 진흙이 신발 바닥을 더럽힌다. 기분 나쁜 감각이 발끝으로 타고 올라왔다. 남자는 손을 들었다. 레이몬드는 얼굴을 확인했다.

“…….”

기억에 없는, 처음 보는 남자였다. 레이몬드는 남자를 담벼락으로 거칠게 밀치고 총구를 관자놀이에 대었다. 남자의 두 눈이 커다랗게 커졌다.

“후회하실 겁니다.”

“성명과 소속.”

“레이몬드 세이어테스님. 전 수상한….”

“소속.”

“…가일 하이튼이라고 합니다. 아인 남작님 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범인은 아인 남작님이에요.”

젠장.

레이몬드는 총을 겨눈 채로 다가갔다. 남자는 바짝 긴장해서 손을 올리고 있었다. 아직 몰라. 모른다고. 진정해. 여기서는 사람을 함부로 쏘았다간 돌이킬 수 없어. 레이몬드는 침을 삼키고 남자에게 물었다.

“왜 그 하녀에게 손을 올리고 있는 거지?”

“그저 건방지게 말을 하길래….”

“이… 이…!”

도나가 옆에서 짜증을 부렸다. 레이몬드가 옆에 있자 완전히 안심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녀가 화풀이하는 시간을 주는 것 또한 바라는 바가 아니기에 레이몬드는 남자의 오금을 찼다.

“으, 윽.”

남자가 신음을 하며 무릎을 굽혔다.

“왜 이 하녀를 협박했고, 하녀와 남작님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 말해라.”

“그건 기사님이 신경 쓰실 만한, 히익!”

“이건 어때? 난 조금 전에 네가 거의 하녀를 죽일 뻔한 걸 보았다. 그리고 그걸 저지하기 위해서 총을 쏜 거지. 남작님이 항의할까?”

“저, 저, 저기요!”

도나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레이몬드는 얼굴을 찡그리고 하녀를 보았다. 저 하녀도 취조해야 할 것 같군. 어쩌면 캐런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레이몬드는 갖가지 가능성을 갈무리 해 두었다. 우선은 이 남자다.

“넌 뒤로 빠져 있어라.”

“저, 저기… 저 괜찮은데”

레이몬드는 남자의 머리를 벽에 박고는 협박하듯이 말했다.

“…이 주변에서 계속해서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

“예?”

“자네가 현행범으로 그럴듯하다고 생각되지 않나?”

“히이익! 아닙니다! 기사님! 그냥 저, 남작님이 저 하녀를 마음에 들어 하셨을 뿐입니다.”

“그래서 끌고 가 즐긴 후 목을 딸 생각이셨나?”

“예에?”

“지금까지 발견된 시체 공통점은 다 젊은 여자였고, 음부와 자궁이 훼손되었지. 뻔하지 않나? 변태 성욕자.”

“어….”

“솔직하게 자백하면 자네는 살 수도 있어. 남작님이 자네를 시켰나? 그래서 저 여자를 잡아 즐기고자 하셨나?”

남자가 거의 눈을 까뒤집고 벌벌 떨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저는 그런 것과는 상관없습니다! 남작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알버트 경감이 매우 좋아하겠군.”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이제까지 모든 여자들은 다들 돈을 받았습니다. 남작님은 여자를 좋아하지만 그뿐입니다. 저… 야! 당장 말해!”

도나가 입을 삐죽이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싫다는데 끌고 가려고 했잖아요.”

“씨발!”

“자세한 건 서에 가서 듣지.”

“아닙니다! 제발…. 제 품을 뒤져 보십시오, 캐런 에반스에게 보내는 남작님의 서신이 있습니다.”

레이몬드의 한 손은 남자의 양팔을, 다른 한 손은 총을 잡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턱짓으로 도나에게 명령했다.

“거기, 네가 뒤져라.”

“네? 네!”

도나는 혐오스럽기 그지없는 얼굴로 남자의 품을 뒤져 서신을 꺼냈다. 레이몬드는 어둠 속에서도 그 서신의 인장이 아인 남작의 인장임을 알아보았다.

“가지고 와.”

도나는 종이를 들고 가까이 왔다. 레이몬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서신의 내용을 보았다.

“…….”

“…….”

“…어때요?”

서신의 내용은 하인이 말한 대로였다.

아인 남작은 캐런에게 캐런이 카드 게임에서 진 돈을 지급할 테니 며칠 간 캐런의 시녀를 자기 저택에서 일하게 해 달라고 하는 부탁을 하고 있었다. 돌려 말하는 매춘이었다.

“캐런은, 이것을….”

“아가씨가 동의할 리 없어요!”

“썅! 야! 넌 주인에게 그걸 보내지도 않았잖아!”

“우리 아가씨는 안 그러거든? 그러실 리가 없잖아.”

“…아무튼 기사님, 저 좀 풀어 주십시오.”

“…….”

레이몬드는 겨눈 총구를 거둬들였다.

“젠장, 아무튼 캐런 에반스에게 제대로 말을 해 주십시오.”

“실례했군.”

레이몬드는 한숨을 참으며 남자를 누르던 힘을 뺐다. 남자가 후다닥 몸을 빼내 골목 사이로 사라졌다.

“…….”

아인 남작님이 범인이라고.

하지만 레이몬드는 자신이 남자를 협박했으면서도 그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아인 남작은 아랫도리를 함부로 놀리기로 유명한 사람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귀족들 사이에서는 말이다. 자신의 집에서 몇 명의 하녀들을 가지고 놀아도 귀족 여자를 건들지 않는 이상 소문은 잘 나지 않는다. 그 정도로 자제력은 있는 남자다. 그것을 내내 감추었다고? 몇십 년간?

귀족 살인광이라는 건 사람들의 흥미를 당길 만한 일이지만 레이몬드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대부분의 살인은 충족하지 못하는 욕망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 아인 남작은 귀족이며 안정적인 영지가 있다. 이런 짓을 하기에는 가진 것이 너무 많다. 하지만 단정 지을 수도 없지 않은가. 미모와 약속된 부를 가진 캐런만 하더라도 알 수 없는 광증을 토로하지 않았는가.

“저, 저기요.”

하녀를 돕지 않고 좀 더 지켜보는 것이 맞았을까? 캐런의 말을 믿는다면 그저 기다렸다가 알버트에게 말하는 것이 더 맞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자신이 증인이 되고 상대가 귀족이라도 바로 수사할 수밖에 없다.

“기사님?”

“아, 미안하군.”

“아니에요. 감사해요.”

레이몬드는 도나를 보며 사과했다. 그랬다가는 이 하녀는 차라리 죽는 것이 더 편할 것이다, 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캐런을 캐내는 것에 집중하다가 자꾸만 중심을 잃을 뻔한다.

“돌아가자.”

“…네.”

도나가 레이몬드의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저… 말하지 말아 주세요.”

“뭘?”

“캐런 아가씨한테요….”

도나의 목소리는 점점 조그맣게 줄어들었다.

“저… 진짜… 가기 싫어요.”

“…음.”

레이몬드는 매끈한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캐런이 도나를 매춘시킨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런 지저분한 일을 하기에 캐런은 너무 어리지 않은가. 그리고 도나와 캐런은 사이가 상당히 좋아 보였었다.

“캐런이 그럴 리가 없다.”

“…아가씨를 사랑하시는군요.”

여기서는 그렇다고 해야겠지. 우선 돌아가서 캐런을 좀 더 추궁해 보아야겠다. 아인 남작이 범인인 것 같지도 않다는 것부터 시작해야겠군.

“하지만… 보셨잖아요….”

“…….”

“아가씨 등이요. 만일… 제가 가겠다고 했으면, 어… 그러니까… 그럼… 아가씨는 맞지 않았을까요?”

레이몬드는 그제야 도나가 왜 그렇게 주눅이 들었는지 알았다. 그리고 약간 어이가 없어졌다. 도나는 자신이 몸을 팔았으면 캐런이 맞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넌 하녀고, 맡은 일을 하면 된다. 고용인이지 노예가 아니니까.”

“…하지만 레이몬드 님은 아가씨를 사랑하시니까.”

여기서 화를 냈어야 했나? 레이몬드는 여자들이 복잡한 것인지 자신이 이상한 것인지 알기가 힘들어졌다. 유대감은 이상하게 감정적으로 얽혀 있다. 같은 피해자로서의 공감대가 기형적으로 형성된다.

자신도 최소한 저 여자 정도의 애정은 보여야겠군. 레이몬드는 고민이 머리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여자를 잘못 만났다.

“무엇이 되었든 이번 일은 해결해야겠군.”

그녀의 약혼자로서.

캐런은 방에 없었다. 도나와 레이몬드는 이셀라의 방으로 올라갔다.

똑똑.

“…아가씨?”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도나는 문을 열었다.

“어…. 아가씨?”

젠장, 가지가지 하는군.

캐런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추궁하려고 들면 기절하거나 울며 알지 못할 소리를 하는 것은 질색이다. 그것 때문에 휘둘리는 것 또한 불쾌하다. 레이몬드는 얼굴을 찡그리고 도나가 급하게 달려가 캐런을 살피는 것을 보았다. 저 여자 때문에 자신은 헛수고를 했다.

“아가씨?”

“…….”

여기서 또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나? 레이몬드는 캐런의 옷 사이로 드러난 상처를 보았다. 아직도 제대로 처치되지 않아 피가 옷을 더럽히고 있었다. 알코올을 적신 거즈를 먼저 가져다 댔어야 할 텐데.

“아가씨?”

이셀라보다 캐런이 누워 있어야 어울릴 것 같군. 레이몬드는 장갑을 벗고 캐런을 향해 다가가 캐런을 옮기기 위해 목을 잡았다.

“…….”

“젠장.”

“왜, 왜 이러시죠?”

“듈란 신관님을 불러라, 당장!”

캐런이 숨을 쉬지 않았다.


 

이제 조금 있으면 레이몬드가 올 것이다. 캐런은 레이몬드에게 자신이 아는 범인을 말했다. 아인 남작은 범인으로 잡힌다. 이번에도 그럴까? 그렇게 돌아가야 일이 좀 더 편할 텐데. 캐런은 문을 잠그지 않고 닫았다. 등에는 피가 흐르고 있다. 질척이는 것이 기분 나빴다. 이번에는 어떻게 될까?

“이셀라, 레이몬드 경은 믿을까요?”

“…….”

“…….”

캐런은 이셀라를 본다. 그녀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녀는 반격하지 않는다. 그녀는 시체이며 라이벌이며 패배자다. 영원히. 대화는 필요 없다. 이셀라와의 대화는 독백이다. 이제 이것 또한 필요 없다. 혼자만의 주절거림은 진절머리가 난다. 이제 그녀는 레이몬드와 대화를 할 것이다.

똑, 똑.

링거의 수액이 떨어진다. 캐런은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리고 새로운 바늘을 꺼내들었다.

“내 추측이 맞다면.”

“…….”

캐런은 그것이 궁금했다.

저택의 불은 누가 질렀을까. 이제까지 불은 일어난 적이 없다. 캐런이 시도했을 때 언제나 발 빠른 하인들이 불을 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번에 불이 수습되지 않은 것은 하인들이 끄지 않아서이지 않겠는가.

“듈란.”

그리고 이셀라는 왜 일어나지 않을까.

이제까지 도망 다녔어도 이제 그는 다시 무대 위로 끌려 나와야 할 것이다. 캐런은 이셀라의 수액이 연결된 바늘을 들었다.

푹.

캐런은 자신의 팔에 바늘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고통은 없었다. 고통 전에 어두움이 깔렸다.

쿵.

레이몬드는 초조하게 캐런을 보고 있었다. 이성을 찾고 살펴보니 숨이 멎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호흡이 급격하게 느려지고 몸은 차가웠다. 등의 피 또한 멎지 않았다. 어설프게 소독하고 붕대로 감아 두었지만 제대로 된 처치를 하지 않았다. 여러모로 의사가 필요하다.

“난 지금 대체 뭘 하고 싶은 걸까.”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당장이라도 죽어 버릴 것 같은 여자를 가지고 뭘 하고 싶은 걸까. 정신이 불안하고 정략결혼의 상대이자 학대당하는 양녀. 사랑하기로 약속한 여자.

“…너무 늦는군.

피로 더러워진 손을 보며 레이몬드는 의아했다. 당장 달려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복도는 조용하다. 왜 아직도 아무도 안 오는 거지? 레이몬드가 초조함에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자 마침 도나가 숨을 몰아쉬며 방 앞으로 돌아왔다.

“기, 기사님.”

하지만 도나는 혼자였다. 도나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발만 구르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왜 너 혼자지? 신관님은 안 계시나?”

“그, 그것이요.”

“우선 말을 해라. 지금 이 저택 안에 계시나 안 계시나?”

“…계세요.”

“어디에?”

“베, 베르딕 주인님의 방에요.”

“지금 왜 안 오시지?”

“두 분이서 할 일이 있으시다고….”

“비켜라.”

레이몬드는 도나를 끌고 복도로 나왔다. 중앙복도와 계단을 내려가며 물었다. 도나는 허겁지겁 따라갔다. 추궁하는 시간 또한 아깝다. 레이몬드는 바로 걸음을 빨리했다. 복도를 뛰어 계단을 내려간다. 하인들과 하녀들이 급하게 뛰는 레이몬드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지만 그뿐이었다. 이 집에서 다급히 움직이는 건 도나와 레이몬드뿐이었다.

“…비켜 주길 바란다.”

캐런이 의심스럽다. 그녀에 대해 조사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 일이다. 레이몬드는 머리를 흔들었다. 베르딕의 육중한 방문 앞을 덩치 큰 하인이 막고 있었다.

“레, 레이몬드 님.”

“비키라고.”

“주인님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듈란 신관님만 불러내면 된다. 캐런 에반스가 쓰러져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한다. 의사가 필요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다려 주십시오.”

“젠장, 당장 나오시라고 해!”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커졌다. 하인은 귀족의 분노에 기겁했지만 그보다 무서운 것은 그의 주인이었다. 남자가 대답했다.

“잠, 잠깐만 부탁드립니다.”

하인이 겁먹은 눈으로 고개를 숙이고는 문을 두들겼다. 안에서 험악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인이 잔뜩 수그린 채로 문 안으로 들어갔다.

뻐억.

“당장 꺼지라고 전해!”

그리고 맞는 소리와 고함소리가 들렸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기 힘든 레이몬드는 문을 밀었다.

“아, 안됩니다.”

또 다른 하인이 레이몬드를 잡았다. 잔뜩 겁먹은 얼굴이었다. 이곳의 하인들과 하녀들은 온통 이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 아랫사람들까지 일일이 신경 쓸 수는 없다. 레이몬드는 하인을 거칠게 밀고 문을 열었다.

“듈란 신관님, 나와 주십시오. 캐런 에반스가 의사를 필요로 합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대답을 한 것은 듈란이 아닌 베르딕이었다. 베르딕이 씨근거리면서 레이몬드를 노려보며 대답했다.

“…레이몬드 기사님, 제 방에서 나가 주십시오.”

“신관님.”

무시당한 베르딕의 얼굴이 분노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레이몬드 세어어테스 경! 여긴 제 방입니다! 나가 주십시오!”

베르딕이 레이몬드에게 고함을 질렀다. 레이몬드는 방의 주인인 베르딕은 쳐다도 보지 않고 물끄러미 자신을 올려다보는 듈란을 보았다. 비쩍 마르고 창백한 청년이었다. 캐런의 친척이자 전 약혼자. 캐런에게 거절당한 남자. 현 하이어의 영주. 듈란은 무표정한 얼굴로 레이몬드와 눈을 마주쳤다. 레이몬드는 그에게 다가갔다.

“캐런 에반스가 숨을 쉬지 못합니다. 출혈 또한 심합니다. 조치가 필요합니다. 신관으로서, 의사로서의 의무를 부탁드립니다.”

“레이몬드 경! 당신은 지금 무례를 저지르고 있소! 나가시오!”

레이몬드는 베르딕의 입을 닥치게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당장은 듈란을 끌고 가는 것이 우선이다. 듈란은 손을 꿈지럭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제, 제가, 갈… 필요가 있을까요?”

“듈란 신관님.”

“캐, 캐, 캐런은, 그 여자는 전… 부터 그랬습니다. 신경 쓰지 않, 으셔도 됩니다.”

레이몬드는 이를 악물었다, 손을 들어 듈란의 멱살을 잡았다. 젠장, 젠장, 젠장. 욕이 나올 것 같았다. 동정하고 싶지 않은데 동정하게 된다. 결국 이 모든 행동은 캐런 에반스를 지극히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겠군.

“듈란 신관님. 의사는 판단하지 않는다 배웠습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간다면 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또한 신의 사랑을 베푸는 신관으로서도 그러는 것이 맞다 배웠습니다.”

“저,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 다.”

레이몬드는 듈란을 잡고 질질 끌었다. 판단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신성한 의무를 버리실 생각이십니까?”

널 버린 여자라서? 레이몬드는 이런 남자를 많이 봐 왔다. 군대에서 이런 남자는 많았다. 남자들끼리만 있으면 저열함을 자랑스럽게 보이는 사람이 많았다. 여자에 대한 복수심이라거나, 가학심이라거나, 그 수많은 부정적인 감정을 우선시하는 남자들. 하지만 신성한 의무보다 그런 것을 앞세우는 것은 레이몬드로서 용납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레이몬드는 폭력적인 선의를 휘두를 마음으로 듈란을 몰아붙였다.

“그 손을 떼고 나가시오!”

베르딕이 뒤에서 레이몬드에게 고함을 질렀지만 그것은 소음에 지나지 않았다. 듈란은 더듬거리면서 대답했다. 레이몬드의 눈을 피하며 수그러들었다

“그, 그, 그 정도로 죽지 않습… 니다. 쇼크가 왔… 다면 그, 전, 오전 중에 이미 증… 상이 나타났을 겁니다.”

그 대답은 레이몬드를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지금, 숨을 못 쉽니다. 직접 보고 진단해 주십시오.”

“해, 해, 행여 죽, 죽었다면… 제가 당, 당장 갈 필요도 없겠군요.”

레이몬드는 듈란을 벽으로 밀었다. 뼈가 부딪히는 듯한 소리가 났다. 듈란의 눈을 노려보며 레이몬드가 물었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지금 제 약혼녀를 보지 않으시면 당신은 제 손에 성치 못 할 겁니다.”

“레이몬드!”

베르딕이 레이몬드 뒤에서 어깨를 거칠게 잡았다. 하지만 잘 단련된 청년의 몸은 베르딕이 아무리 애를 써도 움직이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듈란만을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을 버린 여자라고 생각해서 죽어도 괜찮은 겁니까?”

“노… 놓아주십시오, 기사님.”

“싫습니다.”

레이몬드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듈란의 목을 잡았다. 그리고 베르딕을 끝까지 무시하며 방문 밖으로 그를 끌어냈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꺄아악!”

“시끄럽다. 비켜.”

쾅!

“이걸 놓, 놓.”

하인과 하녀들이 소란을 피웠지만 레이몬드를 막을 수는 없었다.

레이몬드는 방에서 나가기 전에 고개를 힐끗 돌려 베르딕을 노려보았다.

“베르딕 씨.”

“레이몬드.”

“전 당신에게 진 빚을 세 배 이상 갚았습니다. 그리고 이셀라 에반스 양이 그런 상태가 된 뒤에도 당신과의 계약을 준수했습니다.

“…하, 지금, 당신이 내게 한 짓을 보시오.”

“캐런 에반스는 이제 당신의 딸이자 제 약혼녀입니다. 존중하십시오.”

“내 딸은…!”

“알아들었으리라 믿습니다.”

두 청년이 문 밖으로 나서자 베르딕은 혼자 방 안에 남았다.

“…감히.”

툭, 툭.

베르딕은 분노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눈에 피가 몰려 시야가 흐려진다. 레이몬드는 그를 끝까지 무시했다. 감히, 감히 딸에게 사 준 불량품이. 그는 지금 베르딕을 무시하고 있다. 감히! 레이몬드 저 애송이 자식이! 베르딕은 이제까지 레이몬드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었다.

“감히 내게….”

베르딕은 주먹을 쥐었다.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엉망이 된 방 안을 치웠다. 레이몬드 세이어테스는 아직 베르딕을 모르고 있다. 베르딕은 결코 손해 보는 장사를 하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베르딕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이다. 그의 재산, 사랑, 목숨조차.

“…급, 급성 쇼크일 뿐입니다.”

레이몬드가 듈란을 강제로 끌고 와 캐런의 침대로 그를 처넣자 듈란은 캐런을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대충 넘기려는 기색이 보이면 폭력을 불사할 마음이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듈란은 천천히, 세심하게 캐런을 쳐다보고 등의 상처까지 전부 처치하고 나서 일어났다.

“왜 그런 것 같습니까?”

“야, 약을… 잘못 먹은 것 같습니다.”

듈란은 캐런이 눕혀진 침대 옆에 서서 레이몬드에게 말했다.

“앞으로 이, 이셀라 에반스의 간호는… 못하도록 해, 해야 겠… 습니다. 그녀에게… 맞는 약이 아닌, 아닌데.”

결국 캐런에게는 잘된 일이군. 레이몬드는 캐런을 내려다보았다. 듈란이 주사를 놓자 곧 색색거리며 편하게 숨을 쉬었다. 레이몬드가 보기에도 캐런에게 주어진 일과는 너무 많았다. 낮에는 노동과 밤에는 사교계 참석. 채찍질까지 얹어지니 약간 돌아 버릴 수도 있겠지.

어쩌면 다른 의사에게 데려가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하며 레이몬드는 한숨을 쉬었다. 여자를 잘못 골랐다. 잠을 자고 있는 그녀는 그 나이로 보였다. 그동안은 알 수 없는 생명체처럼 보였는데.

“…….”

“…….”

진찰이 끝나자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레이몬드는 이런 식으로 얽히는 것이 싫었다. 자신이 어쩔 수가 없는 문제 아닌가. 차라리 내 여자를 네가 감히! 하면서 결투를 신청하는 쪽이 편했다.

‘너무 뻔해서 안 하려나.’

상대가 듈란이라면 자신이 총을 꺼낼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듈란과 그런 애정 결투를 한다는 것 또한 좀 낯간지러웠다.

“듈란 신관님.”

“…예.”

캐런은 자신에게 베르딕에 관한 분노만 이야기를 했지 듈란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그리고 듈란 또한 이제까지 이셀라의 손님으로서 저택에 기거했기에, 서로 마주칠 일도 없었다. 그냥 그런 어색한 관계였다.

“듈란 신관님, 캐런 에반스를… 음, 그러니까. 사랑하십니까? 아, 그러니까… 음… 절 증오하십니까?”

“…….”

듈란은 침묵했다. 레이몬드는 한숨을 쉬었다. 결투라도 해야 하나?

“우리는 동맹 관계입니다. 전 캐런 에반스를 존중합니다. 그러니 그녀를 증오하지 마십시오. 애정은 그녀에게 속한 문제니 전 간섭하지 않겠습니다. 신관님도 그러시길 바랍니다.”

일이 끝나면 그 다음은 그녀가 선택하겠지. 레이몬드는 정말이지 그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았다.

“…레이몬드 기사님은. 좋은 분이시군요.”

듈란이 씹듯이 대답했다. 그 얼굴에는 너무 많은 것이 서려 있었다.


 

“…그렇습니까.”

어둠 속에서 들리는 누군가의 목소리. 이런 감각은 익숙해지려고 해도 익숙해질 수가 없다. 의식이 와해되고 혼란에 저어지는 감각. 어느 사람들이나 공통적으로 느끼는 그 죽음을 닮은 잠에 가까워지는 피곤함. 의식조차 무너져 흐려지는 공간에서 처음 떠오르는 건 피곤함이었다.

너무 피곤하다.

이대로 다시는 눈을 뜨지 않았으면. 하지만 또다시 빛은 들어오고 캐런은 눈을 뜰 것이다. 숨이 막힌다. 이번에는 누구야.

날 제발 내버려 둬.

외칠 수 없는 목소리. 누가 내 목을 조르고 있나? 혼란스럽다. 약의 냄새, 화약의 냄새, 그리고 향수 냄새. 괴롭다. 어지럽다. 누워서 눈을 감아도 어지럽다. 차갑고 어두운 공간에서 정신부터 해체된다.

“역시 …군요.”

차가운 손이 이마에 닿는다. 이마에서부터 냉기가 흐른다. 분명 사람의 손일 텐데도 차갑기 그지없다. 아버지의 손은 따뜻했는데. 지금은 차갑겠지. 시체가 된 아버지는 사랑을 찾아 떠났다. 참으로 부러운 어머니. 그렇다면 어머니는 사랑을 찾았고 어머니의 어머니는….

“오늘 밤의 약속은 그럼 혼자서….”

쉬는 건가? 캐런은 그 와중에도 약속이 깨지는 것에 의식이 명료해지는 것을 느꼈다. 계속 자도 되는 건가?

“열은 내렸습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머리 바로 위에서 들린다. 한동안 피해 다니더니 결국 끌려오는군. 영주씩이나 되어서 아직도 의사 노릇이나 하고 말이야. 그래서 넌 글러 먹었다는 거야.

“…수고가 많으십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

그렇군.

결국 자신은 쓰러졌다. 캐런은 마지막으로 이셀라의 방에서 일을 하다가 바닥이 가까워졌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그 이유 또한 분명했다.

“저, 정신을 차렸으면… 일어나지 그, 그래.”

“…….”

캐런은 자신의 옆에 누운 이셀라를 바라보았다. 캐런의 방에는 어떠한 의료 시설도 없기에 그녀 또한 이셀라의 옆에 누워 있었다. 캐런은 이셀라의, 그리고 자신의 팔에 연결되어 있는 주삿바늘을 본다. 하지만 그 안의 내용물은 다르리라. 캐런은 일어났고, 이셀라는 아직도 잠들어 있다. 캐런은 자신의 팔을 들어 듈란에게 보인다.

“내가 왜 기절했는지 너라면 알겠지.”

“…….”

바늘을 팔에 찔러 넣자마자 혼미해지는 시야를 느꼈다. 간신히 마지막 기운을 다해 통을 처리하고는 바닥에 그대로 처박혔다. 확신한다. 불타는 저택에서 이셀라를 끌고 나온 것은 듈란이었으나, 이셀라를 재우고 있는 것 또한 듈란이었다.

“베르딕 씨가 알면 어떻게 될까?”

캐런은 억지로 웃으면서 듈란을 보았다. 자신의 돈을 함부로 썼다는 이유로 가죽이 찢어져라 채찍질을 했던 베르딕이다. 그가 의지하고 있는 듈란이 베르딕의 딸을 저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면? 캐런은 그가 도끼를 들 것임을 의심치 않았다.

“…….”

듈란은 입을 다물고 캐런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답했다.

“내, 내, 내년에 보도록 하지.”

생각하지 못했던 대답이었다. 캐런은 순간 쥐어 잡던 이불을 놓았다. 저런 대답을 예상하지는 않았는데. 너무나 당연하게 캐런의 회귀를 인정하는 발언이었다. 신관이면서 의사로서의 어떠한 책임감도 없는 말. 아버지조차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불신을 드러냈었는데.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듈란의 믿음에 캐런은 말문이 막혔다. 어째서 저렇게 순전하게 믿을 수 있을까. 무엇을 알고 있는 걸까. 너무 담담한 대답에 오히려 말문이 막힌다. 하지만 속에서 조용히 분노가 타올랐다. 캐런은 애써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어머나. 놀랍기도 해라.”

듈란의 목을 조르면 어떨까? 캐런은 허옇게 보이는 듈란의 긴 목을 노려보며 고민했다. 캐런의 시선이 닿자 듈란은 목을 움츠렸다. 캐런은 이셀라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셀라 양을 왜 잠재우고 있니?”

“…너, 네가 죽… 이려고 했잖아.”

“응.”

“이, 이 여자는 죄가 없어. 주, 죽을 필요는, 없지.”

캐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대답은 이상했다.

“이셀라 양을 사랑해…? 음, 그건 아닌 것 같구나. 맞아. 이셀라 양은 죄가 없지. 하지만 죽어야 해. 음… 우선 내가 살인했다고 믿고… 얘 어깨, 내가 찔렀거든. 깨어나면 날 죽이려고 들 거야. 그래서 죽이려고 했고.”

캐런의 대답에 듈란이 더듬거리면서 대답했다.

“아, 알아. 그래서… 재우고 있잖아. 그, 그녀를 내버려 둬. 이제 이 여자는 무… 대에서 내려왔으니까.”

듈란은 이셀라를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은 성인이나, 사랑에 빠진 남자라고 추측하기에는 지극히 냉정했다. 그럼에도 듈란은 이셀라를 캐런에게서 보호하기 위해서 잠재우고 있다고 대답했다. 행여 자신이 베르딕에게 죽임당할 위험에 처한다고 하더라도. 그 기묘한 선행에 캐런은 역겨움을 느꼈다. 캐런의 시선을 눈치챈 듈란이 입을 열었다.

“네, 네가 알 필요 없는 이야기야.”

“…….”

“너, 넌 어차피 다시 시작할 테고. 나, 난 그냥… 이렇게 뒤에서 그걸 보겠지.”

듈란은 캐런에게 대답했다. 그의 말은 모순되어 있었다. 그는 선행과 악행을 동시에 행하고 있었다. 캐런을 이셀라에게서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그녀를 식물인간으로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에 그는 어떠한 의문을 품고 있지 않았다. 그저 네가 하고 싶으면 하든지, 내가 수습은 하지만 적극적으로 하진 않겠어, 라는 어정쩡한 태도였다.

무대 밑의 관객처럼. 이것도 저것도 하지 못하지만 그건 안 돼, 하지만 저것도 안 돼. 그건 너무 나갔어. 하고 참견하는 태도. 그것은 신관으로서의 의무일까? 하지만 순전히 믿는다면 그것조차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닐까. 캐런은 이셀라를 보면서 듈란에게 말했다. 베개 밑에 숨겨둔 가위를 꺼내 들면서. 캐런은 이셀라의 하얀 목에다 가윗날을 대고 듈란을 노려본다.

“그럼 내가 이셀라 양을 죽이는 것 또한 막지 마. 네가 믿는다면, 나의 다시 사는 삶을 믿는다면 내 죄 또한 아무 의미 없겠지. 넌 막으면 안 돼.”

도둑질한 자는 어린 양 한 마리를 바친다.

간음한 자는 어린 암소 세 마리를 바친다.

폭행한 자는 어린 암말 한 마리를 바친다.

살인한 자는 목숨으로 죄를 갚는다.

살인은 죽음 이외의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살인이 의미 없다면? 캐런은 그것이 궁금했다. 자신은 죄를 지을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유흥에 불과하다. 그래서 자신은 행했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후회하지 않는다. 그래서 캐런은 듈란에게 물었다.

“내게 죄가 있니?”

듈란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날 막지 마.”

하지만 듈란은 캐런의 팔을 잡았다. 캐런을 막는 행위였다. 듈란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손의 힘은 강했다.

“믿는다면, 넌 날 막을 이유가 없잖니?”

“주, 죽일 필요도 없잖아.”

“이유야 간단해. 그냥 심심해서야. 그럼 네가 죽어.”

“…어, 어떻게?”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그래서 캐런은 그에게서 확신을 얻었다.

잡았다.

듈란은 정말로 믿는다.

“어, 어떤 방식을, 원하지?”

듈란은 자신의 대답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아직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았다. 듈란은 자신이 사랑하기는커녕, 하찮게 보는 이셀라를 위해 죽는 것 또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캐런이 살인하는 것을 내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확실했다. 듈란은 믿는다. 너무나도 확실히. 그것은 듈란이 성인이라서가 아니다. 사랑이 넘쳐서가 아니다. 저 행위는 확신이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너, 뭘 알고 있어?”

캐런은 듈란의 팔을 붙들었다. 듈란이 팔을 뿌리치려 했지만 캐런은 듈란을 단단히 붙들었다. 놓칠 줄 알고?

“뭘 알고 있어?”

“…모, 몰라.”

듈란은 고개를 숙였다. 잘못한 아이를 보는 것 같았다. 캐런은 시선을 피하는 듈란을 붙들고 윽박질렀다.

“웃기지 마. 네가 모를 리가 없어. 그냥 아무 대가 없이 희생할 리가 없어. 그냥 믿을 리가 없잖아! 뭘 믿는 건데? 뭘 확신하는데?”

“나, 나, 나는 아는 것이 없어!”

“듈란!”

캐런은 일어났다. 가위는 바닥에 내려 두었다. 이것은 듈란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녀는 듈란에게 달려들어 매달렸다. 그는 캐런에게서 도망가고 싶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놓칠 수 없다.

“뭘 원해? 나랑 자고 싶어? 내 몸에 욕정을 풀고 싶어? 얼마든지 해도 좋아. 하고 싶잖아. 아니, 그게 싫으면 돈을 가지고 싶니? 얼마든지 구해 줄게. 응? 제발 아는 걸 말해 줘. 뭐든지 좋아. 추측 정도라도 괜찮으니 제발 하나라도 말해 줘. 원한다면 이번엔 너랑 결혼할게. 아, 지금 너무 상황이 그런가? 그럼 내가 이셀라를 죽일게. 그리고 날 데리고 신전으로 가. 성역에서는 아무도 체포할 수 없어. 거기서 날 가지고 마음대로 놀아도 좋아. 아니면 내 시체를 가지고 놀아도 돼. 그냥 뭐든….”

“저, 정신 차려.”

“지금 내가 제정신으로 보여?”

드디어 단서를 찾나 싶은 순간인데!

“차, 창녀처럼 굴지… 마. 나, 날 사랑하지도 않으… 면서.”

듈란의 대답에 캐런은 입이 벌어졌다. 어이가 없었다. 기가 찼다. 지금 듈란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믿는다고 하면서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이제 와서?

“듈란, 듈란, 자기야. 설마… 진심이야? 너 지금, 진짜로, 내가 지금 너나 레이몬드 따위가 내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지금 어느 남자랑 되느냐 같은 게 진짜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너 진짜 그렇게 머저리야?”

캐런은 듈란의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말해. 아니, 말해 줘,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구해다 줄게.”

내가 죽을 수 있도록 해 줘.

듈란의 얼굴은 기괴했다. 무엇인가 끔찍한 것을 본 것 같았다. 하지만 캐런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서 맞닿은 그의 하반신에서 흥분의 증거를 눈치챘다. 그것 봐. 넌 말과는 결국 다르잖아. 이 상황에서도 이렇잖아. 그의 하반신에 손을 가져다 대며 웃었다. 몸이면 싼 값이지. 하지만 듈란은 캐런을 떼어 냈다.

“이, 이, 이렇게 굴지 마.”

“왜?”

“이, 이, 이건…. 이건.”

“나랑 하고 싶잖아.”

네 말은 언제나 육체와는 어긋나지. 경멸의 말을 내뱉어도 욕정은 하잖아.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럴 테지. 캐런은 듈란을 알았다. 그에게 가장 좋은 수단은 몸이다.

“아, 아, 아냐!”

듈란은 거칠게 캐런을 밀쳤다. 흡사 겁간당한 처녀의 얼굴이라 캐런은 어이가 없었다. 듈란은 캐런에게서 떨어져서 옷을 가다듬었다. 씨근거리는 숨을 재운다. 눈가에는 거의 눈물이 맺혀 있는 것 같았다.

“…….”

“…….”

짜증 나네.

캐런은 듈란의 머리채를 쥐어뜯고 싶은 마음을 참았다. 처음부터 듈란을 죽도록 고문했어야 했다. 다음 생에서는 듈란이 잠들 때를 노려 기습해야지. 참자, 참자.

“너, 넌 아무도 사랑하지… 않지?”

대답을 요구한 질문은 아니었다. 듈란은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이, 이, 이제까지도 그랬… 겠지.”

“재미없는 이야기는 관두자. 옷 벗어. 아니면 입고 하고 싶니?”

듈란은 자기 스스로의 팔을 잡았다, 온몸이 경련하듯 떨리고 있었다. 듈란은 몸을 떨며, 목소리를 더듬으며 말을 했다.

“아, 아, 아직 나도 아는 것… 없어. 하지만 네가 속죄하고… 사람을 사랑한다면,”

“뭐?”

“정말로, 사랑에 빠, 빠진다면.”

듈란은 얼굴을 여전히 가린 채로 더듬거리면서 대답했다.

“지금,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넘길, 게. 히, 힘들어 보이지만.”

캐런은 그의 말에 코웃음을 참아야 했다. 아직도 듈란은 캐서린처럼, 그녀의 부친처럼, 로맨스 소설 놀이를 하고 있는 건가? 캐런은 듈란에게 다가가면서 말을 걸었다.

“야, 시답잖은 놀이 집어치워.”

“…….”

“그냥 나랑 자고 정보 내놔. 공짜면 더욱 좋고.”

하지만 듈란은 여전히 구석에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흡사 거의 우는 것처럼 보였다. 몸이 떨리고 있었다. 천치를 괴롭히는 질 낮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은 더러웠다. 누가 누구를 비난하는가?

“내, 내, 내가 아니야.”

“하.”

“나는… 아니야.”

듈란은 손을 내렸다. 예상과는 다르게 듈란은 울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을 시체처럼 굳히고 있었다.

“이, 잊지 마. 내가 인정할 정도로 사랑해야 해.”


 

레이몬드는 총을 내려놓았다.

캐런은 듈란을 죽이지 않았다. 이셀라 또한 죽이지 않았다. 그걸로 됐다. 캐런을 당장 죽여야 할 이유는 없다. 레이몬드는 듈란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 그녀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자신이 행해야 할 행동은 무엇인가.

레이몬드는 혼란스러운 이 상황이 싫었다. 좀 더 명확하기를 바랐다. 내일이 되면 좀 더 대화를 해야겠군. 추궁을 조금만 하려고 해도 캐런은 너무나 위태로웠다. 좀 더 안전한 곳에 놓고 지켜보아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의 저택은 너무나 멀었다. 괜찮은 곳을 고민한다. 어느 가문에 부탁을 해야 하나.

“…….”

그녀를 죽일 필요는 없다. 최소한 지금은. 레이몬드는 총에서 총알을 빼냈다.

“전 복잡한 것을 싫어합니다.”

“다행이네요. 저도 그래요.”

캐런은 졸린 눈을 비비면서 새벽부터 창문을 두드린 레이몬드를 맞이하며 말했다. 듈란에게서 사랑을 하라는 명령 아닌 명령을 받고 나서 머리가 복잡해진 탓이다. 캐런은 멍한 얼굴로 레이몬드를 맞았다.

“새벽부터 숙녀의 방에 찾아오다니 실례세요.”

“당신도 그랬잖습니까.”

“그건 그러네요.”

캐런은 눈을 비비고 창문을 닫았다.

“등은 어떻습니까?”

“별로죠. 그래도 어제보다는 낫네요. 약을 잔뜩 먹었더니.”

“다행이군요.”

“네. 레이몬드 경께서 베르딕 씨에게서 듈란을 데리고 오셨다고 들었어요. 고마워요.”

캐런은 도나가 흥분한 얼굴로 말한 것을 기억해 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사랑을 해.”

그리고 듈란은 그렇게 말했지. 하지만 그것이 가능할까? 이번에 레이몬드가 캐런에게 자신과의 만남이 베르딕에 대한 복수가 되지 않겠냐고 말했듯이 과거에도 레이몬드는 계획적으로 캐런에게 접근했음을 추측할 수 있었다. 설마 레이몬드가 과거에 캐런을 사랑하지 않아서 자신이 반복하는 삶을 사는 것인가? 또다시 고민에 빠진 캐런을 레이몬드가 불렀다. 캐런은 고개를 들었다.

“캐런.”

“네.”

“전 복잡한 것을 싫어합니다.”

“네.”

“그냥 말하세요.”

그래서 캐런은 그냥 묻기로 했다.

“레이몬드 경, 절 사랑하세요?”

레이몬드의 얼굴을 보자 캐런은 웃음이 날 것 같았다.

“미쳤습니까?”

“아 역시.”

잠은 확실히 깨는군. 캐런은 고개를 도리질하면서 이불을 돌돌 매고 침대에 앉았다. 창문이 열려 있어서 막 일어난 캐런에게는 공기가 싸늘했다. 그녀는 고개를 까딱이면서 물었다.

“사랑한다고 해 주세요.”

“왜요?”

“그냥요.”

“…사랑합니다, 캐런.”

“그리고 듈란 앞에서 그 말 좀 해 주세요.”

“당신은 진짜 잔인한 여자로군요.”

“…….”

욕이 나왔다. 레이몬드의 얼굴은 거의 혐오로 얼룩져 있었다. 역시 가장 좋은 건 듈란을 고문하는 것 같은데.

‘레이몬드 경! 듈란을 고문해 주세요!’

‘캐런 에반스를 정신 병원으로 보내라. 그녀는 주요 용의자니 엄중히 다루어야 한다.’

‘…….’

그러겠지? 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대답일까. 캐런은 혀를 차면서 물었다. 자신이 말하는 것이 부디 정상적으로 들리기를 바라면서.

“레이몬드 경, 제가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전 계속해서 다시 살아요. 전 그렇게 믿고 있어요.”

“아… 예….”

떨떠름하게 대답하는 레이몬드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솔직하게 무슨 생각 하세요?”

“당신이 돌았다는 것을 알았으면 손을 잡지 않았을 겁니다.”

“어머, 섭섭해라.”

아무래도 과거에도 그랬을 것 같았다. 캐런은 레이몬드가 생각보다 냉정하다는 것을 알았다. 레이몬드는 캐런에게만 다정했다. 그것을 뒤집어 보면 캐런에게만 내숭을 떨었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냥 듈란을 고문해 힌트를 얻는 것이 가장 쉬울 방법 같은데, 듈란은 자신을 보호할 테고 레이몬드는 그녀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죽음조차 의미 없어 하는 듈란에게 어떠한 협박이 먹힐지 캐런으로서는 자신이 없었다.

“캐런.”

“네.”

“말 하세요.”

“레이몬드 경은 과거의 반복되는 삶에서 몇 번이고 저와 결혼했어요.”

“…음, 네….”

“계속해서 저에게 사랑한다고 하셨고, 계속 기억하겠다고 약속하셨어요. 하지만 한 번도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죠.”

“그… 렇군요.”

그러면서 레이몬드는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웃음을 참는 얼굴이었다. 만일 캐런이 하이어 저택에서 그런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레이몬드는 분명 이 시점에서 크게 웃었을 것이다. 그는 과거에도 그랬다. 웃고, 그럼 다시 사랑하겠다면서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지금 그를 보면 어떤가. 캐런은 한숨을 쉬었다.

“당신이 그럴 것 같아서 고민하고 있었어요.”

“무엇을 말입니까.”

“그런 얼굴로 쳐다볼 줄 알았다구요. 안 미쳤다니까요?”

계속해서 반응이 저걸 어쩌면 좋냐, 하는 얼굴이니 문제다. 레이몬드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좋습니다.”

“뭐가요?”

“말했듯이 저는 복잡한 것이 싫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어기는 것 또한 내키지 않군요.”

캐런은 멍하니 대답했다. 일 처리가 군인 같군.

“깔끔해서 좋네요.”

“그러니까, 아인 남작님과 다시 내기를 해 주시길 바랍니다. 당신 하녀가 덜덜 떨더군요. 확실하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짓밟아 주십시오.”

“저 아직 등이….”

“돈은 제가 내겠습니다.”

그리고 레이몬드는 주머니를 꺼냈다. 덜거덕, 묵직한 무게감이 캐런의 침대로 떨어졌다. 캐런은 금화가 가득 든 주머니를 보며 입을 벌렸다.

“이거 레이몬드 경 1년 치 봉급이네요.”

말 그대로 피땀 어린 돈이었다. 상원 의원이 될 미래에 비하면 푼돈이었지만, 베르딕에게 돈을 갚고 난 지 얼마 안 된 그로서는 꽤나 아쉬울 돈이었다.

“네. 그 정도는 판돈으로 내겠습니다. 이걸로 이기세요. 그럼 저는 무조건 당신을 믿고 돕겠습니다. 시체니 뭐니 더 이상 징그러운 장난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래 봤자 죽을 사람은 죽어요. 아직….”

“그만. 그 뒤로 아인 남작님에게 사람을 붙였습니다. 이상한 행동은 아직까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전 솔직히 당신을 믿지 못하겠지만… 당신이 아인 남작님을 다시 카드로 철저히 이긴다면, 전 당신을 돕겠습니다. 그것이 약속입니다.”

캐런은 레이몬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람들은 당황으로 웅성거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캐런은 눈을 감았다. 이런 방식으로는 해 보지 않았다. 미약한 흥분감이 손끝에서 올라왔다. 카드 게임은 이미 수십 년 전에 질렸었다. 다시 이 종이들은 만지면서 흥분에 감돌 줄이야.

“확실히 해 주길 바란단다. 후회하지 않니?”

“자신 없으세요?”

“…….”

아인 남작은 입꼬리를 비틀면서 웃었다. 어린 캐런이 하는 도발에 넘어가는 것은 어른답지 못한 일이었지만, 이렇게까지 나온 이상 거절하는 것은 더욱 우스운 일이 될 것이다.

캐런은 주변의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멀리서 귀즈 왕세자가 보였다. 결국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다. 백작, 공작, 왕족까지. 캐런은 카드를 집었다. 볼 필요도 없다. 이길지 말지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레이몬드에게서 동정을 살지, 어떤 식으로 해야 더 많은 답을 얻을까 고민할 필요도 없다. 답은 하나다. 캐런은 이기고, 아인 남작은 진다.

“카드를 돌리겠습니다.”

“…….”

몇몇 귀족들은 뒤에서 캐런의 어리석음을 비웃었고, 몇몇은 아인 남작을 비난했다. 하지만 몇몇은 기대를 했다.

“…카드는 보지 그러니.”

“볼 필요도 없어요. 전 운에 맡기기로 했어요.”

“날 너무 우습게 아는구나.”

“전 오늘을 위해 새벽 기도까지 하고 왔답니다.”

캐런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카드를 냈다. 볼 필요도 없었다. 모든 수를 캐런은 읽고 있었다. 그리고 레이몬드가 깔아 준 판이다. 레이몬드가 그녀를 의심하지 않고 믿게 하기 위해서, 그녀를 돕기 위해서, 당신은 져 주어야 한다.

판이 돌았다.

처음에 아인 남작은 얼굴이 굳었고, 그 다음에는 헛웃음을 지었으며, 마지막에는.

“…점수를 내겠습니다.”

비명을 질렀다.

“아… 안 돼, 안 돼!”

아인 남작의 얼굴은 잿빛이 되었다.

캐런은 77배를 땄다.

파산, 파산이다. 아인 남작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현금으로도 모자라 저택을 팔아야 할 판국이 되었다. 머리가 새하얗게 변한 아인 남작은 테이블의 카드를 흩뜨렸다.

“이… 이건 사기야! 무효야! 말도 안 돼! 전부 봤잖은가!”

“아인 남작님.”

“네,네, 네놈 레이몬드! 네가 꾸민 거지? 네 약혼녀와 꾸민 거지? 이건 말도 안 돼!”

“세상에, 아인 남작님. 패배를 인정하세요.”

엘바 백작 부인이 새초롬하게 부채 너머로 웃으면서 비아냥거렸다. 아인 남작에게 거금을 빼앗긴 그녀로서는 이 상황이 너무나 재밌어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었다.

“말도 안 돼! 다들, 다들 봤잖은가? 이게 말이 되나?”

“그거 참 신기하군요….”

“어쩌면 저럴 수가 있지?”

“자기 어머니를 닮은 거지.”

“사기가 분명해.”

“솔직히 카드를 안 보고 저런다는 건….”

이런, 너무 승리에 취했나. 캐런은 어깨를 으쓱하고 레이몬드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이 어떻든 그녀에게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캐런은 내기에서 이겼다. 그리고 이제 그 대가를 받을 것이다. 레이몬드의 신뢰를.

“…….”

하지만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그는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한 거니?”

“캐런? 레이디 캐서린의 딸?”

“그 다음에는 나와 한 번….”

흥분한 관중들이 캐런을 에워쌌다. 캐런은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싸여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다고!”

고함을 지르는 아인 남작은 애처로울 지경이었지만 그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기든 지든,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캐런이었다. 사람들은 캐런의 승리를 환영했다. 그것은 재미있는 이야기였으니까. 캐런은 적당히 사람들에게 인사하다 이리저리 떠밀렸다. 결국 캐런을 레이몬드가 건지다시피 하고 나서야 편히 쉴 수 있었다.

그리고 레이몬드는 그녀를 믿기로 약속했다.

대가였다.

“짐 싸세요. 이제 베르딕 씨에게 더 이상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 제대로 등 돌리시는 건가요?”

“네. 이제 당신도 책임지셔야 합니다.”

“사랑의 도피 같네요.”

“…그렇군요.”

캐런은 웃었다. 그리고 짐은 없었다. 어차피 그녀의 소지품들은 전부 베르딕의 것이었다. 하녀들만이 자신들의 짐을 챙겼다.

“갑시다. 이젠… 베르딕 씨와 정말로 적이 됩니다.”

캐런은 레이몬드의 손을 잡았다. 레이몬드는 순간적으로 흠칫 놀랬지만 이내 캐런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고개를 돌려 에반스 저택을 노려보았다. 베르딕이 창가에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캐런은 두려움에 떠는 듯한 얼굴을 하고 얼굴을 숙였다. 듈란이 있을까 했지만 듈란은 없었다.

과연 레이몬드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하지만 캐런에게 그것은 이제 중요해졌다. 최소한 듈란이 인정할 정도는 흉내 내어야겠지. 레이몬드의 손은 따뜻했다. 그것은 마음에 들었다. 그는 아직도 캐런의 기사였고, 베르딕에게서 그녀를 구해 내었다. 모두가 레이몬드가 캐런을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듈란도 조만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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