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악당
“결혼이요.”
레이몬드는 캐런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캐런의 표정이 막연하게 좋았을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아니면 얼떨떨한 정도. 하지만 캐런을 레이몬드에게 안겨서 얼굴을 찌푸렸다. 진부해서. 이번은 그냥 그렇구나. 그 생각이 끝이었다.
캐런에게 레이몬드의 결혼 신청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새삼스럽게 감흥이 새롭게 일지는 않았다. 수십 번이나 같은 상대에게서 청혼을 받다 보면 거기서 거기인 방식에 감탄하기는 힘들었다.
‘짜증 나.’
하지만 이번은 기분이 좀 이상했다. 캐런은 스스로의 감정에 약간 놀랐다.
왜지. 두 자릿수가 넘어가면서 지루함만 있었는데, 약간 달라진 것이다. 우선 캐런을 그동안 본 적 없던 차가운 눈길로 보던 그였는데, 레이몬드의 태도가 너무나 빨리 변화했다. 레이몬드는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캐런을 의심 섞인 눈으로 조용히 취조하듯 다루지 않았는가. 역시 레이몬드 경도 좀 문제가 있긴 있어. 캐런은 레이몬드의 약간 들뜬 듯한 목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쉬었다.
무슨 생각일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번에도 청혼했다. 이번 생에도 그는 캐런에게 청혼했고, 그의 결정은 진심이었다. 그것은 한두 마디의 말이 아니라 서류가 증명한다.
이것이 아마 사랑이겠지.
레이디 리안은 캐런의 앞에 있는 수많은 편지지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와아….”
“하아….”
캐런은 한숨을 쉬었다. 결혼식의 일정과, 초대장을 보낼 사람들의 목록. 저것을 언제 다 쓰냐는 막막함이 캐런을 귀찮게 했다.
“엄청나네요. 이 사람들이 다 오는 거예요?”
“그럴 거예요.”
“루이스 왕세손님도요?”
“그러겠지요.”
이제까지 왔으니까.
“당장 어머니에게 새 드레스를 맞춰 달라고 해야겠어요! 캐런, 들러리는 내가 서도 되나요?”
“그럼 저야 영광이죠, 하지만 엘바 부인에게 먼저 허락을 받아야 해요.”
“반드시 받아 낼게요!”
레이디 리안이 도도도 달려 나갔다. 품위 없는 발걸음이었지만 그만큼 경쾌했다. 아이가 방에서 나가자 도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캐런 아가씨, 결혼이 기쁘지 않으세요?”
도나가 물었다.
“티 났니?”
“…네에. 조금요.”
자신도 참을성이 어지간히 없어졌다. 아이는 못 알아채도 성인은 눈치를 볼 정도라니. 캐런은 조금씩 참을성을 잃어 가는 자신에게 한탄하며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
캐런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레이몬드도 아니고 듈란도 아니다. 굳이 속일 만한 이유도 없었다. 도나가 캐런에게 뜨거운 차를 가져다주면서 위로했다.
“처음이라 그럴 거예요.”
아니야, 너무 많이 결혼해서 그래.
하지만 캐런은 더 말하지 않고 목록을 치우고 책상에 엎드렸다.
“머리가 좀 복잡해….”
이번에도 그렇다.
캐런은 결혼식을 앞두고 지루함과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이번에도 그는 다르지 않다. 이번에도 비슷하다. 이번에도 레이몬드는 캐런이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으로 또다시 그녀에게 청혼했다. 캐런은 이해할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아마 그것이 아닐 것이다. 신경 써야 할 것은 눈앞의 목록이다.
“생각해야 할 것이 너무 많으셔서 그래요. 영주님과 마님이 살아 계셨으면 많이 도와주셨을 텐데….”
“그럴까.”
“그럼요. 영주님이 살아 계셨으면 얼마나… 흑….”
캐런은 작게 울먹이는 도나를 무시하며 찻잔을 들어 품위 없이 들이켰다.
“마님께서도….”
이것이 술잔이라면 누군가와 부딪히며 ‘제기랄, 어머니! 책임 좀 지고 가시지!’라며 외쳤을 텐데. 그러다가 캐런은 뜨거운 차에 혀를 데었다.
쿨럭, 쿨럭.
“아, 아가씨. 괜찮으세요?”
손을 뻗는 도나를 저지하며 캐런이 손을 내저었다. 약간 부끄러웠다.
“…그래. 어머니가 계셨으면 좀 달랐겠지.”
이런 것은 부모가 해 주어야 하는 일인데. 캐런은 처음 결혼을 할 때 할 일을 보며 자신이 얼마나 막막했는가를 기억했다. 수많은 군인들과 귀족들과 왕족까지 모두 모인 자리에서 결혼을 맹세하는 것이다. 그 후엔 단순히 일시적인 관계나, 덫이라고 할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정말 귀찮은 일이야….”
캐런은 자신의 감정을 믿지 않듯 다른 사람의 맹세도 믿지 않는다. 캐런과 관계를 맺은 남자는 셀 수도 없지만, 청혼한 사람은 10분의 1도 채 되지 않는다. 식을 올리고 도장까지 찍은 사람은 두 손가락으로 셀 수 있었다. 결혼이란 남자에게도 위험이 되는 일이다.
“그래도 레이몬드 님이랑 결혼하셔서 행복하시죠?”
캐런은 탁상에 엎드려서 자신이 할 일을 본다. 수십 번이나 반복한 결혼식 준비는 질리고 귀찮은 일일 따름이다. 캐런은 팔을 늘어뜨렸다. 자신도 안다. 레이몬드 정도 되는 남자는 극히 드물다.
“그가 괜찮은 사람인 건 나도 알아.”
잘 알지. 캐런보다 그것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캐런은 객관적으로 그가 괜찮은 신랑감이라는 것을 안다. 외모, 성품 무엇을 따져도 레이몬드 정도의 남자를 찾는 것은 힘들었다. 그것은 잘 기억나지도 않는 책의 이야기가 아니라, 캐런이 직접 겪은 기억으로 내린 판단이었다. 그 베르딕이 자신의 딸에게 잘 골라 준 신랑감 아닌가. 비록 그가 이셀라를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하지만 행복하지는 않은 것 같아.”
시간이 흐르지 않으니까.
그들의 결혼은 결실을 맺지 않는다. 감정은 진전되지 않는다. 언제나 다시 만나고, 언제나 다시 고백하고, 청혼하고… 죽고. 그리고 또다시 그것을 반복하겠지.
사회에서 두 사람이 부부가 되겠다고 선언하는 것. 남는 것은 없다. 하지만 그것은 캐런에게만 그러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니다. 그 순간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남는다. 이것만으론 진정한 사랑을 입증하기에는 부족할까? 하지만 캐런은 그 이상의 방법은 무엇이 좋을지 잘 모른다.
결혼은 위험을 감수한다. 약혼보다 몇 갑절 중요한 맹세. 캐런은 결혼을 했던 남자들을 생각한다. 그중에는 듈란도 있었다.
“어머니도 결혼 전에는 이러셨겠지.”
사랑을 믿지 못하고, 누구를 선택해야 죽을 수 있을지 모르고.
부친을 통해 광신과 같은 절대적인 사랑이 필요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하지만 듈란은 왜 진정한 사랑을 입에 담은 것인가? 레이몬드가 캐런에게 청혼한 감정은 어느 정도의 감정인가?
“진정한 사랑을 해.”
“그러면.”
“도와줄게.”
“…결혼식에서 키스하면 포기하겠지.”
부족한가? 캐런은 머리카락을 꼬았다.
하지만 앞에서 첫날밤을 보여 주거나 하면 듈란은 심장 마비로 죽을 것 같은데. 아니, 어쩌면 그런 취향일 수도 있으려나.
“듈란 님이요? 설마 아직도 연락하세요?”
기겁하는 하녀에게 눈을 찡긋하며 속삭였다.
“레이몬드에게는 이르지 마.”
도나의 얼굴이 하얗게 변한다. 도나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네? 진짜에요?”
“비밀.”
자신을 놀린 것을 안 도나의 얼굴이 약간 붉어진다. 캐런은 그녀를 보며 웃고는 다시 그녀가 할 일을 본다.
“드레스는 엘바 백작 부인이 사람을 소개시켜 주신다고 했으니까, 해야 할 일 목록에서 빼도 되는데….”
캐런은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세요?”
“아, 그 꽃 말인데, 잠깐만.”
캐런은 도나가 든 꽃을 보았다. 레이몬드가 자신을 깨우면서 건넨 꽃이다. 사실 그 꽃 또한 여느 날 주던 것과 같아서 큰 차이는 없었다. 좀 더 크고, 좀 더 많았을 뿐이다.
“아가씨, 꽃은 병에 넣어 둘까요. 아니면 바로 말릴까요?”
“…그냥 꽃병에 넣어 두렴.”
어차피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다. 꽃이 시드는 것이 빠를까, 캐런이 죽는 것이 빠를까.
“기분이 계속 안 좋으세요?”
“그래 보이니?”
“…네, 복잡해 보이세요.”
도나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캐런은 긴장을 한 듯한 그녀의 하녀에게 손을 내저으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그냥 결혼한다고 생각하니까 이상해서 그래.”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날’은 다가오고 있었다. 캐런에게는 이번 생에서 시간이 너무나 부족했다. 중간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찌 되었든 결과는 청혼이다. 캐런은 그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처음부터 중요한 것은 레이몬드의 감정이 아니지 않았는가. 중요한 것은 듈란에게 얻는 조언이다. 듈란은 자신에게 답을 주어야 한다. 그것만 생각하자.
“처음이라서 많이 떨리시고 불안하신 거예요.”
아니다. 처음이 아니다.
캐런은 자신이 왜 답답하고 불안한 것인지 알았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과 같기 때문이다. 캐런은 도나가 물을 담고 있는 꽃병을 본다. 거기에 꽂힌 수국을 본다. 그리고 방 안을 가득 채운 꽃들을 본다.
“꽃이 참 많구나.”
“감동적이지 않아요?”
“응.”
하지만 표정마저 들뜬 흉내를 내기는 귀찮았다. 캐런은 꽃들을 보았다. 셀 수 없이 수많은 꽃잎들.
“예전에도 꽃을 받았었어.”
레이몬드는 처음에도 꽃을 줬었다. 그랬었다. 캐런은 자신의 기분이 왜 생소하고, 약간 언짢은지 깨달았다.
캐런이 레이몬드에게서 ‘정말로’ 처음 받은 청혼 선물. 캐런은 기억한다. 레이몬드가 처음, 정말로 처음에 청혼했을 때. 그는 그때 꽃을 가지고 왔었다.
“그냥… 아침에 꽃을 보는데, 문득 청혼하고 싶은 마음을 더 이상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캐런은 웃었다.
“이미 우리는 약혼했잖아요.”
그래도 레이몬드는 다시 캐런을 보면서 말했다.
“그래도 다시 말하고 싶었습니다.”
먼 옛날의 이야기다.
레이몬드는 그대로다. 레이몬드는 시간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전에도 그러하였고 이번에도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캐런은 잘 알 수가 없었다. 레이몬드를 잘 알 수가 없었다. 왜 이번조차.
당신의 배를 갈라 그 속에 들어가고 싶어. 그렇다면 알 수 있을까. 캐런은 꽃을 보며 생각을 했다. 새하얀 꽃잎이 캐런의 손에서 뭉그러졌다. 당신이 날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맞는지 궁금해. 내가 보기에는 이제까지와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아니지, 이번은 아니지. 이번은 전과 같을 수가 없지.
이번에 그는 그렇게 캐런을 차갑게 보다가, 갑자기 어느 순간부터 태도가 변했다. 전과 같이. 예전 삶과 같이 그는 이번에도 캐런을 다시 사랑한다고 한다.
어째서. 캐런은 두려웠다.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캐런이 생각하는 레이몬드라면, 그는 캐런에게 사랑을 고백하면 안 되었다. 그의 눈은 나날이 차가워져야 하고, 결국 캐런에게 총을 겨누어야 한다. 캐런이 생각하는 그라면. 캐런은 자신의 감정이 혼란스러웠다. 초조했다. 그리고 이내 캐런은 자신의 감정이 왜 이런 것인지를 알았다.
“…나도 참 답이 없구나.”
자신은 사랑받기를 요구하며 사실은 칼을 맞고 싶어 했다.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
캐런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래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번 생은 너무나 혼란스럽다. 하지만 최소한 자기 스스로에게는 솔직해져야 한다.
캐런은 손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당신이 날 받아들인 것이 마음에 안 들어. 이제까지의 모습이 갑자기 바뀐 게 마음에 안 들어. 믿을 수 있는가? 레이몬드를 믿을 수 있는가? 캐런은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결정하는 것은 그녀가 아니라 듈란이다. 사랑이 맞는지 아닌지, 심판을 내리는 것은 그였다.
애초에 캐런이 레이몬드를 이번 생에서 쫓아다닌 것은 듈란이 미끼를 던졌기 때문이 아닌가. 그래서 캐런은 원래 목적으로 했던 연쇄 살인마로서의 원대한 꿈 대신 레이몬드와 열심히 돌아다니며 놀았던 것이 아닌가. 언제부터 이렇게 일이 틀어졌을까. 그래도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니까. 캐런은 아쉬움을 달랬다.
“그래, 아무 문제없어.”
캐런은 중얼거렸다. 텅 빈 방 안. 햇살은 따뜻하다. 여름의 절정이었다. 눈이 부시다. 일어나야 한다. 이제 평화로운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레이몬드가 자신에게 청혼을 했으니 그것을 근거로 듈란을 찾아가야 한다.
캐런이 레이몬드에게 어떤 감정이든, 혹 아무 감정이 아니든. 그런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 것이다. 캐런은 한숨을 쉬었다. 듈란이 레이몬드의 청혼으로 답을 내주었으면 좋겠다.
캐런은 이제 듈란에게 힌트를 얻고, 드디어 죽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감정은 지극히 사소한 것이니까. 이 지긋지긋한 삶의 연속에서, 영원의 미로 안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 변하는 사람의 감정은 가치가 없다.
“그래서 기분이 이상하구나.”
어쩌면 자신은 아예 잘못 짚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캐런은 자신의 머리를 흔들었다.
“이게 다 레이몬드 경 때문이야.”
캐런은 결론을 내렸다.
자신이 힘든 이유는 그 때문이다. 레이몬드가 꽃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으로 청혼할 때 준 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것을 또다시 주었기 때문이다. 100년이 지났다. 레이몬드는 변함이 없는데. 캐런은 무너질 것 같은 정신을 추스른다.
“어쩌면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캐런은 말했다. 초상화들을 본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잘못을 한 것은 캐런인 것이다. 캐런이 진정한 사랑을 하지 않고 사람을 활자로 대했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고 사랑을 수단으로 보았기 때문에.
캐런 자신이 100년 동안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서.
그래서 자신은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와 어머니의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들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서 저주에서 벗어났고, 자신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서 이렇게 굴레에 갇혀 있는 거라고.
“그럼 내가 사랑하면 전부 끝날까?”
캐런은 중얼거렸다. 하지만 답은 모른다. 그냥 중얼거릴 뿐이다.
캐런은 홀로 방 안에서 꽃들을 내려다보며 울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그래도 시도해 볼 가치는 있을 것이다.
시도해 볼 가치는.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캐런은 레이몬드를 사랑하기 위해 좀 더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날 밤 레이몬드는 편지 한 장만 남기고 돌아오지 않았다,
“너무 빠르지 않아?”
캐런은 레이몬드가 급하게 남긴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 당분간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다는 글이었다. 제대로 된 편지지도 아니었으며, 급하게 수첩을 찢어서 휘갈긴 듯한 글이었다. 은퇴를 앞둔 사람을 이런 식으로 부려 먹다니.
“결혼식을 미루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아냐, 미루기도 힘들어.”
어차피 이제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레이몬드가 정확히 언제 도착할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결국 이번에도 안전하게 돌아올 것이며, 그녀와 결혼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도 이렇게….”
캐런은 또 다른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왕실에서 온 편지였다.
귀즈 왕세자가 또다시 그녀를 부르고 있다.
명백한 의도를 가진 편지.
내 옆으로 와 내 침대를 덥혀라.
캐런은 한숨을 쉬었다. 레이몬드는 없다. 그리고 엘바 백작 부인은 절대 자신을 보호하지 않을 것이다. 왕실에 반하는 것은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레이몬드 같이 명분과 양심을 신봉하는 사람이나 그런 미친 짓을 한다. 그래서 캐런이 그를 선택했다. 하지만 레이몬드가 이번에도 그녀를 지킬 수 있을까. 이제 점점 캐런이 경우의 수를 계산하기 어려운 사건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가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자신이 모처럼 어려운 결심을 했더니 또다시 찾아온 시련이 이렇다.
레이몬드는 또다시 일을 하러 불려 나가고, 자신은 귀즈 왕세자에게 불려 나간다. 예전에는 기껏해야 이셀라에게 고통당하는 것이 끝이었는데. 역시 로맨스 소설에서 악역은 여자가 좋다. 남자가 끼면 이야기가 추접스러워진다. 더러운 냄새가 난다.
“귀즈 왕세자님은 왜 나한테 이렇게 집착하실까.”
“아가씨….”
발정 난 개새끼가.
어머니를 정복하지 못한 아쉬움을 딸에게 푸는 것일까. 물론 캐런은 캐서린이 버린 폐기물을 쓸 생각이 없었다. 위생상 좋지 않다. 정신 건강에도 물론이고.
자신이 가지 않으면 레이몬드는 언제까지 군의 명령에 의해 불려 다닐까. 레이몬드는 자신이 군을 그만두고 상원 의원이 되면 더 이상 그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상대는 왕족이다. 그것도 계승권 제1의 왕족. 왕세자. 그에게 레이몬드가 어디까지 저항할 수 있을까? 지금도 레이몬드는 캐런 곁에 없지 않은가. 그가 보호해 줄 수 있는 건 어느 선까지일까?
“내가 귀즈 왕세자님에게 가야지 레이몬드 경이 안전해지는 걸까?”
그래야 하는 것일까.
많은 폭군들이 그러는 것처럼. 유부녀를, 약혼녀를 권력자들에게 빼앗긴 남편들처럼 레이몬드 또한 위험한 곳에 가는 것일까. 그래서 캐런은 자신과 레이몬드의 안전을 위해서 귀즈 왕세자에게 가야 하는 걸까. 그가 만족을 할 때까지? 낡은 물건에 질리기만을 기다리면서? 언제까지?
하지만 그래도 캐런은 선택해야 한다.
결국은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이다. 캐런은 굳이 따지자면 해야 한다 쪽에 무게를 두었다.
하지만 문제가 두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귀즈 왕세자는 어머니의 옛 구혼자 중 하나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자신과 같이 반복하는 생을 사는 사람이었다. 캐런은 어머니가 썼을지도 모르는 막대기를 쓰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지나치게 비위생적이었다. 본능적인 거부감이었다.
“참아야지 별수 있나.”
캐런은 음식물 쓰레기를 목구멍에 넘기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한숨을 팍팍 쉬면서 납득했다. 자신이 반복한 시간을 생각하면 귀즈도 자신보다 젊을 것이라고 위안했지만 이 나이까지 살아도 싫은 것도 꽤 많았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다른 것이다.
두 번째는 그것이 듈란이 생각하는 사랑이냐는 점이었다.
여자가 남자를 위해서 다른 남자에게 몸을 맡기는 이야기는 너무나 많고 흔했다. 하지만 그 끝이 행복하게 매듭지어 지는 것을 캐런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가장 좋은 것은 부부가 그것을 묻고 없었던 일로 하는 것이겠지만, 레이몬드가 그럴 것 같지도 않았다.
레이몬드를 위해 귀즈 왕세자에게 다리를 벌려야 하는가?
그것이 사랑인가?
캐런은 홀로 방 안에 남아 벽면을 채운 초상화들을 본다. 여자들을 본다. 어머니를 본다.
사랑을 위해서 창녀가 되는 것이 사랑인가?
당신들은 그렇게 했나?
신관은 그것을 사랑이라 인정할 것인가?
레이몬드를 사랑한다면 그를 위해 다른 남자와 자야 하는가?
“…늙다리의 노리개가 되는 것이 사랑의 증명?”
웃기지도 않는다.
자신이 왜 이번 생에서 사람을 죽이려고 했는가. 더 이상 죽임당하는 것도 싫어서, 좀 더 새롭게 살아 보고 싶어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 보고 싶어서 칼을 들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자신이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혼란스러워야 할까.
왜 이런 더러운 시험에 들어야 하는가.
혼란 속에서 밤이 되었다.
다시 아침이 되었다.
“아가씨, 식사라도 하시는 게….”
“나가 줘.”
캐런은 엎드려서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최대한 유예 기간을 늘리고 싶었다. 판단하고 싶지 않아. 선택하고 싶지 않아. 그렇게 버티다가 레이몬드가 오면 그를 사랑하기로 노력하자. 귀즈 왕세자에게 갈지 말지도 선택하게 하자. 같이 의논하는 것이 사랑일지도 모르잖아?
“이 편지를….”
캐런은 도나에게 편지를 건넸다. 수신자는 없었다. 캐런이 다시 말했다.
“듈란에게 전해 줘.”
캐런은 자신이 잘못 판단하느니, 답안지를 훔쳐보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공부는 하고 싶지 않았다. 가는 것이 맞다고 하면 가자. 듈란이 가라고 해서 간다면, 비위생적인 경험을 하더라도 듈란이 답을 주겠지. 가지 말라고 해서 레이몬드가 죽으면? 그렇다면 그것 또한 듈란의 책임이 되겠지. 캐런은 다 지긋지긋해졌다. 레이몬드고 듈란이고 귀즈고 베르딕이고 이셀라고 간에.
하지만 레이몬드는 오지 않았다. 듈란에게서 답도 오지 않았다.
캐런은 꽃 속에 파묻혀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그리고 과거를 생각한다. 그는 그때 어땠더라. 그때는….
또다시 밤이 찾아오고, 귀즈 왕세자가 말한 날이 왔다.
똑똑.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도나가 자리를 비운 모양이다. 캐런은 베개로 귀를 막았다. 옷은 잠옷 차림이었다. 캐런은 눈을 감았다. 자신은 정말이지 가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가 쓰던 것을 쓰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
이제 시간은 거의 다 되었다. 한 달 반. 그 정도만 기다리면 캐런의 결혼식이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캐런은 죽거나 아니면 이번에야말로 끝을 맞이할 것이다.
똑똑.
자신은 더 이상 다리를 벌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더 이상 목을 베이지 않아도 될 것이다. 더 이상.
똑똑.
“나가.”
“명을 받드십시오.”
도나가 아니라 낯선 남자가 들어왔다. 평범한 옷을 입은 남자였다. 하지만 얼굴이 험상궂었고, 팔뚝은 굵었다. 궂은일을 하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 주는 남자. 캐런은 인상을 썼다.
“나가요.”
“귀즈 왕세자께서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없었다고 해요.”
“그분에게 거짓을 말할 수 없습니다.”
“전 결혼할 몸인데 왜 이런 짓을 하세요?”
“전 귀즈 왕세자님의 명을 받들 뿐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과 말씀을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남자가 캐런의 손목을 잡았다. 캐런은 침대에서 강제로 일으켜 세워졌다. 캐런이 문가를 향해 소리쳤다.
“도나!”
“…….”
“엘바 백작 부인에게 알려!”
이것은 지독한 월권이다. 아무리 귀즈 왕세자라고 해도 백작가에 기거하고 있는 여성을, 남작가의 약혼녀를 이렇게 끌고 가서 멋대로 할 수는 없다.
“놔요. 날 개돼지처럼 끌고 갈 건가요?”
“전 명을 따를 뿐입니다. 캐런 에반스, 일어나서 명을 따르십시오. 그분께서 당신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도나!”
하지만 대답이 없다. 하녀는 없었다. 언제부터 없었지?
캐런은 자신 주변에 너무 적은 사람을 둔 것을 후회했다. 최소한 엘바 백작 부인에게 알려야 한다. 리안에게라도 알려야 한다. 아무도 모르게 끌려갈 수는 없다. 그녀가 입을 다물더라도 최소한 보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왜 아무도 없지?
남자가 캐런의 팔을 잡았다.
“…캐런 에반스, 조용히 하시오.”
“당신, 계급이 뭐죠? 어디 가문이에요. 제대로 밝혀요.”
“그것도 알 필요 없으시고.”
캐런은 그의 옷이 평범하고, 말투와 억양 또한 거친 것에 주목했다. 그는 왕실에 공식적으로 고용된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저렇게 말할 수 없다. 캐런은 주위를 살폈다. 뒤에는 그와 같은 남자들이 몇 명 더 있었다.
“귀즈 왕세자라고 하실지라도 이렇게 밤중에, 자는 사람을 끌고 가는 것은 말도 안 돼요. 공식적으로 초청하라고 하세요.”
“하.”
“저와 자고 싶으시면 최소한 정부로 대하라고 전해요.”
짜악.
캐런은 숨을 몰아쉬었다. 뭐야, 지금. 저 남자. 지금. 내 뺨. 내 얼굴에. 머리가 흔들린다. 캐런은 눈을 깜빡였다. 생각지 않은 사람에게서 예기치 못한 폭력이었다.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시종이 캐런의 뺨을 쳤다. 이름도 모르고, 단 한 번도 자신을 친 적 없는 남자에게 맞았다.
“얌전히 구시오.”
“…얼굴을 상하게 하면 당신도 무사하지 않을 텐데요.”
하지만 가다듬으려고 해도 목소리가 약하게 흘러나왔다. 캐런은 마음을 다잡고 그를 노려봤다. 베르딕에게서 채찍으로 맞은 게 수백 번이고 도끼로 목이 잘린 게 수십 번인데. 자존심이 상한다. 하지만 캐런의 눈길이 가소롭다는 듯이 남자가 웃는다.
“그건 당신 생각이고.”
“엘바 백작 부인에게 알리고 가겠어요.”
이렇게 가다가는 정말 아무도 모르게 그냥 세상에서 사라질 것 같았다. 최소한 간다면, 누군가에게 알리고 가야 한다. 자신은 그냥 사라지는 것이 싫었다.
“잔말 말고 10분 주지. 옷을 갈아입어. 아니면 그냥 가도 나야 상관없어. 어차피 그분 앞에서는 옷을 입고 있지도 않을 테니까.”
캐런은 앉아서 그를 쏘아보았다.
“하나.”
“둘.”
그가 숫자를 센다. 캐런은 생각을 해야 한다. 판단을 해야 한다. 그대로 간다면, 최소한 레이몬드에게 철저하게 피해자인 척해야 한다. 그냥 이대로 사라져서는 안 된다. 캐런은 자신이 현실 도피하려 했던 지난 이틀을 후회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누가 그녀를 왕세자에게서 돕는단 말인가?
“아녀자를 희롱하는 건 악한 짓이야.”
“…전하.”
그때 기적처럼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를 돕는 것은 그의 아들이었다. 레이몬드를 동경하는 어린 왕족이었다.
루이스 왕세손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뒤를 기사 셋이 따라 들어왔다.
시종이 무릎을 꿇었다. 왕세손이 남자를 내려다보다가 자신의 기사에게 물었다.
“누군지 아나?”
“…모르겠습니다.”
“자네는 누구지?”
“루이스 님, 말을 섞으실 필요 없습니다. 미천한 자입니다.”
기사가 대신 나서서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는 꿇어서 머리를 조아렸다.
“넌 누구냐.”
“귀즈 왕세자님 밑에서 심부름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럼, 자네는 아버지께서 캐런 양을 이 밤중에 불렀다고 말하는 건가?”
“…….”
남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왜 왕세손님께서 이 야심한 밤에 여기 계십니까?”
“와.”
루이스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자네는 내가 누구인지 못 들은 모양이야. 경, 들었어?”
“예. 왕족을 취조하려고 하고 있군요.”
“아, 아닙니다!”
졸지에 왕세손을 취조한 사람이 된 남자는 땀을 뻘뻘 흘렸다.
“왕세자님께서 그녀를….”
“왜 부르셨지?”
“…저는 모릅니다.”
“지금 나라가 위급한가?”
“…….”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잘 못 알아들은 남자에게 루이스가 친절하게 다시 말을 했다.
“나라가 위급해서,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지금 캐런 양이 갈 필요가 있을까?”
“귀즈 왕세자님께서 요구하신 일입니다. 저도 명령을 받았습니다.”
“닥쳐라.”
기사가 머리를 꽉 잡았다.
“밤이 깊었으니 꼭 지금 가지 않아도 괜찮을 거야. 그렇지?”
“전하… 제게도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남자는 조금 전의 캐런처럼 목소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 내가 그걸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루이스 왕세손이 기사에게 눈짓했다. 기사가 남자의 머리를 잡아 올렸다. 남자와 눈을 마주치며 루이스 왕세손이 입을 열었다.
“잘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거야.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
남자가 굽실거리면서 나가자, 루이스 왕세손이 머리를 숙이는 캐런에게 일어나라고 손짓했다.
“옷은 갈아입을 필요 없어. 금방 나갈 테니까.”
“송구하옵니다.”
어떻게 지금 왔지? 캐런은 궁금했지만 자신이 먼저 입을 열어도 되는지, 질문을 해도 되는지 알 수가 없었기에 자세를 풀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레이몬드 경이 내게 비둘기를 보냈거든.”
“그래도 어쩌다가….”
“아버지의 잠자리를 신경 쓰는 아들이라니, 참 나라 꼴 잘 돌아가지?”
캐런은 그냥 머리를 숙였다. 루이스 왕세손이 기사에게 손짓하자 문이 열렸다.
“조만간 리안 영애를 보러 한 번 더 올 거야. 내가 이 저택에 있으면 저런 남자가 들어올 일은 없겠지.”
캐런의 감사 인사는 딱히 필요하지 않은지 루이스 왕세손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캐런은 일어나 침대에 앉았다. 태도나 몸짓, 머리 스타일까지 레이몬드를 많이 흉내 낸 모습이었다. 어지간히 그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사소한 곳에서 아직 어린 티가 나긴 하지만. 캐런은 그가 어른이 되면 얼마나 달라질지 궁금했다. 한 번도 본 적 없으니까.
“…도나, 차를.”
아직도 오지 않은 것인가?
캐런은 얼굴을 찌푸렸다. 자신의 전담 하녀인 그녀가 너무 오랫동안 보이지 않았다. 적당히 괜찮아서 계속 옆에 두었더니, 점점 불성실해진다. 캐런은 전에 쓰던 다른 아이를 생각하며 혀를 찼다.
하지만 다음 날이 되어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캐런은 레이몬드가 오지 않을 때보다 더 불안해졌다.
도나가 없다.
이제까지 없었던 일이다.
아니다, 이제까지 도나는 자신의 전담 하녀였던 적도 없다. 캐런은 그녀가 이제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움직였는지 전혀 모른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캐런은 궁금했다.
“글쎄요…. 오늘 식사를 가지러 오지 않았네요. 어머나, 캐런 아가씨 아니세요?”
백작 가문의 주방장인 중년 여자가 캐런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캐런은 주방을 보았다. 백작 가문에 있는 곳답게 매우 크고 사람들도 많았다. 갑작스럽게 방문한 캐런을 향해 주방장이 약간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식사를 계속 못 하신 건가요? 세상에, 방에 계시면 금방 가져다 드리라고 이를게요. 어쩜….”
“아니, 별로 배가 고프지는 않아.”
캐런은 주방장 뒤에 바짝 긴장하고 있는 하녀들에게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도나가 언제부터 없었는지 아니?”
“아뇨.”
애초에 도나는 자신의 전담 하녀다. 그리고 자신은 백작 부인의 호의로 얹혀사는 처지. 다른 사람들과 서로 연관이 되어 있지 않았다. 도나는 그냥 주는 음식을 받아다가 나르기만 하는, 손님의 하녀인 것이다. 이름을 아는 것이 전부다. 그런 외부인.
“어디 갔을까.”
“언제부터 못 보셨는데요?”
“잘 모르겠어…. 이틀? 사흘?”
귀즈 왕세자 때문에 캐런은 요 며칠 고민하느라 거의 폐인처럼 지냈다. 도나가 언제 정확히 사라졌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아무 말 없었어요?”
편지 전달을 지시했는데 그 뒤로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로 사라졌을까. 하루 정도는 에반스 저택에서 머물수도 있겠다 생각했지만 지나치게 오래 걸렸다.
“응.”
“그럼 좀 힘들 것 같은데요.”
캐런은 눈가를 비볐다. 그리고 주방장이 뒤를 돌아서 ‘베이컨 열두 상자’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뒤로 물러났다. 주방의 하녀들은 모두 기대와 흥분과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도나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자신이 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캐런은 더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난 세탁실 애들에게 가 볼게.”
“어딘지 아세요?”
“응.”
한두 번 온 곳이 아니니까.
캐런은 세탁실로 향했다. 그곳의 하녀들도 일이 많아 보였다. 캐런이 도착하자 바쁜 와중에도 담당자가 와서 응대하였지만, 세탁실의 하녀들도 별다른 답을 주지는 않았다.
“잘 모르겠네요, 저희들과 같이 일하는 아이는 아니라서.”
“전속 재단사를 보내 드릴까요?”
“나중에.”
캐런은 자신의 안부만 신경 쓰는 하녀들에게 별 할 말이 없었다. 세탁실의 하녀들은 도나의 이름도 잘 몰랐다. 사실 당연한 것이다. 도나는 캐런의 하녀다. 그녀들과는 접점이 없다.
“저… 아가씨.”
세탁 담당이 캐런에게 일렀다. 캐런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 애들은 잘 그만둬요. 몇 살이에요?”
“열여덟.”
“그 나이대 애들은 가출도 많이 하고 그래요. 3일 지났으면 안 돌아와요. 그냥 잊으세요.”
그 말은 하녀장도 마찬가지로 했다.
어느 곳이나 대저택의 하녀장들은 꼬장꼬장한 늙은 여자들이었다. 하이어저에 있던 헬렌과 닮은 키가 큰 가정부였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이제 어디로 가 있을까. 가정부는 캐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언제 나갔는지 모르시나요?”
“잘 모르겠어.”
“경찰에 연락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당분간은 다른 손님분들께 말하지 말아 주세요.”
“경찰에는 언제쯤 연락을 할 거지?”
“…그분들이 돌아가시면 바로 연락토록 하겠습니다.”
만약에 도나가 누군가에 의해 납치되었다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
캐런의 얼굴이 변하기 전에 가정부가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변명하듯이.
“왜 그런지는 더 잘 아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니.”
물론 가정부보다 캐런이 현실을 더 잘 알았다. 루이스 왕세손이 편하게 거처하는 것은 도나의 실종보다 중하다.
도나는 캐런이 오늘 만난 수십 명의 하녀들과 비교해 하나도 다른 점이 없었으며, 그녀가 사라진 것도 그렇게 이상하지 않다. 그런 여자들은 하루에도 수도에서만 셀 수 없이 사라지며, 그중 아주 몇 명은 시체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 세계다.
탁.
캐런은 자신의 방, 정확히는 엘바 백작 부인이 제공해 준 별채에 들어왔다.
별채라고 하더라도 백작이 제공하는 장소답게 꽤나 호사스러웠다. 이 장소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캐런은 도나를 생각했다. 자신의 방에서 좀 떨어진 하녀의 방.
캐런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 본 적 없던 장소를 향해 가기 시작했다.
하녀의 방에 머무는 하녀들은 그때그때 달랐다. 그곳에 머무는 것은 대부분 낸시였다. 그리고 가끔은 세라였다. 도나가 있던 적은 처음이었다. 그것은 약간의 자극이었고, 언젠가 도나의 목을 베는 장면도 가끔 생각했었다. 낸시의 목을 조르고 나서.
캐런은 자신이 계속 혼란스러운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은 본디 이번 생에서 사람을 죽이고, 죽이고, 열심히 죽일 생각이었다. 레이몬드의 눈을 피해서 어디까지 죽일 수 있을까. 그것이 캐런의 목적이었다.
“그것을 듈란이 웃기지도 않은 내기로 묶어 버렸지.”
듈란 때문에 이번 생에서의 목적이 아예 틀어져 버렸다. 캐런의 유흥은 결국 시간 때우기 이상이 되지 않았다. 살인이라는 자극적인 일이라고 하더라도. 캐런이 원하는 끝, 자신의 죽음에 비하면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듈란은 캐런의 이어지는 살인을 막았지만 지금 캐런은 점점 더 내기를 그만두고 싶어졌다. 레이몬드의 사랑은 결국 전과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캐런을 죽이려고 든다면 재미가 있었겠지만, 그의 변함없는 사랑은 또다시 의심을 낳았다.
캐런은 머리를 저었다.
지금 캐런은 레이몬드나 듈란보다 도나가 더 궁금했다. 낸시가 죽음으로써 그동안 보여 준 적 없던 새로운 모습을 보여 줬던 것처럼, 도나도 새로운 모습을 보여 줄지 어찌 아는가.
보통 하녀들의 거처는 저택이지만, 캐런의 하녀들은 언제나 캐런을 따라서 옮겼다. 낸시는 캐런의 의사 중 하나였고, 도나는?
끼익.
“막 알고 보니 도나가 연쇄 살인의 최종 원흉이면 재밌겠네.”
캐런은 문을 열었다.
그리고 실망했다.
도나의 방은 별다를 바가 없었다. 캐런은 사용인의 방답게 작은 침대와, 작은 창문, 그리고 작은 옷장과 책상 하나를 보았다. 그냥 그런 곳이었다. 하이어 저택에도 있는 그런 방. 너무나 흔한 방. 일반 여자 사용인들은 다들 모여서 생활하지만 도나 같은 경우는 약간 다르다. 손님에게 딸린 사용인들은 이렇게 혼자서 지냈다. 약간은 쓸쓸한 풍경이었다.
“그래도 레이몬드 경보다는 낫네.”
캐런은 도나의 임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언제나 다 정리해 두고 금방 떠날 준비를 하던 레이몬드의 방과는 달랐다. 화장품도 있었고, 옷가지와 꽃도 있었다. 캐런은 창가로 다가갔다.
“수국이네.”
캐런은 그 꽃이 수국인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차피 자신의 방에는 너무 많으니, 달라고 하면 많이 줄 텐데. 도나는 한 송이를 유리병에 꽂아 두었다. 자신의 돈으로 산 것일까. 캐런은 쓸데없는 곳에 돈을 썼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그녀의 마음일 것이다. 꽃은 아직 신선했다.
“꽃이 신선하다는 것은 떠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증거일까?”
하지만 당연한 것 아닌가.
도나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있었다. 화병이라고 하기엔 초라한 물병 바닥에는 물이 고여 있었다. 캐런은 그런 걸로는 딱히 별다른 걸 추측할 수 없었다.
“책상은?”
작은 간이 탁자였다. 투박한 컵 하나가 있었다. 안은 비어 있었다. 그녀는 컵 두 개를 둘 필요는 없었던 모양이다.
“일기장 같은 건 역시나 없네….”
일기 같은 것이 없을까 했지만 역시 어린아이가 아닌 이상 일기를 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일기가 있다며 사람의 속을 들여다볼 수도 있겠지만 바쁜 성인 중에 일기를 쓰는 사람은 드물다. 캐런만 하더라도 일기는 쓰지 않았다. 자신은 그리 바쁘지도 않아도 쓰지 않았다.
“…난 귀찮아서가 아니라 어차피 지워지니까 안 쓰는 거야.”
어머니도 그랬겠군. 앞으로 그런 걸로는 불평하지 않을게요, 어머니.
캐런은 얼굴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넘기며 자신의 모친에게 속으로 사과를 했다.
“이건 좀 싸구려네….”
그리고 선반에는 화장품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낸시는 검은 피부를 돋보이게 하려면 붉은 입술이 필수라며 항상 입술을 붉게 물들이고는 했었는데, 나중에 수도에서 하나 사다 주어야겠다.
“물론 다음 생에.”
캐런은 자신의 손에서 목이 졸려 가며 컥컥거리던 낸시를 생각하며 웃었다. 마지막 얼굴은 좀 지저분해 보였다.
캐런은 작은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 보았다. 캐런은 하녀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보며 찌푸렸다. 도나가 없으니 다른 여자애 하나를 빌려 달라고 해야 겠다.
캐런은 한 바퀴 돌고는 침대로 향했다.
“결론은… 모르겠다.”
캐런은 도나의 침대에 털썩 누웠다. 작은 침대가 딱딱했다. 캐런은 요통을 유발할 것이 분명한 싸구려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보았다.
자신도 안다.
자신은 여기서 지금 놀고 있다.
재밌나?
재밌는 거 같아.
사람이 사라졌잖아.
그건 이제까지 없던 이야기지.
뭐든지 다른 건 좋은 거야. 변화하는 건 재밌는 거고.
그렇지?
“아야.”
캐런은 자세를 틀어서 통증이 올라오는 허리를 문질렀다. 아무리 싸구려라고 해도 좀 심하다. 아니, 이것은 바닥에 뭔가가 들어 있는 감촉이었다.
옛날이야기가 떠오른다. 열두 겹의 두툼한 요와 열두 겹의 오리털 이불을 깔고도 공주는 완두콩 한 알의 불편함을 견디지 못했지. 하지만 이것은 완두콩이 아니었다. 그리고 도나의 침대는 그렇게 두툼하지도 않았다. 하녀의 침대니까.
완두콩보다 훨씬 큰… 상자 같은. 실수로 침대에 넣어 두었다가도 찌푸리며 일어날 크기의 물건. 그냥 눈으로 볼 때는 지나치더라도 누운 사람은 바로 알아차릴 크기의 것이었다.
캐런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뭔가가 있었다. 그렇다면 꺼내 봐야지.
캐런은 깔린 천을 들었다. 약간 무거웠지만 혼자 못 들 정도는 아니었다. 침대 틀이 삐걱이고, 먼지가 날렸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 아래에는 중요한 것이 있으니까.
“…어머나.”
그리고 그 안에는 보물 상자가 들어 있었다. 캐런은 눈을 반짝이며 그것을 빼냈다.
“보물 상자네?”
말 그대로 보물 상자처럼 생긴 상자였다. 캐런은 보랏빛 비단에 감싸져 있는 그 상자를 꺼냈다. 하녀의 방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천을 가차 없이 풀어내자 그 안에서 연한 갈색의 나무 상자가 나왔다.
이것을 열면 무엇이 나올까? 캐런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미소를 지었다. 도나의 돈이라도 들어 있으려나, 아니면 비밀 일기장? 아니, 아니다. 그런 것이라면 도나가 사라질 때 들고 갔겠지. 캐런은 어쩌면 자신과 관련된 것일까 기대를 했다.
낸시가 그녀의 기억을 주물렀다면, 혹시 도나도 그런 식으로 자신과 연관되어 있을까?
“아니면 폭탄이 꽈앙….”
하지만 캐런이 귀를 대었을 때 초침이 흘러가는 소리 같은 것은 들리지 않았다. 사실,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고 해도 진짜 폭탄이 그런 소리를 내는지 캐런도 모른다. 연극에서 과장스럽게 큰 시계가 붙어 있는 양초 더미들을 봤을 뿐이다.
하지만 죽어도 어떠랴. 지금 캐런을 막는 것은 남의 사생활을 캔다는 약간의 양심뿐이었고, 그것조차 이번 생에는 살인을 하며 신나게 날려 먹었다. 그래서 캐런은 즐거운 마음으로 그 상자도 열었다.
“…….”
상자를 열자 캐런은 약간 눈이 부셨다. 그 안에는 결혼을 축하하는 쪽지와, 장신구들이 있었다. 어쩌면 예상한 물건이었고, 어쩌면 예상치 못한 물건이었다.
엽서의 위에는 캐런에게, 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누굴까.
그리고 엽서의 뒤에는.
결혼 축하한다.
캐런은 글자를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캐런은 필적을 보고 누군지 바로 알 수는 없었다.
쪽지를 바닥에 내리고 캐런은 다른 물건들을 내려다보았다.
“…….”
그 쪽지와 장신구, 꽃. 그것까지는 괜찮았다. 다른 것이 문제였다. 처음에는 그것 또한 장식품 같은 것인 줄 알았다. 잘 어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손이었다.
사람의 손이 꽃과 금은보화에 장식되어 있었다. 단면은 깔끔하게 잘려서, 분홍빛 리본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언뜻 보면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하는 소녀에게 줄 법한 선물 같았다.
하지만 말라붙은 피가 손톱 끝에 달라붙어 있는 것을 보면, 마지막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처리하는 세심함은 없었다.
“…도나니?”
캐런은 손에게 질문을 던졌다.
물론 대답은 없었다.
이것은 도나의 손일까?
아니면 누구지?
왜?
왜 잘려서 이 안에 있지?
누가 넣어 두었을까?
캐런은 비명을 지르거나, 경악하지는 않았다. 사실 상자가 침대 밑에서 나왔을 때부터 무언가 불길한 것이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다. 놀랍기는 하지만 공포보다 호기심이 생겼다.
“누굴까?”
누군가가 자신에게 손을 보냈다.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으니 다르게 생각할 것도 없다. 하지만 보내는 사람의 이름은 없었다. 캐런은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누굴까? 어떤 사람들은 필체만 보고도 누구인지 알아맞히겠지만, 캐런에게 그런 지식은 없었다. 세련된 필체긴 했다.
“베르딕 에반스 씨… 는 아닐 것 같은데.”
그는 이 시점에서 가장 자주 캐런을 핍박하는 사람이었지만, 그가 여자를 토막 내서 보낸다는 것은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캐런을 겁주기 위해서 다른 여자를 도륙 내기보다는, 자신이 도끼를 들고 와 캐런의 목을 칠 사람이다.
“베르딕 씨가 보기보다 화끈한 면이 있지.”
베르딕은 캐런을 잘 모르겠지만 캐런은 그를 잘 알기에, 캐런은 베르딕을 지웠다. 베르딕은 캐런을 그동안 너무 많이 죽였기에, 그가 이럴 리 없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는 묘한 곳에 결벽증이 있었다.
캐런은 다른 남자를 생각했다.
“역시 귀즈 왕세자?”
가장 현실적으로 그럴듯한 사람이기는 하다. 최근에 그가 캐런을 불러내려고 지시했기 때문에. 하지만 왕족이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캐런은 그를 모른다. 그는 어머니의 남자 중 하나였고, 늙고 시든 작대기를 가진 남자였으며, 비위도 강한 남자라는 것. 그것이 캐런이 아는 전부였다. 그에게 이런 취미도 있는 것일까?
하지만 왜 이제야?
캐런은 그래서 더 이상했다. 어머니에게 이 정도로 집착하고, 자신에게 이 정도로 집착하는 변태가 왜 그 세월 동안 한 번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단 말인가? 그는 이제까지 기껏해야, 캐런의 얼굴을 보며 캐서린과 닮았다고 했을 뿐이다. 결혼식에조차 참석하지 않았다.
귀즈 왕세자라고 확정하기 어려운 것은 그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듈란.”
캐런은 자신의 약혼자였던 듈란을 떠올린다. 낮은 가능성이지만, 그일까?
캐런은 도나에게 마지막으로 부탁을 했었다.
“듈란에게 편지를 전해 줘.”
그 편지에는 듈란에게 선택을 미룬 자신의 고민이 적혀 있었다. 도나가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은 듈란일 가능성이 컸다.
“정말이지 이번 생은 너무 어려워….”
하지만 캐런이 아는 그가 이런 짓을 할까.
캐런은 말을 더듬고, 항상 불안해하고, 남을 비난하기 좋아하는 성질의 그를 안다. 그는 캐런 앞에서는 그나마 약자인 것처럼 소심한 것처럼 굴지만, 자신보다 밑이라 생각하면 한없이 깔보는 성격이었다.
그것 말고도 성격적 단점은 많았다. 캐런은 그를 1년만 본 것이 아니라 100년을 봐 왔다. 듈란 같은 남자들이 마지막 날 캐런을 찌른 적도 몇 번 있었다. 대부분 수도사들 중에 많았다. 하지만 듈란이 캐런을 죽인 적은 없었다.
“으음….”
듈란의 도덕을 믿는 것이 아니라 듈란의 도살 실력을 믿었다. 듈란은 사육제 때마다 수많은 동물들의 숨을 끊었다. 대부분은 작은 동물들이었지만 가끔은 소 같은 거대한 동물들일 때도 있었다. 듈란은 하기 싫어서 지긋지긋하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소의 정수리를 적은 힘으로 내려치고, 목을 따서 피를 빼내었다. 새 같은 동물은 한 번에 목을 비틀었다.
캐런은 차갑게 식은 손을 만져 보았다. 손톱에는 피가 묻어 있었고, 절단면이 거칠었다. 살아 있을 때 자른 것 같았다. 캐런은 예전에 토마스를 토막 내던 때를 기억한다. 시체를 잘랐기에 깔끔하게 잘렸다. 캐런의 힘이 좀 모자라서 잘근잘근 썰어야 했지만, 절단면이 이렇지는 않았다. 이 (아마도) 여자의 손목 절단면은 상당히 거칠었다. 살아 있을 때 잘린 것이다. 캐런은 자신의 손목이 잘리는 것을 뜬 눈으로 봐야 했을 손의 소유자를 생각했다.
“진짜 도나인가 보네.”
손은 굳은살이 조금씩 박혀 있었고, 너무 작지도 않았지만 성숙한 느낌이 드는 손도 아니었다. 딱 캐런 나이대의 여성의 손. 그리고 귀족도 아닌. 이것은 추리가 필요 없을 법한 이야기다. 도나가 알고 보니 미친 살인마였던 것이 아니라면 역시 이 손은 도나의 것이다.
그리고 캐런은 역시 도나의 손일 것이라 생각했다. 캐런에게 보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캐런과 관련이 있는 여성은 그리 많지 않았다. 잘린 손을 잘라서 선물해 줄 사람이, 아무 사람이나 잡아서 자를 것 같지는 않았다.
“도나야, 아마도 도나야. 마지막으로 듈란을 만났니?”
물론 손은 말을 하지 않았다. 캐런은 악수하듯 손을 잡았다.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죽은 고깃덩어리의 느낌.
“…….”
낸시를 죽일 때는 신선한 시체였기에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너무 흥분해서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토마스의 시체를 토막 낼 때는 자신이 미친 것이 아닐까 싶게 열중했었고 아버지가 죽었을 때는 불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캐런은 여자의 손을 잡으면서 눈을 감았다. 약간 동정심 같은 것이 솟아오를까. 하지만 캐런은 눈물 같은 것이 나지는 않았다. 죽었을까, 살았을까.
궁금하기는 했지만 슬프지는 않았다.
그보다 든 생각은 ‘그래서 듈란은 뭐라고 대답할까?’ 하는 질문이었다.
듈란은 언제 대답을 준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그냥 진정한 사랑을 하라고 했을 뿐이다. 이제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캐런은 선택하기 싫어서 미뤄 두었지만, 지금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어떻게 죽을까. 그것을 선택할 때 느끼던 감각을 느꼈다. 캐런은 하인들이 소리를 지르는 창밖을 보았다.
“온실 수리는 내일에야 다 끝난대요!”
“양고기는 도착했어!”
“3층 복도는 다시 한 번 점검해!”
하인들이 루이스 왕세손을 맞을 준비를 하느라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전에 없이 소란스럽게 굴고 있었다. 백작 가문의 사용인들답게 항상 조용조용 다녔지만, 루이스 왕세손의 갑작스러운 방문은 사람들을 저렇게 들뜨게 만들었다. 캐런은 리안 영애가 볼을 발그레하게 물들이며 수십 벌의 옷을 놓고 고민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언제 오시지?”
“내일!”
가만히 있으면, 캐런은 해피 엔딩을 맞이할 것이다.
레이몬드는 이번에도 캐런을 사랑한다고, 결혼하자고 했다. 전과 같이.
귀즈 왕세자가 캐런을 탐내는 악당이 되었지만, 그것 또한 루이스 왕세손이 막아 줄 터였다. 캐런은 이 방 안에서 그저 기다리면 된다. 레이몬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랑에 빠진 소녀가 되면 된다. 이번에 사랑을 이루면, 만약에 듈란이 그것을 인정해서, 끝이 나면.
그걸로 끝날까?
전과 같이?
캐런은 일어났다. 손은 다시 상자에 집어넣었다.
여성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캐런은 일어나서 머리를 빗고, 목걸이와 귀걸이를 차고, 옷을 갈아입었다. 하녀가 없으니 혼자서 해야 했다. 캐런은 별것 아닌 사소한 일들을 혼자서 하는 것이 익숙지 않았다. 나이를 헛먹었다.
“옷도 혼자 입기 힘들구나.”
캐런은 한숨을 쉬며 간신히 옷에 몸을 끼워 넣었다. 코르셋으로 조이는 것은 포기했다. 혼자서 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배가 좀 나온 것일까. 캐런은 그 사소한 생각에 웃으며 얼굴을 닦았다.
머리를 틀어 올리고, 장식을 끼워 넣는다. 목걸이는 신경 써야 한다. 캐런은 진주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자신은 이것이 좋았다. 세 줄짜리의 굵은 진주알들과 가운데에는 여러 개의 다이아. 호화스러워서 잘 하지 않지만 지금은 이것을 할 때였다.
이셀라의 것과 비슷하지만 캐런의 것이 좀 더 좋았다. 캐런은 목에 그것을 걸었다. 옷은 좀 간편한 것이 좋을 것이다. 등이 파여도 지금은 별 상관없겠지. 캐런은 드레스 중 과감히 등을 드러내는 옷을 선택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것이 아니니 괜찮으리라.
듈란은 은근히 그런 옷을 좋아했다.
“걔는 알고 보면 변태야.”
캐런은 옷을 입고, 화장을 했다. 붉은 입술이 성숙해 보였다. 마지막에 검은색의, 모자가 달린 망토를 입었다. 모자로 머리를 가리고 캐런은 방 밖으로 빠져나왔다.
캐런은 이대로 해피 엔딩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듈란은 여기 있겠지.”
캐런은 이셀라 에반스 저택을 본다. 대부분 불은 꺼져 있었다. 어느새 밤이 깊었다.
“…문을 두드려야 하나.”
캐런은 지친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 멀지 않을 줄 알았는데. 엘바 백작 부인 몰래 나온 것이라 백작가의 마차는 쓸 수 없었다. 도중에 마차를 한 번 탔지만, 사설 마차는 큰길 외에는 가지 않는다. 그리고 에반스 가문의 사유지는 너무 넓었다. 사유지 앞에서 마차는 멈췄다. 너무 넓어서 인적이 드문 곳이 많은 게 다행이었다. 수풀을 헤치며 캐런은 걸었다.
“에반스 부지가 이렇게 멀었나.”
캐런은 이셀라의 시녀로 있던 때에 쓴 적 있던 뒷문을 열었다.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지만 캐런은 그 여분의 열쇠가 바로 옆의 작은 조각상 밑에 있는 것을 알았다. 문이 열리자 지하실이 드러났다.
“…듈란 방을 모르네.”
그제서야 캐런은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알았다. 캐런이 에반스 가문에서 오래 있었다고 해도, 듈란이 같이 있던 것은 처음이었다.
“…어휴.”
캐런은 손님의 방으로 쓰던 곳이 어디였지 기억을 되살리며,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다.
또각또각.
어느새 밤이 깊었고, 저택 안은 고요했다.
캐런은 구두를 벗어 손에 들었다. 에반스는 대리석으로 바닥을 장식했기 때문에, 아무리 살살 걸어도 시끄러웠다. 캐런은 신발을 들고 조심조심 손님들이 쓰는 복도로 향했다. 저택이 어두워도 익숙한 공간이었기에 이동은 어렵지 않았다.
화려한 저택은 어둠에 묻혀 잠들어 있었다. 캐런은 아무도 깨우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듈란과의 만남일 뿐이다. 괜히 베르딕 에반스와 마주치는 민망한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저택마다 법칙은 다르다. 하지만 캐런은 에반스 저택의 사소한 법칙을 안다. 손님방들 중 문이 잠겨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듈란의 방이리라. 에반스 저택은 안 쓰는 방은 굳이 잠가 두지 않았다.
“…어라.”
문이 열려 있었다. 캐런은 걸리는 것 없이 부드럽게 돌아가는 문고리에 당황했다. 혹시나 해서 살짝 안을 들여다보았으나, 빈 방이었다. 첫 번째 방이라서 이곳을 먼저 쓸 텐데. 캐런은 문을 닫고 다음 방으로 향했다.
“…….”
그 방도 여전히 비워져 있었다. 뭐지. 캐런은 당황했다.
설마 듈란은 지금 에반스 저택에 없는가? 어째서? 그는 지금 캐런을 위해 이셀라 에반스를 잠재우고 있을 터였다. 캐런은 당황했다. 이셀라를 돌보기 위해 그는 지금 여기 있어야 한다. 그녀는 일반적인 병이 아니기에, 듈란이 지속적으로 약을 투입해야 한다. 그런데 왜? 지금 이 시간에? 그는 어디로 간 것이지?
“…거기, 누구야?”
캐런은 하인이 등을 들고 멀리서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캐런은 재빨리 계단 쪽으로 몸을 피했다. 하지만 그는 캐런 쪽으로 오고 있었다. 어디로든 피해야 한다. 캐런은 계단 위로 올라갔다.
“…….”
계단을 오르는 걸음을 빨리했다. 캐런은 자신이 지금 어디로 가야 할지 잘 알았다. 꼭대기다. 확인을 해야 한다. 꼭대기에는 이셀라 에반스의 방이었다.
무엇인가 이상했다.
“누구냐!”
예상치 못한 사람이 또 나타났다. 저택이 깨려 한다. 하지만 베르딕에게 채찍을 맞더라도 확인을 해야 한다. 캐런은 거의 달리다시피 올라갔다.
타다다닥.
방문이 보인다. 이셀라 에반스의 방문은 잠겨 있었지만 캐런은 그것을 여는 법을 안다. 캐런은 방문의 아래쪽을 강하게 발로 찼다.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어디 갔어요?”
이셀라의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듈란도, 누워 있을 이셀라도. 캐런은 방 안으로 들어가서 이셀라의 침대를 들추었다. 아무도 없었다. 쓰레기통을 본다. 텅 비어 있었다. 쓰지 않은 지 꽤 오래된 것 같았다. 이셀라는?
“대체.”
그리고 캐런 뒤에서 누군가가 캐런의 입을 막았다. 캐런은 익숙한 감각을 느꼈다. 숨이 막히는 감각이었다.
듈란은. 이셀라는. 도나는.
캐런은 가물거리는 눈으로 텅 빈 방 안을 보았다.
여전히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캐런은 눈을 떴다. 그리고 다시 감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밤인가 봐.
캐런은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했다. 졸음이 다시 쏟아졌다. 하지만 뺨에 낯선 천의 감촉이 느껴졌다. 캐런은 다시 눈을 떴다. 흐물거리던 이성이 천천히 돌아왔다. 어두워. 여기는 어디지. 캐런은 침대를 더듬었다. 침대 끝의 살랑줄을 잡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손에 닿지 않았다.
“…아.”
캐런은 마지막에 자신이 에반스 저택에서 정신을 잃은 것을 기억했다.
캐런은 듈란을 만나기 위해 에반스 저택으로 갔다. 하지만 듈란은 없었다. 그래서 이셀라의 방으로 갔는데 그녀조차 없었다. 캐런은 그 방을 보며 정신을 잃었다.
여긴 어디지. 캐런은 침대에 엎드려서 기억을 하기 위해 애썼다. 너무 어두웠다. 창이 없는 곳이었다. 아니면 두꺼운 천을 쳤던가. 에반스 저택에서 자신을 납치한 사람은 어디에다 옮긴 것이지? 캐런은 몸을 일으켰다.
“여긴 어디야….”
너무 어두웠다.
캐런은 침대에 앉았다. 일어나기에는 너무 어두웠다.
“베르딕 에반스?”
시험 삼아 불러 보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캐런은 어둠 속에 앉아서 주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에반스 저택에서 정신을 잃었다. 여기는 에반스 가문의 저택일까?
“…이상한데.”
캐런은 더듬거리며 일어났다. 창문을 열어서 방 안을 확인해 봐야 한다. 아니면 문을 열어 나가야지. 하지만 너무 어두웠고 캐런은 칠흑 속에서 걷는 것이 약간 무서웠다. 이런 것을 무서워하면 안 돼지. 어둠은 무서운 게 아니야. 진짜 무서운 건 그런 게 아니야. 자신을 다독이면서 캐런은 일어나서 손을 뻗었다.
캐런은 방을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몇 걸음 걷자 차가운 벽이 만져졌다. 캐런은 싸늘한 냉기에 약간 소름이 돋았다. 싸늘한 돌의 감촉. 그래도 벽을 만지면서 걷는다.
“아야.”
덜컹거리는 뭔가가 있었다. 장식품 같은 것일까. 캐런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갖가지 상상을 누르면서 다시 벽을 만졌다. 하지만 무릎이 약간 아팠다. 더듬거리며 더 나아가자 돌이 아닌 나무로 된 벽이 만져졌다. 문이다. 하지만 방문으로 쓸 법한 문은 아니었다. 일반 문의 두 배 정도 넓은 너비였고, 중간에 철판이 가로로 덧대어져 있었다. 문고리가 만져졌다. 두 개의 원으로 된 손잡이였다. 묵직했다.
“…무거워.”
캐런은 당겨 보고, 밀어 보았지만 약간 덜컹이더니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누군가가 밖에서 잠근 것이다.
“…왜?”
여긴 지하실일까? 하지만 베르딕 에반스의 지하실은 캐런이 잘 알았다. 그는 거기서 자주 사용인들에게 체벌을 가하고는 했지만 침대 같은 것은 두지 않았다. 체벌의 공간에 왜 침대가 필요하단 말인가. 지하실에 또 다른 방이 있었나. 캐런의 기억에는 없었다.
여기는 베르딕 에반스의 저택이 아니다.
캐런은 그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결론이 나더라도 이해는 가지 않았다.
“왜 베르딕 에반스가 날 여기에….”
자신이 에반스 가문에 몰래 들어온 도둑이라고 생각했다 하더라도, 이런 곳에 둘 이유가 있을까? 크게 창피를 주고 내쫓으면 그만일 일이다. 좀 더 나간다면 경찰에 알려서 도둑이라고 몰아갈 수는 있겠지만. 캐런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10대 여성일 뿐이다.
이유는 금방 밝혀졌다.
문이 덜컹거리며 열렸기 때문이다.
“일어났구나.”
귀즈 왕세자였다.
뻔하다면 뻔한 사람이었다. 새삼스러운 반전은 아니구나, 캐런은 눈을 깜빡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결국 이번 생은 귀즈 왕세자의 노리개로 끝나는 인생이구나. 기회를 봐서 목매달고 죽어야지. 캐런은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방 안을 밝혀라. 잠에서 깼으니 이제 일어나야지.”
귀즈 왕세자는 뒤의 하인들에게 지시했다.
여러 개의 횃불이 벽에 걸리자 방이 드러났다. 어둠 속에서 느낀 것보다는 훨씬 커 보였다. 천장이 매우 높아서 더욱 그렇게 보였다. 왕궁의 지하실인 것일까. 지하실이기에 어쩔 수 없는 습기가 있었지만, 횃불이 곳곳에 걸리자 그것도 이내 사라졌다.
“난로는 아직 더워서 켜지 않을 거란다. 괜찮니?”
“…네.”
그렇지. 아직은 여름이다. 벽난로는 필요하지 않다. 적당한 온도가 중요하다. 방 안의 장신구들을 위해서도 그것이 적당할 것이다. 캐런은 납득했다.
호화스러운 물건들이 많았다. 베르딕의 집과는 다른 점이 많았다. 베르딕의 지하실은 철저히 체벌을 위한 공간이었지만, 이곳은 유희의 공간이었다.
캐런이 누워 있던 침대는 녹색 비단이 깔려 있었고, 난롯가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고, 테이블에는 책도 몇 권 있었다. 의자는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테이블의 탁자는 대리석과 상아로 만들어져 있었다.
책장에는 여러 권의 책과 장식품들이 들어 있었다. 체스도 있었고, 카드도 있었다. 심지어 어린애들이 가지고 놀 만한 인형들도 있었다. 귀즈 왕세자의 취향을 맞추다가 죽겠구나. 캐런은 귀즈가 손으로 가리키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저는… 베르딕 씨의 집에 갔었는데, 눈을 뜨니 이곳에 있군요.”
“베르딕 에반스는 내게 잘 보이고 싶어 하기 때문이란다. 내가 널 마음에 들어 하는 걸 어떻게 또 들었는지.”
귀즈 왕세자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한결 더 미끄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베르딕 에반스가 자신을 잡고 팔 만한 것이라고 판단했구나. 캐런은 베르딕에게 화가 났다. 차라리 전처럼 자신의 목이나 칠 것이지.
“…그래서 그가 절 넘겨준 것인가요?”
자신은 고작해야 듈란을 만나러 저택에 들어갔을 뿐인데. 귀즈 왕세자가 빙글거리며 웃고는 캐런에게 다가왔다.
“그도 욕심이 많은 상인이란다.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그의 손이 캐런의 뺨을 쓰다듬었다. 주름진 손이 살짝 떨렸다. 그는 뭔가를 억누르는 듯했다. 하지만 그 인내가 그리 길 것 같지 않았다. 캐런은 입을 열었다.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리고 싶었다.
“베르딕 에반스 씨에게 무엇을 넘겨주었나요?”
“너와는 이제 상관없는 일이란다.”
“…베르딕 에반스가 왜 절 넘겼나요?”
귀즈 왕세자는 손가락으로 캐런의 입을 벌렸다. 캐런은 입을 다물고 싶었지만, 순순히 그의 힘에 거역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입술이 예쁘구나.”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입이 벌려져 있으니 그러기는 힘들었다. 그도 그것을 요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손을 뺐다. 캐런은 짠맛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눈썹을 찌푸렸다. 그것마저 참기는 힘들었다. 표정 관리가 잘되지는 않았지만 귀즈 왕세자는 그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베르딕 에반스는 딱 하나를 원했단다.”
귀즈 왕세자는 캐런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중한 자세였다. 캐런은 그 손을 잡았다. 귀즈 왕세자는 캐런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그가 캐런의 허리와 손을 잡고 빙글 돌았다. 캐런은 자신의 뒤를 보게 되었다.
“네 파멸을 원했지.”
“…….”
“자기 딸의 원수. 자기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라고 하면서. 하이어를 죽였니?”
음악은 없었지만 노래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어떻게? 그 사실은 명백했다. 캐런은 텅 빈 방 안을 생각했다. 있어야 할 곳에 없는 남자를 생각했다. 아, 그렇구나.
듈란이 자신을 배신했구나.
귀즈 왕세자는 캐런의 허리를 잡고 스텝을 밟았다. 일정한 박자에 따라 몸이 움직인다.
“하지만 난 널 파괴하지 않을 거야. 내가 왜 그러겠어? 이토록 힘들게 손에 넣었는데.”
“…….”
“마음에 드는 짓만 골라 하는 널 왜 미워하겠어?”
아버지가 줄에 매달려 흔들렸다. 흔들흔들 흔들리면서 웃는다.
‘날 죽인 건 톰이라고? 넌 그게 아니란 것을 잘 알잖아. 네가 그만뒀을까? 아니, 넌 분명 달려갔을 거야. 달려들어서 내 목에 줄을 매달고 웃었겠지.’
좋은 때는 끝났다. 귀즈 왕세자는 캐런의 귀에 속삭였다. 연인을 대하듯 은밀한 목소리로.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재밌었니? 괜찮아. 내가 널 보호해 줄 테니까.”
“…절 내보내 주실 생각이 없으시군요.”
“그래, 그래서 네가 이 방을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구나.”
춤을 춘다. 그가 캐런의 몸을 돌린다. 캐런은 귀즈 왕세자의 춤에 몸을 맡기고 방 안을 둘러보게 되었다.
“재밌을 거야.”
방 안은 호사스러웠고, 꽤 넓었다. 방 안의 대부분의 물건들이 반짝였다. 장난감도 많았다. 캐런은 그 물건들 하나하나에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하나같이 최고급품들이었다.
가장 압권은 벽에 걸려 있는 장식품들이었다.
“아.”
천장이 높아서 벽에 빼곡하게 장식들이 걸려 있었다. 그 수만 해도 아득한 것이었는데, 몇몇은 명화를 재현하기까지 해서 보는 사람들이 생각할 거리마저 던져 주는 것이었다. 비명을 지르지만 않는다면 귀즈 왕세자에게 소장품에 대해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캐런은 비명은 지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괜찮은 것은 아니었다.
벽에 펼쳐져 있고, 장식되어 있는 것은 사람들이었으니까.
“감상을 듣고 싶구나.”
대부분은 여자들이었고, 가끔은 남자들이었다. 캐런은 가장 가까운 곳에 걸려 있는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마치 자애로운 성모처럼 두 팔을 벌리고 모든 것을 보여 주고, 포용하고 있었다. 선홍빛의 내장이 있었을 그 배 속에는 더 이상 내장은 없었지만,
그리고 캐런은 그중에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자신의 하녀가 있었다. 옷은 전부 벗겨진 채로, 한 손과 한 발이 잘려서. 도나는 캐런과 눈이 마주쳤다. 입이 벌어졌다.
“흐… 아.”
도나의 입에서 언어가 되지 못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벌어진 입에서 피가 떨어졌다.
“…전… 하.”
캐런은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꾸밀 필요도 없는 억누른 목소리가 간신히 새어 나왔다. 자신의 목소리는 도나의 목소리와 닮았다.
캐런은 머릿속으로 수도의 여성 연쇄 살인 사건, 실종 사건을 기억해 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라졌는지, 그리고 왜 수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왜 신문에는 작게 적혔는지.
아인 남작이 범인이었을 텐데, 어째서.
캐런은 이내 그 이유를 알았다. 아인 남작이 범인으로 잡혔던 것은, 캐런과의 도박 후 파산했을 때였다. 그리고 그의 재판은 이상하리만치 질질 늘어졌고, 최후에는 증거 부족으로 풀려났다. 캐런은 아인 남작이 다른 곳에서 돈을 마련해 증인을 조작한 것이 아닌가 추측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아인 남작에게 귀즈 왕세자가 돈을 주었구나.
“아인 남작님은 사람을 죽일 만한 사람은 아닙니다.”
레이몬드의 말이 맞았다.
도나와 눈이 마주쳤다.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도나의 손을 챙겨 왔어야 했는데, 그래야 이어 줄 수 있는데, 아니, 아니야. 정신 차려. 하지만.
“소리 질러도 되나요?”
캐런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멍청한 소리였다.
젠장,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캐런은 울고 싶었다. 아니, 약간 눈물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비명… 을… 지르고… 싶어요. 네…?”
제발, 제발.
관대한 귀즈 왕세자는 그것을 허락했다.
캐런은 비명을 질렀다.
자신도 알 수 없는 비명이었다. 비명을 지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캐런이 비명을 지르는 동안 귀즈 왕세자는 웃었다.
그는 웃으면서 비명을 지르는 캐런을 꼭 껴안고 빙글빙글 왈츠를 추었다.
왕실의 춤 선생들이 귀즈 왕세자를 보면 자랑스러워하리라. 그는 비명을 지르는 여자를 안고도 완벽하게 춤을 추었다. 음악이 없어도 박자는 어긋나지 않는다. 완벽하다. 하지만 예법 선생들은 그를 보며 부끄러워할 것이다. 그의 웃음은 너무나 품위 없고, 일그러져 있었으니까. 그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서 거의 침을 흘리면서 웃고 있었다.
“히히히히히!”
해피 엔딩을 거부한 여주인공이 받는 대가란 이런 것일까.
캐런은 그런 생각을 했다.
“많이 놀랐구나.”
“…이젠 괜찮습니다.”
결국,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비명을 하루 종일 지를 수는 없는 법이다. 캐런은 다시 침착을 되찾았다. 물론 머릿속으로만. 어쩌면 이것은 너무 놀라서 침착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간에, 캐런이 비명을 멈추자 귀즈 왕세자도 웃음을 멈추었다. 다행이었다. 그의 웃는 모습은 너무나 기분이 나빴으니까. 하지만 춤은 끝나지 않았다. 귀즈 왕세자는 소리 내서 웃는 것을 멈추었으나, 춤은 계속 이어졌다. 캐런은 계속 그의 손에 끌려갔다. 귀즈가 캐런을 이끌며 물었다.
“선물은 마음에 들었니?”
그 선물도 역시 그였구나. 캐런은 그 리본을 귀즈가 곱게 감싸고, 꽃과 같이 넣는 상상을 하자 속이 더부룩해졌다. 중늙은이가 어린 여자애들 흉내를 내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다. 심지어 그 주된 내용물은 사람의 조각난 몸이다.
“악취미세요.”
“그래?”
캐런은 담담하게 말하고자 노력했다.
“예. 손의 절단면이 깔끔하지 않았어요. 대비를 통한 효과를 원하신 건가요? 하지만 전 그렇게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미…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거든요.”
“하하, 내가 선물을 잘못 골랐구나.”
유쾌하다는 듯이 귀즈가 다시 웃었다.
하지만 아까처럼 광소가 아닌, 적당한 웃음이었다.
이내 뚝 멈추었다.
웃음도 멈추고 춤도 멈췄다.
귀즈 왕세자가 밀착되어 있던 몸을 떼고 캐런을 고개 숙여 내려다본다.
“난 강한 척하는 여자는 싫어한단다.”
“…….”
손에 힘이 들어간다. 캐런은 잡힌 손에 손톱이 파고드는 걸 느낀다. 아프다.
귀즈 왕세자가 말한다.
“그렇게 떨면서, 괜찮은 척하는 건 우스꽝스럽거든. 내 주변에는 온통 그런 자들뿐이었지. 자신은 다른 척, 무섭지 않은 척,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척.”
그리고 캐런의 턱을 잡았다. 그리고 힘을 준다. 아프다. 고개를 돌린다. 도나의 얼굴이 보인다. 얼굴은 피에 젖어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귀즈 왕세자가 다시 캐런의 몸을 누르며 도나에게로 인도한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도나의 얼굴이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랬지. 저 애도 처음에는 꽤나 강한 척했단다. 물론 자신의 팔이 잘리기 전까지는 말이야. 평상시에는 어떤 하녀였었느냐? 정말이지 너무나 시끄러워서…. 발도 자르니 그나마 조용해지더구나. 원래 그렇게 말이 많았느냐?”
“…….”
“내가 물었단다.”
손에 힘을 준다. 볼을 강하게 누른다. 캐런은 대답을 해야 한다.
도나가 어떤 애였지? 어떤 애였더라. 캐런은 도나를 잘 모른다. 캐런이 보는 도나는 말 그대로 평범했다.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성실했다. 실수는 잦았지만 본디 일하는 것이 세탁하녀였으니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평범했어요.”
어쩌다보니 죽이지 않고, 어쩌다 보니 지금까지 계속 있어왔다. 캐런은 도나를 보았다.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자신이 오기 전까지 어떤 일들을 당했을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젠 자신도 저런 모습이 될까.
“그건 너무 성의 없는 대답이야. 얘야, 어린 하녀야. 네 주인은 네게 관심이 없었나 보구나. 섭섭지 않느냐?”
캐런은 도나의 모습을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캐런은 도나의 꼴을 보자 속이 정말로 역해졌다. 자신이 토머스의 몸을 토막 칠 때도, 토머스의 시체가 썩은 것을 봤을 때도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는데. 살아 있는 여자의 몸에 장난질을 쳐 둔 것을 보니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의 차이일까. 아니면 자신이 아직도 나약해서 일까. 역시 자신은 비위가 약한 모양이었다.
그런 캐런의 표정을 보면서 귀즈가 도나를 내려다보았다.
“사실은 네 여주인이 영주를,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단다. 알고 나니 기분이 어떤지 궁금하구나.”
귀즈가 도나의 턱을 들었다. 도나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어, 어우, 하는 끔찍한 소리가 났다.
“…으.”
그 안에는 혀가 없었다. 아니, 있기는 있었다. 거의 다 으깨진 것처럼 보였다. 캐런은 하마터면 자신의 혀를 깨물 뻔했다. 캐런의 얼굴을 보면서 귀즈가 안타깝다는 듯이 캐런의 등을 도닥였다. 마치 시녀들의 두드림 같은 부드러운 손짓이었다. 그러면서 그가 부드럽게 말을 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야. 난 언어를 소중히 여긴단다. 서로 대화를 하는 것은 매우 귀중하고, 신이 우리에게 주신 특권이지. 저건 자기 스스로 깨문 거야.”
귀즈가 어깨를 으쓱하면서 도나의 뺨을 툭툭 쳤다. 캐런에게 내민 손길과는 다른 거친 손이었다. 도나가 끔찍한 신음을 내었다. 저렇게 괴로워하면서 아까는 어떻게 조용했을까. 기절했었던 걸까. 차라리 계속 기절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캐런은 도나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 캐런의 얼굴을 보면서 귀즈 왕세자가 입을 열었다.
“아무튼, 저 아이가 널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구나. 어떻니?”
“…아.”
캐런은 다시 톰을 보는 것 같았다. 말을 못한다는 것은 잔인하다. 그리고 말을 포기해서 지키고 싶은 것도 지켜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비참하다. 귀즈 왕세자는 매끄러운 목소리로 도나를 대신해서 말했다.
“네 정보를 저 아이가 팔았단다.”
캐런은 도나를 보았다. 도나도 캐런을 보았다. 둘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냥 서로를 보았다.
“네가 언제 자는지, 언제 일어나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어떤 고민을 말하고 누구를 좋아하고… 그런 모든 것들.”
도나는 괜찮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냥 일상이었으니까. 캐런은 도나를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거친 손이나, 저택에서 혼자 지내야 하는 나날들을 생각했다. 사람은 혼자 있으면 생각이 많아진다. 그리고 캐런이 이셀라 에반스의 저택에서 일할 때는 도나보다도 더 힘들게 살았다.
지켜 줘야 할 아가씨, 불쌍한 아가씨, 부모님을 잃고 원수에게 학대당하는 아가씨.
하지만 캐런에게는 레이몬드가 있었다.
기사는 예쁜 아가씨에게 반해서 악당을 물리치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해피 엔딩이에요. 아가씨는 아름답고 불쌍하고, 기사님은 용감하고 씩씩했거든요.
아가씨의 하녀도 좀 더 나은 봉급을 받는 하녀가 되었답니다.
그게 싫다구요? 별 수 없어요. 그럼 아가씨를 미워할 수 있나요? 아니면 아가씨를 죽이고 대신 아가씨 흉내를 낼 수 있나요? 그래도 하녀는 아가씨가 될 수 없는 걸요. 기사님은 하녀에게 아무 감정이 없으니까요. 아니, 기사님이 문제가 아니에요. 하녀는 하녀, 아가씨는 아가씨. 모든 소녀가 공주님이라는 건 거짓말이에요.
하지만 하녀가 돈을 조금 더 받기 위해 노력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잖아요? 설령 돈을 주는 것이 늙은 왕자님이라고 해도 말이에요.
캐런은 도나를 본다. 도나의 눈동자에서 이야기를 읽는다.
“건방진 하녀에게 무슨 생각이 드느냐? 역시, 벌을 줘야 하지 않겠느냐?”
도나가 귀즈에게 캐런의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아가씨는 예쁘고, 착하고, 불쌍하고. 가끔씩 이야기가 마음에 안 들어 하는 눈치면 적당히 바꾸어서.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들어 한 것은 캐런은 캐서린과 똑 닮았다는 말 같은 것. 귀즈가 원하는 이상적인 아가씨의 모습은 캐서린과 똑 닮았을지도 모른다.
“…자기의 입장에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해요.”
캐런은 도나를 미워하지 않는다. 캐런에게서 분노를 사기란 어려운 법이다. 캐런에게 감정이란 아지랑이와 같아서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귀즈 왕세자는 자신의 광기로 캐런에게 비명을 주었지만, 도나의 행동은 배신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워 보였다. 그냥 캐런은….
그랬다.
캐런은 그냥 당장 귀즈가 자신을 놓아주었으면 했다.
“저는 그녀를 미워하지 않아요.”
귀즈는 그 대답이 너무나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완벽해.”
귀즈 왕세자는 환희에 찬 목소리로 말한다.
“캐서린과 똑같은 대답을 하는구나.”
“전 어머니가 아니에요.”
캐런은 불쾌했다. 자신이 캐서린과 닮았고, 비슷한 저주 같은 것을 받았다고 해서 그녀의 뒤치다꺼리까지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캐런의 말은 그에게 닿지 않았다.
“그녀와 같은 가치관, 같은 말을 하면 거의 동류라고 할 수 있지 않겠니? 캐서린도 그랬단다. 그녀의 친구이자 시녀였던 그 디어였던가.”
“데어 부인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캐런은 자신이 죽인 어머니의 친구를, 자신의 가정교사를 기억했다. 레이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건방지게도 뒤에서 캐서린의 욕을 하고 다니길래 내가 손톱 몇 개를 뽑은 적이 있단다. 그런 건 친구라고 할 수 없잖느냐.”
“…그러셨군요.”
그러고 보니 아버지도 그녀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약간은 농담같이, 자신을 노리는 것이 아니냐는 말도 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낸시를 거부하는 가정교사를 싫어했다.
“당신은 캐런의 가정교사이지, 내 가족이 아니야. 그만두고 나가 주게.”
하지만 그녀는 캐런에게 조치를 취하는 것을 유일하게 끝까지 반대한 사람이었다. 해고를 각오하면서까지. 캐런은 기억하지 못하고, 그녀가 기분 나쁘다는 이유로 죽였지만. 그녀는 마지막까지 캐런에게 욕 한 마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귀즈 왕세자는 그런 것을 모를 것이다.
“그런데도 캐서린은 그 여자를 옹호했지, 그녀가 뭐라고 했을 것 같나?”
“…모르겠어요.”
캐런은 괴로웠다. 귀즈 왕세자가 아무리 무엇이라고 해도, 자신에게 그는 잘못 걸린 늙은이였다. 자신을 놓고 죽이려면 빨리 죽이던가, 어떤 방향으로든 끝이 났으면.
“집중해.”
귀즈가 캐런의 머리채를 잡았다.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고통도 결국은 곧 끝날 것이다. 답이 없는 대답을 요구하는 귀즈 왕세자에게 맞추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캐런의 그 어설픈 대답조차 귀즈는 마음에 들어 했다.
“맞아. 그거야.”
캐런은 두피에서 통증이 올라오자 눈가에 눈물이 나는 것을 알았다. 아파서 일까. 하지만 경미한 아픔인데.
“넌 캐서린이 아니야. 분명 다른 점이 많지.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그래도 공통점이 더 많으니까.”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
“넌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서린이 내게 남긴 유산이며… 가장 중요한 건 우리가 이제 같이 있을 거라는 거지.”
“제게… 거부권이… 있나요?”
캐런은 마지막 자존심을 긁어모아 물었다. 귀즈는 웃었다.
그리고 도나의 양 볼을 강하게 누른다.
“아니.”
도나의 입이 벌어진다.
“하녀 아이야.”
“…….”
“난 네가 죽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단다. 그런데 왕명을 거부했으니 벌을 내리려고 한다.”
“아, 아으.”
아아, 도나야. 혀는 아무리 깨물어도 죽을 수 없어. 그건 잘못된 이야기야. 내가 아무리 깨물어도 그런 방식으로는 죽지 못했어. 너도 죽고 싶었구나. 그래서 네 혀를 깨물었구나. 너를 내 손으로 먼저 죽였어야 했는데. 왜 넌 더 살아서, 왜 이야기에 개입되어서…. 이런 꼴이 되고 말았구나.
“도와주겠니?”
귀즈는 벽에 있는 수많은 도구 중 하나를 내렸다. 작은 단도였다. 역시나 쓸데없이 화려한 보석들과 황금으로 된 손잡이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정말로 그런 것이었다. 캐런은 날이 없는 장식품이란 것을 알았다.
“제가… 찌르라고요?”
“그래.”
“왜죠?”
“캐서린은 결국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서 떠났지. 날 이해하려고 시도하지도 않았어.”
“…….”
“너도 나와 같은 짓을 하다보면 날 이해하게 될 거야.”
“전하.”
“꽤 재미있거든.”
심장이 이상하게 두근거렸다. 캐런은 이 상황이 싫은 것인지, 오히려 웃어야 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자신은 이번 생에 살인마가 되고자 하지 않았는가?
“…….”
하지만 이것은 날이 없었다. 캐런은 그것을 잡고 손가락으로 날을 대보았지만 멀쩡했다. 캐런이 의아하게 귀즈 왕세자를 쳐다보자 그가 빙그레 웃었다.
“날이 있으면 벌이 아니라, 도와주는 것이 되잖겠느냐.”
그러니까 날이 없는 단도로 죽을 때까지 찌르라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캐런은 단도를 손에 쥐었다.
도나와 눈이 마주쳤다.
톰이 캐런을 저런 눈으로 바라보았던 것 같았다.
“레이몬드 경, 지금 정신을 다른 곳에 두고 있나?”
“죄송합니다, 후작님.”
레이몬드는 팬케이르 후작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너무 급하게 나온 것이 걸렸던 것이다. 레이몬드는 자신의 장갑을 다시 고정시켰다. 중요한 일은 전부 끝났다. 더 이상 위험은 없다. 그리고 모든 의원들, 귀족들의 동의도 확인했다. 귀즈 왕세자는 더 이상 레이몬드에게 위협을 가할 수 없을 것이다.
“…….”
하지만 불안감이 계속 남아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었다. 레이몬드는 자신의 장갑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불안해할 필요는 전혀 없다. 레이몬드의 인생은 언제나 불확실한 불안감에 걸어야 할 때가 많았지만, 이번 일처럼 잘 풀리는 것은 드물었다.
“너무 갑작스러웠지만, 이런 일은 그렇게 해야 하는 법이라. 이해해 주길 바라네.”
팬케이르 후작이 너스레를 떨었다. 수시로, 새벽에도 오라고 하면 가는 일에 익숙해져 있던 레이몬드는 약간 어이가 없었지만, 그 나름의 농담이리라.
레이몬드가 가는 것은 공식적인 일이었고, 팬케이르 후작이 옆에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뿐 아니라 호위 마차 여덟 대와 후작의 군대가 뒤를 따르고 있었다. 레이몬드가 두려워할 일은 없었다. 애초에 그들은 전투를 하러 가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 일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끝났다.
일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그들은 마차에 앉아서 차를 함께 하며 평화를 축하하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기차를 탔을 때와는 전혀 다르게 안락한 마차에 약간 놀랐다. 대부분의 마차는 기차보다는 좀 불편하기 마련이었는데, 후작의 마차이다 보니 안락하기가 저택의 응접실과 다를 바 없었다. 이제 다 끝났으니 편안해야 할 텐데.
“이제 시작이군. 여러모로 수고했네.”
“감사합니다. 후작님의 도움이 컸습니다.”
레이몬드는 미소로 대답했지만 석연치 않았다. 후작이 물었다.
“결혼 때문에 긴장되나?”
주의를 끌고 긴장을 풀기 위한 물음이었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레이몬드는 급하게 나온 것이 아무래도 걸렸다. 최대한의 대비는 했지만, 눈앞에 없으니 불안했다. 캐런은 조금만 자신과 떨어져 있으면 여기저기 신기할 정도로 적을 만들고는 했다. 그것이 여자들의 시기질투 같은 가벼운 것이면 좋으련만, 캐런의 적은 베르딕 에반스나 귀즈 왕세자다. 레이몬드는 약간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젠 괜찮다.
“예, 좀 그렇습니다.”
“나도 그랬다고 하고 싶지만, 난 별로 긴장하지 않아서 해 줄 말이 없네.”
“그러시군요.”
“웃으라고 한 말이야.”
레이몬드가 급하게 환한 웃음을 지으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후작이 그만두라고 손을 내저으며 말을 꺼냈다.
“자네 결혼식 말인데, 난 참석하긴 좀 어려울 것 같더군.”
“그러십니까.”
“음. 아무래도 나도 대비해야 할 일도 꽤 많고. 하지만 선물은 섭섭지 않게 보내도록 하겠네.”
레이몬드의 얼굴이 계속 굳어 있기에 일부러 꺼낸 말이었지만, 분위기가 완화되기는커녕 더욱 굳어졌다. 평상시에는 자신의 감정을 후작에게 그다지 비치지 않는 레이몬드였다. 자신이 꺼낸 주제가 더 정곡이었던 걸까. 후작은 다시 물었다.
“자네 약혼녀 때문인가? 캐서린의 딸 맞지?”
“예, 그렇습니다. 아십니까?”
후작이 턱을 쓰다듬었다.
“잠깐 나도 그녀를 쫓아다닌 적은 있었지. 역시 모친을 닮았는가?”
“저는 부인을 뵌 적이 없으니 모르지만, 다른 분들은 전부 입을 모아 똑 닮았다고 하더군요. 몇몇은 더 아름답다고도 합니다.”
한마디를 굳이 더 붙이는 그에게 후작은 웃었다.
“예쁘겠군.”
“예.”
레이몬드는 짧게 대답했다. 캐런이 예쁘다는 사실은 확신할 수 있었다. 후작이 자신의 몸을 살짝 굽히더니 놀리듯 말한다.
“그리고 약간 이상한 점도 있을 테고. 진정한 사랑에 집착하지는 않던가?”
“…예. 아십니까?”
레이몬드는 약간 긴장했다. 역시 캐런의 병은 유전병이었던가. 하지만 후작의 얼굴은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몸을 세우면서 말했다.
“그래. 뭐, 그래도 그것도 매력이었지만…. 엉뚱한 매력이 있었어.”
후작은 유쾌하게 웃었다. 캐런처럼 이상한 사람은 아니었던 걸까. 아니면 팬케이르 후작과 캐서린 부인과의 관계가 그리 깊지 않아서 그랬던 걸까.
“그 정도로 예쁘면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있더라도 매력적으로 보일 법 했지.”
후자였던 모양이다.
레이몬드는 후작에게 약간 불쾌감을 담아 말했다.
“후작님, 제 부인될 사람의 어머니입니다.”
“무섭군. 아무튼, 매력적이었어. 그렇게 사랑 하나만 바란다고 말하는 건 신선했거든.”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후작이 손가락을 들어 휘이휘이 저으며 부정했다.
“자네는 사랑만 보고 결혼하나?”
“예.”
레이몬드는 대답했다. 그는 사랑만 보고 결혼한다. 이건 사랑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짓이라고 레이몬드는 생각하기에.
“하하, 그거 진짜 재밌군.”
그는 일이 잘 처리된 것에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그럴 법도 했다. 레이몬드는 왕실에서 내려온 급령에 당황했지만, 그가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다. 이제 레이몬드는 정말로 은퇴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 대부분의 업무를 넘겼고, 자신의 총도 지급받은 것은 대부분 반납했다. 이젠 정말 군인이라 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무튼, 좀 이상한 구석도 있었지만 난 그녀가 좋았어. 하이어와 결혼한 후에도 친구로 지내고 싶었지. 사교계에 그녀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아서 불가능했지만. 자네는 결혼한 후에 그런 짓 하지 말게. 부인이 칩거하면 나중에 자식문제가 또 귀찮아져.”
“그렇군요.”
“솔직히 하이어를 선택할 줄은 몰랐어. 그래, 그녀는 정말 사랑만 보고 결혼했지. 그보다 더 돈 많은 남자도, 지위가 높은 남자도 많았지만 선택한 건 하이어였지. 뭐, 여자로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긴 하지. 하이어도 꽤나 반반했거든.”
레이몬드는 귀즈 왕세자를 떠올렸다. 그는 질척하게 집착했다. 처음에 레이몬드는 자신을 눈엣가시로 보는 귀즈 왕세자가 보복성으로 캐런을 겁탈하려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집착은 그것보다 좀 더 심했다.
“귀즈 왕세자 전하도 청혼하셨습니까? 그래서 캐런에게 저리 집착하는 걸까요?”
“뭐? 하하.”
그 말에 팬케이르 후작이 숨넘어가게 웃었다.
레이몬드는 약간 당황했다.
“음, 그래. 미안하군. 잠깐만.”
“제가 무슨 실수라도?”
후작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자네 약혼녀를 아주 사랑한다는 것은 알겠어. 맞아. 기가 막히게 예쁘지.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 캐서린은 백작의 딸이야. 귀즈 왕세자 전하는 왕위를 물려받을 사람이었고.”
“캐서린 부인의 외조모는 카트린 대공비니, 그렇게 격이 떨어지지는 않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레이몬드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카트린 대공비의 외손녀라고 해도, 캐서린의 어머니가 문제지. 케일린 백작 부인이었잖나. 거기 여자들은 너무 사랑만 보고 결혼했어. 자기가 선택하는 만큼 자기 딸에게는 선택권이 줄어드는 걸.”
“그렇군요.”
“뭐, 그래도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 귀즈 왕세자 전하가 왕위를 포기할 각오까지 하고 캐서린에게 청혼했으면 또 모르지.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어.”
“아십니까?”
“알지. 귀즈 전하가 말한 적 있거든.”
팬케이르 후작은 귀즈와 가까운 친척이었다. 서로 캐서린을 두고 연적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진지하게 연적이라고 할 수 없었다. 팬케이르 후작은 실리적인 사람이었다.
“캐서린을 적당한 남자와 결혼시키고 정부로 삼겠다고 했었어.”
“하.”
“그렇지. 아무리 캐서린이 백작의 딸이라고 하더라도 대공비의 외손녀야. 창녀의 신분 세탁도 아니고 그게 뭔가? 그녀로서는 그것을 용납할 수는 없었겠지.”
“그랬군요.”
“하지만 귀즈도 왕위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을 거야. 사실, 좀 말이 안 되는 것 아닌가. 애인 하나 때문에 왕위를 포기한다는 건.”
똑똑.
마차의 창문을 누가 두드렸다. 레이몬드는 일어나서 창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레이몬드 경, 문제가 생겼습니다.”
후작을 앞에 두고 자신에게 먼저 말한다. 레이몬드는 순간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를 직감했다.
캐런이다.
“캐런 님이 실종되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캐런은 칼을 바닥에 던졌다.
“싫어요.”
생각할 가치도 없는 이야기였다. 귀즈가 캐런에게 선사할 수 있는 것은 죽음뿐이다. 어쩌면 고문, 어쩌면 강간. 캐런은 그 모든 것을 지긋지긋하게 겪었다. 캐런을 협박할 수 있는 것은 듈란뿐이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정말 죽을 수 있을지를 가지고 협박을 할 수 있는 사람.
“전 하고 싶지 않아요.”
캐런이 살인을 한다면, 그것은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다. 귀즈 왕세자의 성벽에 맞춰 주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뜻대로 살고 싶었다.
목숨을 걸고.
“흠, 의외구나.”
“…….”
“너만은 날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제가 전하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어요.”
캐런의 반항에 귀즈 왕세자는 허리를 굽혀 날 없는 단도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리 불쾌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의아한 것 같았다. 귀즈 왕세자가 물었다.
“넌 네 아버지인 하이어 영주를 죽이지 않았느냐?”
“…증거가 있나요? 아까도 그러셨지만, 증거도 없이 사람을.”
캐런의 입을 귀즈 왕세자가 손가락으로 눌렀다. 눈꼬리가 휘어진다.
“저런, 그 말이 증거가 되고 있구나. 아직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지.”
캐런이 스스로 결백한 사람이면 증거가 있냐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아니라고 했을 것이다. 증거가 있냐고 하는 말은, 증거가 없을 걸 안다고 주장하는 용의자의 말이다. 귀즈 왕세자의 지적에 캐런은 입술을 깨물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에 조금 더 익숙해지면, 자연스럽게 숨길 수 있게 될 거란다.”
“…무슨 소리신지 전 몰라요.”
귀즈 왕세자는 캐런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 얼굴로 대꾸했다.
“나 정도의 위치에 있게 되면 들어오는 정보가 많단다. 네가 이 와중에도 이리 뻣뻣하게 구는 것은 레이몬드 경을 믿기 때문인가?”
그것은 아마 아닐 것이다.
“전….”
캐런은 레이몬드가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택한 것을 알지만, 그를 온전히 신뢰하지는 않는다. 레이몬드의 옆에 있었어도 그녀는 계속해서 죽었기 때문에. 하지만 캐런이 그것을 귀즈에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글쎄요.”
애매한 대답을 긍정으로 알아들은 것일까. 귀즈 왕세자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뒤로 돌아섰다. 캐런은 단도를 들고 귀즈 왕세자의 목을 본다.
목을 찌른다면…. 단도에는 날이 없다. 단번에 목숨을 끊지 못한다. 그럼 캐런은 귀즈에게 바로 제압당한다. 그리고 벽에 걸린다. 캐런은 그 과정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내가 네게 준 선물이 있었지.”
도나의 팔.
“또 하나를 주고 싶구나. 네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기대가 돼서 말이야.”
캐런에게 상자를 가리킨다.
그 다음은 도나의 다리일까? 하지만 귀즈 왕세자의 손끝이 가리키는 것을 보니 다리는 아닐 것 같았다.
캐런은 이제까지 있는지도 몰랐지만,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상자가 있었다. 그것은 처음에 받은 상자보다 지나치게 컸다. 캐런은 홀린 듯이 그 상자 앞에 섰다.
“열어 보렴.”
귀즈 왕세자가 캐런에게 열쇠를 주었다. 상자는 쇠사슬로 묶여 자물쇠로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캐런은 자물쇠에 열쇠를 넣고 돌렸다. 덜컥, 하는 소리가 났다. 캐런은 무거운 상자의 뚜껑을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어둠 속에서 선물의 정체가 드러났다.
“루이스 왕세손 전하와 캐런 에반스 양이 실종되었습니다.”
루이스 왕세손, 귀즈 왕세자의 아들이 상자 안에 들어 있었다.
캐런은 어린 왕손을 내려다보았다.
“재밌지 않은가?”
귀즈가 웃었다.
숨을 쉰다. 가슴팍이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아직 루이스 왕세손은 죽지 않았다. 도나와 다르게 팔다리도 무사히 달려 있다. 옷이 지저분하고 이곳 저곳 상처가 많이 나 있을 뿐이었다. 캐런은 눈을 감고 상자 안에 처박혀 있는 왕세손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하. 전하께서 무슨 생각인지 전… 어리고 미숙하여 잘 모르겠습니다.”
뭐하자는 걸까, 귀즈 왕세자는.
왜 자신의 아들을 이곳에 넣어둔 걸까. 귀즈 왕세자는 자신의 아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아는 사실이다. 현왕이 아직도 귀즈 왕세자에게 왕권을 물려주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은, 품행이 단정한 루이스 왕세손에게 바로 왕위를 이양하기 위해서라고. 그래서 귀즈 왕세자는 자신의 아들을 미워한다고.
“이러시는… 건 전하에게 아무런 이득이 안 되잖아요.”
하지만 현왕은 나이가 너무 많았다.
이미 거동이 힘들어지는 나이였다. 캐런과 나이 차가 거의 없는 등장인물이 왕일 것이다. 캐런은 먼발치에서밖에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그가 당장 죽어도 그리 이상하지 않을 나이라는 것은 안다.
귀즈 왕세자는 매우 늦게 본 아들이었으며, 루이스 왕세손 또한 좀 늦게 태어난 아들이었다. 현왕이 아무리 버틴다 하더라도 루이스 왕세손에게 바로 이양될 가능성은 낮았다.
“사람이 이득만으로 움직이나?”
그럼에도 정도와 이성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캐런은 귀즈 왕세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신은 귀즈 왕세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이 움직이는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단다. 왕 정도 되면 더욱 그렇지.”
그리고 귀즈 왕세자가 루이스 왕세손을 아들로 두고 있다는 것은, 그에게도 확고한 왕위를 보장한다.
귀즈와 동년배인 상위 계승 순위 왕족들에게는 아직 루이스 왕세손과 같은 아들이 없었다. 루이스 왕세손이 싫다 하더라도, 이 소년은 귀즈 왕세자에게 득이 된다. 제1왕위계승권자라 하더라도 나이는 이미 중년이다.
루이스 왕세손은 늦게 얻은 자식이다. 또한 왕세자비는 이미 죽은 지 꽤 오래되었다. 왕족은 자식이 많을수록 미래가 보장된다. 자식이 없는 왕족보다, 총명하고 튼튼한 자식이 있는 왕족이 훨씬 더 안정적으로 왕위를 이양받는다. 루이스 왕세손이 있음으로 귀즈 왕세자의 왕위 또한 더 견고해지는 것이다. 루이스 왕세손은 살아야 한다.
“정말 모르는가?”
귀즈 왕세자가 캐런의 어깨를 잡는다.
캐런은 알았다. 귀즈가 루이스를 죽여서 잃을 이득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다.
귀즈 왕세자가 루이스 왕세손을 미워한다는 것을 알았다.
루이스 왕세손을 죽일 생각이구나.
그가 루이스 왕세손으로 인해 얻을 모든 이득에도 불구하고.
캐런이 납득하지 못할 이유를 가지고.
그는 충동적으로 자신의 아들을 이곳에 데려온 것이 아니었다.
부스럭.
그리고 그 순간 루이스 왕세손이 움직였다. 귀즈 왕세자의 목소리를 듣고 깬 것이다.
“아버님…?”
상자 안의 루이스 왕세손이 눈을 떴다. 손이 묶여 있지는 않았기에 루이스 왕세손은 손을 뻗어 상자의 가장자리를 잡았다. 눈을 깜빡인다. 아직 정신이 다 돌아오지는 않은 모양이다. 캐런이 손을 내밀어 그를 부축했다. 루이스 왕세손이 자신의 머리를 문지르며 얼굴을 찡그렸다.
“여기가, 대체…. 지금….”
“전하, 정신 차리세요.”
어쩌면 정신을 놓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지만, 캐런은 자신이 비명을 질렀던 것을 생각하며 루이스 왕세손을 잡았다. 그가 비명을 지른다면 귀가 아플 것 같았다. 루이스 왕세손이 캐런의 팔을 강하게 잡았다. 눈을 크게 뜬다. 그도 보았다.
“…저게…. 무슨, 무슨?”
루이스 왕세손은 벽의 장식물들을 보고 다시 상자 안으로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아버님… 지금… 저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자신의 아들을 내려다보며 귀즈 왕세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약간 과장하는 듯한 태도였다.
“너무 나약해.”
귀즈 왕세자가 뒤에서 그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캐런보다는 훨씬 이성적인 태도였건만, 그것도 눈에 차지는 않는 모양이다. 사실 귀즈 왕세자는 루이스 왕세손이 어떠한 반응을 보이더라도 싫어할 것 같았다.
“역시 넌 날 닮지 않았어. 하나도 말이야.”
루이스 왕세손은 기절한 것은 아니었기에 다시 캐런의 부축을 받고 일어날 수 있었다. 루이스 왕세손이 심호흡을 했다. 어떻게든 몸을 추스르려고 했다.
“아버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루이스 왕세손은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간신히 일어나 그의 아버지를 보았다. 노려보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으나 십여 세의 몸에 위압감은 없었다. 귀즈 왕세자가 다가오자 그는 다시 주저앉아 버리고 싶은 표정을 지었다.
“재밌었느냐?”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버님, 지금 저기 걸려 있는 것들이 다 무엇입니까? 아버님, 그리고 이곳은 어디입니까?”
“모르는 척하지 말아라.”
“아버님.”
“넌 이 방에 대해 알고 있지 않았느냐.”
“…….”
귀즈 왕세자가 루이스 왕세손의 양 어깨를 붙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을 들어올렸다. 루이스 왕세손은 쉽게 귀즈 왕세자에게 들려 상자 밖을 빠져나왔다.
“왜 레이몬드 세이어테스와 접촉하였느냐?”
“…그가 기사의 본이 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버님, 저를 놓아주십시오. 이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툭.
루이스 왕세손이 바닥에 떨궈졌다. 귀즈는 자신의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폭력성이 오히려 루이스 왕세손의 치기를 깨운 것 같았다. 그는 바닥에서 일어나 이를 악물었다.
“아버지, 자수하십시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이것 보아라, 캐런.”
귀즈 왕세자가 루이스 왕세손에게서 고개를 돌려 캐런을 바라보았다. 캐런과 눈을 마주치고 귀즈 왕세자는 말했다. 자신의 아들에게 말하는 것과는 달리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혹시 내 아들에게 희망을 걸었느냐?”
“…….”
캐런은 거기까지는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루이스 왕세손은 레이몬드에게서 언질을 받고 자신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자 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기사도 없었고, 자신의 아버지를 이길 만한 그 어떠한 무기도 가지지 못했다. 캐런은 자신보다도 훨씬 작고 가냘픈 어린아이를 보았다. 소년이 지켜야 할 것은 자기 자신으로 보였다.
“아버님!”
“네게 묻지 않았다!”
귀즈 왕세자는 루이스 왕세손에게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는 캐런을 보았다.
“날 사랑할 수 있느냐?”
“…….”
“그래, 무리겠지.”
귀즈 왕세자는 루이스 왕세손을 구둣발로 밟았다. 루이스 왕세손이 몸을 웅크렸다.
“가만히 있거라. 괜찮을 거야.”
저 말은 캐런에게 하는 것일까, 아니면 루이스 왕세손에게 하는 것일까?
“…아, 아버님. 그만두십시오.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저뿐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압니다.”
“네가 말했느냐?”
“…아버님, 캐런 에반스를 놓아주십시오. 할아버지께 용서를 구하고, 죄를 참회하십시오.”
“저런, 폐하께서는 이미 이 방의 존재를 아신단다. 그래도 이제까지 날 내버려두신 거야.”
루이스 왕세손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자신의 부친을 노려보았다.
“할아버지께서 그럴 리가 없습니다.”
강한 부정이었다.
귀즈 왕세자는 루이스 왕세손의 손을 밟았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충분히 제압할 만한 어린 소년이었건만, 그는 자신의 아들이 어지간히 싫은 모양이었다.
“왕 정도 되면 사소한 것은 무시하기 마련이거든. 폐하께서도 이런저런 취미가 많으셨지.”
“아버님… 할아버님을 모독하지 마십시오. 아버님이 자꾸 그러시니까….”
“폐하가 네게 다음 왕 자리를 약속하셨느냐?”
루이스 왕세손은 약간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아버님, 이런 것은 아버님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어서.”
그것이 귀즈 왕세자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역시 그렇군.”
귀즈 왕세자는 상자 뒤의 벽, 그 높은 곳에 걸려 있던 또 다른 검을 꺼낸다. 역시나 아름답고 호화로운 검이었다. 하지만 스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검신이 드러나자 캐런은 단검과는 전혀 다른 것을 알았다.
저 칼은 날이 서 있다.
그 칼을 들고 귀즈 왕세자는 몸을 돌렸다.
저벅, 저벅, 저벅.
“난 폐하가 싫단다.”
“…아버님!”
그때 또 다른 발소리가 들렸다. 캐런이 귀즈 왕세자에게 말했다.
“전하, 그만두십시오. 사람이 오고 있는 소리가 들립니다.”
캐런이 다급하게 말했다.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레이몬드가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가 돌아와서 귀즈 왕세자를 저지하고, 저 어린 왕세손을 구해 내고, 캐런을 구해 낼지도 모른다.
“하하, 그걸 믿느냐?”
캐런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귀즈 왕세자가 말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어떻게 장식물로 만들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어 보였다. 칼날이 빛났다. 캐런이 다시금 말했다.
“정말로 들립니다.”
캐런이 외쳤다. 정말로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귀즈 왕세자가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도 그는 올 것인가?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무거운 발걸음 소리. 이번에도 레이몬드는 캐런을 구하러 올 것인가?
“전하, 그만두십시오.”
어쩌면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레이몬드는 캐런에게 청혼했다.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캐런을 믿지 않으면서도. 어쩌면.
“들어와라.”
문이 열렸다.
“전하, 말씀하신 대로 목욕물을 준비했습니다.”
레이몬드가 아니다.
전에 본 귀즈 왕세자의 시종이었다.
이번에도 레이몬드는 늦을 모양이었다.
이제까지의 인생처럼. 캐런의 예상보다는 더 빨리 실망을 안겨 주었지만. 캐런은 약간 실망했지만, 루이스 왕세손의 눈은 절망으로 물들었다. 다급하게 시종에게 외쳤다.
“이봐라! 너, 사람들에게 이 방을 알리지 않고 지금 뭐하는 것이냐!”
루이스 왕세손의 외침에 시종이 눈을 끔벅이며 몸을 천천히 돌렸다.
“저런, 루이스 전하 아니십니까. 그러게 제가 뭐라 했습니까.”
“나가라.”
귀즈 왕세자가 그의 말을 잘랐다. 시종은 바로 굽실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죄송합니다, 전하.”
하지만 웃음은 그대로였다. 덩치 큰 시종이 루이스 왕세손과 캐런을 보며 히죽이며 웃었다.
“캐런, 자네는 좀 씻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
“우선, 일 처리는 좀 하고 말이지.”
그리고 다시 루이스 왕세손에게 칼끝이 향했다. 루이스 왕세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버님,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내가 충고 하나 해 주마. 여자와 자기 전에는 몸을 씻는 것이 좋단다. 넌 이제 알 필요도 없겠지만. 쉬,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느냐.”
귀즈 왕세자가 얼굴도 돌리지 않고 시종들에게 일렀다.
“아침이 올 때까지 열지 말거라.”
“예, 전하.”
덜컹, 밖에서 문이 다시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귀즈 왕세자가 캐런과 루이스 왕세손을 돌아보았다.
“기대했느냐?”
루이스 왕세손은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이제 더 이상은 무리인 것이다. 귀즈 왕세자가 칼을 들고 루이스 왕세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실 캐런, 자네와 같이 하고 싶었지만. 아. 목욕 말고. 다른 걸 말하는 거네.”
“…….”
“이제 자네도 이런 걸 꽤나 좋아하게 될 거야. 익숙해지겠지.”
귀즈가 루이스 왕세손에게 말을 걸었다.
“루이스, 폐하가 다음 왕이 너라고 이르셨느냐?”
루이스 왕세손은 눈물 맺힌 눈으로 귀즈 왕세자를 노려보았다. 악문 이빨 사이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면서도 그는 말한다.
“…그렇다. 이 미치광이야.”
“그렇구나.”
푸욱.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루이스 왕세손이 비명을 질렀다. 그가 루이스 왕세손의 허벅지를 찌른 것이다. 관통한 상태로 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폐하도 네가 없어지면 날 포기 못하실 게다.”
“어, 어억, 아아악….”
“다음의 왕은 네가 아니야. 폐하는 정말이지 너무 하시지. 날 원망하지 말거라. 이건 전부 폐하의 잘못이니까. 난 한 번도 널 내 아들로 생각한 적이 없단다. 처음부터 넌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귀즈 왕세자는 칼을 다시 들었다.
그리고 루이스 왕세손의 다른 허벅지를 노렸다.
“사람의 다리는 두 개지. 난 그중에서 허벅지를 찌르는 것이 가장 좋단다. 피를 빼기 좋은 부분이거든. 목이나 손목도 좋지만, 그건 자르는 것에 목적을 둘 때야.”
“아, 아아, 악.”
“자, 이걸로 넌 다시는 걷지 못할 거야. 다리는 무사해 보이지? 하지만 달려 있다고 다 다리가 아니란다. 자, 루이스. 어떤 기분이냐? 몸에 장식품을 달고 있는 건? 쓸모없는 부분이 몸에 있는 건 어떤 기분이냐?”
루이스 왕세손이 거품을 물었다.
“이런, 내가 기절해도 된다고 허하지 않았거늘.”
“…….”
“자식의 머리를 받으면 부모는 어떤 얼굴이 될까? 폐하의 얼굴이 궁금하군. 내게 빨리 왕관을 주실 지도 모르겠어…. 사실 이제 받아도 늦었지만.”
귀즈 왕세자는 또다시 칼을 들었다.
“크아아악!”
하지만 그 다음에 소리를 지른 것은 루이스 왕세손이 아니었다.
귀즈 왕세자였다.
“이…. 이 비천한!”
도나가 한 팔과 한 다리로 기어와 귀즈 왕세자의 다리를 물었다. 도나의 이는 그녀의 자살을 돕지는 못했지만, 귀즈 왕세자의 바지를 뚫고 다리에 박힐 정도의 힘은 있었다.
물론, 그뿐이다. 다리를 무는 것은 화만 부채질한다. 그를 저지하지 못한다.
귀즈 왕세자는 도나에게로 몸을 돌렸다.
“네 년부터다.”
캐런은 알았다. 이번에 레이몬드는 늦을 것이다. 언제나처럼. 그는 마지막에는 늦거나, 결국에는 실패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캐런은 죽고, 죽고, 또 죽고.
이번에도 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귀즈 왕세자는 등 뒤로 그녀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캐런이 자기를 도와 자기 발에 붙은 여자를 떼어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를 도와 그녀를 죽일 것이라고. 왜 그런 막연한 믿음이 생겼는지는 그도 모른다.
“어서 처리해!”
물론, 그의 착각이다.
캐런은 캐서린이 아니다. 귀즈 왕세자는 차가운 뭔가가 자신의 등을 누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순간 칼이라고 생각했지만, 칼은 바닥에 이미 떨어져 있었다. 구두 굽이었다.
캐런의 구두가 귀즈 왕세자의 등을 향했다. 귀즈 왕세자는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귀즈 왕세자가 다시 일어나려 했지만, 도나가 다리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캐런은 쓰러진 귀즈 왕세자의 등을 밟고, 자신의 목걸이를 귀즈 왕세자의 목에 걸었다. 바닥으로 진주알이 후두두둑 흩어졌다.
“…커억….”
귀즈 왕세자가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캐런의 구두가 바로 등을 강하게 누르고 있어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도나가 여전히 남은 팔로 귀즈 왕세자의 몸을 붙잡았다. 귀즈 왕세자가 도나를 발로 찼지만 그녀는 떨어지지 않았다. 목걸이의 줄이 귀즈 왕세자의 목을 파고들었다.
“그, 어, 으윽.”
캐런은 자신의 목걸이 줄로 귀즈 왕세자의 목을, 온몸을 이용해서 당겼다. 귀즈 왕세자의 손가락이 목걸이 줄로 향했다. 그는 그것을 벗겨 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벗겨지지 않았다. 캐런이 자살용으로 줄을 바꾸어 단 목걸이였다. 귀즈가 벗어나려고 해도 이미 목 안으로 파고 든 줄을 벗겨낼 수는 없었다.
“괜찮아요, 전하.”
“…어, 으어억.”
“괜찮으니까 가만히 계세요.”
귀에 더없이 달콤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운 목소리와 똑같은 목소리. 하지만 저 목소리에서는 독기가 똑, 똑, 떨어진다. 귀를 기울이면 안 되는 목소리.
“…아, 아아….”
“쉬이….”
눈앞이 하얗게 변한다. 귀즈 왕세자는 필사적으로 손가락을 뻗다가, 발로 누군가를 차거나 하면서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그럴수록 줄이 점점 더 조여들었다.
“…억.”
마지막으로 크게 뚝, 하는 소리가 들렸다.
툭.
귀즈 왕세자가 버둥거림을 멈추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끝이었다.
한나라의 왕세자, 왕이 될 중년의 남자, 연쇄 살인마, 강간범, 그리고 캐런의 어머니인 캐서린을 사랑한 남자가 죽었다.
“…아버지보다 오래 버티셨네요.”
“…….”
한참을 발버둥치던 귀즈 왕세자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되자, 캐런은 천천히 줄에서 손을 놓았다. 자신의 손에도 줄의 자국이 깊게 남았다.
“오르간 줄로 바꾸어두었거든요.”
“…….”
“여차하면 목매달아서 자살하기 좋아서.”
“…….”
“사실 저거보다는 스카프 천으로 자살하는 게 더 편하고 잘 가긴 하는데 말이에요. 수납하기엔 저것보다 더 편한 게 별로 없더라구요. 독 같은 것도 좋긴 한데, 워낙 급하게 나와서 실수했지 뭐에요? 뭐 어차피 전하는 제가 건네는 잔 같은 건 마시지 않으셨겠지만.”
캐런은 자신의 손을 탁탁, 털었다.
“손 아프잖아요.”
“…….”
캐런은 귀즈 왕세자의 얼굴을 구두 신은 발로 뒤집어 보았다. 누군가 본다면 왕실모독죄라고 할 행동이었다.
“…늙으면 욕심은 좀 자제하셔야지.”
귀즈 왕세자는 눈을 뜬 상태로 죽었다. 실핏줄이 터져 눈이 붉게 변했고, 입에서는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추한 죽음이었다.
“…이런.”
캐런은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팠다. 귀즈 왕세자가 발버둥치며 손톱으로 캐런의 손을 쥐어뜯은 것이다. 흉이 남을 것 같았다. 쓰라린 손을 내려다보니 한숨이 나온다. 이번에는 노동으로도 많이 상했는데, 흉까지 남는다.
“아프네.”
캐런은 찡그리며 소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하반신이 온통 피로 젖어 있었다. 캐런은 구두를 고쳐신으며 루이스 왕세손을 불렀다.
“루이스 전하?”
“…….”
대답이 없다. 캐런은 귀즈 왕세자를 일부러 한번 꾸욱 밟고는, 루이스 왕세손에게로 갔다. 루이스 왕세손은 눈을 감고 쓰러져 있었다. 양 다리에서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캐런은 덜컥, 하는 마음이 들었다.
“전하?”
가슴팍 가까이에 귀를 대 보았다.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
숨이 멎어 있었다. 이미 틀린 것이다.
“…….”
“아. 아아?”
도나가 저편에서 신음 소리를 낸다. 캐런은 일어나서 방 안의 광경을 본다.
“…미치겠네.”
이번에도 레이몬드는 늦었고, 캐런도 늦었고, 미래의 왕들은 전부 죽어 버렸다. 이번에도 끝났다. 이런 상황에서의 해피 엔딩은 불가능하다.
자신은 싫었다. 이런 상황이 싫었다.
캐런은 일어났다.
“하아.”
캐런은 한숨을 내쉬며 귀즈 왕세자와 루이스 왕세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도나를 보았다.
“…….”
결정했다.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다. 자신은 이번 생에서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이제는 정리를 해야 한다. 자신은 쾌락살인마의 길을 걷기로 하지 않았는가.
낸시를 죽일 때처럼, 토마스를 토막 냈을 때처럼, 데어 부인에게 총을 쏠 때처럼. 정말로 잘못 없는 사람이라도, 잘못한 사람이라도, 그런 잘잘못은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지 않았나.
“진정한 사랑을 해.”
“그러면.”
“도와줄게.”
결국 중요한 것은, 이번 생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음번에 하면 돼.”
캐런은 귀즈 왕세자의 칼을 들었다.
직접 드니 생각보다는 무거웠다. 하지만 손안에 달라붙는 금속의 감촉은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굉장히 아름다운 칼이었다. 캐런은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칼을 들었다.
탁.
캐런의 발걸음은 도나에게 향했다.
도나가 캐런을 본다. 캐런도 도나를 본다.
캐런은 칼을 들었다. 도나의 눈이 크게 떠졌다.
“도나야.”
캐런은 칼을 들고 도나에게 다가갔다.
“많이 아프니?”
어설프게 칼을 한번 바깥쪽으로 휘두른다. 부웅 소리가 나며 칼이 공기를 가른다. 그렇게 한 번 휘두르자 칼에 묻어 있던 루이스 왕세손의 피가 떨어져 나갔다. 캐런은 새하얀 검신을 본다. 좋은 세공품이다.
캐런은 도나에게 다가가며 그녀에게 설명했다. 그녀에게는 좀 더 친절하게 굴고 싶었다. 왜인지 이유는 모른다. 캐런이 생각한 것은, 도나를 진작 죽였어야 한다는 강한 의무감이다.
“어쩌면 내가 그냥, 방금 전에 레이몬드를 그냥 기다려야 했을지도 몰라. 어쩌면 그냥 방 밖을 나가서는 안 되었어. 어쩌면… 모르겠어. 확실한 건, 이번에는 내가 이도 저도 아니었던 거 같아. 그냥 철저하게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가 되자고 했으면서, 듈란에게 휘둘리고 귀즈에게 휘둘리고…. 어차피 레이몬드는 이번에도 똑같았는데. 이게 뭐니, 대체.”
도나가 눈을 크게 뜬다. 입을 벌린다.
“이번 생은 어차피 틀렸어.”
손을 내젓는다. 다리로 발버둥친다. 하지만 한 손과 한 발로는 멀리 갈 수 없다. 캐런이 울면서 다가갔다. 캐런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위로하듯이 도나에게 다가갔다.
“도나야, 괜찮아. 금방 끝나.”
“…아.”
“이제 괜찮아. 내가 도와줄게.”
칼을 든다.
“다시 시작하면 돼.”
그러니까.
괜찮아.
레이몬드는 캐런이 미쳤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래서 그녀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었다. 캐런의 광증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 듈란을 찾아갔다. 그것은 레이몬드의 마음을 굳히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왜 제게… 오신 겁니까?”
“캐런은 미쳤습니다. 맞습니까?”
의사로서, 신관으로서 그것을 입증해 달라고.
레이몬드는 듈란에게 요구했다. 그것은 단순하게 위로를 바라서가 아니었다. 레이몬드는 듈란에게 말했다.
“혹시라도 캐런의 과거가 드러날 때를 위한 것입니다.”
“…그녀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신관님의 말을 믿겠습니다. 하지만 캐런의 태도는 극히 불안정해서 어떤 식으로 베르딕 에반스가 걸고넘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이것은.”
“신관으로서, 의사로서의 증언을 부탁드립니다. 마저 작성하시고 서명해 주십시오.”
그래서 레이몬드는 정식으로 듈란에게 문서를 작성하기를 요구했다. 캐런의 정신은 극히 불안정하니, 가족의 보호와 의사의 돌봄이 필요하다는 소견서였다.
“…이것으로 만족하십니까?”
레이몬드는 그것을 찬찬히 보았다. 만약에 레이몬드가 캐런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캐런은 이 문서로 평생 정신병원에서 나올 수도 없을 만한 문서였다.
“예, 감사합니다.”
물론 레이몬드는 캐런을 병원에 보낼 생각은 없었다. 그것은 원수에게나 할 법한 짓이다. 정신병원의 치료는 대부분 환자에게 고문을 가해서 교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가족이라면 할 짓이 아니었다. 레이몬드는 캐런을 평생 책임질 자신이 있었다. 완력으로나, 금전적으로나.
레이몬드는 일어나려고 하는 듈란에게 하나를 더 물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무, 무엇을 말입니까.”
“캐런에게 왜 그런 거짓말을 하셨습니까?”
레이몬드는 그것이 궁금했다. 자신이 보기에 그것은 모범적인 의사가 할 법한 것은 아니었다.
“책 밖이라는 것은 없잖습니까.”
레이몬드는 자신이 했던 노력들을 생각하며 약간 눈썹을 찌푸렸다. 역시 쓸데없는 노력이었다.
“전 노력했습니다. 캐런이 다시 산다는 것이라던가, 책 밖에서 왔다는 이야기 같은 것들을요. 그녀는 진정한 사랑을 이루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간다고 믿더군요.”
레이몬드는 정말로 노력했다. 캐런의 말을 한 번도 믿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은 역시나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언어학, 물리학, 신학 교수들을 초대한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다른 세상이라는 말은 하지 못했지만, 다른 나라의 사람일 수 있냐는 불안감을 담아 의견을 구했습니다.”
그 말에 듈란은 약간 재밌다는 듯이, 아주 약하게 웃었다.
“그런 짓까지 하셨습니까?”
“예. 물론 전부 웃으셨습니다. 캐런의 발음과 모든 지식 중 어느 것 하나 다른 나라의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고 하시더군요.”
레이몬드는 듈란에게 물었다.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것을 왜 캐런이 믿고 있습니까?”
듈란은 대답했다.
“위, 위, 위안이 되기 위한 치료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데아나 내세를 위해 행동을 가다듬을 수 있으니까요.”
전부 죽자 고요한 침묵이 맴돌았다.
캐런은 헐떡이는 숨을 가다듬었다.
“이걸로 확실히… 사형이야.”
그래도 괜찮다.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레이몬드 경, 너무 늦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