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Resetting Lady
시작은 언제나 똑같다.
회색빛의 하늘, 질척이는 가랑비, 아직 아무것도 나지 않은 진흙의 정원. 오싹한 공기와 더러워진 잠옷. 목에 난 상처가 쓰리다. 저택으로 곧 돌아가지 않으면 정원사가 발견할 것이다. 발 근처에서 차이는 밧줄을 대충 밀어 놓고 하녀들이 쓰는 통로로 향한다. 이번에도 실패했어. 춥다. 이번에도. 이가 갈린다. 이번에는 무엇이 잘못된 걸까.
축축한 복도와는 다르게 방 안에는 벽난로의 불이 타오르고 두툼한 모피들이 냉기를 막아 주어 공기가 훈훈하다. 더러운 옷을 벗어 벽난로에 던지자 젖은 옷 탓에 불기가 사그라든다.
욕설을 퍼부으며 침대 발치에 놓여 있던 등잔을 연다. 그 안의 기름을 벽난로에 붓자 불길이 다시 타오른다. 거울 속 나신의 여자를 노려본다. 이번에도 실패했다.
이번에도!
다시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노력은 의미가 없다. 세월은 의미가 없다. 아무런 인연도 이어지지 않는다. 사랑도, 원한도, 동정도. 레이몬드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베르딕이 아무리 자신을 증오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또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하!”
캐런은 몸을 돌렸다. 책상 위에 놓인 종이는 구겨 버렸다.
종이 위에 더 이상 적을 필요는 없다. 자신은 이런 것도 싫다. 혹시나 했다. 이번에는 어쩌면 살지 않을까. 어쩌면 무서웠던 것 같기도 하다. 정말로 죽음을 맞이한다는 생각에.
캐런이 눈을 떴을 때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안도도 잠시, 지독한 지긋지긋함이 몰려온다. 안도를 내쉬는 자신에게도 혐오감이 든다. 또다. 또 살아났다. 이번에도 살아나고야 말았다. 똑같다. 듈란은 거짓말을 했다.
캐런은 앉아서 엎드렸다. 힘들었다. 이번에도.
“…….”
아냐.
달라진 것이 있다.
캐런은 다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의자에 앉아서 허공을 보았다. 이상하다. 아니다. 분명 달라졌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그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이번은.
“아냐…. 달라졌어….”
캐런은 눈치챘다.
자신이 죽던 순간, 그 순간!
이번은 언제나와 달랐다. 캐런은 단 한 번도 정해진 날 이전에 죽은 적이 없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신의 죽음을 또렷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캐런은 분명 예정된 날 전에 죽었다.
“…일찍 죽었어.”
변했다.
캐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야 한다. 뭔가 확인해야 한다. 그녀는 손에 유품을 꽉 쥐고 달렸다. 기억은 완전하지 않아도 조금씩 돌아오고 있다. 자신에게 어머니가 선물한 것을 기억한다. 이걸 준 건 어머니였다. 지금의 자신과 똑 닮은 붉은 머리의 여자가 우는 자신을 달랬다.
“어쩌면 이게 네게 도움이 될지 몰라.”
“하지만 가능하면 쓰지 마렴.”
캐런은 이제까지 기억하지 못했다. 캐런은 홀린 듯이 찾아낸 자신의 총을 본다. 낸시를 죽일 때는 총을 사용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망각 속에 묻어 두었던 것이었다. 홀린 듯이 처음 찾아낸 그것. 왜 자신은 방의 한구석에서 의심도 없이 총을 찾아내었을까. 기억이 더 돌아올 수 있을까. 아무튼,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급하게 얇은 원피스를 걸친 캐런은 환희에 차서 달렸다. 맨발로 어둠속에서 달렸다. 캐런은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복도와 냉기를 느꼈다.
이번에도 배경은 같다. 저택은 불에 타지 않았다. 복도는 깨끗했다. 복도에 나란히 나 있는 창 너머로 비가 내리는 것이 보였다. 급하게 입은 얇은 옷은 추위를 전혀 막지 못했지만 그런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이제는 달라진 것이 있으니까.
“하, 하하.”
어서 확인해야 한다.
캐런은 문 앞에 섰다.
숨을 몰아쉬었다. 가다듬었다. 어서 확인해 봐야 한다. 캐런은 나무 문을 살짝 두들겼다.
똑똑.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직 새벽이다. 안에 있는 사람은 자고 있을 것이다. 돌아가서 아침까지 기다려야 함이 옳다. 하지만 캐런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캐런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내리쳤다.
쾅!
캐런은 문을 힘차게 두들겼다. 하지만 아직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쾅쾅쾅쾅!
손이 부서져라 두들겼다. 계속해서 두들겼다. 캐런은 문이 열리기 전까지 계속 두들길 것이다. 지금 당장 확인해야 한다. 어서, 당장! 캐런은 문을 두들겼다. 기다리기가 싫다. 고함을 질렀다.
“일어나!”
쾅쾅쾅쾅!
“일어나라고!”
마침내 안에서 부산스럽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곧 문이 열렸다. 문이 조금 열리고 안에서 헝클어진 머리를 한 여자가 눈을 비비며 서서 눈앞의 사람을 확인했다. 캐런의 얼굴을 보자 살짝 한숨을 쉬었다.
“아가씨, 아직 밤이에요.”
얼굴에는 피곤함과 짜증이 가득했다.
“무슨 일이세요?”
검은 피부의,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아는, 정말로 익숙한 그녀의 얼굴이었다. 캐런은 저 얼굴이 숨이 멎을 때 어떻게 변하는지 똑똑히 기억한다. 캐런은 반가움에 웃었다. 그녀다. 그녀의 하녀. 자신이 목 졸라 죽인 첫 번째 사람.
“낸시!”
캐런은 낸시를 끌어안았다. 낸시는 어리둥절해 하다가 마주 끌어안았다. 낸시가 캐런의 등을 토닥인다. 여전히 피곤한 목소리로 말한다.
“또 악몽을 꾸셨나요?”
“응.”
“방으로 갈까요?”
캐런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래, 또 네가 기억을 지워 줄 거니?”
캐런을 도닥이던 손이 뚝 멈췄다. 낸시는 끌어안고 있던 캐런을 확 밀어냈다.
“네?”
낸시가 되물었다. 얼굴이 마치 차가운 물을 끼얹은 것 같은 얼굴이다. 잠이 달아난 것 같은 그녀의 얼굴에 캐런이 다시 물었다.
“내 기억을 지우는 대가로 얼마나 받았어?”
“…아가씨. 지금, 무슨…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가요. 아직 잠이 덜 깨신….”
하지만 낸시의 목소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캐런은 알 수 있었다. 저 말은 그것을 어떻게 알았냐며 당황하는 목소리였다. 낸시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캐런을 붙잡고 있었다.
“내가 언제까지 모를 것 같았어?”
“아가씨, 그게 아니라.”
지금 계속 낸시를 추궁해야 할까. 그녀에게도 궁금한 것이 많다. 하지만 캐런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아, 참.”
아니, 아니다. 아직은 아니다.
캐런은 확인도 해야 하지만 그 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다. 캐런은 자신이 들고 온 물건을 낸시에게 주었다. 낸시는 어리둥절하며 무엇인가를 손에 쥐었다. 묵직한 무게감이 기분 좋다. 캐런은 환하게 웃었다.
“그 전에, 약속부터 지켜야지.”
캐런은 웃었다. 선물을 줘야지. 약속했으니까.
“여기.”
“…네?”
캐런은 낸시의 손가락에 총의 방아쇠를 걸어주었다. 이미 장전은 다 해놓았다.
“어서 당겨.”
그리고 총부리를 자신의 이마에 대었다. 차가운 금속이 기분 좋았다.
캐런은 눈을 감았다.
“어, 어머? 아가씨? 이게 뭐예요? 잠깐만요.”
낸시의 당황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캐런은 겹친 손가락을 당겼다.
탕.
시작은 언제나 똑같다.
회색빛의 하늘, 질척이는 가랑비, 아직 아무것도 나지 않은 진흙의 정원. 오싹한 공기와 더러워진 잠옷. 목에 난 상처가 쓰리다.
“…역시 바로 시작하는구나.”
캐런은 쓰라린 목을 만지면서 하늘을 본다. 새벽의 하늘은 어둡고 우울했다. 하지만 캐런은 그 안에 희망이 있는 것을 알았다. 절대 변하지 않던 하나가 변했다. 그렇다면 다른 것도 변할 수 있을 것이다.
캐런은 복도로 걸어갔다. 그리고 머리를 흔들었다. 기억은 드문드문 끊어져 있다. 아직도 기억은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지난 삶, 아니, 이제는 지지난번 삶에서 일여 년 간 낸시와 아예 떨어져 있어도 그랬다.
기억이 제대로 돌아오면 무엇이 변할까? 그것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변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비가 오는 하늘 저편에도 별과 해가 있듯이. 그녀의 적은 불변이다. 하지만 시간은 무한하다. 자신은 결국 답을 찾아낼 것이다.
끼익.
캐런은 문을 열었다. 모닥불이 타오른다. 두툼한 모피들이 걸려 있어 훈훈한 방이다. 젖은 옷을 갈아입었다. 캐런은 으스스한 떨림에서도 희망이 자신을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똑같지만 달라졌다.
자신은 살인과 함께 많은 진실을 손에 넣었다.
캐런은 펜을 들었다.
내 이름은 캐런 하이어.
이름에는 의미가 있다. 괜찮다. 이번에는, 아니면 다음에는, 다음에라도. 10년이든 30년이든 그녀는 끝까지 도전할 것이다. 자신은 최선을 다해 죽음에 도전할 것이다.
자신은 책 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100년 동안 속았다.
앞으로는 속지 않을 것이다.
“내 이름.”
자신의 이름은 캐런 하이어.
그 이름으로 온전하다.
캐런은 손끝으로 자신이 쓴 글씨를 만져 보았다. 손끝에 잉크가 묻어나며 글씨가 번졌다.
캐런은 총을 품고 겉옷을 걸쳤다. 그리고 등을 들었다. 아직은 새벽이다. 그리고 이때 움직여야 한다. 움직이는 것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이때 복도가 비어 있는 것은 너무나 잘 아는 사실이니까.
“그러니까… 우선은, 서재지.”
캐런은 불이 났을 때 자신이 언뜻 보았던 서재의 노트를 생각했다. 같은 표지의 책들 (아마도 백과사전 따위일 것이다) 사이에 이질적으로 꽂혀 있던 노트.
캐런은 서재의 문을 본다.
“…젠장.”
역시나 잠겨 있다. 캐런은 듈란이 자신의 방에서 서재 열쇠를 꺼내 준 것을 기억해냈다. 하지만 아직은 듈란조차 도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여분의 열쇠는 부친이나 가정부 헬렌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
지금은 새벽이다. 기다려야 한다. 아직 아무도 깨어나지 않았다. 캐런은 한숨을 쉬며 뒤돌았다. 역시 너무 성급했다. 바로 조금 전에 낸시를 죽이지 않았는가. 아니, 이번에는 낸시에게 자신이 죽었다. 한번 죽은 것으로 오늘밤의 할 일은 충분하다. 이 정도면 내일 아침에 다시 시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에이….”
역시 기다리기 싫다. 이제 캐런은 일이 꼬이면 바로 죽으면 된다는 것을 안다. 머뭇거릴 필요는 없다. 나이가 드니 인내심이 사라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철컥.
캐런은 총을 꺼냈다. 총으로 문고리를 겨누고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한 번에 해치우자.
타앙!
반동으로 캐런의 어깨가 들썩였다. 캐런은 휘청하다가 자세를 잡았다. 캐런은 약간 얼얼한 손을 문질렀다.
“…와.”
캐런은 거대한 소리가 복도를 울리는 것에 기겁했다. 지나치게 컸다. 누군가가 들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캐런은 아무도 오지 않는 복도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하긴 여러 번 생을 반복하면서도 오늘 사람들이 깬 적은 없었다. 그냥 오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난히 깊게 자는 날인 모양이다. 사실 그렇지 않아도 이제는 큰 상관없지만. 캐런은 문고리를 보았다. 이래놓고도 부서지지 않았으면 화가 날 것 같다.
“…휴.”
다행히 경첩은 부서졌다. 캐런은 한숨을 쉬었다. 여태껏 사람을 쏠 때는 잘도 맞았다. 캐런은 떨어진 문고리의 조각을 주웠다. 완전히 부서지지는 않았지만 문을 열기에는 충분히 망가졌다. 사람을 쏴 죽이는 것보다 문고리를 부수는 것이 더 어렵다. 다음에는 사격을 더 열심히 연습해 볼까. 레이몬드 경 옆에서. 잘 가르쳐주기는 할 텐데. 아예 제대로 사격을 배워 보자. 왜 배우고 싶냐고 물으면 뭐라고 하지? 사람 죽이려고요?
“어디였더라….”
캐런은 걸어간다. 손에 등불을 들고 들어갔다. 서재 안은 어둡다. 캐런은 등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서재에는 어둠속에서 캐서린의 초상화가 보인다.
“안녕, 엄마.”
캐런은 한번 올려다보고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자신은 결국 캐서린처럼 죽음을 맞이하고 말 것이다. 변화가 있다면 끝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
분명 사다리 위쪽이었다. 캐런은 불에 타던 서재를 생각하면서 사다리를 붙잡고 올라갔다. 한 손에는 등불을 들었기 때문에 천천히 올라가야 했다. 괜히 캐런은 초조해졌다. 어디 있지. 설마 이번에는 없다거나, 그런 식으로 변화가 생길 수도 있을까.
“아, 있다.”
캐런의 시간이 뒤바뀐다고 해서 있던 것이 없어지지는 않았다. 캐런은 손을 뻗어 노트를 집었다. 연속적으로 같은 디자인 사이에 혼자 다른 노트였다. 검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표지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었다. 캐런은 사다리 위에 서서 노트를 펼쳐 보았다. 한 손이었기 때문에 조금 불편했다.
“…….”
노트 안에는 글이 있었다. 다행히 그냥 빈 종이는 아니었다. 캐런은 천천히 내지를 넘겼다.
임신했다. 이제는 끝이다.
“…….”
임신과 끝. 자신이 생각하는 그 뜻이 맞을까. 캐런은 한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직은 생각하지 말자. 어머니는 자신을 임신해서 회귀를 떠넘겼다. 하지만 어쩌면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정말로 어쩌면 모르는 장소에 간다던가, 어떤 물건을 손에 넣는다거나.
캐런은 뒷장을 넘겼다.
입맛이 떨어진다. 과일 먹고 싶어.
이번에는 평범하게 임신 후의 증상에 대한 이야기였다. 캐런은 겪을 일이 없을 듯한 푸념이었다. 캐런은 다시 넘겼다.
팔락.
귀즈 왕세자가 또 찾아왔다. 개새끼. 죽어.
팔락.
“…….”
없다.
캐런은 또다시 넘겨보았다. 그리고 책장의 맨 뒷장을 펼쳤다.
여전히 없다.
“…아, 진짜!”
캐런은 일기장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텅 비었다. 캐서린은 분명 꽤나 게으른 사람이었음에 분명했다. 일기는 앞부분만 몇 장 쓰여 있었고 이내 전부 비어 있었다. 일기를 쓰다 말았다.
“엄마!”
캐런은 씩씩거리면서 화를 내며 사다리 아래로 내려왔다. 두근거리면서 기대했더니 일기는 텅텅 비어 있었다.
“너무하네, 진짜!”
캐런은 바닥에 떨어진 일기를 보면서 발을 쾅 굴렀다. 실망스러웠다. 자신이 그때 화재가 난 집에서 봤을 땐 뭔가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없다니.
“씨….”
캐런은 바닥에 떨어진 일기장을 대충 집어서 아무데나 꽂아 넣었다. 찢어발겨 버리고 싶은 것을 참았다. 그리고 서재에 높이 걸려 있는 캐서린을 보며 입술을 내밀었다. 화가 났다.
“진짜 너무하시네요.”
좀 도와주고 오래오래 살다 가야 할 것 아닌가. 자신처럼 캐서린도 그랬다면 최대한 상세하게 기록을 남길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엄마로서, 인생의 선배로서 성의가 없다. 캐런은 분통을 터트렸다. 자신이라면 그러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라면 최선을 다해서.
“…나라면.”
하지만 캐런은 이내 자신도 일기를 꼬박꼬박 쓰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만약에 자신이 딸을 낳자마자 죽는다면 자신의 딸도 게으르다며 자신을 욕할 것이다.
“아니, 그래도 난 상황이 다르니까….”
매번 1년마다 죽기 때문에 굳이 기록을 하는 것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기록은 남지 않으니 횟수를 남긴 동전 하나 정도가 끝이다. 캐런은 그렇게 자신을 두둔했다. 약간은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역시 부아가 치미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
그렇다고 초상화에 대고 더 화를 내는 것도 힘이 빠진다.
캐런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먼지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캐런은 아예 드러누웠다. 어두워서 초상화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캐런은 누워서 생각한다. 어떻게 움직이는 것이 가장 좋을까. 지금은 무엇을 해야 좋을까.
“…….”
총소리가 났음에도 저택은 고요했다. 오늘은 그냥 그런 날인가 보다. 그리 변하지 않는 첫째 날의 밤.
일기는 글렀다. 글은 남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 자신은 뭘 해야 할까?
“…당연하잖아.”
캐런은 일어났다. 무언가가 변했다는 것에 너무 흥분해서 자신은 안달복달한 모양이다.
“듈란.”
“이제 진정한 위안이 올 거야.”
캐런은 죽기 직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이번에는 진짜로 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변한 것은 죽는 날이었다. 뭔가가 변했지만 그것으로 위안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뭐가 위안이라는 거지?”
캐런은 총을 만지작거렸다. 캐런은 불타 없어진 자신의 집이 멀쩡하게 있는 것을 보고, 낸시와의 약속을 지키자마자 일기장을 찾아 뒤졌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위안이고 뭐고. 지금은 듈란이 아직 저택에 오지도 않은 첫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자. 일기장은 쓸모없다. 그렇다면.
“나도 참….”
기록이 없다면 당연히 사람이다. 캐런은 총을 다시 장전했다. 다른 사람에게서 정보를 알아내야지.
사실 처음부터 이래야 했는데…. 캐런은 자신이 약간 들떠서 행동이 중구난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이제 어설프게 실수해서 남은 기간을 오래 머물 필요는 없으니까. 실수하면 바로 머리에 총알을 박고 자살하자.
“물론 처음은… 당연하지.”
캐런은 바로 조금 전에 찾아갔던 낸시의 방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약속은 지켰으니 이제 그녀가 필요한 것을 해야 할 차례다.
“아참, 그럼 이번에 죽이면 다음번에 또 죽어 줘야 하나?”
캐런은 총을 들고 고민했다. 하지만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은 이미 많이 죽어 봤으니 그 정도는 봐 주겠지.
똑똑.
좀 전처럼 강하게 두들길 때와는 달랐다. 약간은 차분해진 캐런은 문을 거칠게 두들기는 대신에 한참 동안을 두들겼다. 똑똑똑똑, 열릴 때까지. 좀 더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 문이 천천히 열렸고,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아가씨, 아직 새벽이에요….”
낸시가 짜증과 피곤이 가득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캐런을 보며 눈을 비볐다. 조금 전과 똑같은 상황이다. 그녀는 그리고 조금 전처럼 똑같은 말을 한다.
“악몽이라도 꾸셨나요?”
악몽을 꿨지. 사실 지금도 악몽을 꾸는 중이야. 하지만 자신은 이제 새로운 아침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도와야 할 것이다.
“그래, 내 방으로 갈까?”
“저, 저 아가씨… 그건 뭐에요?”
낸시가 떨면서 물었다. 캐런은 그녀의 질문이 좀 우스웠다.
“알면서 뭘. 혹시나 말하는데 큰 소리 내면 바로 얼굴에 쏠 거야.”
캐런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낸시의 얼굴에 권총을 들이밀었다. 낸시가 입을 꾹 다물었다. 잠은 깬 모양이다. 캐런은 그녀에게 쉿, 하고 손가락 하나를 세우고는 천천히 방 밖으로 그녀를 끄집어냈다.
“우리 좀 할 대화가 많지?”
낸시가 벌벌 떨면서 한 이야기는 캐런이 예상했을 법한 이야기였다.
캐서린은 계속해서 우울해하는 캐런에게 낸시를 데려왔다. 그리고 자신이 동화 속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했다.
“이유는?”
“임신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보게 하고 싶으셨어요. 좀 더 순수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기 원하셨나 봐요.”
아버지가 아닌 부리는 자들에게는 좀 더 노골적이고 솔직하게 말한 모양이었다. 캐런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말했다.
“…이해를 못 하겠어.”
캐런은 총을 겨누고 중얼거렸다. 자신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굳이 옆길로 돌아가게 한단 말인가. 왜 굳이 그렇게 만든단 말인가. 캐런에게 캐서린이 취한 처사는 배려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의 아가씨는 그 이야기를 듣고 극도로 불안해하면서 우울해하셨어요.”
“임신하고, 낳고, 죽고, 그게 내 인생의 목표예요? 그게 전부예요?”
그 울음이 캐서린을 움직이게 했다. 그리고 캐런의 인생을 아예 뒤바꾸어 버렸다.
“고작… 그런 것 가지고.”
캐서린은 그러면 안 됐었다. 캐런은 울고 싶어졌다. 마음에 안 드는 진실이라도 그렇게 꼬아 놓아서는 안 되었다. 캐서린은 그냥 캐런에게 진실을 말해 줬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캐런은 캐서린이 왜 그런 행동을 했을지 막연히 짐작할 수 있었다.
캐서린도 귀즈 왕세자 때문에 지쳤으리라. 캐런이 신경질 나서 팽개친 일기장은 지극히 불성실했지만, 거기서도 귀즈 왕세자에 대한 분노는 명백했다.
‘귀즈가 또 찾아왔다. 개새끼. 죽어.’
외할머니는 대공비, 할머니는 백작 부인, 어머니는 준남작위. 작위는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졌다. 여자들은 자기들만의 기준으로 멋대로 남자를 선택했다.
외할머니는 대공과 결혼했지만 캐서린은 준남작과 결혼했다. 왕세자가 그녀에게 제대로 청혼했으리라 생각되지는 않았다. 캐런은 귀즈 왕세자가 세간에서 말하는 것처럼 로맨티스트가 아닌 것을 잘 안다. 캐서린에게도 그의 구애는 폭력적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어머니는 아버지도 사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그냥 주어지는 대로 결혼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버지가 어머니의 최선이었을까.
귀즈 왕세자가 결혼 후에도 찾아왔을 것이다. 그것은 캐서린에게 어떠한 기쁨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귀찮은 일일 뿐. 왕족의 구애는 사랑이 아니라 폭력이었다. 캐서린에게는 선택권이 없었고, 도망과 도망뿐이었다. 어쩌면 딸인 캐런의 울음이 그녀를 더욱 몰아붙였을지도 모른다.
정말 사랑만 선택할 수 있게 하라고.
그 모든 것은 캐런의 추측에 불과하다. 하지만 캐런은 캐서린이 자신에게 그런 이야기를 불어넣으며 분명 자신의 소망을 담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손에 넣지 못했던 완벽한 사랑 이야기를.
하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잘못 세워진 것이다. 캐런은 불임이다. 그녀의 계획은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부실하기 짝이 없다.
캐런은 앞으로도… 캐런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무언가가 달라졌다. 앞으로도 달라질 수 있다.
“…지금 어머니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어쩌면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
캐런의 대답에 낸시는 조금 놀란 것 같았다.
“그러신가요. 들으시면 서운해하시겠네요.”
알 게 뭐니. 캐런은 그녀의 비난 같은 소리를 무시하며 본론을 물었다.
“내 기억을 되살릴 수 있어?”
“아마도요?”
낸시는 대답했다.
“어떻게?”
“우선 이것을 풀어 주세요.”
철컥.
“진짜예요….”
낸시가 울상으로 말했다. 캐런은 고민했다. 기억은 드문드문 돌아오고 있었다. 낸시는 저렇게 울먹거리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누워 있는 캐런을 제압 못 할 정도로 심약한 여자도 아니었다. 그녀도 예전에 캐런을 죽였던 적이 있는 여자였다.
“내 몸에 더 이상 손대지 마.”
캐런은 지긋지긋했다. 어둠이 지겨웠다. 진실을 뒤지는 데 진절머리가 났다.
“기억이 완전히 돌아온 것은 아니야. 하지만 계속 돌아오고는 있어.”
낸시가 은근한 목소리로 부추겼다.
“더 기다리시지 말고, 제 도움이 있으면 더 빨리 돌아오시지 않겠어요?”
무엇이든 도움이 된다면, 그녀에게서 얻어 낼 수 있는 걸 얻어 내야 할까? 어차피 이젠 빨리 죽을 수 있다.
“…하지만 묶은 것은 풀어 주지는 않을 거야.”
“저 진짜 안 그래요.”
“어떻게 믿어?”
낸시는 잠시 생각하면서 고민하다가 제안했다.
“제게 돈을 더 많이 주시면 되요.”
“…너 참 뻔뻔하다.”
캐런의 말에 낸시는 대놓고 뻔뻔해지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가슴을 펴고 또박또박 말했다.
“전 돈만 보고 움직이거든요. 영주님이 제안한 금액보다 더 주시면 전적으로 협력할게요.”
그럴듯하다.
캐런은 낸시가 은근히 손버릇이 나쁘다는 것을 안다. 낸시는 손끝이 야무지고 나름대로 일도 잘했지만 다른 곳에서 오래 일하지 못하고 쫓겨났다. 최면으로도 극복하지 못하는 손버릇 탓이었다. 낸시는 탐나는 것이 있으면 자꾸만 자기 주머니로 쑤셔 넣고는 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하이어가에서 이를 눈감아 준 것은 낸시의 최면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나.
“…이셀라의 목걸이도 네가 훔쳤구나.”
왜 낸시를 의심하지 않았을까. 캐런은 그것을 생각했다. 분명 이셀라가 엉엉 운 그날, 낸시는 이셀라에게 뺨을 맞았었다.
“이셀라가 누군가요?”
아직 등장하지 않았나? 캐런은 낸시의 물음을 무시하고 대답했다.
“좋아, 우선 네게 은화 열 개를 줄게.”
낸시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그녀의 석 달 치 봉급이었다.
“아가씨가 어떻게요?”
“아빠 열쇠 훔쳐서.”
“나도 거기까진 못 했는데….”
“성공하면 금화 열 개야.”
낸시의 눈은 굳센 의지로 불타올랐다.
계약은 성립되었다.
하지만 그 눈은 금방 식어 버렸다. 낸시는 당황한 얼굴로 다시 중얼거렸다.
“자, 자… 아가씨, 절 믿으시고….”
캐런은 몇 번이나 반복되는 말을 듣고, 향초를 거듭해서 들이켰지만 무언가 더 떠오르지는 않았다.
“아직도 안 돼?”
캐런은 자신의 총을 만지작거렸다.
“다시 해 볼게요.”
하지만 그래도 변하지는 않았다.
똑똑.
“누구야?”
“둘 다 오늘 내내 뭐 하는 건가요?”
가정부인 헬렌의 엄격한 목소리가 들렸다. 캐런은 급하게 외쳤다.
“낸시와 말할 것이 있어서 그래!”
“아가씨, 며칠 있으면 듈란 님이 오실 텐데, 준비할 게 많아요. 어서 나오라고 하세요.”
낸시가 작게 대답했다.
“저도 할 일이 좀 많아서요.”
그러면서 자신이 문 너머로 나가야 하지 않겠냐는 손짓을 취한다. 캐런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대답했다.
“네가 가긴 어딜 가?”
“어, 저도 진짜 아가씨 기억을 되찾게 해 드리고 싶은데요. 그게 안 되면… 답이 없지 않을까요….”
캐런은 짜증이 나서 권총을 다시 장전했다. 이 여자는 왜 이리 도움이 안 되는지 모르겠다. 그냥 죽이고 또 시작할까.
“아, 아가씨 잠깐만요.”
낸시가 급하게 말했다. 역시 사람은 급하면 뭐든 말한다. 캐런은 속으로 낄낄 웃으면서 무표정으로 말했다.
“왜.”
“제가 믿어요!”
“믿든 말든.”
“아니, 아니. 그, 믿는다고 가정하고 말할게요.”
필사적으로 답을 짜내는 낸시를 본다. 낸시는 자신의 머리를 굴린다.
“아가씨, 만약에 아가씨가 진짜 117? 8? 그 나이라면 기억을 되살리기는 힘들어요.”
“왜.”
“세월이 그만큼 흘러서 기억나지 않는 걸 테니까요. 100년이나 반복된 세뇌를 푸는 건 아무도 할 수 없다구요.”
“…방법을, 생각해 내.”
캐런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낸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냥 다른, 진짜 노인들처럼 천천히 기다리시면서 노력하는 거 말고는 답이 없어요.”
낸시를 또 죽이면 재판장에 또 끌려가려나? 캐런은 짜증을 참았다. 아직 되살아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결국 넌 도움이 되지 않는구나.”
“하지만 아가씨가 돈을 주신다면 전력을 다해서 돕겠어요.”
캐런은 한참의 한숨 끝에 낸시를 풀었다. 다음번에 또 죽이든, 어쩌든. 지금은 별수 없지 않은가. 캐런은 일단 죽이는 것보다는 다른 것을 생각하기로 했다.
낸시는 묶인 손목을 쓱쓱 문지르더니 캐런의 머리칼을 잡았다.
“뭐야?”
“머리 빗어야죠.”
캐런은 얌전히 앉았다. 낸시는 캐런의 총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내 잡고 계실 건가요?”
“내가 지금 널 믿게 생겼니?”
“아가씨, 아가씨를 죽이면 제게 무슨 이득이 있겠어요?”
너 예전에 나 죽인 적 있거든? 하지만 그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지. 캐런은 더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낸시는 어쨌든 지금 자신에게 총을 겨누기까지 한 캐런에게 어떤 살의를 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제가 먹이고 입히고 길러서 나름대로 애착은 있답니다.”
“그래서 검은 피부의 사람이 여왕인 그런 나라를 속삭였니?”
“언젠가는… 그런 나라도 생길 수 있지 않을까요. 뭐, 동화도 있는걸요.”
여기서 헛꿈 꾸지 말라고 말했다간 진짜 원수가 되겠지. 캐런은 낸시에게 더 말하지는 않았다.
세뇌하고 세뇌당한 사람. 하지만 낸시가 말한 그 수많은 나날은 결국은 캐런의 생각을 구성하는 밑바탕이 되고 말았다. 캐런은 이셀라처럼 낸시를 검은 피부라고 징그럽게 여기는 것이 ‘정상’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저도 저 나름대로는 아가씨 좋아해요.”
“…그래.”
낸시는 캐런의 머리를 솜씨 좋게 다듬고, 코르셋을 졸라맨 후에 옷을 입혔다. 캐런이 일어나자, 낸시도 다시 방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아가씨, 그러고 보니 동전 있으세요?”
“무슨 동전.”
“금화요.”
“뭐?”
캐런은 순간 심장이 덜컹, 하는 것 같았다. 별것 아닌데도 왠지 그런 기분이 들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사실을 낸시가 물었기 때문이다.
금화라면 캐런이 죽기 전에 쥐고 있던 그 금화를 말하는 걸까?
“무, 무슨 금화?”
“아시는 거 없으면 됐어요.”
“…말 제대로 해.”
“아니, 별거 아닌데요?”
“그걸 판단하는 건 나야. 말해. 제대로.”
낸시가 주눅이 든 얼굴로 다시 말했다.
“듈란 님이 저한테 말한 적이 있어요. 아가씨가 숫자가 적힌 금화를 들고 있다면 바로 자기에게 말하라고요.”
“듈란이 동전에 대해 말했다고.”
캐런은 중얼거렸다. 그리고 일해야 할 시간이라 안절부절못하는 낸시를 붙들고 말했다.
“우선 듈란이 오는 대로 넌 거기에 숫자가 있다고 말해.”
“네, 네.”
낸시는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캐런은 숫자의 수를 생각했다. 자신은 몇 살이지? 몇 번을 반복했지? 아니다. 캐런은 그것을 계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숫자는… 117.”
전과 같은 숫자를 말하는 것이 더 유리할 것이다.
“알겠어? 그대로 말해.”
“알겠어요. 나중에 그렇게 말할게요.”
캐런은 낸시가 나간 방에 혼자 앉아서 바닥을 노려보았다. 캐런은 반복되는 삶 동안 유일한 위안이 되었던 그 동전을 생각한다.
“내 동전….”
백 년 동안 지니고 있었던 그 동전. 캐런은 그동안 붙들고 있던 동전을 생각한다.
“어디 갔을까.”
캐런은 이불을 들춘다. 탁자 위를 본다. 그리고 바닥을 본다. 없다. 캐런은 기억을 더듬었다. 모르겠다. 어디에 있지.
“없어….”
한참을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방 구석구석을 뒤져도 없다. 생각해 보면 이번에 정원에서는 그것에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전의 인생에서 놓고 온 모양이다.
캐런은 침대에 몸을 축 늘어뜨렸다. 보이지 않았다. 없다. 언제부터 없었지. 탑에서 떨어진 뒤에, 죽었던 그때였을까.
아니다.
캐런은 자신이 약속을 지키겠답시고 낸시에게 달려가서 한 손으로는 총부리를, 한 손으로는 방아쇠를 당긴 전날을 기억한다.
큰 조건 중 하나가 뒤집혔다는 것에 지나치게 흥분해 그것을 신경 쓰지 못했다. 캐런 자신의 실수다.
“잃어버렸어….”
100년 동안 내내 들고 다니던 것이 사라졌다. 캐런은 울적해졌다. 하지만 잠시 후에 캐런은 일어났다. 찾지 못한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괜찮아.”
자신은 괜찮다.
그리 별다를 것도 없는 동전이다. 그리고 그 동전뿐 아니라 전에 다른 것도 손에 쥐고 죽었던 적이 있었다. 동전 자체는 별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아쉽지만 그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낸시가 듈란에게 전처럼 숫자를 말하면 그뿐이다.
중요한 것은 동전 자체가 아니다.
그것을 듈란이 알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동전에 숫자를 듈란에게 말하라고?”
캐런은 언젠가 그것을 손에 쥐고 있던 것이 자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명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신은 어느 순간부터 그것을 가지고 있었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을 듈란이 안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그가 개입되어 있다는 뜻이다.
“걘 뭐지?”
듈란은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어디까지 그가 계획한 것일까.
왜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 동전에 대해 그가 알고 있는 것일까.
그는 뭘 생각하고 있는 걸까.
의문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친다.
“내가 몇 개나 가지고 있지?”
캐런은 총알의 개수를 센다.
그리고 듈란을 생각한다. 우선 듈란을 잡아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 가며 고문을 해 보자. 그러면 실토하겠지. 어떻게 그를 몰아넣어야 할까. 약을 타서 끌고 와야 하나? 남자의 몸무게는 생각보다 무겁다. 토머스의 시체를 바로 지하실로 끌고 오는 것도 상당히 힘들었다. 듈란을 어디서 어떻게 끌고 오는 것이 가장 좋을까.
듈란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듈란 또한 이번에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또다시 방 안으로 그를 끌고 오자.
캐런은 천천히 손을 들고 듈란을 어떻게 처치하는 것이 좋을까 고민했다. 듈란이 말했던 진정한 위안이니 하는 것은 그녀에게 오지 않았다. 그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넌 죽었어.”
가볍게 살의를 씹는다.
다시 살아난 캐런은 자신에게 의욕이 넘치는 것을 알았다. 이 기세로 열심히 움직이자. 생각을 깊게 하면 절망할 뿐이다. 희망을 잡고 움직이자.
캐런은 스스로를 북돋으며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웃자.
하지만 캐런은 동전을 잃어버린 것에 가슴 한편이 쓰라린 것을 느꼈다. 작은 상실감이 들었다. 동전 하나만큼 작지만 무시하기는 힘든 감정이었다.
똑같은 생일 모임.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영주의 딸 생일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다. 똑같은 사람들, 똑같은 음식들, 똑같은 음악들. 하지만 다른 것은 있다. 캐런 자신이다. 캐런은 눈을 부릅뜨고 듈란을 기다리고 있었다. 치마의 안쪽 한 다리에는 단도가, 다른 한 곳에는 총이 장전되어 있었다.
낸시도 성공했으니 듈란이라고 하지 못할 건 없다. 낸시도 나름대로 자신에게 협력하지 않는가. 듈란도 나름대로 그렇고 그런 사이였으니 그녀에게 협력할 것이라 믿는다.
안 되면 총이 자신을 돕겠지.
“진짜 하시려구요?”
“넌 제대로 고정시키기나 해.”
낸시는 반은 겁먹은 얼굴로, 반은 좀 기가 찬다는 얼굴로 캐런의 양 허벅지에 그것들을 고정시켰다.
“이거 제대로 빠질 수 있겠지?”
“네에….”
캐런은 손을 넣어 당겼다. 제대로 빠지지 않았다. 캐런과 낸시는 한참 동안을 끙끙거리며 총을 간신히 고정시켰다.
“숨쉬기가 힘들어….”
“어쩔 수 없어요. 코르셋과 연결해서 고정해야 그나마 떨어지지 않아요.”
“으으….”
캐런은 조여드는 코르셋이 갑갑했다. 낸시가 긴장을 한 탓인지 평상시와는 조금 달랐다. 다리에 달린 총은 번거로웠고 머리 모양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코르셋도 지나치게 조였다.
캐런은 이것까지 포함해 듈란에게 갚아 주겠다고 결심했다.
잡히면 모가지를 콱.
그리고 그때 익숙한 음성이 귀를 찔렀다.
“캐, 캐런 하이어. 네 남… 편이 와도 그런 얼굴을 할 텐가?”
왔다!
캐런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가 그렇게 반갑기는 백 년만이었다. 캐런은 너 잘 만났다! 하고 외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으며 대답했다.
“아직 아니잖아.”
“…약, 혼.”
“아무튼 아직 아무래도.”
듈란은 뭘까. 그는 캐런의 약혼자였다.
명색이 약혼녀의 생일인데 검은 사제복을 입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생일을 축하한다기보다는 장례식에 참석한 것 같았다. 주위에서는 그를 보고 이번에도 수군대고, 그도 의연하지 못하고 주위를 노려보았다.
그 모습에 어떤 숨겨진 모습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듈란은 그냥 평범하게 못났다.
“뭐, 뭐 하는 거야.”
캐런은 그의 옷을 끌어당겼다. 이번에도 옷에서는 비 냄새가 났다. 그리고 옷자락 끝에는 진흙을 닦아 낸 물기가 아직도 남아있다. 그리고 약한 포도주 냄새가 난다. 그는 술을 마신 걸까. 캐런은 그녀를 노려보는 듈란을 아래에서 노려본다. 눈이 마주친다.
“네, 네가 무슨… 생각인지 알, 알겠지만.”
지금의 듈란은 캐런이 무슨 생각하는지 알 리가 없다.
그는 캐서린이 캐런에게 붙인 조력자였다. 캐서린은 캐런이 진정한 사랑을 하기를 바랐다. 낸시는 그가 캐런에게 진정제를 투여했다고 했다. 그녀가 먹는 음식의 대부분은 그가 레시피를 보낸 것이라고.
“…….”
당장 끌고 가서 죽여 버리고 싶다. 고문해서 진실을 토해 내게 하고 싶다. 의뭉스러운 태도는 집어치우라고 소리 지르고 싶다.
캐런은 생각한다. 그를 의심한다.
“놔….”
캐런은 자신이 듈란의 멱살을 잡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실례.”
캐런은 주변의 사람들이 자신들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놓았다. 하지만 이가 갈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곡이 시작됐다. 캐런은 이를 악물고 듈란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진정한 위안을.”
그는 전과 똑같은 말을 한다. 그는 기억을 하지 못한다. 캐런은 전투적으로 그를 이끌었다.
이번에는 또 어떻게 난 죽을까.
네가 말한 것은 무슨 위안일까.
레이몬드와의 만남은 한 달은 더 기다려야 한다. 듈란은 똑같은 얼굴로 반복한다. 캐런은 똑같은 그의 얼굴을 찢어 버리고 싶었다.
곡이 끝났다.
“사, 사, 사랑하라고… 까지는 하지 않겠어. 캐런 하이어. 우린… 전부터… 봐 왔고.”
우리가 전부터 봐 왔다는 것은 너 혼자만의 일이겠지. 캐런은 그를 계속 노려본다. 그의 말 하나하나가 거슬렸다. 지금 들어 보니 그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기억을 떠보고 있는 것이다.
열등감에 주눅 든 남자의 얼굴을 하면서, 눈치를 보는 얼굴을 하면서, 그는 자신의 얼굴을 뜯어보고 검사하고 있다.
캐런은 벌레가 기어 다니는 불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최, 최소한 웃어.”
내가 왜 네 앞에서 웃어야 하지? 어쩌면 넌….
캐런은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그리고 그가 할 말을 내뱉었다.
“날 바보 취급하는 건 견딜 수 없어.”
“…….”
듈란은 말을 멈췄다.
정말 바보 취급을 하고 있던 건 자신이 아니라 그다.
캐런은 듈란과의 결혼이 어쩌면 답이라고 생각했던 때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것은 답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캐런에게 단 한 번도 전부를 말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말을 더듬으며, 어리숙한 척하며, 그녀를 잠재웠으며, 시체를 치우고, 자신을 탑에서 떨어뜨렸다.
넌 누구야?
캐런은 묻고 싶은 것을 참는다. 이때 자신이 해야 할 것을 생각하자.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오늘 밤 내 방에 찾아와.”
그러자 듈란은 눈썹을 찌푸렸다. 화를 내거나, 욕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방문을 잠그고 개떼를 풀어 두려고?”
“하.”
“빌어먹을, 네가 열 살 생일 때 그랬잖아.”
이 가증스러운 성직자를 보라. 그는 캐런이 기억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떠보는 것이다. 그는 알고 있었다. 알고서.
“지금 바로 가자.”
하지만 그가 어떤지 캐런은 안다. 그는, 성욕을 품고 있으니까. 그가 캐런을 어떤 눈으로 보더라도, 그것은 확실하다. 그는 캐런의 말을 따를 것이다.
“이해를 못, 하겠군.”
캐런은 그와 밀착했다. 그리고 자신의 다리 옆을 확인했다.
숙녀는 비장의 무기를 가지고 있는 법이다.
캐런은 듈란을 묶어 놓고 그 위에 걸터앉았다. 듈란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캐런은 바로 그의 머리를 총으로 겨누었다. 듈란은 아래에서 캐런을 씹어 먹을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미, 미쳤군. 비, 비… 비켜.”
잠깐 동안의 부산스러움이 있었지만 생각보다 그는 선선히 잡혔다. 캐런은 자신의 밑에 깔려 있는 남자의 머리채를 잡았다.
“내가 왜 미쳤게?”
“…….”
이 와중에도 입 다물고 있는 남자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엄마와 네가 거래를 한 걸 알아.”
뻐억.
캐런은 듈란의 머리채를 잡고 바닥에 박았다. 듈란의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약한 신음이 들렸지만 그렇다고 크게 괴로워 보이지도 않았다. 캐런은 그에게 정말로 고통을 안겨 주고 싶었다.
“…내가 있잖아. 진짜 짜증 나는 가정 하나를 해 볼게.”
“이, 이걸 풀어.”
캐런은 머리칼을 강하게 잡았다. 이 남자가 울면서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싶다. 살의와 악의가 끓어오른다. 하지만 그 전에 그에게서 확인을 해야 했다. 캐런은 그에게서 답을 들어야 했다.
“잘 들어. 묻는 건 나야. 대답하는 건 너고. 알았어?”
“…미친.”
“입 다물라고 했지.”
캐런은 손톱을 그의 두피에 세웠다. 듈란이 조용해졌다.
“있잖아. 엄마가 날 임신하고 아무래도 이 빌어먹을 반복이 멈춘 것 같단 말이야.”
“…….”
“그런데 난 한 번도 임신한 적이 없어.”
“…….”
“내가 불임이고, 그것 때문에 난 영원히… 이렇게 산다고 생각했거든?”
“…….”
“난 한 번도 임신한 적 없어. 남자란 남자는 다 긁어모아도 말이야.”
그녀는 좌절했다. 절망했다. 한없이 비탄에 잠겼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캐런은 총부리를 듈란의 관자놀이에 대었다. 캐런은 의심한다.
그는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는 걸까? 왜 그는 캐런이 동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까?
그가 캐서린에게서 받기로 한 대가는 무엇일까?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의심이 맞다면, 그는.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의심.
“내가 불임이라는 거.”
캐런은 총부리를 강하게 눌렀다.
“네가 내게 안정제를 투여했다면, 날 불임으로 만드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어?”
듈란은 한참 있다가, 캐런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 대답은 궁색했다.
“…네,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이게 발뺌을 해?
캐런은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캐런이 총을 당장 당기지 않은 것은, 자신이 노리고 있는 곳이 목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당기면 아무 말도 듣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녀를 막았다. 캐런은 씹듯이 말했다. 참아야 한다.
“난 죽고 다시 살아. 네가 모를 리 없어.”
캐런은 지난 생의 듈란을 안다. 듈란은 그때 분명 죽는 것도 그리 무서워하지 않았다. 지난번의 듈란이 그 근거였다. 하지만 지금의 듈란은 그것을 부정했다.
“너, 너, 너는 그런 착각에… 빠져 있지. 그래서 내가… 의학을 배웠고.”
“네가 인정했다고!”
하지만 통하지 않는다. 듈란은 천천히 부정한다.
“…네, 착… 착각이야.”
캐런은 총을 그대로 겨눈 채 칼을 꺼내 듈란의 손등에 꽂았다. 퍼억! 있는 힘껏 찌른 칼은 손을 관통했다. 피가 쏟아진다. 듈란이 눈을 크게 부릅뜬다.
“크, 아, 아악!”
“다음번에는 손가락을 자를 거야.”
“하, 하아.”
듈란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캐런은 자신 밑에서 숨을 가다듬는 남자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듈란이 얼굴을 마주한다.
“듈란… 듈란, 자기야?”
“…미친.”
캐런은 칼이 꽂힌 부분을 살짝 흔들었다. 그리고 그의 위에서 그를 노려보았다.
“난 너와 결혼한 적도 있고, 파혼한 적도 있었다?”
몸이 밀착되어 있었다. 캐런은 헐떡이면서 피를 흘리는 그를 보자 마치 자신이 강간하는 불한당이 된 것 같았다. 재밌는 일이다.
“하.”
“그런데도 넌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
그리고 칼을 빼냈다. 듈란의 몸이 꿈틀거린다. 캐런은 온몸으로 듈란을 눌렀다.
“내가 사람을 죽이기 전까지는 말이야.”
“…….”
“음, 아닌가? 아무튼, 지난번 때 넌 내게 뭐라고 이거저거 말을 했거든.”
“…캐, 캐런 하이어. 넌 미쳤어. 이, 이걸… 놓고….”
푹.
캐런은 다시 찔렀다. 듈란이 소리를 지를 것 같아서 베개로 입을 틀어막았다. 캐런은 다리 사이로 크게 경련하는 남자를 본다.
이 상황에서도 그는 제대로 입을 열지 않는다. 캐런은 박혀 있는 칼을 휘저었다. 남자의 진동을 즐긴다. 전의 그를 생각하니 새삼스럽다. 그때도 그는 결국 끝까지 제대로 말을 하지 않았다.
“듈란. 지금부터 찌르는 것 대신에 네 몸을 조금씩 자르려고 해.”
언젠가는 신음 대신 다른 것이 나올지도 모른다.
“네 손가락이 몇 개가 남을 때까지 넌 입을 다물고 있을까?”
“…….”
“자르다 보면 알게 되겠지.”
전의 생에서 그는 캐런의 반복을 알고 있었다. 또한 동전도. 캐런은 듈란의 넷째 손가락에 칼을 들이댔다. 듈란이 몸부림을 더욱 심하게 쳤다.
“…크, 아,”
“너무 큰 소리는 치지 말고.”
캐런은 총구를 그의 목에 강하게 찔러 넣었다. 그의 목울대의 떨림이 총 너머로 전해진다. 듈란이 격렬하게 꿈틀거렸다.
“…….”
듈란은 캐런을 노려본다. 캐런은 듈란의 입을 막고 있던 베개를 빼냈다.
“너, 넌 아픈 거야.”
푹.
들리지 않는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너 진짜 내가 병신으로 보이지?”
“…….”
캐런은 지금 이 순간 누군가가 자기들을 본다면 얼마나 우스울지 생각한다. 자신은 미친년으로 보이겠지. 불쌍한 의사를, 가엾은 약혼자를 고문하고 있는 여자로 보이겠지.
듈란은 말하지 않았다. 그는 캐런이 미쳤다고 말한다. 정말로 아무것도 믿지 않는 정상적인 신관으로 보였다.
“대답해…. 너는 대답을 해야 해. 왜 제대로 말을 하지 않는 건데? 왜?”
캐런은 듈란의 턱 아래에 총을 들이 밀었다. 하지만 그것도 소용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부정한다.
“듈란.”
캐런은 듈란의 머리채를 강하게 올렸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입이 자연스럽게 벌어졌다.
와.
진짜.
캐런은 진심으로 화가 났다.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알았다. 이 상황이 어떨지 안다.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너무 잘 알아서 화가 나서 미치겠다.
낸시와는 다르다. 듈란이 아무리 말랐다고 하더라도 듈란은 한창때의 청년이다.
귀즈와도 다르다. 귀즈 왕세자 때는 그가 다른 곳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고, 도나가 그를 붙잡고 있었다.
캐런이 듈란을 제압하는 것은 힘들다. 캐런은 몇 번이나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 앞에서, 그를 묶을 때, 그의 위에서.
듈란은 몇 번이나 캐런을 제압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하지 않았다.
“이….”
캐런은 그가 지금 자신과 장난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을 알았다. 그에겐 이것이 진짜 위협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굴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은 장난감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 이렇게, 자신이 피해자인 것처럼. 선량한 의사인 것처럼. 100년 동안이나.
눈앞이 분노로 새하얗게 변할 것 같다.
“난 지금 100년을 살았어. 내가 널 못 쏠 것 같아?”
“…이, 이러는 건… 네게 좋지… 않아.”
그것이 끝이었다. 캐런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무엇인가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탕!
굉음이 울렸다. 캐런은 듈란의 입에다 넣고 총을 잡아당겼다. 방 안에 피가 튀었다. 캐런은 쓰러진 듈란을 내려다보았다.
“…이 개자식.”
듈란은 아직도 죽지 않았다. 눈이 돌아갔다. 입천장 뒤로 구멍이 나 피가 끊임없이 흐른다.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뭐, 뭐라고?”
캐런은 다급하게 귀를 가까이 댔다. 듈란의 입이 달싹인다. 들어야 했다. 캐런이 듈란에게 가까이 가자, 듈란이 캐런의 목을 잡았다. 캐런은 순간 그가 목을 조르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듈란은 캐런의 목을 잡고, 자신의 입술 가까이로 끌어당겼다.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그는 입 모양으로 말했다.
‘…다음에 보자’
듈란은 널브러졌다. 입술 끝이 기묘하게 올라가 있었다. 캐런은 그의 손을 밀치면서 일어났다.
“…하!”
이미 숨이 끊어진 시체가 나뒹굴었다. 이제 이번의 그는 어떠한 정보도 말할 수 없다.
“…젠장.”
아, 젠장. 고문하고 죽였어야 했는데. 캐런은 자신의 풀어진 머리를 다시 묶었다. 정신이 없다. 정리해야 한다.
“젠장….”
이번에는 어쩌지? 듈란이 위안을 운운해서 그에게서 답을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번의 듈란」은 지난번의 듈란과 다른 모양이다.
위안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다. 이번의 듈란은 그냥 철저히 캐런을 농락하고 있다. 그가 무엇을 아는지 모르는지조차 제대로 말하지 않았다.
듈란이 이 모든 것의 원흉일까? 어디서부터? 왜?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서는 무엇을 하는 게 맞지? 어떻게 희망을 찾지? 죽음으로 도망간 저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 화풀이부터 하자.”
캐런은 떨어진 칼을 주워들었다.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화는 건강에 좋지 않다. 죽기 전에 듈란 몸에 화풀이라도 해야겠다. 캐런은 결심했다.
그리고 그 순간,
“신관님!”
캐런은 뭔가가 자신의 머리를 강하게 강타하는 것을 느꼈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따뜻한 뭔가가 끊임없이 얼굴을 뒤덮었다.
시작은 언제나 똑같다.
회색빛의 하늘, 질척이는 가랑비. 캐런은 싹이 나지 않은 정원에서 눈을 깜박였다.
뭐야 이거.
“…….”
캐런은 죽었다.
바로 죽고 다시 시작해서 다행이었다. 캐런은 자신이 듈란을 죽이자마자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한 것을 알았다. 이렇게 허무할 수가.
“…하하….”
헛웃음이 튀어나온다.
캐런은 황당할 정도로 빠른 죽음에 기가 찼다.
이번에는 듈란을 죽였다. 그리고 곧 다른 사람이 자신을 죽였다.
“신관님!”
그리고 그 목소리는 자신이 아는 목소리였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대체 어떻게 인연이 꼬여 있는 것일까.
“보웬이랑 듈란이랑 무슨 관계니?”
낸시는 총을 겨눈 캐런을 보며 얌전하게 대답했다.
“듈란 신관님이 보웬 어머니를 낫게 하신 뒤로 그분에게 충성한다고 했어요.”
그냥 하인인 줄 알았는데. 자신이 지나치게 안일했던 걸까. 캐런은 한숨을 내쉬면서 더 물었다.
“전에 뭐 하던 애야?”
“도축업자요.”
“…끼리끼리 노네.”
어쩐지 자신이 데어 부인을 죽이는 것을 보고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캐런은 당시 그냥 재밌어서 깔깔거렸지만, 돌이켜보면 그의 행동은 그리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아가씨가 이러시면 저희만 피곤해지지 않습니까.”
일반적인 하인이 그렇게 툴툴거리면서 평범하게 시체를 치우고 거짓말을 할까. 보통은 고함을 지르거나 어찌할 바를 모르거나, 신고를 할 것이다. 캐런은 그냥 영주의 딸이지 왕국의 공주 같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보웬의 행동은 지극히 뻔한 일을 본 사람의 행동이었다. 그는 캐런이 그럴 수도 있다고 예상한 것이다.
도나가 자신을 봤으면, 하다못해 낸시가 자신을 봤어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수습할 생각은 못 했을 것이다.
“듈란이 어디까지 알까?”
“그, 글쎄요… ?”
아무리 고용되었고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수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해도, 캐런이 사람을 죽일 것이라고 예상하긴 힘들다.
“내가 생각보다 착하거든?”
“…….”
“진짜야. 오래 참았단 말이야.”
자신은 100년 동안 참지 않았는가. 캐런은 100년이면 그럭저럭 오래 버틴 편이라고 자부한다. 일반 노인의 100년이 아니라, 열일곱 살의 100년이다.
“대체 뭘 믿고. 어디까지 예상해야 그렇게 행동할 수 있지?”
캐런은 듈란이 어디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감을 잡기도 어려워졌다. 하지만 그녀가 무엇을 해야 할지는 분명했다. 그녀의 목표가 바로 곁에 있다. 어쩌면, 시작할 때부터.
“듈란을 역시 죽여야겠어.”
시도하다 보면 죽겠지. 그래도 고문하다 보면 언젠가 답을 얻을 수 있겠지. 캐런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캐런은 듈란을 세 번 죽이고 보웬에게 세 번 죽었다.
“대체 뭐가 문제지?”
“뭐… 뭐, 뭐가요?”
낸시가 자신의 이마를 가리키고 있는 총을 보면서 물었다.
“아, 미안. 깜박했어.”
캐런은 「이번의 낸시」와 이미 서로 말이 끝났음을 기억하고 총을 거두었다. 죽는 기간이 확 줄었더니 기억이 더욱 뒤죽박죽이다. 캐런은 떠는 낸시의 어깨를 감싸며 달랬다.
“떨지 마. 듈란 생각나서 기분 나쁘잖아.”
“네, 네에.”
캐런은 그래도 낸시가 썩 내키지는 않았다. 자신의 기억이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것도 눈앞의 낸시와 듈란 때문이다.
하지만 낸시처럼 이런 것을 공유할 상대도 없지. 캐런은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내가 보웬에게 세 번 죽었거든.”
“아… 네….”
대답이 영 석연찮았다.
“…넌 믿는다고 하지 않았니?”
“제가 믿어요. 진짜 진짜 돈에 맹세코.”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한다.”
캐런은 낸시를 구박하며 침대 위의 은화 하나를 던졌다. 낸시는 덜덜 떨면서도 재빨리 낚아챘다.
“난 듈란을 죽이고 싶어.”
“듈란 님이 진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셔서요?”
“응, 드디어 지난번에 듈란 손가락까지 잘라 냈는데도 별말 안하더라.”
“…제가 진짜 아가씨 교육을 잘못 했나 봐요. 이렇게 안 키웠는데.”
“낸시야.”
자신을 부르자 낸시가 앗, 하는 얼굴로 다시 자세에 각을 잡는다.
“듈란 님을 죽이려고 했는데 실패하셨구나. 그래서요?”
“…….”
캐런은 한숨을 참았다. 낸시도 자신을 은근히 자신의 밑으로 보고 있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제대로 들어.”
“네.”
자신이 머릿속을 주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상대방에게 우월감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태도가 가볍지. 하지만 캐런은 낸시가 그렇게 구는 것을 봐줄 만큼 여유가 넘치지도 않았다.
“농담같이 들리면 네 손가락 하나 자르고 시작할 수도 있어. 아버지가 그걸로 과연 날 처벌하실 것 같니? 아니면 수습을 하실 것 같니?”
“…….”
“제대로 해.”
“네.”
태도를 바로 잡는 것도 주인이 해야 할 일이지만 이렇게 하나하나 매번 잡는 것도 신물이 난다.
매번 낸시의 총에 대고 협박을 하고, 며칠 뒤에 듈란이 찾아오면 꼬여 내어 방으로 부르고, 듈란을 죽이려다가 보웬에게 죽는다.
“보웬부터 죽이면 듈란을 죽이는 데 더 수월해지지 않을까?”
“어떻게 죽이시려구요?”
“지금부터 생각해야지.”
낸시는 캐런에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세요.”
“살인은 나쁘다는 말은 안 들을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요.”
낸시는 좀 더 현실적으로 말했다.
“보웬 씨 성격 진짜 더러워요. 손도 더럽고.”
“도축업자라고는 했어.”
“네. 그런데 소문이지만… 동물만 죽인 것이 아니라 사람도 처리한 것 아니냐는 말이 있을 정도였어요. 하인들과 하녀들이 사이 별로 안 좋은 것은 아시죠?”
“응.”
“그중 하나가 보웬이에요. 사람이 기본적으로 음험해요. 옷을 깔끔히 다려 입어서 그렇지, 예전에는 정말로 더 심했어요.”
낸시는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보웬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았다.
보웬은 듈란이나 영주의 말을 제외하면 그리 잘 듣지도 않는다. 자신은 제대로 일하지 않으면서 주변 사람들이 제대로 일하지 않으면 지적질이나 한다부터, 가끔씩 술을 먹고 사냥개들에게 화풀이를 한다는 말까지 늘어놓았다. 나중에는 화장실을 자주 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일을 떠넘긴다는 말까지 했다.
사용인들 사이의 불평불만을 한바탕 늘어놓는 것을 들은 캐런이 내린 결론은 단순했다.
‘얘네 사이 더럽게 안 좋구나.’
캐런은 낸시의 시체를 수습한답시고 바로 거침없이 토막을 낸 보웬의 솜씨를 기억했다. 나중에 (아마도) 듈란이 사지를 이어 붙여 간이 장례를 치러 준 모양이었지만, 그 토막을 친 것에는 명백한 악의가 있었다.
같이 일하면서 왜 그렇게 사이가 나쁜지 캐런으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낸시는 한참 동안 보웬이 얼마나 개새끼인가에 대해 늘어놓았다.
“그래서 결국하고 싶은 말이 뭐니?”
“보웬을 죽이고 싶으시다면 전 얼마든지 찬성이에요. 하지만 첫 번째, 육체적으로 힘드실 것이구요. 둘째로, 캐런 아가씨의 행동을 계속 듈란 님에게 보고한 것이 보웬이에요.”
“너 하나가 아니었어?”
“최소 두 명이죠. 그것 때문에 마찰이 심했어요. 그 변태, 아닌 척하면서 계속 아가씨의 속옷 같은 것도 관찰했으니까.”
“…….”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알게 되었다. 캐런은 네 번 연속으로 보웬에게 머리를 처박혀 죽게 되고 나니, 더 이상 그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
“역시 듈란을 따로 빼내는 게 가장 편한데.”
하지만 이제까지 계속 별 소용이 없었다.
캐런은 다시 펜대를 물고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아가씨.”
“응?”
“보웬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잖아요.”
“…맞아. 중요한 건 그가 아니야. 듈란이지.”
듈란을 고문해서 진실을 토하게 하고 싶다. 그런데 영 도움이 안 된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에 캐런은 그가 목표라는 것을 확신했다.
듈란을 죽이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에게서 진실을 얻는 것이 어렵다.
“듈란 님을 죽이고 나서 바로 죽는 게 싫으신 거예요?”
“아니, 그건 별로 문제없어…. 그냥 듈란 시체에 대고 화풀이하지도 못하고 바로 시작하는 게 불만족스러운 거지.”
캐런은 대답했다.
“그럼 우선 지금은 참으세요. 때가 아닌 거니까요.”
낸시는 그렇게 말하면서 캐런을 눕게 했다.
“옛날이야기라도 해 드릴까요?”
“세뇌라면 됐어.”
“네.”
캐런은 쓴웃음을 지으며 나가는 낸시를 보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렸다.
그리고 알았다.
낸시는 결국 자신을 믿지 않는다.
낸시는 지금도 자신이 살인을 하지 못하도록 뜯어 말리고 있는 것이다.
저렇게 빙빙 둘러가면서.
자신을 정말로 믿는 것은 결국 듈란뿐인건가.
캐런은 그 사실이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왜 말을 하지 않는단 말인가?
“나랑 한 번 자는 대신에 진실 하나씩 말해 주는 건 어때?”
“음, 음, 음녀는 지옥에 떨어지며….”
“…와 진짜.”
캐런은 또 다른 장소로 듈란을 불러내었다. 이번에는 생일이 아니었다. 보웬이 없는 날. 그가 멀리 심부름을 간 날이었다. 처음부터 위험 요소는 제거하면 그만이다.
“참으세요. 때가 아닌 거예요.”
낸시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때는 지금이다. 그녀는 보웬이 어디로 갈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지만 캐런은 대부분의 하인들의 일정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없을 때 듈란에게 찾아갔다.
“…따라온 건 너거든?”
캐런은 말 한마디에 자신을 따라온 듈란을 보면서 기가 찼다.
“유, 유, 유혹에 넘어간 자와 음녀는 결코 같을 수….”
“…이거 다섯 번째야.”
캐런은 정말로 지긋지긋해졌다. 사실 보웬은 문제가 아니었다. 인과관계가 문제였으니까. 문제는 듈란이다. 듈란은 고문해도, 그와 자도, 살인을 해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
아래를 잘라 내면 좀 달라질까?
캐런은 듈란의 아랫도리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칼로 듈란의 수도복을 위에서부터 천천히 찢었다.
“무, 무, 무슨.”
듈란은 말을 더듬는다. 이번에는 좀 무서워질까? 캐런은 칼로 그의 드러난 몸을 본다. 참으로 볼품없었다. 차라리 옷을 입는 것이 더 나은 몸이었다.
“잘라서 입에 처넣기 전에 말하자. 나도 이러는 거 별로 재미없어.”
“…내, 내가 진실로… 네게… 말하지만….”
이번에도다.
하지만 이번에는 듈란을 죽이고 나서 화풀이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캐런은 칼을 높이 들었다.
끼이익.
“캐런! 지금 뭐 하는 것이냐!”
“…….”
캐런은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생각지도 못했던 남자였다.
“…아버지.”
오랜만에 보는 하이어 영주였다. 캐런은 그의 얼굴을 보자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가 제대로 그의 얼굴을 본 것이 언제였더라.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을 본 것이.
대롱대롱 밧줄에 매달린 그의 얼굴을 기억한다.
“나가 주세요.”
“지금 내가 나가면 무엇을 하려고!”
“…….”
듈란을 죽이려구요.
하지만 캐런은 그 말을 내뱉으면 안 된다는 것은 안다. 그 정도까지 돌지는 않았다. 그래서 캐런은 고민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뭐라고 해야 하지? 아버지께 보여 드리기 부끄러운 일? 하지만 그것도 만만치 않게 돌은 변명 같다.
“…저희가… 어릴 때부터 칼싸움을 하고 놀아서….”
궁색한 변명이 흘러나왔다. 캐런은 자신이 바보 같은 말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자주 죽어서 너무 현실성이 없다.
그냥 영주가 나가면 머리에 총 박고 자살해야겠다. 캐런은 그렇게 결심했다.
툭.
총이 캐런의 품에서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
“…….”
“…그러니까 저것도 총싸움을….”
이게 아닌데. 캐런은 칼을 들고 고민했다. 뭐라고 하지?
“여, 여, 영주님. 살려… 주십시오.”
캐런은 단번에 상황을 단순하게 만드는 듈란을 보고 기가 차서 손에 힘을 주었다. 넌 죽어라 좀.
타악.
“…그만두거라.”
“…네에.”
캐런은 자신을 붙든 영주에게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다.
이번에도 실패다.
성공했다.
듈란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