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4. 이단자의 고백 (13/31)

04. 이단자의 고백


 

“틀렸습니다. 이건 못 살려요.”

검은 피를 토하는 시온을 진찰한 의사는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죄송합니다. 불가능 합니다.’ 시온은 독을 먹었다. 그것은 사고나 우연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든 식사였다. 약간의 우연이 아니었다면 숨이 끊어지는 것은 레이몬드였을 것이다. 계산된 살의가 담긴 식사. 레이몬드는 의사에게 다시 물었다.

“어떻게 방법이 없습니까?”

“죄송합니다. 폐가 굳어 가고 있습니다. 이건 불가능합니다.”

레이몬드는 검게 변해 가는 시온의 얼굴을 보았다. 점점 숨이 잦아들고 있었다. 많이 봐 온 얼굴이다. 시체의 얼굴. 하지만 익숙해지면 안 되는 색이다. 하지만 경험은 레이몬드를 매달리지 못하게 한다. 오열하지 못하게 한다. 레이몬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생각한다.

“죽기 전에 고해성사나 하게 해 주십시오.”

그것이 그가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친절일 것이라고. 의사는 그렇게 레이몬드에게 충고했다.

대성당에서는 끊임없는 기도가 이어진다. 회랑을 따라 걸으며 사람들의 기도를 듣는다. 사람들은 신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구했다. 저에게 부를, 저에게 사랑을, 저에게 영생을.

구원을 원하는 기도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신이시여 저희를 굽어살피소서. 높은 천장으로 사람들의 기도가 올라간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소서. 하지만 성당의 천장은 너무나 높았다. 사람들의 기도는 끝없이 올라간다. 신에게 닿을 때까지. 과연 그 기도는 닿을까. 레이몬드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너무나 멀었다.

“…….”

그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기도보다는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그는 기도를 하려 했지만 기도의 축복은 그에게 내려지지 않았다. 만일 그가 원하는 답을 받지 못한다면 시험에 들지 않을까 두려움이 들었던 까닭이다.

레이몬드는 언제나 시험을 받고 있는 기분이었다. 다른 이들에게도 인생은 언제나 어려울까. 하지만 레이몬드는 자신의 문제는 남들에 비해 좀 더 어려운 것 같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기다림은 고통이며 고통은 시험에 빠지게 한다. 레이몬드는 이마를 짚었다. 이런 시간은 싫다. 생각에 빠지게 한다.

“레이몬드 세이어테스 경.”

다행히 그 기다림은 곧 끝이 났다.

레이몬드 옆에 누군가가 다가왔다. 젊은 견습 수사였다.

“듈란 신관님께서 오셨습니다.”

견습 수사가 조용히 레이몬드에게 알렸다. 레이몬드는 고개를 돌렸다. 성당의 계단 끝에서 레이몬드가 기다리던 사람이 보인다. 듈란 로이드다. 레이몬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이몬드는 듈란을 만나기 위해 왔다. 그의 창백한 얼굴이 보인다.


 

“오셨습니까.”

레이몬드는 반갑다고 하려다가 그와 그런 인사를 하는 것이 맞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좀 더 평범한 인사를 하며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십니까, 듈란 님. 오랜만입니다.”

“…….”

하지만 듈란은 손을 내려다보더니 몸을 돌렸다. 예의 없고 무례한 태도였다. 레이몬드는 내민 손을 어색하게 내렸다. 견습 수사가 옆에서 민망한 얼굴로 레이몬드에게 대신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저분이 좀… 기사님께서 이해를 해 주십시오. 원래 저분이….”

숫제 허리를 숙이려는 모양이라 레이몬드는 자제를 시켰다. 그가 사과할 일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 기분 나쁜 것은 아니었다. 듈란은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주었으니까.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소한 일이다. 헤이몬드는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견습 수사에게 더 큰일을 물었다. 본론을 먼저 들어야 한다.

“시온 경은 무사합니까?”

그 젊은 기사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 때문에 휘말린 부하가 살아 있는가였다.

“예.”

그리고 견습 수사는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다. 부하를 걱정하는 레이몬드를 흐뭇하다는 듯이 본다. 빙그레 웃는 그의 얼굴을 보고 레이몬드는 급히 듈란의 뒤로 따라갔다.

“신관님.”

“…….”

“듈란 신관님.”

듈란은 잠시 멈추고 레이몬드를 힐끗 쳐다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레이몬드를 막거나 하지는 않았다. 거절하기 위해 입을 여는 것이 어려운 탓이다. 레이몬드는 듈란을 따라가면서 말을 이었다.

“시온 경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의 인사였다. 하지만 듈란은 레이몬드를 힐끗 쳐다보면서 내뱉듯이 말을 했다.

“…해야 할 일일 뿐입니다.”

“감사를 표하는 것도 해야 할 일입니다.”

레이몬드는 손을 잡으려고 했지만 듈란은 뒤로 물러났다.

“그럼 이제… 가십시오. 자, 잘 알았으니까요.”

듈란은 레이몬드를 불편해하는 것 같았다. 사실 불편해도 이상하지 않을 관계다. 그들을 묶고 있는 건 캐런이라는 여자 하나였으니까. 캐런이 아니었다면 그들이 엮일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인연이 생겼다. 그리고 레이몬드는 그 끈을 좀 더 잡기로 했다.

“시온 경의 몸 상태에 대해 더 물어도 되겠습니까?”

“크, 큰 문제없을 겁니다.”

듈란이 물었다. 두 눈이 마주친다.

“이, 이미 사람을 보냈을 텐데요. 왜 여,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그는 레이몬드에게 이곳에 온 이유를 묻는다. 레이몬드는 그를 보며 말했다.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알았으니, 도, 돌아가십시오.”

“신관님.”

“다, 다른 이유가 이… 이, 있습니까?”

첫 이유는 시온이었다. 하지만 그것뿐이 아니었다. 듈란은 그것을 안다. 레이몬드는 약간 부끄러워져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자신이 온 것은 좀 더 다른 이유였다. 뒤의 이유가 더 중할 수도 있었다.

듈란이 지적하지 않더라도 레이몬드도 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그것이 이내 자신의 부끄러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듈란과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가 피하고 싶어 할지라도.

“고해성사를 하고 싶습니다.”

“…지, 지금은 제가 좀 바쁘군요.”

듈란이 레이몬드를 명백히 피하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미루기에는 시간이 없다. 그에게 허락된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 그는 가늠할 수 없다. 귀즈 왕세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레이몬드는 듈란과 이야기해야 했다. 확인해야 했다.

“언제 시간이 나십니까?”

“그… 그, 글쎄요.”

“시간이 나실 때까지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듈란의 얼굴이 대놓고 불쾌감을 표했지만 레이몬드는 두 손을 내밀었다. 자신은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고해성사를 하고 싶습니다.”

“…….”

“지금 당장이요.”

결국 레이몬드는 계속 쭈뼛거리는 듈란을 고해소로 몰이하듯이 몰고 갔다.

타악.

습하고 서늘한 공기가 느껴진다.

어두운 고해소는 늙은 떡갈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짙고 무거워 사람의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듯했다. 레이몬드는 앉아서 눈을 감았다. 약간의 틈 너머로 듈란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면서.

본당이 아닌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한적한 뒤편에 있는 이 고해소는 고해를 하는 사람이나 듣는 성직자의 신원을 전혀 가려 주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이 쓰고는 했다.

“…전 당신에게 고해성사를 하러 왔습니다.”

보라색 영대를 엉거주춤 걸친 듈란이 건너편에 앉아 있는 것을 보면서 레이몬드는 입을 열었다. 듈란은 고해성사를 듣는 것이 흔히 있는 일 같지 않았다. 모든 것이 어색해 보였다. 하지만 듈란이 자리에 앉아서 레이몬드와 마주하자 레이몬드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과 이 남자는 무슨 관계일까. 하이어 저택에서 마주한 그때는, 약간 사회성이 떨어지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레이몬드는 캐런과 얽힌 그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어려웠다. 하지만 그에게 확인받아야 할 것이 있다.

“전 죄를 지었습니다.”

“어… 떤 죄를 지으셨습니까.”

“…사람을 죽였습니다.”

레이몬드는 그에게는 인사치레가 되는 죄를 고했다. 그것은 본론이 아니다. 레이몬드도 듈란도 그것을 알았다. 살인은 가장 큰 죄이지만 그것이 직업인 사람에게는 아니다. 그에게 더 큰 죄는 따로 있다. 레이몬드는 살인보다 더 큰 죄를 생각했다.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의심하고 계, 계십니까.”

레이몬드는 듈란을 보았다.

“듈란 신관님. 당신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듈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 당신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캐런 하이어를 도와 사람을 죽이고, 시체를 은폐하고, 불을 질렀으며, 이셀라 에반스를 저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레이몬드는 틈 너머로 듈란의 검은 눈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제 죄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둘 사이로 성가가 울려 퍼졌다.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음악이었다. 레이몬드는 듈란을 보았다. 듈란도 레이몬드를 보았다. 복도에서와는 다르게 그는 피하지 않았다.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듈란은 속내를 알 수 없는 눈으로 레이몬드를 보았다. 그리고 대답했다.

“…당신은 용서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겨, 경의 의심은 합당하니까요.”

“그러십니까.”

레이몬드는 듈란의 답을 들었다.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그도 듈란의 대답을 예상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날의 화재는 역시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레이몬드는 고개를 숙이고 손을 겹쳤다. 짐작했던 이야기를 확인한다 하더라도 생소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레이몬드는 자신의 가슴 부근이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

레이몬드는 눈을 감았다. 귓가에서는 저 멀리 본당에서의 성가가 들린다. 축복하라. 어울리지 않는 성가가 울려 퍼진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자신의 가슴에 있을 수 없는 감정이 샘솟는 것을 느낀다. 레이몬드는 눈을 떴다. 상기된 얼굴의 듈란이 보였다.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더, 더 고백할 것이 있으십니까?”

“지금도 신관님을 믿지 못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예?”

그는 모든 태도가 어설펐다. 거짓말까지도. 그의 대답으로 레이몬드는 확신할 수 있었다. 듈란은 침묵으로 무엇인가를 감추려 하지만 레이몬드는 알았다. 그 안의 내용까지는 몰라도 레이몬드가 확인하고자 한 것은 그걸로 충분했다. 레이몬드는 고개를 들어 듈란을 보았다. 그는 약간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제가 알지 못하는 제 죄도 주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레, 레이몬드 경?”

“시온의 일은 감사드립니다. 잠시나마 신의 도구인 당신을 의심한 것에 대해 당신에게도 사과드립니다.”

레이몬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듈란의 얼굴이 변했다.

“지, 지금.”

“당신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 못 됩니다.”

그건 자신 같은 사람이나 하는 것이다.

“고해성사를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

레이몬드를 따라 듈란이 고해소를 나왔다. 밝은 곳에서의 그는 더 볼품없어 보였다. 마른 팔을 뻗어 레이몬드를 잡는다.

“…왜… 오신 겁니까?”

“제 죄를 고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역시 제 생각이 틀렸음을 알았기에, 죄를 고백하고 돌아가려고 합니다.”

레이몬드는 듈란의 대답으로, 캐런을 옹호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보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시온에 대한 감사도 했고. 하지만 듈란은 레이몬드를 잡았다. 얼굴이 일그러졌다.

“죄, 죄가, 죄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 그렇군요.”

“당신의 의심은… 죄가… 아니라고.”

팔에 힘이 들어간다. 하지만 그것은 잘 단련된 군인인 레이몬드에게는 미약할 뿐이었다.

“제 상황에서 의심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한 것뿐이시군요.”

“제, 제가….”

레이몬드는 듈란의 팔을 잡아 부드럽게 떼었다.

“죄송합니다, 듈란 신관님.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제, 제가 그 군인을… 살렸기 때문입니까? 제, 제가 사람을 죽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확신하시는 것입니까?”

듈란은 자신이 시온을 살림으로써 역으로 의심을 산 것이냐고 물었다. 자신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위인이 못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냐고. 그건 마치 자신이 겁쟁이로 보이느냐고 말하는 것으로 들렸다. 위악하는 자의 태도였다.

“저런, 신관님. 사람을 살리신 것을 후회하시는 겁니까?”

“…….”

듈란의 얼굴은 그런 것처럼 보였다. 레이몬드는 약간 씁쓸했다. 선의에는 선의로. 그런 세상이 마땅하다고 믿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설교와 실제는 다른 법이다.

“신관님. 너무 크게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걸음은 곧 멀어졌다. 이내 복도에는 어떠한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성가가 들린다. 여기의 소리도 밖에 들릴 수 있다. 레이몬드는 듈란의 어깨를 잡았다. 떨림이 느껴진다. 나름대로 진정하라고 한 행동이었지만 위협 이상이 되지 않는다. 레이몬드는 듈란의 귓가에 작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레이몬드는 자신의 죄를 지고 살기로 결심했다.

레이몬드 세이어테스가 여자를 보는 기준은 단순했다. 외모 하나다.


 

레이몬드 세이어테스는 평범한 사내아이였다.

상당히 얼굴이 곱상하기는 했지만, 어린 시절의 소년들 중 아름다운 아이들은 많으니 그가 유달리 특이한 것은 아니었다.

태생이 귀족이니 주변에는 깔끔하고 부유하게 입는 영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이 자기들의 영지와 가족들 앞에서는 진흙투성이로 놀기 일쑤인 것처럼 레이몬드 또한 그러했다. 그래서 그가 어린 시절에 유달리 남들과 달랐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시골의 남자아이들이 으레 그렇듯이 얼굴의 곱상함은 쓸모없는 것이라 믿었으며, 치장보다 몸싸움을 하며 지내는 것을 더 즐기는 소년이었다. 그 시절 그는 ‘너 참 잘생겼구나’ 하는 칭찬을 들으면 앞에서는 감사의 인사를 하면서도 밤에는 해적 선장처럼 얼굴에 흉이 있는 것이 멋지지 않을까 하며 눈가에 낙서하고 잠들고는 했다. 그에게 얼굴이란 그 정도였다.

몸놀림이 빠르긴 했지만 사람들은 거기서 군인이 된 모습을 상상하지 못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세이어테스 남작가의 레이몬드의 명성보다는 고기나 양털 등의 가문의 주요 산업에 더 관심을 보였다.

영지의 양들은 튼튼했고, 날씨는 좋았으며 사람들은 느긋했다. 영지의 수입은 안정적이었으며, 정계에서는 약간 밀려났지만 그야말로 평화로운 땅의 아들이었다. 부친은 용감했고 모친은 온유했으니, 그들의 어린 자식이 튼튼하고 친절한 성품을 지니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외모와 건강, 성품과 지능을 다 갖추었으며 부모와 형제가 그를 아꼈으니 그의 미래가 빛날 것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레이몬드, 커서 뭐가 되고 싶니?”

레이몬드의 형은 일찍이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었기에 레이몬드는 자신의 미래를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영지와 재산의 대부분은 후계자가 받더라도, 차남은 최소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어린 레이몬드는 그것을 더 멋지다고 여겼기에 문제는 없었다. 인생에는 시련이 있는 법이라고 믿는 아이다운 치기였다. 그래서 레이몬드는 학자가 되기를 원했다.

“전 공부를 더 하고 싶어요.”

그의 형과는 반대되는 태도에 부친은 껄껄거리면서 웃었다. 평생 연구하며 세상의 진리를 좀 더 알고 싶다는 레이몬드의 소원은 모범적이었으며 순수했다. 돈을 버는 것도 아니었으며, 예술에 미치는 것도 아니었고, 신관으로서 세속과 타락 사이에 고통받지도 않는다.

“쉽지 않을걸.”

“왜. 형, 시비 걸지 마.”

“미남은 세상 사는 게 고달프거든. 네가 열다섯 살만 되어도 여자들이 널 가만두지 않을 거다.”

“형은 그렇게 사나 봐?”

“물론이지.”

남작 부인이 레이몬드를 쓰다듬었다.

“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살렴. 하지만 공부는 쉽지 않을 거야.”

푸르른 유월이었다. 레이몬드는 여타 행복한 가정의 아이들이 그러하듯 가족을 사랑했다. 햇살이 나뭇잎들 사이로 쏟아져 내렸고 새하얀 양 떼들이 초지 사이에서 놀고 있었다. 몇몇 목동들이 구경하는 남작 부부에게 손을 흔들었다. 레이몬드는 자신이 행복한 것을 모르고 행복했다.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리고 모든 일이 그러하듯 그런 시절은 일찍 끝나기 마련이다.

“머리가 아파….”

“어머니?”

어느 날 모친이 편두통을 호소하며 얼굴에 인상을 썼다. 고운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남작 부인은 침대에 누워 정신을 잃었다. 의사들이 급하게 찾아왔다. 레이몬드는 남작 부인에게 다가가려고 했지만 그의 형이 그 발길을 막았다.

“안 돼.”

“왜? 형은 들어가면서.”

레이몬드가 인상을 썼지만 통하지 않았다.

“난 어른이니까 괜찮지만 넌 어려서 안 돼. 네 방에 가서 기도나 해.”

“아버지! 형이 절 막아요!”

레이몬드는 아버지의 바지를 붙잡았지만 부친의 얼굴도 심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남작은 레이몬드의 손을 떼어 내고는 꼭 잡았다. 손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남작의 얼굴은 레이몬드가 더 떼를 쓰기 어렵게 만들었다.

“레이몬드. 형의 말을 듣거라. 그리고… 의사가 왔으니 괜찮을 거란다. 잠깐 동안만 부탁한다.”

“왜 전 못 들어가죠? 왜 어머니가 아프신 건데요?”

“나중에 알려 주마.”

어른들은 방으로 들어갔다. 레이몬드는 혼자 배제된 것이 서러웠다. 그도 가족이었고 어머니를 걱정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포기하지 않고 방 밖에서 문에 귀를 댔다. 레이몬드는 방 밖에서 의사와 남작이 하는 말을 들었다.

“위험합니다, 남작님. 지금 다른 지방에서도 이유 모를 고열 때문에 환자가 급속도로 늘어났습니다.”

의사의 말에 남작이 근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레이몬드는 들은 적 없던 근심 어린 목소리가 생소했다.

“방법은?”

“지금 확신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우선은 당장 다른 사람들에게서 격리해야 합니다. 위험하니 어리거나 나이 많은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고는 레이몬드는 신전에 맡겨졌다. 친척인 노신관이 한동안 그를 돌봤다. 레이몬드는 제단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지만 불안해하지는 않았다.

“레이, 괜찮니? 힘들겠지만 우리 같이 기도하자꾸나.”

“괜찮아요, 신관님.”

레이몬드는 자신보다도 불안해 보이는 신관의 손을 잡았다.

“신관님. 엄마가 돌아가실 리가 없잖아요. 믿는 사람은 불안해하지 않는 것이래요. 신관님이 그렇게 가르쳐 주셨잖아요.”

세이어테스 남작 부인은 착한 사람이었다. 레이몬드는 어머니가 죽을 리가 없다는 확신에 차 있었기에 불안해하지 않았다. 남작 부인은 여느 때와 같이 빈민 구제를 위한 봉사 활동을 하다가 지쳐서 아플 뿐이었다. 전염이 되었다 하더라도 다시 신이 그녀를 불쌍히 여겨 그녀의 병마를 거두실 것이다.

착한 사람이 착한 일을 하다가 죽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레이몬드의 세계는 그렇게 이루어져 있었다. 착한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

레이몬드는 신관이 아무 말 하지 않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다. 그것은 불안감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자신을 사랑해 주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어린 레이몬드는 전보를 받고서도 한참 동안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신관은 전보를 전해 주었다. 레이몬드는 그 쪽지를 받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아이들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신관은 비명 소리나, 울음소리가 들릴 것을 예상했지만 레이몬드는 그저 한참을 침묵하고 물었다.

“부모님을 뵐 수는 없나요?”

그러니까, 시체라도 말이에요. 레이몬드는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때의 레이몬드는 슬픔도 잘 알 수 없었다. 현실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관은 그것을 어른스러움이나, 예절로 생각했지만 레이몬드는 이 또한 많은 부모님을 잃은 여느 아이들과 같은 반응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현실감이 없기 때문에 비애감은 당장의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레이몬드는 자신의 부모를 다시 보고 싶었다.

“입관 전에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어요.”

신관은 레이몬드에게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힘들 것 같구나. 전염병에 걸려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모습이 많이… 변하셨단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레이몬드는 반항적인 눈빛으로 대답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구요. 신관님, 제게 부모님과 마주할 시간을 주세요.”

“안 된단다.”

“어리기 때문인가요?”

“전염병이기 때문이야. 네게 감염될 위험이 있단다.”

레이몬드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건 남작 부부가 땅에 묻히고도 한 달이 지나서였다. 그리고 레이몬드의 형이 새로운 남작이 되었다. 신관은 레이몬드를 보내기 전에 당부했다.

“남작은 변했단다. 너무 놀라면 안 된다.”

“네.”

그리고 레이몬드가 집으로 돌아가자 자신의 형인 세이어테스 남작이 그를 새로운 얼굴로 맞이했다.

“돌아왔구나, 레이몬드.”

“…오랜만이야, 형.”

신관의 말은 지나치게 축소된 것이었다.

레이몬드는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남작의 얼굴에서 형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다.

한창때의 청년인 남작은 전염병에 죽지는 않았지만, 얼굴은 그 흔적을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피부가 얼룩덜룩해지고, 코는 변형되었으며, 몸은 마치 산더미처럼 부어올랐다. 목소리마저 억눌린 것처럼 흘러나왔다. 이전의 총명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몰골이었다.

“형이 살아 있어서 기뻐.”

레이몬드의 말에 남작은 자신의 동생을 살에 눌려 작아진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네 방으로 가라.”

그 목소리는 짐승의 신음처럼 들렸다. 레이몬드는 자신의 방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올라갔다. 형제들 사이에는 부모를 잃은 것에 대한 어떠한 위로도, 공감도 없었다. 그러기에는 당장 잃은 것이 너무 많았다.

“큰 도련님… 남작님은 곧 나아지실 겁니다.”

하인 중 하나가 레이몬드의 짐을 들면서 말을 건넸다. 레이몬드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남작님도 많이 힘드시니까요. 이럴 때일수록 형제가 서로 도우면 분명 더 좋아질 겁니다.”

끼이익.

레이몬드는 자신의 텅 빈 방을 보고 잠시 자신이 잘못 들어온 것이 아닌가 고민했다. 하지만 잠시 뒷걸음질 쳐서 위치를 확인해 봐도 틀림없는 자신의 방이었다.

“내 물건들이 하나도 없네?”

“전염병 때문에 다 태우라 지시하셨습니다.

“…그래.”

레이몬드는 낯선 침대에 누웠다. 거친 천이 덮여 있었고 급하게 만든 듯 침대의 틀은 거칠었다. 하지만 그것은 참을 만했다.

“형이 사라진 것 같아.”

레이몬드는 형의 얼굴을 생각하며 밤새 잠을 이루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레이몬드는 옛이야기에 나오는 괴물을 떠올렸지만, 많은 이야기들이 그러하듯이 마음은 착한 괴물을 생각했다.

“형은 변하지 않을 거야. 중요한 것은 마음이니까.”

하지만 레이몬드는 너무 어렸다.

병자가 선한 마음을 갖는 것은 기적이 필요한 일이었다.

우리는 인연이 아닌 듯 합니다.

짧은 쪽지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세이어테스 남작의 약혼녀는 단 한 줄로 약혼을 파기했다. 그 문장에는 어떠한 이유도, 가식도, 변명도 없었다. 예의 없다고 비난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였다.

“이 여자에게서 이렇게 솔직한 편지는 처음 받아 봐.”

레이몬드를 닮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이제 레이몬드는 형의 모습을 머리털에서밖에 찾을 수 없었다. 목소리조차 변했기 때문이다. 그녀도 그랬으리라. 레이몬드도 그렇듯이. 그래서 레이몬드는 납득을 했지만 편지를 받은 당사자는 아니었다. 남작은 레이몬드에게 약혼녀가 보낸 편지를 들어 흔들며 히익히익, 하며 웃었다. 어깨를 거의 경련하듯 떨고 있었다.

“언제나 격식을 꽉꽉 채운 편지를 세 장씩 썼는데 말이야.”

“형.”

“웃기지 않아?”

구구절절한 말은 필요 없었다. 더 이상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난 그대로인데, 주변이 다 변했어.”


 

아니다. 남작은 변했다. 거울만 보아도, 걸을 때도, 숨을 쉴 때조차 알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외모뿐이 아니었다. 외모는 시작이었다. 본인도 알 것이다. 모를 수가 없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그것을 말할 수 없었다. 부모를 잃은 것은 형제 둘에게 닥친 일이었지만, 건강을 잃은 것은 남작만이었다. 레이몬드는 변하지 않았으니까.

“형, 그런 것보다 우선 건강해지는 것부터 생각하자.”

“그년은 지금쯤 다른 새끼랑 붙어먹겠지. 내가 준 반지는 버렸을까? 웃기고 있네, 그건 왜 동봉 안 했대? 그 반지가 얼마짜린데….”

앞뒤가 안 맞는 소리를 중얼거리는 남작을 보는 것은 괴로웠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고작 반지 하나야, 형. 중요한 건 따로 있어.”

남작님을 좀 말려 주십시오, 도련님.

“지금 양들이 새끼를 배는 족족 사산이 되고 있습니다. 비율이 지나치게 높아요. 대대적인 조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중요한 건 내가 아프다는 이유로 날 버렸다는 거야. 이년은 창녀야. 창녀였어. 돈 때문에 달라붙었다가 그게 없으니까 떨어져 나간 거라고. 아니야, 이년은 창녀만도 못해.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할 거 아니야. 약속을 했으면….”

형이 잃은 건 돈뿐만이 아니잖아. 몸이 변하고, 성격이 변하고, 영지가 변했다. 가장 마지막이 제일 심각했다. 시종인들뿐 아니라 집사와 부관들의 얼굴이 점점 심각해졌다.

“형. 그런 것보다 당장 닥친 일부터 생각하자. 제임스 씨가 뵐 수 있냐고 물어봤어. 형이 한번 시찰을 해 봐야 할 것 같아.”

영지가 점점 심각해져 갔다. 레이몬드는 사람들이 어린 자신을 붙들고 말을 할 때, 처음에는 약간의 책임감과 뿌듯함을 느꼈다. 자신도 이제 영지의 일원이,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어른이 된 것 같아서. 하지만 이내 자신에게까지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은 정말로 일이 심각하기 때문인 것을 깨달았다. 10대 풋내기에게 남작을 잘 달래서 나오게 해 달라고 빌다니.

“지금 양들 상태가 좋지 않아. 사산되는 새끼 수가 급증했다고 사람들이 아우성이야. 어제 형 침대에 올려놓았는데 봤어?”

영지의 상태는 점점 더 좋지 않은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전염병이 사람들을 쓸고 간 지 몇 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서 이번에는 양들이 쓰러졌다. 성체들은 아직 별다른 증상을 보이지 않았지만 새끼들이 문제였다.

“모여서 회의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다른 지역과도 같 하기 위해서 형이 편지를 써야 해.”

“야.”

남작의 목소리가 그르렁거렸다. 레이몬드는 고개를 들었다.

“입 좀 닥치지 못하겠냐?”

레이몬드는 순간 놀라서 입을 벌렸다. 이제까지 자신에게 저런 식으로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작과 레이몬드는 서로 다투기에는 나이 차이가 너무 났다. 가끔씩 남작이 짓궂게 굴 때도 이내 부모님이 말렸고, 그것도 장난 이상으로 심각한 다툼은 없었다.

형이 지금 나한테 뭐라고 한 거지?

하지만 그 놀람이 가시기도 전에 남작의 말이 이어졌다.

“이 어린 새끼는 자기가 멀쩡하다고 역겹게 굴고 있어. 야, 넌 지금 멀쩡하니까 그딴 소리나 하고 앉아 있지. 양이 뭐? 양이 어쨌다고? 너 지금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상황이냐?”

레이몬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상황은 심각했다. 파혼보다 더 중요한 문제들이 많았다. 하지만 가족으로서 위로를 먼저 했어야 했을까? 하지만 이제까지 남작은 위로도 비아냥으로밖에 받아들이지 않지 않았는가.

“형, 미안해. 하지만.”

“하지만이라는 소리가 나와? 이 역겨운 새끼. 넌 네가 영주가 되기라도 한 것 같아? 어? 야, 넌 내 성에서 빌붙고 있는 애새끼에 불과해. 지금 좋지? 네가 남작이 된 것 같아서 기쁘지? 그래서 나한테 이 지랄하는 거지?”

“형!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야!”

“난 너 같은 역겨운 새끼들을 많이 봤어. 재산이랑 작위를 받으려고 아양을 떨다가도 자기에게 떨어질 것 같으면 바로 이를 드러내지. 이 역겨운 쥐새끼들… 형에게 감사한 줄도 모르고….”

“형!”

쨍그랑!

남작이 화분을 집어 던졌다. 레이몬드는 깨진 유리병을 보았다. 거기에는 시든 꽃들이 놓여 있었다. 항상 저것을 관리하던 에이미는 어머니와 같이 죽었다. 그 뒤로 아무도 갈지 않았구나. 레이몬드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남작이 자신의 멱살을 잡기 전까지.

남작은 변했다.

쾌활하고 미남이었던 청년은 이제 성에 기생하는 괴물이 되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가끔 쿵쿵거리는 소리, 옷이 쓸리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렸고,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도 들렸다.

저택 안은 긴장이 맴돌았다. 레이몬드는 그 공기가 싫었다. 경험한 적 없었기에 그 분위기는 더욱 이상하고 소름이 끼쳤다. 사용인들이 남작의 얼굴을 피하는 그 모습이, 자신 앞에서 억지로 밝은 목소리를 내는 그 과장된 분위기가.

사람들이 눈짓한다.

사람들이 비웃는다.

세이어테스 남작을 보는 사람들의 눈빛은 공포와 혐오로 얼룩져 있었다. 레이몬드는 그것을 당시에는 몰랐다. 그 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레이몬드를 그런 눈빛으로 보지 않았으니까.

레이몬드는 뒤바뀐 일상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레이몬드는 부모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보다 형의 변화를 견뎌 내는 것에 더 신경을 써야 했다. 초상화로만 남은 부모는 언제나 온화한 얼굴로 박제되어 있지만 세이어테스 남작은 그 육중한 몸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죽은 가족은 상냥하나 살아 있는 가족은 잔인하다. 그것이 문제였다.

“오늘도 일용할 양식에 감사드립니다.”

말 그대로 ‘일용할 양식’이었다. 레이몬드는 눈앞에 놓인 식사를 보며 집안이 절대 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실감했다. 오트밀과 빵과 닭고기가 있었다. 그것밖에 없었다. 전과 비교할 수도 없이 초라한 식사였다.

“…….”

자신들의 식사가 이 정도라면 어느 정도로 상황이 안 좋은 걸까. 레이몬드가 선뜻 칼을 들지 못하자 남작이 입을 열었다.

“나와 식사하기도 괴로운 거냐?”

“…뭐?”

“그래서 그렇게 입맛 떨어지는 얼굴을 하고 있는 거냐고.”

“무슨 소리야, 형. 그럴 리가 없잖아.”

레이몬드는 급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남작의 얼굴은 전혀 납득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두툼한 턱이 씰룩거리면서 움직였다.

“그렇겠지. 내가 봐도 토할 것 같으니까.”

“형, 지나치게 생각하지 마. 내가 생각한 건 그냥….”

레이몬드는 순간 말을 멈췄다. 자신이 생각한 것은 그냥… 집이 망한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말을 그대로 해도 되는가? 그것을 고민하는 사이에 남작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접시를 밀어 버렸다.

“어련하겠어?”

형제가 힘을 합해서 고난을 이겨야 한다.

레이몬드의 고난은 자신의 형이었다.

세이어테스 남작의 태도는 점점 더 심해졌고, 레이몬드가 말할 상대는 더더욱 줄었다. 형제들이 그렇듯이 가끔 형이 짓궂게 굴 때는 부모님이 중재를 해 주었으나, 이제 부모님은 없다. 레이몬드의 유일한 보호자는 자신의 형인 세이어테스 남작이었다.

“또 남작님께 가십니까?”

“제논!”

제논이 복도에서 레이몬드를 발견하고 손을 들었다.

“성에는 무슨 일이야?”

사냥터지기인 제논은 성에 직접 올 일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남작 부부가 죽은 뒤로 사냥터로 갈 일도 별로 없었던 레이몬드는 그가 반가웠다. 제논은 남자애들이 환장할 만한 것들을 잘 보여 주는 사람이었다. 호쾌하게 잘 웃던 얼굴은 이제 그리 밝지는 않았지만.

“남작님께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요.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아. 하지만 형은….”

레이몬드는 남작을 생각하자 속이 쓰렸다.

“형은 점점 더 방 안에만 지내고 있어. 나와서 움직여야 해. 사람들과도 말해야 하고.”

“누가 그런 소리를 합디까?”

“의사가.”

“똑똑한 사람들 말이니까 그게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전 잘 모르겠군요.”

“뭐가? 그럼 제논은 형을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

“가끔 그런 것도 도움이 됩니다.”

“충고 고마워. 하지만 그 방법도 딱히 정답은 아닌 것 같아. 내버려 두면 더… 그러거든.”

‘돼지처럼 꽥꽥거려.’

레이몬드는 걸음을 옮기면서 말을 했다. 제논의 충고는 그리 쓸모 있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별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레이몬드에게는 예의가 남아 있었다. 남작과는 달리. 깊게 생각하지 말자. 하나밖에 남지 않은 가족이니까.

“형과 꼭 지금 만나 봐야 해?”

“예…?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제논이 어리둥절해서 레이몬드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남작의 집무실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제논의 손을 잡았다.

“어제 에반스 가문의 하수인들이 이자를 걷어 가겠다면서 이번 달 예산을 가져갔거든.”

“예? 허… 상황이 좀 더럽게 됐군요.”

“오늘 기분은 유난히 안 좋아.”

“레이몬드 도련님.”

제논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뭐?”

“신경 쓰지 마시라구요. 제임스가 말해 줬습니다. 지금 남작님은 업무를 전혀 보고 계시지 않다고요. 상황은 심각한데 남작님은 방 안에서 고함만 지르고 계시다구요. 당장은 제임스 씨가 하고 있지만 그것도 곧 한계가 옵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남작님과 도련님의 대부이신 란던 백작님이 편지를 보내셨다구 들었습니다. 하지만 남작님이 찢어 버리셨다고 하녀 애들이 그러더라구요…. 무슨 내용인지는 전 잘 모르겠지만… 하지만 백작님은 남작님이 아닌 레이몬드 도련님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라 하더라구요.”

즉, 백작은 실질적인 후계자를 자신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집사인 제임스가 지나가면서 자신을 어두운 눈으로 보던 것이 그것이었구나. 형이 자신에게 그리 예민하게 구는 것도 근거 없는 소리가 아니었다. 레이몬드는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자신은 열두 살이었다. 어깨가 무거웠다.

“난 너무 어려. 그리고… 난 형의 몫을 가져가고 싶지 않아.”

“도련님.”

“어차피 형이 후계자를 가지면 그 아이에게 법적으로 자리가 가게 되어 있어. 다들 생각이 지나친 거야.”

“전 그런 건 잘 모르지만… 아무튼, 곧 제임스 씨가 말할 겁니다. 미리 도련님이 놀라지 말게 잘 말해 주라 했는데, 어이구.”

제논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쩌지?

어쩌지?

어떻게 살아야 하지?


 

“그냥 부모님이랑 같이 죽었으면 편했을까요?”

레이몬드는 신관에게 고해성사를 하며 물었다. 친척인 신관은 자신의 옷자락을 쥐면서 대답했다.

“신께서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험을 내리신단다. 그분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거라.”

“신께서는 형을 사랑해서 그런 시험을 내리신 걸까요?”

“…그분의 뜻은 너무나… 깊어서 간혹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지.”

하지만 레이몬드에게 신관의 말은 와 닿지 않았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신관에게 분노를 표하지는 않았다. 어른에게 인생의 부당함을 토로하기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답답함은 있었다. 그래서 레이몬드는 물었다.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대답하셨나요?”

“…그래. 그분이 내리는 시험은… 너무나 어려워서. 우리는 그저 시험에 들지 않게 해 주시기를, 우리가 감당할 시험만을 달라고 간구할 뿐이란다.”

“부모님은 시험을 감당하지 못한 건가요?”

자신의 부모를 생각한다. 레이몬드는 납득할 수 없었다. 신관은 빨리 그의 의심을 부정했다. 어린아이에게 적당한 말을 해 주어야 한다. 달래 주어야 한다.

“아니야. 그건 아니야. 그저 착한 사람들은 빨리 죽기 때문이란다. 천국에서 할 일이 너무 많을 테니까.

“살아남은 사람들은 착하지 않은 걸까요? 형과 저는 죄인이라 아직 살아서 고통받는 걸까요?

“…….”

신관의 얼굴은 괴로워 보였다. 레이몬드가 조금만 더 나이가 들었다면 그런 질문으로 자신의 친척을, 신실하게 살아온 시골 신관을 괴롭히려고 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어렸고 자신의 고통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시험에 드느니 부모님과 같이 묻혔으면 더 이상 괴롭지 않았을까요?”

“레이몬드!”

“왜 그러세요?”

“그런 말 하지 말거라. 살아 있다는 것은 축복이야. 그리고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옳지 못한 거야. 다시는 내 앞에서 그런 소리 하지 말려무나. 주님께서 주신 생명을 함부로 하면 지옥에 간단다.”

왜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죄가 되나요? 사는 것이 힘들어서 죄를 짓기 전에 그분의 품에, 먼저 가신 사랑하는 사람들의 품에 가고 싶다는 것이 왜 죄가 되나요? 질문은 끝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만 레이몬드는 더 이상 죽은 자들에 관해서 입을 열 수 없었다.

신관의 얼굴 또한 괴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이몬드는 좀 더 쉬운 것을 물었다.

“형과 어떻게 하면 잘 지낼 수 있을까요?”

그 질문에 신관은 얼굴이 약간 밝아졌다.

부모 잃은 자식에게 말하는 것보다 형과 불화가 있는 동생에게 말하는 것이 더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남작은 아픈 거란다. 가족인 네가 참고 도와주면 분명 극복할 수 있을 거야.”

괜찮아.

형은 아픈 거야.

레이몬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늘에서는 다시 빛이 비춘다. 그리고 레이몬드는 노력하기로 결심했다. 자신은 아프지 않고, 남작은 아프다. 그리고 그렇게 된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에 좌절할 필요는 없다. 슬퍼할 이유도 없다. 사람은 한계가 있으니까.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형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노력하자.

아픈 사람은 미워할 필요가 없다. 증오할 필요도 없다.

가족인 자신의 의무는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고 아끼는 것이다.

“제 동생 레이몬드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남자가 왔다.

베르딕 에반스.

레이몬드가 베르딕을 처음 만났을 때, 레이몬드는 그의 얼굴을 보고 왠지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중년이라기에는 젊었고, 청년이라기엔 나이 든 남자였다.

“레이몬드 군. 안녕하십니까.”

“예. 성함이….”

“베르딕 에반스입니다. 예전에 한번 뵌 적이 있을 겁니다. 란던 백작 부인께서 주최하셨던 모임에 후원자의 자격으로 참석했었으니까.”

어디서 만났었지? 레이몬드는 기억을 더듬었다. 자신의 그다지 길지 않은 경험을 뒤져 보았으나 확신할 수는 없었다. 레이몬드는 아직 단독으로 친척 외의 귀족들을 만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가족과 같이 있을 때는 그가 그렇게 책임질 일이 없었다. 그럴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요즘 정신이 없어서요, 베르딕 에반스 씨.”

하지만 이제는 자신이 기억하고 행동해야 한다.

레이몬드는 베르딕의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적당한 악력, 적당한 키의 평범한 남자. 손은 부드러운 것을 보아하니 사냥을 즐기지 않는 것 같았다. 레이몬드는 이상하리만치 매끈한 손을 잡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손을 마주 잡으며 베르딕은 빙그레 웃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거짓말이니까.”

“…예?”

“거짓말이라고 했소, 레이몬드 군. 약간의 농이오.”

레이몬드가 당황하는 것을 재밌다는 듯이 본다. 베르딕은 남작에게 얼굴을 돌려 웃음 띤 얼굴로 말을 한다.

“과연 남작님 말씀대로 작은 거짓말도 못 하는 착한 도련님이군요.”

“보시다시피 건강하기도 합니다. 외모도 괜찮구요.”

“예. 그런 것 같군요. 지금… 예전 남작님의 모습과 많이 닮으셨고.”

그러면서 베르딕은 레이몬드의 턱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어깨를 잡았다.

“키도 나이에 비해 꽤 큰데, 훨씬 더 커지실 것 같소만. 좋습니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레이몬드가 베르딕의 손을 쳐 냈다. 불쾌했다. 처음 보는 사이에 너무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의 태도는 친밀감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상품’.

소나 양을 고를 때의 눈이었다.

“불쾌합니다. 왜 제게 이러시는 겁니까?”

레이몬드가 베르딕에게 항의하자, 남작이 그르렁거렸다.

“레이몬드, 베르딕 씨 앞에서 예의를 지켜라.”

베르딕의 눈치를 더 보는 듯한 말이었다.

“하하, 너무 그렇게 몰지 마십시오. 아직 어리지 않습니까. 가족끼리는 잘 지내야 하잖습니까.”

왜 처음 보는 남자가 자신의 집안 문제에 간섭을 하려 드는 거지? 친척들도 조심스럽게 권할 만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이 낯선 남자는 누구지? 하지만 레이몬드는 섣불리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둘 다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으며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행여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태도를 단단히 고쳐 두겠습니다.”

“아니, 아니오. 괜찮아요…. 하지만 교육은 필요할 것 같군요.”

“…명심하겠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음.”

베르딕이 눈으로 약간 곤란한 듯이 웃으며 레이몬드를 쳐다보았다. 남작이 레이몬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베르딕 에반스 씨. 저를 두고 제 형과,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여쭙고 싶습니다.”

“약간 도발적인 기질도 있군요.”

“죄송합니다, 베르딕 씨. 나가라, 레이몬드. 어른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어.”

“아닙니다, 남성적인 면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신은 신경도 쓰지 않는 그 태도에 레이몬드는 일어섰다. 남작이 주먹을 쥐었기 때문이다.

레이몬드는 일어나면서 베르딕의 기름칠한 머리를 보았다. 그리고 왜 그를 본 적도 없는데 본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알았다. 너무나 평범한 귀족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필사적으로 꾸미는 것처럼.

베르딕은 한참 후에 성을 나갔다. 레이몬드는 그가 나가자마자 재빨리 남작의 집무실을 두드렸다. 남작에 대한 두려움은 호기심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더욱이 자신에 대한 이야기다.

“결혼? 내가?”

“나도 네 나이 때 약혼했어. 지금은 가치가 떨어져서 파혼당했지만. 얼마나 좋냐? 넌 이제 부잣집 사위가 되는 거야.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에반스 가문은 정말로 돈이 많거든. 잘된 일이지.”

레이몬드는 의자에 앉아 신음을 참았다. 흔한 일이다.

“설마 너, 지금 우리 상황에서 네 인생은 멋대로 살겠다고 하지는 않겠지.”

가문이 몰락하지 않아도 얼마나 많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의 조건에 맞추어 결혼을 하는가. 자신의 부모님들도 결혼은 가문의 소개로 결정한 것이다. 자신의 생각보다는 많이 이르게 결정되었지만, 흔한 일이고 비극도 아니다. 괜찮다. 괜찮다.

“…아니야.”

“그래야지.”

그래, 흔한 일이다. 하지만 남작은 말해야 했다. 자신의 가격이 얼마인지는 말해 주어야 했다.

“얼마나 받았어?”

“그런 건 네가 궁금해할 일이 아닐 텐데.”

내 몸값 얼마나 받았냐고. 내 몸의 가치는 얼마야? 내가 알지도 못하는 여자와 자식을 만들고 성을 주는데 얼마나 받았어? 형의 그 부푼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값을 치렀어? 레이몬드는 내뱉을 수 없는 말을 삼켰다.

“난 그 사람이 싫어.”

“싫어하는 건 네 마음이지만, 앞에서 티는 내지 마라.”

남작은 거래가 성사된 것이 꽤 만족스러운지 오랜만에 여유가 있어 보였다. 그래서 레이몬드는 더욱 압박감을 느꼈다. 배가 부른 것 같은 저 얼굴은 무엇을 받아먹었을까.

“날 보는 눈이 꼭 가축을 고르는 것 같았단 말이야.”

형을 보는 눈은 불량품을 보는 것 같았고.

레이몬드의 말을 들은 남작은 시답잖다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마치 파리를 쫓는 것처럼.

“아무렴 어때. 중요한 건 그 사람이 우리 영지 중 대부분을 사들이기로 했단 거야.”

뭐라고? 레이몬드는 점점 더 기가 막혀서 남작을 쳐다보았다. 남작은 레이몬드의 눈을 마주 보았다. 볼이 씰룩였다.

“왜… 팔았어? 상의도… 아니야. 내게 상의를 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내려온 땅인데. 왜… 갑자기?”

레이몬드는 목이 메이는 것 같았다. 자신을 결혼시키고, 땅을 팔아넘기고, 밤마다 술을 마시고 더 이상 신전에도 나가지 않고. 영지에도 관심이 없었으면서. 왜. 그럼 철저하게 가만히 있던가.

“우리 땅은 지금 점점 더 상황이 악화되고 있어. 저 사람이 사들이기로 한 가격에 팔 수 있을 때 팔아야 한단 말이야. 두 배는 더 쳐주기로 했어. 더 알려지기 전에 팔아야지.”

지금 형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레이몬드는 천천히 생각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럼 베르딕 씨는 우리 땅이 지금 병들고 있다는 걸 모른다고?”

“그래.”

당연한 것 아니야. 단점은 숨기고 파는 거야. 그것이 거래의 기본이지.

레이몬드의 귓가에 남작의 말이 들린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치졸하고 비겁하게 들렸다.

“알았어.”

“뭘.”

“베르딕 씨에게 말해야겠어. 이건 사기야.”

“다시 앉아.”

“싫어.”

“다시 앉아, 레이몬드!”

두툼한 손이 레이몬드에게 향한다. 남작의 팔이 레이몬드의 머리끝을 잡는다. 하지만 그뿐이다. 남작은 너무나 둔하고 레이몬드는 빠르다. 금빛 머리칼 몇 개가 뽑혀 나간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문을 박차고 나간다.

“거기 서지 못해!”

뛴다. 달린다. 레이몬드는 새삼 자신이 그새 또 키가 컸다는 것을 알았다. 관절이 아프던 것은 남작이 때려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레이몬드는 달리면서 소리를 질렀다.

“제임스! 제논! 에밀! 아무나 말 좀 끌어내!”

“누구든 저 말 들으면 죽을 줄 알아!”

레이몬드는 달렸다.


 

남작은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입구로 뛰었다. 말 하나가 거기에 서 있었다. 레이몬드는 뛰어올랐다. 발받침은 필요치 않았다. 혀를 차며 말의 옆구리를 찼다.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부끄러웠다. 부끄러웠다. 모든 것이 부끄럽고 괴로웠다.

남작이 부끄럽고 자신이 부끄러웠다. 남작의 몸이 변한 것은 아주 작은 것이었나. 몸이 멀쩡했으면 남작은 레이몬드를 보내는 대신 자신이 갔을까. 예전이라면,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사기를 치지 않았을까.

“베르딕 에반스!”

레이몬드는 말을 달렸다. 비가 쏟아져서 그의 화려한 마차는 그리 멀리까지 가지 못하고 있었다. 마부가 고개를 돌리더니 레이몬드를 본다. 마차가 멈춘다. 레이몬드는 말을 마차 가까이에 댄다. 마차의 창이 열린다. 그 안에서 베르딕이 고개를 내민다.

“이런, 비가 오는데 무슨 일인지… 궁금한 건 남작님이 말해 주실 겁니다.”

레이몬드는 비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시야가 가린다.

“계약을 취소해 주셨으면 합니다.”

“흐음.”

마차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레이몬드는 가까이 다가갔다.

“우리 영지에는 지금 양들에게서 돌림병이 돌고 있습니다. 형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돈을 잃더라도, 가문을 잃더라도, 건강을 잃더라도. 비난을 받더라도.

그래도 레이몬드는 자신 안의 양심을 잃고 싶지 않았다. 가르침을 준 부모가 죽은 지 오래되지 않았고, 어렸고, 그냥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레이몬드는 비를 맞으면서 자신의 눈에서도 눈물이 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다행이었다. 티 나지 않을 테니까. 저 기분 나쁜 상인에게 알려지지 않을 테니까.

“죄송합니다.”

부끄럽게 살지 말아라. 그걸 지키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신과 같이 사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이것 참….”

베르딕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 안에서 조그만 머리통의 여자아이가 튀어나왔다. 저 아이가 딸인가. 레이몬드는 기가 찼다. 자신보다도 더욱 어린, 글을 읽을 수나 있을까 싶은 어린아이였다.

“남작님이 절 속이셨단 말이군요.”

레이몬드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베르딕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자기 옆의 어린 딸을 달래더니 다시 레이몬드에게 말을 했다.

“잘 알았소. 우리를 속인 것에는 값을 치러야 하겠지만.”

“…….”

“하지만 약혼을 깨고 싶지는 않군.”

레이몬드는 돌아갔다. 제논이 길목에 서서 남작의 화가 풀릴 때까지 자기네 집에서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일렀다. 그래서 레이몬드는 자신의 인생이 남작과 베르딕의 계약서 사이에서 정해졌다는 것을 몰랐다.

얼마 후 레이몬드는 군사 학교에서 입학 통지서를 받았다. 베르딕의 추천이었다. 레이몬드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레이몬드가 마차 안에서 이셀라 에반스에게 얼굴을 보인 순간 그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이셀라 에반스가 베르딕 에반스에게 말했기 때문이다.

“저분은 마치 기사님 같네요. 군복이 어울리겠어요.”

그래서 레이몬드는 군복을 입게 되었다.

괜찮아.

형은 아픈 거야.

레이몬드는 그래서 세이어테스 남작을 원망하지 않았다. 병자를 원망해서 무엇한단 말인가. 그리고 이제는 둘밖에 없는 가족 아닌가.

아픈 사람은 그럴 수 있는 법이다.

아픈 사람은 그럴 수 있다.

군사 학교는 생각보다 레이몬드에게 잘 맞았다. 사실 다른 기회가 없으니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두각을 나타냈으니 잘 맞다고 할 수 있겠다.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다는 비관적인 생각은 빠르게 사라졌다. 군사 학교에는 자신 같은 처지의 학생들이 너무 많았다. 레이몬드의 입장 또한 그리 유별난 것이 아니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은 타고났으며, 학업에 진중하고, 외모까지 받쳐 주니 레이몬드를 부르는 곳은 많았다. 계기야 어떻든 레이몬드는 객관적으로 괜찮은 인재였다. 그리고 레이몬드 자신도 그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베르딕 에반스가 장인이라면서요?”

“누가 그래.”

“다들 그렇게 말하던데요.”

시온이 건들거리는 자세로 말했다.

“굳이 그 사실을 내게 알려 줄 필요 있을까?”

“아는 편이 좋지 않나요?”

“알아서 뭐해. 딱히 좋은 이야기도 아닐 것 같은데.”

시온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아는 편이 좋을걸요. 3년 연속 수석을 차지하면 그만큼 질투하는 사람들도 많거든요.”

“내가 잘하면 돼.”

레이몬드는 시온을 툭 치며 무시했다. 학생들의 질투까지 신경 쓰기엔 너무 바빴다. 공부하지 않아도 수석을 차지하는 사람은 없다. 움직이지 않아도 몸이 단련되는 사람은 없다. 노력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레이몬드는 노력했다.

“존경스러워서 눈물이 다 날 것 같네요.”

“시온, 좀 닥쳐.”

“예.”

하지만 시온은 잠시 참았다가 다시 또 입을 나불거렸다.

“그런데 말입니다, 선배님.”

“시온, 결투다. 내일 점심시간에 보자.”

레이몬드는 펜을 빙빙 돌리며 시온을 노려보았다. 레이몬드의 시선에 시온이 기겁하며 더 말을 이었다.

“잠깐만요. 아, 진짜 잠깐만요. 이유가 다 있다니까요. 이번에도 팬케이르 후작님이 주최하는 모임에 진짜 안 나가실 겁니까? 그거 가지고 사람들이 말이 많던데요.”

팬케이르 후작은 학교의 이사 중 하나였다. 그리고 많은 장학생들을 후원하는 사람이었다. 수석인 레이몬드가 빠지는 것은 그리 보기 좋지 않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 베르딕 씨가 불러서.”

“…코 뀄네, 코 꿰었어. 선배님 인생 쫑 났네요.”

시온이 혀를 끌끌 찼다. 레이몬드가 눈썹을 찌푸리자 시온이 손가락을 흔들었다.

“제가 좀 없이 자란 거 아시죠? 그래서 눈치는 좀 빠르거든요. 살 구석 찾아서 비벼야 하니까. 선배님은 쓸데없는 곳에서 고지식한 부분이 있어요. 그냥 무시해요.”

“네가 신경 쓸 문제 아닐 텐데.”

시온이 갑갑한 듯 콧방귀를 뀌었다.

“하루 이틀 늦게 간다고 빚을 늘리겠습니까? 그래 봤자 눈치 주는 걸로 끝이지. 막말로 선배님이 나이 팔십 먹은 여귀족 잡으면 어쩌겠어요?”

“그건 네 장래 희망인가?”

레이몬드의 시선에도 시온은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말했다.

“진지한 사람의 꿈을 짓밟지 마시죠. 전 선배님처럼 사느니 주름살이 섹시한 할머니를 잡겠으니까.”

남자 꽃뱀으로서의 포부를 밝힌 시온은 레이몬드의 시선은 가볍게 무시하며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왜 베르딕이 부르는 날은 후원자들이 주최하는 모임이 있는 날일까요? 그것도 매번. 선배님이 새로운 줄 찾는 걸 막으려고 그러는 겁니다. 자기가 잡은 걸 놓치기 싫어서요. 순수한 빚쟁이들은 그렇게 굴지 않아요. 돈 나올 구석을 더 잡으려고 하지.”

“시온.”

“우리도 살길 찾아봐야죠.”

시온은 레이몬드를 진지하게 쳐다보았다.

레이몬드는 시온의 머리를 가볍게 툭 쳤다.

“나 데려가는 대가로 뭐 받기로 했냐?”

“다음 학기 기숙사비요. 그래도 제 의견이 거짓말인 건 아닙니다. 솔직히 살길은 여러 곳에 터놔야 합니다. 다들 그렇게 하고 있는데 왜 그 사채업자에게 의리를 지키시는 겁니까?”

레이몬드는 도저히 공부를 더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눈길을 끄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 간섭받을 줄이야. 레이몬드는 책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가십니까?”

“그래. 네가 너무 시끄러워서 나가서 하련다.”

시온의 말에 영향을 받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시온은 사실 그리 통찰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가 말하는 것은 레이몬드도 다 짐작하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냥 귀찮았던 걸까.’

베르딕에게 반항하기 힘들어서, 차남이라는 그의 입장 때문에, 학생이라서, 어리고 경험이 없어서.

막연하게 짐작하고 감안하는 것과 남에게 알려졌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건 다르다. 후자는 사람의 자존심을 좀 더 건드린다. 그날 밤 레이몬드는 베르딕 에반스의 저택으로 가는 기차표를 찢어 버렸다. 변덕과 만용이었다.

“축하한다. 네 기숙사비.”

“감사합니다, 선배님. 역시 정복이 죽여주게 어울리십니다.”

레이몬드는 정복을 입은 학생들이 서 있는 홀에 들어섰다. 익숙한 시선들이 느껴진다. 군인이라기보다 사교계의 여자들 같은 시선들. 사실 다를 것도 없겠지.

“베르딕 에반스에게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잘 알아서 했어.”

베르딕에게는 조금 몸이 안 좋다고 쓰려다가,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변명을 대더라도 거짓말이 될 테고, 베르딕은 그것을 알아차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온, 성공했구나.”

“옙, 선배님들의 귀염둥이가 성공했습니다.”

알버트가 시온의 어깨를 치며 웃었다. 그리고 레이몬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너였냐?”

“널 너무 사랑해 마지않는 내 노력이었지. 뭐, 그렇게 혼자 있는 것보다 나오는 게 좋잖아.”

“학생들 모임에는 꾸준히 나가고 있어.”

“그런 건 아무 의미 없어…. 후작님, 이쪽이 제 학우 레이몬드 세이어테스입니다. 3년 연속 수석, 교수님들의 귀염둥이죠.”

갑작스러운 소개였지만 레이몬드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 서 있는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레이몬드 세이어테스입니다.”

“드디어 얼굴을 보는군. 자네가 올 줄은 몰랐는데. 올해는 드디어 보는 군, 수석 후배.”

옆에서 알버트가 슬쩍 끼며 말을 했다.

“제 친구라 제가 잘 설득했습니다.”

레이몬드는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알버트는 나중에 상대하기로 결심하며 후작과 마주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후작님. 후작님께서도 졸업생이셨군요.”

“그래. 내 젊고 어리고, 유치하기 짝이 없던 시절을 여기서 보냈지. 자네도 잘 보내고 있기를 바란다네. 알버트 군, 자네의 사교성은 내 잘 생각해 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알버트는 재빨리 굽신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베르딕이 자네가 여기 오는 걸 좋아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말이야.”

팬케이르 후작은 이사라는 직함에는 어울리지 않게 젊어 보였다. 팬케이르 후작 역시 레이몬드가 그간 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를 언급했다. 베르딕이 후원을 하기 시작한 그 다음 해에 팬케이르 후작은 이사직을 맡았다.

“몰래 왔습니다.”

“어차피 알게 될걸.”

“이것 하나 제 선택대로 못 하면 왜 살겠습니까?”

팬케이르 후작은 그 말을 듣고 웃었다.

“그래, 용기 있군.”

팬케이르 후작이 이사직을 맡게 된 것을 안 베르딕은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 레이몬드에게도 그 생각을 숨기지 않을 정도였다. 베르딕은 레이몬드의 입학과 동시에 꽤 많은 돈을 후원했다. 그리고 무기 사업을 점점 더 키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팬케이르 후작의 땅은 변방에 위치하고 있었다. 군사가 가장 많이 필요한 땅의 영주였고, 그의 영지는 분쟁이 자주 일어나는 곳이었다. 하지만 영지가 그만큼 멀기에 수도에 가까운 군사 학교와는 연이 먼 귀족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이사직을 맡은 이유는 뭘까.

중앙에 진출하기 위해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

많은 학생들이 그렇게 생각했고 베르딕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울분을 터트렸다.

“아무리 개처럼 벌어도 대귀족 하나가 나서기 시작하면 우리 같은 상인들은 쓸려 나가기 십상이오.”

베르딕이 상당한 수익을 얻기 시작한 무기 산업에 팬케이르 후작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베르딕은 못 견디게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자연스럽게 그의 후원을 받는 레이몬드는 팬케이르 후작같이 군사 쪽에 연이 있는 귀족들 모임에는 빠지게 되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아직 어려 후작님께서 즐거워하실 만한 대화를 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는군요.”

“자네는 나이도 어린데 뭘 그리 걱정하나?”

후작이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하인에게서 잔을 건네게 했다. 레이몬드는 크리스털 잔을 받았다. 후작이 잔에 포도주를 부었다.

“내가 나이 어린 자네에게 도움을 받을 정도로 힘들어 보이나?”

“그럴 리가요.”

후작이 남작가의 차남에게 도움받을 일이 있을 리가. 레이몬드는 쓰게 웃었다. 그래서 그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더 짐작하기 어려운 것이다. 당장 떠오르는 이유는 베르딕 에반스 하나밖에 없었지만.

“베르딕 에반스 때문이 맞네.”

“그러시군요.”

“자네도 참 담담하군.”

“지금 전 어리고 아는 것이 없으니 충고에 귀를 기울일 뿐입니다.”

“그래. 난 그가 싫어.”

느닷없이 들어오는 불호 선언에 레이몬드는 눈을 한번 돌리고 대답했다.

“…네.”

어찌 되었든 레이몬드 자신은 베르딕 측의 사람이다. 레이몬드가 베르딕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상관없이. 레이몬드의 짧은 대답에 후작이 재밌다는 듯이 웃는다.

“그렇다고 해서 자네가 싫다는 건 아니니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어. 난 한낱 장사치가 감히 신성한 의원장에 기웃거리려고 하는 것이 싫어. 분쟁을 일부러 유도하고 피를 빨아먹는 버러지.”

“가혹한 평가시군요. 절 부르신 이유가 더더욱 궁금해집니다.”

“좀 더 나은 선택지를 주고 싶다네. 세이어테스 남작에게 닥친 비극을 안타깝게 여기거든.”

“제 형과 인연이 있으십니까?”

“약간은.”

“처음 듣는군요.”

후작은 잔을 내려놓고 손을 움직였다. 음악이 더 크게 울려 퍼졌다.

“사실 별 인연은 아니야. 중요한 건 내가 베르딕 에반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그거 하나지.”

“그러시군요.”

“끝까지 조심스럽군. 그런 태도는 적을 만들기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친구를 만들기도 어렵다네. 한번 내 제안을 잘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후작은 바로 다른 학생에게 손짓했다.

레이몬드와의 대화는 끝이었다.

레이몬드는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시종이 건넨 와인병을 받았다. 그리고 그 와인병에는 베르딕 에반스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가 있었다.

“레이몬드 님, 오랜만이어요.”

“…….”

누구더라. 레이몬드는 잠깐 고민하고 나서야 눈앞의 여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아, 그래. 내 약혼녀. 오 년 동안 세 번 만난, 베르딕 에반스의 딸.

“레이몬드 님이 안 오셔서 아버지가 데리러 오라 하셨어요.”

화려한 옷에 거의 파묻힐 것 같은 여자가 도도한 척 고개를 쳐들었지만, 장신의 레이몬드에게 그것은 애들의 흉내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레이몬드의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가 본 것 때문이다.

팬케이르 후작이 그에게 넘겨준 서신.

“… 그렇군요.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을 텐데.”

“왜 늦으셨사와요?”

당신의 아버지가 악당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 뒤에도 레이몬드의 일상은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약간은 변했다. 그는 더욱 성실해졌다. 조금도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베르딕에 대한 분노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베르딕을 칼로 찌르고 총알을 박는 그런 분노가 아니었다.

“아버지께서 레이몬드 님을 전폭적으로 도와주실 것이와요.”

레이몬드도 알았다.

“그러니까 다시는 이러지 마시와요.”

그가 얌전히 있으면 베르딕은 시작이 어떻든 그에게 최고급 건초를 입에 넣어 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세이어테스 가문의 영지의 새로운 주인, 실질적인 주인으로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매해 영지의 발전 속도를 보면 알 수 있었다.

목초지에는 광산과 공장이 들어섰으며, 철도가 깔리고 인구가 늘어났다. 그것은 이셀라와 결혼하면 다시 레이몬드의 것이 될 터였다. 어쩌면 복수 같은 것은 접어 두고 베르딕에게서 받을 수 있는 것을 챙기는 것이 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군요.”

베르딕에게 사육당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레이몬드는 자신이 분노로 방향을 잃어버리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을 잘 알았다. 레이몬드도 아직 잃을 것이 많은 사람이었고, 베르딕 또한 그랬다. 그들 사이에서는 주먹질 그 이상의 싸움이 필요했다.

레이몬드는 에반스 가문 전체의 몰락을 원했다.

그리고 그것은 팬케이르 후작이 꽤 도움을 주었다.

“아니지, 아니야. 아직은 고르지 마. 인간관계를 계산한다는 인상을 주면 안 돼. 약간 어리숙한 것처럼, 하지만 정직한 것처럼 보여야 해.”

“얕보이지 않겠습니까?”

혈기 넘치는 남자애들 사이에서 주먹과 성적을 같이 휘둘렀던 레이몬드는 그의 충고가 약간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후작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자네는 어리니까 괜찮아. 우습게 보이지 않는 것과 허세를 부리는 건 전혀 다른 문제야. 젊은 사람이 어리숙한 건 당연한 거야. 허세는 절대 부리지 마. 조금만 눈치 있어도 다 보여. 그건 가치가 떨어지는 짓이야.”

“알겠습니다.”

“그렇다고 비굴해 보이면 안 돼. 한 번 비굴해 보이면 끝이니까. 자세와 외모는 반듯해서 좋군.”

“감사합니다.”

레이몬드는 그 사실이 약간 우스웠다. 자신의 외모가 볼품없었다면, 베르딕이 그를 사려고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많은 조건들이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딸에게 보기 좋은 종마를 붙여 주려고 한 것이니. 병에 걸린 것이 형이 아닌 자신이었다면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짝.

“죄송합니다.”

“말은 반 박자 천천히 하도록. 말이 조금 빨라.”

“예.”

이것은 약간 사교계를 데뷔하는 아가씨 수업 같군. 레이몬드는 약간 목이 졸리는 것 같았다. 그리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정도는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레이몬드는 예법을 통해 자신의 태도를 가다듬는 것에서도 작은 성취감을 느꼈다.

“그리고 수석은 절대 놓치지 마. 베르딕의 사업이 아니라, 학업에 관심이 있다는 식으로 물어봐. 달튼 공작은 지적 허영심이 강하니까 자네 같은 젊은 사람이 물어보면 줄줄 말을 늘어놓을 거야. 그리고 사람은 자신이 베푼다는 생각을 하는 걸 좋아해.”

후작 또한 레이몬드를 베푸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는 걸까? 하지만 레이몬드는 그것을 묻지 못했다. 레이몬드가 곁눈질을 하는 것을 보고 후작이 물었다.

“내가 왜 자네를 마음에 들어 할 것 같나?”

레이몬드는 그것이 궁금했다. 후작이 자신을 통해 베르딕을 무너뜨리고 싶은 걸까? 하지만 왜 굳이 이렇게까지 귀찮고 돌아가는 방법을 쓰는 걸까. 자신에게 가치가 있을까? 종마로서의 가치? 하지만 그에게 딸은 없을 텐데. 레이몬드는 생각을 접었다. 지금은 재는 것이 아니라 받을 시간이다.

“…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후작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괜찮은 학생이군.”

레이몬드의 대답에 후작이 웃으면서 그의 어깨를 소리 나게 쳤다.

“중요한 것을 말해 주지. 자네는 명분을 지켜야 해. 그게 자네의 가장 큰 무기가 될 테니까.”

레이몬드는 전보가 보급된 시대에 아직도 비둘기들이 그렇게 많이 쓰이는지 몰랐다. 베르딕의 눈을 피해 초대장과 추천서가 오고 갔다. 레이몬드는 베르딕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될 만한 길을 찾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아직도 구시대의 가치에 열광해. 하원 의원 수가 더 많아지고, 베르딕의 재산은 어지간한 백작들보다 더 많아. 그런데도 왜 그가 귀족이 되고 싶어서 저 난리를 치겠어?”

아직도 대부분의 부호들은 귀족이기 때문 아닌가.

“돈을 얻었으면 그다음은 명예와 역사를 얻고 싶어지지.”

“잘 모르겠습니다, 후작님. 명예란 얻고 싶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후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명예는 만들어지는 거야, 레이몬드. 얼마나 많은 사람들, 그래 소위 말해 나라를 구하고 발전시킨 의인들이 이름 없이 그냥 스러지는지 잘 알 텐데. 가위를 발명한 사람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래, 그래서 베르딕은 명예를 얻고자 자네를 사들였지.”

“전 명예가 없습니다.”

레이몬드는 자신을 알았다. 자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학교 안에서만 통용되는 성적뿐. 그리고 외모였다. 자신의 집안은 몰락했고 베르딕에게 빚은 쌓여 있다.

“자네는 지금 자네의 선조들을 모욕하고 있어. 모든 귀족들의 초대 가주들은 막대한 노력을 통해 영지를 받았는데, 어찌 영광과 역사가 없겠나. 에반스가 가지고 있는 것은 악명뿐이지.”

“제가 실언했습니다.”

“너무 자주 사과하는 것도 좋지 않아.”

“예.”

“아니, 그냥 조용히 다물고 있게. 필요할 때… 마지막에 사과하는 게 적절하니까. 이런. 이런 것까지 가르쳐야 하다니. 아니, 사과하지 말게. 나중에.”

레이몬드는 입을 다물었다. 공작이 자신의 방 뒤의 초상화들을 가리켰다.

“베르딕 에반스는 역사를 가지고 싶어 해. 맞아, 쉽게 이야기하면 명예는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야. 그가 가지고 싶어 하는 건 권력이지. 안정적인 기반이야. 에반스 가문이 백색산맥 너머의 나라에서 온 것은 잘 알겠지.”

“예.”

“그래서 그들의 기반은 현금, 금, 보석들이지. 그런 것들은 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기반은 땅과, 법에서 나오니까. 그래서 결혼을 시켜야 했지.”

“왜 본인은 하지 않았습니까?”

베르딕 에반스의 행보를 보면 시온의 선배가 될 법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상인의 딸과 결혼해 자식을 보았다. 후작은 한마디로 알려 주었다.

“베르딕 에반스가 젊었을 때는 그의 재산은 지금의 10분의 1도 안 됐어. 턱도 없지.”

“그렇군요.”

“그리고 세이어테스 가문이 아무리 영향력이 줄어들었다고 해도 남작 가문과 이방 민족이 결혼한다는 것은 말도 안 돼. 건방지기 짝이 없지. 지금도 내전 중에 해외 귀족들이 계속 들어오고 있는데… 감히… 고작 상인 따위가.”

후작은 바닥을 노려보았다. 그는 진심으로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이방인인 그가 최근에 큰돈을 벌고 있는 곳이 무기 산업이지.”

팬케이르 후작 또한 무기 산업과 방비를 통해 돈을 벌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약간 부끄러움을 느꼈다. 자신은 아직 고작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베르딕이 어떠한 방식을 통해 돈을 벌고, 권력을 얻으려 하는지 그는 모른다. 베르딕이 그것을 나눌 것이라 생각되지도 않았다.

“베르딕 에반스는 절 믿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별 상관없어.”

팬케이르 후작은 펜대를 만졌다.

“그가 자네를 군에 넣은 것은, 글쎄. 난 잘 모르겠군. 나라면 자네를 상원 의원 쪽으로 넣었을 텐데. 법학을 배우는 것도 괜찮고. 아무튼 그가 자네를 군사 학교로 보냈다면, 그것을 낭비하지는 않을 거야.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라고. 도무지 자네에게 맡길 수밖에 없게 말이야.”

“예.”

“자네는 전에 내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른다고 했었지?”

“예.”

“이상적인 기사가 되도록 하게. 아이들이 보면 환장할 정도의 영웅 말이야. 사람들이 자네를 보고 환호할 정도로.”

팬케이르 후작의 눈은 기묘할 정도로 반짝이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뒷말에 그가 농을 하는 것인가 생각했지만, 그의 얼굴은 진지했다.

“자네는 그저 명예롭게 살도록 해. 가장 어려운 일이지만 자네에게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거야.”

그리고 얼굴도 잘 관리하고 말이지. 지나가는 듯이 덧붙인 말도 레이몬드는 흘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레이몬드는 운이 좋게도, 외모도 타고난 편이었으니까.

후작이 어떤 생각이든, 레이몬드를 통해 베르딕의 재산을 빼앗고 싶어 하든, 어쩌면 그의 또 다른 수족이 필요하든, 그것도 아니면 일종의 화초 가꾸는 놀이든. 레이몬드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명분에 메였지만 그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후작의 말대로였다.

지금처럼 살던 대로 살면 훈장은 주어졌다. 레이몬드는 몇몇 고관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어느 동기들에게는 질투를 받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환호를 받았다.

그리고 레이몬드는 3년 뒤 기사의 칭호를 얻었고, 왕세손이 빛나는 눈으로 그를 찾으러 온 것을 보았다.

“자네가 레이몬드 세이어테스 경인가? 팬케이르 후작에게서 자네의 명성은 많이 들었어.”

레이몬드는 루이스 왕세손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그 뒤에는 팬케이르 후작이 서 있었다.

최고의 명예.

왕족의 선망.


 

베르딕 에반스는 레이몬드가 자신이 채운 목줄을 벗어 버리려는 것을 알아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레이몬드 세이어테스는 철저하게 영광과 도덕, 사람들의 환호로 자신을 세웠기 때문이다.

“젠장… 이 애송이가.”

베르딕은 자신의 잉크병을 집어 던졌다. 자신이 적당히 꾸며서 딸에게 주려고 했더니, 배은망덕하게 물고 도망가려 하고 있다.

베르딕 에반스는 딸을 불렀다. 이셀라 에반스가 언제나처럼 베르딕이 사 준 옷을 입고 아버지의 부름에 따라 나타났다.

“네가 결혼할 때가 된 것 같구나.”

레이몬드 세이어테스는 결혼을 깰 계기가 필요했다.

거창한 계기는 필요 없다. 레이몬드는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 필요에 의해 계기를 만드는데 진지한 고려는 오히려 문제가 된다. 누구라도 좋다. 레이몬드는 어느 여자든 그의 방식으로 좋은 남편이 될 자신이 있었다. 그는 베르딕 에반스의 딸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충실하게 의무를 다할 남자였다.

하지만 누구나 납득할 만한 필요조건은 있었다. 베르딕 에반스가 그를 고른 이유 같은 것. 이셀라 에반스가 그를 선택한 이유 같은 것. 사람들이 보고 크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이유.

이셀라 에반스와 비교도 안 되게 아름다운 여자 같은.

“괜찮습니까?”

“전 책 속에 들어왔어요.”

캐런 하이어의 말을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말은 신경 쓰였다. 진정한 사랑을 찾지 못해 100년간 죽고, 죽고 또 죽었다는 그녀의 말. 어딘지 묘하게 그를 탓하는 것 같은 얼굴. 캐런의 얼굴은 묘하게 조숙한 구석이 있었지만, 그런 말을 할 때면 투정을 부리는 아이 같기도 했다.

“믿기로 약속하셨잖아요.”

노력은 했지만 성인이 받아들일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저걸 믿는다면 그가 먼저 병원에 가야 하겠지. 레이몬드는 혀를 차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아직 나이도 어린데.

“진정한 사랑을 찾으면 저주에서 벗어난대요. 아, 좀. 그런 얼굴 하지 말아 줄래요? 뭔 생각하는지 알겠거든요?”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살인자가 변명으로 둘러대는 이야기라 하기엔 지나치게 몽환적이고, 약간 낭만적인 구석마저 있었다. 레이몬드가 거의 예닐곱 살에 허황되다며 치워 버린 그런 이야기들.

‘좀 유치하기도 하고.’

“노력 안 하죠?”

캐런이 노려보자 레이몬드는 두 손을 들고 대답했다. 약속은 약속이니까.

“합니다…. 예… 한다구요.”

설마 죄를 피하기 위해 미친 척을 하는 걸까? 레이몬드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자료들을 보며 곁눈질로 캐런을 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일관성이 있었다. 만일 전부 다 꾸며 낸 이야기라면 지나치게 체계적으로 돌았다. 정말로 미친 것일까? 레이몬드는 자신이 너무 얼굴만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캐런이 레이몬드의 뚱한 얼굴을 보며 볼멘소리로 말했다.

“저도 이상한 거 알거든요. 좀 노력해 봐요.”

“…예.”

너무나 황당하면 오히려 무시하기가 힘들어진다. 어찌 되었든 레이몬드는 캐런에게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레이몬드는 고서적을 같이 살펴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골동품을 사기 위해 경매장을 돌아다녔다.

‘내가 이거 지금 뭐 하는 거지.’

하지만 의외로 꽤 재밌었다. 캐런은 말재간이 있는 편이었고, 취미도 다양했다. 레이몬드가 약한 갖가지 상식 또한 풍부했고,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저분은 성격이 꽤 까다로운 분인데 당신을 꽤 마음에 들어 하시는군요.”

“이미 다 예전에 만나 본 사람들이라서 그래요.”

캐런은 별것 아니라면서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았지만, 레이몬드는 자신이 어렵게 취득했던 그런 태도를 보면서 약간 허탈감을 느꼈다. 그리고 확실히 그녀가 매력 있는 광인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외모뿐 아니라 전부.

레이몬드 자신이 캐런을 사랑하지 않아서 계속해서 이 시간을 반복하는 것 아니냐는 캐런의 투정은, 무시하고 싶지만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레이몬드는 자신이 왜 그런 것일까 생각했다.

하지만 잘 알 수가 없었다.

필요에 의해 접근해서? 아니다. 레이몬드는 처음부터 그녀가 살인자인 것을 의심하며 접근했다. 그를 필요로 하며 문을 두드린 것은 캐런이었다. 최소한 둘의 관계에서 레이몬드는 떳떳했다. 문제는 오히려 캐런이다. 사람을….

‘아니, 아니지. 오히려 당장 증거부터 잡아서 넣었어야 했는데.’

레이몬드는 자신이 필요에 의해 그녀를 내버려 두고 있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그녀가 아니라 자신의 양심에게.

‘왜 난 여기서 이러고 있지?’

레이몬드는 캐런이 사들이는 쓸 곳 없는 골동품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어느새 그것들로 방 하나를 가득 채웠다. 그녀의 망상에 레이몬드는 지나치게 시간을 많이 들이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어느 순간부터 캐런과 보내는 시간이 너무 길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교계 모임에 같이 입장하고, 공연을 보고, 경매장을 돌아다니며 전설과 망상을 뒤지는 그 쓸데없이 흘러가는 시간들. 시간을 그렇게 낭비하는 것은 레이몬드의 인생에서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 나날들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레이몬드 경, 왕실에서 편지가 왔네요?”

귀즈 왕세자였다. 레이몬드는 그것을 보는 순간 그가 자신을 노리고 있음을 알았다. 레이몬드는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캐런의 앞으로 모든 유산을 남기는 유언장을 썼다. 남작은 그것을 받을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최대한의 표시였다. 레이몬드가 그녀를 위해 노력한다는 표시.

“아이참, 안 죽는다니까요!”

레이몬드는 그것을 믿지 않았다.

그녀의 말은 너무나 허황되고 실제 상황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확언이다. 캐런은 왕세자와 왕세손, 그리고 자신과 베르딕과 후작과 그 수많은 사람들과 사업체들과 국가와 후계자들의 싸움에 관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냥 끝을 말할 뿐이다. 그냥 믿는, 이유가 필요치 않은 말이었다. 그녀는 과정을 모른다. 정세를 모른다. 레이몬드는 그래서 더 이상 캐런에게 말하지 않았다.

레이몬드도 지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캐런이 이리저리 종종거리며 돌아다니고, 전설이나 사람들의 관계를 헤집는 것을 보는 건 꽤 재미있었다. 그녀에게 레이몬드의 재산 정도는 같이 놀아 준 대가라고 생각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고.

또다시 익숙한 일을 하면서

레이몬드는 생각보다 자신이 그 쓸데없는 나날들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너무 오랫동안 그는 유희에서 멀어져 있던 것이다.

“베르딕 에반스가 날 배신했나?”

루트엘라 공작의 머리에 총을 박아 넣는 순간, 그리고 그 어린 손녀를 죽이는 순간. 레이몬드가 느낀 것은 죄책감보다 어서 일을 끝내고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어디로 돌아가고 싶은지. 레이몬드는 해답을 깨닫고 자신이 중증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 알았다.

레이몬드는 명예롭게 살았다.

이날까지는.

그가 가장 편하게 사는 방법이 그것이었다. 불의를 보면 그것에 저항한다. 침묵하지 않는다. 그리고 공의를 위해서.

하지만 캐런 하이어를 죽이지 못하고.

레이몬드는 캐런을 본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폭력성을, 잔인성을 레이몬드의 눈앞에서 보였다면 그는 머뭇거리지 않았을 것이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레이몬드 앞에서 단 한 번도 그런 것을 보이지 않았다.

“전 레이몬드 경을 사랑해요.”

그녀는 그 말을 자기 스스로도 믿지 않겠지. 눈물을 흘리던 눈은 왕세자의 방에서 나오자마자 귀찮다는 듯이 변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피해자였다. 언제나. 언제나.

레이몬드는 캐런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명예나 양심 같은 자신이 쌓아 온 모든 가치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생겼다.

레이몬드는 이 감정을 도무지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그는 고민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시간은 부족하고 적은 도처에 있으니 레이몬드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가 캐런을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캐런의 말은 허황되며 그녀가 살인에 연루되었을 것이라는 확신은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가 도와줄 것이니까.

레이몬드는 자기 앞의 신관을 본다. 듈란 로이드라는 청년 신관을 본다. 레이몬드는 그를 처음 봤을 때를 생각한다. 그와 그녀는 서로 사랑하는 것보다, 증오하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레이몬드는 남자로서 그를 약간은 동정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캐런에게 파혼을 당했다는 이유로 베르딕 에반스를 통해 캐런을 고문한 자였다.

평범하고, 음험하고, 질투하는 남자.

레이몬드는 더 이상 그를 동정하지 않았다. 연적이니까. 그가 행한 그런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 캐런 하이어를 대신해 감옥에 가겠다고 하지 않는가.

“듈란 신관님.”

레이몬드 세이어테스는 자기 앞의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듈란 로이드를 본다. 밖에서는 성가가 울려 퍼지고, 신의 대리인이라는 신관은 그의 앞에서 무너져 있다. 자신이 캐런을 감옥으로 보낼까 두려워하면서. 레이몬드는 그를 보면서 불쾌감을 느꼈다. 이 감정은 뭘까.

“캐런 하이어를 사랑하십니까?”

“…아닙니다.”

하지만 그 말은 설득력이 없었다.

“왜 이렇게까지 캐런 하이어를 보호하려고 하십니까?”

“…제, 제가… 그녀의 의사이고… 신관이니까요.”

“그래서 대신 감옥까지 가시겠다니, 좀 말이 안 된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저 감정은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레이몬드는 그 사실에 미약한 질투를 느꼈다. 그리고 조금 놀랐다.

사실 레이몬드는 오기 전에 그런 생각을 했다. 듈란이 캐런을 사랑한다면, 그래서 그녀를 보호하려는 것이라면. 만약 자신이 죽는다면, 그 후 그가 도움을 주는 것이 좋은 방법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지금 듈란이 캐런과 얽히는 것을 거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듈란이 캐런을 사랑한다면, 그것을 더 이용해야 했다.

“제가 보기에 당신은 캐런 하이어를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아, 아닙니다.”

“아니면 동정입니까?”

“…….”

철저한 동정이라면 좋겠군. 하지만 레이몬드는 듈란의 질척한 눈과 손길을 보았다. 그것에는 지나치게 많은 감정이 들어 있었다. 듈란이 캐런을 사랑할 것이라는 가정은, 생각만으로도 매우 불쾌했다. 레이몬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끼는 질투에 약간 당황스러웠다.

레이몬드는 듈란에게 제안을 했다. 어쩌면 그의 연적에게.

그가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캐런 하이어를 죽일 필요도 없고, 미워할 필요도 없는 답을 그가 줄 것이기 때문이다.

“캐런 하이어는 미쳤습니까? 그래서 당신은 그녀를 돕는 겁니까?”

“…레, 레이몬드 경?”

레이몬드는 듈란을 일으켰다. 그의 팔을 강하게 잡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본다. 강압적으로라도 그에게서 확답을 들어야 한다. 그는 레이몬드에게 답을 주어야 한다.

“그래서 캐런은 죄가 없다고 한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해. 레이몬드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녀에게 죄가 없다고. 그 뜻은.

듈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로서, 신관으로서.

그리고 레이몬드는 그 사실에 구원을 받은 것 같았다. 성가가 멀리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복도를 걸었다. 약간 늦은 아침이었다. 눈부신 햇살이 복도의 창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축복하라. 발걸음이 가벼웠다. 레이몬드는 사람이 극도로 적은 이 저택이 마음에 들었다. 세이어테스 가문의 집이 아니기에, 잠깐 머무는 공간이었지만 그로 인해 오는 평안함도 있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집으로 갈 것이다. 레이몬드를 선택하고, 레이몬드가 선택한 여자와 같이.

“도나?”

캐런과 자신이 머무는 곳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레이몬드는 하녀가 자리를 비운 것을 보고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다. 지금은 그녀 하나만 있으면 충분했다. 약간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흠.”

레이몬드는 자신의 손에 들린 수국을 보았다. 새하얗고 푸른 여름의 꽃. 이제 꽃의 종류는 바뀌겠지. 여름은 지나가고 있으니까. 붉은 머리를 가진 캐런의 침실에는 대조되는 하얗고 푸른 꽃이 더 어울렸다. 여름이 지나가면 이제는 무슨 꽃을 골라야 할까.

“꽃보다는 그냥 보석이 나았을 것 같기도 한데.”

레이몬드는 꽃을 들고 고민했다. 거리의 아이들을 위한 적선으로 적당히 선택한 선물이지만, 캐런은 꽃을 받아도 그냥 고맙다며 꽂아 두고, 보석을 받아도 그냥 고맙다고 장식했다.

무엇을 받아도 웃으며 고마워했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 무언가 놀라게 해 주고 싶었지만 그녀는 도박에도 능했기에 돈에 구애받지도 않았다. 그녀의 관심을 끄는 건 별 이상한 골동품들뿐. 레이몬드는 자신이 너무 빠르다는 것을 알았지만, 굳이 기다리는 것도 싫었다.

“아, 그래도 이건 좀 아닌가.”

고민하다가 레이몬드는 그냥 평상시와 같이 수국 한 다발을 샀다. 상점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레이몬드는 그냥 수국 한 다발만을 들고 왔다. 그나마 상태가 좋다는 것이 위안이었다.

똑똑.

레이몬드는 캐런의 방문을 두드렸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아직 시간이 이르기에 그런 걸까, 고민했다. 돌아가는 것이 예의일 것이다.

“음.”

하지만 문을 열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컸다. 사람이 예의를 좀 무시하게 되고 유치하게 되는 감정. 레이몬드는 그 약간의 타락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끼익.

문이 열렸다.

그리고 침대에 캐런이 있었다. 역시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을 싫어했다. 레이몬드는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에 따라 그녀를 새벽에 움직이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그것만은 실패였다.

캐런이 자는 것을 확인했으니 다시 나가는 것이 예의겠지만.

레이몬드는 인형 같은 캐런의 감은 눈을 본다. 신기할 정도로 예쁜 얼굴이었다.

죽었나?

레이몬드는 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정도로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레이몬드가 처음에 그녀를 봤을 때는 좀 더 나이가 있는 여자인 줄 알았다. 열일곱이라는 나이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 이야기를 차마 하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그 나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사실 가끔은 사람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미색에 익숙했지만 캐런의 얼굴과 인상은 가끔 무엇인가를 초월한 걸로 보였다. 돌이라거나 물 같은 것처럼. (시체처럼.)

하지만 캐런은 살아 있었다. 그 증거로 가슴팍이 천천히, 오르내리고 있었다. 숨을 쉬고 있다.

레이몬드의 눈앞에서.

레이몬드는 그 얼굴 옆에 수국을 내려 두었다. 매일 가져다 둔 꽃다발에 방 안은 온통 꽃으로 가득 차 있었고, 캐런은 거의 꽃에 파묻혀 있었다. 꽃의 무덤 같은 풍경이었다.

“캐런.”

“…….”

시간은 충분하다. 공작과 후작들. 상원 의원, 하원 의원들의 과반수가 귀즈 왕세자의 퇴위에 찬성했다. 다음의 왕은 루이스가 될 것이다. 귀즈 왕세자는 이제 레이몬드를 사지로 보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 주에 레이몬드는 상원 의원이 된다.

“언제까지 잠만 잡니까? 좀 일어나시죠.”

캐런은 사람을 죽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상관없다. 레이몬드는 캐런을 옆에서 천천히 보았다. 캐런이 조금이라도 폭력적인 성향을 보인다면, 사람을 죽인다면. 레이몬드는 어떠한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캐런의 머리에 총을 겨눌 수 있었다. 있었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캐런은 그동안 단 한 번도 자신의 옆에서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언제나 철저한 피해자였다. 만약에 그런 성향을 보였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레이몬드가 단순히 육체적으로 그녀보다 훨씬 강하기에 그 앞에서는 내숭을 떠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이몬드를 죽이려는 그 어떠한 시도도 보이지 않았고, 하녀들이나 아이들, 하물며 지나가는 아이들에게도 그녀는 폭력을 보인 적이 없었다.

“전 책 속에 빠졌어요.”

자신이 책에 빠졌다는 웃기지도 않는 망상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그리고 당신이 제 남자 주인공이에요.”

사랑을 갈구할 뿐이었다. 종알거리면서. 이상한 소리를 말하면서. 사랑을 요구하는 사람을 사랑하는데 장애물은 없다.

“캐런.”

레이몬드는 캐런이 미쳤다고 생각한다. 캐런이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캐런의 말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캐런을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되지 못했다. 레이몬드는 깨달았다. 그녀를 사랑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레이몬드 경, 치장도 하지 않은 숙녀의 방에… 실례세요.”

캐런이 가물거리는 눈을 뜨고 자신의 얼굴을 가린다. 부끄러워한다기보다는 약간 짜증이 난 얼굴이었다. 레이몬드는 찌뿌둥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웃었다. 언제나 가다듬어진 얼굴이었지만, 잠에서 덜 깬 상황에서는 그녀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당신도 제 방에 그냥 쳐들어오지 않았습니까.”

“지금… 아침… 화장… 세수….”

캐런은 아직 잠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는지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한다. 그 얼굴은 살인이니, 광증이니 하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그것이 재밌었다. 그리고 약간은 슬펐다.

이런 모습만 유지된다면 그들은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단점을 그대로 사랑하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레이몬드는 아마 그녀를 평생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강한 예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지금은 상관없다. 이해와 사랑은 양립하지 않더라도 괜찮다.

“일어나 봐요.”

“한 시간 뒤에요.”

“저와 결혼해 주십시오.”

뭐라고 할까. 자신에게 사랑을 하라고 요구하던 소녀는. 놀랄까, 기뻐할까, 울까.

그 무엇도 아니었다. 캐런은 베개를 던졌다. 레이몬드의 얼굴을 향해. 물론 레이몬드는 베개를 잡았다. 하지만 그 반응에 더 화가 난 캐런이 외쳤다.

“죽을래요?”

“100년 뒤쯤에 죽겠습니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하지만 이것은 이것대로 좋다. 자신은 캐런이 뭐라 대답하든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이미 자신의 마음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지금, 사람 자는데 갑자기 들어와서 이… 재미없는 농담… 나가 죽어요.”

“재미없다는 건 좀 슬픕니다만, 진심입니다.”

“…진심이요? 그… 음, 그러니까, 잠깐만요. 진짜요?”

“예.”

캐런은 얼굴을 푹 숙였다. 그냥 다시 자려나 했더니 눈을 살짝 돌리면서 말을 한다. 여전히 피곤해 보였지만, 그렇게 기분 나쁜 얼굴은 아니었다.

“다섯 시간 뒤에, 화장 다 끝내고 나서 다시 말해요. 반지 가져 오고.”

“대답 먼저 듣고 하면 안 됩니까?”

“죽어요. 그냥….”

그리고 캐런은 고개를 베개에 폭 파묻었다. 잠시 뒤에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레이몬드 경, 제가 미쳤나요, 아니면 당신이 미쳤나요?”

“제가 사랑에 미쳤습니다.”

“진짜 더럽게 재미없네요.”

자신이 사랑에 미쳤다면 캐런은 무엇에 미쳤을까. 그녀는 무언가에 얽매여 있을까. 하지만 확실한 것은 캐런은 미쳤다. 그것은 레이몬드처럼, 베르딕처럼, 명예나 복수나 돈이나 그런 세속적 가치나 명예 같은 무언가에 매달린 사람들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이 아니었다. 좀 더 타고나는 그런 것이었다. 마치 질병 같은 것.

“…레, 레이몬드 경의 말대로… 캐런은 미쳤습니다. 그것은 제, 제가 보장하도록 하, 하겠습니다.”

캐런은 그냥 아픈 것이다. 그의 형처럼, 의사가, 신관이 말하지 않았는가.

레이몬드는 그 확답에 큰 안도감을 느꼈다.

캐런은 미쳤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레이몬드는 캐런이 정신병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자 더없이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캐런은 그냥 아픈 것이다. 정신이 아픈 환자다. 아픈 사람은 때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법이다. 그것은 가족들이 이해해야 하고, 돌보아야 하는 영역이다.

“당신과 함께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음… 그래요. 그건 괜찮네요. 반지는 없어도 봐줄게요.”

캐런의 대답에 레이몬드는 웃었다.

“영광입니다.”

레이몬드는 캐런을 이해할 수 없고, 그녀의 행동을 긍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사랑한다. 레이몬드는 그렇게 정했다. 만약에 그녀가 돌발 행동을 벌인다면 남편으로서 그것을 막으면 그뿐이다. 어쩌면 침실에는 창살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좋다.

괜찮아.

레이몬드는 캐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당신은 아픈 거야. 그리고 미쳤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아. 그것은 사랑에 문제가 되지 않아.

괜찮아. 아픈 사람은 그럴 수도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레이몬드는 캐런의 행동은 내버려 둘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내버려 두는 것은 방종이다. 그는 가족의 의무를 다할 것이다. 책임을 다할 것이다. 그가 형에게 그러했듯이. 가족이 아프더라도, 실수를 하더라도.

캐런은 아직 어리다. 열일곱 살이다. 그리고 약간 미쳤다. 하지만 그 나이대는,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레이몬드는 전쟁터에서 더 미친 사람을 많이 봐 왔다. 그녀 정도의 광증은 남편으로서 참아 줄 만하다. 그녀도 시간이 지나면 현숙해질 것이고 어린 날의 망상은 부끄러운 과거로 치부할 날이 올 것이다.

“제가 당신을 정말로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베푸는 즐거움을, 신실한 사람들 사이에서 지내는 안정감을, 가정 안에서 느끼는 평안함을 그녀는 이제 알게 될 것이다. 레이몬드의 곁에서. 그것만은 양보할 수 없었다.

레이몬드는 자신의 새로운 가족을 끌어안았다.

그래서 캐런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축복하라.

듈란은 대성당의 본관에 서 있었다. 레이몬드는 돌아갔다. 듈란은 회랑에 서서 기둥에 손을 짚었다.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빛이 비춰지고 있었다. 새벽 미사는 끝이 났고 사람들은 돌아갔다. 레이몬드도 캐런에게로 돌아갔다. 레이몬드의 고해성사는 끝이 났다. 아니다. 고해성사라고도 할 수 없었다. 레이몬드에게 죄는 없으니까. 죄인은 그가 아니다.

죄를 고해야 하는 것은 그가 아니다.

듈란은 미약하게 떨리는 손으로 벽을 짚는다. 눈이 부셨다. 듈란은 벽으로 고개를 돌렸다. 듈란은 본당에서, 성물에서, 고개를 돌렸다. 이곳에 죄인이 있다. 기만자가 있다. 이단자가 이곳에 있다. 도망가려고 해도 도망갈 수 없는 죄인이 이곳에 있다.

듈란은 무릎을 꿇었다. 그것은 의도를 가졌다고 하기보다는, 쓰러진 것에 가까웠다. 그의 죄는 너무나 깊어서, 그는 두려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듈란은 손을 모았다. 떨리는 입. 떨리는 손. 그럼에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원하는 가치는 저곳에 있다. 신이 허락하지 않을 저 깊고, 깊은 욕망.

신이시여,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신이시여, 저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마소서.

저는 죄인이며 지옥 불에 불탈 것이옵니다. 제가 그것을 아나이다.

듈란은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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