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3. The Others (29/31)

03. The Others


 

캐런은 레이몬드를 사랑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레이몬드 외의 모든 사람과 차단되기 시작하면서 캐런은 생각을 할 시간이 많아졌다.

완벽한 세상에 둘만 있는 것은 사랑일까?

1년 뒤에는 정말로 달라질까?

소설 속의 세계란 없다.

하지만 캐런은 아직도 그 안에 있는 것 같았다.

다만 소설 안에 갇힌 사람이 두 명이 되었을 뿐이었다.

계기는 손톱이었다.

레이몬드는 그 손톱의 주인이 누군지 말하지 않았다. 더 캐물으면 말해 줄 것 같았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캐런이 손톱을 발견했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없었다. 레이몬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물음을 받아, 필요한 일이라면서 잘라내어 버렸다.

그 뒤로 더 이상 캐런은 어떤 이상한 점도 발견할 수 없었고 레이몬드도 티를 내지 않았다. 그것을 말하지 않아도 대화는 부드럽게 흘렀고 풍경은 평화로웠다.

묻어 두면 되는 일들은 많았다.

지금 그들은 막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었고 1년 뒤에는 또다시 죽음으로 갈라질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괜한 분쟁으로 서로 불편해지고 싶지 않았다. 캐런도 그러했고, 레이몬드도 그랬다.

시간은 언제나 그렇듯 빠른지 느린지 알 수 없게 흘러갔다. 초여름이 다가왔다. 테스 대저택의 장미는 이셀라가 자랑하던 것처럼 엄청나게 피어났다.

빛나는 여름이었다.

흐드러지게 핀 장미들은 집주인의 무관심 속에서도 여전히 아름다웠고, 죽은 여주인을 추억하듯이 여전히 다양한 품종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흐드러지게 핀 종이 유독 눈에 띄었다. 겉 꽃잎은 하얗고 속은 붉은 종이었다. 처음 보는 종이었다. 멀리서 보면 종이로 만든 화관 같은 아름다움이었다. 선명한 붉은색이 아닌 연분홍빛의 꽃잎과 온화한 하얀 꽃잎의 조화가 퍽이나 아름다웠다. 캐런은 그 장미 중 하나를 꺾었다. 그리고 장미에 붙어 있는 작은 벌레 하나를 떨어내었다.

장미가 아름다워도 역시 관리하는 사람이 없으니 바로 티가 났다. 벌레에 간간히 잎이 먹힌 자국이 눈에 띄었으며, 잡초도 많이 섞여 있었다. 가지들도 다듬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약간의 야생성 또한 멋이다. 아직은 나쁘지 않았다.

벌레가 있고 옷은 촌스럽고 화장품도 적지만, 그래도 이곳에는 평화가 있었다. 그러니까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캐런은 계속해서 그녀의 마음을 갉고 있는 사람 하나를 떠올렸다.

생각하지 말자고 고개를 흔들어도 계속 떠오르는 그 얼굴은 장미 정원의 벌레처럼 계속해서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셀라 에반스는 아직도 실종 상태일까?

캐런은 이셀라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싫어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소설 속 사람에게 화를 내 봤자 뭘 한단 말인가? 그것이 그녀의 신조였다.

누군가에게 아버지가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날릴 때에도, 하녀를 부리는 입장에서 하녀가 될 때에도, 차가 식었다는 이유로 뺨을 맞을 때도, 중년 남자들의 끈적한 손을 견뎌야 할 때도. 밤낮으로 일해서 걷다가 쓰러질 때도.

괜찮다. 괜찮다.

미워하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는다. 두려워하지 않는다. 슬퍼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책 속의 일. 시간이 지나면 자신은 결국 끝을 맞이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것 하나만을 찾았다.

되뇐다. 자신은 후회하지 않는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또다시 전부 살아났다. 도나는 다시 일을 잘 못하는 세탁 하녀고, 톰은 토머스에게 두들겨 맞겠지.

하지만 캐런은 왜 이셀라가 이렇게 신경 쓰이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로맨스 소설의 여주인공이라면, 그녀는 조연이 아닌가.

끝까지 여주인공에게 폐를 끼치다가 추하게 퇴장하는 조연. 그에 어울리는 엔딩.

“제 목걸이가 마음에 드시나요?”

“당신은 지금 내 하녀야!”

“감히… 네가… 감히….”

이셀라는 캐런을 질투했다. 그것은 노골적이었다. 레이몬드에게서 시선을 독차지하려는 것부터, 사교계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 그리고 그냥 움직이면서 웃는 것까지.

캐런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외모는 결국 그걸로 끝이었다. 사람들의 관심을 잠깐 끄는 것으로 끝이었다.

캐런에게는 돈이 없었고, 힘이 있는 부모가 없었다. 이셀라가 머리채를 잡고 내동댕이쳐도 다른 하녀들이 후에 불쌍하다며 손을 잡아 주는 것이 끝이었고, 다른 귀족들이 혀를 차는 것으로 끝이었다.

베르딕의 양딸이 되었어도 그것은 바뀌지 않았다. 베르딕은 친딸이 아닌 그녀에게는 가차 없이 채찍질을 했고, 이셀라가 눈을 뜨자 캐런을 결국 죽음으로 몰고 갔다.

캐런에게 남은 것은 그냥 레이몬드의 동정심 하나였다. 그것 때문에 베르딕은 캐런을 수십 번도 더 죽였다.

캐런은 손톱을 생각했다. 자신의 손톱을 내려다봤다. 잘 알 수 없었다. 누군가는 손톱을 뽑혔다. 레이몬드가 손톱을 뽑았다. 정보를 얻기 위해서. 어쩌면 분풀이로.

이셀라는 실종되었다.

손톱의 주인은 이셀라일까?

하지만 그것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레이몬드가 캐런을 사랑해서, 필요해서, 누군가의 손톱을 뽑았다 한들 캐런이 레이몬드를 어떻게 비난한단 말인가? 그것에 왜 놀란단 말인가?

하지만 캐런은 그 손톱의 주인이 이셀라라는 생각이 이상하게도 불편했다.

그 생각이 왜 이렇게 불편할까.

책 속이기에 괜찮다.

다시 살아나기에 괜찮다.

자신도 몇 번이고 죽었으니까 괜찮다.

하지만 이셀라는 한 번도 캐런을 죽이지 않았다.

“아이도 죄가 있어요. 캐런. 모든 사람은 부모의 영향을 받아요. 유산을 받고 이름을 받는데 왜 범죄는 안 받는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런 자 밑에서 컸으면 뻔해요. 저 애도 범죄자가 될 거예요.”

이셀라는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면서 말했다. 캐런은 그때 그 생각을 했다. 같은 상황이 자신에게 닥쳐도 그녀는 납득할까?

이셀라의 아버지인 베르딕 에반스가 캐런 하이어를 여러 번 죽였다.

그래서 레이몬드가 이셀라를 죽였을까? 이셀라는 자신의 죽음에 납득할까?

물론 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레이몬드만이 유일한 사람이고, 그것으로 충분하리라 생각했건만, 이셀라 에반스가 레이몬드에게 고문을 받고 죽었다는 상상을 하니 이다지도 불편했다.

자신이 이셀라를 죽였다면 기분이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베르딕의 앞에서 죽였다면 더욱 희열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레이몬드가 이셀라를 고문해 죽였다는 가정은 이다지도 불편하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캐런은 계속해서 생각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단둘뿐인 이 저택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생각뿐이니까.

그리고 미숙한 결론을 내렸다.

자신이 책 속이라고 치부했지만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제 진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자신도 사람이고 이셀라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셀라는, 결국 자신을 단 한 번도 죽이지 않은 드문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하아.”

하지만 캐런은 한숨을 쉬면서 눈을 감았다. 도무지 시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이 누구를 동정한단 말인가.

이것도 결국은 필요 없는 싸구려 동정, 생각조차 할 필요 없는 혼자만의 유희거리. 사치스러운 잉여 감정.

캐런은 탄식했다.

자신은 역시 이셀라와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 모양이다.

하지만 그 고민은 아주 짧았다. 이번의 생에서도 평화는 있었지만 결국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고 사건은 터지기 마련이었다.

조롱거리는 새소리가 들렸다. 장미의 향이 풍겼다. 자신이 들고 있던 시집은 옆에 떨어져 있었다.

“…….”

캐런은 자신이 정원의 벤치에 늘어져 있다가 낮잠이 든 것을 깨달았다. 정신이 가물거리다가 눈이 뜨였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여전히 레이몬드였다. 레이몬드의 금빛 머리가 석양에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얌전히 있지 않았다.

캐런은 자신이 잠들어서 깨우지 못하고 저러는 것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레이몬드는 너무 이상했다.

‘…왜 저래?’

레이몬드는 캐런의 시선을 알아채지 못했는지 여전히 다른 곳에 정신을 팔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을 하는 것은 또 아니었다. 말을 거는 것도 아니고, 지켜보는 것도 아니었다. 레이몬드는 캐런 주변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산만하게 걷고 있었다.

뭔가 그녀에게 중요한 말을 해야 하는데 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보는 사람이 더 불안했다.

“흠, 흠.”

캐런은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여전히 부산스러운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어지간히 생각에 깊이 잠겨 있는 모양이었다.

“레이몬드 경.”

“…캐런, 일어났습니까?”

레이몬드가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표정은 어색했고 손가락도 꿈틀거렸다.

“저녁 식사를 태우기라도 하셨나요?”

“예?”

“아니면 옷을 또 찢어 버리셨나요?”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정신이 없어 보이는지 궁금하네요. 그리고 단추 잘못 끼워져 있어요.”

레이몬드가 투덜거렸다.

“뭐 어차피 둘밖에 없지 않습니까…. 죄송합니다.”

캐런은 레이몬드에게 손짓했다. 레이몬드가 벤치로 다가왔다. 캐런은 똑바로 앉아서 레이몬드의 단추를 풀고 다시 끼웠다.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정신이 너무 없어 보여서 그래요. 무슨 일이 있나요?”

“…아무래도 도저히 미룰 수 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무슨 일이지.

캐런은 약간 두근거리는 호기심이 이는 것을 느꼈다. 미룬다고 하는 것, 레이몬드가 저렇게 불안해하는 것. 그것은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었다.

“왜 말 안 하고 그렇게 안절부절못하시나요? 그냥 말해 봐요.”

캐런이 레이몬드를 보자 레이몬드가 눈썹을 약간 찡그리면서 대답했다. 자신이 이 말을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캐런, 총은 어느 정도로 다룰 수 있습니까?”

생각지 않은 질문이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캐런은 약간 당황했지만 대답했다.

“그냥… 권총에 총알을 넣고 장전하는 정도는 알아요.”

“라이플을 줄 테니 사람 머리를 저택 3층에서 정원까지 저격할 수 있습니까?”

“…가능하겠어요?”

캐런이 레이몬드를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진지했다. 레이몬드는 자신의 턱을 만지며 다시 물었다.

“그럼 도끼가 있습니다.”

“없는데요.”

하지만 레이몬드는 손으로 긴 도끼를 허공에 그리면서 계속 말을 했다.

“도끼가 있다고 가정하고, 음, 저 정도는 아니더라도 제논 정도의… 일반 성인 남성이 당신에게 달려든다고 하면 도끼로 목을 칠 수 있겠습니까?”

“그 남자를 누가 묶어 놓거나 술에 취해서 제대로 몸을 못 가누는 상태라면 가능하겠네요.”

“…귀즈 왕세자 전하는 어떻게 죽였습니까?”

캐런은 ‘넌 할 수 있어!’ 같은 얼굴의 레이몬드에게 기가 차서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푹 찔렀다. 정신 좀 차리라고.

“도나가 도와줬어요. 그리고 다른 일 하는 뒤에서 사람을 치는 것과 제게 달려드는 사람을 제압하는 건 전혀 다르잖아요. 왜 이러세요? 더 잘 아시면서.”

레이몬드가 자신의 이마를 짓눌렀다.

자신 스스로도 멍청한 소리를 연달아 늘어놓은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수류탄을 던지는 건 쉽습니다.”

“…….”

아직 제대로 못 깨달은 모양이다.

캐런은 더 말하기도 귀찮아져서 레이몬드를 빤히 쳐다보았다. 침묵이 이어지자 그제야 레이몬드가 깍지를 끼고 허리를 숙였다. 표정이 어두웠다.

“…제가 좀 늙어서 정신이 없는 모양입니다.”

“아니, 다행이네요. 레이몬드 경. 대체 왜 이러시는 건데요?”

“…아무래도 캐런, 당신이 혼자 있어야 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어느새 시간이 그렇게 되었다. 캐런은 레이몬드가 왜 저렇게 안절부절못하는지 깨달았다. 캐런은 레이몬드 없이 이 저택에 있어야 했다. 그런 시간이 되었다. 3개월이 지났다.

레이몬드가 일을 하기 위해 떠나야 하는 날이 된 것이었다.


 

레이몬드는 손에 수류탄을 들고서 열성적으로 설명했다. 요약하자면 핀을 뽑고 던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비슷한 무게의 장식물을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우선 이것을 던지는 것부터 시험해 봅시다. 집 안은 위험하니까요.”

캐런은 물끄러미 그것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중에 수류탄을 던져서 산불이 나면 그건 누가 끄나요?”

“제가….”

레이몬드는 이내 그것이 불가능한 것을 알고 입을 다물었다.

결국 캐런이 쓸 만한 것은 그가 쓰던 것과 비슷한 권총 하나가 끝이었다. 레이몬드는 캐런에게 권총을 주면서 영 기분이 좋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역시 불안하군요. 산적이나 짐승이 습격하면 별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고용인들이 없는 건 안 된다고 했잖아요.”

“…고용인들은 또 어떻게 믿습니까.”

인생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피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그것은 레이몬드라도 마찬가지다. 반복되기 전의 인과들이 쌓여서 현재의 일들을 만들어 낸다. 레이몬드가 은퇴한다고 하더라도 그 전부터 약속된 일들이나 미래의 일들이 현재의 일을 강요할 것이다. 레이몬드는 이 순간 캐런을 떠날 수밖에 없다. 귀즈 왕세자가 캐런에게 접근할 때도 일을 나가야 했던 것처럼.

손도끼를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휘두를 수 있는가에 대해 한참을 듣고, 라이플을 어떻게 장전하고 어떻게 포복 전진을 하는지에 대해 한참을 들었지만, 캐런이 보기에는 아무래도 무리였다.

“지금 며칠 뒤에 떠날 거면서 이런 게 얼마나 효과가 있겠어요? 왜 이제까지는 아무 말 안 했으면서.”

“하루 만에 돌아올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일정이 변했나요?”

“예, 목표물이 전에 있던 곳과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그런가요.”

레이몬드와 캐런은 정원과 홀에서 한참을 씨름하다가 결국 지쳐서 응접실에서 차 한 잔을 마시기로 했다.

“그냥 당신을 데려가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그것은 더 위험할 것 같더군요.”

“절요?”

레이몬드는 그냥 가정이라며 어깨를 한 번 으쓱이며 가볍게 말했다. 캐런은 헛소리를 하는 레이몬드에게 뭐라 반박할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찻물이 뜨거웠기 때문에 그냥 얌전히 마셨다. 피곤해서 차의 향도 잘 느껴지지도 않았다.

“당신이 최소한 제논 정도의 체력과 체격만 갖추고 있다면 같이 가겠지만.”

“…레이몬드 경. 제논은 남자 중에서도 체격이 좋은 편이거든요?”

“의미 없는 가정이라는 건 압니다. 더군다나 당신은 살 쪄 봤자 그리 커지지는 않더군요.”

레이몬드가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는 얼굴로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아… 그것도… 기억하고 있었네요….”

그냥 좀 잊지.

캐런은 살이 오동통하게 올라왔던 언젠가를 생각하며 얼굴을 붉혔다. 열심히 찌웠지만 그리 마음에 들던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왜 근육은 키워 보지 않았습니까? 약한 것보다는 몸 선이 굵은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하긴 1년뿐이니 무리긴 하겠지만, 나중에 한번 본격적으로 몸을 단련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레이몬드의 말에 캐런은 팔뚝이 지금 자신의 허리만 한 모습을 상상했다.

“전 싫어요.”

캐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캐런. 육체가 튼튼하면 어딜 가도 무시당하지 않습니다. 확실히 편합니다.”

“그건 당신이 남자니까 그런 거구요. 제가 강해져 봤자 어디다 쓰는데요? 그리고 제가 이제 와서 키나 근육이 당신처럼 클 수도 없잖아요.”

“죽을 확률이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레이몬드 경, 재미없는 농담 그만하시구요.”

“전 언제나 진지합니다.”

“그만하라구요.”

캐런이 레이몬드의 옆구리를 세게 꼬집자 레이몬드가 으윽, 하는 소리를 내고 멈췄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도 무리인 것을 아는지 실없이 한 번 웃고, 한숨을 쉬었다.

“확실히 불안하군요. 이제까지 당신이 이 기간에 한 번도 위험에 안 처한 적이 없으니.”

“그래 봤자 대부분 일 좀 한 게 끝이에요. 그때는… 저도 좀 과격하게 움직였으니 그 반동이라 생각하구요.”

캐런은 1년 후에 죽었지만, 그 전에는 죽지 않았다. 죽을 정도의 위기에 처하더라도 죽지 않았다. 117년 이후에 뭔가의 법칙이 깨져서 전에도 죽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캐런은 무리하지 않는다면 전처럼 1년 전까지는 그럭저럭 살 것 같았다.

“별일 없을 거예요.”

사실 이제는 죽고 다시 시작하더라도 그리 크게 무섭지도 않았다. 레이몬드가 기억하기 때문이다. 다시 시작하더라도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기에,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을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

“뭐, 어차피 제가 죽어도 다시 시작할 텐데요.”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십시오.”

“그래도요. 너무 무서워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이번뿐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는데 뭘 그렇게 초조해하세요. 죽어도 다시 살 텐데.”

레이몬드와 캐런에게 기회는 많았다. 캐런이 몇 번 죽어도 레이몬드가 그것을 전부 기억하듯이.

“그러고 보니 레이몬드 경, 당신도 이젠 죽는 거 별로 무섭지 않겠네요.”

“예?”

“예전에는 무서워했잖아요.”

“…그랬습니까?”

“네.”

레이몬드는 약간 어리둥절해 보였다. 캐런은 약하게 웃었다.

“가끔씩 잘 때 벌떡벌떡 일어나서 무서워했던 거 기억하거든요?”

“…그랬군요.”

레이몬드는 정말 옛날을 더듬는 것처럼 눈가를 약하게 찡그렸다.

다시 대화가 끊기고 침묵이 감돌았다. 캐런은 죽음을 너무 가볍게 대화에 올렸던 것에 약간 후회했다. 최근의 연속된 짧은 죽음은, 정작 죽은 자신에게는 우습기까지 한 희극이었지만 그에게는 한 번의 죽음이 수십 년의 인생 반복이었을 것이다.

어두운 얼굴을 보지 않으려면, 이번에도 죽지 않도록 노력해야겠지. 캐런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캐런보다 레이몬드인 것 같았다. 죽을 사람보다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이 더 괴롭다.

먼저 다시 대화를 시작한 것은 레이몬드였다.

“우선 덫은 숲과 입구에 전부 설치해 두겠습니다.”

“괜찮네요. 그런데 그동안 저도 나가지 못하나요?”

“제대로 다 알려 줄 테니 잘 기억하고 계십시오.”

“…알겠어요.”

캐런이 한숨을 쉬자 레이몬드가 일어서서 캐런의 뒷목을 끌어당겼다. 레이몬드의 입술이 살짝 달래듯 닿았다 떨어졌다.

“차부터 마저 마시고.”

“잠깐만요.”

레이몬드의 숨이 살짝 거칠어졌다. 입술에서 차 맛이 났다. 하지만 찻잔 안의 차보다 좀 더 단 맛이 나는 것 같다. 분명 같은 차인데. 캐런은 레이몬드를 더 당겼다. 혀가 섞이고, 호흡이 섞였다.

스킨십은 이제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없는 동안 진짜 심심하겠네. 캐런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레이몬드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이 휘어졌다. 반짝이는 진한 신록의 눈동자가 마음에 들었다. 마지막의 마지막에나 가끔 보던 표정이었다.

레이몬드가 얼굴을 조금 떼고 말했다.

“수도에 들렀다가 올 텐데, 옷을 맞춰서 가져오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그래 봤자 기성복인데요.”

거기서 거기인 옷은 별로 기대되지 않았다. 캐런의 볼멘소리에 레이몬드가 달래듯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제가 나이가 많잖습니까.”

“네.”

“몇 십 년 뒤에 유행할 옷을 가장 먼저 맞춰 가지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꽤 재밌을 것 같았다. 캐런은 레이몬드의 목에 팔을 둘렀다.

이틀 뒤면 레이몬드 없이 혼자서 지내야 할 텐데. 캐런은 개울가에 발을 적시면서 무엇을 할지 고민했다.

저택을 뒤지면서 레이몬드가 한 짓을 뒤져 볼까? 아니면 레이몬드가 있을 때는 하지 못한 원초적 게으름을 피워 볼까? 간식을 잔뜩 쌓아 두고 침대 밖을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누워 있는 것이다. 그것도 꽤 좋을 것 같다.

아무리 오래 지낸 사이라 하더라도 캐런은 매일 씻고 단장하고 움직이는 생활은 해야 했다. 이참에 레이몬드가 없을 때는 아예 극도로 게으름을 피우는 것도 괜찮을지 모른다. 정말로 혼자서만 있는 거니까.

“…아, 안 되겠네.”

최소한 가축들에게 먹이는 줘야 했다. 청소는 하지 않더라도 해야 할 것은 있었다. 역시 목숨을 걸고서라도 사용인을 두는 편이 좋았을까. 캐런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때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아이, 참.”

캐런은 머리에 얹어 두었던 모자가 물 위로 떨어진 것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새로 받은 것이라 그냥 버리기에는 아까웠다. 캐런은 저택을 보았다.

“…….”

레이몬드는 이틀 뒤에 나갈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캐런은 개울을 보았다. 그리 깊지는 않았다. 끽해야 자신의 허리 아래.

그리고 자신이 입은 것은 사용인들이 입는 거친 옷이었다. 옷은 모자보다 훨씬 싸구려였다. 캐런은 일어나서 물속으로 들어갔다.

“…….”

그리고 모자를 잡았다.

캐런은 그것을 들어서 물을 툭툭 털어 내었다. 역시 물은 그리 깊지 않았다. 그리고 개울 밖으로 나가는 그 순간.

“…흡!”

캐런은 개울 바닥의 돌에 미끄러져 물에 빠졌다. 물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수면 위에 떨어진 나뭇잎, 꽃잎들이 어지러이 떠다녔다.

캐런은 자세를 다시 세우려고 했다. 그리 당황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돌에 미끄러졌고, 발버둥 칠수록 치마가 무겁게 느껴졌다.

아, 이런.

캐런은 자신이 입은 겉옷 안의 속치마들이 새로 주문한 것이란 것을 깨달았다. 안에 입어서 잊었지만 레이스가 겹겹이 있는 것이라 무게가 꽤 나가는 것이었다.

설마 이번에는 이렇게 죽나?

캐런은 스스로도 좀 기가 찼다. 뭐 이렇게 어이없이 죽나. 하긴 언젠가는 접시 물에 코 박고 죽은 적도 있었다. 이럴 수도 있긴 하지. 사고사는 무난하지 않은가. 어쩌다가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는 일이다.

캐런은 점점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물속에서 보는 하늘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숨이 막히는데도 이상하게 괴롭지는 않았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캐런은 하늘을 보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괜찮았다.

이번에는 잘 지냈다. 레이몬드가 그녀를 기억하고, 그녀가 죽어도 다시 찾아올 것이다. 캐런은 그래서 물속에서 찾아올 죽음을 기다렸다.

하지만 레이몬드가 슬퍼할 것은 걱정이 되었다.

그것 봐요, 레이몬드 경.

사용인들 두는 게 더 낫다니까. 다음에는 꼭 그렇게 말해야지.

하지만 캐런의 소망은 바로 실천되지 않았다. 누군가가 물에 빠져 있던 캐런을 강하게 들어 올렸던 것이다.

촤아아아악!

캐런은 그 팔에 매달려서 급격하게 자신을 다시 맞이하는 세상을 반겼다. 다시 맞은 수면 밖은 그녀에게 고통을 안겼다. 끌어올려진 캐런은 물가에 엎드려서 기침했다.

“콜록, 콜록! …우욱!”

물이 속에서 올라왔다. 눈물인지 물인지 알 수 없는 액체가 눈에서 흘렀다.

“젠장…. 미쳤나? 어? 지금 뭐 하는 거요?”

캐런은 자신을 끌어올린 사람을 보았다. 그리고 눈을 비볐다. 레이몬드가 아니었다.

“제대로 정신 차리고 다니시오.”

처음 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익숙했다. 그리고 절대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절대 이런 행동을 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캐런은 목이 졸리는 것 같았다. 물을 다 토해 낸 줄 알았는데도 계속해서 목에 무언가가 걸린 것 같았다.

“감사… 합니다.”

베르딕 에반스였다.


 

캐런은 처음에는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다. 이내 그를 알아보고 두 번 놀랐다. 베르딕 에반스를 자신이 못 알아봤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의 모습이 예전 같지 않음에 놀랐다. 사람이 항상 똑같을 수는 없지만 베르딕 에반스는 100년 동안 언제나 똑같았다.

그는 항상 값비싼 정장을 입었고, 머리는 기름을 적당히 발라 깔끔하게 넘겼으며, 콧수염 또한 항상 가지런하게 다듬었다. 턱수염은 깔끔하게 밀어내어 나이답지 않게 날카롭고 단정한 턱 선을 자랑하였고, 딱 맞는 정장은 약간은 살집이 두툼한 몸을 풍채 좋게 만들었다.

그리고 외알 안경과 장갑, 지팡이와 매끈한 목소리까지 항상 그럴듯했다. 그는 귀족보다도 더 귀족 같은 인상의 남자였다. 그가 늘 하고 다니는 몇 개의 반지들과 목걸이들 때문에 심도 있게 사람을 보는 사람들은 천박하다 비웃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머리부터 발끝까지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캐런의 목을 따러 달려올 때조차 정장을 갖춰 입던 남자였다. 자신의 하나뿐인 딸인 이셀라가 쓰러져 있을 때조차 그는 단정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그때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장신구는 하나도 없었다. 얼굴에는 관리되지 않은 수염이 듬성듬성 나 있었다. 무엇보다 인상이 전혀 달라졌다. 머리카락이 물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했지만, 그것뿐이 아니었다.

몸은 풍채가 좋은 것이 아니라 부은 것처럼 보였고, 언제나 미끈하고 고른 색을 지니던 피부는 얼룩져 베르딕은 그 나이의 중년 같았다.

관리되지 않은 수염을 따라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모습은 상당히 초라해 보였다. 베르딕은 인상을 쓰며 당황한 캐런에게 화를 냈다.

“이런, 젠장…. 별로 깊지도 않은데, 왜 물에 처박혀서 그러고 있던 거요? 미쳤소?”

베르딕은 물에 흠뻑 젖은 자신의 웃옷을 벗어 걸레 짜듯 물을 짜내며 화를 냈다. 입에서 물이 튀어 더러워 보였다. 베르딕이. 그가 캐런에게 버럭버럭 화를 내는 모습은 익숙했지만, 그때와 내용이 전혀 달랐다.

“지금 어린 나이에 죽고 싶어서 환장한 거요?”

“아가씨, 그 나이면 분수에 맞게 사는 법을 알아야 하지 않겠소? 오늘 저녁은 굶으시오.”

“대체 왜 물속에 들어가 있던 거요?”

“이셀라의 비위를 잘 맞추라 하지 않았나?”

캐런은 베르딕이 그녀에게 화를 내던 내용을 기억했다. 그가 늘 하던 말이었으니까. 그에게 캐런은 이셀라의 하녀였고, 그의 것을 훔쳐 간 도둑년이었다.

“…대체 왜 거기 있었냐고 묻지 않았소?”

베르딕이 재차 묻자 캐런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캐런은 자신이 계속 대꾸하지 않고 멍청하게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물이 별로 깊지도 않았는데.”

베르딕이 캐런이 무서워 겁낸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어조를 낮췄다. 그가 태도를 저렇게 바꾸는 것조차 생소한 모습이었다. 사람이 역시 100년간 살다 보면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되기 마련인가.

하지만 사람을 죽였던 117년째의 그때도 그는 변하지 않았었는데. 그가 이렇게까지 변했다는 건 역시.

“신사 분께…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지금 해야 하는 것은 과거의 회상이 아니었다. 캐런은 고함에 주눅이 든 모습을 흉내 내며 작게 대답했다. 캐런은 베르딕을 알은체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그것보다는 우선 가능한 모르는 척, 미루는 편을 택했다. 최대한 그와 엮이지 않아야 한다.

“물에 떨어진 모자를… 건지려다가 그만… 물때에 미끄러졌어요.”

고함 소리를 들으니 정말로 주눅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캐런은 차가운 물에서 나와서인지 몸이 약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여름이라 하더라도 물은 차가웠다.

“치마가 엉켜서 제대로 나올 수가 없었어요. 신사 분의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왜 베르딕이 여기에 있는가? 물론 캐런은 그 답을 짐작했다. 이번에 그가 이런 것은 처음이지만 그가 여기 있는 이유를 유추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그가 왜 저렇게 비참한 얼굴로 여기에 있는지.

캐런이 베르딕을 찾아간 것은 몇 개월 전이었다.

베르딕과 이셀라가 올 시기가 지났는데 오지 않았던 것. 그리고 그가 손해를 보면서까지 사업을 다 접어 버린 것. 레이몬드가 단순히 이셀라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 아니리라.

이셀라 에반스를 아직 찾지 못했구나.

그래서 여기로 왔구나.

이셀라.

베르딕 에반스는 처음에는, 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물속에서 너울거리는 치맛자락을 보자마자 그런 생각을 했다. 이셀라일지도 모른다고. 자신의 딸이 물속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움직이지도 않는 다리였지만 바로 물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하지만 아니었다.

물가로 달려가 잡아 일으키면서 이셀라가 아닌 것을 알자 맥이 풀렸다. 딸 나이 또래의 여자였지만 머리는 금발인 이셀라와 다르게 선명한 붉은 머리였다.

딸이 아니다.

콜록거리며 물을 토하는 젊은 여자를 보며 베르딕은 화가 났다. 처음에 베르딕이 여자의 머리칼을 보고 나서 든 감정은 분노였다. 이미 물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 들어온 힘이 관성적으로 그녀를 물 밖으로 건져 냈지만, 베르딕은 숨을 쉬고 물을 토하는 여자를 보며 어떠한 기쁨도 느낄 수 없었다.

왜 넌 내 딸이 아닌데 여기서 이렇게 있어서.

베르딕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눈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그냥 개울의 물인지 자신의 눈물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운 것은 너무나 옛날의 일이었기에 그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 어떤 근육의 움직임인지 예민하게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눈물을 흘리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베르딕 에반스의 하나뿐인 딸인 이셀라 에반스가 사라지고 시간이 흘렀다.

어느새 계절이 바뀌었다.

어느 날, 꽃도 피지 않는 차가운 봄날. 갑자기 딸이 사라졌다.

이셀라는 어떤 말도, 흔적도 남기지 않고 세상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이셀라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그렇게 세상은 이셀라가 처음부터 마치 없었던 것처럼 변했다.

하지만 이셀라가 사라진 이유를 베르딕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셀라는 왜 사라졌지?

언제나처럼 똑같은 날이었다. 피아노 교사가 이셀라를 가르쳤고, 이셀라는 오후에 시내로 나가겠다고 그를 졸라 시녀와 같이 외출했다. 언제나와 같은 평범한 일상이었다.

베르딕은 그날 귀즈 왕세자에게 빌려준 돈을 받을 가능성을 생각하느라 고민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조차 먹지 않고 방 안에 틀어박혀서 서류와 법안 등을 곱씹으며 변호사들과 상의하고 있었다.

“이셀라는 아직도 잠자고 있는 건가?”

“주, 주인님… 아가씨는 아직….”

“아직도 일어나지 않다니, 지나치게 게으르군. 어서 깨워 데리고 오도록.”

“그것이….”

시녀가 벌벌 떨면서 베르딕에게 고백했다.

“아가씨는 아직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말도 없이 어디로 놀러 갔나?”

베르딕은 딸이 사고를 쳤다는 생각에 눈썹을 찌푸렸다. 자신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어디로 놀러갔단 말인가? 안 그래도 최근 사업이 지나치게 꼬여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이셀라가 돌아오면 확실히 버릇을 들여야지.

“그런데 왜 넌 같이 가지 않고. 누구와 갔나?”

“주인님, 아가씨가…. 혼자서 사라지셨어요.”

베르딕은 머리가 하얗게 변한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왜 말을 하지 않았지? 왜 제때 말을 하지 않았지? 이 멍청한 것들은 왜 우리 집에 있는 거지? 그리고 이셀라는 지금.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죠?”

아내의 싸늘한 목소리에 베르딕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셀라의 시녀가 배를 잡고 웅크리고 쓰러져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는 거품이 일고 있었다. 베르딕은 욱신거리는 구둣발로 한 번 더 찼다.

“꺄아아악!”

“에반스!”

분노는 천천히 해도 된다. 베르딕은 씨근거리는 숨을 들이쉬었다.

첫째 날에는 걱정과 분노가 동시에 일어났다.

둘째 날에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셋째 날부터 베르딕은 사람을 풀기 시작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셀라가 어디로 갔을까.

베르딕은 사람을 풀었고, 그와 동시에 기다렸다. 이셀라는 베르딕 에반스의 딸이다. 베르딕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많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베르딕이 가지고 있는 것 또한 많았다. 베르딕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셀라를 데려간 사람이 그에게 연락할 거라 예상했다.

배상이냐 원한이냐.

베르딕은 상당한 액수의 현금을 우선 준비했다. 베르딕의 딸인 이셀라가 납치된 것은 처음이었지만, 베르딕은 이런 사례를 몇 번이고 봐 왔다.

베르딕과 같은 사람들은 원한을 잘 사는 법이니까.

베르딕과 같은 사람들은 자신의 경호에 항상 신경을 써야 했다. 떠돌이 민족인 그들에겐 현금과 보석만이 그들을 지켜 줄 무기였다. 가족을 납치하고 친구를 납치하고 법으로 압박하고 재산을 앗아 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그들은 증오했다.

이셀라를 데려간 사람이 누구든 그는 돈과 같이 피 값을 받을 것이다.

베르딕은 맹세했다.

하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다.

베르딕은 기다렸다.

연락이 오지 않을 리가 없다. 베르딕이 가지고 있는 재산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셀라는 베르딕의 외동딸이었다. 베르딕의 재산은 이셀라에게 전부 이어질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 베르딕은 기다렸다. 믿고 기다렸다. 그것은 사람의 욕망에 대한 믿음이었다. 베르딕의 재산은 결코, 결코.

하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다. 베르딕은 충혈된 눈으로 이셀라의 방문을 걸어 잠그게 했다. 한 달이 지나도 연락이 없다는 것은 더 이상 협상을 할 여지가 없다는 뜻일 테니까. 베르딕은 사람을 더 많이 풀었다.

그리고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서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움직여도 이셀라를 찾을 수는 없었다.

돈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원한이겠지.

베르딕은 어느 순간부터는 이셀라의 시체를 기다렸다. 원한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것을 원할 것이다. 자신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려고 할 것이다. 복수심을 가지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하다.

하지만 연락은 아무 곳에서도, 정말 아무 곳에서도 오지 않았다. 아니, 연락 자체는 많이 왔다. 하지만 전부 돈을 노린 자들의 거짓말이었다. 진짜 범인에게서는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 진짜 증거는 하나도 없었다.

이셀라를 찾기 위해 인력과 돈과 시간을 낭비하기 시작하면서 베르딕의 사업 또한 축소되기 시작했다. 베르딕이 직접 잡지 않는 사업은 점점 허술한 구석을 보이면서 무너지기 시작했고, 이상할 정도로 사고가 많이 일어났다. 광산 폭발 사고도 늘어나기 시작했고, 동종 업계의 경쟁자들은 점점 늘어났다. 베르딕은 손해를 줄이기 위해 많은 사업들을 중단했다.

그리고 베르딕은 3개월간 딸을 찾으러 다녔고, 이제는 그마저도 접으려고 했다.

할 만큼 했다. 이제는 포기할 때가 되었다고. 베르딕은 닫힌 딸의 방문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베르딕은 아버지로서보다 사업가로서의 자신을 더 강하게 인지했다. 자신의 정체성은 돈을 쫓는 개에 더 어울린다고. 이셀라를 위해 할 만큼 했다고. 안 되는 것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당신 앞으로 이것이 왔어요.”

하지만 아내가 내민 물건은. 베르딕은 소포 꾸러미를 보고 한참 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열어야 한다.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도저히 열 수 없었다.

소포에는 이셀라 에반스라고 쓰여 있었다.

왜 이제 와서.


 

짧으면 짧은 기간, 길면 긴 기간. 5개월간 베르딕은 미칠 것 같은 시간을 지냈다. 베르딕이 슬퍼하고, 분노하고, 체념하기까지 그만큼이 걸렸다. 하지만 베르딕이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바로 이때에 기다렸다는 듯이 도착한 물건이었다.

무엇을 원할까. 어떤 것을 원할까.

베르딕은 덜덜 떨며 그 소포를 열었다.

“…….”

그리고 그 안에는 머리카락이 들어 있었다.

이셀라의 머리색과 똑같은 약간 부스스한, 레몬 빛의 머리칼.

그리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베르딕은 그 소포를 역추적했다. 소포는 결국 문서가 남기 마련이었다. 범인은 몇 번을 꼬아서 보냈지만 돈이면 결국 연관된 사람이 나왔다. 그리고 모든 소포와 편지는 중부 지역에 모였다가 다시 재발송되는데, 베르딕은 그곳을 좀 더 뒤지기 위해 그 지역의 귀족을 방문해야 했다.

얄궂게도 이셀라의 전 약혼자였던 레이몬드 세이어테스, 그의 형이 있는 영지였다.

“…이상하군.”

베르딕은 자신의 턱을 괴고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전부 우연일까? 세이어테스 영주는 자신과 약간 껄끄러운 관계에 있었다. 그리고 그의 동생은 자신의 딸과 약혼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직접적인 증거는 없었다. 그냥 소포는 그곳을 거쳤을 뿐이었다. 하지만 베르딕은 껄끄러운 감각을 느꼈다. 그 감각은 오랫동안 이성보다 더 적절히 그를 도왔던 직감이었다.

그리고 베르딕은 빨간 머리의 여자를 보고 그 껄끄러운 감각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것을 느꼈다.

“자네, 캐런 하이어로군?”

캐런이 뒤돌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베르딕이 그 순간 캐런의 얼굴을 보았다면, 그는 그 얼굴에서 수많은 것을 읽었을 테니까.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아요.”

“아니, 맞는 것 같은데.”

“몇 개월 전 하이어 영주의 대리로 와서 계약을 파기하지 않았소? 얼굴을 보니 맞는 것 같은데.”

베르딕은 단호했다. 어떤 것이 더 좋을까? 캐런은 단 한 번의 만남, 그것도 정신없이 있을 때 잠깐 만난 것을 그가 기억할 줄은 몰랐다. 자신의 얼굴이 한번 보면 잊기 힘든 얼굴이기는 했지만. 캐런은 머리를 굴렸다. 어쩌지?

‘네, 제가 캐런 하이어예요. 안녕하세요, 베르딕 씨. 그동안 딸은 찾으셨나요? 저런, 못 찾으셨다니 유감을 표할게요.’ 이런 식으로 말할까?

거짓말은 없다. 베르딕의 예민함 앞에서는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거짓말을 하면 할수록 허점은 드러나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캐런은 베르딕의 얼굴을 보자마자 자신의 머리가 바닥을 굴러가는 장면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레이몬드가 아무래도 이셀라를 어떻게 한 것 같아.’

그것이 문제였다.

캐런은 자신이 발견한 손톱을 생각했다. 이셀라와 베르딕은 캐런과 레이몬드의 적이었다. 캐런은 레이몬드가 누군가를 죽였다거나 고문했다고 상상하면 그 상대로 제일 먼저 베르딕과 이셀라를 떠올렸다. 그 손톱의 주인이 이셀라일 수도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측이었다. 베르딕이 그 사실을 알면 레이몬드의 약혼녀인 캐런은 이번에도 죽을 것이다.

지금의 캐런은 베르딕과 어떠한 악연도 없다. 지금은. 그것이 문제였다. 베르딕과 지금 악연이 없다고 해서 앞으로도 없다고 보장할 수 있는가? 아니다. 캐런은 자신의 목을 몇 번이고 내려치던 그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는 몇 번이고 캐런을 죽였다. 그와 캐런은 아무리 생각해도 악연이었다. 이번에는 어떻게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언제 이야기가 다시 원래의 악연으로 돌아갈지 모른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거요?”

레이몬드와 그렇고 그런 사이거든요.

캐런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레이몬드와 캐런의 사이를 고백하면, 그 후가 문제였다. 레이몬드는 베르딕이 이셀라에게 준 남자였다. 레이몬드와 이셀라와의 관계가 끝났으니 그 후에 레이몬드의 약혼녀인 캐런에게도 불똥이 튈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이렇게 죽는 걸까?

캐런은 자신의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변했고,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것 또한 변하리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캐런은 어쩌면 이번에도 같은 인생이 또 반복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

캐런은 입술을 살짝 핥았다.

“저… 저택에서 일하고 있어요.”

“당신이 그런 일을 할 계급은 아닐 텐데.”

아니, 많이 했는데. 캐런은 베르딕이 시켜서 했던 갖가지 일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것이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캐런은 결심했다.

“저… 저는 신사분이… 무슨 말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제 일은….”

“당신은 캐런 하이어가 아니오?”

“전… 당신을 몰라요. 그러니까 전… 제 이름은….”

“그러니까, 당신 이름을 묻지 않소?”

“흑….”

캐런은 울먹였다.

베르딕은 백치처럼 행동하는 캐런을 보면서 짜증이 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했다.

“전… 으윽…. 흑….”

“…하아.”

작게 ‘미친’이라고 읊조리는 욕까지 들린다. 황당하게 들릴지 몰라도 이것이 최선이었다. 베르딕은 지금 어떠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베르딕에게 캐런이 당장 중요한 인물도 아니다. 레이몬드와 우선 말을 맞추어야 한다.

캐런은 한참을 훌쩍이다가 말했다.

“지금 레이몬드 씨는 저택에 계시니… 만나 보시겠어요?”

“…좋소. 그렇게 하도록 하지.”

베르딕은 약간은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캐런은 물을 뚝뚝 흘리면서 저택으로 베르딕을 안내했다. 물이 마르기 시작하면서 몸이 차가워졌다. 빨리 들어가서 레이몬드에게 베르딕을 넘기고 옷부터 갈아입어야겠다.

“…있는 것은, 확실한 거요?”

“예.”

베르딕이 캐런의 뒤를 급하게 따라왔다. 그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정원과, 잡풀이 나 있는 돌계단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군.”

베르딕이 캐런의 뒤에서 말했다.

“네…. 레이몬드 씨가 바쁘셔서요. 가능한 사용인들을 줄이셨답니다.”

“지금 몇이나 있소?”

“저 하나만 있습니다.”

“…이상하군.”

“사람이 워낙 없어서 큰 문제는 없답니다.”

“…하.”

베르딕은 점점 더 의심을 깊게 품은 것 같았다. 하긴 자신이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캐런은 그나마 자신이 하녀복을 입고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여기서 만약에 자신이 하녀복이 아닌 고급스러운 드레스 같은 것을 입고 있었다면 상황은 더더욱 복잡하게 흘러갔을 것이다.

“그럼 레이몬드 경이 아가씨를 정식으로 고용한 것이오?”

“…잘… 모르겠습니다.”

“아가씨 본인의 문제인데 그것을 모른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종이에 서명한 기억은 없습니다.”

“그럼 하녀라고 할 수도 없군. 그냥 노예지.”

애초에 캐런은 고용된 것도 아니었으니까. 캐런은 가능한 백치처럼 보이기 위해서 노력했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관심을 최대한 돌려야 한다. 베르딕은 더더욱 기가 찬다는 듯이 꼬치꼬치 캐물었지만, 최대한 대답을 하지 않으려면 이 수밖에 없었다.

“이 대저택에서 성인 남녀 둘이 지낸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그러게. 캐런은 걸으면서 동감했다. 하지만 그들의 상황은 특수했다.

“성인 남녀가, 이런 곳에서 계약서도 없이? 그것도… 제정신이 아니군.”

레이몬드가 좀 그렇긴 하죠. 캐런은 동감하려다가 정색하고 반박했다.

“레이몬드 씨는 제 은인이세요. 나쁘게 말하지 말아주세요.”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은 이렇게 일을 처리하지 않소. 온정을 베풀려거든 제대로 베풀어 집까지 찾아 데려다 줘야지. 그냥 집에 두다니….”

베르딕이 레이몬드를 비난해? 그것도 도덕으로. 캐런은 기가 차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셀라가 사라지고 나니 별별 간섭을 다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레이몬드 경과 언제부터 알고 지냈소? 혹시 이상한 일이나… 다른 여자가 있지는 않았소?”

“…저는 아는 것이 없어요.”

하지만 캐런은 베르딕을 안다. 그가 휘두르는 도끼의 감촉 또한.

‘죽여 버릴까?’

캐런은 입구에 있는 함정을 생각했다. 레이몬드는 저택에 함정을 많이 설치했다. 베르딕과 캐런은 단 한 번도 악연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이미 만나 버린 김에 그를 이야기에서 배제하는 것도 방법이리라. 베르딕이 자신을 죽이기 전에 자신이 먼저 그를 죽여 버려야 한다.

할 수 있다.

자신이 두려워서 못 했을 뿐이다. 기회가 없어서 못 했을 뿐이다. 캐런은 주변을 본다. 베르딕은 자신을 뒤쫓아 오고 있다. 풍채 좋은 중년이지만, 육탄전이 아닌 함정을 이용하면 상대적으로 약한 자신이라도 성공할지 모른다. 이번에는 복수를 성공할 수도 있다.

캐런은 자신의 눈앞의 대문을 보았다. 숨을 살짝 들이쉬었다. 해 보자.

“…대문이 제대로 열리지 않는데, 도와주시겠어요?”

캐런은 뒤를 돌아서 베르딕에게 물었다.

대문에는 함정이 설치되어 있다. 사자가 물고 있는 문고리를 당기면 열리는 방식이지만, 문고리 안쪽에 있는 매듭을 풀지 않고 그대로 당겨서 열면 밧줄이 방문하는 사람의 몸을 낚아채 올린다. 운이 좋으면 한 번에 베르딕의 목을 매달 수도 있으리라.

“이 문을 당겨 주시면 되는데요.”

“…참 나.”

베르딕은 인상을 찌푸린다. 자신이 할 일이 아니니까. 캐런은 베르딕이 문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환호했다. 이번에는 좀 떨렸지만 처음부터 확실하게 죽여 버리면 자신도 레이몬드도 안전해질 것이다.

두근.

베르딕이 문 앞에 왔다. 목의 스카프를 고쳐 맸다. 캐런은 그대로 그의 목을 졸라 버리는 상상을 했다. 할 수 있다. 베르딕을 처리하고, 시체를 찢어 내 버리자. 청소는 깨끗이 해야겠지.

지난 생에서는 못했잖아. 자신이 살려면 무엇보다.

하지만 베르딕은 문고리에 손을 대지는 않았다. 캐런은 기다리다가 조바심이 나서 말을 걸었다. 왜 가만히 있는 거지? 뭔가를 눈치챈 것일까? 그럴 리가 없는데?

“이것만 당기시면….”

“린드! 이리 와서 문을 열게!”

베르딕이 뒤돌아서 소리쳤다. 뭐야? 캐런이 당황해서 베르딕이 외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젠장, 캐런은 욕을 내뱉었다. 멀리서 베르딕의 비서인 린드가 오고 있었다.

“베르딕 씨! 천천히 같이 가는… 헉, 것이.”

“자네는 너무 느려 터졌어!”

베르딕은 고함을 지르면서 비서에게 손짓했다. 사람이 더 있었다. 심지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캐런이 긴장해서 베르딕 말고 다른 사람이 멀리서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젠장. 캐런은 짓씹듯이 말했다.

“손님이… 많으시군요.”

베르딕은 시계를 보고 찡그리며 대답했다.

“여기까지 오는데 혼자 올 리가 없지 않은가. 시계에 물이 찼군, 젠장. 이게 얼마짜린데… 린드, 문을 열게. 지금 테스 대저택에는 정말로 사용인들이 거의 없는 모양이야.”

“이 아가씨는 누굽니까?”

뒤늦게 도착한 뚱뚱한 비서가 캐런을 쳐다보았다.

“물에 빠졌길래 건졌어. 레이몬드의 하녀라 하더군.”

“문을 열어 주세요.”

캐런이 베르딕의 말을 끊었다. 베르딕이 턱짓으로 문짝을 가리켰다. 역시 그는 문을 여는 고생조차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캐런은 린드 뒤의 사람들을 세었다. 둘이 아니었다. 하나, 둘, 셋…. 어림잡아 여섯은 되었다. 역시 그 정도의 사람이 혼자서 오고갈 리는 없었다. 캐런은 급하게 문고리에 손을 대는 비서에게 말을 걸었다.

“문고리 안쪽에 있는 매듭을 풀고 여셔야 해요.”

“…좀 특이한 방식이군요.”

“그렇군. 굉장히… 전과는 달라졌는걸, 전에는 이런 것은 하지 않았는데.”

“머무는 사람이 적어서요.”

베르딕의 말에 캐런이 대답했다. 변명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캐런은 손에 땀이 약간 배는 것을 느꼈다.

끼이이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베르딕이 뒤에서 안을 보며 천천히 말했다.

“집 안도 전과는 많이 다른 것 같은데.”

베르딕을 한 번에 죽이는 것은 실패다. 그가 혼자 오길 기대하다니, 자신 역시 초조한 모양이었다. 어떻게 할 수 없을까. 캐런은 가능한 태연한 얼굴로 베르딕에게 말을 걸었다.

“신사 분.”

“베르딕 에반스요. 아가씨가 언제까지 모르는 척할지는 모르겠지만.”

“아…. 네… 베르딕 씨. 여기서 기다리고 계시면 레이몬드 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좋소. 기다리겠소.”

베르딕이 홀에 서서 대답했다. 함정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사람이 많다면 많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있다. 캐런은 두 손을 모으고 물었다. 정말 하녀인 것처럼.

“차를 가져다드릴까요?”


 

“부탁합니다.”

비서가 흔쾌히 대답했다. 그는 캐런의 얼굴을 대놓고 쳐다보면서 환하게 웃었다. 캐런도 마주 보고 웃으며 베르딕에게도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베르딕은 웃지 않았다. 불쾌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됐소.”

“베르딕 씨.”

“린드, 자네는 가만히 있게. 빨리 아가씨는 레이몬드 경에게 알리기부터 하시오.”

“네에… 알겠습니다.”

“베르딕 씨, 너무 그러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지금 레이몬드 세이어테스 경에게 통보도 하지 않고 찾아온 것인데….”

“린드.”

비서는 입을 다물었다. 캐런은 발걸음을 돌렸다. 어서 레이몬드와 상의해야 한다. 어떻게 할지 생각해야 한다. 레이몬드라면 셋이나 넷 정도면 어렵지 않게 죽여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죽여야 한다. 왜 레이몬드가 가장 먼저 베르딕부터 처리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었다. 화를 내야지.

이상하다.

베르딕은 붉은 머리의 여자를 노려보았다.

남작 가문에 단둘이서? 그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분명 무엇인가를 감추고 있는 것임이 분명했다. 베르딕 에반스는 주먹을 쥐었다. 의심이 스멀스멀 기어오르고 있었다.

자신의 딸이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레이몬드 세이어테스는 그 당시에 솔리아 백작 부인이 주최하는 학술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자. 하지 말자. 아직 모르는 일이다.

“베르딕 에반스 씨 아니십니까. 오랜만입니다.”

레이몬드 세이어테스가 옅은 웃음을 띠고 계단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똑똑.

물에 흠뻑 젖은 캐런이 베르딕을 홀에 세워 두고 레이몬드의 방문을 두들겼을 때였다. 캐런은 밑에서 기다리고 있는 베르딕을 생각하면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똑.

“예.”

캐런이 문을 열자 레이몬드가 가방과 총을 손질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틀 뒤면 레이몬드는 일을 하기 위해 집을 비워야 했다. 몇 번을 다시 살아도 그의 일은 역시나 저런 것이다. 레이몬드가 캐런을 보고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안색이 변했다. 그녀의 온몸이 물에 젖어 있었던 것이다.

“캐런, 왜 물에.”

캐런은 레이몬드의 말을 잘랐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캐런은 대화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베르딕이 바로 아래에 있다. 시간이 없다.

“레이몬드 경, 손님이 왔어요.”

“누구입니까?”

“베르딕 에반스 씨가 왔어요. 온 이유는 아직 말하지 않았지만, 당신을 찾아온 것이라 생각해요.”

레이몬드의 눈이 바로 침착하게 변했다. 그녀가 물에 젖었다고 걱정을 하는 것은 나중의 일이다. 레이몬드는 자신아 챙기던 가방과 짐을 한번 내려다보고, 다시 캐런에게 물었다.

“그렇군요. 나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캐런, 당신은 옷을 갈아입는 것이 좋겠습니다.”

레이몬드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다행인지 아닌지 캐런은 알 수 없었다.

“예, 그리고 절 기억하고 있어요.”

“…그렇군요. 당신과 이미 만난 적이 있었습니까?”

“네, 제가 집이 아닌 그 탑에서 당신과 만난 건, 아버지의 대리로 계약을 파기하기 위해 떠난 길이었으니까요.”

레이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은 그리 밝지는 않았지만 어둡지도 않았다. 그냥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얼굴이었다. 분명 레이몬드는 일을 하러 간다고 했지 베르딕에 관해서는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얼굴은 갑자기 닥친 사고에 당황하는 얼굴이 아니어서 캐런은 약간 초조했다.

“베르딕 씨가 왔어요.”

캐런은 다시 반복했다. 그가 왔다는 것을 다시 확실하게 깨닫게 하기 위해서. 레이몬드는 지나치게 침착해서 캐런은 오히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어째서?

“예, 캐런. 제가 내려가겠습니다. 당신과 이미 얼굴을 텄다는 것은 의외지만…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가 왜 여기에 왔을까요.”

하지만 캐런은 레이몬드처럼 담담할 수 없었다. 캐런은 레이몬드의 여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당신은 그렇게 멀쩡하죠? 캐런은 레이몬드가 거울 앞에서 자신의 옷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을 보며 당혹감을 느꼈다.

베르딕은 이제까지 캐런을 수십 번도 더 죽였다. 베르딕이 캐런 앞에 나타났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캐런은 입 안이 마르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베르딕이 자신과 연이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레이몬드가 자신을 기억하고, 베르딕과는 완전히 연이 끊어졌다고. 하지만 아니었다. 그리고 캐런은 손톱을 기억한다. 이셀라의 실종 때문에 당황하던 사람들을 기억한다. 초췌해진 베르딕을 본다. 레이몬드가 이셀라를. 그랬다면 그것은 캐런의 죽음을 앞당기는 일이 아닐까. 하지만 레이몬드는 침착해 보였다.

“압니다. 왜 왔는지도 알 법하군요. 하지만 당신이 신경 쓸 정도의 일은 아닙니다. 음, 어쩔까요. 당신을 알아봤다고 해도 전 지금 당신을 외부에 보낼 생각은 없습니다.”

“우선 계속 못 알아본다고 우겼어요. 하지만 전혀 믿지 않아요.”

“…일단 가명을 대고 기억 상실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믿겠어요?”

캐런은 기억상실 같은 편리한 편명을 베르딕이 믿을 것 같지 않았다.

“믿지 않더라도 별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앞으로는 제발 조심했으면 좋겠군요. 그것보다 당신이 들어왔을 때 놀랐습니다.”

레이몬드가 물을 뚝뚝 흘리는 캐런을 보았을 때, 그는 순식간에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하지만 캐런이 베르딕에 대해 이야기하자 오히려 침착해졌고, 당황스러움이 사라진 듯했다. 레이몬드는 거울을 보면서 옷매무새를 정리하기까지 했다.

“캐런, 왜 젖었습니까.”

“개울물에 빠졌어요.”

덜컹.

레이몬드가 자신의 옷을 정리하는 것을 그만두고 캐런에게 다가왔다. 중요한 것은 그것뿐인 것처럼.

“…수영이라도 즐긴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캐런의 어깨를 꽉 잡았다.

“분명, 제가 위험한 곳에는… 가지… 말라고.”

레이몬드는 말을 하다가 이를 악물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베르딕이 아니었다. 하지만 베르딕이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레이몬드가 이성을 붙들고 있게 했다. 캐런은 베르딕이 없었다면 그가 어떤 말을 할지 약간 무서웠다. 레이몬드의 얼굴은 그만큼 심각했다.

“다치지 않아서 다행입니다만, 앞으로는 정원에 나가는 것도 혼자 나가는 것은 삼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역시 아무래도 안 되겠군요. 제가 없는 동안에는 더더욱. 반드시 집 안에만 있어야 합니다. 베르딕은… 사실 지금부터 안 나가는 것이 좋겠지만. 그냥 하녀라고 둘러대십시오.”

“레이몬드 경.”

“베르딕에 관해서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옷부터 갈아입어요.”

레이몬드는 캐런이 옷을 갈아입게 하면서,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그러고는 마저 가방을 챙기고, 침대 아래로 내려 두었다.

“오랜만입니다, 베르딕 에반스 씨.”

베르딕은 레이몬드를 보며 알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눈앞의 레이몬드는 분명 자신이 이제까지 보아 왔던 젊은 청년이었지만, 태도나 눈빛이나 목소리가 이상하게 거슬렸다.

‘왜지?’

베르딕은 사람을 꿰뚫어 보는 데 익숙했다.

베르딕은 레이몬드가 아주 어렸을 적, 자신의 가슴팍 아래에 있을 때부터 그를 보아왔다. 그는 딸이 원한 인형 같은 남자였다. 지나치게 유능하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렇다고 해도 젊은이 특유의 치기어린 반항감은 언제나 눈에서 이글거렸다. 매력적이었지만 그만큼 그의 약점이 되기도 하는 태도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레이몬드는 이상하게… 거슬렸다. 베르딕은 자신이 느끼는 그 생소함을 무엇이라 표현할지 몰랐다.

“물에 젖으셨군요. 춥지 않으십니까?”

“신경 쓸 것 없소.”

베르딕은 대답하고 약간 후회했다. 방금 전에는 자신이 저 하녀를 구하는 선행을 베풀었다고 말했어야 했다. 레이몬드의 승인을 받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닌가. 하지만 레이몬드의 시선이 이상스레 불쾌했다. 저택에 들어오면서, 아니 저 붉은 머리 여자를 보면서부터 느꼈던 감각이었다.

“캘리, 인원에 맞추어 차를 내주면 고맙겠습니다.”

레이몬드가 캐런을 쳐다보면서 지시했다. 부르러 간다더니 저렇게 입을 맞춘 모양이다. 베르딕은 웃기지도 않은 짓거리를 하는 그들을 한심한 얼굴로 보았다. 캐런에서 캘리라니. 어지간히도 성의 없는 눈속임 아닌가. 베르딕은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 붉은 머리 여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레이몬드에게 말했다.

“저 여자의 이름은 캘리가 아닌 캐런이라고 해야 하지 않소?”

레이몬드는 뻔뻔하게 미소까지 띠면서 대답했다.

“전 캘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난 저 아가씨를 캐런 하이어란 이름으로 본 적이 있다만?”

거짓말을 하려면 좀 더 그럴듯한 이름으로 바꾸는 것이 좋을 것이다. 베르딕은 캐런 하이어에 대해 좀 더 알아봐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셀라 에반스, 자신의 딸이 사라졌다. 그리고 캐런 하이어는 왜 딸의 전 약혼자와 같이 있을까. 베르딕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레이몬드, 캐런 하이어, 세이어테스 남작.

“그렇습니까? 음, 베르딕 씨. 지금 그것 때문에 오신 겁니까? 저 아가씨의 이름에 관해 심도 깊은 탐구를 하고 싶다면 저로서야 환영입니다.”

레이몬드가 묻자 베르딕은 입을 다물었다.

바로 이렇게 치고 나올 줄이야.

레이몬드는 지금 제대로 된 변명을 할 생각이 없다. 저 태도는 오히려 네가 그러면 어쩌겠느냐는 태도였다. 베르딕은 지금 자신이 온 이유인 이셀라를 생각했다.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는 이셀라 에반스의 머리카락이 이곳을 통해 도착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단서를 더 찾기 위해서였다. 아직 캐런에 대해 더 캐기에는 이르다. 본론을 쫓지 못하고 가지로 빠질 위험이 있었다. 캐런에 대한 것을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주목적에 어긋났다.

“…….”

하지만 저 날카로운 반응은 기억해 둘 필요가 있었다. 베르딕은 여전히 젖은 머리를 하고 있는 캐런, 아니 여기서는 캘리인(베르딕은 어지간히 성의도 없는 개명이라 생각했다) 그녀를 힐끗 보고는 레이몬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중요한 것은 저 여자가 아니다. 단서는 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아니오. 우리 집에 도착한 우편물이 있는데….”

“들어가서 말씀하시는 것이 좋겠군요.”

레이몬드는 베르딕의 말을 끊고, 안쪽으로 발끝을 돌렸다. 행동은 무례했으면서도 표정은 온화하기 짝이 없다. 베르딕에게 아직도 앙심이 남아 있음을 감추지 않는 태도다. 너무 노골적이라서 오히려 의심스럽다.

“그러실 것 같았습니다. 우선 응접실로 가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물론 베르딕 씨는 이 집에 대해 잘 아시겠지만.”

베르딕의 취향은 아니었지만 이 저택은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역사라든가. 하지만 지금의 집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베르딕은 저택의 내부를 곁눈질했다.

“오랜만에 방문하니 기억나는 것이 너무 없더군. 안내를 부탁하지.”

“기꺼이.”

이상한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왜 이 대저택에 단둘이 있는가. 그리고 왜 저 여자는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있는가.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의 딸, 이셀라 에반스다. 그녀의 실종이다.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파헤치기 위해서는 레이몬드의 허가서가 필요하다.

“두 잔은 따로 부탁합니다.”

“네.”

레이몬드는 캐런(인 듯한 캘리)에게 턱짓했다. 캐런은 고개를 숙이고 하녀처럼 물러났다.

“우선 응접실로 가셔서 말씀하도록 합시다. 저도 곧 일이 있어서 떠나야 합니다…. 갈아입을 옷을 드릴까요?”

레이몬드는 베르딕의 젖은 옷을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말했다. 친절인지 비웃음인지 알 수 없는 그 시선에 베르딕은 모멸감을 느꼈다. 자신이 왜 안 하던 짓을 해서.

“됐소.”

캐런은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베르딕 씨의 건강이 걱정되는군요. 젖은 옷을 입고 있으면 체력이 떨어집니다. 제게 친절을 베풀 기회를 주십시오.”

“난 괜찮다고 했소만.”

“청소하는 것은 힘이 듭니다. 베르딕 씨.”

레이몬드는 베르딕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힘을 준 것은 아니었지만, 충분한 압박감이 들었다. 레이몬드는 베르딕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애송이가 빈정거리긴! 베르딕은 입가를 씰룩였다. 하지만 베르딕은 지금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자신은 이곳에 레이몬드와 씨름을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이셀라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 왔다. 자신의 자존심은 나중에 찾아도 된다.

베르딕은 고개를 숙였다.

“친절에… 감사하네.”

베르딕은 불쾌했다.

자신이 불쾌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그것도 레이몬드의 앞에서. 더 기분 나쁜 것은 레이몬드가 그런 사실을 눈치채고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분은 나빠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베르딕의 고통이 그에게 기쁨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옷을 갈아입으셨습니까? 들어오십시오.”

베르딕은 그가 안내하는 대로 들어갔다. 집은 예전과는 좀 달랐다. 좀 더 삭막했고, 고요했다.

“다른 고용인은 전부 내보낸 건가…? 그 한 여자만 제외하면?”

“뭐, 그렇습니다. 전 그리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당신 덕분에 군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옷은 잘 맞으시는군요.”

말에 가시가 있었다. 베르딕은 레이몬드와 그가 서로 그리 좋은 관계가 아닌 것을 다시 한번 자각했다. 이셀라가 사이에 있었지만, 그들은 결코 일반적인 가족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을 바라지도 않았지만.

베르딕은 자신이 데려온 사람의 수를 생각했다. 그리고 머리를 흔들었다. 지나친 생각이다.

“…….”

베르딕은 레이몬드가 준 마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하지만 호의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레이몬드가 준 옷은 베르딕의 몸에 맞춘 것처럼 딱 맞았다. 그러나 그 옷은 베르딕이 입을 옷이 아니었다. 하인들의 복장이었으니까.

“돌아가실 때 입고 가셔도 괜찮습니다.”

“…….”

치욕스러웠지만 자신은 딸을 위해서 이곳으로 왔다. 베르딕은 엉거주춤하게 서서 레이몬드를 노려보다가, 그 마저도 포기하고 눈을 깔았다. 지금 그는 레이몬드에게 철저하게 약자인 입장이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잊었군요. 자리에 앉으시기를 바랍니다.”

“…….”

베르딕은 레이몬드가 가리키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레이몬드가 자리에 마저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파이프를 피워도 되겠소?”

“전 담배 냄새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베르딕 씨가 원하시면 창문을 열어야겠군요.”

“아니, 되었소, 레이몬드 경. 옷을 갈아입었다는 것을 깜빡했군.”

베르딕은 레이몬드의 얼굴을 보고 다급히 말했다. 레이몬드에게 부탁을 해야 할 것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운송물 조사에 당신의 허가가 필요하기 때문이오.”

“그러십니까.”

레이몬드는 베르딕을 빤히 쳐다보았다. 베르딕은 더 설명을 이었다.

“레이몬드 경, 그 쪽도 알겠지만 당신의 약혼녀이자 내 딸인 이셀라가 실종된 지 벌써 수개월이 지났소.”

“압니다. 유감스럽군요.”

전혀 유감스럽지 않은 얼굴이었다. 레이몬드의 얼굴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그 얼굴은 차라리 속이 시원한 듯했다. 베르딕은 생각을 더 확장하지 않기 위해 혀를 깨물었다. 베르딕이 여기서 레이몬드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린다면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고꾸라질 것이다. 수사권 협조도 당연히 날아갈 것이다.

“하지만 운송물에 대한 조사권을 드려야 하는 이유는 전 듣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관계는 이미 끝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내 딸의 머리칼로 보이는 머리털이 도착했소.”

베르딕이 품에서 봉투를 꺼내 레이몬드에게 건네주었다. 레이몬드는 받아서 봉투를 받아서 열었다.

“…금발이라고 다 따님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제 머리도 금발입니다. 그렇게 드물지는 않습니다.”

“내 자식의 머리칼도 못 알아볼 것 같소?”

“제가 보기에는 그냥 흔해 보입니다.”

베르딕이 이를 갈았다. 자신이 이셀라의 머리카락을 못 알아볼 리가 없지 않은가. 흔한 금발이라고? 아니, 이셀라의 머리와 똑같은 머리는 없다. 똑같은 사람은 없다. 세상에서 베르딕 에반스의 딸은 하나뿐이다.

“베르딕 씨, 지쳐 보이시는군요. 자고 가셔도 저는 환영입니다.”

“…레이몬드 세이어테스 남작.”

“그냥 경이라고 하셔도 괜찮습니다.”

베르딕은 의도적으로 레이몬드를 노려보았다. 자신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려 주기 위해서였다.

“운송물이 이곳을 거쳐 갔다는 것을 알았소.”

“그랬군요.”

“부디 조사를 위해 협조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오.”

레이몬드는 베르딕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그 입술이 천천히 호선을 그렸다.

“싫습니다.”

“이유는?”

“요즘 바쁩니다.”

베르딕의 손에 총이 있다면 그는 레이몬드를 쏘아 버렸을 것이다. 베르딕이 핏발 선 눈으로 레이몬드를 노려보았다.

캐런은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베르딕은 이제까지 수십 번이나 캐런을 죽였다. 저 경험 많고 돈 많고 집요한 남자는, 캐런의 일생일대의 적이었다. 그는 뻔뻔하고 노골적으로 욕망에 솔직했고 복수도 집요했다. 그것을 알아도 피하기 힘들 정도로 집요했다. 캐런은 그를 생각할 때마다 목이 졸려 오는 듯했고 등이 간지러웠다.

베르딕이 캐런을 구했다고?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살인자라도 우는 아이를 일으켜 세워 줄 수는 있는 법이다. 굶어 죽어 가는 거지에게 동전 하나를 집어던져 줄 수는 있는 법이다. 행동 하나로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

그리고 베르딕은 거지에게 던져 주는 것보다는 탈세를 하기 위해 재단을 세울 사람이다. 캐런은 그를 보며 순간적으로나마 이셀라를 떠올리고 씁쓸함을 느끼려던 자신에게 환멸을 느꼈다. 자신을 챙기기도 벅차다. 자신은 이제까지 저 자에게 수도 없이 죽었다.

레이몬드는 캐런을 위해 누군가를 죽였다. 어쩌면 아주 많이. 그 안에 이셀라도 있을 것이다. 그것에 씁쓸함을 느끼는 것은 죄악이다.

“…다들 드셨나요?”

캐런은 잠든 베르딕의 하인들을 보면서 일어났다.

자신은 자신이 해야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레이몬드가 베르딕을 데려간 것은 분명 그를 처리하려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자신도 나머지를 도와야하지 않겠는가.

수면제의 효과는 상당했다. 베르딕의 하수인들은 다들 별 의심도 없이 캐런이 건네는 차를 흔쾌히 마셨다. 그러고는 이런저런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셀라가 사라지고 나서 얼마나 베르딕이 미친 것처럼 구는지, 몇 개월이 지나고 나서 드디어 좀 잠잠해지나 했을 때 도착한 머리칼 때문에 얼마나 그가 발광했는지. 이곳까지 온 것도 자신들은 말렸지만 베르딕은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얼마나 눈을 부라리며 폐를 끼치는지 등등.

그런 것들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베르딕은 캐런의 원수고, 이들은 베르딕의 하수인이라는 사실이다. 캐런은 텅 빈 찻주전자를 밀었다. 그리고 일어났다.

덜컹.

캐런은 부엌 안을 뒤졌다. 무엇이 좋을까.

부엌 안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식칼이었다. 캐런은 자신의 죽음을 생각했다. 이걸로 목을 찌를까. 어디를 찔러야 할까. 역시 목이 제일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분명 한꺼번에 처리하기는 힘이 들 것 같다. 한 번에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몇 시간은 더 푹 잠이 들 테니, 하나하나씩 끌고 갈까. 좀 무거워 보이지만 온 힘을 다하면 절대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부엌 안의 고기들을 말리는 창고에 넣어서 죽이자. 하나씩 끌고 가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우선 전부 묶어 놓고, 하나씩 죽이면 된다. 목을 찌르면 괜찮겠지. 하지만 자신이 식칼로 목을 제대로 자를 수 있을까? 캐런은 들고 있는 식칼을 보았다. 나쁜 물건은 아니었지만 믿음직스럽지는 않았다.

덜컹.

창고의 문을 열었다. 말라 가고 있는 고기들이 보인다. 가죽을 전부 벗겨 낸 것들이었다.

푹.

캐런은 시험 삼아서 사슴의 목을 베어 보았다. 겉의 가죽을 벗겨 냈음에도 제대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완력이 부족한 것이다. 사람들은 분명 중간에 일어날 테니 더 어려울 것이다. 갈고리에 제대로 걸기만 하면 될 것 같지만, 캐런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역시 이걸로는 부족하다. 힘을 좀 더 줄 수 있을 만한 것이 필요했다.

“…역시.”

캐런은 베르딕을 이해했다. 총이 아닌 것 중에서는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 그것이었다. 도끼라면 충분히 힘이 가해질 것이다. 누워 있는 사람의 목을 제대로 절단할 수 있는 것은 도끼다.

식칼, 톱, 도끼…, 도끼는 어디에 있지? 캐런은 도끼를 찾았다. 식칼은 그리 좋은 물건이 아니다. 식칼로 허벅지를 찌르면 분명 깨어나서 소리를 지를 것이다. 수면제의 양은 상당했지만 몸을 찌르는 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캐런은 식칼과 도끼를 놓고 고민했지만, 역시 도끼로 목을 치는 쪽이 좋았다.

무엇보다 베르딕에게 도끼로 여러 번 목이 잘린 자신이니 베르딕과 그 부하들에게도 도끼를 쓰는 것이 어울리지 않겠는가.

분명 레이몬드는 베르딕을 죽이겠지. 그래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다. 캐런은 베르딕의 부하들이 잠들어 있는 부엌으로 돌아갔다.

끼이이익.

바닥에 질질 끌어도 일어나지 않는다. 수면제의 효과는 생각보다 좋았다. 캐런은 비교적 가벼운 부하 하나를 들쳐 메었다. 무거웠다. 남자의 다리가 바닥에 끌린다. 하지만 깨지는 않았다. 캐런은 그를 업고 바로 옆의 창고로 들어갔다. 바닥에 남자를 놓고, 도끼를 든다.

“…….”

이 남자의 이름은 뭐더라?

캐런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베르딕의 부하 중 하나였다. 그중 비교적 연약해 보이는 남자였다. 캐런은 이 남자의 이름을 모른다. 턱이 갸름한 것이 왠지 듈란을 떠오르게 하는 남자였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중요한 사람도 아니었고 캐런이 100년 넘게 살면서 제대로 마주친 적도 없는 남자였다.

왜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캐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죽여야 할 사람은 많다. 자신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레이몬드가 그녀를 위해 도덕을 버렸다면, 그녀 또한 마땅히 그래야 한다. 베르딕이 딸을 잃고 얼마나 비통해하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도끼 아래에 있는 남자가 어떤 사람이든지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혼자만의 세상에서 드디어 둘의 세상이 되었다.

그 이상의 사람은 없다.

유일한 동반자는 서로를 위해야 한다.

캐런은 도끼를 높게 쳐들었다.


 

캐런은 도끼를 휘둘렀다.

남자의 머리를 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시도는 실패했다. 도끼는 무언가에 덜컥 걸렸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내려쳐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잡고 있었으니까. 캐런의 귀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차를 내 달라고 했는데 왜 이리 오지 않았나 했더니”

당연하게도 레이몬드였다.

하지만 캐런은 그가 하는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그는 지금 도끼를 잡은 거지? 캐런은 레이몬드를 올려다보았다. 레이몬드는 캐런을 내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초록빛 다정한 눈이 웃음을 띠었다.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것처럼 상냥하게 웃었다. 그리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캐런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숲의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손을 도끼에서 떼요, 캐런.”

왜? 캐런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하지 말라고 하는 거지? 자신이 못 미더워서 그런 걸까? 캐런은 도끼를 움켜쥐었다. 자신도 할 수 있었다. 이런 일은 나누는 것이 맞았다. 레이몬드에게 전부 넘기는 것은 싫었다. 레이몬드가 자신을 위하듯, 자신도 레이몬드를 이해하고 싶었다.

“어서.”

“…….”

캐런은 손을 떼었다.

레이몬드가 자신 대신에 남자를 죽이려는 것이라면, 레이몬드가 더 제격이리라. 베르딕을 처리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레이몬드는 지금 내려와 있다. 베르딕을 이미 처리한 걸까? 그래서 다른 사람도 마저 처리하기 위해 내려온 것일까?

“이건 잘 들지도 않는 건데. 여기는 냄새가 역하니 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레이몬드는 남자를 들쳐 메었다. 다른 곳에서 처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걸까? 자신은 장소를 잘못 지정한 걸까? 캐런은 레이몬드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남자를 메고 부엌으로 돌아가더니, 다른 남자들이 잠들어 있는 소파에 그 남자도 놓았다.

“흠, 이 남자 생긴 것이 마음에 안 드는군요. 전 이런 얼굴 안 좋아합니다.”

“…….”

“설마 캘리, 이런 남자가 취향인 건 아니겠죠?”

“레이몬드, 안 웃겨요.”

“심각한 이야기였는데. 제가 얼굴을 바꿀 수는 없잖습니까.”

“…….”

너스레를 떠는 레이몬드의 모습은 어떻게 해석해도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하는 행동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캐런은 레이몬드에게 나지막하게 물었다.

“…지금 뭐하는 건가요.”

“무엇을 하긴요. 사람들을 다시 돌려놓고 있습니다.”

“…죽이지 않나요?”

죽여야 하지 않는가.

“어찌 그런 무시무시한 소리를.”

“레이몬드!”

“쉿, 캘리.”

레이몬드가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리고 캐런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렀다. 캐런은 기가 막혀서 그 뻔뻔한 얼굴을 노려보며 레이몬드의 손가락을 물었다.

“아픕니다.”

“지금 뭐하는 거냐고 물었어요.”

캐런은 레이몬드의 손을 쥐면서 물었다. 레이몬드가 엄살을 떨면서 다른 손으로 캐런의 손을 잡고 자신의 손을 빼냈다.

“베르딕이 아직 기다리고 있으니, 제가 차를 가지고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가 삼십 분쯤 뒤에 사람들을 깨우도록 하십시오. 그때쯤 베르딕을 내보낼 생각입니다.”

“…예?”

“나중에 설명 드리겠습니다.”

캐런은 직접 뜨거운 물을 가져가는 레이몬드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레이몬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시는 길 안전히 돌아가시길.”

“…….”

베르딕은 대답도 하지 않고 겉옷을 벗어 바닥에 내팽개쳤다.

“린드, 자네 재킷을 다오.”

“예.”

그가 자신의 하인 중 하나인 린드에게 손을 내밀자 린드가 자신의 윗옷을 베르딕에게 벗어 내밀었다. 베르딕이 평상시에 입던 옷에 비하면 저급이었으나 레이몬드가 제공한 옷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하인이라 하더라도 베르딕에게 옷을 빼앗긴 린드는 변호사였기 때문이다. 레이몬드가 준 것은 잡일이나 할 법한 옷이었다. 무엇보다 질에 상관없이 베르딕은 레이몬드가 준 것을 옷에 걸쳤다는 사실이 역겨웠다.

“몸이 썩을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군.”

“베, 베르딕 씨! 아직 레이몬드 세이어테스 남작이….”

레이몬드가 뒤에서 베르딕을 배웅했다. 베르딕과 다르게 웃는 낯짝이었다.

“제 호의를 이렇게 무시하시다니. 가슴이 아프군요, 베르딕 에반스.”

“하, 웃기지도 않는군.”

레이몬드가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주워 들며 말했지만 베르딕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베르딕이 방에서 레이몬드에게 당한 치욕은 더이상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레이몬드는 베르딕의 부탁을 짓밟으며 웃었다. 감히 그가 자신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하인의 복장을 입힌 것부터 전부 다 자신을 조롱하기 위해서였다. 베르딕은 빠른 걸음으로 저택을 빠져 나갔다.

“주, 주인님!”

하인들이 허둥지둥 베르딕을 쫓아갔다. 베르딕은 마차에 올라타서 한참 동안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반스 본가로 바로 가시겠습니까?”

“…잠깐. 우선 마차를 타고 크게 영지를 돌아보도록 하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베르딕의 비위를 가장 잘 맞추는 린드가 베르딕에게 물었다. 린드는 베르딕이 마차에 타자마자 자신이 건넨 윗옷도 내팽개치는 것을 보고 상당히 긴장했다.

이셀라를 잃어버린 후 베르딕은 한동안 미친 것 같았다.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가 미치는 것은 당연한 법이었지만, 베르딕은 불안함을 아랫사람들에게 쉽게 폭력으로 돌리는 사람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린드처럼 그의 옆에 있는 하인들은 항상 다리에 멍을 달고 살았으며, 노집사는 베르딕 때문에 앓아누웠다. 베르딕이 집안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채찍을 들고 노인을 두들겨 팼기 때문이다. 지금 모여 있는 사람들은 몇 개월간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다 자신처럼 기본 체력이 좋은 줄 아나….’

그나마 다른 사람들은 몸을 쓰는 사람들이었지, 자신처럼 펜을 굴리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으로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베르딕은 체력이 유달리 좋은 편이었고, 다른 사람들이 최소한 자기만큼은 따라와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이셀라의 흔적을 찾다가 조금이라도 쉬거나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을 못견뎌했다.

이셀라의 방을 치우면 치운다고 하녀들의 뺨을 쳤으며, 치우지 않으면 관리하지 않는다고 정강이를 걷어찼다. 식사를 하면 한다고 노려보아 체하게 만들었고, 굶어서 소리가 나면 소리가 난다고 욕설을 했다. 이러나저러나 고통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베르딕이 체념을 하려는 시간이 찾아왔다.

“지난번에 넘겼던 그 서류를 가져와. 너무 일을 미뤄 두었던 것 같군.”

‘드디어 주인님이 제정신을 차렸구나!’

하인들은 서로서로 눈치를 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인들과 하녀들은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지 가족이 아니었다. 이셀라의 실종 소식에 몇몇은 걱정했지만, 동정보다 베르딕에게서 받는 고통이 너무 컸다. 몇몇은 차라리 일을 그만두겠다고 나갔으며 일은 사람들의 공백 때문에 더더욱 고되어졌다.

그나마 일이 정상적으로 다시 돌아가려던 때에 이셀라의 것으로 추정되는 머리칼이 도착하자 사용인들은 비명을 질렀다. 일부의 동정심 넘치는 사람들은 그녀가 살아 있음에, 대부분의 돈 때문에 일할 뿐인 사람들은 앞으로 지옥이 펼쳐질 것이라는 예상에.

덜컹덜컹.

마차 안은 조용했다. 하인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베르딕은 핏발 선 눈으로 자신의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역시 제대로 해결이 되지 않은 모양이다. 하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잘… 처리되지 않은 것 같지?’

‘누가 주인님에게 말을 걸어 봐.’

‘린드 씨가 물어보쇼.’

‘젠장.’

린드가 헛기침을 하고 베르딕에게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다.

“…주인님, 레이몬드 세이어테스 남작과의 일은 잘 처리하셨습니까?”

“자네 말투가 왜 그렇지?”

베르딕이 한 말은 뜻밖이었다. 린드는 자신의 주인이 괜한 화풀이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일이 잘 안 풀린 모양이었다.

“저, 제가 말실수를 했다면….”

“아니 그거 말고. 자네 발음이 좀 이상한데.”

“예?”

린드는 주인의 뜬금없는 소리에 눈을 치켜떴다. 베르딕이 린드의 입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꿀꺽, 하고 침을 삼켰다.

“아… 죄송합니다, 주인님. 실은 주인님과 레이몬드 남작의 대화가 길어져서 잠시 잠들었습니다.”

“…….”

린드는 눈을 감았다. 베르딕이 무엇이든 잡아서 자신의 머리를 내려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로서도 억울했다. 그동안 너무 피곤했고, 베르딕은 하인들을 지나치게 볶아댔다. 따뜻한 장소에서 미인이 대접하는 차를 마시고 잠시 잠들었을 뿐인데, 베르딕은 그들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군. 거기서 주는 걸 마실 생각이나 하다니.”

“무엇이 문제입니까?”

“…됐다. 우선 마을로 내려가 지켜보도록 하지.”

베르딕의 말은 예상 밖이었다. 분명 베르딕은 레이몬드에게서 권한을 받아, 운송물을 추적하기 위해서 왔다. 그것은 그의 딸 이셀라를 찾기 위한 중요한 서류였다.

“레이몬드 남작님에게서 허가를 받으셨습니까?”

베르딕의 얼굴이 유독 좋지 않아서 분명 거절당했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다행히 허가를 받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베르딕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는 거절했다. 그리고 그것뿐만 아니라….”

“왜 그러십니까?”

“아직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군. 당장은 떠나지 않고 기다려 보도록 하지.”

“허가를 받지 못했으면 조사하기가 힘들 텐데요.”

베르딕은 당연한 답을 했다.

“돈을 먹여.”

“최근 뇌물 관련 법안이 강화되었습니다.”

“그건 자네가 알아서 해.”

“에반스 씨!”

베르딕은 린드에게 시끄럽다며 손짓을 하고는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부하들을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며 명령했다.

“일단은 마을에서 머문다. 자네들은 여기에 토를 달지 말라고.”

베르딕은 뒤돌아 성을 노려보았다. 부하들은 입을 다물었다. 베르딕과 레이몬드 사이의 이야기를 그들은 지금 알지 못한다. 하지만 뭔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고, 그것은 그들에게도 딱히 좋은 일은 아니란 것은 분명했다.

캐런은 멀어져 가는 베르딕의 일행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표정을 푸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제 내일이면 떠날 텐데 당신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군요.”

“지금 제가 웃게 생겼나요?”

“인생을 살면서 웃지 못 할 일이란 없지 않습니까. 전 당신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흘러넘… 윽.”

캐런은 레이몬드를 팔꿈치로 쳤다.

“대체 왜 그랬어요?”

“뭘 말하는 겁니까.”

“뭘 말하긴요.”

캐런은 레이몬드를 노려보며 말했다.

“당연히 전부 다 죽였어야죠.”


 

베르딕은 자신의 저택이 아닌 가까운 마을의 여관에 짐을 풀었다. 여행객들이나 머물법한 더러운 곳이었지만, 그렇다고 레이몬드의 저택에 있을 수는 없었다.

“에반스 씨,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

하지만 너무 더럽기는 했다. 베르딕은 구석으로 도망가는 쥐를 보며 험악하게 인상을 썼다. 탁자로 다가가자 다른 하인이 쫓아와서 그의 옷을 벗어 의자에 깔았다. 베르딕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떻게 할지 이야기 해 봐.”

린드는 눈치를 보면서 베르딕의 건너편에 앉았다. 그리고 안경을 추켜올리면서 말했다.

“우선 남작의 서명 없이 수사를 하기란 힘이 듭니다. 지난번에 탈세하셨던 것도….”

“빌어먹을, 세무서장 교체해.”

“케이먼 씨는 오래 일하셔서 신용 있는 분이십니다.”

“탈세범이 신용 있는 사람 찾고 앉아 있군. 그냥 무능력한 사람은 바꿔.”

케이먼 씨가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의 직장이 더 소중했기에 린드는 더 이상 케이먼을 옹호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우선, 서명 없이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걸 알아서 하라고 내가 자네에게 돈을 주는 걸 알아 둬. 케이먼의 전철을 밟고 싶지는 않겠지.”

“알겠습니다.”

“3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린드가 울고 싶은 얼굴로 대답했다. 베르딕은 다시 파이프를 꺼내 뻑뻑 피우기 시작했다.

“전의 세이어테스 남작님이면 한결 편했을 텐데요.”

린드는 전의 세이어테스 남작을 기억하며 말했다. 레이몬드의 형인 그가 남작 작위를 잇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몸이 너무 좋지 않아 요양 시설로 들어가야만 했고, 결국 그의 동생인 레이몬드 세이어테스가 남작 작위를 받게 되었다.

“차라리 그랬으면 훨씬 나았겠지…. 불가능한 것을 말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나.”

“요양원에 있는 전대 남작에게 대리 서명을 요구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지만 그로서도 상황이 명쾌한 것은 아니었다. 명령을 내려도 확신은 없다. 조사를 한다고 해서 이게 제대로 된 방향일지 알 수 없다.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레이몬드의 협력을 받으려고 한 것이거늘, 레이몬드는 대놓고 그를 비웃으면서 거절했다. 전의 남작이었으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 개새끼.”

“예?”

“자네 말고.”

레이몬드 이 개자식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베르딕은 레이몬드를 키운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셀라가 그를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에 딸에게 사다준 장난감에 불과했다. 어린 레이몬드는 정의감이 넘치는 소년이었고, 자신의 영지를 삼키려는 베르딕에게도 달려와서 부당함을 고한 적이 있지 않았던가.

“저분은 마치 기사님 같네요.”

베르딕은 동감했다. 그것은 사람의 본질이다. 교육을 통해서 변하는 것과는 다른 좀 더 본연의 것이다.

그것은 베르딕이 그를 제련하고 나서도 변하지 않았다. 돈이 사라지고 가족이 줄어들고 군대에 가고 전쟁에 가더라도. 사람마다 변하지 않는 본질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레이몬드는 이제까지 그것을 결국 버리지 못했다. 이셀라에게 쓴 소리 한마디 하지 못했으며, 군대에서도 성실하게 임했다.

그런데 갑자기 저렇게 비아냥거리는 태도라니. 베르딕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럴 수도 있는 법이다.

레이몬드가 이셀라와의 결혼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것은 베르딕도 알았다. 그래서 이셀라가 실종된 것을 기회로 삼을 수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 레이몬드가?

도장 하나 찍어 주지 않는다고?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의 인성과 태도와 본질 그 모든 것이 뒤집어질 수 있는가?

그럴 수도 있지만 베르딕은 지금 무엇이든 잡고 늘어질 생각이었다.

하나를 의심하기 시작하니 의심할 것이 너무 많았다. 레이몬드와 같이 있는 여자. 어쩌면 그 여자에게 반해서. 사랑에 빠진 남자는 머저리가 되는 법이다. 아직 레이몬드는 베르딕이 보기에는 어렸다.

그렇다면 이셀라를?

너무 나갔다. 베르딕은 고개를 저었다. 그 생각은 지나쳤다. 레이몬드는 자신에게 복수한다 하더라도 이셀라를 어떻게 할 정도로 단호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베르딕이 그를 골랐다. 레이몬드는 그러지 못할 것을 아니까.

사랑에 빠진 남자라고 하더라도 그의 본질이 뒤집어질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베르딕에게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다 하더라도… 하지만 그는 너무나 수상쩍게 굴고 있지 않은가.

레이몬드는 군을 이상하리만치 빨리 그만두었다. 갑자기 남작의 몸이 급격하게 좋지 않아져서, 남작위를 이어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베르딕은 그를 상원 의원에 넣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조금 더 기다리라고 하려 했지만 갑자기 광산 세 개가 연달아 폭발했다. 그것을 수습하고 나니 이셀라가 실종되었다. 전대 남작과 구두로 성립된 약혼은 흐지부지 없는 일이 되어 버렸으며, 레이몬드는 그 사이에 원금을 다 갚아 버렸다. 어느새 레이몬드는 그와 상관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럴 수도 있을까?

그 모든 게 우연일 수 있을까? 레이몬드는 사교계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남작으로서 영지에 골몰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테스 대저택은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수많은 사용인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아무도 없는 대저택.

붉은 머리 하녀와 단둘이 사는 그 저택.

“하이어 영주의 딸이 어떻게 되었지?”

“예?”

뜬금없는 소리를 듣고 린드가 베르딕을 쳐다보았다. 베르딕은 바로 알아듣지 못하는 부하가 짜증났다. 눈치 하나는 빨랐던 남자였는데, 계속해서 밀려오는 졸음에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베르딕은 화를 참고 다시 말했다.

“하이어 영주 말이다. 남부 철도 확장안의 종착역이었던 곳.”

“예, 하이어 영지를 말씀하시는 군요.”

“거기 딸이 몇 달 전에 영주의 대리로 찾아온 적이 있어. 기억하나?”

린드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안내를 했던 것은 기억합니다. 시기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상당한 미인이….”

“젠장, 그거 말고. 아무튼, 아까 세이어테스 남작 가문에 있던 하녀와 얼굴이 똑같지 않았나?”

린드는 자신의 안경을 닦으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졸음을 내쫓기 위한 행동이었기에 베르딕은 뭐라 하지 않았다. 린드가 안경을 쓰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상당히 닮았습니다. 하녀 복장을 입고 있고 처음에 물에 젖어서 그렇지, 얼굴도 그렇고 머리색도 똑같군요.”

“그렇지?”

“물론 닮은 다른 사람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맞아, 그 둘이 거기에 있을 이유가 없으니… 뭐든 가능성은 열어 놓아야지.”

베르딕은 자신의 턱을 문질렀다. 이상하게 가려웠다.

기분이 나빴다. 자신이 무엇을 잡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눈앞의 의심스러운 사람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운송물에 대한 조사와 동시에 그 여자도 알아봐야 한다. 레이몬드와 단둘이 있는 그 여자는 그와 무슨 관계에 있는가?

“우선 하이어 영주의 딸이 맞는지 확인부터 해야겠어. 영주의 딸 캐런 하이어의 행적이 어떻게 되는지 사람을 보내 봐.”

캐런은 레이몬드를 노려보았다. 레이몬드는 뻔뻔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캐런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를 살려서 보내는 거죠?”

“죽이고 싶으십니까?”

“베르딕 에반스가 절 처음에 보자마자 알아봤어요. 죽여야 해요. 이제까지 겪어 봤잖아요. 그 남자는 여기서 또 어떻게 단서를 찾을지 몰라요.”

캐런은 레이몬드의 팔을 잡고 말했다. 레이몬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베르딕은 만만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의 교활함은 수시로 그들을 덮쳤다. 117세 때의 베르딕이 결국 다시 캐런의 목을 치기 위해 돌아왔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어떤 방식으로 돌아올지 모른다. 레이몬드가 만약에 이셀라를 죽였다면 그는 지옥에서도 돌아와 복수할 남자였다.

“당장 죽여요…. 죽여 버려요. 아직 늦지 않았어요. 쫓아가서 전부 죽여 버려요.”

레이몬드는 캐런을 달래듯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손은 크고 따뜻했다.

“베르딕에게 굳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는 절 몇 번이나 죽였다구요!”

레이몬드가 쓰게 웃었다.

“압니다, 캐런.”

“그런데 어떻게….”

“하지만 캐런, 전 언제나 당신만 생각하고, 당신만이 중요합니다.”

“알아요.”

“그럼 괜찮지 않겠습니까?”

캐런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속에서 나오는 격한 감정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베르딕을 직접 고문하고 싶으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괜찮을 겁니다.”

“…그게 아니에요.”

그렇다면 얼마나 쉽겠어. 하지만 캐런을 괴롭히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캐런은 베르딕을 죽이고 싶어서, 복수심에 불타서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소한 것이었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레이몬드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레이몬드가 캐런에게 전부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당신 행동에는 일관성이 없지요? 왜 누군가의 손톱을 뽑았으면서, 처음 보는 외국인들을 전부 죽였으면서, 누군가의 딸을 죽였으면서 왜 내 원수는 내버려두지요? 전부 죽여야 하는 것이 맞지 않나요?

물론 계산을 하면 그가 맞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저렇게 많으면 전부 죽인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베르딕은 혼자 온 것이 아니었으며, 캐런이 죽였던 낸시나 톰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사회적 위치가 공고한 중년 남자였다. 그를 죽였다가는 지난번의 귀즈 왕세자 때처럼 자신과 레이몬드가 통제할 수 없는 일까지 번질지도 모른다.

그냥 베르딕은 알아서 살게 내버려 두는 것이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지만.

당신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게 싫어요.

그것이 답답했다.

“캐런.”

“네.”

레이몬드가 고개를 숙였다. 캐런과 눈을 마주쳤다.

“제가 그러니까,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캐런은 그 웃기지도 않는 말에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웃으라고 한 말이었습니다만.”

캐런은 웃지 않았다. 웃을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자신은 정말로 레이몬드에게 속상했다. 그는 중요한 것을 말하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당신 농담은 재미없어요.”

레이몬드는 약간 씁쓸하게 웃었다. 정말로 약간은 부끄러운 듯한 그런 얼굴이었다. 사춘기 소년 같은 얼굴이었다. 레이몬드는 캐런의 볼을 쓰다듬었다.

“당신에게 보여 주기 싫은 부분도 있고, 제가 알아서 하고 싶은 그런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너무 말하지 않은 것 같군요.”

레이몬드는 입을 다물고, 캐런을 응시하면서 캐런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보다가 결국 레이몬드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천천히, 캐런에게 말했다.

“베르딕은 오래지 않아 죽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조급해할 필요 없어요.”

상냥한 목소리가 캐런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그만큼 잔인한 목소리였다.

베르딕은 자신의 딸을 다시는 찾지 못 할 겁니다.

죽기 전까지 그는 자신의 딸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 헤맬 겁니다.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잠들지도 못할 겁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딸을 놓칠 수도 있으니까요.

살아서 어디에서 괴로워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 어떠한 것도 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찾아 돌아다니는 삶을 살게 될 겁니다.

그리고 포기하지도 못할 겁니다.

제가 포기하지 못하도록 조금씩 도와줄 생각이거든요.

그는 계속 희망을 품고서, 포기하지도 못하고 그렇게 영원히 찾아 헤맬 겁니다.

하지만 결코 찾을 수 없을 겁니다.

걱정 말아요, 캐런. 그는 정말로, 살아서 지옥을 보게 될 겁니다.

내가 이미 확인했어요.

죽는 것은 너무나 쉬운 복수 아니겠습니까.


 

“역시 그 여자가 캐런이었군.”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린드의 말에도 베르딕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더 신중해질 필요는 없었다. 이 부분은 단정을 짓고 넘어가야 일이 진행된다.

“캐런 하이어가 실종되었고, 다른 곳에서 자신에 대해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여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여자는 캐런 하이어와 똑같이 생겼지. 그냥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낫지 않겠나?”

“하지만 그녀가 왜 여기에 있단 말입니까?”

“그건 모르지.”

베르딕은 전보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야 한다. 왜 그 여자가 레이몬드의 저택에 있는가.

어디서 무엇을 놓쳤을지 모른다.

레이몬드와 캐런.

둘을 엮는 것은 베르딕밖에 없었다. 그들이 어쩌다가 얽혔을까.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중요한 건 이셀라의 행방이야, 이 여자가 레이몬드와 연관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중 문제지.”

중요한 것은 지금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베르딕은 레이몬드가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당분간 바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베르딕은 레이몬드의 대부분의 일정을 알고 있었다. 그가 비공식적인 업무를 하는 것은 대부분 베르딕과 귀즈 왕세자의 이해가 맞아 떨어질 때였다. 가끔 그는 새로운 무기를 테스트해 보고 싶어 했고, 레이몬드는 적절한 대상자였다. 하지만 이번에 귀즈 왕세자는 베르딕에게 어떠한 언질도 없었다. 누가 그에게 일을 줬는가? 팬케이르 후작인가?

어찌 되었든 중요한 것은 레이몬드가 집 안에 없다는 것이다.

왜 그는 집을 비워 두었을까.

테스 대저택 정도에는 사용인이 50명은 상주해야 한다.

그런데 왜 단 한 명의 여자만 있는 것일까.

무엇을 숨겨 두었을까.

“레이몬드 세이어테스 남작이 내게 당분간 집을 비운다고 했다.”

베르딕이 수하들에게 일렀다. 남자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남작가를 지키고 있는 것은 여자 하나. 그들이 거리낄 것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우리끼리 가도 충분하겠군요.”

여자 하나면 남자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정장 대여섯이 있는 지금이면 아무 문제없었다. 하지만 베르딕은 고개를 저었다. 혹시 모르는 일이다.

“저택에 전보를 부쳐. 입이 무거운 놈들로만 다섯 명 더 부르도록.”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세이어테스 남작가를 뒤져 본다. 물론 그 캘리라는 여자도.”

베르딕은 단단히 뒤져 볼 생각이었다.

무엇이 나올지 몰라도.

최악의 상황이라도 베르딕은 움직여야 했다.

어쩌면 그 저택에는 레이몬드와 캐런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귀즈 왕세자 전하에게도 연락하도록 해. 금화 한 궤짝과 전부터 말하시던 조각과 미술품 전부를 드릴 테니. 사람들을 빌려 달라고.”

“…괜찮으시겠습니까?”

베르딕은 린드의 멱살을 잡았다. 괜찮냐고? 괜찮을 거냐고? 뭐가? 돈이? 아니면 이셀라가? 하나하나가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괜찮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 빌어먹을 놈팡이들은 베르딕을 앞에 두고도 꾸벅꾸벅 졸기나 하고 있었다.

결국 돈을 얼마를 줘도, 아무리 협박하고 윽박질러도 자신의 가족이 아닌 저들은 베르딕에 비하면 여유가 넘치기 짝이 없었다. 베르딕은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떻게 네놈들은 멀쩡한 얼굴로 행동할 수 있지? 왜 괜찮은 거지?

“다시는… 내게 토 달지 말고 바로 행동해. 알았나?”

린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딕은 찾아내야만 했다.

눈이 충혈되었고 입에서는 단내가 났다. 마지막으로 언제 편하게 누워 잤는지 까마득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잠들 수는 없었다. 그의 딸이 어디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캐런은 레이몬드의 사랑에 감격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 사랑이 얼마나 붉더라도 그래야 한다.

캐런에게 그는 언제나 상냥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잔인했다. 그래서 더욱 완벽한 남자 주인공이었다. 자신에게만 친절한 남자. 그가 어떤 짓을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오롯이 캐런 하나만을 위함이다. 캐런이 그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심지어 그를 멀리하더라도 그의 사랑은 절대적이면서 완벽할 것이다.

캐런은 그의 사랑에 보답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탄식과 슬픔이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캐런이 원수에게도 용서와 사랑을 베푸는 성인이어서가 아니었다.

캐런이 사랑한 그의 모습은, 한결같으면서도 뒤집어져 있었다. 그것이 슬펐다.

캐런이 사랑한 기사는 이제 미쳤다는 것이, 그 이유가 캐런 때문이라는 것이 슬펐다.

무엇보다 그의 방법이 맞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캐런은 자신의 모든 죽음을 기억한다.

레이몬드도 기억할 것이다.

캐런은 방에 틀어박혀 있던 날에도 죽었다.

117세일 때 뭔가가 틀어지고, 그 전날에도 죽을 수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무리하게 움직였을 때였다.

그날까지 버티면 정말로 이번에는 다르게 살아날까?

정확한 것이 없기에 불안했다.

그가 성공하기를 자신도 간절히 바라지만, 어머니가 반복된 삶에서 도망친 것은 자신에게 삶을 밀어 주고 나서였다. 자신을 낳고서야 끝이 났다. 하지만 자신은 불임이었다. 만약에 듈란이 자신을 불임으로 만들었다면, 끝은 나지 않을 것이다. 듈란은 자신의 죽음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와 결혼해도 답은 없었다. 그는 어떠한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열일곱 살 때의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른다. 달라졌다고 해도 무엇이 달라졌는지 아무도 모른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그날까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지금 달라졌다고 그날도 달라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 자신이 해야 할 것은 하나였다.

기분과는 다르게 태양은 화창했고 새들은 지저귀고 여름의 장미와 수국이 한가득 피어 있었다. 레이몬드는 떠날 준비를 하며 커다란 가방을 들고 있었다.

“언제쯤 돌아올지는 확실하게 모르시는 건가요?”

“이런저런 일들이 같이 있습니다. 이번에 처음 시도하는 일도 있어서 확실하게 대답하기 어렵군요. 하지만 그날 전에는 돌아옵니다.”

“올 때 옷 맞춰 오는 것 잊지 마세요.”

“예. 치수는 분명히 적어 두었습니다. 하지만 좀 더 살을 찌우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좀 더 넉넉한 치수로 맞추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제 옷에 관해서 훈계하지 마세요.”

“…네.”

“구두도 주문한 것 그대로 사 오셔야 해요. 전 소가죽 싫어요, 무조건 양이어야 해요.”

“양가죽이라니 그 약해 빠진 가죽을….”

“예쁘니까요.”

“예, 왈가왈부하지 않겠습니다. 적어준 그대로 사 올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캐런은 요즘 제대로 잠자지 못했다. 심정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캐런과는 다르게 레이몬드는 가볍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한가롭게 옷이나 신발의 이야기를 하면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리고 말 위에 올라타기 전에 캐런을 보았다.

“말이 없으니 마을로 내려갈 생각은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알아요.”

“끝나면 어디든지 갑시다. 눈 덮인 설원이든 드넓은 해변이든 어디든 좋습니다. 가고 싶은 곳이 있습니까?”

“나중에 이야기해요.”

아직 머나먼 이야기다. 그리고 캐런은 그 미래가 정말로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캐런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레이몬드의 어깨를 잡고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짧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한숨 같은 입맞춤이었다. 캐런은 레이몬드를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잘 다녀오세요.”

캐런의 얼굴이 밝지 않자 레이몬드도 일부러 쾌활한 척했던 것이었는지, 약간 쓰게 웃었다.

“기왕이면 웃으면서 보내 줬으면 좋겠습니다만.”

“싫어요.”

“이러다가 제가 죽어서 못 돌아오면 평생 당신이 괴롭지 않겠습니까. ‘아, 그때 레이몬드에게 웃어 줬어야 했어!’ 하고 말입니다.”

“…레이몬드 경, 당신이 안 오면 그 뒤로 바로 자살하면 되잖아요.”

레이몬드가 복잡한 얼굴로 자세를 바로 했다. 캐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숙인다. 약간 신음 섞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음…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화내고 싶은데, 그게 또 맞는 말이니 뭐라 할 말이 없군요.”

“그렇죠?”

그들 사이에서 죽음은 더 이상 비극이 아니었다. 캐런이 죽으면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걸 안 이상 죽음은 그냥 넘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최소한 캐런에게는 그랬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보다 기다림이 더 무서웠다. 캐런은 레이몬드가 사망하면 그 즉시 자살할 생각이었다. 그날 전에도 죽을 수 있으니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일주일 내로 돌아오겠습니다.”

“안 오면 자살할게요. 기다리기 귀찮아요.”

“…그래도 끝까지 살았으면 좋겠군요.”

좀 더 낭만적으로 말해야겠다.

“당신 없는 세상에서 굳이 더 버텨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감격적이긴 합니다만, 제가 지금 노력하는 게 캐런, 당신이 살길 위해서라는 걸 좀 생각해 주면 안 되겠습니까?”

별로 안 통하는군. 하지만 캐런이 입을 다물자 레이몬드도 어깨를 으쓱이며 캐런에게 손을 내밀었다. 캐런에게 손을 달라는 뜻이었다. 캐런은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쉬며 손을 내밀었다.

“제 수명은 꽤 긴 편이니, 이번에도 짧지는 않을 겁니다.”

“그거 부럽네요.”

“그렇습니까? 한번 저보다 오래 사는 것도 시도해 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레이몬드가 손등에 입을 맞추고 물러났다.

“아무튼, 다녀오겠습니다.”

환한 미소는 아니라도 서로 떨떠름한 웃음을 짓고 헤어진다.

그 꼴이 우스워 다시 웃게 된다. 결국 캐런은 웃음으로 레이몬드를 보내게 되었다.

“나중에 봐요.”

부서지는 햇살 아래의 금발이 눈부시다. 캐런은 눈을 감았다. 바람은 신선하고 볼에는 꽃잎이 떨어졌다. 귓가에는 개울물이 흘러가는 소리와 새소리가 섞여서 평화롭기 이를 데 없었다.

그가 성공하기를.

노력하는 자는 그 결실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

그리고 밤이 되었다.

캐런은 홀로 침대에 누워 세월을 곱씹었다.

레이몬드는 집 안에 없다.

“…….”

캐런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반나절이 지났다. 레이몬드는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말이 한 마리도 남지 않았기에 마을로 내려가려면 걸어 내려가야 했다. 못 걸을 거리는 아니었다. 아침까지 기다려야 할까?

아니, 아니다. 캐런은 나가고 싶은 마음을 눌러 참았다. 자신이 괜히 나서서 행여나 곰이라도 만나거나 지나가는 강도에게 당해 죽는다면 다음 생에 레이몬드를 볼 면목이 없다. 이번에는 참기로 했으니 참아야 한다.

하지만 집 안을 돌아다니는 것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캐런은 일어났다.

“…후우.”


 

혼자 잠드는 침대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정신은 점점 더 맑아졌고 캐런은 눈을 어둠 속에서 깜빡이다가 일어났다.

도저히 잠이 들 수 없었다.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은 너무나 답답했다. 고작 반나절이 지났을 뿐인데 견디기가 힘들었다. 몸을 움직여서 피곤하게 만들어야 했다.

“…하아.”

캐런은 침대에서 내려와 등불을 들었다. 안에 있는 초에 불을 붙였다. 불이 타오르자 딱 그만큼의 불빛이 생겼다. 캐런은 등불을 들고 일어났다. 혼자 있으니 굳이 옷매무새를 갖출 필요도 없었다. 거울을 본다. 헝클어진 머리 사이로 안광이 빛난다. 촛불의 불빛이 음산함을 더했다. 스스로의 모습인데도 낯설다.

‘약간 무섭네.’

캐런은 머리를 손으로 넘겼다. 우습게도 소름이 돋았다.

왜 자신은 무서운 걸까? 사람을 죽이기도 했고 죽음도 무섭지 않으면서, 혼자 있는 대저택에서 눈을 뜨자 공포심이 들었다. 자신은 결국 나약한 사람인 것일까. 레이몬드는 혼자 있을 때 아무런 공포심도 들지 않았을지 궁금해졌다. 레이몬드는 뭐든지 별로 안 무서워할 것 같기는 하다.

캐런은 웃었다. 레이몬드가 무엇을 무서워한다는 것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것도 혼자 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니. 레이몬드는 평범하게 주변에 사람이 있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할 것이다. 자신이 이것으로 무서워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겠지. 아니면 무서움은 사람이 가할 위협에 비하면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캐런은 귀신처럼 보이는 자신의 모습에서 얼굴을 돌렸다.

사실 자신의 본질은 귀신과 다르지도 않았다. 안식을 얻지 못하고 영원히 구천을 떠도는 자. 사람들과 섞이지 못하고 있어야 할 곳을 떠돈다.

캐런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는 다르다. 레이몬드가 있다. 몸에 흐르는 것은 잉크가 아니라 붉은 피이며 반드시 세상으로 나갈 것이다. 둘이서 같이.

“…혼자 있으니 정말 넓구나.”

복도를 걸었다.

테스 대저택은 참으로 컸다. 캐런은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밤의 산책이었다.

모험하는 것 같아 두근거리기도 했다. 이곳은 어차피 자신의 집이나 마찬가지인데도 마치 처음 도착한 곳처럼 생소했다. 예전에는 수많은 사용인들이 항상 수발을 들었는데 지금은 아무도 없다.

레이몬드가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사람들의 부족함을 채워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여럿이 없어서 느끼는 상실감보다 한 사람이 없는 상실감이 훨씬 컸다. 100에서 1로 가는 것보다 1에서 0으로 가는 것이 훨씬 무거웠다. 캐런은 텅 빈 복도를 걸으면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복도는 어두웠지만 조금 더 나아가니 큰 메인 홀이 나왔다.

메인 홀에는 유리창이 많이 달려 있었기에 달빛이 쏟아졌다. 어두운 밤이라도 달빛이 바로 비춰지고 있어서인지 그렇게 어둡지는 않았다. 그래도 밤은 밤이었다.

홀은 매끈한 대리석 바닥이었다. 레이몬드가 매일 쓸고 닦았기에 밤에도 빛이 났다.

‘이제 내가 닦아야 하나?’

레이몬드는 자신이 없는 동안 굳이 청소할 필요가 없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청소하다가 미끄러져 죽기라도 하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식사도 육포라거나, 군대식 식사 등 별 조리가 필요 없는 것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하지 않으면 먼지가 내려앉을 것이고, 캐런은 자신이 더러운 것을 참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하녀로 있을 때 기본적인 것은 배운 적이 있었다. 이셀라의 말동무를 빙자한 화풀이 대상이 되어 주는 것이 주 업무였지만, 그래도 아예 안 한 것은 아니었다. 이 저택을 매일 치우다가 게으름을 피우다가 하는 것을 반복하면 시간은 금방 지날 것이다.

자신이 죽는 날을 기다리자.

그리고 캐런은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죽지 않을지도 모른다. 레이몬드의 말대로 천수를 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적은 일어났다. 레이몬드는 기억했고 그날이 되기 전에 캐런은 죽을 수 있었다. 어쩌면 자신이 죽지 않고 그날의 다음날, 또 다음날도 맞이하게 될지 모른다. 그날은 자신의 진정한 생일이리라.

“어디든 갑시다. 새하얀 설원이든, 끝없이 펼쳐진 바다든.”

캐런은 레이몬드의 말을 떠올렸다. 그를 생각하자 입술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어디를 가는 곳도 물론이고, 나중에 성공하면 이곳에서 축하를 하자.

모든 사람을 모아서 자신과 레이몬드의 진정한 시작을 하자. 자신들이 결국 어딘가로 떠날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사람, 사회의 구성원들이라는 것을 축하하자.

자신들의 죽음을 축복하자. 여기서 결혼을 축하했던 것처럼.

말할 수 없어도 축하를 받자.

이곳에서 일어났던 결혼식을 기억한다.

언젠가는 아버지도 살아 있었다. 그때는 대부분이 좋게 좋게 끝이 났었다. 언제였더라. 가끔은 그런 때가 있었다. 초반에는 캐런이 레이몬드에게 사랑을 요구했고, 그가 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레이몬드는 정말로 그럴듯한 사랑을 캐런에게 보여 줬었기 때문에, 끝은 언제나 해피엔딩이었다. 레이몬드는 베르딕이나 다른 경쟁자나 그 어떠한 고난이 있어도 반드시 캐런에게 돌아왔다. 그래서 그는 캐런의 기사였고 그날까지도 그러하였다.

레이몬드가 좀 더 못났으면 자신은 금방 포기할 수 있었을까?

캐런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자신의 인생을 연애소설이라고 백여 년간 믿을 수 있었던 것, 또한 처음부터 그렇게 받아들인 것은 레이몬드가 너무 잘난 탓이었다. 캐런은 웃었다. 레이몬드가 좀 더 평범하고 더러운 남자였다면, 자신은 좀 더 빨리 의심했을까.

결혼식을 기억한다.

정확히 몇 번이나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여러 번 있었다.

이곳에서 연회가 열릴 때, 구두가 바닥에 울리는 소리가 시끄러우면서도 경쾌했었다. 캐런은 발을 굴렀다.

타악.

하지만 지금 자신이 신은 것은 구두가 아닌 가죽으로 만든 슬리퍼였기에 조용한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캐런은 등불을 들고 중앙 계단에 앉았다.

혼자 있으니 생각 말고는 할 것이 없었다. 일어나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귀찮아졌다. 캐런은 누워만 있다가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일어나야 하는데.

“…….”

달빛은 환했고 조용하지만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저택이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멀리서 풀벌레 소리와 부엉이의 소리, 그리고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응?”

가만, 캐런은 이상한 소리에 고개를 흔들었다. 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눈을 떴다. 이상한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리라.

흑….

적막만이 감돌았다.

자신 혼자만이 존재하는 세상.

정말로?

지금 자신은 혼자 있을까?

캐런은 문득 그 생각이 들었다. 눈을 감았다가 떴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환청인가? 캐런은 자신의 나약함에 한탄했다.

“…혼자 있으니까 그래.”

하지만 약간 무서운 것은 여기서 사람이 죽어 나갔기 때문이리라. 캐런은 다시 일어났다.

손톱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을까.

“…….”

레이몬드가 없을 때 찾아보는 것이 좋을까.

이미 죽었겠지. 하지만 단 한 명일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한둘이 아닐지도 모른다. 캐런은 두려워하는 자신이 싫었다.

이런 감각은 익숙하다. 무서워서 공포에 떠는 밤은 익숙하다. 이럴 때는 누구라도 있어야 한다. 레이몬드가 있어야 하고, 최소한 낸시 같은 하녀를 불러야 한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할 때가 있었다.

그래서 사람을 죽였다.

무언가가 너무 무서우면 일부러 익숙해져야 한다.

어둠을 보고 있는 것이 무서우면 어둠 속에 들어가면 된다. 죽는 것이 무서우면 살인마가 되면 된다. 그럼 조금이나마 괜찮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혼자 있는 것이 무서우면?

집을 뒤지면 다른 사람을 발견할 수 있을까?

무서울 때 더 무서운 시체를 발견하면 덜 무서워지지 않을까?

실로 자신이 귀신을 무서워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사람이 죽은 뒤에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이 왜 공포의 이유가 될까.

문득 든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에이 씨.”

역시 총을 들고 움직여야 했다. 비록 권총이라도 가까이서 머리를 쏘면 죽는다. 약한 자신이라도 총이 있으면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그 묵직한 무게감이 필요했다.

캐런은 다시 계단을 올라가면서 아래를 둘러보았다. 그때 레이몬드가 청소를 하던 것은 저 홀의 바닥이었다. 그리고 손톱이 떠올랐던 것도 저곳을 닦던 대걸레에 묻은 것이었다.

‘사람이 여기서…?’

그는 이 집 안 어디에서 누군가의 손톱을 뽑았다. 누군가가 저 홀의 바닥에서 피를 흘렸을까? 어디에서 어디로 갔을까? 레이몬드는 시체를 완전히 치웠을까? 단 한 명이었을까? 지금 캐런은 혼자 있는 것이 맞을까?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럴 때는 확인을 해야 한다. 어둠이 무서울 때는 어둠 안에 들어가야 한다. 모르는 것이 무서울 때는 알아야 한다.

캐런은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탁탁탁.

발걸음 소리가 크게 들렸다.

캐런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여기서 피를 닦았을까? 그렇다면 지하실에 사람을 넣어 뒀을까. 캐런이 여기서 지냈다 하더라도 레이몬드와 내내 같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혼자서 여러 가지 일들을 했다.

이상한 소리는 설마 다른 사람이 있어서 나는 소리일까.

주위를 둘러보았다. 홀은 넓었지만 중앙 계단의 뒤편에는 지하실로 내려가는 통로가 있었다. 캐런은 지하실의 문 앞에 섰다. 지하실은 잠겨 있었다.

“…….”

동화가 생각난다. 남편의 방에 몰래 들어간 부인이 거기서 시체를 발견한다. 남편의 비밀을 캔 부인은 놀라서 열쇠를 떨어뜨리고 열쇠에 묻은 피는 아무리 애를 써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돌아온 남편은 아내를 죽였다.

‘나는 아니야.’

캐런은 이야기를 부정했다. 자신의 이야기는 아니다. 자신은 레이몬드를 이해하고 싶어서 이러는 것이다. 그리고 레이몬드도 굳이 가지 말라고 말하며 시험하지 않았다. 그저 굳이 알 필요 있겠느냐는, 어디까지나 캐런의 안위를 생각한 이야기였다.

이야기 속의 아내는 남편을 몰랐다. 남편도 아내를 몰랐다. 그는 아내를 잘못 선택했다. 자신이라면… 자신은 사랑을 잡기 위해 기꺼이 남편과 같이 도끼를 들 것이다.

덜커덩.

그때였다. 캐런은 만지던 자물쇠를 내려놓았다.

이상한 소리가 점점 더 강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것은 지하실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바깥이었다.

“…젠장.”

캐런은 급하게 자신이 들고 있는 등불의 불을 껐다. 사람이 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덜컹덜컹.

캐런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레이몬드를 원망했다.

역시 이곳에 혼자 있어서는 안 됐다. 레이몬드는 잘못 판단했다.

급하게 자신의 치맛자락을 부여잡고 계단 위로 올라갔다. 총을 잡아야 했다. 자신이 잠들 수 없었던 것은 불안함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사라진 바로 당일부터 닥칠 불안을 생각했어야 했다.

쾅!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시나.”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누군지 확인해 볼 필요도 없었다.


 

베르딕이 수십 명의 장정들과 함께 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죠?”

캐런이 앙칼진 목소리로 베르딕을 노려보았다. 베르딕은 캐런이 뭐라 하든 그다지 신경 쓰지도 않고 들어왔다.

“우리 할 말이 많지 않나?”

“지금 한밤중에 이게 무슨 짓이냐구요! 당장 나가세요!”

물론 베르딕은 캐런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베르딕은 캐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자신 뒤에 서 있는 남자들에게 명령했다.

“캐런… 캘리라는 저 여자는 저리 치워 둬라.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 두고.”

“알겠습니다.”

“…이거 놔요! 지금 주인도 없는 집에 들어와서… 불한당들 같으니!”

“입도 막아 두고.”

“예.”

버둥거리는 캐런을 향해 남자들이 다가왔다. 거친 손이 캐런의 몸을 묶었고, 이내 입도 천으로 틀어막혔다. 캐런을 응접실의 소파에 강제로 앉히고는 베르딕이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부터 다섯은 1층부터, 세일런 씨는 위층부터 하나하나 뒤져 봐 주시길 바라오.”

“다락방과 보일러실 같은 곳부터 뒤질까요?”

저 남자는 왜 여기에 있지? 캐런은 남자의 얼굴을 보고 입을 벌렸다. 저 남자의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귀즈 왕세자의 부하였다. 베르딕과 귀즈 왕세자는 생각보다 더 깊게 연관이 되어 있는 것인가? 레이몬드는 여기까지 다 알고 있는 것이 확실한가?

베르딕은 그에게, 베르딕의 부하에게 명령했다.

“아니, 우선은 일반적인 방을 전반적으로 확인한 뒤에 특수실을 뒤지는 것이 더 효율적이겠군.”

“도면은 있습니까?”

“없소.”

“인력으로 하나하나 뒤지는 수밖에 없겠군요.”

남자들이 흩어졌다. 베르딕도 그들과 함께 이동했다. 베르딕 에반스는 말 그대로 집 안을 헤집었다. 수많은 남자들이 집 안 구석구석을 뒤졌다. 이셀라의 흔적이 있을까.

“오랜만이군… 뭐, 고작 이틀 지났을 뿐이지만.”

“…읍.”

“그동안 정말 보고 싶었다네.”

베르딕은 캐런을 내려다보았다. 캐런이 아닌 다른 여자라고는 역시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젊은 여자가 단둘이 있는 젊은 남자를 옹호하는 이유야 뻔했다. 자신의 딸도 레이몬드의 얼굴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니까. 어린 여자애들은 그 속에 든 것이 무엇이든 겉만 반지르르 하면 홀딱 넘어가고는 했다. 어느 정도까지 넘어갔는지는 모르지만.

“당신이 입을 열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얌전히 있으시오.”

베르딕은 캐런을 내려다보고는 자신도 위로 올라가서 찾기 위해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처음은 서재였다. 먼저 들어간 남자들이 안을 헤집고 있었다. 귀즈 왕세자가 보낸 사람들이었다. 그중 하나가 베르딕을 보면서 손을 들어 그의 걸음을 세웠다.

“…베르딕 에반스 씨, 움직이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무엇이 문제요?”

“함정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뭐?”

베르딕은 멈춰서 내려다보았다. 밤이기에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눈을 가늘게 뜨고 천천히 보니 뭔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뭐지, 이건?”

“실톱입니다. 뭐, 그렇다고 해서 당장 다리가 베여 나가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넘어지기에는 딱 좋지요.”

“왜 이런 장난질을.”

“여성 혼자 있으면 위험하니까 그런 것일까요? 우리가 없었으면 좀 다쳤겠군요.”

“…고맙게 되었군.”

베르딕이 눈썹을 씰룩였다. 레이몬드는 정말이지 하나하나 의심을 뚝뚝 흘리고 다녔다. 자신의 저택에서 함정을 설치한다니, 마치 자신들이 침입할 것을 예상하고 만든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럼 좀 더 빨리 움직일 수는 없는 것인가?”

“예, 실톱 하나가 발견된 이상 어디에 어떤 것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베르딕 씨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세이어테스 남작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오.”

베르딕은 초조했다. 레이몬드가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그는 레이몬드가 돌아오기 전에 충분히 집 안을 뒤지고 싶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장난질을 쳐 놓았다니. 레이몬드가 돌아오면 더 위험해질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태평했다. 자기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베르딕은 자신의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캐런은 묶여서 생각했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레이몬드는 갖가지 함정들을 설치해 두었지만 철저히 준비한 것은 또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딸을 절대 찾지 못할 겁니다. 이미 제가 다 확인했어요.”

하지만 그것은 캐런이 없었던 때였다.

캐런은 지난 몇 번, 듈란을 죽이려다가 일찍 죽었다. 레이몬드가 실험을, 복수를 성공했던 것은 그 뒤의 일 아닌가. 그가 성공했던 것은 집 안에 캐런이 없었기 때문이다.

“젠장할!”

멀리서 베르딕이 자신의 분에 못 이겨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 들렸다. 레이몬드가 설치한 함정에라도 걸린 것일까?

“방을 들어갈 때는 서재와 부엌과… 제가 따로 정리해 드릴 테니, 그곳은 들어가지 마십시오.”

“이게 뭔데요?”

“장난질입니다. 당신이 혹시나 죽을까 봐 심한 것은 설치해 두지 않았지만 그래도 위험하니까요.”

“…알겠어요.”

하지만 그것들은 지극히 단순했다. 어떤 방에서는 바늘이 튀어나와 손을 찌를 정도이고, 어디서는 책상이 넘어져 발을 찧겠지만, 그렇다고 총이 튀어나오거나 도끼가 덜컹 떨어지는 그런 함정은 없었다.

레이몬드는 왜 저런 것을 설치했을까?

베르딕은 무시할 만한 남자가 아니었다.

집요했고, 노련했다. 어떤 사소한 곳에서도 증거를 잡아 캐런에게 다시 복수하러 돌아오고는 했다. 캐런에게서 레이몬드를 찾아내고, 레이몬드에서 이셀라를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들에게 복수하러 돌아올 것이다. 캐런은 그리고 그 손톱을 생각했다. 그 손톱의 주인이 이셀라라면 레이몬드는 충분히 처리를 했을까? 제대로 완벽하게 끝을 냈을까?

‘레이몬드 경, 사실 청소 잘 못하잖아.’

캐런은 신음을 흘렸다.

레이몬드는 자신만만하게 말하고는 했지만 가끔씩 허술한 부분이 있고는 했다. 쉰 명이 넘는 사용인들이 관리하는 곳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눈에 띄는 큰 부분들 위주로 쓸고 닦는 것이었다. 자신이 손톱을 발견했던 것처럼, 약간의 실수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시체는 잘 처리했어야 했는데.’

캐런은 레이몬드가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 같아서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이셀라 하나뿐인지 그것 또한 걱정이 되었다.

그렇다고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캐런은 꽁꽁 묶여 있는 자신이 조금 한심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도 알았다. 장정 스무 명이 넘는 자들이 왔다. 레이몬드가 무슨 짓을 했을지 몰라도 저 사람들을 전부 제압하는 것은 레이몬드나 가능한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어떻게 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었다. 이내 생각은 레이몬드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대체 뭔 생각인거예요?

“캐런 하이어!”

베르딕 에반스가 화난 목소리로 위에서 자신을 부르자 속이 쓰려왔다. 레이몬드가 무슨 짓을 또 하긴 한 모양이었다.

베르딕은 캐런 하이어를 노려보면서 급한 발걸음으로 내려왔다. 캐런은 그를 빤히 노려보았다.

“대체 레이몬드 경과 자네는 무슨 사이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

하지만 캐런은 입이 막혀서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멍청한 물음을 했다는 것을 깨달은 베르딕은 캐런의 입을 막은 천을 격하게 벗겨 냈다.

“쿨럭, 쿨럭.”

“이 저택에서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말하시오. 당장!”

캐런은 얼굴을 찡그리고 기침을 했다. 자세가 불편했다. 목도 아팠다.

“갑자기, 집주인도 없는 테스 대저택에 와서… 이 무슨 짓인가요. 신사분.”

“날 모르는 척하는 것은 재미없소, 캐런 하이어.”

“제 이름은 캐런 하이어가 아니에요.”

캐런은 지난번에 둘러대었던 이름을 다시 떠올렸다.

“제 이름은 캘리예요.”

“그 성의 없는 가명은 집어치우시오, 캐런.”

“제가 아닌 것을 맞다고 할 수는 없어요. 전 캘리고.”

순간적으로 혀가 꼬일 뻔했다. 목을 가다듬고는 다시 말했다.

“저를… 레이몬드 경이 살려 주셨어요. 숲 속에서 강도들을 만나 가족들을 잃고, 저도 죽임 당하려는 찰나에 그분께서 절 살려 주시고, 이 저택에서 살게 하셨어요.”

“그 가족들은?”

캐런은 낸시를 생각하며 나름대로 애틋한 목소리를 내려고 했다. 가족 비슷하긴 하지. 죽기도 했고.

“전 떠돌이 집시들과 같이 살았어요. 그리고 전부 죽었답니다.”

“하!”

베르딕이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캐런의 턱을 쥐었다. 캐런의 볼이 그의 손 안에서 눌렸다. 베르딕이 캐런을 노려보며 거의 분노로 떠는 목소리로 말했다.

“날 아주 병신으로 아는군.”

“…정말이랍니다. 저는 떠돌이 출신이며 레이몬드 경의 크나큰 은혜를 입어….”

“신발을 벗겨. 묶은 것도 풀어 버리고.”

뒤에 있던 부하 중 하나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예?”

“어서. 설마 이 여자 하나가 위험하다는 헛소리는 안 하겠지.”

“아, 예. 예.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의 주인은 참을성이 없었다.

“뭐, 뭐하는 짓이에요?”

캐런이 당황하든 말든 남자는 캐런의 신발을 벗겼다.

“양말도.”

“예.”

“참나…. 지금, 이게 무슨….”

새하얀 발이 드러났다. 그리고 캐런의 하얗고 고운 손이 드러났다. 캐런은 그가 왜 그랬는지 알았다. 제대로 된 거짓말이 아니니 바로 이렇게 티가 났다.

“누가 떠돌이 집시 출신 하녀라고? 이 책보다 무거운 건 들지도 않은 손이? 굳은살 하나도 박이지 않은 발이?”

베르딕은 캐런의 손과 발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레이몬드 님이 저를 많이 도와주셔서요.”

“하녀를 돕는 귀족이라고!”

“그분은 당신과 다르시니까요.”

캐런은 고개를 들고 말했다. 베르딕의 이글거리는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사실 생각해 보니 그녀로서는 더 이상 무서워할 것이 없었다. 그리고 무서워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가 믿든 말든 상관없었다.

그리고 레이몬드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약간은 알 것 같았다.

캐런은 베르딕이 분노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웃겼다. 그리고 베르딕에게 진실을 이야기 할 생각도 없었다.

“네. 저는 떠돌이였고, 의지할 사람 하나 없었답니다. 레이몬드 경만이 제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어요.”

웃음을 참자.

베르딕은 지금 자신을 죽이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지만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캐런은 얌전하게 대답했다. 저는 몰라요.

“캐런, 캐런 하이어. 계속 이러시는 건 좋지 않습니다.”

뒤에서 린드가 자신의 안경을 고쳐 쓰면서 좀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캐런을 달래기 시작했다. 채찍 이후에 당근을 시도하는 건가. 재미없는 짓이다.

“당신은 지금 속고 있습니다. 여기 계신 베르딕 에반스 씨의 외동딸인 이셀라 에반스가 실종된 지 벌써 반년이 다 되어갑니다. 그 유력한 용의자가 레이몬드 세이어테스 남작입니다.”

“…….”

자신도 안다. 캐런은 눈을 감았다. 듣고 싶지 않았다.

“용의자란 말입니다.”


 

“…….”

저것은 거짓말이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제대로 된 용의자가 아니다. 그것은 확실했다. 왜냐면 이곳의 귀족은 레이몬드였고, 그들은 지금 어디까지나 무단으로 침입해서 캐런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이런 권한이 없었다. 하지만 캘리라는 하녀를 연기하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우기는 것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캐런이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했는지 린드는 계속 말을 이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대저택에서 둘만 지낸다는 것이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이것은 결코 정상이 아닙니다.”

“레이몬드 님은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세요.”

사실 거짓말이지만.

캐런은 속으로 낄낄거리면서 대답했다. 하지만 린드는 그것까지는 모르는지 계속 열성적으로 캐런에게 말했다.

“이런 곳은 사람 100여명은 들여서 관리해야 제대로 돌아갑니다. 또한 그는 이 지역의 남작으로서 의무도 제대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캐런, 좋아요. 캘리. 레이몬드 님을 믿으려는 마음은 알겠지만, 그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

캐런이 침묵하거나 말거나 그는 말을 더 이었다. 뒤의 베르딕을 더 의식하는 듯한 말이었다. 린드가 캐런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게 아니라면 참을성을 잃은 베르딕이 당장이라도 캐런의 뺨을 내리칠 것 같았다.

“이셀라 아가씨는 그분의 약혼녀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되었습니다. 또한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저택의 모든 사용인들이 해고당했습니다. 그중에는 그의 친척도 있었고, 그를 어릴 때부터 돌보던 사냥터지기도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내쫓고 혼자 집 안에 틀어박힌 남자를 어떻게 믿습니까?”

“…….”

레이몬드가 그러는 것은 온전히 캐런을 위해서였다.

“전 당신이 캐런 하이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실종되었고, 그 캐런과 얼굴이 똑같기 때문입니다.”

“저는 캐런이 아닌 캘리예요.”

“…집어치워.”

베르딕이 뒤에서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린드가 다급하게 캐런에게 다시 말했다.

“신사분, 몇 번이나 말하지만 아닌 것을 맞다고 할 수는 없어요.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고, 레이몬드 경도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자신이 생각해도 믿지 않을 말이었지만, 캐런은 앵무새처럼 그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캐런, 당신은 캐런이어야 합니다.”

“제가 답을 줄 수가 없으니 어쩔 수가 없네요. 신사분은 돌아가셔서 신을 찾으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린드가 난처한 얼굴로 베르딕을 돌아보았다. 베르딕 에반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 줘라, 그 여자는 분명 캐런 하이어다.”

“알겠습니다.”

남자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캐런 하이어 양,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하이어 영주님은 당신이 사라지고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셨습니다. 돌아가야 합니다.

“아가씨, 대답해 주십시오. 당신은 캐런 하이어가 맞습니까? 저희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우리와 같이 이곳을 나가야 합니다. 하이어 영주를 매장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얼굴을 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캐런은 뜻밖의 이야기에 고민했다. 오랜만에 드는 익숙한 고민거리였다. 여기서 어떤 표정이 좋은지 생각해야 했다. 어떤 반응이 좋은지 골라야만 했다. 지금 자신 스스로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알기 어려웠다. 또다시 세상과 유리되는 감각이었다.

“…저는.”

지금까지의 반응을 유지하자면 캐런은 캐런이 아닌, 캘리로서의 표정만을 내밀어야 했다. 베르딕이 아무리 믿지 않고 윽박지른다고 하더라도 그 태도를 고수해야 했다. 자신에게는 아버지가 없으며 자신은 떠돌이 집시들의 손에서 자랐고, 유일한 가족은 레이몬드 하나라고 해야 했다.

하지만 베르딕은 믿지 않는다. 그는 캐런이 캐런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캐런도 그것을 안다. 하지만 그가 속지 않을 거짓말을 계속해야 한다. 레이몬드가 지금 없기 때문에 캐런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반복적으로 같은 말을 해야 할 뿐이다. 지금 캐런으로서의 모습을 다시 보여야 하는가?

하지만 자신은 지금 슬픈가? 하지만 캐런은 슬프지 않았다. 새삼스럽게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기란 힘들었다. 아버지는 너무 자주 죽었다. 자신에게 아버지는 활자였다. 너무 오랫동안 그랬다.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너무나 어색했다.

“당신은 사랑에 빠지고 모든 힘든 일은 끝이 날거야.”

자신은 누군가의 자식이 아니라 항상 누군가의 연인이었으며, 원수였으며, 썅년이었다. 캐런은 사실 친부보다 베르딕이 더 친숙했다. 아버지가 죽은 것이 캐런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새삼스럽게. 그냥 그의 죽음은 레이몬드에게서 동정을 더 쉽게 사기 위한 수단 중 하나였을 뿐이다.

하지만 이 남자들은 눈앞에 있는 캐런이 어떤 여자인지 모른다.

그러니까 이렇게 평범한, 사랑에 빠져서 철없는 행동을 하는, 어쩌면 약간 미친 것 같은 사춘기 소녀를 대하듯이 하고 있는 것이다. 캐런은 자신을 달래듯이 말하는 린드를 보았다. 그는 마치 이셀라를 대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하이어 영주님은 당신을 찾아 헤매시다 슬픔에 지쳐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당신이 우리와 같이 마을로 내려가, 하이어 영지에 전보를 부치면 거기서 답이 올 겁니다. 아니, 내일이면 그 부고가 지역 신문에도 실리겠군요. 그걸 가지고 오게 할 수도 있습니다.”

캐런은 고개를 저었다.

“전 지금 당신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다만 제가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거죠. 전 캐런 하이어가 아니라 캘리예요. 그리고 제게 소중한 사람은 레이몬드 경 하나뿐이랍니다.”

차라리 지난번에 아버지가 톰에게 살해당했을 때,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작음에 통탄했던 그때가 더 안타까움 비슷한 감정이 들었던 것 같다. 이번에 아버지가 죽었다고 해서 새삼스럽게 슬퍼하기는 힘들었다.

생소한 감정은 들었다. 보통은 사업이 망해서 앓다가 돌아가셨는데, 이번에는 내가 사라졌다고 돌아가셨구나. 나 때문에도 죽는 분이었구나. 자살도 하지 못하는 분이었는데, 자식이 행방불명되자 자살에 성공하셨구나. 그냥… 그렇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끝.

어머니는 그냥 아이가 생겨서 아버지와 결혼한 걸까. 아니면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어서 고른 거였을까. 하지만 무엇이든 별 상관은 없을 것 같았다.

캐런은 거듭해서 부정했다.

“그분이 누구신지 저는 몰라요. 전 그분의 딸이 아니니까요.”

캐런은 떨리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웃기고 있군.”

“에반스 씨. 당신은 지금 잘못 짚고 있어요.”

하지만 캐런이 아무리 담담하게 대답해도 베르딕의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는 캐런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는 캐런이 캐런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남자에게 단단히 미쳤군.”

“실례되는 말은 삼가주시겠어요?”

베르딕은 캐런에게 화를 냈다.

“왜 거짓말을 하는 거지? 당신의 아버지가 죽었다고. 이걸 모르겠소?”

“…….”

“아가씨, 이것을 봐 주십시오.”

린드가 캐런에게 돌돌 만 그림 하나를 내밀었다. 캐런은 그것을 받았다. 캐런의 초상화였다. 물론 자신의 얼굴과 똑같았다. 자신을 찾는 전단지였다.

“저와 닮았군요. 하지만 전 이 사람이 아니에요.”

“계속 이러시는 것은 곤란합니다. 당신을 아는 사람을 더 데려올 수도 있습니다.”

“누구를 데려오시든 제 대답은 똑같을 거예요. 전 캐런이라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캐런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 연이은 부정에 베르딕이 이성을 잃었다. 베르딕은 캐런의 어깨를 강하게 잡았다.

“…신사분, 아파요.”

이미 신사라기엔 거리가 먼 모습이기는 했다.

베르딕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캐런을 부여잡았다.

“당신 아버지가 당신이 사라져서! 당신이 여기에, 그 뻔지르르한 레이몬드에게 홀려서 지내는 동안! 매일매일 걱정하고 눈물만 흘리다가 결국 목매 죽었다고! 그런데 그게… 어떻게.”

캐런은 기가 막혔다. 그리고 우습기까지 했다. 누가 누구에게 무슨 훈계를 한단 말인가. 지금 베르딕이 캐런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자신의 아버지에게 미안하지도 않나? 어떻게 네년은….”

“베르딕 씨!”

만약에 단둘만 있었다면 베르딕은 캐런을 두들겨 팼겠지. 하지만 어느새 모든 하인들, 그리고 베르딕의 하인이 아닌 다른 무리의 사람들도 전부 내려와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떻게 자식이….”

어떻게 자식이 부모에게 그럴 수 있냐고? 지금 그가 자신에게 훈계를 할 수 있는 건가?

지금 누가 누구에게.

캐런은 베르딕을 안다. 베르딕의 악한 성미를 안다. 그는 이제까지 몇 번이나 캐런의 목을 쳤다. 그것뿐 아니다. 그는 천성이 이기적이고 제 부만 밝히는 자다.

이제까지 수십 번이나 하이어 영주는 베르딕 때문에 목을 매었고, 수도 없이 많은 자들이 저 자 때문에 죽었다. 베르딕이 군수 중개업을 통해 돈을 벌었고, 그가 여기저기서 일부러 분쟁을 조장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백색산맥 너머에서 전쟁이 끝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돈을 대는 귀족들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고, 세이어테스 남작 가문이 그에게 넘어간 이유는 그가 병이 있는 종자를 팔았기 때문이다.

베르딕 때문에 죽은 사람은 간접적으로 수백, 수천, 수만이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지금 자신에게 어찌 자식으로서 그럴 수 있냐고. 왜 아버지의 죽음에 신경 쓰지 않느냐고 분노하고 있다.

“말을… 하시오. 캐런 하이어.”

“저는 캐런이 아니에요.”

캐런은 계속해서 자신이 캘리라는 설정을 밀고 나가기로 했다. 그가 믿든 믿지 않든 상관은 없었다. 베르딕은 자신에게서 그 이상 답을 얻지 못할 것이다.

캐런은 묵묵히 허공을 응시했다.

그리고 이것이 캐런으로서의 최선이었다.

“도저히 입을 열 것 같지가 않습니다.”

린드는 캐런에게서 나와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베르딕은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홀을 다섯 바퀴 이상 돌아야 했다. 캐런에게서 이셀라에 대한 정보를 얻기란 요원해 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캐런이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고, 레이몬드에 대해서도 계속 좋은 사람이라는 말만 했다.

“어떻게 해서든 인정하게 만들어.”

“그 말인 즉슨.”

린드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는 베르딕에 비하면 좀 더 일처리를 부드럽게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비교적이었다. 린드 또한 캐런의 묵묵부답에 약간 질려 있었다. 린드가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베르딕은 바로 부정했다.

“아니, 아니다.”

베르딕은 자신의 말을 취하했다. 자신의 성질 같아서는 캐런이 아니라고 하는 여자에게 강압적으로 폭력을 가해서라도 무엇이든지 듣고 싶었다. 하지만 저 여자는 캐런이 분명했고, 레이몬드가 돌아와서 이것을 빌미로 어떻게 물고 늘어질지 모른다.

‘그냥 죽여 버리고 싶군.’


 

하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자신의 부하들을 닥치게 하는 것도 문제지만, 일을 좀 더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사람을 빌린 것이 문제였다.

“베르딕 씨.”

귀즈 왕세자의 하수인인 가일이 베르딕을 불렀다. 어느새 왔는지 몰랐던 베르딕은 조금 놀랐다. 가일은 그에게 찌푸린 얼굴로 말을 했다.

“베르딕 씨, 아무래도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저택을 조사하는데 말이오? 아무리 그래도 이 인원이 있는데 그렇게 오래 걸린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자신을 책망하는 베르딕에게 가일이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집의 주인이 방마다 약간의 장난을 쳐 놓았습니다. 아직까지 그렇게 치명적인 것은 나오지 않았지만, 베르딕 씨가 생각하시는 것처럼 레이몬드 경이… 의심스럽다면, 더더욱 천천히 조사해야 합니다.”

“그가 돌아오기 전까지 최대한 조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소?”

남자가 베르딕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의심 하나만으로 저희가 그 정도의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까? 저희는 그 정도까지의 일이라고 듣지 않았습니다.”

베르딕은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렇다고 더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저 남자들은 자신의 하수인이 아니었다. 귀즈 왕세자에게서 빌린 사람들이었다. 귀즈 왕세자는 사람을 빌려 주었지만, 그렇다고 저들이 죽거나 다치면 귀즈 왕세자에게 빚을 지게 된다. 증거 없이 의심만으로 빌린 것이고, 또한 레이몬드는 자신이 멋대로 주물럭거릴 수 있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젠장.’

움직이기가 힘들다. 베르딕은 자신의 수염을 매만졌다.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결정을 내려야 한다.

베르딕은 결정했다.

“그렇다면 레이몬드 세이어테스 남작이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머물도록 하겠소.”

“…미쳤군요?”

캐런은 기가 차서 입을 벌렸다. 하지만 베르딕은 캐런을 보지도 않고 남자들에게 말했다.

“방문객을 접대하는 것은 귀족의 의무. 우리는 우연찮게 다시 돌아왔고 어쩔 수 없이 머물게 된 거요. 그가 돌아오면 오히려 고마워해야겠군. 그동안 집을 잘 돌보아 주면 될 테니.”

“괜찮으신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소?”

“미쳤네요.”

어떻게 저런 뻔뻔한 소리를 할 수 있지. 캐런은 그런 얼굴로 베르딕을 올려다보았지만, 베르딕에게 익숙한 그의 부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어떻게 할까요. 원래 기한은 일주일이었습니다만.”

“좀 더 미뤄 달라고 그분께 부탁해 주었으면 좋겠군.”

남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캐런은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이제까지 이 시기에 베르딕의 손아래 없던 적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베르딕이 캐런에게 위험을 가하던 시기가 돌아온다. 자신은 이번에 그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정말로, 그날을 피할 수 있을까?

베르딕은 선택했다.

그리고 선택한 후에는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베르딕은 뻔뻔하게도 레이몬드의 저택에서 정말로 살 생각이었다. 레이몬드가 돌아오기 전까지 그는 계속해서 그의 저택을 뒤질 생각이었다.

캐런은 기가 막혔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베르딕은 사람들을 불렀고, 대대적으로 저택을 뒤지고 있었다. 레이몬드가 돌아온다 하더라도 그에게 뭐라 하기 어렵도록 왕실의 직인이 찍힌 서류까지 들고 왔다.

“이걸로 내가 이 저택에 있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소.”

“법보다 예의의 문제라고는 생각 안 하나요?”

“후에 청소를 하면 되는 문제지. 의심이 해결된다면 레이몬드 남작으로서도 좋을 것이오. 그리고 당신에게도 말이오.”

베르딕은 일축했다.

캐런은 어이가 없었지만 베르딕에게 자신이 반항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캐런은 베르딕과 다른 남자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더 이상 거세게 저항하는 것보다는 순응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저 아가씨에게 손을 대면 안 됩니다.”

“…불쾌한 상상은 그만둬 줬으면 좋겠군.”

베르딕이 대꾸하자 남자가 웃었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어떠한 자국도 나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남자는 힐끗, 캐런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분께서는 캐서린의 딸에게 깊은 관심이 있으니까 말이지요.”

캐런은 한숨을 쉬었다.

엄마가 쓰던 것도 쓸모가 있긴 있었다. 지난 생에도 귀즈 왕세자가 자신에게 관심을 좀 더 일찍 두었더라면 베르딕에게는 덜 시달리지 않았을까. 지금의 베르딕은 몇 번이라도 캐런에게 채찍을 휘두르고 싶어 하는 눈이었지만, 귀즈 왕세자를 의식해서 하지 못했다.

귀즈 왕세자의 눈에 든 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판단하기 힘들다. 하지만 지금 캐런은 자신이 아슬아슬하게 좋은 쪽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베르딕은 지금 캐런을 건드리지 못한다. 캐런이 이셀라에 대한 단서를 알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며, 귀즈 왕세자가 캐런을 신경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귀즈 왕세자 또한 캐런을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베르딕이 이셀라를 찾아 미친 듯이 헤매고 있고, 캐런을 중요한 단서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러오고 싶다 하더라도 베르딕은 그에게도 중요한 자금줄이었다.

결과적으로 캐런은 여러 사람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조금씩 엇나가, 저택 안에서 조용하게 일상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이전의 생애처럼 원수와 한 지붕 아래 있는데도 평화가 찾아왔다.

“아가씨, 일어나세요.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고맙군요. 하지만 저도 하녀니 당신이 이럴 필요는 없어요.”

캐런은 눈을 비비면서 일어났다. 우습게도 베르딕은 하녀까지 붙여 주었다. 베르딕은 채찍이 통하지 않는다면 먹이로 유인하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캐런이 일어나자 다른 하녀가 세숫물을 들고 왔고, 또 다른 하녀는 뒤에서 트레이에 음식을 담아 왔다.

“침대에 앉아서 하시겠어요?”

“네.”

캐런은 누워서 손짓했다. 조금 전에 자신도 하녀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했지만, 어차피 아무도 안 믿을 거짓말이니 게으름을 더 피우는 편이 나았다.

“홍차와 우유, 물 중 어떤 것이 좋으신가요?”

“우선 우유부터 마실 테니 홍차도 같이 우려 놓아 줘요. 식사 후에 밀크 티로 마실 테니까.”

“알겠습니다.”

식사를 내려다보고 실소를 지었다.

나쁘지 않았다. 사실 상당히 좋았다. 하지만 이것도 전과 같은 것이 재밌었다.

아침 식사는 메이플 시럽을 듬뿍 뿌린 두툼한 핫케이크와 블루베리 스콘, 과일이 얹어진 토스트까지.

“…살찔 텐데.”

하지만 베르딕의 하녀들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캐런은 쓴 웃음을 지으면서 식기를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식사를 했다. 역시나 맛은 좋았다. 그리고 캐런은 그것에 만족했다.

“이 옷은 또 무엇인가요?”

“캐런 아가씨에게 어울릴 것 같은 옷을 맞춰 왔습니다.”

“내 이름은 캐런이 아닌 캘리예요.”

“…실례했습니다, 캘리 양.”

괜한 짓으로 떠보려고 하는군. 캐런은 하녀를 쳐다보고는 옷을 보았다.

얄궂게도 옷마저 이셀라가 입곤 하던 하늘색 드레스였다. 물론 고급이었고, 자신에게 딱 맞는 옷이었다. 하지만 이런 옷을 입히다니 베르딕인지 하녀들의 선택인지 어지간한 악취미가 아니었다.

캐런은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정원에서 늘어져 있었다.

베르딕은 열심히 이셀라의 흔적을 찾고 있고, 캐런이 지나갈 때마다 자신에게 말을 걸며 이셀라에 대해 말을 하고는 했다. 이제는 방향을 바꿔서 캐런을 달래고 죄책감을 일깨우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캐런은 베르딕에게 죄책감을 느끼기에는 너무 닳고 닳았다. 그녀가 죄책감을 느끼는 상대는 레이몬드만으로 족했다.

그래서 캐런은 그저 베르딕이 제공하는 갖가지 편의를 실컷 누리고 있었다.

“안에 얼음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죄송합니다. 아가씨. 이곳까지 얼음을 가져오기는 조금 힘이 들어요.”

“알았어요.”

“…최대한 맞춰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녀들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차가운 냇가에서 꺼낸 오렌지를 꺼내 다시 갈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번에 가져왔던 새는 날아가 버렸어요. 새로운 카나리아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알려 주시겠어요?”

“예, 아가씨.”

캐런은 웃었다.

“전 아가씨가 아니라 당신 같은 하녀랍니다.”

“예, 카나리아는 붉은색이 좋으신가요?”

“전 금빛이 좋아요.”

“예, 알겠습니다. 아가씨.”

“전 하녀라니까.”

이것은 조롱이다.

이 이야기 또한 베르딕에게 들어갈 것이다. 캐런은 히죽이며 자신이 들고 있던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차가운 복수란 아주 맛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간을 죽이기에도 적당했다.

“이것은 또 뭔가요?”

“아가씨가 내게 협조할 시 갖게 될 금화요.”

베르딕은 캐런을 앉혀 놓고 건너편에 앉아서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이몬드 세이어테스 남작은 분명히 뭔가를 숨기고 있소.”

“…잘못 알고 계신 거예요. 분명 뭔가 오해가 있을 거랍니다.”

“더 이상 한마디도 하지 마시오. 내가 이성을 유지하고 있기를 바란다면.”

너무 성의 없는 거짓말이었던 것 같다.

캐런은 눈을 내리깔았다. 자신도 안다. 자신은 스스로도 믿지 않는 거짓말을 내내 하고 있었다. 베르딕을 오랜 원수로 둔 캐런이 아니었다면 오랜 원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을 조금이라도 털어놓을 것이다. 베르딕은 사람들을 불러 매일같이 청소를 시키고, 식사를 먹이고, 갖가지 보석까지 가져다 놓았다.

캐런은 보석에는 손도 대지 않았지만 베르딕이 자신을 회유하려고 안간힘을 쓴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만약에 자신이 정말로, 아무 기억도 없는 캐런이라면, 단순하게 레이몬드에게 반해서 그의 공모자가 된 소녀라면 이미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레이몬드 세이어테스는 내 딸의 약혼자였소. 그리고 내 딸은 어느 날 실종되었고… 마지막으로 발견된 곳에는 레이몬드의 부하와 같이 있었소.”

“…….”

“그리고 내 딸의 머리칼이 도착했고, 이 지역에서 누군가가 소포를 끼워 넣었소.”

베르딕은 어쩌면 이렇게 충실하게 레이몬드의 생각대로 움직일까.

베르딕은 집요했고, 행동력이 있었고, 생각보다도 유연하게 움직였다.

“당신에게 동정을 부탁하겠소…. 당신의 아버지는 정말로 자살했소. 이것에 대해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게…. 난 도무지 모르겠소.”

“…….”

“매일 밤 내 딸이 돌아오는 꿈을 꾸는데, 얼마 전에는 그 아이의 생일이었는데, 왜 작년에만 해도 무슨 선물을 줄까 고민을 했는데 올해는 아무런 고민도 할 수 없는지… 왜.”

베르딕의 목소리가 잠겼다.

“무엇이라도 찾고 싶소. 제발….”

그리고 캐런은 그의 비참함 또한 레이몬드가 자신에게 준 선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구나.

베르딕의 저 모습을 보라고.

그가 죽는 것은 너무나 쉬운 복수니 그에게 가장 걸맞은 방법으로 복수를 하겠다고.

캐런은 쓰게 웃었다.

레이몬드는 정말이지, 캐런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하는 남자였다.

그리고 캐런은 그가 주는 선물을 기쁘게 받아야 할 의무가 있었기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건 없는 것 같습니다. 베르딕 에반스 씨.”

베르딕의 눈에서 눈물이 천천히 흘렀다.

캐런은 일어났다. 그리고 뒤를 돌아 문을 열었다.

“잠깐!”

“…이만 물러나겠어요.”

베르딕이 캐런을 불렀다.

“1년 치 사업 투자 예산을 전부 주겠소!”

“…….”

“내가 죽은 다음 당신을 상속녀로 삼겠소! 이건 어떠시오? 당신의 아버지가 죽었으니 당신을 내 양딸로 삼겠소! 내 딸을… 찾기만 한다면! 당신이 도와주기만 한다면!”

캐런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딸로 들어가 봤자 무엇을 한단 말인가. 그리고 이셀라가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가 없는데. 그의 딸이 죽은 이유는 그저 캐런을 위함인데.

“못 들은 것으로 하겠어요.”

“캐런 하이어!”

탁.

베르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도 캐런을 회유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집 안에서는 좀처럼 단서가 나오지 않았다. 귀즈 왕세자의 부하들은 성의가 점점 더 없어졌고, 자신의 부하들은 행여 자신들이 다칠까 봐 활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무서워했다.

어떡하지.

이 순간에도 이셀라는 어디에 있을까. 살아는 있을까. 살아 있다면 어디 아프지는 않을까. 죽지만 않았으면. 살아만 있다면….

베르딕은 머리를 숙였다.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은 자신의 딸을 찾아낼 것이다.

어떠한 모습이라도.


 

“아가씨, 요청하신 신문입니다.”

“이리 가져와요. 수도에서 발행하는 것 맞나요?”

“네.”

캐런은 하녀가 주는 신문을 받았다.

요즘 캐런은 정말이지 살 것 같았다. 레이몬드와 단둘이 있는 것도 나름대로 로맨틱했지만, 자신은 평생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살았기 때문에 그것으로는 버틸 수 없었다.

베르딕이 제공하는 온갖 편의는 그녀를 사람같이 살게 만들었다.

식사, 청소, 유희거리까지. 심지어 그는 캐런에게 복수의 즐거움까지 주지 않는가! 캐런은 그동안 자신이 지나치게 답답하게 살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흐응….”

신문에는 온갖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다.

세상은 캐런이 없어도 돌아간다. 자신이 있던 세계는 너무나 좁았다. 캐런은 이 세계가 로맨스 소설이라고 생각했던 과거가 약간 안타까웠다. 마음먹고 둘러보면 세상은 이렇게나 넓은 것을.

세상에는 슬픔과 비극과 희극이 넘쳐났다. 캐런은 문화란부터 먼저 탐독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예전에 본 ‘오늘’과 같았기에 이내 흥미를 잃었다. 이미 읽은 소식들은 별 재미가 없었다. 캐런은 신문의 페이지를 넘겼다. 눈으로 빠르게 소식을 �y었다.

아버지.

혹시나 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적혀 있지 않을까 했지만, 시골 영주의 죽음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지역 신문이면 몰라도 수도에서 발행하는 신문에는 하이어 영주의 죽음은 다루지 않았다. 이미 장례식도 끝났다고 했으니 이제 와서 신문에 실릴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하지만 캐런은 부고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생각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죽어서는 안 될 사람이 죽어 있다.

루이스 왕세손 사망.

루이스 왕세손이 왜 죽었지?

캐런은 당황했다.

루이스 왕세손은 이 시기에 죽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117세의 그날에 루이스 왕세손은 죽었었지만, 그 소년은 주로 살아남는 사람이었다. 귀즈 왕세자와 루이스 왕세손은 116세 전까지는 둘 다 사는 사람들이었다. 117세 때의 그때만 제외하면.

117세의 캐런이 살인을 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고, 귀즈 왕세자와 루이스 왕세손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그리고 결국에 루이스 왕세손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살해당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만큼 특이했던, 있을 수 없었던 일이었다. 117세에서나 일어났던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왜?”

캐런은 신문을 미친 듯이 읽어 내렸다. 자신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렇게 유쾌한 일도 아니었다. 왜 루이스 왕세손이 죽었단 말인가?

…지난 7일 새벽, 루이스 왕세손은 거리 행진에서 괴한의 총에 맞아 중태에 빠졌고,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지난 17일 신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왜?

캐런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루이스 왕세손이 이 시기에 거리 행진에 참가했던 것은 아주 평범한 일이었다. 캐런이 굳이 기억도 할 필요 없었던 아주 흔한 일. 그저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주는 일이었다. 그는 어려서 사회적으로 죽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단 한 사람, 그의 아버지인 귀즈 왕세자를 제외하면 말이다.

귀즈 왕세자는 자신의 자식을 증오했다. 캐런의 앞에서 그는 자신의 자식을 죽였다. 하지만 그것은 117세 때의, 아주 특별한 상황에서였다.

지금 캐런은 저택에 틀어박혀 있다. 자신은 이럴 때의 인생을 안다. 이런 경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자신의 집에서 낸시와 다른 하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검소하게 지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돌아가는 것을 알 수는 있었다. 그때도 루이스 왕세손은 그냥 마지막까지 살았었다.

왜 루이스 왕세손이 죽었을까.

생각해 보면 캐런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캐런은 1년 뒤의 세상을 모른다. 베르딕은 귀즈 왕세자에게 돈을 대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귀즈 왕세자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 귀족들에게도 돈을 대고, 인연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루이스 왕세손에게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귀즈 왕세자는 루이스 왕세손을 왕으로 만들 생각이 없었구나.

자신의 아들은 왕위 경쟁자일 뿐이지 자식이 아니었구나. 캐런은 그제야 알았다. 그리고 베르딕은 그의 계획을 알았던 것이다. 언제일지는 몰라도 루이스 왕세손은 언젠가 죽을 것이고, 그 어린 소년에게 심혈을 기울일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그와 동시에 왜 그 소년, 미래의 왕, 레이몬드를 동경하던 그 어린 왕족이 죽었는지도 알 것 같았다.

자신만 있다면 루이스 왕세손은 살았을 것이다.

그 소년은 최소한 올해에는 원래 죽는 운명이 아니었다. 루이스 왕세손이 죽었던 것은 캐런이 117세를 기념하여 살인을 저지르기로 마음먹었던 그때뿐이었다. 캐런이 이렇게 저택에 틀어박혔을 때도 그는 살아 있었다.

그 소년은 살아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 그는 죽었다.

캐런이 아니라 레이몬드가 같이 회귀했기 때문이다. 레이몬드가 캐런에게 묶여 버린 것이 다르게 적용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온갖 상황을 다 겪었다고 했다. 루이스 왕세손의 사망이라는 사건을 그가 예측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레이몬드 그 소년마저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캐런 하나뿐이기에.

“…저기, 루이스 왕세손이 죽은 거 알았나요?”

“예, 아가씨. 얼마 전… 10일 전쯤 돌아가셨습니다.”

“알았나요?”

“예… 신문에 나왔으니까요. 왜 그러시나요?”

“…아뇨. 아니에요.”

캐런은 하녀에게 물었다. 하지만 하녀는 그냥 담담하게 대답했다. 캐런은 어떻게 그렇게 담담 하느냐고 물으려고 했지만, 당연하기에 물을 수 없었다. 베르딕은 귀즈 왕세자가 중요하지 루이스 왕세손은 그리 중요히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어린애가 죽은 것이 불쌍해서요.”

캐런은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목이 약간 잠길까 봐 걱정했지만 자신의 목소리는 지극히 평범하게 나왔다. 다행이었다. 캐런은 그리고 신문을 넘겼다.

이것이 정상인의 반응이다.

루이스 왕세자가 죽었든, 귀즈 왕세자가 살아 있든. 그것은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다. 그것은 결국 신문 안의 일. 다른 세상의 일.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다. 자신에게 사람은 단 하나 뿐이다.

중요한 것은 레이몬드와 자신뿐이다.

“…목이 마르네요. 물 좀 가져다주겠어요?”

“예, 아가씨.”

“레이몬드 경, 아니 레이몬드 남작이라고 불러야 하나?”

팬케이르 후작은 잠긴 목소리로 레이몬드를 불렀다.

“이제 내일이면 정식으로 남작위를 받을 테니 그냥 남작이라고 부르셔도 상관없습니다. 팬케이르 후작님.”

“그렇겠군. 자네도 장례식에 참가하고 내려가겠지. 당분간 자네는 내려가 있는 편이 좋을 것 같군. 지금 이래저래 상황이 복잡하니.”

“예.”

레이몬드는 짧게 대답했다. 목소리가 그리 밝지 않았다. 남작위에 큰 훈장까지 받게 된 것을 축하해야 할 터인데 상황이 너무나 암울했다. 자신의 조카이자 미래의 왕이 죽었다. 그도 상심한 것인가. 팬케이르 후작은 한숨을 쉬었다.

루이스 왕세손이 갑작스럽게 죽었다. 누군가가 죽였다. 적당한 때에 발표를 하기 위해서 사망발표는 늦게 했지만, 루이스 왕세손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난 내 사촌이 정말 싫어.”

“…….”

팬케이르 후작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물었다. 얇은 입술이 경련했다. 팬케이르 후작은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늦은 여름이었다. 풀벌레 우는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한창인데, 죽어야 할 사람은 살고 살아야 할 사람은 죽었다. 누군가가 죽기에는 너무나 좋은 날씨였다.

루이스 왕세손이 죽었다.

다음 대의 왕은 귀즈 왕세자, 단 하나뿐.

하지만 팬케이르 후작은 절대 그를 왕위에 올릴 생각이 없었다. 루이스 왕세손을 누가 죽였는지는 확실하다. 왕위를 그에게 무난하게 넘기기 위해 온갖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었다. 현왕은 아흔이 넘어가서도 억지로 왕관을 부여잡고 있었으며, 귀족들은 아직 나이 어린 루이스 왕세손과도 교류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죽었으니 모든 것이 수포가 되어 버렸다.

준비된 왕이 죽었으니 그들은 귀즈 왕세자를 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팬케이르 후작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는 왕을 만나야 했다.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이어질 것 같군.”

“…….”

“레이몬드, 지금은 자네의 집에 내려가 있게. 때가 되면 다시 부르겠으니.”

“지금 제 도움이 필요치 않으십니까?”

레이몬드의 녹색 눈이 석양에 빛났다. 그는 누구나 아는 좋은 저격수였다. 팬케이르 후작은 고개를 저었다. 너무나 유명했기에 지금 그가 여기에 있는 것은 오히려 의심을 살 수 있다.

“자네와 루이스 왕세손이 각별한 사이였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 지금 자네가 수도에 있는 것은 결코 좋지 않아.”

“저는 귀즈 왕세자 전하를 한번 꼭 뵙고 싶습니다.”

팬케이르 후작은 고개를 저었다. 레이몬드가 그를 만나서 귀즈 왕세자를 죽이면 그것은 또 다른 분쟁으로 일어난다.

“자네의 마음은 잘 알겠어. 당장이라도 복수하고 싶겠지.”

“…….”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네.”

“…….”

“내려가서 자네 형의 장례라도 치르면서, 아무것에도 관심 없는 것처럼 조용히 살게.”

레이몬드는 한참을 침묵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다는 듯이.

“꼭 다시 부르도록 하겠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나도 준비를 해야 할 것이 있어서.”

“알겠습니다.”

그리고 팬케이르 후작은 범인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사실 범인은 단 한사람 말고는 없었으니까. 팬케이르 후작은 주먹을 쥐었다. 루이스 왕세손은 그의 왕이자, 친척 조카이기도 했다. 팬케이르 후작은 절대로 귀즈 왕세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팬케이르 후작님.”

“그래, 자네 형의 장례식에 부조금은 부치겠네.”

“감사합니다.”

레이몬드는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그의 굳은 얼굴이 신경 쓰였다.

저 치도 운이 없지.

팬케이르 후작은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저 청년은 능력에 비해 항상 운이 없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강제로 빚쟁이의 딸과 약혼했더니, 약혼녀는 실종되고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 형도 죽었다.

그리고 이제는. 후작은 가슴이 싸해졌다. 자신이 누구보다 아꼈던 어린 소년 왕이 죽었다. 레이몬드를 선망의 눈빛으로 쳐다보던 그 소년이 죽었다.

귀즈 왕세자는 죗값을 받아야 할 것이다.

레이몬드는 후작의 방문을 닫았다.

“…하아.”

루이스 왕세손이 죽었다.

팬케이르 후작은 귀즈 왕세자에게 격렬한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루이스 왕세손이 죽은 지금, 귀즈 왕세자 다음의 계승권자는 팬케이르 후작이었다. 이제까지의 그는 어디까지나 루이스에게 왕위가 바로 가도록 노력했으나 이제는 다를 것이다.

본격적으로 왕위 싸움이 시작된다. 귀즈 왕세자는 팬케이르 후작을 대하느라 온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최소한 1년은 여자 생각은 나지도 않겠지.

“당신이 레이몬드 세이어테스 경이라고?”

“정말 혼자서 100명을 상대할 수 있어?”

자신을 올려다보던 소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가슴에 내려앉는 이물감은 무시할 수 있을 수준이다.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한 사람 뿐이다.

“이런, 의상실은 문을 닫았겠군요. 내일이나 모레쯤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불타는 하늘이 보인다. 핏빛 하늘의 끝부분은 점점 보랏빛으로 물들어 밤을 환영하고 있었다. 그가 사랑하는, 그에게 유일하게 의미 있는 사람을 생각나게 한다.

“석양은 머리칼, 보랏빛 하늘은 눈, 달은 반짝이는 얼굴… 음, 표현이 너무 느끼한가요? 어떤 표현이 적당할지 모르겠군요. 그래도 한번 시도는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너무 느끼하면 유머로라도 쓸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레이몬드는 웃었다.

팬케이르 후작은 귀즈 왕세자를 대대적으로 적대할 것이다.

귀즈 왕세자는 팬케이르 후작을 대하느라 모든 정신을 쏟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베르딕은 이셀라를 찾기 위해, 자신이 잡은 증거라 생각하는 캐런을 온 힘을 다해 보호할 것이다.

“옷을 맞추고 내려가야겠군요.”

“…….”

“너무 늦었다고 화를 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괜찮겠지요?”

“…….”

레이몬드는 가방을 들었다. 상당히 무거웠지만 그가 못 들 무게는 아니었다. 레이몬드는 가방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괜찮을 겁니다. 캐런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날 사랑할 테니까요.”

그날까지 그녀는 이것으로 무사할 것이다. 레이몬드는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중요한 것은 단 한 사람뿐.

그것으로 충분하다.

레이몬드가 돌아왔다.

그가 온 것은 너무나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레이몬드는 자신이 돌아올 날을 명확하게 이야기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돌아온 날 모두가 허둥거리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를 제일 먼저 맞이한 것은 베르딕이었다. 베르딕은 멀리서 들리는 말발굽 소리에 눈을 바로 뜨고 허둥지둥 문으로 나갔다. 하인들보다도 더 빠른 움직임이었다. 그는 무슨 소식이든지 어떤 소식이든지 너무나 간절했다.

“…레이몬드 세이어테스.”

그 남자였다.

베르딕은 허탈했다.

레이몬드 세이어테스가 결국에는 그의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베르딕은 속이 쓰렸다.

‘아직… 아직 아무것도 찾지 못했는데.’

베르딕은 그것이 너무나 원통했다.

시간은 너무나 빨리 흘러갔다. 베르딕이 집 안을 아무리 뒤져도 그가 원하는 어떠한 증거도 찾을 수 없었고, 캐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캐런에게 손을 댈 수도 없었고, 동정을 구걸해도 넘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만 흐르고 어느새 레이몬드가 돌아오고야 말았다.

“왜 당신이 여기에 있으십니까?”

“…귀즈 왕세자 전하께서 내 사정을 듣고 편지를 써주셨소.”

베르딕이 이를 갈듯이 말했다. 레이몬드는 눈썹을 올리더니, 그냥 한번 웃었다. 가소롭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그러시군요. 잘 지내셨습니까?”

“…내 딸을 찾지 못했는데 어찌 잘 지낼 수 있겠소?”

“안되셨군요.”

그 가벼운 흐름. 레이몬드는 이를 가는 베르딕을 지나 큰 가방을 들면서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어, 어머나.”

“레… 레이몬드 님.”

베르딕의 하인과 하녀들이 허둥지둥 일어나서 뛰쳐나왔다. 홀에 나란히 서서 헝클어진 머리로 줄 세워져 있는 사람들을 보고 레이몬드가 하하, 웃었다. 하지만 서늘한 웃음이었다. 레이몬드가 베르딕을 돌아보고 말했다.

“이런, 베르딕 에반스 씨… 제가 없는 동안 이렇게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시다니, 정말이지 너무하시는군요.”

“…….”

“꼭 당신이 이곳의 주인 같지 않습니까.”

베르딕의 얼굴이 붉어졌다가 가라앉았다. 베르딕은 캐런을 통해 자신의 화를 더욱 잘 다스리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포기하는 것을 잘 알 수 있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었다. 베르딕은 다시 천천히 말했다.

“그저 당신… 의 하녀는 편하게… 있소.”

“캘리는 그냥 하녀일 뿐인데 왜 그러셨습니까?”

“그녀는 캐런 하이어잖소.”

“아닙니다.”

레이몬드는 장난처럼 대꾸하고는 올라갔다. 가방은 여전히 든 상태였다. 그리고 베르딕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당신의 무례는 귀즈 왕세자 전하의 입장을 봐서 용서해 드리겠습니다.”

레이몬드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변했다.

“하지만 조만간 나가주시길.”

“…이셀라에 대해 알려 주시오. 당신은 대체 무엇을 알고 있는 거요? 당신은 무슨 짓을 했소?”

“전 모르는 일입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는 복도 저편으로 가 버렸다. 베르딕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그의 방을 향해 가 버렸다. 베르딕은 자신의 머리를 짚었다.

“젠장!”

꿈결처럼 다정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얼굴에 따스한 무언가가 닿는다. 캐런은 눈을 감은 채 그것을 받아들였다. 이런 방식으로 깨우는 사람은 단 하나뿐이었다. 레이몬드는 항상 더운 수건을 가지고 와서 캐런의 얼굴을 닦는 방식으로 깨웠다. 아주 천천히, 부드럽게.

“다녀왔나요?”

“다녀왔습니다, 캐런.”

“캘리라면서요.”

“지금 베르딕 씨는 아래에 있으니까요.”

레이몬드의 눈이 휘어진다. 캐런은 가물거리는 녹빛을 향해 웃었다. 레이몬드의 머리가 엉망으로 뻗쳐 있었다. 앞으로 다 내려오기까지 해서 군인이라기보다는 소년 같았다.

소년. 나의 소년이여. 사실 그는 사랑에 빠지면 항상 저렇게 웃었다. 모든 것을 기억하고 난 후의 그는 웃음 속에도 어딘가 지쳐 보이는 얼굴이었기 때문에, 조금 더 나이가 들어보였다. 세월은 웃음에 묻어났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얼굴은 여느 때보다는 좀 편해 보였다. 캐런은 새삼스러운 웃음에 마주 웃었다.

“일은 잘하고 돌아왔나요?”

“예. 이제 더 이상 나갈 일은 없습니다. 그날까지… 읍.”

그거 잘됐네.

캐런은 레이몬드의 목을 끌어당겼다. 거친 키스가 이어졌다.

“베르딕 에반스 씨는 언제 떠날까요?”

한참 후에 캐런이 침대에 앉아서 누워 있는 레이몬드에게 물었다. 레이몬드는 약간 졸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만간 떠나게 될 겁니다.”

“「그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캐런은 약간 불안해졌다. 하지만 레이몬드가 몸을 일으켜 세워 뒤에서 캐런을 끌어안았다. 두근거리는 가슴이 느껴진다. 캐런을 끌어안고서 레이몬드가 말했다.

“무서워할 필요 없습니다.”

“저도 믿고 싶기는 한데… 솔직히 제 상황이 좀… 그렇잖아요?”

캐런은 결국 불신할 수밖에 없었다. 레이몬드가 기억을 한 것은 처음이고, 그녀 또한 이번이 끝이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베르딕과 레이몬드가 한 집에 있는 이 상황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베르딕은 그날이 되면 캐런의 목을 치기 위해 도끼를 들고 달려오고는 했으니까.

“지금 상황 흘러가는 게 딱 제가 베르딕 씨에게 원한 사서 죽기 너무 좋아 보여서요.”

이대로 베르딕에게 죽으면 너무 그럴듯하게 죽는 길이었다. 레이몬드는 이셀라를 죽인 것 같고, 캐런은 가명을 쓰면서 레이몬드와 동업하고 있는 것 같고. 심지어 둘이 연인이라니. 베르딕으로서 캐런을 죽이지 않을 이유를 찾는 것이 더 어려워 보였다. 캐런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에도 죽을 것 같다. 베르딕이 도끼 한 방으로 끝내길 바랄 뿐이다.

“상황 보면 그렇지 않나요?”

레이몬드가 잠시 침묵하더니 대답했다.

“그렇군요. 아무튼, 베르딕 에반스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조만간 떠날 테니까요.”

“솔직히 별로 믿기지는 않는데요… 무슨 짓을 했나요?”

“캐런, 남자에게는 비밀이 많은 법입니다.”

엄숙한 듯 장난치는 목소리였다.

“재미없거든요.”

레이몬드는 캐런의 어깨에 턱을 올리고 있었다. 캐런은 레이몬드의 코를 한번 쥐었다.

“아픕니다.”

“재미없다구요. 아무튼, 그래도 당신이 해 놓은 장난 덕분에 편하긴 했어요. 베르딕 씨 하녀들이 편하기는 하더라구요. 그리고 그분도 참 은근히 단순한 구석이 있어서.”

“당신에게 무엇을 주던가요?”

“뻔하죠, 뭐…. 돈이라거나 양녀라거나, 옷 음식 이것저것 다 줬어요.”

“잘 지냈겠군요.”

“네.”

너무 잘 지냈어요.

나에게 죄책감이라는 것이 이렇게 없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잘 지냈어요. 난 어쩌면 이렇게 속물적인지 자식을 잃은 부모를 이용하는 것에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더군요. 그가 주는 음식을 먹고 그의 하녀들을 손끝으로 부리는데도, 미안한 게 아니라 너무너무 편하다는 생각 말고는 들지 않았어요. 정말로.

“정말 잘 지냈어요.”

“그래도 저 혼자서 하는 게 더 낫지 않습니까?”

캐런은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그리고 레이몬드에게 머리를 강하게 기댔다. 무게가 느껴지자 힘이 빠진 레이몬드가 다시 침대로 누웠다. 캐런은 레이몬드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누워서 말을 이었다.

“역시 사람은 많은 것이 좋아요.”

“그렇습니까.”

“네. 레이몬드 경이 혼자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100명이 해야 하는 걸 혼자서 할 수는 없어요. 편의성을 위해서는 확실히 사용인들이 있어야 해요.”

“「그날」 이후에는 좀 더 들이도록 합시다.”

“꼭이에요.”

“예. 캐런, 그러고 보니 옷을 사왔는데, 잠깐만 짐을 좀 풀고 오겠습니다.”

“네.”

레이몬드는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방에 다녀오더니 캐런에게 옷을 꺼내 주었다.

캐런이 말한 의상실의 디자인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분명 캐런이 말한 소재와 패턴을 쓰기는 했다. 그리고 천도 아주 고급스러웠고, 박음질 또한 깔끔한 것이 일류의 솜씨였다. 문제는 디자인이었다.

캐런이 주로 입던 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옷이었기 때문에 캐런은 영 내키지는 않았다. 캐런의 못마땅한 얼굴을 본 레이몬드가 다급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게 나중에 크게 유행합니다.”

“…진짜요?”

“예.”

캐런은 썩 마음에 차지 않았지만, 생각해 보면 자신은 미래를 너무 모른다. 나중에는 어떤 옷이 유행할지 모르니 그의 의견을 참조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한 5년 정도 유행을 선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그렇다면 자신이 최신 유행을 선도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캐런은 옷을 마저 입고 나서 거울을 보고 나니 목소리가 점점 가라앉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지나치게 단순했다. 프릴이 하나도 없는 옷은 하녀일 때에도 입은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몸매를 확 드러내는 디자인도 아니었다. 캐런이 보기에는 이것은 옷도 아니었다. 심지어 종아리를 다 드러내는 옷이었다. 저잣거리의 창녀들도 이런 디자인의 옷은 입지 않았다. 이것은 속옷만도 못한 옷이었다. 윗가슴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고, 위는 꽁꽁 다 싸매고 다리는 훤히 드러내다니. 너무나 변태적으로 느껴졌다.

“…이게 진짜 유행해요?”

“예, 활동적일 뿐 아니라 단순한 멋이 아주 좋습니다. 이제 여름이기도 하니 실용적인 면에서도 아주 좋구요. 아직은 사람들이 잘 입지 않지만… 곧….”

캐런의 목소리가 그리 좋지 않자 레이몬드가 캐런의 눈을 피했다. 캐런이 재차 물었다.

“대체 얼마나 있다가요?”

“한… 20년….”

캐런은 미래의 세대에 통탄했다. 자신도 그리 도덕적이지 않은 인간이라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그래도 사회와 종교가 가르친 수치심이라는 것은 있었다. 그것은 성적인 것을 타인에게 보여 주지 않는 것과 같은 예의였다. 다리를 다 드러내다니. 다리는 생식기를 바로 연상시키는 신체의 일부가 아니던가. 어찌 미래의 여자들은 이런 옷을 수치심도 없이 입고 다닌단 말인가. 캐런은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이런 옷이 유행을….”

“캐런, 잘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미래를 못 봐서 그렇지 이런 옷은 여성들을 한결 더 편하게 해 줄 것이 분명합니다.”

“사오라는 코르셋도 안 사오고….”

캐런은 코르셋도 없는 꾸러미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코르셋도 없고, 이 옷에는 버슬(bustle)도 전혀 달려있지 않아서 엉덩이를 보완해 주지도 않았다. 전반적으로, 끔찍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그 옷이 마음에 드는지 눈을 돌리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계속 말했다.

“코르셋은 금방 유행이 지날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몸에 좋지 않습니다.”

“…….”

“그… 예…. 그럴 겁니다.”

20년이나 유행을 선도하고 싶지는 않았던 캐런은 조용히 옷을 벗었다. 레이몬드는 눈치를 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앞으로는… 꼭… 그냥… 무조건 사라는 대로 사와요. 알겠죠?”

“예, 캐런.”

“그리고 당신 혼자서는 턱도 없다는 걸 인정 하구요.”

“…예.”

캐런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리고 미래가 오더라도 저런 옷은 절대 입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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