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7. 결혼식 (16/31)

07. 결혼식


 

“캐런, 하나만 정직하게 말해 주십시오. 당신은 당신의 아버지를 죽였습니까?”

“…지금 그게 중요해요?”

캐런은 자신을 붙잡는 레이몬드를 보고 손목 안쪽을 신경질적으로 긁으며 물었다. 밧줄로 강하게 묶여 있었기 때문에 갑갑했다. 캐런은 이제 사형을 받기 위해 이동해야 한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캐런을 붙잡았다.

“전 이미 사형 선고를 받았고, 그것은 뒤집히지 않을 거예요.”

“…말해 주십시오.”

“글쎄, 이제 와서.”

하지만 레이몬드는 캐런과 눈을 마주치고 다시 한 번 더 말했다.

“당신이 아니라고 하면, 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캐런은 한숨을 쉬었다. 불쌍하다고 해야 하나, 구질구질하다고 해야 하나. 레이몬드는 이미 엔딩은 정해졌는데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미련을 갖는다. 죽는 것은 캐런인데 레이몬드는 숫제 자신이 죽으러 가는 얼굴이다.

“당신이 포기하지 않으면 어쩔 건데요?”

목소리가 날카롭게 나갔다. 이제 힘들었다. 이만하면 충분히 노력했다. 지금 캐런은 자신의 슬픔과 적막을 버티기도 힘이 들었다. 영원의 굴레에 갇힐 미래를 아는데, 재판에서 얌전히 있던 것만으로도 그녀로서는 충분한 노력이었다.

“레이몬드 경, 마음가짐으로 변하는 게 있나요?”

레이몬드가 노력하는 것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이 이상의 시간낭비는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끝이다.

“당신이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다고 해서 변하는 게 있냐구요.”

“…….”

레이몬드의 노력은 의미가 없다. 레이몬드의 사랑은 가치가 없다. 그가 노력하더라도 캐런은 죽을 것이다. 사형은 번복되지 않는다. 또한 하늘이 무너져 내려도 캐런은 결국 또.

“이만 가야 할 시간입니다.”

법정 집행인이 캐런의 어깨를 잡았다. 캐런은 뒤를 돌았다. 레이몬드가 따라온다. 그는 캐런을 따라오며 말한다.

“당신이 아니라고 하면 난 믿을 겁니다.”

그래서 당신의 믿음이 무슨 상관이 있냐고. 캐런은 패악을 부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 약속한 예의가 행동을 눌렀다. 캐런은 레이몬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캐런은 입을 열었다.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어요. 불도 지르지 않았고요.”

그것이 사실이다. 캐런은 어찌 되었건, 결국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 죽이려고 했을 수도 있지만 결국 영주를 죽이는 것에 성공한 것은 톰이지 캐런이 아니다. 불을 지른 것도 캐런이 아니다. 듈란이다. 이셀라는 제대로 말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는 것은 없다. 그렇게 말하자.

“저는.”

하지만 캐런은 입을 열다가 머뭇거렸다.

“…….”

말이 나오지 않는다.

자신이 명명백백하게 죽인 것은 아버지가 아닌 낸시다. 이셀라가 잘못 말한 부분이 있다고 해서 캐런의 본질이 달라지지 않는다.

“저는, 그러니까.”

구질구질하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레이몬드가 이제 와서 뒤집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저택은 이미 불타 버렸고 선고는 떨어졌다.

시간은 이미 막바지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고 캐런이 사형을 당하고 나면, 다시 캐런은 되살아나고 그는 캐런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까지 그랬었던 것처럼.

그렇다면 레이몬드는?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의 인생을 살까. 자신이 죽은 후에도 그는 그의 인생을 살까. 캐런은 그것이 궁금했다. 하지만 그녀는 영원히 자신이 알 수 없을 것을 알았다. 지금 눈앞의 레이몬드와 이제까지 몇 번이고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던 레이몬드는 같은 사람일까.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텐데.

레이몬드는 그녀를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 사이에는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계속해서 흐를 것이다.

캐런은 자신이 죽고 난 다음에도 계속 살 레이몬드를 생각한다. 영원히 살 자신 앞에 그는 한순간의 생을 살 뿐이다. 캐런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이렇게 말하자.

더 생각하지 말고.

“예, 제가 다 죽였어요. 레이몬드 경은 이제 자신의 생을 사세요.”

캐런은 말을 마치고 집행인들의 인도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되더라도 레이몬드는 잘 살 것 같았다. 사실 그 정도 되는 남자가 잘 못살기도 쉽지 않다. 레이몬드는 다른 여자와 결혼할까? 이셀라와 할까? 이제는 아무래도 좋을 일이다.

“저는 잊으시구요.”

이 말 좀 감동적인 것 같아. 캐런은 스스로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이만하면 예의는 충분히 차렸겠지. 다음번에는 레이몬드의 얼굴을 보지 말고 방 안에 틀어박히자. 이제 전부 다 싫다. 영원에 갇힐 테니까.

캐런은 복도를 가로질러 밖으로 나갔다. 바람이 선선했다. 어느새 시간이 꽤 흘렀다. 이번에도 그녀는 죽는 시간을 맞이할 때다.

타박타박.

아까는 그렇게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한 명도 없다. 마치 짠 것처럼.

“올라가십시오. 캐런 에반스.”

“예.”

마차에 오른다. 집행인들은 그녀를 돕지 않아서, 캐런은 약간 힘들게 마차를 올라야 했다. 비틀거리며 낡디낡은 마차에 앉는다. 삐걱이는 소리가 들린다. 캐런이 자리에 앉을 때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캐런!”

레이몬드가 캐런을 부른다. 마차가 출발하려고 하다가 방해를 받았다. 레이몬드가 마차의 창문을 올린다.

“저는 듈란 신관에게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정말로 미쳤으니까요.”

“아, 예.”

캐런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캐런을 노려보며 화내듯이 대답했다.

“그래서 당신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듈란 신관도 믿지 않습니다. 그는 당신을 사형시키기 위해 거짓말을 했습니다.”

“…….”

캐런은 자신이 뇌물을 주지 않았다는 걸 굳이 말하는 그의 심리가 이해가지 않았다. 응, 그래. 너 결백하구나.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자 레이몬드가 캐런에게 다시 말했다.

“반드시 당신을 데리러 가겠습니다.”

“이제 죽는다니까요.”

“캐런, 마지막까지 살아 계십시오. 당신에게 가겠습니다.”

의미 없는 노력하지 마세요.

캐런은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마차가 출발했다. 이제 그들에게 더 이상의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는 집행인의 판단이었다.

“감동적이죠? 제가 죄 많은 여자라.”

캐런이 자신의 옆에 앉은 남자에게 말했다. 옆에 앉아 있던 다른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이 창문에 커튼을 쳤다.

“보안을 강화해야겠군.”

캐런도 동감했다.

캐런이 사형장에 도착했다. 사형은 3일 후였던가. 캐런은 낡은 탑을 보며 마차를 타고 와 찌뿌듯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풀었다.

“집행은 누가 하나요? 참수인가요? 아니면 교수형? 총살은 아니겠죠?”

“…….”

“말해 주는 것도 금지되어 있나요?”

“…….”

남자는 묵묵부답이었다. 캐런은 밧줄로 묶여 남자가 끄는 대로 끌려들어 갔다. 빈 터에 막사가 쳐져 있었다. 자신은 조용히 목이 쳐질 줄 알았는데, 캐런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의아했다.

하지만 캐런이 가는 곳은 광장의 막사나 교수형대가 아니었다. 남자는 빈 터로 바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탑을 가리켰다. 하얗고 낡은 탑이었다. 올려다보는 것으로도 목이 아파지는 탑이었다. 이런 곳에서 죽은 적은 없었다. 그 아래 입구로 캐런은 끌려갔다.

“올라가시오.”

남자가 뒤에서 지시했다.

“꼭대기까지요?”

캐런은 눈앞의 무수한 계단을 보자 한숨이 났다. 저걸 또 언제 다 올라가. 그냥 대충 목매달고 끝내지. 캐런은 고개를 돌려 남자에게 물었다.

“같이 가시나요?”

쾅.

문이 닫히고, 걸음쇠가 잠겼다.

“냉정해라… 밧줄이라도 풀어 주지.”

자기는 안 가고, 나 혼자 올라가라 이거지.

캐런은 발로 문을 퍽 찼다. 발만 아팠다. 캐런은 자신의 손목을 강하게 얽어맨 밧줄을 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냥 죽고 죽어 누워 있고 싶은데 그조차도 허락지 않는다.

캐런은 이셀라의 하녀가 되어야 하고, 재판을 받아야 하고, 사형을 기다려야 한다.

“인생이란.”

그냥 사형! 하고 선고가 내려지면 목 뎅강 자르고 끝 하면 얼마나 좋을까. 캐런은 한숨을 쉬며 계단을 올랐다.

저벅저벅.

끝도 없이 돌아 올라가는 탑은 평상시에는 사형장으로서의 역할보다 숲 속에서 길을 알리기 위한 용도로 보였다. 그래서 상당히 높았다. 캐런은 걷다가 다리가 아팠다. 캐런은 멈췄다.

“…더럽네….”

계단의 벽에는 핏자국이 있었다. 청소를 그리 자주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캐런은 갈색으로 말라붙은 오래된 핏자국을 보며 키를 가늠해 보았다. 먼저 죽은 선배 사형수는 자신보다 큰 키를 가진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갈 때 엄청나게 발버둥을 친 모양이다. 위쪽에 지저분하게 자국이 남았다.

자신은 깔끔하게 나오라고 할 때 나가야지. 그나마 베르딕 에반스가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그가 오는 것이 제일 싫었다. 일부러 녹슬고 무딘 도끼를 들고 오기 때문이다.

“역시 교수형일까.”

캐런은 계단을 오르면서 작게 나 있는 창을 보았다. 사람이 간신히 팔 하나 뻗을 수 있을 만한 작은 창이었다. 나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밖을 보기에는 충분했다. 캐런은 얼굴을 대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역시 교수형인가 보네.”

역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었다. 막사를 치고 있는 것이 교수형대를 세우려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시내에서 집행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캐런은 자신의 시체를 구경하러 올 수많은 관중들을 생각하면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구경거리가 될 뿐 아니라 여자 사형수들의 시체는 이것저것 다양하게 쓸 수 있으니까.

“…하, 하아. 다리 아파.”

그리고 꼭대기에 올랐다. 캐런은 꼭대기의 문에 도착했다. 방 하나. 이곳에서 머물다가 이제 사형을 당하는 것일까. 문은 열려 있었다. 캐런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마를 찌푸렸다.

“왜 네가 여기에 있어?”

그리고 방 안에 있는 남자를 보았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듈란이었다. 캐런은 약간 의아했다. 듈란은 방 안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왔다.

“…내, 내가 마지막… 고해담당… 이니까.”

그리고 캐런의 손에 묶인 밧줄을 풀었다. 캐런은 얼얼한 손목을 만진다. 생판 남보다는 나은 걸까? 하지만 그냥 아는 사람도 아니고 그 듈란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하. 뭐. 그래.”

“…….”

“내가 지금 막 사형선고 당하자마자 여기로 끌려와서 정신이 없어.”

“…그래.”

캐런은 얼얼한 손목을 만지며 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하나였기 때문에 듈란은 서 있었다. 캐런은 듈란을 쳐다보았다.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

“…….”

“사형을 당할 때 보통 이렇게까지 멀리 오나? 내가 사형은 처음인데, 그래도 몇 번 보기는 했거든. 보통 유명한 사람을 죽이면 본보기로 삼기 위해서 더더욱 많은 사람들 보는 앞에서 죽인단 말이야.”

캐런은 창문 밖을 보며 말했다. 꼭대기 층은 생각보다 창이 크고 밝았다.

“여기는 자주 쓰이는 사형장도 아닌 것 같은데.”

“그, 그게 궁금해?”

“응.”

듈란은 선선히 대답했다.

“내, 내가… 베르딕 씨에게 부탁했거든.”

“사형장을 여기로 해 달라고?”

“그, 그래.”

“왜?”


 

“네…. 네가, 주, 죽기 전에… 내게 분풀이 당하라고.”

캐런은 눈을 깜빡였다.

“와.”

“…….”

“네가 먼저 부탁했어?”

듈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캐런은 기가 찼다.

“…음, 그러니까, 죽기 전에… 아, 알겠어.”

너무 잘 알겠다. 캐런은 이런 걸 잘 안다. 운 나쁜 젊은 여자들은 항상 ‘이런 식’의 위험에 처한다. 캐런은 그중에서도 아주 운이 나쁜 축에 속한다. 하지만 캐런은 이 말을 듈란이 했다는 데에 화가 났다.

“너 지금 나랑 뭐하자는 건데?”

“…….”

캐런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헝클였다. 화와 짜증이 뒤섞여서 억누르기 힘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사정을 아는 듈란이 왜 자신에게 이렇게 구는지 모르겠다. 그냥 대충 죽게 하면 지옥에 떨어지기라도 한단 말인가?

“지금 옷 벗어? 아, 진짜. 레이몬드 경만으로도 난 충분히 지금 힘들어. 베르딕 씨는 진짜 짜증 나고. 좀 있으면 사형당하러 갈 텐데 너는 마지막까지 왜 이렇게 짜증 나게 굴어?”

“…….”

캐런은 벌떡 일어나서 듈란의 멱살을 잡았다.

“야, 내가 죽으면 시체나 가지고 놀아. 나 지금 충분히 힘들단 말이야. 너 대체 나한테 왜 이래? 어?”

캐런은 화가 났다. 이제까지 캐런이 듈란에게 크게 화를 내지 않았던 것은 너무 큰일이 연달아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캐런은 정말로 어지간해서는 화를 낼 수 없는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이, 이거 놔.”

하지만 듈란이 캐런에게 한 짓은, 화를 내지 않을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귀즈 왕세자에게 날 보내고, 이셀라를 되살리고, 날 사형선고 당하게 하고, 지금 여기 이곳까지 끌고 와서, 왜 이렇게 짜증 나게 해? 어? 그래 놓고 뭐? 죽기 전에 욕정을 풀어?”

짜악!

캐런은 멱살을 잡고 듈란의 한쪽 뺨을 강하게 쳤다.

“처음부터… 처음부터! 내가, 내가 자고 싶으면 얼마든지 다리 벌리겠다고 했잖아! 안 하겠다고 한 건 너야! 전부 끝났어! 넌 소용없어! 그냥 빨리 날 죽게 내버려두란 말이야!”

“아, 아니.”

듈란은 캐런의 손목을 잡았다. 강한 힘이 캐런을 눌렀다. 듈란은 캐런의 어깨를 강하게 눌렀다.

“…너, 너는 아직 대답하지 않았어.”

캐런은 씨근덕거리는 숨을 가라앉히면서 듈란을 노려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듈란의 목을 잘라 버리고 싶었다.

“뭘.”

“…진정한 사랑.”

캐런은 듈란을 노려보았지만 듈란은 그 끝없이 새까만 눈동자로 캐런을 마주 보았다.

“레, 레이몬드 경을… 사랑해?”

너는 아직 답을 하지 않았어.

우리의 내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어쩌지….’

이셀라는 불안해하며 자신의 손톱을 물어뜯었다. 천막 안에서 신경질적으로 안을 빙빙 돌았다. 자신이 잠든 사이에 너무 많은 일들이 지나갔다. 이셀라는 자신이 7개월이나 잠들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릴리! 릴리!”

“…….”

“아, 안 왔어?”

이셀라는 자신의 하녀조차 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낙담했다. 불편하다. 정말로 천막 안은 불편했다.

이셀라는 정말이지 오고 싶지 않았지만 여기서 ‘비켜서서 보는 것’ 또한 의무였다. 아버지가 말한 복수자의 의무. 이셀라는 여기서 캐런에게 복수하고, 그 결과를 봐야 했다.

하지만 이셀라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시체는커녕 상처조차 보기 싫어하는 이셀라였다. 하지만 베르딕은 그 이상의 어리광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 어린 시절은 끝났으니까.

“이셀라, 손톱 좀 그만 괴롭히거라. 보기 안 좋지 않느냐.”

베르딕이 천막 안으로 들어오면서 지적했다.

“죄, 죄송해요.”

이셀라는 엄지를 입에서 뗐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누워 있던 딸에게 베르딕은 그 이상 나무라지는 않았다. 이셀라는 눈치를 보며 그에게 물었다.

“아버지, 어머니는요? 오지 않았나요?”

“그 여자가 어디 집 밖으로 잘 나왔더냐.”

베르딕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안 오시는군요….”

이셀라는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가 더 보고 싶었다. 불안했기 때문이다. 이셀라는 주로 베르딕이 더 곁에 두고 다녔지만, 눈을 뜬 후로 아버지는 계속 무서웠고, 낯설었다.

“이제 우리도 곧 집에 갈 거란다.”

“네에….”

이셀라는 번들거리는 눈을 하고 있는 베르딕을 보며 대답했다. 이셀라는 무서웠다. 지금도 무서웠고, 벌어질 일도 무서웠다.

“빨리 끝나는 대로 돌아가자꾸나.”

베르딕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내용은 부드럽지 않았다. 그는 딸에게 결코 먼저 돌아가서 쉬라고 하지 않았다.

“끝나는 대로.”

베르딕은 탑을 노려보면서 대답했다. 굳건한 다짐이었다. 이셀라는 치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아버지가 저런 얼굴을 하고 있을 때면 언제나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

“저길 보거라. 지금 우리의 복수는 시작됐을 것이란다.”

저 탑 안에는 캐런이 있을 것이다. 이셀라의 법적 자매, 이셀라의 원수, 사람을 여럿 죽인 살인마. 이셀라와 베르딕은 탑의 밖에서 그녀의 목이 내걸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서워….’

베르딕은 그녀의 목을 볼 때까지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 분명했다. 이셀라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결국 내내 생각하던 말을 꺼냈다.

“아버지….”

“왜 그러느냐.”

베르딕이 탑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저, 저는 무서워요.”

“무서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단다. 이제 전부 끝났어.”

이셀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가 무서웠다. 하지만 베르딕은 이셀라의 아버지다.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었다.

“아버지, 제가… 맞게 본 걸까요?”

이셀라는 자신의 기억을 확신할 수 없었다.

“제가 분명히… 본 게 맞을까요?”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리냐.”

베르딕이 거슬린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셀라는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전 불난 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요…. 분명히 저는… 그때 캐런이… 하이어 영주, 자신의 아버지와 방에 있는 것을 봤어요. 그런데 그녀가 죽인 것을 보진 못했어요.”

베르딕은 이셀라의 어깨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겐 상처가 있었단다. 그리고 널 친 것은 캐런이라 하지 않았느냐.”

“네, 네. 맞아요.”

이셀라는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확신이 없었다.

일어나자마자 자신의 파혼 소식을 듣고, 레이몬드 세이어테스가 자신이 아니라 캐런과 약혼했다는 말을 듣자 비명을 지르며 말했다.

캐런은 그 어두운 복도에서 붉은 머리를 휘날리며 그녀를 쫓아 달려왔다. 어디까지고, 어디까지고. 웃으면서. 복도는 너무나 어두웠고 끝나지 않았다.

“…분명히… 그녀가 절….”

이셀라는 이제야 그 악몽에서 마침내 깨어났다. 부르르 떨면서 자신의 어깨를 감쌌다. 악몽에서 깨어났어도 두려움은 끝나지 않았다. 새로운 두려움이 생겼다.

“하지만 전 그녀가 죽인 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어요…. 제… 제가, 잘못 본 것이면 어떡해요?”

일이 너무나 커졌다. 이셀라는 자신을 노려보는 레이몬드를, 그리고 수많은 귀족들이 자신을 주목할 때를 떠올리자 모골이 송연해졌다. 자신은 정말 진실만을 말한 것일까? 정말?

“이셀라, 이셀라야.”

베르딕은 딸의 옆으로 갔다. 그리고 부들부들 떠는 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베르딕은 부드럽게 얼렀다.

“너는 너무 착해서 탈이란다.”

“하, 하지만요, 아버지.”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이셀라는 말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짓눌렸다. 캐런이 싫다. 자신의 약혼자를 빼앗아 간 그 여자를 죽여 버리고 싶다. 그리고 무섭다. 그 여자가 세상에서 지워졌으면 좋겠다.

“저는 무서워요….”

하지만 직접 사형장에 와서 캐런의 목을 기다리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자신의 눈으로 시체를 직접 보기 위해 기다리는 것은 아직 모르는 일이었다.

“아, 아직 제가 감당하기 너무 버거운 것 같아요.”

이 모든 상황이. 이셀라는 새삼 자신이 아직 어리다고 느꼈다. 너무 일이 커졌다. 하지만 베르디은 단호했다.

“적의 시체를 직접 확인할 나이가 되었다. 이제 너는 성인이니까.”

이셀라는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베르딕은 마저 말했다.

“이셀라야.”

“…네, 아버지.”

“무엇이 그렇게 두려우냐. 캐런이 사람을 죽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고, 네게 상처를 입힌 것도 명백한 사실 아니냐. 너는 복수를 하고 그년의 살을 뜯어야 한다. 내 딸이니까.”

이셀라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잘못 봤으면, 그렇다면… 어쩌나요?”

“그럴 수도 있다.”

베르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셀라는 놀랐다. 그럴 수도 있다고? 하지만 베르딕은 다시 말했다.

“네가 잘못 봤을 수도 있다. 성인 남자가 십대인 자기 딸에게 죽기란 쉽지 않으니까.”

아버지는 처음부터 감안했단 말인가? 그걸 예상하고도?

“하, 하지만… 그렇다면.”

그만, 베르딕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게 피해를 준 사실이 사라지느냐?”

“…….”

“내 딸은 실수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어.”

“아버지!”

베르딕은 단호했다. 하지만 이셀라는 마저 말을 해야 했다. 쓰러지기 전에도, 지금도. 자신의 아버지는 언제나와 같았다. 하지만 자신도 말을 해야 한다. 무섭기 때문이다.

“제가, 제가… 쓰러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것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사와요.”

“그래, 레이몬드 세이어테스 경이 분명하다.”

베르딕의 눈에 파란 불길이 일었다.

“그 자식은 널 구하지 않았고 저 빨간 머리 계집을 구했다. 일부러 널 방치한 것임이 분명해.”

아니야, 아버지. 이셀라는 그것이 아님을 안다. 레이몬드는 결국에는 선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 이셀라는 레이몬드가 그러지 못할 것임을 안다. 이셀라는 원수에게 와서 당신이 값을 잘못 치렀다고 말하는 어린 기사를 안다.

“모르겠어요! 만약에…. 만약에… 아버지, 정말 만약에 말이에요.”

이셀라는 침을 삼켰다. 떨렸다. 무서웠다. 정말 무서운 것은 캐런이 아니라.

“신관 듈란 로이드가 제 목을 조른 남자면 어떡해요?”

이셀라는 그것이 무서웠다. 이셀라는 어렴풋하게 들리던 남자의 목소리를 생각한다.

“그러니까, 말했잖습니까.”

“끼어들지 말라고.”

자신의 목을 조른 것은 듈란이 아닐까.

“그, 그렇다면.”

이셀라는 그 의심 때문에 두려웠다. 그리고 짐작할 수 없어서 더 두려웠다. 레이몬드라면 오히려 단순하다. 그는 이셀라 에반스를 베르딕 때문에 달가워하지 않는다. 안다. 안다. 하지만 듈란이라면. 그 허리 굽고 창백한 신관이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잠재우고 이제 와서 무슨 의도를 가지고 깨운 것이라면.

“듈란 로이드는 대체 왜 그런단 말이에요?”

이셀라는 무서웠다. 짐작도 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셀라.”

베르딕은 딸의 떠는 어깨를 감싸 안았다. 단단한 손이었다. 그리고 잔인한 손이었다. 베르딕은 부드럽게 딸을 어르면서 말했다.

“듈란 로이드가, 그 신관이 이 아비를 조종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냐?”

“…히끅.”

이셀라는 그 남자가 아버지 옆에서 너무나 오래 있었다는 것이 무서웠다. 그리고 그 남자가 자신을 돌봤다는 것도 무서웠다. 그 남자는 결코 호인이 아니다. 그래서 자신은 그를 경멸했다.

“이셀라,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단다. 듈란이 저 안에서 캐런에게 무엇을 하고 있을지 뻔하지 않으냐.”

이셀라는 아버지의 손이 징그럽게 느껴졌다. 자신이라면, 어머니라면 그런 방식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자들은 그렇게 복수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베르딕은 그렇게 했다.

“듈란이 조종했다고?”

베르딕이 킬킬 웃었다. 그리고 탑을 노려보았다.

“이제 네가 깨어났으니 그는 필요 없단다.”

“…….”

“어디 한번 보자꾸나.”


 

캐런은 듈란을 봤다. 기가 찼다. 그는 알 수 없었다. 언제나 의뭉스러웠다. 그는 언제나.

“이제 와서… 너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말해.”

“이제 와서 내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캐런은 발악했다.

장난해? 이제 와서 왜 그런 소리를 하는가. 사실은 명쾌하지 않은가. 자신은 삶을 반복한다. 책 속에 들어왔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환상이다. 반복을 끝내려면 자식을 낳아 물려주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은 불임이기에 끝낼 방법은 없다. 그것은 듈란이 재판 전에 인정한 사실이다.

“내게 사랑이라고? 닥쳐! 넌 지금까지 내게 왜 이러는데!”

하지만 듈란은 계속해서 캐런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아, 아직 내기는 끝나지 않았어.”

희망이 있는 걸까? 캐런은 듈란을 본다. 어떻게 하면 답을 얻을 수 있을까. 캐런은 생각한다. 생각을 해야 한다. 처음부터 듈란을 죽여 버리고 시작했어야 했는데. 아니야. 듈란을 죽이면 답을 못 얻잖아. 듈란을. 이 자식을 어떻게 해야 좋을까.

탁.

“사랑해.”

하지만 일단 답은 해야겠지. 캐런은 진지하려고 노력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레이몬드 경을 사랑해. 봤잖아, 너도.”

“…….”

“봤잖아. 만난 지 몇 개월 만에 그 남자가 날 위해 포기한 것을 봐. 그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면서 저렇게 희생했어. 지금도… 마지막까지 내게 기다리라고,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했어.”

캐런은 생각했다. 또 무엇이 있을까.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는데, 저렇게까지 했어. 저 정도까지 하는데 사랑이 아닐 수 있을까?”

“그, 그 남자 말고.”

듈란이 반박했다.

“네, 네 감정은 어떻지?”

캐런은 치마를 꽉 쥐면서 대답했다.

“물론, 나도 사랑해. 저렇게 온전하게 날 위해 희생하는 남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 어.”

하지만 듈란은 말하지 않았다. 듈란은 일어났다. 캐런은 듈란을 잡았다.

“잠깐, 잠깐, 아니야. 듈란. 내가 널 사랑해. 내가 잘못 알았어. 레이몬드 경이 아니야. 널 사랑해. 날 도와줘.”

“…….”

듈란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캐런은 그 얼굴을 보고 웃기지도 않은 헛소리들을 그만두기로 했다. 이미 다 틀렸는데 자신은 왜 자꾸만 희망을 찾는 걸까. 왜. 자신은 이다지도 어리석을까.

“…그래, 알았어.”

캐런은 고개를 숙였다.

“난 사랑할 수 없어. 아무도. 그건… 누가 잘하고, 못하고, 맞지 않아서가 아니야.”

캐런은 인정했다. 저 정도로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는 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캐런은 이번 생뿐 아니라 계속해서 확인하지 않았는가.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레이몬드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결국 이번에도 캐런에게 증오를 내뿜지 않는다. 그녀가 살인을 하더라도.

그래서 그녀는 선택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너무나 당연하게 소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저렇게 레이몬드가 최선을 다하니까. 자신이 보기에도 신기할 정도로. 그녀의 기사, 그녀의 남주인공.

“그래도 난 그를 사랑할 수 없어.”

이제 조금 후에는 그도 캐런을 잊어버릴 테니까.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이야….”

다시 글자는 흩어지고 시간은 처음으로 돌아간다. 노력도, 애정도, 의무도, 증오도. 그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모든 관계는 사라진다. 그래서 캐런은 사랑할 수 없다.

절대로.

세월은 쌓이지 않는다. 결국 끝까지 아무도 그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와 반복되는 생을 살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앞으로도 영원히 혼자일 것이다.

“사랑은 사람과 사람이 하는 거야. 사람과 활자는 사랑할 수 없어. 책이 환상이라고? 하지만 결국 변하는 건 없어. 그 누구도 나와 세상을 공유할 수 없어.”

처음부터 내기는 성립하지 않아.

베르딕은 듈란에게 편지를 집어넣었다. 탑 안으로 편지를 밀어 넣는다. 그가 확인할지, 안 할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제 베르딕의 인내심은 바닥나고 있었다.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군.”

캐런 하이어의 목을 내걸지 않으면 그가 직접 캐런의 목을 칠 생각이었다.

베르딕은 군사들에게 탑의 문을 부술 준비를 하라고 일렀다.

“날 설득하려 왔다면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팬케이르 후작은 레이몬드가 문을 열자마자 말했다.

“팬케이르 후작님.”

“난 할 만큼 했네.”

팬케이르 후작은 레이몬드를 보며 썩은 음식을 문 듯한 얼굴을 했다. 레이몬드의 예상대로였다. 후작은 손을 내저으며 진심으로 말했다.

“자네도 할 만큼 했어. 이제 그만 그 여자는 잊어버려.”

“후작님.”

“내가 지금 자네에게 화를 내지 않는 건, 자네도 속았다고 생각해서야.”

레이몬드는 후작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말을 멈추었다. 후작은 상당히 화가 나 보였다.

“자네뿐만 아니라, 나도 상당히 무리했어. 캐서린의 딸이라는 걸 염두에 두었단 말일세. 나는 우정이라는 걸 기억했거든. 이 이상은 무리야.”

“…….”

“아니, 무리니 뭐니 할 것도 없지…. 이미 사형 판결이 났는데 뭘 어쩌란 말인가. 이제 전부 끝났어. 배심원들의 이름을 알겠지. 전부 쟁쟁한 귀족들, 의원들이었어. 그리고 그들 대부분에게 미리 말을 해 놨는데, 이게 뭔가. 나만 우스운 꼴이 되었어.”

팬케이르 후작은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레이몬드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푹 찔렀다. 힘이 들어간 손짓이었다.

“1년 정도 다시 군대에 있도록 하게. 자네가 해 줬으면 하는 일이 있으니까.”

“…….”

“아니, 자네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야. 이미 귀즈 왕세자의 행적을 공개한 것만 해도 전하와 상당히 불편해졌어.”

하지만 그만큼 새로운 왕으로서의 입지는 더 좋아지겠지. 레이몬드는 자신이 큰 은혜를 베풀고 엄청난 손해를 본 것처럼 말하는 팬케이르 후작의 앞에 서서 생각했다. 이자는 결국 정치인이다. 자신에게 이 이상 투자하지 않을 것이다.

“머리 굴리지 말게. 자네가 생각하는 것 정도는 다 보이니까.”

하지만 레이몬드가 이제 무엇을 더 할 수 있겠는가. 미래의 왕이 될 남자조차 네게 더 이상 희망은 없다고 하는데. 후작이 우두커니 서 있는 레이몬드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못 걸렸어. 여자 보는 눈이 없던 거지.”

“…….”

“이제까지 자네는 충분히 했어.”

후작은 약간은 후련한 얼굴로 뒤를 돌았다. 레이몬드는 그의 뒤에서 말했다.

“알겠습니다, 후작님. 하지만 명을 받기 전에 저도 할 일이 있습니다.”

레이몬드는 돌아섰다. 후작이 다급히 말했다. 그가 얼굴을 다시 돌려 레이몬드를 곁눈으로 노려본다. 자신의 충고를 듣지 않는 것이 불쾌하다.

“어떻게 할 생각인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나을 텐데.”

“혼자서라도 가겠습니다.”

“어디로?”

“사형장으로 가겠습니다.”

“악취미로군. 자네 약혼녀의 목이 매달리는 것을 보려고 하는 건가?”

“아뇨.”

레이몬드는 자신이 구할 수 있는 화약의 양을 계산했다.

“혼자서라도 가겠습니다.”

“미쳤군. 내가 허락할 것 같은가? 그녀는 이제 법적인 사형수야.”

“후작님, 그래서 미리 말하고 가려 합니다.”

레이몬드는 말했다.

“사형장에 몇 명이나 있습니까?”

“자네, 지금 내 말을 뭐로 들었나?”

“제가 확인해 본 결과로는 거기 모인 사람들은 많으나, 국가직인 집행인들은 가지 않았습니다.”

“레이몬드 경.”

“제가 죽을 것 같더라도 후작님과 연관되지 않도록 처리하겠습니다.”

“자네가 젊어서 그래. 우선 진정하게.”

“후작님, 제가 궁금한 것은, 그곳에 후작님의 사병이 있습니까?”

후작은 손으로 탁자를 탕 소리 나게 쳤다. 레이몬드는 지금 너무 흥분해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왜 내가 그곳에 병사를 보낸단 말인가?”

“그렇다면 전부 죽여도 후작님께 폐가 가진 않겠군요.”

“…레이몬드!”

후작이 크게 소리쳤지만 레이몬드는 마저 말을 이었다.

“여자 하나를 사형시키기 위해 거기까지 끌고 가고, 한 부대의 용병들이 이동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레이몬드는 베르딕이 싫었다. 레이몬드는 생각했다. 베르딕이 그곳으로 간 이유는 무엇일까. 캐런을 왜 그곳까지 끌고 가서 죽이려고 하는가.

“제게 책임이 있습니다.”

레이몬드는 캐런의 등을 생각한다. 명백하게 가학적인 성품이 드러나던 그 상처들을 생각한다. 이제 캐런은 자신의 책임이다. 레이몬드가 다른 여자를 잡았으면, 캐런은 그냥 집안이 몰락했을지언정 평범하게 결혼했겠지.

사실은 레이몬드도 안다.

레이몬드는 자신이 가야 할 이유를 가져오고 있었다.

“이제 자네 손을 떠난 일이야.”

“제 약혼녀입니다.”

그가 선택한.

“혼자 가서 뭘 어떻게 하려고? 자네 인생을 생각하게. 그 여자를 만난 지 얼마나 지났는지 생각하라고. 자네가 원하는 것은 베르딕의 필멸 아니었나? 지금 가서 뭘 어쩐다고? 불가능해. 이건 몰래 숨어드는 것도 아니야.”

레이몬드는 후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사실 이미 정하고 왔습니다.”

“…자네, 여기 왜 왔나?”

레이몬드는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화약 좀 빌리려고요.”

후작은 급하게 창문을 열었다. 마차 하나가 뭔가를 싣고 나가는 것이 보였다. 후작이 몸을 돌려 문 밖으로 급히 빠져나가는 레이몬드에게 소리 질렀다.

“레이몬드 경!”

“이제까지 무보수로 많이 일했으니 그 정도는 가불해 주십시오.”

“그만둬!”

레이몬드는 듣지 않았다. 처음부터 후작이 더 이상 설득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레이몬드 자신 스스로도 설득할 수 없는데 어찌 남을 설득하겠는가.

“제논, 출발해!”

레이몬드는 안다. 이것은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다. 아무런 명예도 없다.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을 날리는 짓이다.

심지어 캐런조차 오라고 말하지 않는다.

“제가 전부 다 죽였어요.”

캐런은 그렇게 말했지만 레이몬드는 믿지 않는다.

레이몬드는 듈란에게 돈을 건넨 적이 없었다. 그것은 듈란의 거짓말, 베르딕의 조작이다. 그것은 정말로 확실하다. 캐런은 베르딕에게 당한 피해자다. 베르딕은 캐런을 사형대로 올리기 위해 온갖 수작을 부렸다. 그러니 캐런의 말은 믿지 않는다. 자백도 믿을 수 없다.

그리고 믿지 않기 때문에 레이몬드는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캐런은 새벽에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해가 뜨고 있었다. 아, 이제는 죽을 시간인가.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이번에는 어디지. 나는 지금 몇 살이더라. 너무나 피곤하고 시간은 뭉개지는데 그것을 누군가가 깨운다.

“이… 일어나, 캐런.”

“…뭐니.”

캐런은 눈을 비볐다. 듈란이 자신을 흔들었다. 아직 이른 새벽이었다.

“인간적으로 사형시킬 거라면 자고 있을 때 해 주면 안 되는 거야?”

“…시간이 필요해.”

듈란은 알 수없는 소리를 한다. 캐런은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하늘은 아직 동이 트지 않았다.

캐런과는 달리 듈란은 한숨도 자지 못한 얼굴이었다. 창백한 얼굴은 거의 시체처럼 질려 있었다. 캐런은 침대에 앉아서 듈란에게 물었다.

“사형집행도 네가 해?”

“워, 원래는 그러려고 했어…. 베, 베르딕 씨에게도 그렇게 말했는데.”

“그럼 빨리 죽이지 않고 뭐 하니. 나 베르딕 씨 도끼는 싫은데.”

“…내, 내기가.”

캐런은 듈란의 머리카락을 팍 잡아당겼다.

“내가 졌잖아.”

이제 끝이다.

캐런은 자신이 레이몬드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랑은 사람과 사람이 하는 것이므로 자신은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고. 다음번에는 듈란을 속일만큼 더 노력해야겠지만, 이번은 무리였다. 사람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날뛰려고 했던 처음의 계획이, 그녀의 삶이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래도 나 사람 죽인 거 후회 안 한다?”

“…….”

“사실 더 많이 못 죽인 게 아쉬워. 왜 힘이 없어서. 다음번에는 베르딕을 죽이는 것도 노력해 봐야지.”

캐런은 투덜거렸다. 하지만 듈란이 이불을 젖히는 바람에 소스라쳤다.

“춥거든?”

“일어나.”

“왜.”

“베, 베르딕이 오고 있어.”

캐런은 희미하게, 쿵쿵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이제 시간이 되었구나. 벌써? 벌써? 이제 죽는구나. 이제 끝이구나.

“어, 어서 일어나서 창가로 가.”

듈란의 지시에 캐런은 허둥지둥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새벽공기가 방 안으로 파고들었다. 창문 밖은 낭떠러지와 같이 까마득했다.

“…….”

거친 바람소리가 들린다. 캐런은 듈란을 본다. 그는 침대로 문을 막고 있었다. 우드드득 멀리서 작게 문짝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캐런은 듈란이 무슨 짓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시, 시간을 재고 있어.”

“베르딕에게서 탈출하라고? 그게 가능할 것 같아? 아니, 애초에 날… 여기로 끌고 온 건 너잖아.”

캐런은 듈란의 얼굴을 본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차, 창문을 봐.”

캐런은 창가로 다가갔다. 베르딕의 막사에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캐런은 자신의 나부끼는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캐런은 그를 보았다.

그녀의 기사를.

레이몬드는 총을 들었다.

그는 혼자서 군대를 대신한다.

시작은 저격이다. 레이몬드는 새벽에 폭탄을 설치했다. 시온이 그를 도왔다.

“전 더 이상 안 합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그는 투덜거리면서도 전부 화약을 설치하고, 뒤로 물러나 발화를 시작했다. 천천히 불이 피어오르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허둥지둥 정신없이 나오는 사람들을 향해 레이몬드는 총을 겨눴다.

하나, 둘, 셋.

“멈춰! 멈춰! 저격수가 있다!”

사람들이 허둥거리다가 몸을 낮춘다. 레이몬드는 저격물들의 머리가 급격하게 낮아지는 것을 본다. 혀를 찬다. 아직 일곱. 멀었다. 레이몬드는 멀리서 사람들의 얼굴과 복장을 본다.

역시나 옷은 사복이지만, 움직임은 명백하게 훈련된 병사의 그것이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빠져나간 병사는 없었다.

“역시, 폐하께서는 화가 많이 나셨군.”

현왕이 반드시 캐런을 죽이라고 한 모양이었다. 레이몬드는 장전했다.

화약은 충분하다.

레이몬드 경이 돌아왔다.

캐런은 알 수 있었다.

그냥 알 수 있었다.

“미쳤나 봐.”

캐런은 자신의 머리를 다시 탑 안으로 집어넣었다. 캐런은 그가 왜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알 수 있었다. 그녀를 사랑해서. 왜. 왜 사랑한다고 하는지 그녀는 그 이유를 명확하게 알 수 없다.

이번에도 그는 늦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어쩐지 모든 일들이 좀 빠르게 일어나더라.”

캐런은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자신이 사람을 죽인 탓이었을까, 모든 일들이 전보다 조금씩 빨리 일어났다. 이셀라의 집으로 들어간 것도 빨랐고, 레이몬드가 학대받는 그녀를 동정해 끌고 나간 것도 빨랐으며, 심지어 그가 고백한 것조차 좀 더 빨랐다.

“하지만.”

하지만 그런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번에도 그녀는 죽을 텐데.

캐런은 그래도 다시 예의를 지키고 싶어졌다. 이번에 죽는다면, 그의 옆에서 죽자고 생각한 그 다짐을 생각해 냈다. 캐런은 듈란을 본다. 그가 짐으로 문 앞을 쌓아둔다.

“듈란. 레이몬드 경이 돌아왔어.”

“…그래.”

“레이몬드 경이 돌아왔다고. 오지 말라고 했는데.”

캐런은 다시 서글퍼졌다. 이번에도 그는 돌아왔고,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그를 지옥으로 끌고 갈 여자를 사랑한다. 그리고 캐런은 그에게 아무것도 되돌려 줄 수 없다. 감정조차. 하지만 그것이 새삼스럽게… 부담스러웠다.

캐런은 결코 동일한 무게의 감정을 가질 수 없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단 하나의 감정은 진실이다. 그녀가 톰에게 칼을 들이댈 때도, 도나에게 칼을 들이댈 때도, 광기에 몸을 맡기려고 할 때도 결국 놓지 못했던 저 바닥의 감정 하나.

“그를 동정해.”

자신은 결코 그를 사람으로 생각할 수 없을 것이고. 그가 의미 없는 노력을 하는 것을 보는 감정. 그 얄팍한 동정심만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다시 살아나면 그도 모든 것을 잊겠지. 그것이 캐런은 정말로, 싫어졌다.

“레이몬드 경이 날 기억했으면 좋겠어.”

“…그래.”

듈란은 캐런에게 대답했다. 이상하게도 듈란의 목소리는 평화로웠다. 그에게서 처음 듣는 어조였다.

투둑, 퍽.

“열어!”

그 순간, 문을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 베르딕이 도끼를 들고 문 밖에 서 있던 것이다.

이제 저 문이 열리면 자신은 죽을 것이다.

캐런은 듈란에게 물었다.

“…왜 넌 여기서 이러고 있어?”

그는 왜 여기에 있지? 캐런은 궁금했다. 그는 답하지 않았다. 베르딕에게 한 말과는 다르게 캐런에게 손 한번 대지 않았다. 그는 그저, 묻는다. 듈란이 문을 보며 캐런에게 답했다.

“시, 시간을 재려고.”

“…무슨 시간.”

캐런은 듈란에게 물었다.

듈란이 캐런에게 답했다.

“네가 죽어야 할 시간.”

“개 같은 년놈들.”

베르딕은 이를 갈았다. 누가 총을 겨누고 있는지는 뻔했다. 레이몬드 세이어테스, 그 빌어먹을 개자식. 국왕이 사복을 입은 군인들을 내려주었으니 망정이지, 자신의 개인 사병들이었다면 전부 다 사살당했을 것이다.

“확실히 처리하라는 분부가 있으셨습니다.”

물론이지. 그래야지. 아무리 죽음을 눈앞에 둔 늙은 왕이라도 그 정도의 영향력은 얼마든지 있지. 베르딕은 애국심이라고는 없는 이방 상인이었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으로 처절히 통감했다. 빼앗긴 자는 결코 편히 죽을 수 없다.

“지금 상황이 어떨 것 같소?”

베르딕이 묻자 군인 하나가 짧게 대답했다. 불만에 찬 목소리였다.

“베르딕 에반스 씨, 처음부터 그 여자의 목을 베서 폐하에게 보내드렸어야 합니다.”

“…별로 좋지 않다는 이야기군.”

베르딕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든 자신에게 책임을 넘기려는 군인을 한심하게 쳐다보며 마부에게 소리 질렀다.

“이셀라를 탈출시켜! 난 마무리하고 간다!”

이셀라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뛰어나왔다. 베르딕은 이셀라의 팔뚝을 잡았다.

“상황이 좋지 않다. 그 계집의 머리는 나중에 구경시켜 주마.”

“아, 아버지.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에요?”

“가라. 레이몬드 그 개자식이 지금 온 모양이다.”

그는 자신의 딸을 사랑했어야 했다. 그는 빚을 갚아야 했다. 베르딕은 이를 갈았다.

“출발시켜!”

베르딕은 이셀라를 마차에 밀어 넣었다. 이셀라가 베르딕에게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도 함께 도망가세요.”

이셀라가 베르딕의 소매를 잡았다. 하지만 베르딕은 딸의 손을 떼어냈다.

“그년의 목을 자를 때까지 난 가지 않는다.”

베르딕의 눈은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제대로 자지 못하고, 불똥이 눈에 튀었기 때문이다. 베르딕은 그 여자, 붉은 머리의 그 계집을 도륙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목을 자르기 전까지 결코 돌아가지 않겠다.

“아버지. 그냥 돌아가요. 너무 위험해요.”

“어서 마차를 출발시켜!”

베르딕은 마차 문을 거칠게 닫았다. 베르딕은 용서할 수 없었다. 레이몬드도, 캐런도, 듈란까지. 베르딕은 딸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점점 더 듈란에 관한 의구심 또한 솟구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아직도 왜 캐런의 목이 걸리지 않고 있지?”

저자는 왜 아직도 캐런을 죽이지 않았단 말인가? 레이몬드가 오고 있을 이 시점까지?

베르딕은 도끼를 들었다. 그리고 철문이 부서졌다.

“비켜! 내가 직접 처리한다!”

“위험합니다!”

“당신들이 한 게 뭐가 있나! 안에 있는 건 말라비틀어진 신관 하나와 계집 하나야! 입구나 제대로 막아!”

베르딕은 계단을 뛰어올랐다. 어두운 계단이었지만 그는 무섭지 않았다. 분노가 그를 지배했다. 그는 계단을 뛰어올랐다. 손에는 단단히 도끼를 쥐어들고서.

그 계집을 이 손으로 도륙하고야 말겠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탑을 휘몰아쳤다.

캐런은 듈란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다시 묻는다.

“지금, 뭐라고?”

“…….”

듈란은 탑 아래를 본다. 그리고 다시 말한다.

“…뛰, 뛰어내려. 지, 지금 뛰어내리지 않으면… 베르딕이 오, 올 거야.”

듈란의 말은 물론 아래쪽에 안전장치가 있다던가 따위의 말이 아니었다. 캐런은 아래를 본다. 죽으라는 말이다.

“레이몬드 경이, 왔는데.”

하지만 듈란은 다시 말한다. 재촉하듯이 말한다.

“캐, 캐런.”

“…….”

“이제 좀, 좀 있으면, 너, 너도 알게 될 거야. 이게… 네게 위안이, 될 거야.”

“…….”

“어서.”

캐런은 본다. 창틀을 잡는다. 듈란이 왜 지금 뛰어내리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왜 죽으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조금의 힌트라도 얻기 위해서라면 캐런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여긴… 그리고 오늘은.”

“네게는 이, 익숙한 일이잖아?”

듈란의 반문이 맞다. 캐런에게 죽음은 일상이다. 이것도 유난히 다른 것은 아니다. 중간이 달라도 결론이 다른 것은 아니다. 전에도 베르딕은 이렇게.

쾅.

“…왜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건데?”

너와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캐런은 묻고 싶었다. 듈란은 대답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그렇다. 그는 언제나 의뭉스럽다. 하지만 이제는 물을 시간도 없다.

“네가 뭔데?”

듈란이 캐런의 어깨를 재촉하듯 민다.

“내기에서 이겼으니까.”


 

“…뭐?”

“이건, 네, 네게… 도움이 될 거야.”

캐런은 아찔한 높이를 본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니다. 지금은 죽을 시간이야. 저기서 뛰어 내려서 죽어. 듈란은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다. 캐런이 머뭇거리자 듈란이 다시 말한다.

“주, 주, 죽는 것이 무, 무섭나?”

“…그런 것이 아니야.”

캐런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게 아니란 말이야…. 내가 죽을 날은 오늘이 아니야. 듈란, 오늘이 아니란 말이야.”

이번에는 모든 것이 너무나 빨리 일어났다. 캐런의 행동 탓일지, 듈란이 자신의 말대로 시간을 재고 있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캐런은 저 바닥아래에서, 저 아래에서 추락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죽지 못할 거야.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져본 적 있어.”

캐런은 끔찍한 고통을 기억한다. 온몸이 부서지는 고통을 기억한다. 비슷한 높이에서 떨어져 본 적이 있다. 그때도 그랬다. 캐런이 이제까지 안간힘을 써도 그날 전에는 죽지 못하는 것처럼,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사지가 뒤틀리고 온몸의 뼈가 부서져도 그날 전에는 죽지 못한다.

“오늘이 아니란 말이야.”

“…이, 이번에는 다를 거야.”

쾅!

가깝다. 캐런은 고개를 돌렸다. 그가 온다.

“당장 이 문을 열지 못해!”

쾅!

베르딕의 고함 소리가 들린다. 그가 문을 내려치고 있다. 캐런은 익숙한 그의 목소리에 강렬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번에는 여러 번 변수가 많았지만 마지막은 또 베르딕이었다. 이번에도. 이번에도.

“하지만….”

“캐런!”

그리고 또 다른 목소리가 들린다. 레이몬드의 목소리다. 어느새 그는 가까이 와 있다. 그가 창가로 상반신을 내밀고 있는 캐런에게 손짓한다. 얼굴이 새빨갛다.

“거기서 조금만, 있….”

그리고 자신의 몸을 다시 돌려 어디로인가 총을 겨눈다. 탕! 또 누군가가 죽는 소리가 들린다. 문밖에는 베르딕이 문을 부수고 있고, 레이몬드는 탑 아래서 그녀에게 달려오고 있다.

캐런은 레이몬드를 본다.

“하지만 레이몬드 경이 왔어.”

캐런은 중얼거렸다. 그가 왔다. 이번에는 비슷한 상황에서. 그는 언제나 늦었는데. 그가 왔다고.

“저 남자와 예의를 지키기로 약속했어.”

“…무슨 예의.”

바람에 듈란의 짧은 머리도 휘날린다. 캐런은 듈란에게 말했다.

“마지막까지 노력하기로. 그러니까, 살려고.”

캐런은 손가락으로 레이몬드를 가리킨다.

“저렇게.”

듈란은 캐런의 손끝에서 움직이고 있는 그녀의 기사를 본다.

“그, 그래… 저 남자.”

“봐 봐. 그렇지? 이 상황에서… 아직도…. 한 번도 제때 온 적 없었는데.”

캐런은 자신의 팔을 감쌌다. 바람이 불고, 옆에는 듈란이 있고, 문 밖에는 베르딕이 도끼로 문을 부수고 있는데도 기묘하게 평화가 감돌았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조금 더 기다려도 상관없잖아.”

캐런은 보았다. 레이몬드의 노력을 보았다. 목을 베이더라도 조금 더 기다리자. 캐런은 지금 당장 죽고 싶지 않았다. 저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죽으면 이제 또다시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간다.

기억은 중첩되지 않는다. 시간은 쌓이지 않는다. 저 레이몬드는 이 순간 말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같아도 기억은 없다. 의심하고, 동정하고, 그럼에도 다시 선택한 순간은 사라진다.

그것이 캐런은 싫었다.

하지만 듈란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듈란은 캐런의 뒤에서 말했다.

“도와주지. 넌 내기에서 이겼어.”

캐런은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세상이 뒤집혔다.

바람 소리가 강하게 스쳤다.

머리가 빙빙 돌았다. 그리고 아팠다.

캐런의 등을 듈란이 떠밀었다.

캐런이 그 순간 바로 떨어지지 않은 것은 말 그대로 우연이었다. 캐런의 옷자락이 창틀에 걸렸다. 캐런은 공중에 자신의 두 다리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너, 너 지금….”

캐런은 한 팔을 뻗어 간신히 창틀을 붙잡았다. 하지만 제대로 잡은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손가락이 걸쳐져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람이 강하게 불어 가벼운 캐런은 부는 대로 흔들리고 있었다. 캐런은 숨을 헐떡였다.

“지금, 뭐하는 거야?”

듈란이 창틀로 다가왔다. 꼭대기 창은 너무나 컸다. 듈란은 창으로 몸을 내밀고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캐런의 손목을 잡았다. 캐런은 듈란의 팔에 매달렸다.

“주, 죽는 게 무서워?”

“지금 뭐하는 거냐고!”

“어렸을 때부터 그랬지.”

캐런은 화를 냈다. 듈란이 싫다. 그는 무엇 하나 제대로 말하지도 않으면서 그녀를 죽이려고 든다. 이번 생에 그녀의 마지막은 레이몬드도 아니고 베르딕도 아니고 듈란이란 말인가?

듈란은 캐런의 손끝을 향해 걸어왔다. 듈란은 그녀를 내려다봤다.

“이, 이제는 무섭지 않을 거야.”

“뭐?”

쾅!

“물론… 지금… 네가 산다는 뜻은 아니야. 지, 지금 널 여기서 들어봤자, 끝은 또….”

쾅!

“넌 베르딕 씨에게 죽겠지.”

캐런은 숨이 막혔다. 지금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 그녀가 택할 수 있는 건 베르딕에게 죽느냐, 듈란에게 죽느냐의 차이일 뿐인데. 왜 그것을 선택하라고 하는가? 왜 그것이 대단한 것인 것처럼 말하는가?

“넌 내기에서 이겼어.”

“뭐?”

“저, 저 남자… 레이몬드 경이 왔으니까.”

듈란은 발치의 캐런이 아니라 레이몬드를 본다. 그는 캐런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병사들의 머리를 밟고 도약한다. 입구에서 화살이 쏘여지지만 맞을 리가 없다. 레이몬드가 탑에 가까워졌다. 그는 벽을 잡았다. 듈란과 눈을 마주쳤다. 듈란은 레이몬드를 보며 말했다.

“사실, 난… 누구든지… 별 상관없었을 지도 몰라. 지금은 알겠어.”

“있는 척, 말하지 마, 개자식아!”

캐런은 악을 썼다. 그리고 그녀는 이상한 것을 보았다.

“이, 이제 그만 떨어져.”

듈란이 웃었다. 자신의 입을 찢는 듯한 웃음이었다.

“너, 있잖아.”

캐런은 생각한다.

어쩌면.

어쩌면.

이제 와서.

캐런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캐런은 이제까지 듈란에게 그리 화가 나지 않았었다. 여기까지 와서 말을 안 하는 것에 답답함을 느껴 짜증을 부렸지만, 듈란은 좀 더 다른 감정을 품게 했다. 그것은 레이몬드와 같이 본인의 성품이나 태도에서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비밀을 공유하고 있다는 동지의식 같은 것이었다. 캐런을 믿지 않는 레이몬드와 달리 그는 믿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착각이 아니라는 보장이 있는가?

그냥, 그냥. 어쩌면 듈란은…. 그냥, 그냥.

“이번에는 다를 거야.”

그 말은 이번에 죽으면 정말로 죽는다는 뜻일까?

어쩌면 자신이 다시 사는 것조차 착각일까?

자신은 이번에 죽으면 그냥 정말로 죽는 것일까?

괜찮아. 그건 좋은 거잖아.

지금도?

이대로 그냥 죽으면… 정말로 괜찮은 걸까? 무섭지 않은 걸까? 이걸로 그냥 암흑이 찾아오고 죽으면 괜찮은 걸까? 무로 돌아가고 사고가 흩어지고 자신은 결국 아무것도 답을 얻지 못하고 흙과 재로 돌아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진심으로?

“이제 넌 괜찮을 거야.”

캐런의 손끝을 듈란이 밟았다.

“캐런!”

레이몬드는 이를 악물었다. 몸을 더 강하게 움직여야 한다. 레이몬드는 창가에 매달려 있는 캐런을 보고 높이를 가늠했다. 다리를 한번 구부리고, 도약했다. 벽에 닿았다.

탑의 벽은 수직이지만 그것은 레이몬드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레이몬드는 낡은 탑의 사이사이의 틈을 이용해 뛰어 올랐다. 벽은 그에게 평지나 마찬가지다. 화살 하나가 그의 귀를 스쳤다.

잡을 수 있어, 잡을 수 있어! 레이몬드는 달렸다. 벽을 타고 뛰었다. 벽은 수직에 가까웠지만 그것은 그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캐런에게 손을 뻗는다.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그가 붙잡은 것은 허공이었다.

캐런은 밑으로, 밑으로. 너무나 가볍게.

그리고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가장 끔찍한 일은 그 뒤에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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