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 This is not the end
이셀라는 어두운 공간에서 눈을 떴다. 그리고 당황했다. 자신이 눈을 뜬 것은 침대가 아니었다. 딱딱한 바닥이 느껴진다. 여기가 어디지? 침대에서 떨어졌나?
아니, 자신의 방은 나무로 된 바닥이었다. 여기는 돌이다. 이셀라는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 하아…?”
어둡다. 이셀라는 눈을 비볐다. 하지만 쉽사리 눈에 보이는 것은 없었다.
왜? 이셀라의 방에는 창문이 크게 달려 있다. 이렇게 어두울 리가 없다. 황급하게 손을 더듬거린다. 그리고 무언가가 만져졌다.
“꺄아아아아악!”
사람의 손이었다. 이셀라는 기겁을 하고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이셀라의 입은 그 손에 의해 막혔다. 공포에 질린 이셀라가 손톱으로 상대방의 손을 쥐어뜯자, 뒤에 있던 사람이 아픈지 신음 소리를 낸다.
“…윽, 이셀라…. 가만히 있어요.”
익숙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셀라는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버둥거렸다.
“이셀라, 진정해요.”
상대방이 침착하게 힘으로 누르자 점점 힘이 빠지고 정신이 들었다. 한없이 어두운 곳에서도 선명하게 목소리가 들린다.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미성. 이셀라의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그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괜찮아요. 진정하면 괜찮을 거예요. 알았어요? 침착해지면 놓을게요.”
이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막고 있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캐런? 여기가 어디죠? 대성전인가요? 왜 이렇게 어두운 거죠?”
부디 그랬으면. 이셀라는 자신의 희망을 말했다. 하지만 캐런은 단박에 부정했다.
“아뇨, 거기는 아니에요. 여기는… 우리가 와서는 안 될 곳인데. 난 전에 와 본 적이 있는 곳이에요.”
“여기가 어딘데요?”
캐런은 이셀라에게서 떨어졌다. 자박거리는 걸음 소리가 들린다. 이셀라는 멀어지는 캐런에게 다시 물었다.
“여기가 어디냐구요!”
“이셀라, 불을 켜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절대 비명을 지르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그리고 여기가 어딘지 궁금해하지 말아요. 그 편이 더 좋을 거예요.”
“어딘지 말해요!”
“모르는 편이 좋아요.”
이셀라가 발작하듯 소리 질렀지만 캐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체 어딘데요? 우리는 지금 왜 여기에 있죠? 난 분명….”
여기는 어디지. 전혀 모르는 곳이다. 바닥은 차갑고 서늘하다. 창이 하나도 없는데 좁은 곳은 아니다. 이셀라는 바닥을 더듬으면서 기억을 더듬었다.
마지막으로 있었던 곳은 어디지? 내가 어디에 있었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셀라는 자신의 머리를 매만졌다. 머리 쪽에서 무언가가 흘러내려서 안 그래도 어두운데 거슬렸다.
“…히익.”
머리가 흥건하고 축축하다. 처음에는 땀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부디 물이기를 바라지만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았다. 자각하자 두피가 점점 따갑게 느껴진다. 팔 다리도 아프다. 몸 여기저기서 통증이 올라오고 있었다.
어째서?
이셀라는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쉿, 이셀라.”
캐런은 손가락을 들어서 입술에 대며 이셀라와 눈을 마주쳤다. 이셀라는 말하려다가 멈췄다. 캐런이 뒤편 어딘가를 잠시 바라보는 것 같았다. 몸 전체가 경직되어 있다.
이셀라는 캐런에게 말을 하려다가 멈췄다. 여전히 바람은 산들거리고 물소리는 고요한데, 갑자기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아직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왜 그렇지? 이셀라는 캐런의 갑작스러운 표정 변화에 당황했다.
“왜….”
“지금 그대로 뒤로 돌아요. 조용히. 괜찮으니까 천천히….”
얼굴이 굳어 있었다. 이셀라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캐런의 단호한 태도에 눌려 더 묻지는 못했다. 이셀라의 시선이 주위를 훑었다.
어느새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물비린내와 악취가 약하게 풍겼다. 이셀라는 얼굴을 찡그렸다. 처음 보는 곳이었다. 천을 따라 너무 멀리 걸어온 것이다. 이셀라는 움직이려고 했다. 무언가를 보지 않았더라면.
이셀라는 숨을 멈췄다.
“…히익.”
사람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덩치들이 꽤 있는 청년과 중년 남자들이었다.
옷이 깔끔하지 못하고 수염이 지저분하게 나 있어서, 이셀라와 마주칠 일이 거의 없는 신분의 남자들이었다. 욕설도 섞여서 들렸다.
“욱.”
“어서.”
캐런은 저걸 보고 돌아가려 한 것이었나. 이셀라는 급하게 돌아가려 했다.
첨벙.
무언가를 잡고 하천으로 던진다. 첨벙거리면서 던져지는 소리가 났다. 그들은 무인가를 버리고 있었다. 악취는 거기에서 나는 것 같았다.
이셀라는 멀리서 그들이 팔 하나를 장난스럽게 들고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팔? 사람의 팔. 이미 몸에서 잘린.
‘저 사람들은 지금 시체를 처리하고 있어.’
너무 아래까지 왔다. 그리고 주변에는 그들밖에 없었다.
이셀라가 꼼짝도 하지 못하자 캐런이 이셀라를 살짝 밀면서 속삭였다.
“천천히… 벗어나야 해요. 조용히.”
캐런은 이셀라의 뒤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이셀라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돌았다. 캐런의 말대로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당장.
이셀라는 천천히 발을 뗐다.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그때였다. 풀이 부스럭 거렸을까, 아니면 발걸음 소리가 들렸을까. 남자들의 거친 고함소리가 들렸다.
“야, 저, 저기! 씨발!”
“잡아!”
“저기 여자 둘이 있다! 당장 잡아!”
“놓치지 마!”
젠장, 캐런이 혀를 찼다. 캐런이 이셀라의 등을 떠밀었다.
“뛰어!”
이셀라는 분명 정신없이 발을 내디뎠다. 다닥다닥 구두 소리가 울린다. 이셀라는 거의 태어나서 처음으로 숨이 터져라 달려 나갔다. 하지만 옷은 너무 무거웠고 구두는 높았다. 그리고 남자들은 너무 많았다.
‘안, 안 돼…. 잡히겠어.’
“씨발, 존나 귀찮게 하네.”
“그래도 다행이지. 덕분에 손 덜었어. 이 여자들로 하지?”
“그게 좋겠어.”
몇 걸음 못 가서 이셀라는 머리채를 강하게 휘어 잡혔다.
그리고 끝이었다.
이셀라와 같이 산책을 하는 중이었다. 이셀라는 자신이 걱정되는지 병원에서 검사를 받게 했고, 그 뒤로 계속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캐런은 그것을 보며 아마 병원에서 자신이 미쳤다고 했거나, 아니면 다른 검사를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듈란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에게 약을 먹였으니 어쩌면 약의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어떤 결과가 나와도 그럴 법했다. 자신의 정신이든 몸이든 무엇이나 정상이 아닐 수 있다.
어떤 안 좋은 결과든 캐런은 기꺼이 받아들일 마음이 있었기에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캐런은 이셀라가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약간은 귀엽다고 느꼈다.
“캐, 캐런…. 산책하면서 할 말이 있는데요.”
이셀라가 캐런에게 그렇게 같이 외출을 신청했을 때, 캐런은 기꺼이 동행했다. 강가를 천천히 걸으면서 계속 이셀라가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
어쩌면 우리는 친구 비슷한 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캐런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노력에 박수를 보냈다. 살인만큼 뿌듯한 일 아닌가. 낸시를 죽이는 것에 성공했을 때도 이렇게 뿌듯했다. 역시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도전하는 것은 참 보람된 일이다.
상쾌한 마음에 기꺼이 이셀라의 말을 들을 준비를 한 순간을 그들이 망쳤다.
“젠장….”
나올 때는 아직 해가 있었고, 공원이 조성되어 있는 강가에는 산책하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다. 위험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그런데 정처 없이 걷다 보니 무심코 너무 멀리까지 내려오고 말았다.
이셀라가 준비된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 캐런이 본 것은 남자들이 하천에서 시체를 처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그 광경을 본 순간 캐런은 위험하다는 생각보다는 간신히 이셀라와 이 정도까지 친해졌는데,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셀라보다 먼저 붙잡힌 캐런은 남자들에게 입을 막히면서 이번 생의 끝을 생각했다. 시체를 처리하는 것을 보았으니 살려둘 리가 없다. 무슨 짓을 해도 1년이라는 기간을 꼭꼭 채우고 죽던 과거의 캐런이라면 지금 이 시기에 어떤 꼴을 당하더라도 죽지 않을 것이란 자신이 있었겠지만, 이제는 아니다. 자신은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
아쉽지만 이번 생은 이렇게 끝인가 보다.
레이몬드는 자신을 찾다가 안 되면 그도 자살하고 따라오겠지. 캐런은 무심코 떠올리다가 이것도 꽤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몬드에게 앞으로는 기다리지 말고 자살하라고 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역시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니 남자가 눈물이 많아져서.
캐런은 레이몬드를 생각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런데 눈을 뜨니 여기란 말이지….”
캐런은 손으로 방의 벽을 더듬어 나가면서 장소를 파악했다.
아무래도 여긴 지난번에 왔던 곳인 것 같다. 캐런은 벽을 더듬으면서 천천히 예전에 등불이 걸려 있던 곳을 찾았다. 덜그럭거리면서 불이 꺼진 등불을 찾았다.
다행히 등불의 바로 옆에 성냥도 같이 놓여 있었다. 캐런은 암흑 속에서 몇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성냥에 불을 붙이는 데 성공했다.
“여기가 어디냐구요!”
“…이셀라, 다시 말하지만… 비명을 지르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대체 어딘데요?”
어디긴.
이곳의 주인은 뻔하다. 이 나라의 실권을 잡고 있는 사람.
“하아.”
캐런은 한숨을 쉬면서 등불에 불을 붙였다. 아주 작은 불이었지만 불이 들어오자 시야가 트였다. 이셀라가 불을 향해 허둥지둥 다가왔다. 이셀라의 얼굴이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런. 캐런은 이셀라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그녀는 캐런의 손을 피했다.
“여기가 어디죠? 그리고 우린 왜 여기에 있죠? 왜 아까부터 제대로 말하지 않아요?”
“…아까 말했듯이 모르는 게 좋아요.”
캐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 방의 주인은 귀즈 왕세자다. 그는 아마 자신을 죽이려고 들지는 않을 것이다. 모친을 빼다 닮은 자신은 그냥 죽이는 것보다 좀 더 다양하게 쓸모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비위가 약한 캐런으로서는 그와 어울려 줄 생각이 없었다.
‘차라리 빨리 자살할까?’
캐런은 장식용 칼이 걸려 있던 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너무 높은 곳에 있다. 자신의 팔로는 닿지 않을 것이다. 지난번에도 귀즈 왕세자가 자신의 아들을 죽이면서 바닥에 내려놓아서 가능했던 일이다.
“골치 아프네….”
캐런은 자살 방법을 생각했다. 혀를 깨물어도 죽지 않는다는 것은 전의 인생들을 통해 알았다. 머리를 벽에 힘차게 박으면 죽을까? 아무리 자신이라도 그런 방법으로 자살에 성공한 적은 없었다.
지난번처럼 목걸이를 단단한 줄로 바꿔 놓았어야 했다. 그랬으면 자살에 성공하기 좋았을 텐데. 캐런은 자신의 부족함을 한탄했다. 어떻게 죽지?
“…캐런, 당신 얼굴에 피… 가… 묻어 있는데요.”
게다가 이셀라도 있다.
캐런은 어두운 공간에서 얼굴이 피로 얼룩져 있는 이셀라를 보자 암담했다. 그녀 또한 납치당하면서 머리를 무엇으로 맞았는지 얼굴에 피가 묻어 있었다. 캐런은 자신의 뒤통수를 만지면서 이셀라에게 말했다. 다행히 자신의 뒤통수가 깨지지는 않은 것 같다.
“이셀라, 당신 얼굴도 피범벅이에요.”
“네, 네? 정말요? 아, 그래서…. 어쩐지, 잠깐 등불 좀”
이셀라가 캐런에게서 등불을 낚아채서 허둥거리며 소매로 얼굴을 닦아 내다가, 소매에 흠뻑 묻어나는 피를 보고 기겁했다.
“아아악!”
“쉿.”
“꺄아아아악!”
“이셀라. 조용히 해요.”
“아파요! 피, 피가!”
계속 피는 나고 있었는데 새삼스럽게. 캐런은 이셀라에게 다가가서 머리를 살펴보았다. 가격당했는지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멀쩡히 움직이는 것을 보면, 그것보다 다른 것을 신경 써야 할 시간이다.
“이셀라. 좀 진정….”
“…악.”
“이셀라!”
그리고 이셀라는 입을 벌린 채 쓰러지고 말았다.
캐런은 급하게 이셀라의 심장에 귀를 가져다 댔지만 심장이 멎거나 한 건 아니었다.
“…어쩌지.”
캐런은 등을 높이 들었다.
그러자 어둠 속에 숨겨졌던 방 안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났다.
그 방 안에는 여전히 벽에 시체가 잔뜩 걸려 있었다. 다행이라 할 만한 것은 장식품의 수가 아직 적다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방 안 가득히 걸릴 텐데, 시간이 일러서인지 걸려 있는 수가 덜해 그때에 비해서는 그로테스크함이 떨어졌다.
“…이셀라….”
여전히 역겨웠지만 두 번째는 비명을 지르지 않고 담담하게 쳐다볼 수가 있었다. 캐런은 사람의, 사람이었던 것들의 개수가 전보다 확연히 적은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죠?”
귀즈 왕세자와 또다시 얽히고 말았다.
“아직 믿을 수 없네.”
레이몬드는 용의자의 이름도 꺼내지 않았지만, 팬케이르 후작은 잘라 말했다. 더 듣고 싶지도 않다는 얼굴이었다. 레이몬드는 자신이 가지고 온 자료들을 가리키면서 입을 뗐다.
“후작님, 전 이 사실을 후작님에게 알릴까 말까 굉장히 조심스러웠습니다.”
“자네는 지금 무슨 소리를 했는지 이해하나? 지금… 이게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지 자각이 있는지 묻고 있네.”
레이몬드가 내민 증거와 통계, 사람들의 증언들과 용의자들의 몽타주 등은 전부 귀즈 왕세자를 향하고 있었다. 이미 답을 아는 레이몬드가 거꾸로 증거를 만들어 낸 것에 가까웠지만, 그것을 모르는 후작이 보기에는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한 증거들이었다.
하지만 후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자신 또한 왕실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그 모든 증거가 왕궁을 향하고 있습니다.”
레이몬드는 후작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말했다.
“더 이상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네는 목이 한 일곱 개쯤은 되는 모양이야. 난 못 들은 것으로 하겠어.”
“후작님.”
후작과 함께하는 시간이 쌓이면서 레이몬드는 후작의 냉정한 부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젊었을 때는 잘 보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후작은 베르딕이 무기 개발을 하거나, 분쟁을 조절하는 것은 혐오했지만 귀즈 왕세자를 적극적으로 말리지도 않았다.
사람이 하나둘도 아니고 레이몬드가 파악한 수만 세 자리에 달한다. 팬케이르 후작과 귀즈 왕세자는 겉으로는 꽤나 친밀한 사이었다. 그의 비밀에 대해서 눈치 못 챘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는 절대 귀즈 왕세자를 말리지 않았다.
자신은 결국 후작에게 장기 말에 불과했다. 그는 정치적 목적에 따라 자신을 얼마든지 내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왕위에 오르기 위해서.
루이스 왕세손은 결국 나중에 죽을 것이고 후작은 왕이 될 터였다. 그의 더러운 면까지 봤던 레이몬드는 후작 대신 오명을 뒤집어쓴 적도 있었다. 사람이 넓은 무대로 나아가니 쓰고 버림이 더 자유로워진 것이다.
팬케이르 후작은 좀처럼 이 문제에 대해 간섭하고 싶지 않아 했다. 후작은 레이몬드가 내민 자료를 손으로 밀어 버리면서 충고했다.
“몸조심하게. 가끔은 참아야 할 때도 있는 법이야.”
“지금도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시체가 발견된 시기, 납치될 뻔한 시기를 보십시오.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국경선에서는 지금도 훨씬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어. 수도에서 좀 사라진 것은 티도 안 난다네. 아직 시기가 일러.”
후작의 눈이 차가웠다. 레이몬드는 그가 보기에 아직 까마득한 애송이었다. 그런 그가 위험한 증거를 들고 나타나자 후작은 레이몬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과거의 그는 레이몬드보다 더 많은 양의 정보를 쥐고 있었기에 레이몬드의 행동을 여유롭게 받아쳤다. 그러나 지금은 레이몬드가 그보다 더 많은 정보를 손에 쥐었다는 것을 알아채자 바로 날카롭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후작은 레이몬드가 주도권을 갖는 대화를 불쾌해했다.
“후작님.”
“무엇보다 자네의 일이 아니지 않는가. 사람들이 실종된 것에 왜 그렇게 관심을 갖는가? 그것도 대부분 창기들 아닌가. 신경 쓰지 말게.”
“창기는 죽어도 됩니까?”
레이몬드의 도발적인 말에도 후작은 코웃음만 쳤다.
“자네가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나? 건방지게 말하지 마.”
“후작님.”
도무지 지금의 후작은 레이몬드의 의견을 수용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레이몬드는 자신이 가져온 정보를 갈무리했다. 귀즈 왕세자를 지금 후작을 통해서 수습하는 것은 무리다. 그는 지나치게 완고하다. 마지막까지 몰지 않으면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레이몬드는 신음을 흘렸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자신이 지금 최대한 사람들이 죽는 것을 막으려고 해도, 시체는 여전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레이몬드가 막으면 그만큼 귀즈 왕세자는 다른 곳에서 어떻게든 희생양을 또 데리고 오는 것이다. 권력자의 힘은 그만큼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라진 사람의 수는 전보다 확실히 줄었지만, 그것은 레이몬드가 기억하는 과거에서나 그런 것이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어떡할까….’
“이 이야기뿐이면 난 먼저 가도록 하겠네.”
“후작님.”
레이몬드는 그냥 전부 다 죽여 버리는 것을 생각했다. 역시 사람이 선하게 사는 것은 어렵다. 옳은 길로 가려고 해도 더 꼬여 버린다. 그는 좀 더 편한 방식을 안다.
후작 대신 귀즈 왕세자와 손을 잡으면 그는 캐런에게는 손을 대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이번에도 그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후작님.”
그는 떠나 버렸다.
레이몬드는 신음을 삼켰다. 캐런에게 뭐라고 하는 것이 좋을까. 그의 살인은 방치하는 것이 맞을까.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없을까?
세상이 캐런에게 좀 더 온화해졌으면. 그것만이라도.
“레이몬드 경이 후회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캐런은 한숨을 쉬면서 이셀라를 질질 끌어 푹신한 소파에 눕혔다. 이셀라는 거품을 물고 기절한 뒤에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캐런은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혼잣말을 이어 나갔다. 전의 인생이 떠오른다.
“이번 생에서는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지금 죽기에는 아직 너무 이른데.”
“…….”
그나마 위안이라면 그때와 다르게 좀 더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캐런은 등불을 이용해 벽난로에 불을 지피고 환해진 방 안을 둘러보면서 소파에 이셀라를 누이고 자신도 몸을 파묻었다.
캐런은 귀즈 왕세자의 취미가 듬뿍 담긴 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기억하고 있었던 것보다 더 컸다. 캐런은 사람의 수를 세어 보았지만 분명 과거보다 퍽이나 줄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귀즈 왕세자는 몇 개월 내에 그 많은 사람들을 죽였던 걸까?
“그러고 보면 요즘 살인 사건 별로 없었죠? 역시 그가 개입한 게 이렇게 돌아왔나 봐요.”
세상일이란. 캐런은 혀를 찼다.
기억을 더듬으면서 과거와의 차이를 생각했다. 확실히 살인 사건은 과거보다 줄었다. 레이몬드가 개입을 한 것이리라. 캐런은 자신의 부탁을 뒤에서도 지키고 있었던 그에게 칭찬을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칭찬을 하려면 여기서 나가야 했다. 그럴 확률이 매우 희박하므로 다음 생에서나 가능하리라는 생각이 들자 얼굴이 절로 찡그려졌다.
분명 잔소리를 할 것이다. 이제는 그녀의 말도 듣지 않을지 모른다.
레이몬드는 이번에 계속해서 캐런이 하는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셀라와 친구가 되겠다고 하는 것도, 좀 더 선하게 살아 보자고 하는 것도.
캐런이 시도하는 행동 자체를 싫어했다. 레이몬드는 최대한 캐런에게 맞추려고 노력했지만 언뜻언뜻 드러나는 행동에서 그의 본심이 드러났다.
레이몬드는 다시 캐런과 단둘이 저택에 처박혀 있고 싶어 했다. 그가 그렇게 강제하지 않는 것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었으나, 그는 여전히 그걸 바라고 있었다.
세상 모두에게서 등을 지는 것이 더 낫다고 하는 그를 설득하기란 어렵다. 이번에 캐런이 귀즈 왕세자에게 죽으면 다음 생에서 그가 할 말은 뻔했다. 새로운 시도는 별 소용없으니 다시 저택에 틀어박히자고 하겠지. 캐런은 입이 삐죽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하아…. 어쩌죠?”
캐런은 잠든 이셀라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답이 나오지 않아서 골치가 아팠다.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답답했다. 자살용 목걸이라도 챙길 것을 그랬다는 생각을 하며 캐런은 울고 싶어졌다.
자살할까.
목걸이도 없고 약도 없지만 그래도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캐런은 타오르는 벽난로를 노려보았다. 편한 방식은 아니지만 불에 타 죽는 것은 빨리 죽는다. 고통스러워도 순간은 짧을 것이다. 하지만 캐런은 선뜻 벽난로에 머리를 처박지 못했다.
“…하아.”
죽고 싶지 않다.
하지만 다른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도 않는다.
캐런은 과거의 삶들을 떠올려 보았지만 귀즈 왕세자의 방에 온 것은 한 번으로 끝이었다.
이셀라가 루트엘라 공작과 부딪혔을 때 좋은 해결책이 되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까? 캐런은 골똘히 생각해 보았지만, 귀즈 왕세자를 상대로는 이셀라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지 않았다.
귀즈 왕세자보다 더 높은 사람은 이 땅 위에 없다. 늙은 왕은 이미 죽기 직전이며, 베르딕 또한 귀즈 왕세자 앞에서는 지고 들어가야 했다. 루트엘라 공작과 왕세자는 전혀 다른 입장인 것이다. 이셀라가 귀즈 왕세자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둘 다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둘 다 확실하게 죽는다.
과거에 캐런이 시간을 벌 수 있었던 것은 두 명이 더 있었기 때문이다. 귀즈 왕세자가 증오하는 그의 아들 루이스 왕세손이 있어 그의 관심을 돌릴 수 있었고, 무기를 취할 기회도 얻었다.
그리고 도나가 있었다. 도나가 그의 다리를 물어뜯는 동안 캐런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셀라는 도움은커녕 짐만 된다.
타닥, 타닥
캐런은 타오르는 장작불을 노려보았다. 그래도 기회는 있다. 빨리 죽을 수 있는 기회.
“이셀라.”
지금 바로 자살하지 않는 것은 저 여자 때문이었다. 겨우 이제 약간은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관계를 처음으로 되돌려야 하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무엇보다 이셀라가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려 했을지 너무나 궁금했다.
귀즈 왕세자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지금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최근 들어서 그의 취미 생활은 이상할 정도로 잘 풀리지가 않았다.
그는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것은 좀 더 직접적인 영역에도 펼쳐져 있었다. 곧 왕이 될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취미는 좀처럼 인정을 받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귀즈 왕세자는 조용히 풀 수밖에 없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취미 생활을 조용히 즐겼다. 조용히, 천천히, 비밀스럽게. 문제는 없었다. 그는 감출 수 있는 능력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무언가 제대로 이루어지지가 않았다. 거듭된 실패에 귀즈 왕세자는 욕구불만으로 미칠 지경이었다. 귀즈 왕세자는 눈앞에서 실패를 고하는 수하를 노려보면서 입을 열었다.
“네놈들은 왜 사는가?”
“죄, 죄, 죄송합니다, 전하….”
별 도움도 되지 않는 쓰레기들이 옆에서 그의 눈치를 보았지만, 그것조차 짜증이 났다. 귀즈 왕세자는 슬슬 수하들을 바꾸는 것이 좋지 않을까 고민했다. 제대로 재료조차 구하지 못하는 자들을 자신이 가만히 둬야 할까. 그럴 필요가 없다.
“룻, 이제 네놈은 더 보고 싶지 않군.”
“전, 전하! 전하!”
“입을 다물어라. 시끄러운 것은 싫다.”
“살려 주십시오!”
귀즈 왕세자는 더 말을 하지 않았다. 계속 걸음을 옮기자 뒤에서 억, 하는 단말마가 들렸다. 룻 다음의 책임자인 케인이 그의 목을 베었을 것이다.
차라리 저 놈이라도 해체하면서 기분을 풀까 생각했지만, 일과 취미는 구분해야 한다. 귀즈 왕세자는 아쉬움을 달래면서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궁 안의 사람들에게 손을 대는 것은 이제까지 피해 왔지만 슬슬 한계였다. 하녀들 정도면 조용히 수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장 아무라도.
“전하.”
그의 생각을 방해하는 목소리에 상념이 깨졌다.
“난 오늘 기분이 매우 좋지 않다. 케인. 하루에 두 번 사람을 바꾸는 걸 보고 싶나?”
“보여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감히 자신에게 말을 붙이는 그에게 귀즈가 말했지만, 케인은 그에게 계속 말을 걸려 했다. 귀즈가 걸음을 멈추자, 그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룻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다른 이에게 들켰다면 제대로 처리는 했겠지.”
“들킨 자들을 대신 잡아 왔습니다.”
“…분명 납치는 뒤탈이 없는 자들로 고르라 했을 텐데.”
귀즈 왕세자는 그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들킬 시에는 빠르게 사고를 가장해서 죽이라고 지시한 것은 그였다. 그런데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납치를 해? 귀즈 왕세자는 제대로 일 처리를 하지 못하는 수하들이 한심해 미칠 지경이었다.
귀즈가 손가락을 들어 새로운 명령을 내리려고 하자, 케인이 급하게 말을 이었다.
“여자 둘입니다. 분명 마음에 들어 하실 겁니다.”
캐런은 생각을 끝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 여기서 자신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그리고 이번에도 자신은 죽을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아까워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레이몬드는 우울해하겠지만 이번이 끝은 아니다. 그리고 캐런은 이번 생에 이셀라와 친구가 되기로 결심했다.
“일어나요 이셀라.”
“…….”
이셀라는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깨워야 한다. 이 장소가 어디인지 아는 이상 캐런은 그가 들어오기 전에 이셀라에게 말을 해야 했다. 캐런은 손을 높게 들었다. 괜찮겠지? 일어나지 않으니 별 수 없었다. 캐런은 그래도 한 번 더 불러 보았다.
“이셀라.”
“…….”
짝!
캐런은 이셀라의 뺨을 후려갈겼다. 경쾌한 타격음이 방 안을 울렸다. 캐런은 약간 속이 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것은 복수를 위함이 아니라 깨우기 위함이었다. 캐런은 그렇게 되새기면서 다시 손을 올렸다. 일어나게 해야 한다. 이셀라는 신음만 흘릴 뿐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하고 있다.
짝!
“아악! 아파! 뭐야!”
“일어나요.”
이셀라가 자신의 양 뺨을 부여잡고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눈앞의 캐런을 보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캐런?”
“네. 정신 차려요.”
“날 때렸어?”
“네.”
이셀라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뻐끔거렸지만 캐런이 손을 다시 들기 전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 미친… 어떻게 내….”
“뒤를 봐요.”
“왜 날 때렸냐구요!”
“정신 차리라구요. 여기가 어딘지 파악을 좀 해요.”
다시 기절하려는 이셀라를 수습하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이셀라는 또다시 거품을 물로 뒤로 넘어가려고 했다. 캐런이 몇 번이나 이셀라의 뺨을 내려치고 나서야 돌아가는 눈동자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이셀라는 벌벌 떨었다.
“여, 여기가 어디지….”
울음을 터트리려고 하는 이셀라를 부여잡았다. 여기서 울면 답이 없다.
“울지 말고 잘 들어요. 지금 우리는 납치당했고, 아마 특별한 일이 없으면 여기서 죽게 될 거예요. 살 확률이 낮다는 건 인정해요. 알았어요?”
“…히끅”
“하지만 살 방법을 찾아보려 해요.”
이셀라는 벌벌 떨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다시 기절한 척해요. 방의 주인과 최대한 협상해 볼 테니까, 기회가 닿는 대로 도망가요. 그리고 만약에….”
이셀라에게 레이몬드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을까? 그에게 자신을 구하러 오라고 해야 할까? 캐런은 생각해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하는 것보다는 둘 다 빨리 자살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괜찮다. 이 생의 사람들은 그냥 살게 내버려두고 레이몬드와 자신은 빠르게 다시 시작하면 된다.
“밖으로 도망치는 것에 성공하면, 잘 살아요. 그리고 아버지가 찾으러 오시면 저는 그냥 행방불명된 것으로 처리해요.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죠?”
“캐런 당신은요?”
“난 못 나가요.”
캐런은 고개를 저었다. 이셀라를 무사히 내보내는 것도 사실 확신이 없다. 이 방 안은 귀즈 왕세자의 공간이다. 이 주변에도 그의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이셀라를 보내는 대신 혼자 남는 다거나.
혼자인 자신은 빨리 죽으면 된다. 레이몬드가 자신을 구하러 오는 것에 희망을 거는 것보다, 화덕에 머리를 박고 빨리 자살해 다음 삶으로 넘어가는 편이 효율적이다.
그때 멀리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별로 없다. 사람이 오고 있다.
“…이셀라. 그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나요?”
“네?”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 하지 않았나요?”
“그건….”
그 순간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마음에 들어 하실 겁니다.”
늦었다.
젠장. 캐런은 이셀라의 머리를 밀어 소파에 파묻었다.
“조용히 기절한 척하고 있어요. 절대 눈뜨지 말고.”
덜컹,
두꺼운 문이 열린다. 캐런은 그것을 보면서 침을 삼켰다.
기시감이 든다. 저 문을 열고 레이몬드가 들어오던 때를 생각한다. 물론 지금 저 문 너머에 있는 건 그가 아니다. 어머니의 실패한 책갈피 하나에 불과하다.
중년 남자.
이 나라의 권력자. 어머니의 전 남자. 미친놈.
귀즈 왕세자가 알 수 없는 얼굴로 캐런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또 뭐하는 광경인지 모르겠군. 묶어 놓지도 않았나?”
“죄, 죄송합니다.”
“어이가 없군. 당장 채워 놔.”
“예.”
남자가 캐런과 이셀라의 손발을 묶었다. 눈을 감고 필사적으로 기절한 척하는 이셀라의 몸이 약하게 떨렸지만, 다행히 아무도 눈치채지는 못한 것 같았다. 캐런이 계속 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꼭 저를 묶어야 하나요?”
“귀찮은 건 질색이야.”
귀즈 왕세자는 방 안에서 울고불고 기절하거나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가끔은 실성해서 웃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방에 들어온 자는 살아나가지 못한다. 어두운 방 안에 걸려 있는 시체들을 보면 누구나 짐작할 사실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붉은 머리 여자는 어떤 반응 없이 가만히 앉아서 편한 자세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귀즈 왕세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케인에게 물었다.
“이 여자는 돈을 주고 사왔나?”
그것밖에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어디서 돈을 두둑하게 주고 설명을 하고 데려온 것일까. 하지만 케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목격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제 성격이에요, 귀즈 왕세자 전하.”
“…하.”
귀즈 왕세자는 옆의 케인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이름을 아는 여자라니. 귀족이다. 케인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변했다. 납치를 해도 단단히 잘못 골랐다. 케인은 먼저 죽은 룻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귀즈 왕세자는 뒤탈이 있을 만한 대상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취미 생활과 공적인 부분을 구분할 줄 알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케인은 이를 악물었다.
차라리 그냥 여자들을 보내 줬어야 했다. 그랬다면 시체를 발견했다며 신고가 들어간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끝일 것이다.
“그 옆의 분을 나가게 해 주세요. 전하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귀즈 왕세자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날 알면서 배짱도 좋군.”
“어차피 전 나가지 못할 테니까요. 설마 제가 무서우신 건가요?”
하찮게까지 느껴지는 도발이었지만 귀즈 왕세자는 턱짓으로 하수인을 밖으로 내보냈다. 남자는 굽실거리며 나갔지만 그렇다고 틈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 말해 주자면 문 밖에 수십이 있다고 해두지.”
“그리고 여기는 지하실이니까요.”
“끌려올 때 정신을 차리고 있었나.”
“아뇨. 전의 생에서 온 적이 있습니다, 전하.”
“…별로 재미없는 농담이군.”
귀즈 왕세자는 캐런에게서 몸을 돌려 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난로 옆의 가구에 열쇠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비교적 작은 갈고리와 칼 몇 개를 꺼냈다. 캐런은 지난번의 그와 지금의 왕세자 사이의 간격이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알았다.
‘전과는 확실히 다르다.’
그때의 귀즈 왕세자는 캐런을 죽이기보다 욕정을 풀고자 했고, 루이스 왕세손을 죽이고자 했다.
하지만 지금 귀즈는 자신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자신과 이셀라가 이곳에 온 것은 운이 나빠서였기 때문이다. 그는 전과 달리 캐런을 그의 재료 중 하나로 보고 있었다.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그의 작업을 할 준비를 한다.
“자네가 누군지는 천천히 알아보도록 하지.”
귀즈 왕세자가 캐런의 머리통을 톡톡 두들기면서 살짝 웃었다.
“난 요즘 취미 생활을 하지 못해서 매우 욕구불만이거든. 그리고 네 얼굴은… 꽤나 내 취향이야.”
귀즈 왕세자의 눈이 번들거렸다.
캐런은 입을 열었다.
“그러시겠죠. 전 어머니를 쏙 닮았거든요.”
“그렇구나. 어머니에게 감사 기도를 올리렴. 얼굴은 도려내 주마.”
귀즈 왕세자는 급해 보였다.
캐런은 눈을 살짝 감았다 떴다.
“어머니가 전하의 이야기를 많이 하셨죠.”
“…네 어머니가 누구지?”
“캐서린 노라 에니드.”
귀즈 왕세자가 일어났다.
그의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름인 것이다.
“…우연이군.”
“우연이죠.”
귀즈 왕세자는 자신의 입을 가렸다.
그리고 방 안을 걸었다. 자신의 생각을,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다. 입을 가리고 있었지만 손가락 사이로 찢어지게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지금 너무나 즐거워보였다. 히익거리면서 웃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할 말이… 많군. 캐서린, 캐서린이라. 그래, 벌써 17년이 되었지…. 이렇게 기쁠 수가. 하, 하하. 재밌구나.”
“네. 어머니는….”
캐서린은 필사적으로 캐서린에 대해 떠올렸다. 지금 귀즈 왕세자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무엇이든 생각해야 했다. 캐서린은 귀즈 왕세자에 대해 뭐라고 했던가.
하지만 캐런의 머릿속에는 별다른 정보가 떠오르지 않았다. 캐런이 고민하고 있는 동안 귀즈 왕세자는 캐런의 앞에서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캐서린은 나에 대해 뭐라고 했지?”
“더 듣고 싶으시다면 조건이 있어요.”
“미안하지만 난 널 풀어 줄 생각이 없단다.”
“그럴 것이라 생각했어요.”
캐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죽느냐, 아니면 목숨을 붙이고 사느냐의 차이였다. 귀즈 왕세자가 자신을 풀어 줄 일은 없을 것이다.
“저 말고 이 여자를 살려 주세요.”
“그것도 안 돼.”
캐런은 고개를 조아렸다.
“그럼 전 어머니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겠어요.”
“사람에게서 답을 얻는 방법은 꽤 많이 있단다.”
귀즈 왕세자는 단도 하나를 캐런 가까이에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가슴 쪽의 천이 날카로운 날에 종잇장처럼 찢어졌다. 캐런의 가슴골이 드러나고 그 사이에 약간의 피가 흘렀다. 따가웠다. 캐런은 얼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전 살 것이라 기대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죽는 것이 무섭지도 않아요. 여기서 살아나지 못할 걸 아니까요.”
캐런은 심호흡을 했다.
잘 생각해 보자. 과거의 귀즈 왕세자는 ‘너도 나이가 많다고 할지 궁금하군.’ 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너도. 캐런은 그가 그렇게 말했던 것을 다시 씹어 보았다. 아마 캐서린은 귀즈 왕세자에게 자신이 되살아난다고 말했던 것이리라.
“어머니도 다시 사는 삶에 대해 말하지 않으시던가요.”
“…….”
“믿지 않으셨겠지만.”
귀즈 왕세자가 입을 다물었다.
흥분이 가라앉고 표정이 일그러진다. 캐런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어머니가 전하를 거절하신 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신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저와 어머니는 그런 걸 무서워하지 않아요.”
감히 왕족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저 남자가 힘이 좋거나, 돈이 많기만 해도 여자가 그 남자의 애정을 거절하는 것에는 위험이 따른다. 과시욕이 있는 남자들이 말하는 애정은 자주 폭력성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귀즈 왕세자 정도의 사람이면 감히 자신을 거절한 여자와 부모 자식을 전부 죽였어도 이상하지 않을 위치와 인성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캐서린이 결혼을 하고 자식을 보게 내버려두었다. 결국 죽이지는 않은 것이다.
“이번 생에 전 이 방 안에서 삶을 마칠 것을 각오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것은 들어주세요. 이 여자를 그저 다시 온 곳에 버려 주세요.”
“동지가 있는 편이 네게도 좋을 것이라 생각한단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캐런은 약간 눈물 맺힌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전 부끄러움이 많은 편이에요.”
“…하.”
“절 딸처럼 대해 주시지는 않을 걸 아니까요.”
“안간힘을 쓰는군.”
귀즈 왕세자는 자신이 상처를 낸 가슴 사이를 눌렀다. 캐런이 약한 신음을 냈다. 통증이 올라왔다. 이셀라가 캐런의 뒤에서 벌벌 떠는 것이 느껴졌다.
“뒤의 여자가 깨어 있는 걸 안다.”
“…….”
“흐, 흐윽.”
캐런은 그제야 이셀라가 제대로 자는 척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렇게 기절한 척하라고 했는데.
시온은 자신의 머리를 긁으면서 고민했다.
‘아무래도 임신 같지?’
이셀라는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시온 엘렉트라는 눈치 하나로 수많은 여성들의 귀여움을 받고 살았다. 이셀라가 캐런에 관련돼서 말하지 못하고 있는 그 사실은 조금만 고민해보면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둘이 같이 병원에 갔다가, 검진 결과를 듣고 본인에게 말하지 못해서 고민이라고 했다. 이셀라가 조금 더 말을 꺼내다가 아니라고 했던 그 말. 결국 그래도 말해야겠다고 하던 이셀라를 보면서 시온은 캐런이 임신을 했다고 추측했다. 캐런의 몸에 이상이 있는데 남에게 알려 주기 어려운 것은 그것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자신도 레이몬드에게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되었다. 사실상 캐런 하이어가 임신을 하든 말든 시온과는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입 밖에 내봤자 질 나쁜 가십이 될 뿐이다.
하지만 시온은 그 아빠로 추정되는 사람이 자신과 연이 깊은 레이몬드라는 사실 때문에 머리를 긁적이면서 고민했다. 레이몬드라면 미리 말해 두는 편이 좋을까? 이셀라의 고민이 자신에게 옮겨 왔지만 자신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레이몬드는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의 최근 행동이 이해가 간다.
레이몬드가 그렇게 부득불 이셀라를 마다하고 돈이 없는 캐런을 챙기거나, 그녀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거나, 급하게 군에서 은퇴하거나, 전에 없이 감정 변화가 오락가락하는 그 모든 모습은 바로 그것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그 레이몬드가 결혼하지도 않은 여자에게 손을 댔다니 그로서는 좀처럼 잘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것도 임신까지? 게다가 캐런은 돈이 없기는 하지만 귀족 아가씨였다.
시온은 자신이 괜히 먼저 아는 척했다가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게 될 것을 염려했다. 우선은 이셀라가 말한 후에 캐런의 반응이 중요할 것이다. 그것을 물어보려고 왔는데 이셀라는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 갔지?”
시온은 일찍부터 이셀라와 캐런이 머무는 대성전 앞을 기웃거려봤지만 아직까지 둘 다 나오지 않았다. 사제들이 오가고 있었지만 대놓고 이셀라에게 추파를 던지는 자신을 좋게 보지 않는 그들과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야기가 잘 안 됐나?’
이셀라라면 분명 그 결과를 자신에게 말해 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저, 실례합니다, 신관님.”
결국 시온은 지나가는 신관을 붙들고 이셀라에 대해서 물어보게 되었다.
“실례하지만 성전에서 머물고 있는 이셀라 에반스 양을 뵙고 싶은데요. 불러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신관의 표정은 약간 불쾌해 보였다.
“이셀라 양의 품행에 대해 우리가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합니까?”
“…무슨 소리인지 잘….”
“몇 번이고 그녀에게 통행 시간에 대해 우리는 충고했습니다. 예배 시간 참석과 봉사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에게 저희가 뭐라고 합니까?”
신관은 치정 문제에 얽히는 것이 질색이었다.
수도에 위치한 대성전을 젊은 남녀들은 갖가지 문제를 끌어안고 찾아온다. 안 그래도 주교는 그런 사람들을 불쾌하게 여겼다. 어떤 문제로 왔든지 간에 신전 안에서는 그에 따른 율법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자기 멋대로 사는 이셀라는 그들에게 불청객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셀라 양에 대해 제게 묻지 마십시오.”
“그녀와 약속을 했는데 나오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과 약속이 있는지, 방에서 지금까지 잠을 자고 있을지 제가 어찌 압니까.”
어지간히 질린 목소리였다.
이셀라가 외출을 할 때는 대부분 시온 자신과 동행했다. 그리고 다른 약속이 있다면 늘 미리 말을 해 줬다. 어제는 온통 캐런의 일에 온 정신을 쏟다가 잊어버렸다고 생각해 보려 해도 시온은 영 느낌이 이상했다. 왜 아직까지 나오지 않지?
“방 안에서 자고 있는지 확인이라도 해 주실 수 없습니까? 그저 걱정이 되서 그렇습니다.”
“대성전은 신성한 곳이지 여인숙이 아닙니다.”
“신관님.”
시온은 속으로 신음을 참았다.
이 깐깐해 보이는 신관은 좀처럼 협력해 줄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럼 캐런 하이어 양이라도 있는지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그 또한 저는 모릅니다.”
갑자기 신관은 눈을 피했다. 신관의 태도가 점점 꺼림칙해졌다.
“신관님.”
시온은 그런 신관의 얼굴을 노골적으로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이셀라 에반스 양의 아버지이신 베르딕 에반스 씨가 걱정하십니다. 이셀라 양을 뵙고 싶으시다구요. 전 지금 그분과도 연락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
“신관님,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이셀라 에반스는 지금 방에 있습니까?”
신관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네 제안은 글쎄, 그다지 매력 있는 건 아니구나.”
귀즈 왕세자는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그의 시선은 캐런을 넘어 뒤의 이셀라에게 닿았다.
“어머니에 대해 더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애야, 너 하나를 고문해도 충분히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느냐?”
캐런은 귀즈 왕세자를 보면서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려야 했다. 어떻게 해야 귀즈 왕세자가 그녀의 청을 들어줄 것인가.
귀즈 왕세자는 벌벌 떨며 뒤돌아 있는 이셀라를 흥미진진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갑작스런 사고라 해도, 내겐 충분히 수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단다.”
“저 아이 하나에게만이라도 동정을 베풀어 주실 수 없나요?”
“내가 조금이라도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있겠느냐.”
“저 아이는 베르딕 에반스의 딸이에요.”
캐런은 이셀라의 정체를 말했다. 베르딕은 귀즈 왕세자와 연이 있다. 과거 캐런을 잡아서 귀즈 왕세자에게 넘긴 것도 그였다. 그는 분명 귀즈 왕세자의 괴벽 또한 알고 있을 터였다.
“…흠, 그건 좀 놀랍구나.”
귀즈 왕세자의 미소가 진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꼭 내보낼 필요는 없지. 네가 그렇게까지 저 아이를 내보내고 싶어 하는 것을 보면, 저 아이에게 희망을 걸고 있는 것 같구나. 그렇다면 더욱 보내줄 수 없단다. 둘 다 말이야.”
“베르딕 씨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면 그가 더 충성하겠지요.”
“그는 내게 당연히 충성해야 해.”
귀즈 왕세자는 계속해서 입을 놀리는 캐런을 흡사 앵무새가 재롱떠는 것을 보는 것처럼 즐기고 있었다.
“네가 내 걱정까지 해 줄 필요는 없단다. 난 가진 것이 아주 많은 사람이거든.”
귀즈 왕세자는 자신의 갈고리를 가지고 이셀라를 툭툭 쳐 보았다. 이셀라는 이 와중에도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뜨지 못하고, 땀과 눈물을 흘리면서 덜덜 떨고 있었다.
캐런은 차라리 귀즈 왕세자가 자신에게 집중하기를 바랐지만, 그는 이셀라의 그런 반응을 즐기고 있었다.
“꽤나 친한 친구인가 보구나.”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캐런은 실토했다. 역시 아직 자신이 보기에 둘은 친구는 아니었다. 계속 관계가 진전 없이 삐거덕대 왔다. 게다가 지금 캐런에게 이셀라는 짐 덩어리였다.
“그래도 역시 저 아이가 죽는 것은 싫어요.”
이셀라의 흐느낌이 약하게 들렸다.
캐런은 자신의 말에 스스로 약간 감동 받았다. 방금 전의 대사 괜찮았던 것 같아. 캐런은 이셀라가 감동 받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이셀라는 공포에 질려서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좀 아쉬웠다.
“음, 그럼 이건 어때요, 전하?”
“어떤 걸 말하는 거니.”
“예를 들면 절 새로운 정부로 삼으시는 거예요.”
귀즈 왕세자는 아직 레이몬드와 자신의 관계를 모른다.
전과는 다르다. 과거의 그는 레이몬드의 약혼녀인 캐런을 조공 받는 방법을 택했지만, 이번의 그는 우연히 캐런을 손에 넣었다. 갑작스럽게 뚝 떨어진, 캐서린의 딸. 정보를 쥔 것은 캐런이다.
“전 전하의 취미 생활을 존중해 드릴 용의가 있어요.”
엄마와는 다르게요.
캐런은 손가락을 까딱였다.
“솔직히 전, 어머니가 잘 이해가 가지 않아요.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지만 전 어머니가 아버지를 그렇게 사랑했는지도 잘 모르겠거든요.”
“…계속 말해봐.”
“어머니는 그냥… 아무 남자나 별 상관없으셨던 것 같아요.”
캐런은 말을 골라야 했다.
어머니는 귀즈 왕세자가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자신을 임신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그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그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은 좋지 않다. 캐런은 말을 끊었다.
“어머니는… 그러니까, 좀 더 순수한 사랑에 집착이 있으셨어요.”
“…….”
“돈이나 권력에 구애받지 않고 아무것도 없는 아버지의 사랑이 더 순수하다고, 그렇게 생각하셨어요.”
캐런 스스로도 너무 뻔한 거짓말일까 생각했지만 귀즈 왕세자의 반응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캐런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캐런은 계속 말을 이었다.
“…….”
“하지만 전 달라요. 전 전하께서 절 정부로 삼으신다 하더라도 상관없어요. 전 약간의 드레스와 보석이면 충분해요. 공개하는 것이 싫으시면 어쩔 수 없구요. 하지만 그저 전 제안하는 거예요. 괜찮지 않나요? 고문 받고 시끄럽게 구는 여자와 스스로 안겨 드는 젊은 애인, 어떤 것이 더 마음에 드시나요?”
“…꽤 대담하구나.”
귀즈 왕세자는 한참 캐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일어났다.
그리고 문가로 갔다. 그가 종이 달린 줄을 당기자 문이 열렸다. 밖에서 남자들이 몰려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전하.”
“저 여자를 원래 있던 곳에 버리고 와라. 금발 여자만.”
“예?”
캐런과 남자들은 같은 얼굴을 했다. 귀즈 왕세자가 여기까지 납치해 온 여자를 가져다가 되돌려 놓다니. 위험하다. 보통의 살인마라도 절대 하지 않을 짓이다. 심지어 귀즈 왕세자는 가진 게 너무나 많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짓을 한다고? 캐런은 듣고도 믿기 힘들었다.
“놀란 눈이군.”
“…네. 사실 그래요.”
“들키지 않을 자신도 있거든.”
귀즈 왕세자가 캐런의 옆에 앉으면서 말을 이었다.
“내가 이런 취미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폐하께서는 날 지켜 주시지.”
그리고 이셀라를 보았다.
“베르딕 또한 자신의 딸을 계속해서 지키고 싶다면 제대로 행동해야 할 거야. 제대로 행동하려무나, 베르딕의 딸아.”
캐런은 간질거리는 등을 느꼈다.
재채기가 나올 것 같았지만 참았다. 이셀라의 손가락이 빠르게 캐런의 등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꼼지락 거리는 손가락. 무언가 말하고자 하는 것 같아서 움직이는 그 손끝에 집중했다.
“어서 데리고 나가라.”
“…알겠습니다.”
문이 닫혔다.
이제 다시 귀즈 왕세자와 캐런만이 남았다.
캐런은 어두운 방 안에서 입가가 찢어져라 웃는 귀즈 왕세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기괴하게 느껴졌던 그였지만, 이제는 전처럼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계속 이야기를 해 볼까.”
귀즈 왕세자는 갈고리를 들고 캐런에게 왔다. 캐런은 불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건을 보았다.
“둘 다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
“내가 널 양쪽 다 즐기는 거지. 내장부터.”
그리고 아래쪽을 가리켰다.
“여기까지.”
어쩌지.
캐런은 이를 악물었다.
그냥 죽고 다시 시작하려고 했다. 이셀라가 나갔으니 더 이상 그녀를 잡는 것은 없을 터였다. 캐런은 자신의 입술을 핥는 귀즈 왕세자를 올려다보면서 고민했다.
그래야 했는데. 죽는 것은 무섭지 않아야 하고 그녀를 탐하는 귀즈 왕세자도 아무것도 아니어야 했는데.
이셀라가 마지막에 남긴 그 말.
그녀는 떠나면서 급하게 손가락으로 캐런의 등에 글을 남겼다.
‘반드시 구하러 올게요.’
감격적인 말이다.
이셀라가 그녀를 구하려고 하다니. 항상 캐런을 죽음으로 몰고 가던 그녀가. 베르딕의 딸이. 레이몬드의 원래 약혼녀가. 그녀가 드디어 캐런을 구하겠다고 스스로 고하는 날이 오다니.
그 말대로 성공할 것을 믿지는 않았지만 캐런은 ‘반드시’라는 말에 그녀의 의지가 느껴져 감동했다.
캐런의 노력이 결국에는 빛을 발한 것이다. 이제 그녀들은 최소한 원수는 아니다. 원수는커녕 서로 목숨을 건 관계가 되었다. 이 정도면 친구 내지는 전우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셀라의 다음 문장은 그녀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당신은 임신 중이에요.’
어떻게 임신했지? 캐런은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배가 나온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뱃속에서 무언가가 느껴지지도 않았다. 생리는 언제나 불규칙했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불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임신이라는 것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전과는 무엇이 달랐지? 듈란이 처음부터 오지 않아서? 차이점이라면 그것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은 좋아해야 할까. 드디어 답을 찾았으니까? 하지만 캐런은 도무지 좋아할 수 없었다. 의심과 불안감이 머리를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출산을 못하고 그냥 이대로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혼란스럽다.
‘임신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런 갑작스러운 소식은 안심이 되기는커녕 불안만 가중시킨다.
캐런은 입술을 깨물었다.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면 자식에게 운명을 넘기고 죽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태에서 자신이 죽으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이대로 영영 죽을지도 모른다.
자식도 자신도 전부 죽는다면 어떨까. 그리고 다시는 살아나지 못한다면. 늘 바랐던 평범한 죽음이다.
만약에 과거의 어느 때였다면 그 소식에 기뻤을 것이다. 몇 년 전이었다면 즐거워서 춤을 췄을 것이다. 드디어 죽음에 도달했다는 성취감에 도취되어 기꺼이 죽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왜 하필이면 지금. 이 장소에서. 이런 순간에.
캐런은 한탄했다. 그렇게 노력해도 여태껏 실패했는데 왜 이런 최악의 장소에서 임신 사실을 확인한단 말인가.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캐런은 담담했다. 죽고 나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자신에게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개선된 거나 낸시가 벌인 소동 덕에 이셀라와의 관계가 이렇게 진전된 것이 전부 없었던 일이 되어 아쉽지만, 그렇다고 죽지 못할 만큼 절실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과 같이 삶을 반복하는 레이몬드가 있으니 무서울 것이 없었다.
레이몬드.
“전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는 것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 충분합니다.”
캐런은 레이몬드의 얼굴을 생각했다. 자신이 죽으면 그는 울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번 생에서 아쉬움이라면 이셀라나, 아버지를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죽는다고 생각하니 레이몬드가 떠올라 마음이 너무나 무거워졌다. 정말로 반복되는 이 삶이 끝나면 어떡하지. 레이몬드는 어떻게 되는 걸까.
레이몬드는 몇 년의 세월을 짊어지고 자신에게 왔는데 혼자 영원한 죽음으로 떠나면. 그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는 살아 있을 수 있을까?
캐런은 숨이 턱 막혔다.
죽는다면 같이 죽어야 한다. 그를 이 세상에 홀로 남겨 둘 수 없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죽음이 두려워졌느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전하.”
“두려워진 모양이군.”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어도 상관없었지만, 이제는 살아야 했다.
죽을 수 없다.
최소한 죽는 곳이 여기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이 귀즈 왕세자여서는 안 된다.
자신은 레이몬드의 옆에서 좀 더 나중에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아까와는 다르게 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캐런의 양팔을 침대 머리에 단단히 묶었다. 푸른 비단으로 만든 것이라 손목에 상처가 날 리 없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하지만 흔든다고 해서 풀릴 정도로 허술하지는 않았다. 다리까지 묶어 두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다리만 움직이는 것으로 도망갈 수 있을 리도 없었다. 언제든지 제압할 수 있기 때문에 구경하려고 풀어 둔 것에 불과했다.
귀즈 왕세자가 캐런이 누워 있는 침대 옆에 걸터앉아 캐런을 내려다보며 캐런의 손을 쓰다듬었다. 캐런은 귀즈 왕세자를 올려다보았다.
“전하, 무엇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날 도발하는 것은 그리 추천하지 않는단다. 인내심이 그리 깊지는 않거든.”
캐런은 그저 질문했을 뿐이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무엇이 그를 자극할지 알 수 없었기에 입을 다물었다.
“너와 무엇부터 하는 것이 좋을까?”
귀즈 왕세자에게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리면 어떻게 될까. 캐런은 자신의 몸 안에 다른 이의 자식이 있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리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해 보았다.
하지만 그 또한 미친 사람이기에 쉬이 예상하기가 어려웠다.
“아프지 않은 방향이 좋겠어요.”
“솔직한 건 좋구나. 그래, 너와는 좀 더 다양한 방식을 생각해 봐야겠구나.”
캐런은 자신의 가슴에서 배로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남자의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성 노리개가 되는 건 그리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단순히 그것만을 원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머니의 젊었을 때와 저는 많이 닮았나요?”
“자세히 보면 동일 인물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닮았지.”
“어머니와도 이런 짓을 하셨나요?”
“글쎄. 궁금하니?”
“약간은요.”
저 벽에 걸려 있는 시체들 중 하나가 되지 않으리란 법이 어디 있는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 이러다 어느 순간 돌변해서 배 안을 확인해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없다.
“무서우냐?”
“네.”
“그래. 그럼 비명을 질러 보련?”
이셀라는 숨을 헐떡였다.
손목과 발목이 묶인 채로 포대자루 안에 넣어졌다. 자신을 누군가가 들쳐 메고 이동하고 있었다. 입까지 막혀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어 괴롭다.
‘빨리, 빨리….’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자신은 살아난 것일까? 머릿속이 핑핑 돌았다. 어디서부터 문제였을까?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을까? 그 장소에 가서는 안 되었다. 아니, 애초에 집을 떠나면 안 되었다. 이셀라는 자신이 한 모든 것을 후회했다. 머리가 아팠다.
한참을 짐짝처럼 옮겨지자 머릿속으로 갖가지 생각이 밀려들었다. 이대로 살 수 있는 걸까? 이번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 절대 혼자서 나오는 미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경호해 주는 사람 없이 나다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캐런은 어떡하지?’
이셀라는 숨이 턱 막혔다. 자신이 마지막에 그녀에게 남긴 메시지는 전달이 되었을까? 이셀라는 자신이 잘한 것인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이셀라는 필사적으로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알려 주지 않고, 그녀가 이대로 죽으면 자신은 영영 후회할 것 같았다.
이셀라는 눈을 꽉 감았다. 어서 빨리 풀려났으면….
“우욱!”
갑작스러운 고통이 이셀라를 덮쳤다. 어딘가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았다.
‘뭐, 뭐지?’
“뭐, 운이 나빴지. 천국 가시오.”
숨이 막혔다.
아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몸을 뒤척여도 끊임없이 눈과 코와 입 사이로 더러운 물이 꾸역꾸역 밀려들어온다. 이셀라는 자신이 물에 빠졌음을 알았다.
“으으읍!”
“제스, 막대기로 눌러.”
“그냥 떠내려가게 두는 게 낫지 않나? 어차피 다 묶었잖아.”
“아냐, 혹시 떠오르면 어떡하나. 눌러서 완전히 숨 끊어 놓은 다음에 흘러가게 하자고.”
“해체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까?”
“그냥 평범하게 익사체로 만드는 편이 좋을 거야. 괜히 장식적으로 만들었다가 여자 애비가 들쑤시면 어떡하나? 쯧.”
버둥거리는 포대기를 끝이 뭉툭한 막대기로 처박았다. 안에서 거품이 부글부글 올라오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익사하게 될 것이다.
케인은 베르딕이 귀즈 왕세자의 흔적을 알아차리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베르딕은 가끔씩 뒤탈이 없을 재료들을 수급해 주고는 했다. 그가 잔혹하게 죽은 딸을 보면 어떻게든 뒷조사를 할 것이다. 그러다가 일을 사주한 것이 귀즈 왕세자라는 것을 알게 되면 일이 복잡해진다.
“아, 역시 그렇겠군요. 평범하게…. 그럼 죽이기 전에 맛이라도 보게 해 주지.”
“그 편이 더 평범했을지도 모르겠군. 뭐, 울고불고 하는 것보다는 돈 받고 안겨 드는 창녀가 더 낫지 않겠나.”
“네가 안 해 봐서 그래. 한번 하면 길들이면서 하는 것도 재밌다고? 그나저나, 이거 끝나고 식사는 어떻게 할까?”
“글쎄다…. 물고기 튀김이 좋겠군. 팔딱거리는 것을 보니 생선 요리가 먹고 싶어.”
“윽. 거 비위도 좋다. 난 비린내 나는 건 당분간 싫어.”
“이만하면 깔끔한데 뭐가 문제냐?”
“오늘 말고 어제 거는 좀 역겨웠어.”
남자가 얼굴을 찡그렸다. 귀즈 왕세자는 요즘 재료 수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히스테리를 부리고 있었다. 처리하는 입장으로서는 고역이었다.
“아무튼 룻 대신 승진했으니 점심은 내가 사지.”
“야, 들었냐? 케인이 산대.”
평온하고 일상적인 목소리가 수면 위에서 오고갔다.
꿈틀거리는 모포를 보면서 케인은 한숨을 쉬었다. 빨리 일을 끝내고 식사나 하고 싶었다.
“알아서 잘 처리해라.”
당연한 일이다. 어떻게 목격자를 살려 둔단 말인가? 그 붉은 머리 여자를 구슬리기 위해서 풀어 준다고 했지만, 귀즈 왕세자는 이 여자를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그게 누구든.
“아직도 꿈틀대냐?”
“응.”
“거 질기네. 피 좀 빼내고 넣으면 어때?”
“관둬. 베르딕이 파고들면 골치 아프다고 몇 번을 말했나.”
“베르딕 에반스를 말하는 건가?”
“뭐, 그렇지.”
순간이었다.
케인은 자신의 시야가 어두워졌다고 생각했다.
밤? 밤이 갑자기 찾아왔어. 그런 어이없는 생각을 먼저 했다. 하지만 그 다음에 밀려오는 끔찍한 고통에 그는 비명을 질렀다.
“아, 아악, 아아악!”
“조용히 좀 해 봐.”
눈에 끝없는 고통이 찾아왔다. 그리고 다시 시야가 밝아졌다. 케인은 눈을 떴다.
아니, 떴다고 생각했다. 시야가 이상했다. 눈은 자신의 허벅지와, 다른 풍경을 비췄다. 정신없이 시야가 흔들린다. 자신의 얼굴.
왜 내 얼굴이 보이지?
“아아아아악!”
눈알이 빠져 아래로 덜렁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늦었다. 케인이 빠진 눈알을 붙들고 패닉 상태에 빠져 있든 말든 난입한 남자는 그를 발로 차서 물에 빠트렸다. 케인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지도 못했다. 빠지면서 덜렁거리는 눈알을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넌 또 뭐야?”
“으, 윽.”
“일단 귀찮으니까 자진 입수하는 게 어때?”
“이… 이 개자식!”
제스가 품에서 칼을 꺼냈다.
“내 칼도 좀 길어.”
시온이 자신의 칼을 뽑아 들었다. 남자는 자신의 칼보다 훨씬 긴 칼과, 본격적인 그의 폼을 보고 당황했다.
“살, 살려….”
퍼억.
하지만 그 애원은 이어지지 못했다. 날아온 돌 하나에 맞았기 때문이다. 정면으로 날아온 돌에 남자는 코와 입을 동시에 맞고 쓰러졌다.
“거, 제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두시죠?”
“…하나만 살려 놓아도 충분해. 눈알 빠진 놈으로 하지.”
“대질신문하려면 둘 이상이어야 하거든요? 레이몬드 경!”
“우선 물에 빠진 저것부터 건져. 사람인 것 같은데.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지.”
“예?”
“어서.”
시온은 그제야 물에 떠내려가고 있는 모포 더미를 보았다. 이런, 젠장. 시온은 욕을 하며 하수구 안으로 뛰어들었다. 낚아채는 순간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직 딱딱하게 굳지 않았다.
촤악.
지저분한 물에 빠진 것이 불쾌해 얼굴을 찡그리면서 시온은 모포를 풀었다. 아까 남자들이 막대로 누르던 것이 이것이었나.
안에는 역시나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시온은 그 안에 바로 자신이 찾던 사람이 들어 있는 것에 놀람을 금할 수 없었다.
“이셀라?”
레이몬드는 대체 어떻게 이셀라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거지?
시온은 자신의 선배를, 자신이 여지껏 잘 안다고 생각했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레이몬드는 전에 없이 굳은 얼굴로 이셀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셀라는 안락한 숙면 끝에 눈을 떴다. 눈앞에는 오랜만에 보는 부모의 얼굴이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생경하게 느껴져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자신이 꿈에서 깨어난 것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그래, 오랫동안 집을 나가니까 고생만 하지 않느냐.”
“…아버지, 어머니.”
베르딕은 이셀라를 내려다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이셀라의 어머니인 셀리나도 눈시울을 붉혔다. 이셀라는 얼굴을 돌려 자신이 있는 곳을 보았다.
“여기는… 수도의 집인가요?”
“그렇단다, 이셀라. 이제는 다 괜찮아. 넌 안전해.”
크림색 천과 밝은 원목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방안이었다. 대성전의 작은 방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안락한 방이다. 어릴 때부터 여름마다 쓰던 방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내 방이 이렇게 좋은 곳이었나.
“아, 아야.”
“만지지 마렴. 여기저기 다쳤어.”
“고생만 하고…. 이게 뭔 꼴이냐.”
얼굴이 따끔거리는 것이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었는지 떠오르게 했다. 이셀라는 몸을 일으켜 이불을 감싸 쥐었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새하얀 천 위로 눈물이 툭, 툭 떨어졌다.
“흐, 흐흑….”
살았다.
자신은 살았다. 그 어둡고 공포스러운 방에서 살아 나왔고, 그 더러운 물에서 빠져나왔다. 자신은 마침내 살아서 집에서 부모님의 손을 잡고 있다.
이셀라를 셀리나가 끌어안았다. 모녀는 부둥켜안고 생환을 축하하며 울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고 역시 목이 잠긴 베르딕이 입을 열었다.
“이제 집으로 가자.”
험한 꼴을 당한 딸을 보며 그들은 새삼 자신들이 부부라는 것을 실감했다.
이셀라가 수도에서 나다닐 때 엄마인 셀리나는 사람들을 통해 멀리서 이셀라의 평판이 나빠지지는 않는지 항상 감시했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이셀라는 도에 지나친 행동을 하지 않았다.
베르딕은 이셀라의 소식을 아내를 통해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딸의 행동거지를 파악하고 있었고, 적당히 도와주고 있었다. 이셀라가 파는 금붙이는 한 번도 사기를 당하지 않고 매번 적당히 높은 가격에 팔렸고, 대성전에는 늘 거금의 기부금이 지원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안전한 곳에 함께 있는 것과는 달랐다. 이셀라에게 아직 세상은 위험했다.
이셀라는 자신의 부모님이 서로 손을 잡는 것을 생경하게 쳐다보았다.
“우선 당분간 엄마와 난 네 옆에 있을 거란다. 가족끼리 너무 시간을 못 보낸 것 같구나.”
“인생이란 게 정말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다고 깨달았단다.”
“아버지, 어머니.”
이셀라는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네 결혼도 다시 준비해야지.”
“네?”
이셀라가 다급하게 말했다. 베르딕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원하는 남자가 누군지도 알겠다.”
“남자요?”
“시온 엘렉트라 말이다. 너에게는 택도 없이 부족한 사람이지만… 네 은인이기도 하니 내 허락하려고 한다. 아직 애송, 흠… 좀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그 정도는 얼마든지 내가 키워 주도록 하마.”
“시온 경이요? 아….”
이셀라는 마지막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이 살아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자마자, 물속에 자신을 던져 버렸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물속에서 괴로워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래, 그가 널 구했어. 그가 내내 널 찾아다니다가 정말 천운으로 널 구해 냈단다.”
“그렇군요….”
이셀라는 자신의 목을 더듬었다. 숨을 쉬고 있는 것이 기적 같았다. 시온과 자주 산책하던 물가였기 때문에 그가 자신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일까. 납치된 지 오래되지 않아서 풀려난 것이 다행이었다. 조금만 시간이 어긋났으면 자신은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남자도 죽여 버렸단다.”
“누구를요?”
“누구긴, 널 물에 빠뜨려 죽이려 한 그 남자 말이다.”
이셀라는 아직 상황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기절해 버렸으니 다들 그 전 상황을 몰라서 수습이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지금 한가롭게 누워서 다른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었다.
“아버지, 아니, 그 사건 하나가 아니어요.”
“뭐?”
“전 바로 물에 빠진 게 아니라 거의 하루 동안 납치되어 있었어요.”
이셀라는 창밖을 보았다. 어느새 아침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그러니 납치된 지 최소 하루는 더 지났을 것이다. 이셀라는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래, 그러니까 많이 힘들겠구나. 이제 쉬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마.”
“그래, 이셀라. 아버지 말을 들어. 엄마와 같이 가자.”
“아, 아직은 갈 수 없사와요! 자, 잠깐, 그러니까 저… 진짜 범인이 따로 있사와요.”
이셀라는 다급하게 외쳤다. 지금 자신의 결혼이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은 이렇게 평온하게 말할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베르딕은 이셀라를 안타깝게 내려다보았다.
“안 좋은 이야기는 나중에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그래, 우선 쉬렴.”
왜 이러지?
분위기가 이상했다. 이셀라는 당황해서 부모님을 올려다보았지만 여전히 베르딕과 셀리나는 석연찮은 얼굴이었다.
“네가 편히 쉬었으면 좋겠구나. 빨리 가정을 꾸려 안착했으면 좋겠고…”
“네?”
셀리나는 서로 정부를 공공연히 따로 두고 있는 부모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 것이 황당할 지경이었지만, 베르딕과 셀리나는 서로 곁눈질을 하면서 계속해서 다른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것이와요?”
“전부터 빨리 결혼하고 싶어 하지 않았느냐.”
그것은 레이몬드가 어디로 가지 않을까 불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이미 다 지난 일이다. 이셀라는 지금 이 상황에서 왜 이렇게 부모님이 결혼을 밀어붙이는지 알 수 없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워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저뿐 아니라… 다른 납치된 사람이 있사와요. 아직 살아있을 것이와요. 당장 구해야 해요.”
“너 말고? 아, 캐런 하이어 말이냐.”
“아셨어요?”
“그래, 시온 경이 같이 사라졌다고 말했으니까. 한동안 네 하녀 노릇을 했다며. 너무 신경 쓰지 말거라. 수사관이 이 일 때문에 널 귀찮게 할 일은 없을 거야.”
이셀라는 계속해서 대화가 어긋나고 겉도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왜?
“아뇨, 아버지… 조금 전부터 계속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것이와요?”
“난 아까부터 같은 말을 하고 있단다. 네가 힘들었을 테니 어서 돌아가서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말이란다. 너야말로 왜 그러느냐?”
“사람이 납치되었다니까요!”
이셀라는 답답해서 목소리가 커졌다.
“지금 저 말고 다른 사람이 또 납치되어 있다구요! 그 사람이 캐런이라구요! 이 상황에 어떻게 지금 제 결혼식 이야기 같은 걸 하시냐구요! 사람 목숨이 달려 있다니까요?”
베르딕은 이셀라의 목소리가 커지자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는 딸에게 돈을 아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딸이 자신에게 건방지게 구는 것을 두고 볼 사람은 아니었다.
“이셀라, 아버지에게 그 무슨 말이니. 어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려.”
“아뇨, 지금… 대체 뭐 하시는 건지 저야말로 이해를 못하겠어요. 제가 납치당했어요. 그리고 끔찍한 장소에 끌려갔어요. 저는 풀려났지만 그건 저 대신 남겠다고 한 여자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왜 이런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으시는 것이와요?”
처음부터 끝까지 베르딕은 딸이 살아온 사실에 안도할 뿐이지, 자신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왜 자신을 계속 결혼시키려고 서두를까.
“아… 그렇군요.”
뒤늦게 이셀라는 이유를 깨닫고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제가… 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납치당한 것이 소문나기 전에 빨리 결혼을 시켜야지.”
베르딕과 셀리나는 그렇게 서로 입을 맞추었다.
이셀라는 만 하루 동안 납치당했다. 그 사실이 알려지는 것은 절대 막아야 했다. 시온 엘렉트라와 결혼을 서두르면 더더욱 쓸데없는 소문은 나지 않을 것이다.
둘이 자주 사교계에서 파트너로 공공연하게 다니던 차였다. 베르딕은 이셀라가 적당히 만족하고 나면 둘 사이를 갈라놓을 생각이었지만 상황이 변했다.
미혼 여성의 행방이 하루가 넘게 묘연하더니, 죽을 위기에 처했다가 살아났다.
이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뻔했다. 의사는 강간 흔적은 없다고 말했지만 소문이 나면 분명 진실은 온데간데없이 그저 깎아내리기에 바쁠 것이다.
“여보.”
“어쩔 수 없지.”
부부는 오랜만에 뜻을 같이했다. 빨리 이셀라에게 맞춰 주는 척 얘기해서 결혼을 시키자고. 레이몬드만큼 마음에 차진 않지만,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시온의 모자란 부분은 얼마든지 돈으로 더 채워 줄 수 있었다.
베르딕은 이셀라의 방 근처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시온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자네와 딸의 결혼을 허락하겠네.”
“예?”
“두 번 묻지는 않겠어. 하겠나?”
시온은 약간 당황스러운 얼굴이었지만, 그가 바라는 대답을 했다.
“…이셀라 양이 동의만 한다면, 저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래야지.”
베르딕은 젊은 기사를 내려다보았다.
가능한 빨리, 결혼을 시키고 이 모든 사실을 묻어 버려야 한다. 이셀라는 납치 따위는 당한 적 없던 것이다.
“당하지 않았어요. 만족하시나요? 저 대신 당한 여자가 있으니까.”
“이셀라!”
이셀라는 손을 들어서 눈을 가렸다.
아버지를 사랑한다. 아버지를 존경한다. 자신의 모든 것은 아버지 덕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셀라는 아버지의 이런 모습에 조금씩 자신의 몸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따뜻하게 입고 있음에도 그러하였다.
“아버지, 귀즈 왕세자 전하와 연이 있으시지요.”
이셀라는 베르딕이 왕가와도 연이 있음을 기억해 냈다. 베르딕은 이셀라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늘어놓지는 않았지만, 식사 시간에 가끔씩 사업 이야기를 풀어 놓으면서 자랑하기를 좋아했다. 그녀는 베르딕이 귀즈 왕세자와 연을 텄음을 자랑했다는 것을 떠올리면서 말을 꺼냈다.
“귀즈 왕세자 전하가 저와 캐런을 납치했었어요. 일을 목격한 젊은 여자라는 이유로.”
“…셀리나, 문 밖에 다른 사람이 없는지 확인해 주시오.”
셀리나는 조용히 일어나서 방문 밖을 확인했다. 그리고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아무도 없어요.”
“다행이군.”
베르딕은 이셀라의 손을 잡았다. 이셀라는 억지로 잡힌 손을 내려다보며 그의 말을 들었다.
“어쩌다가 그런 험한 일에 얽혔느냐.”
“캐런과 산책을 하다가 너무 멀리까지 갔어요. 그러다가 사람들이 시체를 처분하는 걸 목격하고… 잡혀 가서 눈뜬 곳은 왕궁 지하였어요.”
속이 메슥거렸다.
“저 대신 캐런이 남겠다고 간청해서 절 풀어 주셨어요. 하지만 사실은 절 풀어 준 게 아니었어요. 죽이려고 했다구요.”
“…귀즈 전하가 그럴 리가 없어. 시종이 잘못 이해했을 거야. 그냥 사고야.”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세요?”
“그래.”
베르딕은 놀라지 않았다. 그냥 부정했다. 귀즈 왕세자가 그럴 리가 없다고? 자신의 딸이 끌려갔다가 왔는데? 그냥 사고라니. 그것은 사고가 아니다. 이셀라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냥 사고라니! 자신이 끌려갔다가 돌아왔는데 어떻게 그것을 단순한 사고로 치부한단 말인가?
이셀라는 잠시 뒤에야 이해했다.
귀즈 왕세자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그런 사람일 리가 없다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딸인 이셀라에게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 그러니까… 알고 계셨군요?”
“…원래 왕족들은, 고약한 취미가 많지….”
이셀라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베르딕에게서 역겨움을 느꼈다.
이셀라가 베르딕에게 더 말하려는 순간, 베르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의도적인 대화의 단절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구나.”
이셀라는 오히려 자신을 나무라는 부친을 기가 막혀 쳐다보았지만, 베르딕은 더욱 강하게 으름장을 놓았다.
“시온 엘렉트라와 결혼하는 것도 미뤄야겠구나. 네 말대로 넌 결혼하기 이르니 말이다.”
“아버지,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베르딕은 의도적으로 이셀라의 말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이셀라 넌 당분간 외출 금지다. 1년이든 2년이든, 네가 정신 차릴 때까지 나오지 못할 줄 알아라.”
“네? 몇 년이라구요?”
“그래. 당장 본가로 돌아가서 네 잘못을 천천히 생각해라.”
이셀라는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며칠도 아니고 몇 년이라고? 이것은 감금이나 다름없었다. 이셀라는 어이가 없어서 반문했다. 재회의 기쁨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요.”
“집 밖으로 나온 것이 네 잘못 아니냐! 애초에 네가 멋대로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으면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게야.”
“뭐라구요?”
베르딕은 지금 이 모든 사건을 단순 가출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는 아내에게 말을 돌렸다.
“셀레나, 당분간 이셀라와 같이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난 귀즈 전하에게 방문해야 할 것 같소. 선물과 함께 신세를 져서 죄송하다는 말과 사례를 하러 말이오.”
“그 사람이 미친놈이라구요!”
“조용히 해! 네가 잘못 본 거야! 어디서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는 게냐!”
베르딕은 분에 못 이겨 손에 잡히는 화병을 내려치려다가 말았다. 팔뚝에 힘줄이 돋았지만 필사적으로 남은 자제력을 끌어 모았다.
“이셀라 네가… 잘못 본 거야. 그분이 그러실 리가 없어. 내가 그분께 드린 돈이 얼만데… 내 딸을 실수로라도 납치해서 죽여 버린다니…. 그럴 리가 없단 말이다. 시체가 쌓여 있는 방이라니, 네 머리가 잘못된 게 분명해…. 부탁하오, 셀레나.”
“알겠어요. 이셀라, 내일 바로 내려가자꾸나.”
“아버지!”
“난 먼저 나가겠소.”
쾅.
일부러 문을 강하게 닫고 베르딕은 나가 버렸다.
“…맙소사. 어머니, 아버지가 무슨.”
이셀라는 기가 막혀서 그 문을 망연하게 쳐다보았다. 자신의 아버지가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베르딕 때문에 죽은 사람이 한둘도 아닐 것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과는 좀 더 멀리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셀라 자신이 신경 쓸 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고 나니 막연히 짐작하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셀라는 베르딕의 이기적인 면이 자신을 향하자 그것이 무척 거북스러웠다. 베르딕은 아예 자신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가출한 가장 큰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물론 레이몬드가 그 발단이 되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저 고압적인 태도가 갑갑했기 때문이었다.
잠시나마 화합하는 듯했던 가정은 금방 현실로 돌아왔다.
“어쩔 수 없단다, 이셀라. 왕실과 얽히는 것은 위험해. 앞으로 다시는 입 밖에 내지 마려무나.”
“…캐런 하이어가… 저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만 잊으렴. 그의 아버지가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일러두마. 하이어 영주는 그의 영지가 전에 없이 발전하는 걸 보게 될 거야.”
돈으로 가족에게 보답을 하겠다고. 하지만 그녀의 가족들은 왜 그런 보상을 받는지 절대 알지 못할 것이다. 이셀라는 베르딕이 보답을 하기나 할까 의심스러웠다. 그녀의 아버지는 생색내지 못할 보답은 하지 않는 사람이다. 하이어 영지는 발전은커녕 망하지만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아버지가 그럴 리가 있나요.”
“이셀라, 아버지가 하지 않는다면 나라도 최선을 다해 보상하도록 할게. 여자끼리의 약속이야.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 일에서 빠지자꾸나.”
“…보상이요? 어머니도 제가 죽었으면 귀즈 전하에게 보상을 받으셨을 건가 봐요.”
“비꼬지 마렴. 우리도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어. 여기까지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야.”
하지만 사람이 납치당했다. 이 나라의 왕세자가 연쇄 살인마다. 이 정도의 일을 그냥 저렇게 묻고 지나간다고?
이셀라는 아직도 목이 근질거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벽에 잔뜩 걸려 있던 시체, 시체, 시체들. 자신도 거기에 걸릴 예정이었다. 지금쯤 캐런이 거기에 걸려 있을지도 모른다.
“이셀라. 네 아버지가 나갈 때 귀즈 전하에게 간다는 말을 들었지.”
셀레나는 딸을 붙들고 남편을 옹호했다.
“아버지도 네가 죽을 뻔했는데 당연히 분하지 않겠니? 하지만 아버지는 귀즈 전하에게 화를 내실 수가 없어. 그분은 왕족이니까. 오히려 우리는 그분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선물을 드려야 하는 입장이란다. 우리가 고발을 한다고? 누구를? 누구를 구한다고? 우리는 못해. 이셀라, 우리는 못한단다.”
“제가 죽을 뻔했는데….”
“네가 죽을 뻔했으니까.”
이셀라는 자신을 붙든 어머니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우리는 너를 잃을 수 없어. 왕족 앞에 우리는 그저 돈 나오는 지갑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단다. 이셀라, 우리는 지금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입장이 아니야…. 그저 네 목숨을 보전한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야 한단다. 아버지의 한계를 인정하렴.”
캐런 하이어는 자신 때문에 이대로 죽는 것일까? 이셀라는 자신이 왜 캐런에게 그녀를 구하러 돌아오겠다고 그렇게 말했는지 스스로가 후회스러웠다. 누가 누구를 구한단 말인가. 자기 자신조차도 수습하기 어려운데.
“부디 제발… 가만히 있어 주렴….”
“엄마….”
“부탁이야.”
셀레나의 눈에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이셀라는 더 이상 모친에게 말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캐런을 잊는 것도 무서웠다.
‘캐런 뱃속에 아기가 있을 텐데.’
그 생각이 이셀라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밤이 되어서야 이셀라는 혼자 있을 수 있었다. 다음날이 되면 셀레나와 같이 본가로 내려가야 할 처지였다. 이번에 내려가면 몇 년 동안 집에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한다. 이셀라는 두려움에 몸서리가 쳐졌다.
캐런의 임신 사실을 본인에게 말하는 것도 부담스러워서 외면하려고 했던 자신이다. 왕족이 얽힌 이 사건은 그녀에게 지나치게 무겁게 다가왔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그냥 다 끝나는 걸까?’
아버지는 어떻게든 귀즈 왕세자에게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애를 쓸 것이다. 이셀라는 모친과 함께 내려가는 것이 자신에게 가장 안전하고 행복한 길이 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부모는 항상 그녀에게 좋은 것만을 쥐여 주지 않았는가.
두렵던 그 지하실도 이렇게 푹신한 자신의 방 안에 누워 있으면 먼 꿈처럼 느껴진다. 이대로 안전한 본가로 내려가면 자신은 모든 것을 잊고 원래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난 못 살아요.”
캐런도 스스로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자신이 살아 나가지 못할 것을 장담하고 있었다. 이셀라가 약간의 죄책감을 모른 척만 하면, 그것으로 자신은 평생 안전해질 수 있다.
귀즈 왕세자는 이 나라의 왕이 될 사람이다.
이셀라는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 되새기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자신 하나뿐 아니라 가족 전체가 위험해진다. 부친이, 선조가 대대로 일궈 놓은 모든 사업이 무너질 수도 있다.
지금 베르딕이 귀즈 왕세자에게 숙이고 오히려 빌러 간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길을 걷다가 발로 채였어도 친 사람이 왕족이면 채인 사람이 잘못한 것이다. 감히 길에 있어서 왕족이 발을 올리는 수고를 들이게 했으니까.
귀즈 왕세자가 법안 하나만 불리하게 통과시켜도 쌓아 둔 부가 순식간에 날아간다. 이셀라는 어렸을 적에 베르딕이 그런 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앓는 소리를 하며 욕지거리를 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리고 그 뒤로 그는 귀족이나 왕족과 연을 맺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이게 우리 한계야.’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이셀라는 사람이 얼마나 빨리 죽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왕세자가 마음만 먹으면 이미 캐런을 죽였을 것이다. 벌써 만 하루가 지났다. 왕세자가 그녀를 온전히 놔두었을 것 같지 않았다.
‘이미 죽었을지도 몰라. 내일 떠나면 난 이제 안전해.’
너무나 달콤한 유혹이었다.
캐런이 이셀라와 같이 사라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다. 자신 하나뿐이다. 자신이 눈을 감고 어머니를 따라가면 평생 안전해질 것이다.
양심만 제외하고. 하지만 그 양심도 이제 곧 무뎌질 것이다.
이셀라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캐런을 향한 감정이 남아 있다는 게 싫었다.
역시 개입하지 말았어야 했다. 임신을 했든 말든. 캐런이 대신 희생을 했든 말든. 그녀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자신의 일이 아니다. 알 바 아니다. 그렇게 살고 싶었다.
이셀라는 베개를 끌어안고 신음을 참았다. 고민이 깊어지자 몸이 실제로 아파 오는 것 같았다. 여기저기 난 생채기들이 다시 인식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고통도 금방 사라질 것이다.
가슴을 괴롭히는 이런 감정도 시간이 지나면 무뎌질 것이다.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향해 혐오스러운 시선을 내뱉을 때처럼. 발목을 잡는 거지의 손을 짓밟을 때처럼. 자신이 잃어버린 물건을 하녀들의 범행으로 돌렸을 때처럼.
이번에도 그냥 묻고 지나가면.
똑, 똑.
“…흡.”
이셀라는 놀라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고개를 돌리자 이셀라는 힘이 풀려서 다시 기절할 뻔했다. 창문 밖에 손이 있었다. 그 손이 창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시온 경?”
“이셀라, 문 좀 열어 주시겠습니까?”
시온 엘렉트라였다. 이셀라는 창문으로 다가가서 잠긴 경첩을 열었다. 시온이 비 맞은 머리를 털면서 들어왔다. 어느새 지금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죄송합니다. 도무지 만나는 것을 허락해 주지 않아서 말입니다.”
“괜찮사와요. 그런데 무슨 일로….”
끝을 흐렸다. 이셀라는 베르딕이 꺼낸 시온과의 결혼 이야기를 떠올리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결혼. 지금은 꺼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도피처가 될 만도 하다. 시온은 자신의 기분을 잘 맞춰 줄 것이다. 레이몬드와는 다르게 그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니까. 언제 결혼할지 궁금해서 온 걸까.
“그때 캐런 하이어 양과 같이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혼자 돌아오신 것이 걱정이 되어 그렇습니다. 괜찮습니까?”
“제가 말한 적 있었나요?”
“아뇨, 하지만 대성전에 찾아갔는데 두 분 다 안 계셨기 때문에 알았습니다. 같이 사라진 거니까, 당신이 위험해 처해 있었다면 분명 그녀도 위험하단 뜻이지 않겠습니까.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면 찾아야 할 테니까요.”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당신이 알고 있었군요.”
“이셀라?”
“그래서 나를 구할 수 있었군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불안해하십니까?”
시온 엘렉트라는 자신이 캐런과 같이 지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과 같이 사라졌다는 것을 안다. 만약에 이셀라가 그에게 함구를 원하면 그는 입을 다물고 평생 그녀 곁에 있을 수 있을까? 아버지처럼? 양심에 눈을 감고 안락을 추구할 수 있을까?
“…….”
이셀라는 그가 레이몬드와 같은 사람이 아니란 걸 안다. 그는 귀족이 아니고, 돈이 없고, 돈 많은 여자들을 찾아다니는 남자다.
하지만 그가 어떤 남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 줄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그리고 그가 캐런과 이셀라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셀라는 좀 더 위선을 떨고 싶어졌다. 이셀라는 시온을 똑바로 보고 입을 열었다.
“시온 경, 맹세해 주시와요. 무조건 내 편을 들어 주겠다고.”
“전 항상 당신의 편이 되겠습니다.”
온전한 자신의 편이 한 명 있다는 것만으로도 용기가 생겼다.
“캐런 하이어가 귀즈 왕세자 전하에게 납치되어 있사와요. 그리고 전 그녀를 구하고 싶어요. 도와주시겠사와요?”
시온 엘렉트라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기사처럼. 그는 원래 기사였지만.
“당신의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캐런이… 귀즈 왕세자 전하에게.”
“이셀라 양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증거가 있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아니, 나도 믿어. 그녀가 없는 이야기를 할 사람은 아니지. 위치가 어디인지도 대강 짐작이 가.”
레이몬드는 심각한 얼굴로 자신의 입가를 가렸지만, 그렇다고 경악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레이몬드는 지도와 날짜를 보면서 고민하다가 시온에게 물었다.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다니 감사한 일이군. 그래서 이셀라 에반스 양은 어디서 머물고 있지?”
“지금은 제가 머무는 숙소에 있습니다. 레이몬드 경.”
“란던 백작님에게 따로 연락을 드릴 테니 그쪽으로 옮기는 것이 낫겠어. 내 대부시니 그 정도 부탁은 들어주실 거다.”
“레이몬드 경이 도와주셨다고 말해야 할까요?”
“아니, 그냥 시온 경 자네 인맥이라고 말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군. 틀린 말도 아니니 일단은 그렇게 말해 둬.”
“알겠습니다.”
레이몬드는 시온이 전한 소식을 듣고도 침착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애인이 납치당한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침착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원래 레이몬드는 눈앞에서 폭탄이 날아다녀도 침착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범인이 귀즈 왕세자라는 것까지 마치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크게 놀라지 않는 부분은 껄끄러웠다.
“레이몬드 경, 귀즈 왕세자 전하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까?”
귀즈 왕세자의 취미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은 시온도 풍문으로 들었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여럿 죽일 정도의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시온은 레이몬드의 굳은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약간은. 후작님께 전에 말씀드려 봤지만 역시 소용은 없었지.”
“어떻게 하실 계획이십니까? 상대는 왕족입니다. 그리고 장소는 왕궁이구요. 이셀라 에반스 양에게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지만… 전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레이몬드는 지도를 묵묵하게 내려다보았다. 초록색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하나 밖에 없겠어.”
그리고 지도 위에 선을 그었다.
“궁을 폭파시킨다.”
시온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레이몬드의 손을 쳐다보고, 창밖과 자신의 신발까지 내려다보다가 이것이 현실임을 깨달았다. 레이몬드는 정말 할 생각이었다.
“아, 그러시군요. 그럼 여기서 전 빠져도 되겠습니까?”
“나도 그러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미 늦었어, 시온 경.”
“레이몬드 경, 전 오래오래 가늘고 길게 빌붙어서 사는 게 꿈입니다.”
“직접 행동하는 건 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게.”
시온은 기가 차서 레이몬드에게 말했다.
“궁정에 폭발물을 설치했다가 붙잡히면 3대가 멸족입니다! 이건 그냥 테러라구요! 증거를 찾고 수사부에 넘겨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자넨 고아잖아.”
“아, 지금 그게 문제입니까…. 설마 그래서 절 끌어들이시는 겁니까?”
“아니, 자네 말고는 믿을 사람이 없어서 그렇지.”
“감동 안 받습니다. 전 죽기 싫어요.”
“그럼 어쩔 수 없고. 수사부에 넘긴다고 해도 감히 왕세자의 궁을 수사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무리하더라도 내가 직접 할 수밖에.”
시온은 순순히 대답하는 레이몬드의 눈치를 보면서 물었다.
“어떻게 하시려구요.”
“혼자 폭파시킨다.”
“…….”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레이몬드는 침착하게 돌아 있었다.
시온은 이셀라에게 물론 돕겠다고 했지만, 이렇게 막가는 식의 행동은 생각하지 못했다. 레이몬드 경이 이렇게 막가는 사람이었나?
캐런 하이어를 자신에게 소개해 준 이후로 그는 갑자기 얼이 빠진 듯한 행동을 하고는 했다. 전의 시온이 알던 그와는 너무 달라 레이몬드를 따라 행동하기가 힘들었다.
“잘 생각해 봅시다, 레이몬드 경. 궁을 폭파시키다니, 어떻게 들어가시려구요. 그리고 왕궁에 있는 수많은 경비병들과 사람들은 어떻게 하시려는 겁니까?”
“난 들어갈 수 있어.”
“그야 왕궁에서 파티가 있을 때 들어가거나, 왕세손 전하를 뵈러 들어가거나 하시겠지요. 하지만 지금 그것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애초에, 화내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캐런 하이어 양이 지금 살아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지 않습니까?”
“살아 있을 거야. 그건 확실해. 그런 것보다… 캐런이 더 큰 사고를 칠까 봐 걱정되는군.”
“예?”
레이몬드는 고개를 흔들며 말을 돌렸다.
“아무튼, 결국 궁 안에 폭발물을 설치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 지하실의 위치는 분명 귀즈 왕세자 전하의 방과 연결되어 있다. 그런 비공식적인 곳을 조사하겠다고 할 수도 없고, 캐런과 내 관계도 공식적인 것이 아니야. 과격하더라도 이 방법 밖에는 없네. 시온 경 자네가 가능한 한 덜 얽히도록 노력은 하겠어.”
“레이몬드 경은요?”
“안 되면 죽어야지. 시온 경, 사랑을 위해 죽는 것도 꽤나 로맨틱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자폭이라도 하시려는 겁니까?”
“그것과는 좀 다른데, 난 목숨을 거는 게 무섭지 않을 뿐이야. 그리고 지금 이 방법이 최선일 뿐이고. 도와주겠나? 아니, 도와줘.”
시온은 레이몬드의 한쪽 눈을 보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그가 자신 때문에 다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부채감을 가지고 도울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귀즈 왕세자 전하가 참석하는 파티가 바로 다음날이야. 란던 백작님에게 부탁드렸으니, 그분이 이셀라 에반스 양을 준비시켜 주실 거야. 자네는 그녀와 함께 입장해서 상황을 지켜보다가 내게 전하가 어떤 상태인지 알려 줘. 언제 도착해서 얼마나 머물다가 돌아갈 채비를 하는지. 전처럼 일곱 번째 테라스의 두 번째 틈새에 부탁하네.”
“참석하지 않으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과거를 생각하면 분명 하실 거다. 이제까지 그분은 언제나 그날 참석하셨거든.”
레이몬드는 날짜를 종이 위에 쓰면서 그렇게 말했다.
“사람의 행동에는 관성이 있어.”
“이셀라, 이제 곧 궁에 도착합니다.”
“네, 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시온은 긴장한 얼굴로 목의 스카프를 고쳐 매었다. 파티라는 파티는 빠지지 않고 죄다 참석하기를 좋아하는 그였지만, 이번처럼 긴장한 적은 없었다.
시온이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귀즈 왕세자가 파티에 참석하는 것을 확인하고, 그가 얼마나 머물 지 레이몬드에게 알리는 것이다.
시온은 일곱 번째 테라스의 두 번째 틈새가 어디쯤인지 머릿속으로 그려봤다. 일곱 번째 테라스의 위치는 잘 쓰지 않는 곳이어서 암암리에 남녀들이 은밀한 공간으로 사용했다. 호위병들도 일부러 그 주변으로는 잘 가지 않았다. 그래서 종종 레이몬드와 비밀리에 쪽지를 주고받을 일이 있을 때 사용하곤 했다.
시온은 시간을 확인하고 심호흡을 했다. 자신이 할 일은 분명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지만, 레이몬드가 벌일 일 때문에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작은 폭탄을 산발적으로 설치할 거야. 그걸로 사람들의 시선이나 인력이 분산될 때 캐런을 빼내는 것이 계획이야.”
“제발 한 번에 성공해서 구할 수 있으면 좋겠군요.”
부디 그래야 할 것이다.
사건이 작은 폭발 사고, 그 이상으로 확대되는 것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 시온이 바라는 것은 캐런을 무사히 빼내고, 레이몬드와 캐런은 잠적해서 레이몬드의 영지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자신과 이셀라도 원래의 영지에서 알아서 잘 사는 것이다.
“떠, 떨지 마시와요.”
“전 안 떨고 있습니다, 이셀라.”
이셀라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진녹색 드레스는 분명 꽤나 값비싼 것이었지만 약간 불편해 보였다. 맨몸으로 집에서 빠져나온 이셀라를 위해 란던 백작 부인에게서 빌린 옷이기 때문이었다. 품이나 소매의 기장 등이 약간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셀라의 표정이 지나치게 굳어 있어서 위화감이 심했다.
“저, 저는. 안, 떨고… 떨고 있사와요?”
“예.”
사교 모임을 자주 참석했지만 왕실 무도회에는 처음 참석하는 이셀라는, 여러모로 긴장을 한 기색이 역력했다. 본디 왕궁에서 데뷔한 후에야 본격적으로 사교계 데뷔를 했다고 인정을 하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그녀가 이제야 제대로 사교계 활동을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귀족이나 유명 인사들보다, 귀즈 왕세자가 이셀라를 보게 될 것이다. 귀즈 왕세자는 그가 놓친 이셀라가 파티에 참석한다는 것을 안다면 더더욱 빠지지 않을 것이다.
“위험합니다.”
“알아. 하지만 자네 혼자서 들어가는 것은 전하의 눈길을 잡아 두기가 어려워. 이셀라 양에게 시선이 집중될 때 자네가 움직여 줘야 해.”
“에반스 양이 납치된 지 고작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녀가 거절하면 난 더 이상 부탁하지 않겠어.”
시온은 그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귀즈 왕세자가 한 번 놓친 사냥감이다. 이셀라를 보면 어떤 얼굴을 할 것인가? 시온은 분명 이셀라가 참석하지 않겠다고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이셀라는 시온의 예상과는 다르게, 연회에 나가겠다고 했다.
‘저렇게 덜덜 떨면서.’
시온은 캐런 하이어에게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지나치게 휘말리는 것 같아서 싫었다. 시온 자신이 맨몸으로, 볼만한 외모 하나로 먹고살아서 그런지 그는 자신 같은 사람을 싫어했다. 시온은 캐런 하이어를 소개받자마자 자신과 동류라는 것을 알아봤고 그런 캐런이 영 거북스러웠다.
탄탄대로를 걷던 선배가 삐끗하기 시작한 것도 그 여자를 만난 이후였던 것 같고, 지금 공들이고 있는 이셀라 옆에 있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이셀라와 레이몬드가 바라기 때문에 참여하고는 있지만 시온은 자신처럼 외모로 사람들의 호의를 사는 캐런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 여자 하나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 시온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셀라, 지금도 말하지만… 전 당신이 위험에 빠지는 것이 싫습니다. 이셀라 당신이 캐런 양의 행방을 알려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할 일을 다 했어요.”
“아, 아, 아뇨…. 결국은 귀즈 왕세자 전하와도, 해, 해결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와… 요….”
이셀라는 덜덜 떨면서도 화장을 고치고 구두의 굽을 확인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냥… 전하의 눈을 피해 절 내려가게 하시려고 하지만 부모님도 아실 거예요. 도망가도 소용없사와요…. 차라리 얼굴을 드러내는 편이 나아요…. 결국 캐런이 탈출에 성공하면 그녀의 소재를 아는 제가 제일 먼저 그분의 분노를 사지 않겠어요?”
“그렇겠지요.”
이셀라는 반지와 목걸이를 마저 체크하면서 점점 안정되는 듯했다. 장신구가 여자의 무기라는 말은 그녀를 보니 진실로 느껴졌다. 그녀는 전쟁에 나가는 기사의 얼굴로 목걸이의 각도를 다시 매만지며 말했다.
“그럼 차라리 궁 안에서… 그분 앞에서 이번 건과 조금이라도 상관없는 척하는 편이 나을 거예요. 그래도 의심은 사겠지만, 약간이라도 위험은 덜 수 있겠죠. 사고가 날 때 저는 비명을 지르면서 기절할 예, 예정이와요.”
논리는 그럴듯했지만 그래도 사자 굴에 자진해서 들어가는 것이다. 시온은 혀를 차려 했지만 막상 이셀라를 보니 그녀의 배짱에 더 감탄했다.
“…이셀라, 당신이 남자로 태어났으면 하는 아쉬움이 약간은 생기는군요.”
“네? 싫어요.”
“…네.”
시온은 이셀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셀라가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이셀라는 시온의 옆에서 걸으면서 멀리서 보이는 궁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시온 경, 전 기사가 되고 싶었사와요.”
“그리 좋은 직업은 아닙니다.”
“직업 말고, 이야기에 나오는 기사 말이어요. 약자를 수호하고 정의를 지키는…. 현실에 없다는 걸, 제가 그렇게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아서 제가 기사와 결혼하고 싶었사와요.”
이셀라는 긴장한 얼굴로 약간 웃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제가 직접 하는 게 더 흥미진진하네요.”
“그럼 정의를 수호하러 갑시다.”
“네.”
악당에 잡힌 사람을 구하러 간다. 마치 기사처럼.
비록 구하는 사람은 공주가 아니라 시골 아가씨지만. 그리 친한 사람도 아니지만.
레이몬드는 궁 안으로 들어갔다. 성문 앞에서 경비 대장이 레이몬드를 보면서 알은체를 했다.
“레이몬드 경, 오랜만이십니다.”
“그래. 연회 때문에 바빠 보이는군.”
“예, 그렇습니다. 참석하시려구요?”
“음, 잠깐 루이스 전하와 할 이야기가 있어서.”
“알겠습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그래 바빠 보이는데 굳이 안내해 줄 필요는 없어.”
“앗, 감사합니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궁 안에는 수많은 시종들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들의 눈을 피해 깊숙이 들어가는 것은 그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몇몇 하녀들이 홀을 지날 때 그를 알아보았지만 이내 자신들의 일을 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레이몬드는 왕자의 사격 스승으로서 자주 출입했기 때문에, 연회가 열리는 중앙 궁전이 아닌 왕세자와 왕세손이 머무는 궁으로 향할 때도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왕세손은 레이몬드를 자주 찾았기 때문이다.
귀즈 왕세자는 제대로 된 아버지가 아니었고, 다른 스승들은 나이들이 많아서 루이스 왕세손은 가끔씩 레이몬드를 스승보다는 아끼는 부하, 혹은 형처럼 대하고 싶어 했다.
루이스 왕세손은 수업 중에 총을 잡다가 레이몬드에게 물었다.
“나도 나이가 들면 저런 것이 재밌어지는 걸까.”
레이몬드는 궁에서 들리는 음악 소리를 무시하려고 하며 루이스 왕세손에게 대답했다.
“전 별로 재미없어 보입니다.”
루이스 왕세손은 귀즈 왕세자와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다. 아직 어려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귀즈 왕세자 보다는 그의 할아버지나 스승인 대신들, 대부인 팬케이르 후작을 좀 더 닮았다. 그래서 귀즈 왕세자는 루이스 왕세손을 더 증오했던 걸까.
왕궁에서는 연회가 자주 열렸다. 귀즈 왕세자는 내킬 때만 나오곤 했고 보통 그가 참석하면 연회의 분위기는 퇴폐한 파티가 되고는 했다. 고성이 오고 가고 큰 도박이 벌어지고 시간이 지나면 하녀를 가장한 창녀들이 궁 밖에서 들어오고는 했다.
늙은 왕은 귀즈 왕세자가 왕궁에서 벌이는 그런 행동까지 간섭할 여력이 없었다.
‘오늘은 분명 참석하겠지.’
레이몬드는 백여 번이 넘는 시간 동안 그가 참석했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그는 참석할 것이다.
이셀라가 말한 어두운 지하실, 시체가 잔뜩 걸려 있는 방은 분명 귀즈 왕세자의 방에서 이어지는 곳이었다. 캐런은 그곳에 있으리라. 있어야 한다. 아직 살아 있는 상태로.
시온은 그녀가 벌써 죽었을 가능성도 언급했지만, 그것은 지금 레이몬드에게 논외였다.
만약에 캐런이 죽었다면 재빨리 자신도 자살하리라. 그녀도 그것을 바랄 것이다. 레이몬드는 이제 그녀 없는 세상에서 더 사는 것이 귀찮았다. 정보는 필요한 만큼 얻었다.
지금은 캐런이 살아 있는 것을 전제로 두고 움직여야 한다.
레이몬드는 걸어가면서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을 때마다 복도나 정원 쪽에 작은 폭탄을 하나씩 떨어뜨렸다. 태엽을 감아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폭발하게 되어 있다.
소리가 매우 큰 것들이어서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기에는 충분했다. 어떤 것은 폭죽처럼 화려하게 터지는 것도 있었다. 작은 불이라도 나 준다면 더욱 좋았다.
캐런은 비공식적으로 납치를 당한 것이기 때문에 탈출시켜 자신의 집 안에서 지내게 하면 귀즈 왕세자는 더 이상 손대지 못할 것이다. 레이몬드는 지난번보다 더 깊숙이 캐런을 숨겨야겠다고 결심했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번 생에 캐런은 무리했다. 캐런은 바깥세상으로 나가고 싶어 했다. 자신이 이제까지 있던 곳이 책이 아니란 것을 깨달은 순간 다시 많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그 노력은 빛을 발하지 못했다.
역시나 세상은 어렵고 두렵고 너무나 거칠어 캐런이 살기에는 부적합하다. 이번에도 저택으로 돌아가자. 다시 캐런을 방 안에 두고, 침대에서 둘만 사랑을 속삭이고,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럼 그녀는 불행할까?
그럴 리가 없지. 캐런은 자신을 사랑할 테니까. 자신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단둘이서 1년을 보내고, 또다시 1년을 보내고. 그렇게 둘이서 수십 년, 수백 년, 수천 년을 살아가면 그것으로 해피엔딩이다.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운 영원한 삶이다.
이셀라가 캐런을 돕는다는, 전에 없던 일이 일어나도. 베르딕이 캐런을 구한다는 기적이 일어나도. 결국 그들은 타인이고 중요한 것은 단둘뿐이다. 둘이서 시간을 더 보낼 필요가 있다. 세상은 다 지긋지긋하다.
“…아무도 없군.”
레이몬드는 왕세자의 방문 앞에 섰다. 아직까지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사람이 너무 적었다. 레이몬드는 지나치면서 시온에게서 쪽지가 오지 않았을까 테라스로 나가 살펴보았지만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귀즈 왕세자는 연회장에 도착하지 않은 것일까?
‘기다려야 해.’
원래의 그라면 그래야 한다.
확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능한 성공률을 더 높이기 위해 참아야 한다. 저 문 너머에 아직 귀즈 왕세자가 자신의 수하들과 함께 있을지도 모른다. 왕궁에서 탈출하는 것이 영영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 레이몬드는 귀즈 왕세자의 위치를 파악할 때까지 섣불리 움직이면 안 된다는 것을 머리로 알았다.
“…….”
하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저 문 너머에 캐런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이제까지 참아 온 인내심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벌써 이틀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5분만 있어도 숙련된 도살자는 숨통을 끊어 놓는다. 전신을 두들기는 것은 일도 아니다. 레이몬드는 캐런이 부디 현명하게 행동해 살아남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자신이 현명하게 기다리는 것에는 실패했다.
끼익.
레이몬드는 권총을 품에 넣었다. 아직 첫 번째 폭탄이 터트리기 전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그렇다면 칼을 쓰는 편이 났다. 레이몬드는 중간 길이의 칼을 품에서 꺼냈다.
‘누가 보고 있다면 단번에 사형감이군.’
“…….”
귀즈 왕세자의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방 안은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 나간 것이다. 그는 연회에 참석한 것일까? 그렇다면 지금이 기회다.
레이몬드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카페트를 들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전처럼 통로의 입구가 보였다.
이번에는 자물쇠로 잠겨 있지는 않았다. 가볍게 닫혀 있었다. 레이몬드는 문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캐런.”
레이몬드는 심호흡을 하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창가에서 시온이 아직 아무런 소식을 보내지 않았지만, 지금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레이몬드는 총과 칼의 위치를 다시 확인했다. 이제는 정말 한계였다. 캐런과 더 이상 떨어져 있는 것도 싫었고 그녀가 고생하는 것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다.
마주치는 전부를 죽이고 나가게 되더라도 그는 그렇게 할 것이다.
기다리는 것보다 그 편이 나았다.
이셀라는 시온과 함께 스텝을 밟았다. 긴장이 감돌았다. 궁정 악사들이 연주하는 밝은 왈츠곡으로 몇몇 쌍들이 천천히 춤을 추고 있었지만 각자 자신의 일행과 흥을 돋우기 위한 춤이었지, 본격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불편해 보이는 이셀라에게 시온이 말을 건넸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아직은 시간이 일러 분위기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시온은 이셀라와 천천히 움직이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왕궁에서 열리더라도 신년이나 축제에 열리는 연회가 아닌, 통상적으로 열리는 연회였다.
원래 이 모임의 분위기는 뻔했다. 그저 시간을 낭비하고 즐기는 모임. 소모적이고 퇴폐적이며 지루한 모임이었다. 시온은 이런 파티도 기꺼이 참석했지만 그의 주요 관심사는 나이 지긋한 귀족 여성이었기 때문에 그리 매력적인 연회는 아니었다.
이곳은 유흥을 좋아하는 남자들 위주의 모임이었다. 몇 시간이 지나면 그나마 있는 여성들도 다 빠져나가기 일쑤인 모임. 이셀라를 여기에 두는 것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이셀라와 자신의 즐거움이 아니었다.
“시온 경, 귀즈 왕세자 전하가 참석하는 것은 맞사와요?”
“예, 아마도….”
시온은 끝을 흐렸다. 이셀라가 재촉하듯 올려다보자 다시 이셀라와 살짝 멀어졌다가 가까워지면서 말을 이었다.
“귀즈 전하는 원래 마음 내키는 대로 참석하시니까요. 다른 소식통으로는 참석하실 것이라고 했지만….”
레이몬드는 호언장담했지만 레이몬드보다 이런 연회에 더 자주 참석하는 시온으로서는 그가 뭘 믿고 장담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연회라고는 하지만 중요한 날도 아니었고 축제 기간도 아니었다. 참석한 귀족들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저 유흥을 좋아하는 몇몇 젊은 귀족들만이 여기저기서 여자들을 지분거리며 놀고 있었다.
귀즈 왕세자가 참석할 것인가? 시온은 확신이 없었다. 장식이 유난히 화려한 것도 아니었고 고위 귀족들이 좀 더 참석한 것도 아니었다. 물론 귀즈는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참석할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유달리… 건전한데.’
시온은 자신이 느끼는 위화감을 알아챘다. 귀즈 왕세자는 왕족이면서도 연회장을 퇴폐적인 공간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휘황찬란한 대리석 위에 포도주를 뿌리면서 사람들이 기어 다니길 원했고, 시종 대신 창녀와 남창들이 서 있는 것을 바랐다. 도박에 파산한 자들이 품위를 잃는 것을 보고 즐겼으며 보증을 서 주고는 그것으로 협박하는 것도 좋아했다.
하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술은 평범하게 고급스러웠고 도수가 그리 높지도 않았다. 음악은 경쾌한 왈츠곡이었으며 장식용 천은 밝은 크림색 천들이 걸쳐져 있었다. 이른 백합이 여기저기 장식되어 있어서 그가 참석하는 왕궁의 연회라기보다, 여느 귀족 부인이 여는 살롱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그가 참석하면 이런 분위기가 되지 않는다. 그는 오늘 정말로 참석하는 것이 맞는 걸까? 시온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런 시온을 이셀라가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그럼 만약에, 그분이 참석하지 않으시면 어떻게 되는 것이와요?”
시온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럼 일이 복잡해진다. 그렇게 된다면 레이몬드는 귀즈 왕세자와 마주칠지도 모른다. 그럼 캐런 하이어는 어디에 있을까.
“그럼.”
하지만 그의 말은 끊겼다. 시종이 소리 높여 외쳤기 때문이다.
“귀즈 왕세자 전하께서 들어오십니다!”
다행이군.
레이몬드 경에게 쪽지를 보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귀즈 왕세자는 한 번 참석하면 어지간하면 오래 있는 편이었다. 사람들이 취하거나 인사불성이 되는 모습을 즐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레이몬드 경이 캐런 하이어를 빼낼 수 있는 시간은 충분할 것이다. 자신들은 여기서 귀즈 왕세자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가능한 한 오래 여기서 귀즈 왕세자와 시간을 보내면 되는 것이다.
“귀즈 왕세자 전하를 뵙습니다.”
“신께서 전하를 보호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이옵나이다.”
몇몇 사람들이 귀즈 왕세자에게 허리를 숙이면서 인사를 했지만 귀즈 왕세자는 무심히 지나가면서 자신이 주로 앉던 자리로 걸었다.
시온은 그의 얼굴이 전과는 좀 다르다고 생각했다. 항상 남들을 비웃곤 했던 잔인해 보이는 얼굴은 오늘따라 유난히 밝아 보였다. 귀즈 왕세자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가. 이셀라와 눈을 마주쳤다.
“흠, 이셀라 에반스 아닌가.”
“…….”
이셀라가 굳었다.
하얗게 굳은 이셀라 옆에서 시온이 그녀의 손가락을 살짝 잡았다. 정신 차려요 이셀라. 이셀라는 그제서야 허리를 숙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오늘 이렇게 참석할 줄은 몰랐는데.”
강바닥 아래 가라앉아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
이셀라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빈정대는 뉘앙스를 알아차렸다. 이셀라는 입을 열었다. 말을, 해야 한다. 아버지에게, 어머니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저, 전, 전하… 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내가 자네에게 무슨 감사받을 일을 했던가?”
귀즈 왕세자는 옅은 미소를 띄고 이셀라를 내려다보면서 그렇게 물었다. 이셀라는 할 말이 없어졌다. 여기서 자신이 살려 주셔서 감사하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레이몬드는 텅 빈 방 안에 서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시체도, 캐런도, 그 무엇도.
그때 이셀라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여기서 들려서는 안 되는 목소리였다.
“너무 그렇게 하지 마세요, 전하. 에반스 양이 난처해하잖아요.”
“…재밌어서 말이지.”
뒤늦게 시종이 외쳤다.
“캐런 하이어 양이 입장하십니다!”
이셀라는 당황했다. 시온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예상하지 못한 사람의 등장에 할 말을 잃었다. 원래의 계획이라면 귀즈 왕세자가 여기에 있고 왕실의 시종들의 집중이 여기로 쏠릴 동안 레이몬드가 캐런을 빼내야 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셀라 양, 그날 잘 돌아가셨나요?”
“…….”
“캐런이 묻고 있지 않나.”
“예, 예…. 그렇사옵니다, 전하.”
“내가 질문한 게 아닐 텐데.”
“죄, 죄송합니다, 전하. 덕분에… 집에 잘 들어갔어요, 캐런.”
왜 캐런이 저렇게 귀즈 왕세자 옆에 있단 말인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셀라는 계획이 틀어진 것에 당황해서 거의 패닉 상태였다. 먼저 사태를 파악한 것은 시온 엘렉트라였다. 캐런 하이어가 귀즈 왕세자를 구워삶아 놓은 모양이었다.
너무 알아서 자기 살길 잘 잡는군. 시온은 혀를 찼다. 죽거나 다친 부분은 없어서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이셀라가 말한 대로라면 귀즈 왕세자는 사람의 신체에 과도한 파괴욕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사실이라면 캐런은 왕궁 정원 아래 묻혀 있을 확률이 훨씬 높았다.
그러나 캐런은 곱다 못해 휘황찬란한 모습으로 귀즈 왕세자 옆에서 미소 짓고 있었다. 구하러 왔다는 이셀라가 더 초라한 모습이었다.
스물도 채 되지 않은 아가씨가 입기에는 지나치게 화려했다. 캐런이 입은 드레스는 금으로 된 자수가 전반적으로 화려하게 놓아져 있었으며 머리와 목에도 다이아와 자수정과 루비 등 갖가지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시온은 왜 오늘의 연회장의 모습이 예전과 달랐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귀즈 왕세자는 평상시처럼 사람들의 추한 꼴을 구경하기 위해서 연회를 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어린 정부를 보여 주기 위해서 연회를 연 것이었다.
캐런의 얼굴은 화사하기 그지없었다. 연분홍빛 입술이 호선을 그리면서 부드러운 미성이 흘러나온다.
“그래요. 날이 늦어서 걱정 많이 했어요, 이셀라.”
“저, 캐런…. 괜찮아요?”
“제가 괜찮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귀즈 전하가 이렇게 절 잘 돌봐 주시는 걸요.”
캐런이 살아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저렇게 귀즈 왕세자 옆에 천연덕스럽게 서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시온은 계획을 어떻게 수정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캐런이 저렇게 나왔다면, 당장의 생명은 보장되지만 그만큼 궁에서 도망칠 수 있는 확률은 더 줄어든다. 공식적인 정부가 되면 죽을 염려도 줄어들겠지만. 그럼 이제 캐런은 계속해서 왕궁에서 살게 되는 것일까?
‘레이몬드 경은?’
시온은 허리를 숙이고 급히 물러났다. 대화의 주체는 자신이 아닌 이셀라였기 때문에, 그가 물러나는 것이 오히려 예의를 지키는 것처럼 보였다. 귀즈 왕세자의 시선 또한 이셀라에게 집중하고 있는 이때가 적기였다.
시온은 일곱 번째 테라스에 쪽지를 끼워 넣었다.
G-I, k 동행
레이몬드가 괜히 먼저 들어가서 함정에 걸리지 않았기를.
시온은 입술을 깨물고 나왔다. 캐런이 귀즈 왕세자 옆에 있다는 것이 불안했다. 상황은 그들이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텅 빈 방 안에 서 있었다.
아무도 없다. 캐런은 분명 이 방 안에 있어야 하는데. 그뿐 아니라 수많은 시체들이 걸려 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어째서? 혼란스럽지만 없다는 것을 안 이상 그가 여기에 있을 필요는 없었다. 레이몬드는 방 안을 빠르게 훑고 나왔다.
레이몬드는 귀즈 왕세자의 밀실에서 나왔다. 잠겨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잠가 둘 필요가 없으니까 이렇게 해 둔 것이었다. 그렇다면 캐런은 지금쯤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선은 방을 빠져나가야 한다. 레이몬드는 조심스럽게 방 안을 원래의 상태로 정돈하고 일어났다. 생각을 해야 한다.
레이몬드는 방을 나갔다. 아니, 나가려고 했다.
“레이몬드 경?”
젠장.
왜 여기서 저 소년이 나타난 것일까.
“…루이스 왕세손 전하를 뵙습니다.”
하필이면 왜 루이스 왕세손이.
레이몬드는 속으로 혀를 찼다. 루이스 왕세손은 레이몬드를 올려다보면서 그에게 묻고 있었다. 하필이면 방 안에서 나오는 것을 그에게 바로 들켜 버렸다. 레이몬드는 이 소년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루이스 왕세손은 왕이 되지 못한다.
레이몬드는 과거의 온갖 미래를 경험했다. 캐런이 죽고 난 이후의 삶도. 그 이후로 수없이 많은 인생이 흘러갔다. 조금씩 다를 때도 있었지만 캐런이 죽은 100번의 삶은 늘 비슷했다. 과거의 기억을 가졌던 5번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루이스 왕세손은 절대, 왕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레이몬드에게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없었다. 캐런이 죽고 난 후 얼마 되지 않아 귀즈 왕세자가 자신의 아들을 죽여 버리고 왕좌에 오른다.
그리고 세월이 조금 더 지나면 귀즈 왕세자를 팬케이르 후작이 죽여 버리고 왕좌에 오른다. 팬케이르 후작의 아들이 또 다음의 왕이 될 것이며 팬케이르 후작이 맡던 변경의 수비는 약해지고 거기서는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레이몬드의 수십 년, 수백 년, 수천 년의 삶 중에 루이스 왕세손이 영향을 끼치는 부분은 미미했다. 레이몬드는 원래 동정을 베푸는 걸 좋아했지만 그런 감정은 세월에 휩쓸린 지 오래였다. 이 소년은 언제나 영원히 소년이기에 더 이상 죄책감을 가지기도 어려웠다.
그는 루이스 왕세손의 편에 서느니 귀즈 왕세자를 선택했다. 그의 성품이 역하고 더럽더라도 그저 목적을 위해서 사무적으로 그를 대하는 것이 더 편했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 또한 길지 않음을 알기에 버틸 수 있었다. 형을 어느 순간 포기하게 된 것처럼, 루이스 왕세손도 포기하게 되었다.
“경이 여기에 어쩐 일이지. 여기는 아버님의 방인데. 오늘은 수업이 없지 않았나.”
루이스 왕세손은 레이몬드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의아하다기보다는 추궁의 뜻을 담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품속의 칼을 생각했다. 여차하면 루이스 왕세손을 죽이고 달아나는 것이.
“…전하.”
레이몬드는 문밖을 둘러보았다. 사람은 없었다. 루이스 왕세손은 시종 하나 달지 않고 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를 죽이는 것에 문제는 없다. 루이스 왕세손은 레이몬드의 손짓 한 번에 죽을 것이다. 빨리 그를 죽이고 캐런을.
레이몬드는 루이스 왕세손의 하얗고 가는 목을 보았다. 어린 사슴이 생각나는 목이었다. 눈은 유순했고 감히 레이몬드가 그를 해할 것이라고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눈이었다. 단번에. 어차피 그가 전에 죽는 것도.
“사실은 할 말이 있습니다. 이리로.”
“무엇이지?”
레이몬드는 루이스 왕세손의 목을 본다. 약간 겁을 먹은 것 같다. 레이몬드가 그렇게 느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게 해 주고 싶어서요.”
그 순간 레이몬드의 머리를 꽉 채운 것은 캐런의 목소리였다.
캐런은 레이몬드가 얼마나 망가졌는지 잘 알지 못한다. 레이몬드가 캐런에게 밝힌 부분은 극히 일부분이었다. 그것으로도 캐런은 슬퍼했다. 그녀는 레이몬드가 하기 싫은 일을 자신 때문에 한다고 생각해서 저렇게 무리를 했다.
이셀라와 친구가 되겠다고 하고, 베르딕 또한 용서하자고 하고, 자신의 가족에게도 주의를 기울였다. 레이몬드는 그녀의 노력이 헛되다고 생각하면서도 맞춰 주었다.
이제는 한계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또다시 그의 순수했던 먼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어린 왕세손을 보자 그녀의 말을 따르고 싶어졌다.
“레이몬드 경?”
“…전하.”
레이몬드는 루이스 왕세손을 바라봤다. 목을 비틀면 바로 죽일 수 있다. 루이스 왕세손이 자신을 목격했다. 그것도 귀즈 왕세자의 방에서.
이것이 다른 사람에게, 특히 귀즈 왕세자의 귀에 들어가면 그는 이제 끝이다. 아니, 귀즈 왕세자뿐 아니라 팬케이르 후작에게만 알려져도 그의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른다. 과거의 그는 팬케이르 후작을 위해 좀 더 많은 일을 했지만 이번 생은 아니었다.
혼란스럽다. 루이스 왕세손을 죽이고 탈출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그것이 캐런이 원하는 일이 아니다. 자신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비척이면서 걸음을 옮겼다.
캐런은 어디에 있을까. 생각하는 것조차 지치고 힘이 들었다. 그녀 옆에서 사고조차 멈추고 싶었다.
“레이몬드 경!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인가? 아버지는 지금 연회에 참석 중이신데 왜 자네는 아버지의 방에 있는 거야?”
“전하, 저도 모르겠습니다.”
레이몬드는 걸음을 옮겼다. 지금 어디로 가야 하지. 왜 캐런은 지하실에 없단 말인가. 귀즈 왕세자는 이미 캐런을 죽였단 말인가? 아니면 어디로. 레이몬드는 걸었다. 일단은…. 그러니까 어디를 가야 하는 것일까. 먼저 해야 하는 것은.
“레이몬드 경?”
“안녕하십니까…. 엘바 백작 부인.”
“경을 오늘 볼 줄은 몰랐네요.”
아는 얼굴이었다. 이로서 만나는 자들을 다 죽이기는 더 힘들어졌군. 엘바 백작 부인의 등장으로 레이몬드에게 향했던 왕세손의 시선은 거두어졌다.
레이몬드는 엘바 백작 부인에게 인사하고 바로 옆에 있던, 자신이 아까 설치해 두었던 폭탄 중 하나를 들었다. 제거는 해야겠지.
“그건 뭔가요?”
“별 것 아닙니다. 제가 아까 떨어뜨린 물건이지요. 약간 위험하니 피하시는 게 좋습니다.”
“어머머, 잘하셔야지요. 아무리 군의 물건이라지만 큰일이라도 벌어지면 사형이라구요.”
“현명한 충고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스스로의 행동에 약간 충격을 먹었다. 지금 이 와중에 폭탄을 제거할 생각은 드는군. 레이몬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엘바 백작 부인 역시 이내 레이몬드에게 관심을 거두고 뒤에 있던 루이스 왕세손을 반갑게 맞았다.
“어머나, 루이스 전하. 오랜만입니다.”
“안녕, 엘바 백작 부인. 레이디 리안은 잘 지내나?”
“그럼요. 전하를 보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른답니다. 하지만 오늘은 오지 않았어요.”
“연회에 참석하려고?”
“네. 리안이 올 만한 곳은 아니니까요. 저도 그리 오래 있지는 않을 거랍니다.”
“그래, 조만간 나도 한번 다과회를 열 생각이니, 그때 리안을 보면 반가울 것 같아.”
“매우 기대하겠습니다.”
엘바 백작 부인과 루이스 왕세손은 서로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레이몬드는 등을 돌려 걸어가면서 시온이 놓아두었던 쪽지 몇 장을 품에서 꺼냈다. 세 장이 있었다. 시간별로 일정하게 한 장씩 넣어 둔 것이었다.
두 장의 종이는 빈 종이였다. 시온이 들어가기로 한 시간부터 시종장이 두 번 돌 때까지 귀즈가 오지 않은 것이다. 마지막 종이는 글씨가 있는 것이 종이가 접힌 상태에서도 보였다.
그의 예상대로 귀즈 왕세자는 약간 늦게 입장을 했으니 아직도 연회장 안에 있을 것이다. 레이몬드는 종이를 폈다.
“레이디 엘바는 원래 아버지가 베푸는 연회는 참석하지 않았잖아.”
“이번은 약간 다를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무엇이 다른데?”
“음…. 그것이….”
엘바 백작 부인은 루이스 왕세손에게 말을 꺼내기 어려워서 머뭇거렸다. 루이스 왕세손이 재촉했다.
“괜찮으니까 말 해.”
“새로운 사람을 사람들 앞에 보이실 생각이라 하더군요.”
“…여자로구나. 내 새어머니가 될 사람 같아?”
“그건 아닐 것 같아요. 아직 어리고, 가문이 대단찮은 사람이라서요.”
“누군데?”
“캐런 하이어라고 아세요?”
루이스 왕세손은 고개를 저었다.
레이몬드는 자신이 뒤돌아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죠?”
“쉿, 이셀라. 진정해요.”
시온은 이셀라의 입술에 손가락을 올렸다. 그들이 있는 곳은 주로 남녀가 은밀한 만남을 하는 곳이었지만, 그렇다고 큰 소리를 내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크고 화려하다고 해도 적진의 한복판인 것이다. 눈에 띄지 말자.
하지만 이셀라는 자신의 입술 위로 올라온 시온의 손가락을 잡아 내렸다. 긴장이 풀리자 목소리가 커지고 공포는 분노로 바뀌었다.
“지금 진정하게 생겼사와요? 왜 캐런이 저기에 있냐구요! 누구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을 하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왔는데…!”
“아마 그녀 나름대로 살 방법을 궁리한 것이겠지요. 일단 그분에게 잘 보이면 당장 죽지는 않을 테니까요.”
귀즈 왕세자에게 잘 보여서 살아남은 것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잘 살아남았다. 그의 정부 자리를 꿰차다니. 아까 만난 귀즈 왕세자 옆의 캐런은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최소한 당장 죽을 일이 없어 보였다.
다행인가? 하지만 앞으로의 일은 더 골치 아파졌다. 정부로 눈에 들어온 사람을 어떻게 빼낸단 말인가.
왕족의 정부가 되는 여자들은 비슷한 단계를 거친다. 고위 귀족들도 그렇게 한다. 이 나라의 법은 일부일처제를 원칙으로 삼고 사생아는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종교적 사상의 영향이 큰 이 나라는 미혼의 여성이 남성과 추문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부정하게 본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정치적 세력이 약한 남자나 자신의 부하 중 하나를 애첩과 결혼시켜서 그녀에게 직위를 준다.
‘아, 그래서 그런 건가?’
시온은 캐런이 캐서린과 같은 방법으로 귀즈 왕세자에게서 달아나려는 생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선은 귀즈 왕세자를 달래기 위해 그의 정부 자리로 들어간다. 하지만 왕족과 귀족의 정부는 유부녀여야 한다. 사람들 앞에 아예 나오지도 못할, 지하실의 시체 취급이면 몰라도 정부는 다르다.
시온은 사교계의 가십거리를 꿰고 있어 캐서린과 귀즈의 과거 또한 알고 있었다. 캐서린은 법적인 남편을 방패 삼아 귀즈에게서 달아났다.
캐런 또한 레이몬드를 가짜 남편으로 삼겠다고 지목하면 캐런 또한 귀즈에게서 빠져나올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그 둘의 관계는 둘을 제외하면 시온밖에 모른다. 일단 레이몬드와 캐런의 관계는 공식적인 것이 아니다 보니 결혼을 레이몬드와 하게 되면 기회가 생긴다.
“알겠습니다.”
“네?”
“정부면 분명 먼저 결혼을 시킬 테고 아마 그 남편을 레이몬드 경으로 지정해 달라고 하지 않을까요? 전의 캐런의 모친인 캐서린 또한 그런 방식으로 해결했다고 들었습니다.”
“…네? 뭐라구요?”
“정부로 삼으려면 유부녀여야 할 테니까요. 저렇게 공식적으로 파티에 데리고 나온 것을 보면 분명 단순히 유희 상대가 아닌 정부로 삼으려는 게 분명합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왜 갑자기 레이몬드 경 이름이 나오죠? 레이몬드라면 당신의 선배이자 제 전 약혼자를 말하시는 것이와요?”
“아.”
시온은 입을 다물었다. 말실수를 제대로 해 버렸다.
변명거리를 찾으려 했지만 이셀라가 그러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레이몬드 경이 캐런과 무슨 관계라고 그녀가 그를 지목한단 말이어요?”
“제가 말이 잘못 나왔습니다. 물론 그 사람이 아니라….”
“그럼 레이몬드 경의 이름은 왜 나온 거죠?”
“그러니까….”
아직 이셀라에게 말할 준비가 안 됐는데. 그녀는 과거에 레이몬드를 흠모했다. 하지만 레이몬드와 캐런의 관계는 몰랐다. 이셀라가 그 둘의 관계를 안다면 분명 불똥이 캐런에게도 떨어질 것이니 함구하라고 레이몬드가 명령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그게 아니….”
“아뇨, 말 돌리지 말고 말하시어요. 왜 레이몬드 경의 이름이 지금 거기서 나오는지 이해를 못하겠어요. 왜 캐런이 레이몬드 경을 남편으로 지정해 달라고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어요? 그 둘의 관계가 뭐라고?”
“제가 말이 잘못 나왔습니다. 아시다시피 레이몬드 경은 제 상사고 잘 아는 사람이다 보니까.”
“시온 경, 경은 저에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솔직한 대화를 하기로 약속하지 않았사와요?”
시온은 도망가고 싶었다. 역시 레이몬드가 뭐라 하든 자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그냥 이셀라를 구슬려서 안전한 저택에서 비위 맞추며 열심히 애교나 떨었어야 했는데. 이셀라의 눈초리가 점점 가늘어졌다. 시온은 식은땀을 흘렸다.
“실은 제가 그녀를 임신시켰기 때문입니다.”
대답은 뒤에서 들렸다.
“…네?”
시온은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그의 상사를 쳐다보았다. 레이몬드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시온과 이셀라가 있는 발코니 공간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입니다, 이셀라. 이렇게 얽히게 돼서 다시 한번 미안하단 말밖에 할 말이 없군요.”
그동안 계속해서 비밀로 삼아 왔던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시온은 이셀라를 통해 캐런이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들었다. 고민하던 그는 레이몬드가 직접 폭탄을 들고 움직이기 직전에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캐런 하이어 양과 어느 정도의 관계냐고. 그녀는 지금 임신 중일지도 모른다고.
레이몬드는 자신을 노려보는 이셀라에게 담담하게 고백했다.
“캐런과 내연 관계였습니다.”
이셀라는 그 사실에 뒤통수가 얼얼한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결혼도 안한 여자를… 레이몬드 경이….”
“그렇습니다. 캐런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워서 그녀와 연락을 끊었습니다.”
레이몬드는 순순히 대답했다.
“당신에게도 말했듯, 저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더군요. 이후에는 한 여자에게 얽매이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 깨달았습니다.”
“…캐런이 설마… 제게 남자에 대해 한마디도 안 한 건….”
“당연히 그녀와도 진지한 관계가 아니었죠. 제가 왜 고작 한 여자에게 목맸겠습니까.”
그래서 결국 잠깐 만나고 떠났다는 이야기였다. 이셀라에게 총이 있다면 레이몬드를 쏘아 버렸을 것 같았다. 이셀라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레이몬드에게 질문을 이어 갔다.
“…캐런이 임신 중이라는 건 언제 아셨나요.”
“시온 경이 캐런 하이어 양의 실종을 알리면서 제게 그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캐런에게 이셀라의 화살이 돌아가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레이몬드의 모습은 시온이 보기에도 가상할 정도였다.
시온이 레이몬드의 아랫도리가 얼마나 가벼운가 거짓말을 해 두었던 그 긴 시간이 드디어 빛을 발하는 상황이었다. 레이몬드는 전 약혼녀의 친구와 자는 것도 모자라 임신시키고 도망간 천하의 개새끼가 되어 있었다.
‘개자식.’
이셀라는 눈을 파랗게 뜨고 레이몬드를 경멸의 눈으로 노려보았다. 속으로는 욕을 퍼부었다. 그녀는 캐런이 왜 그렇게 자신의 옆에 있으려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째서 자신의 옆에서 그렇게 시녀 노릇까지 해 가면서 계속 비위를 맞추었는지, 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대성전에서 봉사 활동을 해 가면서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썼는지 알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캐런이 더더욱 미쳐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임신하지 않았을 거라고 스스로 세뇌하면서 말이다. 자신은 불임이다, 그렇게 믿으면서도 자신이 살 곳을 찾아서 본능적으로 움직인 것이다.
이셀라는 드디어 캐런을 이해하고 동정하기 시작했다. 진심으로. 이곳에서 ‘버려진 여자’가 받는 눈초리는 가혹했다. 돌이라도 맞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래서 그리 베풀고 자신의 비위를 맞추려고 했으리라.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 고생한 것은 저 남자 때문이다.
레이몬드 세이어테스 경.
얼굴만 반지르르한 천하의 개자식.
이셀라도 캐런도 전부 따지고 보면 저 남자 때문에 이렇게 고생을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셀라는 레이몬드를 테라스 밖으로 떠밀어 버리고 싶은 마음을 참아야 했다.
“…그런데 지금 왜 당신은 여기에 있나요? 그렇게… 망나니라고 지칭하셨던 분이 왜 이 자리에 있는지 전 알 수가 없네요. 책임감 없이 자유롭게 행동하시던 분이 왜 갑자기 여기에 오셨는지?”
이셀라가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보자 레이몬드는 시온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당신 옆의 시온 엘렉트라 경이 절 설득했으니까요. 저는 잠깐 만난 여자를 위해 희생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바보 같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온 경이 절 설득했고,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레이몬드는 그리고 자신을 불쾌하게 바라보는 이셀라에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당신은 캐런을 위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캐런 하이어를 위해 이렇게까지 용기를 내는 당신과 시온 경을 보고 제 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전 더 이상 도망가서는 안 된다는 걸 배웠습니다.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전 이제 당신에게 무릎을 꿇고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 말은 진실했다.
“부디 절 도와주십시오, 이셀라 에반스.”
이셀라는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왔다.
“알았어요. 하지만 이 일이 끝난 이후에는 당신을 보고 싶지 않네요.”
“예.”
“다시는.”
어떻게 일이 풀릴지는 모른다. 만약에 시온이 말했던 것처럼 캐런이 눈치껏 레이몬드 경을 자신의 남편으로 지목하면 일이 잘 풀리는 걸까?
“이셀라, 그런데…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까?”
“그냥 서 있어요, 시온 경. 제 생각에는 캐런이 레이몬드 경을 지목하지는 않을 것 같거든요.”
“왜죠? 그녀의 어머니처럼 캐런이 그냥 레이몬드 경을 지목하면 끝이 날 텐데요.”
“그럴 리가 있나요.”
시온의 추측을 이셀라는 바로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다. 주변에서 아무리 레이몬드를 부정하고 방종하다 일컬어도 그의 대외적인 가치는 결코 적지 않았다. 그는 루이스 왕세손이 좋아하는 유명한 군인이었으며 전쟁 영웅이었다. 거기다 젊고 잘생기기까지 했다.
“캐런이 요청한다고 하더라도 귀즈 왕세자 전하가 그걸 결코 허락할 리가 없잖아요. 왕세자에 대한 그녀의 진심만 의심스러워질 거예요.”
“…제 생각이 짧았군요. 그럼 이셀라 양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레이몬드 경이 제게 도와 달라고 했던 건…. 아무래도 캐런 양이 당신을 지목하지 않을까 싶어요.”
“예?”
시온은 황당한 얼굴로 자신을 가리켰다. 왜 캐런이 자신을? 캐런과 그의 사이는 좋다기보다는 약간 나쁜 쪽에 더 가까웠다. 그런데 왜 그녀가 자신을 남편으로 지목한단 말인가?
“그러니까요. 정부의 남편 자리인데 결코 사이가 좋은 남자나 대외적으로 가치 있는 남자를 지목하도록 둘 리가 없잖아요. 친분 관계가 희미하면서도 지위는 낮고, 오히려 확실하게 다른 여자에게 관심이 있는 남자가 낫겠죠. 귀즈 전하가 허락해 줄 만한 사람을 잡아야 하는데 당신이 제격이지 않겠어요?”
시온은 자신의 뒷목을 매만졌다.
이해는 했다. 캐런이 머리를 굴린다면 결코 레이몬드를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셀라의 말을 보아하니 분명 캐런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레이몬드와 캐런의 관계 때문에 자신이 지나치게 좁게 추측한 것 같았다.
“음, 청혼받을 준비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그나저나 왜 레이몬드 경은 제가 아니라 이셀라 당신에게 부탁한 겁니까. 제게 말했어도 이해할 텐데. 당신을 왜 위험에 끌어들이는지 모르겠군요.”
시온이 투덜거리자 이셀라는 부채로 입을 가리며 그를 보았다.
“이 계획에서는 당연히 내 허락을 맡아야죠.”
“아. 음. 네….”
“싫사와요?”
그럴 리가 없었다. 시온은 그의 여주인에게 기꺼이 복종하기로 결심했다. 선택권은 없어도 되는 것이다.
하지만 캐런은 시온을 선택하지 않았다. 물론 레이몬드를 선택한 것도 아니었다.
캐런은 귀즈 왕세자에게 나긋하게 웃으면서 자신의 남편을 요청했다.
“듈란 로이드가 좋겠어요, 전하.”
듈란 로이드가 수도로 올라온 것은 캐런 하이어에게 약을 먹이기 위함이었다.
캐런이 저택에 있을 때는 자신의 하인들이나, 하녀들을 써서 캐런 하이어에게 피임약을 미리미리 먹여 둘 수 있었지만 낸시나 영주의 말을 들어보면 저택을 떠난 이후 피임약을 먹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임신을 하는 것은 그가 원하지 않는 방향이었다.
소개해 드리고 싶은 남자가 있어요.
영주에게 보낸 그 편지에는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했을 뿐 이름이나 인상착의에 대해 설명하지는 않았다.
듈란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의 인생이 처음이 아니라면 분명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서 골랐을 것이다.
어떤 남자를 골랐을까?
꽤 궁금했지만 이내 누구든 별 상관없겠지, 하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누구든 자신과는 별 상관없는 일이다.
캐런은 오래 살았으니만큼 원한다면 어떤 남자든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 정도의 미모면 그리 어렵지도 않을 것이고, 누구를 선택하든 그 끝은 똑같을 것이다. 돈이 많은 남자, 잘생긴 남자, 유명한 남자.
누구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자신의 일이다. 자신은 캐런 하이어가 임신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아름다운 끝이란 없다. 끝은 끝으로서 끔찍해진다.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그녀에게 자식은 필요 없다. 끝은 필요 없다.
듈란은 수도원에서 오랫동안 머물렀었고 신관이었기 때문에 대성전에 기거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듈란이 대성전에 도착하자 부주교는 반색하며 맞이했다. 주교 또한 듈란을 불러 대면했다.
“이런 시기에 듈란 신관님이 와 주시니 매우 큰 도움이 되는군요.”
“미, 미숙한 손이나마… 도움이 된다니 다행입니다.”
“정말로 큰 도움이 됩니다. 수도에서는 사람이 언제나 부족하니까요. 휴, 정말이지… 어느 신관님이라도 도와주러 오시면 기쁠 터인데 앨번 수도원에서 오신 신관님이라니, 정말 감사할 뿐입니다.”
의사는 어디서나 큰 환영을 받는다. 사립 병원들은 고가의 진료비와 약제비를 받았고, 나라에서 운영하는 병원은 지극히 적었다.
왕실에서는 신전에서 구호 활동을 하기를 요구했으나 어느 시대 어느 나라나 그러하듯이 나라에서 지원하는 예산은 언제나 부족한 법이었다. 특히 빈민층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 봉사는 더욱 그러했다. 약도 부족하고 인력도 부족했다.
그러던 와중에 듈란의 방문은 대성전의 사람들에게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었다.
“앨번의 수도원장께서는 잘 지내고 계십니까?”
“예, 예…. 건강하십니다.”
“듈란 신관님이 학업을 중단하는 것에 매우 아쉬워하시더군요. 그래도 학술회에 참석하시는 건 당분간 의학 공부를 더 하기 위해 오신 건가요?”
“그, 그렇습니다. 아직 하이어 영주님이 정정하시니까요.”
부주교는 듈란의 학업적 열성에 대해 수도원장에게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은근히 그 쪽으로 가기를 더 기대했다.
부주교에게 작은 영지의 영주는 별 관심이 없는 상대였으나 의학의 길을 계속 걷는 신관이라면 입장이 좀 달랐다. 게다가 듈란은 9년 내내 수석을 차지한 인재였다.
“영지는 나중에 나이가 더 들어서 받아도 될 텐데요.”
“아직 고민하고… 있습니다.”
듣던 대로 말을 더듬는 버릇이나,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하는 태도 등은 영지를 다스리는 지배자의 길보다는 학자의 길에 더 어울려 보였다.
그래서 듈란이 학업을 중단한다 선언했을 때 수도원장과 부원장 다른 신관들은 전부 아쉬움에 고개를 저었다.
“그러시군요. 음, 그러고 보니 하이어 영주의 따님이 여기 기거하시는 중인데. 듈란 신관님과 약혼 이야기가 오고 갔던 사이 맞으십니까?”
“…맞습니다.”
부주교는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혹시….”
“생각하시는 그런 식의 파혼은 아, 아닙니다. 하지만 서로 알려지면… 불편할 테니, 비밀로 해 주십시오. 눈에 띄지 않게 머물고 싶습니다.”
듈란은 부주교가 차인 남자를 보는 눈으로 보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어렸을 때 이후로 캐런을 본 적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4년 전이었던가. 그때의 캐런은 발악을 하는 미친 아이에 불과했다.
나이가 들었다고 새삼스럽게 여인으로 볼 일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듈란 스스로도 원하지 않는다.
“지금 전… 그저 신의 종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듈란은 자신을 약간 가엾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부주교가 껄끄러웠다. 부주교는 듈란이 캐런에게 거절당하고도 그녀를 잊지 못해 쫓아온 어리석은 남자로 여기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상황이 그렇게 보인다는 것을 알기에 부정하지도 못하고 듈란은 입을 다물었다.
캐런의 상대가 누군지 확인하고 때에 맞춰서 약을 먹이면. 자신이 할 일은 그것으로 끝나겠지.
자신의 호기심만 충족하면 된다. 그뿐이다.
하지만 캐런이 누구를 선택했는지는 쉽게 알 수 없었다.
캐런의 생활은 대부분이 이셀라 에반스에게 맞추어져 있었다. 이셀라의 옆방에서 기거하며 그녀의 사소한 심부름을 하고, 그녀와 같이 외출하며 행동한다.
물건을 사러 돌아다니는 것이나 사교계에 얼굴을 비추는 것이나 심지어 신전에서 하는 봉사 활동까지 다른 남자와 함께하는 듯한 구석은 거의 없었다. 캐런이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은 시온 엘렉트라였으나 그는 캐런과 사이가 그다지 좋아 보이지도 않았다.
미색이 뛰어나니 길거리에서 그녀를 돕는 남자들이나 치근덕거리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아버지에게 소개할 수 있을 정도로 자주 만나는 남자는 없었다. 듈란은 캐런이 단순히 핑계를 대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
그리고 짜증 날 정도로 예쁘게 크긴 했다.
허리는 잘록했고 늘씬해진 몸이 성인 여성의 티가 완연했다. 피부는 우윳빛으로 빛났고 어두운 성전 안에서도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는 물결치며 그 고운 자태를 자랑했다.
단순한 거죽뿐이 아니라 태도 또한 어렸을 적과 전혀 달랐다. 캐런의 걸음걸이는 조심스러웠고 말투는 나긋했으며 얼굴에는 항상 미소가 감돌았다. 대성전 안에서는 금세 화려하게 아름다우면서도 단아한 캐런 하이어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
어릴 적 발악하고 듈란의 얼굴에 뜨거운 수프를 던지거나 목을 매달려고 하던 모습을 생각하면 기적에 가까웠다.
하지만 쓸모없는 아름다움이었다. 캐런은 어떤 남자에게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이셀라의 시중을 드는 것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캐런의 일상은 그냥 이셀라의 시녀였다.
‘내가 왜 여기에 있지?’
듈란은 한 달 만에 회의감이 들었다.
캐서린과 듈란과 영주는 캐런이 어느 남자를 만나는지, 누구와 사랑에 빠지고 어떻게 자식을 가질 것인지, 아니면 가지지 않을 것인지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누구의 시녀냐 동무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듈란은 캐런이 어떤 남자를 만나는지는 궁금했지만 이셀라 에반스와 캐런이 무슨 옷을 사느냐는 궁금하지 않았다. 캐런이 어떤 음식점을 가는지, 어떤 오페라에 관심이 있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가 할 일은 지극히 단순했다. 아이를 갖지 못하게 하는 것. 캐런 하이어가 영원히 살도록 하는 것.
하지만 캐런이 좀처럼 남자를 만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듈란은 계속 한구석에서 숨죽이면서 그녀의 모습을 하루하루 지켜보는 일상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눈 한 번 마주치지 않고.
그리고 듈란은 예전처럼 캐런의 식사에 약을 탔다. 캐런뿐 아닌 신전의 모든 사람들이 한층 경건해질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캐런이 숙소로 돌아오지 않았다. 듈란은 드디어 그날이 왔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
듈란이 지켜볼 때는 좀처럼 남자가 없는 것 같았지만, 이셀라에게 다른 남자를 보이기 싫은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듈란이 지켜보는 동안은 잠시 떨어져 있던 남자일 수도 있고. 그녀가 부친에게 보낸 편지에서 남자가 있음을 확인하지 않았는가.
이셀라와 캐런 둘 다 숙소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뻔하다. 둘 다 각자의 남자를 만나러 간 것이 분명했다. 듈란은 캐런에게 피임약을 먹였던가를 다시 생각했다. 분명 먹였다. 오늘 어떤 남자와 뒹굴어도 그녀는, 덤으로 에반스 가문의 여식도 자식은 생기지 않겠지.
“…새삼스레.”
듈란은 자신이 이미 아는 사실을 왜 이리 신경 쓰는지 알 수 없어서 기분이 나빠졌다. 캐런 하이어에게 남자가 있음을 아는데도, 그녀가 외박을 한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껄끄러웠다. 그리고 자신이 왜 불쾌해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더 기분 나빴다.
어떤 남자와 뒹굴고 있을까.
“…흥.”
듈란은 캐런이 들어오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의자에 걸터앉아 성서를 읽었다. 사실 상대가 누구인지 자신이 알아야 할 일은 아니다.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것 또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식을 낳지 못하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충분히 괜찮을 것이다.
듈란은 피임약을 향신료에 잘 섞어서 식사로 내는 레시피를 대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알렸다. 그들은 식사를 만들면서 자신들도 모르게 성전에 머무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식이 절대 생기지 않도록 잘 만들어 줄 것이다.
캐런이 머물 동안 먹은 약의 양을 생각하면 앞으로 1년간은 자식이 생기지 않을 터였다.
아이는 생기지 않을 거야.
그것으로 자신의 일은 끝났다. 캐런이 어떤 남자와 뒹굴든, 그것은 자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영원이다.
추잡스러운 생각을 떨어뜨리기 위해서 듈란은 성서로 눈을 돌렸다. 종이 위의 글씨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자신이 하는 행위는 이단자의 행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는 그에게 삶의 기준이 되었다.
영원, 이단, 순결, 진리….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젠장.”
하필이면 펼치는 구절마다 이 모양이다.
물론 성서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눈이 문제이다.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린 듈란은 성서를 덮었다.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손을 모아 눈을 가리고 한숨을 쉬었다.
“…하아.”
지금쯤 자고 있겠지.
듈란은 자신의 생각을 결국 억누르지 못했다.
침대에서는 어떤 표정을 할까. 어떤 식으로 상대를 부를까. 분명 천박하겠지.
신경 쓰지 말아야 하는데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10년 넘게 그녀의 임신과 출생을 신경 써서 그렇게 된 것이 분명하다. 임신을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성행위를 해야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자신이 이상해서가 아니다. 게다가 결혼하기도 전에 그러는 캐런이 더러운 것이다.
듈란은 그날 내내 잠들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다음날, 다다음날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듈란은 대예배가 이루어지는 동안 몸이 편치 않다는 핑계로 불참하고 이셀라와 캐런이 묵는 숙소로 들어갔다. 어느 방이 캐런의 방인지는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가 제일 먼저 확인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들어가는 여벌 열쇠정도는 예전부터 확보해 두고 있었다.
똑똑.
“…….”
역시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듈란은 열쇠를 구멍 안에 넣고 돌렸다. 낡은 문이 천천히 열렸다.
끼익.
숙소는 전부 비슷해서 자신의 방과 큰 차이가 없었다. 책상 하나, 옷장 하나, 침대 하나. 옷장 주변에는 사교계에 나가는 여성이니만큼 옷장에 채 집어넣지 못한 옷들이 더 놓여 있었다.
듈란은 옷 위를 손가락으로 쓸어 보았다. 그러고는 스스로도 음험한 기분이 들어 그만두었다. 옷 밑의 피부를 생각하는 것을 막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개를 젓고 다시 나갈 준비를 했다. 캐런은 그 뒤로 돌아오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뒤에 다시 들어오지 않았나 했지만 전날 입었던 옷이 없는 것을 확인하니 그대로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아직도.
“듈란 신관님,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친척으로서, 돌아오지 않은 것 같아 걱정이 되어서.”
“여신도들의 숙소니 아무리 신관님이라 해도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신전에서 일하는 잡역부였다. 그래도 궁색한 변명이 그래도 먹혔는지 더 이상 추궁하지는 않았다. 듈란은 뒤로 물러났다. 잡역부는 문을 닫더니 걸어 잠그고 옆방을 열었다. 그러고는 방 안에 있는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이 방을 쓰던 아가씨가 집으로 돌아가기로 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짐을 챙기는 중입니다. 계속 지켜보실 겁니까?”
옷가지들과 각종 장신구들, 금과 은과 보석으로 된 물건들을 아쉬운 눈으로 쳐다보면서 듈란을 흘겨본다. 그가 옆에 있지 않았다면 몇 개는 빼돌릴 것 같은 눈빛이었다.
“캐런 하이어… 의 짐은 챙기지 않습니까?”
“글쎄요, 전 이 방을 쓰던 이셀라 에반스 양에 대해서만 들어서.”
듈란은 잡역부가 이셀라의 짐을 전부 빼는 것을 그냥 멍청히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캐런 하이어는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그 다음날, 그 다다음날이 되어도 캐런은 짐에 손을 대지 않은 것 같았다. 이셀라처럼 누군가가 짐을 빼지도 않았으며 캐런이 돌아오지도 않았다.
“듈란 자네가 잘 몰라서 그렇지 여기서 머무는 젊은이들의 외박은 은근히 잦네.”
부주교에게 말을 해 보았지만 그냥 외박 중일 거라며 일축해 버렸다.
듈란은 자신이 어디까지 행동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방관해야 할 터인데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할까. 대성전의 책임자가 저렇게 괜찮을 것이라고 말을 하면 외부인인 자신이 먼저 나서는 것도 맞지 않았다.
정말 걱정이 되는 것인지 아니면 순전히 궁금한 것인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알 수가 없었다. 캐런 하이어의 소재를 알게 된 것은 일주일이나 더 지난 뒤였다.
일주일 뒤에 듈란을 누군가가 찾아왔다.
“듈란 로이드 신관님?”
“예, 예…. 그렇습니다.”
금발의 앙칼지게 생긴 여자였다. 그녀는 듈란을 모르지만 듈란은 그녀를 알았다.
캐런과 같이 지냈던 이셀라 에반스였다. 거부 에반스의 딸이며 거만했고 사치스러웠고 캐런을 하녀로 부리던 여자였다. 또한 하이어 영주가 될 그에게는 거북스러운 상대이기도 했다. 결국 듈란도 그녀에게 빚을 많이 지게 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셀라가 지금 그를 찾아올 이유는 없었다.
“대체 언제부터 수도에서 기거하고 계셨나요? 당신을 찾느라 퍽 힘들었사와요.”
“몇, 몇 주 전부터….”
“여기에 있는 줄 알았다면 한참 찾을 필요도 없었을 텐데…. 저와 캐런이 여기에 머무는 것도 아셨겠군요?”
“…….”
듈란은 추궁하듯이 묻는 이셀라가 거북스러웠다. 처음 만난 사이에 이렇게 추궁당할 일은 없었다. 듈란은 아직 하이어 영주가 아니었으며 이셀라 에반스는 베르딕 에반스가 아니었다.
“제가 왜 여기에 왔는지 전혀 모르시겠나요?”
“…짚이는 곳이 없, 없습니다.”
“여기는 왜 왔나요? 캐런 하이어와는?”
듈란은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이 일방적으로 훔쳐보긴 했다. 하지만 그것을 이셀라에게 들켰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은 화를 낼 수 있는 입장이다.
“…학술회에 참석하기 위해 올라왔을 뿐입니다. 캐, 캐런 하이어와는 어렸을 적 이후로 대화 한 번 한 적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지켜보기는 했지만. 일단 캐런과 대화를 제대로 하지는 않았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셀라는 석연치 않은 얼굴로 계속 듈란을 보고 있었다.
“정말 그런 사이라면 차라리 시온을 가리키는 것이 나았을 텐데.”
“무, 무, 무슨 소리신지….”
“…말 좀 안 더듬을 수 없나요? 정말로 듣기 어렵군요. 안 그래도 답답해 죽겠는데 말더듬이라니.”
“대, 대화가 싫으시면 나가셔도 괜찮습니다.”
듈란은 갑자기 만남을 신청하더니 신경질만 내는 이셀라와 있는 것이 불편했다. 듈란이 손으로 문밖을 가리키면서 일어나자 이셀라는 자신이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탁자에 내려놓았다.
“캐런 하이어가 여기에 있는 것을 당신이 몰랐을 것 같지 않네요. 그녀가 지목한 사람이 여기에 있다는 것도 이상하고, 당신의 태도도 이상해요. 대체 뭐가 문제인 것이와요?”
자신도 모르겠으니 그냥 나갔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셀라도 듈란도 정말로 대화를 끊고 나갈 생각은 없었다. 캐런에 관련된 일이다 보니 듈란은 이셀라의 말을 그냥 넘기기 힘들었고 이셀라 또한 듈란에게 할 말이 더 있었다.
하지만 이셀라는 그와 대화하는 것이 짜증 나고 답답했다. 듈란 같은 사람은 이셀라가 쳐다보기도 싫고 얽히기도 싫은 유형의 사람이었다. 음험하게 생겼고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가 과연 캐런을 도울까? 그를 보면 왠지 모르게 피부가 약간 간지러워지는 것 같았다. 그의 외모나 말, 그리고 그의 행적이 이상스레 께적지근하고 불쾌했다.
“…….”
대화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고 침묵이 돌았다.
“이셀라, 이야기는 끝났습니까?”
“시온 경. 듈란 신관님이 저와는 그다지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신 것 같아요.”
이셀라의 대화가 길어지자 말끔한 남자가 들어왔다. 이셀라는 시온에게 눈짓했다. 대신 말해 줘요.
시온이 약간 난감하게 웃으면서 들어왔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듈란을 보고는 알 만하다는 듯이 이셀라의 옆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십니까, 듈란 신관님.”
“…누구신지.”
“이셀라 양의 친우인 시온 엘렉트라라고 합니다. 캐런 하이어와도 친분이 있지요.”
“…….”
시온에게 캐런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나 이셀라의 덤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기에 듈란은 악수를 하려 내민 시온의 손을 어설프게 마주 잡았다.
“조만간 왕실에서 신관님에게 연락이 올 것입니다. 당신과 캐런 양의 결혼을 추진하기 위해서입니다. 귀즈 왕세자 전하가 그것을 바라시더군요.”
“…결혼?”
듈란 로이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행여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해 시온이 바로 쐐기를 박았다.
“그것이 뜻하는 바가 어떤 것인지는 당신도 아시겠지요.”
“…정부입니까.”
“그렇습니다.”
왕족의 정부. 정부의 남편.
말 그대로 허수아비 같은 남편이었다.
“신관님께서도 캐런 하이어 양의 친척이시라 들었습니다. 물론 도우시겠지요.”
“…지금 전.”
“당연히 도우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물론 그렇게 어려운 것은 없어요. 중요한 것은 다른 친구들이 함께할 테니까요. 하지만 알아는 두셔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시온 엘렉트라는 듈란에게 웃으면서 인사했다.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듈란은 시온이 나가고 나서 몇 시간 되지 않아서 왕실에서 온 신하에게 좀 더 제대로 된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귀즈 왕세자가 캐런 하이어를 정부로 삼고자 한다.
그냥 하루 이틀 가지고 노는 창녀가 아닌 정부. 지속적으로 옆에 계속 끼고 있고 싶다는 의도를 확실히 보였다. 캐런의 모친인 캐서린에게 실패했던 그 일을 다시 시도하려고 하는 것이다.
추문이 일고 부도덕하다 여겨도 이제 왕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 곧 왕위에 오를 귀즈 왕세자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루이스 왕세손의 친모인 왕세자비가 죽은 지도 오래됐기 때문에 비난할 명분도 없었다. 역으로 정부가 아닌 혼인을 하더라도 말릴 사람은 손에 꼽았다.
귀즈 왕세자는 캐런을 놓치려고 하지 않았다.
캐서린은 결혼을 빌미로 하이어 영지로 떠나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귀즈 왕세자는 똑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보였다.
결혼식은 수도에서 열릴 것이다. 성전에서 축도를 받고 그 뒤로 왕궁으로 들어가 축하를 받으며 머문다는 일정이 짤막하게 써 있었다.
“…언제 왕궁을 떠난다는 말은… 없군.”
듈란은 서신의 끝을 쓸었다. 귀즈 왕세자는 캐런을 왕궁에 들이고 다시는 내보내지 않을 것이다. 여타 다른 정부들이 그러하듯이.
“…왜 하필 나를….”
듈란은 캐서린에게서 귀즈 왕세자에 대해 자주 들었다.
그는 사람의 신체를 훼손하는 것에 취미가 있었다. 갖은 악행도 많았다. 하지만 캐서린은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듈란은 고개를 저었다.
캐런은 왜 자신을 가짜 남편으로 지목했을까. 자신을 찾아온 이셀라나 시온의 말처럼 자신을 구해 달라는 의미일까?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하지만 듈란은 캐런을 좀 더 알고 있었다.
캐런 스스로도 모르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캐런은 광증에 차 있어도 합리적으로 움직였었다. 약에 절여져 밤중에 일어나 정원에서 목을 매다는 시도를 할 때도 규칙이 있었다.
캐런이 자신을 지목했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듈란이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왜?
캐런은 이미 자신과 파혼하겠다고 선언했었다. 얼굴조차 보지 않겠다고 영주를 통해 말했다. 그런데 왜 자신을 가짜로나마 남편으로 삼겠다고 했을까?
도와 달라고?
자신이 버린 남자에게?
“시온 경, 이상하지 않나요?”
“무엇이 말입니까, 이셀라?”
이셀라는 시온의 팔을 잡고서 대성전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하늘까지 치솟는 고딕 양식의 대성전이었다. 하늘에 닿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담긴 공간은 장엄하고 웅장했다. 하지만 그래도 수도라는, 도시에 있는 공간이기에 넓이는 한정이 되어 있었다.
“시온 경이 여기에 산다면 여기를 다 둘러보는데 얼마나 걸리겠어요? 숙소나 준비 공간 다 포함하면요.”
“글쎄요…. 길어도 한 시간 이상은 걸리지 않겠군요.”
“그렇죠? 그럼 2주나 3주 내내 사는데 마주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일부러 피하려고 하지 않는 한 불가능하겠군요.”
“맞아요.”
이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캐런이 듈란을 지목하자마자 바로 하이어 영주에게 서신을 보내 듈란의 소재를 물었다. 하지만 그는 영지에 있지도 않았고 수도원에 있지도 않았다. 대성전에 있었다.
“이셀라, 원래 파혼 당한 남자는 부끄러워서 숨으려고 하기 마련입니다. 레이몬드 경도 그러셨잖습니까.”
이셀라가 듈란에 대해 말하는 것을 알고 시온이 그렇게 말했지만, 이셀라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 2주나 3주였으면 뭐라고 안하겠어요. 하지만 하이어 영주는 저자가 떠난 지 몇 개월이 지났다고 했다구요.”
“음…. 그러니까 신관님이 거짓말을?”
“네.”
이셀라는 닭살이 돋은 자신의 팔을 한 번 쓰다듬고는 걸음을 빨리했다.
“몇 주가 아니라 몇 달 내내 같은 공간에 있었는데 우리는 저자가 여기 있는지도 몰랐어요. 기분 나쁘지 않나요? 저 사람이 과연 캐런을 도울까요?”
캐런이 듈란 로이드를 자신의 남편으로 지목했다. 그것은 이셀라나 시온뿐 아니라 듈란에게도 예상 밖의 이야기였다.
“듈란 로이드를 남편으로 정하겠어요.”
방 안에 홀로 남은 듈란은 의자에 앉아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캐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시온 엘렉트라와 이셀라 에반스는 듈란이 캐런의 친척이라는 것을 들며 그녀를 도우라고 했지만, 캐런과 자신의 사이는 일반적인 혈연관계라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파혼한 관계다. 그렇다고 통상적인 연인 관계라고 보기에는 스스로도 석연치 않았다.
‘무슨 생각이야.’
캐런은 반복하는 삶에 대해 알고 있으며, 듈란이 자신의 기억이나 상황을 조작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더이상 기억을 건들지 말라는 말과 함께 파혼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자신을 다시 남편으로 부르는 걸까. 그것도 허수아비 남편으로.
듈란은 캐서린에게서 귀즈 왕세자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었다. 귀즈 왕세자는 타고난 성정이 악한 사람이었으며 여러 번 생을 거듭한 캐서린도 감당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캐런은 왜 그런 사람의 정부가 되었다는 말인가?
캐서린의 딸인 캐런이 귀즈 왕세자의 정부가 되었다는 것부터 희대의 스캔들이었다. 캐서린이 귀즈 왕세자와 짧게나마 연인 관계였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딸인 캐런을 정부로 들이다니, 입에 올리지 못할 이야기들이 수없이 오고갈 것이 뻔했다.
아버지에게 소개해 드리고 싶은 남자가 있어요.
그것이 설마 귀즈 왕세자란 말인가?
캐런은 귀즈 왕세자를 영주에게 소개해 주겠다는 말이었을까?
지나치게 저질이었다. 남에게 이러한 생각을 들킨다면, 그것만으로도 크게 비웃음을 당하는 걸 넘어 혐오스러운 시선을 받을 만한 일이었다. 자신의 어머니와 연인 관계였던 중년 남자를 애인으로 삼고, 그것을 자신의 부친에게 소개하다니. 일반적인 사람의 생각이 아니었다.
하지만 캐런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을 듈란은 안다.
극도의 자극을 추구하는 걸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는 혼돈 속에서도 자신이 할 일을 알았다. 듈란은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캐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은 이 제안을 거부할 수 없다. 그것이 세상이 비웃는 일이든, 어떤 구렁텅이로 빠지는 일이든, 함정이든. 자신은 거부할 수 없었다.
그리고 듈란은 그 감정을 호기심이라 이름 붙였다.
레이몬드는 숨이 끊어진 캐런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깊은 한숨을 쉰다. 눈물은 말라서 나오지 않는다. 이것이 현실이다.
이제 끝이다. 모든 것을 차단하고 둘이서 보낸 이번 생에서 자신과 캐런의 인연은 끝났다. 자신이 살아 있는 한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여느 사람들이 그러하듯 죽음은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캐런.”
하지만 다른 이들과 레이몬드는 다르다. 그는 평생을 그리워하며 여생을 살 필요가 없다. 죽으면 바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녀를 만날 수 있다.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그는 죽으면 다시 시작할 것이고,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다. 손가락 하나를 당기기만 하면 가능하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바로 머리에 총을 쏠 수는 없었다.
이 남자 때문이다.
“신관님.”
레이몬드는 기절한 듈란을 내려다보았다. 발로 툭, 쳐 보았지만 고통이 커서 기절했는지 좀처럼 그는 눈을 뜨지 못했다. 발톱을 먼저 다 뽑고 하반신을 거의 으깨어 버렸지만 그래도 그는 죽지 않았다.
레이몬드가 세심하게 숨이 멎지 않도록 중간 중간 보살펴 주었기 때문이다. 듈란이 빨리 죽으면 레이몬드만 손해였다. 그가 털어놓은 정보는 레이몬드에게 부족했다.
“드디어 이번 생에 당신과 다시 만났는데, 소득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듈란이 무슨 짓을 했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지만 그가 정말 어디까지 아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몰랐다. 그리고 지난 생애서 그는 레이몬드와 만나기도 전에 캐런에게 몇 번이고 죽었기 때문에 레이몬드는 그를 손에 넣을 수 없었다.
캐런은 연달아서 일찍 숨을 거두더니 다섯 번째가 되서야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찾았다. 레이몬드는 드디어 캐런을 만났고, 마침내 듈란도 손에 넣었다.
새벽 미사를 준비하던 듈란의 머리를 내려쳐서 끌고 오는 건 레이몬드에게는 신발 끈을 묶는 것처럼 일상적이고 쉬운 일이었다.
제일 먼저 한 것은 그의 다리 힘줄을 잘라 내는 일이었다. 혀를 자를까 생각했지만 그래 봤자 성대가 있는 한 소리를 낼 수 있기에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으로 만족했다.
혀를 깨무는 것으로는 쉽게 자살할 수 없다는 것을 그도 레이몬드도 알았지만, 레이몬드는 기분전환으로 그의 생니를 몇 개 뽑았다.
“신관님.”
레이몬드는 듈란의 머리채를 잡아 들어올렸다. 앞니가 하나 없는 듈란이 바보 같아 보인다고 생각했다. 얼굴에는 피가 말라붙어서 지저분해 보였다.
“당신과 많은 대화를 하고 싶었습니다. 지금의 당신은 절 잘 모르시겠지만, 우리는 여러 번 만났습니다.”
“빨리….”
듈란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우습게도 말더듬은 이빨이 몇 개 뽑히면서 나아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만큼 발음이 새서 알아듣기는 여전히 어려웠다. 레이몬드는 혀를 차면서 듈란의 머리채를 다시 잡았다. 잘 듣기 위해서였다.
“죽여주십시오.”
“제가 왜 그런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까?”
레이몬드는 듈란의 귀를 강하게 잡아 쥐어짜듯이 휘었다.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뜯어 버릴까 생각했지만 이미 여러 군데가 상했기 때문에 참았다.
“조금 전에 캐런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당신의 친척이자, 원래 약혼녀이자, 제 연인인 캐런 말입니다.”
“…어, 왜… 날….”
듈란은 말을 멈췄다. 그리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고통이 심한 것인지 아니면 캐런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레이몬드는 기다렸지만 듈란은 더 말을 하지 않고 레이몬드를 올려다보았다.
왜 날, 뒤에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왜 나에게 이런 짓을 하느냐, 아니면 왜 의사인 내게 보이지 않았느냐. 하지만 알 수 없다.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죽을 겁니다.”
“…….”
“끝을 낼 방법을 알려 주지 않겠습니까?”
자비를 베풀어 주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듈란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다, 당신에게… 말한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시군요.”
고문은 약한 것부터 강한 것까지 차등을 두어 효율적으로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을 콧구멍에 넣고 약한 전기를 흘린다거나, 지속적으로 가는 쇠줄을 목 근처에서 살살 문질러 피부에 생채기를 내는 것은 몸은 크게 상하지 않지만 사람의 정신을 쥐고 흔들기에 효과적이다.
하지만 약한 고문만으로는 부족하다. 사람의 몸은 관성이 있어서, 신경쇠약적인 고문 방법은 오래 쓰면 무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은 망치와 갈고리, 칼이 필요하다. 직접 때리는 것은 금방 피곤해진다. 연장이 있으면 효과적으로 폭력을 가할 수 있다.
그리고 순수히 정보만을 뽑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수도 필요하다.
복수심을 해갈하지 못한다면 자신은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정말 모르는 걸까?’
레이몬드는 그냥 붙어 있는 장식물에 가까워진 그의 다리를 보았다. 잘라 내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듈란은 레이몬드의 손에 잡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눈물을 흘리며 자비를 구했다. 레이몬드는 그를 내려다보며 생각보다 빨리 답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캐런이 죽은 오늘까지 듈란은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정보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듈란을 고문하며 몇 가지는 들을 수 있었다.
임신을 하면 풀려날 수 있다는 사실 같은 것.
캐런이 머뭇거리면서 자신이 불임이라 풀리지 못하는 것 같다고 고백했을 때도 놀라지 않았다. 이미 듈란에게서 얻은 정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것이 없었다.
레이몬드는 고문하는 1여 년의 시간 동안 고민했다.
‘지금’의 이자는 정말 모를지도 모른다. 이 시점의 그는 정말 아는 것이 적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고문을 해도 알아낼 수 없다면. 자신이 하는 행동이 그냥 분풀이 이상이 되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신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퍼억.
“…젠장.”
레이몬드는 실톱을 내려다보았다. 톱날 사이에 지방이 붙어서 제대로 들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지방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뼈다귀 같은 몸인데도 톱날 사이에는 붙어서 피가 흐르고 흘렀다. 그것이 그가 살이 있는, 살아 있는 사람임을 보여 주었다. 레이몬드로서는 불편한 일이었다. 새로운 톱날이 필요했다. 듈란의 입에서는 거품이 흐르고 있었다. 그도 치료가 필요할 것이다.
“잠시 쉬고 계십시오. 신관님.”
그는 연장을 갈기 위해 방을 나섰다.
레이몬드는 창밖의 정원을 보면서 캐런의 남겨진 몸을 생각했다. 몸은 그냥 남은 것에 불과하다. 그대로 두면 썩어 백골이 될 터이니 어떻게든 처리를 해야 한다. 백번 넘게 그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시체를 끌어안고 영원히 죽음을 슬퍼할 생각은 없었다.
“역시 화장이 좋을까요? 가장 깔끔하니 말입니다. 아니면 매장도 괜찮아요. 가족묘에 안치해두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같이 묻히기에는 좀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정식으로 결혼한 것은 아니라… 뭐, 일단 묘비라도 세워 두면 그걸 뽑기야 하겠습니까만은.”
레이몬드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레이몬드는 입을 다물었다. 옆에는 아무도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옆에 있었는데.”
기억을 되찾은 후부터 진짜 캐런을 만나기 전까지, 레이몬드는 캐런의 기억과 환상에 시달렸다. 옆에서 캐런은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과거에 했던 말을 반복했다.
“그것 봐요, 잊을 거라고 했잖아요.”
가끔은 했을 것 같은 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결국 그 모든 것은 헛것이었지만.
일상생활을 하면서 약간 불편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그것 또한 즐기기 시작했었다. 그런 자신의 정신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자각했지만, 그렇다고 치료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캐런의 환상을 사랑했고 거기서 위안을 얻었다.
“매장한 후에 나무를 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장미가 좋을까요. 붉은 머리니까 장미는 너무 식상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젠장.
레이몬드는 입을 다물었다. 환상이 보이지 않는다.
스스로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이젠 괜찮을 것이다. 캐런을 만났다. 그녀는 지금 비록 옆에 없지만 캐런은 또다시 빠른 죽음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그녀를 위해 이번 생애에서 마저 준비를 하고 넘어가야 한다. 환상은 필요 없다. 기억이면 충분하다.
레이몬드는 톱날을 갈아 끼우고, 망치를 닦아 냈다. 그리고 소염제와 진통제를 챙기고 다시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우선은 계속해서 끄집어내 봐야 한다. 캐런은 눈을 감았으니 좀 더 본격적으로 고문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
레이몬드는 열려 있는 문에 소리를 내지 않고 다가갔다.
방 안에는 듈란이 있었다.
그는 걸을 수가 없다. 그의 다리는 레이몬드가 다 부숴 버렸으니까. 하지만 듈란은 움직였다. 멀리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바닥에 피와 고름이 진하게 남아서 그의 행적을 보여 주었다.
그렇게 곤죽으로 만들었는데 아직까지 움직일 기력이 남아 있다는 것에 레이몬드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듈란은 따로 훈련을 받지 않는 일반인보다도 말랐다.
악력은 생각보다 있는 편이었지만 그것도 고문하는 몇 개월간 한없이 약해졌다. 아직 자신이 그를 제대로 제압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듈란이 그만큼 움직이려고 기력을 자아냈거나. 하지만 그가 움직여 간 곳은 레이몬드의 예상 밖이었다.
듈란이 방 밖으로 도망치려고 했다면 이해했을 것이다. 사람이 고문을 피해 도망가고자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자신을 피해 달아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할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살고 싶어 한다.
듈란이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려고 했어도 이해했을 것이다. 레이몬드는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해 듈란의 숨을 붙여 놓았지만 그의 몸에 수없이 많은 영구적인 손상을 남겨 놓았다. 그는 전부터 차라리 죽여 달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그가 기어간 방향은 창문도 문도 아니었다. 다리를 쓰지 못하기 때문에 팔로 기어서. 손톱은 전부 뽑혀 있었고 손가락도 마디마디를 잘라 놓아 성한 손가락은 양손을 합쳐서 네 개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손으로 기어서.
캐런에게 가고 있었다.
“…크, 윽.”
듈란은 레이몬드를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레이몬드는 그를 밟아 저지시킬까 했지만 이내 숨을 죽이고 그를 지켜보았다. 어차피 캐런은 죽었다. 그가 무슨 짓을 하는지 하나라도 확인하고 알아내야 한다.
왜 이미 죽은 캐런에게 저렇게 기어가는 것일까.
듈란은 기어가면서 고통이 심한지 몇 번이고 신음을 삼켰지만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레이몬드의 걸음으로는 몇 초 만에 도착할 거리였지만 듈란에게는 한없이 먼 거리였다.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고 기어서 캐런의 시체 곁에 도착했다.
그러고선 금화 하나를 남은 손가락 두개로 꺼냈다.
“하, 하아….”
어디서 난 것일까. 용케도 아직까지 레이몬드에게 들키지 않은 물건이었다. 듈란은 그것을 죽은 캐런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미 죽은 몸이라 손에 쥐어지지 않는 것을 남은 손가락으로 힘을 주어 쥐게 했다.
죽은 그녀의 손이 굳어가며 단단히 금화를 쥐었다.
레이몬드는 더 이상 듈란이 캐런에게 손을 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지?”
듈란은 레이몬드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에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레이몬드는 듈란을 제치고 그가 캐런의 손에 쥐여 주려 한 금화를 뺏어서 들여다보았다. 별다른 것이 없는 평범한 금화였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건가.”
“…그냥… 장례, 절차일 뿐….”
장례식에서 죽은 사람에게 돈을 쥐여 주는 것은 자연스러운 절차였다.
사람들은 죽음 이후 망각의 강을 건넌다고 믿었고, 명복을 빌며 그를 위한 여비를 시체의 손에 쥐여 주곤 했다. 이를 포함하여 장례의 전반을 주관하는 것이 신관의 일이지만, 레이몬드는 이것을 듈란이 한다는 것이 불쾌했다.
그건 단순히 자신의 연인에게 다른 남자가 손을 대서 느끼는 불쾌함과는 다른 감정이었다. 오랜 세월이 만든 증오와 혐오가 레이몬드의 피부 위를 기어 다녔다.
“방금 전에 무엇을 하셨습니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말, 그저… 장례를….”
“장례라니, 당신이 뭐라고….”
캐런이 조금 전에 숨을 거두었다.
처음도 아니었다. 백 번 넘게 숨을 거두었다. 그저 한 번 죽었다면 다시 살아날 것을 축복할지도 모른다. 다시 만남의 기회가 있음에 기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캐런은 너무 자주, 너무 많이 죽어 왔다. 삶을 매듭짓지 못하고 백 번을 되살아난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그리고 이번 생에서 다시 한번 캐런은 확실하게, 이것이 저주라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 주었다. 그녀의 죽음과 부활은 축복이 아니었다.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여러 번 죽을 뿐이었다. 캐런의 죽음은 강제된다.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거나 식사를 조심한다고 피할 수 있는 죽음이 아니었다. 그날은 절대로 넘을 수 없다.
듈란 역시 캐런의 저주를 알고 있었다. 어째서 그녀의 손에 금화를 쥐여 준 걸까. 장례라는 그의 변명이 우스웠다. 우습다 못해 화가 났다.
“우리가 아직까지 이렇게 죽는 이유가.”
“크, 아, 아악!”
“당신 때문인데.”
레이몬드는 듈란의 배를 걷어찼다. 그러자 듈란이 속에서 피를 게워 냈다. 먹은 것이 없어서 안에서는 멀건 위액만이 나왔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더러웠다.
듈란의 눈가에는 눈물과 피가 맺혀 있었고 입가에도 더러운 것들이 묻어 있었다. 그의 모습은 의연하거나 대단해 보이지는 않았다. 듈란은 계속되는 고문에 본인의 약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그래서 더 역겨웠다. 신념을 가지고 입을 다무는 모습이라도 보여 줬다면 그의 심지에 박수라도 보내 줬을지도 모른다. 그는 주변을 에두르는 정보만을 뱉어 낼 뿐, 레이몬드가 원하는 제대로 된 답을 주지 않는다.
레이몬드는 캐런의 옆에 그를 데려다 놓으면서, 혹시나 그가 자신의 죄를 보고 참회하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자신의 죄를 확인하기를 바랐다. 캐런을 동정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듈란은 죽은 캐런을 보고도 안타까워하기보다는 장례 절차라는 말로 캐런에게 또 무언가를 저지르려 했다. 캐런을 보며 슬퍼하기보다는 레이몬드의 발길질에 고통스러워했다. 레이몬드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이제까지 행해 온 악행들이 자신의 죄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일까.
“방금 전에 동전으로 정확하게 뭘 하셨습니까?”
“정, 정말로 별것… 아닙니다.”
“그건 제가 판단하겠습니다.”
듈란은 망가진 다리 대신에 팔로 기었다. 도망가려는 건가 싶었지만, 움직이지도 못하는 다리로 어디까지 가나 싶어 말을 걸지 않고 지켜보았다. 하지만 듈란은 문 쪽으로 가지 않았다. 자살이라도 시도하려는 듯이 창문께로 이동했다.
죽음이 모든 것을 해결하지는 못한다. 죽지 못하게 만드는 것 역시 고문의 한 종류다. 레이몬드는 기어가는 듈란의 앞을 막고 이야기했다.
“지금부터 남은 손가락 중에서 마디가 꽤 성한 것부터 다시 잘라내겠습니다. 빨리 말하시면 괜찮지만 아니면… 전부 잘리겠군요.”
“정말로 별… 아, 아악!”
텅.
듈란의 눈이 돌아갔다.
“기절하시면 안 됩니다. 말을 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문은 계속되었다. 기절하려는 기색이 보이면 멈추고, 너무 피를 많이 흘리면 지혈해 주고, 그러다가 피가 멎으면 다시 시작하고. 레이몬드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해답을 위해 악귀와도 같은 짓을 계속했다.
“흐, 윽…. 금, 금화 자체는 별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러니까… 캐서린, 캐런의 어머니에게서 들은 대로… 그러니까… 위안을… 주기 위해….”
듈란에게 몇 번의 고문을 더 가한 끝에 금화의 의미를 알아낼 수 있었다.
금화 자체는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캐런에게는 중요한 물건이었다. 캐런이 다시 산다는 증거물이었다. 또한 듈란에게는 회귀의 확신을 주는 첫 번째 물건이었다.
“손가락 세 마디가 잘린 것치고는 대단치 않은 진실이군요. 희생한 것이 아까워서라도 엄청난 것이었으면 했는데요.”
”…….”
레이몬드는 자신의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붉은 피를 계속해서 보니 머리가 어지러운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 아십니까, 신관님?”
”…….”
“전 기억이 살아나면서 당신에 대해서도 좀 더 많이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확실한 건 지금 당신이 순수하게 캐런이 겪을 정신적인 혼란을 걱정해서 쥐여 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 아닙니다.”
“그렇다면 기억을 못할 다음 생애의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선물이었겠군요.”
레이몬드는 듈란을 내려다보았다. 듈란은 기억을 못한다.
하지만 이 고문도 기억 못하리라 생각하니 아쉬운 점이 많았다. 가능하다면 평생 고문해서 다음생의 그가 버티지 못하고 진실을 계속해서 털어놓으면 좋으련만.
고문을 하다 보면 듈란의 정신은 결국에는 망가질 것이다. 약해진 몸이 죽어 버리면 다음 생의 듈란은 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깨끗한 몸과 정신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레이몬드나 캐런과는 다르게.
그것이 레이몬드는 참을 수가 없었다.
“당신은 계속해서 도망갈 구석을 만들어 놓는군요. 죽음이든, 기억이든….”
“그만….”
“부탁합니다, 신관님.”
이제는 슬프기까지 한 좌절이 몰려 들어왔다. 레이몬드는 톱 대신 송곳을 들었다. 그리고 듈란의 왼쪽 눈가에 가져다 대면서 공손하게, 간절하게 말했다.
“정말로… 부탁드립니다.”
부디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송곳이 듈란의 한쪽 눈으로 향했다.
“레이몬드 경, 주무십니까?”
레이몬드는 눈을 떴다.
그리고 어지러운 시야를 바로잡기 위해 몇 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어지럽다. 피 냄새, 고름 냄새, 화약 냄새. 아니, 더 이상 나지 않는다. 자신이 있는 곳은 테스 대저택이 아니다. 지금 옆에 있는 것은 듈란 신관이 아닌 시온 엘렉트라다.
자신은 또다시 살아났다.
“지금… 그러니까.”
그래서 지금 해야 하는 게 뭐지? 지금은 전쟁 중인가? 아니 내가 은퇴했던가? 삶을 반복하면서 레이몬드는 자신이 어느 시점에 있는지 종종 헷갈리곤 했다.
레이몬드는 상반신을 일으켰다.
“괜찮으십니까?”
“…빈말로라도 차마 괜찮다고 하기는 어렵군.”
“이런 상황이지만 그래도 잠은 주무셔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자네는 너무 잘 자서 문제야. 그러니까 졸다가 총에 맞아 죽지. 장소는 구분하라고, 시온 경.”
“예?”
“…미안하군. 잠이 덜 깼어.”
지금의 시온은 건강하고 멀쩡하다. 레이몬드는 과거의 시온 엘렉트라를 생각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시온 엘렉트라는 항상 부와 명예를 좇았지만 평민인 그에게 그것은 환상처럼 먼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귀부인들을 쫓아다녔다. 그렇지만 그의 성격은 욱하는 기질이 있어서 원한을 자주 샀고, 경솔하게 움직이다가 몇 번이고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그는 서른이 되기 전에 반드시 죽었다.
“오래오래 살게, 시온 경. 폭탄 조심, 총 조심, 여자 조심.”
“레이몬드 경, 이번에 큰일이 닥친 건 알지만… 좀… 올해 들어서 내내 이상하신 거 아십니까?”
시온 엘렉트라가 그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스스로가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 아니 약간 부끄러워졌다. 최대한 정상적으로 살려고 노력해도 계속 이렇게 문제들이 불거지는 모양이다. 레이몬드는 캐런이 보고 싶었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서로밖에 없었다.
“냉수부터 드시죠.”
“그래.”
레이몬드는 머리를 흔들고는 물을 들이켰다. 목을 타고 물이 넘어가자 정신이 돌아왔다. 과거의 기억을 머릿속 한구석에 갈무리하자 최근의 기억들이 다시 떠올랐다. 지금 자신은 또다시 시작했다.
모든 삶은 특별하지만 이번 생은 조금 더 다르다.
레이몬드는 시온 엘렉트라의 목에 걸려 있는 가는 사슬 목걸이를 보았다. 저 목걸이에는 반지가 걸려 있다는 것을 안다. 시온과 이셀라가 나누어 가진 것이다.
시온은 상황이 좋지 않기에 레이몬드에게 자초지종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레이몬드는 지나가면서 언뜻 보기만 해도 시온이 가지고 있는 반지가 누구의 것인지 알았다. 이셀라는 이번에 캐런을 구하고자 하였다. 지난번 삶에서 베르딕이 다른 면을 보여 주었던 것처럼.
레이몬드는 이번 생이 또다시 과거의 꿈처럼 사라질 것이 불쾌했다. 그런 경험은 더 이상 겪고 싶지 않았다. 이번 생애에서 이셀라와 캐런은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일이고, 시온은 더 오래 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레이몬드는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아직 젊은 청년의 얼굴이었지만 역시 자신의 눈에는 노인과도 같은 흔적이 보였다. 레이몬드는 거울 너머에서 정말 어리고 풋내 나는 시온을 본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미래가 필요하다.
“그나저나 무슨 일인가?”
시온이 레이몬드에게 어깨를 약간 으쓱이면서 대답했다.
“듈란 신관님이 협조하겠다는 전갈을 보내셨습니다. 좀 의외긴 하더군요.”
다행인 일이다. 레이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듈란은 레이몬드에 대해서도 모르고 캐런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그는 의심스러워도 걸어 들어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야 말로 끝을 낼 것이다.
캐런은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 긴 인생을 살면서도 본 적 없는 화려한 모습이었다. 레이몬드는 캐런에게 돈을 아끼지 않았고, 그 외에도 여러 나이 많은 귀족들의 애첩 놀이를 하면서 갖은 호사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왕족의 정부는 차원이 달랐다.
금과 은이 세밀하게 수놓아진 은색 드레스 천은 노출이 많은 디자인이었지만 성적인 느낌보다는 압도적인 화려함에 더 질리게 만드는 옷이었다.
블루 다이아를 작은 다이아들이 감싸고, 또 그 장식이 목뿐 아니라 어깨와 가슴까지 휘감았다. 셀 수 없이 많은 보석들이 드레스 전체를 뒤덮고 있어 천과 보석의 비율이 거의 동일한 수준이었다.
금으로 세공한 장미들이 가슴팍과 팔목에 달려 있었고, 진주 가루는 그저 옷의 빛을 더하기 위해서 가볍게 얹었다. 움직일 때마다 진주 가루와 금가루가 떨어진다. 드레스 뒤를 쫓아다니면서 떨어지는 것만 주워도 큰돈이 될 거라고 생각되는 옷이었다.
귀걸이 또한 묵직한 보석이 매달려서 귓불이 얼얼할 지경이었고 머리에는 목과 가슴을 감싼 것들과 같은 디자인의 블루 다이아와 다이아몬드, 진주들이 잔뜩 얹어져 있었다.
‘목 부러지겠네.’
캐런은 이셀라가 아끼던 목걸이의 두 배는 될 법한 무거운 장신구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이셀라의 취향도 노골적이고 화려해서 천박하다는 손가락질을 받았는데 귀즈 왕세자의 취향과 비교하면 그녀는 소박한 수준이었다.
그가 지난번에 선물한 옷도 상당히 고가였지만, 이 옷과는 비교되지 않았다. 그것은 좀 더 은밀한 느낌을 주었지만 이것은 흡사 광고용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여자가 왕의 정부라고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그런 의도를 가진 화려함은 눈길을 사로잡는 것을 넘어 위압감마저 뿜어냈다.
이전 생에서 그가 선물한 옷은 취향이 구식이라 촌스럽게 느꼈지만 이렇게 보석 덩어리가 되고 나니 취향을 논할 수준이 아니었다. 디자인을 평가할 새도 없이 그저 보석 덩어리인 것이다.
이 정도면 단순한 사치를 넘어 드레스 그대로 지방 영지의 1년 치 예산이다.
“휘이.”
캐런은 거울 속 자신을 보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평생 놀고먹을 수 있는 양이 아니라, 도망갔다가는 어디서도 처분을 못해 줄 만큼 어마어마한 무게였다.
“여자로 태어나서 한번 이 정도는 걸쳐 봐야지.”
“괜찮은 생각이야.”
“…오셨어요, 전하.”
“그래, 역시 어울린다고 하고 싶지만…. 꽤나 무거워 보이긴 하는군. 덜어 주련?”
“아니에요, 기뻐요.”
“그래.”
귀즈 왕세자는 캐런의 미소를 보면서 천천히 캐런의 뒤로 돌았다. 태를 감상하려는 것이다.
“캐서린도 이 정도까지는 걸쳐 본 적이 없어…. 죽은 전 왕비마저도. 이 나라에서 너만큼 비싼 여자도 없을 것이다. 기분이 어떤가?”
캐런은 웃었다.
“당연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캐런은 귀즈 왕세자에게 속삭였다.
“제가 전하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으니까요.”
제가 당신의 아이를 낳아 드릴게요. 루이스 왕세손이 아니라. 진짜 당신의 아이를.
루이스 왕세손의 첫 번째 기억은 다섯 살의 여름날이었다.
그전의 기억은 너무 어렴풋해서 기억에 남지 않았다. 기어 다니던 날이나 처음 옹알이를 하던 때의 기억이 나지 않는 것에 억울해한 적도 있었지만, 그건 루이스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서 오려무나, 루이스.”
“폐하! 제가 보낸 것 보셨어요?”
“그래, 다 봤단다.”
다섯 살의 나이, 처음으로 글을 쓰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은 날이었다. 루이스의 첫 기억에서도 할아버지는 이미 노인이었다. 새하얗게 센 눈썹과 수염을 가진 왕은 자신의 어린 혈육을 반겼다.
“루이스, 이 편지를 전부 다 네가 썼다고?”
“네, 폐하.”
루이스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안부를 묻는 평범한 편지였지만 자신이 처음으로 쓴 편지였다. 그리고 무려 열 줄이나 되는 편지였다.
“허…. 유모가 도운 것이 아니지? 기사들이 대신 써 준 것도 아니고?”
“혼자 다 썼습니다.”
“쓰느라 힘들었겠구나.”
“전 배우는 것이 좋아요.”
다부진 대답에 왕이 허허 웃으면서 수염을 쓰다듬었다.
“장하구나. 글씨에 힘이 있는 것이 아주 노력을 많이 한 게 보이는구나. 앞으로도 계속 열심히 하거라.”
“감사합니다, 폐하.”
환하게 웃는 루이스 왕세손을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왕은 대주교에게 말을 건넸다.
“왕세손이 저리 어릴 때부터 학업에 관심이 깊으니, 참으로 기분이 좋구려.”
“축하드립니다, 폐하.”
“대주교께서도 결혼을 해서 자식을 봤으면 좋았을 것을.”
“허허, 폐하. 전 교단과 혼인한 몸이옵니다.”
종교는 사제들의 결혼을 금하지는 않았지만, 가정이 있는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가 어려웠다. 추기경부터는 전부 미혼이거나, 최소한 자식들을 사생아로 만들어 놓았다. 대주교도 사생아가 있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왕의 눈을 피하며 난처하게 웃었다.
“그래, 루이스. 잘했다는 상으로 무엇이 가지고 싶으냐. 네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구해다 주마.”
루이스는 고개를 숙이고 고민했지만 딱히 가지고 싶은 것이 없었다. 먹고 싶은 것이나 보고 싶은 것이나 하고 싶은 것은 뭐든지 이미 할 수 있었다.
“제 모든 것이 할아버지의 것이니 필요 없습니다.”
“정말로? 얘야, 이런 기회는 매일 오는 것이 아니란다.”
조숙하게도, 정치적으로도 들릴 수 있는 말에 왕은 재밌다는 듯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매일 오지 않나요?”
다섯 살 소년이 당황하자 왕은 바로 자신이 루이스를 너무 정치적으로 봤음을 깨달았다. 노인은 손을 내저었다.
“매일 오지, 암…. 그래도 원하는 것이 없느냐? 사람은 받고 싶어 하는 마음만큼 주고 싶어 하는 마음도 있는 법이란다.”
“폐하는 제게 선물을 주고 싶으신 건가요?”
“그래.”
루이스 왕세손은 계속해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그럼 다음 성축일에 같이 책을 읽어 주세요.”
그리고 그 대답은 왕의 기분에 아주 적절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마. 그리고 이건 앞으로 계속 열심히 공부하라는 의미로 주는 선물이다.”
금으로 만든 만년필이었다. 다섯 살 루이스 왕세손에게는 그냥 좀 멋진 필기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그것이 왕이 줄곧 서명할 때 쓰던 것임을 눈치챈 대주교는 약간 걱정하며 참견했다.
“지나치게 호사스럽지 않습니까?”
“불만인가?”
“아닙니다, 폐하.”
왕이 서명할 때 쓰는 필기구를 선물했다. 자신의 아들이 아닌 손자에게.
대주교는 눈을 내리깔고 어린 왕세손에게 자신도 고개를 숙였다. 어찌 되었든 신분의 차이를 넘어 자신은 왕과 알고 지낸 지 60여 년이 넘는 친구였다. 왕의 심정은 짐작할 만했다. 귀즈 왕세자의 행태는 대주교에게도 알음알음 들렸으니까.
왕이라 할지라도 자식은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었다.
“저도 선물을 하나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대주교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어서 왕세자가 크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
그날은 왕부터 대주교, 공후백작과 유모들 호위 기사들이 하나같이 일부러 호들갑을 떨면서 그에게 칭찬을 퍼부었기 때문에, 루이스 왕세손은 그날 다른 아이들이 그러하듯이 아주 우쭐해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조금 비쌀 뿐인, 그저 필기구라고 하더라도 다섯 살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신나는 법이다. 루이스 왕세손은 만년필을 들고 팬케이르 후작이 하던 펜 돌리기를 시험해 보고 있었다.
후작은 턱을 괴고서 심심할 때면 손으로 펜을 휘릭휘릭 돌리고는 했는데, 그것이 루이스 왕세손의 눈에는 퍽이나 멋있어 보였던 것이다.
“음….”
하지만 좀처럼 성공하지는 못했다. 여물지 못한 손에서 계속해서 펜은 굴러 떨어졌다. 루이스가 일곱 번째 떨어뜨렸을 때는 책상 너머로 넘어가 데굴데굴 굴러가 버리고 말았다. 아, 루이스는 그것을 주우려고 일어섰다.
펜이 굴러가다가 멈추고, 루이스는 그것을 주우려고 엎드렸다. 하지만 손이 닿기 전에 그것을 먼저 낚아채는 손이 있었다.
“이게 뭐지?”
귀즈 왕세자였다.
루이스 왕세손의 아버지. 하지만 루이스는 할아버지인 왕에게 했던 것처럼 웃지 못했다. 귀즈 왕세자가 만년필을 주워 살펴보았다. 금과 다이아로 세공되어 있는 펜대에는 왕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귀즈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이름을 읽었다.
“이건… 폐하의 물건이군.”
“폐하께서 루이스 전하가 글을 쓰시게 된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하사하셨습니다.”
유모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재빨리 귀즈 왕세자에게 대답했다. 루이스는 일어나지 못하고 유모의 손을 잡았다. 유모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네게 묻지 않았다.”
“죄, 죄송합니다.”
귀즈 왕세자는 금으로 만들어진 만년필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루이스와 눈을 마주쳤다. 루이스는 그 모습을 보면서 약간 볼이 붉어졌다.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폐하가 네게 선물해 줬다고.”
루이스는 귀즈 왕세자도 자신에게 잘했다고, 앞으로도 계속 정진하라 등의 말을 건네기를 기다렸다. 아니면 귀즈 왕세자가 자신을 발로 차고 욕설을 하기를 기다렸다.
이상하게 귀즈 왕세자는 둘 다 할 것 같은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귀즈 왕세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만년필을 루이스에게 건넸다.
“별 유난을 다 떠는군.”
그것이 루이스 왕세자의 첫 기억이었다.
유달리 슬프거나 화가 나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루이스의 짧은 인생에서 유난히 기억에 남는 일이었다.
유모나 기사나 하다못해 같이 노는 놀이 동무마저도 루이스가 글을 읽거나, 쓰거나, 배우는 것에 대해 사기를 북돋으며 응원하고는 했지만, 정작 루이스 왕세자의 아버지인 귀즈 왕세자는 그런 것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왕족의 사이에서는 혈연의 끈끈함보다 경쟁 관계가 우선시된다는 것을 인식한 것은 몇 년 뒤, 왕정학을 배우기 시작하면서였다.
역사와 정치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루이스 왕세손은 할아버지인 왕이 고령의 나이가 되면서도 아들에게 넘겨주지 않고 있는 상황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수많은 역사에서 아버지와 아들 역시 왕위를 놓고 경쟁하는 관계라는 것도 깨달았다. 자신과 귀즈 왕세자의 관계 또한 그와 비슷하다는 것도.
“아닙니다. 귀즈 전하는… 마음 깊은 곳에서 루이스 전하를 사랑하십니다.”
팬케이르 후작은 그렇게 말을 했지만 스스로도 확신이 없는 태도였다. 루이스는 대부이자 장차 그의 신하가 될 후작에게 그냥 쓰게 웃었다.
“괜찮아.”
그냥 그런 관계도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자식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고, 경쟁 관계일 수도 있고, 차라리 죽기를 바랄 수도 있다. 키가 크는 것을 싫어하고, 글자를 배우는 것에 기분 나빠하는 아버지도 있을 수 있다.
“괜찮으니 가서 자네의 할 일이나 해.”
“전하.”
평범한 가족이 어떤지는 자신이 알 필요가 없었다. 자신이 여타 사람들과 다른 환경이라는 것은 날 때부터, 기어 다닐 때부터 알았다.
귀즈 왕세자가 자신을 보는 눈이 싸늘하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터득한 사실이니 새삼스레 서러울 것도 없었다.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은 그 말고도 아주 많았다.
루이스는 자신이 분명 사랑받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루이스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이 나라의 왕이자 그의 할아버지라는 사실은 그만큼 큰 부담도 동반했다.
“참으로 열심히 하는 구나. 장하다, 루이스.”
“감사합니다, 폐하.”
왕명으로 선생들이 갓 글을 익히기 시작한 어린 소년의 공부를 가르치게 되었다. 하지만 왕의 기대를 따라가기는 힘들었다.
왕의 칭찬은 처음에는 좋은 일이었다. 왕은 루이스에게 선물을 내리고 왕세손을 돌보는 담당자들에게 상을 내렸다. 하지만 다음 주, 다다음 주, 다음 달…. 계속해서 왕은 손자의 성장을 확인하고 싶어 했다. 매번 칭찬을 하고 싶어 했다.
“이번에는 지난번과 큰 차이가 없구나. 열심히 해야지.”
“네…. 노력하겠습니다.”
“그래, 네가 이 나라의 희망이란다.”
큰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약간의 한숨이나 찌푸림만으로도 루이스 주변의 사람들에게는 큰 문제가 되었다. 왕이 약간 편찮은 표정만 지어도 밑의 사람들은 일자리가 날아가기 때문이다.
현 왕은 귀즈 왕세자와 달리 학구열이 높은 루이스 왕세손에게 아주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귀즈 왕세자는 어린 시절 금방 공부에 흥미를 잃었고 사냥과 주색잡기에 집중했다. 왕세손이 아직 어릴 때 제대로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 왕을 사로잡았다.
‘루이스만은 귀즈와 같아선 안 된다.’
하지만 왕의 나이는 이미 많았고 왕은 하루라도 빨리 루이스 왕세손의 성장을 보고 싶어 했다. 매일같이 성장을 재촉하는 모습은 나무에 끊임없이 물을 뿌리는 것과 같았다.
나무는 뿌리에 물을 너무 머금다 못해 썩어 가고 있었다. 루이스는 점점 만성 피로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는 이제 겨우 여덟 살이었다.
“폐하께서 루이스 전하의 수업이 너무 부족하지 않냐고 하셨습니다.”
“이미 전하의 수업은 또래 귀족들보다 충분히 빠릅니다만….”
“하지만 지난달에 비해 전혀 진척이 없다고 하셔서…. 혹시 가르치는 방법을 바꾸어 보는 게 어떨까요?”
“하지만 전하, 다음 달에 또다시 폐하께서 부르실 겁니다.”
“졸리단 말이야…. 손이 아파.”
루이스는 계속해서 펜을 잡고 있느라 굳은살이 박이기 시작한 손을 들어 보였다. 결국 선생은 원고를 대신 써서 외우게 했다. 그것만 해도 여덟 살이 갓 지난 루이스에게는 벅찼지만, 전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네 의견은 아일레스 린드버그가 발표했던 것이지. 하지만 그건 지난번 테이쳄 사건에서 이미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평가를 받는단다.”
“그렇군요….”
왕세손은 자신이 모르는 정보가 나오자 말문이 막혔다. 루이스의 얼굴을 본 왕은 다시 물었다.
“테이쳄 사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
“린드버그의 첫 번째 발표 중 복지 확장안에 대해서는?”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해서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복지 확장안은 린드버그의 이론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루이스는 결국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왕은 실망했지만, 그렇다고 왕세손에 화를 내지는 않았다. 루이스는 당연히 그의 하나뿐인, 정당하고 정상적인 아이였다. 루이스가 잘못한 것은 없다.
“죄송합니다, 폐하.”
“괜찮다 루이스, 네가 잘못한 것이 아니야. 왕은 잘못하지 않는다. 그러니… 선생을 모두 바꾸도록 하자.”
“폐하!”
“네게는 최고의 교육이 필요하단다. …가능한 빨리.”
왕의 명령으로 왕세손의 스승들은 전부 교체가 되었다. 왕이 아는 최고의 학식들, 내로라하는 학자들이었다. 정치와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일선에서 막 은퇴한, 백전노장들이었다.
“루이스 왕세손 전하이십니다.”
“…알긴 알지….”
“지난번에 봤으니까…. 그러니까… 10년 전?”
“아직 여덟 살이십니다.”
“허허, 태어나신지 얼마 안 됐군. 태어나셨을 때는 봤지. 그리고 또… 한 5년 전인가.”
학자들은 왕세손을 만나자마자 자기들끼리 눈을 마주치면서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손주 재롱은 잘 보긴 하오만.”
“무, 무엄합니다, 백작님!”
시큰둥한 노학자들의 반응에 시종장이 당황하며 화를 냈지만, 노인들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대부분 어린아이를 가르치기에 적합하지 않은 늙은이들이었다.
왕의 스승이 된다는 영광은 그들에게 더 이상 별다른 메리트가 없었다. 왕은 자신이 아는 최대한의 학자들과 관료들을 모았지만 그들의 나이는 적어도 일흔은 넘었다.
루이스가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아무리 봐도 수십 년, 어쩌면 50여 년 후가 될지도 모른다. 루이스가 왕족이라고 해도 새파랗게 어리다 못해 핏덩이나 마찬가지였다. 노학자들이 루이스에게 노력을 들여 봤자 그들은 왕의 스승으로서의 혜택을 전혀 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폐하의 명이니 시작하기는 하지만… 나이 들어서 애나 보게 하시다니 폐하도 참 너무하시는 군.”
노신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루이스는 여기서 자신이 화를 내 봤자 비웃음만 당할 것을 알았다. 자신이 왕에게 눈물로 선생을 바꾸어 달라고 조르면 왕은 자신을 달래 주겠지만, 크게 실망할 것이다.
“…잘 부탁하네. 열심히 하겠어.”
루이스가 노인들에게 할 말은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루이스는 열심히 했다.
“…와, 미치겠네. 폐하는 왕세손 전하가 몇 살인지는 알고 계십니까?”
팬케이르 후작은 루이스 왕세손을 보면서 입을 떡 벌렸다. 오랜만에 보는 대부였다. 하지만 그가 너무 경악을 했기 때문에 당사자인 루이스는 약간 민망해졌다. 그리고 그가 화를 내는 대상은 그의 할아버지이자 왕이었다.
“팬케이르 후작, 말은 좀 조심히 하게.”
“말투가…. 허… 루이스 전하, 제가 누구인 것 같습니까?”
“방금 말했지 않아. 내 대부이자 팬케이르 변경의 후작 아닌가. 그렇게 경거망동하지 말게.”
“지난번에 봤을 때는 팬케이크라고 불렀으면서. 선을 그으시니 서먹서먹합니다…. 아니, 그것보다 너무 마르셨습니다. 식사는 잘 하고 있나?”
후작이 허둥거리자, 루이스는 웃었다.
“말투도 그게 뭐야? 이상하다구.”
“…아예 맛이 가지는 않으셨군요.”
“후작, 아무리 조카라지만 왕세손인데 자네 너무 예법이 엉망 아닌가.”
팬케이르 후작은 자신의 대자이자 조카인 루이스 왕세손의 어깨를 잡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이거, 폐하께서도 정말 너무하시는군요….”
키는 또래에 비해 껑충 컸지만, 얼굴에 혈색이 없었다. 왕세자의 얼굴은 어린 나이에 맞지 않게 피로가 감돌았다.
주변의 사람들이 온통 노인인 탓에 말투도 약간 달라져 있었고, 자세나 행동이 열 살도 안 된 아이라고 하기에 위화감이 들었다. 팬케이르 후작이 알아차릴 정도라면 또래 귀족들 사이에서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팬케이르 후작은 왕이 왜 그러는지는 알 것 같았다.
왕이 될 귀즈 왕세자가 도를 지나친 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개인 공간에 시체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고, 폭력과 약에 취하는 날들도 늘었다.
아예 폐인이 되면 차라리 빨리 폐위를 시키겠지만 그것도 아닌 데다가, 귀즈는 자리를 돈 받고 팔면서 요직의 인물들을 자기 측근으로 채워 나가고 있었다. 귀족들의 작위 또한 왕세자에게 뺏기거나 팔려 나갔다.
일반 백성들 사이에도 불만의 목소리가 슬슬 커지기 시작했다. 50년 전만 해도 그들의 말은 무시할 수 있었지만 시대가 달라졌다. 철도가 깔리고 공업과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국민들 사이에서는 왕가와 기존 귀족들만큼이나 부를 쌓은 사람들이 생겨났다.
무시할 수 없는 목소리들이 늘어나는데 그들을 상대하기에 귀즈 왕세자는 너무나 부족했다. 살인과 약물, 강간 등 그의 단점은 한없이 많았으며 그에게 충성하는 유능한 인재는 거의 없었다.
때가 좋지 않았다. 보다 현명하면서 강한 왕이 필요했다. 지금 떠돌고 있는 불만이 터지지 않고 겨우 잠잠할 수 있는 것은 현 왕의 오랜 통치 덕분이었다. 왕이 집권한 것은 50여 년이 넘는다. 이 나라의 백성들은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지금의 왕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만큼 왕이 바뀐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었고, 그에 대한 존경도 컸다.
하지만 귀즈 왕세자가 왕이 된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의 질 나쁜 취미는 왕정을 반대하는 무리들에게 더없이 좋은 건수가 될 것이다.
국제적으로 전쟁이 빈발하고 있는 시대다. 산맥 하나만 넘어도 격전이 벌어지고 있다. 산맥 너머의 나라는 호시탐탐 국경을 넘고 싶어 했고 이 나라가 화염에 싸일 확률도 매우 높았다. 그것을 아는데도 오랫동안 귀즈를 폐위하고 강력한 왕정을 세우기 위한 시도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귀즈 왕세자가 유일한 왕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루이스 왕세손이 있다.
적법한 후계자, 총명한 소년.
‘하지만 너무 어리단 말입니다!’
팬케이르 후작은 한숨을 쉬었다. 현 왕은 너무 늙었다. 그리고 루이스 왕세손은 너무 어리다. 고작 여덟 살이다.
하루라도 빨리 루이스 왕세손을 기르고 교육시키려고 하는 왕의 심정은 이해하나 방에 틀어박혀서 노인들과만 대화하고 책을 보느라 움직이지 못하는 이 소년이 오래 살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시간이 너무 부족해…. 이런다고 해서 아이가 성인이 될 수는 없어.’
성인이 돼서 정식으로 활동하려면 적어도 지금으로부터 10년은 지나야 한다.
그러나 18세라고 하더라도 갓 어린 티를 벗은 것일 뿐이다. 전쟁 중인 산맥 너머에서야 젊은 영웅들이 나오는 것이지, 겉으로나마 평화를 유지하고 있는 이 나라에서 안정적으로 왕위를 받으려면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심지어 이 나라는 왕도 늙었고 가신들도 전부 너무 오랫동안 일했다. 천천히 왕궁이 쇠락하고 있다는 것은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적어도 20년은 필요하다. 루이스 왕세손이 28세는 되어야 그럭저럭 왕으로 인정받을 것이다. 10년으로는 부족하다. 15년 후에야 간신히 풋내를 벗을 것이다. 그리고 책 속의 지식만으로는 한 나라를 통치하기에는 세상이 녹록치 않았다.
‘차라리… 내가 대신하는 것이.’
팬케이르 후작은 고개를 저었다. 멀지 않은 친척이다 보니 귀즈 왕세자 다음이었지만, 자신이 왕위를 이어받는다면 그 후에 자라날 루이스 왕세손이 문제였다. 분명 한번 팬케이르 후작대로 왕위가 온다면 이후 루이스 왕세손에게 적법한 절차로 양위가 이어지지 않을 것이며 루이스가 왕위를 포기하기도 힘들 것이다.
가장 안정적인 방법은 하나였다. 자신이 루이스 왕세손을 지지해서 어린 나이에라도 왕의 자리에 올려 주는 것.
하지만 역시 너무 어렸다. 감기에도 죽는 것이 아이들이다. 루이스 왕세손은 여덟 살이 되었으니 아주 위험한 시기는 지났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가면 성년을 맞이하기도 힘들어 보였다.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제대로 된 운동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교류 관계도 문제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전하를 어떻게 왕으로 잘 키울까 생각합니다.”
“아직 멀었는데… 폐하고 후작이고 다들 너무 성급해. 좀 여유를 가지라고.”
팬케이르 후작은 순진한 소리를 한다며 루이스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굳은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루이스 왕세손의 얼굴을 보며, 왕세손이 정말로 생각보다 많이 성숙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상황을 아시는군요.”
“모를 수 없지. 내 스승들이 지나가듯이 계속 말을 하니까.”
루이스는 왕이 귀즈 왕세자를 대신하여 자신을 왕으로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왕세손은 대를 뛰어 넘어 즉위한다는 것,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모를 만큼 어리석지도 않았다. 루이스는 아버지인 귀즈가 자신의 적이라 결코 사이가 좋아질 수 없으며, 자신이 죽는다면 오히려 귀즈가 좋아할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아이답게 지낼 여유가 없었다.
“알 수밖에 없다고….”
팬케이르 후작은 그에게 총을 다루는 선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레이몬드 경입니다. 전하의 사격 선생이 될 텐데 어떻습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전하.”
키가 큰 미남이었다.
계속해서 노인들과만 지내던 루이스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루이스 주변에는 청년이 없었다. 루이스의 호위 기사만 해도 중년이었고, 팬케이르 후작 또한 귀즈 왕세자와 동년배였다.
“잘 부탁해, 레이몬드 경.”
손을 내밀었다. 마주잡은 손은 힘이 있었고 따뜻했다. 귀즈 왕세자와 턱이나 눈가가 닮은 듯한 청년이었지만, 선의로 넘치는 사람이었다. 이상적인 남성의 상이란 이런 것이라고 규정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건강하고, 부드럽고, 힘이 넘치는.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이었다.
레이몬드는 괜찮은 스승이었다.
가르치는 것에는 군더더기가 없었고, 지적하는 부분은 정확했다. 그럼에도 스승이라고 하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시간표를 짜고 매번 일정한 시간에 오는 선생들과는 다르게 레이몬드가 루이스 왕세손을 방문하는 날은 불규칙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끔 만나는 특별 손님 같았다. 정치인이나 학자 노릇을 했던 다른 스승들과는 다르게 젊고 훤칠했으며, 적당히 침묵을 지킬 줄도 알았다.
나이가 많은 스승들은 하던 일 탓인지 한번 입을 열면 끊임없이 말이 흘러나왔으며 가끔은 수업과 관련 없는 말들도 전부 루이스에게 쏟아 놓고는 했다. 루이스는 공부나 잡식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하지만 스승들이 하는 말은 가끔씩 그가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친 것들이 많았다. 아이에게 적당히 에둘러 설명할 법한 것도 가감 없이 말하곤 했다. 학업적인 면에서도 그렇고 심적으로도 그렇다. 그들은 왕세손을 어린애로 취급하는 것을 1년 만에 그만두었다. 루이스는 어린아이로 있을 여유가 없었다. 보다 빨리 정치적인 사람이 될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루이스의 머리는 또래보다는 빠른 편이었다.
몸을 움직이는 운동 시간은 더 있긴 했지만, 승마 시간과 기초 체력을 단련하는 시간과 레이몬드가 가르치는 시간은 엄연히 달랐다.
“왜 경은 다른 선생들처럼 자주 오지 않지?”
“호신용 사격은 그렇게 배우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몸을 보호하시려는 용도니까요. 장전하고 쏘는 법을 아시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주 올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루이스는 약간 아쉬웠다. 루이스는 학업에 치여 레이몬드와의 시간이 휴식하는 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사냥을 잘하신다고 들었는데. 사냥하실 때 이런 권총을 쓰지는 않으실 것 아니야.”
“사냥을 하기에는 확실히 무리가 있습니다만… 아직 루이스 전하에게는 무겁습니다. 조금 더 근육이 붙으시면 가지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들고 움직이지 못하십니다.”
레이몬드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장작 하나를 들어서 루이스에게 내밀었다. 루이스가 받아들자 무거워서 휘청거렸다. 레이몬드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말했다.
“그것과 비슷한 무게입니다.”
“확실히… 아직 무리구나.”
“사냥을 좋아하십니까?”
“해 본 적 없으니 어떨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아버지가 좋아하신다고 하니 궁금해서.”
귀즈 왕세자는 사냥을 좋아했다. 루이스는 동물을 죽이는 것에 재미를 느낀다는 것을 아직 이해하기에는 어렸지만, 그저 작은 벌레들을 치우거나 손톱으로 눌러 죽이는 것과 비슷하다고 이해했다.
이해하려고 했다. 그래서 루이스는 가끔, 귀즈 왕세자가 자신을 바라볼 때 느끼는 이상한 기분도 이해하려고 했다. 루이스는 아버지도 이해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성공하지 못했다.
“오래 걸릴까?”
“열넷, 열다섯 살은 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보통 사냥은 그즈음에 많이 시작하니까요.”
“그렇구나.”
“…….”
레이몬드는 루이스의 말에 약간 고개를 숙이고 고민하더니, 루이스에게 제안했다.
“그럼 제가 오는 날에 같이 숲으로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수업의 일환으로서 말입니다.”
사냥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지만, 숲으로 나가는 것은 신선했다. 정원보다 멀리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루이스는 성인 여섯이 팔을 뻗어도 다 안지 못할 굵기의 나무들이 감도 오지 않을 정도로 높이 솟아오른 것을 보면서 감탄했다. 정원에 있는 나무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역시 나오니 좋구나.”
“제 수업은 가능한 바깥에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돼?”
“예. 후작 전하가 시키신 일이니까요. 그 정도의 융통성은 발휘할 수 있습니다…. 자주 오는 것도 아니니.”
레이몬드는 나무 아래 앉아서 쉬고 있는 루이스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레이몬드는 적당한 거리를 띄우고 있었다.
“자주 오지는 못하지만 가능한 올 때마다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무리할 필요는 없어.”
“…혹시 문제가 되면 저를 탓하십시오. 제가 책임지고 물러나겠습니다. 선생으로서 수업 장소 선택을 잘못한 것이니까요.”
루이스는 앉아서 눈을 감았다.
새소리가 들리다가 이내 의식에서 멀어졌다. 한참을 잠에 취해 있다가 눈을 떴을 때는 레이몬드가 그를 업고 있었다. 루이스는 업혀서 정말로 애 취급당하는 기분이 좀 신기했다.
“깨우지.”
“그냥 마저 주무십시오. 얼마 걸리지 않습니다.”
후작이 레이몬드를 루이스의 곁에 둔 것은 한 가지 이유는 아닐 것이다. 그 정도의 사람은 한 이유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다양한 경우의 수와 이득을 생각하면서 수를 배치한다.
루이스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레이몬드는 젊고, 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것으로 유명한 기사였다. 화려한 외모뿐 아니라 온몸에서 자신감과 절도가 배어 나왔으며, 선의가 있었지만 오만은 없었다.
지식이나 지위는 루이스의 노스승들보다 부족할지 몰라도 사람의 호감을 사는 태도는 설명을 듣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체험하는 것이었다. 레이몬드는 루이스에게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행동으로 보여 줬다.
그가 루이스에게 호감을 사듯이 다른 사람에게도 호감을 쉽게 사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팬케이르 후작이 어떤 이유로 그를 붙였든지, 그와 함께하는 시간은 괜찮았다. 다른 스승들과는 다르게 그는 현실보다 낭만을 보여 주는 사람이었다.
루이스가 자라면서 스승들은 더욱 더 경쟁하듯 수업 시간에 열을 쏟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린 왕세손을 가르치는 것에 불만을 품었지만, 루이스가 항상 학업에 열심이고 잘 따라오자 열성적으로 가르치게 되었다.
그들의 자손들, 손자 손녀, 더 나아가 증손녀나 증손자들이 자라기 시작하다 보니 더 그랬다. 현 왕은 그를 차기 왕으로 점찍어 두고 있기에 앞으로 왕이 될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의 가문에 분명 힘이 될 것이다. 자신들이 누리지 못해도, 자식과 손자가 누릴 수 있는 영광을 점점 생각하게 되었다. 수업은 정치적으로 되었고, 노인들은 말을 고르기 시작했다. 가문, 영광, 명예, 미래.
레이몬드의 위치도 분명 그런 이득을 노리기에 괜찮은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럴 이유가 있었다. 대부이자 친척인 팬케이르 후작은 레이몬드의 사정에 대해 말을 했었다.
“복수심을 품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던데.”
“한 번도 말한 적 없습니까?”
“응.”
“의외군요. 분명 그를 도와주면 은혜를 갚을 텐데.”
“그러게…. 의외네.”
하지만 레이몬드는 한 번도 루이스에게 무언가를 부탁한 적이 없었다. 복수에 대해서 말한 적도 없었다. 루이스는 아직 어렸지만 스승들은 벌써부터 그에게 점점 많은 부탁을 하기 시작했다. 손녀를, 손자를 만나보십시오. 제 영지를 개발하면 나라에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어느 남작은, 어느 백작은, 어느 공작에 대해 아십니까….
“혹시 할 말 없어?”
“팔 근육을 좀 더 키우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응.”
그러나 레이몬드는 한 번도 복수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루이스는 막연히 레이몬드가 부탁을 한다면 한번은 꼭 들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부탁을 한다면 그것은 분명, 반드시 중요하고 필요한 일일 테니까.
“…죄송합니다, 전하.”
레이몬드의 얼굴은 우울했다.
루이스는 그의 모습을 보고 고민에 빠졌다. 자신은 어지간한 것이라면 들어주고 싶었다. 레이몬드가 루이스에게 어떤 것을 요청하더라도 그는 승낙했을 것이다. 하지만 레이몬드가 그에게 전한 것은 쉽게 정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아버지가… 그런 분이란 것은… 나도 짐작은 했지만.”
루이스는 자신의 방 안에서 턱을 괴고 고민에 빠졌다. 부친인 귀즈 왕세자와 그의 사이는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사이였다.
루이스가 태어난 것은 처음에는 귀즈 왕세자에게 좋은 일이었다. 차기 왕은 귀즈, 그리고 그 다음은 루이스. 아들이 있는 것은 왕자들에게 더 확실한 왕위를 약속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귀즈 왕세자의 경우에는 조금 달랐으니, 왕이 자신의 아들인 귀즈에게 좀처럼 왕위를 이양하지 않고 있었다.
루이스는 자신의 위치가 아버지와 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다섯 살 때부터 알았다. 그러나 짐작을 하는 것과 눈으로 확인하는 것, 눈앞에서 아버지가 점점 더 다른 일을 꾸미고 있음을 직면하게 되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레이몬드에게서 귀즈 왕세자의 비밀의 방에 대해서 듣고 나서, 루이스의 이마에는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주름이 가실 새가 없었다.
아버지가 나쁜 사람이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귀즈의 주변 사람들의 언행이나, 수시로 하녀들이 바뀌는 것, 다치거나 불구가 되어 나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는 소문들은 루이스에게도 들려왔다.
하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 연속해서 사람을 납치해 방 안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니. 루이스는 처음에는 당장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다음에는 ‘나에게는 어떤 일이 닥치는 거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살인자의 아들이라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죄송합니다.”
루이스는 레이몬드를 보면서 스승들이 무엇이라고 할지 생각했다. 그들 중 몇몇은 레이몬드처럼 왕실의 치부를 아는 사람은 처리해야 한다고 할 것이다. 루이스가 언젠가 귀즈 왕세자와 반목하더라도 이것은 지나치게 큰 문제이니까.
“팬케이르 후작은 알고 있어?”
“아마 짐작은 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내게 보고를 안 했다는 건, 내가 어리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게 너무 큰 문제라 움직이고 싶지 않은 건가.”
레이몬드가 그에게 말한 것은 지나치게 큰 문제였다.
귀즈 왕세자가 루이스를 치우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먼 훗날이 아니라, 지금 당장.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리고 캐런은 그 증거 중 하나였다.
“캐런 하이어 양과 우선 만나고 결정하겠어.”
결혼식은 빨리빨리, 대충대충 준비되고 있었다. 왕의 정부가 되기 위한 결혼식은 화려할 필요가 없었다. 결혼식 때 입는 웨딩드레스도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캐런이 귀즈에게 받은 드레스들은 하나같이 그 값을 따지기 어려운 것들이었지만 웨딩드레스만은 달랐다. 싸구려였다. 어느 나라의 여자들이든, 어느 시대의 여자들이든 혼인식 때만은 가장 좋은 옷을 입지만, 지금의 캐런은 아니었다.
진짜 결혼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이 준비해 놓고도 버석거리고 너무 큰 것 같은 옷이 신경 쓰이는지 귀즈 왕세자가 캐런 앞의 마네킹에 걸려 있는 웨딩드레스를 힐끔거리며 물었다.
“좀 더 좋은 것이 필요한가?”
“아뇨. 중요하지 않은 옷이니 상관없습니다.”
캐런은 종이로 만든 것 같은 옷감에, 장식 하나 없는 흰옷을 기꺼이 받았다. 모두가 결혼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안다. 그것은 그냥 형식적인 것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귀즈 왕세자의 애첩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결혼식에 지나치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오히려 반대로 힘을 빼야 한다. 귀즈 왕세자에게 자신이 신경 쓰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캐서린은 결혼식을 치른 뒤 날 떠나갔지. 결혼식은 왕궁의 뒤뜰에서 행해질 거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을 테니 약식으로 치를 것이다.”
“저는 어머니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 거예요.”
“내가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귀즈 왕세자의 손이 캐런의 턱을 잡았다. 그리고 이리저리 돌려 본다. 캐런은 잡힌 턱이 아팠지만, 힘을 빼고 그저 그가 흔드는 대로 흔들렸다. 괜히 자존심을 세우는 것은 좋지 않다.
“지나치게 순종적인 것도 의심스럽단 말이지.”
뭐 어쩌란 말이냐.
캐런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눈을 내리깔았다. 이래도 불만, 저래도 불만. 어머니는 어쩌다가 이런 남자와 얽혔는지 모를 일이다. 캐런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자신에게까지 문제를 떠넘긴 캐서린을 원망했다.
“전하께서 제가 원하는 만큼의 충분한 보화를 안겨 주셨으니 어찌 제가 이보다 더 만족스러울 수 있겠어요?”
“재밌는 말을 하는군. 난 네 애정을 갈구하는 것이 아니다. 너를 통해 캐서린의 심정이 어땠을지 반추해 보는 거지.”
“그것뿐인가요?”
“그것뿐만은 아니지.”
귀즈는 자신의 입술을 핥으며 캐런의 배를 꾹 눌렀다.
“하지만 네 말을 무조건 믿을 정도로 미치지는 않았어.”
그리고 손은 아래로 내려갔다. 음부에 가까운 곳까지 내려가자, 귀즈 왕세자의 입술이 비틀렸다.
“한 번도 넣지 않았는데 내 애를 뱄다고.”
캐런은 마주 웃었다.
“네, 전하의 애라니까요.”
믿든가 말든가.
서로를 향한 웃음은 신랄했다.
캐런은 처음에는 임신 사실을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귀즈 왕세자가 임신 사실을 알면 자신의 배를 갈라 보는 짓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충분히 그럴 만한 사람이었다.
“난 어렸을 적부터 사람의 속이 궁금했지. 다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다 달랐지만 열어 보면 내부는 똑같았거든…. 그것을 보는 게 좋았어.”
하지만 이내 깨달았다.
귀즈 왕세자는 자신이 임신하지 않았어도 배를 갈라 보고 싶어 할 사람이었다. 귀즈 왕세자는 캐런의 어깨를 짚으면서 속삭였다.
“하지만 자네는 속도 아름다울 것 같군.”
“겉도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물론 겉도 괜찮지. 하지만 그것은 잠깐이야. 아름다운 것은 금방 시들기 마련이지. 그래서 난 보존하는 걸 좋아해…. 조금씩 바꾸어 끼우거나 해서 말이지. 하지만 그렇게 하면 또 빨리 상하더군.”
“안타깝네요. 그럼 비명을 지르는 인질보다는 아까 말씀드렸던 대로 저를 애첩으로 삼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계속해서 꾸며 주신다면 괜찮은 제 겉모습이 더 오래 유지될 거예요.”
캐런은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몸을 이용할 의향이 있었다.
어머니가 쓰던 것을 쓴다는 것은 여전히 거부감이 들었고 역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캐런은 애첩이 되든 애견이 되든 어떤 짓을 하더라도 살아남아야 했다. 백 년 만에 임신이 성공한 이번 생을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전 전하를 유일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하지만 귀즈 왕세자는 입술을 찢는 것처럼 웃으면서 눈을 가늘게 감았다. 네 속 정도야 훤히 보인다는 웃음이었다.
“얘야, 난 캐서린이 떠난 후로 누군가에게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단다. 넌 캐서린이 아니고, 그녀가 남긴 부산물에 불과해.”
“캐서린이 내게 남긴 너를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어?”
과정이 다르니 과거와 같은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귀즈 왕세자는 그때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캐런이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은 우연한 사고에 의한 것이므로 귀즈가 의도를 가지고 그녀를 끌어들였던 117세의 그때와는 달랐다.
“박제는 처음에 깔끔히 숨을 끊고 나서 공작하는 게 좋더군.”
“…….”
어떻게 눈앞에 닥친 죽음을 피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귀즈 왕세자의 비위를 맞출 수 있을까.
지난번에는 귀즈 왕세자가 먼저 접근을 했었다. 그는 캐런의 뒤를 상세히 조사했었고, 캐런이 살인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까지 알아냈다. 그리고 그는 캐런만이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녀에게 자신을 이해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번 생은 아니다. 캐런은 아직까지 살인에 연루된 적도 없었고, 또 그가 캐런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셀라와 같이 납치되었기 때문에, 캐런이 뭐라고 말하든 귀즈 왕세자는 캐런이 살기 위해서 수를 쓴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맞다.
“포기했느냐?”
“아뇨.”
캐런은 귀즈 왕세자를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기억이 있다. 지식이 있다. 쌓인 세월 동안, 듣고 겪은 것이 있다. 그녀는 갓 수도에 올라온 열일곱 살이 아니며 100번이 넘도록 사교계에서 이 시간대의, 이 시대의 사정을 곱씹은 사람이었다.
“전하, 어머니가 왜 떠나셨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아까도 말했지만….”
“전하에게서 자식을 얻지 못하셨기 때문이에요.”
쾅!
귀드 왕세자는 캐런의 머리를 잡아서 바닥에 찧었다. 머리가 얼얼했다. 캐런은 충격으로 입을 벌렸다. 아프다기보다는 갑작스러운 충격에 얼떨떨했다.
귀즈 왕세자는 캐런의 머리를 바닥에 짓누르면서 으르렁거렸다. 조금 전까지 여유에 넘치는 자세는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입을 재밌게 놀리는군. 처음은 그 혓바닥부터 잘라 주마.”
“틀린 말이라도 했나요? 아, 머리가 아프니 그러지 마세요, 전하. 고문은 천천히 해도 늦지 않아요.”
“닥쳐라.”
손이 다시 머리채를 잡고 공중으로 들어 올린다. 캐런은 인상을 쓰지 않도록 노력하며 가능한 담대하게 말을 하려고 했다.
“어머니는 다시 사는 삶을 말했지만, 전하는 믿지 않으셨죠.”
“너도 보기보다 나이가 많다고 할지 궁금하군.”
귀즈 왕세자는 그때 분명 캐런에게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캐서린은 분명 다시 산다거나, 실제 보이는 것보다 경험이 많은 사람에 대해 그에게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어투로 봐서는 그는 믿지 않았다.
캐서린은 그것도 알았다. 그것을 감안하고도 그를 선택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레이몬드와 캐런 둘만이 저택에 존재하던 시절, 레이몬드는 캐런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런 말을 했었다.
“자식을 낳으면 풀려난다는 말은…. 그래서 귀즈 전하를 선택하지 않았겠군요.”
“뭐가요? 아, 움직이지 말아요. 아직 그리는 중이라구요.”
레이몬드는 캐런의 말을 들으면서 이마를 찌푸렸다. 캐런은 앉아서 캔버스에 집중하다가 레이몬드가 움직이자 급하게 말했다. 모델이 움직이면 제대로 그릴 수가 없다. 레이몬드는 자신의 눈을 찌르는 머리카락을 살짝 치우고 캐런이 노려보는 눈을 피하면서 말했다.
“당신의 모친인 캐서린 말입니다.”
“네…. 어머니가 귀즈 왕세자 전하를 선택 안 한 건 문제가 많아서 그런 거 아닌가요? 연쇄 살인마에 변태고… 그런 자의 정부라니 자존심 상하고.”
그리고 나이가 드니까 머리숱도 적었지. 캐런은 레이몬드의 풍성한 머릿결을 보면서 그도 나이 들면 머리숱이 적어질까 잠시 걱정했지만, 저택에 줄줄이 걸려 있는 그의 조상들의 풍성한 머리가 떠올라 안도했다. 나이 들면 머리숱이 생명이다.
“아마 그런 것보다는 좀 더 절실하고 직접적인 이유일 겁니다.”
“어머니에 대해 더 아시는 게 있나요?”
“아뇨, 그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왕세자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풍문이지만… 그자는 자식을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서기는 서던데. 캐런이 눈살을 찌푸리고 약간 시든 그의 아랫도리를 생각했다.
“그렇다면… 루이스 왕세손은…?”
“그는 귀즈의 아들이 아닙니다.”
캐런은 루이스를 총애한다는 왕을 떠올렸다. 과연 그래서 그런거였군. 캐런은 납득했다.
“정말 쓸모없는 막대… 아니, 사람이었군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캐런은 그의 아들이라고 하는 루이스 왕세손을 떠올렸다. 그가 왜 자신의 아들을 그렇게 싫어하고 질투하고 마지막에 칼을 꽂아 죽이기까지 했는지는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루이스는 귀즈의 아들이 아닌 남동생인 것이다. 그것도 왕이 의도적으로 만들어서 자신의 아들이라고 위장한.
어머니에게 저 남자는 필요 없었던 것이다. 최소한의 조건도 채우지 못하는 남자. 자식을 안겨 주지 못하는 남자. 금은보화도 의미가 없고 권력도 의미가 없다. 그는 캐서린에게 죽음을 선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의 저질적인 취향은 어머니에게 부차적인 문제였을 것이다.
“전하.”
어쩌면 이렇게 가치 없는 남자가.
“어머니는 귀즈 전하를 사랑하셨어요.”
캐서린은 일기장에 분명 ‘귀즈 개새끼, 죽어’라는 말을 늘어놓았다. 그런 캐서린이 귀즈를 사랑했을까? 그랬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귀즈 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 것 같지가 않았다. 제정신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얼마든지 거짓말을 입에 담을 수 있다. 그가 원하는 말을 해서 살 수만 있다면 수십 가지라도 꾸며 낼 수 있다.
“하지만 전하가 어머니를 믿지 않으셨고, 다시 사는 삶을 끝낼 자식을 주지 못하시니 떠날 수밖에 없었어요…. 왜 전하에게 말씀하지 않으셨겠어요.”
말할 필요도 없으니까.
“어머니는 전하께서 상처받는 것도 싫어하셨던 거예요.”
머리채를 쥐고 흔들던 귀즈의 손이 멈췄다. 그는 약간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이것은 시작이다.
“전하, 어머니는 다시 살았고 저도 다시 살아요. 죽어도 되살아나기 때문에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
“…그럼 한 번 더 죽어도 괜찮겠군. 재밌는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에 대한 보답으로, 네 시체에는 보석을 장식해 걸어 두마.”
“이 배 안에는 전하의 아이가 있는데도요?”
“…뭐?”
캐런은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몇 개월 기다려 보세요. 아직 티는 안 나지만 이 안에서 전하를 쏙 빼닮은 아이가 태어날 거예요. 전의 생애에서 전하와 관계한 적이 있으니까요.”
“…아, 이런. 난 너같이 미친년은 별로 안 좋아한다.”
“믿지 않으시나요?”
“그걸 믿는 얼간이가 어디 있나.”
귀즈 왕세자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방금 전 네 스스로 말하지 않았나. 난 그래, 자식을 수태시킬 능력이 없어. 루이스는 내 자식이 아니야. 그리고 캐서린도 그런 이유로 나를 떠나갔다고? 아, 그래. 그렇다고 하자. 그럼 거기서 왜 네가 내 자식을 뱄다는 말이 나오느냐? 앞뒤도 맞지 않고 난 네 다리 사이에 내 물건을 넣은 적도 없어!”
“전에 하셨다니까요. 아이를 갖는 게 어려운 것이지,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니까요. 20여 년 전과 달라요. 의료 기술은 발전했어요.”
꾸준히, 천천히. 계속해서 말을 하자. 캐런은 혀로 앞니를 핥았다. 입술을 핥으면 너무 노골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티가 날 것이다.
“제가 왜 여기 와서 이렇게 두려워하지 않겠어요?”
“하….”
“저는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 다시 살아날 테니까요. 여기가 두렵지도 않아요, 여러 번 온 곳이니까. 그리고 전하도 두렵지 않아요.”
캐런은 힘이 빠진 귀즈의 손을 잡았다. 어느새 묶어 둔 매듭이 풀렸다. 귀즈가 머리를 잡고 내려치면서 빠졌기 때문이다.
당장이라도 총으로 그의 머리를 뚫어 버리고 싶었지만, 캐런은 참았다. 지금 자신에게는 총이 없다. 지금은 사는 것만 생각하자. 억지로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전하는 제 남편이니까.”
“별 미친 소리를 다 하는군.”
“그런 말 많이 들어요.”
같잖은 소리를 한다는 듯이 귀즈가 손을 쳐 냈다. 수작 부리지 말라는 어투였다.
“네가 무슨 성녀라도 된단 말이냐. 동정녀 잉태라니 웃기지도 않아.”
맞는데.
신전에서 혈연 조사라도 해 보시던가.
캐런은 모계로 전달되기 때문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핏줄의 특성을 생각하며 투덜거렸다. 남자들이 아닌 여자들이 가문을 이었다면 좀 더 빨리 진실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귀즈 왕세자도 캐서린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아예 짚이는 구석이 없는 건 아닌지 조금 혼란스러워 보였다.
“미친 소리.”
“…….”
그렇다고 완전히 넘어온 것은 아니었지만. 캐런은 길게 말하지 않고 그저 입을 다물고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였다. 귀즈 왕세자는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당장 캐런의 목을 칠 기분도 아니어 보였다.
“재밌기는 하지만 너무 황당하니 흥이 식는다. 남편이라, 하, 하하…. 정말이지 웃기지도 않는군. 난 널 지금 처음 본다.”
“전하는 저를 이번 생에서는 처음 보시는 거지만 지난 생에서 저희는 분명 만났어요. 저는 다시 사는 삶을 살고 있으니까요. 어머니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나요. 어머니가 정말 그 나이로 보이셨나요?”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는 믿지 않는다.”
“알아요.”
하지만 귀즈 왕세자의 흥미를 끄는 것으로 충분하다. 캐런은 계속 말을 늘어놓았다.
“루이스 왕세손 전하는 귀즈 전하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요.”
“그래, 내겐 그 능력이 없지. 캐서린이 말했나?”
“아니요, 어머니는 그런 말을 하지는 않으셨어요.”
캐서린은 자신에게 남겨 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기억조차. 캐서린은 자신의 어머니나 조상에게서 더 많은 힌트나 삶의 요령을 배웠을지 몰라도 캐런은 온전히 혼자의 힘으로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 세월 동안 배운 것이 있으니, 바로 거짓말을 하는 법이었다.
귀즈 왕세자는 캐런을 죽이기 위해 그녀만 남기고 시종을 포함해 모든 사람을 물렸지만, 그만큼 캐런의 헛소리를 막고 자중시키는 사람이 없어 그녀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세 치의 혀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는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말을 끊지 못하고 집중할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그에게 가장 예민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귀즈는 아직 캐서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캐서린의 그림자일 뿐이라며 캐런을 하대하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 죽이지 못하는 것처럼.
“어머니가 전하를 떠나신 건 자식을 제 아버지에게서 얻으셨기 때문이죠. 전하의 정부로 남더라도 첫날밤은 아버지와 치르셨어야 했으니까요. 그날 이미 제가 생겨 버렸어요.”
“하지만 그녀는 그 뒤로 내게 돌아오지 않았어. 널 낳고도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다.”
귀즈 왕세자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말했다. 하지만 이때 더 치고 나가야 한다. 그가 듣기 좋아할 만한 말을 가지고.
“어떻게 돌아갈 수 있겠어요. 다른 남자의 자식을 가지고! 전하는 어떻게 그렇게 무심하셔요! 여자가 어떻게 사랑하는 남자에게 그런 짓을 한단 말이에요!”
어머니 아버지,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도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캐런은 속으로 부모님들께 사과했다.
“어머니에게서 전하의 어두운 부분, 괴로워하시는 부분에 대해 들었어요…. 그러다 보니 전 아주 어렸을 적부터 전하를 만나고 싶었답니다.”
애달픈 목소리로, 정말로 눈물까지 흘리면서.
“지난번 생애에서도 전하는 저를 납치하셨고, 이 방을 보여 주셨어요. 하지만 결국 전하와 저는 사랑에 빠졌답니다.”
“…하….”
어이없다는 얼굴이었지만 캐런은 꿋꿋하게 그 설정을 밀고 나갔다.
“전하, 전하는 아직 제대로 된 의사를 만나지 못하신 것뿐이에요. 전하께서 적당한 의사를 만나 몸을 고치시면 정말 자식을 가지시게 될 거예요. 그리고 이 배 안에 있는 자식은 정말 전하의 자식이에요. 그때 전하는 제대로 된 의사를 만났고 그 후에 저를 안으셨으니까요.”
“네 설명에 허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 같지만 일단 넘어가고, 그럼 넌 왜 또 죽어 이 자리에 있단 말이냐?”
“출산을 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답니다. 전 반복해서 살고, 이 삶은 자식을 낳아야지만 끝낼 수 있어요. 하지만 지난 생에서 전하의 아이를 잉태하게 되어 아이를 밴 채로 다시 살게 되었어요.”
“…하하.”
“전하.”
죽지 않으려고 아주 용을 쓰는군.
귀즈 왕세자는 애달프게 말하는 캐런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다시 산다는 것도 황당하기 그지없는 말이건만, 안지도 않은 여자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수태 능력이 없는, 씨 없는 남자를 향해서.
“제 배 속에 있는 아이는 분명 전하의 아이가 맞아요. 지난 생의 왕세자님은 치료를 받으셔서 건강해지셨답니다. 의심 가신다면 그 의사를 다시 불러 치료를 받아 보세요. 몇 개월 있으면 전하는 제 말이 거짓이 아닌 걸 아시게 될 거예요. 진정한 전하의 자식이 태어날 거랍니다. 태어나면 바로 이 아이가 전하의 아이라고 확신하게 되실 거예요.”
어차피 배는 나오지도 않았다. 자식이 태어나려면 한참의 시간이 걸린다. 보통은 10개월 걸린다지. 몇 개월이라도 좋다. 시간을 벌기만 하면 충분하다.
그리고 귀즈 왕세자는 고민하고 있었다.
“…하하.”
귀즈 왕세자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절로 새어 나오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저런 미친 소리를 다른 사람이 했다면 당장 사지를 잘라 개 먹이로 던져 줬을 것이다. 자신을 농락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미친 소리를 하는 것이 캐서린의 딸이며, 외양이 자신의 취향에 정확히 부합한다는 것이 그를 계속해서 잡고 있었다.
“전하, 아이가 태어나면 아시게 될 거에요. 보자마자 아시게 될 거에요. 지난번에 정말로 너무 힘들게 성공했어요. 이렇게 다시 뵙게 되다니 역시 저희는 운명인가 봐요.”
귀즈 왕세자는 일어났다.
저런 장황한 헛소리, 살기 위해서 마구 내뱉는 듯한 소리를 계속 듣고 있자니 자신의 머리도 이상해질 것 같았다.
귀즈는 뒤로 돌았다. 생각하고 싶었다. 그리고 동시에 당장 생각하지 않고 저 여자의 입을 닥치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계속 듣고 싶었다.
헛소리라고 치부하면서도 그녀의 말은 지독하게 그가 원해 온 것이라 계속 귀 기울이게 되었다.
그가 결혼한 왕비는 이제 기억도 안 나는 희미한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그 왕비가 석녀라며 홀대했고, 이혼할 구실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 수많은 여자들을 안고 나서도 단 한 명도 임신하지 못하자 자신이 불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비참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감정이었다.
간신히 자식이 생겼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그것은 여자가 다른 남자와 배를 맞추고 낳은 자식들이었다. 물론 귀즈는 그런 여자들을 살려 둔 적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비참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왕의 정부가 낳은 동생이 자신의 자식이라며 주어졌을 때는 비참함을 넘어 분노를 느꼈다.
자신의 동생인 루이스 왕세손은 언젠가 자신의 자리를 가져가겠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단 자신이 죽고 난 다음의 일일 것이다. 그리고 자식이 있는 왕세자는 왕위를 좀 더 빨리 받기 마련이기에 귀즈는 참았다. 안정적인 왕위 계승을 위해서.
‘…왜?’
그러나 부친은 좀처럼 양위를 하지 않았다.
귀즈는 조바심이 났다. 부친은 골골거리면서도 왕위를 자신에게 넘기지 않았다. 귀즈 왕세자는 정부의 요직들을 자신의 사람들로 채워 보려고 노력했지만, 그것도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현왕이 물러나지 않았으니 그들도 내려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귀즈는 왕이 자신이 아닌 루이스에게 바로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수를 쓰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챘다. 처음부터 자신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동생이었다. 그것이 이제는 자신의 자리를 곧바로 차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귀즈는 루이스의 목을 베어 버릴 구실만 찾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벽에 걸어 놓는 장식품 중 하나로 만들고 싶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갓 성인이 된 여성이라 루이스는 그의 취향과는 맞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걸어 놓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자신의 혈육이라는 희소성도 있었고 무엇보다 앞길에 방해만 되는 것을 죽여 전시해 놓으면 마음이 한결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생각을 실천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았다. 어느새 루이스는 조금씩 자라고 있었고, 귀즈뿐 아니라 루이스 또한 호위 기사와 하녀들이 항상 같이 있었다. 왕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은, 귀즈가 아닌 루이스에게 충성했다.
귀즈는 초조해졌고, 점점 자신만의 취미 생활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욕구불만을 해소할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이 용납하지 못할 취미였지만 이미 시작한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것마저 요즘은 재료를 찾기 쉽지 않아, 귀즈의 욕구불만은 분출되지 못하고 계속 쌓여 있는 상태였다.
그런 날, 정말 오랜만에 손에 넣은 최상급의 재료.
귀즈는 보자마자 더없이 흡족했다. 사람은 정말이지 일만 하고는 살 수 없다. 적당한 취미 생활로 인생을 윤택하게 해야 했다.
“제 어머니는 캐서린 노라 하이어예요.”
“전하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어요.”
미친 소리!
귀즈 왕세자는 믿지 않았다.
믿을 수 없다. 당연하다. 그렇게 오랜 시간 비밀리에 의사들을 동원하고 갖가지 약재를 먹었지만 자식은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여자가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고? 그것도 자신의 재료로 잡혀서 처음 만나는 여자가?
헛소리다. 미친 소리다. 살기 위해서 꾸며 내는 거짓말이다. 귀즈 왕세자는 확신했다. 믿지 않는다. 하지만 캐서린의 딸이 내뱉는 이야기는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그것은 회귀를 믿어서가 아니다. 자신에게는 자식이 필요했다. 자신을 제일 흔들어 놓는 단어를 저 여자가 입에 담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유일한 왕자라고 하더라도 홀몸인 것보다는 자식이 있는 것이 당연히 왕위를 물려받는 데 유리했다. 보통 왕족들은 10대에 결혼을 하고 출산을 거듭하여 귀즈의 나이에는 손자를 두는 경우도 많았다.
이제까지 생기지 않은 자식이 앞으로도 생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금 당장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하는 여자가 나타났다. 그것도 귀즈의 전 애인의 딸. 그녀와 똑같이 생긴 그녀의 딸.
“…하하.”
이 어찌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가.
믿지 않는다, 믿을 수 없다. 하지만. 저 배 속에 정말로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을 쓸 수는 있지 않을까. 루이스를 죽이고 대신 자식이라고 내세울 수 있지 않을까.
그건 꽤 마음에 드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저 여자는 정말로 힘이 없는 촌뜨기에 불과하다. 캐서린만 하더라도 백작의 딸이고, 대공의 외손녀였다.
하지만 대공이 죽은 지는 오래되었고 백작 또한 일찍 숨을 거뒀다. 캐런의 아버지인 하이어 영주는 그의 딸을 절대, 절대 지킬 수 없다. 그러니 이 여자는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
“전하, 분명히 전하는 이번 생애에서도 절 사랑하시게 될 거예요. 그리고 이 아이는 전하의 아이라는 걸 확신하게 되실 거예요. 기다려 주세요. 그 다음에 아니라고 생각하시면 절 죽이셔도 좋아요.”
캐런의 목소리는 애달팠다. 살기 위해서 하는 거짓말이다. 믿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귀즈는 그녀가 부리는 농간이, 꽤나 재밌었다. 지금의 왕은 루이스에게 왕위를 바로 넘기기 위해 모든 것을 정비하고 있었다. 루이스가 죽으면 큰 혼란이 닥칠 것이다.
그런 상황에 자신에게 자식이 있다고 하면 이야기는 또 재밌게 흘러가겠지. 그러니 자신에겐 자식이 필요했다.
왕비와 오래전에 사별한 그가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도 고정된 정부도 없었고 사생아도 없다는 것은 안 좋은 소문을 남겼다. 단순한 소문이면 무시해 버릴 수 있지만, 진실이었으니 더 문제였다. 귀즈는 결정했다.
“좋다. 당분간 널 처리하지 않겠다. 하지만 네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당장 널 박제로 만들 것이다. 네 목숨은 내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명심하려무나.”
“전하는 저를 사랑하시게 될 거예요.”
아마도.
캐런은 웃었다.
루이스를 죽인 다음 가지고 놀다가 죽여야지.
귀즈도 웃었다.
“캐런 하이어, 당신은 임신 중입니다.”
의사가 말했다. 캐런은 고개를 떨궜다.
“…그래요.”
그토록 고대했던 임신이건만 상황은 좋지 않았다. 자신은 지금 귀즈 왕세자의 노리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못 되었다. 지하 감옥에서 즉사하는 꼴은 면했지만 왕세자는 여전히 자신을 믿지 못했고 호시탐탐 죽일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모정이 솟아 안타깝거나, 슬픈 것은 아니었다. 배 속의 형체도 없을 살덩어리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며, 그 다음은 레이몬드였다. 괜찮다.
“어쩔 수 없지.”
처음부터 임신을 하려던 이유는 죽음을 원했기 때문이다. 죽음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임신은, 사랑의 결과물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
아이의 아버지가 그녀가 사랑하는 레이몬드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자신과 연인의 반을 떼어서 만든 사랑의 결실이 아니라, 삶을 떠넘기기 위한 새로운 사람. 또 다른 분신일 뿐이다.
캐런은 자신이 빼닮은 캐서린을 떠올렸다. 그녀와 캐런의 얼굴은 동일 인물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흡사하다고 했다. 캐런은 분명 카를라 대공비도, 그 어머니의 어머니도 자신과 흡사한 얼굴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몇 번째에 죽음을 선택했을까. 그들의 삶은 겉보기엔 영생과 같지만 몇 번 죽고 나면 진심으로 죽음을 원하게 된다.
캐서린이 자신의 기억을 없애지 않고 그저 평범하게(평범하다는 표현은 이상하지만) 임신을 해야 죽음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알려 주었으면 자신은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괜찮다.
이미 다 지나간 일이다.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서 제대로 된 죽음에 도달할 것이다.
캐런은 자신의 배를 쥐고 눈앞에 없는 남자에게 이를 갈았다.
씹어 삼켜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이셀라가 말한 한마디로, 자신은 편한 죽음이 아니라 가시밭길이 될지라도 모르는 삶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은 진실이다. 진실이었기에 캐런은 이 길을 끝까지 걸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듈란, 이 개자식.
“정말로 임신 중이기는 하더군.”
“정말이라니까요. 그리고 전하의 자식이구요.”
“언제까지 그런…. 그래. 그렇다고 치지. 그래야 할 거야. 그래서 널 살려 둔 것이지.”
왕실 의사 셋이 검증한 사실이었다. 임신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속에 든 것은 귀즈의 자식일 리 없지만. 캐런도 귀즈도 아는 사실이었지만, 그들은 속에 든 것을 말하지 않고 웃었다. 서로가 거짓말을 하는 것을 알아도, 납득하는 척, 웃는 척, 예상한 척.
“내 아이를 임신했다고 가정하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아야겠지. 최고의 부를 네게 안겨 주마.”
“…기쁘기 짝이 없습니다.”
캐런이 캐서린의 자식이라는 것은 놀라웠지만, 거기까지였다.
귀즈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캐런이 꺼낸 그 이야기는, 귀즈의 가장 큰 치부를 알고 있던 캐런의 목소리는, 그의 흥미를 끌었다.
그리고 귀즈는 그녀를 이용하면 루이스를 죽이려고 하는 계획을 좀 더 확실하게, 매끄럽게 준비할 수 있다는 것까지 생각을 확장했다.
“하지만 이 안에 든 것이 내 자식인지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아니, 믿는 놈이 얼간이겠지. 그러니까 넌 내 말을 잘 듣고, 내가 내 자식이라고 인정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캐런은 ‘다른 무언가를 노리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전처럼 몸이면 편하겠지만, 귀즈 왕세자는 다른 꿍꿍이가 있는 눈치였다.
“제가 전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무엇을 해야지 전하가 만족하시나요?”
“곧 알게 될 거다.”
귀즈는 웃었다.
귀즈는 루이스를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쉽사리 그에게 손을 댈 수도 없었다. 왕이 그를 보호하고 있었고, 루이스가 죽으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의심하고, 반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좀 더 눈길을 끌 만한 미끼가 필요했다.
“네가 잘만 하면, 그때는 너를 이혼시키고 내가 너와 재혼할 생각이다. 네 아이가 다음의 왕이 될 수도 있고, 네가 잘만 하면 왕비가 될 수도 있겠지.”
헛소리다. 아이를 왕으로 세우려면 절대로 처음부터 캐런을 정부로 삼아서는 안 된다. 정부가 되려면 유부녀여야만 하는데 그 자식이 왕의 후계를 이을 자가 된다면 정통성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정부의 자식이 공작위나 후작위까지 받은 적은 있지만 절대로 왕위에 오를 수는 없다. 애초에 그것 때문에 정부를 유부녀로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귀즈 왕세자의 말은 그냥 캐런을 구슬리려는 것에 불과하다.
“정말이시죠, 전하?”
“그래. 성공하면 내 모든 것이 네 것이 될 거야.”
하지만 지금 캐런은 그것을 믿는 척해야 한다. 그리고 권력에 눈독 들이는 어린 정부, 욕심은 많고 약간 머리가 이상한 어린 여자를 연기해야 한다.
그것은 정말로 쉬운 일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남자들은 대부분 캐런을 그렇게 봤으니까. 캐런은 귀즈 왕세자를 올려다보며, 정말 멍청하게 들릴 소리를 입에 담았다.
“전하는 분명 절 사랑하실 거예요. 이 아이는 왕이 될 거구요.”
“…하하.”
캐런은 귀즈가 자신의 목을 언제쯤 자르고 싶어 할지 궁금했다. 물론 그가 성공하기 전에 자신이 잘라 버려야겠지만.
서로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을까. 어디까지 눈치채고 있을까. 서로가 무시하며 동시에 의심한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목을 잘라 버리고 싶어 하는 이 마음이 들킬까, 들키지 않을까 생각하며 대화를 이어 갔다.
캐런은 차라리 귀즈 왕세자가 자신과 동침하는 편이 일 처리가 쉽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지금 당장은 다리를 벌리게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좀 더 길게 즐기려는 것이다. 사냥의 과정을. 캐런에게 같이 자지도 않았는데 그게 자신의 자식이겠냐고 언제든지 비아냥거리고 싶은 그 마음.
‘차라리 과거처럼 발정 난 개같이 달라붙으면 일 처리가 쉬울 텐데.’
캐런은 귀즈가 걸어 주는 목걸이를 눈을 감고 받아들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가 적당히 이성을 잃는 쪽이 자신으로서는 편하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캐런의 다리 사이보다 좀 더 다른 쪽에 관심이 있어 보였다.
그렇다고 욕정을 품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가슴 위나 음부, 다리 사이를 노골적인 시선으로 훑어 내렸다. 그저 다음을 위해서 참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사람들이 전부 널 보면서 감탄할 것이 분명하다.”
‘…돌 맞아 죽기 딱 좋겠네.’
정부란 정말이지 물고 뜯기 딱 좋은 가십 상대였다.
현왕의 정부들 또한 오랜 세월 동안 욕을 먹었다. 지금 왕의 정부인 베르셀 부인은 20년 넘게 정부의 자리에 있었고 왕의 병 수발까지 드는 처지라 많이 사그라졌지만, 그녀 또한 젊었을 때 온갖 음란 서적의 주인공이 되었었다.
캐런도 그녀의 별명을 들었다. 왕가의 암캐였던가. 그녀가 루이스 왕세손의 친모라는 것을 생각하면 혹독하기 짝이 없는 운명이었다.
캐서린이 그런 자리에 가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 것이다. 귀즈 왕세자는 캐서린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도 손해 보려고 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고자고.
“내가 네게 원하는 것이 우선 그것이다.”
“네?”
귀즈 왕세자가 캐런의 배와 턱을 만졌다.
그리고 뱀처럼 속삭였다.
“화려하게 치장하고, 사람들에게서 비난을 사라. 더없이 사치하고 멍청하게 굴어라. 그럼 나는 너를 사랑할 것이다. 너를 보호할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귀즈 왕세자가 다음에 내뱉은 말은 캐런의 몸을 굳게 만들었다.
“루이스 왕세손을 네 손으로 죽여라. 그러면 네 자식이 내 다음 왕이 될 것이다.”
“이런 젠장.”
캐런은 빈방에서 목걸이를 침대로 집어 던지면서 욕을 내뱉었다. 그러면 그렇지. 저 빌어먹을 늙은이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굴 리가 없었다.
“아주… 한 번에 다 해 먹으려고 들잖아?”
귀즈 왕세자는 캐런을 정말로 알뜰히 써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선 캐런에게 갖은 관심이 다 가도록 화려하게 치장해서 욕을 먹게 한다. 캐서린과 그의 염문도 유명했는데 심지어 그녀의 딸인 캐런을 정부로 두다니. 이 이상 선정적일 수가 없다.
근친 유혹 등 갖가지 더러운 소문이 그녀를 따라다닐 것이다. 상대가 왕족이 아닌 그저 범인이었으면 그녀를 안타까운 눈으로 볼 시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임신한 캐런이 금은보화에 둘러싸여 있다면?
정도 이상의 부를 쥐고 있는 어린 여성은 사람들의 혀 위에서 난도질당하기 딱 좋은 먹잇감이다. 캐런은 이미 여러 번 그런 경험이 있었다.
게다가 누가 스무 살 어린 부인을 동등하게 생각하겠는가. 그것은 그냥 노예다. 절대 동등할 수 없다. 장신구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런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황금과 보석의 가치만 보며 그것을 걸고 있는 캐런을 질투하며 욕망했다.
캐런은 몇 번이고 길거리에서 맞아 죽은 적이 있었다. 노귀족의 애첩이 된 결과였다. 그리 좋지가 않았다. 남자를 통해 부를 얻는 것은, 그만큼의 위험을 안고 왔다.
귀즈 왕세자의 옆 자리 또한 그럴 것이 분명했다. 심지어 본부인도 아니고 정부라면 더더욱.
“…분명 도색 잡지 다음 표지는 나겠네.”
그것도 몇 개월, 아니 죽기 전까지 내내 걸릴 것이 분명했다. 평범하게 살아 있다면 몇 년은 두고두고 팔겠지. 모델비도 주지 않으면서 욕설과 음담패설만 잔뜩 실릴 잡지들을 생각하니 절로 속이 쓰렸다.
그 정도의 상황에서 루이스 왕세자가 죽으면?
그것도 자신이 범인으로 몰리면?
캐런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귀즈 왕세자가 정말로 자신이 루이스를 죽이는 것에 성공하리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그것조차 가지고 놀기 위해서 던져 본 것에 불과할까?
무엇이든 확실한 것은, 귀즈는 루이스를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이제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캐런은 레이몬드가 말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루이스 왕세손은 죽을 운명이라고 했다. 그 소년은 그럴 운명이라고.
“…머리 아파….”
캐런은 머리를 감쌌다. 살기 위해서 한 행동이 자신을 더더욱 귀찮게 만든다. 그냥 죽어 버리고 다시 시작하면 한결 편하지 않을까. 임신이야 또 하면 될 문제 아닌가.
루이스고 귀즈고 결국에는 타인. 자신과 연관 없는 사람들이다. 캐런은 빠른 자살과 빠른 부활에 자꾸만 끌렸다. 다음 생애에는 우선 레이몬드와 다시 임신을 하고 또 다른 방법을….
“다시 올게요.”
그 와중에 떠오른 것은 뜬금없게도 이셀라였다.
자신에게 임신했다고 일러 주고 다시 왕궁으로, 귀즈 왕세자 앞으로 나온 이셀라 에반스. 전에 캐런을 사형대로 보냈던 그녀가.
“…….”
캐런은 루이스를 살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셀라를 죽이고 싶지 않는 자신의 마음. 그 몇백 배 이상, 몇천 배 이상 분명히 레이몬드는 루이스를 살리려 할 것이다. 그것이 캐런이 사랑한 그의 본모습이었다.
이번 연회는 캐런이 귀즈 왕세자의 정부로 소개되는 날이었다.
‘귀즈 왕세자 전하는 제정신이신가?’
귀즈의 옆에 있는 캐런을 보며 하나같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처음에는 캐런의 미모에, 마지막으로 전 애인의 딸을 정부로 삼는 귀즈 왕세자의 부도덕함에.
‘캐서린의 딸을 애인으로 두겠다고?’
‘근친일 수도 있는 관계 아닌가!’
‘어찌 저런 역겨운….’
연회의 많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권력을 휘두르며 켕기는 구석 하나씩은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애인의 딸을 또다시 애인으로 삼는 것은 지극히 변태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부끄러움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주위의 시선에 차마 하지 못할 짓이었다. 하지만 귀즈 왕세자는 그런 시선을 전혀 거리끼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재밌군, 재밌어.”
귀즈 왕세자는 사람들의 시선을 즐겼다. 다른 사람들은 무엇도 개의치 않는 귀즈의 행동에 괴행을 저지른다고 생각했지만 진짜 그의 취미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귀즈는 술잔을 들고 천천히 사람들의 시선과 목소리를 음미했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는 두려움으로 새하얗게 질린 이셀라 에반스가 있었다.
“이셀라?”
“캐, 캐, 캐런….”
‘저것이 왜 이 자리에 있지.’
귀즈는 기분이 가라앉았다. 자신의 부하들은 명령을 지키지 못했다. 이셀라 에반스를 제대로 처리하라고 했거늘. 그들의 실수를 책망하고 싶어도 이미 전부 죽거나 사라져 버렸다. 그의 더러움을 아는 사람은 아무리 벌레같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천박한 자들이라도 적은 것이 좋았다.
“에반스의 눈은 뽑아서 가지고 왔나? 푸른 계열의 눈은 반드시 따로 모아 두라고 했을 텐데.”
“전, 전하… 그것이… 처리하러 간 자들이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이셀라 에반스를 처리하고 돌아와야 할 수하들이 돌아오지 않자 귀즈는 손가락을 까딱이며 베르딕이 가지고 있는 재산의 흐름 중 반란으로 몰 수 있을 만한 것들을 뽑고 있었다.
이제까지 베르딕의 재산을 몰수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던 것은 그가 큰돈을 더더욱 큰돈으로 만드는 사업 수완을 지녔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베르딕과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는 해도 가족 문제가 직접적으로 얽히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우환이 될지도 모르는 것은 처음부터 없애는 것이 좋다. 귀즈 왕세자의 직인이 찍힌 서류가 넘어가기 직전에 베르딕이 달려오지 않았으면 문제는 해결되었을 것이다.
“전하, 제 여식이 전하께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약소하지만 이걸 받아 주시고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베르딕이 금화를 궤짝으로 가져와서 머리를 조아리며 싹싹 빌지 않았더라면 귀즈 왕세자는 이셀라 에반스 때문에 에반스 가문 자체를 쓸어버리는 것을 최근의 가장 큰 유흥거리로 삼았을 것이다.
‘살려 줬으면 조용히 눈앞에서 사라질 것이지, 왜 여기에 나타났지?’
귀즈 왕세자는 자신이 놓친 재료가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것이 불쾌했다. 매듭지어지지 않는 문제는 언제나 자신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운이 좋게 베르딕의 딸로 태어났으면 당연히 자신의 눈에 띄지 않게 멀리 시골로 사라져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감히, 살려 준 고마움도 모르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왕실 연회에 참가해? 귀즈 왕세자는 새하얗게 질린 이셀라의 얼굴을 뜯어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아주 목을 베어 달라고 들이대는 행동이다.
“이셀라, 무사했군요. 기뻐요.”
하지만 귀즈의 심정과는 다르게 캐런은 웃는 낯으로 이셀라를 맞았다.
환하게 웃는 것이 서로의 생존을 기뻐하는 것 같아서 그것을 지켜보는 귀즈의 배알은 뒤틀렸다. 저렇게 안전해진 줄 알다가 누구 하나의 머리가 깨지면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를 텐데.
“무슨 꿍꿍이지?”
“제가 뭘요? 저는 그저 전하가 약속을 지키셔서 기쁠 뿐인걸요.”
캐런은 생글생글 웃으며 이셀라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셀라도 생명은 질기게 긴 편인가 봐요. 사실 다시 만날 거라는 기대는 크게 하지 않았는데.”
“…….”
“전하가 약속을 안 지킬 거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구요.”
“하.”
귀즈는 코웃음을 치며 캐런의 여유 넘치는 모습을 보았다. 그의 은밀한 취미를 목격한 생존자가 있다는 것은 절대 그에게 좋은 일이 아니다. 이셀라의 부친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베르딕 에반스라는 것이 다행이기는 했다. 그는 이해득실을 잘 따지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이셀라가 살아 있다는 것은 언제 나불거릴지 모르는 폭탄이 귀즈의 손 밖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캐런 하이어와 이셀라 에반스가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닌가.
귀즈 왕세자는 흥미로운 연극을 보듯이 그들을 감시했다. 하지만 캐런은 떨고 있는 이셀라에게 인사할 뿐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왜 도움을 청하지 않지?’
귀즈는 의아했다. 캐런이 귓속말을 하거나, 무언가를 건네주거나 도움을 요청하는 걸 기대했지만, 그들은 그저 인사를 하고 다시 멀어졌다. 이셀라의 표정은 자연스럽지 않았고 분명 베르딕이 경고했을 텐데 이곳에 온 것 자체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이셀라.”
“…시온 경.”
귀즈는 이셀라 에반스의 파트너로 있는 젊은 남자를 보았다.
“흐음.”
알 법했다.
젊고 잘생긴 기사였다. 귀즈는 캐런과 이셀라의 머리통을 번갈아 내려다보면서 비웃었다.
‘꼴에 머리를 굴리는 군. 제 어미 때와 같은 수법을 쓰겠다는 건가.’
귀즈는 자신의 하수인 중 하나를 캐런의 남편으로 삼을 예정이었다. 캐서린 때와 같은 실수는 하지 않겠다. 캐런의 남편감은 신분이 더욱 비천해야 했고, 매력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도 없는 남자여야 한다.
자신의 시체를 수습하는 자들 중 하나에게 영지 없는 작위를 내려 주고 캐런과 결혼시킬 생각이었다. 부하의 충성도 얻을 수 있으며 절대 자신으로부터 결혼을 빌미로 남편의 영지로 도망갈 수 없는 일거양득이다. 기왕이면 폭력도 휘두르는 남자면 더욱 좋다.
“저 남자는 누구지?”
“…시온 엘렉트라 경입니다, 전하.”
하지만 이셀라의 옆에 있는 남자는 깨끗한 피부를 가지고 탄탄한 몸을 가진 젊은 기사였다. 자신이 캐런에게 줄 만한 남자는 아니었다. 귀즈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사교계에서 부인들에게 꽤나 인기 있던 기사였다.
“캐런 하이어, 자네가 원하는 남편은 정했나?”
“…예, 전하.”
귀즈는 캐서린 때와 달리 캐런은 다른 길을 걷게 하려고 했다. 캐서린 때 귀즈는 나름대로 캐서린을 생각해서 성품이 온유한 남자를 골랐다. 외모도 멀끔한.
하지만 캐서린은 그를 배신하고 하이어에게 도망쳤다. 캐런에게는 더러운 남자를 붙여 줄 생각이었다. 캐런이 캐서린처럼 다른 남자를 고르려고 한다면. 도망치려고 한다면. 귀즈의 미소가 짙어졌다.
“자네의 선택을 존중하도록 하지.”
사람이 살면서 과거 자신이 선택의 기로에서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할 때가 있다. 또 행동을 후회할 때도 있다. 귀즈 왕세자는 자신을 배신했던 캐서린을 죽이지 못했던 것을 가끔 후회한다.
“자네가 누구를 고르든 그와 결혼할 수 있도록 허락하마.”
캐런이 저 멀끔한 기사를 선택하고 그에게서 달아나려는 앙큼한 생각을 하고 있다면, 마치 캐서린처럼. 그렇다면 캐서린의 몫도 딸이 치러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전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캐런은 무릎을 살짝 굽혀 귀즈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는 연회장을 훑어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시선은 마지막에 이셀라와 시온에서 멈췄다. 귀즈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캐런은 시온 엘렉트라를 호명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 없는 듈란 로이드를 불러 주세요.”
귀즈 왕세자는 자신의 예측이 연달아 빗나가는 것에 대해 약간의 신선함을 느꼈지만, 그보다는 불쾌감이 더 컸다. 자신의 계획이 어긋나는 것 같았고 자신의 생각이 계속 틀렸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짜증나는 일이었다.
“듈란 로이드는 또 누구지?”
“캐런 하이어의 전 약혼자입니다.”
“하하, 그것 참… 노골적이군. 네 애인의 협조를 받아 도망가겠다는 건가?”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알겠지만, 그런 것이 아니에요, 전하.”
캐런은 고개까지 도리질하면서 부정했지만, 귀즈 왕세자는 믿지 않았다. 시종이 건넨 종이를 보면 약혼을 깬 것은 성인이 되기 직전, 수도로 올라오기 바로 전의 일이었다. 어릴 적부터 친척으로 가까이 지냈으니 형태가 어떻다고 하든 밀착되어 있는 관계인 것이다. 누구보다 친밀할 관계.
“허락하지 않겠다.”
“전하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에요. 그는 의사로서… 전하를 고칠 사람이랍니다.”
“왕실 의사들도 고치지 못한 것을 네 약혼자에게 맡기라고?”
“…전하가 그에게 몸을 맡기시면… 반드시… 나을 거예요.”
“전혀 신용이 안 가는 말이구나.”
귀즈 왕세자는 어설픈 수를 쓰는 캐런을 놀리는 것이 재밌어서 이마를 툭툭 쳤다. 어차피 죽일 것이라고 마음을 먹자 좀 더 가지고 놀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살려고 애를 쓰고 헛소리를 늘어놓지만 이렇게 앞뒤가 안 맞는다. 멍청한 이 어린것을 어떻게 울릴까.
“믿어 주세요, 전하. 이 세상에서 그 정도로 불임에 대해 잘 알 사람은 없을 거예요.”
“수재라고 하지만 고작 25세의 신관이 알면 얼마나 안단 말이냐. 내 주변에 있는 의사들은 그의 몇 배의 지식을 쌓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정체가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신관의 말을 믿어 치료를 받으라고? 내 목숨 줄을 누구보다 쉽게 가지고 놀 수 있는 사람이다. 네가 내게 복수하려는 과정으로 보이는 구나.”
“…그러니까 음… 전하가 절 사랑….”
“하, 하하, 하하하.”
귀즈 왕세자는 낄낄거리면서 웃었다. 아직도 저런 소리를 하는군.
재밌는 말이다. 귀즈 왕세자가 숨넘어가듯이 웃다가 웃음을 뚝, 하고 그쳤다. 캐런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마주 보았다.
“그러니 그 듈란 로이드라는 신관이 네게 자유를 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는 게 좋을 거야. 내가 그 꼴을 얌전히 봐 줄 것 같으냐? 네가 연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걸 가만히 놓아둘 것 같으냐?”
“연인….”
캐런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러니까 제가 사랑하는 분은 전하라니까요.”
그리고 약간 씹듯이 말을 이었다.
“듈란을 보시면 아실 거예요.”
듈란은 자신을 지목하는 왕궁의 편지를 받아들였다.
그를 사로잡은 강렬한 궁금증이, 도무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캐런 하이어가 자신을 부른다. 자신을 남편으로 지목했다. 무슨 생각일까. 캐서린은 하이어 영주를 남편으로 선택했다. 그의 자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듈란은 캐서린이 하이어 영주에게 감정이 아예 없는 것 또한 아님을 알았다.
캐서린은 죽기 전까지 하이어 영주와 괜찮은 관계를 유지했다. 하이어 영주는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는 그의 사랑을 기꺼이 받았다.
캐런은 듈란을 남편으로 지목했다.
그에게서 무엇을 기대하는 걸까.
‘왜?’
듈란은 과거의 자신들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캐런과 자신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어떤 관계를 쌓았을까. 지금의 그로서는 알 수 없는 시간들이 궁금했다. 어쩌면. 어쩌면.
“듈란 로이드가 도착했습니다, 전하.”
“들게 해라.”
듈란은 화려한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긴장과 기대와 불안감이 뒤섞였지만 왕세자의 부름에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고개를 들어라.”
“…예.”
듈란은 고개를 들었다.
화려한 방 안에서 듈란을 내려다보는 두 사람이 있었다. 듈란은 숨이 막혔다. 가까이에서 본 캐런은 정말로, 너무나 화려하고 압도적으로 아름다웠다. 먼발치에서 보았던 성전에서의 모습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화려함이었다.
위압적인 느낌마저 드는 화려함에 듈란은 자신이 눌리는 것 같았다. 비참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캐런의 옆에는 잔인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앉아서 그를 보고 있었다.
“…듀, 듀, 듈란 로이드… 입니다.”
듈란은 간신히 자신을 소개했다. 그래도 자신은 이곳에 왔다. 이곳에….
“크, 푸, 크하하하하! 이거 진짜 걸작이군! 그래, 캐런 자네에게 사과는 해야겠어.”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저 정도일 줄은 몰랐지!”
귀즈 왕세자는 미친 듯이 웃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 캐런에게 말했다.
“좋다. 저것을 네 남편으로 삼게 해 주마.”
듈란의 얼굴을 확인한 그날 밤 귀즈 왕세자는 듈란을 따로 불렀다. 귀즈의 응접실에 앉은 듈란은 안 그래도 허연 얼굴이 시퍼레질 지경이었다.
“앉도록 하지. 자네의 심정이 그리 편하진 않겠지만.”
“저, 전… 전하의 충실한 종입니다.”
“이 땅 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래야 하지.”
귀즈는 손을 들어 시종을 불렀다.
“한잔 들면서 말을 나누도록 하지.”
붉은 포도주가 와인 잔에 담겼다.
“그리 걱정할 것은 없어. 안에 뭘 넣지는 않았으니까.”
“…아닙니다.”
붉은 포도주가 거미 같은 손가락에 휘감겼다. 듈란은 천천히, 귀즈의 앞에서 와인을 들이켰다. 듈란은 상당한 고급술인데도 아무런 맛을 느끼지 못했다.
그럴 만도 했다. 일반 사제인 그가 귀즈 왕세자를 알현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듈란, 직업은 신관 그리고 앨번 수도원 출신으로 의사의 자격 또한 갖추고 있음. 하이어 영지의 다음 영주. 캐런의 약혼자.
“아까 크게 웃은 것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아, 아닙니다.”
“아니야, 너무 의외라서 웃고 말았지만, 분명 자네에게 무례한 행동이었지.”
더 반박하지 말라는 의미로 손을 들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는 웃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캐런의 예전 약혼자, 그것도 차기 하이어 영주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귀즈의 머리는 차갑게 식었다. 과거 캐서린의 선택을 반복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캐런이 머리를 굴린다는 것은 뻔히 보였지만, 이번 선택은 너무나도 같잖아 귀여운 것이 아니라 짜증을 일으켰다. 분명 젊은 시절 하이어 영주를 닮은 매끈하고 유순해 보이는 청년이 나올 것이라 생각했다.
의사 자격이 있는 신관이라니, 뻔하지 않은가. 자신의 편이 되어 줄 사람을 고른 것이다. 하지만 귀즈가 예상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
“너무 의외여서 말이지.”
“…….”
시체같이 생긴 남자.
외모로 보나 태도로 보나 부족함이 많았다. 귀즈는 듈란에게 좀 더 흥미가 생겼다. 정확히는 그의 감정에.
“캐런 하이어와 어떤 사이인가.”
“친척… 관계입니다.”
“전 약혼자라고도 하던데.”
“그리 대단한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제, 제가 다음 영주니… 만약을 위해서, 한 것뿐입니다.”
“그렇게 떨 필요는 없어. 내가 정부의 남편이라고 자네를 죽이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하이어 영주와 닮았다면 좀 분풀이를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포도주가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향과 맛이 오늘따라 일품이었다.
듈란 로이드 같은 사람을 귀즈는 아주 많이 봐 왔다.
가진 것은 없으나 욕심은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 특히 여성에게 분노를 품고 있는 남자들. 분노와 성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귀즈는 혐오하면서도 좋아했다. 쓰고 버리기에 좋은 패들이기 때문이다.
듈란은 무표정하게 있었지만 귀즈는 알았다. 그가 사제복으로 자신의 욕정을 죄고 있지만 캐런에게 발정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권력자의 정부가 되어 더 꺾기 힘들어진 여자, 그래서 더 열망하는 것이다.
“이렇게 부른 건 자네가 날 좀 도와줬으면 해서 말이야.”
듈란은 잠자코 귀즈 왕세자를 바라보았다.
“약을 좀 준비해 줬으면 좋겠네. 앨번 수도원에서 아주 촉망받는 인재였다고 하니 어려운 일도 아닐 테고.”
“전하의… 약을 말씀입니까?”
“아니, 내 것이 아니야.”
귀즈 왕세자는 히죽이며 웃었다.
“내가 키우는 애완동물이 있는데, 영 마음에 안 든단 말이지…. 제대로 따르지도 않고, 점점 이를 드러내는 것이 정말 불쾌해. 문제는 희귀한 놈이라 잘못 죽였다가는 문제가 될 것 같단 말이야.”
“전, 전하의 곁에는 존경받는 의사들이… 많이 있을 텐데요.”
“다른 의사들에게는 맡기지를 못하겠단 말이지. 그놈들은 입이 가벼워서 문제가 생기면 쪼르르 폐하께 달려가서 고자질할 것이 분명하거든.”
“…전하, 제가 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귀즈는 잔을 내려놓고 깍지를 꼈다. 설마 이걸 듣고도 정말 동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무색무취의 약을 제조해 줬으면 좋겠어. 맛도 안 나면 더욱 좋지. 캐런은 자네가 식사에 약을 섞는 걸 아주 잘한다고 하던데. 아닌가?”
“…그저 사소한… 약을 다룰 뿐입니다. 독극물은 잘….”
듈란은 가능한 한 개입하고 싶지 않은지 말을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귀즈의 방에 들어온 이상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아직 그것을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여기에 들어온 이상 듈란은 귀즈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캐런은 듈란이 귀즈의 몸을 고칠 것이라고 했지만, 귀즈는 그것을 믿지 않았다. 자신의 곁에는 저 젊은 청년보다 훨씬 경험과 학식이 풍부한 의사들이 수두룩했다. 아무리 내로라하는 인재라 하더라도 캐런이 지목한 자에게 몸을 맡기다니. 그런 미친 짓을 왜 한단 말인가?
“난 쓸 만한 부하들이 너무 부족해.”
“…전하.”
“자네가 내 곁에서 힘이 되어 줬으면 좋겠군. 어찌 되었든 우리는 캐런으로 맺어진 깊은 사이 아닌가?”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손에 굴러들어 온 재미있는 장난감들을 버릴 생각도 없었다. 의사나 신관은 귀즈가 싫어하는 직업이었지만, 듈란의 얼굴을 본 순간 이 남자를 가지고 놀 수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저 눈에 담긴 열망. 시체 같은 피부 아래 있는 열기.
검은 사제복과 바싹 마른 몸, 서툰 언변으로 가려져 있지만 귀즈의 눈에는 잘 보였다. 저런 남자들이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그것이 적일 때는 귀찮아지지만 내제된 열등감을 잘 구슬린다면 이용하기 좋았다. 가지고 싶은 것은 많지만 가질 수 없는 사람들.
“자네가 잘 해결해 주면 섭섭하지 않게 쳐주지.”
“…밤이 늦었습니다, 전하. 저,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둘을 동시에 치워도 될 것이고, 아니면… 괜찮은 부하를 하나 더 만드는 것도 괜찮겠지. 귀즈는 웃으면서 듈란을 쳐다보았지만 듈란의 표정은 한결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캐런을 볼 때는 바로 눈에 욕망이 뚝뚝 떨어져 나오더니.
“이건 어떤가? 일을 도와주면, 대성전의 부주교로 자네를 추천하고 싶어.”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전하.”
듈란의 목소리가 반대로 떨림 없이 정확해지고 있었다.
귀즈는 턱을 괴고 말했다. 자신은 이런 것이 재밌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이 한순간의 선택으로 오락가락하는 것, 그리고 그중에서 적당히 필요한 것을 골라서 취하는 것. 지배자의 천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디 한번 던져 볼까.
“캐런은 지금 내 아이를 가지고 있거든. 부주교 정도는 되어야 급이 맞지 않겠나.”
“…….”
듈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얼굴을 보자 귀즈는 자신이 생각한 것이 맞다는 것을 알았다.
‘저놈이 아비는 아니군.’
캐런은 위험한 곳에 자신의 애인을 끌어들이지 않았다. 그녀가 끌어들인 것은 그저 친척이다. 캐런은 그가 자신을 도울 것이라고 말했지만, 귀즈가 보기에 그것은 실수였다. 듈란은 캐런을 친척 그 이상의 눈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끊으면 못난 남자의 원망이 캐런이 아닌 귀즈에게 돌아간다. 그렇다면 다시 방향을 돌릴 필요가 있다.
“아닐 수도 있지. 나도 확신은 없거든. 내가 처음이 아닌 건 분명하니까.”
“무….”
“확인했거든.”
귀즈는 웃었다. 자신이 거짓말한 것은 하나도 없다. 듈란의 눈이 귀즈 왕세자의 잔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무리 짐이 그녀를 귀애한다고 해도, 그녀의 자식을 왕족으로 올릴 수야 없는 일 아닌가. 그렇지 않나? 하지만 남편은 쥐여 주어야 할 테고…. 캐런이 자네를 선택했으니 자네에게 그만큼의 권리를 주고 싶어.”
그러니까 우리는, 가족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그의 웃음은 뱀과 닮아 있었다.
듈란은 자신에게 주어진 방으로 돌아갔다. 한동안 속이 역겨워 가라앉히기가 힘들었다. 술이 몸에 잘 안 맞은 탓이었다.
“…윽.”
귀즈 왕세자가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기를 요구했다.
그가 원하는 약의 제조는 분명 독약이다. 잘못 얽혔다가는 자신의 목만 날아갈 것이 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거절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그리고 무서운 것도 아니었다. 캐런은 되살아난다. 자신도 되살아난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임신했다고.”
듈란은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생각해야 했다. 캐런은 왜 자신을 남편으로 지목했는가. 그리고 왜 귀즈 왕세자의 옆에 있는가. 그녀는 영주에게 소개하고 싶은 남자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왜. 귀즈 왕세자의 자식? 아니면 또 다른 남자의 자식?
“대체 언제 임신했지?”
듈란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캐런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몇 개월간 누구와 열렬한 연애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더니, 귀즈 왕세자의 정부라며 나타났다. 그렇다면 캐런은 귀즈 왕세자와 배를 맞추고 한동안 대성전에 숨어 있었단 말인가?
“내 자식이 아닐 수도 있지.”
대체 몇 명의 남자와?
고작 열일곱 살이다, 그럴 리가 없다. 어쩌면 집을 나와서 고생하다가 험한 짓을 당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동안 어떻게 임신을 하고, 게다가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를 만큼 뒹굴다니, 뭔가 이상하다. 열일곱 살이라면 분명 순진한 처녀여야 할 터이다.
“…아니, 열일곱이 아니지.”
캐런 하이어는 열일곱 살이 아니다. 듈란은 되새겼다. 그녀가 그 나이의 여성이 아니란 것은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지 않는가. 그녀가 얼마나 살았을지는 모른다. 남자를 알다 못해 닳고 닳은 여자일 것이 확실하다. 삶이 계속 1년마다 반복된다면 오히려 닥치는 대로 욕망에 탐닉하는 삶이 더 그럴듯하다. 되는 대로 갈아 치웠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문제는 없다. 아니, 문제는 없어야 할 것이다. 인생을 반복한 사람이 망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다. 하지만….
듈란은 그녀가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했다는 것이 거슬렸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수많은 남자들 사이를 누비다가 이제야 자신을 부른 캐런 하이어에게 이상한 분노가 느껴졌다. 귀즈 왕세자가 자신에게 맡기려는 일은 뻔했다. 루이스 왕세손을 죽일 약을 만드는 것.
‘캐런이 날 부른 이유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가 왜 그랬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그녀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어렸을 적의 일이다. 새삼스럽게 자신에게 친애의 감정이 들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얼굴에 화병을 집어 던지던 캐런이었다.
캐런이 듈란을 자신의 남편감으로 추천한 이유가 그녀를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닐 것이다. 물론 듈란을 애정해서도 아니었다. 그녀가 자신을 고른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나에게 복수하려고.”
귀즈 왕세자의 기이한 성벽에 대해서 듈란은 이미 알고 있었다. 캐서린은 딸에게 말하지 않은 수많은 더러운 이야기를 듈란에게는 털어놓았다.
그래서 듈란은 귀즈 왕세자가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고, 캐런이 어떻게 될지도 알았다. 귀즈 왕세자는 자신을 이용하고 나아가 캐런 역시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애첩. 운이 나쁘면 사형대.
듈란 또한 달아날 곳은 없다. 듈란은 기도를 읊조렸다.
“주여, 제게 가야 할 길을 알려 주소서.”
하지만 응답은 없었다. 그러나 듈란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신이 원하지 않는 길이라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듈란은 약을 만들 준비를 했다. 두렵지 않았다.
이미 자신은 과거에 충분한 준비를 해 두었다.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결과다.
끝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결과.
연회는 끝났다.
캐런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몸에 걸친 장신구들은 캐런의 몸무게의 반은 나가는 무게라 서 있는 것만 해도 힘이 들었다. 벗어 내려고 했지만 착용도 복잡했고 벗는 방법도 어려웠다.
보조 하녀가 있어야 했지만 캐런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상은 아니었다. 귀족가의 저택, 아니 자신의 집만 하더라도 손님에게 하녀 하나 이상은 꼭 붙여 준다. 그래야 옷을 갈아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왕궁이면 더더욱 많은 사람이 그녀 옆에서 시중을 들어야 한다. 하지만 방 안에는 침묵만이 맴돌았다. 굳이 주인이 명령하지 않더라도 하녀들이 따라붙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건만. 캐런은 한숨을 쉬었다.
“귀즈 전하는 참 인기도 없으시지.”
불편했지만 귀즈에게 하녀를 불러 달라고 요청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캐런은 혼자서 벗어 보려고 노력해 보다가 이내 포기하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화장은 지워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나가서 사람을 찾는 것도 고역이었다. 궁전에서 왕세자의 정부가 하녀들에게 세숫물을 가져다 달라고 청해야 하다니.
‘뭐, 나라도 여기 오는 건 눈치 보이겠지만.’
자신이 머무는 방은 죽은 왕세자비의 방이었다. 아무리 애첩으로 삼는다고 해도 분명 이런 방을 정부가 쓴다는 것은 그리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다. 일부러 이런 방으로 줬을 것이다. 단순한 애첩이 아니라는 것을 왕과 루이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심기가 불편하라고.
그리고 다른 귀족들과 백성들은 뻔뻔하게 왕세자비의 방을 쓰는 캐런을 요녀라고 비난하겠지. 하지만 이왕 비난받을 것이라면 사치라도 많이 했으면 한다. 캐런은 투덜거리면서 눈을 감았다.
진짜 폭군의 애첩 흉내를 제대로 내려면 패악이라도 부릴 텐데, 가짜 애첩이니 무언가 하나 하는 것도 눈치가 보인다. 이것도 가짜, 저것도 가짜. 사치랍시고 보석은 잔뜩 안겨 주는데 시중들 사람이 이렇게 없으면 착용도 못 하니 사치라고 할 수도 없다.
“혼자 있는 건 싫은데….”
혼자 있으면 안 좋은 생각만 하게 된다. 자신의 오랜 버릇이다. 혼자만의 세계에 다시 몰두하게 된다. 그렇게 백 년을 보냈다.
앞으로 얼마나 보내야 할까. 천 년? 만 년? 1억 년? 캐런은 자신의 몸을 옹송그리며 배를 끌어안았다. 얼마나 우리는 더 시간을 보내야 죽음에 도달할 수 있을까.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 질긴 인생을 그만 잘라 내게 하소서.
하지만 기도는 닿지 않는다. 이 운명은 달라지지 않는다. 신은 여자들에게 운명을 부과했지만 거기에 떼어 낼 수 없는 불을 붙인 것은 신이 아니라….
눈을 감는다. 눈물은 말라붙어 나오지 않는다. 한숨만이 길게 나온다.
다른 생각, 다른 생각을 해야….
그러다가 까마득하게 잠이 들었다.
똑똑.
“…들어와. 너무 늦잖니.”
캐런은 눈을 살짝 뜨고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가 약간 잠겼다.
하녀들이 이제야 온 모양이다. 자신이 이제까지 얼마나 기다렸는데 이제야 오다니. 어서 세숫물로 얼굴의 분을 씻어 내고, 갑주처럼 몸을 압박하고 있는 옷도 벗고 싶었다.
똑, 똑.
문이 잠겼나. 아니면 들리지 않는 건가.
무거운 몸을 간신히 일으키고 문가로 향했다. 하지만 손을 뻗었을 때, 캐런은 인기척이 문밖에서 느껴지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문밖에는 아무도 없다.
똑똑똑똑.
두드리는 소리는 문이 아니라 바로 옆 유리창에서 들리고 있었다.
“뭐, 뭐… 레이몬드 경?”
캐런은 순간 놀라서 비명을 지를 뻔하다가 그 인영이 자신이 잘 아는 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가슴을 부여잡았다.
“왜 거기 있어요? 아니, 왜 있는지는 알겠는데, 아, 갑자기…!”
놀란 가슴 때문에 당황해서 목소리가 커진다. 레이몬드가 계면쩍은 얼굴로 두드리던 손을 멈췄다. 그리고 창 가까이에서 소곤거렸다.
“캐런, 문 좀…. 아니 그냥 제가 알아서 열겠습니다.”
“부수지 마세요!”
“쉿, 쉿.”
덜컥. 발코니의 투명한 창이 달린 문을 캐런이 열었다. 바로 나가려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잠깐….”
주변은 조용했다. 캐런은 주변을 잠깐 돌아보고 발코니로 나갔다.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레이몬드의 머리가 살짝 젖어 있었다.
“머리가 젖었네요.”
“예, 덕분에 감시하는 사람은 없군요. 불도 덜 붙고…. 귀즈 왕세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의 방에요. 불이요?”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귀즈 왕세자가 밤에 찾아오는 일이 있습니까?”
레이몬드는 잠깐 말을 멈추더니 별일 아니라는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돌렸다.
“아직까지는 없었어요. 아침까지는 시간이 있을 거예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은 해야 해요.”
“알겠습니다. 다친 곳은?”
“없어요.”
그 대답을 듣고 나서 레이몬드는 캐런을 꽉 끌어안았다.
캐런도 레이몬드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단단하고 커다란 몸을 끌어안자 왠지 울고 싶어졌다. 올 줄 알았다. 만날 줄 알았다. 그가 반드시 데리러 올 줄 알았다. 이번 생애에서도. 나의 기사. 나만의.
“캐런, 잠깐….”
레이몬드의 머리가 젖어서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비에 젖어 불편한지 한쪽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를 벗었다. 눈을 가로지르는 흉이 드러났다. 손에 쥐고 있던 안대를 자신의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캐런은 레이몬드의 눈가를 쓸어 보면서 말했다. 흉은 불거져 있었지만 그것도 미남의 얼굴 위에 있으니 나름대로 야성적인 멋이 있었다. 분명 그는 늙어도 잘생겼겠지.
“상처가 생각보다 오래가네요.”
“그래도 많이 나아졌습니다.”
“시력은요?”
“보이기는 합니다.”
“…문제없을 거라더니.”
“음, 약간은… 그래도 큰 문제는 아닙니다.”
분명 떨어져 있던 시간은 오래되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너무나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았다. 레이몬드가 캐런을 흐릿한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웃었다.
“당신이 다치게 한 사람이나 죽인 사람은 없습니까?”
“…농담 재미없다니까요.”
나름대로 감동받으려는 찰나였건만. 캐런은 꼬집으려다가 옷 때문에 아프지도 않을 것 같아서 발로 밟았다. 하지만 간지럽지도 않은지 그냥 무시한다. 레이몬드는 캐런을 다시 포옹하면서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사형당하면 속상해서 보러 가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아니, 집행인 정도는 정으로 해 줘야지 그게 무슨 소리에요? 아무튼, 이번에는 그리 늦지 않았어요.”
“다행이군요.”
감격해서 칭찬이라도 해야 할 텐데 너무 예상했던 만남이라 그런가, 피곤이 가시지를 않는다. 캐런은 레이몬드를 안은 채로 물었다. 이상하게 계속해서 힘이 없다.
이번에도. 이유를 알아서 그런 걸까. 머리로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계속해서 체념이 몸을 눌렀다.
“저를 데리러 오셨나요?”
“예. 루이스 전하가 사용인들 몇몇에게 다른 일을 시키셨습니다. 달아날 수 있는 길을 압니다. 이대로 그냥 도망가면 이번 생은 무사히 끝이 날 겁니다. 집으로 갑시다. 귀즈와 얽혀서 좋을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주변에 아무도 없던 거였을까. 루이스 왕세손은 어지간히 레이몬드를 아끼는 모양이었다. 레이몬드가 캐런에게서 몸을 떼고 난간을 잡았다. 캐런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캐런, 제 목을 잡으십시오. 교대 시간이 오기 전에 탈출해야 합니다.”
“지금요?”
“예.”
레이몬드는 거듭 대답했다. 하지만 캐런은 고개를 저었다.
“귀즈 왕세자 전하께서 저를 정부로 들이겠다고 선포하셨어요. 제 얼굴은 이미 귀족들에게 다 알려졌고, 지금 옆에 하인들이 없다 해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도망가는 건 불가능해요.”
“갈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베르딕 가문은 끝나겠지요.”
“베르딕 에반스가 왜… 나옵니까.”
“제 친구의 가문 아닌가요. 이번 생애에서는 좀 더 달라졌다고 당신도 느끼지 않나요?”
“…….”
레이몬드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캐런은 그 침묵에 쓰게 웃었다. 레이몬드가 생각하는 방법이란 뻔했다. 전부 죽이고 자신을 데리고 도망친다는 게 그가 생각할 방법이겠지. 하지만 이번의 생에서는 그럴 수 없다. 그러고 싶지 않다. 얼마나 자신이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백 년 만에 찾은 책 밖의 세상인데 어떻게 그렇게 쉬운 방법을 선택한단 말인가.
“귀즈 왕세자 전하가 제게 루이스 전하를 죽이라고 명하셨어요.”
레이몬드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캐런은 팔 안에서 느껴지는 그의 상태를 보면서 ‘역시나’라고 생각했다.
“물론 제가 죽일 이유는 없죠…. 하지만 중요한 건… 당신이 말했듯이,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도망가면 이번에도 루이스 왕세손은 죽을 거예요. 그걸로 만족해요? 당신은 그래도 상관없어요?”
“캐런, 전….”
캐런은 레이몬드의 입을 막았다.
‘저랑은 상관없습니다.’
그런 대답을 듣고 싶지 않다. 그런 거짓말은 듣고 싶지 않다. 그럴 리가 없다. 한 사람만 생각하며 산다는 것은 사실상 모든 것을 포기한 삶이다.
자신이 쾌락이나 재미에만 몰두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레이몬드 경, 어쩌면 우리랑 상관없는 일일지도 몰라요. 당신이 말했던 것처럼. 이셀라를 신경 쓰지 말라고 했었던 것처럼. 우리는 시간에서 유리되어 있고 이 시간은 그냥 또다시 되풀이될 수 있는 시간이니까.”
우리 둘 말고는 의미가 없으니까.
“당신은 제게 루이스 전하가 왕이 되는 미래는 없다고 했었죠.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고…. 지금은 어때요? 정말로 말이에요.”
“지금도… 그분이… 살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죽지 않았으면 하잖아요.”
“캐런, 전 정말로… 당신만 있으면 그 외에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럼 루이스 왕세손을 당신이 죽일 건가요?”
“캐런, 저는….”
레이몬드는 이를 악물었다.
캐런은 마저 말했다.
“이번 생에서는 좀 더 건설적인 인생을 한번 만들어 보자고, 좀 더 노력하자고, 당신도 동의했잖아요.”
“전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따라 준다고 했잖아요.”
둘만이 아니라 세계로, 사회로,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좀 더 넓은 세상으로, 정체가 아닌 흐름을 위해서.
“임신했어요.”
그토록 원했던.
자신의 끝. 이제는 레이몬드와의 새로운 끝. 둘이 만들어 갈 새로운 인생.
하지만 레이몬드의 얼굴은 그다지 기뻐 보이지 않았다.
아, 그렇구나. 그도 아는구나. 그도 진실을 아는구나….
캐런은 조금 울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 레이몬드의 품에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물었다.
“이셀라에게서 들었나요? 시온이 전해 주었나요?”
“둘 다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레이몬드 경, 저는 이셀라가 절 위해서 여기까지 왔다는 게 기뻐요. 그리고 루이스 왕세손이 살아서 왕관을 머리 위에 얹는 것도 보고 싶어요. 당신에게 호감을 품은 소년이 살았으면 좋겠어요. 제 옆에서 자기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한 그 소년이 왕이 되는 것이 보고 싶어요.”
빗소리가 커졌다. 캐런은 얼굴이 비에 젖은 것이 차라리 다행으로 느꼈다.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으니까.”
이셀라가 처음으로 그녀에게 왔던 것처럼. 그런 기적 같은 일을 기대하고 싶어진다. 좀 더 나은 세상을 바라고 싶어진다. 선은 선으로, 악은 악으로 갚는 세상을 기대하고 싶어진다.
“레이몬드 경… 사실은… 그런 말을 해 보고 싶었어요. 자식을 위해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건 어떻겠냐는 말… 을… 어제까지만 해도… 생각했었는데.”
“…….”
“당신도 아는군요.”
입술을 깨문다. 레이몬드도 알고 있다.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들은 둘 다 알고 있다.
임신했다는 사실도.
그리고 아이가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도.
귀즈가 캐런을 의사들에게 보일 때였다. 한 의사가 귀즈를 불렀고 다른 의사가 캐런의 곁으로 다가왔다. 회색 눈이 재빠르게 굴러간다. 손가락 하나가 올라온다. 쉿.
캐런은 눈치챘다. 왕실 주치의들 정도쯤 되면 살길을 하나만 뚫어 놓지는 않는다. 주치의 중 하나인 늙은 의사가 캐런에게 말했다.
“루이스 전하가 당신의 상태에 대해 물으시고, 알려 주라고 하셨습니다.”
“루이스 전하가요?”
“예. 제 학생이기도 하지요.”
생각지도 못한 도움의 손길이 온다. 캐런은 혹시라도 자신과 태아에게 위험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걱정 없이 의사에게 몸을 맡겼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늙은 의사는 캐런을 보면서 주름진 얼굴을 기묘하게 일그러뜨리면서 말을 이었다.
“당신은 정말 임신했습니다. 하지만 그걸로 부귀영화를 손에 넣기는 어렵겠군요.”
“상관없어요.”
어차피 귀즈의 자식도 아닌 것을. 살기 위해서 둘러댄 거짓말에 불과하다. 그리고 귀즈도 믿지 않는다. 흥미를 위해서 서로 진실을 모르는 척 행동을 유보한 것일 뿐이다. 레이몬드가 올 때까지 살아남기만 하면 되는 문제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자신은 진정한 삶을 손에 넣을 것이다. 자식을 낳아서. 이번에야말로.
“…아닙니다.”
하지만 의사는 캐런의 희망에 찬 얼굴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태어나지 못해요.
…….
…….
“제, 제, 제가… 그렇게… 쉽게… 놓아둘 것이라 생각했습니까?”
듈란이 웃었다.
레이몬드 경, 제가 어떻게 보입니까? 저는 이다지도 약하고, 음험하고, 가진 것이 없는 자입니다. 당신도 알고 저도 압니다. 하지만 저도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영원에 대한 갈망 말입니다.
“캐런이 정말로 사랑하기 전까지 임신하지 못하도록 도와주렴.”
선택을 유보할 수 있도록 말이야.
캐서린은 그렇게 말했지만, 듈란은 그것을 들으면서 속으로 헛웃음을 쳤다. 대체 진정한 사랑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판단한단 말인가? 그리고 왜 자신이 그래야 하는가? 캐서린은 무엇을 믿고 그에게 거래하자고 했는가? 자신이 잃을 것이 없다고? 아니다.
캐런이 죽으면 영원이 사라진다.
자신은 절대로, 절대로 캐런이 임신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듈란 로이드는 생각했다.
내 마음이 달라지면 어떡하지? 실수하면 어떡하지? 순간의 흔들림 때문에 영원을 포기해 버리는 짓을 하면 어떡하지?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자신은 그리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캐런이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이대로 약혼이 진행되어서 결혼까지 가면, 그러면… 자신이 포기해 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영원을 포기하고 평범하게 살다가 죽는 범인의 삶을 선택해 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안 돼.
듈란은 거부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흔들려서는 안 될 일이다. 그래서 듈란은 좀 더 약을 먹이기로 결심했다.
좀 더 오래, 오래…. 좀 더 확실하게….
“왜죠?”
멍하니 캐런이 물었다.
희망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다가왔다가 갑작스럽게 사라진다. 언제나 불임이라고 생각했다가 갑자기 최악의 상황에서 찾아온 실낱같은 희망의 임신은 또다시 사라져 버린다. 캐런은 자신의 배에 손을 얹었다. 아직은 모르겠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왜죠? 제 몸이… 제가 뭘… 무슨 실수가….”
의사는 동정했지만 그렇다고 진실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약을 너무 많이 먹지 않았습니까?”
“약… 이번에는… 잘… 최근은 없는 것 같은데….”
어지럽다. 무엇을 먹었지? 누구를 만났지? 내 입에 들어간 것은… 속이 울렁거린다. 내가 이번에 무엇을 잘못해서 일이 실패한 걸까? 내가 무엇을….
캐런의 호흡이 가빠지자 의사가 캐런을 붙들고 다시 천천히 물었다.
“아주 오랫동안 먹은 것이 아닙니까? 아가씨 몸을 확인하니 이미 사산의 기미가 보입니다.”
이건 한두 달이 아니라 몇 년간 꾸준히 섭취한 것이 아니면 안 돼요. 당신의 몸은 아이를 가져도 낳지 못합니다. 이미 약을 너무 많이 섭취했어요. 그 아이는 태어나지 못합니다.
캐런 양, 괜찮습니까? 숨을 천천히 쉬어요. 당신 몸에는 별 이상이 없습니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몇 년 간 치료하면 차도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직 준비가 안 된 것뿐입니다. 지금은 우선, 숨을 천천히 쉬고….
비명을 지를 수는 없었다. 귀즈 왕세자가 옆에 있다.
눈을 크게 뜨고, 눈물을 참는다…. 괜찮다…. 지금 할 수 있는 것….
“여, 여, 역시… 그러기를 잘했, 습니다.”
듈란이 킬킬거리면서 웃었다.
“좀 걱정했습니다. 당신이 제가 연관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을 보면 과거의 제가 뭔가를 하기는 한 모양입니다. 전 그럴 계획은 없었고, 지금의 저는 그 방법도 모릅니다.”
두 다리가 으깨진 상황에서도 유쾌하기 짝이 없는 모양이었다.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르고 입가에도 피와 위액이 흘렀지만 그 웃음은 비명으로도 멈출 수 없었다. 듈란은 레이몬드가 자신을 고문할수록 확신했다. 이 순간은 결국 끝나고 또다시 돌아올 것이다.
“하, 하, 하지만 당신…. 경의 얼굴을 보, 보면… 제가 정말로 제대로 성공했나 보군요.”
이렇게 기쁠 수가.
당신의 얼굴을 보니 이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캐런은 정말로 영원을 손에 넣었군요. 과거의 저는 이제까지 정말로 계속 성공했군요. 지금 당장 죽어도 전 다시 살아나고 이 모든 고통도 없어지겠군요.
레이몬드 경, 전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지금도 더 이상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기쁠 수가!
쏴아아아아.
빗줄기가 거세졌다. 캐런은 얼굴에 비를 맞는 것을 다행으로 느꼈다. 분명 자신은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레이몬드도. 서로에게 울지 말라고 위로할 힘도 나지 않았다.
“당신도… 알고 있었군요.”
그래서 당신은 그토록 의미 없다는 말을 반복하면도 제 곁에서 소원을 다 들어주겠다고 한 것이군요. 지난번에 이미 소용이 없다고 확신해서. 이셀라와 친구가 되든, 되지 못하든, 임신을 하든, 못 하든…. 죽어도 살아도 당신과 옆에 있어도 떨어져 있어도… 결국 이번에도 끝은 같으니까.
서로를 동정한다.
자신들은 이다지도 불행하고 가엾고 서로의 상처를 위로해 주는 것도 할 수 없다. 동정심이 북받쳐 올랐다.
생각해야 한다. 생각해야 한다. 하지 않으면 자신은 죽는다. 지금… 할 수 있는 것… 을….
캐런은 입을 열었다.
“루이스 왕세손이 귀즈에게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캐런.”
“어차피 우리가 죽지 않는다면, 이번에도 끝은 같다면, 이번에야말로 루이스 왕세손이 사는 것을 봐도 괜찮겠지요.”
“전… 당신이 고생하는 것이 싫습니다.”
캐런은 주먹으로 레이몬드를 쳤다.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목구멍에서 꺽꺽거리는 분노와 절규가 흘러나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괴로워요!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이 더 끔찍해요! 레이몬드 경! 내가 죽어도 세상이 흘러가기를 원해요! 무언가를 남기기를 원해요! 시간이 흐르기를 원해요! 당신이 살기를 원해요! 그걸 모르겠어요?”
이건 살아 있는 것이 아니야. 유령이 세상을 떠도는 거야.
“무엇이든 의미 있는 삶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이셀라와 친구가 되었다구요. 아버지와 같이 식사를 하고 어머니에 대해서 말을 나누고, 낸시에게 사기를 당해서 고생하고…. 이런 걸… 다시 처음부터 하면, 그건… 그건 정말로….”
퍽, 퍽. 몇 번을 쳤다. 레이몬드에게 화를 내서는 안 된다. 분명 그는 자신 때문에 이 지옥에 떨어진 사람이다. 레이몬드가 말하지 않은 것에 분노해서도 안 된다. 자신을 걱정해서 말하지 않은 것이다. 답이 없으니까.
“레이몬드 경, 당신은 저를 믿지 않으니까 사랑할 수 있다고 했죠.”
캐런은 레이몬드의 옷을 콱 끌어당겨 노려보았다.
“그럼 우리는 죽지 않으니까 한번 끝까지 가 봐요. 저는 이셀라와 친구가 되고 싶었고, 성공했어요. 그럼 당신은 루이스를 왕위에 올려요. 전 그게 보고 싶어요.”
우리가 보지 못할 미래라도.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런, 전 항상… 당신만 있으면 됩니다.”
레이몬드가 천천히,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일이면 뭐든지 합니다.”
레이몬드의 얼굴은 정말로 평안해 보였다.
캐런이 자신을 떠밀어 주기를 바란 것이었다.
캐런이 죽어도 시간은 흘렀다. 세상은 돌아갔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있었고 죽은 사람이 있었고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 유독 기억에 남는 사람들도 있었다.
캐런이 그랬고, 루이스가 그랬다.
자신을 동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소년은 왕이 되지 못할 운명이었다.
그리고 백 번의 삶을 살고 난 후에는 자신의 목적에 있어 더 이상 중요하지도 않은 소년이었다. 그는 레이몬드의 첫 번째였던 백 번째의 삶에서, 레이몬드의 여름날, 청년의 시절에는 중요한 사람이었다. 약간은 안타깝고, 가슴 아프게 하는 소년 하나.
만약에 레이몬드가 정말로 청년이었다면 그는 루이스도 포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백 번이 넘는 삶을 겪는 동안 한 번도 살지 못한 루이스는 그냥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그의 형처럼 자신의 손을 떠난 채로 굴러가는 수레바퀴. 기억을 찾은 그에게는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그녀가 허락했으니까. 자신은 좀 더 위선을 베풀어도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둘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재밌군.”
귀즈 왕세자는 턱을 괴고 그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당연히 자신의 자식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있었겠지. 아이의 아버지가. 하지만 저렇게 뻔뻔하게 궁 안까지 끌어들여서 끌어안고 있다니.
헛웃음이 난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귀즈에게 아인 남작이 물었다. 귀즈는 자신의 컬렉션들을 훑어보았다. 무엇이 좋을까?
“내일 캐런 하이어에게 이 칼과 독약을 건네주도록.”
“무엇이라고 할까요?”
“내가 명령하면 바로 루이스를 죽이라고 해.”
“성공하겠습니까?”
“실패해도 큰 상관은 없다.”
귀즈는 히죽이면서 캐런의 표정을 상상했다. 성공하면 자신은 귀찮은 일을 더는 것이다. 루이스도 죽이고, 그 죄를 저지른 캐런도 사형대에 보내야지. 임신한 애첩이 왕위에 눈이 멀어서 미친 짓을 했다고 하면 누구나 그럴듯하다고 여길 것이다. 언제쯤이 좋을까. 귀즈는 시간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네 가족의 눈과 혀를 선물로 받게 될 것이다…. 이런 말을 하도록.”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아인은 약간 굳은 얼굴로 품 안에 그것들을 집어넣었다.
“잠깐, 자네가 할 일이 하나 더 있어.”
“예?”
아인 남작은 나가려던 걸음을 멈췄다.
“지금 내 기사들과 함께 하이어 영주에게 가도록. 구면이지?”
“그렇습니다만….”
“눈과 혀를 뽑고 목을 잘라 와라.”
성공하든 실패하든, 난 그년이 비명 지르는 꼴은 봐야겠어. 사형대에 가기 전에 말이야.
“알겠습니다.”
아인 남작은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자네도 봤지?”
귀즈 왕세자는 몸을 돌렸다. 거기에는 창백한 신관 하나가 가만히 서 있었다.
“여자는 다 똑같아. 하지만 일이 잘 끝나면 자네에게도 저걸 한 번쯤은 다룰 기회를 주지.”
“…예.”
듈란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캐런에게 제공된 공간은 방 하나 정도가 아니었다.
왕세자비 정도의 왕족에게는 보통 방 하나뿐이 아니라 여러 구역을 배정해 준다. 방 일곱 개와 홀 하나, 응접실 하나, 화실, 악기가 놓여 있는 음악실까지. 4층짜리 궁전 건물 하나가 왕세자비의 몫이었다.
주인이 없어지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런 공간은 일반적으로 사교 시즌에 다른 귀족들에게 내어 주거나 그도 아니면 미술품의 보관 장소로 쓰고는 했다.
하지만 죽은 왕세자비의 구역은 계속 비워져 있었다. 왕세자의 궁과 바로 가까이에 있는 넓은 공간을 그렇게 낭비하는 것은 예사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다 피했기 때문이다.
“귀신이 나온대”
“죽은 왕세자비가 울면서 돌아다닌대”
“비명 소리도 들린대”
그건 단순한 소문이 아니었다. 실제로 사용인들이 자꾸만 사라지거나 죽어서 발견되었다. 아무리 조심해도 계속해서 흉흉한 일들이 일어나자, 사용인들은 구역을 관리하는 시간을 최소화하고 가능한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고 했다.
귀즈 왕세자의 궁과 바로 붙어 있는 왕세자비 궁은, 방탕과 타락, 사치의 장소인 왕세자 궁과 달리 을씨년스럽고 어두웠다. 귀즈 왕세자가 캐런 하이어를 머물게 하기 전까지는. 캐런은 하녀를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세숫물은 제때 가져다주면 안 되겠니?”
“죄, 죄송합니다…. 하이어… 아가씨.”
하녀는 눈치를 보면서 물이 담긴 은쟁반을 그녀의 앞에 두었다. 캐런 하이어라는 화려한 여자는 귀즈 왕세자의 옆자리를 꿰차더니 하늘 아래 무서운 것이 없는지 갖가지 귀중품을 온몸에 쌓아 놓고 살았다.
‘저거 하나만 있으면 평생 편하게 살 텐데.’
하녀는 눈을 굴렸지만 차마 가져갈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귀즈 왕세자가 무서웠기 때문이다. 귀즈 왕세자의 주변에서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한 사용인들은 호된 꼴을 보게 되었다. 이는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귀즈 왕세자는 까다로운 귀족들 중에서도 단연코 으뜸이었다. 귀즈 왕세자의 비위를 맞추는 아인 남작이나 다른 귀족들도 그의 까다로움에 자주 한숨을 쉬면서 방에 처박혀 담배를 줄곧 피워 대고는 했으니, 상것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청소하는 자들이 눈에 띄는 것조차 싫어하는 것이 귀즈 왕세자였다. 까다롭기 그지없었고 무엇보다 시간 단위로 변하는 변덕이 심했다.
날이 추우니 불을 때라 지시해서 불을 때면 나를 쪄 죽일 셈이냐 하면서 찻잔을 얼굴에 집어던지는 것이 귀즈였다. 그래서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면 보기 흉한 꼴로 자신을 괴롭게 한다며 발로 차는 행위도 예사였다.
아침에는 창녀를 불러 다이아를 얹어 주고는 밤에 개에게 물려 도망가는 모습을 보며 박수치는 것이 귀즈였다. 그나마 그렇게 살아 나가면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가끔은, 소리도 없이 사라지고는 했다.
그래서 사용인들은 가능한 그에게 거슬리지 않기 위해 있는 듯, 없는 듯 지내고, 시키지도 않은 일들은 죽어도 하지 않아야 하며 시키는 일은 죽어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세숫물이 너무 차가우시면 뜨거운 물을 더 타겠습니다.”
“아니, 이 정도면 괜찮아. 꽃잎은 앞으로 뿌리지 마. 세수할 때 걸리적거려.”
“알겠습니다.”
귀즈 왕세자에 비하면 원하는 것과 불만을 정확히 지적하는 이 붉은 머리 아가씨는 아주 편한 상전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녀의 지위였다. 귀즈는 그녀에게 왕세자비의 거처를 내려 주었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직위도 내려 주지 않았다.
‘어떻게 대해야 하지?’
그것이 공통된 사용인들의 고민이었다.
귀즈 왕세자가 그녀를 왕세자비처럼 대한다면 평민이 아닌 하급 귀족들이 그녀의 시중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캐런의 남편에게 직위를 주어서 그녀에게도 공작부인 급의 칭호를 수여해야만 한다.
그러나 캐런은 아직 미혼이었고, 귀즈가 그녀를 어디까지 올릴지는 아무도 몰랐다. 한없이 귀애하다가도 어느 날 사라지는 것이 그의 옆자리였다. 그런 불안한 자리임에도 정작 당사자는 시큰둥하게 몸을 치장하고 한숨을 쉴 뿐이었다.
“내가 부탁한 화장품은?”
“내일 도착한다고 합니다. 치장을 도와줄 아이를 부를까요?”
“그래.”
캐런은 눈을 감았다. 시녀들의 조심스러운 손길이 그녀의 몸 위를 오고갔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캐런의 시중을 드는 것이 맞는지도 사실 자신이 없었다. 캐런 자체는 까다로운 상전이 아니라고 해도 그 뒤에 버티고 있는 귀즈 왕세자 때문에,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시녀장님 쪽에서는 아무 말 안 내려왔어?”
“정부가 감히 왕세자비 궁을 쓴다고 화내셨어.”
“그게 끝이야? 어떻게 하라는 말은 없으셨어?”
“응…. 우리는 어쩌지?”
“가만히 있어야지 뭐. 너도 조심해.”
“그래.”
귀즈 왕세자가 오랫동안 총애할 애첩이라면 무조건 납죽 엎드리는 것이 편하다. 아니, 그 정도의 애첩이라면 자신들이 아니라 당장 본궁에서 귀족 시녀들을 요청해야 한다. 자신들이 옆에 있는 것 또한 무시당하는 거라고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녀장은 단호하게 그 요청을 거부했다.
“남작 가문의 여식들을 어찌 직위도 없는 여자의 시중을 들게 한단 말이냐!”
총 시녀장은 미래 왕의 어린 정부를 고까워했다. 왕비도 아닌 정부가 자신의 영향력을 넓힐수록 자신의 권위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아직 정식 직위도 없는 것을 보아하니 왕세자 옆에서 오래 갈 이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도 시녀장의 결정에 한몫했다.
왕은 늙었지만 왕세자에게 고집스럽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있었고, 왕세손은 어렸고, 왕궁에 여자는 늙은 왕의 정부 외에는 없었다. 이러다 보니 캐런 하이어의 등장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귀즈 왕세자가 어디까지 그녀를 높일 것인가.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왕족이냐, 정부냐, 곧 내쳐질 창녀냐.
긴장의 눈길이 오가고 모두의 머릿속은 팽팽 돌아가며 그녀의 미래를 점쳐 보고 있었다.
쨍그랑!
“아니, 아니 되옵니다, 전하!”
조용한 날은 길지 않았다.
왕세자비 관저의 하녀들은 여기에 와서는 안 될 사람을 보면서 기겁했다. 여기에 오기를 아무도 바라지 않는 사람. 바로 루이스 왕세손이었다.
“네가 감히 나를 막는 건가?”
루이스 왕세손은 자신의 앞을 막은 하녀들을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뒤의 기사들 또한 험악한 얼굴을 했지만, 하녀들에게는 루이스의 화내는 모습보다 귀즈가 더 무서웠다.
“용서하시옵소서, 전하. 하지만 이 방에 거하시는 분은…”
“내 어머니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이지.”
“아니, 아니옵니다, 전하! 어찌… 어찌 감히….”
“지금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나?”
“…전하! 하지만 저희가… 저희가 귀즈 왕세자 전하에게 크게… 추궁받게 됩니다….”
왕세자비의 거처를 담당하는 하녀들은 고개를 숙인 채 안절부절못하면서 루이스 왕세손을 말렸다. 그러나 그 말이 결정적이었다. 귀즈 왕세자를 입에 담은 그들을, 루이스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내려다보다가 옆의 기사들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그러니까 지금 저들은 나중 일이 귀찮으니 날 막는다는 거군?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기사들은 루이스 대신 눈을 부라리며 대답했다.
“엄하게 다스리셔야 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궁의 법도는 지엄한 것인데, 저들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법도를 어기고 있습니다. 왕족의 앞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국법입니다.”
“아, 아니옵니다!”
“귀족이 왕족에게 간언할 시에 끼어드는 자는 어떻게 해야 하나?”
“조항이 없습니다. 즉결 처분을 할 수 있습니다.”
“……!”
하녀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본디 자신들은 왕족에게 말을 거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 처지였다. 루이스 왕세손이 나이가 워낙 어리고 귀즈와 달리 유순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그동안 인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루이스 왕세손은 캐런 하이어라는 존재가 꽤나 거슬리는지 전에 없는 날카로운 태도를 보였다.
“지금의 무례는 용서하겠다. 하지만 자네들의 일은 자네들이 해야 하는 것. 내게 그 책임을 지우려고 하지 마라. 내 관대함을 이용하려고 들지 마라.”
“…물, 물러가겠습니다.”
그제야 하녀들은 애첩의 존재가 루이스의 계승권에 대한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난 그 여자를 보러 가겠다.”
루이스 왕세손의 차가운 얼굴은 그의 아비와 닮아 보였다.
“언젠가 아버지가 날 죽이려고 할 줄 알았지.”
“믿으세요?”
“믿고 말고 할 게 어딨어. 당연한 걸. 거기 설탕 좀 주겠어?”
루이스는 한숨을 푹푹 쉬면서 홍차에 우유와 설탕을 집어넣었다, 한 개, 두 개, 세 개… 다섯 개까지 집어넣고 나서야 루이스는 홍차에 입을 대었다. 하지만 어린아이 같은 모습은 입맛뿐이었고 얼굴은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전하, 당분간은 설탕을 많이 넣은 차는 드시지 마세요. 독이 들어갈 시 판단하기 어려워요.”
“아버지가 날 죽이려면 그런 조잡한 약은 안 넣을 거라고 믿어. 무색무취는 기본이겠지.”
루이스는 툴툴거리면서 음료수에 가까운 홍차를 마셨다.
내가 설탕에 약을 넣으면 어쩌려고 그러시나. 캐런은 속으로 생각했지만 그 말을 내뱉지는 않고 대신 자신의 품에서 크리스탈 병을 꺼냈다.
“무색무취인지는 모르겠지만 약을 받기는 했어요. 그리고 밧줄과 단도도.”
“…이것이?”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맛보시려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재밌는 농담이지만 너무 살벌하군, 하이어 영애.”
“전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랍니다.”
루이스는 크리스탈 병 안에 든 투명한 액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지만 약은 보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혀에 대 보고 바로 뱉으면 어떻게 될까?”
“전하, 전 오래 살고 싶어요.”
여기 있는 전부가 목이 날아가겠지.
루이스 또한 동의했다. 그리고 자신의 호위 기사에게 약병을 건넸다. 기사는 조심스럽게 약을 자신의 품에 담아 온 다른 병에 넣고, 빈 병을 캐런에게 돌려주었다.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게 증거가 될까요?”
“아니, 아버지가 날 죽이기로 했다는 증거로 내기는 부족해.”
루이스는 한숨을 쉬었다.
“그냥 하이어 영애의 목이 날아가겠지. 날 음해하려고 했다는 증거로.”
“…그럴 것 같기는 했어요.”
캐런도 한숨을 쉬었다.
역시 루이스 왕세손이 그녀에게 협조하고, 심지어 그녀를 믿는다고 해도 상대 또한 왕족이다 보니 상황이 좋지 않았다. 캐런이 증언한다 하더라도 귀즈 왕세자는 ‘저것이 왕위에 욕심이 뒤집혀서 거짓말을 한다’며 바로 내칠 것이 뻔했다.
“다 같이 생각해 보자.”
루이스가 제안했다.
하지만 사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기는 했다.
지금 당장은 귀즈 왕세자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캐런은 귀즈 왕세자가 자신에게 쥐여 준 단도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예전 생에서 끌려갔던 지하실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는 지하실에서 루이스도 데리고 왔었지. 그리고 그때의 그는 루이스를 죽이고, 캐런에게 죽임을 당했다. 아무리 권력자라고 해도 칼로 찌르면 죽고, 독을 먹으면 죽고, 목을 조르면 죽는다. 단도를 쓸어내렸다. 이번 생을 포기하면… 답은 비교적 쉬울 것이다.
“제가 귀즈 왕세자 전하를 죽이면 됩니다.”
“그거 말고.”
“그것이 가장 현실적으로 전하를 지킬 수 있는 방법입니다.”
“…차나 더 마시게, 레이몬드 경.”
루이스를 대신해 근위 대장이 말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포기하지 않고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전하….”
“차나 더 마셔요, 레이몬드 경.”
캐런은 레이몬드를 말렸다. 자신이 먼저 말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레이몬드 경, 그건 고려할 가치가 없는 제안이야.”
“왜 그렇습니까?”
레이몬드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루이스 전하가 절대 얽히지 않도록 완벽하게 처리하겠습니다.”
“절대 얽히지 않는 건 불가능해.”
“가능합니다.”
“그만둬. 못 들은 것으로 하겠어.”
레이몬드는 더 말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캐런은 그가 한다면 정말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도 방금 전에 귀즈의 목을 도끼로 치는 것이 제일 빠르지 않을까 하는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는가. 살인이 제일 쉽다.
아무리 왕세자라 하더라도 사람이니까. 레이몬드는 정말로 왕세자를 찾아가서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요, 그만두세요, 레이몬드 경. 뒤도 생각하셔야죠.”
결국 죽음뿐이다.
그런 방식은 결국 그 뒤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사형대로 끌려갔던 것처럼. 캐런은 레이몬드가 저렇게 가끔씩 외골수적인 면이 지나치게 보인다는 것을 알았다. 그만큼 레이몬드는 오래 살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제까지 루이스가 귀즈에게 죽는 모습만 백여 번을 봤으니, 무뎌진 것이다. 살인에 대해서도 무뎌지고 그 후의 상황에 대해서도 무뎌진다. 죽음이 인생에서 멀어지고 현실감각은 사라졌다.
“루이스 전하의 입장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럼에도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레이몬드는 강경했다.
“반발도 있고 의심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가장 좋은 방법이 공격이라는 것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 오히려 그런 소문은 전하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레이몬드 경!”
루이스의 얼굴이 굳었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을, 그것도 내 아버지를, 이 나라의 왕세자를 먼저 공격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어?”
레이몬드는 입을 다물었다. 생명이 하나뿐인 사람과 이미 수백 번 반복한 사람의 입장이 같을 수는 없었다. 루이스는 그만큼 신중해져야 했다. 하지만 그 신중함이 루이스를 죽였다.
“명분이 필요해. 아무런 증거 없이 아버지를 칠 수는 없어.”
루이스가 정당하게 왕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과정이 필요했다.
레이몬드와 캐런은 명분을 찾기보다는 귀즈를 죽이는 것이 그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한 번의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루이스 주변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한숨을 쉬면서 고민에 빠졌다.
적을 안다. 이유도 안다.
그런데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명분이 없다.
침묵만이 감돌았다. 사실 이 모임에서 더 나올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보였다. 레이몬드가 낸 방안을 루이스가 거절했으니 남는 것은 하나였다.
“결국 지금은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군요.”
캐런이 말했다.
“귀즈 전하는 제게 조만간 명령을 내린다고 하셨어요. 그 순간에 틈이 나지 않겠어요?”
“루이스 전하, 위험합니다. 공격받을 것을 알고 기다리는 것은 현명한 방법이 아닙니다.”
레이몬드는 바로 반박했다.
그는 루이스를 살리고 싶어 했지만 그렇다고 캐런이 계속 귀즈 왕세자 곁에서 위험에 빠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둘의 무게를 잰다면 당연히 캐런이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이미 몇 번이나 루이스를 가볍게 여겨 버린 적이 있었다. 레이몬드의 얼굴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 갔다. 캐런은 레이몬드의 말을 끊었다.
“저는 괜찮아요.”
“…하이어 양에게는 미안하게 됐어. 자네의 용기에는 감사해.”
“전하!”
“그만해요, 레이몬드 경.”
캐런은 일어났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전하. 귀즈 전하는 그렇게 참을성이 깊으신 분이 아니니 조만간 움직이시겠지요. 그동안 몸 조심히 계세요.”
“고마워.”
“천만에요.”
캐런은 그에게서 감사를 들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레이몬드는 납득하지 않고 루이스에게 말했다.
“전하, 그저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길입니다. 그저 잠자다가 얼굴에 수건이 잘못 덮여도, 말을 타다가 넘어져도, 먹던 식사가 목에 막혀도 사람은 죽습니다. 전하처럼 어린 분이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얼마나 기다리시려구요?”
“알아.”
“하루, 이틀이면 괜찮습니다. 1년 내내 긴장하는 걸로 끝나면 다행입니다. 전하가 성인이 된다고 해서 끝이 난다면 그리 하셔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전하, 귀즈 전하는 원하는 것을 얻기까지 포기하시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기다려야 한다는 거야.”
“전하의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말입니까?”
“레이몬드!”
쾅!
참다 못한 캐런이 먼저 탁자를 박차고 소리쳤다.
“무엄하게 굴지 말아요! 감정이 격해져도 해서는 안 될 말이 있어요!”
“레이몬드 경, 폐하에게 사과드리십시오.”
“겁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전하. 하지만 제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레이몬드 경!”
캐런은 레이몬드에게 약을 먹이고 싶을 지경이었다.
한번 시체가 되고 나면 정신 좀 차리지 않을까?
“진정하고 생각해요.”
“캐런.”
“그런 식으로만 말하지 말고 지금 제 증언을 제외하면 제대로 된 증거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라구요. 그리고 레이몬드 경이 혹여나 걸리면, 당연히 루이스 왕세손 전하의 목까지 같이 날아가는 것도 아시죠?”
“캐런 하이어 양!”
근위 대장이 버럭 외쳤다.
캐런은 자신 또한 격해져서 말이 험하게 나온 것에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방금 전에 레이몬드를 나무란 자신이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캐런이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자 루이스는 한숨을 쉬면서 손을 들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불필요한 소모전은 그만두자.”
“네.”
루이스는 자신의 손으로 찻주전자를 잡았다. 캐런이 급하게 일어났지만 루이스는 손을 내저어 캐런의 행동을 거절하고는 자신의 손으로 차를 따랐다. 그러고는 설탕을 아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설탕 때문에 끈적해 보이는 차를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며 이마를 찌푸렸다. 루이스는 그렇게 연거푸 두 잔을 더 마시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내가 만약에, 왕이 될 생각이 없다고 하면 아버지는 날 가만히 내버려 두실까?”
“…….”
침묵만이 감돌았다. 루이스는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미안, 철없는 소리를 했군.”
“아직 그러셔도 되는 나이입니다.”
하지만 철없다는 소리에 부정은 하지 않는다.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즈 왕세자가 루이스를 죽이는 것을 그만둘 리도 없거니와, 루이스가 왕위에 욕심이 없으니 살려 달라고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아직까지는 철저한 할아버지, 현왕의 보호 아래 있었지만 누워서 오늘내일하는 노인이 언제까지 그를 지킬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의무와 책임이 있다. 피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루이스는 가끔씩 다 때려치우고 싶을 때가 있었다. 자신의 탄생부터 하루하루 숨을 쉬는 것까지 전부 누군가의 기대와 의도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갑갑했다.
자유로운 삶을 바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소한의 안전만이라도 보장받고 싶었다. 친한 귀족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지 않기를, 자신의 애견이 죽지 않기를, 매번 식사 때마다 시종이 독이 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먼저 맛보지 않는 일상을 원했다.
“아버지가 죽기 전까지 끝나지 않겠지….”
루이스는 지독하게 단 차를 맛보면서 인상을 썼다.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한 끝에 루이스는 결정을 했다.
“나는 다 같이 이야기하고 싶어. 난 좀 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버지를 끌어내리고 싶어.”
루이스 왕세손은 공론화를 원했다.
“절대 안 된다고 말씀드려.”
“각하.”
“레이몬드 경, 자네가 그런 소리는 알아서 막았어야지 어떻게 그런 소리를 전하가 하시게 했는가?”
팬케이르 후작은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레이몬드를 바라보았다.
“자네 지금… 왕실의 치부를 공개하겠다는 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소리인줄 아는가? 다른 곳도 아니고 왕궁 안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공개하겠다고? 그것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라고 전하게.”
팬케이르 후작은 태생이 왕족이라 그쪽의 치부를 들추는 것에 상당히 예민하게 반응했다.
“루이스 전하가 위험합니다.”
“그래서 전하 주변에 가능한 안전한 사람을 배치하지 않았는가. 귀즈 전하도 멍청하지 않아. 그리고 그런 스캔들을 만천하에 공개하다니, 그런 짓을 했다가는 후에 루이스 전하에게도 누가 될 걸세. 그리고 애초에 그것을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대체 출처가 어디냔 말이야.”
“제 연인입니다.”
팬케이르 후작은 너무 노골적인 표정을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자네 연인이 누구인데?”
“귀즈 전하의 정부인 캐런 하이어입니다. 그녀가 직접 지하실로 끌려 들어갔다가 나왔고, 귀즈 왕세자 전하의 계획에 대해 들었습니다.”
“…캐런 하이어라면….”
“예, 캐서린 노라 에니드의 딸입니다.”
팬케이르 후작은 한숨을 쉬었다.
“한동안 영지 내 일이 바빠서 사교계 쪽 일은 끊고 지냈더니, 하… 그렇군. 그녀의 딸을 정부로 삼았어. 왜 그렇게 사람들이 수군거렸는지 알겠군. 난 그저 어린 정부라서 그런 줄 알았더니….”
팬케이르 후작은 기억을 더듬어 그가 무시하고 넘어갔던 소문들을 기억해 냈다. 귀즈 왕세자가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여자를 정부로 들여 왕세자비 궁에서 머물게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것만 해도 심히 부도덕한 일이었지만, 귀즈가 본디 그런 소문을 신경 쓰면서 자제하는 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후작은 관심을 두지 않기로 했다. 정부는 결국 정부이니까. 여느 때와 같은 변덕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귀즈 전하가 그녀에게 준 독약입니다. 명령하면 루이스 전하에게 먹이라고 했다더군요.”
레이몬드는 자신의 품에서 약병을 꺼내 팬케이르 후작에게 넘겼다. 팬케이르 후작은 작디작은 약병을 들어 올려 바라보았다. 투명하고 보기에는 물과 다를 바 없었다.
“이게 전부인가?”
“나머지는 근위 대장이 가지고 있습니다. 루이스 전하 쪽의 의사에게 보내 독성을 확인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확인 결과는?”
“송아지만 한 투견이 약 한 방울로 바로 쓰러졌습니다.”
“…….”
팬케이르 후작은 레이몬드가 건넨 약을 보면서 한숨을 연거푸 쉬었다. 그저 장난으로 치부할 것은 아닌 것이다. 이제 유예 기간은 없다. 서로가 서로를 보면서 언젠가, 하던 시기는 이미 지났다.
“우선 조만간 루이스 전하의 거처를 내 저택으로 옮겨야겠어.”
“영지의 본가로 말입니까?”
“아니, 내 영지는 변경이라 위험하고, 북부에 있는 여름 별장으로 전하를 피신시켜 놓는 게 좋겠어. 왜 그러나?”
레이몬드의 표정이 석연치 않았다.
“루이스 전하는 공론화를 원하십니다. 루이스 전하께서 귀족들 앞에 직접 나셔야 하시지 않겠습니까?”
“택도 없는 소리지.”
팬케이르 후작은 일축했다.
“루이스 전하의 나이가 몇이라고 생각하나? 그리고 귀즈 왕세자 대신 루이스 왕세손이 즉위하면 12살에 즉위하시게 되네. 그렇게 어린 나이에 즉위하는 건 건국 시대에나 있던 일이야. 손자뻘 되는 왕에게 누가 충성한단 말인가?”
“몇 년만 기다리시면 분명 성군이 되실 겁니다.”
“성군이 어디 개인의 우수성으로 되는 것인가?”
팬케이르 후작은 헛웃음을 지었다.
“어찌되었든 등극하신 후 한동안은 섭정을 받으실 수밖에 없어. 그럼 필연적으로 몇 년간은 내가 곁에 있어야겠지. 그렇다면 귀찮은 일은 내가 떠맡는 것이 낫다. 어차피 난 왕가를 떠날 생각이니 부담도 없고.”
“후작님.”
“아무리 그래도 귀즈 왕세자는 루이스 전하의 아버지야. 루이스 전하에게 갈 공격은 가능한 한 줄여야 해.”
“…하지만.”
“불명예는 내가 안고 간다.”
팬케이르 후작은 단호했다.
하지만 그는 실패할 것이다.
“귀즈가 루이스를 죽였다.”
그는 뼛속까지 보수주의자이기 때문에 새로운 수가 가져오는 변화를 두려워했다. 그는 귀족들의 반발을 항상 가까이에서 봐 왔으며 그의 영지는 항상 극도로 보수적이어야 하고 원칙으로 다스려야 하는 국경 부근이었다.
그로 인해서 그는 항상 루이스를 살리는 것에 실패했었다.
“루이스 전하의 결정을 존중해 드리고 싶습니다.”
“자네는 그렇다면 12살에게 그만큼의 무게를 지어 주는 것이 맞다고 보나? 아버지를 끌어내린 아들이라는 소리를 듣게 할 셈인가?”
“그것 또한 루이스 전하의 몫입니다.
“지나치게 잔인한 말이군. 자네가 그런 소리를 할 줄은 몰랐는데.”
레이몬드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반대하는 것은 결국 다가올 미래를 알기 때문이다. 그동안 반복된 루이스 왕세손의 죽음을 알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후작을 어떻게 설득해야 하지? 지금 후작은 자신의 욕심 때문에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왕세손이 보다 안전하기를 바라는 애정에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이다.
답은 하나밖에 없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이군. 일주일만 루이스 전하 신변 보호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게. 이후 일은 그분을 피신시키고 생각해야지.”
후작의 말은 무시하고 진행해야겠군.
레이몬드는 결심했다. 일주일이면 충분하다.
“후우….”
시온은 심호흡을 하고 새카만 어둠만 있는 굴뚝 아래로 내려갔다. 물론 허리에는 줄을 단단히 고정시킨 채였다. 몸을 크게 띄워 아래로 향한다. 몇 초 동안 아래로 떨어지다가 중간중간 발로 벽을 차기를 여러 번. 탁, 탁, 탁, 탁….
푸드드득.
굴뚝 안 어딘가에 날짐승들이 둥지를 틀었는지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끼에엑, 하는 소리와 얼굴에 약한 통증이 느껴졌다. 발톱에 긁힌 것 같았다. 시온은 손으로 근처에서 푸드덕거리는 짐승을 쳐 냈다. 박쥐였다.
‘젠장, 안 보이는 곳이라고 청소도 안 하나? 어떻게 궁전에 박쥐가 살아?’
시온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다른 건 몰라도 얼굴은 다치면 안 되는데. 나가자마자 꼭 연고를 발라야지. 흉 진 얼굴을 이셀라가 싫어하면 어떡하나. 얼굴로 먹고사는 시온으로서는 예민한 문제였다.
“읏.”
그러다가 크게 휘청거렸다. 시온은 혀를 차고 몸을 바로 잡아 아래로 내려가는 데에 집중했다. 박쥐 정도에 놀라서는 안 된다.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일로 놀라선 절대 안 되니까.
‘이러다가 들키면 사형이겠지?’
당연할 것이다.
왕국의 기사가 왕궁에 몰래 잠입하고 있다. 그리고 갖가지 위험한 물건까지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 들키면 사형은 물론이고 죽기 전까지 갖가지 고문을 당하며 배후를 불라고 할 것이다.
“…내가 왜….”
시온은 탄식을 삼켰다.
지금은 주어진 일에 집중할 때다.
레이몬드는 단면도를 가리키면서 시온에게 부탁 아니, 명령을 했다.
“내 추측으로는 이곳에 귀즈 왕세자의 소장품들이 있을 거야. 가서 수가 얼마나 있는지 확인하고, 동서쪽의 벽 네 귀퉁이에 폭탄을 설치해 둬. 필요하면 밖에서 벽을 무너뜨릴 거야.”
“여기가 어딥니까, 레이몬드 경?”
시온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설마 아니겠지. 아니라고 해 줘.’
하지만 레이몬드는 태연하게 설명했다.
“단면 구조를 보고도 모르겠나? 왕궁이지, 시온 경. 왕세자 궁과 왕세자비 궁이야.”
기어코 왕궁을 폭탄으로 날려 버리고 마는구나.
시온은 노골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레이몬드 경의 폭탄은 결국에 쓰일 운명이었던 것이다. 레이몬드는 시온의 어깨를 꽉 잡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시온 경, 지금은 도망가고 싶어도 못 도망가는 거 알겠지. 허튼 생각 말게.”
“…레이몬드 경, 만에 하나 제가 죽으면 지옥 가실 겁니다. 이렇게 앞길 창창한 젊은이를….”
시온의 말에 레이몬드가 코웃음을 쳤다.
“자네는 지옥 안 갈 것 같나? 이왕 가는 거 좀 모험해 봐. 잘 풀리면 그 공이 개국 공신급이야.”
“무슨 그런 끔찍한 농담을 하시죠. 전 죽으면 이셀라 양이랑 천국 갈 건데요.”
“천국행을 바라기에는 자네도 꽤나 여기저기에 원한을 깊이 샀을 텐데.”
“이셀라 양이 제 이름으로 헌금을 많이 합니다. 헌금이 사회에 환원되겠죠.”
“…그 터무니없는 논리를 반박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군.”
시답지 않은 농담이 오고 갔다.
시온은 농담 따먹기를 그만두고 도면을 상세하게 보다가 레이몬드에게 물었다.
“밖에서 무너뜨리려면 벽이 아니라 바닥이어야 하는 게 아닌가요?”
“이 구조를 보면 벽이야. 단면도와 평면도의 두께를 잘 봐. 높이가 조금씩 차이 나고 벽 두께에도 차이가 있어. 일부러 여유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눈속임을 친 거야. 북향의 두 번째 굴뚝으로 들어가.”
탁.
시온은 중간에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층에 멈췄다. 위치를 확인해야 했다. 사람들이 오고 가고 떠드는 소리와 희미한 약품 냄새가 났다. 세탁실이다. 북쪽의 1층이었다.
“폐하는 아직도 누워 계신대?”
“어쩔 수 없지, 나이가 벌써 여든이 넘으신걸.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잖아.”
“하지만 폐하께서 오래 사셔야지, 귀즈 전하가 아니라 루이스 전하가….”
“쉿, 그런 소리 하지 마.”
하녀들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역시나 귀즈의 평판은 바닥이었다. 루이스가 왕좌에 앉으면 최소한 아랫사람들은 매우 기뻐할 것이다. 시온 또한 루이스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귀즈 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그것도 성공해야 할 수 있는 말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가능한 귀즈의 평판을 바닥까지 확실하게 끌어내려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성공한다면 분명 도움이 될 수 있겠지. 잘하면 이셀라 옆에서도 부끄럽지 않을 만한 명예를 얻을 수도 있고.
그렇게 스스로를 북돋으며 시온은 허리춤에 단단히 묶인 줄을 확인하고 도르래를 움직여 더 내려갔다.
탁.
시온은 멈췄다. 지하 1층 창고였다. 그리고 손에 닿는 벽돌을 세면서 천천히 더 내려간다. 지하 2층.
‘확실히 위층과 층 높이가 다르군.’
도면에서는 지하층의 높이가 같았다. 시온은 허리를 벽면에 기대고 다리에 힘을 주어 좁은 굴뚝 틈에 몸을 고정했다. 한결 손이 자유로워진 그는 허리에 찬 등을 꺼내 불을 붙였다.
후두두두두둑.
“으….”
차라리 박쥐가 얼굴을 공격했을 때가 나았다. 갑자기 밝아진 탓에 벌레들이 우르르 흩어졌다. 이런 것은 익숙해지려고 해도 좀처럼 쉽지가 않았다. 시온은 손을 뻗으려다가 불쾌감에 발로 더듬어 이동할 곳을 찾았다.
“역시나….”
레이몬드가 말한 대로 좁은 통로가 있었다. 환풍구는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시온은 벌레들이 부디 빨리 피하기를 바라며 등을 휙휙 돌리고는 들어갔다.
어둡고 촘촘한 공간이었다. 자신도 약간 끼는 느낌이 들면서 조금 숨이 막혔다. 시온보다 체구가 더 큰 레이몬드가 들어오기는 확실히 힘들 것 같았다.
“…으랏차.”
큰 공간이 나왔다. 시온은 손으로 구멍 뚫린 무거운 돌을 들어냈다. 아무도 없었다. 이때 빨리 움직여야 한다. 등을 허리에 매단 채로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여기서 동쪽 벽… 윽.”
시온은 역겨움에 인상을 찌푸렸다.
등을 들자 방 안의 시체들이 보였다. 레이몬드에게서 미리 들었기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시온은 여기로 끌려왔을 이셀라가 새삼스레 안타까웠다. 곱게 자란 아가씨가 마주하기에는 지나치게 험한 곳이다.
당장이라도 태워 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시온은 벽에 필요한 폭탄을 설치하고 다시 허리에 매달린 줄을 잡았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국보급 보물들이 시체 사이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혀를 찼다. 이 방이 드러나기만 하면 증거를 잡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레이몬드 경은 어떻게 이걸 다 알았지? 시온은 잠깐 생각하다가 더 이상 머리를 굴리기를 포기했다. 레이몬드는 자신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아니까 그들을 통해서 알았을 것이다. 왕세손이나 후작 또는 캐런이 알려 주었겠지.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하는 것이다. 시온은 벽의 귀퉁이에 있는 장식 아래에 폭탄을 설치했다. 그리고.
덜컥.
“……!”
시온은 밖에서 들리는 걸음 소리에 급하게 등을 껐다. 지하실이 다시 새카맣게 변했다. 그리고 자신이 들어온 곳으로 재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천장으로 팔을 뻗어 몸을 위로 옮기고 다시 입구를 밀었다.
드르륵.
‘젠장….’
돌 끌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바로 방문이 열렸다. 시온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때에 맞춰 올라왔는지 확신이 없었다. 다리 쪽이 혹시나 보이지는 않았을까. 왜 바로 들어오지 않을까.
설마 들켰나? 바로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하나? 하지만 시온이 몸을 움직이자 벌레 몇 마리가 빠르게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몸을 빨리 움직이면 그만큼 더 큰 소동이 일어날 것이다.
‘들켰나? 아닌가?’
움직일 수가 없다.
시온은 몸을 고정한 상태로 자살 방법을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얼굴이 드러나면 분명 레이몬드에게로 의심이 이어질 것이고 루이스 왕세손과 바로 연결될 것임을 알았다.
자살하느니 도망가야 한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계획이 또 한 번 무너진다. 시온은 숨을 천천히 쉬었다.
“안 들어가고 뭐 하는 거지?”
귀즈 왕세자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방 안이 밝아졌다. 정 안 된다면 다 죽이고 자신도 죽는 방법도 있다. 머릿속에서 갖가지 경우의 수가 팽팽 돌아갔다.
“…아닙니다, 전하. 제… 가 잘못 본 것 같습니다.”
“무엇을 잘못 봤단 말인가?”
“…장, 식물 중에… 제가 아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어두운 곳에서 별생각을 다 하는군.”
시온은 환풍구 안쪽으로 기어 들어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자신이 아는 사람이 서 있었다.
‘듈란 신관?’
무사히 귀환한 시온을 레이몬드가 반겼다.
“잘했어. 다른 부분은 내가 처리했으니 이제 내일을 기다리지.”
“…내일이요? 다음 달 아니었습니까?”
시온은 처음 듣는 말에 기겁했다.
“그래, 내일. 후작 전하의 협조 없이 루이스 전하 단독으로 일을 진행하시는 거니까.”
“왜 미리 말씀 안 해 주셨습니까?”
“자네가 실패할 수도 있으니까. 서운하나?”
“아뇨, 그렇게 어리지는 않습니다. 그냥 놀라서요. 제가 오늘 성공 못 했으면 어쩌시려고 그러셨어요.”
“강제로 밖에서라도 터트리려고 했지. 자네 덕에 많은 사람들의 안전이 지켜질 거야.”
“아무튼,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그럴 일이란 거는 알지만.
시온은 턱을 긁으면서 눈앞의 수없이 쌓인 약과 총알을 쳐다보았다.
“어디 전쟁이라도 나가십니까?”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충분히 보급해 두는 거야. 없으면 불안해서.”
총알이 떨어지는 것만큼 괴로운 것은 없다. 시온은 동감하고 자신도 쌓여 있는 폭약을 챙겼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시온을 말렸다.
“옷 안에 넣을 수 있을 정도만 챙기게. 자네는 바로 루이스 전하의 호위로 붙어 있어. 호위 기사만으로는 좀 불안해서 그래.”
“그럼 차라리 레이몬드 경이 바로 옆에 계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난 루이스 전하 곁이 아니라, 좀 더 멀리서 지켜볼 생각이야.”
“안전한 곳에서 말입니까.”
“빈정거리지 마. 내가 곁에 있는 것보다 그게 자네에게도 더 안전할 테니까.”
시온은 두 손을 들었다.
“예….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제가 간 곳 말인데요. 레이몬드 경 말대로 시체가 많이 걸려 있기는 했습니다. 귀즈 전하가 들어온 것도 확인했구요. 왕가에서나 쓸 법한 귀중품들도 같이 있었으니 입증이 어려울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행이군.”
“그런데… 다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듈란 로이드 신관입니다.”
시온은 검은 머리의 청년 신관을 말했다. 그는 분명 캐런의 친척이었다. 그리고 신관이었다. 그런데 돕기는 고사하고, 신관이면서 그 시체가 가득한 방에 있다니.
“신경 쓰지 마. 우리의 계획에는 차질이 없을 거야.”
레이몬드는 대수롭지 않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온은 기가 막혀서 항의했다.
“캐런 양에게서 우리의 정보가 그에게로 흘러갔을 수도 있습니다.”
“알아. 하지만 큰 문제는 없을 거야. 자네를 발견 못 했을 수도 있고.”
왜 저런 곳에서 허술하게 대처하지?
시온은 레이몬드에게 항의하려고 했지만 레이몬드는 고개를 저었다.
“난 그를 알아.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너무나 잘 알지. 그렇게 말하는 레이몬드의 입가에는 쓴웃음마저 떠 있었다.
맑고 화창한 새파란 여름이었다.
바람은 신선하고 신록은 우거지고 꽃은 만발하는 정오였다.
수도의 가장 빛나는 계절은 여름이었기 때문에 사교계는 활발했다. 어른들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루이스 전하, 오랜만이에요!”
“전하를 뵙습니다.”
“모두들 갑작스러운 부름에 와 줘서 고마워.”
“루이스 전하의 부름인데 당연한 일입니다.”
루이스는 자신에게 인사하는 어린 귀족들과, 그 뒤에 있는 많은 부모들을 맞이했다. 시온은 루이스가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땀을 약간 흘리는 것을 보고, 그 역시 긴장하고 있음을 알았다.
“내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모임을 주최하게 된 이유는… 모두와 상의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야.”
“무슨 일인가요?”
엘바 백작 부인의 딸인 리안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운을 띄우는 것이 심상치가 않았다. 루이스는 천천히 리안과, 다른 사람들에게 눈을 하나하나 맞추고는 입을 열었다.
“내 아버지인 귀즈 왕세자의 악행에 대해서 고발하기 위해 불렀어.”
오늘 귀즈의 방은 폭파되고, 그의 악행은 만천하에 공개될 것이다.
후작은 반대했지만 그것이 루이스의 선택이었다.
레이몬드도 머리로는 후작의 의견이 좀 더 합리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왕족의 치부를 지나치게 공개하지 않고, 피해자 한둘만 크게 부각시킨 다음 후작이 그것으로 귀즈 왕세자를 끌어내린다.
그 방법이라면 현왕 또한 도와줄 것이다. 이후 성인이 된 루이스가 왕위를 이양 받고, 후작은 한동안 섭정을 하다가 은퇴한다.
그러나 루이스가 그 방법을 거부했다.
“사건을 축소시키고 싶지도 않아. 숨기는 것도 싫어. 만약에 이것 때문에 나를 걸고넘어진다면 그건 그때 극복하고 싶어. 만약 내가 그릇이 되지 않는다면 이 일이 언젠가 나를 잡아 내려가게 하겠지. 그것으로 됐어.”
그것은 어린 나이에 오는 치기임을 안다. 비밀을 혼자 안고 있는 것에 지친 탓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일을 알리고 다 같이 고민하자고 하는 것은 일시적으로 루이스의 마음을 가볍게 해 줄 수는 있지만 그걸로 끝이다.
그래도 레이몬드는 그의 선택을 존중해 주고 싶었다.
이제까지 루이스는 한 번도 살아난 적이 없었으니까.
때로는 상식을 파괴하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다.
캐런은 창 너머로 루이스가 있는 곳을 보고 있었다.
왕세손이 티 파티를 여는 정원은 왕세자 궁과 왕세자비 궁 사이의 정원이었다. 여기서 귀즈 왕세자도 과거에 자신을 내려다봤을 것이다. 이번에는 어떨까? 캐런은 유리창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한여름이었지만 유리는 차가웠다.
“어디를 그렇게 보는 거지?”
“루이스 전하가 티 파티를 열고 있네요.”
“그래, 내가 시킨 것은?”
“전하의 명대로 했어요.”
캐런은 속삭였다.
귀즈는 캐런에게 티 파티에 들어갈 찻잎에 약을 섞으라고 지시했다.
“조금 있으면 일이 터지겠네요.”
조금 있으면 폭탄이 터질 것이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캐런은 그 광경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시간에 맞추어 테라스로 나가 있어야 한다. 테라스 바깥쪽에 레이몬드가 설치해 놓은 그물로 떨어진 후 몸을 숨겨야 한다.
그런데 귀즈 왕세자는 아침부터 캐런의 방에서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래. 장소를 옮기는 것이 어떻겠느냐?”
“아뇨…. 여기서 구경하고… 싶어요.”
어서 좀 나가 줬으면. 나가서 네 자식이 죽나 안 죽나 구경이라도 하란 말이야. 그러다가 레이몬드나 시온 손에 죽으면 더 좋고. 캐런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티 파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루이스가 말을 하고 있는지 주변의 귀족들이 크게 동요하며 무어라고 말하는 것이 보였다.
“네?”
“레이디 리안, 저게 무슨 소리인가요?”
“그러니까 루이스 전하가… 음… 귀즈 왕세자 전하 대신 바로 왕위를 받겠다고 선전 포고 하시는 것 같아요, 레이디 솔라.”
“…그러니까 좋은 거죠? 귀즈 왕세자 전하가 나빠서니까.”
“모르겠어요.”
아이들은 무슨 소리인지 잘 몰라서 멍한 얼굴을 하거나, 아니면 귀즈가 나쁜 사람이라는 것에 흥분을 하고 있었다.
“전하, 저는 무조건 전하 편을… 읍….”
“가만히 있어라.”
사색이 된 것은 어른들이었다.
“루이스 전하… 지금 무슨… 무슨 소리를….”
“오늘 날씨가 너무 더워서 전하께서 헛것을 보셨나 봅니다.”
귀족들은 갑작스러운 루이스의 발표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여기 모인 귀족들은 전부 귀즈 왕세자보다는 루이스 왕세손 쪽의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세손의 갑작스러운 발표는 사람들을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다.
“전하, 우선 폐하께 알려 드리는 것이 먼저인 것 같습니다.”
엘바 백작 부인이 루이스에게 간청했다. 사람들은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것을 보고 아무도 미리 연락 받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저희에게 그런 사실을 알려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지금 저희가 판단하기에는 사안이 너무나 중대합니다.”
“알아. 그래서 알린 거야.”
“전하… 저희는….”
루이스는 약간은 홀가분한 것 같았다. 자신뿐이 아니라 전부 다 두려워하고 있었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풀릴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귀족들도, 어린 귀족들도 모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도 다 같이 고민하고 두려움을 나누면 훨씬 나아질 것이라 생각했어.”
루이스는 언제나 수많은 비밀을 혼자 안고 있어야 했다.
자신의 출생의 비밀. 아버지의 광기. 그 외에도 수많은 귀족들의 비리와 알력 싸움들. 자신 앞에 있는 이 많은 귀족들 가운데에서도 누가 진정한 자신의 편인지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들도 전부 같은 문제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명백한 증거가 있습니까?”
“있어. 그리고 곧 보여 줄게.”
루이스는 시온의 얼굴을 보았다. 시온은 시간을 가늠하며 손목시계를 보자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
그때였다.
“전하! 루이스 전하! 본궁에서… 본궁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귀즈 왕세자가 캐런의 손목을 꽉 쥐었다. 캐런은 얼굴을 찡그렸다. 통증이 밀려 올라왔다.
“내가 모를 것 같았나?”
“…알아도 이제는 어쩌실 수 없을걸요.”
캐런은 얼굴을 찡그리면서 동시에 웃었다. 이번에도 죽을 수 있다. 귀즈가 자신의 머리를 총으로 쏠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죽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이번은 괜찮다. 레이몬드와 서로 상의해서, 둘이 한참의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다음의 왕은 루이스 전하가 되시겠네요.”
귀즈 왕세자가 끔찍하게 웃었다.
콰앙!
쾅!
콰콰쾅!
동시에 굉음이 울렸다.
왕세자비 궁에 있는 비밀의 방, 그 방의 벽이 터져 나가고 있었다. 시종이 외치는 소리는 그에 묻혀 버렸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식을 찾아 소리 질렀고 아이들은 울고불고 고함을 치거나 부모나 조부모의 품으로 달려갔다.
“다들 진정해! 그냥… 보여 주려는 것뿐이야!”
방이 드러났다.
귀즈 왕세자의 악취미가 가득 담긴 방이었다.
시체, 시체, 시체가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폐하?”
싸늘하게 식은 늙은 왕의 주검이 있었다.
“모를 거라 생각했나? 알았지. 난 다 알았어. 네가 수를 쓴다는 것도, 아버지가 루이스를 왕으로 바로 앉히려는 것도, 팬케이르 후작 놈이 같잖은 계획을 짠다는 것도 나는 전부 알았단 말이다.”
처음부터 캐런 하이어는 그저 장난감에 불과했다.
캐런을 통해서 정보가 흘러나가면 더욱 좋다. 만일 캐런이 루이스를 독살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일은 잘 풀리겠지만, 그녀에게만 의존할 정도로 귀즈 왕세자는 어리석지 않았다.
자신이 루이스를 죽이려 한다고 생각하게 하자.
실로 틀린 것도 아니니, 정보를 찾아보더라도 그 사실이 나올 것이다. 실제로 귀즈는 루이스를 언제고 죽일 생각을 하고 있기도 했다. 태어난 순간부터 죽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은 죽일 준비를 할 것이다.
하지만 죽이는 것은 루이스뿐이 아니다.
자신의 아버지이자 루이스의 아버지인 현왕 또한 죽어야 한다.
그리고 루이스와, 루이스를 따르고 자신에게 반발하는 귀족들 모두 죽어야 한다.
공론화하겠다고? 더 크게 퍼트려서 빠져나갈 곳이 없게 하겠다고?
해라.
더더욱 큰 혼란이 귀즈를 도울 것이다. 전부 죽이고 난 다음 수습하는 것은 귀즈 하나일 것이다.
“…아…. 윽….”
귀즈는 캐런의 손목을 잡고 질질 끌었다. 캐런은 발버둥을 치다가 머리를 강하게 찧었다.
“놔… 주세요!”
“내가 왜?”
귀즈는 캐런의 팔을 강하게 쥐어 잡고 움직였다. 계단에서도 질질 끌려 올라가다가 캐런이 난간을 잡고 버티자 귀즈 왕세자는 캐런에게 다가갔다.
“계속 이렇게 버티겠다면 여기서 네 배를 갈라 주마.”
“…….”
“아기를 위해서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전하.”
“아, 이미 죽었나? 의사가 그러던데.”
그것도 알고 있었군.
캐런은 입술을 깨물었다. 왕실에서 일하는 의사들은 항상 살아날 구멍을 여러 개 파 둔다. 자신에게도 말했던 사실은 당연히 귀즈에게도 말했을 것이다.
캐런이 힘을 빼자 귀즈는 팔을 잡고 캐런을 질질 끌고 올라갔다.
“이제 구경을 하자고.”
일이 커지면 커질수록 좋다.
루이스와 귀즈는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둘 다 사건을 묻는 것보다 터트리는 편을 더 선호했다. 비록 그 성격은 달랐지만.
귀즈는 그동안 자신의 오랜 취미가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것에 음험한 기쁨을 느꼈다. 사람들의 당황하는 얼굴, 우왕좌왕하는 모습, 공포에 질린 비명 소리가 무척이나 즐거웠다.
“귀즈 전하가 종을 울리셨다. 위로 피신하신 모양이야.”
“어서 신호해.”
대기하고 있던 귀즈의 사병들은 총을 단단히 쥐었다. 발을 맞춰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대관식은 이제 시작된다.
왕이 사라지고 명령 체계가 사라지자 왕실군은 당황해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고 왕이 승하하셨다는 비명 소리가 퍼지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누구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가?
“뭘 하고 있나! 당연히 귀즈 왕세자 전하의 명령을 따라야지! 어서 귀즈 전하의 명을 받들어 루이스 왕세손을 체포해라!”
“루이스 전하가 귀즈 왕세자 전하의 방을….”
“루이스가 궁전을 폭파시켰다!”
시온은 폭발 후의 연기 속에서 빠르게 움직였다. 자신이라면 분명 이럴 때에 제일 먼저 루이스를 노릴 것이다.
“전부 엎드려!”
군화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시온은 싸늘하게 식은 왕의 모습을 보자마자 상황이 다르게 흘러가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루이스 전하, 웅크리고 식탁 밑에 계십시오. 그리고 옷을 벗고… 젠장.”
시온은 팔을 휘둘러서 루이스에게 다가오는 남자의 목에 식탁 위의 나이프를 꽂았다.
“크아아악!”
“시온 경!”
“손에 칼을 들고 있었습… 식탁 밑으로!”
루이스는 더 말을 하지 않고 몸을 숙였다. 하지만 그 순간 거대한 식탁 아래로 총을 휘갈기려는 남자가 있었다. 아래에는 소란을 피해 도망가서 몸을 숙인 사람들이 있었다. 시온은 급하게 총을 꺼냈지만 이미 늦었다
탕!
그 순간 남자의 손이 날아갔다.
“크… 악!”
그리고 끝이었다. 연이어서 그의 머리가 날아갔다. 레이몬드가 먼 곳에서 호위 사격을 하고 있었다. 시온은 레이몬드가 있을 만한 위치를 떠올리려고 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사병들이 오고 있습니다!”
“…우리 편인가?”
“귀즈 왕세자의 사병입니다!”
시온은 주머니에 넣어 둔 총알의 개수를 셌다. 다 쓸 수만 있으면 좋으리라. 자신과 다른 기사 셋 그리고 레이몬드의 지원 사격으로 최소 쉰 명을 상대한다…. 계산은 끝났다.
어린 남동생아, 노력을 많이 하는구나.
하지만 그래 봤자 별수 없을걸. 아버지는 이미 죽었으니까.
그리고 넌 그래 봤자 열두 살이라고.
귀즈는 웃으면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루이스와 언뜻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50명이면 레이몬드 경 혼자서도 충분하지.’
레이몬드의 가장 큰 장점은 초장거리 저격이었다. 그리고 더더욱 놀라운 것은 빠른 속사(速射)였다. 레이몬드의 집중력과 정확도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는 일반 저격수의 몇 배나 되는 속도로 전장을 쓸었다.
누군가가 그의 위치를 파악할 때쯤이면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을 혼자서 전부 다 죽여 버리는 것이다. 레이몬드의 시력은 조준경도 필요치 않았고, 그는 사격 위치도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그 이상을 내다보고 선정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엄호가 있다면 50은 그리 두려운 숫자가 아니었다.
시온은 루이스에게 자신의 옷을 덮어 준 후 후방으로 물러나게 했다. 자신이 시간을 끌다가 여차하면 폭탄을 던지면 된다. 루이스 편의 귀족들이 죽을 수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루이스였다.
레이몬드가 시온을 루이스 곁에 둔 것은 옳은 판단이었다. 시온은 우선순위를 두고 대상을 보호하면서 급변하는 상황을 이끌어 가는 데에 능했다. 시온은 천천히 나무 뒤에서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총을 마구 갈기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아군이 죽어 나가자 발포를 중단했다. 일방적인 학살을 생각하면서 뛰어들었지만 오히려 사냥당하는 입장이 되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찾아! 저격수가 있다! 전부 뒤로 물러나서 나무 아래로 간….”
“으아아아악!”
선두에 있던 남자의 턱이 총에 맞아 날아갔다. 그 꼴은 잔인하나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다. 턱이 날아간 본인도 패닉에 빠졌고 주위의 사병들 역시 그를 보면서 비명을 질렀다.
“곧 후발대가 합류한다! 당황하지 마!”
누군가의 외침에 상황이 어느 정도 수습되었다.
”후발대라니…“
루이스가 시온의 뒤에서 중얼거렸다.
돌아가는 상황이 당황스러웠지만 그는 용케도 패닉에 빠지지는 않았다. 루이스는 무너진 벽 너머에 파랗게 식은 얼굴을 한 왕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연기가 가라앉자 멀리서도 왕의 얼굴이 보였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흔들어 깨우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아버지는 대체 언제부터 준비했지?’
루이스는 왕세자 궁을 노려보았다.
자신을 죽일 시기가 언제든 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왕을 죽일 것이라고는, 거기에 더해 루이스 쪽의 모든 귀족들까지 죽여 버리려고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루이스의 눈에서 분노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레이몬드 경이 네 애인이었던가? 꽤나 하는구나.”
귀즈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제 애인은….”
“저런 솜씨는 그 말고 없다는 건 나도 알지. 괜히 이제 와서 거짓말하지 말고 내려다보려무나. 네가 레이몬드와 관계가 있다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으니까.”
캐런은 아직까지도 욱신거리는 팔다리를 문지르면서 귀즈 왕세자 옆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빠르게 시온과 루이스의 위치를 파악하려 했지만 잘 보이지가 않았다.
폭탄의 안개가 점차 거둬지자, 캐런은 아래를 볼 수 있었다. 혼란했던 시간은 이내 지나가고 사람들은 긴장을 한 채로 대치 상태에 있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귀족들은 여기저기 엎드려서 아이 위에 자신의 몸을 포개고 있었다.
“참으로 눈물 나는 부정이고 모정이군.”
“…….”
“난 지금 내 아들을 죽이려고 하는데…. 참 아이러니하지 않나?”
캐런은 입을 다물었다. 귀즈도 자신에게 그 이상의 반응을 바라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귀즈는 연극을 보는 것 같은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저것도 길지 않을 거야.”
이제 곧 판은 뒤집힐 것이다.
귀즈는 그렇게 읊조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쿵, 쿵.
“젠장. 아직도?”
“곧 올 거야. 가만히 있어!”
사병대의 부대장이 다른 사람들을 윽박지르면서 대기시켰다. 벌써 반절이 죽었다. 움직이는 족족 저격 대상이 되어 버리니 고개 돌리는 것조차 두려웠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자신들이 먼저 루이스 편의 귀족들을 깡그리 정리해 두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하지만 곧 올 것이다. 그들의 주인은 이 나라의 왕이 될 사람이었다.
“지금 네놈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느냐! 루이스 왕세손 전하에게 이 무슨 짓이냐!”
그들이 가만히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담이 큰 귀족 아이 하나가 큰 목소리를 냈다. 자신들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자 슬슬 만용 비슷한 용기가 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꼴에 더 화가 나서 부대장은 고함쳤다.
“닥쳐! 애새끼들은 유모 젖이나 빨아!”
“…닥칠 것은 네놈이다!”
“…죽여 버리겠다.”
견디다 못한 사병 하나가 나서서 자신의 총을 들어 아이를 겨누었다.
“꺄아아악!”
탕!
하지만 쓰러진 것은 병사였다. 견착(肩着)도 채 하지 못하고 땅바닥에 나뒹구는 시체가 되어 버렸다. 사병들은 더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젠장….”
사병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당하더라도 분명히 루이스 왕세손의 주변 기사 몇몇만을 조심하면 될 문제라고 생각했다. 왕궁이다 보니 다른 귀족들은 호위 기사를 데리고 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왕세자 전하에게서 아직 명령은…?”
“없다. 하지만 잠깐만 더 대치하면 된다. 저 귀족들이 밖과 연결될 수단은 없어. 이제 곧… 오면… 전부 죽을 거야….”
루이스 왕세손의 곁에 있는 귀족들은 고작해야 또래 자식들이 있어서, 자식들에게 연을 맺어 주려고 하는 젊은 부부 층들이 대부분이었다.
좀 더 노련하고, 좀 더 음흉한 귀족들은 루이스 왕세손보다 귀즈 왕세자를 선호했다. 귀즈 왕세자의 개인 인성보다 여러 가지 정황상 그가 루이스보다 훨씬 더 빨리 왕좌에 오를 것임을 계산하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루이스 왕세손이 아닌 귀즈 왕세자에게 협력한다는 의미로 각자의 사병들을 보내기로 약속했다. 새로운 왕의 추대에 다들 동의했기 때문에 저들만 죽이면 일은 전부 끝난다.
지금 멀리서 저격수가 자신들을 저지하고 있지만, 수천 명이나 되는 후발대가 온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아무리 뛰어난 저격수라도 수천 명을 한 번에 처리할 수는 없다. 한 번에 한 발뿐이다. 그때 자신은 뒤로 빠져서 저격수를 찾아내 절대 곱게 죽이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다른 사병들이 곧 올 거야….”
분명히 더 올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약속했다.
그리고 자신들은 귀즈 왕세자와 같이 영광을 누릴 것이다.
“…곧….”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총을 들지 못했다. 자신들이 손에 총을 들기만 하면 머리가 날아갈 것이다. 지원병을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면 올 것이다. 그들은 분명 약속했다고 했다….
쾅!
“…뭐지?”
귀즈 왕세자는 핏발 선 눈으로 이를 악물었다. 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상황이 그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캐런은 옆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귀즈는 정신없이 방 안을 오가며 미친 듯이 중얼거렸다. 조금 전까지 여유롭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다들 어디 간 거지? 왜 이리 늦는 거야?”
약속한 사병들이 오지 않고 있었다. 궁 안의 헌병들 중 일부를 포섭했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승기를 잡기 위해서는 귀즈 왕세자의 사병과 측근들의 사병이 먼저 시작해서 앞을 다 처리해 둬야 했다. 그래야 루이스 왕세손의 지지 세력 전부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귀즈 왕세자의 개인 사병들은 레이몬드에 의해 저지당하고 있었고 귀족들은 약속한 사병을 보내지 않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들에게 귀즈가 약속한 대가가 있었고, 그들은 대부분 루이스가 왕위에 오르면 크게 손해를 볼 사람들이었다.
루이스가 그들을 포섭했을 가능성은 없다.
“그런데… 왜?”
왜 오지 않지?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거지? 귀즈의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 찼다. 왜 아무도 자신의 사병을 보내지 않고 있단 말인가?
“왜?”
“…….”
캐런은 입을 다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저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전하.”
“네가 모를 리가 없어…. 네가….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지 않느냐!”
“…….”
캐런의 팔을 강하게 잡고 흔들어도 나오는 대답은 없었다.
“네년이 무엇을 망쳤느냐?”
“전하, 전 아는 것이 없습니다.”
“네가 수백 년을 살았다고 스스로 고하지 않았느냐. 대체 무슨 짓을 했냔 말이다.”
귀즈의 손이 캐런의 팔이 아닌 목으로 올라갔다. 여차하면 손에 힘을 줄 태세였다. 하지만 귀즈가 흥분할수록 캐런은 점점 더 침착해졌다.
“글쎄요. 그걸 믿으셨어요?”
“…….”
“멍청인가.”
꽈악.
귀즈가 부들거리면서 손에 힘을 줬다. 캐런의 목이 졸렸다. 캐런은 인상을 썼지만, 그렇다고 별다른 반항도 하지 않았다. 캐런의 발이 공중에 떠올랐다. 귀즈의 손이 점점 더 강하게 목을 졸랐다. 캐런의 시야가 하얗게 변할 때였다.
쾅!
“놓으시죠, 전하.”
시온 일렉트라가 루이스 왕세손 옆에서 귀즈 왕세자를 총으로 겨눴다. 얼굴은 땀과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눈은 형형했다.
“당장 그 여자 놓고 나오시라구요, 귀즈 전하.”
귀즈의 손에서 캐런이 떨어졌다.
“쿨럭, 쿨럭.”
캐런은 목을 부여잡고 기침했다.
귀즈는 캐런을 힐끗 쳐다보고는 이내 시온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시온이 겨눈 총을 보자 같잖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네놈의 이름을 대라.”
“시온 엘렉트라… 인데 그냥 나오시죠. 대가리에 구멍 나기 싫으시면.”
“레이몬드 세이어테스의 종자였나? 고작해야 더러운 천민이…. 물러나라. 난 이 나라의 왕세자고 네놈이 총을 들 상대가 아니다.”
“종자 아니고…. 아, 젠장, 지랄 마쇼.”
시온은 피 섞인 침을 뱉으면서 귀즈 왕세자에게 다가갔다.
“물러나라고 했다.”
“옷 안에 손 넣는 순간 머리에 바람구멍이 세 개쯤 날 겁니다.”
“네놈이 무슨 말을 하든 내가 죽으면 네놈은 무조건 사형이다.”
“얼씨구.”
그때 어린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괜찮습니다, 아버지. 제 기사의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루이스.”
“아버님.”
두 눈이 마주쳤다.
“이제 끝났습니다.”
루이스 왕세손이 조용히 끝을 고했다.
“아가씨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수습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셀라의 애인은?”
“무사합니다.”
“그래.”
베르딕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야 끝났군.”
얼마 전 이셀라 에반스의 간곡한 부탁과 협박에 결국 베르딕이 넘어갔다.
“상인으로서 도박하겠사와요. 아버지, 루이스 왕세손에게 거시와요.”
집을 가출한 딸이 돌아와서 베르딕에게 총을 겨누고 하는 말이었다.
“이셀라, 미쳤느냐?”
“일단 이래야 아버지가 들어주실 것 같사와요. 말 끝나면 총 떨어뜨리겠사와요.”
“…이 미친….”
“루이스 전하에게 전 걸었사와요. 그리고 아버지는 협력하시어요. 이번이 우리 가문 전체가 살아남는 것을 넘어, 귀족 이상의 대우를 받을 기회니까.”
베르딕은 처음에는 딸에게 채찍을 들려고 할 정도로 크게 분노했지만, 이셀라의 긴 설득에 마음을 돌렸다. 손에 든 무기가 그 설득력을 더했다.
‘성공하면 귀족, 실패하면 역적이라.’
설득보다는 억지를 부리는 것에 가까웠지만, 이셀라가 걷잡을 수 없이 깊게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베르딕은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러가니, 귀즈가 아니라 루이스에게 걸어 보자.’
그리고 한 번 결심했으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베르딕 에반스였다.
베르딕 에반스는 루이스 왕세손과 직접 독대했다. 루이스 왕세손과 고리대금업자인 자신이 이렇게 얽힐 줄은 몰랐건만, 이것 또한 운명이고 기회이리라.
“후작도 폐하도 드릴 수 없는 것을 왕세손께 드리지요.”
“그대에게 마음 깊이 감사하네.”
왕세손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자, 베르딕은 자신이 줄을 제대로 섰음을 확신했다.
귀즈 왕세자는 고마움을 모른다. 그는 날 때부터 왕으로 태어난 자였다. 군림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베풀지 않아도 당연한 것이었다. 하물며 베르딕처럼 뒤가 구린 구석이 많은 상인에게는 더더욱 그렇게 대했다.
하지만 루이스 왕세손은 베르딕 에반스를 고리대금업자가 아닌, 자신을 깊게 도와준 이셀라의 아버지로서 대했고, 감사를 표했다.
베르딕이 그토록 원했던 대우였다. 돈만으로는 살 수 없는 왕족의 인정이었다. 또한 앞으로의 협력을 약속하는 대답이었다.
“루이스 전하와 대립하는 모든 귀족들의 명부를 가져와라.”
악행으로 부를 쌓은 상인이 루이스 쪽에 줄을 대기로 결심하자 판이 순식간에 뒤집히게 되었다. 귀즈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들이지만 루이스는 모르는 사실들. 수많은 귀족들의 부패와 비리들을 베르딕은 훤히 꿰고 있었다.
베르딕은 그들에게 편지를 하나씩 썼다.
그리고 귀족들은 또다시 선택해야 했고, 그들 전부는 침묵을 선택했다.
“이셀라가 날 많이 닮기는 했어.”
“그 이상이죠.”
셀리나가 옆에서 거들었다.
“이셀라 덕분에 좋은 기회를 잡았지.”
“아무렴요. 역시 사윗감으로 신분 상승을 노리는 것보다는 능력 있는 딸 하나가 더 낫네요. 좋은 혈통을 찾는 것보다 직접 영광을 드높이는 게 훨씬 낫지요.”
베르딕은 앉으나 서나 입에 웃음을 달고 살았다.
가장 걱정한 복수는 귀즈 왕세자의 몰락으로 걱정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왕을 죽이려다 실패한 그는 더 이상 왕자가 아니었다. 반역자였다. 귀즈 왕세자가 벌인 일로 그의 하야는 빠르게 결정되었다.
모든 귀족들이 찬성했으며 일반 백성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베르딕 에반스 같은 상인 계급들은 콧노래를 부를 지경이었다. 귀족들의 권위가 퍽 꺾였기 때문이다.
“새로운 왕이 우리의 도움을 받아 직접적으로 연을 맺게 되다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지. 그것도 가장 위험할 때 우리가 구했단 말이야.”
“아무렴요. 그리고 시온 엘렉트라 경도 한몫 단단히 했지요.”
“역시 이셀라가 남자 보는 눈이 있어.”
얼굴만 번지르르한 제비라고 생각했는데. 베르딕은 뒷말은 삼켰다. 벌써부터 부인인 셀리나는 사위 사랑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레이몬드가 이셀라의 약혼자로 있을 때는 껄끄러워서 같이 식사하는 것도 부담스러워하더니, 적당히 비위를 맞추고 살살 기는 시온이 셀리나의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거기에 이번에 제대로 한몫 단단히 한 주역이니 어찌 예쁘지 않을까. 시온은 에반스 가문에서 딸의 예쁘장한 장난감에서 제대로 굴러 온 금덩어리가 되었다. 이셀라고 셀리나고 전 약혼자인 레이몬드는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레이몬드 경은…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흥.”
깊게 관여한 베르딕은 레이몬드의 활약에 대해서도 들었다. 무엇보다 시온에게서.
하지만 레이몬드는 모든 상을 거절했다. 심지어 레이몬드는 자신의 활약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자제해 달라고 루이스 왕세손에게 직접 청했다고 한다. 자신은 그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며 그저 조용히 고향으로 돌아가서 사는 것만 바랄 뿐이라며.
진상을 아는 몇몇 귀족들은 레이몬드의 고귀함에 대해 칭송했지만, 베르딕은 진지하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셀라가 그런 놈이랑 결혼을 안 해서 다행이군.’
받아야 할 것이 있으면 세 배로 받아 내는 것이 에반스의 신조였다. 돈이나 땅을 받지 않으면 그 수십 배에 달하는 명예라도 받아야 하는 것이 세상의 당연한 이치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도덕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혼자만 아는 명예가 무슨 명예란 말인가? 그런 것은 허상이다. 그런 가치를 추구하는 자는 에반스 가문과는 절대로 엮여서는 안 될 이물질 같은 존재였다.
“대관식은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예요. 왕족들과 같은 구역에 앉을 테니 최고급으로 맞춰야 해요.”
“다음 주? 너무 빨리 잡혔군.”
아무리 오랫동안 아파 자리보전하던 왕이라고 하지만 채 시체가 식지도 않았을 텐데.
“너무 화려한 차림은 자제하는 게 좋지 않겠소?”
“베르딕, 지금 제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죠?”
감히 자신에게 사치를 자제하라고 하다니. 셀리나의 눈이 세모꼴로 변하자 베르딕이 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다음 주면… 국장을 대관식 이후에 치를 모양인데, 당신이 너무 화려한 걸 입었다가 군소리라도 들을까 봐 그러는 거요.”
베르딕의 말에 셀리나가 험악한 표정을 그만두고 혀를 찼다.
“베르딕, 당신은 아직 모르는군요? 왕은 아직 살아 있어요.”
“뭐?”
흰 국화에 둘러싸여 누워 있는 백발의 노인은 관 안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숨이 멎으셨습니다.”
“알고 있어.”
“조금이라도 쉬시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전하.”
“이렇게 있는 게 더 편해. 물러가라.”
“알겠습니다.”
왕실 주치의는 고개를 조아리고 물러났다.
루이스 왕세손은 관 옆에 엎드려서 밤을 지새웠다. 눈 밑이 눈물과 피곤으로 꺼멓게 죽어 있었다. 귀즈가 본인의 아버지인 현왕까지 죽이는 것은 그에게도 분명 큰 부담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형제를 거리낌 없이 죽일 수 있기에 자신의 부친이라고 할지라도 기회만 있다면 죽일 사람이라는 것을 간과했다.
“…흐윽.”
귀즈는 자신과 혈연관계지만 진정한 가족이라 생각하기 어려웠다. 루이스가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귀즈가 자신을 보는 시선이 좋지 않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언제고 자신을 죽일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루이스가 그를 볼 때 느끼는 감정은 공포와 동정심이었다. 자신은 그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태어났다. 그리고 루이스는 자신이 살아남는다면 언제고 그를 끌어내릴 사람은 자신일 거라고 예상했다.
팬케이르 후작이 자신을 퍽 신경 쓴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는 변경의 수비를 맡고 있는 대귀족이었고 둘이 만날 수 있는 것은 1년에 몇 번이 채 되지 않았다.
자신을 낳았다는 소문이 도는 부인은 자신과 눈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행여 진짜 친모라면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당연한 반응이기에 루이스는 굳이 그녀에게 찾아가지도 않았다. 투정을 부리기에는 스승들에게 들은 지식이 그의 머리를 너무 빨리 크게 만들었다.
“폐하.”
진정으로 루이스의 가족은 할아버지인 현왕밖에 없는 것이다. 루이스는 늙은 왕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차가웠다. 사람은 죽으면 전부 이렇게 되는구나. 차가운 고깃덩어리. 자신도 미래에 이렇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귀즈는 자신을 오늘 이렇게 만들려고 했다.
“…아버지.”
루이스는 작게 속삭였다.
한 번쯤 그렇게 불러 보고 싶었다. 물론 왕족이기에 세속적인, 다른 귀족들이 자식을 보는 것과 같을 수는 없었다. 팬케이르 후작만 하더라도 루이스에게나 온화하지 자신의 어린 자식들에게는 퍽 엄한 아버지였다.
너무 늙은 왕은 루이스에게 정도 이상의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루이스가 가족이라 여길 수 있는 사람은 왕 하나밖에 없었다. 결국 왕족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왕족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같이 있는 시간은 너무나 적었다. 왕은 왕 나름대로 할 일이 너무나 많았고 루이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만날 때마다 왕은 자신이 죽기 전에 루이스가 어느 정도 완성이 되어 있을까 불안해했었다. 결국 그러다가 이렇게 죽었지만.
보세요, 폐하. 보세요, 아버지. 제가 결국은 왕의 자리에 올라갑니다.
“…폐하?”
루이스는 왕의 얼굴에 손을 대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왕의 숨은 멎었었다. 하지만 방금 전에 루이스는 손끝에서 스치는 숨결을 느꼈다. 착각이다. 자신의 소망이 만들어 낸 환상이다. 그 귀즈가 이런 실수를 할 리가 없는데.
“설마….”
루이스는 다시 손을 대었다. 역시 숨결은 느껴지지 않았다. 루이스가 실망하여 다시 일어날 때였다.
“쿨럭, 쿨럭, 쿨럭.”
“…폐하?”
“…물, 물을 다오. 아무도 없느냐. 짐은 목이 마르다.”
왕은 거칠지만 똑바른 목소리로 말했다. 루이스는 털썩 주저앉았다가 일어났다. 그리고 왕을 껴안았다.
“…루이스? 왠일이냐…. 이곳은…? 짐이 쓰러졌느냐?”
“예. 그렇습니다.”
“저런… 괜찮단다.”
왕은 루이스를 토닥이다가 자신이 국화가 가득 찬 관에 누워 있음을 깨달았다.
“…뭐냐 이것은. 짐이 죽지도 않았는데 이건….”
“폐, 폐하?”
“꺄아아아아악!”
현왕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문을 열고 들어온 시녀가 소리쳤다.
“시, 시체… 아니 폐하께서 살아 계십니다!”
귀즈는 자신의 방에 주저앉았다.
어디서부터 문제였을까. 어디서부터 제대로 풀리지 않았을까. 계획은 분명히 잘 세웠을 텐데. 대체 어디서부터. 결과는 하나도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대체 왜… 왜 내가….”
귀즈는 베르딕이 귀족들의 약점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 줄 몰랐다. 그리고 베르딕이 안다고 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고리대금업자는 진창 바닥에서 굴리는 것이 당연했으니까.
그가 가장 몰랐던 것은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했던 귀족들의 지지가 한없이 약했다는 것이다.
금화로 살 수 있는 마음은 얼마든지 이해득실에 따라 떠나는 것이다. 그리고 귀즈의 곁에 있는 자들은 귀즈가 행하는 원초적인 폭력을 보며 언제든지 자신들도 그리될 수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별별 변태적인 취향이 있는 자들이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서로를 믿지 않았다. 더러운 사람일수록, 불합리하게 이득을 취하는 자들일수록 자신은 그렇게 행동해도 세상은, 타인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기를 바라는 법이었다.
자신은 악인이라도 상대방은 선해야 하며 또한 멍청해야 한다. 그렇기에 루이스의 어린 나이가 오히려 더 그들에게 귀즈 대신 루이스를 선택하게 했음을 그는 몰랐다.
“귀즈 전하, 왕께서 살아나셨습니다.”
“…뭐?”
“축하드립니다. 이것으로 목숨은 건지셨군요. 폐하께서는 자식을 차마 죽일 수 없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팬케이르 후작은 귀즈에게 빈정대면서 소식을 전했다. 귀즈는 뜻밖의 소식에 기가 막혀서 멍할 지경이었다. 아무리 자신의 뜻대로 안 풀린다고 해도 어떻게 이 정도까지 망가질 수가 있는 거지? 어떻게?
“…그럴 리가. 분명… 내 손으로 확실히….”
“더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귀즈 전하.”
“숨이 멎은 것을 확인했다고!”
“약이 불량이었나 보군요.”
후작은 악을 쓰는 귀즈를 무시하면서 나갔다. 이것으로 귀즈는 완벽하게, 끝났다.
침묵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현왕에게 익숙해져 있었다. 현왕은 70여 년 가량을 왕좌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현재의 왕 말고 다른 사람을 상상하기 어려워할 정도였다.
귀즈가 왕좌를 이어받지 않는 것에도 반발이 없었고, 그렇다고 너무 어린 루이스가 되는 것도 찬성하지 않았다.
변화를 싫어하는 대부분의 사람들. 그 사람들은 현왕을 죽이려고 한 귀즈 왕세자를 용납하지 않았고, 그에 대한 반발로 현왕의 어떤 선택에도 믿고 그것을 따를 준비가 되었다.
“귀즈는 변방에 유폐시키고, 루이스의 대관식을 올리겠다. 너무 어리다고 생각해 아직까지 미뤄 왔으나 이제는 아무도 반박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현왕의 발표에 사람들은 전부 고개를 숙이고 동의했다.
“전하의 말씀이 옳으십니다.”
반발 없는 평화로운 즉위식이 예고되었다.
“역시 약을 만든 것은 듈란 신관님이었군요.”
레이몬드는 왕궁의 정원 뒤편에서 캐런과 같이 앉아 있었다. 언제 그런 소란이 났나 싶게 조용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정원이었다. 하지만 여기저기 벽이 부서져 있었고 전투의 잔해가 남아 있었다. 캐런은 떨어져 있는 탄피 하나를 주워서 만지작거리면서 물었다.
“듈란이 가짜 약을 만들 것을 예상했어요?”
“예.”
“어떻게요?”
“이놈이 안 죽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레이몬드는 거대한 개가 자신에게 꼬리 치는 것을 쓱쓱 쓸어 주면서 대답했다. 생긴 것은 괴물 같은데 애교는 퍽이나 많다. 하지만 캐런이 손을 대자 바로 으르렁거리는 것이 재수 없어서 그녀는 바로 손을 뒤로 감추었다.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럴 겁니다.”
“전 동물이랑 별로 연이 없어요.”
“그리 마음 쓰이면 다음번에는 개나 고양이 백 마리와 친하게 지내기는 어떻습니까?”
“안 해요, 안 해. 개는 그만두고 설명이나 좀 더 해 봐요.”
캐런이 툴툴거리면서 레이몬드 옆에서 개를 구경하자 레이몬드가 개를 묶어 놓고 물러났다. 레이몬드가 자신의 손에 물을 부어서 손수건으로 닦고 나서야 캐런은 레이몬드 옆으로 가서 같이 걷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그를 보면서 알 수 있었습니다. 그의 지식의 범위나… 그가 어디까지 다다를 수 있는지 같은 것 말입니다. 그는 항상 마지막에 마음이 약해지더군요.”
“…듈란이요?”
캐런이 되묻자 레이몬드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착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부담스러움조차 견디지 못하는 구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죽음의 기로에 서더라도 남을 죽이지 못하는 사람이 그 자입니다. 차마 왕을 죽인다는 부담을 떠안고 멀쩡할 리가 없지요.”
레이몬드는 말을 이었다.
“스스로는 그것을 도덕이나 신앙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군요. 아무튼, 그가 이제까지 사람을 죽인 것은 단 한 번밖에 없습니다.”
캐런은 그 단 한 번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저군요.”
“예, 그 시점의 그는 당신이 되살아난다는 명백한 확신이 있었으니까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캐런만은 죽일 수 있는 사람이 듈란이었다. 비록 그에게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캐런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것이 그의 가장 악질적인 부분입니다.”
레이몬드는 듈란을 드디어 이해했다.
그의 악한 부분, 그의 약한 부분, 그리고 그가 견딜 수 없어할 점까지. 어쩌면 그리고 결심했다. 레이몬드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캐런과 눈을 마주치면서 물었다.
“이번에도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이번이 두번째로 최악인 청혼이에요. 레이몬드 경. 반지와 꽃 정도는 기본으로 가져오세요.”
물론 그것만 있으면 화내겠지만. 캐런이 가볍게 대답하고 계속 걸었다. 하지만 레이몬드가 따라오지 않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제가 가진 모든 것은 당신의 것입니다.”
“그런 당연한 것 말고는 더 없어요?”
“제 모든 것을 걸고….”
금발의 기사는 자신의 몸을 낮추고 자신의 레이디에게 맹세했다.
“당신에게 죽음을 찾아다 드리겠습니다.”
석양이 지고 있어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고 무너진 궁전 바닥에는 탄피가 널려 있었다. 게다가 둘은 피곤했다. 반지도 없었고 꽃도 없었다. 하지만 레이몬드가 그녀에게 주기로 한 것은 정말로 그녀가 원하는 것이었고 더 이상의 대답은 필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