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Happily ever after
시작은 언제나 똑같다.
비 내리는 정원이다.
손에는 금화가 있었다. 캐런은 손을 들어 금화를 올려다보았다. 숫자가 새겨진 것이 아닌 흔하디흔한, 평범한 금화였다. 지난 생애에 자신을 수습한 것은 듈란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캐런은 금화를 발에 차이는 밧줄 위에 던졌다.
캐런은 움직이지 않았다.
가만히 서서 비를 맞았다.
싸늘하고 차가웠지만 기다려야 한다.
자신이 죽은 후의 상황을 상상해 본다. 레이몬드는 너무 늦지 않게 따라왔을까. 듈란은 포기했을까. 그리고 이번에는, 끝이 날까.
쏴아아아….
한참을 기다리자 비가 멎었다.
캐런은 눈을 떴다. 싸늘한 새벽의 비는 멈추고 동이 터 오르기 시작했다. 더 있으면 또 이번의 삶이 시작될 것이다. 낸시는 자신을 깨우려고 들어올 것이고 하인들과 하녀들은 아침 준비를 하고 청소를 시작하며 이번 생의 시작을 준비할 것이다.
이번의 생을 준비하려면 너무 늦지 않게 들어가야 하지만 캐런은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 사소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약속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캐런은 우두커니 서서 계속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푸른빛의 새벽이 타오르는 아침에 찢겨지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사이에 눈부신 하얀 점 하나가 있었다. 지평선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그 모습은 마치 새벽을 찢어 버리고 달려오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눈부신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어슴푸레한 새벽이었지만 하얗고 금빛으로 빛나는 저 모습이 누구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미친 듯이 날뛰는 새하얀 말을 진정시키기는커녕 더더욱 흥분시켜 내달리게 하는 젊은 기사였다.
그는 캐런의 가까이에 오자 말을 세우지도 않고 그대로 뛰어내렸다. 말은 계속해서 투레질을 하며 내달리다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가 누구인지는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녀의 기사는 항상 그녀에게 오기 때문이다.
눈물은 비에 씻겨 내려가고 아침이 찾아왔다.
투명한 아침의 하늘이 세상에 가득 찼다. 캐런은 팔로 자신의 기사를 끌어안았다. 금빛으로 타오르는 듯한 몸이 캐런을 감쌌다.
영주는 아침부터 문을 두들기는 딸에게 놀랐다.
몇 년 전부터 정신이 급격히 이상해진 딸은 좀처럼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마주침만 유지하는 딸의 사정을 그도 아는 터라 영주도 굳이 딸을 찾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은 정말로 급하게 문을 두들겼기 때문에 영주는 옷을 급하게 갈아입고 직접 문을 열었다.
“얘야, 무슨 일이니? 세상에, 전부 젖었잖아.”
다 큰 딸의 몸은 온통 젖어 있었다. 흡사 호수에라도 빠진 것 같았다. 딸의 광증을 아는 터라 영주는 덜컥 겁이 났지만, 그의 걱정이 무색하게 캐런은 활짝 웃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웃음이었다.
“네, 괜찮아요. 고작 젖었을 뿐인걸요.”
캐런은 비에 젖은 머리와 몸으로, 웃으면서 아버지를 포옹했다. 몇 년 동안 없던 일이다. 놀란 영주가 엉겁결에 마주 끌어안았다. 그리고 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니?”
“너무 많아서 뭐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캐런은 그렇게 깔깔거리고 웃으며 급기야 영주의 등을 두드리더니, 자신의 몸을 돌려 뒤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처음 보는 청년이 서 있었다. 남자가 악수를 청하려 했지만 캐런이 더 빨랐다.
“제가 사랑하는 남자가 있어서요. 소개해 드리고 싶어요.”
“사랑하는 남자 말이냐?”
“네.”
영주는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했지만, 이내 알 수 있었다.
이것은 ‘그 순간’이다. 캐서린이 말했던 그것이다.
얼굴 가득 웃고 있었지만 캐런의 눈가에 빗물이 아닌 눈물이 맺혀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캐서린은 정말로….
“그렇구나.”
영주는 캐런에게 마주 웃었다. 이 순간을, 그도 기다려 왔다. 얼마나 되는 시간이 흘렀을지 자신은 모른다. 하지만 믿는다. 캐런은 웃으면서 몸을 돌렸다.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려 왔는지 몰라요.”
천천히 영주의 시야에 금발 머리 청년 하나가 들어왔다.
긴장한 얼굴의, 청혼을 하려고 하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본편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