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1. The Lady on the book (26/31)

01. The Lady on the book


 

캐서린은 듈란에게 부탁했다.

듈란은 병상에 누운 그녀를 본다. 아름답던 얼굴은 점점 더 파리해져갔다. 파리한 입술을 힘겹게 열며 그녀가 부탁했다. 마른 손이 듈란의 손을 잡았다. 딸을 닮은 보랏빛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바싹 마른 입술 사이로 간절한 소원이 흘러나온다.

나는 진정한 사랑을 원했단다. 어머니도, 외할머니도, 그런 것은 없다고 했지만 난 믿었어.

그리고 난 그렇게 생각했단다. 진정한 사랑을 찾았다고. 그리고 그를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내가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건 폭력이었고, 안식이라고 생각한 것은 너무나 짧아.

내가 틀렸던 거야.

하지만 난 캐런이 정말로 사랑을 찾았으면 좋겠구나.

도와주겠니?

…고마워.

듈란은 캐런에게 약을 먹였다.

캐런의 나이 열네 살, 초경을 할 나이부터.

듈란은 웃었다.

117.

하녀가 일러 준 그의 숫자.

100년 동안 그는 성공한 것이다.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

자신이 알지 못해도 상관없다.

듈란은 죄를 지었다.

하지만 그 죄를 받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캐런은 영원히 살 것이다.



*


 

듈란과 침대 위에서 있는 꼴을 부친에게 들켰다. 그리고 하이어 영주는 캐런을 집무실로 따로 불러내었다. 캐런은 영주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잘못한 것을 들킨 어린아이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맞긴 했다.

저지른 잘못의 수준이 화분을 깼다든가 한 것이 아니라 칼로 내려찍으려던 것이긴 하지만.

‘뭐라고 둘러댈까?’

캐런은 영주의 눈이 부담스러웠다. 듈란과 ‘옷을 입지 않는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우길 수 있었을까? 어쩌면 성공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캐런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고 치마에서는 총이 굴러 떨어졌다. 예비부부의 대화라기에는 좀 무리가 있었다.

영주는 캐런을 빤히 쳐다본다. 집무실에서는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캐런.”

“…네”

“이렇게 단둘이 말하는 것도 오래간만이구나.”

“…네. 그러네요.”

하지만 영주도 말을 쉽게 꺼내지는 못했다. 조금 더 침묵이 이어져다.

결국 다시 말을 시작한 것은 캐런이었다.

“제가 잘못했어요. 앞으로 듈란 로이드와 그렇게 싸우지 않겠어요.”

앞으로는 확실하게 들키지 않고 고문하다 죽여 버려야지. 아니, 답을 얻어 내야 하는데. 캐런은 자꾸만 선후관계가 뒤바뀌는 것을 바로잡았다.

계속해서 실패하는 것을 보면 「이 시간」에 활동하는 것은 무리인 것 같다. 그렇다면 조금 더 참아야 한다. 듈란을 언제쯤 부르는 것이 가장 좋을까.

집이 아닌 숲 같은 곳으로 데리고 나갈까. 아니면 신전으로 가서 시도를 하는 것이 좋을까. 역시 아랫도리를 잘라야 해.

“캐런.”

“…정말로 죄송해요.”

들키지 말았어야 했다. 캐런은 눈을 내리깔았다. 하이어 영주가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더구나. 나중에 사과하렴.”

“…예.”

이미 서로 사과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지만, 캐런은 마지못해서 대답했다. 캐런은 듈란을 죽이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온몸을 토막 내도 만족할 수 없었다. 갈기갈기 찢어도 그녀가 원하는 답을 얻기 전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음험한 그 남자가 어디까지 할지 두고 보자.

“캐런.”

“네.”

“…듈란을 왜 그리 미워하느냐. 그는 나름… 그래, 그럭저럭 괜찮단다.”

빈말로라도 좋은 신랑감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캐런은 이제 영주도 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캐런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제 주치의라는 것 잘 알고 있어요.”

“그래… 음?”

영주가 당황한다. 아참, 지금의 아버지와는 제대로 말을 하지 않았구나. 캐런은 또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자신에게 답답함을 느꼈다.

“어머니가 책 속에 들어왔다고 하셨죠. 저도 책 속에 들어왔다고 생각했구요.”

캐런은 하나하나 그가 말하지 않았던 것을, 또다시 말했다. 지겹지만 결국은 해야 한다. 이것은 그녀의 일이다. 낸시에게 했던 것처럼.

“제가 다시 산다는 것, 어머니가 다시 사셨다는 것을 믿으시나요?”

“당연히 믿지.”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목숨을 바로 걸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이상 자신의 부친을 추궁할 생각도 없었다.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은 임신과 출산인가요?”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단다.”

“아니면, 어머니와 제가 가정을 꾸려 가족을 만들면 막연히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하시는 건가요?”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 믿는 건가? 그렇게 순진한가?

하이어 영주는 물끄러미 딸을 본다. 그가 일어나서 캐런의 손을 잡는다.

“항상 믿는단다. 그것은 네가 결국은 사랑에 빠져서, 행복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지.”

“전 듈란이 제 문제를 해결할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목숨을 걸 만큼은 아니었다. 캐런은 왜 아버지에게 자꾸만 뭔가를 미루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캐서린은 하이어 영주를 사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냥 적당한 제공자를 찾아서 임신을 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 물음에 충격을 받은 것은 자신보다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기억이, 전부는 아니지만 조금씩 돌아오고 있어요.”

“…그래서 충격을 많이 받았구나.”

아뇨, 그것은 사소한 거예요. 전 아버지가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 충격을 많이 받았어요. 아버지, 임신해서 애를 낳으면 끝난대요. 그런데 전 불임이래요. 그래서 전 영원히 반복되는 삶 속에 살고 있어요.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요? 듈란이, 옆에서 절 돕겠다고 하는 저 남자가 절 불임으로 만든 것이면 어떡하죠? 의심스럽지 않으신가요?

캐런은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질문들을 삼킨다. 하이어 영주에게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전부 다 말하더라도 그가 어디까지 도울까.

“삶의 반복을 믿으시나요?”

“…믿는단다.”

영주는 깊은 한숨을 쉬면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캐런.”

“네.”

“넌 어렸을 때부터 듈란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

“그랬나요?”

“그래. 문을 잠가 두고 개떼를 풀어 둔 것은 너무 심했단다.”

하지만 영주는 살짝 웃었다.

“하지만 네가 여전히 듈란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겠구나. 약혼은 없던 일로 하겠다.”

“…….”

“천천히 적당한 신랑감을 찾아보자꾸나.”

어느새 시간이 또 흐르고 있었다.

이번에는 듈란과의 파혼이 이렇게 이루어지는구나.

“듈란에게는 내가 잘 일러두도록 하마.”

“…네.”

집무실의 책상에는 서류가 쌓여 있었다. 캐런은 그 서류들을 보면서 다시 반복할 앞으로의 시간들을 생각한다. 이제 또 이셀라와 베르딕이 찾아오겠구나.

이셀라를 맞이하고, 영지는 베르딕의 손에 넘어가고. 그런 1년이 다시 반복될 것이다.

그것이 지겨워서 차라리 초반에 여러 번 죽더라도 빨리 답을 얻고 싶었는데. 편법은 잘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

또 시간은 흐른다.

캐런은 이 시간대에서는 듈란에게서 결국 답을 얻지 못했다.

이번에는 그러면 이셀라와 무엇을 할까. 친구가 되기로 했었나? 캐런은 기억을 더듬는다. 이셀라와는 뭘 하는 것이 좋을까.

“캐런.”

“네. 아버지.”

“여행이라도 가면 어떻겠느냐. 너무 오랫동안 집에서만 머물고 있었어.”

캐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아버지가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지.

“아버지랑요?”

“난 일이 많아서 힘들지.”

그렇다면 누구와? 캐런은 생각을 한다.

“설마 듈란과….”

“아니, 이런 상황에서 관계를 개선하라는 말은 아니란다. 그냥 가서 쉬렴. 새로운 것도 보고.”

아, 알겠다. 이번에는 그런 쪽으로 흘러가는구나. 캐런은 납득했다. 많이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가끔씩 이셀라와 같이 별장에 머문 적이 있었다. 그곳도 나쁘지는 않다.

“이셀라 양과 같이 말인가요?”

캐런은 이셀라와 동행했던 여행을 떠올렸다. 이셀라의 시녀로서 동행하고, 그녀의 시중을 들다가 또다시 구박받고. 그런 일상이 또다시 반복되는 것일까. 이제 이셀라가 올 때도 되었다. 그녀는 이번에도 그 목걸이를 하고 올까.

낸시도 옆에 있다면 한번 낸시가 이셀라의 목걸이를 훔치는지 구경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이셀라가 지금쯤 도착했어야 하는데. 이번에는 약간 늦는 걸까.

“이셀라 양?”

“네. 언제쯤 출발하는지 일러 주세요.”

영주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묻는다.

“이셀라가 누구냐?”

“예?”

캐런은 멍하니 되물었다.

이셀라요. 이셀라 에반스. 자신의 연적. 베르딕 에반스의 딸.

영지를 가져갈 사람들. 아버지가 모를 리 없는 사람들.


 

아버지는 왜 이런 소리를 하시는 거지?

캐런은 약간 겁이 났다. 캐런은 급하게 말하려다가 오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베, 베르딕… 에반스의 딸 말하는 거예요.”

설마.

심장이 떨린다. 이셀라 에반스는 환상인가? 자신은 정신병자인가? 그 모든 것은 자신의 꿈에 불과하고 자신은 그냥 못난 약혼자를 못 견디는 소녀인가?

또다시 불안감이 엄습한다. 몇 번이고 반복한 두려움과 기시감이 올려온다. 아버지가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 하면 어떡하지.

“아. 그자의 딸?”

하지만 영주는 그 이름을 듣자 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딸과 같이 온다고 편지를 보냈었지…. 그래,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구나. 그런데 그 이름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그건.”

그야 이제까지 그녀와 전 내내 항상 함께 있었으니까요.

“제가… 들었어요…. 풍문으로.”

영주는 캐런의 얼굴을 보고 더 묻지 않았다.

“오지 않을 거란다. 하녀와 마부를 붙여 줄 테니 친척집에라도 가 있으려무나.”

“…네.”

뭔가가 이상하다. 캐런은 다시 물었다.

“우리 집에 재정이… 부족하지 않았나요?”

전부다 이상했다. 캐런은 이제까지 여행을 단독으로 간 적이 없다. 재정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여자들은 좀처럼 단독으로 여행가지 않는다. 언제나 캐런이 이동할 때는 이셀라가 옆에 있거나, 아니면 듈란이나 레이몬드가 있었다.

“제가 여행을 갈 여유가… 없지 않나요?”

하이어 영주가 고개를 저었다. 얼굴은 가벼워 보였다.

“확장하려던 사업이 전면 백지화되었어. 당분간은 무리가 없단다.”

“네?”

“그러고 보니, 가는 길에 네가 나 대신 해 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단다.”

이셀라가 오지 않았다.

그것은 100년간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무엇인가 거대한 흐름이 달라지고 있다.

“아가씨, 아직 멀었어요?”

“잠깐만, 조금만 마저 정리하고.”

캐런은 부친이 자기에게 부탁한 것을 읽고 있었다.

“이것만 마저 읽을게.”

“다 준비 끝났는데요.”

낸시가 큰 가방 세 개를 들고 온다. 역시 힘도 세다. 힘도 좋고 능력도 좋고. 손버릇만 나쁘지 않았으면 괜찮은 하녀일 텐데. 가끔씩 세뇌하려고 드는 것도 빼고. 마지막이 큰 흠이다.

낸시는 캐런의 작은 가방도 마저 자신의 짐 위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해야 할 일이 뭔데요?”

“베르딕 에반스에게 가서 사업 폐기 동의 문서에 서명해야 해.”

이셀라 에반스와 베르딕 에반스가 오지 않는다는 급한 변화가 생겼지만, 그렇다고 아예 만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나 보다. 하지만 그것만 해도 너무나 큰 변화라 캐런은 얼떨떨했다.

“베르딕 에반스에게 직접 가서 인장을 찍고 서명을 해 주렴. 이미 이야기는 전부 끝났으니 그것만 하면 된단다.”

아무리 그래도 계약서를 제대로 읽지 않는 것은 불안했다. 어쩌면 이번에는 베르딕의 더 큰 사업적 함정일지도 모른다.

‘…못 찾겠어.’

하지만 캐런은 아무리 읽어도 하자를 찾을 수 없었다. 깔끔하게 작성된 문서였다.

‘…대체 왜?’

캐런은 사업에 대한 전반적인 것을 안다. 이 시기에 베르딕이 손을 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캐런을 양녀로 들이면서까지 사업을 지속하려고 했다. 하이어 영지는 돈이 많이 나오는 곳은 아니더라도 나름 명망이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가 투자한 금액이 있었다. 그것을 그대로 팽개친다니?

‘베르딕이 미쳤나?’

이것은 베르딕 에반스에게 손해가 가는 일이다. 아무리 봐도 그가 이렇게 할 이유는 없었다. 그의 사업은 그녀가 삶을 새로 시작하는 시점 전부터 준비되었던 일이다.

“아가씨!”

“알았어. 갈게.”

캐런은 자신이 읽던 것을 다 집어넣었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어찌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네 물건은 다 챙겼니?”

낸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계속 기다린 모양이다.

“제 옷이나 물건은 다 챙겼어요. 아가씨 옷이나 물건도 대부분은 챙긴 것 같은데… 한번 직접 확인해 보세요.”

“어련히 알아서 했겠지. 양말은 충분히 챙겼지?”

“네. 아가씨, 밤색 원피스도 챙길까요?”

“아니, 그거 너무 낡아서 마음에 안 들어. 그 마을에 가서 새로 맞추려고.”

캐런은 영주의 반지를 손가락에 끼웠다. 대리인은 자신이다. 베르딕에게 가서 인장을 찍고 공식적으로 폐기하면 되는 단순한 일이다.

“거기 옷이 괜찮다는 소문을 들었거든.”

잘된 일이다. 캐런은 수도에 있는 베르딕의 저택뿐 아니라 지방에 있는 베르딕의 별장도 잘 알았다. 그곳의 재봉사들과 몇몇 천들은 꽤 괜찮았다. 캐런은 새로운 옷을 맞출 생각에 기분이 나아졌다. 이셀라에게 굽신거릴 필요 없이 부친의 돈으로 사는 것이다. 좋다.

“돈 탈탈 털어서 사야지.”

“그것도 괜찮겠네요. 그런데 듈란 님이 아니라 아가씨가 가서 서명하신다구요?”

“생일 지났잖아. 나도 성인이야. 대리인 자격은 있어. 듈란이 나와 결혼한 것도 아니고. 보웬. 저거 마저 실어.”

캐런은 큰 트렁크를 문가에 서 있는 보웬에게 넘기면서 말했다.

“듈란에게 뭐라 하지는 말고.”

“제가 왜 그런 짓을….”

“아니면 말고.”

캐런은 보웬을 가볍게 쳤다. 그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한참을 마차가 달린다. 캐런은 변하는 풍경을 넋 놓고 쳐다보았다. 전에도 몇 번이나 가 본 길이었지만 지금처럼 듈란도, 레이몬드도, 아버지도 없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가씨, 머리 집어넣으세요. 조금 있으면 숲 안쪽으로 가야 하니까요.”

“그게 왜?”

“나뭇가지 때문에 위험하니까요. 당연하잖아요.”

캐런은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네 잔소리도 좀 오랜만에 듣는 것 같아.”

“왜요?”

“지난번에는 네가 아니라 다른 애였거든.”

“나 말고 다른 하녀를 채용하셨다구요? 대체 언제요?”

“지난번 생에서.”

“…네에.”

약간 흥분한 것처럼 보이던 낸시는 이내 김이 빠졌다.

캐런은 쿡쿡 웃었다. 캐런의 얼굴을 보면서 낸시가 물었다.

“네에… 왜 바꾸셨어요?”

내가 널 죽였거든. 살다 보니까 심심해서 너 죽으면 어떻게 변할지 궁금했어. 그리고 그 시작은 꽤 많은 걸 바꿨어. 지금 널 또 죽이면 뭐가 어떻게 변할까?

물론 캐런은 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다. 캐런은 다음 선택까지 참을 생각이었다.

“네가 죽었어.”

“…왜요?”

낸시가 약간 충격 받은 목소리로 물었다.

“사고가 났거든.”

“무슨 사고요?”

“그럴 수도 있지 왜 이리 캐물어? 안 믿는다면서.”

꼬치꼬치 묻는 낸시에게 캐런이 대꾸했다. 어차피 제대로 믿지도 않으면서. 네가 원할 대답을 해 주지도 않을 텐데. 낸시는 툴툴거리면서 대답했다.

“안 믿어도 그런 건 좀 찝찝하잖아요. 전 점을 치지만 신뢰하지는 않아요. 그래도 궁금해서 치긴 쳐요.”

“어차피 안 믿는데 왜 점을 쳐?”

“제가 토마토를 먹고 죽는 꿈을 꾼다면 그 다음날은 토마토를 먹지 않는 이유 같은 거죠.”

캐런은 눈을 깜빡였다. 역시 잘 모르겠다.

“도나였어.”

“도나가 누군데요?”

“세탁 하녀 중에 있잖아. 나보다 한살 많은 갈색 머리… 그 양 갈래로 땋아서 다니는 애 말이야.”

캐런이 설명을 상세히 하자 낸시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아, 하고 기억해 냈다.

“기억났어요. 그런데 왜 하필 걔예요? 일도 지지리 못하는데.”

“글쎄.”

별 사소한 이유였겠지. 자신이 낸시를 죽였다는 것을 아버지와 듈란은 알았다.

낸시와 달리 전혀 아무 능력도 없고, 약간 덜떨어지고, 약한 또래를 하녀로 밀어 넣었다. 아마 가장… 죽어도 아무도 찾지 않을 만한 아이였을 것이다.

“하필 세탁실의 도나라니 약간 자존심이 상하네요.”

“뭘 또 그러니.”

“같이 일하는 애들이 엄청 싫어해요. 착하긴 하지만 좀 요령이 없는 아이라.”

하지만 걔는 네 생각보다는 용감해. 한 다리와 한 팔이 없어져도 마지막까지 기어 와 왕자를 물어뜯을 정도로. 총도 칼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렇구나.”

캐런은 좀 쓸쓸해졌다.

자신이 본 그 도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캐런이 또다시 반복해서 움직이면, 낸시를 죽이고 토머스를 토막 내고 아버지가 불이 나 죽으면 다시 그 도나를 만날까.

“도나는 계속 세탁하는 일을 하니?”

“네. 원하시면 아가씨 쪽으로 돌리게 할까요? 돌아갈 때 헬렌에게 전보를 부칠게요.”

“아냐, 됐어.”

똑같이 행동해서 똑같은 반응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러면 더욱 퇴색되는 것 같아서. 그때의 삶은 그때로 남겨 두고 싶다.

“너무 힘드시면 제가 또 기억을 지워 드릴 수 있어요.”

낸시가 자신의 손을 잡는다.

“전 그러기 위해 왔으니까요.”

하지만 캐런은 손을 빼냈다.

“하지 마. 그냥 이대로 있고 싶어.”

캐런은 자신의 손을 포개고 눈을 감았다. 피곤하고 서글퍼도 슬픔에 도취되고 싶었다.

베르딕 에반스가 흐트러진 머리로 캐런을 맞았다.

“반갑소, 캐런 하이어 영애.”

캐런은 그의 머리가 그렇게 정돈이 안 된 것을 처음 보았다. 그는 항상 기름을 발라서 말끔히 넘기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옷도 구겨져 있었다.

“하이어 영지에서 대리인으로 온 것이오?”

“예, 아버지를 대신해서 왔습니다. 제가 찾아온 시간이 맞지 않은 때인가요?”

“아, 아니. 괜찮소.”

지금 베르딕은 캐런이 그의 머리를 보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래 살다 보니 정말 별별 꼴을 다 보는군. 캐런은 그의 모습을 보며 치마 끝을 잡고 종종거리는 발걸음으로 쫓아갔다.

“여기와, 여기, 그리고 이곳에 찍으시오.”

캐런은 그가 내미는 서류들을 다시 보았다. 역시나 문제는 없다. 캐런은 찍고 나서 베르딕이 찍은 서류를 받았다.

“그래, 이제 당신들과 우리의 관계는 끝났소.”

“그렇군요.”

“후에 사소한 자재 정리는 다음 달부터 철거하도록 명하겠으니, 그렇게 아버지에게 전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너무 빠르고 깔끔해서 차가울 정도의 진행이었다.

캐런은 일어났다. 문가에 있던 하인이 정중한 태도로 문을 열었다. 베르딕이 뒤따라오면서 말했다.

“날이 지고 있는데 머물 것이오?”

“아뇨, 마을로 내려가서 머물려고 합니다.”

자신을 몇 번이나 죽인 남자의 집에 머물고 싶지는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제대로 말을 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아, 음… 그렇소? 잘 가시오.”

“….예. 안녕히 계세요.”

아무리 그래도 세 번은 권해야 하는 거 아닌가? 뭐 이렇게 무례해?

캐런은 몇 번 더 거절할 준비를 했던 것이 무색해지자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지금 자신은 그의 하녀도, 양딸도 아니었다. 하지만 베르딕은 자신의 표정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가자.”

캐런은 마차로 가서 서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낸시와 보웬에게 일렀다. 사이에 낀 마부는 쩔쩔매고 있다가 캐런을 보고 화색이 돌았다.

“벌써 오십니까?”

“그렇게 됐어.”

“여기서 묵고 가실 줄 알았는데요.”

“집주인이 그런 여유가 없어 보이더라. 마을로 가자. 여인숙이 있겠지.”

“네.”

캐런은 얼굴이 잔뜩 상한 낸시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왜 또 싸웠어?”

“안 싸웠어요.”

“그런데 보웬이랑 또 왜 그러니?”

“…보웬이 듈란 님과 연락하는 것 같아서 시비 좀 털어 봤어요. 잘 했나요?”

“잘했어….”

이민족에, 돈도 없는 하녀인 그녀가 저렇게 뻔뻔하게 구는 것은 최면에 자신이 있기 때문일까? 캐런은 그녀가 보웬에게 목이 잘렸던 것을 기억했다. 낸시를 죽인 것은 캐런이었지만 토막을 낸 것은 보웬이었다.

“그래도, 너무 씩씩하게 행동하지는 마렴. 그러다가 칼 맞아.”

“저 그렇게 막나가지는 않아요….”

낸시는 마부를 힐끗거리면서 대답했다. 캐런은 저 마부가 예전에 낸시를, 지금도 낸시를 좋아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왜 지난번에는 낸시가 아닌 도나를 좋아했지?

아하.

캐런은 이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저 마부는 하인들 중에서 제일 만만했다. 낸시는 캐런 말고도 여기저기 테스트를 해 본 모양이었다.


 

“이거 아무래도 힘들겠는데요.”

보웬이 왔다. 낸시를 본체만체하며 캐런에게 말한다.

“뭐가?”

“모든 숙박업소가 지금 문을 닫았습니다. 지금 난리도 아니에요.”

“왜?”

“베르딕 에반스의 딸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번에 가장 큰 변화가 있는 것은 이셀라 에반스인 걸까? 캐런은 자꾸만 이상하게 달라지는 이야기에 어안이 벙벙했다.

“이셀라 에반스가 사라져서 그가 그렇게 준비가 안 된 거구나.”

“예,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마을 전체에서 쥐 잡듯이 뒤지고 있어서 여기서 머무는 건 힘들 것 같습니다.”

캐런은 자신이 혼자 왔다면 이셀라를 찾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며 남고 싶었다. 도통 뭐가 어떻게 변하는 것인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전부 다 죽여 버리고 싶다.

하지만 캐런은 낸시와 보웬을 보았다. 그리고 마부도. 총도 들켜서 뺏겼다. 결국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여주인으로서의 적당한 판단뿐이다. 캐런은 내키지 않았지만 자신이 해야 할 말을 했다.

“다음 마을로 갈까?”

“급하게 움직이면 밤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부가 대답했다.

“별수 없구나. 가자.”

캐런은 그렇게 명령하면서도 마차 안에서 자꾸만 마을과 이셀라의 별장을 돌아보았다.

이셀라 에반스가 사라졌다니.

대체 무엇이 어떻게 달라진 걸까. 캐런은 궁금했다. 이셀라 에반스가 사라지고 베르딕이 사업을 취소했다. 대체 무엇이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 걸까.

마부가 굽신거렸다.

“정말 죄송합니다.”

“네 탓 아닌 건 알아.”

캐런은 한숨을 쉬었다. 이상하게도 길목마다 장애물이 많았다. 나무가 쓰러져 있거나, 돌들이 흩어져 있거나. 심지어 짐이 떨어져 있기까지 했다. 궁금해서 손대고 싶었지만 낸시가 말렸다.

“이대로 숲을 통과하는 것은 위험해요.”

어느새 달이 떴다. 그리고 마차는 아직도 숲 속의 길을 굴러가고 있었다. 곰이 나오려나? 캐런은 고개를 올려 숫자를 센다. 그러고 보니 슬슬 위험한 일이 자주 닥치는 날이었다. 이번에는 짐승에게 위험을 당할지도 모른다.

“아가씨, 우선 조금만 더 가면 공터와 감시탑이 나옵니다. 오늘은 거기서 마차를 멈추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요.”

“그러렴.”

하지만 캐런은 도착하자마자 눈을 깜빡였다. 생각치도 못한 곳이었다.

“여기야?”

하필이면.

캐런은 눈앞의 높은 탑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117세에 떨어져 죽은 탑이었다.

자신이 죽었던 곳에서 잠을 청하는 것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의 집에서 죽은 적도 있었지만, 이 탑은 그녀가 상당히 인상적인 죽음을 맞이한 곳이었기에, 캐런은 잠을 좀처럼 이룰 수가 없었다.

“문이 잠겨 있었는데 괜찮을까? 주인이 화내지 않을까?”

“별일 있겠어요? 어차피 그 베르딕 에반스 사유재산일 텐데. 숲 속에서 머무는 게 더 말이 안 돼요. 원래 이런 장소는 사람들이 쓰는 게 맞아요.”

“예전에 사형 장소로도 쓰던 곳이래.”

“악몽 꾸시면 지워 드릴게요.”

“…농담이라도 하지 마.”

캐런과 낸시는 탑 안의 방에 들어왔다. 탑의 입구는 잠겨 있었지만 낸시는 머리핀을 구부려서 몇 번 툭툭 건들더니 자물쇠 몇 개를 손쉽게 열어 버렸다. 정작 탑의 주인이었던 베르딕 에반스는 열지 못하고 부수고 올라왔었는데, 평상시에는 허술하게 잠겨 있던 모양이다.

“관리인이 오면 돈 주면 되겠죠, 뭐.”

전의 삶에서 봤던 핏자국은 이번에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 핏자국은 언제 생겼던 걸까? 캐런은 낸시가 올려 주는 모포를 덮으며 생각했다. 자신이 죽기 전에 이 탑에서는 누군가가 또 피를 흘릴 것을 예상하니, 편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아가씨가 마차 안에서 잘 수는 없잖아요. 노숙하는 것도 그렇고.”

“그래.”

그래도 이 방식이 최선이겠지. 캐런은 자신의 의견을 굳이 내세우지 않았다. 어차피 숲으로 가는 것도 위험하다. 이 방법이 ‘상식적’이다. 캐런은 정말이지 아무도 없는 여행을 가고 싶었다.

아버지고 듈란이고 레이몬드고 이셀라고 중요 인물은 아무도 없는 여행. 자신은 이런 여행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식으로 흐름이 뒤바뀌든, 캐런은 그 변화를 기꺼이 즐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새벽이 되면 바로 출발할 거예요. 조금만 참으세요.”

인생은 변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을 거라고.

캐런은 모포를 덮고 누웠다. 잠은 잘 오지 않았다. 자꾸만 추락할 것 같았고, 문 밖에서 누군가가 계속해서 문을 두들기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괜찮다. 이번에 베르딕은 자신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이셀라는 만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캐런은 듈란이 자신의 손을 발로 밟아 떨어뜨리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자신을 깨웠다.

“일어나라.”

하지만 새벽이 오기 전에 캐런은 자신을 거칠게 흔드는 손길에 눈을 떠야 했다.

“…조금만 더 자면 안 될까?”

하지만 손이 거칠다. 숫제 고통을 안기는 그 손길에 캐런은 짜증을 내며 눈을 떴다. 하지만 눈앞이 가물거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캐런은 눈을 비비면서 눈앞의 사람을 본다.

“….누구세요?”

처음 보는 남자였다. 이번 생뿐 아니라, 이제까지의 모든 인생 동안. 캐런이 처음 보는 남자가 캐런을 흔들어 깨웠다. 캐런은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캐런의 고개를 잡고 그 남자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넌 누구냐, 베르딕 에반스와는 무슨 관계지?”

그리고 캐런을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이게 무슨…. 외국인?”

백색산맥 너머의 억양이었다. 캐런은 자신을 붙든 남자를 본다. 그리고 방 안에는 그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나, 둘…. 적어도 이 방에만 여섯. 노인과 어린아이도 있다. 마치 가족끼리 여행이라도 나온 듯했다. 하지만 표정은 하나같이 좋지 않았다.

“대답해.”

자신은 좀 전까지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들이닥쳐서 이러고 있다. 지금 이건 무슨 상황이지. 캐런은 잠에서 덜 깬 머리를 흔들었다. 설명이 필요하다.

“낸시?”

“읍, 으읍.”

하녀는 있었다. 하지만 낸시는 앞에서 입이 막혀 있었고 보웬과 마부는 보이지 않았다.

캐런의 팔뚝을 강하게 붙든 남자가 다시 캐런을 향해 물었다.

“넌 누구냐.”

그냥 강도는 아닌 모양이다. 캐런은 그의 입에서 베르딕 에반스가 나왔다는 것을 되새긴다. 그와 연관된 사람이 여기서 무슨 예정이 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셀라 에반스가 사라졌기 때문에 베르딕 에반스가 혼선이 있었고…. 젠장, 캐런은 욕을 했다. 빌어먹을 에반스, 이번 생에서도 자신의 인생에 발목을 잡는다. 정말이지 지긋지긋한 악연이다. 어떻게 한 번도 도움이 안 되지?

“제 이름은 캐런 하이어입니다.”

“모르는 가문이다.”

남자는 뒤로 사람들을 본다. 노인이 고개를 젓는다. 그도 모르는 모양이다. 캐런은 그 대답에 이곳 사람들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베르딕 에반스와 자신의 영지는 아주 근접한 것은 아니었으나 하루 동안 마차로 오갈 거리였다. 이 사람들은 멀리서 온 모양이다. 외국인의 억양이 맞다.

“저희는 여행 중에 지나가는 길이었습니다. 날이 어두워져 짐승을 피해 들어왔습니다.”

“믿을 수 없다. 베르딕 에반스와는 무슨 관계지?”

“별 연은 없습니다.”

“이 숲은 그의 사유지 중 하나다.”

“…제 아버지의 영지를 그가 매입하려 하였다가 그만두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버지 대신 문서를 폐기하기 위해 왔습니다.”

이런 것까지 전부 말해야 하는가. 하지만 자신의 목에 와 닿는 금속의 감촉에 순순히 대답했다. 남자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말에 어긋나는 것은 없습니다.”

“아니, 잠깐만요.”

뒤에서 모르는 남자 하나가 말한다. 그가 캐런을 찡그리며 노려본다. 캐런은 모르는 남자다.

“저 얼굴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전 17세의 생일을 맞이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네 어머니는 누구지?”

그쪽의 인연이었군. 캐런은 아버지의 한미한 이름을 한탄했다. 아버지 노력 좀 하시지.

“제 어머니는 캐서린 노라 하이어. 처녀적 성은 에니드였습니다.”

“에니드 백작 부인의 외손녀입니다.”

“아, 그 카를라 대공비의 증외손녀로군.”

그들이 잠시 수군거린다. 뒤로 물러나 있던 노인이 자신의 지팡이를 짚고 캐런에게 다가온다. 여기는 꽤 높은 탑인데 저 노구를 끌고 잘도 올라왔다.

“자네가 왜 여기에 있지?”

“다른 곳으로 가려다가 숲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이미 한 대답을 다시 반복한다.

“귀하의 성함은 어찌 되시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모르는 게 좋을 텐데. 꼭 듣고 싶나?”

“그럼 굳이 듣고 싶지는 않습니다.”

“현명하군.”

노인이 자신의 지팡이로 바닥을 툭, 친다.

“내가 자네를 어떻게 해야 좋을까.”

“죽여야 합니다. 들키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캐런을 알아본 남자가 말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귀즈 왕세자의 사생아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딴 소문도 있었어?

캐런은 처음 듣는 불쾌한 소문에 기가 막혀서 입을 벌렸다. 그럼 귀즈 왕세자는 혹시 자신의 딸일 수도 있다는 소문을 알면서도 자신을 부른 것이란 말인가? 아무리 막 산다고 해도 정말 심하다. 캐런이 귀즈 왕세자의 얼굴을 생각하면서 분통을 터트리는 동안 사람들은 캐런의 생사에 대해 논했다.

“베르딕과 귀즈 왕세자는 상당히 연이 있습니다.”

“그 남자는 사업가다. 여러 나라에 손을 뻗고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처음 듣는 가문의 여식이, 귀즈 왕세자의 딸이라면 그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귀즈 왕세자에게 이야기가 흘러갈 것이 뻔합니다.”

딸이라니. 캐런이 충격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의 말에 반박했다.

“전 귀즈 왕세자 전하의 딸이 아닙니다.”

최소한 그것은 반박해야겠다. 어쩌면 귀즈 왕세자의 딸이라고 하고 협상을 하는 것이 맞는 선택지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싫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지만 그녀의 부정을 귀 기울여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 베르딕의 전령이 없는지 모르겠군요. 여기에서 기다리시면 제가 혼자 그에게 다녀오겠습니다.”

“이셀라 에반스가 사라져서 경황이 없어서 그럴 것이에요.”

그제야 캐런의 말을 듣는다. 노인이 물었다.

“…그것을 어떻게 알지?”

“제가 아버지 대리로 거기에 갔다가 돌아왔으니까요.”

“귀즈 왕세자를 말하는 건가.”

캐런은 한숨을 참았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아닙니다. 제 어머니의 명예를 지켜 주세요.”

하지만 이번에도 사람들은 캐런의 말에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웅성거리면서 불안해하고 있었다. 외국인 가족들, 왕족을 극도로 경계하고 상인과 손을 잡는 사람들.

아, 캐런은 알 것 같았다. 저 사람들은 전쟁을 피해 국경을 넘어온 귀족들이다. 캐런은 이야기 속에서나 듣던 사람들을 눈앞에서 본 것이 신기했다. 베르딕과도 연이 있었구나.

“…안녕?”

캐런은 노인의 뒤에서 캐런을 곁눈질하는 여아에게 손을 흔들었다. 레이디 리안보다는 약간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소녀였다. 하지만 리안같이 방긋거리는 웃음이 아니라 불안 초조한 눈빛이었다.

“…….”

뒤로 물러난다. 캐런은 손을 흔든 것이 약간 어색해져 내렸다.

“역시 아무래도 안 되겠군.”

노인이 다가왔다.

“캐런 하이어 양, 자네는 죽어 줘야겠네. 우리도 상황이 좋지 않다네. 조금이라도 불안 요소를 남기고 싶지 않아.”

“전 그저 지나가다가 들렀을 뿐이에요. 놓아주시면 아무 말도 하지 않겠어요.”

“…미안하게 됐군.”

캐런은 자신에게 사과하는 노인을 본다. 옷이 고급이다. 자신을 흔든 남자와 다르게 억양에 어색함이 없다. 그리고 손녀를 본다. 그들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언젠가 레이몬드가 말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베르딕에게 몸을 의탁한 적이 있었다.

캐런은 눈을 깜빡였다.

“그런가요.”

이번에도 고난과 위협은 다가온다.


 

이런 시기에는 언제나 큰 위협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런 일이다. 캐런은 노인과 아이와 남자와 여자를 본다. 눈은 절박했다. 거친 옷 안쪽에는 최고급의 옷감으로 만들어진 옷들이 엿보였다. 캐런은 이번에는 그냥 죽고 다시 시작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면 빨리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

“전 잠을 자고 있었을 뿐이고, 당신들이 깨우지 않았으면 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아시죠?”

“…미안하게 됐구나.”

노인이 일어났다. 캐런은 노인을 본다. 다른 남자가 캐런에게 무엇인가를 건넨다.

“이게 뭔가요?”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걸 이해해 주게. 스스로 목을 매달던지, 아니면 도와주겠네.”

이거 너무 빠르지 않아?

캐런은 헛웃음을 치며 자신의 앞에 놓인 끈 하나를 내려다보았다. 이들은 진심이다. 캐런은 결박당해 있던 낸시가 천천히 쓰러지는 것을 본다. 이미 보웬은 죽었을 것 같다. 이번의 낸시에게 약간의 미안함이 솟는다. 하인들에게는 의사를 묻지도 않는다. 하인보다 좋은 옷을 입어 얻은 이득은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나름 행운일까.

캐런은 손으로 천을 잡았다.

“알겠으니 나가 주세요, 루트엘라 공작님.”

그가 놀라는 것 따위는 알 바 아니다.

“…어쩔까.”

캐런은 목을 매달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다른 방법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밖을 본다. 자신이 떨어진 적 있던 곳이다. 그리고 문은 하나. 잠시 뒤에 그들이 목을 매달았는지 확인하러 올 것이다. 총도 없다.

하지만 무섭거나 하지는 않았다.

죽음이란 너무나 친숙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이 궁금했다.

혼자 있으면서 날짜를 세 보았다. 자신이 책 안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도, 반복되는 인생을 살다 보면 결국 어떤 날에는 특정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반복된다.

캐런은 이 시기에는 언제나 고난이 닥쳤다는 것을 알았다. 이날은 그런 날이다. 어떨 때는 강간의 위험에 처하고, 어떨 때는 짐승에게 다쳤고, 어떨 때는 그냥 넘어진다. 어떤 위험이든 종류는 다양하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캐런은 원래 자신이 죽는 그날을 안다. 하지만 117이 넘어간 후에 자신이 그 전에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오늘은 어떠한가? 저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번은 뒤틀렸다. 자신이 오늘 죽을 확률과 오늘 살 확률. 어느 쪽이 더 높을까? 조금 더 기다리면 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기다린다.

답을 기다린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캐런은 저 소리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강렬한 기시감이 든다.

이날에 그녀를 찾아오는 사람은.

“…….”

자신의 목을 매다는 것과 문 밖의 사람을 보는 것. 캐런에게 무서운 것은 후자다.

캐런은 입을 다물고 그 문을 쳐다보았다. 저 문 너머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언제나, 그녀를 구하러 온다.

레이몬드 세이어테스. 그녀의 기사.

하지만 캐런은 이를 확인하는 것이 무서웠다.

그가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그냥 루트엘라 공작의 무리가 자신이 죽은 것을 확인하러 온 것일 수도 있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캐런에게 루트엘라 공작은 저잣거리의 강간범 토머스와 차이가 없었다. 이 시기에는 항상 고난이 찾아온다. 그러다가 죽더라도 무섭지 않다. 어차피 다시 살아난다. 그럼 그 다음에는 여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숲으로 계속 가는 선택을 하면 그뿐이다.

하지만 그라면.

이 시기에는 언제나 그가 왔다. 언제나. 언제나. 장소는 가끔 달랐지만 우연과 필연과 고의가 겹쳐 언제나 그는 캐런과 만난다. 이제까지는 다른 장소라도 하이어 영지의 마을 안에서였는데, 그가 캐런을 만난다는 전제는 장소가 달라진다 하더라도 겹쳐지는 모양이다. 이전과 같이.

이번에는 어떨까.

머리로는 안다. 이번도 이제까지처럼 똑같을 것이다. 자신은 위험에 처하고 레이몬드는 그것을 구하고. 이셀라는 질투하고 베르딕은 분노하고. 이제까지처럼 반복하는 것뿐이다.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1년의 시작이다. 어떠한 자극도 없는 그녀의 1년.

똑똑.

문 밖에서 누군가가 다시 두드렸다. 저 밖에 있는 사람은 그일까. 그렇다고 해도 놀랄 일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캐런은 확인하는 것이 무서웠다.

캐런은 그 뒤로, 117세 이후로 도나와 말 한마디 섞지 않았다. 다시 보는 것이 싫었다. 멀리서 움직이고 가정부와 다른 하녀들에게 구박받는 도나를 보았지만 더 이상 캐런은 도나에게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때의 인생은 그대로 기억해 두고 싶었다. 보존해 두고 싶었다. 슬픔은 슬픔대로, 좌절은 좌절대로 두고 싶었다.

반복되면 더 이상 새로움은 없다. 자신이 책 밖에서 온 사람이 아니래도 결국 사람은 활자처럼 느껴진다. 모든 것이 지긋지긋해진다. 레이몬드 또한 그렇다. 세월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캐런에게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활자다. 책 밖의 세상이 없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캐런은 안다.

원래의 캐런이라면 레이몬드보다 늙어빠진 루트엘라 공작의 등장을 더 환영해야 한다. 레이몬드는 오래된 인연이었으며, 루트엘라는 처음 보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캐런은 지금 레이몬드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도나를 보기 고통스러운 것처럼. 지난번에도 결국은 실패했다는 쓰디쓴 감정이 다시 올라온다. 이번에도 실패할 것이라는 예감이 강하게 든다.

도나도 기억을 하지 못하고, 낸시도 기억을 하지 못하고, 몇 번이나 고문당하다 죽는 듈란도 기억하지 못한다. 확인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레이몬드 또한 그럴 것이다.

“…….”

캐런은 그래서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도 또다시 만나면 그에게 사과를 해야 하고, 감사를 해야 하고, 또다시 사랑에 빠져야 한다. 아니면 이번에도 그에게 사정을 말하고 손을 잡자고 제안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번에는 귀즈 왕세자의 뒤를 파헤치자고 할 수도 있고, 베르딕을 퇴치할 수도 있다.

어머니의 역사를 다시 볼 수도 있고, 루트엘라 공작과 귀즈 왕세자와 루이스 왕세손처럼 대 귀족, 왕족들 간의 알력 싸움과 전쟁에 참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싫었다.

다시 인사하고 싶지 않았고. 이번에도 모르는 사람처럼, 처음 그에게서 구해지는 것처럼 또다시 반복하는 것이 싫었다. 사는 것이 싫었다. 사랑하는 것이 싫었다. 숨조차 쉬는 것이 지긋지긋하다.

그래서 캐런은 문을 열지 않았다.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도망가고 싶었다. 레이몬드가 아니면 어차피 죽을 것이고, 레이몬드라면. 그것은 죽을 만큼 싫은 일이었다. 캐런이 레이몬드에게 그 정도로 최선을 다해 예의를 지킨 것이 처음이라서 그런 것일까. 이유는 너무나 많다. 캐런은 문을 잠그고 싶어졌다. 아니면 목을 매달고 싶어졌다.

끼이익.

하지만 문은 열렸다. 문 밖의 사람은 캐런의 대답을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때와 달리 너무나도 쉽게 열렸다. 문을 잠가 두는 사람이 없으니까.

“…….”

순간 캐런은 시간이 엄청나게 느려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먼저 손이 보인다. 그것만 봐도 누군지 알 수 있다. 팔이, 그리고 옷이 드러났다. 아침 햇살에 그가 나타났다. 이번에도 캐런이 생각한 대로다. 그녀의 기사는 그녀를 구하러 온다. 옷마저 똑같다. 이번에도 어두운 군복이다. 어두워서 피가 묻어 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레이몬드의 한 손에서 툭, 하고 총이 떨어졌다. 그가 주로 쓰던 것이다.

반전은 없다.

이번에도 그는 캐런을 구하러 온 것이다. 아니면 어떠한 다른 일에 휩쓸려서 캐런과 마주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이 되었든 캐런은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캐런이 살인을 저질렀을 때조차 그녀의 편이다. 이번에도 그는 캐런의 편에 설 것이며 언제나 변하지 않을 것이다.

캐런은 생각한다.

이번에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 감사해요. 아니, 누구세요. 그것도 아니면 살려 주세요. 어떤 말이 자연스러울지 모르겠다. 캐런의 뒤에서는 아침의 햇살이 빛나고 있다. 어느새 해가 뜨고 아침이 찾아왔다. 끔찍하고 지긋지긋한 하루가 또 시작된다. 레이몬드와 또 만나고 말았다.

레이몬드의 머리카락과, 얼굴이, 드러난다. 캐런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다. 캐런은 이를 악물었다. 기대하면 안 돼,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이, 참담한 기분이었다.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인데도 그러했다.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그가 다가온다.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 캐런은 생각한다. 모르겠다. 모르겠다. 하지만 더 이상 도망칠 수도 없다. 말을 해야 한다. 누구냐고 해야 한다. 처음 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대답을 해야 한다.얼굴을 들었다. 레이몬드의 턱이, 입술이, 코와 눈이 보인다. 그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아름답다. 하지만.

하지만 캐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레이몬드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캐런은 언젠가, 아주 초반에, 죽음의 공포에 떨면서 그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죽는 것이 무서워요. 그리고 당신도 또다시 날 기억하지 않을 것이 무서워요. 그때의 그는 웃으면서 캐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시 당신을 찾아가겠습니다. 그럼 암호라도 만들어 둘까요. 제가 기억하는지, 어쩌는지. 전 분명….

절대 잊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기억한 적이 없었다. 그가 암호를 만들자는 말을 했었지만 그것은 농담 섞인 위로와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성적인 사람이다. 한 번도 진심으로 믿은 적은 없다. 지난번에도. 그는 마지막까지 캐런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걸었다.

그래서 그는 캐런의 남주인공이라고. 캐런은 주저 없이 듈란에게 말했었다. 믿음은 없어도 저렇게 최선을 다하는 남자를 어떻게 사랑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겠냐고.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아도 저렇게 최선을 다하는 남자가 있는데 저 사람 말고 누구를 선택하겠느냐고.

“암호라도 만들까요?”

아니, 그런 것은 필요 없다.

레이몬드가 캐런에게 다가왔다. 캐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캐런은 레이몬드를 보았다.

캐런은 그의 그런 얼굴을 처음 보았다.

레이몬드는 울고 있었다.

캐런은 자신의 손으로 그를 잡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레이몬드는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캐런을 끌어안았다. 캐런은 자신의 어깨가 젖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레이몬드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캐런은 항상 그가 우는 얼굴이 궁금했다. 그는 그 세월 동안 웃고, 화내고, 놀란 그 모든 얼굴을 보였지만 한 번도 운 적은 없었기에. 캐런은 막연하게 그가 운다면 조용히 눈물을 흘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레이몬드는 그냥 고상하게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었다. 입가에서 짐승의 신음 같은 울부짖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캐런은 자신의 목구멍에서도 비슷한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알았다. 숨이 막혔다.

“…….”

어떻게 알았어요? 지금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어요? 지금 당신은 누구예요? 지금 왜 여기에, 왜 이제야, 캐런은 몇 번이나 소용돌이치는 질문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자신을 끌어안은 레이몬드에게 팔을 둘렀다. 서로가 서로의 몸이 부서질 것처럼 끌어안았다. 더 이상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아찔한 슬픔과 감격이 칼날처럼 온몸을 찔렀다.

암호는 필요 없다. 시험은 필요 없다. 확인은 필요 없다. 사랑은 시험하는 것이 아니다. 세월은 그 무엇으로도 감출 수 없다. 언어조차 필요하지 않다. 어떤 말도 이 순간에는 필요하지 않다. 그냥 보면 알 수 있었다. 눈물만이 존재했다.

활자로 만든 세상에 사람이 둘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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