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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Dullan Roid (24/31)

06. Dullan Roid


 

“결혼이요? 너무 빠르지 않아요?”

이셀라는 캐런의 말에 놀라서 되물었다. 캐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이르긴 하지만 제 상태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라서요.”

“그럼 언제요?”

“3일 뒤 루이스 전하의 즉위식이 있는 날에요.”

“…어머, 네?”

이셀라가 입을 떡 벌렸다.

“미쳤… 아니, 돌았… 아니, 제정신이에요? 루이스 전하의 즉위식 날에요?”

말을 가능한 순화하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같은 말을 하는 이셀라였다. 캐런은 웃으면서 설명했다.

“네. 사람들 눈에 띄기 싫어서요. 가능한 조용히 하고 싶은데, 결혼식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일가친척들부터 레이몬드와 제 지인들까지 전부 올 거 아닌가요.”

“당연하죠, 결혼식인걸요.”

“그래서 부득이하게 루이스 전하에게 꼭 부탁드렸어요. 아주 조용히, 작은 신전에서 둘만 식을 올리겠다구요.”

“왜 눈에 띄기 싫은데요? 배라면 나오지도 않았잖아요. 아, 미안해요.”

노골적인 말에 캐런이 결국 웃었다. 이셀라는 민망한 얼굴을 했지만 이미 쏟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캐런은 자신의 아주 약하게 나온 배를 내려다보면서 속삭였다.

“실은 배가 나오지 않는 편이라서 그렇지, 몇 달 남지 않았어요.”

“그럼 최소한 다음 주, 아니 정말 급해도 즉위식 며칠 뒤로 해요. 성대하게 하지는 못해도 즉위식 날 하신다니요. 레이몬드 경이 이번에 세운 공만 하더라도 루이스 전하가 제대로 챙겨 주실 텐데요.”

“이셀라, 레이몬드 경과 저는 아무런 명예도 원하지 않아요. 우리는 그저 내려가서 쉬고 싶을 뿐이에요.”

“…캐런….”

이셀라가 진지하게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성서를 너무 읽은 것이 아닌가요? 레이몬드 경이야 오래 군대에 있었으니 피곤할 수 있지만, 당신이 그를 따라가 어디 시골에서 지낼 필요는 없어요. 제대로 놀아 보지도 않고서 쉬겠다고 하다니, 말도 안 돼요. 레이몬드 경이 지나치게 이기적이네요.”

“후후.”

이 세상에서 캐런만큼 놀기만 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백여 년간 젊디젊은 몸으로 열심히 놀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것을 설명할 수 없어서 캐런은 그저 웃고 말았다. 이런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다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믿어 준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 레이몬드도 자신이 겪고 나서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는 그 인생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아무튼, 하루라도 미루면 안 되나요? 즉위식이 있는 날은 정말 힘들 텐데.”

“이미 결정한 일이에요. 왜 그러나요, 이셀라 양?”

“루이스 전하가 왕족들이 앉는 칸에 초대해 주셔서 아무래도 즉위식을 불참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요.”

이셀라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자신이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인 것처럼.

“좀 늦게라도 가긴 해야 할 텐데, 뭐 가지고 싶은 거 있어요?”

“…괜찮아요.”

약간 목이 메었다.

이셀라 에반스와 친구가 되는 것은 이제까지 불가능했다. 그들의 성격은 그리 맞는 편이 아니었고 취미나 취향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레이몬드가 있었다.

하지만 서로 맞지 않는 사람이라도 노력하면 이렇게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공통의 적을 만나고, 같이 시간을 보내다가. 그러다가 사귀는 친구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인연이 이렇게 이어진다.

그리고 이셀라의 저 표정도, 이번 생에서 결국에는 끝이 나겠지.

또 다음 생의 이셀라는 캐런을 불쾌한 얼굴로 쳐다볼 것이고, 머리에 타르를 부으려 할 것이며, 허름한 옷을 입게 하며 베르딕이 캐런을 채찍질하는 것을 은근히 종용할 것이다.

‘아니야, 또다시 친구가 되면 돼.’

하지만 결국 현재의 이 순간은 사라지는 것이다.

결국 또 새로운 시작을 통해서 이 순간의 의미는 퇴색된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반복하다 보면 이셀라와 친해진다는 행위 자체가 지겹고 귀찮은 행동이 되겠지. 이미 이제까지 살면서 그랬던 것처럼. 귀찮고 의미 없다며 포기하게 되겠지….

그것이 너무나 불쾌하고, 슬퍼서, 캐런은 목이 메었다. 목구멍에 종이 뭉치를 억지로 쑤셔 박히는 느낌이었다.

“…고마워요, 이셀라. 정말…. 하지만 마음만으로도 충분해요.”

캐런은 간신히 표정을 수습하고 대답했다.

더 말을 했다가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듈란은 다시 홀로 촛불을 켜고 앉았다.

대성전의 작은 방. 자신에게 일시적으로 주어진 이런 작은 공간이야말로 그에게 합당한 곳이었다.

“하아.”

듈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동안 그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던 갖가지 사건과 큰일들이 끝나고 나자, 이제야 홀로 방에 틀어박혀서 성서를 읽으며 약초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이렇게 마음이 편한 것을.’

눈앞에서 캐런이 정절을 지키며 다른 남자들과 만나고 있지 않을 때는 괴로웠다. 피부 밑에서 일어나는 불길에 스스로가 타 버릴 것 같았다.

스스로 이단자라고 칭한 주제에, 신을 원망하는 날까지도 있었다. 이루지 못할 욕망을, 이 괴롭고 불타는 욕망을 왜 주셨느냐고 원망했다. 그것은 저열하고 비열한 욕망임을 스스로 알기에 더더욱 괴로웠다.

귀즈 왕세자가 그에게 속삭였을 때의 흔들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주여, 그 목소리는 어찌나 간교하던지.

“내 뜻대로 하면 네게 캐런을 주마. 내 다시는 캐런을 찾지 않을 것이다.”

“왕을 죽일 약을 만들어다오.”

귀즈 왕세자의 목소리는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귀를 막고 싶었지만 그럴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유혹을 피할 힘을 주십사 기도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네게 부주교의 자리를 주마. 지금 대주교가 얼마 있지 않아 죽고 나면 이 나라의 대주교는 네가 될 것이다. 사제로서 최고의 영광인 것이다. 죄도 아니다. 그저 아버지를 도와드리는 것이다. 너무 나이가 많으셔서 요즘은 기침도 힘들어 하신다. 그러니 자식된 도리로… 아버지를 도와드려야 하지 않겠느냐.”

목소리는 더욱 낮아졌다.

“내가 직접 할 테니 두려워 말아라. 자네는 그저 약만 만들어 주면 될 뿐이다.”

듈란은 그의 낮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거절하면 귀즈가 그 즉시 자신의 목을 칠 것임을 알았다. 죽음이 무서운 것은 아니었으나 그녀의 이번 생의 끝은 궁금했다. 이번에도 결국에는 끝이 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다음 생의 자신을 위해 동전을 쥐여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알겠습니다.”

듈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을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에게는 다른 사람을, 그것도 왕이라는 사람을 죽이고 싶은 마음 또한 없었다. 듈란은 생명을 예찬했다. 영생에 홀렸다.

제사용 짐승을 도축하는 것은 일상이 된 지금조차도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손에서 생명이 사그라지고 고깃덩어리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는 건 퍽이나 껄끄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약을 만들어야 할까. 귀즈 왕세자가 마련해 준 방에서는 캐런의 방이 훤하게 보였다. 대성전의 때가 생각이 났다. 음험한 기쁨이 없었다면 거짓이다.

듈란은 성서와 캐런을 내려다보면서 고민에 빠졌다. 어떤 약을 주어야 할까. 듈란은 그 어떤 언어로도 형용할 수 없는 음험함을 느꼈다. 건너편의 방에서 캐런의 일상을 본다.

하품을 하면서 호화품들 사이에 무기력하게 몸을 뉘이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꽤나 재밌는 일상이었다. 자신이 약 하나만 건네준다면, 이렇게 멀리서 몰래 보는 것이 아니라…. 머리속에서 갖가지 약의 조제법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저것을 보라. 우습기 짝이 없군.”

귀즈 왕세자가 헛웃음을 치면서 손가락질하는 것을 보지만 않았으면.

듈란은 자신이 어떠한 행동을 했을지 알 수 없었다.

“뻔뻔하기가 그지없어.”

멀리서였지만, 모를 수가 없었다.

캐런이 한 남자와 손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의 행동에 그녀가 고개를 젓고 있었다. 얼굴은 비로 젖어 있었지만, 멀리서 봐도 표정을 알 수 있었다.

듈란이 그토록 오랫동안 훔쳐봤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비통한 얼굴이었다. 캐런은 웃거나, 지루해하거나, 비아냥거렸지만 단 한 번도 그런 얼굴을 한 적이 없었다. 진정으로 슬퍼하는 얼굴이었다.

“저것은 아무래도 루이스의 측근인 레이몬드 세이어테스 경 같군. 자네도 아는가?”

“…아닙니다.”

그리고 듈란은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알았다.

캐런이 아버지에게 소개해 주겠다는, 그 남자로구나.

“루이스가 퍽이나 재밌는 짓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측근을 보내서 빼내려고 했나? 하지만 떠나지 않는 것을 보니 역으로 다른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군.”

레이몬드 세이어테스 경.

멀리서 보기에도 체격이 훤칠한 남자였다. 듈란도 그 이름을 알았다. 잘생긴 전쟁 영웅의 이름은 수시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니까.

“자네는 저 불여우에게 속은 거야. 내게 협력하면 얼마든지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저 계집에게 복수할 기회가 있겠지.”

듈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은 달랐다. 피부 밑에서 근질거리는 불쾌한 쾌감이 가라앉자 수용의 시간이 다가왔다. 귀즈는 듈란을 몰랐다. 듈란도 자신을 몰랐다. 하지만 눈으로 캐런이 다른 남자를 보는 모습을 보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캐런이 자신을 저런 얼굴로 보는 일은 영원히 없겠지.

자신을 부른 것은 남편으로서가 아니라 귀즈에게서 자신의 연인이 눈에 띄지 않게 하려는 수작이었다. 귀즈는 듈란이 분노하리라 생각했다. 듈란도 자신이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더러운 여자, 음탕한 여자,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아도 신경 쓰지 않는 여자.

“여자는 다 저런 동물이야.”

넌더리를 내는 귀즈 왕세자에게 듈란은 속삭였다.

“제가 약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듈란은 약을 만들었다. 먹으면 죽은 듯이 쓰러져 가사 상태에 빠지는 약이었다. 온몸이 뻣뻣하게 굳고 의사가 진찰하더라도 좀처럼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맥박이 느려지는 약이었다.

노인이기에 위험했으나, 이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이었다. 건강한 젊은이라면 하루가 채 안 되어서 깨어나겠지만, 오늘내일하는 늙은이라면 결국 숨을 거둘 수도 있었다.

“훌륭해. 잘 만들었어.”

귀즈는 그가 내민 약으로 시험을 해 보더니 흡족하게 웃었다.

하지만 귀즈는 실패할 것이다. 왕은 죽었다가 다시 되살아날 테니까.

눈앞에서 캐런이 오가는 것을 볼 때 흔들리던 마음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마음은 흔들리고 음욕의 시험에 스스로 괴로워하던 그 나날들. 그리고 왕세자의 유혹의 손길까지 그는 전부 거절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애욕도, 애정도, 하물며 그녀의 선악이나 정숙의 유무도 중요하지 않다. 캐런이 누구를 사랑하는가도 중요하지 않다. 그를 증오하는 것조차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듈란 신관님, 정말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으실 겁니까?”

“…예, 부주교님. 저, 저는… 긴히 할 일이 있습니다.”

결혼식에 축복을 내려야 합니다.

듈란은 성호를 그었다.


 

레이몬드 세이어테스 경.

레이몬드는 듈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고 눈을 마주쳤다. 선명한 녹색 눈은 듈란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 같았다. 실로 그러했다.

캐런의 연인. 루이스 왕세손의 측근. 전쟁 영웅. 귀족.

그를 수식하는 말들은 어느 것 하나 듈란과는 상관이 없는 단어들이었으니까.

“부탁을 들어주셔서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레이몬드의 손에 약간 힘이 들어간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아플 정도는 아니었다.

“…오랜… 친척이고, 친구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결혼에 축복을 내리는 것은… 사제의 가장 큰 기쁨이 아, 아니겠습니까.”

레이몬드는 듈란에게 주례를 부탁했다.

큰일을 마무리 짓고 나서, 일부러 대관식이 열리는 날 수도의 작은 신전에서 올리고 싶다는 말도 함께 전했다. 대성전에서 있는 대관식에는 나라 안팎의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사람은 전부 참석해야 했다.

레이몬드와 캐런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피하고 싶었기에 일부러 그날로 잡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단둘이 결혼하고 싶어도 최소한 한 명은 필요했다. 결혼의 공증인이 될 신관의 존재다.

견습 사제 이상의 직급인 모든 사제들은 전부 수도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때문에, 그날 결혼식의 주례를 설 신관은 없었다.

“부디 듈란 신관님께서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캐런 때문에 위험한 일에 휘말리셨는데, 이런 부탁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괘, 괘념치 마십시오.”

“감사합니다.”

레이몬드는 거듭 말했다.

그가 듈란에게 사과할 필요는 없었다.

듈란이 어찌 이런 기회를 놓친단 말인가. 듈란은 레이몬드에게 오히려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

대관식 날이 되었다.

화창하고 선선한 날이었다. 아침부터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수도 전체가 축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축제였지만, 예상하지 못한 만큼 사람들은 더 들떠서 환호하며 준비했다.

새로운 왕. 긴 세월 동안 왕은 한 명뿐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은 그야말로 천지가 달라지는 느낌이었다. 해마다 있는 신을 위한 종교적 축제가 아닌, 살아 있는 한 사람을 위한 축제였다.

거리에는 미친 듯이 꽃이 휘날리고 집집마다 리본과 꽃을 달아 놓고 있었다. 왕실이 축제의 상당 부분을 지원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대관식이 열리는 것을 반가워했고 축제를 즐겼다.

음식들이 끊임없이 구워지고, 삶아지고, 튀겨지며 테이블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고, 수많은 귀족들 또한 이때를 틈타서 사비를 털어 축제를 풍족하게 하는 식으로 왕가에 대한 충성을 과시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큰 축제였다. 거리에 금화가 미친 듯이 흘렀다.

음악은 끊임없이 거리에서 흘러나왔으며 재주꾼들 또한 한없이 몰려들어 눈길을 사로잡았다. 왕과 귀족이 지원하는 축제에 사람들은 열광하며 외쳤다.

“루이스! 루이스! 루이스!”

루이스 왕세손은 행렬에서 나가 사람들의 앞에서 손을 들었다. 그는 대성전에서 왕이 미리 넘긴 왕관과 홀을 대주교에게서 받고, 다시 사람들 앞에서 축하와 연설을 해야 했다. 아직 작은 몸에 위엄을 얹기 위해 어깨와 가슴에는 수많은 장식들이 달렸다.

캐런은 사람들이 기뻐하는 그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어서 자신 또한 준비를 해야 할 텐데, 도무지 힘이 나지를 않았다.

자신에게 백여 년, 레이몬드에게 몇천 년. 그동안 절대로 성공하지 못했던 결과가 저 언덕 아래에 있었다. 루이스 왕세손이 처음으로 왕이 되었고 나라 전체가 기쁨으로 떠들썩한 날을 맞이했는데도 그 기쁨을 순전히 남들과 공유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보러 갈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캐런.”

캐런은 새하얀 드레스와 면사포로 갈아입을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남들이 축제를 벌일 동안 자신들은 결혼식을 해야 한다. 자신 또한 동의한 것이지만 아쉬움은 어쩔 수가 없었다. 캐런은 자신의 옆에 걸려 있는 드레스를 손끝으로 쓸어 보았다.

“그냥 귀즈 전하가 준비했던 걸로 입어도 별 상관은 없었는데요.”

“…그래도 저는 그 옷이 아니라서 더 좋습니다.”

“그래요? 하긴 그게 좀 촌스럽기는 했죠.”

캐런이 피식 웃으면서 이셀라가 맞추게 한 드레스와 패물들을 만졌다. 이셀라는 귀즈가 준 옷을 그냥 입고 결혼하겠다는 캐런에게 아무 말도 하진 않았다. 다만 옷 만드는 사람들을 보내 새 드레스를 맞추게 했다. 어쩌다가 마주치는 레이몬드에게 눈으로 욕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셀라가 보낸 여자들은 솜씨 좋게 귀즈가 준 옷을 해체하더니, 자신들이 가져온 갖가지 휘황찬란하고 세밀한 레이스들을 덧대어 캐런의 몸에 딱 맞는 옷을 새로 만들어 냈다.

정말이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해도 이셀라가 한마디만 더 싫다는 말을 하면 자신과 절교할 줄 알라며 으름장을 놓는 틈에 어쩔 수가 없었다. 레이몬드는 원형을 알아볼 수 없게 재탄생한 드레스를 신기한 눈으로 구경하면서 물었다.

“코르셋은 뺐습니까?”

“네. 임신 중이라고 하니 아쉬워하면서도 결국 빼더군요.”

귀즈는 임신 중이라고 해도 코르셋을 꼭 채우게 했지만. 캐런은 웃었다.

지금쯤 그는 어디 감옥에서 이를 갈고 발을 구르고 있을까. 그것을 보지 못함이 아쉬웠다. 나중에는 꼭 뒷조사도 해 봐야지. 그 얼굴이 어떨지 구경하면서 구경 값이라고 금화를 던져 주는 것도 해 보고 싶었다. 정말이지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듈란 신관님이 주례를 서고, 반지를 교환한 후 축배를 나눠 마시게 할 겁니다.”

“결국 그가 오긴 하는군요. 거절할까 봐 걱정했어요.”

“하하.”

레이몬드가 캐런의 말에 소리 내어 웃으면서 말했다. 웃음에는 조소가 섞여 있었다.

“신관님이 그럴 리가 없지요.”

“그런가요. 이제는 레이몬드 당신이 저보다 듈란을 더 잘 아는 것 같네요.”

“서글프게도 그렇습니다.”

똑똑.

문밖에서 누군가가 노크를 하더니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아직도 같이 있는 레이몬드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하녀치고는 지나치게 당당한 태도였지만, 그녀는 레이몬드에게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레이몬드 경, 얼른 나가 주세요.”

“그냥 나도 같이 돕는 편이 빨리 끝나지 않겠나?”

둘이 있을 적에는 레이몬드가 캐런의 옷시중을 들었기 때문에 그도 어느 정도 갈아입히는 법을 알았다. 하지만 도나는 도리질까지 하면서 거절했다.

“신랑분이 뭘 돕는다구요. 그리고 원래 결혼식 전에 신부는 보는 거 아니에요! 운이 떨어진다구요!”

도나는 영주를 부축해 캐런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올라왔다. 유일한 친정 하녀이기 때문에 도나는 ‘영주님이 저에게 부탁하셨다구요!’라는 말까지 등에 업고서 돕겠다면서 아득바득 캐런의 옆에 남았다.

도나는 영 레이몬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결혼식 날짜부터, 지나치게 적은 하객 수라든가. 심지어 코르셋을 빼게 하자 입을 뻐끔거리면서 레이몬드를 증오의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캐런은 쫓겨 나가는 레이몬드를 보며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도와줘서 고마워.”

“아니에요, 아가씨….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급하게….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할게요.”

도나가 속상한 얼굴로 종알거렸다.

아무리 사람을 적게 부르려고 해도 아버지를 부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가능한 아버지도 초대하고 싶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오고 도나가 오고 이셀라가 선물을 보냈다.

귀즈에게서 잠시 도망쳐야 했던 아버지는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건강이 좋지 않음에도 꼭 참석하겠다고 도나를 통해 말을 전했다.

쉽게 인연을 끊어 버릴 수가 없다.

레이몬드가 루이스를 살리고 제논은 귀즈의 손에서 영주를 빼돌렸다. 시온은 이셀라의 연인이 되었고 레이몬드 이상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두 사람만의 세상에서 더 많은 사람들과의 연을 맺겠다고 결심했다.

언제나처럼 죽음을 담담히 맞이할 줄 알았지만 막상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죽어야 한다는 비통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제는 끝을 내야만 했다.

듈란은 작은 신전의 주례석에 서서 목을 가다듬었다.

레이몬드는 먼저 들어와서 듈란의 아래에 서 있었다.

홀 안에는 제논만이 앉아 있었다. 레이몬드의 형은 몸이 좋지 않아 계속 요양 중이라고 했다. 작은 신전이라 하더라도 백여 명은 충분히 앉을 곳이었기 때문에, 휑한 느낌은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신랑 신부가 그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으니 별 수 없었다. 처음에 캐런은 영주가 오는 것도 막으려고 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괜찮으십니까?”

“예.”

신랑이 주례를 걱정하다니. 듈란은 약간 우스웠다. 자신은 물론 괜찮았다.

덜컹.

“아, 미안해요.”

문을 연 것은 이셀라였다. 이셀라는 씩씩거리는 숨을 가다듬고는 텅 빈 하객 석을 보더니 혀를 차며 구석에 앉았다. 시온은 마저 훈장을 수여받아야 하기 때문에 오지 못했지만, 결국 이셀라는 부득불 오고야 말았다.

“아가씨께서 입장하십니다.”

도나가 말했다.

음악도 없고, 화려한 장식도 없는 작은 결혼식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듈란조차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들어오는 캐런을 보는 순간 정말로 충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캐런은 영주의 손을 잡고 들어왔다.

걸음 하나하나가 사람이 움직이는 것 같지가 않았다.

머리에는 새하얀 면사포가 드리워져 있었다.

종이 더미 같다고 생각한 드레스는 솜씨 좋게 수선되어 뭐라 형용하기가 어려운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화려한 것도 아니었고, 그저 사람이 아닌 성서 그 자체였다. 마치 성서가 인간의 모습을 입고 있는 듯한 성스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짝, 짝, 짝.

박수를 치는 사람은 지극히 적었지만, 그렇다고 전혀 부족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주변의 사람이 아무리 적어도 상관없었다. 하물며 캐런의 손을 잡고 들어오는 영주가 없다 하더라도 아무도 부족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캐런 하이어는 그 자체로 완벽하며 온전하고 넘쳐흐르는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의 신부, 누군가의 딸. 그런 수식어조차 필요하지 않은 존재 그 자체의 성스러움이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캐런은 듈란을 향해 걸어왔다.

눈이, 마주쳤다.

듈란은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캐런은 레이몬드가 아닌 듈란을 보고 있었다.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똑바로, 주저 없이. 그 걸음 자체에 숨이 막힌다.

캐런이 영주를 떠나 레이몬드의 손을 잡는 그 순간에도 듈란은 아무 생각을 하지 못했다. 결국 그 보랏빛 눈이 살짝 내리깔리고서야 듈란은 입을 열 수 있었다.

“신의 영광과 축복이… 그대들에게 함께하기를.”

잘 끝날 것이다. 자신의 역할은 처음부터 이 자리였다.

그것을 깨닫고 나니 모든 상념과 정념은 사라지고 마음이 지극히 편안해졌다.

“오늘부터 영원토록.”

자신이 해야 할 말.

그리고 자신이 건네주어야 할 축복.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그리고 그때였다.

“쿨럭.”

처음에는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바로 앞에 있는 듈란조차 알 수 없었다. 캐런이 축복의 성수를 나누어 마실 때였다. 기침을 하는 것을 보고 실수를 했다 생각하여 이셀라는 살짝 웃을 정도였다. 하지만 웃음은 이내 뚝 그쳤다.

“캐런!”

캐런의 입에서 피가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꺄아악!”

“아가씨!”

분명 사람은 적었는데도 성전은 비명으로 가득 찼다. 쿵, 하는 소리와 같이 하이어 영주가 벌떡 일어났지만 차마 다가가지도 못하고 넘어졌다.

“쿨럭, 쿨럭….”

“…하이어?”

듈란은 당황해서 멍하니 되물었다.

그리고 자신이 내민 성수를 다시 쳐다보았다. 뭐지? 이럴 리가 없는데. 듈란이 캐런에게 먹인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듈란은 성수를 내려다봤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저 투명한….

“잔에.”

듈란은 캐런의 목을 짚었다. 토하게 해야 한다. 이것은 그가 원한 방식이 아니었다. 이것은….

“듈란 신관님.”

“레, 레이몬드 경.”

듈란은 뒤를 돌아보았다. 신랑인 레이몬드는, 당황하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는 얼굴로 듈란의 손을 잡았다. 왜?

듈란은 이내 그 이유를 알았지만 그렇다고 저항할 수 없었다. 레이몬드의 악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레이몬드는 캐런의 부케 안에 있던 것을 꺼내 듈란에게 쥐여 주었다.

“제대로 하셔야지요.”

레이몬드는 듈란의 손을 잡고 캐런의 속을 파고든 칼에 더더욱 힘을 주었다. 듈란의 손끝에 무언가 찔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는 그것이 뭔지 알았다. 심장이다.

“…아, 헉….”

멀리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자신의 비명이었다.


 

무너진 궁전의 벽에 노을이 지는 그날이었다.

레이몬드는 캐런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것은 자신의 잘못을 고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정말로 힘이 빠져서,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레이몬드는 무릎을 꿇고 캐런을 끌어안았다. 캐런은 서서 마주 그를 쓰다듬었다. 동정한다. 레이몬드를 동정한다, 자신을 동정한다.

“캐런, 이제야 알겠습니다.”

레이몬드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필요 없다고 느꼈습니다. 당신만 있으면 영원이라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 당신보다 어느 순간부터 더 오래 살았으니, 이것으로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제가 더 옳다고 느꼈습니다. 만족하는 삶…. 답을 안다고….”

캐런을 더더욱 품에 안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가 틀렸군요. 당신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제 오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목소리는 거의 오열하다시피 변하고 있었다. 캐런을 끌어안은 손은 절박했다. 숨이 막혔다.

“당신의 말이 맞았습니다. 당신이 저보다 더 저를 잘 알았습니다. 저 하나로는 당신의 삶에 드릴 수 있는 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순간이 되어서야 깨달았습니다.”

레이몬드는 무너진 성벽 위에서 오열했다. 자신이, 캐런이 일궈 낸 결과를 보면서 통탄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 모든 것이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괴로웠다.

우리는 도무지 우리의 인생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그들이 내린 결론이었다.

듈란은 레이몬드를 올려다보았다. 고문하는 것은 레이몬드였는데 더 괴로워 보이는 것도 그였다. 그것이 듈란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캐런의 죽음 때문인가? 하지만 그녀가 이번에 죽은 것도 몇 년이 지났다. 그리고 레이몬드는 누구보다도 캐런의 영생을 확신할 수 있다. 듈란 자신보다도. 그는 피를 쿨럭이면서 물었다.

“왜 그리 슬퍼하십니까? 왜 그리 힘들어하십니까? 그녀는 영생을 사는데 무엇이 그리 당신을 서글프게 합니까?”

레이몬드는 고백했다.

“저 또한 그녀와 같이 영생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를 이해하고, 이것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저런.

듈란은 혀를 찼다. 이빨이 부서져서 제대로 발음이 나오지는 않았다.

‘레이몬드 경. 당신이 그러시면 안 됩니다…. 당신을 위해 제 자식까지 이용했는데.’

“캐런, 전 정말로 괜찮았습니다. 당신과 같이 영원히 떠돌아도 괜찮았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올바른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듈란 신관이… 쓴 방법 말고도 말입니다. 정말로 좋은 방법을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레이몬드는 캐런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그때까지 저는 버틸 자신이 있었습니다. 당신 옆에 있으면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닌 것 같습니다. 제 스스로의 나약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캐런은 레이몬드를 받아 냈다. 지탱해 냈다. 레이몬드의 얼굴은 끔찍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영원한 생의 첫 만남에서도 그는 이렇게 울지 않았다. 그것은 재회의 감격이었으며 탄생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지금 더없는 절망에 빠져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위로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 또한 그와 같은 처지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캐런은 그저 레이몬드를 끌어안았다. 한참 후에야 레이몬드가 캐런에게 간신히 말했다.

“제가 어떻게 당신에 대한 기억을 할 수 있었는지 아십니까?”

“아니요.”

캐런은 자신이 기억 저편에 묻어 두었던 의문을 다시 끄집어내었다. 언젠가 그녀는 그것에 대해 궁금해했었다. 하지만 이내 떠올리지 않았다. 꺼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도 몰랐습니다. 지난번에도 몰랐습니다. 당신이 탑에서 떨어졌을 때 저는 당시 혼란과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억지로 이성을 붙잡고 살다가 죽었습니다. 하지만 지난번에 당신을 만나고, 당신이 죽고, 듈란 신관과 수십 년을 살았습니다.”

레이몬드는 잠시 침묵했다가 말을 이었다.

“제가 그에게 어떤 행위를 했는지 당신은 짐작도 하지 못할 겁니다. 그에게서 모든 정보를 끌어내기 위해 어떤 짓을 했는지…. 전… 그리고 마침내 알았습니다.”

레이몬드는 탑에서 떨어진 캐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축 늘어진 그녀의 몸을 부여잡았다. 아직 죽지 않았다. 아직 숨을 거두지 않았다. 몸은 부들부들 떨렸고 눈은 뒤집어졌고 피가 흐르고 사지는 꺾여 있었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죽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캐런을 붙들고 속삭였다.

“…캐런, 괜찮아요. 괜찮아….”

캐런이 듣고 있는지 자신도 확신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레이몬드는 자신이 캐런에게 하는 말이 혼잣말 수준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괜찮다는 희망뿐인 말만 반복했다. 그런 그에게 신관이 다가왔다.

“…레이몬드 경.”

당신이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녀의 숨을 끊어 편하게 해 주십시오.

레이몬드는 부정했다. 애원했다. 협박만은 하지 못했다. 당장 앞에 있는 의사가 단 한 명이었고 주변의 모든 군사들이 레이몬드와 캐런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이몬드는 부정하며 애원했다.

“신관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레이몬드는 듈란이 마지막에 캐런의 손을 밟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그에게 비는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도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듈란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살려 주십시오.

하지만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당신이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레이몬드의 품에 있던 캐런이 경련하기 시작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죽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레이몬드는 지금 캐런과 같은 모습을 전쟁터에서 수십 번이고 봐 왔다. 그리고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것이 정녕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철컥.

레이몬드는 자신의 총을 장전했다.

이러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이러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온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레이몬드는 방아쇠를 당겼다.

탕!

그리고 시작이었다. 정말로 레이몬드가 캐런을 위해 살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같이 지옥을 걷기 시작하는 것.

행여나,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레이몬드는 다리가 없는 듈란을 붙들고 울고 싶은 얼굴을 하며 참았다. 이번에도 캐런이 죽고 듈란을 계속해서 고문하고 살리고 세월을 보냈는데도 결국 방법은 없는 것이었다.

진정한 사랑이라거나, 좀 더 부드럽고 따뜻한 방법이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왜 자신이 그녀를 기억했을까.

캐런은 레이몬드가 조심스럽게 읊조리는 말을 조용히 들었다.

그리 좋지는 않을 것이라고, 직감했었다. 처음 의문이 들었을 때부터 더 캐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레이몬드가 기억하기 시작한 117번째의 삶에서 캐런은 살인을 저질렀으며, 레이몬드와 만나기도 전에 듈란과 잠자리를 같이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몬드와 또다시 끌리고야 말았다.

그러니까.

레이몬드가 그 모든 과거를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은.

캐런, 당신은 탑에서 떨어져 죽었을 때 임신 중이었습니다.

네, 그때도 태어나지 못할 자식을 당신은 품고 있었습니다. 당신도 모르고, 저도 몰랐지만…. 단 한 사람만은 알고 있었습니다. 듈란 신관 말입니다.

당신과 기억을 나누어 가지는 방법이 그것이었습니다.

임신한 당신을 죽이는 것.

듈란 신관의 자식을 이용해 저를 당신과 함께 걷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레이몬드는 듈란에게 물었다.

“왜 제게 그러셨습니까. 왜 스스로가 기억하는 방법을 쓰지 않았습니까.”

듈란은 대답했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그런 길을 왜 제가 걸어야 합니까?”

“아….”

캐런은 듈란이 잡은 칼을 내려다보았다. 부들부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레이몬드가 뒤에서 강제로 붙들고 있던 손을 놓았지만, 듈란은 충격에 아직도 칼에서 손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심장을 꿰뚫은 칼을 보며 캐런은 중얼거렸다.

“…도와주지.”

폐를 찔린 것은 아니기에 말은 아직 할 수 있었다. 끔찍한 고통이 가슴을 찔렀다. 피가 미친 듯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제 자신은 죽을 것이다. 하지만 좀 더 확실히 해야 한다.

“…흐윽.”

캐런은 생명이 빠져나가는 이 순간이 얼마나 자신에게 친숙한 순간인가 회상했다. 죽음은 그녀의 오래된 친구였다. 정말로 친해지고 싶지 않았지만 이 정도로 만나면 친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영원보다는 끝이 낫다는데 더 동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반복되는 순환보다는 끝이 있는 유한이 나았다.

툭, 투둑.

입에서, 가슴팍에서,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피가 너무 많이 흘러나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캐런은 몸을 옹송그렸다. 하지만 끊임없이 생명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레이몬드는 손을 뗐다. 하지만 듈란은 손을 잡고 있었다. 이걸로 될까.

비명 소리가 들린다.

피비린내. 비명 소리. 죽음과 가까운 수많은 흔적들. 자신이 그렇게 무서워하고 두려워해서 극복하고 싶은 순간들. 그래서 자신은 사람을 죽이면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극복하지 못했다. 살인한다고 해서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두려움은 날로 커져서 결국에 레이몬드까지 억눌렀다.

시작은 자신이었다.

그 다음은 타인이었다.

사람을 죽였다. 그녀와 얽힌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레이몬드를 죽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기도 했었다. 더 많이 죽이고, 죽이고, 죽이다 보면 무섭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캐런은 듈란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그리고 힘을 주었다.

“너….”

이제는 혀가 천천히 굳기 시작한다. 생각보다 자신의 생명은 질긴 모양이었다.

자신이 마지막에 죽일 사람은 누구인지 궁금했다. 또다시 자살일까, 아니면 결국에는 레이몬드를 죽이는데 성공할까.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시작은 자신, 그 다음은 타인…. 마지막은 자식이었다.

“듈, 듈란… 날 봐…. 내 눈을 똑똑히… 봐.”

캐런은 혀를 간신히 움직였다.

숨을 거두기 직전에 보는 것이 이 남자라니. 생각하지도 못한 끝이었다. 웃으려고 했지만 도무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날 죽이, 인 건… 너야…. 그걸 알아야 해. 너, 넌… 지금 이게 네 탓 아닌 것 같지? 아니야. 이건… 네가 죽인거야.”

“아, 아, 아냐…. 캐런, 레이몬드 경. 이게 무슨.”

듈란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지만 어느새 레이몬드는 손을 떼고 있었다. 듈란은 혼란에 빠졌다. 언제부터 레이몬드는 손을 대지 않았지? 지금 자신이 캐런을 죽이고 있다고? 알 수 없었다. 지금 온통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캐런은 고개를 젓는 듈란을 다시 강하게 잡았다. 자꾸만 힘이 빠져나가기 때문에 그를 붙들어야 했다. 레이몬드는 추락한 자신의 머리를 총으로 쐈다. 안락사를 위한 것이었지만 그것조차 임신한 몸은 살인으로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지금의 듈란도.

말해야 한다. 말해야 한다. 지금 당장…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기 전에. 까마득해지는 시야를 붙든다. 입을 연다. 눈에서 피를 닮은 눈물이 새어 나왔다. 입에서는 핏물이 배어나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널 보고, 네게 말을 해야 한다.

듈란 로이드.

내 원수. 내 죽음의 시작. 내 영원의 협력자.

슬픔과, 분노와, 체념과… 지긋지긋한 증오를 혀 위에 담아서 네게 고한다.

“널 용서해.”

캐런의 귀에 이셀라의 비명 소리, 아버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환호하는 시민들의 축제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으로 레이몬드의 얼굴을 보려고 했지만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다.

이것으로 이번 생은 끝이다.


 

까마득해진다.

발을 구르자 공중으로 치솟더니 다시 땅으로 떨어진다. 그 뒤를 미는 것은 듈란이었다. 캐런은 그네를 타고 있었다.

“난 죽는 게 무서워.”

캐런이 다섯 살 때쯤이었다. 친척 어른 중 하나가 죽었다. 장례식에는 친척들 전부가 참가했었다. 으레 가족 모임이 그렇듯 어린아이들을 보는 것은 조금 나이 있는 아이의 몫이다.

듈란은 그네에 탄 캐런의 등을 밀면서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애 볼 시간에 혼자 앉아서 책이나 보고 싶었다. 특히 캐런은 질색이었다. 시끄럽고 툭하면 울고 도무지 가만히 앉아 있지를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혼자 구석에 앉아 있는 걸 선호하는 듈란으로서는 캐런과 함께 있는 것이 괴롭다 못해 끔찍할 노릇이었다.

“듈란, 넌 죽음이 안 무서워? 죽으면 엄마 아빠도 못 보잖아. 숨도 못 쉰대.”

“…누구나 무서워해.”

“그런데 왜 아무렇지도 않아?”

“살다 보면 바빠서 까먹어.”

“그게 뭐야.”

“다 그렇게 산대.”

그것은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것이고, 극복하는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신을 믿고 안정을 찾거나, 그저 공포에 익숙해져서 잊고 사는 것이다.

그래도 두려울 때는 잠을 자거나 일을 돕고, 글자를 배우다 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간다.

캐런뿐만 아니라 죽음을 목격한 아이들은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있기 마련이다. 커 가면서 잊고 있다가 늙어서 다시금 두려워하게 된다. 모든 인류의 두려움이니 유별날 것은 없었다.

장례식장을 처음 경험한 아이들이 죽음이라는 막연한 것을 무서워하고 있을 때 평범한 엄마라면 그런 아이들에게 순리를 알려 주거나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하지만 캐런의 엄마는 유별난 사람이었다. 캐서린은 듈란과 이야기하다 울상 짓는 딸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캐런을 끌어안으며 달랬다.

“죽음이 무섭다고? 캐런, 넌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단다. 넌 죽고 싶을 때까지 영원히 살 수 있으니까.”

“어떻게요?”

“나와 넌 마법에 걸려 있거든.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할 때까지 넌 죽지 않아.”

캐런은 캐서린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되물었다.

“정말요? 엄마, 진짜에요?”

“그럼, 진짜 진짜야.”

캐서린은 울면서 매달리는 캐런에게 그렇게 가르쳤다. 장례식 내내 캐런에게 시달린 듈란은 잠든 캐런을 내려다보며 캐서린에게 한숨 쉬면서 말했다.

“차라리 기도를 열심히 하면 괜찮다고 하지 그러셨습니까. 왜 그런 거짓말을….”

“거짓말이 아니야.”

캐서린은 진심이었다.

“거짓말이 아니란다.”

진지한 얼굴로 거듭해서 말하는 캐서린에게 결국 고개를 끄덕인 듈란은 캐런에게 말했다.

“축하해.”

“축하할 만한 거야?”

“그래.”

이제 넌 무서워할 필요가 없으니까.

잘됐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런 끝을 생각한 적은 없었다.

이 나라에는 수많은 제사가 있다. 인류의 죄는 너무나 커서 대속이 필요하다.

신관들은 도축업자와 본질이 같다. 매달 흠 없는 비둘기를 잡아 목을 비틀어 죽인 후 배를 갈라 내장을 빼내고 불로 태워 신께 제물로 바친다. 인간의 죄를 대신 받기 위해.

아니다, 눈앞의 저것은 비둘기가 아닌 사람이다. 자신은 신관이지만 의사다. 사람을 눈앞에 둔다면 배를 가르는 것이 아닌 봉합을 해야 한다.

“꺄아아아아악!”

새된 비명 소리가 들린다. 듈란은 수습을 하려고 했다. 아니야, 아직 따뜻해. 다시 넣어 봉합을 하고, 심장에 적당한 충격을 준다면 아직 희망이 있을 거야. 아직 죽지 않았을 거야. 아직 따뜻해. 심장을…. 바늘은 어디에 있지.

“아.”

심장이 갈라져 있다.

분주하게 수습하던 손이 멈췄다. 듈란은 자신이 하는 노력이 그 어떠한 의미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판단이 끝나자 의문만이 남았다.

왜?

듈란은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손을 강제로 움직이게 만든, 레이몬드 세이어테스.

신부를 죽이게 한 신랑을 올려다보았다.

이상하게 현실성이 없었다. 비명 소리와 고함 소리가 들리고 있었지만 이 공간에는 듈란 자신과 레이몬드밖에 없는 것 같았다. 레이몬드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듈란에게 말을 걸었다.

“헛된 짓을 하시는군요, 듈란 신관님.”

듈란은 지금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잘못 판단했나? 듈란은 캐런이 고른 저 남자가 분명 캐런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캐런도 저 남자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잘못 생각했나? 사실은 원한을 가지고 있었단 말인가?

그러나 캐런을 찌르게 한 레이몬드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듈란은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다.

왜 그가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가? 왜 자신을 저렇게 원망하는 듯한 눈길로 내려다보는 거지? 왜 저렇게 상처받은 얼굴을 하는 거지? 저자도 자신이 캐런을 죽였다고 말하는 듯한 눈으로….

“기억해…. 날… 죽인 건… 너야…. 알았어?”

원망과 증오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 힘이 빠지는 손. 식어 가는 몸.

듈란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찌른 것은, 널 죽인 것은 내가 아니야! 네 신랑이란 말이다!’

“왜….”

“제가 더 묻고 싶군요. 왜 지금 살리려고 하십니까? 어차피 그녀는 다시 살아날 텐데.”

레이몬드의 말은 듈란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그는 회귀에 대해 알고 있단 말인가? 캐런에게서 들은 진실인가?

레이몬드는 듈란을 내려다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조금 전 자신의 아내가 될 이에게 칼을 박아 넣던 행동이 믿기지 않을 만큼 잔잔한 목소리였다.

“전 기억합니다. 당신 덕분에…. 이런, ‘지금’의 당신은 그 방법을 미처 모르는 모양이군요.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곧 알게 될 테니까. 이건 그녀와 제가 노력한 결과입니다. 어떻습니까?”

“당신도, 기억을…한다고.”

“예.”

혼란스럽다. 의문은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왜 지금 이렇게? 왜 자신이 캐런을 죽이는 것으로 몰고 가려고 한단 말인가? 듈란은 레이몬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에 자신 덕분에 레이몬드가 캐런의 영원한 삶을 알게 되었다면, 그걸로 만족해야 한다. 그들은 듈란에게 감사해야 한다. 영원한 처녀, 영원한 젊음, 영생을 누리는 신과 사랑을 나누는 것에 기뻐해야 한다.

“…이,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정말로 둘이 서로를 사랑하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닌가. 둘이서 결혼해서 살라고. 되살아나는 것까지 안다면 더더욱 그들에게는 완벽한 행운이 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자신은 주어진 역에 만족하려고 했다. 듈란은 지금의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아서 미칠 지경이었다.

“왜, 왜 이런….”

“저런, 역시 말씀드려도 지금의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그럴 것이라 생각하긴 했습니다만 역시 좀 슬프군요.”

듈란은 캐런을 붙들고 있었다. 이미 숨이 끊어졌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레이몬드는 그런 듈란을 보면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시감이 느껴지는군요. 예전에는 당신이 저를 이렇게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듈란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를 말하는 것인가?

하지만 전생의 자신이 한 행동이라면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의문에 찬 그를 레이몬드가 계속해서 보고 있다. 듈란은 눈치챘다. 레이몬드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무엇을?

“듈란 신관님, 당신은 억울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자신이 이런 짓을 당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당신의 죄를 모르겠지요.”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은 죄인이 아니다. 죄인일 수가 없다. 자신은 희생자다. 사랑의 완성을 돕는 자다. 영원을 지키는 자다. 캐런은, 레이몬드는, 자신에게 감사히 여겨야 한다.

“신관님, 어디까지 도망가실 생각입니까?”

당신들은 내게 이래서는 안 돼.

남자가 입을 벌렸다. 그의 손에 너덜거리는 하얀 것이 살점과 같이 떨어져 나온다.

“부탁합니다.”

그는 자신의 이빨을 뽑으며 눈물을 흘린다.

마치 너무나 괴롭다는 듯이.

뭐지?

듈란은 숨을 들이쉬었다. 겪은 적 없는 풍경이 떠오르고 있었다. 레이몬드가 자신의 이빨을 뽑는 환상이 보였다. 고개를 저었다. 다시 시야가 돌아온다.

“크윽…. 지금….”

듈란의 입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듈란은 자신이 혀를 씹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통증은 없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하지만 또다시 시야는 흐려진다. 손을 뻗는다. 하지만 닿는 것은 없었다.

“캐, 캐런 하이어. 네 남… 편이 와도 그런 얼굴을 할 텐가?”

시작은 질문이다.

너는 자신이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지. 난 네 남주인공이 나타날 때까지의 적당한 방해물이고. 그럼 내 질문에 넌 얼굴을 찌푸리면서 싫어하겠지.

“아직 아니잖아.”

그래, 그럴 것 같았어.

춤이 시작된다. 작달막하고 떼를 쓰고 성질을 부리던 생물은 어느새 늘씬한 미인으로 자라 능숙하게 움직인다. 그걸 바라보며 듈란은 생각한다. 이 아름다움은 영원할 것이다.

“아가씨가 숫자가 새겨진 동전을 들고 있었어요. 117이라고 새겨져 있던데요. 무슨 의미인가요?”

“117이라고.”

그제야 알았다. 성공했다. 이번에도 자신은 성공했고 캐런은 지금 영원 속에 박제되어 있다. 하지만 기쁨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 첫날에 동전부터 확인했어야 했는데. 하필이면 그 첫날에. 듈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임신했으면 어떡하지?’

듈란은 자신이 과거에 투여했던 약물의 양을 생각한다. 괜찮다. 출산은 하지 못할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을 것이다. 이대로라면 똑같이 사산을 할 것이고 생은 되풀이될 것이다. 자신의 자식이라도 마찬가지다.

후회하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육욕이 아니다. 애정이 아니다. 그가 원하는 가치는 더 높은 곳에 있다. 인간의 손으로 영원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영원 앞에서 자식을 낳고 기르는 삶 따위는 하찮다.

그것은 어느 사람이나, 어느 여자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불멸이다. 그것이 신이다.

“미쳤습니다. 제가 급하게 숨기느라 비록 이 꼴이 되었지만, 죽은 것은 확실했어요. 아가씨가 낸시를 죽였습니다.”

보웬이 끔찍한 꼴이 되어 있는 낸시를 가리키며 넌더리를 냈다. 듈란은 낸시의 얼굴을 보았다. 공포와 고통으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괜찮아…. 예상했다. 멀쩡한 정신으로 살기는 힘들겠지.”

“듈란 님.”

“가서 네 할 일을 해라.”

시체는 이어졌다. 그 다음은 사형수의 시신이 토막이 난 상태로 다시 버려졌다. 마치 낸시의 시체를 뺏긴 것에 대한 분노의 표시 같았다. 그리고 캐런은 사형수의 자식을 데려왔다. 듈란은 아이의 벌린 입을 들여다보았다. 심한 화상을 입고 있었다.

듈란은 캐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생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 둘이었다. 예전의 가정교사와 그 하녀. 총에 맞아 절명한 것을 수습하던 보웬이 넌더리를 냈다. 시체의 숫자는 빠르게 늘어난다. 이셀라가 캐런에게서 달아나다가 마주친 순간, 듈란은 깨달았다.

캐런은 완전히 망가졌다. 캐런은 살인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자신이 한 짓의 결과다.

영원을 만들어 내고 싶었다. 영생을 선물하고 싶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캐런은 고독과 지루함에 미쳐 날뛰는 짐승이었다. 이것이 자신이 만들어 낸 결과요, 죄였다. 듈란은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죽어도 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내려다본다. 자신이 한 결과를 본다.

영주의 불탄 시체가 있다. 죽어서 나온 어린아이의 시체가 있다. 자신이 화장한 하녀의, 가정교사의, 또 그 하녀의…. 듈란은 자신이 한 일의 끝을 알았다.

하지만 듈란은 확신했다. 저자들은 또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러니까 캐런은 죄인이 될 수 없다. 죄인은 캐런을 미치게 한 자신, 하나뿐이다. 듈란은 캐런이 임신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잠시나마 흔들린 자신을 다잡고 기도했다.

‘주여 저를 용서치 마소서. 제가 죄인임을 스스로 아나니.’

그리고 결정했다. 자신은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절대 포기할 수는 없다.

“진정한 사랑을 해. 그럼 널… 도와줄게. 내가 아는 모든 것을 넘, 넘길게.”

내기를 했다. 거듭된 삶에 지친 그녀는 사랑을 비웃으면서도 희망을 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사랑은 그녀가 비웃어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머릿속 깊숙이 넣어 둔 것이다. 그리고 듈란이 던지는 희망은 그녀의 미쳐 날뛰는 행동을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이야?”

“그래.”

듈란은 자신의 위치를 깨달았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절감했다. 캐런이 진정한 사랑을, 정말로 도무지 놓지 못할 사랑을 찾는지 보자. 그리고 자신이 그것을 인정할 수 있을지 보자. 만약에 그녀가 선택한 남자가 자신이 보기에도 합당하다면.

“잊, 잊지 마. 내가 인정할 정도로… 사랑해야 해.”

네 배 안에 있는 내 자식을 죽여서, 네 사랑의 완성을 도와주지. 그리고 넌 그와 같이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거야.

내가 주는 결혼 선물이다.


 

눈에서 피가 흘러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코에서, 입에서, 온통 피가 흐른다. 듈란은 자신이 모르는 기억이 떠오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것은 무슨 기억이지? 환상인가? 나는 미친 것인가?

목소리가 들린다. 어렴풋이 멀리서, 하지만 바로 옆에서.

죽음이 흐르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기 시작한다.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어느 날 듈란은 캐런의 부고를 보았다. 지역 신문에서 나온 짧은 기사였다. 결혼식 날 독주를 마시고 살해당했으며 경찰은 최선을 다해 수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듈란과 캐런은 먼 친척인 것 말고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기 때문에 신문 기사보다 늦게 연락이 도착했다.

듈란은 장례식을 주도했지만 별다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독을 먹은 얼굴은 생전의 눈처럼 보랏빛으로 변해 있었다. 손에 동전을 쥐여 주었다. 다음에는 덜 무서울 거야.

어느 날 누군가가 캐런의 부고를 일렀다.

캐런 아가씨가 말에 치여 돌아가셨다는군요. 며칠 뒤에 장례식의 집도를 맡아 달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자식의 죽음을 접한 영주는 기절해서 쓰러진 뒤 그 길로 죽었다. 듈란은 무덤을 두 개 파야했다.

시체를 검안하자 캐런의 몸에서는 동전이 나왔다. 조사관들은 그것의 의미를 몰랐지만 듈란은 알았다. 이번에는 격렬했나 보군. 듈란은 남몰래 웃으면서 그 동전을 캐런의 손에 쥐었다.

어느 날 캐런이 치정 문제로 죽었다.

계단에서 떠밀려 목이 부러졌다. 듈란은 목을 다시 돌려놓으면서 어이없어서 웃었다. 품에서는 동전이 나왔다. 듈란은 손에 쥐여 주면서 불륜보다는 좀 더 다른 재미를 찾아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충고했다. 물론 시체는 말이 없다. 듈란은 무덤에 흙을 던졌다.

어느 날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자신과 결혼하겠다는 캐런의 얼굴을 보면서 듈란은 역겨움을 느꼈다. 캐런에게 숫자 77이 새겨져 있는 동전이 있었던 것을 알기 때문이다. 77번의 삶 속에서 그녀는 어떻게 살았기에 자신에게 온 걸까. 어찌 되었든 자신은 성공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성공할 것이다. 캐런 로이드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을 보며 듈란은 이름을 파내고 싶었다. 내 아내가 아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한 짓이 아니다.

죽음이 그에게 다가온다.

캐런이 발을 구른다.

듈란은 그 등을 힘껏 민다. 그러면 캐런은 하늘 위로 높이 솟구쳐서 닿지 못할 곳으로 올라간다.

내가 원한 것은.

레이몬드는 눈을 감았다.

답이 보이지 않는다. 한없는 어둠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듈란과 오랜 시간을 보냈다.

드디어 잡은 신관을 제대로 이용해야 했다. 자신의 시간은 캐런보다 많이 길었지만, 이번만큼 길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레이몬드는 듈란을 고문하면서, 또한 이제까지 쌓인 지식을 이용하면서 자신이 어떻게 기억을 찾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듈란이 이미 캐런의 몸을 제대로 망가뜨렸다는 것마저도 알게 되었다.

듈란은 자신의 자식을 이용해서 레이몬드에게 기억을 되찾게 했다. 듈란은 과거에 캐런과 이어진 적도 있었지만 그것이 그의 신앙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왜 그러셨습니까?”

“제, 제 자신이 약해질 것이 두려웠습니다. 행여 미래의 제, 제가… 마음이 약해질까. 그것이 두려웠습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를 바라지 않습니다.”

듈란은 죽기 전까지 그렇게 말했다.

그는 레이몬드의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의 광신은 남의 인정을 바라는 영역이 아니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이해조차도 바라지 않았다. 듈란은 자신이 약해질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했다.

캐런이 출산을 하면 영원은 끝난다. 그래서 듈란은 이미 캐런이 출산을 못하는 몸으로 만들어 버렸다.

“행여… 제 마음이 약해지면 어떡합니까. 레이몬드 경, 당신은 뭘 착각하고 계셨군요. 전 그녀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왜 제게 기억을 짊어지게 하셨습니까. 왜 하필 저였습니까.”

“지금의 제게 물어서 어떡합니까.”

듈란은 너덜거리는 자신의 손톱을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때의 제 자신이 약간 원망… 스럽군요. 왜 하필이면 당신을, 골라서.”

자신을 이다지도 괴롭히는지.

레이몬드를 끝으로 몰고 가는 대화였다.

그리고 듈란은 머지않아 죽었다. 레이몬드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결국 그는 자살에 성공한 것이다. 레이몬드는 남은 한 팔로 기어가 석벽에 머리를 찧어 자살한 그를 보면서 벽에 기대어 한숨을 쉬었다.

“이제 다음 생애에나 보겠군요. 듈란 신관님. 어쩌면 다다음에도, 또 그 다음에도.”

아무리 캐런과 자신이 노력해도, 어떤 방법을 써도 자식은 태어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이번에 노력해서 얻은 결과는 절망이다. 끝은 나지 않을 것이다. 레이몬드는 숨이 끊긴 듈란의 가슴 위에 성물 대신 자신이 자주 쓰던 망치를 올려 두었다.

오랜 세월동안 고문하는 자와 고문당하는 자는 둘 다 지쳤다. 둘은 같아져 버렸다. 다음 생에, 다다음 생에,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고통 받는 것은 레이몬드다. 듈란은 지금의 고통을 기억조차 하지 못할 테니까.

“그래도 다음 생애에서는 좀 더 잘할 수 있을 겁니다.”

단 하나의 위안은 절망과 같은 맥락이었다. 영원한 시간이 있다. 결국에는 답을 찾을 것이다. 듈란이 시간의 끈을 뒤집어 붙였다면 그만큼 그들에게도 시간이 있다.

지금의 레이몬드는 다시 한번 캐런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다시 캐런을 만나고, 다시 고민하고, 같이 살면서 언젠가 끝을 찾자.

‘괜찮아. 다시 만날 수 있어.’

‘괜찮아. 다시 살아나니까.’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체념이 있었다.

영원에서 벗어나기 위한 인간이 잡는 희망이 결국에는 또 영원이라니.

이런 아이러니가 또 없다.

“뭐가 그렇게 무서워요?”

“모르겠습니다, 캐런.”

레이몬드는 중얼거렸다.

환상인가. 지금은 몇 년이 지났나.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어디인가. 하지만 그것이 뭐가 중요할까. 끝나지 않는 삶의 고리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뿐이다.

“전 그냥 당신만 있으면 됩니다.”

자신은 또다시 만나고, 또다시 사랑하고, 또다시 죽을 것이다.

이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그것이면 된다.

다시 눈을 뜬다.

레이몬드의 새로운 시작은 늘 전쟁터다.

시작할 때 가끔은 눈을 다친다.

“레이몬드 경! 죄송… 정말 죄송합니다.”

“됐어. 신경 쓰지 마.”

다시 몇 번이나 사는 자신이 실수한 것이다. 레이몬드는 한 눈으로 또다시 수십 년 전의 젊은 기사를 본다. 감회에 젖는다. 저 젊은 청년은 항상 청년이고, 루이스는 항상 소년이고, 캐런은 항상 갓 성인이 된 처녀다.

이번에도 다시 살면 그뿐이다.

우선 무엇을 해야 할까. 레이몬드는 고민하다가 결국 처음에는 같은 방법을 선택했다. 이셀라에게 찾아가고, 그 다음은 캐런을 찾아가고. 그러다가 천천히 설명하자. 그러나 당장 캐런을 만나러 가기에는 힘이 들었다. 그러다가 무리해서 빨리 만나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자 힘이 빠졌다. 캐런은 저택에 있을 것이고 거기에서 그녀는 그날까지 안전하다.

“그 목걸이로 주세요.”

하지만 레이몬드는 있을 수 없는 거리에, 있을 수 없는 장소에 캐런이 나타난 것을 보고 처음에는 꿈을 꾸는 것인가 생각했다. 왜 그녀는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좀 다르게 살아 보고 싶어서요. 베르딕 에반스 씨한테 가서 빚 좀 줄여 달라 해 볼까 하고.”

가볍게 희망을 말한다.

“안 되도 어쩔 수 없지만 아버지의 짐을 덜어 볼까 해서요.”

그것이 당신에게 왜 중요합니까?

캐런은 미래를 말한다. 희망을 말한다. 좀 더 넓은 세계를 말한다. 그래서 레이몬드는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진실을 말해 주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캐런 외의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레이몬드는 더 이상 캐런을 사랑하는 것 외의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이셀라와 친구가 되고 싶어요.”

필요 없어요.

캐런, 우리의 아이는 태어나지 못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 둘 외에는 아무도 없었고, 없고, 없을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기억은 중첩되지 않을 것이고 인연은 끊어질 것이며 세계는 무너질 것입니다. 자식은 태어나지 않아요. 괜한 짓 하지 말아요. 노력하지 말아요. 노력은 의미가 없는데. 그런데도 결국.

루이스 전하 만세!

루이스가 왕이 되는 미래가 결정되었다. 7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번도 없었던, 기적이었다. 그것은 레이몬드 혼자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선택과 노력과 우연이 겹쳐졌다. 레이몬드가 모르는 미래가 생겨났다.

아, 세상은 이렇게나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불확실하고 수많은 가능성이 있고 한없이 뻗어져나가는 미래가 레이몬드의 눈앞에 있었다.

레이몬드는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만이 있으면 된다고 했지만, 당신과 같이 세상을 살고 싶습니다.

당신의 인생을, 우리의 인생을, 미래를 도무지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 무엇이든.

제 자식을 이용해서라도.

“듈란이 기억을 찾는다고 포기할까요?”

캐런이 물었다.

“듈란은 알다시피 자신이 기억하는 것도 싫어서 도망갔던 사람이에요. 하지만 확신만 있다면 죽음조차 비웃는 사람이 듈란이죠. 기억을 찾으면 그가 포기할까요?”

레이몬드는 캐런에게 말했다.

“그분은 포기할 겁니다. 확신합니다. 전 이제 듈란 신관님을 더 잘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가 제게 기억을 주었으니까요.”

듈란이 자신을 극복할 힘을 레이몬드에게 주었다. 레이몬드는 듈란을 이해했다. 그의 마음을, 그의 행동을, 그리고 그가 할 선택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듈란이 결국 왕을 죽이지 못하자 레이몬드는 확신했다.

듈란의 약한 부분을 알았다. 그는 스스로 도덕이라 부를지 모르겠다. 하지만 듈란의 약점 그 하나를 레이몬드는 드디어 알았다. 어쩌면 좀 더 전에 알았을지도 모른다. 결심이 부족해 스스로의 눈을 가렸다.

그러나 지금의 레이몬드는 다음의 날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리고 선택했다.

“듈란 신관님은 이제까지, 백 번이 넘는 삶 동안 단 한 번도 오래 산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항상 청년이었다.

듈란의 눈앞에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수백 번의 기억, 캐런의 죽음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괜찮다. 자신은 확신한다. 캐런은 또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녀는 영생을 얻었으니까.

…그리고 자신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

신관님, 그거 아십니까? 당신은 이제까지 언제나 캐런이 죽고 머지않아 자살하셨습니다. 저는 압니다. 이제 확신합니다. 당신은 버티지 못합니다.

저는 결국 완벽한 그녀의 짝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제 외모 덕분도 아니고, 제 품행 때문도 아니며, 하물며 재산은 더더욱 아닙니다.

제가 죽여야 할 때는 반드시 죽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캐런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결국 당신 말이 맞긴 했군요.

제가 그녀에게 선물할 수 있는 건 ‘죽음’이라는 말 말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죄를 알아야 합니다.

이제 기억나십니까?

탕!

그리고 듈란 혼자만이 남았다.


 

“안… 돼….”

듈란은 레이몬드에게 기어갔다. 하지만 관자놀이를 정확하게 뚫은 탄환은 반대편으로 나가 신전의 벽에 처박혔다. 듈란은 레이몬드를 손으로 붙들었지만 이미 그 안에 혼이 없다는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안 돼….”

듈란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런 것을 원한 게 아니었다. 자신은 캐런을 포기했다. 포기하려고 했다. 그리고 축복하려고 했다. 영원을, 영원한 사랑을. 자신이 아니라도 그녀가 선택한 남자를 축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탑 위에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캐런이 있었다. 사형을 앞두고, 불임을 눈치챈 캐런의 얼굴은 해쓱했지만 약간 밝아졌다.

“듈란, 레이몬드 경이 돌아왔어.”

“…그래.”

“레이몬드 경이 돌아왔다고. 오지 말라고 했는데.”

다시 얼굴은 서글픔으로 물든다.

“그를 동정해.”

아니야, 넌 그를 사랑하고 있어.

“사랑은 사람끼리 하는 거야!”

아니, 난 알 수 있어.

듈란은 그래서 결심했다. 내기는 졌다. 어쩌면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사랑을 하지 않기를. 영원히 혼자서 살아가기를.

하지만 백여 년을 넘게 산 캐런이 고른 남자다. 너의 운명이라며, 남자 주인공을 찾으라는 그 웃기지도 않은 속삭임을 믿고 선택한 남자가 저 남자다. 그 선택이 틀릴 리가 없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형장에 끌려온 캐런에게 달려드는 레이몬드를 보면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남자가 네가 선택한 남자구나. 널 위해 저렇게까지 포기할 수 있는 남자가 있구나. 원칙과 정의를 사랑하지만 그보다 널 더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있구나. 나는 도무지 저렇게 하지 못함을 인정한다.

“넌 내기에서 이겼어.”

발로 손가락을 지그시 눌러 떼어 낸다. 그리고 떨어지는 캐런과, 벽을 차고 뛰어오르는 레이몬드를 본다. 닿지 않기를 기도한다.

그러니까 죽어라.

네 사랑은 완성되고 넌 영원한 동반자를 얻게 될 것이며 나는 그 결혼을 축복하리라.

“왜 하필 저였습니까?”

캐서린에게 묻는 자신이 보인다.

왜 하필 저를 고르셨나요. 왜 저보고 당신을 도우라 하셨나요. 왜 하필이면.

캐서린은 언제나처럼 우아하게 앉아서, 옅은 미소를 띠면서 어린 듈란을 내려다본다.

“그야 당연하잖니.”

“네가.”

“캐런을….”

가질 수 없는 감정이 있다.

그것만은 아니어야 한다. 그렇다면 도무지 할 수 없을 짓이니까. 이 더럽고, 포기 못 하는 구역질 나는 마음을, 호기심을, 광증을 그런 감정이라고 칭할 수 없다.

“엄마가 난 안 죽는대.”

그거 잘됐네.

너는 불안해할 필요가 없어. 불안으로 미래를 볼 필요 없어. 죽는 것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어. 죽는 건 무섭잖아, 그렇지? 아름다운 끝은 없어. 이야기는 끝나지 않아.

“이게 아니야!”

시체가 둘 남았다. 이것을 원한 게 아니었다. 듈란은 절규했다.

모든 기억이 중첩되기 시작하고 모든 삶이 그의 머릿속을, 눈앞을, 귀를 채운다. 속에서부터 차올라 목구멍을 막아 버린다. 그의 귀에 들릴 리 없는 목소리가 들린다. 보일 리 없는 것이 보인다. 끝나지 않는 속삭임과 환상이 시작된다.

신관님이 절 이해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이 고통을, 이 눈물을, 이 한숨을 당신도 이해할 수 있다면. 당신에게도 기억을 드릴 수 있다면.

네가 무서워했으면 좋겠어. 아주 슬퍼했으면 좋겠어. 끝나지 않는 통곡의 밤을 보냈으면 좋겠어.

너는 도망갈 수 없어. 우리의 자식이 네게 죽었으니까.

듈란은 감옥에 갇혔다.

기절한 하이어 영주를 대신해 이셀라가 상황을 수습했다. 이셀라는 하인들에게 명령해 듈란을 포박해서 넘겼으며 팬케이르 후작이 그의 처리를 이어받았다.

후작은 그를 감옥에 가두어 두었지만 어떻게 그를 처리해야 할지 며칠이 지나고도 정하지 못했다. 루이스에게는 말하지 못했다. 즉위 후 초기 통치 기간이다 보니 무척이나 예민해, 꺼림칙한 비극을 꺼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혼 서약을 위해 캐런과 레이몬드는 단상 앞으로 나아갔고, 그 앞에서 듈란은 주례를 봤기 때문에 그들의 위치는 다른 사람들과 꽤나 떨어져 있었다. 너무 급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확실한 것은 캐런이 칼에 찔려 죽었으며, 레이몬드는 자살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남은 듈란이 죄인이라며 이셀라는 그를 지목했지만, 신부가 죽었다고 그 자리에서 바로 자살했다는 레이몬드가 남긴 편지가, 후작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캐런이 죽는다면 범인은 듈란입니다. 하지만 후작님, 재판이 어떻게 되더라도 절대 그가 죽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그는 사형이라는 편한 길을 가면 안 될 사람입니다.

캐런과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편지에 후작은 머리가 아팠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도 말이 없었다. 정황상 듈란이 범인이었지만 이셀라를 몇 번 추궁해 본 결과 듈란이 캐런을 찌른 것인지 이셀라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레이몬드가 듈란을 제압했던 것이 아니라, 캐런을 따라 자살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거기에 더해 편지까지 보니 더더욱 판단을 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결국 후작은 듈란을 시간이 흐른 뒤 증거 불충분으로 풀어 줄 수밖에 없었다.

“어딜 가나 내가 지켜보고 있음을 잊지 마시오.”

“…….”

아직 청년인 듈란의 얼굴은 노인과 같이 변해 버렸다. 분명 아직 피부는 늘어지지 않았고 머리는 검었으나, 등은 더욱 굽었고 몸은 꼬챙이처럼 말라 버렸다. 식물이나 정물에 가까운 모습은 도무지 한창때의 청년이라 할 수 없었다.

눈은 빛을 잃었고 말은 거의 하지 못했다. 그와 대화를 하려면 그를 두드려야 했고 그 후에도 한참 동안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 듈란은 사건 이후 쭉 넋이 나가 있었다. 혼자 있으면 식사도 하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을 붙여야 했다. 팬케이르 후작은 혀를 찼다.

듈란은 유죄 판결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돌아가서 하이어 영주가 되어야 했다. 결혼식 후 2년이 지나서였다.

듈란은 하이어 저택으로 돌아와서도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가 감당하지 못하는 기억은 환상과 환청이 되어 나타났고 듈란은 그저 가만히 앉아서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나 결혼할 거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네가 이해하기나 해?

신관님, 부탁합니다. 부디 저를.

저희를.

듈란이 유령과 같이 사는 자신의 모습을 인지한 것은 시간이 더 지나서였다. 몸을 돌보지 않아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듈란은 움직였다. 그리고 텅 빈 저택 안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을 보았다. 듈란은 비척거리며 영지의 무덤으로 기다시피 움직였다.

어느새 몇 번째인지 모를 가을이 되었다. 풍성함을 나타내는 계절일 터인데 날씨는 을씨년스러웠고 미친 영주의 저택에는 아무도 오지 않아 주위는 온통 폐허였다.

내려다보이는 마을은 이미 황폐화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떠나, 그 자리를 떠돌이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듈란은 그 모습을 멀거니 쳐다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유령에 지쳐 무덤으로 가고 싶었다. 이제 한계였다.

사람이 너무 괴로우면 자살할 힘도 나지 않는다. 듈란은 정신을 다잡고 죽기 위해 무덤으로 기어 올라갔다.

죽자, 어서, 언제나처럼.

품에는 약이 들어 있었다. 잠깐 잠드는 것이 아닌, 영원히 잠들게 하는 약이었다. 듈란의 눈에 가장 가까운 묘비명이 들어왔다.

캐런 하이어.

캐런의 시신은 하이어 영지에 묻혔으며 레이몬드의 시신 또한 세이어테스 영지로 보내졌다. 결혼을 제대로 치르지 못했기에 가족들과 친척들은 각 시신을 돌려받기 원했다.

“…영주님.”

듈란은 캐서린의 무덤 옆에 묻힌 영주의 비석을 내려다보았다. 하이어 영주는 이번에도 죽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캐런의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하이어 영주는 딸이 죽은 것을 보고 쓰러져 더 이상 일어나지 못했다. 일가족의 무덤을 보며 듈란은 멍하니 서 있다가, 자신의 품에서 약을 꺼냈다.

“…….”

자살은 쉽다.

듈란은 이제까지 몇 번이고 해 왔다. 하지만 듈란은 캐런의 묘비를 보았다. 열일곱 살에 죽었다고 적혀 있는 묘비명을 본다.

아이러니하게도 듈란의 자살을 막은 것은 캐런을 다시 만난다는 두려움이었다. 지금 죽으면 캐런의 얼굴을 바로, 머지않아서 보게 된다. 그리고 캐런과 레이몬드는 앞으로도 몇 번이고 듈란의 앞에서 죽을 것이다.

듈란이 포기할 때까지 계속해서.

듈란은 비석 앞에 무릎을 꿇었다. 도망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모든 기억은 되살아났으며 캐런과 레이몬드 또한 그 사실을 안다. 육체적으로 자살할 수 있어도 또다시 자신은 둘의 운명에 끌려들어 갈 것이다.

“안 돼.”

듈란은 깨달았다. 지금 자신이 벗어날 방법을 찾아내지 않으면 캐런은 다음 생에서 곧바로 죽을 것이며 레이몬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제 자신은 더 이상 죽음을 이용해 도망갈 수 없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네가 날 죽였어!”

듈란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죄책감이 아니라 너무 많은 기억이 홍수처럼 밀려 들어와 머리가 아팠다. 자신은 죽음으로 도망갈 수 없다. 하지만 살아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 영원히 복수당하는 것만이 남은 것인가? 듈란은 화끈거리는 코를 움켜쥐었다. 또다시 코피가 흐르고 있었다. 기억이 돌아온 뒤로 툭하면 피가 흐르고 환청과 환각이 끊이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듈란은 멍하니 앉아서 숨을 쉬었다. 그나마 무덤가에서는 환각이 덜 보였다.

그리고 기억해….

너를 용서해.

어떻게 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 캐런의 입은 용서를 말하지만 눈은 복수를 외친다. 그녀와 그는 자신이 겪게 될 고통을 예상하고 있었다. 화가 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때 우연처럼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신관님이 우리의 이 고통을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군요.”

듈란은 자신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생리적인 것인지 감정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싫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듈란은 캐런을 관찰하고 이해하고 싶어 했지만 사랑하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약해지고 싶지 않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영원의 끝을 낼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 듈란은 모든 기억을 되찾았고 캐런을 이해하게 되었다. 자신에게 종교와 같은 영원은 캐런에겐 지옥보다 못한 벌이었음을.

자신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듈란 로이드는 배교자(背敎者)다. 영생은 더 이상 자신에게 불변의 진리일 수 없었다. 기억을 되찾은 자신은 이다지도 나약하고, 두려워서… 참회하고 싶었다. 그래서 방법을 간구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알게 되었다.

툭.

듈란은 들고 있던 약을 캐런의 묘비에 부었다. 자살을 포기해야 한다.

자신이 죽지 않도록 조치해 두고 간 이유, 캐런이 자신을 용서한다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더 이상 도망가지 마십시오.”

자신은 이제까지 도망갈 수 있었다. 자살이라는 수단으로 그 다음의 인생으로 도망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은 기필코 살아야 했다.

그렇게 살아서 일생 동안 캐런의 몸을 다시 임신이 가능한 상태로 만들 연구를 해야 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은 자신이 수습해야 했다. 그리고 다음 생애에 다시 그녀를 만나야 했다.

너를 용서해

용서란 본래 사과 뒤에 오는 것이다.

캐런이 용서했으니 그 전에 듈란이 사과를 해야 했다.

캐런은 배를 쓰다듬었다.

사산될 아이, 태어나지 못할 아이, 앞으로 자신처럼 반복해서 죽을 아이를 생각한다.

아직 보지도 못한, 어떨지도 모르는 내 아이야. 어쩌면 이 끝없는 세상에 널 태어나게 하는 게 네게 잔인한 짓인지도 모르겠구나. 지금 태어나지도 못하고 사라지는 것이 축복인지도 모르겠어.

사실 새삼스럽게 엄청난 모성이 느껴지는 것 같지도 않아. 날 위해서 널 만들어 내는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정말 간절하게 널 바라고 또 바란단다. 네 얼굴이 궁금해. 네가 어떻게 걸을지, 어떤 인생을 살게 될지…. 널 정말로 만나고 싶어.

그러니까 지금은 같이 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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