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The Lady & The Gentleman
레이몬드는 언어가 되지 못한 수많은 감정들을 토해 내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울다가 지쳐서 서 있지도 못할 지경이 되어서야 레이몬드가 캐런의 얼굴을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한 팔로는 그녀를 껴안고 있었다. 그가 한 손으로 캐런의 얼굴을 더듬으면서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캐런, 우선 이동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곳에 계속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네. 알겠어요.”
캐런이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몬드가 캐런을 안아 들었다. 레이몬드가 창밖을 힐끗 보더니 계단으로 향했다.
“천천히 내려가는 편이 좋겠군요.”
“…당연한 소리를 하시네요.”
캐런은 지난번에 너무 빨리 내려가서 생긴 결과를 생각했다. 무지막지하게 아팠다. 심지어 즉사도 아니었다. 곧 죽기는 했지만. 캐런은 온몸이 부서지던 감각을 생각하자 온몸이 떨렸다. 죽음이 익숙한 그녀에게도 고통은 익숙하지 않았다.
“캐런, 캐런?”
“네.”
“괜찮습니까?”
하지만 지금은 레이몬드가 그녀를 붙들고 있었다. 캐런은 눈을 깜빡였다. 괜찮다. 이제는 죽어도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캐런은 자신을 붙들고 있는 남자의 품에 안겨서 그의 얼굴을 봤다. 그녀를 아는 사람. 그녀를 사랑하는, 이해하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
“레이몬드 경. 전부터 제가 하고 싶었던 게 있는데요.”
“무엇이든지 하십시오.”
“경이 재미없는 농담할 때마다 꼬집어도 되나요?”
“…제 농담이 그렇게 재미없었습니까?”
약간 충격받은 목소리였다. 캐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노력하겠습니다.”
“많이 하세요.”
캐런은 웃었다. 하지만 이내 숨이 막혔다. 레이몬드가 캐런을 추켜올렸는데 너무 세게 올렸던 것이다.
“저, 그냥 걸어갈게요.”
“그냥 제가 안고 내려가면 안 되겠습니까?”
“안 될 건 없지만….”
그냥 걷는 쪽이 편할 것 같은데. 캐런을 안고 있는 레이몬드가 계단을 걸어 내려가고 있었기 때문에 진동이 그대로 그녀에게 전해졌다. 하지만 캐런은 더 말을 하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웃고 있었지만 눈가가 부어서 이상했다. 캐런은 그냥 그가 자신을 들고 있게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는 너무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항상 이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레이몬드가 캐런을 보듬어 안으며 그렇게 말했다.
“살아 있는 당신과.”
타박거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하지만 길지 않았다. 오를 때는 몰라도 같이 내려갈 때는 이렇게나 짧다. 계단은 어두웠고 약간은 어지러웠지만 그 모든 것은 이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계단이 끝날 무렵에 레이몬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약간 머뭇거리는 어투였다.
“캐런.”
“네.”
“눈을 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왜요?”
캐런은 고개를 돌렸다. 비린내가 훅 풍겼다. 캐런은 벽에 진득하게 묻은 핏자국을 보며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았다.
“…….”
애초에 레이몬드가 평화롭게 협상하고 올라왔을 리가 없다. 피비린내가 진동을 한다. 레이몬드는 캐런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팍으로 당겼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그 사과는 죽은 사람들에 대한 사과가 아니라 캐런에게 하는 사과였다. 냄새가 당신에게 거슬리는 것이 미안하다고. 단지 그것뿐이었다.
“…….”
피 냄새가 진동을 했다. 사람들이 전부 죽었다. 분명 그 공작이나 어린애도 있었는데. 어떻게 어린아이를 죽일 수 있어요, 라고 말하는 것이 맞는 걸까. 자신은 그렇게 말해야 하는 걸까?
아니다.
캐런은 레이몬드 쪽으로 다시 파고들면서 대답했다.
“괜찮아요.”
레이몬드는 항상 그녀의 편이다. 그리고 캐런 또한 그렇다. 이제 캐런은 더 이상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레이몬드가 보기에 그럴듯할까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무엇을 하든 그는 그녀를 이해할 것이고, 그녀도 그를 이해할 것이다.
사실 캐런이 레이몬드보다 훨씬 더 악질이다. 그녀는 죽이고 싶어서 죽이는 사람이다. 레이몬드도 그것을 알 것이다. 하지만 그는 캐런에게 사람을 죽여 냄새가 나는 것, 비위를 상하게 한 것을 미안해했다. 캐런이 지금 해야 할 것은 하나다. 눈을 감았다. 그것이 그에 대한 그녀의 예의였다.
캐런은 레이몬드의 품에 안겨서 시체들의 더미를 지나갔다.
레이몬드의 신발 아래로 철벅이는 피의 소리가 들렸다.
“저는 괜찮아요.”
그녀의 기사는 이전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자신 때문에 뭔가가 크게 변했을 수밖에 없겠지. 자신이 본 기억을 못 하는 레이몬드와 지금의 레이몬드는 같을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더라도, 캐런은 지금의 레이몬드라면 사랑할 수밖에 없다. 자신을 위해 뭔가를 포기할수록 더더욱 사랑할 것이다.
레이몬드가 캐런을 내린 것은 말의 앞에서였다. 캐런은 계단에서부터 봤던 부분이 신경 쓰였다.
“여기요. 볼 이쪽.”
“감사합니다.”
레이몬드는 캐런의 손수건으로 얼굴을 대충 닦았다. 캐런은 약간 번진 부분이 신경 쓰였다.
“잠깐만요.”
캐런이 레이몬드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다시 닦았다. 레이몬드는 눈을 감고 캐런의 손을 받아들였다. 별것 아닌데도 괜히 선정적으로 느껴져서 캐런은 빨리 몸을 일으켰다. 이제는 얼굴만 봐도 기분이 이상했다.
“저도 묻었나요?”
“아뇨, 당신은 묻은 곳이 없습니다. 마차가 아니라 말을 타고 이동해야 합니다. 몸은 괜찮습니까?”
캐런은 자신의 발목이나 허리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별문제는 없었다.
“괜찮아요. 그런데 어디로 가나요?”
“제 집으로요.”
“와.”
레이몬드의 집은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꽤나 괜찮다. 유서 깊은 남작가문의 집다웠다.
왕궁만큼은 아니지만 백작 부인이 내주었던 손님채보다 화려한 것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레이몬드는 캐런이 쓰는 돈에는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는 것이 제일 완벽했다. 안온한 나날들. 이제까지는 그 기간이 너무나 짧았지만 이번에는 봄부터 즐길 것이다.
이 시기에 그의 집으로 가다니. 캐런은 변하는 것이 너무 많아 신기할 정도였다. 물론 기적이 일어났으니 무엇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캐런, 먼저 올라가십시오.”
레이몬드가 캐런을 안장 위로 올렸다. 캐런이 앞으로 몸을 당기자 레이몬드가 그녀의 뒤로 올라탔다. 캐런은 등 뒤의 그에게 물었다.
“여행 가고 싶었는데. 여행부터 가면 안 되나요?”
캐런은 자신이 생각했던 일정이 완전히 부서졌던 것이 약간은 아쉬웠다. 자신은 이번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여행을 갈 예정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캐런, 먼저 양해를 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양해요?”
“여행은 1년 뒤로 미뤄 둡시다.”
“짧은 인생 미뤄서 뭐해요?”
그녀의 인생은 진짜 짧다.
“여름에 바다로 가 보고 싶은데. 안 되나요?”
스스로도 좀 칭얼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와서 놀랐다. 와, 나 진짜 애처럼 구네. 캐런은 달래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 그것을 깨닫고 약간 부끄러움을 느꼈다.
“캐런.”
레이몬드가 말을 움직이게 하면서 다정하게 말했다.
“1년 정도는 집 안에만 당신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양해를 구해야 할 일인 건 알지만, 당신이 싫다 해도 안 들을 겁니다. 그리고… 당신의 집에 연락하는 건 좀 생각해 봐야겠군요.”
“아버지가 걱정하실 텐데요.”
“당신이 돌아갔다가 눈에서 안 보이는 곳에서 죽을까 봐 무서워서 그렇습니다.”
“보여도 죽잖… 아, 울지 마요 좀.”
무심코 뒤를 돌아본 캐런은 레이몬드가 또 울 것 같아서 말을 멈췄다. 여자의 눈물은 무기라던데, 남자의 눈물도 무기다.
“아무튼, 1년간은 제가 전부 준비하겠습니다. 1년만 참아 줘요. 그 뒤로 어디든 갑시다. 바다든 산이든 외국이든. 당신이 원하는 곳 어디든지. 하지만 그날 전은 안 됩니다.”
“어머나. 레이몬드 경. 집착하는 남자는 인기 없어요. 절 방 안에 감금하시려구요?”
레이몬드의 몸이 굳었다. 잠시 후에 그가 엄청나게 버벅대며 말했다.
“그게, 음… 아니… 우선 1년 후에 당신이 죽지 않는 것부터 확인하고….”
“농담이에요. 진지하게 받아치지 마세요. 저도 듣자마자 이유는 짐작했으니까.”
“네….”
캐런은 레이몬드의 손등을 꼬집었다. 레이몬드는 말 위에서 휘청거리다가 자세를 바로 잡았다.
“레이몬드 경도 늙었나 봐요. 나이 드니까 안 그래도 재미없더니 더 재미없어지네.”
“…캐런, 농담이죠?”
“진담인데요.”
“…….”
“농담으로 칠게요. 아무튼, 레이몬드 경이 집착하는 건 봐 드릴게요. 잘생겼으니까.”
귀즈 왕세자처럼 집착하는 것과 그는 다르다. 어두운 지하실이 아니라 거대한 온실이다. 독점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키기 위함이다. 캐런은 그의 충만한 사랑을 안다. 물론 외모도 중요하다.
“영광입니다.”
“하지만 늙으면 얄짤없어요.”
“괜찮습니다. 전 늙어도 잘생겼거든요.”
레이몬드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뻔뻔할 정도의 확신이다.
“와… 자신감….”
“정말입니다.”
레이몬드가 웃었다. 캐런은 등 뒤로 그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을 느꼈다. 레이몬드는 한참을 웃다가 말했다.
“그리고 다시는 자살하지 말아 주십시오. 제 수명이 당신보다 너무 길어서 저도 더 이상은 버티기가 힘들더군요. 이번에도 늦었으면 살기 귀찮을 것 같았습니다.”
“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겁니다. 다른 사람 손을 빌렸다고 해서 자살이 아닌 건 아니지 않습니까.”
캐런은 잠시 생각하다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탑에서 떨어져 죽은 뒤에 낸시 손으로 자살하고 보웬의 손에 몇 번이나 죽었다. 레이몬드는 그것을 말했다. 캐런은 다시 살아난 이후로 그의 생각을 일부러 안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때 성급하게 행동하지 않았으면 그를 좀 더 빨리 만났을까.
“아, 그거… 다섯 번 정도 죽은 거… 레이몬드 경이 아는 줄 몰라서….”
캐런은 말을 멈췄다.
자신은 레이몬드가 117살에 만난 레이몬드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그가 말하는 것은.
“…레이몬드 경. 어디까지 기억하나요?”
캐런은 고개를 위로 올렸다. 레이몬드의 얼굴이 보인다. 그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아름답고 피부에는 그 어떠한 세월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캐런은 그를 보자마자 그에게서 세월이 흘렀음을 인지할 수 있었다.
캐런이 117살 때 만난 한 번의 생을 산 남자가 아니다.
레이몬드는 한 번의 생만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그는 자신의 늙은 후의 모습도 말한다.
지금 이 남자는 대체 몇 살이지? 레이몬드가 캐런의 몸을 끌어당겼다.
“전부요.”
캐런은 그의 품에서 레이몬드의 얼굴을 봤다. 캐런은 약간, 거대한 절벽을 볼 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막대한 세월이 그에게서 흘러갔음을 알아차렸다.
“전부 다 기억합니다.”
엄청나게 지친 목소리였다.
“전 이제 당신을 사랑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습니다.”
“캐런.”
레이몬드는 다가간다. 자신의 약혼녀. 안다. 틀렸어. 죽었어. 높이를 봤잖아. 소리를 들었잖아. 아직 몰라. 확인해야 해.
“캐런.”
레이몬드는 캐런에게 다가갔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제는 사랑했던으로 바뀔 듯한 사람보다는 사물의 형상에 더 가까운 소녀를 봤다. 그녀의 목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직 맥은 뛰었다. 코와 입에서는 아직 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것은 금방이라도 꺼질 것이다.
“캐런, 괜찮습니다.”
괜찮을 리가 없어. 이미 끝났어. 닥쳐.
“제 손을 잡아요. 캐런? 눈을 뜨고 계십시오. 정신을 놓으면 안 됩니다. 눈을 움직일 수 있습니까?”
“레이몬드 경….”
시온이 뒤에서 그를 부른다. 레이몬드는 시온에게 고개를 돌렸다. 시온의 얼굴이 참담했다. 위로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얼굴에 레이몬드는 악을 쓰듯이 고함을 질렀다.
“의사를 불러! 아직 죽지 않았어!”
하지만 끔찍한 소리가 천천히 그의 뒤에서 다가왔다. 발을 끄는 듯한 소리. 수도복이 끌리는 소리. 그 남자. 이곳에 존재하는 유일한 의사. 레이몬드는 그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다.
“신관… 님…. 제발… 당신은….”
“이, 이, 이미… 틀렸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다.
숲은 어둡고 깊었다. 캐런은 레이몬드의 앞에 앉아 있었다. 말은 빨리 달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볍게 속도를 내고 있었다.
“앗.”
“조심하십시오.”
“네.”
승마에 그리 능한 편은 아닌 캐런은 말에 앉아 균형을 잡는 것에 집중했다. 하지만 점점 속도가 늦어지자 신경을 쓸 여유가 생겼다.
“레이몬드 경,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당신 옆에 있을 생각입니다.”
답은 단호했다. 하지만 캐런은 조금씩 현실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노력해도 자신이 말을 타는 게 편하지 않은 것처럼, 안 되는 일은 안 되는 법이다.
“저… 사실… 현실적으로 말이에요. 레이몬드 경이 계속 제 옆에 있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나요?”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했다. 레이몬드가 전부 관둔다고 하더라도 그는 왕이 아니다. 왕이라도 불가능하다. 그는 소속된 곳이 있었고, 엮인 사람이 많았다. 되살아나더라도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캐런 또한 그렇기 때문에 몇 번이나 베르딕 에반스 밑의 하녀가 되었고, 사교계에 나가는 것과 같은 일정을 해야 하지 않았는가. 더군다나 레이몬드는 캐런보다도 훨씬 더 얽힌 사람이 많다.
설마.
캐런은 레이몬드가 상당히 오래 산 것을 떠올렸다. 그녀는 117년이 넘고 나니 할 것이 없어서 살인을 시작했다. 사형당해도 별 상관 없어지니까. 레이몬드도 그런 걸까?
그냥 생각 없이 행동하고 있는 걸까? 캐런은 침을 삼켰다. 잘못하다가는 이번에는 사형수가 레이몬드다.
“설마 탈영하신 건 아니시겠죠?”
“그건 아닙니다.”
레이몬드가 바로 대답했다.
“그랬다가는 집으로 가면 바로 당신이 아닌 절 잡으러 오겠군요.”
“이번 생에서는 아직 전 잘못 저지른 게 없거든요?”
캐런이 볼멘소리로 반박했다.
“…아, 그랬군요. 음, 아무튼 탈영은 아닙니다. 은퇴 앞두고 있으니까 휴가 전부 다 끌어다 썼어요. 은퇴는 서류로 자동으로 처리하게 될 예정입니다.”
생각보다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방식이었다. 캐런은 살짝 한숨을 쉬었다. 안도감 때문이었다.
“그래도 되나요?”
“가능한 일은 최대한 미뤄 뒀습니다. 세 달 정도는 아무 일 없을 겁니다. 세 달 뒤에 일이 하나 있기는 하지만 큰일은 아닙니다.”
“확신해요?”
“예. 두 번 확인했습니다.”
“그 확인이라는 거….”
“전의 생에서요. 당신이 없기는 했지만, 큰 차이는 없을 것 같습니다. 사실 그러기를 희망하는 것에 가깝지만요.”
그는 약간 비관적으로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현실적이다. 자신이 없음으로서 그렇게 된 것일까.
“…그럼 차라리 제가 사회적으로 실종된 것이 더 낫겠네요.”
“예, 그것도 그렇습니다.”
“감안하시고 행동하신 건가요?”
“…예. 죄송합니다.”
“아뇨, 잘하셨어요.”
말을 그렇게 했지만 사실 캐런은 그냥 넘어가기가 힘들었다. 그냥 묻지 않으려고 했지만, 계획을 위해서든 관계를 위해서든 묻는 것이 낫다. 캐런은 고개를 위로 올렸다. 레이몬드의 초록색 눈이 보였다.
“…레이몬드 경.”
“예.”
“지금 몇 살이에요?”
레이몬드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숫자를 세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캐런은 그 대답에 덜컥 겁이 났다.
“혹시… 음… 제가, 100년 정도… 그러니까, 지난번에 살인했을 때가 117살이었고 100번째 돌았던 것으로 기억하거든요.”
“예. 맞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 뒤로 짧게 다섯 번 죽었구요.”
“예. 다시는 그러지 마십시오. 이번에도 늦은 줄 알았습니다.”
레이몬드의 목소리는 온화했다. 하지만 캐런은 그가 불안했다. 너무 어마어마한 숫자가 짐작되기 때문이었다.
“레이몬드 경… 혹시… 100번 반복한 거… 그때 인생 전부 기억해요?”
캐런은 숨을 멈췄다. 사람의 숫자가 아니다. 자신의 1년. 레이몬드가 어림잡아 70년을 더 산다고 한다면 그는 105번을 70년 산 것이다. 7000년이 넘어간다.
움직이고 말을 하고 있을 수 있는가? 사람이 그 인생을 버틸 수 있는가? 영생 앞에 7000년은 짧지만, 캐런은 무서웠다. 이기적이게도 그가 버텼을 생각보다 자신이 그렇게 살게 될까 봐 무서웠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하아. 다행이네요.”
캐런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막대한 세월이 무서웠다. 7000년은 너무 길다. 너무나 길다.
“하지만 충분히 길었습니다.”
레이몬드가 캐런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너무나 다행이라는 듯이.
캐런 에반스는 사형수로 죽었다. 레이몬드는 대관식을 앞둔 후작에게 불려 갔다. 노발대발하거나, 아니면 싸늘한 얼굴로 죽으라고 할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생각지도 않게 왕위에 오른 사람은 손이 너무나 부족했다. 레이몬드는 그에게 쓸 만한 사람이었다. 아직 그의 쓸모는 그 정도의 반항보다 더 큰 것이다.
“자네가 다음에 갈 곳을 알려 주지. 불만은 받지 않겠어.”
“물론입니다. 팬케이르 후작님.”
“그 호칭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군.”
“축하드립니다.”
레이몬드는 담담히 대답했다. 팬케이르 후작은 레이몬드에게 일거리를 넘기면서 말했다.
“…괜찮나?”
무엇을 두고 말하는지는 안다. 레이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장례식은. 어떻게 할 텐가.”
“사형수에게 장례는 허락되지 않더군요.”
레이몬드는 팬케이르 후작이 건넨 사살 대상들을 무심히 보면서 대답했다.
“역시 쉬는 편이 낫지 않겠나?”
“아닙니다.”
사실 괜찮을 리가 없다. 하지만 후작이 자신의 관대함에 도취해서 하는 말을 정말로 쉬라는 말로 믿어서는 안 된다.
“그래, 그럴 때는 오히려 일을 하는 게 더 낫지. 나도 그랬네.”
그래 봤자 직접 사람을 죽이는 것이 직업인 자신보다 더 할까. 하지만 레이몬드는 그냥 고개를 숙였다.
자신은 괜찮을 것이다.
“몇 개월 잠깐 만난 사이니까요.”
레이몬드는 반복해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상황이 그에게 완벽히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상원 의원 자리는 날아갔고, 베르딕은 승승장구했다.
우습게도, 베르딕만은 아무것도 잃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이상 누렸다.
탑에서 캐런이 떨어지고, 곧이어 숨을 거두고 나서 베르딕은 병사 수십 명에게 총구가 겨눠지고 있는 레이몬드에게 다가왔다.
“내 딸이 죽고 말았군.”
비통한 대사와 달리 너무나 상쾌한 듯한 얼굴이었다. 베르딕은 캐런의 시체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어찌 되었든, 일은 이렇게 되었네.”
“…….”
레이몬드는 베르딕을 보았다. 그를 죽여 버리면 자신의 마음이 편할까. 듈란을 죽여 버리면 자신이 편할까. 전부 다 죽일 수 있을까?
하지만 레이몬드가 조금만 움직이면 그의 머리를 바로 쏘아 버릴 병사 수십이 바로 뒤에 있다. 그들은 전부 총을 겨누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숫자를 가늠하며 총을 보았다. 불가능하다. 여기서 자신은 이미 틀렸다.
“하지만 난 관대하지.”
“…….”
“사형수가 사형을 당했으니, 이제 문제는 아무것도 없어.”
베르딕은 레이몬드의 어깨를 짚었다. 레이몬드가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움츠려들기는커녕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자네가 여기서 죽지 않는 건 내 은혜야. 사는 걸 부끄럽게 여기게.”
베르딕이 레이몬드에게 손속을 가하지 않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계산 결과였다. 캐런을 죽임으로서 그는 목적을 이뤘다. 그는 자신의 사적인 복수를 이뤘고 늙은 현왕에게서 이득을 얻었으며, 레이몬드를 손대지 않음으로서 팬케이르 후작에게서 도덕적 명분도 얻었다.
그는 잃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레이몬드는 손해를 봤지만, 그럼에도 아직 살아 있다.
살아 있다.
죽은 것은 캐런이지만, 그는 살아 있다. 그에게 일은 언제나 많고 시간은 흐른다. 새로운 왕이 그를 필요로 했고 세상에는 아직 그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
레이몬드는 캐런이었던 시체를 돌아보았다. 그에게는 시체를 수습할 자격도 없었다.
“괜찮을 거야.”
팬케이르 국왕은 그렇게 말했다.
세상의 모든 희로애락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레이몬드 또한 그것을 알았다. 부모님이 죽었고, 형이 죽었고, 동료들이 죽었다.
하지만 가슴을 찢는 듯한 아픔은 몇 년이 지나가면 사라지고 희석됐다. 먹먹한 아픔은 사그라들었고 또다시 새로운 인생과 인연이 시작됐다.
그러니까 지금 아무리 슬퍼도 캐런은 잊힐 것이다.
“…….”
그럴 수 있을까?
레이몬드는 문을 닫고 수건으로 자신의 코를 막았다.
“아, 젠장.”
코피가 흐르고 있었다. 좀처럼 멎지 않았다.
“…….”
레이몬드는 거울을 봤다. 세수를 했다. 차가운 물이 얼굴에 닿으며 현실을 직시하라고 했다.
레이몬드는 다시 거울을 봤다.
“괜찮아.”
잊을 수 있을 거라고 되뇌었다. 자신은 계속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저는 잘 살 겁니다.”
하지만 정말로?
거울 안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레이몬드 경은 절 잊을 거예요.
“캐런,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캐런이 죽었다.
자신이 사랑한 소녀가 죽었다. 어쩌면 이제는 사랑했는지조차 헷갈렸다. 그녀와 함께한 시간은 그토록 짧은 시간이었다.
괜찮다.
트라우마일 뿐이다.
애인을 떠나보낸 슬픔이 그를 덮치는 것뿐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그를 위로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그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는 가족을, 친구들을, 전우들을 떠나보내면서 그 비통함과 비극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 어떤 슬픔에도 그는 다시 일어났다. 그만큼 그는 슬픔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것 봐요. 잊을 거라고 했잖아요.
“모르겠습니다.”
가능할까?
가장 끔찍한 일은 캐런의 죽음이 아니었다.
더 끔찍한 일은 캐런이 죽은 뒤에 일어났다.
“…캐런?”
캐런의 죽음 이후 계속해서 잊을 리가 없는 기억이 떠오르고 있다.
있을 수 없는 기억이 떠오르고 있다.
캐런이 죽었다.
캐런이 죽었다.
캐런이 목을 매달고, 독을 먹고, 말에 짓밟혀서, 사람들에게 목을 졸려서, 밀쳐져서.
폭포수 같은 기억이 레이몬드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저주의 시작이다.
어느 날의 이야기였다. 반짝이는 불빛과 달콤한 과자 냄새들이 공기를 가득 채우는 날이었다. 캐런이 레이몬드를 올려다봤다. 커다란 보라색 눈에서는 긴장이 보였다. 레이몬드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기대했다.
“레이몬드 경, 이상한 말로 들릴 것 같지만요…. 저는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거 같아요. 이 세상이 소설처럼 느껴져요. 사실은… 진짜로 소설인 것 같아요.”
재미있는 이야기였지만 유치한 이야기였다.
“남주인공은 당신이구요, 여주인공은 전데요. 둘이 사랑에 빠지면 해피 엔딩인 거예요.”
그 이야기 안에는 사회의 어떠한 관점도 없었고,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에 대한 고찰도 없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가득 찬 수줍은 고백이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레이몬드는 캐런의 손을 잡았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니까, 이 이야기는 이제 해피 엔딩이겠군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캐런은 자신을 사랑하는가? 하지만 그것은 사실 자신에게 별 상관이 없을 것이다. 시간은 많고, 세월이 사랑을 만들어 줄 것이다.
결혼을 앞둔 신부 특유의 불안함 같은 것이라고. 레이몬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날 캐런이 죽었다.
어느 날의 이야기였다. 스산한 바람이 온몸을 스치는 날이었다. 이셀라 에반스가 저주를 하며 캐런의 뺨을 후려갈겼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심지어 그 작은 복수도 레이몬드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지 못했다. 오늘은 베르딕 에반스가 완전히 파산한 날이었고, 레이몬드는 승리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레이몬드에게 축하를 보냈고, 그의 결혼식에 찾아가 명예를 더해 주겠노라고 일렀다. 레이몬드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아름다운 약혼녀에게 입을 맞췄다.
캐런이 레이몬드를 올려다봤다. 레이몬드는 캐런을 내려다봤다. 커다란 보라색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다. 캐런을 달래기 위해 레이몬드는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너무 무서워할 것 없습니다. 베르딕은 이제 모든 힘을 잃었습니다.”
레이몬드의 기대 이상이었다. 베르딕이 하는 사업 중 주축 하나가 완전히 파산했다. 캐런이 말하는 이야기 중 레이몬드는 한 부분에 집중했다. 그것은 꽤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레이몬드 경, 저는….”
“당신이 절 도왔으니 전 평생을 걸쳐 당신과 함께할 겁니다.”
“저는 두려워요. 저는 제가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정말 이상한 소리로 느껴지겠지만, 전 이번 생이 처음이 아니에요. …정말로 소설처럼 느껴져요.”
현실적이고 냉철한 조언을 해 왔던 것과는 다르게 그녀의 입술에서는 꿈과 같은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후작이 캐런의 모친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약간 꿈에 빠져 살았다고.
하지만 레이몬드는 캐런이 꿈에 빠져 있다면 그는 그 꿈을 존중해 줄 의사가 있었다. 그녀가 꿈을 계속 꾸도록 그는 만들어 줄 것이다.
현실은 냉정하고 스산하더라도, 눈앞의 꿈처럼 아름다운 소녀가 계속 환상에 젖어 있을 수 있도록.
하지만 레이몬드는 캐런의 눈이 약간 체념에 젖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의 말을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레이몬드 경. 당신이 믿지 않는다는 걸 알아요.’
캐런의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믿는다고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그리고 다음날 캐런이 죽었다.
어느 날의 이야기였다. 화창한 봄이었다. 레이몬드는 이셀라 에반스와의 약혼을 깰 적당한 핑계를 찾아야 했다. 어디 지나가는, 눈 돌아갈 만한 미녀는 없을까? 레이몬드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수첩을 뒤적였다. 그리고 자신이 한심했다.
“안녕하세요.”
“예… 하이어 영애. 몸은 괜찮습니까?”
“괜찮아요. 덕분에 살았네요. 고맙습니다.”
“당연한 일일 뿐입니다.”
레이몬드는 캐런 하이어라는 붉은 머리의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오동통하게 살이 찐, 동글동글한 소녀였다. 레이몬드는 볼을 한 번 찔러 보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분명 엄청나게 싫어하겠지.
“살이 찌면 괜찮을 줄 알았어요.”
캐런 하이어가 옆에 앉아서 툭 내뱉었다. 레이몬드는 무슨 말인가 고민하다가, 캐런이 위험한 일을 당할 뻔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축제 때 불한당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영주의 딸을 그가 구해 데리고 왔던 것이다.
“…원래 강간, 음.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런 남자들은 외모를 따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 그래도 좀 달라질 줄 알았다구요. 제 인생에 실망했어요.”
어렸을 적부터 엄청나게 예뻤다고 했지. 어쩌면 그래서 살을 찌운 걸까? 레이몬드는 캐런의 부친이 은근히 자신의 딸을 내세웠던 것을 기억했다.
“몸이 커지고, 좀 강해질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러면 아무도 날 죽이지 못할 것 같아서요.”
“전 남자고 군인이지만 매번 전투에 나가는 것이 무섭습니다.”
“하지만 저와 같지는 않을걸요. 전 길거리를 걷는 것조차 안전하게 걸을 수 없어요.”
“그야 그렇겠지요. 어쩌겠습니까.”
“…그러게요.”
그런데 왜 이 여자는 자기에게 이렇게까지 말을 붙이는 걸까? 자신이 마음에 들어서? 레이몬드는 캐런의 옆얼굴을 보았다.
“…뭐예요?”
하지만 그 얼굴은 연정 같은 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차라리 전투에 나가는 사람의 비장미에 더 가까웠다. 캐런이 그의 시선을 눈치챈 듯, 레이몬드를 쏘아보았다.
“아뇨, 혹시 제게 반했나 싶어서 봤습니다.”
“그럴 생각 없으니까 다시 고개 돌려요.”
레이몬드는 괜히 민망해져서 다시 고개를 돌렸다.
“…….”
역시 왠지 자존심이 상한다. 유치한 자존심에 레이몬드는 자신이 들고 있던 수첩을 내려놓고 캐런에게 몸을 돌렸다.
“전 잘생겼습니다.”
“알아요. 고개 돌리라고 했죠?”
“제가 보는 것까지 허가받아야 합니까?”
“네.”
“그렇군요.”
생각해 보니 상대가 원치 않는 시선을 주는 것도 무례한 짓이긴 했다. 수긍하며 레이몬드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꽤 괜찮기는 한데.’
오동통했지만 이목구비는 뚜렷했고 눈동자는 말갛다. 이 소녀와 결혼하겠다고 하면 이셀라 에반스는 어떤 얼굴을 할까?
괜찮은 파트너가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셀라는 더 부아에 차서 난리를 칠지도 모르지.
“전 오래오래 사는 것이 인생 목표예요. 그런데 이게 왜 이렇게 힘들죠?”
“음… 힘내십시오.”
“레이몬드 경도요.”
캐런의 눈은 의지로 일렁이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그걸 보고 자신의 제안이 그녀에게 먹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레이몬드는 오래 살기 힘든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의지를 왜 저에게 말하시는지… ?”
“저한테 반하지 말라구요.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청혼 마세요. 이번에 왠지 당신이 청혼할 것 같아서 미리 말하러 왔어요.”
그 당당함에 레이몬드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황당했지만 재미있기는 했다. 그래서 더 아쉬웠다. 레이몬드의 옆은 결코 그리 안전한 곳은 아닐 테니까.
“전 여자 얼굴만 봅니다. 당신은 아니에요.”
울까? 래이몬드는 캐런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캐런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 동안 이를 갈더니 일어났다.
“…생각보다… 레이몬드 경… 그런… 사람이었네요.”
“스스로를 돌아보고 말하시죠. 갑자기 와서 뭡니까.”
캐런은 발을 한 번 탕, 구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이번 인생에서 다시는 보지 말아요. 기왕이면 앞으로도.”
“뭘 또 그렇게까지.”
하지만 캐런은 씩씩거리면서 언덕을 내려갔다. 레이몬드는 실없이 웃으면서 그 뒷모습을 구경했다.
꽤 재밌기는 하다. 정신이 좀 특이하기는 하지만.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군.
“…….”
그리고 이 지역은 베르딕의 손아귀에 떨어지겠지.
레이몬드는 다시 앉아서 한숨을 쉬며 일정을 정리했다. 저런 엉뚱한 시골 처녀도 베르딕의 손길이 지나고 나면 무너지고, 우울해지고, 비참해지겠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레이몬드는 저 멀리 보이는 영주의 저택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후에 레이몬드는 캐런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녀는 그 소원을 결국 이루지 못했다.
어느 날의 이야기였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이었다. 레이몬드는 강물에 휩쓸려 내려가는 소녀 하나를 건져내었다.
“이번에는 죽을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아직 죽을 때는 아니니 더 오래 사십시오.”
레이몬드는 파리한 얼굴의 캐런 하이어를 보았다. 영주의 딸이었다.
“…울지 마십시오.”
“젠장… 또 살았어….”
캐런은 거의 욕을 하면서 울고 있었다.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이 너무나 싫은 듯한 얼굴이었다.
“자살을 방해했습니까?”
“…네. 도와주실 수 있나요?”
“싫습니다.”
“그렇게 대답하실 줄 알았어요.”
레이몬드는 모포를 캐런 하이어에게 두르며 거절했다. 자신은 살고 싶었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제 약혼자가 왔네요.”
캐런은 모포를 두른 채로 일어났다. 레이몬드는 멀거니 그 소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감, 감사드립니다.”
말을 더듬으면서 신관이 그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레이몬드는 그 감사를 받으면서 신관에게 말했다.
“약혼녀가 좀 힘들어 보이는데, 잘 위로해 주십시오.”
“…신,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런. 레이몬드는 쓰게 웃었다. 그가 사교계에서 지겹게 받았던 견제 어린 눈빛이었다.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 한 쌍이었지만 그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저들이 흔한 한 쌍이라면 자신과 이셀라는 어떠한가.
레이몬드는 이셀라를 거의 죽여 버리고 싶어 하지 않는가. 그녀의 아비가 죄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저들 정도면 잘 살 것이다. 자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베르딕이 저 영지를 탐내고, 모든 권리를 앗아간다 할지라도 그녀는 최소한의 의식주와 생활은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살아 있다는 사실에 절망에 빠진 그 눈빛을 오랫동안 기억했다.
그리고 레이몬드는 1년 뒤에 캐런이 결국 죽음에 성공했다는 말을 들었다.
어느 날의 일이었다.
캐런이 죽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떨어지고.
…죽었다.
레이몬드는 그녀의 눈을 쓸어내렸다.
사랑, 애욕, 동정, 동지애, 우정 비슷한 어떠한 감정부터 들끓는 애정까지
그 수많은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
그 수많은 감정들은 100년의 무게를 안고 레이몬드를 눌렀다.
“…….”
레이몬드는 아침마다 멎지 않는 코피에 시달려야 했고, 밤마다 불면증에 시달려야 했다.
“캐런.”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의 주인은 이제 세상에 없다.
이미 죽어 버렸으니까.
이번에는 죽을 수 있을까요?
레이몬드는 자신의 총을 관자놀이에 댔다. 싸늘한 감촉, 묵직한 무게가 안정감을 주었다.
“…….”
죽어서 자신에게 안식이 주어지기나 할까? 다음에는 기억할 수 있을까? 레이몬드에게 닥치는 기억은 캐런에 관한 것뿐이었다. 미래의 인생이 아니었다. 불확실함 때문에 어쩌면 지금 있는 기회를 날릴 수는 없었다.
지금은 아니다.
100년의 세월이 고통스럽다고 해서 지금 바로 죽을 수는 없었다. 레이몬드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았다. 살아서 무엇이든 더 찾아야 한다. 비극이자 희극이었다. 레이몬드는 살아야 했다. 레이몬드는 캐런 때문에 죽고 싶었지만 캐런 때문에 살아야 했다.
“레이몬드 경?”
“예.”
“넋 놓고 있길래 불러 봤어요.”
“미안합니다.”
레이몬드가 사과했다. 캐런은 레이몬드가 왜 저런 식으로 넋을 놓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도 가끔 그랬기 때문이다. 밀어닥치는 기억들은 조금만 방심하면 봇물이 터지듯 사람의 머리에 몰아치고는 했다.
레이몬드는 자신보다 더 오래 살았다고 했다. 아마 자신보다는 위치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좀 더 다양한 선택지와 인생을 겪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더 긴 세월을 살았다. 저런 때의 방법은 하나뿐이다.
현재의 순간에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캐런은 고삐를 잡은 레이몬드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냥 생각하지 마세요.”
“예.”
손은 따뜻했고 현실감이 있었다.
“이 지역은 봄에도 보기 좋네요.”
“조금 있으면 꽃이 피기 시작할 시기니 더 괜찮아질 겁니다.”
캐런은 개울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 푸른 풀이 뒤덮은 초원 위의 저택을 보았다. 아치로 만들어진 다리 밑으로 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거의 다 왔군요.”
멀리 테스 대저택이 보였다. 캐런은 저 저택이 좋았다. 약간의 경사 위에 있는 체이스 대저택은 역사가 깊은 건물이었고, 고풍스러웠다.
“항상 가을에나 겨울에나 왔는데, 여름이 기대되네요. 정원까지는 나가도 상관없죠?”
자신이 정원에서 죽은 적은 없으니까. 저곳까지도 나가지 말라고 하면 너무 힘들 것 같았다.
“예. 하지만 ‘그날’이 가까워지면 방 안에만 있어야 합니다.”
레이몬드의 말에 캐런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알아요. 장미 정원은 어때요? 조경이 괜찮다고 들었는데 제가 올 적에는 언제나 장미가 다 져 버려서 한번 직접 보고 싶었어요.”
“꽤 괜찮다고는 합니다.”
자신의 집인데도 좀 성의 없고 자신 없는 대답이었다. 캐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잘 몰라요?”
“어릴 때 말고는 장미 정원에는 별 관심이 없었거든요.”
“꽃 별로 안 좋아해요?”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전 주로 집보다는 수도나 일터에 있는 편이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주로 집 안의 꽃에 신경 쓰기보다는 꽃 파는 아이들의 것을 사니까요.”
“아이들이 파는 것보다는 정원에서 직접 기른 것들이 나을 텐데요.”
“그냥 빈민 구제용입니다. 전 위선을 베푸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스스로 깎아내리지 마세요. 직접적인 적선도 그들에게는 큰 위로가… 아, 우리 이거 여러 번 말했죠?”
레이몬드가 웃었다.
“예, 여러 번 한 대화군요.”
비슷한 대화의 반복에 서로가 짠 듯이 대화를 나눴다. 인식하니 우습기 그지없다. 레이몬드가 웃다가 캐런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 장미 정원이 그렇게 유명했습니까?”
캐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이셀라가 많이 자랑했거든요.”
레이몬드 또한 잠시 침묵 후에 대답했다.
“그랬군요.”
맞추지 않은 대화는 약간 어색하게 끝을 맺었다. 캐런은 레이몬드를 흘끗 쳐다보았다. 레이몬드는 말을 다루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말의 속도가 약간 빨라진다.
이셀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캐런은 레이몬드가 무어라 말하기를 기다렸지만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캐런은 궁금했지만 그에게 더 묻지는 않았다. 이셀라는 캐런의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이었다. 레이몬드의 인생에서도. 그들의 옆에는 언제나 그녀가 있었고 베르딕이 있었다. 그들의 처음을 묶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레이몬드가 아닌 다른 남자와 결혼할 때도 이셀라가 온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가 오지 않았다. 사라졌다. 그녀의 아버지인 베르딕조차 자신의 딸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
“…….”
레이몬드는 이셀라에게 무슨 짓을 했을까.
레이몬드가 이셀라에 대해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역으로 그가 무엇인가 손을 썼다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 하지만 캐런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말할 필요가 있다면 그때 가서 할 것이다. 지금은 더 묻지 않는 것이 예의리라.
“지금 저택에는 에밀리가 있나요?”
캐런은 말을 돌렸다. 에밀리는 레이몬드의 늙은 가정부였다. 레이몬드는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뇨, 없습니다. 왜 궁금해하십니까?”
“지난번에 그녀의 고향식 자수법에 대해 배우다가 말았거든요. 이번에는 배울 수 있을까 해서요.”
앞으로 무슨 일을 할지 캐런은 생각했다. 캐런은 몇 번의 삶 전에 자신이 수를 놓았던 것을 떠올렸다. 몇 번이나 손가락을 찔려 가면서 수를 놓았지만 계속해서 틀렸다. 이번에는 그것을 완벽하게 완성하는 것도 괜찮으리라.
“죄송합니다. 당신이 다른 사람은 가능한 만나지 않게 하려고 해서 전부 해고했습니다.”
“…그랬군요.”
“원한다면 준비하겠습니다.”
캐런의 약간 시무룩한 대답에 레이몬드가 제안했다.
“에밀리를요?”
“제가 자수를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레이몬드의 진지한 대답에 캐런은 고개를 숙였다.
“방금 건 좀 웃겼어요.”
“웃기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만….”
레이몬드는 시무룩한 얼굴로 대답했지만 캐런은 그가 엄격하고 진지한 얼굴로 자수를 놓는 것을 생각하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튼, 뭘 해야 할지 생각해 봐야겠네요. 저택에서 뭘 하고 노는 게 좋을까.”
캐런은 저 대저택이 좋았다.
규모 면에서는 왕족의 별장으로 쓰이는 성들에 못지않았으며, 무엇보다 풍광이 아름다웠다. 건물의 뒤편에는 산이 있어 저택을 한층 더 빛나게 하였고, 연갈색의 저택 앞에는 얕은 개울이 있어 물장난을 치기 좋았다. 캐런은 특히 저택의 앞에 펼쳐진 넓은 평원에서 햇볕을 쬐며 조는 것을 좋아했다.
정원에는 정원사들이 만든 각양각색의 아름다운 나무들이 있었으며, 여름이 되면 많은 귀족들이 방문하고는 했다. 공작새들과 백조들이 정원에서 돌아다녔고 장미 정원은 캐런이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었다.
“이곳에는 정말 오랜만에 오네요.”
분명 베르딕 에반스가 세이어테스 가문을 탐낸 이유 중 하나는 저 테스 대저택의 위엄이었을 것이다.
베르딕 에반스 또한 대저택을 몇 개나 가지고 있었지만 저런 대저택을 소유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귀족이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관리하고 점유해 온 땅의 저택은 건물 하나뿐이 아니다. 정원부터 오래된 양식의 건물, 사냥터, 그 안의 오래된 장식을 전부 포함했다. 베르딕이 가지고 있는 건물은 세련되고 화려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부자들이 그러하듯이.
“캐런, 손을 잡고 내려오십시오.”
캐런은 레이몬드의 팔을 잡고 말에서 내렸다. 허리가 아팠다. 캐런은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리고 대저택을 올려다보았다. 밝은 정오의 햇살 아래에 저택이 그 위엄을 드러냈다.
캐런은 레이몬드 옆에서 천천히 걸었다. 몇 번이고 온 곳이지만 감흥이 새로웠다.
“생각해 보니까 장미 정원은 좀 위험한 것 같습니다.”
“…왜요?”
“장미 가시에 손이 찔려 파상풍에 걸리면 어떡합니까.”
“…레이몬드 경, 작작 좀 해요.”
캐런은 장난스럽게 레이몬드를 꼬집었다. 하지만 레이몬드의 얼굴은 심각했다.
“전 항상 진지합니다.”
“…아무튼, 당분간은 저택 안에 있을게요. 어차피 꽃도 피지 않았으니까요.”
“예, 죄송합니다.”
“이유를 아니까 그럴 필요는 없어요.”
저택이 작았으면 싫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캐런은 하이어 영지의 저택을 생각했다. 그것도 영주민들의 저택을 생각하면 분명 큰 저택이었지만, 그 안에서 지내는 것만 해도 충분히 답답했다.
하지만 레이몬드의 집이라면 1년 정도는 충분히 즐겁게 처박힐 만했다. 네 개 층으로 이루어진 저택의 방 개수만 해도 170개가 넘었다. 더군다나 각각의 공간은 답답함을 느끼기 힘들 정도로 충분히 넓었다.
캐런은 대문으로 걸어올라 들어갔다.
하지만 대문 앞에서 사자 조각이 물고 있는 문고리를 몇 번 탕탕 소리 냈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레이몬드가 캐런의 뒤에서 다가오면서 큰 열쇠를 꺼냈다.
“지금 하인들이 없어서 직접 열어야 합니다.”
레이몬드가 문을 열었다. 덜컹거리며 대문이 천천히 열렸다. 사람을 줄이기는 정말 많이 줄였구나. 캐런은 고개를 끄덕이며 저택으로 들어갔다.
“후우.”
오랫동안 오지 않긴 했구나. 캐런은 홀의 샹들리에를 올려다보며 감회에 젖었다. 전부 크리스털로 만들어져 있었나.
“어라….”
뭔가 이상하다.
샹들리에에는 초가 얹어져 있지 않았다. 사람이 적으니까 관리하기 힘들어서 빼낸 건가. 하지만 저게 없으면 밤에는 상당히 어두울 텐데.
“레이몬드 경, 저기.”
고개를 돌리니 더욱 가관이다.
캐런은 정문에 깨진 유리창을 보았다.
저게 뭐야. 정문 위의 창문이 깨졌는데 왜 그대로지?
캐런은 레이몬드를 돌아봤다.
“레이몬드 경, 저기 창문이 깨져 있는데요.”
“아, 며칠 전에 돌풍이 강하게 분다 싶더니 깨진 모양이군요. 곧 업자를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샹들리에 초가 없는 건….”
“관리할 필요가 없어서 빼 두었습니다. 원한다면 다시 끼워 넣겠습니다.”
시키는 것이 아니라?
설마.
캐런은 자신의 손을 꼼지락거리면서 레이몬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물어보아야 한다. 이건 정말 물어야 한다.
“레이몬드 경. 하녀와 하인들을 줄였다고 했죠?”
“예.”
설마, 설마 아니겠지.
캐런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며 침착하게 물었다.
“몇 명이나 있어요?”
레이몬드가 눈을 깜빡이다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두 명입니다.”
설마 하인이 단 두 명이라고? 캐런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이 군인이 아니라 말라비틀어진 신관이라면 그에게 폭력을 가했을 것 같았다. 설마 그런 건 아니겠지.
귀족의 대저택이다. 분명 상주 인원은 100명이 넘으며 여름에는 왕족이 방문할 정도의 풍광을 자랑하던 곳이었다.
“두 명이요?”
“아… 제 말에 실수가 있었군요. 없습니다.”
“…없다구요?”
캐런은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지금 이 남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하지만 레이몬드는 캐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듯 빙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예. 저택에는 우리 둘뿐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짐꾼이 마차로 물건을 가지고 오기로 했으니 그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참자. 참자.
캐런은 떨리는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다시 물었다.
“지금 저 정도 저택은… 100명 정도가 상시 거주하는 것이 일반적인 거 아시죠?”
“예.”
“그럼 우리 둘이서 치우고… 식사를 만들면서 관리하자구요? 그러니까, 레이몬드 경이랑 제가… 청소부터, 건물 관리나… 정원이나… 그 100명 넘는 사람들이 하던 걸?”
레이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할 것은 많으니 심심하지는 않겠군요. 다행입니다. 군대에서 요리하는 것이나 청소는 다 배웠습니다.”
“요리… 군대 요리요….”
캐런의 대답에 레이몬드가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부하들 전부 감탄을 금치 못하고 다 먹어치웠습니다.”
“청소는… 어떤 걸 말하시나요… ?”
“캐런, 너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제가 하루 만에 군복 100인분도, 아, 아앗!”
농담인 게 당연해야 하는데.
캐런은 주먹을 꽉 쥐었다. 앞길이 깜깜했다.
“…아얏, 왜 그러십니까?”
캐런은 레이몬드의 옆구리를 강하게 꼬집었지만 레이몬드는 그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캐런을 내려다보았다.
“재밌는 농담이네요. 이번에는 정말 재밌었어요.”
농담이라고 해. 어서.
하지만 레이몬드의 표정은 어리둥절했다.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돈으로 얼마든지….”
그게 문제가 아니다. 캐런은 이를 꽉 깨물었다.
“죽을래요?”
“예?”
“레이몬드 경, 죽을래요?”
잔뜩 부아가 난 캐런을 레이몬드가 쩔쩔매면서 달랬지만 캐런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저는 손 하나 까딱 안 할 거예요.”
“예, 제가 다 하겠습니다.”
레이몬드는 별로 불쾌한 구석도 없이 흔쾌히 대답했다. 그래서 캐런은 더 불안했다. 캐런은 레이몬드가 다시 고용하겠다는 대답을 하길 원했지 자신이 직접 다 하겠다는 대답을 원하지는 않았다.
“정말로요?”
“예.”
자신이 보기에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캐런은 레이몬드를 가늘게 뜬 눈으로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무르지 마세요? 분명 알아서 하신다고 한 거예요?”
하다 죽을 텐데.
“당신이 일하다가 죽는다면 오히려 목적이 뒤바뀌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냥 편하게 있으십시오.”
편하게 있는 게 가능할까? 레이몬드의 자신만만한 얼굴이 이렇게 불안해 보이는 것도 처음이었다.
“방에서 쉬고 계십시오. 적당히 치우고 올라가겠습니다.”
끝까지 해 보려나 보네. 캐런은 한숨을 한 번 쉬고 계단으로 올라가며 물었다.
“제가 어떤 방을 쓸까요?”
이 저택에는 방이 너무 많다. 캐런은 170개의 방 중 어느 방이 멀쩡할지 고민했다. 레이몬드는 창고로 향하면서 캐런에게 말했다.
“예전에 같이 쓰던 방이 낫지 않겠습니까?”
“3층 방이요? 치워 두었나요?”
“예… 제가 치운 건 아니지만요.”
“그럼 더 믿을 만하네요.”
캐런의 말에 레이몬드가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캐런, 전 자신 있습니다. 식사 준비가 끝나면 깨울 테니 쉬고 있어요.”
퍽이나.
캐런은 이죽거림을 참으며 손을 마주 흔들어 주었다.
“난 몰라… 편하게 있으라 했으니까.”
캐런은 레이몬드가 사다리를 가져와서 샹들리에에 양초를 하나하나 꽂는 것을 보다가 방으로 올라왔다. 밤에나 잠깐 켜고 자기 전에는 또 하나하나 다 꺼야 하는 것을 생각하면, 캐런이 생각하기에도 어지간히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알아서 하라지 뭐.”
하지만 캐런은 레이몬드에게 굳이 하지 말라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고생해 봐야 자신이 잘못 판단했다는 걸 알겠지. 이셀라의 시중을 들어 본 캐런으로서는 이 정도의 저택을 개인이 관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새벽에 문을 열고 밤에 문을 닫는 것부터, 깨진 유리창을 가는 것이나 침구를 가는 것 전부 하나하나 사람의 손이 들어가는 일이다. 캐런의 집만 하더라도 이 저택의 4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하녀만 스무 명이 넘었고, 하인들이나 마부들, 요리사들까지 하면 쉰이 넘었다.
레이몬드는 대부분 집안의 일을 집사와 가정부들에게 위임해 왔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리라. 캐런은 고개를 저었다. 이래서 남자들이란.
캐런은 레이몬드가 한 달도 되지 않아 포기 선언을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가 몸을 잘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전투의 영역이다. 캐런이 잘 움직이는 곳은 사교계나 춤의 영역이고. 그는 전투 영역이었다.
캐런이 이셀라의 시중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혼자 전부 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담당한 것은 극히 일부였다. 하지만 캐런은 그래서 레이몬드의 저 자신만만한 모습에 기가 찼다.
“…아직은 깔끔하네.”
캐런은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사용인들이 퇴근, 아니 강제 해고를 당하면서도 나름대로 깔끔하게 마무리를 하고 간 모양이다. 캐런은 자신이 이셀라의 집에서 관둔 과거를 생각한다.
“…난 양탄자 밑에 듬뿍 타르를 칠하고 나왔는데. 그게 보통 아니었나?”
자신은 나쁜 하녀였지만 레이몬드의 사용인들은 그래도 마지막까지 열심히 하고 간 모양이었다.
“…더 아까워 죽겠네.”
이 저택의 사용인들 정도로 전반적인 사용인들의 솜씨가 좋은 곳은 극히 드물었다. 캐런은 자신이 기대하던 늘어지게 여유로운 휴가가 날아간 것이 아까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끼익.
캐런은 자신이 예전에 레이몬드와 쓰던 방문을 열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하아.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바람이 불었다.
캐런은 창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창문에 달린 하얀 커튼이 휘날리면서 캐런을 반기고 있었다.
돌풍이 있었다고 했지. 그때 열렸던 건가. 캐런은 창가로 다가가서 커튼을 묶었다. 바람에 휘날려서 나뭇가지 몇 개와 이른 봄에 난 꽃잎들 몇 개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연분홍의 부드러운 어린 꽃잎이 얼굴에 와 닿았다.
캐런은 꽃잎을 떼어 내었다.
눈부신 오후의 햇살이 캐런을 반겼다.
캐런은 창가에서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아름답고 평화로운 저택이었다.
캐런이 레이몬드를 선택했을 때 마지막에 얻을 수 있었던 공간.
드넓은 초원과 간간히 풀을 뜯는 양 떼들이 멀리서 보였다. 저택과 가까운 곳에는 개울이 있는데, 그곳의 조각배 위에서 책을 읽다가 잠드는 것도 좋았다. 개울을 가르는 다리를 건너면 분수대가 있었다. 아직 물을 대지는 않았지만 여름에는 저기서 물이 나오겠지. 장미 정원에는 장미들이 아름답고 등나무로 만든 터널 아래는 보랏빛의 산책길이 빛날 것이다.
“정원사들도 다 관두었으면 여름에는 난리나겠네….”
캐런은 약도 치지 않은 정원이 얼마나 지저분해질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와장창 낭만이 깨졌다. 캐런은 정원사들만큼은 반드시 오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요리사도 꼭 불러야지.”
레이몬드의 식사는 전혀 기대되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파왔다. 캐런은 머리를 흔들었다. 불평은 나중에 해도 충분했다. 지금은 잘 시간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승마 때문에 피곤했다.
캐런은 방으로 몸을 돌렸다.
큰 침대는 대여섯 명이 누워도 넉넉할 정도였다.
그녀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풀썩, 소리를 내며 누웠다. 침대는 푹신하고 컸다. 침대 안에는 팔이 담긴 선물 상자는커녕 부드러운 솜의 감촉만이 느껴졌다. 캐런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엎드려서 신발을 바닥으로 날렸다.
레이몬드가 알아서 한다고 했으니 알아서 하겠지.
자신이 취할 것은 휴식이다.
캐런은 눈을 감았다. 베개에서는 연한 꽃 냄새가 났다. 평화의 냄새다.
캐런, 식사는 어떻게….
두어 번 레이몬드가 깨웠지만 캐런은 그때마다 손짓으로 레이몬드를 나가게 했다. 정말 오랜만에 자신이 맞는 평온한 잠이었다.
“…으응.”
결국 눈을 떴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너무 잤다.
캐런은 자다가 눈을 뜨고는 잠시 당황했다. 너무 오래 잠들어서 상황 파악이 힘들었다. 너무 긴 수면에 두통이 올라왔다.
“하아.”
이번에도 꿈은 악몽이었다. 캐런은 꿈에서 또 죽었다. 아니, 그냥 죽은 것도 아니었다. 캐런은 살아 있는 채로 수장당하는 꿈을 꾸었다. 천천히 관 안에 물이 들어오는데 자신은 그것을 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한없이 해저 아래로 처박히면서 발끝에서 차오르는 물을 느끼는 꿈이었다. 캐런은 일어나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
캐런은 사람의 인기척을 느끼고 눈을 돌렸다. 순간 긴장했지만 레이몬드였다. 캐런은 레이몬드의 금빛 머리칼과, 그 아래의 몸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무서워할 것은 없다. 레이몬드가 자신의 곁에 있다. 레이몬드가 자신을 기억한다. 그는 캐런과 같이 관 속에 들어갈 사람이었다.
죽음의 공포는 사라지지 않아도 악몽을 깨우는 온기가 있다.
“…….”
하지만 그것은 그것이고, 캐런은 레이몬드의 어깨를 흔들었다.
“레이몬드 경.”
“…….”
“레이몬드.”
“…예.”
레이몬드가 간신히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잠에 취해 있었다. 하지만 캐런은 흔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옷을 안 갈아입고 침대에 들어오면 어떡해요. 일어나서 갈아입고 누워요.”
“…….”
레이몬드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뒤돌아 있던 몸을 캐런 쪽으로 돌렸다. 하지만 여전히 눈은 감은 채였다.
“…옷이 지금 엄청 더럽거든요?”
“…….”
캐런이 아무리 꼬집어도 일어나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봐주면… 안 됩니까…? 지금… 좀 전에 잠들어서….”
“안 돼요. 지저분하게.”
레이몬드가 온종일 청소했다면 그 몸에 묻은 것이 어떨지는 뻔하지 않은가.
“양초 다 끼워 놨는데… 보지도 않고….”
한 대 때리고 싶다. 캐런은 잠에 취해서 헛소리를 늘어놓는 레이몬드의 어깨를 흔들었다.
“저 먼저 잔다고 했잖아요. 레이몬드, 일단 옷부터 갈아입고 자요.”
“제가 지금 너무 졸려서… 잠깐….”
“저 다른 방에서 잘까요?”
그 말에 레이몬드가 눈을 번쩍 떴다.
“아니. 가지 말아요, 캐런.”
그리고 캐런의 몸을 꽉 끌어당겼다.
“옆에서 자요.”
캐런은 먼지가 잔뜩 묻은 레이몬드의 옷에 얼굴이 파묻히게 되자 인상을 썼다.
“그럼 옷부터 갈아입어요.”
“어차피 이미 틀렸습니다. 이불은 더러워졌어요.”
그러더니 그는 눈을 꽉 감아 버렸다.
“하루만 봐줘요… 그동안 정말로 너무 못 잤단 말입….”
그답지 않게 투정 어린 듯한 목소리가 끝을 맺지 못했다.
“…하아.”
캐런은 한숨을 쉬면서 레이몬드의 조끼라도 벗기기 위해 단추를 하나하나 풀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성공하지 못했다.
“….윽.”
레이몬드가 캐런을 자신의 품으로 꽉 끌어안았다. 캐런은 레이몬드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는 결국 조끼를 벗기는 것도 포기했다. 빨래도 자신이 한다고 했으니까.
캐런은 투덜거리면서 다시 눈을 감았다. 캐런은 이미 충분히 잤다. 하지만 캐런은 레이몬드의 품 밖으로 빠져나갈 자신도 없었다. 사실 캐런도 그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좀 투덜거리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
고개를 살짝 돌려서 레이몬드의 팔을 벴다. 팔이라도 저리라고.
그래도 장점은 있었다. 온몸에 와 닿는 온기가 느껴졌다. 아직 이른 봄은 싸늘했다. 레이몬드의 숨소리가 들렸다. 캐런은 둘 다 살아서 이렇게 한 침대에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마치 처음으로 이렇게 같이 누워 있는 것 같았다. 캐런은 자신이 수장된다면 관이 아니라 침대째로 가라앉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차가운 물로 전신이 싸늘하게 식더라도 옆에서 계속해서 숨소리가 들린다면 잠에서 깰 것 같아서. 이 온기가 자신을 감싸고 있으면 더 이상 무서울 것은 없을 것 같아서.
캐런은 레이몬드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레이몬드가 그녀의 허리에 얹은 다른 팔은 약간 무거웠지만 그 무게감이 오히려 그녀를 현실에 안주하게 만들어 주었다.
“…….”
레이몬드도 그동안 불면증에 시달렸을까. 그녀처럼 끝나지 않는 밤을 새우면서 죽음을 기다렸을까.
캐런이 다시 잠드는 데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레이몬드의 관리 일은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최악은 아니었다. 저택의 대부분을 쓰지 않으니 그만큼 손볼 일도 적었던 것이었다. 하인들의 방은 전부 쓰지 않으며, 찾아오는 손님 또한 없으니, 두 명이 쓰는 부분만 정리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생활의 윤택함은 전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떨어졌다.
첫 번째로 의복의 문제였다.
“정말 미안합니다. 캐런.”
“…….”
캐런은 레이몬드가 하는 사과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자신의 눈앞에 놓인 천 더미가 된 치마를 보고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옷 중 가장 좋은 옷이었다. 레이몬드와 첫 만남을 가졌을 때 보통 입었던, 안에 프릴이 겹겹이 달린 옷이었다. 생긴 것뿐 아니라 가볍고 보온도 좋은 것이라, 캐런이 애용하던 옷이었다. 하지만 최소한 캐런이 살아 있는 동안 이 치마를 다시 입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미 옷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천 더미가 되어 버렸으니까.
“어떻게 세탁하신 건가요?”
“그냥… 다른 옷과 같이… 비누를 풀고 세탁을 했습니다.”
“…레이몬드 경의 옷이랑 같이요?”
“…예. 그렇습니다.”
캐런은 세탁 하녀가 아니었지만, 최소한 이런 옷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작업복과 다르게 여성복의 연약한 천은 거의 손상을 주면 안 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옷은 더러워진 부분만 살짝 정리하고 털어 버려야 했다.
“지금 작업할 때 입는 옷과 같이 넣었나요?”
“…예.”
그런 옷을 텐트 같은 것에 쓰이는 작업복과 같이 빨았으니 결과는 끔찍했다. 옷의 틀은 완전히 뒤틀어졌고 칙칙한 작업복 색의 물이 들어 버렸다.
“…….”
“곧 사 오도록 하겠습니다.”
“…….”
괜찮다고 해야 한다. 그의 잘못이 아니다. 모르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는 바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보상을 하겠다고 하지 않는가. 어서 괜찮아요, 라고 대답해야 한다.
“…….”
하지만 캐런은 흔쾌히 괜찮다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하녀라면 꾸중을 하고, 이셀라라면 포기를 하겠지만 상대가 레이몬드다. 캐런은 입을 열었지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정말 미안합니다.”
“…됐어요.”
그것이 최선이었다.
결국 캐런은 괜찮다고 말을 하지 못했다. 머리로는 알아도 감정이 상했다. 레이몬드를 사랑하는 것과 이런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날 밤 캐런은 레이몬드에게서 등을 돌리고 잠들었다.
“미안합니다.”
“알아요, 레이몬드.”
“…….”
레이몬드는 입을 다물었다.
캐런은 저택의 170개나 되는 방을 다 뒤졌지만 자신의 마음에 드는 옷은 찾을 수 없었다. 고용인들이 나가면서 전부 다 들고 나갔던 것이다.
“괜찮아….”
캐런은 자신이 입은 옷을 거울로 보면서 다짐했다. 검고 평범한 하녀들이 입는 옷이었다. 캐런은 그 위에 앞치마를 두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거친 천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캐런은 약간 불길한 기시감이 들었다.
두 번째는 더 심각했다.
식사 문제였다.
캐런은 맛있는 식사를 좋아했다. 미식을 사랑했다. 지고의 쾌락을 사랑했다. 레이몬드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그의 집, 테스 대저택이었다. 그중에서도 저택 내의 주방장들이었다.
기름진 토양에서 나는 곡물과 양과 소떼들을 가지고 그들은 마법을 만들어 내고는 했다. 솜씨도 훌륭했지만 여기의 토산물들이 워낙 질이 좋았던 덕으로, 캐런이 이 땅 자체를 사랑하게 만들고는 했다.
커다란 식당은 사람 수십 명이 앉아서 먹을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지금 이 공간은 캐런과 레이몬드 단둘만을 위해 있는 곳이었다. 커다란 창에서 들어오는 눈부신 햇살이 식당 전체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고, 길고 큰 식탁에서 단둘이 식사를 하는 것은 나름대로 괜찮았다.
또한 눈앞에 있는 사람이 무슨 대화를 하더라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은 훌륭한 식사 시간의 중요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캐런은 쉽사리 포크와 나이프에 손이 가지 않았다.
“…입에 맞지 않습니까?”
“아뇨, 괜찮아요. 수고 많이 하셨어요. 고마워요.”
캐런은 묵묵히 고기를 썰면서 대답했다. 접시는 마음에 들었다. 주물로 만든 접시와 고기는 딱 알맞은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뜨거웠지만 고기의 구워진 정도는 완벽했다. 캐런의 칼질에 서걱이는 소리가 나며 고기가 갈라졌고, 붉은 부분이 적당한 익힘을 자랑하며 드러났다.
“다행이군요.”
캐런은 한 조각을 잘라서 입에 밀어 넣었다. 어린 암양을 가지고 요리한 것이었다. 사실 요리라고 할 것도 없었다. 단순하게 삶은 다음에 후추와 소금을 곁들인 것이었다. 하지만 고기의 질이 좋았기에 누린내는 전혀 없었고, 부드러웠다. 소박한 요리법이었지만 그렇다고 먹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맛은 괜찮아요.”
아침으로 내놓은 것만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레이몬드 경의 수고가 염려되니, 앞으로는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캐런은 아침은 거의 먹지 않는다. 먹는다 하더라도 우유와 차, 그리고 약간의 간식 정도로 때웠다. 그녀가 유별난 것은 아니었으며 대부분의 저택에서 내놓는 식사는 그것이 평범했다. 하인들조차도.
“괜찮습니다. 당신이 즐겁게 식사하는 것을 보는 것이 제 보람입니다.”
“…….”
감동적이긴 했다.
레이몬드가 내놓는 것은 고기, 고기, 고기였다. 그것도 별 요령 없이 그냥 삶거나, 굽거나, 데친 고기. 캐런은 고기에 곁들이는 음식이 고작해야 구운 감자라는 현실이 암담했다. 이래서야 대저택이 아니라 수도원에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레이몬드 경.”
“예, 캐런.”
“군대에서는 보통 이런 식사를 하나요?”
“보통은 이것보다 훨씬 안 좋습니다.”
“…맛있네요. 감사히 먹고 있어요.”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캐런은 한숨을 참으며 고기를 썰었다.
캐런이 호응을 하지 않자 레이몬드가 다시 제안했다.
“급하게 준비하느라 빵이라고는 딱딱한 깜빠뉴밖에 없었습니다. 그것보다는 고기를 내놓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밀가루는 없나요?”
캐런의 질문에 레이몬드가 굳어서 대답했다.
“제가 곧 제빵을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있는데 못 만드는구나.
캐런은 레이몬드를 보지 않고 고기만을 노려보았다. 레이몬드도 귀족이다. 평범한 식사가 어떤 것인지 알 것이다. 하지만 평상시에 남에게 접대를 하는 입장이 아니니, 자신의 기준으로 최선을 다해 내놓는 것이다.
그냥 요리사들을 부르면 안 되는 건가요?
캐런은 입 안에서 맴도는 말을 참으며 레이몬드를 빤히 쳐다보았다.
“다음에 짐꾼이 오면 비스킷과 빵을 가지고 오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짐꾼이 도착하려면 아직도 멀었다. 캐런은 며칠은 더 이 피가 떨어지는 식사를 계속해야 한다는 사실에 울적했다.
“꼭… 부탁드려요.”
캐런은 레이몬드에게 애써 웃으면서 대답했다. 웃는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았다. 하지만 만드는 것도 레이몬드요, 치우는 것도 레이몬드요, 돈을 지불하는 것조차 레이몬드니 불평을 말하기도 힘이 들었다.
“불편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레이몬드의 진지한 눈빛에 캐런은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비명을 삼켜야 했다.
궁전 같은 대저택에서의 조용한 식사였다.
세 번째는 레이몬드가 너무 바쁘다는 것이었다.
레이몬드는 억지로 시간을 내서 캐런과 함께 하루 두 시간은 같이 앉아서 체스 같은 게임을 두거나, 같이 정원을 산책하면서 대화를 했다. 하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집 안을 치우고, 음식을 만들고, 캐런과 시간을 보내는 것만 해도 하루해가 다 갔으며, 저녁 시간 이후에는 끊임없이 서류를 받아서 정리하고, 다시 전서구와 전보를 부치고는 했다.
“은퇴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제가 군의 일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일도 했었나요?”
“예.”
그 짧은 대답에 스스로도 놀랐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후작님과 관련된 일이 좀 있습니다.”
저택 안에 틀어박힌다고 해서 사회와 완전히 유리된 삶을 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캐런은 사회에서 유리되어 있었다. 연결 고리는 레이몬드뿐이었다.
“…1년만 참아주십시오.”
하지만 캐런에게는 그 기간이 너무나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사건을 치고 싶은 건 아닌데.”
레이몬드 경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는가. 캐런이 이렇게 초원에 나와서 누워 있는 동안 레이몬드는 안에서 모든 일을 한다.
하지만 캐런은 불만족스러웠다. 자신이 불평을 할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이 더 답답했다.
“…왜 아직도 외로운 걸까?”
자신은 언제나 외로웠다. 이제까지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기억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드디어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났는데도 텅 빈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다.
식사가 불만족스러워서? 옷이 소박해서? 그 모든 것이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캐런은 자신의 욕망을 인정하는 것이 좀 어려웠다.
“평화로운데… 왜….”
캐런은 풀밭 위에 누워서 저택을 올려다본다. 이 넓은 공간에 레이몬드와 자신 둘뿐이지만, 캐런은 계속해서 욕망이 채워지지 않는 것을 느꼈다.
점점 욕심이 더 커진다.
옆에 있고 싶다.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다. 좀 더 미래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해할 수 있는 한 명이 생기니까 욕심은 끝도 없이 커진다. 세상이 활자로 느껴졌는데, 이제는 현실적인 거대한 온실로 느껴졌다. 현실감이 들기 시작하면서 하고 싶은 것은 점점 더 늘어났다.
생각보다 1년은 길었다.
“캐런, 식사 준비가 끝났습니다.”
어느새 석양이 지고 있었다. 또 낮잠이 든 모양이었다. 캐런은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레이몬드를 보았다.
옷에 풀물이 들었겠네. 캐런은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이내 그래도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옷들은 전부 폐기되어서 하녀들이 입는 단순한 검은 옷이었던 것이다. 풀물 정도야 들어도 상관없었다. 캐런은 계속해서 누워 레이몬드에게 물었다.
“또 기름진 식사인가요?”
“…고기는 빼고 계란만 썼습니다.”
“삶은 계란인가요?”
“아닙니다, 오믈렛입니다.”
“와.”
캐런은 기대했다. 오믈렛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았다. 황금빛 오믈렛을 가르면 그 안에서 감자와 베이컨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는 것도 좋다. 그 정도면 여기에 다 있는 재료일 것이다.
다행이었다. 캐런은 모처럼 고기가 아닌 제대로 된 식사를 한다는 것에 만족했다.
“다음에 여러 가지를 주문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캐런은 잔디 위에 누워서 레이몬드를 올려다보았다.
레이몬드가 캐런의 손을 잡았다.
자신도 노력해야지. 레이몬드도 노력하니까.
레이몬드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이고 있었다. 석양의 빛 때문에 레이몬드의 머리색이 불그스름한 빛을 띤다. 캐런은 자신의 머리색과 닮아 가는 그 색이 마음에 들었다. 봄바람이 볼을 쓸었다.
캐런은 두 팔을 뻗었다.
레이몬드의 목에 감쌌다.
“식사하러 갈까요?”
“잠깐만요.”
캐런은 레이몬드의 목을 끌어당겼다.
“아.”
“죄, 죄송합니다. 무심코.”
왜 이럴 때 힘이 좋아서. 레이몬드의 몸이 당겨지지 않았다. 캐런은 레이몬드에게 명령했다.
“힘 빼요.”
이번에는 힘을 너무 빼서 코가 맞부딪혔다. 어쩐지 계속 맞지가 않는다. 둘이 맞보면서 낄낄 거리다가 천천히 입술을 겹쳤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캐런은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노력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심각한 욕구불만이었다.
사람의 욕망. 사람의 죄.
교만, 탐식, 탐욕, 나태.
캐런이 원하는 대부분의 욕망은 채워지지 않았다. 분명 캐런이 머무는 곳은 화려한 대저택이었고, 목숨의 위협이 없는 아름다운 풍광이었고, 그녀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과 머무는 곳이었다. 그녀가 100년간 한 번도 손에 넣지 못했던 온전한 평화가 이곳에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캐런은 극한의 쾌락을 알았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욕망을 알았다. 사교계에서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의 즐거움, 칭송을 받는 기쁨, 움직이기 위한 사료가 아닌 입에서 즐기는 탐식.
지금까지 캐런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죄악은 나태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캐런에게 맞지 않았다. 너무 오랫동안 열심히 살았고, 포기하려 노력했지만, 자신은 포기조차 격했다. 어떻게든 죽으려고 들었고, 죽이려고 들었다.
자신은 100년간 목숨을 건 삶을 살았다.
이번 생은 그녀에게 자극이 너무 약했다.
책 속이 아니야, 진짜 인생이야, 혼자가 아니야, 같이할 수 있어.
그 생각이 들자 1년은 너무나 길고, 긴 시간으로 느껴졌다. 캐런은 조금씩 초조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캐런에게 불안감을 주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왜 안 하지?”
캐런은 베개를 안고 침대에 앉았다.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왜?”
레이몬드 경은 자신의 연인이다. 이번 생에서는 식을 올리지 않았지만 남편이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건 둘뿐이다. 그의 애정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눈에서, 손짓에서, 말 하나하나에서 절박에 가까운 애정이 묻어났다. 그래서 캐런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왜… 안 하지?”
레이몬드는 왜 자신과 성적 관계를 맺지 않는단 말인가?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
애정 문제 이상 없음.
건강 문제 이상 없음.
심지어 주변에 사람 하나 없이 단둘.
“…할 건 하나밖에 없지 않나?”
캐런은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젊은 남녀 아닌가. 그리고 캐런과 레이몬드는 이미 과거에 몇 번이고 잠자리를 같이한 사이였다. 자신과 레이몬드에게 육체적 결합은 머나먼 책의 종장의 일이 아니었다.
“…….”
캐런은 텅 빈 침대의 옆을 보았다. 레이몬드는 오늘 아침에도 새벽부터 나갔다.
지금도 잠자리를 같이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는 다르게 레이몬드는 캐런의 옷을 한 번도 벗기지 않았다. 같이 잠자리에 들기는 했지만, 문자 그대로 수면만 같이했을 뿐이었다. 타인의 숨소리를 들으며 자는 것은 평온했지만, 점점 그런 날이 더 길어질수록 이상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가 자신과 관계를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까드드득.
캐런은 손톱을 물어뜯었다. 초조해서 짜증이 났다.
자신이 왜 이런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레이몬드는 다 책임지겠노라고 큰소리를 치더니, 식사도 그냥 그랬다. 관리 청소 빨래 전부 성에 차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캐런의 옆에 잘 있지도 않았다. 캐런은 하루 종일 레이몬드와 만나는 시간만 손을 꼽아야 했다. 심지어 자신이 같이 일을 도우려 해도, 그것조차 탐탁지 않아 하면서 말렸다.
“설마….”
캐런은 생각하기 싫은 가정 하나를 떠올렸다.
질린 건가?
“그럴 수도… 있나…?”
나이 들고 힘에 부쳐서 관계가 소원해지는 부부의 이야기는 흔했다. 정신적으로는 서로 지지하더라도 육체적인 열망은 시드는 흔한 부부 이야기. 레이몬드와 캐런이 젊은 육체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기억이 몰려오면서 성적 흥분이 사라진 걸까.
“…….”
잠을 잘 때 끌어안고 자고, 안부를 묻고, 같이 체스를 두다가 책 이야기나 하는 그런 조용한 삶을 살게 되는 걸까. 정말로?
“…….”
생각지도 않은 미래였다. 만약에 그런 미래가 온다고 해도 지금은 아니었다.
베개를 끌어안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난 만족 못 해.”
캐런은 절대 손만 잡고 자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자신이 느끼는 이 초조함이 관계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캐런은 옷장의 문을 열었다. 옷은 갈아입었지만, 역시나 캐런의 마음에 드는 옷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예쁜 것을 입고 싶었지만, 결국 있는 것은 하녀들의 단순한 검은 원피스뿐이었다. 똑같이 생긴 옷을 매일매일 갈아입는다. 거기서 거기인 음식을 먹는다.
언제쯤 새 옷이 올까. 캐런은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 싫었다. 또한 새 옷 한두 벌이 오는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었다. 옷을 살 때는, 수백 개의 옷감들을 직접 만지고 고르고, 어떤 형태의 옷을 만들지, 어떤 재봉선을 쓸 지까지 전부 고른 후에 몸에 직접 맞춰야 한다.
하이어 영주의 딸로 있을 때에도 재봉사에게서 맞춤형 옷을 입던 캐런으로서는, 자신의 몸을 재지도 않고 만드는 옷에 기대를 가지기는 힘들었다.
캐런은 옷장 문을 닫고 레이몬드를 찾아 나섰다.
식당에 있을 줄 알았지만 아직 거기에는 있지 않았다.
“이 사람이 어디로 갔나….”
캐런은 레이몬드의 서재를 지나가면서 힐끗 쳐다보았지만 그 안에도 없었다. 이른 아침이었다. 복도를 지나서 중앙 계단이 있는 홀로 향하자 사람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레이몬드였다. 캐런은 중앙의 1층부터 4층까지 탁 터진 유리에서 쏟아지는 빛을 받는 그를 보았다. 언제나처럼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는 항상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기는 했다. 단 하나만 빼고.
“레이몬드 경. 좋은 아침이에요.”
캐런의 말에 레이몬드가 얼굴을 들고 캐런을 보았다. 그러자 그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일어났습니까?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아직 아침은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거기는 왜 닦고 계세요?”
“홀은 당신이 매일 오가니까요. 깨끗한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매일 닦으시나요?”
“예.”
레이몬드는 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항상 깔끔했다.
캐런은 아침의 그가 어떤 상태인지 확인을 못 한 것이 아쉬웠다. 레이몬드는 같이 살면서도 흐트러진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첫날처럼 무리한 경우만 빼면, 레이몬드는 항상 캐런보다 먼저 일어나고 캐런보다 늦게 잠이 들었다.
“너무 열심히 하지 않으셔도 전 괜찮아요.”
“그냥 필요한 부분만 할 뿐입니다.”
어쩌면 일을 너무 해서 성욕이 사라진 걸까?
레이몬드는 혼자서 성의 관리와 청소, 남아 있는 닭과 오리에게 밥을 주는 것과 빨래, 식사까지 전부 했다. 보다 못한 캐런이 결국 거들려고 했지만, 레이몬드는 캐런이 움직이는 것조차 싫어했다. 위험하다고.
“그냥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것이 좋은 걸까?
“집안일 하는 남자가 제일 섹시해요.”
예전에 지내던 하녀들은 이상형에 대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하인들은 대부분 일을 잘 하려고 들지 않았고, 하녀들의 어머니들도 대부분 하녀였다. 캐런에게 하녀들은 은퇴 후의 여성들이 집에서 결코 쉬지 못하고 하루 종일 일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쏟아 내었다.
그래서 레이몬드같이 집안일을 자신이 하려고 드는 남자는 더없이 배려심이 넘치고 매력적이라고. 정말 다시는 없을 남자라고.
“하지만….”
하인 100명을 고용해도 남아도는 재산을 지닌 사람이 저러는 것이 매력이 넘치는 건가? 그냥 괜히 일을 만드는 것은 아니고? 캐런은 그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불안해하며 시간을 쓰는 것보다 고용인을 쓸 수 있는 일은 전부 맡기고 현재의 자신과 더 시간을 보내기를 바랐다. 돈이 있는데 쓰지 않는 것이 더 낭비였다.
“곧 끝내겠습니다.”
섹시한지도 모르겠다.
캐런은 레이몬드의 움직임을 노려보았다. 소매를 걷어붙인 팔뚝이 튼실했다. 옷차림은 평범해도 그 옷 아래는 범상치 않았다. 캐런은 저 옷 아래의 근육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미 알았다. 더 아래도.
할짝.
캐런은 혀로 입술을 핥았다.
“캐런, 무슨 일 있습니까?”
레이몬드가 바닥을 닦다가 캐런의 시선을 느끼고 멈췄다. 아침 인사를 할 때도 멈추지 않더니, 캐런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챈 모양이다.
“왜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레이몬드가 긴장된 목소리로 캐런에게 물었다. 잘못한 것이 있는 듯한 목소리였다. 물론 그가 잘못한 것이 많기는 하다. 부부의 의무를 게을리한 죄.
“레이몬드 경.”
“…예.”
“하던 것, 그만하고 이리 오세요.”
레이몬드는 쭈뼛거리다가 대걸레를 옆으로 밀어 두고 캐런에게 왔다. 캐런은 레이몬드가 계단으로 올라오는 몸짓을 봤다. 분명 흔들림 없고, 드러난 팔뚝은 근육으로 꽉 잡혀 있다. 단순한 복장임에도 몸의 비율이나 형태는 완벽했다. 군복을 입을 때 더 괜찮았던 것 같은데. 저런 작업복도 그가 입으니 괜찮았다. 레이몬드가 캐런을 몇 계단 아래서 올려다보면서 손으로 캐런의 뺨을 만졌다.
“어디 아프기라도 합니까? 열은 없는 것 같습니다만, 얼굴이 빨갛군요.”
아니다, 열이 많다.
“저랑 자요.”
“오늘 늦게 일어났잖습니까. 잔소리처럼 느껴지겠지만, 당신은 너무 잠이 많은 경향이 있습니다.”
일부러 그러는 걸까? 캐런은 레이몬드의 멱살을 잡았다. 몇 계단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레이몬드가 얼떨떨한 얼굴로 캐런에게 멱살을 잡혔다. 캐런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전 못 참아요.”
“…좀 더 노력하겠습니다. 내일이면 짐마차가 옵니다. 필요한 건….”
캐런은 레이몬드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다시 말했다.
“말 돌리지 않고 다시 말할게요. 당장 침대로 가서 하자구요.”
“…예?”
레이몬드가 굳었다.
캐런은 순간 자신이 너 나가 죽어라고 말한 건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레이몬드의 얼굴이 석상처럼 변했기 때문이다. 뭐지, 못 들을 것을 들은 듯한 저 얼굴은. 레이몬드는 처음에는 하얗게 변하더니, 그 다음은 빨갛게 변했다. 심지어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캐런… 그… 우리… 아직 결혼도….”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캐런은 기가 차서 레이몬드를 노려보았다.
“결혼을 대체 몇 번이나 해야 한 걸로 치는 거죠?”
“아, 음. 캐런, 그러니까….”
레이몬드가 캐런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말을 더듬었다.
“지금… 여기… 우리 둘밖에 없지 않잖습니까.”
“그런데요.”
“그러니까. 당신 상황도 있고… 너무… 절제 없이 지내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아직 기간도 많이 남아 있는데… 벌써부터.”
“…….”
캐런은 귀까지 벌겋게 물들인 레이몬드를 보고 자신이 천하의 음녀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장난하나. 하지만 캐런은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레이몬드를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네에….”
“캐런?”
캐런은 레이몬드를 잡았던 손을 놓았다. 맥이 풀렸다. 그렇다, 이번에도 캐런은 욕심을 참아야 하는 것이다. 탐식을 참아야 하고, 도박을 참아야 하고, 모험을 참아야 하는 것처럼.
“…알겠어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캐런은 어디를 쳐야지 레이몬드를 잘 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이내 레이몬드의 멱살을 다시 잡고서 키스했다. 화풀이하는 심정을 담은 키스였다. 뻣뻣하게 굳은 레이몬드의 턱과 열리지 않는 입술을 꽉 물어 버렸다.
“알겠으니까 먼저 가 있을게요. 아픈 건 참아요. 화풀이니까.”
떨어지고 캐런은 여전히 뻣뻣한 레이몬드를 노려보며 씹어뱉듯 말했다. 레이몬드는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여전히 혼이 나간 것 같았다.
“…예.”
“…레이몬드 경.”
캐런은 자신을 붙든 레이몬드에게 연거푸 말했다.
“…예.”
“알았다니까요. 그러니까 먼저 간다구요.”
캐런은 레이몬드를 놓았지만, 이번에는 그가 캐런을 붙들고 놓지 않았다. 캐런은 레이몬드에게 짜증이 나는 것을 참으며, 그의 손을 떼려고 했다. 솔직히 자신으로서도 민망했기 때문에, 더 이상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변명이 많은지 계속해서 놓지 않았다.
“레이몬드 경?”
레이몬드가 캐런의 눈을 보고 몇 번 숨을 쉬다가, 캐런의 얼굴을 잡고 다시 키스했다. 조금 전의 말이 무색할 정도로 거친 움직임이었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숨이 막혀서 그녀는 레이몬드의 어깨를 밀어내었다. 이것으로 참으라고 던지는 것도 아니고, 캐런은 그의 급한 움직임에 오히려 더 화가 났다.
“지금… 뭐예요.”
자신의 말과 반대되는 그 움직임을 캐런이 타박하려고 했지만, 캐런은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레이몬드의 눈이 짙은 색으로 깔려 있었다. 보는 사람이 소름 돋을 정도로 짙은 눈빛이었다.
“캐런.”
레이몬드가 캐런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캐런.”
레이몬드가 캐런을 한 번 더 불렀다.
답이 필요한 부름은 아니었다.
캐런은 후회했다.
최소한 홀에서 그에게 분노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이란, 말 그대로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대저택 전체가 침실이나 마찬가지였다. 시작은 홀의 계단에서였다.
그리고 복도에서, 창가에 걸터앉아서.
캐런이 침실로 가자고 간청을 여러 번 했지만, 레이몬드가 그것을 들은 것은 한참 후였다. 캐런은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계산조차 할 수 없었다.
“으으….”
캐런은 온몸이 타박상을 입은 것처럼 아팠다. 실로 다를 것도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캐런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을 뜨니 해가 떠 있었지만, 지금이 새벽인 것인지 아니면 오후인 것인지조차 구분이 가지 않았다.
온몸이 욱신거리고 끈적였다. 심지어 멍이 든 부분도 있었다.
“레이몬드 경.”
캐런은 작게 레이몬드를 불렀다.
“…….”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캐런은 레이몬드를 보았다. 눈이 부신지 그는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 있었다. 숨이 고른 것이 계속 잠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드디어.
레이몬드의 몸도 완전히 깨끗하지는 않았지만, 체격 차이가 워낙 심해서 그의 피부에 약간의 손톱자국이 난 것이 끝이었다. 피부까지 튼튼해서 그녀가 물어도 별 자국이 남지 않았다. 어깨를 콱 물었는데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캐런은 잇자국도 남지 않은 어깨를 보자 좀 기가 찰 지경이었다. 자신은 이렇게 온몸이 아픈데. 기껏해야 레이몬드는 등짝에 손톱자국 몇 개뿐이었다.
캐런은 자신의 옆에서 곤하게 잠든 레이몬드를 보면서 씻고 싶어졌다. 좀 놓아줬으면 좋겠다. 레이몬드의 행동은 너무 극단적이어서 쫓아가기가 힘들었다. 예전에는 안 이랬던 것 같은데.
“무거워….”
자신의 몸 위에 놓인 팔이 무거웠다.
“레이몬드 경, 팔 치워요.”
“음… 예….”
캐런은 레이몬드의 팔이 무거워서 들고 옆으로 밀어내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 역시도 피곤했던 것이다. 최소 이틀은 지났다. 그동안 식사는커녕 방 밖에도 제대로 나가지 못했다. 잠깐잠깐 생리적 필요로 씻는 것 외에는 계속 침대 안에 있었다.
“으….”
자신이 잠이 든 것인지 지쳐서 혼절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동안은 제대로 식사도 할 수 없었다. 레이몬드가 할 일이 많아서 자신에게 쏟는 시간이 적다고 생각했는데, 하루를 넘어가자 제발 다른 일을 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사람이 움직이려면 입에 무언가 들어오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레이몬드는 캐런보다 워낙 체력이 좋아서 움직이는 시간이 너무 달랐다. 캐런은 정말로 이러다가 자신이 심장마비 같은 걸로 죽지 않을까 생각했다. 남자가 하다가 죽으면 복상사라고 하던데, 여자가 죽을 수도 있던가? 복하사?
캐런은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깜빡였다. 너무 오랫동안 침대를 벗어나지 못해서 일어나고 싶었다. 목마르니 물 한 잔 달라는 사람을 물통에 집어넣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캐런은 자신의 목도 타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캐런은 물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닿지 않았다. 일어나야 했다.
“…가지 말아요.”
캐런은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거의 무섭게 느껴졌다. 뒤를 힐끗 돌아보았지만 잠꼬대였다. 드디어 그도 지쳐 잠든 것이다. 드디어. 캐런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 이런 의미로도 무섭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자연스럽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좀… 놔줘요….”
캐런은 자신의 발목을 잡는 레이몬드의 손을 발로 밀어내고는 침대를 빠져나왔다. 자신은 괴물같이 튼튼한 레이몬드와 다르게 평범한 사람의 몸을 가졌다. 이제는 정말 무리다. 캐런은 바닥을 오랜만에 혼자 밟자 비틀거렸다.
“…….”
어지럽다.
캐런은 일어나서 침대 옆의 물병에서 물을 따라 마셨다. 차가운 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캐런을 콜록대면서 자신의 목을 만지며 얼굴을 찡그렸다. 목이 아팠다. 아픈 것은 목뿐이 아니었다. 너무 무리해서 온몸이 욱신거리면서 아팠다.
그냥 나태만을 즐길 것을. 왜 괜히 안하던 짓을 해서.
생각해 보니 자신이 먼저 그렇게 요구했던 것도 처음이었던 것 같다. 레이몬드와는 잠자리가 익숙해지기 전에 죽었으니까, 항상 서툴고 수줍은 처녀의 모습만 보여 줬지.
하지만 그것이 더 편했던 것 같다. 캐런은 레이몬드가 왜 참았는지 알 것 같았다. 둘밖에 없으니 자제할 자신이 없다는 그의 말은 진심이었던 것이다.
캐런은 레이몬드가 이제까지 신혼 때 얼마나 배려를 했던 것인지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멋대로 움직이는 레이몬드는 캐런이 감당할 만한 남자가 아니었다.
심지어 캐런이 지쳐 잠드는 것조차 계속 깨워 괴롭히지 않았던가. 이 정도면 고문이다.
“…….”
잠든 것을 확인하고, 캐런은 살금살금 까치발로 방을 빠져나왔다. 내려가서 뭐든지 먹고 햇볕을 쐬고 싶었다.
“하아아….”
캐런은 부엌의 냄새나는 것들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대체 며칠이나 내내 침대에 처박혀 있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대부분은 훈제된 고기들이라 별문제 없었지만, 새 같은 것은 레이몬드가 잡은 것이기에 썩은 내가 났다.
“…내가 치워야 하나?”
캐런은 비위가 상했다. 하지만 곤히 잠든 레이몬드를 깨우고 싶지도 않았다. 같이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인지라, 캐런은 썩은 것들을 한군데에 모아 두고, 치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체를 어디다가 버려야 할지는 좀처럼 알 수가 없었다.
이것은 자신이 전에도 해 본 적이 없던 것이었다. 요리는 요리사가 하는 것이니까, 치우는 것도 담당자들이 하는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 합리화한 캐런은 이내 포기하고 구석에 쌓여 있는 토마토 중 깔끔한 것을 베어 물었다.
“…배고프다….”
캐런은 지긋지긋했던 고기를 다시 먹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역시 과일이나 야채로는 힘을 내는 데 한계가 있었다. 캐런은 토마토들을 작은 바구니에 집어넣고는 부엌에서 빠져나와 다시 자신들의 침실로 향했다. 이제는 정말로 그만하고 좀 일어나서 일상생활을 하자고 해야겠다.
요리사는 정말 있어야 했다. 그리고 잡역부를 다섯 정도라도 불러야 한다. 둘만이 있는 생활은 절제가 없고 너무 힘이 들었다. 또한 캐런은 다른 사람과도 말을 나누고 싶었다.
“두 명은 너무 적어.”
한 사람만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는데, 아니었다. 두 명은 너무 적었다. 캐런은 좀 더 사람이 많은 곳에서 살고 싶었다. 교류가 필요했다. 관계를 맺기 전에는 레이몬드와의 스킨십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했지만, 몸이 부서질 정도로 같이 밤을 보내고 나니 더욱 확실해졌다.
“…사람이 필요해.”
캐런은 사람이 필요했다. 한 명은 부족했다. 대화를 나누고 서로 웃거나 화내거나 할 사람이 더 있어야 했다.
모든 사람들을 책 속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서 거리를 두었지만, 그 의미 없다고 생각했던 인연들이 자신을 이루는 것이었다.
캐런은 새삼 자신이 항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음을 알았다.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식사를 할 때, 일을 하거나 잠이 들 때까지 언제나 하녀와 하인들이 그녀의 곁에 있었다.
레이몬드가 아무리 자신을 사랑하고 옆에서 대다수의 일을 혼자 떠맡는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너무 적었다. 그것은 레이몬드가 한 명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1년만.”
1년만 참으면 된다.
캐런은 복도를 걸었다. 그 전에 토마토 하나를 더 꺼내서 입에 물었다. 아직 토마토는 많이 남아 있으니 괜찮았다. 모자라면 다시 돌아가면 되는 일이고. 캐런은 입 안에서 터지는 과육을 느끼며 사람들을 생각했다.
분노하고, 실망하고, 괴로워도 그 수많은 사람들이 필요했다. 이셀라나, 베르딕이나, 낸시나, 보웬이나, 도나나, 엘바 백작 부인이나, 귀즈 왕세자 같은 그 수많은 사람들.
“…….”
캐런이 걷다가 메인 홀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아직도 며칠 전에 레이몬드가 치우다가 남은 대걸레와 물통이 놓여 있었다. 저것도 안 치우고 바로 여기서…. 캐런은 자신의 얼굴이 좀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진짜 너무… 응….”
아무리 그래도 너무했다. 캐런은 자신의 뺨을 문지르면서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레이몬드가 아직 자고 있을 때 이것이라도 먼저 치워야겠다. 캐런은 토마토가 든 바구니를 옆에 내려놓고 물통과 대걸레를 들었다.
“…으, 더러워.”
느긋하게 여기저기 둘러보고 나니 시간이 꽤 지난 것이 분명했다. 캐런은 지저분한 대걸레를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시간이 지나서 물기가 없이 바싹 말라 있었지만 대걸레에는 더러운 것이 잔뜩 묻어 있었다. 캐런은 물통과 대걸레를 들고 정원 쪽의 수도가 있는 곳으로 나갔다.
“정말 사람도 없는데 왜 이렇게 더럽담. 역시 두 명은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워낙 저택이 넓으니 이렇게 바로바로 더러워지지 않는가. 캐런은 투덜거리면서 먼지가 쌓인 수도를 틀어서 물통 안에 물을 넣었다. 물이 차오르기 시작하면서 안의 더러운 물을 헹궜다.
“…어머.”
뭐지 이게.
캐런은 바닥에 밀어 놓은 더러운 대걸레를 들었다. 대걸레 안에서 무엇인가 반짝이고 있었다.
“…….”
캐런이 조금만 더 어렸다면, 그러니까 한 20년 정도만 더 어렸다면. 캐런은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캐런은 이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캐런은 작게 반짝이는 그것을 들고 다른 손으로 물통을 살펴보았다.
더러웠다.
캐런은 이 자국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서 갈색으로 변한 이것이 무엇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
캐런은 손바닥에 놓인 그 물건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생각지도 않은 물건이었다.
누군가의 손톱이었다.
생각하지 말자.
어떻게 돌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비척비척 어떻게든 방으로 돌아왔다. 캐런은 다시 레이몬드의 곁에 누웠다.
짐승의 피일까? 레이몬드는 언제나 고기를 손질하니까. 양이라거나, 소라거나. 레이몬드가 그럴 리가 없는데. 대체 왜 홀로 피가 떨어지는 짐승을 가지고 온단 말인가?
피뿐이 아니었다. 왜 손톱이 거기에 있단 말인가. 캐런은 사람의 손톱과 비슷한 손톱을 가진 동물이 없을까 생각했다.
양, 소, 말, 닭….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캐런은 사람의 손톱을 닮은 동물을 생각할 수 없었다.
무엇일까. 아니 누구일까.
“캐런.”
“…네, 레이몬드 경.”
캐런은 순간 비명을 지를 뻔했다. 레이몬드가 쉰 목소리로 캐런에게 물었다.
“언제 일어났습니까?”
캐런은 자연스럽게 웃어야 했다. 다행히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만 일어나요, 레이몬드.”
“…예.”
“그리고 있잖아요…. 우리 이제 식사라도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알겠습니다.”
레이몬드가 캐런의 손을 잡았다.
“옆에 있으니 좋군요.”
“…….”
캐런은 그에게서 손을 빼내지 못했다. 하지만 더 이상 묻지도 못했다.
왜 핏자국을 지우고 있었나요?
누구의 손톱인가요?
거짓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물어야 해. 하지만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아. 실망하게 될까 봐 무서워. 예의를 지켜야 하는데.
캐런은 레이몬드의 얼굴이 다시 자신의 입술 위로 내려오는 것을 느끼고 눈을 감았다.
레이몬드의 사랑은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물을 수 없었다.
누구의 손톱일까?
캐런은 레이몬드가 나간 방에 혼자 앉아서 자신이 주운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반짝인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그냥 평범한 손톱 조각이었다. 그저 햇빛과 물에 반짝였던 것이었다. 도나의 잘린 손을 봤을 때처럼 무언가를 추측하기란 힘들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구분하기 힘들었다. 심지어 구정물에 빠져 있던 것이었다.
손톱의 크기를 보아하니 엄지는 아니었고, 남자의 약지나 여자의 검지 정도로 보였다. 끝은 상해 있었으나 그걸로는 노동계급의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톱니 같은 자국이 있었다. 물에 씻겨서 살점이나 피 같은 것은 붙어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이 손톱은 부러진 것이 아니라, 뽑힌 것이었다.
아팠겠군.
캐런은 손톱을 들어 햇빛에 비추어 보았지만 역시 그것으로는 더 무엇을 유추하기란 어려웠다. 자신은 결국 나이만 먹었고 지식이 없어, 이 작은 손톱 조각으로 무언가를 유추하기란 한계가 있었다.
“…누굴까.”
캐런은 다시 침대에 푹, 몸을 파묻었다. 아직 레이몬드의 온기가 남아 있는 침대였다. 그리고 그는 지금 부엌에서 캐런과 자신을 위한 식사를 만들고 있는 중이리라.
캐런은 레이몬드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의심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세상에 서로밖에 없다. 단 두 명만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레이몬드는 캐런이 사람을 죽일 때조차도 캐런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때의 그는 캐런을 자신의 옆에 두고 감시할 사람이었지, ‘우리 같이 사람이나 죽이면서 인생을 보내 볼까요?’ 같은 제안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레이몬드는 이제 캐런보다도 나이가 더 많았다. 너무 많아져 버렸다.
“…늙다리.”
“그거 설마 절 말하는 겁니까?”
캐런은 순간 비명을 한 번 더 지를 뻔했다. 레이몬드가 찌푸린 얼굴로 캐런을 내려다보았다.
“제가 늙다리라고 해도 당신도 나이는 흠, 아무튼 우리 서로 나이로 상처 주지는 맙시다. 서로 같은 처지에.”
레이몬드가 웃으면서 캐런에게 손을 내밀었다. 캐런이 그 손을 잡자 그녀를 잡아당겨 일으켰다.
“식사는 여기서 하시겠습니까?”
캐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내려갈게요…. 여기도 좀… 치워야 할 것 같아서요.”
침대에서 먹고 싶지는 않았다. 침대 시트부터 갈아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레이몬드가 캐런의 눈빛을 보자 머쓱해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은 정말로 평범한 사람 같았다.
캐런은 고기를 내려다보았다. 레이몬드는 항상 고기만을 내놓았다. 이번에도 고기였다.
고기.
캐런은 끔찍한 상상이 떠올라서 눈을 감았다. 상상이 지나치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눈앞의 이 고기는 소고기다. 자신이 익숙히 아는 맛이다. 사람 고기는… 사람 고기는 어떤 맛이지? 자신은 사람의 맛이 어떤지 아나? 사실 자신은 눈앞에 사람의 고기가 나와도 구별할 수 없을 것이다.
“…캐런, 그만 먹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른 것이 많으니 그런 얼굴로 먹지 않아도 됩니다.”
레이몬드가 캐런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캐런은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고개를 들자 그녀의 기사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에는 염려가 가득했다. 캐런은 자신이 긴장으로 굳어 있던 것을 알았다.
레이몬드가 일어나서 캐런의 컵에 물을 따랐다. 따뜻한 물이었다. 컵 안에 있던 마른 레몬 조각이 물에 불어나는 것을 보다가, 컵을 들어 마셨다. 따뜻한 물이 목으로 넘어가자 한결 나아졌다.
“역시 몸이 좋지 않군요.”
“좋지는… 않죠.”
캐런이 힘겹게 대답했다.
당신이 청소하던 것 때문에 심란하다고.
캐런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러자 무겁게 그녀의 위를 누르던 체증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만 좀 괴롭혀요.”
“그… 예, 죄송합니다.”
캐런은 레이몬드가 고개를 푹 숙이고 고기를 써는 것을 보고 그가 어떻게 들었는지 알았지만, 착각을 고칠 힘도 들지 않았다. 자신은 정말 며칠 동안 꽤나 괴롭힘을 당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육체적인 것을 넘어서 정신적인 것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레이몬드가 자신에게 이상한 것을 먹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도 캐런은 고기에 손을 대지 않고 아까 자신이 먹던 토마토에 다시 손을 가져갔다.
“…….”
아삭거리는 붉은 알 너머로 액체가 흐르자 또다시 기분 나쁜 상상이 이어졌다. 이 정도면 중증이다. 하지만 고기보다는 낫다. 캐런은 토마토를 계속 씹었다.
캐런은 자신이 왜 이렇게 놀란 것인지 더 알 수 없었다.
왜 자신은 이렇게 혼란스러운 것일까?
“어제 당신이 잠든 사이에, 짐마차가 왔다 갔습니다.”
레이몬드의 말에 그녀는 입에 대고 있던 토마토를 떼었다.
“그런데 왜 이것만 내놓았어요?”
“어차피 지금 제대로 못 먹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도 선택지가 지금 줄어든 건 별개거든요?”
캐런이 레이몬드를 노려보아도 레이몬드는 그냥 어깨를 으쓱이며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고기가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얼굴이 아까부터 너무 창백해 보였으니까요.”
“과자도 있나요?”
“예.”
“지금 당장 줘요.”
“단 것을 먹으면 입맛이 떨어집니다. 식사를 끝난 뒤에, 그리고 소화가 다 된 이후에 드리겠습니다.”
캐런은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단단한 토마토를 손에 쥐었다. 레이몬드를 노려봤다.
“제 유모도 하지 않을 소리를 하시는 거 아시죠? 지금 제가 식사까지 제한을 받아야 하나요?”
“그저 제안입니다.”
“통제하려고 드는 거겠죠.”
“그건 아닙니다. 단지….”
레이몬드는 말을 멈췄다. 그리고 결국 한숨 한 번을 쉬면서 캐런이 던지는 토마토를 잡았다.
“맞았어야 했습니까?”
“레이몬드 경이 잡을 거 알고 던진 거니까 아니에요.”
레이몬드가 토마토를 식탁 위에 올려놓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당신에게 불쌍한 척하기 위해서 맞을 걸 그랬군요. 아무튼, 알겠습니다.”
레이몬드는 두 손을 들고 항복했다.
그 모습은 너무나 만만해 보였다. 캐런을 다른 사람과 만나게 하지 못하게 하는 남자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캐런은 그래서 토마토를 하나 더 던졌다. 역시 레이몬드는 맞아 주지 않았다.
한참의 조용한 식사가 결국 끝이 났고, 레이몬드는 캐런에게 간식을 가져다주었다.
민트색으로 만들어진 긴 소파에 앉아서 캐런은 레이몬드가 건넨 간식을 보았다. 초콜릿이 박힌 비스킷과 사과파이가 있었다.
“랜스가 만든 것이군요.”
캐런의 얼굴이 환해졌다. 테스 대저택의 파티쉐였던 랜스의 솜씨는 보는 순간 알아볼 수 있었다. 레이몬드는 그리 간식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캐런이 그를 불러 칭찬하면 랜스는 더더욱 솜씨를 부렸다. 때문에 날이 갈수록 살을 신경 써야 했다.
잔뜩 얹은 아몬드 가루와 바삭하게 구운 파이의 겉 부분은 약간 탄 것 같았지만 캐런은 그렇게 한 것이 더 좋았다.
입에 넣자 단맛이 퍼졌다. 캐런은 눈을 감고 단 맛을 음미했다. 엄청나게 고급스러운 것은 아니더라도 오랫동안 간식에 허덕인 캐런에게는 충분했다. 고기가 아닌 이런 것을 먹고 싶었다. 캐런이 한참 혀로 간식을 즐기면서 행복에 잠겨 있자 레이몬드가 물었다.
“만족합니까?”
그것은 아니었다. 캐런은 눈을 뜨고 레이몬드를 보았다.
“조금은요.”
사람이란 참으로 단순해서, 욕구가 충족되자 긴장과 우울함이 사라졌다. 변한 것은 없건만 몸이 강제로 행복하게 변했다. 사과파이 하나에 웃음이 배어 나오는 것이 스스로 웃기면서도 미소를 참을 수가 없었다. 쓴 웃음도, 비웃음도 아닌 만족스러운 미소였다.
“하나 드시겠어요?”
“고맙습니다.”
“어차피 레이몬드 경이 가져온 건데요.”
레이몬드가 캐런이 건네는 파이를 입으로 받아먹었다. 레이몬드가 씹는 것을 보며 캐런이 레이몬드에게 물었다.
“랜스는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시내에서 빵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비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은퇴라도 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
“아직 은퇴할 나이는 아니니까요. 랜스는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나.”
캐런은 의외의 말에 놀랐다. 랜스는 레이몬드보다도 나이가 많았다. 결혼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나이였다. 자식이 두셋 있어야 평범한 나이인데.
“몰랐군요. 뭐,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만.”
“하긴 그런 것까지 말하기에는 별로 친하지는 않았네요. 설마 제논도 그런가요?”
“…아뇨, 제논은… 예전에 결혼했습니다.”
“제가 모르는 게 많네요.”
캐런은 지금 없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아쉬움이 복받쳤다. 자신이 원하던 것은 이런 생활이 아니었다는 것이 새삼 실감이 났기 때문이었다. 캐런은 레이몬드에게 말했다.
“…레이몬드 경, 역시 사람이 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캐런이 묻자 레이몬드는 약간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캐런, 당신이 알다시피… 당신이 처음 죽은 것은, 이 집 안에서였습니다.”
“…그랬었나요.”
“예.”
뭐였더라. 캐런은 눈을 굴리면서 두 번째 과자에 손을 가져갔다. 입 안에 단맛이 더 퍼지니, 기억이 났다. 처음에는 독주였지.
“1년 후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 위험한 것은 가능한 배제하고 싶습니다.”
레이몬드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일어났다. 캐런은 그가 다시 일을 하러 가는 것을 알았다. 며칠간 서로 지나치게 탐닉한 탓에 결국 일은 몇 배로 늘어난 채 미뤄지게 된 것이었다.
그는 지금 무슨 일을 받아서 하고 있는 걸까. 궁금했다. 레이몬드와 캐런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서로 중요한 것은 계속 빗나가고 있었다. 1년 뒤를 기다리면서 그들은 계속해서 현재에 유예하고 있었다.
참아야 해. 묻지 말자.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니까.
“조금만 더 참아 줬으면 좋겠군요. 1년 뒤에는 어디든지, 무엇이든지 합시다.”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궁금했다. 참으려고 했는데. 레이몬드가 일어서고, 몸을 돌려서 나갔다. 그의 집무실에서 또다시 캐런에게 말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가 있는 곳은 집무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캐런이 알지 못하는 또 다른 공간에서 무엇인가를 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하는 일이 그 어떤 것이든 캐런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알 필요는 없다. 그가 캐런에게 위해를 입힐 리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래서 누구의 손톱을 뽑았나요?”
레이몬드는 걸음을 멈췄다. 캐런은 그것을 물은 것을 후회했다. 레이몬드가 몸을 돌렸다. 캐런은 고개를 숙였다. 그를 보는 것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화를 낼까? 아니면 난처해할까? 캐런은 그에게 묻지 않으려고 했던 것을 떠올린다. 하지만 도무지 묻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캐런.”
레이몬드가 캐런의 앞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캐런의 숙인 고개 아래에서 캐런을 올려다봤다. 캐런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그 얼굴은 너무나도 온화하고 다정해서 더럽거나 잔인한 것과는 아무 연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계속 불편했던 겁니까?”
“…….”
캐런의 주먹을 폈다. 그 안에는 캐런이 발견한 손톱이 있었다. 레이몬드는 그것을 캐런에게서 가져가 자신의 앞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레이몬드는 캐런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필요해서 그런 거니 무서워할 것 없습니다.”
“…필요해서요?”
너무나 명쾌한 대답이었다. 레이몬드는 화를 내지도 난처해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그가 할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예. 가능한 많은 정보를 받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당신이 무서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는 캐런의 어깨를 한 번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레이몬드는 일어났다.
“그러니까 그런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더럽고 지저분한 일은 자신이 할 테니까.
레이몬드는 자신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리면서 펜치를 집어 들었다.
“…젠장.”
캐런에게 더러운 것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는데, 자신이 실수하고 말았다. 레이몬드는 스스로에게 한심함을 느끼며 펜치로 눈앞의 형체를 툭툭 두들겼다.
이미 죽은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필요한 것은 다 얻어 내었으니 별문제는 없었다. 레이몬드는 캐런이 사람을 죽인다고 하더라도 얼마나 어설픈지 잘 알았다. 그 연약한 팔로 해 봤자 제대로 못했겠지. 이런 거친 일은 남편의 몫이다. 레이몬드는 자신의 일을 마저 하기 위해 눈앞의 넝마를 치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