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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 His story I (19/31)

05.2. His story I


 

하이어 영주, 에드워드 데일 하이어는 로맨티스트였다.

그리고 로맨티스트라는 말 외에는 딱히 칭할 말이 없는 남자였다.

사업에는 재간이 없어 번번이 돈을 날리기가 일쑤였으며, 소싯적 얼굴은 미남이었지만 수줍음이 많아 그 얼굴을 알리지도 못했다. 사교 시즌이 되어도 수도에 올라오지 않았으며 늘 자신의 영지에서 친척들과만 교류하는 남자였다. 그에게 유일하게 특이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죽은 아내 캐서린이었다.

캐서린은 특출 나게 예뻤다.

단지 예쁘기만 했다면 조용히 묻혔을 것이다. 그녀가 유명한 것은 그녀가 대공의 외손녀, 백작의 딸이었다는 것과 수많은 구혼자들을 제치고 하이어 영주와 결혼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 수많은 남자들이 캐서린의 장신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모름지기 보석이란 보석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선물한 사람이 누구인지가 중요한 법이다. 저것은 왕족이, 또 저것은 공작이. 저것은 이국의 술탄이.

그녀의 장신구 중에서는 귀즈 왕세자가 준 것이 으뜸이라 할 것이다. 이 나라의 차기 왕. 유일한 후계자. 캐서린의 연인이 그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궁금한 것은 그가 그녀에게 청혼을 하느냐, 아니면 정부로 삼느냐의 문제였다.

몇몇 사람들은 당연히 그녀가 후일 왕세자비, 나아가 왕비가 되지 않겠느냐고 했지만 나이 있는 사람들은 조만간 파혼을 하거나, 정부의 자리를 받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정부겠지.”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러시겠어? 아주 홀딱 빠지셨던데.”

백작의 딸과 왕세자. 그녀는 대공의 외손녀였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백작이었다. 부친의 계급을 따라가는 나라의 제도상, 그녀는 여느 백작보다는 고귀했지만 왕족과 결혼할 수는 없었다.

“그분을 몰라서 하는 소리야. 어디 그분이 손해 보는 짓을 하는 거 봤어?”

그리고 그들의 생각대로 귀즈 왕세자는 캐서린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왕족과 결혼했다.

하지만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이후 캐서린이 하이어 영주를 선택했고 평생 그와 살았다는 것이다. 자신의 어머니보다도 훨씬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왕궁과 대귀족들의 연인이 아닌 시골 영주의 아내 자리를 선택한 그녀를 누가 이해할까.

하이어 영주조차도 아내의 선택을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자신은 재산이 없다. 작위도 없다.

“사랑이에요.”

그것밖에 없다.

그 애매하고도 불확실한 감정. 그러나 그것조차도 확신할 수 없다.

영주는 안다. 캐서린은 분명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이에요.”

아닌 것을 안다.

캐서린은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언젠가 그가 했던 청혼은 분명 수많은 구혼자 중의 하나가 건넨, 스쳐 지나가는 일에 불과했다.

어느 여름날 그는 캐서린에게 청혼했다.

항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캐서린은 그날 아무도 없이 혼자 앉아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의 그는 캐서린과 단둘이 있다는 것이 마냥 신기했다. 그래서 옆으로 갔다.

“날씨가 좋군요.”

“밤에는 보통 그 인사를 하지 않아요, 하이어 씨.”

“좋은 밤이군요.”

“네. 좋은 밤이네요, 하이어 씨.”

캐서린은 웃으면서 그에게 손을 내밀어 입맞춤을 허락했다.

“연회에서 일찍 나오셨네요.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전….”

그녀가 내 이름을 안다. 그것이 하이어에게는 기적처럼 느껴졌다. 자신을 알고 있다. 분명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바람이 선선했다. 그리고 꽃향기가 강하게 났다. 캐서린이 눈을 깜빡였다. 그 눈이 하이어가 아닌 다른 곳으로 옮겨 가려 하자, 그것을 막으려고 무슨 말이든지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했다.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네?”

그리고 하이어는 스스로 놀랐다. 자신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그리고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놀림당하거나 화를 낸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의 이름을 아는 것만 해도 신기한 일이었다.

그와 그녀는 접점이 전혀 없었다. 그녀에게는 수많은 추종자가 있었고, 자신은 그 추종자도 되지 못해 저 멀리서 얼굴을 구경하는 그저 지나가는 사람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지나가던 사람이 갑자기 고백했으니 그녀가 얼마나 황당할까.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얼굴이 화끈거렸다. 캐서린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리자, 강물에 뛰어들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하이어 씨에게는 다른 좋은 분이 있을 거예요.”

부드러운 거절이었다.

캐서린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녀에게 너무나 익숙한 일이었으니까. 살포시 미소 짓고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하이어는 달아오른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하이어는 한적한 곳으로 가,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하면서 기둥에 머리를 박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곁에 친구가 왔다.

“너 미쳤냐?”

“봤나?”

“봤지. 왕궁 정원이다. 자네 집 뒷마당이 아니라. 지금은 사교 시즌이니 사람이 가득 차 있다구. 제정신이야?”

“더 이상 말하지 말게. 나도 아니까.”

“그래, 아니까 다행이다.”

사람이 없는 듯했던 정원이지만, 곳곳에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네가 넘볼 여자가 아니야.”

“…알아.”

하이어 스스로도 그것을 알았다.

자신이 그리 잘난 것이 없다는 것을 안다. 캐서린의 마음에 들 만한 그 어떤 장점도 가지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는 캐서린에게 청혼한 직후 거절의 말을 듣고도 좌절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냥 당연한 것이었다. 스스로가 부끄러웠지만, 그와 비슷한 사람이 흔하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가끔 캐서린의 미모에 홀려 자신 같이 고백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잊자.

고백 한 번 해 본 것만으로도 그는 그의 젊은 시절을 추억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청혼해 본 여자가 캐서린이었다는 것만 해도 용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무용담으로도 쓸 수 있겠지. 하이어는 그냥 그러고 잊었다. 아니, 잊지는 못했어도 최소한 잊으려고 노력했다.

“하이어 씨.”

그래서 오히려 그는 그녀가 그에게 다시 왔을 때,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당신과 결혼하겠어요.”

하지만 하이어 영주는 그녀의 승낙에 기뻐할 수 없었다. 그 말을 하는 캐서린의 얼굴에는 기쁨이라고는 한 톨도 없었으니까. 캐서린은 그 말만 하고는 이내 돌아가 버렸다. 그에게는 의문만이 남았다.

왜?

“귀즈 왕세자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밤, 그에게 도착한 전갈을 받고 납득했다.

아, 그래서.

귀즈 왕세자는 캐서린을 정부로 삼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를 적당한 연막으로 삼고자 했다. 선대 왕들이 그러하였듯이, 다른 나라의 왕들이 그러하듯이.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그렇다고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왕명은 왕명.

귀즈 왕세자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그의 인생은 그럭저럭 평온하게 흘러갈 것이다. 여느 왕족 정부의 대외용 남편들이 그러하듯이 그 대가로 작위가 내려질 것이고 영지는 번성할 것이다.

그리고 캐서린과 친구라도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괜찮지 않겠는가.

자신은 괜찮은 친구를 갖게 될 것이다.

하이어는 그것으로 납득했다.

“…난 당신과 결혼한다고 했어요.”

“예?”

“당신은 아내를 공유하는 남자인가요?”

캐서린의 눈은 파랗게 타오르고 있었다.

하이어의 납득은 중요하지 않았다.

캐서린의 선택이 중요했다.

“필요 없어요.”

캐서린은 왕세자의 부름이 적힌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 불에 던져 버렸다. 하이어가 당황한 얼굴로 그 종이에 손을 뻗었지만 순식간에 재로 변해 버렸다.

“날 사랑한다고 해요. 그럼 당신을 사랑하겠어요.”

캐서린은 선택했다.

하이어의 차례였다.

하이어는 자신에게 다시 손을 내미는 캐서린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손을 잡으면 분명 귀즈 왕세자는 보복을 할 것이다.

하이어는 자신이 재미없는 남자라는 것을 안다. 그는 사람이 많은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돈놀이에도 약했고, 다른 그 무엇에도 흥미를 가지기가 어려웠다. 그는 그냥 방구석에서 조용히 숨을 쉬다가 자신처럼 결혼이 필요한, 비슷한 집안의 여자와 가정을 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상대는 좀 더 억세서 자신을 지도해 줄 여자일 수도 있고, 아니면 더 심약해서 비슷하게 동지애를 나눌 여자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상상해 봤다. 그러나 캐서린 같은 여자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분명 이것은 위험하다.

“날 사랑하나요?”

하이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모험을 해 보고 싶어졌다.

정원에서 청혼했을 때처럼.

캐서린은 분명 죽기 전까지 현숙한 아내였다. 딸을 사랑하고 남편을 위하며 영지를 돌보다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녀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뱉은 이름은 그의 이름이 아니었다.

자신은 분명 캐서린을 사랑한다.

비록 그녀가 마지막까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을지라도.

어떤 사람은 캐런을 위해서라며 그에게 재혼을 권했다. 남자에게 우선적으로 작위가 넘어가는 상속법 때문에 남자 형제가 없는 것은 캐런에게 좋지 않았다. 영주가 죽으면 작위는 캐런이 아니라 그 다음으로 가까운 친척인 듈란에게 넘어가게 된다.

듈란이 캐런과 결혼하지 않으면 캐런은 얼마 없는 재산만 가지고 결혼해야 한다. 친형제가 있다면 자신의 누이에게 집이라도 주겠지만, 친척 누이라면 대부분 그냥 쫓아내기 마련이었다.

듈란과 캐런을 약혼시켰지만 누가 봐도 그들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계속 재혼을 권했다. 둘째를 낳아 그의 딸에게 안정적인 미래를 주라고.

하지만 영주는 재혼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래서 그를 로맨티스트라고 했다.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해서 그렇다고. 실로 그랬다. 그것은 다시 말해 딸의 미래보다 자신의 사랑이 더욱 소중하다는 의미였다. 그의 사랑은 그에게 영원하고 유일한 영광이었으니까. 그것이 이미 죽은 사랑일지라도.

그는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재혼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딸에게 약을 먹이고, 세뇌를 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딸의 행복을 빈 것은 진심이었다.

그저 아내보다, 자신의 사랑보다 중하지 않았을 뿐이다.

“캐런 아가씨가 선물과 편지를 같이 보내셨습니다.”

헬렌이 보낸 편지에는 캐런의 근황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녀와 같이 있는 이셀라 에반스의 이야기도 있었다.

그녀의 가출을 도우면서 수도에 기거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자연스레 사업은 한없이 미뤄졌고, 자신의 아버지와 연락하지 않으려는 이셀라를 대신해 캐런이 그 사이에 껴서 갖가지 일을 처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아가씨께서 선물도 같이 보내셨네요. 보시겠어요?”

“그래…. 뭐지, 이건?”

“오르골이네요.”

소녀들이나 좋아할 법한 물건이었다.

중년의 영주에게 어울리는 물건은 아니었지만, 영주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한 쌍의 남녀가 춤을 추고 있는 오르골. 태엽을 감자 멜로디와 함께 인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쌍의 연인은 계속해서 춤을 추고 있었다.

그 인형 남녀의 머리색은 자신과 아내를 닮았다. 영주는 그것을 알고 계속해서 오르골을 되감으며 내려다보았다.

하이어는 자신의 딸에 대해 잘 모른다. 스스로 그것을 인정한다.

몇 번이고 죽고 반복되는 삶을 살았다고 하는 캐서린을 믿으려고 하고, 그의 딸을 믿으려고 하지만, 아직도 한 구석에서는 불안함이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사랑하는 남자가 있어요. 조만간 보여 드릴게요.

손끝으로 딸의 글씨를 만져 본다.

이제야 그의 일이 끝난 느낌이 들었다.

이제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사랑에 취해 있어도 되는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상실감에 한숨짓고, 영지를 돌보고, 의무적으로 신전에 참석하면서 죽은 사람의 묘지에 방문하는 일상을 이어 나간다. 그것은 분명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일상일 것이다.

그가 할 일은 다했으니.

“다행이지 않은가.”

“그, 그렇습니다. 영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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