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 His story II
속죄를 위한 재의 3일.
번영을 위한 물의 4일.
첫째 날은 속죄제.
둘째 날은 속건제.
셋째 날은 면죄제.
무의식으로 지은 죄, 연약함으로 지은 죄, 무지로 지은 죄는 속죄 제사를 드리며 소제를 하되, 수입과 지위에 따라 제사의 규모를 달리 한다.
남의 것을 탐한 자, 성물을 더럽힌 자, 거짓 맹세를 한 자는 죄를 고하고 손해를 열 배로 갚으며, 재의 날에 피가 있는 제사를 드려야 한다. 이는 성법에 따른 것으로 각 정부의 법률과는 별도로 한다.
축제에는 피가 흐른다.
이 나라뿐 아니라 백색 산맥 너머의 나라들도 공통점이 있다. 산 하나만이 가로지르고 있을 뿐, 끝없는 바다나 사막이 모든 것을 차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종과 언어와 종교는 흡사할 수밖에 없다.
종교는 분파에 따라 갈라졌고 서로를 이단자라고 손가락질하나 그들의 신의 이름은 같으며 제사의 방법 또한 매우 흡사했다.
이 세계 종교의 공통점.
어느 나라나 제사를 많이 드렸다.
피가 떨어지는 제사였다.
암양과 암소와 암말. 그것들은 제사가 끝나고 사람들의 양식이 된다. 제사는 축제가 되었지만, 본질은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가축들이 죽어 가며 흘리는 피. 특히 왕이 새로이 등극하거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는 등의 큰일이 있으면 피가 강을 만들면서 흘러내렸다.
천 년 전에는 그 피를 사람이 흘렸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였다. 너무 오래 되어서 처음의 원전은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고대의 사람들은 죄를 지었다.
하나의 언어, 하나의 문화, 하나의 신 아래에서 사람들은 급속도로 발전했고 타락해 갔다. 서로를 노예로 만들었으며 식량으로 삼기 시작했고 증오했다.
인류의 죄가 너무나 깊어서 분노한 신이 세상을 멸망시키려고 했다.
지진이 일어나고 해일이 덮치고 병이 창궐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미쳐 갔으며 끝없는 가뭄이 이어지고 선지자들은 인류의 끝을 예언했다.
“이제 신께서는 인간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방법을 찾았다. 그들의 신이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 않기를 바라며, 신을 다시 돌아보게 하기 위해 마법사들과 신관들을 찾아 울부짖었다. 그리고 그들은 잊었던 제사를 다시 기리며 신에게 빌기 시작했다. 그들이 가장 아끼던 물건을 불사르기도 했지만 그것으로는 만족하지 않으셨다.
“신께서 가장 만족하실 만한 것을 찾아 바쳐라.”
사람들은 그것이 뭘까 고민했고, 결국 의인을 찾아내서 신에게 바치기 시작했다.
“의인을 여기 바치나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하지만 신은 의인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신의 기준에 맞는 의인은 너무나 부족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을 잡아 바치기 시작했다.
“여기 죄 없는 아이들을 바치나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하지만 신은 어린아이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쌓은 것도 없기에 너무나 부족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절망했다. 재물도, 의인도, 아이도 신에게는 부족했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서로를 죽이느라 사람의 수는 점점 더 줄기 시작했다.
“그럼 우리를 이대로 멸망시키려 하시나이까.”
사람들은 모여서 백일 간 밤낮으로 기도하며 울부짖었다. 사람들의 눈물과 통곡이 이어지자 신께서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여자 하나를 내리셨다.
“여기에 죄가 없으되 무지한 자가 아닌 여자를 내리노라.”
그리고 멸망은 멈췄다.
끼이이익!
토끼도 비명을 지른다. 얌전한 것 같은 동물들도 죽음의 공포 앞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소리를 낸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면 듈란은 몇 번이고 몸을 멈춰야 했다. 가끔은 신경이 거슬려서 잠까지 설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었다. 죽인 동물의 수를 헤아릴 수 없게 되자 그것도 익숙해졌다. 어차피 익숙해져야만 하는 일이었다. 이 행위는 앞으로 평생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도축의 시작은 제압이다. 망치로 머리를 쳐서 기절시킨다. 거기서 죽는 동물들도 있지만 생명이란 생각보다 질겨 기절만 하는 것이 보통이다.
양이나 소 정도의 규모가 되면 쳐서 기절시키는 것도 제법 힘이 든다. 듈란은 토끼와 어린 양까지는 성공했지만 소는 아직도 성공하지 못했다. 솜씨 좋게 죽이기 위해서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
잠잠해졌다. 그러면 그 후에 목에서 피를 뺀다. 처음 시작할 때는 뭘 몰라서 목을 자르려고 했었다. 그러자 피가 사방으로 튀고 지저분해졌다. 단칼에 목을 자르는 것은 사형수들에게나 하는 것이었다.
피를 빼내자 힘이 빠지는지 경련이 잦아들었다. 약을 사용하면 더 쉽겠지만 제사용 동물들에게 약을 쓰는 것은 금기였다. 또한 이 모든 과정은 도축업자가 아닌 신관이 해야 한다.
“젠장.”
듈란은 신음을 삼켰다. 껍질을 벗기는 과정에서 토끼가 눈을 뜬 것 같았다.
다시 쾅. 아직 움직인다면 다시 한번 더 쾅.
듈란은 망치 아래에서 경련하는 고기를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확실히 죽었다. 하지만 너무 내려쳤는지 꼴이 끔찍했다. 듈란은 얼굴을 찌푸리고 다음 작업을 하기 위해 손에 든 것을 면적이 좁고 날카로운 칼로 바꾸었다.
원래대로라면 여기서 피를 빼내는 것까지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이지만, 듈란은 그 이후의 모든 작업도 직접 했다.
이대로 고기를 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사체를 좀 더 효율적으로 쓰고 싶었다. 제사를 지낼 때는 피만 빼낸 짐승을 내장과 털째 태우지만, 연습용에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건 고기를 낭비하는 것이다.
피를 빼낸 후에 껍질을 벗긴다. 태우지 않고 벗기는 것이기에 좀 더 깔끔하게 벗길 수 있었다. 이제 내장을 빼내고 버린다. 내장은 삶아서 사냥개들의 먹이로 준다. 남은 고기는 세로로 둘로 자른 뒤에 물로 세척한다.
그리고 그 다음은 요리의 영역이다.
듈란은 향신료와 약을 고기와 함께 버무린 다음에야 얼굴에 튄 피를 씻어 낼 수 있었다.
처음에는 구역질을 했었다.
피비린내와 징그러운 내장의 형태는 보는 것만으로도 구토를 유발했고, 손은 덜덜 떨렸다. 눈앞의 동물들은 계속 움직이거나 비명을 지르며 아직 살아 있음을, 곧 찾아올 죽음에 대한 거부를 온몸으로 나타냈다.
“안 먹어.”
캐런에게 내민 고기는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게 갖가지 향신료들로 싸여 있었다. 각고의 노력이 들어간 식사를 손으로 밀어 버리는 것을 보며 듈란은 얼굴을 찡그렸다.
“…동, 동물들에게 연민을 가지지그래. 그건 널 위해 죽었다고.”
“너나 먹던가. 아, 약에 절여서 못 먹겠지?”
“음.”
약의 맛을 감추기 위해 좀 더 노력해야겠다.
캐런은 요리를 내려다보다가 듈란을 노려보았다.
“네가 가지고 오는 요리를 먹고 난 뒤에는 항상 머리가 멍해져.”
“저런.”
그의 어린 신은 사제가 바치는 제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듈란은 나름대로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식사를 다시 들었다. 지금 두고 나가면 캐런은 저 식사를 쓰레기통에 집어던져 버릴 것이다. 듈란은 결국 제물을 포기했다. 신이 정성을 받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 그럼 굶으면 되겠군.”
“약이 들지 않은 식사를 할 거야.”
“…글쎄.”
“네가 주는 건 안 먹는다고! 아무것도 넣지 않은 걸 가져와!”
하지만 그것도 넌 곧 잊게 될 거야.
듈란은 악을 쓰는 캐런을 내려다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자신이 식사를 거부했다는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다음 날의 캐런은, 전날 자신이 거부한 식사를 아무 말 없이 입에 밀어 넣었다.
캐런이 악을 쓰는 시간도 길지 않았다. 점점 기억을 하는 시간은 줄어들고 있었고, 낸시가 속삭이는 대로 캐런은 점점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서 거리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영주를 볼 때 낯설어하면서 예의를 차렸고, 하녀들의 시중도 거북스럽게 여기기 시작했다.
조금 있으면 전부 잊겠지.
“아가씨는 자신이 더 좋은 세상에서 왔다고 생각해요.”
낸시는 듈란에게 말했다.
“낙원 같은 곳. 사람들은 서로 도우면서 살아가고, 가족들은 완벽하고, 친구도 많죠. 그곳에서는 직위나 신분은 중요하지 않게 되고 개인의 역량에 따라 살게 되며 아무리 못난 사람도 굶지 않아요. 됐나요?”
신이 인간의 세상에 내려온 것처럼.
듈란은 낸시가 그리 믿음직스럽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캐런은 세상과 자신을 점점 구분 지을 것이고 단 하나의 가치만을 위해서 맹목적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것이 캐서린이 원한 것이었다.
보다 완벽한 사랑을 찾는 것.
캐런은 다시 산다.
캐서린처럼.
듈란이 울고 있는 캐서린에게 협조하기로 맹세한 뒤로, 캐서린은 여러 가지를 그에게 알려 주었다. 역사나 신학 따위부터 요리 같은 것까지. 캐서린은 몇 년을 살았는지 말하지 않았지만, 분명 그녀의 외견보다는 훨씬 오래 산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 또한 그러했다. 그녀의 외할머니 또한. 그녀들은 남들보다 월등히 많은 시간을 누렸기 때문에 갖가지 지식이 풍부했고, 자식들과도 그러한 지식을 공유했다. 캐서린이 말했던 내용은 캐서린의 역사와 관련된 이야기였고, 제물이 된 성녀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역사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 제물이 직접 말하는 신학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기억은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캐런의 기억은 전부 지워 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세상에서 유리될 것이다.
그것을 원한다. 캐서린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징그러워했다.
“이런 이야기는 이제 필요 없어. 캐런은 가축이 아니라, 사랑을 찾는 거야. 자식을 낳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 사랑만을 선택하는 거야.”
듈란은 캐서린을 보며 자신이 죽인 동물들을 생각했다. 암소의 큰 눈을 닮았다. 닮은 것은 눈만이 아니다. 결국 그들의 본질도 소나 양과 다르지 않았다. 신이 인류에게 내려 준 흠 없는 제물들이다. 그들의 성정 같은 것은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영속성이다. 거듭된 죽음이다.
그것이 싫어.
캐서린은 거듭되는 운명이 싫었다. 신은 반복되는 죽음의 굴레를 그녀들에게 씌웠다. 그 굴레 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다음 대의 제물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것뿐이었다.
난 가축이 아니야.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자식을 낳지 않으면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캐서린은 그 굴레를 완전하게 벗어 던질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최소한 캐런이 자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식을 낳는 것만은 막고 싶었다. 온전히 사랑하기를 원했다.
똑, 똑.
“…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듈란이 대답하자 예상했던 사람이 나타났다. 캐런의 모친, 캐서린이었다.
“열심이구나. 너무 힘들지는 않니?”
“…무, 무슨 일이십니까?”
영주의 부인인 캐서린이 들어오기에는 지나치게 피비린내 나는 공간이었다. 듈란은 칼을 내려놓고 장갑을 벗은 후에 손을 씻으려고 일어났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려 하자 캐서린이 막아섰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하, 하지만 냄새가….”
“남들에게 들리면 좀 곤란한 이야기거든.”
듈란은 문을 다시 닫았다. 듈란이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내가 곧 죽을 예정이란다.”
내일은 산책을 나갈까 하는 듯한 가벼운 목소리였다. 듈란은 당황했지만 캐서린이 계속 말을 늘어놓자 표현할 여유조차 없어졌다.
“어지간한 건 유언장으로 적어둘 텐데, 캐런에 관한 것은 적기가 좀 그렇잖니? 그래서 좀 직접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그, 그렇겠지요.”
“네가 더 요리는 할 필요 없어. 너무 솜씨를 부리니까 캐런이 오히려 의심하는구나. 어차피 너도 곧 수도원으로 떠날 테니 약의 조합만 낸시에게 알려 주렴.”
“…시, 시, 식사가 더 맛이 없겠군요.”
“어쩔 수 없지. 모든 것을 잊었을 때도 네 약이 든 식사를 거부할 때가 있어.”
“기, 기억을… 못 하는데도.”
“기억을 못 해도 반복해서 결심한 건… 바꾸기가 어렵지.”
캐서린이 자신의 시선을 가린 머리카락을 흔들어서 뒤로 넘겼다. 캐런의 몇 년 후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녀의 검붉은 속눈썹 너머로 인상적인 눈이 듈란을 바라본다. 그 눈은 가끔 여름날의 황혼에서나 볼 법한 그런 색이었다. 그는 그 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캐서린은 입을 다물다가 다시 그에게 말했다.
“언제 떠나니?”
“며, 며칠 뒤에 떠납니다.”
“…그래. 그렇구나.”
다시금 침묵이 방안을 맴돌았다. 하지만 그 침묵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닌, 말을 할 준비가 필요한 침묵이었다.
듈란은 그녀의 다른 할 말을 기다렸다. 갑자기 피비린내가 역하게 느껴졌다.
듈란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캐서린은 건강했다. 몸에 문제는 없었다. 그녀가 왜 죽는단 말인가?
“모, 모, 몸에 이상이라도 있으십니까?”
듈란은 발그레한 그녀의 뺨을 보고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병색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캐서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앞으로 생길 거야.”
“병, 병과는 관련이 없… 으신 거군요.”
“그래.”
확언에 가까운 말이었다. 듈란은 그녀가 처한 특수한 상황을 안다. 그녀는 반복해서 죽고 살아났다. 그리고 듈란은 캐서린의 모친과 그 선대 또한 그리 오래 살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기억했다. 캐서린이 그에 대해 더 말하지 않아서 묻지는 않았지만, 전부 그리 오래 살지는 못했다.
누군가는 자살했고, 누구는 병에 걸려서, 누구는 전쟁에 휘말려서. 죽은 이유는 각각 달랐지만 장수한 사람은 없었다. 최소한 캐서린이 알거나 기록에 남은 선조들은 그러했다. 우연이 아니었던 것일까? 삶이 반복되는 기간 외에도 인생을 지배하는 것이 있단 말인가? 듈란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캐런과도 관련된 일입니까?”
“어느 정도는.”
“캐, 캐런도 그렇게 됩니까?”
듈란의 물음에 캐서린이 살짝 웃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어. 그건 아니야…. 피와는 상관없어.”
뒷부분을 말할 때는 약간 고통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캐서린은 말을 이었다.
“귀즈 왕세자 전하가 또 편지를 보내셨어. 나는 내 가족을 지켜야 해.”
“그렇다고 부, 부인께서 생을 마감하는 것이 좋은 방법 같지는 않습니다.”
“너는 그 분을 몰라. 내가 그 분을 알지. 내가 죽으면 귀즈 왕세자 전하는 더 이상 우리 가족에게 관심을 갖지 않을 거야. 그 분은 원래 그런 분이거든.”
캐서린은 그렇게 말했다. 권력자는 자신이 손에 넣지 못한 것에 집착한다. 귀즈 왕세자에게 있어서 그것은 캐서린이었다. 캐서린은 그에게서 도망쳤다고 생각했지만 결혼은 너무나 연약한 도피처였다.
듈란은 영주가 집사에게 고민을 토로하던 것을 들었다.
영지 세금이 예년보다 더 크게 부과됐다는 내용이었다. 갑작스러운 세금 인상에 돈이 부족했다. 돈을 빌려야 했다. 영주는 결국 고리대금업자로 소문난 베르딕 에반스 가문에게 돈을 빌려야 했다.
듈란이 다음 대의 영주로 지목받은 것은 그가 가까운 친척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전에 이미 다른 친척들이 전부 영지 상속을 거부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캐서린이 듈란에게 별도로 준 귀금속들은 그의 부모가 먹고살면서 그의 학비를 대기에는 충분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영지는 점점 값어치가 없어졌다. 빚덩어리 영지였다.
캐서린이 죽으면 귀즈 왕세자는 더 이상 하이어가의 영지에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캐서린은 그렇게 말했다.
“내가 죽으면 이제 내 이야기는 끝이야. 이제는 캐런이… 살겠지. 그걸로 됐어. 뭐, 정말 동화 같지 않니? 원래 주인공은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없는 경우가 많잖아. 부모는 퇴장하는 거야. 난 이걸로 끝.”
“…….”
“내가 없는 것이 캐런에게는 더 도움이 될 거야. 내가 만약에 마음이 약해져서 캐런에게 답을 말해 주면 어떡해? 그러니까 난 여기서 죽는 게 맞아.”
캐서린은 웃었다.
“캐런은 정말 자신의 인생을 살겠지. 최소한의 보호야 하이어가 해 줄 테고. 그 사람도… 부모니까.”
하지만 듈란은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뭔가 석연치 않은 감을 누를 수가 없었다. 캐서린이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죽겠다는 숭고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캐서린은 자신이 죽을 이유를 나열하면서 홀가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캐런을 걱정하는 표정이 아니라 즐거워 보였다. 캐서린은 계속 듈란을 보면서 말하는 중에도 중간 중간에 표정을 억누르는 것처럼 보였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으나 말 못하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더 솔직하게 하, 하실 말이 있으시다면.”
듈란은 성호를 긋고 캐서린을 바라보았다. 신의 사도로서 언급하지 않겠다는 표현이었다. 아직 정식 서품을 받지 못한 어린 사제였지만 성호를 긋는 손길은 능숙했다. 듈란은 신에게 맹세하고 캐서린에게 물었다.
“정말 그러십니까?”
정말로 당신은 캐런을 보호하기 위해 죽겠다고 하는 겁니까?
듈란은 캐서린을 올려다보았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캐서린은 한참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했다.
“사실은… 귀찮아.”
캐서린이 주먹을 쥐었다. 얼굴에는 피로감이 몰려왔다. 캐서린은 듈란을 보면서 진심을 토로했다.
“역시 더 살기가 귀찮아졌어. 이 정도면 충분해. 끝을 보는 것도 싫어. 캐런이 성공할지 안 할지 보는 것도 귀찮아. 왜 어머니가 자살했는지 알겠어. 딸을 위해 이 정도로 준비해 뒀으면 내가 할 일은 다 한 거야. 그렇지?”
난 이제 죽어도 괜찮겠지? 그녀의 눈이 듈란을 보면서 묻고 있었다. 그것은 진실을 원하는 눈이 아니었다. 오직 동의만을 원했다.
“신관으로서… 자살을 권, 권할 수는 없습니다.”
“네 도움 없이도 난 얼마든지 자살할 수 있어.”
“지,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재밌는 농담이야. 내가 이제까지 몇 번이나 죽었을 거라 생각하니?”
듈란은 잠시 침묵하고 대답했다.
“…예, 예의상 해 본 말이었습니다.”
“그래.”
캐서린이 웃었다.
“난 그래서 네가 좋단다.”
이미 캐서린은 며칠 만에 병색이 완연해졌다. 그녀는 모든 지식에 통달한 것은 아니나 자살에는 통달했다. 자살 방법에는 약을 이용한 것도 있었다. 캐서린은 스스로 약을 지어 먹었다. 듈란에게 진찰을 받는다고 했지만, 사실 그녀는 그를 만나는 시간에 진찰을 받는 대신 사약을 삼키고 있었다. 그가 없을 때는 홀로. 그녀의 주치의는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쩔쩔매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솔, 솔직히 말씀드려서…. 고통스럽게 가시는 것보다는, 편하게 가시는 것, 것이 더….”
“싫어.”
캐서린은 딱 잘라 말했다.
듈란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반복된 죽음에 지쳐서 자살을 하겠다는 것까지는 납득했다. 하지만 왜 고통스럽게 죽는 길을 택한단 말인가?
“듈란, 자해하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걸 아니?”
“…….”
“스스로 죽는 시간을 다루고 싶은 거야. 내 몸에 독을 넣으면서… 내 죽음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껴. 이건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거야. 나는 천천히 다가올 죽음을 맞이할 시간이 필요하고, 그이와 친구들도 나를 떠나보낼 시간이 필요해.”
“그, 그렇게 남을 생각하시면…. 더 사시는 것이.”
“거기까지는 귀찮고.”
캐서린이 피식 웃었다.
캐서린은 멀거니 듈란을 올려다보았다. 뺨은 홀쭉했고 눈 밑은 새까맣게 변해 원래의 미모는 자취를 감추었다. 저것은 전조일 뿐이다. 앞으로 저렇게 점점 쇠약해지다가 죽겠지. 이것은 자살이다.
거칠고 새된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우리는 뭘까?”
자식을 거듭해서 낳는 게 삶일까? 멈춰진 시간에서 계속해서 살다 보면 이상한 생각을 많이 하게 돼. 어머니도 그러셨고 할머니도 그러셨어. 우리는 신에게 바쳐진 가축이니까 그냥 이렇게 사는 거라고.
먼 옛날 신관들은 우리 보고 한없는 축복을 받은 거라고 했대. 미래를 알고 원한다면 불사에 가까운 영생을 누릴 수 있으니까. 죽음으로 사람들의 죄를 대속했으니 우리에게는 천국이 약속되어 있을 거라고 했대.
반복되는 삶을 살면서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없어. 아무도 없어. 죽었으니까 전부 해결된 걸까? 시간이 중첩되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없는 일일까?
다른 여자들에 비하면 분명 행운일지도 몰라. 여자들은 전부 결혼에 목숨 걸고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살아야 하니까. 직업을 가지기도 힘들고 재산은 거의 상속받지 못하고 이름조차 남지 않아.
하지만 우리는 자식을 낳고, 죽고, 그렇게 인생이 끝나는 그런 삶을 사는 걸 축복이라고 여겨야 할까? 어차피 누구든 인생의 목표는 자식이 될 수밖에 없는데…. 그게… 이상하게 비참해.
왕족이라면 나라를 구하는 것을 숙원으로 삼을 수도 있겠지.
남자라면 직업을 목표로 삼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자식을 가지고, 그래서 죽음에 도달하는 걸 목표로 삼을 수밖에 없는 우리는, 사랑 말고는 그 가치를 찾을 수가 없어.
그렇다면 최소한 사랑을 하다 죽고 싶었어.
그리고 난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했어.
하지만 내 딸은 성공할 거야.
…그러니까 도와줘. 내 선택을, 캐런이 저주하지 않을 수 있도록…. 정말로…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남자를 잡으면…. 그때 임신할 수 있도록.
장례식은 간소하게 치러졌다.
한때 왕족과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캐서린답지 않은 쓸쓸한 장례식이었다. 캐서린이 병에 걸려 죽었기 때문에 최소한의 사람들만 참석했다. 그 시기에 전국적으로 전염병이 돌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마을 밖으로 나서는 것을 두려워했다.
듈란은 정식 서품을 아직 받지 못했기 때문에 보조 사제로서 장례식을 지켜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추도문을 읽을 때 ‘천국으로 갈 것이다’라는 문장에는 약간 의문을 품었다.
그녀는 과연 천국에 갈 것인가?
그날, 듈란은 자신의 신을 위해 이단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아가씨는 울다가 잠드셨어요.”
“기억은?”
“이제 거의 못해요…. 하지만 캐서린 마님이 돌아가신 지 몇 년 되었다는 걸 이야기했는데 갑자기 쓰러지셨어요.”
얼마 만에 보는 거지. 가능한 마주치지 않으려 했건만. 영주만 만나고 빠르게 돌아가려 했는데 캐런과 마주하게 되었다. 어느새 캐런은 사춘기를 맞아서 키가 크고 숙녀 티가 났다. 기억도 점점 더 자주 잊어버린다고 한다.
계획은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캐런이 기억을 찾는 일은 점점 더 드물어졌고, 익숙한 사람들을 낯설어 하는 일도 잦아졌다. 낸시는 캐런이 점점 자신이 동화 속 공주님이 된 것처럼 행동한다고 했다. 조금 더 온화하고, 조금 더 상냥하게.
“웃기는군.”
어렸을 적 캐런은 빈말로도 성격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는데. 듈란은 악을 쓰던 캐런을 기억했다. 그리고 듈란을 가두고 개떼들을 풀어 놓았던 캐런을 기억했다. 듈란은 문을 열고 들어가 잠든 캐런을 내려다보았다. 눈가는 부어 있었고, 가슴이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하며 깊게 잠들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이제 ‘여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제 조금 더 자라면 누구나 돌아볼 정도로 눈부신 미녀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만날 수많은 사람 속에서 괜찮은 남자를 만나게 된다면…. 죽음에 이르겠지.
“…캐런.”
“…….”
“캐런… 하이어.”
이름을 불렀지만 깨지 않는다. 그것에 안도감을 느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내키지가 않았다. 왜 죽어야 한단 말인가? 왜 시간은 흘러야만 한단 말인가? 자신의 손 아래에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캐런은 영원히 살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캐서린은 그것을 질 나쁜 농담처럼 흘려버렸지만 듈란은 그것이 진정한 축복이라 생각했다. 이 아름다움은 영원히 박제될 것이다.
캐서린의 얼굴은 참담했다.
삶에 지쳐 죽어가는 자의 얼굴은 끔찍하다. 캐런이 단번에 남자를 찾아서 임신에 성공해 자식을 낳고 죽어 가는 평범한 사람의 삶을 사는 것은 더 끔찍하다.
여기에 영원이 있다. 캐서린이 그에게 흘리던 그 수많은 지식들과 역사는 아득하고 막대했다.
왜 영원을 포기해야 하는가?
왜 사람이 죽어야만 하는가?
캐서린은 죽었다.
하지만 캐런은 죽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듈란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기도를 올렸다. 자신이 행할 일에 대해서.
그리고 그는 이단자가 됐음을 스스로 고백했다.
그의 신은 자신의 앞에서 잠들어 있는 이 소녀였다.
“신관님, 듈란 신관님.”
누군가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듈란은 자신이 앉은 채로 잤다는 것을 알았다. 듈란은 눈을 뜨고 들어오는 남자를 보았다. 저택에서 일하는 보웬이었다.
“죄송합니다. 주무시는 중이셨으면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아니…. 괜찮아.”
보웬은 과거에 도축업자였다. 짐승뿐 아니라 가끔 사람도 도축했다는 것이 조금 특별할 뿐이다. 그의 어머니는 아직도 듈란의 약을 먹어야만 목숨을 연명할 수 있는 처지였다. 보웬은 최대한 태도를 고치려고 했지만, 조용히 듈란의 심부름을 하는 중에도 때때로 거친 언사를 사용했다. 그의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은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
듈란은 일어나 보웬을 바라보았다.
“캐런 아가씨께서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지금 수도에서 이셀라 에반스 양과 같이 있다는 소식입니다…. 영주님께서 신관님과 같이 차를 하시려고 하는데, 같이 하시겠습니까?”
“…그래.”
“예, 알겠습니다. 그러면 곧 가신다고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오시기 전에, 옷은 갈아입고 오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새 옷은 옷장 안에 있습니다.”
“알, 알겠다.”
듈란은 자신의 거칠고 메마른 뺨을 문지르면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영지에 도착한 지 벌써 이틀이 지났건만 아직도 정신이 없다. 듈란은 눈을 뜨고 거울을 본다. 메마르고 구부정한 청년 하나가 거기에 있었다. 영원에 홀린 병자 하나가 있었다.
궁금한 것은 하나였다.
“왜… 하필 저였습니까?”
“수도원에 불이 났다고 들었는데, 자네 몸은 괜찮나?”
“괜, 괜찮습니다. 영주님.”
듈란은 자신 앞에 놓인 차를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어 영주를 보며 대답했다. 캐런이 듈란을 거부한다고 해도 듈란이 차기 영주가 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듈란이 돌아오는 날을 조금 미룬 것으로 끝이었다.
하지만 그사이에 듈란에게는 갖가지 일이 일어났었다. 물건이 없어졌다가 다시 나타난다거나하는 사소한 일부터, 갑자기 졸음이 몰려오거나, 등이 넘어져 불이 날 뻔하기까지 했다.
“이제 끝났으니까요.”
이제 듈란이 할 일은 수도원에 있지 않다. 듈란은 수도로 떠난 캐런에 대해 이야기를 들으며 찻잔에 입을 댔다. 영주가 그의 모습을 보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조만간 소개해 줄 남자가… 있다고 하는군.”
“그, 그, 그렇습니까.”
“그래…. 내키지 않을 수도 있지만, 자네도 축하해 줬으면 하네.”
듈란은 왜 영주가 자신을 불러서 조심스럽게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캐런을 뺏겼다고 생각할까 봐 그러는 것일까? 듈란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영주고 캐서린이고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었다.
거래를 제안한 것은 자신들이면서 왜 이행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그들은 실행하는 과정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캐런을 편하게 대하지 못했고, 자신이 사심을 품고 있을 것이라 추측한다. 캐런이 다른 사람을 선택한 것에 듈란의 눈치를 본다. 자신이 왜 화를 낸단 말인가.
“물론입니다.”
축하할 일이었다.
캐런이 누군가를 만나든, 그것은 축복해야 할 일이었다.
자신이 행할 일은 변하지 않으니까.
자신이 해 왔던 일은 변하지 않으니까.
“그러니 캐서린과 했던 이야기는 이제 없는 것으로 하는 게 어떻겠나.”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기억에 손을 대는 것도… 그만두고. 캐서린이….”
영주의 얼굴이 약간 상기됐다. 그가 듈란을 부른 목적은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이다.
“난 아내를 잃었지만 그동안 딸도 잃었어. 먼저 다가온 가족을 다시 잃고 싶지 않네.”
듈란은 턱을 괴고 고민했다.
영주는 듈란을 설득하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그의 말은 듈란에게 확신만 쥐여 주었을 뿐이다. 캐런 스스로는 자신이 다시 산다고 말했다. 그의 부친에게.
듈란은 금화 하나를 던졌다가 다시 쥐었다. 탁, 탁. 동전이 허공에 떴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듈란은 생각했다. 생각해야만 했다.
캐런은 다시 사는가. 듈란은 그것을 믿었다. 하지만 캐런이 기억을 되찾고 손에 아무런 것도 쥐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듈란은 약간 혼란스러웠다. 캐런은 무언가를 쥐고 있었어야 한다. 캐서린이 말하지 않았는가.
“내가 다시 사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억하는 게 먼저겠지만, 그 다음번에는 표식을 쥐고 돌아갈 수 있어.”
캐서린은 듈란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죽을 때 손에 쥔 것은 가지고 시작할 수 있거든. 손안에 꽉 들어갈 정도로 작은 것…. 나 같은 경우, 맨 처음에는 손가락이었지.”
손가락? 듈란은 캐서린의 하얗고 가늘고 긴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캐서린이 자신의 손을 들어 하나를 접었다. 내 손가락 말이야. 잘라서 들고 돌아왔어. 이제는 썩어서 버려 버렸지만.
“그걸 아니? 사람의 손가락에는 무늬가 있어.”
손가락 끝에 있는 피부의 결을 말하는 것인가? 듈란은 자신의 손끝을 내려다보았지만 약으로 인해 반질반질해져 있었다. 하지만 후에 캐서린의 말처럼 모든 사람에게 고유의 무늬가 있고 그것으로 각각의 사람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임신이 답이라서 그런 거였을까? 내 신체의 일부를 쥐면 다시 돌아오게 되더라고. 내 신체가 아닐 경우, 제일 뚜렷하게 남는 게 이거야.”
캐서린은 금화를 집어 들었다.
“이게 제일 거부반응 없이 잘 남아. 다른 것은 자꾸만 문제가 생기더라고.”
“그렇군요.”
“그러니까 나중에 캐런이 죽고 살았는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이런 걸 쥐고 있는지 확인하면 될 거야.”
“만일 죽을 때 본인이 아무것도 안 쥐면 어떡합니까?”
캐서린은 듈란을 찔렀다.
“네가 쥐여 주면 되지.”
“…….”
“죽은 직후라도 괜찮아. 누군가가 죽은 그 아이의 손에 금화를 쥐여 주면 되는 거야….”
그래서 넌 신관이 되어야 해.
네가 그 아이의 죽음을 인도해 줘야 하니까.
캐런은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았다고 했다.
이번 생이 그녀의 첫 인생이기 때문일까? 듈란은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캐런을 이제 내버려두라던 영주의 말에 듈란은 의심을 가졌다. 캐런은 이 집에서 떠나기 위해 영주를 설득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몇 번이고 다시 살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손에는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았을까? 듈란은 과거의 자신이 그녀에게 금화를 쥐여 주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캐런이 죽었다면 당연히 그 손에 금화를 쥐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캐런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듈란은 조금 더 머릿속이 가려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머릿속을 빼내서 정리하고 싶었다.
캐런은 기억을 한다고 했다. 그리고 동전은 없었다.
동전.
듈란은 자신이 몇 번이고 되뇌던 물건을 생각했다.
캐런은 지금 저택에 없다.
평생 저택에서 지냈고, 기억마저 온전치 않은 사람이 저런 행동력을 보일 수 있을까? 그녀가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녀의 곁을 돌보던 낸시는 돈을 가지고 달아나 버렸다. 캐런과 낸시 사이에는 강한 유대가 얽혀 있어야 했다. 최소한 캐런은 낸시에게 어느 정도 휘둘려야 했다. 그렇게 약을 먹고 돌봤으니까. 그런데 캐런은 낸시가 달아난 뒤에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이상하다.
사람이 저렇게 행동할 수 있는가? 역시 캐런은 다시 사는 것인가. 그리고 또한 그녀가 벌써 남자를 소개한다고? 듈란은 동전을 꽉 쥐었다.
캐런의 행동은 한 번의 삶을 산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평생을 저택에 갇혀 살다시피 한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행동력이, 수완이. 듈란은 입술을 비틀면서 웃었다.
그리고 그의 수도원에서의 막바지 생활이 왜 위험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물건이 왜 사라졌는지도 알 것 같았다. 캐런이 누군가에게 시킨 것이다.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알아내려 한 것이 분명했다.
캐런은 이번 생이 처음이 아니다.
또한 어느 정도까지 자신에게서 진실을 캐내었을 것이다.
과거의 나는 성공했다.
캐런이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하더라도 그는 절대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듈란은 과거의 자신들이 옆에서 속삭이는 것이 느껴졌다.
영원을.
도망가려고?
영원에서 죽음으로? 영원한 안식으로?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선택한 남자가 누구든. 듈란은 일어나 가방에 물건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어떤 남자든, 어떤 사람이든, 아무래도 좋았다. 누구라도 상관은 없다. 그가 행할 행동은 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