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Beginning to Ending
05.1. This is not beginning: Carron
캐런은 눈을 떴다.
시작은 언제나 똑같다.
회색빛의 하늘, 질척이는 가랑비, 아직 아무것도 나지 않은 진흙의 정원, 오싹한 공기와 더러워진 잠옷. 목에 난 상처가 쓰리다. 저택으로 곧 돌아가지 않으면 정원사가 발견할 것이다. 발 근처에서 차이는 밧줄을 들었다.
“…100년 전의 나는 그때도 죽고 싶어 했었을까.”
캐런은 그것을 들고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실패했다. 목에 난 상처와 밧줄을 보니 100년 전, 반복을 시작하기 전의 자신도 죽음에 실패했을 것이다.
축축한 복도와는 다르게 방 안에는 벽난로의 불이 타오르고 두툼한 모피들이 냉기를 막아 주어 공기가 훈훈하다. 더러운 옷을 던지지는 않고 그냥 불가에 벗어 두었다. 불은 계속 타오르고 있고 따뜻했다. 거울 속 나신의 여자를 본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 올렸다.
“살다 보면 실패할 수도 있지 않겠어?”
의자에 앉아 종이와 잉크를 본다. 펜촉에 잉크를 묻혀 종이 위에 적어 내린다.
난 몇 살이지? 캐런은 스스로 웃겨서 ‘?’ 부호를 적고 한참을 웃었다. 듈란 때문에 여러 번 죽은 것은 어떻게 세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하긴 몇 번이든 그것이 이제는 무슨 상관이랴.
내 이름은 캐런 하이어.
펜촉을 강하게 휘갈겼다. 단정하고 우아하게 써진다. 분노도 없었고 광기도 없었다. 캐런은 웃었다. 이번에도 실패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을 것이다. 자신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은 레이몬드를 기다리고 같이 도전할 것이다.
자신은 언제나 자신이었다. 자신의 이름은 캐런 하이어였다. 하지만 이제는 시작이 아니다. 자신의 인생은 되풀이된 것이 아니다. 이제는 레이몬드가 기억한다. 캐런은 눈을 떠서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동전을 본다. 굳이 숫자를 새로 새기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증거가 필요하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발버둥 칠 필요도 없었다. 이제 같이 노력하면 된다. 인생은 단 한 명의 타인만 있어도 나아갈 수 있다.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에이.”
이제는 필요하지 않다. 캐런은 그 동전을 불에 던졌다.
천천히 모서리가 물러지기 시작했다. 캐런은 담담한 얼굴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좀 아쉽긴 하다. 하지만 후련했다. 이것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다. 자신과 같이 있는 것은 저 동전 조각이 아니라 레이몬드라는 사람이다. 그러니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자신은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 지금 그는 없어도 그를 기다리면 된다는 것을 안다.
이번에는 어떻게 살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몸이 가벼웠다. 레이몬드가 오기 전에 천천히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캐런은 옷을 갈아입고 잠들었다.
편하고 곤한, 깊은 잠이었다.
“일어났니?”
“어머, 아가씨 일찍 일어나셨네요. 몸은 괜찮으세요?”
“그렇게 괜찮지는 않아. 기억이 싹 사라진 걸 아니까, 영….”
쨍그랑.
“어, 네, 네?”
캐런은 피식 웃었다. 낸시를 협박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총을 들고 협박해도 괜찮지만, 그녀는 그냥 물어봐도 대답할 것이다. 그녀는 생각보다는 마음이 약하고 겁도 많았으니까.
“우리 할 대화가 좀 많지?”
“그렇게 정해진 인생을 사는데 무슨 의미가 있어요?”
캐서린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캐런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네가 진정한 사랑을 했으면 좋겠어. 너는 우리처럼, 나와 어머니들처럼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 별거 아니야. 이건… 캐런, 캐런. 내 말을 잘 들어 봐. 넌 정말 정말 오래 살 거야. 엄마나 아빠는 잠깐이고, 네 인생은 열일곱 살에서 박제되어 누군가를 아이의 아버지로 한참을 고르게 될 거야. 넌 공주님이란다. 왕자님을 기다려야지.”
“필요 없어요!”
“아직 어려서 그래. 더 크면 엄마를 이해할 거야. 이게 내가 줄 수 있는 선물이란다. 난 다른 선택지가 없었어. 하지만 넌 선택할 수 있어…. 우리는 그냥 그런 운명이야. 그리고 너도 언젠가 그걸 축복처럼 느낄 수 있을 거야.”
캐런이 나이를 먹으면서 발작도 점점 늘어났다.
“난 누구야? 여긴 어디야? 우리 엄마는 어디 갔어요?”
세뇌는 시간이 거듭될수록 점점 더 완벽해져 갔다. 듈란이 안정제를 조합해 하이어저로 보내기 시작하면서였다.
영주님의 도움으로 학업은 충실히 밟고 있습니다. 캐런에게 도움이 될 만한 약을 같이 보내 드립니다.
듈란 이 개자식.
그때 널 개먹이로 먹였어야 했어. 캐런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분노도 오래가지 못했다. 기억은 산발적으로 사라져 갔다.
‘기억을… 해야 해.’
가끔씩 기억을 되살리려고 할 때마다 캐런은 필사적으로 무엇인가를 적어 내었다. 기억은 잃어도 기록은 남을지도 모른다.
“내 이름은, 내 이름은 캐런 하이어. 그건 내 이름.”
캐런은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잃어버리면 글을 읽으면 돼. 기억은 없어져도 기록은 남아 있어. 글씨를 읽자. 읽으면 되니까.”
강하게 되새겼다. 자신이 잊어버려도 책을 읽으면 된다고. 편집증적으로 자신에게 되새겼다. 책을 읽으면 돼. 내 글을 읽으면 돼. 내 자신은 이 종이 안에 남아 있어. 기억을 되살리는 데 도움이 될 거야. 캐런은 책을 붙들고서 밤마다 중얼거렸다.
다시 산다고? 그러니까 열일곱 살 생일에 죽으라고? 안 믿어!
완벽한 남자를 만나서 사랑하면 마법에 풀린다고? 웃기지 말라 그래. 캐런은 덜덜 떨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잊고 싶지 않았다.
기억하고… 도망가자.
하지만 어디로? 어떻게? 자신은 마차가 없으면 마을로 내려가지도 못한다. 캐런은 좌절감에 울었다. 하지만 울음도 오래가지 않았다. 엄마는 너무해. 하지만 캐서린은 이미 죽었다.
캐런은 필사적으로 적어 내려갔고, 책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시작했다. 책만이 그녀를 구원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자신을 잊지 않기 위한,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유일한 창구였다. 읽어야 한다는 것은 잊지 말자. 캐런은 그 하나만을 외웠다. 책, 책, 책. 내가 써 내려가는 문자, 글.
나는 책이나 마찬가지야.
이게 내 인생이나 마찬가지야.
“이게 뭐지?”
하지만 하녀가 그것을 발견하고 그것도 끝이 났다.
“주인님, 아가씨가 이것을….”
“돌려줘요! 그건 제 일기장이에요! 제 사적인 것이라구요!”
영주는 천천히 캐런의 일기장을 넘겼다. 그 안에 있는 절절한 분노와 증오를 보았다. 영주는 쓰게 웃었다.
“캐서린은…. 애야, 네 엄마는 이런 것을 원하지 않는단다. 네가 그렇게 할수록 점점 더 내 행동에 확신이 드는구나.”
“아빠, 아빠… 전 엄마를 죽여 버리고 싶을 지경이에요.”
“캐런, 또 잊었구나.”
그리고 영주는 일기장을 벽난로에 집어던져 버렸다. 안 돼! 비명은 불이 삼켜 버렸다. 눈물을 흘리는 캐런에게 영주는 말했다.
“엄마는 이미 몇 년 전에 죽었단다.”
우울한 얼굴의 영주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낸시에게 일렀다.
“저런 어두운 이야기 말고, 밝고 즐거운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시오. 내 딸이 사랑에 동경을 품도록.”
‘알겠습니다, 주인님.’
낸시는 다양한 로맨스 소설을 잔뜩 주문했다. 그리고 그것을 밤마다 읽어 주었다. 캐런은 처음에는 발악을 했다.
“내 기억에 손을 대지 마!”
하지만 울부짖던 것도 잠시였다. 그것도 이내 잊어버렸으니까.
“옛날 옛날에….”
침대에 누워 있는 캐런은 지친 목소리로 낸시에게 물었다. 자신의 손과 발은 침대에 묶여 있었다. 힘이 빠졌다. 캐런은 자신의 하녀가 이해 가지 않았다.
“…너는 그렇게 사는 게 좋니? 예전에는 자유롭게 사는 집시였다며.”
왜 자유를 포기하고 날 괴롭히니. 하지만 낸시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캐런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동정 섞인 입맞춤이었다. 아가씨는 아무것도 몰라요. 밖에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예정 없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 자유보다는 구속이 나아요. 구속은 보호를 동반하니까요.
“저는 밥을 굶지 않고 이렇게 저택에서 사는 것만 해도 좋아요. 그리고 아가씨, 너무 무서워 마세요. 무서운 것은 없어요.”
“넌 믿지도 않잖아.”
“그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검은 손이 캐런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 손은 우습게도 자신을 위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낸시의 목소리가 캐런의 귀로 천천히, 하지만 막을 수 없이 무자비하게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괜찮아.
그냥 받아들여요. 단순하게 살아요. 아가씨는 정말 예쁘니까.
이제 다시 잠들어요.
괜찮아요.
무서운 것은 모두 꿈속의 일.
슬픈 건 모두 책 속의 일.
아가씨는 꿈을 꾸고 있는 거야.
이 세상은 당신에게는 꿈이나 마찬가지야.
조금 있으면 기사님과 당신은 사랑에 빠지고
모든 고난은 끝이 날 거야.
나는 나야!
엄마는 미쳤어, 아빠도 돌았어! 엄마는 죽어서도 날 지배하려고 해! 캐런은 밧줄을 들고 정원으로 달려 나갔다.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이렇게 끝이 날 수는 없었다. 이번에 자신이 기억을 되찾은 것은 1년 만이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그녀는 자신이 책 속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진짜 자신이 있다면서 벗어나야 한다고 일기를 썼다.
서랍 안쪽 구석에 구겨져 있던 일기 한 장이 불현듯 두통을 안겨 주면서 기억을 살려 주었지만, 그것마저도 오래가지 않을 것 같았다. 이번에도 기억을 잃으면 얼마나 갈지 모른다. 캐런은 전부 다 지긋지긋했다. 자신이 자신으로 남아 있을 때 죽고 싶었다.
캐런은 다시 사는 인생을 믿지 않는다. 믿을 수 없다. 하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는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이 당연히 죽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기억을 잃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이라며 기억을 지웠다. 자신이 발광할수록 기억을 더더욱 지워야 한다고 확신했다. 약에 취해 자장가를 들으면서 잠이 들면 얌전해지니까.
캐런은 기억을 찾을 때마다 점점 더 격하게 반항했고, 그 반항은 자해와 자살시도로 이어졌다. 이번에도 잊으면 자신은 정말로 스스로에게서도 잊힐지 모른다.
죽자.
내가 나일 때.
“…꺄아아악!”
캐런은 미끄러졌다. 진흙이 온통 튀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흑… 흑.”
캐런은 나무에 줄을 매달아 매듭을 묶었다. 이렇게 하면 죽을 수 있을 거야. 캐런은 하녀들이 읽는 통속소설에 나오던 삽화를 기억했다. 자신 스스로의 정체성은 없어도 그런 기억은 남았다. 다행이었다. 캐런은 안도하면서 둥근 매듭 안에 머리를 집어넣었다.
다들 엿이나 처먹어!
“왜….”
캐런은 넘어졌다. 자신은 지식이 부족해 매듭이 충분히 단단히 묶이지 않았다. 목에는 상처가 났다. 바닥에 밧줄이 떨어졌다. 캐런은 서서 울었다. 이제 자신은 열여섯 살이었다. 엄마가 죽은 지는 몇 년이 지났다. 기억은 드문드문 잘라졌고 대부분은 멍청하게 보냈다.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은 얼마나 자신으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열일곱 살이라는 것은 생일을 말하는 것일까? 오늘이 아니면 내일 죽으면 성공할까? 하지만 또 실패하고 나니 또 죽는 것이 무서웠다. 목이 쓰라렸다.
얼마나 나는 나로 살아 있을 수 있을까.
책 속에 들어왔다.
책 속에서 빠져나가려면 사랑을 해야 한다. 진정한 사랑을 해서, 그와 이루어져야 한다. 이 소설은 로맨스 소설이다. 자신은 진정한 사랑을 이루면 모든 행복을 손에 넣을 것이다.
괜찮다.
비가 내리는 정원이다. 캐런은 추위에 떨었다. 집, 집으로 가야 해. 추워. 발에 차이는 밧줄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캐런은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신기하게도 어디가 자신의 방인지는 알 수 있었다.
“난 엄마가 좀 미친 것 같아.”
“아가씨, 캐서린 부인에게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좋은 분이세요.”
캐서린에게서 집과 보수와 존중을 받은 낸시는 나름대로 그녀에게 은혜를 갚고 싶었다. 하지만 캐런은 낸시에게 질린다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럼 우리 엄마가 정상 같니? 딸 약 먹이고 세뇌시키는 게?”
“…….”
“거 봐.”
이유는 알 것 같기는 했다.
캐서린도 귀즈 같은 권력 있는 미친 남자에게 너무 제대로 걸린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 귀즈 왕세자는 나라에서 제일가는 일등 신랑감이었다. 미래의 왕이었고, 미남이었으며, 캐서린을 사랑했다. 캐서린도 그 말고 다른 남자는 성에 차지 않았을지 모른다. 성품만으로 남자를 고르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는 걸 캐런은 잘 알았다. 하지만 귀즈는 너무 미쳤다.
캐서린은 그에게 시달리고, 그녀 또한 여러 번 죽음을 반복하면서 몰린 것이다. 그리고 지긋지긋한 죽음에 대한 공포와 임신을 통한 탈출, 그 모든 것에 환멸을 느꼈을 것이다. 캐런은 자신의 어머니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이해했다. 그렇다고 당한 사람으로서 그녀의 행동을 긍정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캐서린은 그에게서 도망가기 위해 몇 번을 죽었을까? 캐런은 그것이 궁금했다.
“엄마는 몇 번 죽었다고 했었니?”
“그런 말 안 하셨는데요.”
“…그렇구나.”
“아가씨는 몇 번 죽으셨는데요?”
낸시가 물었다. 캐런은 얼굴을 찡그리면서 생각했다. 몇 번 죽었었지?
“106번인가.”
“망상도… 그 정도면 정말 구체적이네요.”
캐런은 여전히 이번에도 믿지 않는 낸시를 한숨 쉬면서 쳐다보았다.
낸시는 나름대로 캐런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그녀가 세심하게 돌보는 것에서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동시에 오만함도 가지고 있었다. 출신 성분에서 오는 열등감과 캐런의 머릿속을 주무를 수 있다는 자만심이 합쳐져 캐런을 은근히 깔봤다.
그리 유쾌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또다시 권총으로 죽을래 살래 씨름하기도 귀찮았다. 낸시는 돈으로만 잘 회유하면 배신하지 않는다. 이것도 해 봤고 저것도 해 봤으니 저 정도면 그냥 용납하고 넘어갈 만하다. 자신도 나이를 먹더니 퍽 유해진 모양이다.
“하아….”
캐런은 뒤로 벌렁 누웠다. 다시 침대에 누워 데굴데굴 굴렀다. 이번에는 뭐부터 하는 것이 좋을까. 레이몬드가 오기 전에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살고 싶었다. 이번이 끝이 아니고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이 이렇게 달라진다. 다음에 성공 못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난번처럼 레이몬드 품에서 잠들듯이 죽는 것도 괜찮기는 했다.
“아가씨, 나이 드실 만큼 드셨으면서 뭐 하세요?”
“애벌레 놀이.”
캐런은 이불에 돌돌 말면서 대꾸했다. 낸시가 기겁하면서 캐런이 만 이불을 다시 돌돌 풀었다.
“나이 드셔서 너무 유치하게 굴지 마세요. 내가 이렇게 안 키웠는데.”
“너 내가 나이 먹고 들어왔잖아. 키우긴 뭘 키워.”
어릴 때 내 유모는 데어 부인인 거 안다구. 캐런이 대꾸하자 낸시가 난감하게 웃었다.
“뭐 그런 것까지 기억하시고 그러세요.”
“아무튼 더 이상 사고 안 칠 테니까 세뇌하려고 하지 마. 말했듯이 돈은 내가 더 줄게.”
“알았어요, 알았어.”
낸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로서도 캐런이 저렇게까지 안정적인 상태를 보이고 있는데 굳이 무리해서 캐런을 다시 세뇌시키고, 울고불고하는 입에 억지로 약을 밀어 넣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캐런은 여전히 자신이 다시 살아난다는 망상을 말하지만(도무지 낸시는 믿을 수 없었다), 어찌 되었건 저렇게 안정적인 모습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또한 돈까지 따로 두둑이 준다면, 낸시로서는 기꺼이 영주를 배신하고 캐런의 편에 붙을 예정이었다. 어찌 되었건 자신이 돌본 캐런에게 더 마음이 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 뭘 어쩌시려구요? 이제 곧 생일인데 듈란 님이 오실 거예요. 그때 약혼식이 있으시잖아요.”
듈란을 만나야 할까? 캐런은 가슴에 납덩이가 콱 박히는 것 같았다. 그 개새끼. 이가 갈린다. 가장 큰 문제는 그가 기억조차 못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복과 영생을 맹신하기 때문에 어떤 협박이나 고문도 통하지 않았다. 답이 안 나오니 만나고 싶지도 않다. 고문도 힘이 빠진다. 다섯 번을 연속해서 실패하니 역시 그냥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나 불임이니?”
“예?”
너무 뜬금없게 말했군. 캐런은 다시 낸시에게 말했다.
“듈란이 날 불임으로 만든 것 같은데, 그것에 대해 아는 게 있니? 엄마가 그런 것도 시켰어?”
“전 잘… 모르겠는데요.”
별 도움이 안 되는군.
“그렇게 보시면 슬퍼요….”
“울고 싶은 건 나니까 징징거리지 마.”
“어머머.”
듈란이 캐런을 완전하게 불임으로 만든 것일까? 레이몬드와 몇 개월을 내내 붙어 있었는데도 임신은 실패했다. 그동안은 식사도 전부 레이몬드가 만든 것을 먹었는데도 그랬다. 듈란이 식사에 약을 타 자신을 강제 피임시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테스 대저택에서 레이몬드와 그 정도로 지냈으면 임신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듈란이 자신의 몸에 한 짓은 생각보다 오래전이었던 걸까.
캐런은 머리를 꼬았다.
만약에 듈란이 완전하게 캐런을 불임으로 만들었다면 답은 나오지 않는다. 레이몬드와 캐런은 영원히 반복되는 시간에 갇혀서 사는 것이다. 그도 캐런도 그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하나가 아닌 둘이 되었기 때문에 당장이라도 죽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역시 둘만으로는 부족했다. 둘은 같이 세상을 살고 싶은 것이었지 둘만의 세계에서 영원히 침전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레이몬드는 어떻게 자신을 기억했을까?
캐런은 엎드려서 다리를 흔들며 턱을 괴었다. 수수께끼가 너무 많았다.
“우선 듈란이랑 약혼은 안 해.”
“어머, 정말요? 나중에 파혼하시더라도 일단은 약혼을 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벌써 초대장을 보냈는데.”
“다시 미룬다고 보내. 나 걔랑 약혼 안 할 거야.”
“음….”
낸시가 난감한 얼굴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캐런은 그녀가 결국 캐런의 파혼 의사를 전달조차 할 수 없는 하녀인 것을 깨닫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영주에게 직접 말을 해서 결판을 내야 했다.
“아빠!”
캐런은 문을 벌컥 열고 의도적으로 소리 질렀다. 유치한 기선 제압이었다. 집무실에 앉아 있던 영주가 눈을 크게 뜨고 성큼성큼 들어오는 캐런을 바라보았다. 표정이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으, 응. 캐런. 오랜만이구나.”
“왜 오랜만인데요? 우리 한집에서 사는데.”
“…영주님. 아가씨가… 저.”
낸시가 눈치를 보면서 영주에게 다가가서 말을 했다. 캐런은 낸시를 보면서 자신의 입에 손가락을 댔다. 쉿, 그냥 가만히 있어.
“저 기억났어요.”
“…그랬구나.”
영주가 뒤의 하인들에게 눈짓하자, 캐런은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절대 싫다. 만약에 이번에 또 기억을 잃게 하면 이제까지 쌓아 온 모든 것들이 날아가 버린다.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
“지금 괜찮아요. 내 정신은 지금 아주 맑고 안정적이에요.”
“…….”
“…….”
사람들이 쳐다본다. 캐런은 활짝 웃고 다시 말했다.
“정말이라니까요. 전 정말 괜찮아요.”
영주를 설득하기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우선 듈란과 약혼은 안 할 거예요.”
영주는 고개를 저었다.
“듈란 정도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란다. 나름대로 엄마와 내가 고심해서 고른 거야. 나이와 인척 관계를 고려했을 때 그가 다음 영주가 될 거란다. 너와 결혼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기도 하단다. 또한 어렸을 때부터 널 잘 돌봐 주었고 캐서린의 계획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도왔는지 너는 모를 거란다.”
너무 잘 알아서 문제였다. 그래서 진정제도 먹이고 피임약도 먹이고 어쩌면 불임까지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한번은 탑에서 떨어뜨리기까지 했지. 캐런은 생각하자 새삼 또 머리가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한 번 더 죽여 버릴까.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기꺼이 파혼해 주기도 약속했단다. 그 정도로 이해심 많은 청년도 드물지.”
이해심? 캐런은 차분해지기 위해 애써야 했다. 여기서 분노해서 이성을 잃으면 그때야말로 끝이다. 뒤에는 언제든지 캐런을 제압할 남자들이 있었고, 옆에는 결국 영주가 명령하면 따라야 하는 낸시도 서 있었다. 진정하자. 듈란과 약혼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약혼했다가 파혼하는 것도 싫었다. 얼굴을 보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그거 꽝이에요.”
캐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영주는 난감했다. 캐런이 요구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내와 같이 오랫동안 계획해 둔 일이 있었다. 캐서린은 듈란이 자신을 잘 믿는다고 좋아했지만, 영주는 좀 더 현실적인 이유로 듈란이 마음에 들었다.
그가 다음 대의 영주이기 때문이다. 듈란이 영주 자리를 잇는 것은 상속법에 따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영주는 캐런 외에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가까운 남자 친척인 그가 받게 된다. 캐런이 결혼하면 남편에게도 어느 정도의 지분이 가게는 되지만, 영주 자리는 어디까지나 듈란이었다. 그리고 영주는 사실 캐런이 다른 정상적인 남자와 결혼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을 품고 있었다.
‘내 딸이지만… 아프지 않은가.’
캐런은 아름다웠지만 울고불고 발작을 일으키곤 했으며 기억도 잃었다. 약에 의존하는 경향도 강했다. 영주는 그래서 가능한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듈란과 캐런이 결혼했으면 했다. 그가 옆에서 자신의 딸을 돌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캐런 같은 입장의 외동딸들은 차기 영주와 결혼을 해서 집에 남는다. 그리고 그것이 듈란 같은 차기 영주들에게도 위치를 공고히 다지기 위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럭저럭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캐서린은 캐런이 진정한 사랑을 하게 만들어 주고 싶다고 했다.
“내 부탁을 들어주시겠어요?”
“물론이오.”
캐서린은 자신을 선택할 이유가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온전히 사랑이 아니면 그럴 이유가 없었다. 캐서린은 내로라하는 구혼자가 많았다. 왕의 정부가 촌부의 아내보다 낫다는 것은 누구나 동의할 진실이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존중하신다면, 또한 저를 존중해 주신다면 약혼을 미뤄 주세요.”
캐런은 단호했다. 그의 딸이 캐서린을 데리고 오자 영주의 한숨이 깊어졌다. 딸의 말이 맞았다. 아무리 캐런이 듈란과 약혼하는 것이 여러모로 낫다 하더라도, 그에게 중요한 것은 캐서린의 부탁이었다. 캐런의 사랑이었다.
“네 약혼은 강요하지 않으마.”
영주가 대답했다. 캐런이 보기에 아버지도 듈란이 썩 내키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친척이었지, 객관적으로 마음에 쏙 드는 사윗감은 아니었다.
“이번 생일의 성인식도 취소해 주세요.”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 그건 네가 성인임을 알리는 중요한 일이야. 중요한 친척들이 많이 온단다. 그리고….”
캐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신의 생일에 오는 사람들 중 중요한 사람은 없었다. 캐런은 그만큼 반복해서 알았다. 캐런의 생일에 오는 친척들은 그저 부친과 관련된 친척들이었다. 캐런의 생김새에 대해 품평하면서 듈란 옆에 있는 것이 어떠냐, 입방아를 찧어 대는 사람들이었다. 캐런의 인생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 그냥 그런 사람들이었다. 영주에게나 중요한 친척들이었지 캐런이 봤을 때 장기적으로 도움이 될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캐런은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아요. 아버지, 아버지는 믿지 않으시겠지만,”
“난 모든 것을 믿는단다. 네 엄마의 말은 전부 믿어.”
영주가 급하게 말했다. 역시, 캐런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정말 제 말을 전부 믿으시나요?”
“물론이지.”
“그럼 성인식을 취소해 주세요. 그 사람들은 아무 필요 없어요.”
“캐런, 네 친척들이란다…. 앞으로 네게 중요한 도움을 줄 거야.”
“이제까지 아무 도움 안 됐어요.”
“…….”
영주는 말문이 막혔다. 캐런은 영주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사실 그는 믿지 않는다. 하지만 스스로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영주의 얼굴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우선 듈란에게 당분간 미루겠다고 편지는 쓰도록 하마. 하지만 이번에 그가 여기로 돌아오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어. 다음 대의 영주는 듈란이기 때문에, 그도 내게 이런저런 걸 많이 배워야 한단다.”
“전부 미뤄 주세요. 그리고 전 듈란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그 애는 여기 와야 해. 너와 결혼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럼 전 그동안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요.”
“캐런!”
영주가 캐런을 다급히 불렀다.
캐런은 자신이 첫날부터 너무 자신의 아버지를 몰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살짝 물러나기로 했다. 우선 듈란과 약혼은 없다.
“알았어요. 하지만 전 듈란과 약혼하지 않을 것이고, 성인식 때도 참석하지 않겠어요.”
“…캐런, 친척들에게 이미 말을 다 해 놓았단다. 네가 참석을 해야….”
“아버지, 전 이제까지 몇 번이나 죽었어요.”
캐런은 다시 천천히 강조하며 말했다. 영주는 자신의 입으로 믿는다고 했으니 이것도 믿는 시늉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친척들은 아무 도움도, 영향도 없었어요. 전 이제 좀 더 충실하게 살고 싶어요.”
“…….”
영주는 캐런을 이길 수 없었다.
캐런은 영주를 어떻게 대할지 이제는 잘 알았다. 사실 그와 이렇게 깊은 이야기를 터놓고 할 수 있던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캐런은 영주가 자신의 진짜 부모라는 것을 인정하고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해 아버지와 말을 터놓게 된 이후로, 아버지를 대하는 법을 배웠다. 영주는 결국 자식을 이기지 못하고 밀어붙이면 넘어가는 남자였다.
“아가씨를 정말 사랑하셔서 그래요.”
“응 뭐, 그렇겠지.”
캐런이 대꾸하자 낸시가 캐런에게 타박하듯이 말했다.
“그래도 아가씨를 사랑하셔서 생일을 듈란 님과 크게 준비하셨는데, 많이 서운해하시겠어요.”
“낸시야, 낸시야. 우선 첫 번째로 생일 파티는 우리 집 형편에 무리였어. 그리고 듈란은… 최악의 선택이셨고.”
낸시가 캐런의 머리카락을 다시 땋아 올리면서 물었다.
“듈란 님이 좀 별로기는 한 건 알겠어요. 하지만 그래도 그분 덕분에 아가씨가 안정을 찾은 것도 맞아요.”
“약에 취해서 안정을 찾는 게 의미 있을까?”
“때로는 그것도 큰 도움이 되지요.”
낸시는 최면으로 이 집에 들어오기까지 한 사람이니 듈란을 편드는 것은 당연했다. 그녀와 듈란이 캐런에게 한 짓은 본질적으로 비슷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캐런은로서는 둘 다 사이좋게 총알을 먹었으면 하는 소망이었다.
“이미 몇 번 먹였으니 참을게.”
“뭘요?”
“그런 게 있어.”
작고 반짝이고 빛나는 것. 그리고 캐런은 자신의 머리를 마저 고정시키고 거기에 장식을 다는 낸시에게 말했다.
“그리고 너, 돈이 필요하면 그냥 말을 해. 그만큼 따로 줄 테니까. 하지만 절대 남의 물건… 특히 손님의 물건에 손대지 마.”
“어,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하세요?”
낸시가 당황한 목소리로 항의했지만 캐런은 손가락을 까딱이며 무시했다. 낸시는 이셀라의 목걸이를 훔친 적도 있는 대담한 도둑이었다.
“그런데 아가씨, 왜 이렇게 열심히 꾸미세요? 오늘 아무도 방문하지 않잖아요.”
“외출하고 싶어서 그래.”
“어디로요?”
“어디든. 우선 마을이라도 내려갈까.”
낸시는 급하게 움직이는 캐런이 이해 가지 않는지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지만 캐런은 그냥 웃었다. 자신이 1년 가까이 감금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모를 테니까.
자신이 돌아오고 바로 다음날부터 이렇게 열성적으로 움직이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이 시기에는 정말로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죽고 시작할 때면 언제나 괴로움에 몸부림쳐야 했다. 매번 죽음을 각오하는 인생을 100여 번이나 겪은 캐런은, 이 시기만 되면 처절한 무력감에 기력을 잃었다.
성인식이라는 큰 사건에 듈란을 만나고, 그 다음에는 이셀라를 만나고, 또 그다음에는 레이몬드를 만나고. 자신의 인생에는 언제나 순차적인 만남과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에 다른 것을 보는 건 쉽지 않았다. 정말 사소한 일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캐런은 마차의 창문을 열었다.
“아직 공기가 차가워요.”
낸시는 캐런을 말렸지만 캐런은 고개를 저었다. 답답했다. 열린 창문 사이로 초봄의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어 왔다. 그리고 흔들리는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그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정말이지 1년 내내 저택에 처박혀 있는 것은 힘들다.
‘사실 전에는 괜찮았는데.’
캐런은 자신이 별별 일을 다 했던 수십 년 전, 100년 전의 모습을 생각한다. 하지만 그때는 말 그대로 경우의 수를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막 되살아난 자신은 다시 산다는 것의 절망감에 허덕였다.
레이몬드가 기억한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이렇게 달랐다.
책이 아니라 진짜 세상이라는 것을 인정하자 자신은 인생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캐런은 그래서 단 하루도 흘려보내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어떻게 사는 게 좋을까.’
캐런은 자신이 던져 버린 동전을 생각했다.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인생의 무게는 동등했다. 하지만 이번에 자신은 동전을 녹여 버렸다.
“…좀 아깝나?”
“뭐가요?”
“아직 벽난로 청소 안 했지?”
“갑자기 무슨 소리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낸시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캐런은 천천히 다시 말했다.
“벽난로에 내가 뭘 넣은 게 있는데, 혹시 남은 거 있으면 너 가져.”
“네? 뭘 넣으셨길래요?”
“금화.”
“네에? 왜 그런 짓을… 아가씨…. 영주님, 그렇게 돈 많지 않아요.”
낸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표정이 재밌어서 캐런은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넌 믿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사실 내가 죽기 전에 증거로 삼는 동전이 하나 있었어. 작은 금화인데… 내가 손에 쥐고 죽으면 그걸 쥐고 다시 살아나거든. 그래서 난 이제까지 거기다가 내가 죽었다 살아난 숫자를 새겨 두었어.”
하지만 이제는 필요 없어. 증거는 동전이 아니야, 그런 물건 하나가 아니야. 이제 난 레이몬드 경을, 내 남자 주인공을 기다릴 테니까. 캐런은 그렇게 바람을 느끼면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낸시가 대답하지 않자 다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왜 그러니?”
“음… 그러니까 그거 나름대로 중요하신 거, 맞죠?”
“그렇지…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 왜 그렇게 얼굴이 심각해?”
낸시가 복잡한 얼굴로 캐런을 보지 않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사실 아가씨…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요. 듈란 님에게서 얼마 전에 편지가 도착했어요.”
“나에게?”
“아뇨, 제게요. 그리고 아가씨한테 숫자가 새겨진 동전이 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이거 모르겠네요…. 아가씨, 정말로 다시 살아요? 전 솔직히 못 믿겠거든요. 그런데…”
낸시의 얼굴에 약간의 두려움이 깃들었다. 캐런은 그 얼굴이 익숙했다. 자신이 늘 거울을 볼 때 느끼던 감정이었다. 미지에 대한 공포였다.
듈란은 대체 뭘까.
그가 원하는 것은 뭘까. 캐런은 듈란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캐런으로서는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그는 금은보화도 원하지 않았고 캐런과의 결혼 또한 답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 깊숙이, 캐런의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잡고 흔들고 있었다.
그래, 이전 생에서도 듈란은 낸시에게 동전에 대해 물었었다.
캐런은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에 대해서 생각했다. 언제부터인가 자신은 금화 하나를 쥐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에게 위안이 되는 물건이었다.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한, 다시 산다는 증거품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만은 믿어야 하는 현실, 반복하는 삶에 대한 증거였다. 금화에 새겨진 숫자를 생각한다.
분명 중간에 동전을 잃어버렸었다. 어째서 나는….
캐런은 생각했다. 자신이 정말로 죽음의 매 순간 동전을 쥐었는지. 죽음의 광기에 휩싸였던 시절의 기억은 모호했다. 지난번에 자신은 동전을 잃어버리지 않았던가? 그리고 연달아서 보웬에게 살해당했을 때는 동전을 쥐지도 못했다. 지난번에는 레이몬드의 품에서 죽었다.
“…왜 내가 이번에 금화를 가지고 있을까?”
캐런은 자신도 그 금화를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계속해서 쥐고, 지우고 새기고를 반복해서 그렇지 금화 자체는 별다른 것이 아니었다. 캐런은 자신이 그냥 시중에 있는 금화 하나를 잡아서 증거로 삼았던 것이겠거니 짐작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조차 듈란이 계산한 것이라고?
캐런은 낸시에게 중얼거렸다.
“네가 그걸 보면 듈란에게 말하기로 했다고.”
“네…. 만약에 숫자가 새겨져 있으면, 반드시 말하라고 했어요.”
“언제?”
“얼마 전이니까 이틀 전쯤이에요. 그런데 아가씨, 이거 진짜… 괜찮은 건가요?”
캐런은 항상 자신의 몸을 단장시키고 씻고 먹이는 낸시를 보았다. 자신과 항상 함께 있는 그녀였으니 뭘 알든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듈란은 무엇을 알고 있는 걸까. 고문해도, 결혼해도, 답이 나오지 않으니 답답했다.
하지만 처음으로 또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다.
캐런은 낸시를 응시했다. 그녀의 표정은 불편해 보였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배신할 것 같지도 않았다. 낸시에게 죽고, 낸시를 죽이고, 서로 말을 했던 그 수많은 과거들. 그런 과거가 있은 후에야 드러나는 이야기들이 있다.
“하지만 첫날부터 이렇게 혼란스러울지는 몰랐어….”
“…어떻게 할까요?”
캐런은 낸시에게 말했다.
지난번에 자신은 낸시에게 그대로 동전이 있다고 말하라 했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다른 선택을 해 봐야 한다.
“우선 듈란에게 어떠한 답도 보내지 마. 무조건 모른다고 해. 내 손에서는 어떤 것도 나오지 않았다고. 알았니?”
“네, 알겠어요.”
낸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자 약간은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초봄이었다. 아직 아무것도 나지 않은 시작의 계절이었다.
어쩌면 이것부터 달라질지 모른다. 자신이 살인을 시작함으로써 모든 것이 달라졌던 것처럼. 그럼 이번에는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을까? 그때는 동전을 던져서 선한 길과 악한 길을 골랐지만, 이번에는 어떤 길을 사는 것이 좋을까.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살자고 결심했지만, 그 동전이 듈란에게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갑갑해졌다.
하지만 캐런은 자신이 지난 생에서 결심한 것을 그대로 실천하기로 결심했다.
“낸시야, 아까 말했듯이 금 조각 남아있으면 그건 너 가져.”
“진짜요?”
그 와중에도 은근히 낸시의 목소리에 즐거움이 비쳐졌다. 캐런은 피식 웃었다.
“응. 불에 녹아서 제값 받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금값은 하겠지.”
“네에. 그런데 대체 왜 그러세요? 한 번도 안 하던 일을 하시네요.”
“여러 번 산다고 했잖아.”
“아, 네…. 그러셨지요. 아무튼 전 좋네요.”
“그래.”
캐런은 앉아서 턱을 괴고 낸시가 기대감에 웃는 것을 보았다. 이번 인생도 꽤 재밌을 것 같았다. 듈란은 정말 오래전부터 모든 것을 계획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것은 확신에 가까운 희망이었다.
“이번에는 좀 착하게 살아 보려고.”
캐런은 자신이 불에 던진 금화를 생각했다. 금화는 필요 없다. 그것은 불에 타서 일그러져 버렸다. 선택하는 것은 자신이다. 그리고 캐런은 정원에서 눈을 뜨자마자 결심했다.
“사랑에 빠지면 용감해진대.”
“그래요? 제가 아가씨에게 연애 소설 열심히 읽어 드린 보람이 있네요.”
“그래.”
캐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래.”
캐런은 착하게 살 예정이었다.
금보다 더 빛났던 그녀의 기사를 위해서.
같이 지옥을 걷는 것이 낭만적이라 일컫는 자들은 패배주의자들이다.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다. 같이 책 속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더 나은 삶을 선물해 주고 싶은 것이다. 레이몬드가 그녀에게 내려왔으니 캐런은 그에게 삶을 되돌려 주고 싶었다.
“여기서 멈춰.”
캐런이 도착한 곳은 낡은 빵집이었다. 제분소의 역할도 하는 이곳은, 마을 사람들에게 약간의 권력을 갖고 있었다. 캐런이 보기에는 아주 작은 힘이었지만, 가장 밑바닥의 사람들에게는 거들먹거릴 수 있는 곳. 그리고 여기에 캐런이 찾는 사람이 있었다.
“…이런 곳에는 왜 오셨습니까?”
마부가 뒤에서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캐런은 어깨를 으쓱이며 그냥, 하고 대답했다. 낸시도 캐런을 탐탁지 않게 보았지만 어디까지나 결정하는 것은 캐런이었다.
“이곳보다는 다른 곳을 방문하시는 것이 좋을 텐데요? 아가씨 모자의 리본을 바꾸러 가는 것은 어때요?”
“여기 먼저 들렀다가 가자.”
“좋아요. 하지만 여기를 들를 이유가 없는 것 같아서요.”
“빵이라도 하나 살까?”
그때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부석에 앉아 있던 그가 낸시와 캐런을 따라 내린 것이다.
“돈 낭비입니다.”
보웬이 마차 뒤에서 따라 내렸다.
“캐런 아가씨, 왜 이런 곳을 방문하신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빵집은 맛이 없습니다.”
캐런은 듈란의 하수인인 보웬을 쳐다보며 약간의 긴장감을 느꼈다. 그는 최근에 자신을 여러 번이나 죽였다. 캐런이 듈란을 죽였기 때문이다. 보웬은 듈란에게 은혜를 입고 나서 철저하게 그의 편이었다고 했다. 낸시와 다르게 협상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맛이 있고 없고는 내가 판단할게.”
“아가씨.”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그가 자신을 어떻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캐런이 살인을 저질렀을 때도 수습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으니까. 듈란만 죽이지 않으면 괜찮다. 캐런이 태도를 굽히지 않자 결국 보웬이 물러났다.
“캐런 아가씨, 멋져요. 저놈은 저도 하인인 주제에 마치 뭐라도 된 것처럼 저런다니까요.”
낸시가 속삭였다. 낸시는 캐런이 보웬의 의견을 무시한 것이 퍽이나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얘네 사이 안 좋았지. 죽은 다음에 토막 내는 것도 거리끼지 않을 정도로.
“그런데 보웬이랑 너무 싸우지는 마. 그러다가 싸움나면 네 손해 아니니?”
“아가씨, 고작 풋맨 하나랑 아가씨의 전담 하녀이자 그… 능력도 있는 절 똑같이 생각하세요? 섭섭해요.”
너 그러다가 죽은 다음에 목 잘린다? 지난번에 너를 죽인 건 나지만 감정 담아서 토막 낸 건 쟤야. 하지만 낸시에게 말할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랑 지낼 때는 차라리 도나가 하는 것을 보고 배우는 게 어떻겠니?”
“도나… 설마 세탁 하녀 도나요?”
“응. 걔 말하는 거야. 남들이랑 잘 지내는 것 같더라구.”
“어떻게 저를 그 한심한 애랑….”
캐런은 한숨을 작게 쉬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역시 도나의 장점은 위급한 상황이 되서야 드러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자신도 도나를 다시 만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낸시에게 말하는 것과 도나에게 말하는 것은 그 궤를 달리하는 문제였으니까. 하지만 캐런은 도나의 동그란 얼굴을 떠올리자 입 안이 껄끄러웠다. 지난번에도 느낀 감정이었다. 과거의 인생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짙은 패배감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몇 번 지나면 괜찮으리라.
이제까지 몇 번이고 경험하지 않았던가. 다른 사람에게 기대하고, 보답 받고, 이루어 내고. 그 모든 일이 있어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괜찮다. 다른 사람은 다 기억하지 못해도, 한 사람은 있다. 캐런이 앞으로 다가가자 보웬이 앞으로 가 문을 열었다.
딸랑.
문이 열리자 앉아 있던 뚱뚱한 남자가 급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어울리지 않는 손님들을 보며 당황했다.
“어, 어이쿠! 무슨 일… 어, 누, 누구십니까?”
“영주 따님이시다. 너무 호들갑 떨지는 마시오,”
보웬이 화들짝 놀라는 빵집 주인에게 말했다. 와, 말하는 거 재수 없다. 낸시가 속삭였다. 캐런은 낸시의 옆구리를 쿡 찌르고는 그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여기에 톰이라는 애가 있지?”
자신이 이곳에 온 것은 그 소년을 보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것을 듣지 못한 낸시와 보웬은 눈앞의 남자와 똑같은 얼굴이었다.
“…예?”
“그 애가 얼마 전에 날 도와줬어. 보고 싶은데 어디에 있니?”
빵집 주인이 당황한 얼굴로 캐런을 보았다. 그리고 캐런 뒤의 보웬을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그 역시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게 무슨 소리세요? 누가 아가씨를 도와요? 아가씨는 이제까지… 음… 나간 일도 별로 없었으면서…”
낸시도 옆에서 물었지만 캐런은 대꾸하지 않았다.
“어서 불러 줘.”
캐런이 계속 서 있자 남자는 밖으로 나가서 톰을 불렀다. 그리고 다시 문이 열리면서 조그만 고수머리의 소년이 들어왔다. 지저분하고 바싹 마른, 눈이 큰 소년이었다. 역시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 하지만 캐런은 그 소년의 눈이 얼마나 독기를 품을 수 있었는지 알았다. 그것을 생각하고 빙그레 웃었다.
“안녕, 톰.”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캐런은 그 소년이 반가웠다. 반가움에 웃자 온기에 굶주린 소년이 캐런에게 다가온다. 더듬거리면서 캐런에게 말한다.
“…저, 저를… 부르셨나요?”
“그래, 지난번에 날 도와줬던 거 고마워.”
톰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당연한 것이다. 그가 캐런을 즐겁게 한 것은 벌써 다섯 번은 더 죽기 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그가 캐런을 즐겁게 했던 과거가 변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캐런은 일부러 그를 찾아왔다. 자신은 과거를 잊지 않으니까.
자신은 약속을 지킨다. 그리고 이번에 가장 베풀기 쉬운 선행이 눈앞에 있다.
캐런은 웃으면서 장갑을 벗고, 톰에게 손을 건넸다.
“날 따라오지 않겠니? 고마워서 널 저택에서 일하게 하고 싶어.”
“…예?”
톰의 눈이 크게 떠졌다. 옆에서 보웬이나 낸시가 놀라며 말리는 말을 했지만, 그렇다고 캐런이 결정한 것을 바꿀 수는 없었다.
“나와 같이 가기 싫니?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아뇨, 아니에요! 가고 싶어요! 하지만… 저….”
톰은 영문을 모르는 행운에 살짝 겁을 먹었다.
“정말 가고 싶어요….”
톰은 겁먹은 얼굴이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톰은 행여 캐런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라도 좋았다. 톰은 그녀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낸시는 종알거렸다.
“아가씨, 제가 저택에 얼마나 오고 싶었는지 아세요?”
“지금 일하고 있으니 잘됐구나.”
“들어오기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그건 모르지.”
낸시는 캐런이 톰을 저택에 들이기로 한 것이 영 마음에 내키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톰을 이렇게 일찍 저택에 들인 것도 처음이기는 했다. 언제나 캐런이 토머스에게 위험에 처하고 나서, 죽은 토머스를 신경 쓴 캐런이 톰을 거둔 것이었으니까.
“아가씨는 아가씨니까 모르시겠지만… 저 같은 떠돌이는 톰이라는 애처럼 자신의 집에서 사는 것만 해도 엄청난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같은 사람은 정착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캐서린 마님이 절 거둬서 저택에 온 것은 정말… 정말 엄청난 행운이었어요. 그리고 전 정말 열심히 일했구요.”
이유 없이 톰을 거둔 것이 서운한지 낸시는 계속 투덜거렸다. 자신은 고생 끝에 엄청난 행운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톰이라는 아이는 아무 이유 없이 행운을 거머쥔 것이다. 낸시는 자신의 행운마저 퇴색되는 것이 싫었다.
캐런은 그런 낸시의 속이 보였다. 역시 낸시는 약간은 이기적이긴 하다.
“저 아이에게 질투하니?”
“납득이 가지 않아요. 아가씨… 영주님은 아세요?”
“아버지는 허락하실 수밖에 없을 거야.”
캐런은 아버지가 밀어붙이면 넘어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낸시야, 저 아이를 여기에 그냥 내버려 두면 아까 그 남자에게 더러운 짓을 당하다 죽을 거야. 넌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니?”
“…….”
낸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캐런은 말하고도 자신의 뻔뻔스러움에 손을 쥐었다 펴야 했다. 손이 간질거렸다.
“그러니까 저 아이를 질투하지 마.”
저 아이는 이제까지 충분히 비참하게 살았으니까.
이것은 변덕이다. 캐런은 자신의 행동이 순수한 선의가 아닌 것을 알았다. 자신이 살인을 시작했던 것처럼 이것 역시 또 다른 삶의 선택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하고 싶었다.
이제 동전은 없다. 캐런은 스스로 생각해서 정해 봐야 한다.
살인을 했으면 이번에는 착하게 살아 볼까.
사실 그리 엄청나게 색다른 것은 아니었다. 무난하고 착한 아가씨의 삶은 캐런이 몇 번이나 시도해 본 것이었다. 하지만 책이 아니라 진짜 인생이라는 것,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이 또 있다고 생각하자 마치 살인을 했을 때처럼 두근거렸다.
‘이것도 괜찮은 것 같아.’
캐런은 깃펜을 입에 물고 고민했다. 레이몬드를 기다리는 나날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캐런은 그가 오기 전까지 충실하게 살 생각이었다. 매일이 새로웠다. 아직 짧았지만, 하루하루 매 시간을 열심히 살려고 했다.
톰은 마차 시동으로서 귀여움을 듬뿍 받고 있었다. 거의 자신 옆에 있지는 않았지만, 나이 지긋한 하인들은 붙임성 좋고 눈치 빠른 톰을 귀여워했고, 톰 또한 하인들의 비위를 잘 맞추었다. 생존을 위해 갈고닦은 붙임성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고작 3일이 지났을 뿐인데도 톰은 오랫동안 일해 왔던 것처럼 잘 적응을 했다.
캐런은 톰이 병에 걸렸던 것을 기억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오자마자 데리고 와서 그런지, 톰은 아직까지 몸에 무리가 그다지 없어 보였다. 어쩌면 이번에 톰은 운명을 거스르고 살 수 있지 않을까. 캐런은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이번에 톰은 살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이번에 자신도 성공할지 모른다.
“아가씨, 지금 뭐 하세요?”
“계획 짜. 요즘 톰은 잘 지내니?”
“온 지 얼마나 지났다구요. 고작 이틀인데요.”
“내가 눈을 뜬 것이 고작 3일째라니 안 믿겨.”
“그러시구나….”
낸시는 영 툴툴거린다. 톰을 걱정하던 도나와는 딴판이었다. 캐런은 쿡쿡 웃었다. 이번 생의 톰은 사형수의 아들이 아니라, 그저 빈민가의 소년이었다. 영주는 토머스에게 따로 사람을 보내 그의 아들이 저택에서 일하는 것을 알리고, 그를 오게 했다. 지난번과는 다르게 시작부터 부드러웠다.
“그래서 그… 톰이라는 애를 저택에 살게 하신 것도 계획이었어요?”
“응.”
“솔직히 말씀드려서 전 싫어요….”
“알아. 그런데 너 지금 뭐 하니?”
낸시는 벽난로에 몸을 구부리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금 조각을 찾고 있어요…. 콜록, 콜록. 아무래도 안 보이네요.”
안에서 말하다 보니 사레에 들린 모양이다. 낸시가 얼굴을 빼내고 캐런에게 말했다.
“아가씨, 아가씨는 너무 곱게 커서 몰라요. 저런 아이들은 은혜를 갚을 줄 모르게 자랐어요. 거짓말하면서까지 저 애를 들이신거… 하아, 네, 아가씨 말대로 전에 그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하셨다고 해도, 이번 생에 아가씨가 그렇게 하실 필요는 없어요.”
캐런은 낸시에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다양하게 살고 싶어서 그래.”
“아이 참, 믿지 마시라니까요. 사람 믿는 거 아니에요.”
저렇게 대놓고 안 믿는다고 해도 되는 걸까. 캐런은 낸시를 보면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같은 여자로서 말하겠어요. 캐런, 당신 미쳤어요?”
…기억하지 않으려고 했던 사람도 떠올랐다.
캐런은 고개를 도리질했다.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이셀라 에반스를 지금 떠올려서 뭘 어쩔까.
이셀라는 결국 연적이다. 캐런과 이셀라는 친구가 될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전에 한 번 하녀 비슷하게 끝이 났던 것은, 이셀라가 레이몬드와 결혼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을 때뿐이었다.
그리고 이제 레이몬드는 결코 이셀라에게 가지 못한다.
캐런과 레이몬드의 인연은 끊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난 생의 레이몬드는 이셀라에게…. 생각하지 말자. 캐런은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왜 미련을 가지는가. 왜 후회를 하려고 하는가. 동정하지 말자. 자신은 다른 누군가를 동정할 처지가 못 된다.
동정을 하고 싶다면 톰에게, 낸시에게, 다른 가난하고 저 밑에 있는 자들을 동정하자. 이셀라는 동정의 대상이 아니다. 이셀라는 베르딕의 딸. 동정이 아닌 적대를 해야 할 상대다. 그리고 무엇보다 캐런에게는 레이몬드가 있다. 그리고 이셀라는 레이몬드를 좋아했다.
연적이다. 원수다.
캐런은 턱을 괴고 펜으로 종이 위에 그의 이름을 적었다.
레이몬드 세이어테스 경.
그녀의 기사.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뿐이다. 캐런은 다시 한번 되새겼다. 자신이 이번에는 좀 더 너그럽게 살고자 방향을 정한다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잊으면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레이몬드다.
레이몬드는 언제 올까?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
“…이런.”
캐런은 미리 그와 말을 맞춰 두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몇 날 어디서 만날지 미리 말을 해 두었으면 이렇게 기다릴 필요가 없을 텐데. 죽기 전에 죽으면 어떻게 할지 미리 정해 두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하지만 그때 레이몬드는 너무나 절실해 보여서, 캐런은 차마 자신의 죽음을 가정하고, 실패를 하고 난 뒤의 이야기를 말하기가 힘들었다. 100번째에도, 105번째에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레이몬드는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그는 세상 모든 것에서 캐런을 차단하면 끝이 날지도 모른다고 희망을 걸었다. 그는 그때 결국은 실패했지만, 그렇다고 시도해 볼 가치가 없는 일은 아니었다.
‘만약에 그때 이것저것 다른 일을 해 보다가 죽었으면 또 후회했을 거야. 괜히 동정을 베풀다가 후회하는 것보다는… 그렇게 한 것이 더 맞았어.’
캐런은 레이몬드의 선택을 긍정했다. 그가 선택한 방식은 가장 최선의 방식이었다. 그때 그들은 그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을 선택하기 어려웠다. 그날 전에도 죽을 수 있다면 이후에도 죽는지 보자. 그리고 죽을 가능성이 있는 모든 일을 막자. 레이몬드는 그것을 해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런은 죽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이번에도 죽은 것은 아까웠지만, 기회는 또 있었다. 죽는 것은 싫었지만 레이몬드와 같이 반복하는 것은 이것이 고작 두 번째다. 아직 질리기에는 멀었다.
캐런은 펜을 놓고 이름을 쳐다보면서 낸시에게 말했다.
“…낸시야. 나 실은 결혼할 남자 있어.”
“…예?”
“그래서 이번에 듈란이랑은 만나고 싶지도 않아.”
“아가씨가 어디서 남자를 만났어요?”
낸시가 엎드려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캐런은 그런 낸시를 보면서 웃었다. 낸시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란다. 캐런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확인했다.
“진짜야.”
“대체 누구예요? 세상에, 지금 아가씨가… 설마 집 안의 남자들은 아니죠? 솔직히 아가씨에게 맞을 만한 남자가 없는데…”
낸시는 놀라서 캐런을 빤하게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놀라는지 알 것 같았다. 캐런은 낸시가 모르는 이름을 입에 담았다. 혹시 그녀는 알고 있을까?
“레이몬드 세이어테스 경.”
“경… 기사예요? 군인? 처음 들어요. 아가씨는 대체 언제 그런 남자를 만났어요?”
낸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캐런은 낸시에게 상세하게 말을 이었다.
“이제까지 나는 죽고 다시 살아났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전생의 남자야.”
“…….”
낸시의 얼굴이 차갑게 식는다.
하지만 자신의 사랑에 당당한 캐런은 자신 있게 고백했다.
“기사고, 잘생겼고, 돈도 많아. 귀족이기도 하고 모자란 거 하나도 없이 완벽해. 나를 위해서 모든 걸 포기할 수 있는… 그야말로 완벽한 남주인공이었어.”
“음… 네.”
“얼굴이 안 믿는다고 말하는데?”
“아뇨…. 믿어요….”
낸시의 얼굴은 떨떠름했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쉰다. 별로 숨길 기색도 없어 보였다. 캐런은 지지 않고 계속 말했다.
“아래도 커.”
“네…. 중요하죠….”
낸시는 필사적으로 비웃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얼굴에서 경련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튼 그래서 이번에 듈란 님과… 약혼하는 것을 거부하신 건가요?”
“그거 말고라도 내가 듈란을 마음에 들어 할 이유가 있을까?”
낸시가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없죠.”
듈란은 그녀들의 마음을 알듯이 오지 않았다.
생일이 다가오기 시작하자 캐런은 무엇을 해야 할지 점점 안절부절못하게 되었다. 무엇을 하는 게 좋을까. 어떤 준비를 하는 게 좋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기간이 더 어렵다. 레이몬드보고 조금 더 일찍 오라고 하는 것이 좋았을 텐데.
“식사를 들지 그러느냐.”
영주가 말을 걸 때까지 캐런은 정신을 놓고 있었다.
“죄송해요, 아버지.”
캐런은 살짝 인사를 하고 눈앞의 식사를 보며 식기를 들었다. 식사는 그리 마음에 드는 종류는 아니었다. 으깬 삶은 달걀과 구운 감자, 칠면조 구이가 같이 나왔다. 단출한 식사였지만 이곳의 식사는 원래 그랬다. 베르딕이 오거나 최소한 듈란이 있었어야 했는데. 캐런은 천천히 칠면조를 씹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퍽퍽하고 약간 비린내가 났다.
‘진짜 세상은 좋은 식사가 풍부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캐런은 자신이 생각했던 책 밖의 세상을 생각하자 약간은 울적했다. 낸시가 속삭이던 ‘책 밖의 세상’은 좋은 것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 세상은 없는 것이다. 좋은 가족, 좋은 친구, 더 나은 사상, 더 나은 세계.
“그래도 너와 모처럼 이렇게 식사를 하니까 좋구나.”
영주가 캐런에게 말했다. 캐런은 영주와 눈을 마주쳤다. 영주는 빙그레 웃고 있었다. 캐런은 자신의 아버지를 처음 만나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캐런은 입에 있던 음식을 삼키고 말했다.
“그렇군요, 아버지.”
“앞으로도 식사는 같이 하자꾸나.”
“예.”
하인들이 뒤에서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었다. 며칠 사이에 바람이 따뜻해졌다. 식사는 생각보다는 먹을 만했다.
듈란은 결국 오지 않았고 생일 파티도 취소되었다.
캐런은 책상에 앉아 펜을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낸시가 스콘과 홍차를 들고 다가왔다.
“지금 뭘 그렇게 쓰고 계세요?”
“듈란에게 제대로 전하기는 했지?”
“네. 아가씨한테 동전 같은 건 없었다, 전의 기억이 많이 살아나서 듈란 님을 뵙고 싶어 하지 않는다구요.”
“그래, 잘했어.”
“그런데 그게 아가씨의 상황과 무슨 상관이 있나요?”
“지금 생각 중이야….”
캐런은 한숨을 쉬면서 홍차를 들어 입에 가져갔다. 향이 입 안에 가득 퍼졌다.
듈란이 루프가 시작되기도 전에 자신을 불임으로 만들었다면 어떻게 탈출해야 할까. 영생을 확신하고 숭배하는 자에게는 고문도 죽음의 위협도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안전하게 있으려고 철저히 준비를 해도 그날에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죽음의 순간을 빨리 앞당길 수 있게 되어도 그날을 넘기는 것은 아직까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역시 임신이 답인 것 같은데, 어떤 방법이 좋을까? 음식을 조절하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았다.
“임신을 하고 싶은데 내가 불임인 것 같아.”
“…그러시구나. 남자는 있으시구요? 아, 있다고 하셨지…. 아가씨가 어쩌다가 저렇게….”
“난 진지해.”
캐런은 펜을 입에 물고 고민에 빠졌다. 지금 자신은 어떤 것을 하는 것이 좋을까? 가능한 한 하지 않았던 선택을 하고,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해 보고 싶었다. 극단적이더라도 가장 성공 가능성이 높아 보였던 일은 이미 해 봤다. 지난번에 위험해 보였던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고, 듈란이 손대지 않은 음식을 먹으며 임신에만 힘을 썼는데도 결과는 죽음이었다. 이번에는 다시 방향을 틀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톰을 구한 것도 그런 일의 일환이었다. 살인과는 다른 방식으로 좀 더 적극적으로 일을 해 보는 것. 톰을 구해 저택에 두는 것은 예전에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별 도움이 되는 일은 아니었다. 그냥 톰은 힘없는 소년 하나일 뿐이었고, 그가 이야기에서 적극적으로 변했던 것은 살인을 했던 117번째의 삶뿐이었다. 톰에게서 뭔가를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캐런은 개입을 했다. 이번에는 하나하나 다시, 좀 더 다른 방식으로 시도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착한 일에는 또 뭐가 있을까?”
“전 재산을 빈민들에게 나눠 주는 거죠. 만약 그렇게 하신다면 누구나 아가씨를 찬양하지 않을까요?”
“그러려면 아빠가 죽어야 할 텐데.”
재산을 가진 사람은 캐런이 아닌 영주였다. 전에 캐런이 전 재산을 팔아 빈민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던 건 영주가 빨리 죽었던 해였기 때문이다. 영주가 죽어야 그 일이 가능하다. 하지만 착한 일을 하는 것이 목표인데 아빠를 죽이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캐런에게 낸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말했다.
“…패륜적인 농담은 그만두세요. 저도 농담이었어요.”
“딱히 난 농담은 아니었어. 그리고 내가 영주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캐런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1년 안에 할 수 있는 착한 일은 뭐가 있을까?”
“네 이웃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그냥 주변 사람들과 영주님께 착한 따님이 되시면 되겠네요.”
“으음….”
캐런은 자신이 적은 갖가지 목록을 살펴보았다.
자선가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부자가 되어야 한다. 아버지를 죽이고 아버지의 재산을 쓰는 방법이 아니라면 캐런이 사교계로 나가는 방법도 있다. 도박으로 돈을 따도 되고, 엘바 백작 부인의 살롱에서 그림을 보여도 될 것이다.
캐런은 오래 살아온 만큼 다양한 일에 수준급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레이몬드가 협조하면 일은 한결 쉬워질 것이다. 생활고로 자살한 화가를 도와줄 수도 있으며, 연쇄 살인범인 귀즈 왕세자에게 살해당할 여자들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년 동안 캐런이 개입할 수 있는 일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어떤 것부터 해야 할까?”
사실 이 모든 것들은 당장 닥칠 베르딕 에반스를 건너뛰어야 한다.
순간 캐런의 머리에는 성서의 구절이 떠올랐다. 캐런은 자신이 떠올린 그 생각을 부정했다.
“…아니, 아니야….”
자신이 생각해도 그것은 좀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불쾌감이 근질거렸다.
바스락.
캐런은 종이를 구겨서 던져 버렸다. 자신은 되도 않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자신이 왜 그런 생각을 떠올린단 말인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
네 원수를 용서하라.
베르딕 에반스를 용서하라고?
듈란을 용서하라고?
용서해서 무엇하란 말인가. 그들은 자신의 죄를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데! 아직 제대로 저지른 일도 아닌데!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생각해서 용서해야 하는가? 그들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모르고, 아직 저지르지도 않았으며, 미래에 그들이 지을 죄가 달라지지도 않는다.
용서란 베푸는 사람에게 달린 권한이었지만, 캐런은 그 권한조차 없었다. 자신은 용서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최소한 용서는 해결이 되고, 사과를 받고 나서 고민해야 하는 문제였다. 캐런이 혼자서 지금 용서하고 싶다 하더라도 불가능한 것이다.
“아가씨, 치우는 사람이 바로 뒤에 있는데….”
“…임신하려면 다른 일이….”
“…….”
낸시가 쌓인 종이와 엎질러진 잉크에 우는 소리를 하고 나서야 캐런은 종이를 낭비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결국 살아남아서 임신이라는 가장 큰 목표를 우선에 두되, 캐런은 자신이 이제까지 하지 않았던 방법을 더 생각해야 했다.
톰 또한 그 방법의 일환이었고, 아버지에게 직접적으로 말하고 듈란을 보지 않은 것도 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
캐런은 정했다.
베르딕이 하이어 영지에 오는 것을 막고 싶었다.
이셀라가 레이몬드의 손에 죽는 것도 바꾸고 싶었다.
또다시 새로운 방법을 찾기로 했다.
“…캐런, 지금 네가 왜 그러고 있는지 내게 설명해 줄 수 있겠느냐?”
영주는 캐런을 보면서 억눌린 소리로 물었다.
캐런은 자신의 아버지를 단호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입술은 앙 다물고, 옷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단히 차려입은 상태였다. 모자와 얇은 봄 외투를 걸치고, 안에는 프릴과 진주 장식이 달린 옷을 입었다. 귀걸이와 화장을 곱게 하고 있었으나, 구두는 소가죽으로 만들어 약간은 투박한 느낌이 드는 옷차림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아버지가 생각하시는 것이 맞을 거예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캐런은 자신의 손에 커다란 가방 하나를 단단히 쥐고 있었다. 어딜 보나 멀리 떠나려는 사람의 복장이었다. 영주는 뒤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낸시를 보며 물었다.
“낸시, 지금 캐런이 왜 이러고 있는지 내게 설명해라.”
“죄, 죄송합니다. 영주님… 제가 말렸지만 아가씨가 꼭 가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네가 자유롭게 살았다고 해서 내 딸을 꼬여 낼 생각은 하지 마라. 충분히 난 너에게 돈을 치렀다.”
“영주님이 생각하는 그런 짓을 전 하지 않았습니다.”
영주는 캐런이 낸시의 꼬임을 받아 바깥에 대한 동경을 키운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캐런은 그가 자신을 낸시의 꼭두각시쯤으로 생각하는 것에 쓴웃음을 지었다. 누가 누구를 데리고 왔는데. 영주가 캐런을 꾸짖는 것이 아니라 낸시를 책망하는 것도 캐런을 무시하는 행위였다.
“아버지, 낸시가 아니라 저와 직접 이야기하세요. 제가 혼자 생각한 것이니까요.”
“…….”
영주가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이내 포기하고 캐런에게 몸을 돌렸다.
“어디를 가고 싶단 말이냐.”
지금 캐런이 갈 곳은 단 한 곳이었다. 아직 오지 않은 사람들, 하지만 곧 올 사람들. 지긋지긋한 사람들.
“베르딕 에반스 씨를 만나고 싶어요.”
“…….”
“사업을 막으려고 해요.”
영주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캐런은 사업을 중단하고 싶었다. 에반스 가문과 자신의 악연을 끝내고 싶었다. 단순한 금전 문제 이상의 일이다. 캐런이 상대해야 할 것은 좀 더 기분 나쁘고 질척이는 인연이었다. 단 하나에만 집중해야 한다.
베르딕 에반스와 이셀라 에반스는 이제 캐런과 엮이지 않는 다른 길을 걸어야 한다.
이제까지와 다른 삶.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책장 뒤에서 캐런을 내려다보는 듈란을 본격적으로 끌어내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베르딕의 방해를 가장 먼저 배제하고 싶었다. 그것은 분명 좋은 일이 되리라. 자신에게도, 아버지에게도, 더 나아가 에반스 가문에게도. 캐런은 결심했다. 베르딕과 자신은 이제 갈라져야 한다.
“전에, 베르딕 에반스 씨가 사업을 전면적으로 중단한 적이 있어요.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예요.”
“괜한 소리 하지 말고 네 방으로 돌아가거라. 캐런, 성인식을 집에서 치르지 않았지만 수도에서 치를 수 있도록 내 친척들을 통해 알아보마. 널 데리고 데뷔시킬 분이 있을 거야. 넌 사업에 신경 쓰기보단 신랑감을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
“아버지.”
“이건 네가 간섭할 만한 일이 아니란다. 넌 그냥 방으로 돌아가렴.”
캐런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난번에는 영주가 자신이 여행가는 것을 허락했다. 하지만 그것은 레이몬드가 먼저 개입을 해, 사업이 전면 취소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번에 캐런은 레이몬드가 개입하기 전에 움직이고 싶었다. 이번에도 레이몬드가 베르딕의 사업에 먼저 손댄다면 캐런이 이번 생에서 원하는 방향과 크게 어긋나게 될 것이다.
레이몬드가 움직이기 전에 자신이 먼저 움직이자.
하지만 캐런은 현실에서는 고작 열일곱 살의 소녀였다. 영주에게도 실질적으로 사업을 중단시킬 만한 힘이 없었다. 사람의 일은 사람의 일. 그만큼 노력과 수고가 들어간다. 지금 캐런이 최대한 노력한다 하더라도 당장 사업이 중지되는 길은 요원해 보였다. 대부분의 권리가 베르딕에게로 넘어갔기 때문에 중단시키는 힘은 베르딕에게 있었다. 그래서 우선 캐런은 에반스 가를 방문하고 싶었다.
“이건 어른들의 일이지 네 일이 아니란다.”
“전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아요. 그걸 믿는다 하지 않으셨나요?”
“네가 에반스 씨를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하겠느냐, 게다가 그가 널 그냥 만나 주기나 하겠느냐?”
캐런은 말문이 막혔다. 사실 캐런은 지금 당장 사업을 멈출 방법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캐런이 아는 방법은 레이몬드를 통해 사교계에 데뷔하고 나서, 그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는 엘바 백작 부인과 그녀의 지인들을 통해 정보와 이익을 계산해서 베르딕을 공격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에는 베르딕과 엮여야 했다. 레이몬드가 지난번에 초반 중지가 가능했던 것은, 그라서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캐런은 레이몬드가 손쓰기 전에 베르딕을 만나야 했다.
“정 원한다면 날이 좀 더 풀리면 가거라. 지금은 아니다. 그리고 조만간 베르딕 에반스 씨가 저택에 도착할 거야. 오늘 저녁은 어떤 것이 나올지 부엌에 가서 물어보려무나.”
영주는 캐런이 물러서지 않자 좀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
“베르딕 에반스 씨가 직접 오기 전에 해결하고 싶어요.”
“에반스 씨가 우리 영지에 오기로 한 날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단다. 무엇이 그리 급하느냐.”
“그걸 알아서 그래요.”
이대로 기다리면 레이몬드가 사업을 중지시킬 수 있을 것이다.
캐런은 그 방법이 싫었다. 하지만 지금 영주를 어떻게 설득해야 하는가? 한참을 고민하던 캐런은 결국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주는 캐런이 아니라 낸시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낸시, 캐런의 가방을 다시 가져가거라.”
“…예, 알겠습니다.”
“잠깐만요!”
캐런은 다급히 외쳤다.
“왜 절 못 믿으시는 거죠?”
캐런은 초조했다. 지금 여기서 영주와 입씨름하고 싶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반대였다. 그는 바로 전에 캐런의 여행을 허가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캐런은 이번에도 그리 큰 반대 없이 떠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영주는 좀처럼 허락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캐런은 초조해졌다.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네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말을 하지 못하는데, 굳이 위험하게 먼 길을 간단 말이냐. 부모로서 허락할 수 없구나. 그리고 네가 만나러 가지 않더라도 베르딕 씨는 곧 온다지 않느냐.”
불현듯 캐런의 머릿속에 저번 생의 난동이 떠올랐다. 그때 그가 흔쾌히 여행을 권한 것은 캐런이 듈란을 죽이려고 난동을 피웠기 때문이다. 자신이 집에 머물면 어떤 사고를 칠지 몰라서 허락해 준 것인가. 듈란의 쓸모가 여기서 이렇게 드러나다니. 캐런은 탄식했다. 지금 옆에 있는 낸시의 머리에 총이라도 들이대면서 난리를 치면 또다시 허락해 줄까?
또한 그때 갈 수 있었던 것은 베르딕이 이미 계약을 파기하기로 결정하고 난 뒤였다는 것을 다시 실감했다. 영주는 계약 파기의 대리인으로 자신을 보내며 겸사겸사 여행을 허락한 것이다. 영주는 자신이 능동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거나 성취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 것이다.
“제가 꼭 가고 싶다면요? 그동안 내내 집에 박혀 있었던 것이 답답해서 그렇다면 허락해 주실 건가요?”
“…그렇다면 다른 하인들과 널 책임질 만한 친척 부인과 같이 떠나는 것이 나을 거란다. 좀 더 기다리려무나.”
“그래서 오기 전에 가야 해요. 더 지체되면 너무 늦어요.”
“이 사업은 그리 짧은 시간에 멈추고 시작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제까지 오랫동안 준비하던 것이었으니 너 하나가 먼저 간다고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
캐런은 초조하게 방 안을 돌아보았다. 낸시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영주가 시키는 대로 할 것이다. 이대로라면 레이몬드가 이셀라를 또 다른 곳으로 보낼까? 아니면 전처럼 이셀라는 그냥 다시 캐런과 대립할까? 어느 쪽이든 캐런은 내키지 않았다. 후반으로 갈수록 흐름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간다. 처음이 중요하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캐런은 그 구절이 싫었다. 하지만 캐런은 이미 다양한 선택지를 시도해 봤다. 그리고 지금은, 다른 방향을 선택할 때이다. 한번 결심하면 밀고 나가야 한다.
“아버지.”
“허락하지 않겠다.”
“제가 가서 설득하는 것이 힘들다면, 최소한 가서 베르딕 에반스 씨와 그의 딸 이셀라 에반스를 데리고 오는 일이라도 하겠어요. 미리 맞이하러 가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어쩌면 좋은 인상을 남겨 줄 거예요.”
그것은 갓 성년이 된 딸에게도 그리 무리가 아닌, 비교적 가벼운 일이었다.
영주의 얼굴은 의아했다.
“네가 왜 그런 일을 한단 말이냐.”
“이셀라 에반스를 미리 보고 싶어요. 제 또래라 하니 비교적 말이 통할지도 몰라요.”
“그의 딸과 말이 통하는 것이 사업에 무슨 영향을 끼치겠느냐.”
“사업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아버지. 하지만 전 저택에 있는 것이… 100여 년 동안 저택에 있었어요. 믿지 않으셔도 제가 한동안 저택에만 갇혀 있었던 것도 사실이잖아요. 아시겠어요?”
“…….”
사실 그 시절 동안 내내 저택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럴 때는 거짓말을 해도 좋다. 영주의 얼굴에 죄책감이 서렸다.
“제가 정상이 아니라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절 내내 집 안에서 키우셨죠. 다 기억해요.”
“…그때의 넌 정말 심했단다.”
“그러니 이번에는 절 보내 주세요. 사업을 막는 데 성공하면 결과적으로 영지에는 좋은 일이고, 실패하더라도 별일 없을 거예요. 그냥 가서 같이 오면 되는 일이니까요.”
“…그에게 전보를 부치도록 하마.”
결국 영주가 허락했다. 캐런은 환하게 웃었다.
아무리 그녀가 가고 싶다고 해도 이런 일은 부친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혼자서 이셀라의 저택까지 내내 걸어갈 수는 없는 법이다. 마차와 하녀와 돈이 필요했다. 캐런은 영주를 가볍게 포옹했다. 영주의 몸이 움찔 떨렸다.
“감사해요, 아버지.”
“…그래.”
“전보는 부치지 마세요. 최소한 제가 떠난 다음에 해 주세요.”
“미리 말을 해야 실례가 아닌 법이란다.”
캐런은 고개를 저었다.
“거절 못 하게 밀고 나가려구요.”
낸시는 얼떨떨한 얼굴로 캐런의 가방을 대신 들었다.
“남자 하인을 안 데려가신다구요?”
“마부가 있잖아. 하나면 충분해.”
“위험하지 않을까요?”
“위험한 길로는 안 갈 테니까 괜찮아.”
캐런은 보웬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는 듈란의 수하다. 보웬은 캐런이 살인을 하더라도 돕겠지만, 그가 옆에 있으면 모든 행적이 듈란에게 넘어간다. 캐런은 그것이 더없이 불쾌했다.
“영주님이 허락하셨나요?”
“마차를 전속으로 달리면 돼. 그리고 너무 많이 데려가는 것이 더 눈치 보일걸? 돌아오는 길에는 베르딕 에반스와 같이 오게 될 테니까.”
“…으음.”
도나는 계속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캐런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보웬을 떼어 버리고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인물들만 데려간다.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마차 강도보다는 보웬이 훨씬 더 위험한 인물이다.
타악.
“그럼 나중에 봬요!”
“…안전히 다녀 오거라.”
영주가 밖에서 캐런의 손을 한 번 잡고는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마차가 곧 출발했다. 캐런은 눈을 깜빡였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창문을 열자 아직 쌀쌀한 초봄의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초목도 돋아나지 않았는데, 어느새 가지 끝에는 조금씩 파란 기운이 돌고 있었다. 캐런이 그것을 보고 있자 낸시가 어느새 다가와 옆에서 말을 걸었다.
“아가씨, 가서 정말 사업을 멈출 수 있나요?”
“아니, 힘들 것 같아. 지금 내게 무슨 돈과 힘이 있겠니?”
캐런은 낸시에게 솔직하게 대답했다. 굳이 낸시에게 허세를 부릴 필요는 없었다. 캐런이 그나마 힘을 가지려면 몇 개월이라도 지나야 한다. 그 대답에 낸시가 약간은 어이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럼 정말이지 왜 가시는 거예요? 가서 그 사람들을 마중해서 돌아오는 데 무슨 이득이 있나요?”
“무슨 이득이 있어야지만 사람이 움직이니?”
“저택에 그렇게 있는 것이 싫으셨어요? 차라리 그냥 친척집으로 여행가는 것이 더 나을 텐데요. 그것이라면 영주님도 좀 더 흔쾌히 허락하셨을 거예요.”
“그건 안 돼. 난 베르딕 에반스와 이셀라 에반스를 만나기 위해서 가는 거니까.”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다. 에반스 저택으로 가는 것은 그냥 흥미로 가는 것이 아니다. 흥미를 위해서라면 새로운 장소가 더 매력적일 것이다. 하지만 캐런이 에반스 저택으로 향하는 것은 그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다시 산다는 것을 믿는다고 생각해 봐.”
“음… 점점 더 모르겠네요. 가는 것에 무슨 이득이 있어서 가시는 것이 아닌가요…. 아, 아가씨가 말했던 아가씨 애인이 거기 있나요? 그, 레이몬드 경?”
“응. 아마 그럴 거야.”
캐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몬드는 아마 지금 그 주위에 있을 것이다. 지난번의 레이몬드는 이셀라를 처리했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루프를 돌자마자는 아니다. 레이몬드는 이 시기에는 전쟁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캐런은 레이몬드보다 먼저 이셀라를 만나러 가야 했다.
“내가 지금 가는 것은 그를 만나러 가는 것도 있지만, 그게 주된 이유는 아니야. 난 이셀라를 만나러 가는 거야.”
“베르딕 씨가 아닌 이셀라 양을요? 베르딕 씨를 만나서 사업을 멈추러 가는 게 아닌가요? 최소한 사업을 저지해 달라고 빈다거나….”
“그건 표면적인 이유고, 솔직히 사업은… 내 주요 관심사가 아니야.”
“…좀 충격인데요. 아가씨, 지금 아가씨는 영주님을 돕기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닌가요?”
“기왕이면 사업도 접으면 좋겠지.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니야. 아버지에게 말할 그럴 듯한 변명이 필요했어. 내가 가지 않으면 이셀라 에반스가 레이몬드 경에게 죽을 테니까 그걸 막으려고 하는 거야.”
캐런은 낸시를 보면서 웃었다.
낸시는 그런 캐런을 보면서 한참 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이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아가씨의 말대로 레이몬드란 분이 이셀라를 죽이려는데 왜 아가씨가 그걸 막나요? 에반스 가문의 사업을 막기 위해서는 그 아가씨가 죽는 편이 낫지 않나요? 갑작스럽게 딸이 죽으면 베르딕 씨도 사업에 집중하기 어렵잖아요.”
“가끔 생각하는 건데 넌 가끔 너무 생각이 잔인하게 튄다, 얘.”
“…아가씨가 할 말인가요?”
그건 아니지.
하지만 캐런은 자신 스스로도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자신도 베르딕을 용서하거나 사랑하라는 말에는 진저리가 쳐졌다. 하지만 조금 돌려서 이셀라를 생각하면 그나마 거부감이 덜해졌다.
“아가씨의 친구였나요?”
“아니, 언제나 거의 원수지간이었어.”
캐런은 손을 뻗어서 가지 하나를 낚아챘다. 손에는 여린 분홍색 꽃잎 하나가 쥐여졌다. 때 이른 꽃이었다. 캐런은 꽃잎을 만지작거리면서 철없던 소녀 하나를 생각했다.
“레이몬드 님!”
레이몬드를 향한 연심을 품고 있던 그 소녀를 생각한다. 이셀라와 캐런은 한 번도 친구였던 적이 없었다. 캐런이 철저히 이셀라의 시녀로 복종했을 때도 이셀라는 항상 캐런을 못 견뎌 했다. 캐런의 집안이 자신의 집안보다 뼈대 있다는 것도 싫어했고, 캐런의 걸음걸이나 억양까지도 질투했다. 외모와 레이몬드뿐만이 아니었다. 이셀라는 가진 것이 많음에도 항상 가지지 못한 것을 갈구했다. 그리고 무심하게 예의 없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럼 가서 뭘 하고 싶으신 거예요?”
캐런은 한숨을 토하듯이 말했다.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시도해 볼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친구가 돼 보려고.”
“…원수시라면서요?”
캐런은 꽃을 만지작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자신이 시도하지 못한 것을 해 보자. 그리고 그중 하나는 이셀라와 베르딕이다. 베르딕을 사랑하거나 용서하는 것은 힘들더라도 이셀라를 살리는 것은 그나마 덜 부담스러울 것이다.
“이번 생에는 원수도 사랑하라는 말을 실천해 보려고 해.”
“…하아, 전 아가씨를 이해 못 하겠네요. 적이라면서요.”
“그래, 하지만 그래도 한 100년간 머리채 쥐어뜯기다 보면 나름대로 정이 붙더라고.”
캐런은 어깨를 으쓱이면서 자신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낸시에게 마저 말했다.
“그리고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니까.”
캐런은 낸시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를 생각했다. 자신은 낸시를 죽였다. 그리고 그녀와 약속을 했다.
“다음번에는 네게 죽어 줄게.”
자신은 전에 낸시와의 약속은 지켰다. 캐런은 낸시의 목을 조르면서 그렇게 약속했다. 그리고 다음 생애에서 바로 낸시의 손으로 총을 당겨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었다. 낸시는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약속은 지켰다. 그것은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자부심이었다. 혼자만의 약속이라도 지키면서 목적을 만들어야 살아갈 수 있었다.
“이셀라, 다음번에는… 우리 정말 친구할래요?”
그리고 이번에는 이셀라와 친구가 되겠다는 제안을 실천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제까지 그들은 서로 머리채를 잡고, 머리에 쓰레기를 씌우고, 거짓 증언을 하여 재판장에 보냈다. 그들 사이에는 여러 사람들이 연관되어 있었다. 베르딕이 있었고, 레이몬드가 있었다.
레이몬드 때문에 이셀라는 캐런을 질투했고, 베르딕은 이셀라 때문에 캐런을 죽였고, 또다시 레이몬드는 베르딕 때문에 이셀라를 죽였다. 만약 캐런과 이셀라가 친구가 된다면 어떨까. 이제까지 이셀라의 친구가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캐런이 레이몬드를 철저히 무시하고 이셀라의 시녀로 수그리고 들어갈 때만 이셀라는 만족했다. 그들은 실로 한 번도 친구였던 적이 없다.
원수를 사랑하라.
그것은 굉장히 새로운 일이었다.
캐런은 한번 이번 생에는 그것도 시도해 보기로 결심했다.
베르딕 에반스는 커피를 입에 머금고 눈을 감았다.
고소하면서 씁쓸한 맛이 좋았다. 지금 수도에서 유행하는 것은 홍차였다. 베르딕 또한 이제까지 홍차를 유통하는 사업도 했지만, 슬슬 새로운 음료를 도입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개인의 기호로서 커피가 좋았다.
차와는 전혀 다른 무게감이 혀와 목을 압도했다. 베르딕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아내와 딸을 바라보았다.
“어떻소, 여보, 이셀라?”
하지만 베르딕의 아내, 셀리나의 표정은 냉담했다.
“전 그리 좋지 않네요. 너무 써요. 차라리 안에 설탕과 우유를 넣는 것이 어때요?”
“당신이 뭘 얼마나 안다고 그리 말하시오?”
“모든 사람이 다 당신과 같진 않아요.”
“보통 사람들도 충분히 즐길 만한 음료요. 그리고 설탕과 우유라니. 나는 차에 우유를 넣는 이 나라 사람들은 품위가 없다고 생각하오.”
“이제 당신도 이 나라 사람이죠. 에반스 가문이 아직도 안 좋은 이야기를 듣는 이유는 그런 태도 때문이라구요.”
베르딕은 아내에게서 고개를 돌려 이셀라에게 물었다.
“당신의 의견은 못 믿겠군. 넌 어떠냐, 이셀라.”
이셀라는 화들짝 놀랐다.
“네, 네?”
옆에서 모친이 은근한 목소리로 같이 물었다.
“이셀라, 솔직하게 말해도 된단다. 이걸 이대로 유통하겠다는 건 말도 안 돼. 그리고 이렇게 시커먼 물을 누가 마시겠니? 색도 품위가 없어. 그렇지 않니?”
베르딕과 셀리나는 ‘내가 맞다고 해, 어서.’ 하는 얼굴로 이셀라를 동시에 내려 보았다. 이셀라는 커피 잔을 들고 침을 삼켰다. 한참 긴장한 얼굴로 잔만 쳐다보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소, 소녀는 잘… 모르겠사와요.”
“이셀라.”
“…….”
셀리나는 혀를 찼지만, 커피를 마시는 이셀라의 얼굴에서 맛이 없다는 것은 드러났다. 베르딕은 콧방귀를 뀌고는 잔을 마저 들었다.
‘날 제외하면 맛도 제대로 모르는군.’
셀리나나 이셀라는 쓴 음료에 고개를 저었지만, 미식을 사랑하는 베르딕은 달랐다. 단순히 달고 기름진 것만이 미식이 아니다. 씁쓸하고 떨떠름한 맛도 자극이요, 행복이 된다. 베르딕은 미식가로서의 자신을 사랑했다. 그것은 좀 더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부작용이라면 마시고 나서 잠을 좀처럼 들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베르딕처럼 잠을 극도로 줄이고 낮이나 밤이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부작용조차 축복이었다.
“…좋군.”
베르딕은 아침의 커피를 음미하면서 언제 이 음료를 백작 부인의 살롱에 내놓아야 할지 생각했다. 엘바 백작 부인은 짜증 나는 여자였지만, 항상 사람들을 몰고 다녔고 가십거리를 좋아했다. 그녀의 살롱은 항상 사람이 많았다.
“이번에 하이어 영주와 만나면, 거기 저택을 이셀라 몫으로 넘길까 생각 중이오.”
베르딕은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했다.
“캐런 하이어가 이셀라 에반스를 찾아왔다고 전해 주세요.”
어차피 모든 권리는 이미 대부분 베르딕에게 넘어갔다. 명분상 영주가 계속 앉아는 있고, 다음 대의 영주도 친척이 자리에 앉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허울일 뿐이다. 이셀라는 레이몬드와 결혼해 그곳의 실질적인 지주가 될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지주로서의 감을 잡고, 사교계에서 얼굴을 비추다가 ‘운이 나쁘게도’ 레이몬드의 형이 죽으면 자연스레 이셀라는 귀족의 가문에 편입될 것이다.
“아직 여주인이 되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적당하지. 그거 하나 망가져도 별문제는 없지 않겠소. 다음 영주는 신관이라고 하니 목사관에서 살라고 하면 충분할 것이오.”
영지 하나 정도는 이셀라의 마음대로 해도 별문제 없을 것이다. 이셀라는 아직 어렸지만 베르딕은 이셀라가 파산하더라도 충분히 구제해 줄 능력이 있었다. 일종의 사업장으로서 이셀라는 땅을 쥐게 되는 것이다. 셀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괜찮은 생각이네요. 하지만 결혼식은 수도에서 시키시겠죠?”
“그렇소. 하지만 약혼식은 거기서 시킬 생각이오. 누가 그 땅의 새로운 주인인지 영주민들에게 알릴 필요도 있으니까.”
이셀라는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레이몬드 님과 드디어 약혼식을 올리는 건가요?”
“그렇단다. 그럼 여보, 전 수도에서 마저 재봉사를 고르고 하이어 영지로 바로 보내겠어요.”
“괜찮겠군.”
똑똑.
이셀라는 얼굴을 굳혔다. 모처럼 어머니와 아버지가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인데 방해하다니. 셀리나도 불쾌한지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베르딕은 별로 불쾌해하지도 않으면서 일어났다. 하인이 문을 조용히 열었다.
“무슨 일이지?”
“주인님, 손님이 도착했습니다. 캐런 하이어라고 하는 아가씨더군요.”
셀리나와 이셀라의 눈이 마주쳤다. 자신들이 내려갈 영지의 딸이었다. 그리 좋은 사이가 되기는 힘든, 오히려 안 좋은 이야기만 오갈 사이다. 베르딕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 여자가 왜 왔단 말이냐? 영주가 보낸 것인가?”
“실은 몇 시간 전에 전보가 도착하기는 했습니다.”
“몇 시간 전이나 지금이나… 어지간히 서두르는군. 하이어 영주의 딸… 대체 왜?”
“그것이….”
베르딕과 하인이 몇 마디를 더 나누었다. 셀리나는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셀라, 이제 슬슬 일어나야지.”
이셀라는 베르딕의 그 모습을 보면서 손으로 치마를 쥐었다. 모처럼 가족의 시간을 그 여자가 깨 버렸다. 베르딕은 셀리나를 사랑하지 않고 셀리나도 베르딕을 사랑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사이의 이셀라 때문에 그들은 가족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셀라가 결혼하고 나면 더더욱 이런 시간은 없을 것이다. 저것이 감히. 이셀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셀라.”
베르딕이 이셀라를 불렀다.
“예, 아버지.”
“캐런 하이어가 찾아왔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 어차피 우리도 하이어 영지로 갈 테니 온 이상 저택으로 들이는 쪽이 맞을 것이다. 셀리나, 당신은 언제 수도로 갈 것이오?”
“조만간 출발하려 해요. 그러면 그 아가씨의 접대는 이셀라가 해도 괜찮겠군요.”
베르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셀라에게 마저 물었다.
“그리고 널 보고 싶어 하는구나.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어. 네 또래인데 만나 보겠느냐?”
의견을 묻는다고는 하지만 응접실에 가라는 뜻이었다.
“싫어요.”
이셀라는 대답했다. 그 짧은 답에 베르딕이 의아한 듯 눈썹을 치켜떴다.
“몰락한 하이어 영주의 딸이지만, 그녀는 백작의 외손녀야. 대공의 증외손녀기도 하지. 알아 두어서 나쁠 것은 없는 사이란다. 만나 보는 것이 좋을 거야.”
하지만 이셀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 그런 사람을 한두 번 보시나요? 그녀는 돈을 조금이나마 되찾고 싶어서 수작을 부리는 것이에요.”
“수작은 맞겠지.”
베르딕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까지 찾아오는 사람은 많았다. 빚을 탕감해 달라, 조건을 조정해 달라, 이것을 받아 달라. 결국은 같은 소리였다. 내 돈을 못 내놓겠다는 말이었다. 물론 베르딕은 하이어 영주에게 너그러울 마음은 없었지만, 이셀라의 데뷔 무대에 좋은 장식이 될 만한 여자는 쓸모가 있다 생각했다. 하지만 이셀라는 캐런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내보내세요. 선조의 피가 얼마나 고급스럽든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인가요?”
캐런은 한참을 기다렸다.
낸시나 마부는 저택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지 못해 캐런만 들어와 있어야 했다.
“베르딕 씨나 이셀라 양을 뵈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길 바랍니다.”
이셀라가 없다든가, 어떻게 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다행히 아직은 레이몬드가 이셀라를 찾아가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럼 기다리겠어요.”
캐런은 소파에 기대어 내부를 구경했다. 수도에 있는 이셀라 저택과는 또 다른 곳이었다. 수도에 있는 건물은 화려하고 웅장한 여름용 별장이었지만, 이곳에 있는 저택은 좀 더 실질적인 건물이었다.
최소한의 동선만으로도 움직일 수 있었으며, 내부의 자재들도 좀 더 단순했다. 호화 저택이라기보다는 사업장에 더 어울리는 저택이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이어 저택보다는 훨씬 고급스러웠다. 바닥에 깔려 있는 어두운 대리석은 백작 부인도 깔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깔끔한 양식에 어울리지 않는 바닥에 깔린 모피라거나 벽에 가득 차 있는 동물들의 목으로 베르딕의 취미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캐런은 목이 잘린 수사슴과 호랑이를 보며 자신의 목이 가려운 것을 느꼈다. 베르딕이 캐런의 목을 치려고 달려오던 과거를 생각하면서.
베르딕과 귀즈 왕세자는 좀 닮았었지.
팔에 약간 소름이 돋았다.
“…실례지만 아가씨는 몸이 좋지 않으십니다. 돌아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돌아가라구요?”
“예. 마을에 여관이 있으니 거기서 하루 정도는 머무실 수 있을 겁니다.”
“어머나….”
캐런은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얘 좀 봐라?
아프긴 누가 아프단 말인가.
캐런은 이셀라의 몸 상태를 잘 알았다. 조금 있으면 이셀라는 하이어 주택에 건강한 모습으로 내려올 것이다. 그런데 저택에 찾아온 사람을 만나지도 못할 정도로 아프다니. 거짓말임에 틀림없다.
“…왜지?”
“왜냐니요. 아가씨를 굳이 만나고 싶어 할 이유도 없잖아요.”
“그렇다고 이렇게 면전에서 박대할 정도의 이유도 없단 말이야.”
캐런은 부루퉁한 얼굴로 낸시와 같이 마을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한숨을 팍팍 쉬었다. 마부는 담배를 사러 가 버렸고, 낸시와 캐런은 어두운 얼굴로 앉아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아예 집 안에도 안 들일 줄은 몰랐어.”
이셀라는 생각보다 더 많이 철이 없었다.
자신이 옆에 있어야 이셀라를 찾아올 레이몬드를 설득할 텐데. 결국 자신이 여기 온 이유는 이셀라를 보호하기 위해서였건만, 아무것도 모르는 이셀라는 캐런을 보고 싶어 하지조차 않는다. 결국 영지로 내려가면 보게 될 사이인데 왜 이렇게 앞뒤가 안 맞게 떼를 쓰는 걸까?
캐런으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이셀라는 항상 이랬다. 캐런이 이해하지 못할 때에 화를 내고, 별것 아닌 것을 질투하고 일을 키웠다.
“다음 생에서는 친구할래요?”
아무래도 까마득하다. 자신과 만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 여자와 어떻게 친해진단 말인가? 심지어 그 여자는 레이몬드를 짝사랑하고 있는데.
“레이몬드를 짝사랑….”
“왜 그러세요?”
“생각해 보니까 진짜… 친구가 되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아….”
“제가 그렇다고 했잖아요.”
“…일단 내가 살리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캐런은 물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입을 닦았다.
이셀라가 자신을 만나지 않고 레이몬드에게 납치당하면, 그 다음 베르딕은 또다시 레이몬드를 의심하게 되려나. 원하지 않는 반복이다. 캐런은 그것을 막고 싶었다. 이번 생에서는 이셀라와 나름대로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이셀라가 좋은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이셀라를 살리고 싶었고, 친구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지만 가는 길은 요원하고 의욕도 잘 생기지가 않는다. 새로운 삶을 위한 새로운 시도라고 자위해도 심기가 불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캐런은 컵을 꽉 잡았다.
“내가… 자기를 살리려고… 이러는데.”
이셀라는 그걸 모르겠지.
하지만 이셀라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속이 편해지지는 않았다.
캐런은 텅 빈 컵을 낸시에게 내밀었다. 낸시가 컵에 물을 마저 채웠다.
“하지만 성공하고 말 거야. 내가 이제까지 유혹하지 못한 남자는 없었어. 여자라고 다르겠어?”
이셀라 또한 별다르지 않을 것이다.
캐런은 냉수를 거듭해서 들이켜면서 다짐했다.
되고 만다, 친구.
캐런은 생각지도 못한 낡은 잠자리에 허리가 아팠다. 환영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잠자리조차 제공받지 못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에반스 저택이 마음은 불편해도 식사나 잠자리는 최고였는데. 좀 아쉽네.”
“그래요?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은데요.”
“비교하면 말이야.”
그나마 여인숙의 식사도 고급스럽지는 않았지만 기름지고 먹을 만하기는 했다. 불에 구운 닭고기와 삶은 계란과 완두콩, 차가 나왔다. 캐런을 보면서 찡긋거리는 주인을 보면 신경을 쓰기는 쓴 모양이었다.
캐런은 한숨을 쉬며 여인숙에서 아침 식사를 하면서 투덜거렸다.
“우선 맨손으로 가게 된 것이 문제였던 것 같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이셀라는 그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물이었다. 선물을 들고 대우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분명 캐런을 만나 주었을 것이다. 캐런은 그렇게 생각했다.
“대체 어떻게 해야지 이셀라 옆에 있기 좋을까. 무슨 선물이 좋을지 상상이 가니?”
“돈이 최고죠. 가장 좋은 선물은 현금이에요.”
“이셀라 에반스야. 걔 마음에 들 정도로 현금을 만들려면 우리 집과 땅 전부 다 팔아야 할걸?”
“아…. 그렇겠네요.”
낸시는 머리를 굴렸지만 집시인 그녀로서는 막대한 부자인 이셀라의 마음에 찰 선물을 상상하기가 어려워 보였다. 캐런 또한 그러한데 낸시라고 별수가 있는 것은 아니리라.
“돌아다니다 보면 좋은 선물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그랬으면 좋겠네요.”
캐런은 우선 선물을 고르기 위해 거리를 빠른 걸음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일단은 이셀라 옆에 있어야 한다. 레이몬드가 그녀를 방문할 확률이 아주 높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셀라를 만나려면 선물을 들고 가는 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았다.
날씨가 좋았다.
늦은 아침, 점심이 가까운 이 시간은 한창 거리가 활기찼다. 캐런은 수도보다도 더 세련된 소도시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수도는 오래된 도시이니만큼 고풍스러운 맛이 있었지만, 이곳은 에반스 가문이 몇백 년 전부터 자신들의 지지 기반을 만들기 위해 터를 갈고 닦은 곳이었다.
건물들의 벽은 새하얗고 지붕은 붉은색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전반적으로 힘이 넘치는 소도시였다. 상인들이 길거리에서 캐런을 향해 호객 행위를 한다. 캐런은 그중 한 가게 옆에 멈췄다.
“과일 싸게 팝니다! 주스도 팔아요! 싸게 드릴 테니 한잔 가져가십쇼!”
“아가씨는 오렌지 주스죠? 한 잔 주세요.”
캐런이 길거리에서 과일을 파는 상인을 보고 있자 낸시가 재빨리 물었다. 오늘 아침에는 텁텁한 차만 마셨더니 달달한 음료가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낸시가 적혀 있는 가격만큼의 돈을 내자 상인이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아이고, 두 잔은 사셔야 합니다.”
“전 필요 없어요.”
“이건 두 잔을 묶어서 싸게 파는 거예요, 한 잔을 사시려면 더 내셔야 합니다.”
“예? 아, 됐어요. 별 같잖은 수작 부리고 있어?”
“뭐요?”
낸시가 상인에게 험악한 손짓을 하면서 시비를 붙이자 캐런이 낸시를 말렸다. 모처럼 좋은 기분을 사소한 것으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두 잔 사렴.”
“아가씨!”
“됐어. 한 잔은 네가 마시면 되잖니.”
“돈 아끼셔야 하잖아요!”
“그 정도는 그냥 내.”
“아이고 감사합니다. 한번 드셔 보시면 아실 겁니다. 돈이 전혀 안 아까울 맛입니다요.”
“아가씨, 그렇게 하시면 저런 장사치들에게 돈 다 뺏겨요!”
“주스 두 잔 사면서 뭘.”
낸시는 툴툴거렸지만 사소한 것에 더 목소리가 커지는 것도 싫었다. 상인이 오렌지를 흡착기에 넣더니 짜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캐런에게 얇은 잔에 주스를 담아 주었다. 캐런은 천천히 마시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달콤한 과육이 입 안을 적시자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낸시를 곁눈질로 보자 그녀 역시 맛은 괜찮았는지 마시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다음에 눈에 들어온 것은 구둣방이었다. 캐런이 걸음을 멈추자 낸시가 옆에서 물었다.
“구두라도 사시려구요? 에반스 양에게 선물하시게요?”
“글쎄, 이셀라가 구두를 이런 곳에서 맞추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구두를 남이 선물해 준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구두는 여성의 복식 중에서도 가장 예민한 것이었다. 장갑 하나하나도 전부 마음에 드는 재봉사를 통해 주문하는 이셀라인데 구두를 어떻게 선물할 수 있을까. 캐런이 이셀라를 아무리 잘 안다 하더라도 발의 정확한 형태까지 기억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 여기 있으실 필요는 없네요. 빨리 다른 곳으로 가요.”
“하지만 내가 하나 사고 싶어서 그래.”
“아가씨… 돈….”
“어이구, 어서 오십시오! 어떤 것을 찾으십니까?”
“좋은 가죽 있나요?”
캐런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고운 양가죽으로 만든 구두 하나를 사서 신었다. 캐런으로서도 이미 만들어진 기성품을 사는 것은 좀처럼 없는 일이었지만, 제작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보다 약간만 굽과 틀을 조정해서 당장 신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다음에는 장신구를 보러 갈까? 아니, 그것보다 뭐 먹고 싶은 거 있니?”
“캐런 아가씨!”
뒤에서 낸시는 가벼운 지갑에 걱정을 했지만 그것보다 당장의 행복감에 도취되었다. 어차피 캐런은 급하면 도박으로 돈을 따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보석을 사들이는 수준의 사치가 아니라면 거리낌이 없었다.
캐런은 그 뒤로도 이것저것 물건들을 계속해서 사들였다. 소비 자체에서 느끼는 즐거움이 캐런을 들뜨게 했다. 큰 가치가 없더라도 새로운 물건, 자신에게 말을 거는 처음 보는 상인들, 좀처럼 오지 못했던 거리의 봄의 날씨.
‘평화롭네.’
캐런은 거리를 걸으며 산뜻한 기분에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새로 만든 구두는 그리 고급품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캐런의 발에 딱 맞았다. 사소한 행운이었지만 만족감은 컸다.
이 거리를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걸었던 적은 없었다. 몇십 년간 자신은 죽음을 향해 달려 나가거나, 아니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절망해 틀어박혔다. 자신의 세상은 얼마나 좁았던가.
하지만 지금 태양이 내려쬐는 정오의 거리에는 캐런이 모르는 사람들이 차고 넘쳤다. 옆의 낸시를 제외하면 전부 다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낯선 거리와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평화가 몰려왔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보석상이었다.
그나마 이셀라가 좋아할 만한 곳은 이런 것이겠지. 그리고 이 보석상은 베르딕과도 거래하는 곳이었다. 가끔씩 이셀라와 보석상이 말을 나누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캐런이 낸시를 데리고 문가로 다가가자 직원이 문을 열고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무엇을 보러 오셨습니까?”
“제 또래의 아가씨에게 선물할 것이 있나 와 봤어요. 결혼 전의 여성에게 선물하기에 어떤 것이 적당할까요?”
나이가 지긋한 중늙은이가 안경을 고쳐 쓰고는 캐런을 살펴보았다.
“아직 아가씨 정도의 젊은 사람이라면 가벼운 장식으로도 충분할 것 같군요.”
“제가 선물하고 싶은 사람은 이셀라 에반스예요.”
“오, 실례했습니다.”
이셀라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남자의 얼굴이 알겠다는 얼굴로 변했다. 그리고 그는 진열대 안쪽으로 들어가서 여러 개의 상자를 들고 나왔다.
“에반스 양이라면 대부분의 물건은 우선적으로 가져가십니다. 하지만 여기에 있는 물건들은 아직까지 보신 적 없으신 것들입니다.”
남자가 상자를 하나하나 열었다.
“에메랄드는 에반스 양이 주로 쓰는 것 중 하나입니다. 녹빛이 금발과 아주 잘 어울리니까요.”
에메랄드 귀걸이와 목걸이가 같이 있는 상자였다. 녹빛의 에메랄드가 광물임에도 생명력이 넘쳐 보였다. 금과 은으로 장식을 하고 있었지만 에메랄드 특유의 커팅이 캐런이 보기에는 약간 둔탁해 보였다. 캐런과 같이 있을 때는 에메랄드를 그다지 걸치지 않았는데, 이셀라도 캐런을 만나고 난 뒤에 취향이 변했던 걸까.
“에메랄드 말고는 무엇이 있나요?”
“사파이어도 아주 좋아하십니다. 그리고 루비도 좋아하시지요.”
“루비를 좋아했나요?”
“가장 좋아하시는 보석입니다.”
“…루비를 좋아했군요.”
캐런은 상인이 내미는 루비 반지를 들었다. 붉고 투명하고 아름다웠다. 구혈색(鳩血色)의 최고품이었다. 태양이 타오르는 듯한 보석 알은 크고 영롱했으며 옆의 투명하고 작은 다이아들이 그 붉은 빛을 더욱 강조하고 있었다.
“한번 착용해 보시겠습니까?”
“네.”
캐런의 손가락에 들어가자 맞춘 듯이 딱 맞았다. 캐런은 반지를 내려다보면서 정말로 자신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 사는 것은 자신의 물건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까지의 이셀라는 루비를 좋아했을지 몰라도, 캐런이 아는 이셀라는 루비를 싫어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짐작할 만해서 캐런은 기분이 이상했다. 이셀라는 정말 자신을 싫어했구나. 가장 좋아하던 붉은 보석마저 싫어하게 되었을 정도로.
“다른 것은 어떤 것이 있나요?”
“새로 들어온 다이아 목걸이가 있습니다.”
“보여 주세요.”
상인이 내민 목걸이는 캐런이 아는 목걸이였다.
“…이건.”
“최고급 다이아로만 이루어진 것입니다. 지나치게 호화스럽기는 하지만 선물하기에 이것만큼 좋은 것도 없지요.”
익숙한 물건이었다.
레이몬드가 이셀라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캐런은 작은 다이아들이 휘황찬란하게 장식되어 있는 목걸이를 보고 손으로 들어 올렸다. 낸시가 옆에서 눈이 휘둥그레진다. 캐런은 전에 낸시가 이 목걸이를 어떤 꼴로 걸었는지 기억했기에 웃었다.
“탐내지 마렴. 그러다 죽어.”
“네에…. 그나저나 엄청나네요.”
“화려하기는 전의 것도 만만치 않은걸.”
“그래도 이런 물건이면 나중에 현금화하기도 좋고….”
“우리 가게의 물건은 단순한 재화가 아닙니다. 세공 하나하나에 장인의 마음이 들어가 있는 물건이죠. 이셀라 아가씨와 분명 특별한 관계를 만들어 줄 겁니다.”
주인이 낸시의 말을 냉정하게 끊어 버리고 캐런의 목에 걸었다. 그리고 캐런에게 거울을 비춰 주었다. 여전히 아름다운 목걸이였고 목을 매달기에 좋아 보였다. 캐런은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보며 세월의 수많은 시간을 생각했다. 이 목걸이는 또 이렇게 이번에 자신에게 걸리는구나.
그리고 거울에 손 하나가 더 보였다. 어깨에 누군가가 손을 올렸다.
“그 목걸이는 당신에게 그리 어울리지 않는군요.”
익숙한 목소리와 익숙한 손의 생김새. 그리고 익숙한 냄새가 났다. 화약의 냄새. 캐런은 뒤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뒤의 사람도 캐런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얼마든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제 것이 아니라 선물하려고 해요.”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냄새.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서의 만남이었다. 약간은 놀랍고 반가웠다. 캐런은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금빛의 기사, 자신의 남주인공.
“그리 오랜만은 아닌가요?”
“예. 하지만 오랜만이라고 하는 것이 더 기쁠 것 같군요.”
예고 없는 만남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만남은 아니었다. 그래서 놀람보다 반가움과 기쁨이 더 앞섰다. 캐런과 눈을 마주하자 레이몬드의 눈 한쪽이 부드럽게 휘었다.
“오랜만이에요, 레이몬드 경.”
“오랜만입니다, 캐런.”
레이몬드의 손이 캐런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리고 캐런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새로운 곳에서 또다시 시작하는 만남이었다.
꽃의 향기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레이몬드 경.”
짧은 포옹이 있은 후에 캐런은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바라보고 있는 낸시와 보석상 주인을 보고 레이몬드에게서 몸을 떼어 냈다. 그리고 레이몬드에게 화를 냈다.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뭐예요? 눈은 왜 그래요?”
처음의 만남은 반가워서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었지만, 그 다음에 들어온 것은 레이몬드의 얼굴이었다. 레이몬드의 눈 하나가 안대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실수했습니다.”
레이몬드가 캐런의 눈을 피하면서 말했다. 검은 안대는 레이몬드의 오른쪽 눈을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안대가 미처 가리지 못한 곳으로 흉이 길게 이어진 것이 보였다. 캐런은 레이몬드의 그 모습을 보면서 빠르게 속삭였다.
“자살하고 다시 시작할까요?”
“그렇게까지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영구적이면 너무 불편할 것 같은데요.”
지금 레이몬드가 부상을 입고 시작하는 것보다 자신이 빨리 죽어서 다시 재시작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극 초반에 만났으니 다음의 약속을 잡기도 쉽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캐런의 제안에 넘어가지 않았다.
“아직 경과를 좀 더 지켜봐야 합니다. 그리고 캐런,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제가 노력하는 것은 당신을 위함이니까… 당신도 좀 노력해 보십시오.”
자꾸 그렇게 자살하겠다고 하면 저도 힘이 좀 빠지지 않겠습니까. 레이몬드가 자신의 안대 옆을 긁으면서 말했다. 그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자신보고는 죽지 않게 노력하라고 하고서는, 이렇게 초반에 다른 곳도 아니고 눈을 다치다니.
“지금 나이가 몇인데 그렇게 다치기나 하고…! 정신을 대체 어디다 놓고 다니는 거예요?”
캐런의 목소리가 화가 나서 커지자, 레이몬드도 주변을 의식하고 작게 속삭였다.
“우선 나가서 이야기합시다. 가게에서 너무 길게 말하는 것도 좋지 않겠군요.”
“…알았어요. 물건은 나중에 다시 볼게요.”
캐런과 레이몬드는 문을 밀고 나갔다. 보석상 주인의 시선이 따갑다. 그리고 캐런은 뒤에서 쫓아오는 낸시에게 말했다.
“난 레이몬드와 할 말이 좀 있으니까 낸시, 넌 나중에 여관에서 보자. 밤이 되기 전에는 돌아갈게.”
“아, 그 옆에 분이…?”
“오랜만에 보는군.”
“레이몬드, 소용없어요. 낸시는 기억 못 해요.”
“아, 이런. 앞으로 잘 부탁하네.”
레이몬드가 낸시를 보면서 알은체하다가 머쓱하게 몸을 돌렸다. 레이몬드는 확실히 기억이 한 번에 올라온 뒤로 나사가 빠진 티가 났다. 캐런은 문으로 가면서 낸시에게 빠르게 속삭였다.
“내가 전에 말했던 남자야.”
“세상에… 거짓말….”
쟤 정말 끝까지 안 믿는구나. 캐런은 고개를 한 번 젓고는 레이몬드의 팔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한낮의 거리로 걸음을 옮겼다.
지난번에는 계속 저택에서만 있어서인지 캐런은 레이몬드와 한낮의 거리를 걷는 것이 굉장히 신선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친 레이몬드도 엄청나게 신선했다. 레이몬드의 미모는 안대 하나로 가려지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저것이 장식이 아니라 진짜 부상이라면 문제가 크다. 캐런은 못마땅한 얼굴로 레이몬드를 계속해서 올려다보았다. 보석상에서 한참을 벗어나고 나서,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빠졌다. 그리고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레이몬드는 걸음을 멈췄다.
“빨리 나오려다 보니 다쳤습니다. 적출할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시력이 어느 정도로 회복될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하더군요.”
“나이 먹고 젊었을 때도 안 하던 실수를….”
“지금도 젊습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아, 정말이지.”
캐런은 속상해서 바닥을 탁탁 내리찍었다. 레이몬드에게 더 뭐라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감정이 격해져 행동으로 흘러 나왔다. 한참을 새로 산 구두 굽으로 바닥을 찍자 레이몬드가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앞으로 좀 더 조심하겠습니다.”
“전에도 다친 적이 있었나요?”
“예, 기억이 막 돌아왔을 때는 지뢰를 밟아서 좀 크게 다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정도는 별것 아닙니다.”
레이몬드는 이 정도는 그다지 큰 부상이 아니라고 말하려던 의도였지만 캐런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불신의 눈으로 변하기 전에 레이몬드는 캐런을 붙들고 다시 말했다.
“정말로 눈 하나 다친 건 별것 아닙니다.”
“별것 아니긴요. 전 눈에 찔린 가시 때문에 파상풍으로 번져서 죽은 적도 있어요.”
“아… 그, 그랬었지요.”
“죽기 전에 시야가 좁아져서 사소하게 많이 다치기도 했구요.”
“…아팠겠군요.”
“파상풍으로 죽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
하지만 레이몬드로서도 억울한 감은 있었다. 이런 사고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지난번에는 전쟁 지역에서 온전하게 빠져나왔지만, 이번에는 실패했다. 저번 생을 마치고 되돌아오자마자 빨리 나가고 싶어서 몸이 달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난번에 계획이 실패했던 이유가 좀 늦어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더 급하게 만들었다. 레이몬드는 서둘렀고, 예상하지 못한 변수들이 그를 위험에 빠뜨렸다. 눈을 다치긴 했지만 처음 그의 기억이 되돌아온 후 충격 때문에 받은 부상에 비하면 사소했다. 그걸 모르는 캐런은 레이몬드가 부상을 입은 것이 충격이었겠지만, 레이몬드는 이 정도의 부상으로 죽겠다고 하는 캐런이 더 충격이었다. 캐런은 레이몬드의 눈을 계속 쳐다보면서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
“조심 좀 해요.”
“알겠습니다.”
“수도에서 다른 의사도 찾아가 보구요.”
“예.”
결국 캐런은 몇 마디를 더 하다가 지쳐서 그만두었다. 그리고 캐런은 레이몬드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다가 한숨을 쉬고 말을 돌렸다.
“제가 여기 있는지 어떻게 알았나요?”
“…실은 이셀라 에반스 양의 목걸이를 사러 왔습니다.”
“그러셨군요.”
레이몬드가 이 시기에 여기 있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약간 서두르느라 실수가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시기쯤 이곳에 그가 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상한 것은 하이어 영지에 있어야 할 캐런이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지금 이 시기에 여기에 있습니까?”
“이셀라 양과 친구가 되고 싶어서요.”
“…….”
캐런은 레이몬드의 침묵에 자신이 실수라도 한 것이 아닐까 되짚어 봐야 했다. 레이몬드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친구요. 이셀라 에반스랑. 너무 놀라시네요. 제가 못 할 소리를 한 것도 아니고.”
“캐런, 당신은 제게 제 농담이 별로라고 자주 말했지만 당신 농담도 만만치 않습니다.”
레이몬드는 신음 소리를 내며 짓이기듯이 말했다.
“제가 말한 건 농담이 아닌데요?”
레이몬드는 말을 잇지 못했다.
캐런은 레이몬드의 별별 모습을 다 보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레이몬드가 정신을 차리기까지 기다렸다. 레이몬드의 얼굴은 땅으로 향했다가 하늘로 향했다가, 벽을 쳐다보다가 다시 캐런에게 돌았다.
“친구요.”
“네.”
레이몬드는 정말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캐런에게 물었다.
“왜 당신에게 지금 친구가 필요합니까?”
캐런은 맛없는 것을 입에 넣은 얼굴로 레이몬드를 노려보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지금 제가 당신만 보고 살라고 하시는 건가요?”
“캐런, 전 당신 말고 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당신도 저 말고 다른 사람이 굳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레이몬드의 얼굴은 형용하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그것은 질투나 독점욕이랑은 좀 다른 얼굴이었다. 캐런은 그가 왜 그런 얼굴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레이몬드는 저런 얼굴을 하는가?
“이기적이시네요. 자신은 즐길 거 다 즐겨 놓고.”
레이몬드와 캐런은 입장이 달랐다. 캐런은 고작 삶을 1년 동안 반복하면서 만나던 사람들만 만나야 했지만 레이몬드는 평생에 걸쳐서 경험을 했다. 캐런이 레이몬드를 빤히 쳐다보자 레이몬드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게 아니라.”
“지난번에 레이몬드 경 말대로 끝까지 저택에 틀어박혀 봤잖아요. 그런데도 실패했는데. 이번에는 다른 방향으로 살아 보자는 것이 그렇게 이상하나요?”
“지난번에도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번에는 저택 안에서 좀 더 완벽하게 둘만 있을 수도 있습니다.”
“목소리 낮춰요, 레이몬드 경. 주택가예요. 제가 이셀라와 친구가 되고 싶다는 것이 그렇게 화날 일인가요?”
“캐런!”
“쉿.”
캐런은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레이몬드는 숨을 거칠게 쉬었다. 하지만 그로서도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크게 난 것에 놀랐던 모양이었다. 레이몬드는 자신의 입가를 연거푸 쓰다듬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캐런은 레이몬드를 당겼다. 약간은 거친 입맞춤이 이어졌다. 레이몬드도 캐런도 감정이 거칠어졌다. 캐런은 레이몬드의 안대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번에도 레이몬드는 이셀라를 처리할 생각이었구나. 잠시 후에 입을 뗀 레이몬드가 캐런에게 물었다.
“왜 하필이면 이셀라 에반스 양입니까? 세상에는 친구가 될 만한 좋은 성품의 숙녀들은 많습니다. 에반스 양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도 있지 않나요?”
“도축업자가 가축에게 정을 주는 것은 그리 현명한 행동이 아닙니다.”
일부러 단어를 악의적으로 고른다. 캐런은 레이몬드가 하는 말에 약간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레이몬드의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이셀라 에반스가 베르딕의 시선을 돌리기에 가장 좋은 미끼입니다. 전 이제 와서 또 다른 방법을 찾고 싶지 않습니다.”
“지난번에 제가 죽고 다시 사는 건 베르딕 씨랑 상관없다는 걸 알았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당신의 가장 큰 위험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캐런, 그에 대해서 더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번에는 당신을 외국으로 보낼까 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전 베르딕을 당신과 관련된 사건에서 배제시키고 또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레이몬드는 자신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친구가 필요하다면 제가 사교계에서 평판 좋은 숙녀들을 골라 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친구를 그런 방식으로 사귀었나요?”
“…제가 주제넘었군요.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에반스 양을 고른 것은 현명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안위를 위해서 말입니다.”
“알면 됐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방식을 취하고 싶고, 저는 이셀라와 친구가 된다는 목표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다른 여자들과 이셀라는 달라요. 이제까지 저와 가장 오래 지낸 여자와 친해지고 싶다는 게 무슨 문제가 될까요? 제가 계속하고 싶다면 계속 방해하실 건가요?”
“…하아.”
레이몬드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더 고집하지는 못하고 손을 들었다.
정말로 싫다는 얼굴이었지만 레이몬드는 우선 캐런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무엇보다 지난번에 자신의 주장대로 끌고 나갔으면서도 결국 실패했다는 사실이 그에게 명분을 잃게 했다.
“…알겠습니다.”
레이몬드는 도무지 캐런이 이셀라와 친구가 된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캐런도 한 100번 죽기 전까지는 생각하지도 않았던 일이긴 하다. 그래도 이번에는 그렇게 살고 싶었다. 약속을 했으니까.
“하지만 대체 어떻게 그녀와 친해지겠다는 말입니까?”
“잘 물어봤어요.”
캐런이 환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게 문제예요. 보통 어떻게 친구가 되나요?”
“…제가 생각해야 합니까?”
“제가 여자인 친구가 없잖아요.”
캐런은 이제까지 자신에게 동성 친구가 없었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너무나 부족했기 때문이다. 사교계에 데뷔하고 나서 만난 몇몇 여자들은 친구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캐런은 데뷔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일종의 경쟁자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귀족 여자들은 레이디 리안처럼 서로서로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경우가 많았다. 캐런처럼 시골에서 올라왔다고 해도 자기들의 무리가 있었다. 캐런은 캐서린과 낸시 때문에 다른 귀족들과의 교류도 거의 없었고, 다들 베르딕의 눈치를 보느라 그녀에게 더더욱 접근하지 않았다.
“친구가 하나도 없었어요.”
사실 진정한 의미로는 애인도 없었다.
캐런은 레이몬드가 자신을 보는 눈빛이 좀 마음에 들지 않아 얼른 말을 돌렸다.
“우선 뇌물, 아니 선물을 준비하려구요.”
레이몬드의 얼굴이 또다시 복잡하게 변했다.
“이셀라, 캐런 하이어 양이 또 찾아왔구나.”
“왜 절 자꾸 찾아오나요?”
“너와 친구가 되고 싶다는데.”
베르딕은 재밌어하는 얼굴이었다.
자신에게 달라붙어서 조금이라도 손해를 줄이려고 애원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이셀라에게 달라붙는 거지들도 몇 번 봤었다. 하지만 가난하다고는 해도 귀족의 피를 이은 아가씨가 이셀라에게 찾아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무엇보다 친구라니. 베르딕은 그 말을 듣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누가 누구와 친구가 된단 말인가. 아무리 친구라는 이름으로 있대도 캐런은 이셀라의 시중을 들어야 할 것이 뻔한데. 구미가 꽤 당기는 일이었다. 베르딕은 이셀라가 캐런을 부리는 모습을 매우 보고 싶었다. 자신이 귀족들을 부리고 싶은 것처럼.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캐런 하이어는 대공의 피도 흐른단다. 데뷔할 때 도움이 될 거야.”
“전 싫어요.”
이셀라는 고개를 팩 돌렸다.
“하지만 선물도 들고 왔는데? 꽤나 호화로운 물건이란다.”
“볼 필요도 없어요. 그 수준에 호화로운 것을 준비했다면 더더욱 원하는 것이 따로 있다는 의미 아닌가요? 그런 여자는 더더욱 싫어요.”
베르딕은 자신이 들었던 목걸이를 다시 집어넣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안 만나 줬어요.”
“그랬군요.”
캐런은 연거푸 냉수를 들이켰다. 이셀라의 거절은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지만 냉수를 마시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캐런은 불타는 속이라도 가라앉혀야 했다. 레이몬드는 그 모습을 불안하게 쳐다보았다.
“낸시는요?”
“한번 보석점에 환불할 수 있는지 물어보러 갔습니다.”
“하아, 될까요?”
“별로 기대는 안합니다만, 기세등등한 모습을 보니 한번 기대를 해 봐도 되지 않겠습니까.”
캐런 대신 잔금을 치른 레이몬드는 한숨을 쉬었다.
“나중에 갚을게요.”
“당신이 제게 갚을 필요는 없습니다. 제 모든 것은 당신 것이니까요.”
“감동적이긴 하네요. 일단 좀 누울게요. 힘이 빠져서.”
캐런이 비척거리면서 일어나 침대에 풀썩 누웠다. 먼지가 공기 중에서 반짝였다. 아직 잠이 들기에는 이른 오후였다. 이셀라가 캐런을 만나 주지도 않았기 때문에 할 것이 없었다. 캐런은 누워서 중얼거렸다.
“왜 만나 주지도 않니….”
레이몬드가 돈을 더 내고 마을에서 가장 비싼 곳으로 옮겼지만, 그럼에도 레이몬드 눈에는 방의 상태가 썩 마음에 차지 않았다. 바닥은 약간 삐걱거렸고 침대는 깨끗했지만 좁았다. 레이몬드는 캐런의 옆에 걸터앉았다.
“꼭 이셀라 양과 친구가 되고 싶습니까?”
“네. 이번 생의 목표예요.”
“캐런, 그리 이셀라 양을 좋아하지도 않으시면서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캐런이 고개를 돌려 레이몬드를 노려보았다.
“그건 제가 판단해요.”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친우를 만들고 싶다는 것까지는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꼭 이셀라 양일 필요는 없습니다.”
레이몬드는 베르딕을 증오했다. 그의 딸인 이셀라에게까지 그 분노를 돌리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녀에게 사랑을 속삭일 마음도 없었다. 레이몬드는 그녀를 볼 때마다 감정을 억눌러야 했다. 불합리한 분노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기억이 되살아난 뒤 레이몬드는 이셀라에게 필요에 의한 조치가 아니라 자신의 증오가 투영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계속 점검해야 했다.
캐런은 레이몬드의 입장보다 더했다. 이셀라와 캐런은 결코 친해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사업 관계가 우선시됐다. 베르딕이 있고 하이어 영주가 있고 레이몬드가 있다.
베르딕에게 학대당했고 재산을 빼앗기고 가끔은 그에게 살해까지 당했다. 캐런이 다시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캐런은 그저 베르딕에게 살해당하고 끝나는 인생이었을 것이다. 이셀라는 그런 베르딕의 딸이었다. 왜 그녀와 친해지고 싶어 하는가?
상대가 너무 안 좋다.
살다 보니 원수랑 친해져 보는 것도 좋다는 그녀의 생각은, 레이몬드로서는 잘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레이몬드는 캐런의 전의 인생도 안다. 캐런이 이셀라에게 최대한 맞춰 줬어도 이셀라는 캐런을 하녀 이상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레이몬드가 처음 캐런에게 끌리기 시작한 것도 동정과 죄책감이었다.
“당신이 이셀라를 죽이는 게 싫어서요.”
캐런은 엎드려서 대답했다.
레이몬드는 캐런을 쓰다듬으려다가 멈췄다.
“제가 살인을 해서 싫습니까?”
자신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레이몬드는 군인이었다. 자신이 죽인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리고 캐런도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 당연히 캐런이 그런 것에 거부감을 느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난번에도 캐런은 그런 기색을 내보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지금 캐런은 이런 소리를 하는 걸까.
레이몬드는 약간 불안해졌다. 자신이 지난번에 무슨 실수를 했을까. 역시 손톱 같은 걸 봐서? 베르딕과 이셀라를 동정해서 레이몬드에게 질린 것일까. 캐런이 살인을 했을 시절에는 모든 것을 책이라고 생각했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서 살인에 다시 거부감을 느낀 걸까? 레이몬드를 부담스러워할 만큼?
레이몬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캐런이 자신을 거부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다. 자신이 캐런을 사랑하는 것만큼 그녀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그리고 그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서로밖에 없었으니까.
캐런은 자신만으로 부족하다고 했다. 무슨 뜻일까?
처음에는 편의성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뿐이 아니다. 캐런은 친구도 필요하다고 했다. 레이몬드는 캐런 하나면 충분했다. 공평하지 않다.
“제가 당신에게 실망을 안겼습니까?”
“무슨 헛소리예요?”
캐런이 찡그리면서 몸을 옆으로 돌렸다. 레이몬드는 캐런의 옆에 비스듬히 누웠다. 캐런의 살결이 느껴진다. 레이몬드는 캐런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레이몬드 경?”
둘만의 세계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세상에는 생각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캐런이 거듭해서 죽는 것은 끔찍하다. 하지만 이렇게 몸이 맞닿아 있으니 불안해서 죽을 것 같던 심장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다음번에는 좀 더 빨리 빠져나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난번에는 처음이라 너무 과하게 행동해서 캐런이 불편했을지 모른다. 그날 전까지는 다시 하인들과 하녀들을 붙여 주고, 좋은 성품의 영애들과 있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
어쩌면 이것도 괜찮을지 모른다.
끝나지 않는 영생이라도 혼자가 아니라 둘이면 몇백 년쯤은 금방 흐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옆에 있어도 캐런을 이해하는 것은 레이몬드밖에 없으니 캐런은 자신의 옆에 영원히 있을 것이다.
“…아.”
레이몬드는 자신이 지난 생에서 왜 캐런을 안는 것을 무서워했는지 다시 깨달았다. 자신은 캐런이 영원히 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내심 생각했던 것이다. 캐런은 계속해서 죽지만 결국은 다시 살아난다. 레이몬드가 캐런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몇백 년과 다르게 이제 그녀는 스스로 자살 행위를 하지는 않을 것이고, 그들은 이렇게 계속해서 다시 만날 것이다.
“지금 너무… 대낮부터.”
캐런이 얼굴을 붉혔지만 레이몬드가 파고드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아직도 그들은 신혼이나 마찬가지였다. 몸이 달아 있는 것은 레이몬드만이 아니었다. 레이몬드는 캐런을 끌어안았다. 캐런이 고통에 얼굴을 찡그렸기에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커튼은 쳐요.”
“이 건물과 맞닿아 있는 곳이 없으니 볼 사람도 없습니다.”
“아, 좀.”
캐런이 레이몬드의 뒷머리를 잡았다. 그리고 혀가 섞였다. 둘의 옷이 급하게 벗겨졌다.
레이몬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정신은 육체의 지배를 받는 법이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 캐런이 레이몬드의 옆에 누워서 그를 올려다봤다.
“이건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요.”
“제가 부족한가요?”
“아뇨, 대화를 끊고 이렇게… 하니까, 정작 중요한 이야기가 흐지부지 넘어가잖아요. 몸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아 줄래요?”
“…네. 제가 잘못했습니다.”
레이몬드는 약간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캐런은 레이몬드의 가슴을 콕콕 찌르더니 마저 말을 이었다.
“제가 당신을 싫어할 리가 없잖아요. 그런 사소한 걸로.”
하지만 그것은 레이몬드 말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더 존재하지 않기 때문 아닐까. 캐런의 세상에는 다른 사람이 없다. 단둘뿐이니까.
“확실히 레이몬드 경, 나이 먹은 티가 나네요.”
“예, 예?”
“사람이 나이 먹으면 음흉해진다더니. 말 똑바로 해요. 왜 이렇게 불안해하는 거죠? 제가 이셀라 양과 친구가 되고 싶다고 한 것이 왜 그리 싫은 건데요? 당신 태도는 너무 과해요.”
“제가 지난번에… 이셀라 양에게 손을 댄 것 때문에, 당신이 실망한 것이 아닙니까? 당신이 이셀라 양을 보호하려는 것은 제게 그렇게 느껴집니다.”
레이몬드는 그것이 약간 억울했다.
자신은 이셀라에게 자신의 사적인 감정을 가지고 문제를 일으킨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베르딕에 대한 증오를 이셀라에게 풀기 너무 좋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자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캐런을 위해서는 자신의 도덕이나 신념 같은 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한 행동에 캐런이 실망해서, 자신을 싫어한다면?
레이몬드는 캐런의 눈을 피했다. 약간 우울했다. 캐런이 자신에게 그러면 안 된다. 지난번의 캐런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은 예의나 의무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이셀라에게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거부감이 들었던 것처럼, 캐런도 잔인해진 자신에게 거부감을 느낀다면. 스스로도 어쩔 수 없다면.
“이미 저도 사람 좀 죽였거든요? 왜 그렇게 땅을 파요?”
“합리나 이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레이몬드 경.”
캐런이 레이몬드 위에 올라탔다. 레이몬드가 약간 신음 소리를 냈지만 못 버틸 무게는 아니었다. 캐런의 눈이 오후의 햇살을 받아서 빛이 났다. 캐런이 위에서 레이몬드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잘 생각해 봐요. 제가 이셀라를 정말로, 당신보다 더 좋아해서 이러겠어요? 이 세상에 레이몬드 경 말고 더 중요한 사람이 있겠어요?”
“당신에게는 선택권이 없지 않습니까. 애인이 필요한 만큼 친구가 필요하다는 것도 압니다. 친구가 더 중요한 사람도 있을 테고, 당신이 이셀라와 친구가 되고 싶다는 것은 제게… 지난번의 생을 거부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당신은 애인 정도가 아니라 동반자죠. 그러니까 이러는 거예요.”
캐런은 위에서 레이몬드를 굽어보면서 그렇게 말을 이었다.
“당신이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게 싫으니까 이러는 거라구요. 레이몬드 경은 이셀라 양을 죽이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사람을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캐런의 손이 레이몬드를 쓸어내렸다. 목소리에서 부드러운 감정이 묻어났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쏟아지는 붉은 머리칼이 태양처럼 레이몬드를 감쌌다. 붉은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진다.
레이몬드를 내려다보는 시선에서 온화한 애정이 떨어졌다.
“당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게 해 주고 싶어서 그렇다구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까.
레이몬드는 자신의 사랑이 아직도 캐런에 비해서는 풋내 나는 것임을 인정해야 했다.
“아니까 다행이네.”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이셀라와 어떻게 친구가 될지 잘 생각해 봐요.”
하지만 그렇다고 답이 나오는 문제는 아니었다. 레이몬드 또한 이셀라와 캐런이 친구가 될 방법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목걸이는 아니었나 봐요. 다른 선물을 하는 것이 나을까요?”
“선물로는 그녀의 마음을 사기 어려워 보입니다.”
“이셀라는 왜 레이몬드 경을 좋아하죠?”
“제가 잘생겼으니까요.”
“…와. 네. 하지만 저도 예쁜데요. 왜 저는 별로 안 좋아할까요.”
캐런은 떨떠름하게 레이몬드를 쳐다보았다. 확실히 레이몬드 정도로 잘생긴 남자는 드물었다. 게다가 레이몬드 정도로 잘생긴데다가 귀족이고 돈도 있고 바람둥이가 아닌 남자는 더더욱 없었다.
“이셀라 양은 남자를 좋아하고 여자를 별로 안 좋아하니까요.”
“아, 아뇨. 알아요. 그냥 순간적으로 나온 대답이었어요.”
캐런은 당연한 이유를 알고서 고개를 푹 숙였다.
이셀라는 캐런을 경쟁자로 보았다. 그리고 캐런뿐 아니라 이셀라도 친구가 없었다.
“당신이 싫다면 그 목표는 언제든지 그만두어도 됩니다. 솔직히 전 그만두었으면 좋겠군요.”
“일단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죠.”
“…에반스 양과 그런 약속을 했습니까?”
“죽이려고 할 때 한번 제안은 해 봤어요.”
캐런은 어두운 복도에서 달아나는 이셀라를 뒤쫓으면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뭐라고 하던가요.”
“미친년이냐고 했어요. 자기도 친구 없으면서. 참 나.”
“…그랬군요. 저도 잘은 모르지만 에반스 양은 친구가 별로 필요해 보이는 사람은 아닙니다.”
“알아요.”
이셀라의 부친이 베르딕인 탓이 제일 크겠지만, 캐런이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그뿐이 아니었다. 이셀라는 친구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귀족 영애들 앞에서도 항상 콧대를 세우고 다녔고 돈 이야기 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이셀라에게 필요한 것은 떠받들어 줄 하녀였다.
“하지만 친구라면 몰라도 하녀가 되고 싶지는 않네요.”
“당연합니다.”
“친구… 아참, 레이몬드 경. 아직까지 이셀라 양과 안 만난 거죠?”
“그렇습니다.”
“우선 확실하게, 철저하게 헤어지고 오세요.”
“지금 말입니까?”
“네.”
캐런은 레이몬드에게 당부했다. 우선 레이몬드가 이셀라와 캐런 사이에 있으면 안 된다. 치정 문제로 넘어가면 지저분해진다. 이셀라가 레이몬드와 있는 캐런을 보고 질투에 눈이 뒤집혔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친구가 되려면 남자 문제는 확실히 정리해야 한다.
“기왕이면 이셀라를 차고 상심한 이셀라를 제가 낚아서 친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좋은 방법 같지는 않군요.”
레이몬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면 레이몬드 경이 이셀라를 괴롭히고 제가 그것을 구하는 건 어때요? 전 레이몬드 경이 나 구할 때가 제일 멋지던데.”
“캐런 당신이 생각해도 그건 좀 무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더 멋있을 수도 있죠!”
“그만두십시오.”
레이몬드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캐런의 말이 맞았다. 이셀라를 죽이거나 납치하는 것이 아니라면, 또한 캐런이 이셀라와 친구가 되고 싶다면 일단 자신이 이셀라와 잘 헤어져야 했다.
“…하아.”
하지만 그것이 가능할 것 같지가 않았다.
레이몬드는 이셀라와 어떻게 헤어져야 할지 생각하니 머리가 아팠다. 한 번도 이셀라는 레이몬드를 놓아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레이몬드는 기억이 되살아나자마자 새로운 삶이 시작되면 먼저 캐런에게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에는 그도 이셀라에게 손을 댈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그녀는 베르딕의 딸이었지만, 결국은 그뿐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레이몬드는 분노의 대상과 목표를 분명히 했었다.
‘캐런.’
이셀라와 빨리 헤어진 후에 그녀보다 먼저 캐런과 합류해야 했다. 레이몬드는 전부터 샀던 목걸이를 다시 샀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별의 선물이었다. 이셀라는 목걸이를 받으며 전처럼 기뻐했지만 레이몬드가 뱉은 말에 얼굴을 굳혔다.
“지, 지금 그게 무슨 소리시와요?”
“전 사랑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셀라, 당신과 결혼할 수 없습니다.”
레이몬드는 간곡하게 말했다.
오랜 세월을 겪고, 자신이 늙어 죽고 나서 다시 얻은 기회였다. 캐런에게 어서 찾아가야 한다. 이셀라 에반스는 자신이 보기에 새파랗게 어렸다. 그때의 레이몬드는 이셀라가 다른 인생을 찾기를 바랐다. 베르딕은 죽여야 했지만.
“…그 여자가 누구와요?”
“당신에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누군지 말씀하지 않으시면 저도 헤어져 드릴 수 없사와요.”
“이셀라!”
캐런의 이름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이제까지 캐런이 몇십 번이나 베르딕에게 죽임당한 것을 기억한다. 자신이 말하면 캐런이 위험에 쳐한다. 레이몬드는 이셀라를 붙들었지만, 이셀라는 손을 거칠게 빼냈다. 레이몬드를 노려보는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레이몬드 경은 약속이 우스운가 보군요.”
“제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목숨 걸고.”
“저도 죽어도 놓아드릴 생각 없으니 잘 생각해 보시와요.”
그때는 최악이었다.
레이몬드가 이셀라를 설득하지 못하고 몰래 하이어 저택에 도착했을 때 캐런은 머리에 총을 쏴서 자살한 후였다. 그녀는 한 번도 자살에 성공한 적이 없었는데.
레이몬드는 캐런의 무덤에 우두커니 서서 그녀의 이름만 곱씹었다.
자신이 평생을 달려서 캐런에게 도착했는데 벌써 그녀는 다음의 인생으로 건너가 버렸다.
“당신은 제 것이어요.”
이셀라는 레이몬드를 놓아주지 않았다.
언제나 시간은 더 걸렸고, 그리고 캐런이 죽은 뒤에는 더더욱 큰 보복이 레이몬드를 덮쳤다. 세이어테스 영지에는 다시 전염병이 돌았고, 베르딕은 레이몬드의 정치적 손을 끊어 놓기 위해 갖은 수를 썼다. 레이몬드는 결국 복수에 성공했지만 그의 옆에 캐런이 없었기에 희열감은 없었다.
어서 죽은 다음에 캐런을 만나야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자신을 놓아달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이셀라에게 불을 지르는 짓이었다. 그래서 두 번째의 레이몬드는 다른 방식을 선택했다.
당시의 레이몬드가 눈을 떴을 때는,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캐런이 또 자살할지도 모른다. 지난번의 캐런이 눈을 뜨자마자 권총으로 자살했다면,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몇 번을 더 시도할지도 모른다. 어서 가야 하는데.
레이몬드는 바로 움직였다.
그리고 굉음이 지상을 흔들었다. 콰아앙! 귀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이어졌다. 귀에서 이명이 났다. 하지만 그것보다 극심한 고통이 레이몬드를 찾아왔다.
“크… 으으… 아아악!”
지뢰를 밟았던 것이다. 발목 하나가 날아갔다. 레이몬드는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물었다. 눈에서 눈물과 피가 떨어졌다. 큰 부상 덕에 레이몬드는 금방 은퇴를 해야 했다.
군인이 발 하나를 잃었다. 빈말로도 괜찮다고 할 수 없었다. 평생 그는 의족을 달고 살아야 할 것이었다. 날아간 수많은 기회, 끝없는 고통, 극심한 괴로움이 그를 쳤다.
그나마 그를 버티게 하는 것은 캐런이었다. 자신의 옆에서 환영으로나마 앉아 있는 캐런이 있었기 때문에 레이몬드는 자신의 사라진 발보다 캐런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난 몇 번이나 죽고 다시 살아요.”
“당신도.”
캐런이 자신을 보면 실망할까?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부족한 그를 보며 고개를 돌리지는 않을까. 일단은 그녀를 만나야 한다. 부끄러움이나 고통보다 머릿속을 꽉 채우는 여자, 그녀를 확인해야 했다.
그렇다면 부상이 빠른 은퇴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 그것이 위안이었다. 그리고 눈앞의 이셀라는 방해물이었다. 레이몬드는 지난 생에서 거짓 증언으로 캐런을 사형대로 끌고 간 여자를 노려보았다.
“레, 레이몬드 님.”
“…이셀라 에반스 양, 여기는 전쟁 중입니다. 돌아가십시오. 저는 제 고향으로 곧 돌아갈 겁니다. 왜 이곳에 오셨습니까. 당신 같은 여자가 이곳에 있는 것은 큰 피해가… 윽….”
레이몬드는 이를 악물었다. 고통이 다시 올라왔다. 약을 아무리 먹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이셀라가 레이몬드의 없어진 발을 보면서 자신의 입을 막았다. 피 냄새가 역한지 코도 막다가 이내 숨을 쉬기 위해 떼고 물었다.
“괜찮으신가와요?”
“…힘듭니다.”
레이몬드는 씹듯이 대답했다.
“캐런 하이어가 사람을 죽인 것을 봤습니다.”
그녀의 그 말 때문에 캐런이 죽었다.
레이몬드는 이셀라의 가는 목을 보면서, 자신이 당장 복수하기 얼마나 좋은 위치에 있는가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그것을 묻는 것은 옳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이를 악물었다. 이셀라가 흠칫 놀랐다.
“제, 제가 찾아온 것이… 싫사와요?”
“돌아가십시오, 이셀라 에반스. 베르딕 에반스 씨와 약혼은 없었던 것으로 하기로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베르딕은 불구자인 레이몬드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직접 찾아오지도 않았고, 짧은 전보로 끝이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좋다. 이셀라는 아직 자신이 얼마나 다쳤는지 확인하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이렇게 한 발이 날아간 불량품은 그녀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셀라는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싫사와요!”
“제, 제가 고작 그런 것으로… 레이몬드 경과 헤어지지 않겠사와요!”
“당신은 더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레이몬드가 원하지 않았다. 자신의 분노가, 자신의 복수심이 이셀라 당신에게까지 번지지 않게. 레이몬드는 베르딕을 죽일 생각이었다. 그의 딸을 옆에 두어 봤자 뭘 한단 말인가.
게다가 그녀를 향하는 복수심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레이몬드는 이셀라를 보면 자신이 점점 흉포해지는 것을 누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셀라는 고개를 연거푸 저었다. 그리고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
“레이몬드 님! 저를 위해 그렇게까지 억지로 말하실 필요 없사와요…!”
“전 정말 당신과 결혼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 알아요. 제가 옆에서 당신을 도와드리겠어요.”
“…….”
말이 통하지 않았다.
“안전 이별….”
“무슨 소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네. 베르딕 에반스 씨는?”
“이셀라 양과 시간을 보내고 나서 보자고 하십니다.”
“잘됐군.”
캐런과 다르게 레이몬드는 도착했다는 말을 하인이 건네자마자 바로 이셀라를 만날 수 있었다.
“레이몬드 님! 다치셨나요?”
“별것 아닙니다. 가벼운 상처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세상에…! 정말 오랜만이어요. 집으로 바로 오실 줄은 몰랐는데, 어서 오시어요.”
이셀라는 급하게 레이몬드를 향해 치마를 부여잡고 달려왔다. 그녀로서는 1년 넘게 레이몬드를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레이몬드는 이셀라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이셀라 에반스.”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이별할 수 있을까?
레이몬드는 식은땀을 흘렸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소용없다, 불구니까 날 버려 달라 해도 소용없다, 돈은 이셀라가 훨씬 많고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혈통과 명예뿐이었다. 그것은 레이몬드가 어떻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레이몬드는 어떻게 하면 자신이 이셀라와 잘 헤어지고 캐런과 이셀라가 친해질 수 있는지 계산하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돈을 빌려 달라고 하면 이셀라는 전부 다 줄 것이고, 다른 여자를 만나면 이셀라는 레이몬드가 아니라 그 여자에게 분노를 쏟을 것이다. 왜 이셀라는 자신은 저렇게 맹목적으로 바라보면서 캐런에게는 조금의 동정도 베풀지 않았단 말인가?
이셀라는 온실로 레이몬드를 안내하면서 가득히 핀 장미를 자랑했다. 이른 봄이었지만 온실 안에서는 갖가지 꽃들이 피어져 있었다. 이셀라가 겹장미 하나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정원사가 새로 품종을 만든 것인데 아름답지 않나요?”
“그렇군요.”
레이몬드는 온실에서 이셀라의 머리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고민에 휩싸였다. 캐런은 자신을 많이 배려했지만, 레이몬드로서는 차라리 이셀라와 베르딕을 죽여 버리는 것이 더 손쉽고 편했다. 그의 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위해 베푸는 그 온정을 버릴 수 없었지만 이미 그는 살인이 더 편한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살인은 처음이 힘들다. 악행은 시작이 무겁다. 한번 수단을 가리지 않기 시작하면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하지만 캐런은 이번에 그가 다시 밝은 길을 걷도록 등을 밀었다. 그녀가 바라면 레이몬드는 얼마든지 다시 다른 길을 걸어야 한다.
“이셀라 에반스 양.”
이셀라가 레이몬드에게로 몸을 돌렸다. 이셀라의 눈이 기대로 반짝였다. 레이몬드는 저런 눈을 한 다른 소녀를 떠올렸다. 기대를 하고 있는 눈이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이셀라의 기대를 채워 줄 수 없었다.
“저는 당신과 결혼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말해야 한다.
레이몬드는 묵묵히 이셀라를 쳐다보았다.
“…이유가 뭐죠?”
이셀라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레이몬드는 이제까지 그가 했던 갖가지 말을 떠올렸다. 다른 여자나, 재물이나, 자신의 부상, 그 무엇도 헤어짐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번에 제가 다치고 나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레이몬드 님이 다친 것 정도는 큰 부상도 아니어요. 그런 것을 걱정하시다니 참으로 배려 깊으시군요.”
하지만 난 널 절대 안 놓아줘. 이셀라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전 당신을 배려해서 한 말이 아닙니다. 짧은 인생을 당신에게 매일 수 없다고 결심했습니다.”
“…지금, 무슨 소리인지 잘….”
“이셀라 에반스 양, 전 당신이 싫습니다.”
레이몬드는 담담하게 말했다.
다른 핑계는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이라고 하든 이셀라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했다. 이셀라가 자신을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레이몬드는 자신의 외모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혈통이라고 생각했다. 레이몬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명예나 예의 등을 짓밟는 것이라면 할 수 있었다.
레이몬드가 목소리를 다듬었다.
“베르딕 에반스가 싫습니다. 당신의 아버지는 최악의 사람입니다. 그는 제 집안을 망쳤습니다.”
“제 아버지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당신은 은혜도 모르는 것인가요?”
“제가 왜 베르딕에게 은혜를 갚아야 합니까? 처음부터 세이어테스 영지에 전염병이 돈 것은 에반스 가문의 토지 개발이 원인이었습니다.”
“근거도 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하지만 근거가 없는 소리가 아니었다. 팬케이르 후작이 베르딕 에반스에 대해 의심했던 부분인 베르딕의 행적은 세월이 흐르면서 더 드러났다. 베르딕의 가장 큰 사업은 무기판매업이었지만, 그는 다방면에 골고루 손을 대고 있었다. 사람의 몸에 관련된 실험도 서슴지 않았다. 베르딕이 전의 삶에서 캐런을 구하기 위해 움직인 적이 있다 하더라도 그의 본성은 악이다. 그는 축재(蓄財)를 위해 무엇도 서슴지 않는다.
“조만간 루트엘라 공작이 방문할 겁니다. 베르딕 에반스 씨가 그를 망명시켜 주겠다며 약속했으니까요. 하지만 웃기지 않습니까? 왕실은 루트엘라 공작을 암살하길 원할 겁니다. 루트엘라 공작이 가지고 있는 땅이 탐나니까요. 분쟁을 조장하기 시작한 것은 당신의 할아버지고, 그들의 땅을 빼앗은 것은 당신의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에 대해 함부로 말씀하시면 아무리 레이몬드 경이라도…!”
제발 날 버려.
하지만 이셀라는 다시 숨을 가다듬었다.
“똑바로 하시와요. 레이몬드 님이 사교계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헛소문을 들으신 것이와요. 잘 알지도 못하시면서 어찌 그런 소리를 하시나요? 레이몬드 경이 그렇게 식견이 좁은 사람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네요.”
“이셀라 에반스.”
“아버지는 아니라구요!”
이셀라는 이번에도 레이몬드를 놓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군대에서만 있으셔서 아직 잘 모르시는 것이와요. 당장 결혼하고, 의원직 생활을 하시다 보면 세상을 알게 되실 거예요.”
“이미 전 충분히 압니다.”
“몰라요!”
이셀라 에반스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레이몬드는 이셀라를 내려다보았다.
이셀라도 자신의 아버지인 베르딕이 갖가지 비합법적인 일을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를 대는 것은 이셀라에게 통하지 않았다. 베르딕이, 가문이 이셀라가 내세울 수 있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뭘 알아요!”
막막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자신에게는 명예도 없고 도덕도 없다는 것을 다시 떠올렸다. 어쩌면.
“제가 잘생겼다는 것을 압니다.”
“…네?”
“거울을 볼 때면 제가 모를 수가 없지 않습니까. 사교계에서도 저 정도의 미남은 없었습니다. 어딜 가나 찬탄을 들으니 알 수밖에 없습니다.”
이셀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레이몬드의 자화자찬을 들었다.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레이몬드의 미모 자랑이 더 이어졌다. 그리고 레이몬드는 말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사교계에서도 수많은 여자들이 따라오더군요. 당신보다 훨씬 아름다운 사람들이 말입니다.”
“…어느 여자들이죠? 레이디 세칠리아인가요? 아니면 레이디 베아트리스?”
“글쎄요.”
레이몬드는 나른하게 웃었다.
“너무 많아서 기억할 수 없군요.”
이셀라의 얼굴이 점점 차갑게 굳었다.
레이몬드는 그 얼굴이 재밌었다. 처음으로 성공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마디를 더 얹었다. 캐런도 들었을 때는 기가 막혀 했던 그 말이었다.
“그래서 당신의 얼굴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전 얼굴만 보니까요.”
이셀라는 미친 듯이 화를 냈다.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험담을 할 때는 얼굴을 붉히는 정도였지만, 외모를 직접적으로 비난하자 이셀라는 거의 분노를 포효했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죽어!”
레이몬드는 얼얼한 얼굴을 차가운 물건으로 문질렀다. 에반스 가문의 하인 하나가 그에게 차가운 물주머니를 가져다주었다. 이셀라는 악질이게도 레이몬드의 다친 눈을 노렸다. 하인도 이셀라가 레이몬드에게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을 처음 봤다.
“왜 그렇게까지 말씀하셨습니까.”
“…….”
레이몬드는 한숨을 쉬었다.
이 하인의 이름이 무엇이더라.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잘하셨습니다. 속이 다 시원하더군요. 이셀라 아가씨… 말이 바른 말이지, 솔직히 그리 예쁜 얼굴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인님이 얼마나 싸고 도셨는지 아주 태도가 기고만장해서 보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레이몬드가 쓰게 웃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준 물주머니를 돌려주었다.
“이건 고맙네.”
“별말씀을요. 그럼 주인님은 뵙지 않고 가실 겁니까?”
“이셀라 양의 의견이 어떨지 모르니까.”
레이몬드는 일어났다.
캐런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실로 캐런의 얼굴이 역시 제일 그의 취향이었다.
“그리고 자네는 말을 좀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헉, 아, 아가씨?”
이셀라 에반스가 가까운 덤불 넘어서 레이몬드를 죽어라 노려보고 있는 중이었다. 레이몬드는 하인을 애도하며 걸음을 옮겼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셀라 에반스.”
“죽어 버려요.”
이셀라는 저주의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 말은 레이몬드에게는 축복과도 같았다. 레이몬드는 발걸음을 옮겼다.
“미안합니다.”
레이몬드는 처음으로 이셀라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그 말은 너무 작아서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단 한 번도 이셀라를 이셀라 그 자체로 본 적이 없었다. 이셀라는 언제나 베르딕의 부차적인 산물이고 자신의 복수를 위한 수단이었다. 레이몬드는 처음으로 악을 지르는 이기적인 소녀 하나를 제대로 보았다. 자신은 그녀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증오는 없었다.
레이몬드는 온실을 나갔다.
“…이셀라에게 그렇게 말했어요?”
“네.”
캐런은 자신의 두 눈을 가렸다.
헤어지고 오라고는 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심하게 말할 줄은 몰랐다. 이셀라가 사교계에 소문내면 어떡하지. 하지만 레이몬드는 화사하게 웃었다. 자신이 할 도리는 다했다는 가벼운 웃음이었다.
“이제 당신이 가서 이셀라 양을 위로하면 될지도 모르겠군요.”
“하아, 그랬으면 좋겠네요. 성공하기를 빌어 줘요.”
“알겠습니다. 선물은 준비했습니까? 그 목걸이를 다시 이셀라 에반스 양에게 가져갈 건가요?”
“…그게 말이에요.”
캐런이 레이몬드를 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 태도가 이상했다. 캐런은 입을 뻐끔거리다가 자신의 머리를 감싸고 신음 소리를 냈다.
“캐런? 어디 아픕니까?”
“…….”
“열은 없는데, 무슨 일 있습니까?”
캐런이 계속 입을 다물자 레이몬드는 고개를 돌려 사람을 불렀다.
“낸시!”
그녀와 붙어 있는 하녀라면 이유를 알 것이다. 하지만 여관은 조용했다. 하녀의 방을 하나 더 잡았는데 옆방은 텅 비어 있었다. 이상하다. 레이몬드가 떠난 후에 시간은 충분했다. 낸시에게 분명 바뀐 여관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목걸이를 가지고 환불하겠다고 기세등등하게 떠났다. 이미 돌아오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레이몬드가 옆방을 살피고 돌아오자 캐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걔 없어요.”
“무슨 소리입니까?”
“목걸이랑 돈 전부 가지고 도망갔어요.”
“…예?”
낸시는 이번에도 유혹에 이기지 못한 것이다.
캐런은 낸시가 남긴 쪽지를 레이몬드에게 넘겨주었다.
사랑하는 아가씨께
레이몬드 님과 만나신 거 축하드려요! 하지만 저도 제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아가씨가 주시기로 한 돈과 목걸이 금액이 차이가 너무 나서 어쩔 수 없더라구요. 행복하시고 오래오래 사세요!
목걸이와 돈은 제 새 출발 자금으로 쓸게요.
테리스 씨도 절 사랑하니 너무 노여워 마시고 우리 앞을 축복해 주세요.
사랑을 듬뿍 담아 낸시 드림
“…테라스는 누구입니까?”
“마부요. 우리 집에서 가장… 듬직한 남자라고 낸시가 전부터 좋아했었거든요.”
“하하하하.”
레이몬드가 웃자 캐런이 한마디를 얹었다.
“참고로 레이몬드 경 돈도 전부 들고 갔어요.”
“…큰일 났군요.”
“네.”
선물은커녕 당장 여관비도 부족하다.
둘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내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겼지….’
캐런은 이마를 짚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낸시는 그 ‘이셀라의 목걸이’도 훔쳐 낼 정도였다. 물욕이 강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번 생에서는 한번 믿어 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바로 뒤통수를 맞을 줄이야.
“레이몬드 경, 지금 얼마나 있나요?”
“보시다시피.”
레이몬드는 텅 빈 주머니를 흔들었다. 먼지만 나온다.
“이셀라에게 줄 새 선물을 들고 가는 건 무리겠네요.”
“선물 대신 마음을 가득 담은 편지를 쓰는 건 어떻겠습니까?”
“무슨 마음요?”
“친구가 되겠다는 진솔한 마음을….”
농담이겠지. 캐런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편지라니. 자신이 받는다고 생각해도 싫었다.
“미남이 줘도 이셀라는 그런 거 안 받을걸요.”
“그렇겠군요.”
레이몬드가 주는 선물이라도 호화품만 받던 이셀라였다. 하물며 캐런이 주는 것이라면 물어볼 필요도 없다. 캐런과 레이몬드는 나란히 앉아 한숨을 푹푹 쉬었다.
“안 만나 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친구가 되기 힘들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그것은 정도의 문제였다. 이셀라가 캐런을 탐탁지 않아 했어도 항상 초반에 같이 시간을 보내며 담소를 나누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 정도의 시간은 보내고 교류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예의니까.
하지만 이번의 이셀라는 직접 찾아온 것이 문제였는지 계속해서 캐런의 방문을 거절했다.
이셀라가 레이몬드에게 크게 실망한 지금, 캐런이 방문해서 위로와 그녀가 제일 좋아하던 목걸이를 선물하면 성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그것도 실패할 수도 있었지만 낸시가 시도해 볼 가치가 있는 방법 하나를 들고 도주해 버렸으니…. 아쉬움만 남았다.
“여관비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모자라기는 하지만 가지고 있는 물건 중 하나를 전당포에 맡기면 될 것 같군요. 하지만 계속 있는 것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 우선은 먼저 하이어 영지로 돌아가 다시 이셀라 양과 만나는 것이 어떻습니까.”
“어차피 가는 길이니 이셀라와 같이 가면 좋을 텐데….”
“만나 주지 않으니 별수 있겠습니까.”
캐런은 레이몬드가 자신의 손목시계를 끌러서 들여다보는 것을 보고 약간 울적해졌다. 어차피 이셀라와 베르딕도 하이어 영지의 집으로 갈 텐데, 당연히 동행할 줄 알았던 예정이 어긋나 버렸다.
“…그리고 결국 아무것도 성공하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돌아갈 생각을 하니 좀 우울하네요.”
“아직 시작하지도 않지 않았습니까. 인생은 어차피 좌절의 연속이라고 하니 그 정도로 우울해하지 마십시오.”
별 위로가 되지 않는 레이몬드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면서 캐런은 아버지에게 돌아가 성공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니 부끄러웠다. 그렇게 당당하게 가서 ‘베르딕을 설득하겠다’, ‘최소한 이셀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겠다’고 선포했는데 현실은 이셀라는 만나지도 못했고 낸시는 캐런의 뒤통수를 쳐서 달아나 버렸다. 역시 화나는데 한 번 더 죽여 버릴까?
“캐런, 그럼 전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짐을 챙기고 마차를 탈 준비를 하십시오.”
“잠깐만요, 레이몬드 경. 역시 아무래도 이대로 돌아가는 것은 아까운 것 같아요.”
“하지만 별수가 없지 않습니까.”
“시도는 해 봐야죠. 이셀라 에반스를 다시 한번 찾아가야겠어요.”
“캐런 하이어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베르딕은 질리지도 않고 또다시 찾아온 캐런 하이어의 끈기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셀라의 상태가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베르딕은 읽던 신문을 내려놓고 안경을 고쳐 썼다.
“아버지! 레이몬드 경과 약혼은 없던 것으로 하고 싶어요! 안 해요!”
“이셀라. 그게 무슨 소리냐.”
이셀라는 침대에 엎드려서 엉엉 울었다.
베르딕이 하인에게 레이몬드를 불러 오라고 했지만 레이몬드는 이미 저택을 빠져나간 지 오래였다. 욕설과 함께 눈물을 짓는 이셀라 대신에 긴장을 하고 있는 하인에게 전말을 들은 베르딕은 머리가 아팠다.
레이몬드와 이셀라가 말다툼을 하다가 레이몬드가 이셀라에게 외모를 가지고 폭언을 했다는 것이다.
레이몬드가 그런 소리를 했다니 베르딕으로서는 믿어지지가 않았지만, 일단은 우는 딸을 달래려고 했다. 이셀라는 침대에서 처박혀 있다가 베르딕을 쏘아보았다.
“이게 다 아버지 탓이에요! 왜 제 얼굴을 더 예쁘게 낳지 않으셨나요! 그리고 레이몬드 경 같은 남자를 고르시다니. 아버지도 보는 눈이 없으시네요!”
“그게 왜 내 탓이냐? 그리고 레이몬드 경이 좋다고 한 건 이셀라 너였다!”
시도는 했다.
하지만 베르딕은 딸의 철없는 투정을 더 받아 줄 정도로 너그럽지는 않았다. 저렇게 난리치는 이유가 외모 때문이라니. 이셀라의 머리카락과 피부 관리와 몸매 관리, 옷, 장신구에 들어가는 돈은 정말로 어마어마했다. 이셀라의 모친도 저렇게 쓰지 않았다.
베르딕은 레이몬드가 헤어지고 싶은 핑계로 얼굴을 댄 것이라고 말을 했지만 이셀라는 그 어떤 말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 듯했다. 레이몬드가 지적한 것이 이셀라가 계속 신경 써 왔던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너 정도면 충분히 예쁘단다.”
하지만 이셀라는 엎어져서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짜증이 난 베르딕은 문을 닫아 버렸다. 게다가 레이몬드가 정말로 이셀라와 파혼할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셀라에게 묻고 알아서 하게 해라.”
베르딕은 이셀라의 징징거리는 소리가 듣기 싫었다. 뭐든 이셀라의 관심을 돌릴 화제가 있으면 좋다. 차라리 캐런 하이어에게 화풀이라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베르딕이 허락하자 하인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갖는 계기는 제각기 다르다. 그래서 캐런은 이제까지 시도하지 않았던 방법을 해 보기로 했다.
“어쩌면 통할지도 몰라요.”
“캐런, 솔직히 저로서는 찬성하기 어렵습니다.”
“밑져야 본전이잖아요.”
“안 하느니만 못한 일입니다.”
캐런은 이셀라에게 돈을 빌리기로 결심했다.
“실패해도 기껏해야 거지라고 물벼락이나 맞겠죠.”
“…그냥 며칠 기다려 주면 돈을 구해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냥 절 믿고 기다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이셀라 양이 좋아하는 물건을 더 떠올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레이몬드 경이야 말로 기분 나쁜 짓 하지 말고 그냥 지켜보기나 해요.”
“기분 나쁜….”
“이셀라를 납치한다거나 죽인다거나 하는 짓 말이에요. 물론 저를 위해 한 것인 줄 잘 알지만…. 그 방법은 실패했었으니까 이번 생에서는 제가 알아서 한다구요.”
레이몬드는 돈을 빌리자는 생각에 전혀 찬성을 하지 않았지만, 캐런은 나름대로 이것도 방법일 것이라 생각했다.
사람들은 도움을 받았을 때보다, 자신이 도움을 주었을 때 더 긍정적인 마음을 가진다. 부모와 자식을 동일 선상에 두었을 때 자식을 사랑하는 이가 더 많은 것도 그런 것 때문일 것이다. 자식을 가져 본 적 없는 캐런으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보통 그러했다. 어쩌면 이셀라는 선물을 자기에게 주는 사람보다 자신이 선물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더 좋아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가만, 이셀라가 전에 나한테 몇 번 뽐내면서 선물을 주기는 했었는데.’
캐런은 고개를 흔들었다. 과시용으로 무언가를 주는 것과 곤란한 사람을 도우면서 보람을 얻는 것은 다르다. 이셀라가 어쩌면 캐런을 도우면서 뿌듯함을 느끼는 새로운 면모가 있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잘되면 이셀라와 친구가 될 계기도 되는 것이고, 어긋나더라도 아무것도 못 하는 지금보다는 나을 것이다. 캐런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슨 선물을 가져왔나요?”
화사한 응접실에서 칙칙한 이셀라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울었던 모양이다. 레이몬드가 대체 얼마나 인신공격을 했기에 애가 이 모양이야. 아무래도 레이몬드의 충고를 듣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캐런은 마른침을 삼켰다.
“실은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어요, 이셀라.”
“…계속 선물을 가져오더니, 이젠 다른 방법인가요? 설마 웃기지도 않는 마음의 선물 같은 건 아니겠지요.”
“솔직히 말해서, 부탁할 것이 있어서 왔어요.”
이셀라의 목소리는 더 가라앉아서 캐런은 약간 긴장해야 했다.
그리고 자신이 이셀라 앞에서 긴장한다는 것에 약간은 자존심이 상했다.
“돈을 빌릴 수 있을까요?”
캐런은 질문을 하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물을 부을까? 소리를 지를까?
하지만 의외로 잠잠한 반응에 다시 천천히 눈을 떴다. 이셀라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캐런을 계속 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이유가 궁금하네요.”
캐런은 구구절절한 사연을 연극적인 어조를 섞어 가면서 늘어놓았다.
자신을 어렸을 때부터 돌봐 주던 유모나 마찬가지였던 하녀가 마부와 눈이 맞아 목걸이와 현금을 전부 들고 달아나 버렸다. 그리고 그 목걸이를 사느라 막대한 돈이 들어갔다는 말도 같이 넣었다.
“…세상에.”
이셀라는 그 목걸이를 사느라 재정이 휘청였다는 말에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캐런을 쳐다보았지만, 낸시에 대해서는 불쾌해했다.
“하녀가 마부와 같이 제 돈을 전부 들고 달아나 버렸답니다…. 전 이제 돌아갈 돈조차 없어요.”
“…그런 것들은 다 잡아 죽여야 해요.”
이셀라는 듣다가 낸시와 마부를 같이 욕하기 시작했다.
어느 고용주든 사용인을 여럿 두기 시작하면 하나같이 그들과 있는 마찰에 골머리를 앓았다. 사소하게는 제대로 일을 하지 않는다, 고용주를 우습게 본다부터 돈을 들고 도망가거나 바람을 피웠다던가.
사람이 친해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남을 욕하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둘은 열심히 하인들을 욕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대화는 길어져 하인들이 계속 간식거리를 내왔다. 이셀라는 과자를 으득으득 씹었다. 품위 대신 분노가 담겨 있었다. 전에 이셀라는 살찐다고 저런 과자는 먹지 않았는데.
“잘해 주면 꼭 그렇게 뒤통수를 쳐요….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렇죠.”
캐런은 가만두지 않는다는 대상이 레이몬드는 아니기를 바랐지만 이셀라의 눈을 보니 레이몬드도 포함이 되어 있는 것 같았다.
한참 동안 캐런과 이야기를 나누며 간식거리를 먹던 이셀라는 입가를 닦아내고 캐런을 바라보았다.
“좋아요, 빌려줄게요.”
“네?”
“빌려준다구요.”
이셀라는 아직도 거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말인가요? 고마워요 이셀라 양.”
캐런의 얼굴이 밝아졌다. 온실의 빛이 이셀라의 얼굴을 비췄다. 눈은 통통 부어 있었고 잠을 설쳐서 그런지 얼굴에는 뾰루지가 나 있었지만, 그래도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인생은 정말로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그럼 이걸로 친구 비슷한 관계로 갈 수 있는 건가? 하지만 캐런의 생각은 이셀라의 뒤이은 말에 깨졌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역시나.
캐런은 입맛이 썼다. 역시 이셀라가 그냥 선뜻 해 줄 리가 없지. 대화 한 번으로 동질감을 사고 친구가 되고 돈을 빌려준다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은 여러 가지가 변했으니까 어쩌면 더 잘 풀릴지도 모른다. 이셀라가 자신의 이야기에 이렇게 집중한 것도 처음 있는 일 아닌가. 이셀라가 어떤 조건을 내밀더라도 캐런은 가능한 맞춰 줄 용의가 있었다. 캐런은 희망을 가지고 이셀라를 바라보았다.
“어떤 조건인가요?”
“가출하려고 하는데 도와줘요.”
하지만 이건 예상 밖이었다.
캐런은 목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마차는 구입해도, 말을 몰 사람이 문제였다. 이셀라가 아무리 돈이 있다고 하더라도 마을의 전반적인 경제를 꽉 쥐고 있는 베르딕의 분노를 살 만한 일을 할 사람은 없었다.
마을에서 이셀라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고, 행여나 위험한 일을 하게 될까 봐 다들 손사래를 쳤다. 베르딕은 철저하게 보복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도 그와 얽히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레이몬드가 직접 그들을 호위할 수도 없었다. 이셀라가 거부할 것이 분명했다. 레이몬드가 머리에 가발이라도 쓸까 했지만 그의 몸이나 키, 목소리 같은 것을 감출 수는 없었다.
결국 아는 사람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고, 그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실력 있고 돈이면 가장 빨리 달려올 사람은 이 남자밖에 없었다.
“실력은 좋습니다.”
하지만 레이몬드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캐런은 시온을 직접 만나고 나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시온 엘렉트라 경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캐런 하이어 영애.”
“안녕하세요, 시온 경.”
레이몬드는 그를 소개했다. 젊은 기사였다. 캐런은 결혼식 날 본 적 있던 젊은 남자의 얼굴을 기억했다. 레이몬드의 직속 후배였다. 같은 방을 썼다고 했었다. 하지만 기억 속의 그는 항상 큰 부상으로 인해 얼굴의 반 이상이 검게 물들어 있거나 큰 화상이 얼굴에 있곤 했었다.
지나치게 인상적이었던 그때와 다르게 지금 그의 얼굴은 미남이라 불릴 만했다. 레이몬드가 한쪽 눈을 다쳐서 그런 걸까. 캐런은 마치 뒤바뀐 듯한 그들의 모습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레이몬드 경의 후배시라구요.”
“예. 그쪽은 레이몬드 경의 내연녀시구요.”
“시온!”
“아, 죄송.”
캐런은 눈을 깜빡였다.
화를 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에 레이몬드가 시온의 뒷목을 잡아 들어 올렸다.
“비난하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정말로요. 그저 영애를 직접 만나 뵈니 레이몬드 경이 약혼을 파투 낸 이유를 알 것 같아서 말입니다. 내연녀라는 표현은 적당하지 않겠군요. 애인 맞으시죠?”
“말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설마 짝사랑입니까?”
“…닥쳐. 캐런 양은… 그러니까, 이번에 이셀라 양과 어쩌다가 얽힌 사람일 뿐이야.”
“어련하시겠습니까.”
레이몬드는 그의 명치에 주먹이라도 꽂을까 생각하다가 자신들을 빤하게 쳐다보는 캐런을 보고 그만두었다. 다갈색 머리의 미끈한 남자는 위협을 듣고도 빙글빙글 웃었다.
“죄송합니다, 캐런. 당장 마부를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에요. 잘 부탁드려요, 시온 경.”
지금 중요한 것은 이셀라 하나지, 다른 사람에게까지 더 신경을 쓸 필요는 없지 않은가. 캐런은 그렇게 생각하며 시온의 손을 꽉 잡았다. 힘이 들어갔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며칠 뒤 이셀라는 새벽에 집을 빠져나왔다. 캐런이 준비한 마차에 올라탄 이셀라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집을 나오는 건 처음이에요. 정말 두근거리네요. 캐런, 당신은 어떤가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이셀라.”
두근거려서 죽을 것 같아요. 베르딕이 이걸 빌미로 제 목을 치지는 않겠죠? 캐런은 이셀라의 들뜬 얼굴을 보면서 침을 삼켰다. 이젠 정말 친구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아니면 베르딕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니까.
“우선 수도에서 대성전으로 가려구요. 가서 보호 요청을 해야지.”
“보호 요청이요?”
“네. 모든 신전은 신성한 결혼을 수호할 의무가 있으니까요. 원하지 않는 결혼을 피해 도망 왔다고 할 생각이에요.”
이셀라가 정한 목적지는 캐런이 전혀 예상치 못한 곳이었다. 이셀라가 말한 보호의 의무는 모든 신전이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은 부친과 형제를 피해 산속 깊숙이 있는 수도원을 찾았다. 수도의 대성전이라니. 그곳은 종교의 장이라기보다는 권력의 장이었다. 가자마자 베르딕에게 소식이 들어갈 것이다.
“대성전으로 갈 필요가 있나요? 차라리 한적한 수도원으로 가야지 베르딕 씨가 못 알아차릴 텐데요. 멀리 가는 것은 어때요?”
차라리 아예 새로운 곳이면 캐런으로서는 신선한 여행이니 더 좋을 것이다.
아예 새로운 곳, 끝없이 펼쳐진 바다라거나 아니면 울창한 숲에 둘러싸여 있는 장소가 좋지 않을까. 캐런으로서는 이왕 가는 것 아주 멀리멀리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셀라는 고개를 저었다.
“캐런, 전 아버지를 피해 단순히 도망가는 것이 아니에요. 대성전쯤 되어야 아버지가 절 강제로 잡아가지 못할 테니까요. 그리고 수도에서 놀아야지, 한적한 곳으로 가면 뭐 하고 놀아요?”
아, 놀려고.
“그렇군요. 단단히… 준비했나 봐요.”
“최소 1년은 안 돌아가요.”
그때까지 자신의 목은 붙어 있겠지. 그날 전까지는 죽지 않으니까.
하지만 캐런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자마자 자신의 변화를 바로 상기했다. 이제 자신의 수명을 무엇으로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젠 그 전에도 죽는다.
캐런의 속이 어떻든 이셀라는 마냥 들떠 있었다.
자신은 아버지의 꼭두각시나 마찬가지였다며, 한번 세상을 아버지 없이 나가 보겠다는 그녀의 포부를 듣자 캐런은 목이 근질거리는 것 같았다. 레이몬드가 이셀라를 찬 것이 그녀에게 그만큼 큰 영향을 준 모양이었다.
한참을 달리고 어느새 밤이 되었다.
레이몬드가 추천한 시온은 마차를 거칠게 다루었다. 게다가 몰래 구한 마차는 작고 불편했다. 캐런과 이셀라는 피곤이 쌓여 밀가루 반죽처럼 퍼져 가고 있었다.
“죽을 것 같아요….”
덜컹.
다행히 마차가 멈췄다. 시온 경이 문밖에서 일렀다.
“오늘은 여기서 머무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기는….”
캐런은 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얼굴을 찡그렸다. 여기는 좋지 않다. 또다시 그 장소였다. 자신이 죽은 그 탑이었다. 오늘이 며칠이었지? 이 탑은 위험하다. 캐런은 자신이 레이몬드와 만났던 그날을 생각했다. 그때 루트엘라 공작의 무리와 마주쳤던 것을 기억하면 이 탑에서 하루를 묵는 것은 불길했다.
“여기서 하루는 묵고 올라가야 합니다.”
“안 돼요, 출발해요.”
캐런은 지난번의 날짜가 오늘과 똑같았는지 기억해 내려 했지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지난 몇 번의 삶은 시간이 워낙 뒤죽박죽이었다. 그리고 루트엘라 공작과 만난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오늘이 그날이었나? 하지만 아직은 이른 것 같은데. 캐런은 긴장에 주먹을 쥐었다. 지금 그들의 곁에 레이몬드는 없다. 이 탑에서 벗어나야 한다.
“조금이라도 빨리 수도로 도착하는 것이 낫지 않겠어요? 이셀라, 그 편이 나아요.”
“난 허리가 아파서 쉬고 싶은데요.”
이셀라가 찌뿌둥한 얼굴로 말했다. 거칠게 모는 작고 불편한 마차를 오랫동안 탄 것이 영 피곤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캐런은 이 탑에서 머무는 것이 불안했다.
“여기서 머물다가 수도에 도착도 못 하고 베르딕 씨에게 잡히면 어떡하구요. 이봐요, 그냥 계속 가는 것이 낫지 않겠어요?”
“아뇨, 불가능합니다. 밤의 숲이 더 위험해요. 종일 달려서 말들도 더 못 움직입니다. 이러다 숲에서 곰이라도 만나면 다 죽어요.”
“그래요 캐런, 역시 더 가는 건 무리예요.”
캐런은 불안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시온의 말도 맞았다. 자신이 이곳을 반대하는 건 전생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시기와 장소만 맞으면 삶은 전생과 비슷하게 흘러갔다. 그것을 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는 것이 좋을까.
“내가 실은 예지몽을 꾸는데.”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시죠?”
“…….”
듣지도 않는군.
캐런은 레이몬드가 붙여 준 시온 경을 노려보았지만 그는 모르는 척했다.
껄렁하기 짝이 없는 남자였다. 하지만 캐런이 뭐라고 하든 이셀라는 일단 멈춰서 쉰다는 것에 신이 난 얼굴이었으니 별수 없었다.
“저 탑은 오랜만이군요! 여름 사냥 때 가끔 오는 곳이지만 탑은 잘 안 쓰는데.”
“그냥 올라가지 말고 아래서 쉬는 게 낫지 않을까요?”
“마차가 더 위험하니 그냥 올라가시죠?”
“…그래요.”
아무도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니 별수 없다.
캐런은 새삼스레 레이몬드가 보고 싶어졌다.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니 좀 기운이 빠진다. 지금쯤 레이몬드는 어디에 있을까? 자신의 일을 처리하고 수도에서 다시 보자고 했지만, 캐런은 옆에 그가 없는 게 며칠이나 되었다고 벌써 허전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그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
캐런은 목을 매만지면서 탑을 따라 올라갔다.
“당신은 왜 따라오는 것인가와요?”
이셀라가 계단을 올라가다 멈추고 캐런의 뒤를 따라오는 시온 경을 보면서 물었다. 시온이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키며 되물었다.
“저 말입니까?”
“네, 위에는 방이 하나뿐이니 당신은 내려가시어요.”
“저 혼자 마차에서 자라구요?”
마부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어이없다는 듯이 이셀라를 올려다보았다. 이셀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당연한 것 아니와요? 캐런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어떻게 마부와 아가씨들이 같은 공간에서 자요?”
“물론이죠.”
캐런은 생긋 웃으면서 시온, 마부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은 무조건 이셀라의 편을 하기로 했으니까. 이셀라는 캐런의 대답에 흡족해하면서 마부의 말은 끝까지 듣지도 않고 올라가 버렸다.
“지금 저보고 혼자 몸빵하라고?”
캐런은 마부에게로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그러려고 레이몬드 경의 추천을 받아 온 것 아닌가요?”
“…….”
남자는 뒷머리를 벅벅 긁더니 얼굴을 찡그리고 내려갔다.
캐런은 영 불손한 남자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추천해 준 레이몬드의 얼굴을 봐서라도 그와 잘 지내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이셀라는 새근거리면서 금세 잠이 들었지만 캐런은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 탑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캐런은 일어나서 창밖을 내다보며 마차의 위치를 확인하고, 다시 앉아서 이셀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잠을 자는 이셀라는 마치 과거의 어느 날 같았다.
‘…하.’
이대로 가면 어떻게 될까. 캐런은 이셀라의 자는 모습이 익숙했다. 그녀는 이셀라의 시녀였었고, 그녀의 간병인 역할도 했었다. 이번에는 친구가 되겠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캐런이 이셀라에게 어떤 매력을 느껴서 결심한 것도 아니었다.
캐런은 벌써부터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다. 의도가 있는 접근은 피곤하다. 이셀라의 제멋대로인 행동이 자신에게 이번에도 죽음을 몰고 올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힘이 빠졌다.
“…이셀라.”
“…….”
이셀라는 깊게 잠이 들었는지 불러도 일어나지 않았다.
캐런은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기시감을 느꼈다. 지난번에 잠든 이셀라의 목을 보면서 강하게 느꼈던 유혹이 다시 엄습해 온다. 지난번에 그녀를 죽이려다가 그녀가 캐런에게 먹인 한 방은 어찌나 재밌었는지 말로 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리고 결국 그때 캐런은 이셀라를 죽이는 것을 실패하지 않았는가. 이번에도 그녀를 죽이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분명 친구가 되는 것보다 훨씬 단순한 방법이 그녀 앞에 있었다. 분명히 겪어 본 적 없는 사건이 또다시 몰아칠지도 모른다. 낸시의 죽음으로 시작되었던 그 1년의 변화는 어마어마했다. 이셀라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비중이 높은 사람이었다. 분명, 엄청나게 변하겠지. 정말 재밌을 것이다.
“…….”
캐런은 조용히 이불을 끌어올려 이셀라의 목 아래에 덮었다. 손 아래로 이셀라의 온기가 느껴진다. 캐런은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보다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셀라에게서 돌아누워 잠을 청했다.
‘…괜찮아.’
캐런은 그녀를 죽여서 얻는 기쁨보다 친구가 되면서 얻는 기쁨을 선택하기로 결심했다. 그녀의 알량한 호기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자신이 갑작스레 그녀에게 연민을 갖게 되어서가 아니었다. 레이몬드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자신은 성녀라도 될 수 있었다. 그가 악귀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일어나라.”
오, 제발.
캐런은 가물거리는 눈을 다시 질끈 감고 이불을 끌어 올렸다. 이셀라처럼 힘들다는 소리를 안 했을 뿐이지 캐런도 온몸이 피곤했다. 그리고 거칠게 흔드는 손길이 누군지 알 것 같았기에 캐런은 더 울고 싶어졌다.
레이몬드가 추천한 마부를 일부러 아래에 배치했는데 벌써 죽은 것일까? 레이몬드를 데리고 왔어야 했을까? 그가 온다면 지난번처럼 자신을 데리고 갈 텐데. 자신을 잠에서 깨우는 이 사람들을 전부 죽이고.
아니다. 자신은 그게 싫어서 결심하지 않았는가. 캐런은 눈을 떴다. 예상했던 사람들이 자신의 주변에 서 있었다. 날짜가 맞지 않을 수도 있어, 하고 기대했지만 역시 안 좋은 일은 꼭 이렇게 빗겨 가지도 않고 일어나고는 했다.
“…누구세요.”
이미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루트엘라 공작의 일행이었다.
“당장 일어나.”
“…누구세요?”
캐런은 울고 싶은 마음을 참으면서 전에 했던 질문을 다시 했다. 이번에도 한둘이 아니었다. 노인과 어린아이. 백색산맥 너머의 억양. 틀림없는 루트엘라 공작의 사람들이었다.
“넌 누구냐, 베르딕 에반스와는 무슨 관계지? 대답해.”
남자가 거칠게 캐런을 일으켜 세웠다.
캐런은 주변을 살펴보았다. 침대에는 이셀라가 없었다. 설마. 캐런은 이를 악물었다. 벌써 이셀라는 죽은 걸까? 지난번에 낸시는 이 자리에서 바로 죽었다. 이셀라가 그런 역할이 된 걸까?
“넌 누구냐.”
“…제 이름은 캐런 하이어, 캐서린 노라 하이어의 딸입니다. 어머니의 처녀적 성은 에니드였습니다.”
“에니드 백작 부인의 외손녀입니다.”
“아, 그 카를라 대공비의 증외손녀군.”
뒤로 물러나 있던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이번에도 캐런에게 다가온다.
“자네가 왜 여기에 있지?”
반복되는 질문, 반복되는 상황. 하지만 이번에 레이몬드는 없다. 이셀라가 옆에 있기 때문에 레이몬드는 나중에 그녀의 눈을 피해 다시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여기서 멀리 떨어진 그의 저택으로 갔을 것이다.
“수도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거기까지 대답하고 캐런은 입을 다물었다. 저자들이 누군지 아니 정체를 물을 필요는 없다. 입을 다물고 가능한 조용히 끝내야 한다. 가능한 그들이 그냥 지나가기를. 하지만 루트엘라 공작은 희망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우리가 누구인지 묻지 않나?”
“…….”
“현명하군.”
“죽여야 합니다. 누구든 우리를 본 자가 있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젠장, 대화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흘러간다. 이미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탑에 머물러서는 안 되었다. 아니, 이 숲을 통과하지도 말았어야 한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다른 길을 찾았어야 했다. 아니면 이셀라의 집에 찾아간 것부터 문제였을까. 캐런은 자신의 선택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더듬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귀즈 왕세자의 사생아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보가 들어갈지도 모릅니다.”
저 헛소문은 어떻게 하면 지울 수 있을까? 캐런은 다시 들어도 귀가 썩을 것 같은 말을 하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이번에도 사람들은 캐런을 살려 둘 마음이 없어 보였다. 이셀라는 어디에 있을까. 캐런은 이번 생에서의 자신이 어느 부분에서 실패한 건지 생각했다. 이셀라와 친구가 되는 길이 너무 험난하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노인이 캐런에게 다가왔다. 역시 이번에도 캐런은 죽는 것이다. 이번에는 레이몬드가 없으니 빨리 끝이 나는 걸까.
“꺄아아아아악!”
“거기서 한 발짝도 더 안 움직이는 게 좋을걸?”
“아, 안 돼!”
하지만 그 순간 상황이 뒤바뀌었다. 캐런에게 다가오던 노인은 급하게 몸을 돌려 창가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거기에는 노인의 손녀와 시온이 서 있었다. 정확하게는 시온만 서 있었다. 소녀의 몸은 창 너머로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네놈은 누구냐!”
“할, 할아버지…! 살려 주세요!”
“어허, 다가오지 마시죠? 한 발짝이라도 더 움직이면 너무 무서워서 힘 빠질 것 같으니까.”
레이몬드가 추천한 마부는 여자아이의 팔을 한 손으로 잡고 창밖으로 흔들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캐런에게 향해 있을 때 들어온 것일까. 남자가 빙글빙글 웃으면서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당장 그 애를 놓아줘!”
“거기 있는 아가씨나 놓아주시죠.”
사람들이 급하게 캐런을 놓았다.
“이제 됐지? 어서 그 애를 이리…. 안쪽으로….”
“총도 내려놓으셔야지.”
“네놈을 어떻게 믿고!”
“그럼 말든가”
그리고 손을 놓았다.
“아, 아악!”
“안 돼!”
하지만 떨어지지는 않았다. 남자가 놓았다가 잽싸게 다시 여자아이의 목 뒤를 잡아챘기 때문이다. 작은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내가 농담하는 것 같으면 계속 그러셔도 상관없고. 자, 가진 거 전부 내려놓고 알몸으로 숲 저편으로 떠나시죠? 안 그러면 이번엔 정말 놓을 테니까. 뭐, 운 좋으면 살겠지. 반병신 정도 되어서.”
“네놈이 그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지금 내가 안 이러면 더 위험할 것 같지 않나?”
그러면서 혀로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이 상황을 명백히 즐기고 있었다. 캐런은 사람들의 분위기가 점점 더 험악해지는 것을 느꼈다. 좋지 않다. 이 사람들 또한 죽음을 각오하고 온 사람들이다.
‘여차하면….’
저쪽 입장에선 아이가 루트엘라 공작의 손녀인 것과 별개로 전부가 위험해지느니 하나만 죽는 것이 낫다.
“빨리 물러나지 않으면 이 애 머리가 부서질지도 몰라?”
“…….”
그만.
마부는 지나치게 도발하고 있다. 사람들은 패닉에서 벗어나 하나둘 서로 눈짓을 하고 있다. 아무리 저 마부가 아이를 가지고 협박하더라도 남자는 하나, 총을 든 남자는 넷. 결과는 뻔하다. 상황이 좋지 않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캐런이 어떻게 수습을 한단 말인가?
“…….”
마부와 눈이 마주쳤다. 캐런은 마부를 보며 주먹을 쥐었다. 자신 혼자라도 뒤로 빠져나가라는 뜻인가. 캐런은 뒤로 조금씩 물러났다. 저 남자가 시간을 끌 동안 자신은 숨어야 한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최선이다. 천천히. 조용히.
“…어머나? 누구세요?”
하지만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캐런은 다 끝난 것을 알았다.
“응? 캐런?”
이셀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 있었다. 그녀는 자다가 침대 옆으로 떨어져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침묵이 사람들 사이에서 짙게 깔렸다. 그리고 그것이 깨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캐런은 이셀라를 급하게 불렀다.
“이셀라 에반스.”
“지, 지금… 읍, 으으읍!”
“쉿, 이셀라. 흥분하지 말아요.”
캐런은 비명을 지르려는 이셀라에게 급히 달려가 입을 틀어막았다. ‘이셀라’라는 갑작스러운 인물의 등장은 루트엘라 공작의 사람들에게도 뜻밖이어서 당장에 큰일은 없었다. 캐런은 이셀라의 입을 막고는 재빨리 말했다.
“이셀라, 지금 저 사람들은 망명 중에 우리를 발견하고 죽이려고 하고 있어요. 그리고 시온 경이 우리를 지키기 위해 저렇게 대치하고 있는 중이에요.”
캐런은 공작의 손녀의 팔을 잡고 창밖에서 던질 준비를 하는 시온 경을 보면서 침을 삼켰다.
‘수단이 너무 거칠잖아.’
시온의 실력은 레이몬드만큼까지는 아니어도 괜찮았다. 어린아이를 인질로 잡고 흥정을 시도하는 것도 과격하지만 틀린 방법은 아니었다. 루트엘라 공작이 그만큼 수세에 몰려 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캐런은 공작 옆에 있던 젊은 남자가 총을 매만지는 것을 보면서 이셀라에게 마저 말했다.
“알겠어요? 이셀라, 흥분하지 않겠다면 놓을게요.”
“…읍.”
“알겠어요?”
이셀라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캐런은 천천히 손을 그녀의 입에서 뗐다.
“마부가 기사인가요? 그런 말은 안 했잖아요.”
“지금 그게 중요….”
“당신이랑 어떻게 아는 사이인가요?”
“…….”
캐런은 다시 이셀라의 입을 틀어막을까 고민했다.
“이셀라 에반스, 지금 그게….”
캐런은 그리고 이내 깨달았다.
“그게 중요하군요.”
정확히는, 이셀라에게 다른 일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아버지에게 부탁해서 소개받았어요. 하지만 평판이 그리 좋은 남자가 아니라….”
“기사라…. 미혼인가요?”
“네.”
남자들은 이셀라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시온 역시 창가에서 그들을 보면서 기가 찬 듯 말을 이었다.
“캐런 하이어 영애, 당신이라도 제정신을 차리시죠? 그리고 제 평판이 어때서 그렇습니까?”
“시온 경, 그 아이를 내려 줘요.”
“예?”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어요.”
정말 오랜만에 지난번 생의 기억이 도움이 되는군. 캐런은 웃었다. 그리고 루트엘라 공작에게 이셀라 에반스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 아가씨가 누군지 아시나요, 루트엘라 공작님.”
“내 이름을 아는군?”
“네. 루트엘라 공작님. 그리고 그게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에요.”
지난번의 루트엘라 공작은 자신의 이름을 일부러 말해 주며 캐런을 죽이려고 했다. 캐런은 노인과 시온을 번갈아 보았다. 여기에 자신 혼자만 있다면, 만약에 여기에 있는 것이 시온이 아닌 레이몬드였다면 상황은 지난번과 똑같았을 것이다. 레이몬드는 전부 죽이고 떠날 테지만 시온은 그 정도의 실력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셀라가 있다.
“베르딕 에반스의 하나뿐인 딸 이셀라 에반스 양이 여기 있으니까요.”
젊은 남자가 나서서 이셀라의 얼굴을 면밀하게 관찰했지만 그로서도 확신이 없는 듯했다. 그는 캐런에게 물었다.
“입증할 방법은?”
“그건 당신들이 생각해야지요. 하지만 이 아가씨를 건들면 이제 당신들은 끝이에요. 베르딕의 하나뿐인 딸이니까.”
캐런은 그를 보면서 대답했다. 이셀라 에반스가 여기에 있다. 루트엘라 공작은 베르딕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공작이 신음을 흘렸다. 그들은 지금 망명 중이었다. 이 탑에서 베르딕이 보낸 사람과 합류해서 그의 안내를 받아 은신처로 가야 했는데, 예상과 달리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하지만 공작의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셀라가 루트엘라 공작에게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제가 아버지의 직인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정말 베르딕의 딸이오?”
“네. 지금 전 수도로 이동 중이었사와요. 저희를 이대로 풀어 주시고 직인과 제 편지를 가지고 아버지에게 가시어요. 그럼 이대로 된 것 아닌가요?”
“…확실히, 당신 말대로요.”
언제 그런 것도 챙겼어?
캐런은 단단히 가출, 아니 출가 준비를 한 이셀라를 거의 존경에 가까운 눈빛으로 쳐다보게 되었다.
다소 소란이 있었지만 루트엘라 공작과 이셀라는 합의를 보았다.
“이걸 아버지에게 전해 주시어요.”
“알겠다네. 더 전할 말은 없는가?”
이셀라는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스스로 돌아갈 때까지 절대 찾지 말라고 전해 주시어요. 만약에 절 강제로 끌고 가려 하신다면.”
이셀라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목을 그었다.
“죽음뿐이어요.”
“…부모에게 할 소리는 아니군. 알겠소.”
이셀라는 루트엘라 공작에게 자신이 쓴 편지를 전해 주었다. 공작은 편지를 받아 자신의 품에 잘 갈무리해 넣고는 손녀의 손을 잡았다.
“부디 여행길이 평온하길 바라지. 이셀라 에반스 양…. 그리고 캐런 하이어 영애도.”
“감사합니다.”
“가자, 애야.”
탁.
“…놀랍네요, 이셀라 양.”
캐런은 옆의 이셀라를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이셀라는 캐런을 흘겨본 채 코웃음을 쳤다.
“아버지에게서 듣긴 했지만 여기서 마주칠 줄은 몰랐사와요. 참나, 다들 별것도 아닌 걸로 호들갑 떨기는.”
정말로 놀라웠다.
상황은 놀랍도록 빠르게 수습되었다. 마부가 공작의 손녀를 위협할 때, 캐런은 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셀라가 베르딕의 딸임을 밝히자 상황은 반전되었다.
왕세자와 엮여 유명한 어머니를 둔 탓에 위험 요소만 잔뜩 끌어안은 캐런과는 상황이 달랐다. 그 사실이 이셀라로서는 퍽이나 기분이 좋은 듯했다.
“가문이 유명한 것도 별 소용없군요, 캐런.”
“정말 대단해요, 이셀라 양.”
“알면 됐어요.”
“정말 멋져요, 이셀라 양.”
“…….”
“정말이에요.”
캐런은 애매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이셀라에게 환한 웃음으로 마주하며 대답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서 시온을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뭘 그렇게 노려봅니까?”
“당신 때문에 일이 더 위험해질 뻔했어요. 일 똑바로 안 하나요? 이셀라 양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거 나 아니었으면 둘 다 자는 새에 목이 따였을 걸.”
“말 좀!”
“됐사와요. 캐런, 그의 말이 맞잖아요.”
“…네?”
“전 더 이상 투정부리지 않겠사와요. 어서 수도로 출발해요.”
캐런은 이셀라가 하는 소리를 듣고 자신이 잘못 들었나, 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이셀라는 정말로 담담하게 대답하고 자신의 옷을 챙겨서 일어났다.
사랑의 슬픔이 정말 이셀라를 변하게 한 것일까? 캐런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시온을 쳐다보았지만 시온은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는 이셀라를 잘 모르는 남자였다.
캐런은 지금 이셀라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공유할 대상이 없어서 갑갑했다.
이것은 정말 큰일이었다.
이셀라가 주도적으로 사건을 수습하고 투정을 부리지 않는다는 것.
이제까지 없었던 일이다. 캐런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내뱉었다. 그리고 큰 창문을 통해 휘날리는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을 잡았다. 이셀라의 금빛 머리칼이 전에 없이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것 같았다.
봄이다.
정원사가 가꾸지 않아도 꽃은 피어난다. 마차가 다니는 길가에 꽃들이 가득했다.
날씨는 선선했고 풍경은 아름답다.
수도로 가는 길은 짧으면서도 길게 느껴졌다.
날씨가 워낙 좋아서 셋은 마차 안이 아니라 마부석에 나란히 앉아서 풍경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세상에, 그건 또 처음 듣는 이야기네요. 시온 경은 경험이 많으시네요.”
“아닙니다. 군 안의 이야기는 밖으로 잘 나가지 않으니까요. 이셀라 양, 이것도 아십니까?”
“뭐가요?”
“…….”
정확히는 둘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캐런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생소한 기분을 느꼈다.
“저, 시온 경, 도착하려면 얼마나 더 걸리나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기만 하던 캐런이 드디어 시온 경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그때 레이몬드 경이 그랬습니다.”
“정말 그랬사와요?”
“…….”
하지만 시온은 캐런의 말은 듣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캐런은 다시 한번 물을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자신이 그렇게 오래 살았어도 좀처럼 겪지 못한 기분. 꿔다 논 보릿자루가 된 것 같았다.
그런 캐런을 두고 이셀라와 시온은 열심히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주제는 다양했지만 그중의 제일은 레이몬드의 험담이었다.
“그래서 그때 레이몬드 경이 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웃기던지 말도 못 할 겁니다. 그렇게 멋지기만 한 사람은 아니더라구요.”
“흥, 그랬군요. 그걸 봤어야 했는데.”
“저, 이셀라 양께서는 레이몬드 경과는 괜찮으신 겁니까?”
시온은 이미 레이몬드와 이셀라가 파혼을 한 걸 알았다. 그럼에도 저렇게 이셀라에게 묻는 이유는 뻔하다. 이셀라가 시온이 기사라는 것을 알고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이후로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건방진 마부에서 신사적인 기사로 태도를 싹 바꾸었다. 그 빠른 태세 전환에 캐런은 기가 차서 시온을 쳐다보았지만 시온은 캐런에게 눈을 찡긋거리면서 레이몬드의 험담을 계속했다.
“이셀라 양께서는 레이몬드 경과 약혼한 사이로 알고 있습니다만…. 제가 실수한 것이 아닌가 걱정되는군요.”
“…그것이 말이어요.”
얼씨구.
캐런은 자신의 손수건을 꽉 쥐고 이셀라와 시온이 나누는 대화를 안 듣는 척 들어야 했다. 사이에 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차에 앉아 있는 와중에 다른 곳으로 도망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캐런이 불편하든 말든 이셀라와 시온은 계속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예? 레이몬드 경과 헤어졌다구요?”
“그렇게 됐사와요. 그러니 더 이상 그의 이야기는 제 앞에서 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사와요.”
이셀라가 콧방귀를 흥흥 뀌면서 레이몬드에 대해 묻는 시온에게 대답했다. 시온은 심각한 얼굴로 이셀라를 보면서 말했다.
“레이몬드 경이 보는 눈이 없군요. 이셀라 에반스 양 같은 사람에게 그런 폭언을 날리다니.”
“전 그 사람 같은 위선자가 너무나 싫사와요.”
이셀라가 고개를 팩 돌리며 쏘아붙였다. 시온은 웃으면서 말했다.
“레이몬드 경이 가끔 그렇게 보이기는 하지요. 이셀라 양처럼 솔직 담백하며 대장부의 기질이 있는 아가씨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싶었습니다.”
“저에 대해 어떻게 아시나와요?”
“베르딕 씨의 따님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했으니까요.”
“뭐라고 하던가요.”
이셀라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캐런은 사교계에 떠돌던 그녀에 대한 평판을 생각했다. 당연히 그리 좋은 이야기들은 아니었다. 돈벌레 베르딕의 딸. 무례하고 예의 없으며 돈으로 남자를 사는 여자. 이셀라 스스로도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공공연했으며 옆의 캐런은 그녀의 히스테릭한 폭행을 감당했어야 했다.
“그 어떤 소문도 실물만 못했습니다.”
시온은 낄낄 웃으면서 대답했다.
“얼굴 말인가요?”
“전부 다요.”
가지가지 한다.
캐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시온을 노려보았다. 시온 경이라는 사람은 레이몬드가 소개했으니만큼 경호 능력에 있어서 부족함은 없었다. 하지만 이셀라에게 저렇게 대놓고 치근덕거리다니. 캐런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이셀라를 보았다.
“흥, 다 저희 아버지에게 돈을 꾼 다음 헛소문을 퍼트리는 것이어요.”
“그럴 것 같았습니다.”
쟤도 돈 노리는 것 같아.
캐런은 그렇게 속삭이려고 했다. 친구라면 응당 접근하는 남자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조언해 주어야하는 것이 아닌가.
캐런은 사교계에서 레이몬드만큼은 아니더라도 평판이 나쁘지 않은 귀족 남자들을 생각했다. 무례하지 않으며 재산깨나 지니고 있는 남자들.
“…….”
문제는 그 남자들은 전부 캐런에게만 관심을 두었다. 자신이 노력해서 이셀라를 소개한다고 해도 서로 마음에 들어 할지는 미지수였다. 게다가 시온과 말을 나누는 이셀라의 얼굴은 퍽 밝아 보였다.
‘그냥 이대로 두는 게 나은가?’
캐런은 이셀라가 자신을 곁눈질하면서 목소리가 더 높아지는 것을 눈치챘다. 이셀라는 시온이 캐런이 아니라 자신에게 더 관심을 보이는 것이 퍽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기분이 약간 이상했지만, 그래도 이셀라가 만족하면 자신도 괜찮은 것이 아닐까. 이셀라는 시온으로 만족하고, 자신은 이셀라 옆에서 짝짝짝.
“…시온 경. 약속한 보수는 언제 받기로 했나요?”
“캐런 영애께서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자신에게는 일부러 딱딱하게 거리를 두는 것이 너무 노골적이다. 캐런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대로 두는 것이 정말 맞나? 시온은 캐런을 무시하고는 이셀라에게 물었다.
“이셀라, 수도에 도착하면 대성전에서 계속 머무실 겁니까? 너무 재미없지 않나요?”
“그러려구요. 아버지가 못 들어오실 테니까요.”
“에이, 제가 좋은 곳을 잘 아는데 계속 거기 있는 건 너무 아깝잖아요.”
“하지만 아버지가 찾아오시면….”
시온을 만나기 전에 쇼핑 목록을 잔뜩 적어 놓았으면서 계속 신전에 있을 것처럼 말을 바꾸는 이셀라를 보며, 캐런은 침을 삼켰다. 어울리지도 않는 요조숙녀 흉내를 내는 이셀라라니.
레이몬드는 왜 저런 남자를 소개시켜 준 걸까. 분명 그는 실력은 있었지만 이셀라에게 대놓고 치근덕거리는 것이 심상치가 않았다.
우선순위는 이셀라다.
캐런은 이번 생의 목표를 생각했다.
이셀라와 친구가 되는 것.
그리고 친구는 자고로 좋지 않은 남자가 달라붙으면 떼어 내줘야 하는 법이다. 캐런은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시온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노려보면서 저 둘을 어떻게 떨어뜨려 놓아야 할지 고민했다.
세상에 남자는 많다. 그리고 캐런이 아는 남자만 해도 수두룩하다. 캐런은 주먹을 쥐고 다른 남자를 소개시켜 주기로 결심했다.
“잘 부탁하네. 시온 경.”
레이몬드는 눈앞의 남자를 보면서 신음을 삼켜야 했다. 웃음이 환하다. 그는 레이몬드가 약속한 보수가 퍽이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하긴 그가 맡은 대부분의 일은 레이몬드의 일보다 더 위험한 일이었다. 평민 중에서도 밑바닥에 가까운 그는 언제나 지저분한 일을 맡거나 최전선에서 구르고는 했다. 그에게 이 정도의 일은 매일 하는 가벼운 운동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저만 믿으십시오, 선배님. 수도까지 여자 둘 나르는 거야 일도 아닙니다.”
“…정말 잘 부탁하네, 시온 경. 내가 일이 있어 같이 하지 못하지만…. 정말 이건 내가 가야 할 일인데.”
“저만 믿으십시오.”
시온은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면서 자신감 넘치게 대답했지만 레이몬드는 영 그가 못미더웠다.
‘그렇다고 둘만 보낼 수도 없고.’
캐런과 이셀라 둘만 수도까지 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차가 있어야 했고 보호해 줄 만한 사람이 있어야 했다.
“…시온 경, 부탁할 게 하나 있어.”
시온 엘렉트라는 레이몬드만큼은 아니어도 분명 실력이 있는 사람이었고, 돈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 중 그와 가장 친했다. 다른 자들은 권력이 있어서 레이몬드가 움직일 수 없거나, 아니면 이셀라나 베르딕에게 계획이 들킬 위험이 있었다.
결국 시온이 제격이었다. 하지만 시온이 여자를 꾀는 데는 도가 튼 사람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레이몬드는 그가 얼마나 많은 여자들의 ‘귀염둥이’인지를 잘 알기 때문에 그를 캐런에게 소개하는 것이 정말로 내키지가 않았다.
“글쎄, 전 돈이면 다 한다니까요. 제가 선배님 여자에게 손댈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이셀라 에반스와는 파혼했어.”
“예? 왜요? 그 돈 덩어리…. 음, 선배는 정말 미쳤군요.”
“그래서 그녀가 원하는 건 도와주고 싶어. 그러니까 그녀에게 이상한 짓이라도 하면 가만두지 않겠어.”
“같이 가는 여자는요? 하나 더 있다면서요.”
“캐런 하이어 양은….”
사실 내 애인은 캐런인데, 그 둘이 친구가 될 예정이야.
자기가 생각해도 지나치게 이상했다. 자신들의 상황을 시온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결국 레이몬드는 차마 그 말을 내뱉지 못하고 그저 시온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연신 부탁만 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둘의 안전을 잘 부탁해. 자네에게서도.”
시온은 계속해서 불안한 얼굴을 하는 레이몬드에게 대답했다.
“거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레이몬드 경. 제가 사고 칠 일은 전혀 없다니까요.”
“자네는 치마만 두르면 90 먹은 노파도 좋아하지 않았나.”
시온의 여자관계가 심히 난잡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시온은 뒷배가 없었다. 처지가 유사한 것처럼 보여도 귀족인 레이몬드와는 처지가 하늘과 땅처럼 달랐다. 시온은 그래서 여러 여자 귀족들의 치마폭에 감싸여 보호받기를 원했다. 레이몬드는 캐런과 이셀라가 걱정이 되었다. 긴 세월 동안 시온과 그들이 엮여 본 적은 없었기에 안전을 확신할 수도 없었다.
레이몬드의 어두운 얼굴을 본 시온이 불쾌한 얼굴로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절 너무 이상하게 보시는 거 아닙니까?”
“지난번 애인이었던 엘리자베트 백작 부인은 팔순이었지 않나.”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었죠. 마지막에 유언장을 달링의 자식들이 바꿔치기하지만 않았더라면 지금쯤 전….”
시온이 이를 갈면서 죽은 그의 전 애인을 회상했다.
“그리고 그 전의 애인이었던 세일라 남작은 90살이었고.”
“87세였습니다. 숙녀의 나이를 함부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레이몬드 경.”
“나이뿐 아니라 그 둘을 동시에 사귀었던 것도 알고 있어.”
“셋입니다. 애인의 숫자를 함부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레이몬드 경.”
“…….”
레이몬드는 그가 꼬리 치던 수많은 귀부인들을 생각하면 속이 쓰렸다. 분명 캐런은 자신을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사교계의 귀염둥이로 유명했던 시온이 그녀 옆에 있는 것이 달갑지는 않았다. 시온은 폭탄 덩어리에 가까웠으니까.
주로 나이가 많은 숙녀들이었지만 어린 숙녀도 있었다. 시온은 여자를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시온 말고는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레이몬드 또한 자신의 일을 해야 했으니까. 레이몬드는 지금쯤 자신의 집에서 고용인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있을 형을 떠올렸다.
캐런이 사랑과 용서의 길을 택한다고 했으니 자신 또한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레이몬드는 어쩔 수 없이 시온 엘렉트라와 악수하면서 다짐하듯 말을 건넸다.
“…믿겠어.”
“예, 믿으십시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시온은 손가락을 까딱이면서 레이몬드에게 말했다.
“전 돈 없는 여자는 취급도 안합니다. 시골 영주의 딸이라니 제 눈을 너무 낮게 보시는 거 아닙니까? 전 나이만 안 보지, 보는 기준이 까다롭습니다.”
시온은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전 돈 많은 여자만 사랑한다구요.”
“그게 문제야.”
레이몬드가 한숨을 쉬자 시온은 가볍게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웃었다.
“제 사랑을 가볍게 취급하지 마십시오, 레이몬드 경. 전 돈 앞에서 항상 진중하고 제 사랑도 순수하니까요.”
캐런은 대성전을 올려다보았다.
마침내 도착했다.
대성전에 도착한 이셀라가 한참 동안 담당 신관의 방에서 입씨름을 한 끝에 홀가분한 얼굴로 나오자, 캐런은 그녀가 성공했다는 것을 알았다.
“후, 안 받을 것도 아니면서 노인네 얼마나 귀찮게 하는지.”
“이, 이, 이셀라… 들려요.”
“아.”
이셀라가 자신의 입을 막았지만 이미 늦었다.
“흠, 흠.”
살짝 열려 있는 방 안에서 담당 신관이 이셀라를 노려보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셀라는 방문을 확실하게 닫으면서 캐런에게 말했다.
“뭐, 아무튼 됐어요. 난 여기서 당분간 머물 거예요. 당신도 당분간은 절 좀 도와줬으면 좋겠네요. 그동안 사업에 관해서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서 멈추게 해 달라고 하겠어요. 하이어 영지보다 다른 곳에 더 관심이 있으니까. 이걸로 됐죠?”
“네….”
사실 그것보다 이셀라와 친구가 되는 것이 더 큰 목표였지만. 캐런은 이셀라에게 고맙다는 말로 더 말을 붙여 보려 했지만 이셀라는 바로 뒤를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밤이었음에도 회랑에서는 은은하게 연습을 하는 성가 소리가 들렸다. 이셀라는 가방을 질질 끌고 가면서 설명했다.
정식으로 머물지 않는 시온은 밤에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에 이셀라가 직접 들어야 했다. 전이라면 캐런에게 당연히 던져 줬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돈은 충분히 냈으니까 1년 이상을 숙식하면서 머물러도 상관없어요.”
“1년이요.”
“그만큼이나 있고 싶지는 않지만 말이에요.”
환불은 안 해 주겠죠? 캐런은 이셀라의 목소리에서 아쉬움이 묻어나는 것을 보며 대체 얼마나 줬을지 정말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진짜 많이 줬나 보네.’
신전은 도망자들이나 여행객들을 받기는 하지만 대부분 그 대가로 어느 정도의 금전을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신전들은 집의 대용으로 쓰려는 노숙자들로 바글거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성전 정도로 규모가 큰 곳에서 돈은 언제나 부족하기 마련이었다. 이셀라가 얼마나 주었는지 캐런은 알 수 없었으나, 분명 금 덩어리 하나 정도는 얹어 주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훨씬 더 주었으려나?’
캐런이 이셀라의 뒤를 따라서 회랑을 걸어 나가 숙소가 있는 별동에 도착했다. 또다시 자야 할 시간이었다. 이셀라는 캐런에게 큰 열쇠 하나를 건넸다.
“기부금은 충분히 냈으니까, 우리 방은 따로 쓰면 돼요. 당신도 방은 따로 쓰는 것이 좋죠?”
“제 방이 이셀라의 옆방인 거죠?”
“불만이에요?”
대뜸 표정을 구기려는 이셀라 옆에서 황급히 캐런이 덧붙였다.
“아뇨,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너무 좋아요! 정말요! 그럼 잘 자요, 이셀라 양.”
캐런은 자신의 짐을 풀었다.
방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깔끔했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 옷장 하나. 여느 방과 차이가 있다면 여기에는 성물과 성서가 배치되어 있다는 것 정도였다.
‘이번 생에는 신학이나 할까.’
과거에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할 만하다.
‘…추워.’
그러나 돌 벽을 타고 올라오는 한기에 캐런은 옷을 벗지 못하고 더 껴입은 상태로 모포를 둘러야 했다. 긍정적인 생각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캐런은 기시감을 느꼈다.
‘…예전에 시녀 생활할 때가 떠오르는데.’
아니겠지. 여기는 이셀라의 저택이 아닌 대성당이다. 그리고 이번에 자신은 분명 하녀가 아니라 조력자의 입장으로 이셀라와 동행했다. 분명 자신은 이번에 그녀와 친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그리 나쁘지 않지 않은가.
게다가 이셀라는 레이몬드와 연을 끊어 버렸고 집에서도 나왔다. 그리고 나름대로 같이 역경도 극복하지 않았는가.
분명 하녀 취급이 아니라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여학교에 다니는 학생들과 같은 생활을 할지도 모른다. 여학교는 보통 중류층의 여성들이 직업을 가지기 위해 배우러 가는 곳이었다.
캐런 정도의 집안이나, 이셀라 정도의 재산이 있는 여성들은 전부 가정교사를 집으로 부른다. 그래도 가끔 캐런은 집에서 아예 독립해서 지내는 여학교의 생활이 어떨지 궁금했다. 몇 년이나 떨어져서 또래 여자들과만 지내는 삶이란 어떨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신전은 에반스 저택이랑은 다르겠지? 어쩌면 학교랑 비슷할지도 몰라.’
대성전은 금전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일반 숙소와는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방문자들에게 어느 정도 신도로서 생활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루 두 번 미사에 참석할 것, 식사는 주는 것에 만족할 것, 봉사 활동을 빙자한 신전의 각종 잡일을 도울 것 등등이 있었다.
이번에는 캐런이 일방적으로 이셀라의 시중을 드는 것이 아니라,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동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뎅그렁.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캐런은 눈을 굴리면서 잠을 청했다.
이셀라와 어떻게 지내야 할까. 아직도 잘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같이 생활을 한다면 이셀라와 친해지기 좀 더 용이할 것이다. 레이몬드 또한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친구는 어떻게 사귀는 건가요?”
“그냥… 같이 있다 보면 친해집니다.”
“아, 진짜. 좀 더 성의 있게 설명해 봐요.”
친구 없는 인생 백 년이다.
캐런은 만년필까지 들고서 진지하게 레이몬드에게 친구가 되는 법에 대해 물어봤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그녀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헤맸다.
그는 항상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이성뿐 아니라 동성에게도. 그러나 어울리는 것은 말로 계산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주로 먼저 사람들이 다가왔다. 그래서 친구를 어떻게 사귀냐고 묻는 캐런에게 뭐라고 해 줘야 할지 몰랐다.
“…이셀라와 같이 있던 기간으로 따지면 제가 당신보다 길 텐데요…?”
레이몬드는 신음 소리를 내며 자신의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저야 단체 생활을 했으니까요. 같이 생활을 하다 보면 결국 거기서 더 마음이 맞게 되기 마련입니다.”
레이몬드는 캐런의 어깨를 잡으면서 다시 한번 말했다.
“분명 같이 지내다 보면 누구든 당신을 좋아하게 될 겁니다.”
뭘 믿고 그런 소리를 한 거지?
캐런은 자신을 엄하게 내려다보는 부주교의 시선을 피했다. 그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다. 사실 이는 캐런 때문은 아니다. 그녀는 아침 미사에 참석했다.
“이셀라 에반스 양은 오늘도 나오지 않았습니까?”
이셀라가 전혀 신전 내 활동에 참석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셀라는 오늘도 나오지 않았다. 어느새 쏜살같이 며칠이나 지났지만 이셀라는 평범한 신도의 생활을 여태껏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 시선을 받아야 하는 것은 이셀라가 되어야 하는데, 그녀는 아예 나오지도 않으니 자신이 이렇게 매번 눈치를 봐야 했다. 캐런은 오늘도 이셀라를 위한 변명을 짜냈다.
“…몸이 좋지 않아서요.”
“정말입니까?”
아니지. 이셀라는 지금쯤 아마 자고 있을 것이다. 전날 오페라가 끝나고 오페라 가수들과 만남을 가지면서 잔뜩 취했기 때문이다. 무거운 이셀라를 대성전 앞까지는 시온 경이 들다시피 해서 왔지만 방 앞까지는 캐런이 부축해야 했다.
“캐런양. 이셀라 양이 많이 아픈 것이 정말 사실입니까? 그렇다면 의사에게 몸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요?”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하이어 양.”
계속 꼬치꼬치 물어보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어제 들어오는 것을 들킨 모양이었다. 부주교의 눈썹 아래로 회색 눈이 빛나고 있었다. 더 이상 거짓말해도 별 소용이 없을 것 같다. 그냥 화만 부추기겠지.
“저에게는 그렇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
물론 이셀라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이셀라는 대성전을 숙소로 이용했지, 미사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고 통금 시간도 늘 어기고는 했다.
몇몇 신관들이 눈총을 주었지만 무시하면 그뿐이었다. 이셀라가 대성당에 들어오면서 주교에게 쥐어 준 금덩어리는 무시 못 할 무게였으며, 그녀의 아버지인 베르딕 에반스를 의식했기 때문이다. 생활 태도를 트집 잡아서 그녀를 내쫓았다가 행여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베르딕은 신관들을 탈탈 털어 난리를 칠 것이 분명했다.
“캐런 하이어 양.”
“네, 샤론 부주교님.”
“그냥… 이셀라 에반스 양이 하고 싶은 대로 살게 하십시오. 더 이상 미사에 나오라고 권하지 않겠습니다.”
부주교가 피곤한 얼굴로 캐런에게 당부했다. 그는 몇 번이나 이셀라의 방종하며 게으른 생활을 나이 지긋한 종교인답게 꾸짖거나 눈치를 주었지만, 이셀라는 젊은이의 패기로 그것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렸다. 결국 진 것은 부주교였다.
이곳에서도 이셀라는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방향은 단체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캐런은 낮에 이셀라의 곁에서 하녀 노릇을 하는 것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 이셀라가 어떤 옷을 좋아하는지, 어떤 연극을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들 앞에서 실수를 하고 누구에게 밉보이며 어떤 짓을 하고 다니는지 다 알았다.
최소한 이 1년간의 이셀라를 캐런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녀의 부모조차도 그렇게 세세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니까 캐런은 이 상황도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다.
“이셀라, 이 옷이 당신에게 가장 잘 어울려요. 여기선 이게 최고예요.”
아마도.
캐런과 이셀라는 디베닐 부인의 의상실에서 한참 동안 옷을 이리저리 대보면서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디베닐 부인의 의상실은 수도에서 손꼽히는 괜찮은 곳이었으며, 캐런이 고른 디자인을 과거에 이셀라가 엄청나게 마음에 들어 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난 이 옷이 싫어요.”
“어울리지 않나요? 루스 백작 부인의 모임에서는 이 옷이 가장 어울릴 텐데요. 경매라지만 황금사자 홀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이 정도는 화려해야 해요.”
캐런은 이셀라가 툴툴거리는 것을 달래면서 그녀의 얼굴에 장식을 덧대 보았다. 화려한 코르사주와 같은 디자인의 치마 장식이 눈에 띄었다.
“무겁다니까.”
“전에는 이런 거 좋아했으면서 왜 그래요?”
“난 원래 이런 거 안 좋아해요.”
“…….”
“난 이 옷이 정말 마음에 들어.”
과거의 이셀라는 저 복숭앗빛 드레스를 입고 방 안에서 뱅글뱅글 돌면서 캐런 앞에서 뽐내고는 했다. 캐런이 두 손을 모아서 감탄을 계속 하지 않으면 화를 냈기 때문에 캐런은 몇 십번이고 얼굴을 붉히면서 양손을 모아 부러워해야 했다.
“정말 잘 어울리셔요.”
“손 대지 마. 당신이 아무리 일해도 살 수 있는 옷이 아니니까.”
“옷이 너무 천박해 보이잖아요!”
“어, 어, 어떻게 내 옷에 그런 소리를…!”
“제대로 만든 옷을 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좀 더 장식이 작으면서도 섬세한 것으로 가져오란 말이어요! 그리고 색도 마음에 들지 않아요. 목 주변에는 다른 천을 댄 것이 더 좋다구요.”
“이셀라 에반스 양. 통일감을 위해서는 이 천을 그대로 쓰는 편이….”
“지금 귀찮아서 그러는 것인가요!”
그냥 투정 부리는 것이다.
또 어디서 이렇게 심통이 나서 이러는 걸까? 캐런은 고개를 돌리고 작게 한숨을 한번 쉬다가 의상실에 있던 다른 부인들과 눈이 맞았다.
‘고생이 많아요.’
‘괜찮아요.’
입모양으로 눈짓으로 짧게 서로의 마음을 건넨다.
캐런은 놀랍도록 짧은 그 순간의 교감이 신기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별 것 아닌, 대화라고조차 하기 어려운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순간적으로 이런 친숙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결국 이셀라는 한참을 더 씨름한 끝에 드레스 다섯 벌을 맞췄다.
한참을 이셀라 앞에서 진을 빼던 디베닐 부인은 앓던 이가 빠진 얼굴로 개운하게 잔금을 치르고는 옷을 언제 보낼지 적다가, 주소가 대성전이라는 말에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대성전에는 상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내가 필요한 걸 가지겠다는데 왜 그렇죠?”
“규정이 그래요.”
뇌물로 보일 수 있는 사치품을 금하는 것이다.
“아가씨가 직접 물건을 들고 가신다면 몰라도, 가게에서 직접 가져다 드리는 것은 크게 비난을 받게 되어 어렵습니다.”
“무겁게 제가 어떻게 들고 가요?”
“죄송합니다.”
“이봐요! 돈까지 다 치렀는데…!”
디베닐 부인이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사과를 했지만 얼굴은 그리 유감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셀라가 약 오른 것이 약간은 고소한 얼굴이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직접 들고 가시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네요.”
“난 바로 약속이 있단 말이에요!”
이셀라는 바로 시온을 만나기로 했다. 캐런은 한 발자국 뒤에서 이셀라와 디베닐 부인의 언성이 점점 더 커지는 것을 보면서 약간 지쳐 갔다.
어떻든 이로서 이셀라는 원하는 것을 얻었다. 이셀라가 당장은 툴툴거려도 저 옷은 분명 그녀가 가장 좋아하던 것이었고, 루스 백작 부인은 돈이 궁해 저 옷을 입은 이셀라를 잘 맞이해 줄 얼마 안 되는 귀족이었다. 이로서 이셀라는 분명 오늘의 선택에 만족할 것이다.
루스 백작 부인의 집은 정원의 튤립이 꽤나 괜찮았다. 지금쯤 피었을까? 자신도 이셀라와 같이 방문하면 그것을 볼 수 있겠지. 오늘은 친구로 한 발짝 가까워진 것일까?
캐런은 튤립에 관한 공부도 단단히 해 두었다. 괜찮은 대화를 이을 수 있을 것이다. 주먹을 쥐었다.
“그럼 캐런, 당신이 저걸 좀 가져다줘요.”
“네? 제가요?”
“네.”
“…….”
아무래도 친구보다 하녀의 입장에 한 발짝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장식이 잔뜩 달린 드레스는 무게가 상당하다. 그것이 다섯 벌이나 되면 엄청난 짐이었다. 캐런은 자신 옆에 놓여 있는 짐을 보면서 고민에 휩싸였다. 대성전 앞까지는 마차를 타고 가면 된다. 하지만 그 안에서 별관까지 자신이 들고 갈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부탁을 또 해야 할 텐데 부주교가 문제였다. 자꾸만 젊은 여성들이 오고 가며 사제들의 입에 올라가는 것도 못마땅해 했고, 그들이 캐런에게 호의를 보이는 것을 엄청난 방종처럼 지적했다.
‘…그냥 내가 들어?’
무엇보다 씁쓸한 것은 이셀라와 친구가 되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레이몬드가 이셀라와 헤어졌으니 더 이상 장애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루트엘라 공작이라는, 어떻게 보면 그들에게 큰 장애물이 될 수도 있었던 사건을 잘 마무리했을 때 희망은 금처럼 빛났다.
하지만 그건 그것이고, 이건 이것이었다.
친구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심지어 이것은 남자와도 달랐다. 본능적으로 어느 정도 호감을 가지고 대하는 남자들과 또래 여자는 달랐다. 정확하게는 이셀라가 달랐다. 캐런은 이셀라를 대할 때 전에 하녀로서 그녀를 대하던 행동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에 자괴감을 느꼈다.
‘혹시 나에게 하녀 본능이라도 있었나?’
참으로 비굴한 본능이었다. 캐런은 주로 하녀와 하인을 부리는 입장이었지 누군가에게 노역 당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그런 위치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셀라의 시중을 들던 그 수많은 기억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대화를 할 때 이셀라의 눈치를 보며 일방적으로 그녀의 비위를 맞추어 주게 되고, 그녀가 좋아할 만한 것을 골라서 한다.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호감을 사는 것도 아니란 것이다. 이셀라의 성격은 어디가 꼬였는지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 더 호감을 갖는 것이 아니라 맞춰 주면 자신의 밑으로 여겼다.
캐런은 짐 위에 걸터앉아 정오의 햇살에 눈을 감았다.
“그러게 제가 뭐라 했습니까.”
누군지 알았기 때문에 눈을 뜰 필요는 없다.
캐런은 눈을 감은 채로 손을 내 저으면서 대답했다.
“지금 좀 고민하고 있으니까 잔소리하지 말아요. 레이몬드 경, 잘 다녀오셨나요?”
“예. 제 일은 처리하고 왔습니다.”
레이몬드가 캐런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마차를 가리키면서 캐런의, 정확히는 이셀라의 짐을 대신 들었다. 캐런은 드는 것조차 엄두를 못 냈는데 그의 손에서는 빈 상자처럼 가볍기 그지없다. 캐런도 하나를 더 들어보려다가 꿈쩍도 하지 않는 짐에 포기하고 레이몬드에게 맡겼다.
레이몬드가 상자위에 적혀 있는 의상실의 이름을 보면서 물었다.
“당신 물건입니까?”
“이셀라 양 거예요.”
“당신 물건도 좀 사지 그러셨습니까.”
“돈이 없잖아요.”
“이셀라 양이 같이 지불해 주지는 않습니까? 흠. 좀 너무하는군요.”
“이셀라 양에게 큰 기대는 하지 않아요.”
옹호하는 것인데 빈정거림처럼 들리지 않기 위해 주의하며 캐런이 말했지만, 레이몬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캐런 옆에서 걸음을 옮기면서 말했다.
“대성전의 별관으로 가는 겁니까?”
“네. 레이몬드 경은 못 들어갈 텐데요.”
“이미 관리원에게 말을 해 두었습니다.”
“레이몬드 경도 대성전에서 묵나요?”
“공식적으로는 아닙니다. 하지만 말은 해 두었으니 큰 눈치를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레이몬드는 마부에게 짐을 건넨 후에 캐런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제 이름을 대고 사십시오. 나중에 지불해 드리겠습니다. 제 저택으로 이름을 남기면 집사가 처리해 줄 겁니다. 당신이 에반스 양 앞에서 아무것도 사지 못하고 짐이나 들고 오는 그런 모습은 제 기분을 상하게 하는군요. 사고 싶은 건 마음대로 사십시오.”
“아, 그럼.”
레이몬드가 하는 말의 뜻은 명백했다. 레이몬드는 캐런을 마차 안으로 올리면서 말했다.
“예. 제가 이제 세이어테스 남작이니까요.”
캐런이 이셀라와 같이 수도로 올라올 동안, 레이몬드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일을 처리했다.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레이몬드는 사실 이번에도 지난번과 비슷한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형인 세이어테스 남작은 그에게 이미 100년도 전에 죽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곧 죽을 사람이었다. 미리 죽이는 것에 죄책감 같은 것은 없었다.
“이셀라 양과 친구가 되어 보려구요.”
“당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해 주고 싶어서요.”
캐런이 원한다면 이번에는 형을 죽이는 것은 안 될 것이다.
“하아.”
레이몬드는 영 내키지가 않았다. 존속살해에 대한 거부감보다, 형을 당장 죽이지 않아서 그가 놓칠 기회들이 더 아까웠다. 귀족의 직위는 생각보다 다양하게 쓸모가 있었다. 이 시절의 그는 잘 알지 못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직위의 필요성은 커졌다.
그리고 그 직위는 캐런을 보호하기 위해서 더 필요했다.
“당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해요.”
캐런은 너무나 당연하게, 자신은 다른 사람들을 해치기 싫어하고, 평화를 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레이몬드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사실 100년 전에도 자신은 늘 그랬다. 캐런과 루이스 왕세손과 이셀라 에반스와 베르딕 에반스조차 자신이 도덕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캐런이 등을 밀어주는 지금조차도 형에 대한 동정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형의 손에 맞을 하인들이나 하녀가 더 불쌍했다. 그중 하나는 뼈가 부서져라 맞다가 결국 영구적인 장애를 입는 사람도 있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 확신할 수 있는 관계가 있다. 그와 형의 관계가 그런 것이다. 그들의 관계는 한 가지에 핀 꽃과 같았다. 그리고 그의 형은 병에 걸려 시들어 가는 가지였다. 적당한 가지를 쳐야 다른 가지라도 살아남는다.
그것은 오만하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쏟아진 기억과 반복된 삶을 통해 레이몬드는 확신할 수 있었다. 기대해서는 안 되는 관계 같은 것.
형은 언제나 이 1년, 아니 이 몇 개월 이상을 더 살지 못하고 사고로 죽는다. 그는 전날까지 폭력을 휘두르고 약에 취했고 여자를 샀다. 레이몬드는 처음 형을 죽일 때 죄책감이 아니라 진작 이랬어야 했다는 후회감에 더 휩싸였었다.
“오셨습니까, 작은 도련님.”
집사가 허리를 숙여 레이몬드를 맞았다. 그의 관자놀이에는 피멍이 들어 있었다. 부모님 대부터 오랫동안 일한 제임스를 저렇게 막무가내로 패다니.
제임스의 수명을 아는 레이몬드는 속이 쓰렸다. 그는 몇 년 뒤에 뇌졸중으로 세상을 뜬다.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너무 많은 사람들까지 갑자기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형은 어디에 있지?”
“세이어테스 남작님은 응접실에 계십니다.”
“그래, 형에게 간다고 말해. 지금 바로 가겠어.”
“알겠습니다.”
시동 하나가 뛰어간다.
“제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같이 오실 줄 알았는데요.”
“경험이 쌓이니 제논의 도움은 그리 필요하지 않더군. 그래서 다른 부탁을 했어.”
“그러셨군요…. 사실, 도련님이 오실 줄 몰라서 준비가 부족합니다.”
집 여기저기에 조금씩 부서진 것들이 보인다. 사용인들의 표정은 어둡고 손질은 덜 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병자가 주인이고 안주인이 없으니 상태가 썩 좋지 않다. 제임스가 부끄러워하는 것을 보고 레이몬드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면서 말했다.
“신경 쓰지 마. 내 집이니까.”
“…예.”
레이몬드는 자신의 집을 새삼스럽게 돌아봤다. 하나하나 자신이 쓸고 닦으려고 했을 때는 그렇게 거대했는데, 사용인들이 있는 지금은 생각보다 그리 넓어 보이지 않았다. 레이몬드가 응접실로 향하자 사람들이 긴장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형.”
“왔냐, 레이몬드.”
술병을 든 세이어테스 남작은 응접실로 들어오는 레이몬드를 보았다.
레이몬드는 자신의 형 앞에 앉았다.
“너 아직 군대에 있을 시간 아니냐? 눈은 또 왜 그래?”
“…일찍 나오게 됐어.”
“눈병신이 되어서 그런 건 아니겠지?”
“글쎄.”
나이가 드니 요령이 생겨서. 어디를 어떻게 폭파시키고 누구를 죽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지 알게 되었거든.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게 가장 쉬웠어. 가장 어려운 건 살리는 것이더라.
형을 죽이는 것도 쉬웠어. 어린 시절의 형은 컸지만 지금 내 손에서 나이프 하나면 몇 분 만에 죽을 거라는 것을 알까?
“형, 이셀라 에반스와 헤어졌어.”
“…뭐?”
거대한 몸이 기우뚱거렸다. 남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미친놈이…. 네가 뭔데 베르딕 에반스와…. 네 눈 때문이냐?”
“그건 아니야.”
“그럼 왜! 씨발 왜! 지금 당장 베르딕과 만나야겠다. 이런 젠장… 미친….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약속을….”
“형.”
레이몬드는 남작과 눈을 마주치면서 말했다.
“이셀라 에반스와 난 서로 맞지 않아서야.”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것은 남작이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했기에 생긴 유예에 불과했다. 남작이 이해를 하고 나자 그의 얼굴이 점점 더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네가… 말했냐?”
“응.”
“이 멍청한 놈…. 멍청해서 총질 말고는 아는 게 없는 새끼가!”
차라리 그러면 편하겠지.
레이몬드는 벌떡 일어나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작의 시뻘건 얼굴을 보면서 그 생각을 했다.
“절대 허락 못한다! 이 멍청한… 호래자식이…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형.”
제압은 쉬웠다. 몸이 크다 하더라도 나태하기 짝이 없는 생활로 비대해진 몸은 느리기 짝이 없었고, 레이몬드는 군에서도 유별나게 몸이 좋은 편이었다.
“내가 여기 온 건 형의 허락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야.”
캐런은 레이몬드의 옆모습을 올려다보았다.
“남작님…. 그, 형과는 잘 해결하셨나요?”
“예. 잘 해결했습니다.”
캐런은 역시 신경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117세의 그때에 그가 캐런에게 한 말을 떠올렸다.
당신이 하는 말은 믿을 수가 없다고 그가 캐런에게 했던 말. 당신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신은 내 형이 죽는 것도 알지 못했다. 당신은 스스로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난 당신을 사랑할 수 있다고.
캐런은 그 이후에는 레이몬드가 자신에게 가족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 신경 쓰였던 모양이었다.
“형은 병원에 보냈습니다.”
캐런은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
“그… 너무하지 않나요?”
대부분의 입원 병동은 열악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가족들은 여력이 있으면 집에 머물게 하면서 의사의 방문을 받게 하는 것이 당연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그의 과거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하지만 캐런은 레이몬드의 일부밖에 몰랐다. 그가 좀 더 나은 길을 걷길 원한다 하나 모든 사람들에게 지고 들어가는 방법은 레이몬드에게 전혀 나은 길이 아니었다.
“이 방법이 제 최선이었습니다.”
세이어테스 남작은 더 내버려두면 다른 사람을 죽게 한다. 그리고 그는 곧 죽는다. 그것을 알면서 그냥 두는 것이 더 죄악이라고 생각했다.
그와 그의 형이 온전하게 화해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작은 너무나 오랫동안 약에 찌들어 나태하게 살았다. 그에게 귀족의 작위를 그대로 쥐게 하는 것이 더 안 좋았다.
“캐런, 그냥 친구가 되는 것보다… 어쩌면 그냥 다른 방법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시간이 많다고 했지만 실질적으로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시간이 중첩되는 것은 결국 우리 둘 사이에서만 가능할 뿐, 이셀라 양은 당신에 대해 잘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런 소리를 하셨습니까?”
시온은 레이몬드가 시무룩한 얼굴로 주저앉아 있는 것을 보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레이몬드는 어두운 선술집에서 울적하게 자신의 잔을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시온은 갑작스럽게 변한 레이몬드의 모습이 적응이 안 되어서 뭐라 반응하기가 어려웠다. 자신의 몫을 시키면서 그에게 물었다.
“취하셨습니까?”
“아니.”
레이몬드의 체력은 주량에서도 돋보였다. 짓궂은 상사들이 그에게 궤짝째로 마시게 했을 때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던 레이몬드다. 지금 기껏해야 한 잔도 채 마시지 않은 그가 취했을 리는 없는 것이다.
‘차라리 취한 모습을 보는 게 낫겠군.’
시온 엘렉트라는 레이몬드가 우울해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불편했다. 그렇다고 그를 위로해 주는 기특한 우정도 발휘하고 싶지 않았다.
‘빨리 이셀라 양을 만나러 가야 하는데.’
레이몬드가 우울해하는 원인이 그가 한창 공을 들이고 있는 이셀라 에반스였기 때문이다.
“저… 레이몬드 경, 저는 이만 가도….”
“대체 왜 이셀라 양은 캐런에게 그렇게 군단 말인가?”
“…….”
놓아줄 것 같지도 않았다.
시온은 자신을 붙들고 한탄을 늘어놓는 레이몬드를 피하고 싶었지만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쉬었다.
레이몬드는 요즘 많이 우울했다.
“이셀라 에반스와 친구가 되겠어요.”
캐런이 이셀라에게 공을 들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녀가 그렇게 행동하는 원인이 결국 레이몬드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셀라 에반스와의 질긴 인연을 생각하면 좀 더 잘 지내보고 싶다는 그녀의 의견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왜….”
하지만 이셀라가 캐런과 좀처럼 친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 레이몬드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당사자인 캐런은 약간 시무룩한 정도였지만, 그걸 보는 레이몬드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사교계에서 내로라하는 숙녀들의 모임에 캐런을 데리고 가 다른 사람과 친해지라고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그런 짓을 했다가는 캐런이 자신의 머리를 부숴 버리고 싶어 할 것을 알기에 참고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 레이몬드가 보기에 요즘 이셀라가 캐런을 대하는 행동은 지극히 불합리했다.
“내가 사이에 없는데 도대체 왜 그러지?”
레이몬드는 과거의 이셀라와 캐런을 기억한다. 이셀라는 항상 캐런에게 날을 세웠다. 캐런이 아무리 이셀라에게 맞춰 주고 성실하게 일을 해도, 아무리 비참해져도 이셀라는 좀처럼 만족할 줄을 몰랐다.
이셀라는 레이몬드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원인이 캐런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이몬드는 자신이 이셀라와 잘 헤어진다면, 그것도 자신의 얼굴에 먹칠하는 방향으로 헤어진다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온 경, 나에 대한 험담은 잘 퍼트리고 있는가?”
“이셀라 양과 만날 때마다 한 시간씩은 레이몬드 경 욕을 하고 있습니다.”
시온은 단박에 대답했다.
“자세한 내용을 듣고 싶으세요?”
“…아니.”
시온 엘렉트라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너무 열심히 해서 문제였다. 얼마 전에는 팬케이르 후작에게서까지 편지가 도착했다. 시온의 행동이 너무 방종한 것 아니냐는 충고가 담긴 편지였다.
“…계속해.”
“알겠습니다. 계속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자신의 평판이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캐런에게는 도움이 될 것이다. 여러 의미로. 하지만 레이몬드는 이셀라가 캐런에게 하는 행동이 못마땅하고 걱정스러워서 우울증에 걸릴 지경이었다.
자신이 이셀라와 이별했다고 해도, 그리고 캐런과의 관계를 이셀라가 모른다고 해도, 거기에 자신의 입맛에 맞춰 주는 시온이 있다고 해도 이셀라와 캐런의 관계는 또 다른 문제였다. 레이몬드가 빠진다고 캐런과 이셀라가 절친한 관계가 되는 것은 역시 무리였던 것이다.
이셀라는 기본적으로 또래 여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캐런 또한 주변에 친구가 거의 없었다. 또한 캐런은 오랫동안 이셀라의 비위를 맞추는 하녀 노릇을 한 경험 때문인지 계속해서 이셀라에게 져 주는 행동으로 호의를 표했다.
하지만 레이몬드가 보기에 그것은 서열 관계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지 친구 사이가 아니었다. 자신과 시온의 관계보다도 서열이 더 노골적으로 보이는 행동이었다. 이셀라가 캐런에게 짐을 맡기고 시온과 같이 놀러가 버린 것을 봤을 때 레이몬드는 화가 나 시온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캐런이 뭐가 어때서….”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자의식 과잉이라고 알아요? 레이몬드 경과 상관없이 싫을 수 있는 거죠.”
“닥쳐, 시온.”
“예, 그럼 이만 가도 되겠습니까?”
“가지 말게, 시온 경.”
“아, 뭐 어쩌라는 겁니까? 이셀라 양과 캐런 하이어 영애의 관계는 둘이 알아서 해야 하는 겁니다.”
“이셀라 에반스는 왜 캐런에게 그렇게 군단 말인가.”
시온은 우울하다 못해 바닥에 흘러 내려갈 것 같은 레이몬드를 보며 혀를 찼다. 아무리 사랑이 사람을 변하게 한다고 하지만 짧은 시간 사이에 레이몬드는 지나치게 많이 변했다. 첫 연애라 그런가. 그는 지나치게 빨리 이상해진 것 같았다. 고작 몇 개월 전까지만 하더라도 지극히 냉정한 상관이었는데, 어쩌다가 저렇게 됐을까. 시온은 혀를 찼다.
“취하셨습니다, 레이몬드 경.”
“아까도 말했지만 난 취하지 않았어, 시온 경.”
“취한 것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이는데요. 이만 절 놓아주시겠습니까? 저도 이셀라 양과 만나야 해서.”
“왜 이셀라는….”
“그만 좀 하십시오. 그리고 이셀라 양은 지금 저와 만나는 사이입니다. 더 이상 그녀에 대해 안 좋은 소리를 하시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자네가 가만히 안 있으면… 하.”
레이몬드가 자세를 바로 했다. 어두운 가게 안에서 하나뿐인 눈이 빛났다.
“시온 경, 자네 정말 이셀라와…?”
“전 약혼자를 눈앞에서 보는 제 마음도 생각해 주시죠. 이셀라 양은 좋은 사람… 은 아니지만. 매력 있는 사람입니다. 그녀의 행동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겠죠.”
“의외로군. 난 솔직히 말해서 이전부터 자네의 여자관계는 그리 탐탁지 않았어.”
레이몬드가 자세를 바로하고 시온을 생소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시온은 술병 하나를 그에게 건네면서 언짢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전에 말씀드렸듯이 제 사랑은 항상 진실하다구요.”
하지만 시온의 말은 그의 여자관계를 생각하면 그리 설득력이 없었다. 시온과 레이몬드는 몇몇 부분, 전투적인 면에서는 잘 통했지만, 인간관계 쪽의 문제는 그리 잘 통하는 편이 아니었다.
“…하긴 내가 뭐라 할 처지가 아니군.”
“아시니 다행입니다.”
“그럼 네 생명의 은인으로서 부탁 하나만 하지. 그 둘의 관계 개선을 위해 힘을 써 줬으면 좋겠어.”
“싫, 싫습니다.”
시온은 레이몬드가 하는 부탁에 기겁했다.
이셀라와 시온은 이제 막 만남을 시작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이셀라에게 캐런의 이야기를 하라고? 만나는 여자 앞에서 다른 여자를 언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시온은 여자들 비위 맞추는 것 하나만은 누구보다 절실했고, 잘했기 때문에, 그런 실수는 절대 사양이었다. 문제는 부탁을 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레이몬드라는 것이었다.
“내 입으로 하나하나 기억을 되새겨 줘야 하나?”
“아, 레이몬드 경! 왜 그 문제를 또 들고 나오십니까? 여자들 사이의 문제는 여자들끼리 해결하는 거지 왜 레이몬드 경이 나서는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끝 부분에 가서는 결국 시온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레이몬드에게서 목숨을 빚진 시온이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레이몬드가 굳이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잊고 있었다. 시온은 자신이 수그려야 한다는 것은 인정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시온은 레이몬드가 저렇게까지 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결혼한 사람도 저렇게 아내의 친우 관계까지 신경 쓰지는 않는다.
“난 이셀라 양이 캐런에게 좀 더 친절하게 대해 줬으면 좋겠어.”
레이몬드의 진지한 얼굴에 시온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니까 그건 그냥 두 분 사이의 일인데.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 두십시오. 인간관계는 남이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두 사람이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자네랑 이셀라 양이 충분히 가까워진 시간인데, 왜 이셀라 양과 캐런은 아직도 저렇단 말인가?”
“사람마다 다 다른 법이거든요. 시간이 좀 지나면 맞는지 아닌지 알게 되겠죠. 뭐, 제가 보기엔 안 맞는 것 같습니다만.”
“그럼 곤란해.”
레이몬드는 다시 울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간이 많지 않거든.”
“무슨 소리십니까?”
“…….”
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정시 도착은 최소한의 예의 아니와요?”
다행히 이셀라는 떠나지 않고 약속한 광장 분수대에 서 있었지만 표정은 싸늘했다. 시온은 속으로 혀를 찼다. 자신이 이런 실수를 하다니.
시온은 남의 사소한 인간관계에 끼는 것이 딱 질색이었다. 여자관계가 복잡하니만큼 발 뺄 때를 아는 것이 그의 신조였다. 빠져나갈 때를 잘 알아야지 잘못하다가는 칼 맞아 죽는다.
본능은 괜한 일에 신경 쓰지 말라고 외치고 있었다. 알아서 뭐해. 애정 관계도 아니고 혈연관계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다. 그와는 상관없는 다른 사람들의 일에 자신이 왜 껴야 하냔 말이다.
눈앞의 이셀라에게 집중하기에도 시간은 턱없이 부족한데. 시온은 이셀라의 손에 입을 맞추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그 정중한 동작이 이셀라의 마음에 들었는지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가 시온의 머리 위에서 들렸다.
“앞으로 다시는 기다리지 않겠사와요.”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다시는.”
“예.”
이셀라는 무언가 더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볼은 화가 나서 퉁퉁 부풀었지만, 시온의 매끈한 얼굴을 보자 화가 누그러진 듯했다. 시온 엘렉트라의 곧게 뻗은 콧대가 이셀라의 손등 위를 스치고, 서글서글한 눈이 이셀라를 향했다.
레이몬드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에게는 좀 더 호리호리하고 낭창한 소년미가 있었다. 그리고 레이몬드보다 확실하게 이셀라에게 호의적인 태도가 큰 점수를 줄 만했다.
“왜 늦으셨사와요?”
“군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거든요.”
“어머나, 고생이 많으시군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군은 군이지. 시온은 레이몬드의 부탁 아닌 부탁을 떠올렸다. 자신이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나 하는 좌절감도 들었지만, 결국 어쩌겠는가. 까라면 까야 한다. 레이몬드가 자신의 직속상관이 아니라 하더라도 과거부터 진 빚이 한둘이 아니었다.
“요즘 이셀라 양은 잘 지내고 계십니까?”
“그럭저럭 괜찮아요.”
“다행이군요. 대성전이 머물기 그리 편한 곳 같지는 않아서 걱정되었습니다. 다른 곳은 어떨까요? 이셀라 양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머물 곳을 알아보겠습니다.”
어쩌면 머무는 장소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유난히 예민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시온과 같이 있을 때 이셀라는 그다지 까탈스러운 여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시온은 캐런과 떨어져 있는 것이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 더 좋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뇨, 다른 곳에 머물 수는 없어요.”
“왜 그렇죠?”
“아버지의 평판을 생각해야 하니까요.”
이셀라는 뾰로통한 얼굴로 대답했다.
의외인 대답이었다.
“…가출하셨다기에 그런 것은 신경 쓰시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흥, 어떻게 안 할 수가 있어요. 결국 제 모든 경제적 기반이 아버지에게서 나온 건데.”
이셀라가 모르기가 더 힘들었다. 이셀라는 가출을 하면서 베르딕의 도장과 인장, 그리고 갖가지 패물과 현금 등을 들고 나왔다. 이셀라 앞의 계좌가 있었지만 언제 베르딕이 동결할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성당만큼 베르딕이 접근하기 난감한 곳도 없었지만,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베르딕은 아직까지 이셀라를 잡으러 온다거나 하지 않았다. 이셀라의 계좌도 동결되지 않았다. 직접 대화하지 않아도 행동으로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적당히 놀다 와라.’
베르딕은 이셀라가 처음으로 한 반항을 나무라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불편해도 최소한의 체면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자신이 다른 곳에, 그것도 남자인 시온과 머무는 것은 베르딕의 평판에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가출한 상태라 하더라도, 머무는 곳이 대성당이면 큰 뒷말이 오가지 않는다. 이셀라는 그 정도는 지키기로 했다.
“캐런 양과 지내기 불편하지 않으시구요?”
시온은 이셀라의 설명을 듣고 말을 던졌다.
“왜 그 여자 이야기가 나와요?”
“잘 모르는 사람과 같이 지내다 보면 불편하기 마련이니까요. 사실, 캐런 하이어 양과 같이 지내는 것이 불편하실까 봐 제안한 것이었습니다.”
시온은 자신이 캐런에게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며 말했다.
“캐런이 왜 불편하겠어요. 그렇게 편한 사람도 드물죠.”
이셀라는 캐런의 이름이 나오자 불편한 표정이었지만, 시온이 듣고자 한 대답은 빨리 들려주었다.
“그래서 더 껄끄러워요.”
잘 알 수 없는 대답이었다.
“그럼 더 좋은 것이 아닙니까?”
시온은 이해가 가지 않아 반문했지만, 이셀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더 깊은 꿍꿍이가 있는 것이 분명해요! 자신의 안 좋은 이야기는 절대 풀지 않고, 항상 좋은 말만 하고 일방적으로 다 받아 준다? 그건 대부분 숨긴 꿍꿍이가 보이는 것보다 훨씬 깊고 깊은 사람이와요.”
캐런은 철저하게 이셀라가 좋아할 만한 목록을 뽑아서 그에 맞췄다.
그것이 문제였다.
기억에 의존해서 이셀라가 좋아했던 것들을 그대로 행했지만 역으로 지나치게 맞춰서 의심만 산 것이다. 캐런은 이셀라가 무슨 일을 하든 화내지 않았고 하나하나 다 맞추어 주면서 환심을 사려 했다.
하지만 캐런은 이셀라의 삶이 보통 사람과는 좀 다르다는 것과 남녀 관계와 친우 관계는 다르다는 것을 간과했다.
이셀라는 평생 주변에서 콩고물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봐 왔기 때문에 캐런의 접근 또한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캐런이 웃어 주기만 해도 호감을 사는 남자들과는 달랐다.
그녀는 심지어 일부러 캐런에게 짐을 떠맡기거나 무안을 주는 행동도 해 보고는 했다. 일부러 시온과 데이트를 할 때 부른다거나, 먼저 돌아가게 하거나. 캐런이 가지지 못할 장신구를 자랑하거나.
캐런이 참고 넘어간 그 모든 순간은 이셀라에게 의심만 주었다.
“뭘 해도 웃고 넘어가기만 한다구요. 그게 정상이에요?”
“…잘해 줘도….”
캐런은 레이몬드의 말을 듣고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이제 그만하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아무튼 고마워요, 레이몬드 경.”
캐런은 펜을 물고 곰곰이 생각하면서 레이몬드에게 말했다. 레이몬드는 캐런의 책상에 걸터앉아서 캐런에게 말을 걸었다.
레이몬드는 수도복을 훔쳐 입고는 몰래 들어오고는 했지만, 그것도 사람의 시선이 적은 시간 때나 오고갈 수 있는 일이었다. 조만간 다시 나가야 할 레이몬드는 캐런이 자신에게 집중하길 원했다.
“아니, 감사보다 이제 됐다는 말을 듣고 싶군요.”
기왕이면 키스도. 하지만 캐런은 고민하는 얼굴로 레이몬드가 얹은 팔을 치웠다.
“여자가 하는 일에 남자가 끼는 거 아니에요.”
“…….”
“농담이고, 아무튼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네요.”
“생각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이셀라를 받아들이는 것이 세상으로 나가는 한 걸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 둘만의 세상이 아니라.”
“전 그냥 둘만의 세상에 있어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캐런은 레이몬드의 입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면서 조용하라고 핀잔주고 나서는 편지를 마저 쓰기 시작했다.
“누구에게 쓰는 겁니까?”
“아빠요.”
“하이어 영주님께 말입니까?”
캐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요즘 제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알면 깜짝 놀랄걸요. 레이몬드 경, 낸시는 도망가 버렸지만 전 지금 한 사람 한 사람 최선을 다해서 대하고 있어요. 좀 더 나은 길, 좀 더 선한 길을 찾고 싶어서요. 그리고 1년 정도는 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레이몬드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 효과가 없지 않았는가. 이셀라 에반스와 친구가 된다는 건 너무 험한 길이었고, 애초에 둘은 그리 맞는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캐런은 여전히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캐런은 편지를 끝까지 쓰고는 종이를 들어 툭툭 치면서 잉크를 말리며 레이몬드에게 말했다.
“역시 한번 이셀라 에반스에게 고백해 보려구요.”
“…제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으면 합니다만.”
레이몬드는 캐런을 내려다보면서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지금 캐런이 무슨 소리를. 그러나 캐런은 레이몬드의 말을 부정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거 맞아요. 그렇지만 레이몬드 경이 뭐라 해도 안 들을 거예요.”
“아뇨, 캐런. 반대합니다. 절대 그런… 어떻게 절 두고….”
레이몬드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지금 캐런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걸까? 고백? 이셀라에게? 캐런이? 아무리 친구가 되기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지금 무슨 질 나쁜 농담을.
“둘이서 평생 살 수는 없는 법이잖아요. 역시 둘은 너무 적다구요.”
“절대 안 됩니다.”
레이몬드의 머릿속에서는 캐런을 어디로 옮길지 빠르게 계획이 흘러갔다. 당분간 다시 둘만 지내는 편이 더 나으리라. 캐런은 레이몬드의 단호한 대답에 기분이 상하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언제 제가 당신 허락을 맡고 행동했나요?”
“아무리 그래도 안 됩니다.”
“어차피 이셀라가 안 믿더라도 시도할 거예요!”
“왜 거짓말을 합니까?”
“네? 무슨 소리예요. 전 모든 진실을 말해 보려고 하는 건데.”
“…진실이라니, 캐런. 당신….”
“나도 미친 소리로 들릴 것은 잘 알아요.”
“…….”
캐런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레이몬드 경, 울어요?”
“…….”
숫제 한심하다는 목소리다. 어떻게.
“아니, 이셀라에게 회귀한다고 말하는 게 그렇게 싫어요?”
“…예?”
“어차피 안 믿을 거 나도 안다니까요? 그래도… 알았어요. 그렇게 싫으면 안 할게요. 어휴….”
오해를 푼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레이몬드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연거푸 캐런에게 사과 했지만, 캐런의 눈초리는 오랫동안 가라앉지 않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란 어렵기 짝이 없다.
생각한 대로 흘러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캐런은 좀 더 진심으로 다가가고 싶었다. 진짜 인생을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스스로 책임지면서 실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셀라처럼 가깝고도 먼 관계인 사람일수록 더더욱 중요했다.
“이셀라, 잠깐 할 말이 있어요.”
캐런은 밤늦게 들어온 이셀라의 방문을 두드렸다. 잠옷 차림의 이셀라가 문을 열고는 피곤이 적잖이 쌓인 얼굴로 캐런의 얼굴을 보았다.
“별로 중요한 이야기 아니면 아침에 하지 그래요?”
“중요한 이야기예요.”
“…뭔데요?”
“들어가서 이야기하면 안 될까요?”
이셀라는 내키지가 않는지 문가에서 서서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계속 막을 만한 명분도 없어 문을 열었다.
“내일 일이 있어서 가능한 짧게 말했으면 좋겠어요.”
“네.”
캐런은 이셀라의 방으로 들어갔다.
“…….”
지저분했다. 어쩔 수 없나.
이셀라는 직접 청소를 한 경험이 없으니 지저분하게 쌓아 두고 살았다. 하지만 바로 이틀 전에 캐런이 옷을 입혀 주면서 다 치웠다.
고작 이틀 만에 다시 옷가지들과 각종 영수증들과 잡지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는 공간은 그야말로 끔찍했다. 심지어 침대 위조차 잡지책들이 널려 있었다. 앉을 곳이 없어 서 있자 이셀라가 대충 침대 위에 있는 잡지를 밀어내더니 캐런에게 앉으라고 권했다.
“고, 고마워요.”
같은 방인데 이렇게까지 다르다니. 이셀라는 자신의 집에서 캐런이 일할 때는 먼지 하나 굴러다니는 것도 혐오스러워하며 닦달을 해 댔는데, 자신이 치워야 할 상황이 되자 기꺼이 지저분해지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이런 방에서 자면서도 단장하고 나갈 때는 깔끔하고 화려하기 그지없다니 감탄스러울 지경이었다.
캐런이 침대에 살짝 걸터앉자 책상 위에 기대앉은 이셀라가 그녀에게 물었다.
“할 이야기가 뭔데요?”
캐런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면서 이셀라에게 고백했다.
“이셀라, 사실 전 보기보다 나이가 아주 많아요.”
“…그건 좀 충격이긴 하네요.”
“사실 전 백 번 넘게 죽고 다시 살았어요.”
말하고 싶어. 누군가에게 내 상황을 이해 받고 싶어.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그 욕망이 참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말하고 싶은 욕망이었다. 똑같은 상황인 레이몬드만 아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자신을 모르는 타인에게 고백하고 싶은 욕망이었다.
전 백 번 넘게 죽었어요. 당신과 난 전혀 좋은 사이가 아니었어요. 난 조금 있으면 또 죽어요. 이유가 뭔지 알아요? 임신하지 못해서예요. 죽는 이유는 각양각색이지만 난 절대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난 영원히 이렇게 살고 말 거예요.
난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어요.
이제까지 한 번도 성공한 적 없으니까.
이셀라의 얼굴은 각양각색으로 변했다.
한심하게 보기도 하고, 공포에 질리기도 하고, 하얗게 굳어가기까지 했다.
캐런은 자신이 이셀라를 죽이려고 했다는 말은 쏙 빼고, 자신의 비극만을 강조해서 곱게 곱게 포장했다. 이셀라가 자신을 동정하는 것으로 시작할지도 모른다. 인간관계는 거기서 시작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
캐런의 이야기가 한참 동안 이어지고 마침내 이셀라는 대답했다.
“…좋아요. 알겠어요.”
“믿어요?”
이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캐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럴 리가 없는데?
레이몬드조차 곧바로 자신을 믿지 못했다. 아버지도 마지막까지 믿지 않았다. 믿은 것은 이 일을 전부 계획한 듈란뿐이었다. 그런데 이셀라는 그냥 믿는다고? 어째서? 캐런은 뺨을 맞을 것도 각오하고 왔는데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왜 넌 믿니?
머뭇거리던 이셀라가 혼란에 빠진 캐런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캐런에게 말했다.
“그래요. 그러니까… 음… 캐런, 내일 날이 밝으면 같이 병원부터 가요.”
이셀라의 눈빛은 과거의 레이몬드와 닮아 있었다.
과거.
“…제가 미쳤다고 생각하는군요.”
이셀라가 시선을 피했다.
“…알코올 중독은 부끄러운 게 아니에요. 비밀이지만 과거에 아버지도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으신 적이 있으세요.”
“전 알코올 중독이 아니에요.”
따지자면 약물 중독이지.
역시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캐런은 약한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모처럼 친해지려고, 자신의 비밀까지 털어놓았는데 반응은 이렇다. 어쩌면 이게 정상인의 반응일 것이다. 이셀라는 진지하게 말했다.
“너무 부끄러워하지 말아요. 에반스 가문의 지원을 받는 병원들은 정말 일류니까. 애번 수도원도 우리 산하라구요.”
“…그러니까 전 미친 게 아니라….”
캐런은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가렸다. 밤이 늦었는데 괜한 짓을 한 걸까? 동정이라도 살까, 한 고백이었다만 이렇게 단번에 미친 소리로 치부당하니 약간은 씁쓸했다. 처음에 이셀라가 믿는다고 착각했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나쁜 건 아니잖아요? 병원에 가서 확인이라도 한번 해 보자구요.”
이미 교차 검증은 예전에 레이몬드가 끝냈었다.
캐런은 굳이 갈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지만, 이셀라의 얼굴이 진지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나온들 다시 한번 더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네, 이셀라 양의 호의는… 기꺼이 받겠어요.”
이셀라 에반스는 캐런 하이어의 망상이 지나치게 구체적인 것에 약간 소름이 돋았다. 캐런이 중얼거리다가 점점 더 말에 열기가 뜰 때는 광기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중간에 숨도 돌리지 않고서 쏟아 내는 그녀의 말은 듣는 사람을 질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직 어린데 안됐네….’
하지만 그만큼 동정은 샀다. 비록 그녀를 멀리 하고픈 동정이었지만. 이셀라는 의사가 한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럴 리가 없어.”
“확실합니다. 제가 직접 말씀드릴까요, 이셀라 아가씨?”
늙수그레한 의사는 이셀라에게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의사들은 저렇게 매사 시큰둥하다. 하지만 듣는 사람으로서는 충격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그가 말한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아, 아니… 아니에요. 아직 말하지 마세요.”
이셀라는 밖에서 기다리는 캐런을 생각하며 주먹을 쥐었다. 이셀라가 캐런을 데리고 간 이유는 갖가지 검사를 받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미쳤다는 걸 인정하면 좀 나아지겠지.’
바로 옆방에서 생활하는 사람으로서는 동정과 공포에 휩싸인 판단이었다. 캐런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자 그 소소한 답답함이 두려움으로 바뀌어서 이셀라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캐런이 자신에게 잘해 주었던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에 이셀라는 그녀를 병원으로 데리고 왔다.
캐런의 헛소리 중 이셀라는 그녀가 지나치게 임신에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이 특히 불편했다. 종교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나라다. 열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소녀에 가까운 여자가 할 법한 소리가 아니었다.
“정말 확실한가요?”
“예. 확실합니다.”
캐런 하이어는 임신 중입니다.
“…하아.”
이셀라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자신이 왜 이렇게 고민해야 하는지 한탄했다.
대성당의 정원에는 이르게 핀 장미 정원이 있었다. 신에 대한 찬양보다는 자본의 논리가 들어간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하지만 이셀라의 눈에 찰 만한 것은 아니었으며, 수도에서 갈 수 있는 다른 곳도 많기 때문에 장미 정원은 방문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오늘까지는.
이셀라는 차마 시내로 나가지도 못하고 성전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정원에서 초조하게 기도나 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서글펐다. 무려 자신이 기도까지 하고 있었다.
‘신이시여, 캐런에게 뭐라고 말해야 좋겠사와요?’
이셀라는 대성당에서 머물면서 몇 년 만에 신에게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너무 오랫동안 하지 않았던 행위라 어색했지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정도로 골치가 아팠다.
“기부는 절세하기 좋을 때만, 도움은 최대한 생색내면서, 혹여라도 분위기 안 좋은 일에는 절대 끼지 말 것.”
이득이 되지 않는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아버지의 조언을 지켰어야 했다. 이셀라는 장미 정원 사이에서 대성전을 올려다보면서 손을 모았다.
‘내가 왜 안 하던 짓을 해서….’
차마 본당에 들어가서 기도를 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평상시에 기도를 하지 않는 자신이 기도를 하고 있으면 분명 어느 사제든 그녀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을 테고, 이셀라는 그 물음에 자연스럽게 답할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이 시간에 본당에 있을 캐런 하이어를 자연스럽게 대할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이셀라는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이른 새벽부터 정원에 나와서 이렇게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하아아아….”
캐런은 갖가지 이야기를 그녀에게 늘어놓았다. 어머니로부터 내려오는 저주 같은 것에 걸렸는데, 자신은 옛 이야기에 나오는 전설 속의 성녀 혈통이라고 했다. 이셀라는 사춘기 소녀들의 과대망상 같은 설정에 주먹을 꽉 쥐어야 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는 그나마 귀여운 것이었다. 자세히 풀수록 이야기는 이상했다.
“전 100년도 더 넘게 살았어요.”
“…….”
자신이 이제까지 몇 번이고 다시 죽고 살아났다고 하지만 이셀라는 상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아, 얘 돌았구나.’
이셀라는 캐런이 일종의 정신병을 앓고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말에 일관성이 있었다. 중증이다.
그녀는 캐런 하이어가 특히 임신에 집착한다는 것이 역했다. 자신들은 아직 성인이 된 지 얼마 안 된 나이다. 임신을 해야지 저주에서 풀리는데, 자신이 불임이다. 불임이기 때문에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했다.
이셀라는 거기서부터는 이상함을 넘어 오싹해졌다.
캐런은 열일곱 살이다. 그런데 불임인 것을 어떻게 확인한단 말인가? 그녀는 이제까지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저 고운 얼굴로? 캐런은 제정신이 아니다. 그리고 시골에서 살기에는 지나치게 예뻤다.
미치고, 예쁘고, 시골에서 사는 여자.
거기서 연상되는 사실은 뻔한 것이다. 무슨 짓을 당해서 돌아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이셀라는 갖가지 사람들에 대해서 아버지를 통해 건너 들을 수 있었다. 베르딕이 술에 취했을 때 무심코 내뱉는 말로, 가끔은 하인들과 하녀들의 수다로, 가끔은 베르딕에게 한을 품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렇게 생각하자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든 우선 병원에 데려가서 검사를 해 봐야 했다. 캐런은 이셀라와 숙식을 대부분 같이하는 사람이었다. 바로 옆에 이렇게까지 돌아 버린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이셀라로서 거북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병원에 데려가서 검사부터 해야지.’
그래서 이셀라는 그동안 계속 피하던 아버지와 연관된 사람들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가장 큰 병원에 직접 찾아갔다. 수도에 있어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셀라는 어렸을 때 봤던 늙은 의사에게 찾아갔다.
“이셀라 에반스 양? 무슨 일이십니까?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아, 그리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시는 편이 좋을 것….”
“제가 아픈 게 아니에요. 저, 옆방을 쓰는 또래 여자가 있는데… 좀 이상한 것 같사와요.”
“이셀라 양의 옆방이면 대성전 안을 말하는 겁니까?”
“예…. 그래서 가능한 조용히, 누구도 모르게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의사는 베르딕에게서 언질을 받았는지 흔쾌히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이셀라의 몸은 지극히 건강했다. 이셀라 자신도 그것은 잘 알았다.
문제는 캐런이었다. 이셀라는 소름이 끼쳤다. 자신은 그동안 정신병자와 숙식을 같이 한 것이다. 당장 캐런을 병원에 집어넣어야 할지도 모른다. 미친 사람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검사가 끝난 후 이셀라는 긴장한 얼굴로 의사에게 물었다.
“캐런 하이어 양이 어떤 상태인지 제대로 말해 주시어요. 그리고 비밀은 지켜 주시구요.”
“예, 알겠습니다.”
“제대로 미친 것이 맞나요…? 당장 격리시켜야 할까요?”
하지만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격리가 필요한 상태는 아닙니다. 인지 능력이나 사고 능력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하지만 제게… 이상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는데요?”
“아, 이셀라 양을 놀려 주기 위한 거짓말이었다고 웃으시더군요. 거 참…. 예쁜 아가씨였습니다.”
“이보시어요.”
“그래서 문제입니다. 지금 그 아가씨는 그럴 상황이 아니에요.”
캐런은 의사 앞에서 완벽하게 정상인의 흉내를 낸 것이다. 이셀라에게 말한 이야기는 전부 전설에 불과하다며 웃었고, 자신은 가끔 그런 이야기 때문에 악몽을 꿨지만 그뿐이라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처럼 겉보기에 정상적으로 행동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짜 문제는 캐런의 몸이었다.
캐런 하이어는 임신 상태다.
…누구의?
캐런은 자신이 불임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자신이 임신한 상태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셀라는 캐런이 시골에서 끔찍한 일을 당하는 바람에 미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저 정도로 임신에 대해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면 분명 그럴지도 모른다.
진실을 알려 주는 것이 맞을까?
너무 늦지 않게 알려 주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이셀라는 미혼모에게 가해지는 사회의 폭력에 대해 알 수밖에 없었다. 베르딕의 딸인 자신마저도 미혼의 임신은 두려운 것이었다. 종교가 사회를 지배하는 나라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캐런에게 당장 당신이 임신 중이라고 말해야 할까?
“부담스럽다고….”
갑작스럽게 지나치게 무거운 현실이 이셀라를 짓눌렀다.
그러고 보면 캐런은 이셀라가 대성전에서 지낸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셀라의 시중을 들다시피 하고 있었다.
이셀라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이셀라가 베르딕에게 하이어 영지에 대한 요청을 한다 하더라도, 이 정도까지 캐런이 자신의 비위를 맞춘다니. 이셀라는 그런 캐런이 껄끄러웠다. 분명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셀라는 자신이 생각이 맞아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껄끄러웠던 것은 비밀을 많이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캐런은 자신의 집안으로 돌아가기가 힘든 처지인지도 모른다. 어느 난봉꾼에게 당하고서 차마 집으로 갈 수 없어서, 흔쾌히 이셀라와 같이 대성전에 기거하는 것이다.
성전을 일종의 숙소로 쓰는 이셀라와 달리 캐런은 꼬박꼬박 예배나 봉사에 참석했다. 신학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현실이 비참해서 그런 것일까?
더 생각해 보니 사교계에서 캐런을 부르는 곳은 많았지만 캐런은 이셀라와 동행하는 극히 일부의 모임만 참석했다.
이셀라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부담감에 몸이 무겁게 짓눌리는 것 같았다.
“난 이런 질척한 일에는 관심 없어….”
이셀라는 장미 덩굴 아래 주저앉았다.
자신이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녀가 지금 임신 상태인 것을 무엇이라고 말해야 좋을까?
캐런이 자신의 하녀라면 부정하다면서 뺨을 치고 쫓아내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캐런은 그녀의 하녀가 아니다.
그렇다고 친구인가? 이셀라는 그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캐런은 이상한 여자였고 거북한 상대였다. 얽히고 싶지 않았다.
부스럭.
“시온 경, 이셀라 양 못 봤어요?”
“아, 캐런 하이어 양. 오랜만입니다.”
히익.
이셀라는 재빨리 몸을 숙였다. 캐런이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면서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아직 캐런을 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셀라 바로 위에서 대화를 계속했다.
“아침부터 이셀라 양이 계속 안 보이네요. 이셀라 양에게 할 말이 있었는데….”
“실은 저도 오늘 이셀라 양과 약속이 있었는데 나타나지 않아서 여기로 왔습니다.”
“네? 시온 경과 약속이 있었다구요?”
앗차.
캐런과 말을 나누고 있는 것은 시온이었다. 이셀라는 자신이 캐런 때문에 고민하느라 시온과의 데이트마저 까먹어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은 같이 화가의 살롱을 돌기로 했는데. 이셀라는 캐런이 원망스러웠다.
“언제 마지막으로 보았습니까?”
“글쎄요, 어제 같이 병원에 들렀다가… 이셀라 양이 먼저 돌아가겠다고 했는데… 제가 나왔을 때는 이미 가고 없었고…. 어머, 계속 본 적이 없네요?”
“설마 어젯밤에 돌아오지도 않은 겁니까?”
시온의 목소리가 급해진다.
이셀라는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나 여기 있어요’라고 일러야 하나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지금껏 수그리고 있었는데 일어나기도 부끄럽다. 어쩌지?
“네에, 정말 걱정이네요. 실종 신고를 하는 게 좋을까요?”
“에반스 저택에 연락을 하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어머, 그래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럼 전 저택에 전보를 붙이고 신고하러 먼저 갈게요.”
안 돼!
이셀라는 기겁했지만 캐런의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면서도 일어나지 못했다. 어쩌지? 뭐라고 해야 하지?
“이셀라, 그만 나와도 됩니다.”
“…….”
“다 보여요….”
“네….”
이셀라는 새빨갛게 물든 얼굴로 일어났다. 시온이 민망해하며 이셀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진작 일어날 것을. 후회가 막심했지만 그렇다고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시온은 이셀라와 함께 좀 더 사람이 없는 쪽으로 이동했다.
“…….”
“…사실 캐런 양이 손가락으로 먼저 알려 줬습니다. 보였거든요.”
“그, 그, 그랬사와요?”
이셀라의 얼굴이 굳었다. 그렇게 피해 다녔는데. 분명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결국 캐런은 자신에게 묻고 말 것이다. 뭐라고 해야 하지?
“…무슨 일이 있습니까?”
“사실.”
이셀라는 말을 하려다가 말문이 막혀 입을 뻐금거렸다.
“그게….”
당장이라도 털어놓고 싶다. 그리고 판단을 미루고 싶다. 문제가 단순한 남자 관계였기만 하더라도 이셀라는 바로 털어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너무 크다. 아무리 자신이 시온 경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미혼의 여성인 캐런이 임신했다는 것까지 말할 수는 없었다. 그만큼 예민한 문제다.
“이셀라, 이리로 와요.”
시온은 이셀라가 말을 못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웃옷을 벗어 깔았다. 그리고 손으로 이셀라에게 가리켰다.
이셀라가 머뭇거리다가 그 위에 앉자, 시온은 그 옆에 맨땅에 털썩 앉았다.
“바닥이 더러워요.”
“괜찮습니다. 이 옷은 세탁하기 좋거든요.”
“…네에.”
시온은 옆에서 장미 하나를 꺾어서 이셀라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그 장미를 받자 시온이 물었다.
“제가 경멸스럽습니까?”
“네? 왜요?”
“지금 제가 장미를 꺾었으니까요. 제 물건도 아닌 것을 드리는 것이 이상하지는 않나요?”
“아뇨.”
이셀라는 고개를 저었다.
시온은 웃었다. 그리고 이셀라의 머리에 장미를 솜씨 좋게 꽂았다.
“전 사실 돈이 없습니다.”
“…알아요.”
“오기 전에, 이셀라 당신에게 어울리는 물건을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떠오르지 않더군요. 사실 오늘만이 아니라 계속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너무나 없다는 것만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시온은 이셀라에 비하면 턱없이 가난한 평민에 지나지 않았다. 이셀라가 그에게 호감을 품는 것은 철저히 외관에만 해당되는 것이다. 혈통이 있어 쓸모가 있던 레이몬드와는 다르다. 불안정하고 짧은 호감이다.
“하지만 전 당신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으려고 합니다.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라도,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듣고 같이 고민하고 싶어요.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레이몬드 경, 요즘 자네 지나치게 허술한 것 아닌가? 지난달에는 어디에 갔다 온 건가? 자네에게 시킬 일이 있었는데.”
팬케이르 후작은 레스토랑에 앉아서 차가운 눈으로 레이몬드를 보았다.
아직 테이블에 앉지도 못한 레이몬드는 동작을 멈췄다. 후작에게서 연락이 왔을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자리에 앉기도 전에 저렇게 말할 정도라니 어지간히 기분이 상한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후작님. 그때는 형과 해결할 일이 있었습니다.”
레이몬드는 자신의 형을 생각하며 약간 어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억이 없던 과거의 그는 오랫동안 형을 포기하지 못했다. 언젠가 다시 좋은 모습으로 돌아올 것을 믿었었다.
하지만 100번이 넘는 기간 동안 항상 죽은 형을 기억하게 된 후로는 빠르게 포기할 수 있었다. 캐런 하나만을 생각하기도 충분했으며, 무엇보다 포기해야 할 사람은 빨리 포기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었다.
“세이어테스 남작이라면 이해하지. 그의 상태는 좀 나아졌는가?”
“…걱정해 주신 덕분에 한결 나아졌습니다.”
아니다. 세이어테스 남작의 병은 절대 낫지 않는다.
그는 항상 일찍 죽었다. 술과 약에 취해 걸어 다니다가 개울에 빠져 익사하는 것이 그의 끝이었다. 그의 삶은 항상 폭력적이었다.
레이몬드에게 가족은 아내로 충분하다. 형은 이미 어린 시절 죽은 사람이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캐런이 편지를 접어 겉봉에 주소를 쓰는 것을 보았다. 이번 생의 캐런은 이제껏 그녀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행동을 한다. 하녀 하나하나를 살피고, 가족을 생각하고, 이셀라 에반스를 돌본다.
그래서 레이몬드도 자신의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세이어테스 남작은 나아지지 않았지만, 레이몬드는 그래도 그를 돌보았다. 대신 그에게서 남작으로서의 권한을 빼앗았다.
“축하하네. 하지만 자네를 부른 건 그것뿐이 아니야. 자네도 알지?”
하지만 후작이 부른 것은 하나 뿐이 아니었다. 후작은 자신의 일정을 정리하면서 레이몬드에게 말을 이었다.
“요즘 자네에 대한 소문이 그리 좋지 않아.”
“사실이 아니니 신경 쓰지 않습니다.”
“사실이든 아니든 보다 어떤 소문이 나고 있는지 더 중요하네. 선심을 써야 할 때 써야 한다는 걸 이해 못하나? 루이스 왕세손께서 걱정하시고 계신단 말일세.”
레이몬드는 자신을 향해 나고 있는 소문을 생각했다. 시온이 열심히 일해 후작의 귀에까지 들어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후작이 진심으로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레이몬드에게 말했다.
“이셀라와 왜 헤어졌는지 이해를 못하겠군. 아직 그녀는 써야 할 패야.”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시온 경이라면 내가 오늘 점심 식사는 제대로 사지.”
“괜찮습니다. 전 가볍게 하겠습니다.”
“…정말인가?”
“예.”
후작은 쓰던 메모를 멈추고, 종으로 시종을 불렀다. 밖에 서 있던 시종이 들어오자 레이몬드에게 눈짓했고 레이몬드는 홍차 한잔을 시켰다.
“집무실이 아닌 곳은 오랜만이군요.”
“…내가 자네를 잘못 본 모양이야. 지금 고작 그따위 이유로… 베르딕과의 인연을… 그것도 시온 경?”
팬케이르 후작은 베르딕에게 이를 가는 사람이었다. 베르딕 에반스가 군수 물품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분쟁은 더더욱 극심해졌고 무기들의 값 또한 치솟았다.
레이몬드는 그저 그에게 하나의 말일뿐이었다. 베르딕과의 연결 고리 중 하나.
이셀라와 레이몬드의 부하 중에서 누군가와 계속 연이 이어진다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그것이 시온이라면 좀 달라진다. 베르딕은 시온으로 만족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레이몬드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베르딕은 분명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고, 뒤를 더 캐내려 할지 모른다.
시온의 배경을 조금만 조사하면 바로 레이몬드가 나온다. 그 둘의 관계를 캐내다 보면 자연스레 군과 학교가 나올 것이고, 팬케이르 후작 또한 관계가 멀지 않을 것이다. 시온을 레이몬드 대신으로 쓴다는 것은 후작에게는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이렇게 안 좋은 선택만 연달아 할 줄은 몰랐네.”
후작의 눈이 조금씩 차가워졌다. 레이몬드는 그가 이미 계산을 하며 자신의 쓸모를 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래 살다 보니 그의 눈치는 좀 더 빠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오래 산 만큼 가지고 있는 패도 좀 더 많았다. 루이스 왕세손이 자신을 더 이상 동경하지 않아도, 베르딕과 연이 없더라도 괜찮다.
“다른 이야기를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잠깐 면피하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아 레이몬드 경. 지금 화제를 돌리려면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내놓아야 할 걸세. 베르딕 에반스가 없는 자네가 내게 매력이 있겠는가?”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미리 말하는데, 왕세손 전하를 들먹이면 당분간 자네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아야 할 거야.”
레이몬드는 고개를 저었다. 왕세손이 지금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더 생각했다.
“후작님, 요즘 연달아 있는 연쇄 살인 사건이 끊긴 것을 아실 겁니다. 그것에 대해 좀 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식사하면서 듣기에 좋은 주제는 아니군. 고기 대신 다른 것으로 바꾸겠네.”
베르딕은 그와 같이 차로 종류를 바꿨다.
레이몬드는 품에서 그에게 지도를 꺼냈다. 거기에는 이제까지 사건이 일어난 장소와 그가 막은 장소가 표시되어 있었다.
“최근 제가 사창가를 드나든다는 이야기는 조사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건 뭔가?”
“연쇄 살인 건에 대해 후작님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베르딕이 아니더라도 그에게는 쓸모 있는 패가 많다.
분명 후작은 이 정보를 꽤나 좋아할 것이다. 레이몬드는 후작이 좋아할 만한 다양한 것들을 알았다.
이번 생에서는 살 수 있을까?
이번에야말로 살 수 있을까?
그러기를 소망한다. 선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그녀를 사랑한다. 이번에는 성공해야 한다. 레이몬드는 참담한 희망을 느꼈다.
“…알았어요.”
이셀라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시온에게 말했다.
“부담스러워도 말 안하는 것이 더 부담스러우니까, 말할래요. 할까 말까 할 때는 하는 게 나은 것 같아요. 수습은 돈으로 하면 되니까.”
시온에게 전부 털어놓지는 못했지만, 이야기를 하다 보니 결심이 섰다. 시온은 이셀라에게 악수를 하며 북돋았다.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잘됐으면 좋겠군요.”
“네.”
이셀라는 결심했다. 역시 캐런에게 말을 하는 것이 나으리라.
캐런이 아무리 꺼림칙하더라도 말해 주지 않으면 자신은 계속해서 속이 불편할 것이다. 그녀에게 현실을 말해 주고,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것이 맞으리라.
그리고 그녀는 캐런 하나 정도를 수습할 돈은 자신의 용돈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셀라는 가볍게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다지 큰일이 아닐 수도 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에게는 돈이 많다. 하루만 고민했는데도 이 정도인데 말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계속 신경만 더 쓰여서 오히려 자신에게 손해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시온 경. 전 당신이 돈이 없어도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건 당신을 그만큼 엄청나게 좋아해서는 아니에요. 내가 그만큼 있으니까 베푸는 거지.”
“어련하시겠습니까. 좋아하는 건 제가 더 좋아하면 되는 거죠.”
이셀라는 시온이 자신의 돈을 더 좋아한다 하더라도 그리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 이유를 좀 더 알 것 같았다. 자신은 역시 누군가를 동경하기 보다는 누군가가 맞춰 주는 것이 더 좋았다.
캐런은 계속 꺼림칙했다. 도대체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온은 명쾌했다. 그는 이셀라가 돈이 있는 한 저렇게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녀를 사랑할 것이다. 어쩌면 사랑하는 척이라도.
하지만 이셀라는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에게 남자는 휘두를 수 있는 존재이지 동경하는 존재는 아니었다. 아버지가 주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것이었다. 베르딕도 이셀라를 몰랐고 이셀라도 자신을 몰랐다.
레이몬드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를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셀라는 그가 내내 불편했다. 잘 맞지 않는 장신구나 말을 타고 있는 것 같았다.
명마라고 전부 말을 잘 듣는 것은 아니다. 베르딕은 그녀에게 좋은 남자를 주려고 했지만, 이셀라에게는 자기가 휘두를 수 있는 남자가 좀 더 맞았다. 그것은 레이몬드와 결별 후 시온을 만나고 깨달은 사실이었다.
황금빛 노을에 물든 강가를 걷는다. 강이라기보다는 하천이라 할 만한 물가였지만, 산책을 하며 바람을 쐬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캐런은 바람에 머리가 휘날리는 것을 즐기면서 천천히 걸었다. 강에는 고니들이 떠다니면서 사람들이 던지는 빵 쪼가리들을 쫓고 있었다. 역시 수도가 좋았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오고갔으며 가지각색의 건물들과 볼거리들이 있었다.
“저녁은 어떻게 할까요?”
“음, 어, 이따가 먹고 들어가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전 신전 식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요.”
“그러시군요.”
캐런은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는 이셀라를 보면서 산책을 어디까지 해야 할까 생각했다.
“시온 경과는 만나셨나요? 낮에 계속 찾아다니셨는데.”
“…네.”
만났겠지. 자신이 가르쳐줬는데. 그런데 이셀라는 뭐가 문제라서 어제부터 저러는 걸까? 캐런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면서 고민했다. 어제는 보이지 않았고 그저께 오전에는… 병원에 갔었지.
캐런은 그제야 자신이 이셀라에게 회귀를 고백했던 것이 떠올렸다. 그동안 또 까먹었던 것이다.
병원에서 자신이 미쳤다고 했나 보구나.
캐런은 이셀라가 저렇게 불안해하는 이유를 짐작하자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저렇게 긴장하는 것이다. 옆에 미친년을 계속 두고 살았다고 생각해서. 미친 사람에게 너 미쳤다고 말하기를 어려워한다. 레이몬드도 과거에 그랬었다. 그래서 캐런은 이셀라의 태도를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괜찮아요. 제가 정상이 아니라도 이셀라에게 폐를 끼치지는 않을 거예요.”
당신과 친구가 되려는 목표는 이다지도 이루기가 힘들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어딘가 싶다. 캐런은 이셀라가 자신에게 병원을 권한 것만 하더라도 장족의 발전이라고 생각했다.
예전의 이셀라는 캐런이 일을 하다가 앓아누워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을 쓴다면 자신에게 옮길까 봐 그것에 신경 쓰며 기분 나빠 하는 정도였다. 그랬던 이셀라가 먼저 병원에 가라고 권한 것은, 충분히 감격할 만하다.
“캐런… 그… 혹시 짐작 가는 일이 있나요?”
“음, 글쎄요.”
캐런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이셀라와 같이 계속 걸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한데 계속 말을 꺼내기를 어려워한다. 그렇다고 들들 볶을 수도 없어서, 결국 그들은 한참을 걸었다.
한참을 걷자 어느새 황금빛에서 붉은빛으로 변했고, 보랏빛으로 천천히 물들기 시작한다. 때 이른 저녁 달이 뜨는 것이 아름답다. 캐런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제는 돌아가야 한다. 더 늦으면 부주교가 눈에 쌍심지를 켤 것이다.
“이셀라,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 보는 것은 어때요?”
“…왜요?”
“그냥 얼마 전에 아버지에게 이것저것 근황을 적어 보냈는데, 기분이 괜찮더라구요. 베르딕 씨도 분명 이셀라 양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럴까요.”
“네.”
다시 침묵이 흐른다. 캐런은 걸음을 멈췄다.
“더 늦으면 부주교님이 화내실 거예요. 우리 왔던 길을 되돌아갈까요?”
“잠깐만요. 조금만 더 걸어요.”
이셀라가 고집을 부렸다. 캐런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바람은 선선했고 풀벌레 소리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와 음식이 구워지는 냄새가 섞여서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이셀라의 치마 끝에 어느새 풀물이 들어 있었다. 캐런은 신경이 쓰였지만 이셀라는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것 같아서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이셀라가 걸음을 멈췄다. 캐런도 멈췄다.
이셀라는 캐런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녀에게 말해야 한다. 그녀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더라도. 진실은 알려 줘야 한다.
“캐런, 당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