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아침이었다.
캐런은 눈을 떴다.
창 너머에서는 새 소리가 들리고, 분홍빛이 도는 하얀 장미 다발이 머리맡에 장식되어 있었다. 침대의 휘장은 살짝 젖혀져 있었고 밖에는 아침의 잠을 깨우는 차와 간편한 간식들이 놓여 있었다. 캐런은 침대에 앉아서 손을 뻗어 찻잔을 들었다.
따끔거리는 목으로 따뜻한 차가 넘어가자 속이 편안해졌다. 한숨을 쉬며 정신을 차리고 침대 옆을 내려다보았다. 익숙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캐런은 손을 뻗어 뻗친 금발 머리를 눌러 보았다. 레이몬드가 눈을 뜬다.
“…캐런? 좋은 아침입니다.”
“계속 자요. 아직 새벽이에요.”
“…예.”
레이몬드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지만, 캐런의 계속되는 손길에 다시 눈을 감았다. 다시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개가 주인의 손길을 즐기는 것 같았다. 이제는 옆자리에 캐런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급하게 몸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이제 그는 자다가 숨을 들이키며 벌떡 일어나지 않는다. 그에게 전쟁은 머나먼 일이 되었다.
캐런은 침대에 앉아 레이몬드를 만지작거리다가 그의 머리칼에 붙은 꽃잎을 떼어 내었다. 하지만 꽤나 어울리는 까닭에 다시 꽃잎을 그의 위로 떨구었다. 내친김에 생생한 꽃을 화병에서 한 송이 뽑아 그의 머리에 꽂아 보았다. 꽤나 흡족했다. 거친 일을 하던 남자인데도 그처럼 꽃이 어울리는 남자는 없었다. 게다가 그는 꽃을 좋아했다.
그가 선물하는 것은 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수국, 장미, 리시안서스, 백합, 튤립, 프리지어….
매일매일 신선한 꽃을 정원사가 아닌 그가 직접 잘라서 머리맡에 장식해 두고는 했다. 방 안은 꽃으로 넘쳐 났다. 매일같이 넘치는 꽃다발을 처리하기가 바쁠 정도였다. 앞으로도 영원히 레이몬드 외에는 캐런과 같은 침실을 쓸 남자가 없으니 자신은 평생 꽃에 파묻혀 있을 운명이다.
캐런은 자신과 같이 있는 남자가 레이몬드라는 것에 다시 한번 안도를 했다. 아침마다 새삼 느끼는 것이었지만, 그 말고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꽃이 어울리는 남자라, 보석을 아끼지 않는 남자라, 자는 모습도 잘생긴 남자라 새삼스레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일어날까요?”
“더 자도 괜찮은데요.”
“잠이 더 오지 않는군요. 일어나겠습니다. …머리에 이건 좀.”
“어울리는데 왜 떼요?”
레이몬드는 자신의 머리에 꽂힌 꽃에 손을 가져다 댔다가 멈췄다.
“계속 하고 있어야 하나요?”
“네.”
“언제까지요?”
“제가 질릴 때까지요.”
“…….”
레이몬드는 뭐라 말하려다가 더 말하지 않고 꽃을 머리에 꽂은 상태에서, 하나 더 꺾어 캐런의 머리에도 꽂았다.
“그럼 당신도 계속 꽂고 계십시오.”
“네. 전 불만 없어요.”
“…이런.”
남자가 머리에 꽃을 꽂는 것은 괴상한 일이었지만 여자들이 꽂고 다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레이몬드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챘지만 이미 늦었다.
“싫어요?”
“조금 부끄럽군요.”
“그거 좋네요.”
캐런은 웃으면서 레이몬드의 볼에 키스했다. 레이몬드가 당황하거나 시무룩해하거나 부끄러워하거나. 그런 다양한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그것이 그가 살아 있음을 실감 나게 하기 때문이다.
“전 그냥 당신이 웃기만 했으면 좋겠군요.”
“침대에서는 잘도 울리면서.”
“…….”
“커피, 차, 우유, 어떤 게 좋나요?”
“커피로, 진하게 부탁합니다.”
진짜 나이 들었나 봐.
캐런은 약간 볼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레이몬드가 입을 다물고 빤하게 쳐다보자 더 이상 놀릴 엄두도 나지 않았다. 급하게 가운을 걸치고 일어나 앉았다.
‘그나마 저택에 다른 사람들도 있어서 다행이지.’
캐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은 필요하다. 여러 의미에서.
자식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은 레이몬드에게서 절제의 필요성을 지워 버렸다. 물론 자신도 그 필요성을 인지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체력 차가 워낙 심하다 보니 가끔은 버겁게 느껴졌다.
“커피요.”
캐런은 손을 뻗어 침대의 휘장을 걷어 하녀들이 조금 전에 가져다 놓은 트레이를 끌어당겼다. 호두나무로 만들어진 고동색 트레이 위에 은으로 만들어진 덮개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들자 뜨거운 물과 커피와, 차와 우유, 그리고 곁들여 먹을 수 있는 스콘 등이 나타났다. 잔에는 왕실의 인장과 무늬가 금으로 새겨져 있었다.
“이 잔은 언제 받은 거예요? 못 보던 건데.”
레이몬드가 고개를 들더니 허를 찔린 얼굴로 잔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전부터 있던 겁니다.”
“여기에 지난주에 수여했다는 세공이 있는데요? 왕궁에는 언제 또 다녀왔어요?”
“지난번에 당신이 하루 종일 잘 때….”
“왜 진작 말도 안 하고.”
“별일 아니라 기차로 금방 다녀왔습니다. 거참, 하필이면 왜 그 잔을….”
별일이 아니긴.
캐런은 잔에 있는 왕실의 인장을 쳐다보면서 혀를 찼다. 이것은 과거에 본 적이 있는 장식이었다.
레이몬드는 자신에게 말하지도 않고 루이스 왕세자를 도우러 갔다 온 것이 분명했다. 그날 오랜만에 느긋하게 자고 일어났고, 주인님은 일이 있다는 하녀들의 말에 목욕을 즐기면서 쉬고 있었더니 그새 그는 나라를 구하고 온 모양이었다.
“말 좀 하고 다녀오지 그랬어요.”
“괜히 당신이 걱정할까 그랬습니다.”
“걱정 안 할 자신 있거든요? 나이가 몇인데 그 정도야 알아서 했겠지.”
“예.”
최소한 걱정하는 티를 내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캐런의 대답에 레이몬드는 눈치를 보며 웅얼거렸다.
“상처받습니다.”
“커피나 마셔요. 그리고 앞으로는 말은 하고 가고.”
“알겠습니다.”
캐런은 커피를 레이몬드에게 건네고 그 밑에 있는 신문을 들었다. 캐런은 살짝 열린 창문에서 들어오는 신선한 아침 공기를 들이마셨다.
사소한 편의는 사람을 즐겁게 한다. 신문마저 그렇다. 캐런은 신문을 펼치고 위에서부터 천천히 읽어 내렸다.
“레이몬드 경, 이것 봐요.”
“예, 신문이군요.”
“네.”
레이몬드는 들고 있던 잔을 머리맡 탁자에 내려놓고 캐런이 건넨 신문을 집어 들었다. 훑어보며 약한 한숨을 내쉰다.
“귀즈 왕세자의 처분이 결정되었군요. 참으로 다행입니다.”
레이몬드는 시온의 얼굴이 자그마하게 나온 신문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시온은 기억을 하지 못하지만, 기억을 하는 레이몬드는 시온이 좀 더 효율적으로 공을 세울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레이몬드는 좋은 학생을 둔 교수의 마음으로 시온 엘렉트라의 공을 읽어 내렸다.
“아니, 물론 그것도 중요하긴 한데 그거 말고요. 어딜 보는 거예요?”
“예?”
캐런은 레이몬드가 읽고 있는 신문을 뒤집었다.
“그 뒷장의 아래를 읽어 봐요. 왜 뒤집어서 사회면을 먼저 보고 있어요?”
톡톡. 캐런은 신문의 아래를 가리켰다.
초호화 크루즈 여행
“…이건 뭡니까?”
레이몬드의 어리둥절한 얼굴에 캐런은 환하게 웃었다.
“어디든 같이 가자고 했잖아요. 그런데 아직 우리 아무 곳도 안 간 거 알죠? 전 바다에 가고 싶어요.”
“바다요?”
“네.”
간략한 결혼식을 치르고 캐런은 빠르게 테스 저택의 안주인이 되었다. 전의 생과는 다르게 확실히 편한 안주인으로서의 삶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장소, 새로운 만남에 목말라 있는 캐런에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바다, 사막, 설원 어디든 가자고 하지 않았나요? 어디로든 데려다준다고 했잖아요.”
어디든 새로운 곳으로 가고 싶어!
캐런은 간절한 눈으로 외쳤다.
레이몬드는 입을 다물고 신문의 광고를 쳐다보다가 한참 후에 대답했다.
“…바다는 너무 위험합니다, 캐런.”
레이몬드의 대답에 캐런은 들고 있던 신문을 접었다. 거기에는 크루즈 선박에 대한 광고가 있었다. 푸른 바다, 산뜻한 바람, 바다 위의 도시에서 매일같이 벌어질 파티와 수많은 산해진미들이 그려져 있었다. 캐런은 들뜬 얼굴로 레이몬드에게 말했다.
“안전할 거예요! 이걸 봐요. 위험한 루트로는 가지 않는다구요. 남쪽에서 다섯 개의 섬을 돌아보는 건데 암초도 없고 바람도 적당하고….”
“바다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캐런.”
“어차피 이 시기는 저도 알아요. 이 배가 1년 동안 풍랑에 휩싸이는 일은 없었잖아요.”
“…….”
레이몬드는 신음 소리를 냈다. 말문이 막힌 레이몬드에게 캐런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광고란을 다시 가리켰다.
“갈 거죠?”
“안 됩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지지 않았다.
“캐런, 당신은 접시 물에 코 박고 죽은 적도 있고, 계단에서 미끄러져 죽은 적도 있고, 자다가 심장마비로 죽은 적도 있는데 바다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과거는 비슷하게 흘러가도 고정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 이미 예약도 했단 말이에요.”
캐런이 궁색한 변명을 해 보았지만 레이몬드의 얼굴은 흔들리지 않았다.
“지금 보셨으면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죠, 캐런? 정말 예약했다면 취소하십시오.”
“…어디든 간다면서요. 이 세상 어디든 같이 가자고 한 것은 농담이었나요? 역시 결혼 전에 한 이야기라고 없었던 것으로 취급하는 건가요?”
캐런의 목소리가 낮아지자 레이몬드는 조금 억울한 얼굴로 반박했다.
“임신 중이지 않습니까.”
얼마 전에 막 임신한 캐런을 두고 레이몬드는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듈란이 보낸 조제법대로 캐런에게 약을 먹이고, 식사는 전부 자신이 먼저 먹어 봤다. 처음에는 난임 문제를 가진 다른 임산부에게 먼저 실험을 하자고 했다가 오랫동안 약에 절어 있던 자신과 같은 사람이 없다는 말에야 그만둘 정도였다. 자신의 시야에 캐런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싫어했고, 저택 밖에 정원에도 혼자 나가는 것을 걱정했다.
“그 몸으로 대체 어디를 간다는 말입니까?”
“으….”
어지간하면 캐런도 그의 집착과 사랑을 기꺼이 받을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임신한 캐런은 갑갑증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이제야 책 속에서 풀려난다는 생각은 몸을 들뜨게 만들었다. 캐런은 조금씩 불러 오는 배를 볼 때면 무언가 충동적인 마음을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방 안이 아니라, 저택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이 땅의 끝을 넘어서 새파란 물결을 눈에 담고 싶었다.
“그럼 언제 가는데요? 출산하고?”
“그러고 나서 1년 정도는 있다가 가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1년?
그것도 출산 후에?
캐런은 1년 후를 생각하자 아득해졌다. 1년만 100번 넘게 반복한 자신이다. 1년의 그 다음 날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고 터질 듯이 쿵쾅거리는데 그 후의 1년이라니. 그것은 100년 후에 가자는 말과 동일하게 들렸다.
“유모도 데리고 가면 되잖아요.”
“유모의 문제가 아니라 출산 후에는 당분간 쉬는 편이 좋습니다. 최소 1년은 당신이 쉬어야 하고 그 후에 아이가 어느 정도 클 때까지 바다는 위험합니다.”
“…아이가 얼마나 클 때까지요?”
레이몬드는 고민하다가 손가락을 폈다.
“5년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캐런은 신문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캐, 캐런.”
“됐어요.”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캐런을 불렀지만, 그녀는 씨근덕거리며 레이몬드를 노려보더니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일부러 발을 구르면서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두툼한 슬리퍼에 잠옷 차림이라 별다른 소음은 나지 않았다. 캐런은 대신 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바다라니.”
레이몬드는 캐런이 바닥에 내팽개친 신문을 주우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도 캐런이 얼마나 바다나 다른 나라에 가고 싶어 하는지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안 될 일이었다.
“절대 안 될 일이지.”
캐런이 임신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출산에 성공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레이몬드는 안전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캐런은 나가고 싶어서 난리를 치고 있었지만 지금은 안정을 취해야 할 때가 아닌가.
그 또한 마음이 그리 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캐런이 뿔이 났어도 어차피 금방 포기할 것이다. 캐런 자신 또한 임신 중에 안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당연히 알 테니까.
“음.”
레이몬드는 잠옷을 벗고 옷을 갈아입으려다가 멈췄다. 캐런은 취미처럼 레이몬드의 옷을 골라 주곤 했다. 레이몬드는 집사를 부르려다가 그만두었다. 이유를 말하기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결국 레이몬드는 옷을 혼자 갈아입으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괜찮아. 뭐, 애도 아니고.”
조금 시간이 지나면 풀리겠지.
하지만 그것은 레이몬드의 헛된 기대였다.
점심시간부터 조금씩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레이몬드는 텅 비어 있는 식탁의 건너편을 보며 침을 삼켰다. 그는 오전 내내 이 시간에 다시 볼 아내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캐런은 자리에 없었다. 레이몬드가 식탁에 다가가자 시종이 의자를 뒤로 뺐다. 레이몬드는 자리에 앉지 않고 서서 시종에게 물었다.
“캐런은 아직 오지 않았나?”
“예, 마님은 아직 오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식사하시겠습니까?”
“아냐, 기다리지.”
금방 올 테니까.
세이어테스 남작 부부는 반드시 몇 가지 규칙을 지켰다.
그중 하나가 시간 약속이었다. 특히 식사 시간은 몇 분도 늦어지지 않게 자리를 지키는 것이 두 사람의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두 사람 모두 저택에 머물 때에는 항상 함께 같은 시간에 식사를 했다.
주인들이 시간을 지켜야 아랫사람들이 제대로 준비하고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식사를 중요시하는 캐런은 언제나 그만큼 식사 시간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런데 캐런이 늦다니. 어지간히 마음이 상한 모양이었다. 레이몬드는 앉아서 잠자코 캐런을 기다렸다.
“…….”
“…….”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침묵만이 맴돌았고 캐런은 오지 않았다.
식탁 옆에는 시종들이 조용히 집주인의 눈치를 보며 서 있었다.
레이몬드는 손을 들어 식탁 위에 올렸다가, 이마를 짚었다가, 테이블을 건드리는 등 자세를 흐트러뜨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입을 열자 한숨 섞인 소리가 흘러나왔다.
“캐런이 너무 늦는군.”
“다시 식사를 데워 오겠습니다.”
“…아, 언제 올려놓았지?”
레이몬드는 식탁 위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에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던 것 같은데 꽤나 시간이 흐른 모양이었다. 어느새 식사가 위에 올라와 있었고 거기다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좀 전에 남작님께서 올려놓으라고 하셨습니다만.”
“내가?”
“예.”
식사는 점심인 것을 감안하면 지나치게 신경을 쓴 메뉴였다. 아침부터 캐런의 입맛을 돋울 수 있도록 특별히 신경 쓰라고 직접 지시해 두었기 때문이다.
전채로는 송로 버섯과 치즈에 허브를 얹어 놓았다. 송로 버섯을 구하기 힘든 계절이었기 때문에 레이몬드는 버섯을 구하기 위해 금화를 써야 했다.
또한 주메뉴로는 사과와 견과류를 넣어 어린 칠면조를 구워 내었고 거기에 으깬 감자와 잘게 다진 양파와 당근을 섞어서 곁들여 놓았다.
새하얀 작은 그릇들에는 사과 소스, 지블레(giblet) 소스, 크랜베리 소스 등 다양한 소스들이 마치 보석 장신구처럼 다양하게 늘어놓아져 있었으며 새하얀 빵은 점심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맞추어 구워 냈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있지는 않았지만 식사가 끝나면 간식으로 먹을 오렌지를 얹은 치즈 케이크도 준비되어 있었다.
너무 늦으면 맛이 덜할 텐데.
레이몬드는 손을 모아서 기다렸지만 이윽고 나타난 것은 캐런이 아닌 낸시였다.
“죄송합니다, 남작님. 세이어테스 부인께서는 식사를 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식사를 거른다고?”
“예.”
레이몬드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캐런이 몸이… 아픈가? 식사까지 거르고….”
어떻게 캐런이 식사까지 거른단 말인가.
이번에 구해 온 버섯은 캐런 또한 기대하던 것이었다. 설마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아 기절했다던가 하면 어떡하지? 레이몬드의 머릿속에 피를 토하는 캐런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뇨, 그냥 화나셨어요.”
“…하아.”
낸시의 솔직한 대답에 레이몬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냥 삐진 모양이군.’
이것은 무언의 협박 같은 것이다.
레이몬드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물론 그는 캐런 없이 식사를 하게 되는 것이 실망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그녀에게 항복할 수는 없었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캐런 자신을 위한 행동이 아닌가. 지난번에는 자신이 캐런의 결정을 따랐지만, 이것은 또 다른 문제다. 임신한 아내를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결단코 지나친 것이 아니며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여기서 넘어가면 안 돼.’
당장이라도 캐런의 방문 앞에서 ‘어디든 갑시다! 말만 해요!’ 하고 항복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결단코 현명한 방법이 아닐 것이다. 레이몬드는 하고 싶은 말을 꾹 참고 하녀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상심한 모양이니 잘 달래 줘. 그리고 원하는 게 있는 것 같으면 바로 전해 주고.”
“알겠습니다, 남작님.”
낸시가 올라갔다.
‘괜찮아.’
레이몬드는 속을 달래며 찬물을 연거푸 들이켰다.
그리고 식탁 위의 빵을 들었다. 분명히 아주 맛 좋은 빵이 분명했다. 레이몬드는 빵을 크게 물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좀처럼 삼키지 못하고 한참을 천천히 씹고만 있었다. 눈은 멀거니 뜨고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고 손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옆에서 누가 건들면 큰일이 날 것 같은 그러한 모습이었다.
“…어떡해?”
“…어떡하긴 가만히 있어, 멍청아.”
뒤에서 시종들이 서로 눈짓하다 못해 작게 수군거리는데도 레이몬드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 레이몬드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상황을 보던 노집사가 레이몬드의 옆에 슬쩍 다가와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남작님?”
그제야 레이몬드는 입 안에 있던 빵을 마저 삼키고 입을 열었다. 웃으려고 했지만 딱딱하게 굳어서 기괴한 표정이 되었다.
“괜찮아. 아주 맛있는 식사일 것 같은데. 양도 혼자서 먹기에는 너무 많아. 제임스 자네도 같이 들 텐가? 아주 먹음직스러운 생선인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집사는 식탁 위에는 생선이 없다는 사실은 지적하지 않았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약간 퀭한 얼굴로 다시 한번 권했다.
“사양하지 말고.”
“벌써 저녁 식사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레이몬드 남작님께서도 그만 일어나시지요.”
“…그래….”
레이몬드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저녁은 제대로 준비해 달라고 주방에 전해 줘.”
“예, 알겠습니다.”
“아주 제대로.”
“예.”
레이몬드는 집사에게 단단히 당부했다.
“남작님께서 식사를 하지 않으셨다고?”
“그래, 그러니까 저녁은 더더욱 제대로 준비해.”
“아니 제임스,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하나?”
“금이라도 올리란 말일세!”
주방은 뒤집어졌다.
그리고 모든 인원들이 달라붙어 식사 준비에 땀을 흘렸다. 결과적으로 점심보다 몇 배는 더 호화스러운 식사가 준비되었다. 왕족이 방문할 때나 나올 법한 호화로운 음식들이 연달아 준비되었다.
“레이몬드 남작님,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알겠어.”
하지만 캐런은 저녁 식사 시간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일부러 자신도 조금 삐졌다는 의미로 늦게 갔지만 여전히 식당에는 2인분의 식사만 차려져 있었고 앉아 있는 사람은 없었다.
“…캐런이 보이지 않는군.”
“남작님, 마님께서 저녁도 거르신다고 하셨어요.”
“…….”
레이몬드는 혼자서 연거푸 포도주를 들이켰다. 캐런이 단단히 삐진 상태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들이켠 술 때문에 속만 쓰라릴 뿐이었다.
세이어테스 가문의 집사, 제임스는 요즘 들어서 매일같이 삶이 새로웠다.
레이몬드가 군대에서 나오고 나서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셀라 에반스와 파혼을 선언하고 캐런 하이어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는 저택의 모두가 근심에 휩싸였다.
레이몬드가 드디어 계속 순응하기만 했던 형의 결정에 반기를 든 것은 이해가 갈 만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약혼을 깨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결코 현명한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에반스 가문과 세이어테스 가문이 얽힌 악연이 얼마나 많았던가.
에반스 가문이 복수를 할 것이다.
레이몬드의 형을 포함해 제임스 등 수많은 가신들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레이몬드가 왕실과 후작을 등에 업고 형 대신 남작이 될 때만 해도 다들 젊은 남작을 근심에 싸인 눈으로 쳐다보았다.
‘젊어서 저렇게 사고를 치는군.’
하지만 그것은 뭘 모르는 자들의 기우였다.
레이몬드는 주변 사람들이 모든 과정을 이해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그것도 부드럽게 모든 일을 처리해 버렸다.
남들이 오랜 시간 고민해서 선택할 사항들을 고민 한 번 하지 않고 단번에 결정 내렸다. 그것은 가끔 미친 짓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뭐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저분은 요즘 나보다도 몇 갑절은 더 사신 것 같다니까.’
레이몬드를 어린 시절부터 봐 온 제논 또한 혀를 내두르면서 레이몬드를 은근히 우러러볼 정도였다. 레이몬드는 일을 처리하는 과정 중에 원한을 가질 만한 상대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 정도였으니 옆에서는 더더욱 할 말이 없어졌다.
그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이루어졌고 선택하는 것은 무조건 옳았다.
레이몬드를 아는 사람들은 점점 더 그를 신봉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무엇을 명령하든 결국에는 옳은 결정일 것이 분명했기에 가신들은 그에게 더 충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날 새벽에 제임스는 기절할 뻔했다.
새벽에 등을 들고 저택의 상황을 점검하던 제임스는 수상한 사람이 복도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괴한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인영이 어딘지 익숙했다.
“…주인님?”
“잘 잤나, 제임스? 좋은 아침이야.”
“허억…! 괜찮으십니까? 왜 여기서….”
“나야 항상 건강하지.”
하지만 제임스는 안도할 수 없었다. 레이몬드의 얼굴이 참혹했기 때문이다. 눈은 충혈이 되어 있었고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어젯밤 늦게까지 그가 남작 부인의 방 앞을 서성이고 있다는 것은 들었으나, 지금 이 새벽에도 이곳에 있으시다니…. 밤새도록 그러고 있었다는 뜻 아닌가.
“밤새 서 계셨습니까?”
“잠이 오지 않아서…. 신경 쓰지 말게.”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 있겠습니까. 설마 마님과 싸우신 것 때문에 상심하셔서….”
“캐런과 안 싸웠어.”
“아뇨, 어제 분명 여행을 가는 것에 대해 서로 의견이….”
“안 싸웠다고, 제임스.”
설마 우십니까?
차마 그렇게까지는 묻지 못했다. 레이몬드의 얼굴이 심히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이몬드는 앵무새처럼 중얼거렸다. 정신 상태도 가히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위험하니까 절대 못 보내 줘.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침대를 따로 쓰자고 할 수 있는 거지?”
보통 어느 정도 격이 있는 집안의 부부들은 침실을 각자 쓰는 경우가 많았다. 레이몬드의 부모님이었던 전 남작 부부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레이몬드와 캐런은 아직 신혼이라서 그런지 같은 침실을 쓰고 있었다.
“도련… 주인님, 부부가 침실을 따로 쓰는 건.”
“…….”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라고 말하려던 집사는 말을 삼켰다. 레이몬드의 얼굴이 메마른 사막에서 마실 물이 다 떨어진 사람의 얼굴 같았기 때문이다.
“정말 너무한 일이군요.”
“아가씨, 정말 가실 거예요?”
“응.”
캐런은 화사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어렸을 때부터 말했지? 나는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제가 하기는 했지만요…. 그게….”
낸시는 눈치를 보았지만 캐런의 손길에는 거침이 없었다.
“임신튀라고 아니?”
손에는 티켓이 쥐어져 있었다.
임신튀.
로맨스 소설의 유구한 클리셰 중 하나였다.
예기치 않은 임신을 한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에게서 도망가는 구성 장치다.
보통 아기를 원하지 않는 남주인공에게서 도망가는 여주인공이 주로 나온다. 여주인공은 보호자 없이 혼자 출산의 고통을 감내한다. 독자들은 여주인공에게 동정과 응원을 하게 된다. 물론 대부분은 오해가 있었거나 아니라도 남주가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는 계기가 된다.
“제가 아가씨에게 세뇌… 라기보다는 달래는 용으로라도 임신튀를 읽어 드린 기억은 없는데요. 혼전 임신은 성인용이라구요.”
“내가 사서 읽었어. 그리고 자세한 묘사만 없으면 전연령가야.”
낸시가 캐런을 세뇌시킨 탓에 캐런은 갖가지 연애 소설을 읽었다. 혹여나 그런 곳에서 반복되는 삶을 벗어날 수 있는 힌트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낸시는 캐런에게 계속 반박했다.
“아가씨가 하는 게 무슨 임신튀예요. 그냥 몰래 놀러 가는 거지.”
“임신 중에 도망가면 임신튀지 뭐. 장르 소설에 너무 따지지 말자.”
캐런은 열심히 목록을 보면서 손을 내저으며 귀찮다는 표시를 했다.
“가죽 부츠는 있어야겠고, 현금도 약간은 챙겨야겠고… 내 녹색 코트 가져와.”
“…으으…”
낸시는 캐런을 말리려 했지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캐런이 도망가면 자신은 분명 엄청나게 추궁당할 것이다. 낸시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자신은 혼나고 싶지 않았다. 다시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은 정말이지 절대로 원하지 않았다.
‘쫓겨나면 어쩌지?’
낸시는 캐런의 친정 하녀였다.
레이디스 메이드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지만 남작 가문에서 자신의 위치는 어정쩡했다. 캐런의 비밀을 알고 있기도 하고 환각제 등을 잘 다루는 덕에 친정 하녀로서 대우를 받고 있지만, 주방이나 세탁 청소 등 어디로도 배치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정식으로 레이디스 메이드가 되기에는 나이가 많았고 결정적으로 인종이 달랐다. 지금처럼 캐런의 단순한 시중만 들면서 월급을 타려면 캐런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우선이었다.
캐런은 저택의 안주인으로서 자신의 거처는 얼마든지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만약에 자신이 배신했다고 느끼면 캐런은 얼마든지 자신을 내쫓을 터였다.
‘난 계속 여기서 꿀 빨고 싶은데…. 레이몬드 남작님께 일러바쳐야 하나?’
하지만 이대로 입을 다물면 레이몬드에게 자신이 쫓겨날 것도 뻔했다.
아무리 캐런이 남작 부인이라고 하지만 실질적인 주인은 남작인 레이몬드다. 캐런이 자신의 편을 얼마나 들어 줄지도 미지수였고, 행여 다치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될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캐런에게 복종하면 레이몬드가 자신을 자를 것이고
캐런에게 반항하면 캐런이 자신을 자를 것이다.
낸시는 마른침을 삼켰다.
탁!
“꺅!”
캐런이 빈 가방을 낸시에게 던졌다.
“쉿, 조용히 하고 빨리 챙겨. 레이몬드는 아직 눈치 못 챘지?”
“예, 예…. 그런 것 같기는 한데요.”
“그럼 어서 눈에 안 띄게 짐 챙겨. 뭘 멍하니 있니?”
제 인생이 망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요.
낸시는 속으로 울었다.
레이몬드는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고 집무실 책상에 앉아 있었다.
캐런을 달랠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계속 버텨야 한다는 고집이 레이몬드를 얽매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자신의 인내심은 얄팍했다.
“…헉.”
레이몬드는 책상에 놓여 있던 손거울을 보고 경악해서 일어났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캐런이 자신의 얼굴을 좋아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외모 관리 또한 그의 필수적인 일과 중 하나였다. 그러나 고작 하루 만에 얼굴이 시들어 버린 수국처럼 변해 버렸다.
“내 얼굴이 너무 끔찍하군.”
눈가는 벌겋게 변해 있었고 면도를 하지 않아 턱이 까끌까끌했다. 밤새 같은 옷을 입고 전전긍긍했기 때문에 옷도 후줄근하게 보였다.
캐런이 지금 자신을 보면 수척함에 안타까워하는 대신 지저분하다고 차가운 눈으로 각방을 계속 쓰자고 제안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제임스!”
“예, 주인님.”
“세숫물과 갈아입을 옷을 가져다줘. 꼴이 말이 아니야.”
“알겠습니다.”
시종이 재빨리 차가운 세숫물을 들여왔다. 밤을 새운 레이몬드 탓에 저택의 사용인들은 전부 긴장을 하고 대기 중이다 보니 그의 명령을 재빠르게 수행했다.
“여기 있습니다, 주인님.”
“…후우.”
새하얀 도자기로 만들어진 세숫대야에 새겨져 있는 붉은 꽃을 보자 캐런이 연상되어 다시 한번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물에 비친 자신의 초췌한 모습에 두 번째 한숨이 새어 나오려고 하자 레이몬드는 세숫물에 얼굴을 밀어 넣었다. 울고 싶었다.
‘힘들다.’
머리로는 캐런을 보내지 않겠다고 이미 결론을 내렸지만 어찌 되었건 캐런이 자신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충격이었다. 캐런이 식사를 하지 않았다가 배고파서 굶어 죽으면 어떡하지. 이제까지 캐런이 여러 방법으로 죽었던 것을 떠올렸다. 그녀는 정말로 쉽게 죽어 버렸다.
“주인님!”
“허억!”
레이몬드는 급하게 얼굴을 올렸다.
생각에 빠져서 숨 쉬는 것을 까먹고 너무 오래 물속에 얼굴을 담그고 있었다.
“괜찮아. 잠깐 숨 쉬는 것을 잊었을 뿐이야.”
“그걸 잊으시면 어떡하십니까! 괜찮으신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당장 의사를 불러야…!”
“괜찮다니까.”
레이몬드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면서 늙은 집사를 달랬다. 자신의 할아버지 대부터 일한 늙은 집사를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세수를 하니까 좀 사람의 몰골 같군.”
레이몬드는 손거울을 들고 얼굴의 상태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새삼 갑자기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캐런은 다정하게 웃으면서 자신의 머리에 꽃을 꽂아 주었는데.
“…괜찮아.”
“남작님?”
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옷을 입는 것이 뭐가 문제란 말인가. 머리에 꽃도 혼자 꽂으면 되는 문제였다. 레이몬드는 거울을 보다가 신경질적으로 화분의 꽃 하나를 뽑았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에 꽂았다.
“아무 문제 없어.”
“…….”
“어울리나?”
“예 도련님, 아니 남작님. 아주 멋지십니다.”
집사는 레이몬드가 더 심각해지는 꼴을 보기 전에 자신이 눈을 감았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기도했다. 레이몬드는 집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거울을 보았다. 머리의 꽃 정도야.
“저, 주인님.”
“응?”
레이몬드는 거울을 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손님이 오셨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인 중 하나가 급하게 다가와 물었다.
정신이 없긴 한 모양이었다. 누가 다가오는 것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누군데?”
“접니다, 레이몬드 남작님.”
익숙한 목소리였다.
레이몬드는 급하게 손거울을 수건으로 감싼 후에 집사에게 건넸다. 시온이 거울을 빤히 보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보면 의미심장한 얼굴로 웃을 것이 뻔해 싫었기 때문이다. 레이몬드는 한숨을 깊게 쉬고 나서 고개를 들어 문 너머에 서 있는 시온을 보았다.
“시온 경, 사람이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렇게 오면 어떡하나. 연락도 없이.”
“같은 기숙사 방을 쓰던 사이에 뭘 내외하고 그러십니까.”
무신경한 시온의 태도를 보며 레이몬드는 혀를 찼다.
레이몬드에게 이제 시온은 두 살 어린 기사가 아닌 한없이 어리고 철없는 어린이나 마찬가지로 느껴졌다. 하지만 나이 있는 사람이 참아야겠지. 레이몬드는 시온에게 손을 내밀며 인사말을 건넸다.
“그때가 아니니 서로 예의를 지켜야 하지 않겠나. 공을 세운 것을 다시 한번 축하해, 시온 경. 신문에 자네 초상화가 썩 잘 나왔더군.”
“결혼과 작위 계승을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레이몬드 경. 실물만 못해서 우울했는데 좀 위로가 되네요.”
“무슨 소리, 화가가 지나치게 미화시켜 놓았던데.”
“하하하하! 그것 참 재밌는 농담입니다!”
의도적으로 서로 힘을 줘서 악수를 나눈 후에 시온은 모자를 벗었다.
“지난번에 부탁하셨던 것은 상회에 특별히 주문해 놓았습니다. 고맙다고는 안 하셔도 됩니다.”
“그래, 자네도 훈장을 받은 것에 대해 굳이 고맙다고는 안 해도 되고, 시온 경.”
“감사합니다, 레이몬드 남작님.”
한마디를 안 진다.
하지만 그리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기에 레이몬드는 시온을 안내했다.
“고맙게 생각하네, 시온 경. 앉아서 차라도 한잔하지.”
“전 보리로 만든 음료가 좋습니다.”
“알아. 우리 영지의 맥주는 괜찮지.”
레이몬드는 시온과 이야기하며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계속 캐런을 생각하느라 처지던 몸이 기운을 얻었다.
‘좀 살 것 같군. 나도 캐런만 있는 건 아니란 말이야.’
“그런데 레이몬드 경, 방에서 나가기 전에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뭔데?”
시온은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그 꽃은 뭡니까?”
레이몬드는 그제야 자신이 아직도 머리에 꽃을 달고 있음을 깨달았다.
시온은 싱글싱글 웃으면서 레이몬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 아니 이건.”
“남자가 그럴 수도 있는 법이죠. 머리에 꽃을 꽂는 것도 괜찮은 장식입니다. 지금 사회는 남성들의 외모 가꾸기에 지나치게 제한을 두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레이몬드 경? 공작새들을 보십시오. 수컷들은 암컷들의 눈에 들기 위해서 더없이 화려하지 않습니까. 남자들도 좀 더 장식을 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그만하게, 시온 경.”
“레이몬드 경을 따라서 저도 앞으로 모자에 꽃을 장식해 볼까 생각하는데 마땅한 꽃을 찾기가 어렵더군요. 카네이션 같은 건 아이가 부모에게 달아 줘야 할 것 같고, 무엇이 남성적이면서도 화려하고 어울릴까요? 레이몬드 경의 추천이 있으면 좀 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레이몬드는 자신이 머리에 꽃을 꽂은 상태에서 손거울을 보고 있을 때 시온이 들어오지 않은 것을 크나큰 다행으로 여겼다.
“자네가 왔으면 이셀라 에반스 양도 같이 방문했나?”
“예? 아뇨,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서로 교제한 지도 꽤 됐으니 결혼 발표라도 하려고 온 줄 알았거든.”
레이몬드는 창 아래 있는 마차를 내려다보았다.
에반스 가문의 마차가 있었다.
이셀라와 시온은 합이 잘 맞는 부분이 있어서 약간의 계기만 있으면 서로 쉽게 호감을 가졌다.
“이셀라 양과 결혼한다면 당연히 축하할 일이지. 자네도 생각보다 일찍 가는군.”
“결혼하시니 좋으십니까?”
“좋아. 자네도 빨리 결혼하는 게 좋을 거야. 결혼을 하고 나서야 나는 이제 인생을 제대로 살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어. 눈을 뜨면 신과 세상에 감사하고 있지.”
“예…. 뭐, 축하드립니다.”
“대답이 왜 그런가? 난 자네가 그 말을 전하러 온 줄 알았는데. 아닌가?”
시온이 갑작스럽게 온 이유는 그것 말고 없지 않은가. 웬만한 일은 미리 다 처리했기 때문에 다른 급한 일이 또 생길 게 없는데.
레이몬드는 시온이 약간 시선을 피하는 듯한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놀러 왔나?”
“네.”
“그럼 연락을 좀 하고 오지. 지금 캐런의 몸이 그리 좋지 않아서 당분간 직접 대접을 하기는 어렵거든.”
“…아… 예…. 그러시군요…. 별문제는 없으시구요?”
레이몬드가 잠시 숨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대답했다.
“우리는 아무 문제없어.”
“…예.”
레이몬드의 모습이 심상치 않아서 시온은 더 묻지 않고 말을 돌렸다.
“아무튼 오늘 온 건 결혼식에 대해 말씀드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저희는 아직 서로를 알아 가는 단계거든요. 그리고 이셀라 에반스 양의 사업이 워낙 바쁘기도 하구요.”
“그래? 의외로군.”
레이몬드는 이셀라 에반스의 과거를 생각하며 진심으로 의아했다.
이셀라는 그의 기억에 그리 똑똑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항상 레이몬드를 손에 넣으려다가 자신이 가진 것조차 전부 잃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무조건 이셀라의 밑에서 꼬리를 흔드는 시온을 만나자 이셀라는 전보다 더 과감하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뭘 해도 자신의 편을 들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부모에게도 대항할 힘을 주는 모양이었다.
“호오, 대단한데.”
“그렇죠?”
그래. 레이몬드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셀라와 레이몬드는 옆에서 보는 것보다 거리를 두는 것이 더 좋은 사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인생을, 레이몬드는 레이몬드의 인생을 더 나은 방향으로 걸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몇 번을 살아야 풀리는 인연도 있다.
레이몬드는 찻잔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기왕이면 그녀가 방문을 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이셀라 양은 왜 찾으십니까? 설마….”
“농담 같지도 않은 말은 하지 마.”
레이몬드는 한숨을 푹 쉬었다.
“캐런이 왜 그리 바다에 가고 싶어서 절절매나 했더니 이셀라 양의 이야기를 본 모양이야.”
“무슨 이야기요?”
“에반스 가문에서 대형 크루즈 사업을 시작했다는 기사가 났더군.”
레이몬드는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인 신문 광고를 떠올리면서 이를 갈았다. 시온은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알아챘다.
“아, 그거요. 역시 그걸 보신 모양이군요.”
“그래. 베르딕 에반스가 그쪽 사업을 시작할 줄은 몰랐어. 의외더군.”
레이몬드는 과거를 떠올렸다.
베르딕에 대한 원한을 어느 정도 덜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반드시 파멸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당장은 승승장구할 것이지만 십여 년 뒤에는 무조건 파멸했다. 베르딕은 노년에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고 레이몬드는 그것을 100번 넘게 지켜보았다.
“아닙니다, 베르딕 에반스 씨가 하는 사업이 아니에요.”
“무슨 소리인가, 시온 경? 분명 신문의 광고주는 에반스 가문이었는데.”
“그건 맞지만 에반스 씨가 아니라 이셀라 양이 새로 시작하는 사업입니다.”
시온은 히죽이면서 설명했다.
베르딕은 고리대금업과 무기 사업을 가장 크게 벌였다. 루이스를 구한 후 왕실과 연이 닿기 시작하면서 베르딕은 왕실에서 편의를 봐주기를 기대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사업은 축소되었다.
팬케이르 후작이 베르딕의 사업을 족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베르딕은 펄펄 뛰었지만 그렇다고 루이스가 팬케이르 후작을 버리고 베르딕을 밀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팬케이르는 그의 양부이자 삼촌이고 후작이기 때문이다.
‘역시 돈 대 줘 봤자 금고 취급이지!’
베르딕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일선에서 벗어나서 딸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임시방편에 가까운 면피용이었지만, 이셀라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누구나 아버지가 하던 일을 그대로 따를 거라 예상했지만 이셀라는 바로 베르딕과는 다른 노선을 걸었다.
이셀라는 무기에 쓰던 금속과 목재들을 조선업 쪽으로 돌렸다. 막대한 현금과 왕실의 호감을 등에 업고 있는 에반스 가문은 빠르게 사업을 확장했다. 하지만 고리대금업보다는 낫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사업의 확장에는 반드시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졸지에 이익이 줄어든 동종 업계에서 이미 자리 잡고 있던 사람들은 에반스 가문을 죽여 버리고 싶어서 이를 갈고 있었다.
새롭게 시작하는 사업이다 보니 이전의 베르딕이 주름잡고 있던 사업만큼 일사천리로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영역에서의 도전인 것을 감안하면 눈부신 속도였다.
그리고 베르딕과 그 사업을 이어받을 이셀라는 숨 쉬는 시간도 아까울 정도로 바쁘게 활동하고 있었다.
“이셀라 에반스 양이 직접 대형 선박을 세 척이나 굴린다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결혼은 미뤄 두고 있어요. 지금 결혼했다가는 이셀라 엘렉트라가 될 테니까요.”
시온 엘렉트라는 최근에 큰 공을 세웠고 그의 매끈한 얼굴 덕에 꽤나 유명 인사가 된 상태였다.
에반스 가문 역시 루이스 왕세손에 줄을 댔지만 아직은 고리대금업자로서의 악명이 높았다. 시온과 결혼을 하게 되면 듣게 될 세간의 뒷소문을 피하고자 그들은 결혼을 미루기로 했다. 그래야 베르딕의 이름이 더 빨리 잊혀질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이셀라가 에반스 가문의 딸로서의 권세를 더 휘두르고 싶어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럼 시온 경 자네는 지금 하고 있는 게 무엇인가? 난 당연히 자네가 베르딕의 사업에도 관여하고 있을 줄 알았어.”
“아닙니다. 전 제가 그쪽 방면으론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제가 잘하는 것을 하려구요.”
“뭘 하는데?”
“이셀라 양 경호요.”
“…자네는 꽤나 조신하군.”
“데릴사위의 기본이죠. 전 제가 직접 사업을 하는 것보다 능력 있는 여자 옆에서 아양을 떠는 게 천직이거든요.”
“그래, 긍정적이고 보기 좋아.”
레이몬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셀라 에반스는 자신의 인생을 너무나 잘 개척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캐런은 더 이상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레이몬드조차. 처음부터 그들은 이렇게 얽히지 말았어야 하는 악연이었다. 이 세월이 지나서야 확신할 수 있는 그런 악연. 그녀 자신에게조차.
“그래서 레이몬드 경, 아니 남작님은 뭐가 문제기에 그렇게 우울하십니까?”
시온은 탁자에 걸터앉아서 파이프를 물면서 물어봤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불을 요청하는 손에 성냥 대신 생강 쿠키를 얹으면서 말했다.
“이 저택에서 담배는 금지야. 아내가 임신 중이거든.”
“오, 축하드립니다. 그래서 부인께서 우울하신가요?”
“그래, 혹시 뭐가 문제인지 자네는 알까?”
여자를 잘 알잖아. 하지만 시온은 정색했다.
“제가 알 리가 없잖습니까. 제가 아무리 스쳐 지나갔던 여자가 많았어도 임신시킨 적은 없거든요.”
지킬 것은 지킨다며 정색하는 얼굴을 한 대 칠까 고민하다가 레이몬드는 시온의 얼굴에 쿠키를 하나 더 던졌다.
시온은 쿠키를 다른 손으로 낚아채면서 입에 쿠키를 물었다.
“절 그렇게 보시면 섭섭합니다. 그나저나 그 꽃은 계속 머리에 꽂고 계실 건가요? 그거 진짜 이상한데….”
“신경 꺼.”
“그런 걸 좋아하셨습니까?”
“캐런이 하고 다니라고 했거든.”
“아하. 문제가 그거군요?”
“글쎄…. 뭐가 문제인지 잘 모르겠어.”
레이몬드는 머리의 꽃을 만지작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임신 중인데, 자꾸만 밖으로 나가려고 해서 말이지. 아무튼, 이셀라 양이 방문해 주면 좋은 여흥이 되지 않을까 했지.”
“그냥 두 분이서 같이 여행을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출산이 임박한 것 아니면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도 많은데요. 레이몬드 경이 오신다면 제가 이셀라 양에게 잘 빌어서 좋은 방을 얻어 내겠습니다. 대외적으로 레이몬드 경과의 사이가 잘 수습됐다는 인상도 줄 수 있을 겁니다.”
“그건 안 돼. 위험하니까.”
“절 믿으시면 이셀라 양도 믿어 보세요.”
“그런 문제가 아니야, 시온 경. 임신 중에는 전부 다 위험하다고.”
레이몬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안 될 말이었다. 다른 사람을 불러들이는 것까지도 그는 억지로 납득했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바다나 알 수 없는 나라 같은 것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레이몬드 남작님, 그렇게 따지면 집도 위험하지 않습니까?”
“시온 경, 최소한 집은 내가 관리를 할 수 있어. 이 집 어디에 있든 5분 이내에 내가 찾아갈 수 있고, 항상 의사들이 대기하고 있고, 요리사들이나 하녀들도 엄중하게 골랐어. 물론 여기서도 위험할 수 있겠지. 하지만 난 최대한 위험을 배제하고 싶다는 거야.”
“…와.”
시온은 레이몬드를 약간 질린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레이몬드 남작님은 왜 눈치를 못 채시는 거야!’
낸시는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자신이 열심히 레이몬드에게 눈짓을 보냈지만 레이몬드는 그저 캐런이 자신을 만나지 않는다는 것에 충격을 먹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자신은 정말이지 저택에서 오래오래 붙어 있다가 하녀장 자리까지 먹고 싶었다. 특수한 위치 탓에 그녀는 하이어 저택에서나 이 남작 가문에서나 돈을 남들에 비해 몇 배는 받고 있었다. 이방인인 탓에 재취직도 힘들 것이고 어딜 가나 이만큼의 월급을 줄 리는 없었다.
레이몬드의 태도를 보아 분명 캐런이 사라지면 자신을 족칠 것이 뻔했다.
캐런이 식사를 하지 않는다고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은 얼굴을 했는데 집을 나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기절할지도 몰랐다.
‘내 월급….’
“빨리빨리!”
“네, 네….”
꾸물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는지 캐런은 낸시를 재촉했다. 낸시는 가방에 옷가지와 현금 등을 밀어 넣었다.
“아니, 아니야 옷은 다 빼도 돼.”
“네?”
“편한 잠옷이랑 내가 잘 입는 드레스 한두 벌만 챙겨. 새로 다 사면 되니까. 배 안에 의상실도 따로 있대. 거기서 맞춰 입으면 돼. 그리고 코르셋은 빼라니까! 어차피 임신해서 이제 못 입는다고!”
낸시는 무심코 집어넣었던 코르셋과 화려한 드레스를 빼냈다.
“그 커다란 가방이 아니라 내가 아까 던진 작은 가방에 넣어. 누가 도망가는데 그렇게 큰 걸 들고 가? 너 내가 잡히길 바라는 거니?”
네.
낸시는 대답을 삼켰다. 캐런이 지시한 최소한의 물건들만 집어넣자 가방이 여자 혼자 들 수 있을 만큼 가벼워졌다. 이 정도면 캐런 혼자서도 충분히 들 만한 무게였다.
“돈이라도 더 챙길까요?”
“돈도 최소한으로만 챙겨. 어차피 청구서는 저택으로 보내면 되니까.”
‘임신튀’라며.
낸시는 임신튀의 개념을 무시하는 캐런에게 뭐라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대신 낸시는 캐런에게 물었다.
“그럼 아가씨 언제 출발하실 건데요?”
“오늘 밤.”
“네?”
낸시는 입을 떡 벌렸다.
“뭘 그리 놀래? 아까 티켓 봤잖니. 그거 오늘 밤 기차야.”
“아니… 그건 또 언제….”
캐런이 신문을 보고 가고 싶다고 말한 것이 어제였다. 그런데 하루 만에 떠난다고? 그러고 보니 저 기차표는 또 언제 구한거야?
“지금쯤 시온 경이 레이몬드의 발을 잡고 있을 거야.”
“시온 경이요?”
“어제 네가 식당으로 내려가고 레이몬드도 식당에 있을 때 이셀라에게 전보를 부쳤거든.”
캐런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식사를 빼먹은 탓에 저택 사용인들의 관심은 식당의 레이몬드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부부 싸움은 사용인들의 흥미진진한 구경거리였다.
어차피 심각하게 번지지 않을 것을 알기에 사용인들은 저걸 어쩌나, 아이고 저런, 하면서 입방아를 찧어 댔지 경계를 삼엄하게 하지는 않았다. 낸시조차 그랬다.
그때가 기회였다.
캐런은 방에 드러누워서 떼를 쓰는 척하면서 몰래 나가 이셀라에게 전보를 부쳤다.
전신기를 다루는 방은 레이몬드의 집무실 옆에 있었고 캐런이 먹지 않은 식사를 하인들에게 나눠 주느라 그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심심풀이로 배워 둔 전신기를 쓰는 법이 드디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영주의 딸이자 남작 부인인 자신이 17세의 나이로 전신기를 사용할 줄 안다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귀족들이 직접 전신기를 사용할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신처럼 어린 여성이면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캐런은 자신 말고도 전신기를 사용할 줄 아는 또 다른 사람을 알았다.
이셀라 에반스다. 캐런은 흐흐 웃으면서 에반스 가문에서 이셀라의 시녀로 일했던 기억을 토대로 에반스 가문에 전보를 부쳤다.
「캐런? 이 주소는 대체 어떻게 알았어요?」
「제 모든 걸 동원해서요.」
「아니, 이건 대체….」
이셀라의 당황이 전보로 느껴졌지만 캐런은 급하게 전신을 이었다.
「이번에 신문에 낸 크루즈 광고를 봤어요. 죽어도 가고 싶은데 레이몬드가 안 보내 준대요. 도와줄 수 있어요?」
「제가 왜요?」
이셀라의 짧은 반문이었다.
윽. 캐런은 약간 가슴이 아팠다. 역시 이번에도 귀즈 왕세자에게 같이 납치를 당했어야 했다. 이번 생의 이셀라는 캐런에게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친밀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위험한 일은 하고 싶지 않사와요.」
거절이었다. 하지만 캐런은 포기하지 않았다.
「신문에 크루즈 후기를 상세하게 쓸게요. 제가 쓰는 것이 무엇보다 진실되어 보이지 않겠어요?」
「…….」
무려 전 약혼자의 부인이 쓰는 여행 후기.
좋은 상품, 큰 광고만이 성공을 약속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지 또한 매우 중요했다.
이셀라 에반스는 배의 구조와 재료에서부터 규모까지 세세하게 공을 들였으며 그 안을 채우는 갖가지 상품 또한 심혈을 기울여서 기획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으니, 가격을 도무지 낮출 수가 없었다.
이셀라가 내놓은 상품은 일반 서민들이 기분 전환으로 갈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하급 공무원들의 연봉과 맞먹었으니 대부분은 그저 구경만 할 것이었다.
저렴하게 갈 수 없으면 그만큼의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내세워야 하지만 대부분의 부자들은 귀족들이었으며 귀족들은 에반스 가문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을 타개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덧입히기 위해서는 부자들, 유명인들을 내세워야 했다.
캐런 하이어, 아니 캐런 세이어테스 남작 부인이 쓰는 후기문은 누가 봐도 진실될 것이다.
사교계의 유명 인사인 레이몬드 세이어테스 경의 젊은 부인은 결혼하자마자 바로 영지에 틀어박혀서 숱한 사람들에게 궁금증만을 남겼고, 이셀라 에반스에게는 비웃음이 쏟아졌다.
시온 엘렉트라와의 약혼이 어느 정도는 파혼에 관한 소문을 희석해 주었지만 아직도 이셀라에게는 레이몬드가 선택하지 않은 사채업자의 딸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
이런 상황을 고려했을 때 세어어테스 남작 부인이 극찬을 했다는 이야기는 사업적으로 이셀라에게 꽤나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이셀라 에반스의 답변이 늦어졌다.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그러니까… 밖에… 에반스 가문의 마차가 대기하고 있다구요?”
“응.”
캐런이 문밖으로 나서자 낸시는 캐런의 팔을 붙들었다.
“안 돼요. 싫어요. 가지 마세요.”
“왜 이리 귀찮게 굴어?”
캐런이 찡그리면서 낸시의 손을 쳐 냈다.
“지금 시간 없어, 빨리 가야 해.”
“아가씨가 가시면 저 죽어요!”
“아이참, 이런 걸로 죽긴 왜 죽니? …괜찮아 목숨은 살려 줄 거야.”
“머뭇거리셨죠, 지금?”
“아니야, 조용히 해. 난 이제 떠날 거야. 아무도 날 막을 수 없어. 난 따뜻한 남쪽 바다에서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술잔을 기울이며 떠다닐 거야. 참, 떠다닌다는 건 바다를 말하는 게 아니야. 그거 아니? 그 배에는 수영장도 있단다.”
“아가씨!”
캐런은 낸시를 질질 끌며 가방을 들고 내려갔다. 시온이 레이몬드를 붙들고 있을 동안 어서 뒷문을 통해 빠져나가야 했다.
“아이참… 귀찮게.”
캐런은 질질 매달리는 낸시가 귀찮았다.
총알의 맛을 한번 보면 바로 조용해질 것 같은데. 전처럼 한번 총을 다시 이마에 겨누면 어떨까?
“…….”
캐런은 입맛을 다시다가 고개를 저었다. 역시 사람이 한번 편한 수단을 알게 되니까 그 뒤로도 자꾸만 찾게 된다. 무엇보다 지금 자신에게는 총이 없었다.
레이몬드는 저택에서 캐런에게 총을 지니게끔 허락하지 않았다. 캐런은 그에게 어디서든 혹시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을 지킬 수단을 달라고 했지만 레이몬드는 자신이 옆에 있는데 무엇이 걱정이냐며 주지 않았다.
캐런은 총에 대한 유혹을 떨쳐 내고 낸시에게 상냥하게 말했다.
“그럼 같이 가자.”
크루즈 탑승료가 낸시의 1년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캐런이 낸시를 위해 지불하지 못할 금액은 아니었다. 어차피 캐런과 레이몬드에게 돈이란 큰 의미가 없었다.
낸시가 또 돈을 들고 도망간다거나 해서 뒤통수를 칠지 모른다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금 기회를 잡는 것이 돈보다 더욱 중요했다.
“네?”
하지만 낸시는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겁했다.
“그거 삼등칸만 해도 얼만지 아시죠?”
“삼등칸?”
캐런은 코웃음을 쳤다.
“내가 머물 곳은 특실이야. 너도 거기서 머물 거고.”
“특실….”
“뭘 그렇게 소스라치게 놀라. 어차피 짐 들어 줄 애가 있으면 나도 편하고. 이셀라에게 다른 하녀를 받는 것보다 네가 있는 게 낫겠지.”
“다, 다, 다녀와서 잘리잖아요.”
“기회비용이라고 아니? 너도 다시는 갈 수 없는 기회야. 배에 오르는 비용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
“그렇다고 제 인생을 날릴 수는….”
캐런은 그제야 낸시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낸시는 항상 돈을 탐하기는 했지만 그것보다는 안정된 생활을 원하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아무리 호화로운 경험일지라도 중요하지 않았다.
정신병자인 어린 주인 옆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캐런이 자신의 예상과 다르게 행동하면 미친 듯이 분노하거나, 아니면 돈을 들고 도망가고는 했던 것일 테지. 거리에서 떠다니는 삶, 마약류를 제조하면서 파는 그런 삶이 싫으니까.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제야 캐런은 낸시의 입장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이라면 평생 맛보지 못할 여행을 주저 없이 택할 터였다.
“내가 이번 건에 대해서는 최대한 변호해 줄게. 그리고 그래도 잘리면 소개장을 써 주고.”
그렇다면 그녀가 원하는 안정을 보장해 주자.
캐런은 혀를 차고 손가락을 들었다.
“만약에 잘리면 3년 치 월급을 일시불로 줄게. 그 정도면 가게를 차리기도 충분하겠지.”
“일시불…?”
“그래.”
“캐런 마님, 그 복도로 가시면 위험해요. 지금 청소 약을 발라 놓은 북쪽 계단을 지나서 장미 정원을 통해 마차로 접근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무거우시죠? 짐 이리 주세요.”
낸시는 냉큼 캐런의 가방을 잡아채고 앞장서서 걸었다.
“어서 오세요!”
“…….”
캐런은 낸시의 급변한 태도에 약간 당황하면서 따라갔다.
“그쪽이 아니에요, 이쪽으로 오셔서… 잠깐.”
“너 되게 잘 안다.”
“제가 위치가 어정쩡해서 시간 때우는 법은 통달했거든요. 효율성 있게 돈을 받으려면… 쉿.”
“농땡이를 잘 친다는 거구나.”
“…오호홍.”
캐런은 몇 번이고 아슬아슬하게 사용인들을 피해서 기가 막히게 사람이 없는 곳을 골라 가는 낸시를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자신이 과거의 경험을 통해서 사용인들의 행동 패턴을 알고 움직이려던 것과 다르게 낸시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튈 루트를 찾아내었다.
‘처음부터 돈을 줄 것을 그랬나.’
낸시는 여러 면에서 그리 믿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사실 캐런은 자신이 도망간 것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레이몬드가 낸시를 자르더라도 딱히 가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녀만큼 편안한 수족도 드물었다.
“저기 마차가 보이네요.”
낸시가 마차를 가리켰다.
캐런은 조금 새삼스러웠다. 좋지도 싫지도 않지만, 신용조차 없지만,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 서로 편할 수 있는 관계.
“왜 이렇게 늦… 어… 요!”
이셀라가 마차 안에서 창문을 열고 작게 소리쳤다. 얼굴이 약간 화가 난 것 같았다.
“많이 늦었나요?”
“일단 빨리 올라타요. 하녀는… 고작 하나로 괜찮나요?”
“부족할까요?”
“배의 관리 인력이 많으니 괜찮겠지만, 아, 아니 일단 올라타서 뒤에 앉아요. 생각보다 늦었어요.”
이셀라가 캐런과 낸시를 보며 재촉했다.
캐런이 마차 안에 올라탔다. 이셀라는 나무 판으로 자신이 앉아 있는 곳과 뒤의 좁은 공간 사이를 막아 버렸다. 그러자 새카만 암실이 생겼다.
“에반스 아가씨가 잘도 도와주시네요.”
낸시가 어둠 속에서 속삭였다.
“얼마나 주기로 하셨어요? 에반스 가문이면 어지간한 돈으로는 잘 안 움직일 텐데. 특실이면 엄청날 거 아니에요?”
낸시는 자기가 돈을 쓰는 것도 아니면서 캐런이 지나치게 돈을 쏟아 부을까 봐 덜컥 겁을 먹었다. 삼등칸이라고 할지라도 일반 직장인들보다 두 배는 받는 낸시가 1년 연봉을 쏟아 부어야 하는 돈이었다. 특등실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비용 걱정하는 거라면 괜찮아.”
“괜찮은 거 맞아요?”
“그래, 네 말대로 이셀라 에반스가 어디 돈으로 움직일 사람이니? 돈이라면 어지간한 왕족도 부럽지 않는 사람인데.”
이셀라 에반스가 직접 마차를 끌고 와서 캐런을 몰래 탈출시킨 후에 자신의 배에 태우기까지 하다니, 수지맞는 장사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는 이셀라와 파혼한 레이몬드가 꼭꼭 숨겨 둔다는 부인이었다.
잘못하다가는 납치해서 해코지했다는 소문을 들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했다니.
“그럼 대체 어떻게 꼬신 거예요?”
“글쎄, 내 외모?”
“…….”
어둠 속이라서 낸시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캐런은 낸시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쿡쿡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는다.
“나이가 가져다준 현명함 덕분이지.”
“네에….”
낸시가 생각하는 것은 캐런도 이미 다 고려해 본 사실일 것이다
낸시는 절대 캐런보다 이셀라를 더 잘 알 수 없다.
이셀라 에반스는 돈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캐런은 이셀라가 자신의 전보를 받고 고민하는 모습을 상상해 봤다.
캐런이 작성하기로 한 후기는 이셀라의 흥미를 끌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얼토당토않은 일을 하겠다고 나서기에는 다소 약했다. 그리고 자신이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이셀라는 끄덕도 않고 오히려 더 의심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캐런은 과거의 이셀라를 안다.
자신에게 털어놓았던 이셀라의 고민을 기억한다. 친구 비슷한 관계가 되었던 그때의 이셀라를 안다.
그래서 캐런은 고민하는 이셀라에게 재빨리 문장을 덧붙였다.
「제 가출을 도와줘요.」
과거에 그녀가 자신에게 했던 부탁이었다.
이셀라는 베르딕 에반스의 통제를 갑갑해했다.
물론 좋은 것을 쥐여 주려는 애정을 알았을 것이다. 모를 수가 없다. 자신이 하는 것이 일탈이라는 것을 안다.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충동을 억제할 수가 없을 때가 오는 것이다.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고 싶은 그 마음. 애정을 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좀 더 다른 세상을 보고 싶은 그 마음. 눈앞에 펼쳐질 그 풍경을 도무지 접을 수 없어서.
스스로도 철없는 소리, 배부른 소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꾹꾹 눌러놓다가 언젠가는 터지고야 하는 그 마음을 이셀라는 알고 있다.
「남편이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해서 너무 갑갑해요.」
「앞으로 5년이나 못 나가게 할 거래요.」
그리고 캐런의 예상이 맞았다.
맹세코 이셀라는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유에 대한 호소, 그것도 누가 보더라도 여유 있고 부유하며 애정이 넘치는 집의 또래가 남편 몰래 전신기를 써서 간신히 보내는 메시지는 이셀라의 마음을 흔들었다.
자신이 레이몬드와 결혼했다면 저것보다 더 심한 상태겠지. 레이몬드가 원해서 결혼한 아내에게도 저런 식으로 대한다면.
이셀라는 메세지를 읽으면서 시온을 불렀다.
“시온 경, 하나 물어볼게요. 레이몬드 경이 좋아요, 제가 좋아요?”
“물으실 필요도 없는 질문입니다.”
시온은 나긋하게 웃으면서 이셀라에게 허리를 숙였다.
이셀라는 쪽지를 찢으며 웃었다.
“그럼 레이몬드 경의 뒤통수를 한 대 쳐 주러 갈까요.”
분명 그것은 꽤나 재밌는 일이 될 것임에 틀림없었다.
시온은 창문을 힐끗거렸다.
캐런이 단식 투쟁을 하는 척하면서 레이몬드를 흔들고 시온이 그때 방문해 그의 눈길을 돌려놓는다. 그리고 그사이에 이셀라가 캐런을 빼낸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시온은 조금 불안했다.
레이몬드는 의식을 하지 않고도 항상 주변 상황을 자연스럽게 파악하고 늘 긴장을 놓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누구의 발걸음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도 쉽게 눈치를 채고는 했다.
‘성공할 수 있을까?’
하지만 직접 방문해서 레이몬드를 보자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샘솟았다.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서 캐런이 나한테… 이건 정말 너무하지 않는가. 난 그녀가 없으면 잠도 못 자는데.”
“아, 예.”
어떻게든 감추려고는 하지만 눈가는 불그스름했고 목소리는 피곤으로 들떠 있었다. 그리고 대화 주제가 계속해서 아내에만 맴돌고 있었다. 이제까지 본 적 없는 레이몬드의 모습은 아주 만만해 보였다.
시온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레이몬드를 구슬려 보려고 했지만, 레이몬드는 만만해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캐런에 대해서는 계속 완고했다.
“5년 정도 후를 생각하고 있어. 그 정도면 아이가 태어나고 위험한 고비는 지난 뒤일 테니까.”
“5년이요…. 그렇게 부인을 억압하시다가 사고 터질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면 지금.
시온은 레이몬드가 앉아 있는 탁자 주변을 천천히 걸었다. 창가 쪽으로 가서 멀리 있는 마차가 조금씩 움직이는 것을 본다. 소리는 물론 전혀 들리지 않는다. 좋았어.
“시온 경, 남의 가정사에 지나친 충고는 자제하도록 해. 결혼도 하지 못한 남자가 어디 유부남에게 감히 충고한단 말인가?”
레이몬드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시온에게 결혼의 중요성과 임신부의 안전성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시온은 적당히 레이몬드에게 반박하면서 자신이 성공했음을 의심치 않았다.
자신이 여러모로 신세를 졌던 레이몬드를 속인다는 것이 처음에는 약간 부담스러웠지만, 레이몬드가 저리 꽉 막혀 있다는 것을 보고 나니 죄책감이 한결 덜해지는 것을 느꼈다.
‘남편은 원래 아내를 따라가는 거랬어.’
레이몬드는 지금 거듭된 행운에 빠져서 중요한 진리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시온은 남편의 미덕, 즉 아내에게 순종하는 기쁨을 그에게 알려 주고자 했다. 레이몬드는 다른 것은 몰라도 여자에 대해서는 시온에게 못 미치지 않는가? 시온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쩐지 대화가 계속 겉도는 것 같군.”
“…아, 하하.”
시온은 얼른 창틀에서 손을 뗐다.
레이몬드는 한숨을 한 번 쉬더니 차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시온 경, 자네 정말 심심해서 온 건가?”
“레이몬드 경이 어떻게 지내나 궁금하기도 하고, 뭐… 아, 지난번에 말씀하셨던 것들은 남작 부인의 친정인 하이어 저택으로 보냈습니다.”
레이몬드는 전에 시온을 통해서 이상한 기구들이나 구하기 힘든 광물, 약초 등을 의뢰했었다. 시온이 직접 에반스가의 사업에 몸담고 있진 않아도 잘게 뻗어 있는 인맥을 살짝 이용하면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레이몬드는 시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군.”
“별말씀을요.”
“그런데 물건을 보내서 고맙다는 말은 전에 내가 했지 않나.”
시온은 순간 자신이 말을 둘러대느라 실수를 했음을 알았다.
“그랬었죠. 하지만 그 뒤로 감사를 제대로 못 받은 것 같아서 뭐 떨어질 것 없나 하고….”
“자네 앞으로 분명히 순도 높은 다이아 서른 개를 보냈잖아. 처음부터 계속 그 말을 하더니 왜 계속….”
“…….”
“시온 경.”
레이몬드가 의심의 눈빛으로 시온을 쳐다보았다.
“에이, 뭐 요즘 이셀라 아가씨하고만 붙어 있다 보니 옛 전우가 그리워져서 말입니다. 레이몬드 경도 결혼하시고 심심하실까 봐 겸사겸사 와 봤지요.”
“하아…. 이봐, 자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시온은 발 빠르게 뒤로 도망갔다.
누가 보더라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자신의 실수에 시온은 혀를 차면서 달렸다. 레이몬드가 얼빠진 모습을 처음 봤다고 자신도 얼빠진 대화를 해서는 안 되었는데.
“…제임스.”
“예, 주인님.”
“지금 당장 캐런의 방으로 간다.”
“시온 경의 배웅은 안 하십니까?”
하지만 레이몬드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캐런이 농성하고 있는 방문 앞으로 움직였다. 빠른 걸음에 늙은 집사가 헐떡이며 뛰다시피 쫓아갔다.
똑똑.
“캐런.”
“아직 마님의 화가 풀리지 않으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레이몬드는 대꾸하지 않고 문을 두들겼다.
똑똑.
“…….”
“…주인님, 이제 밤이 늦었습니다만….”
쾅!
레이몬드는 노크를 할 것처럼 손을 올리더니 그대로 문짝을 부숴 버렸다. 호두나무로 만들어진 단단한 문에 구멍이 난 것을 보고 제임스가 고함을 질렀다.
“주인님! 이러시면 마님이 놀라십…!”
하지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온통 헤집어 놓은 것처럼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침대 위에는 쪽지가 한 장 있었다.
사랑하는 레이몬드에게.
청구서는 집으로 보낼게요.
- 캐런 -
“…마차 당장 출발해요!”
“시온?”
“당장!”
마차가 빠르게 출발했다.
“꺄아악!”
급하게 움직이자 덜컹이는 마차 안에서 낸시가 비명을 질렀다. 캐런은 낸시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워낙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다. 마차가 미친 듯이 덜컹였다. 낸시의 비명과 마차가 급하게 출발하느라 덜컹거리는 소음 사이로 대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말한 대로 가는 거야. 알았지?”
“문제없습니다. 그럼 출발합니다.”
이셀라의 목소리가 약간 멀리서 희미하게 들렸다가 다시 사라졌다.
레이몬드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까?
캐런은 어둠 속에서 마차 안의 손잡이를 잡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임신튀는 쉬운 것이 아니다.
‘젠장 내가 미쳤지! 저 레이몬드 경에게!’
시온은 속으로 욕을 하면서 마차를 출발시켰다.
‘준비를 더 철저하게 했어야 했는데…!’
말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적당한 속도, 안전하면서도 의심을 사지 않을 속도를 계산해야 한다.
“시온 엘렉트라!”
“히이이익!”
일반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을 거리였지만 긴장한 시온은 저 멀리 저택에서 고함치는 레이몬드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야, 이 개자식아!’ 하는 욕설도.
“이랴! 나 좀 살려 줘라, 얘들아!”
말들이 채찍을 맞자 어둠 속을 다그닥거리며 내달린다. 어두운 길이었지만 다행히 얼마 전에 정비가 끝난 길은 곧게 뻗어 있어서 속도를 내도 무리는 없었다.
다다다닥.
마을 쪽으로 빨리 이동해야 한다. 그래야 레이몬드를 따돌릴 수 있었다. 네 마리의 말들이 마차를 미친 듯이 끌었다. 이셀라 가문의 혈통 좋은 말들과 가볍고 튼튼한 마차다. 그리고 시온은 어둠 속에서도 마차를 모는 것에 능했다.
시온은 채찍을 적절하게 내려치면서 마차를 몰았다. 조금이라도 여유를 부려서는 안 된다. 급하게, 급박하게…. 시온은 한참을 달리다가 고개를 돌렸다.
“당장 안 멈춰!”
“으아아아악!”
돌아보지 말 것을 그랬다.
시온은 뒤를 흘끗 쳐다보다가 비명을 질렀다.
레이몬드가 악귀 같은 모습으로 마차의 뒤를 바짝 쫓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은 짐승처럼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녹색으로 빛이 났다. 레이몬드의 말이 미친 듯이 내달리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시온처럼 정돈된 길을 따라 달리는 것이 아니라 마구잡이로 내지르듯 달렸다.
말을 달래는 것이 아니라 더더욱 흥분시켜 광란 상태로 만들고 있었고, 스스로도 미친 듯이 보였다.
“시온 너 이 자식…!”
“아아아아아악!”
시온은 고함을 질렀다.
반은 의도된 것이었지만 반은 진짜 소름이 끼쳤다. 분명 죽을 정도의 잘못은 아닐 텐데 눈이 마주친 순간 도무지 그가 자신을 살려 둘 것 같지 않았다. 시온은 채찍을 강하게 휘둘렀다.
철썩!
채찍이 말들의 엉덩이를 휘갈겼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마차가 단독으로 뛰어오는 말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둘 사이의 거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다. 시온은 고함을 지르며 거리를 계산했다. 어쩌면 이대로 성공할지도 모른다.
탕!
“미, 미. 미친…! 레이몬드 경! 절 죽이려고!”
레이몬드가 총을 쐈다. 시온은 경악으로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레이몬드도 맞받아 고함을 쳤다.
“빗맞혔어! 마차 당장 멈추지 못해!”
“레이몬드 경이 지금 그렇게 쫓아오시는데 어떻게 멈춥니까?!”
“위험하잖아 개자식아! 당장 마차 속도를 줄여!”
당신이 안 쫓아오면 안전하다고!
시온은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레이몬드가 점점 더 가까이 오자 두려움에 떨었다. 레이몬드는 점점 더 다가오면서 침착함을 되찾는 것 같았다.
“마차 속도를 줄이지 않으면 다음에는 빗나가게 하지 않는다.”
침착하게 돌아 있었다.
“처음에는 귓불을 쏠 거야. 미리 말했으니 놀라서 마차를 전복시키거나 하지는 말게.”
“뭐, 뭐라구요?”
“너무 움직이면 나라도 실수해서 빗나갈지 몰라.”
“…천천히 뒤로 떨어지시면 마차를 세, 세우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이만하면 자신은 최선을 다 했다.
시온은 침을 삼켰다.
흥분한 말들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어느새 마을에 거의 다 도착해 있었다. 시온은 한숨을 쉬었다.
마차가 완전히 멈추자 레이몬드가 마차의 문으로 다가갔다. 마차의 문을 열고 레이몬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쫓아와 놓고도 정작 캐런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무섭다.
“캐런,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너무 짓궂군요. 이런 행동은 다시는 하지 말아 주십시오.”
“…….”
“이제 산책은 충분하니 돌아갑시다.”
“…문 닫고 가세요.”
레이몬드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질 뻔했다. 목소리가 이상했다.
아냐, 설마… 설마.
심호흡을 하고 눈을 비빈다. 그럴 리가 없다. 왜 여기에.
“…이셀라.”
“할 말이 더 있나요? 레이몬드 경. 난 지금 매우 불쾌하니 문 닫아요.”
마차 안에 있는 건 캐런이 아닌 얼굴에 잔뜩 짜증이 난 이셀라였다. 레이몬드의 얼굴은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일그러졌다.
“아니, 그럴 리가… 분명.”
“문 닫으라고 했어요. 지금 이게 무슨 난폭한 짓인가요?”
“그러니까, 캐런이….”
레이몬드는 인상을 썼다.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나오자 머리가 텅 비는 듯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마차 안을 훑었다.
그리고 이셀라가 앉아 있는 마차의 내부가 외부에서 보이는 것보다 더 좁다는 것을 알아챘다. 보통은 짐칸을 나누어 사용하기는 하지만 저렇게 위까지 막지는 않는다. 레이몬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마차를 수색해 봐도 되겠습니까, 이셀라 에반스. 제 아내가 여기 타고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좀 전에 총성을 들었어요. 지금 이게 무슨 짓이죠?”
“아내가 도망가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둘 남편이 어디 있습니까?”
“잘하면 안 도망가겠죠.”
“…비켜 주십시오. 아니면 강제하겠습니다.”
“레이몬드 경이야말로 이셀라 양에게 사과하십시오.”
시온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레이몬드는 주먹을 쥐었다가 다시 폈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쉬고 다시 말했다.
“이셀라 에반스 양, 제 아내 캐런 세이어테스가 이 마차 안에 있는지 조사하고 싶습니다.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당신은 갑자기 말을 달려 저희를 놀라게 하고, 총까지 쐈어요. 제가 협력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레이몬드는 총알이 시온 근처에도 가지 않았고 들판을 향했다고 하려고 했지만, 스스로도 치졸하게 느껴져 그만두었다.
“시온 경이 급하게 나갔고, 제 아내는 실종되었습니다. 출발한 마차 안에 그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그렇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마차 뒤 칸을 열어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임신 중에 그런 곳에 있으면 힘들 겁니다.”
“이 마차 뒤 칸에는 아무도 없어요.”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습니다.”
레이몬드는 끈질겼지만 이셀라 또한 만만하지 않았다. 수없이 반복되는 삶 동안 한 번도 레이몬드를 놓아주지 않았던 이셀라다. 하려면 힘으로 강제하는 수밖에 없었다. 레이몬드는 점점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었다. 하지만 점점 험악해지는 사이에 시온이 끼어들었다.
“레이몬드 경, 이 안에는 정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 자네는 왜 도망갔지?”
“쫓아오니까요.”
“일단 열어.”
“없다고 하는데 그러시는 건 무례하신 거 아시죠? 물론, 레이몬드 경의 사정도 이해합니다. 정말로 부인을 사랑하고 걱정하시니까요.”
시온은 레이몬드가 이성을 잃기 전에 급하게 뒷말을 덧붙이며 그를 달랬다.
“하지만 이 안에 없다고 했는데 여신다면, 책임은 지실 필요가 있으실 것 같습니다.”
“없을 것 같지 않군.”
“그럼 열어 보십시오.”
“시온.”
시온은 뒤로 살짝 물러났다. 이셀라가 시온을 불렀지만 시온은 이셀라에게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말렸다. 서로 적당하게 밀고 당기기를 해야 한다. 이셀라는 좀 더 시간을 끌려고 하지만 여기서 더 막다가는 장난이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책임은 레이몬드 경이 지셔야 합니다.”
덜컹.
레이몬드는 대답도 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캐런은 소리 내어 웃었다.
멀리 있는 마차 안에서.
처음부터 마차는 두 대였다.
“제가 없다고 말씀드렸잖아요.”
하하하, 호호호.
시온과 이셀라가 웃으면서 레이몬드를 보았다.
레이몬드는 텅 비어 있는 마차 뒤 칸을 보며 어이가 없어서 입을 떡 벌렸다.
“…젠장…. 시온… 너 이 자식. 아까 벌인 그 쇼는….”
“레이몬드 경이 무서워서 도망갔죠.”
시온은 뻔뻔하게 웃으면서 이셀라를 끌어당겼다.
“이대로 가다가는 바로 잡힐 겁니다.”
“에반스 가문의 마차는 아주 가볍고 속도가 빨라요.”
“그보다 빠르게 눈치챌 가능성이 높아요. 레이몬드 경의 의심은 퍽 집요하거든요.”
이셀라가 캐런을 데리고 바로 가장 가까운 항구로 출발해 작은 배를 타고 나가 대형 선박으로 옮겨 탄다는 계획은, 레이몬드를 잘 아는 시온에 의해 살짝 수정되었다.
“두 대로 연막작전을 씁시다. 제가 먼저 레이몬드 경에게 가서 주의를 끌겠습니다. 그리고 마차를 몰고 가면 분명 레이몬드 경은 쫓아오겠죠. 캐런 양은 숨어 있다가 레이몬드 경이 출발하면 그때 다른 마차를 타고 예전 도로로 이동하면 됩니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마을로 도착하면, 여기서 또 다른 마차로 바꾸어 타게 말을 맞춰 두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레이몬드 경을 상대로 이 정도면 정말 허술한 계획입니다.”
그러고도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캐런 때문에 얼이 좀 빠진 상태였고, 시온의 덫에 순순히 빠져들었다. 마차 안에 이셀라가 들어 있어 멀리서 레이몬드가 마차의 창문으로 비치는 여자의 인영을 확인한 것까지 완벽했다.
시온과 이셀라는 제대로 속아 넘어간 레이몬드를 보며 활짝 웃었다.
“수습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시온…. 윽….”
레이몬드는 화를 내려다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무례한 짓을 했다는 자각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당장이라도 캐런을 다시 쫓아가려면 지금 상황을 무마해야 했다.
레이몬드는 눈을 꽉 감았다가 한숨을 쉬고 고개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이셀라. 제가 실수했습니다.”
레이몬드의 패배였다.
“세상에…. 미친…. 저게 다 물이야.”
“네, 아가씨.”
“저게 다 물이라고! 하늘 아래 전부 다 물! 세상에!”
캐런은 침착함을 버리고 열심히 놀라며 낸시를 붙잡고 흔들었다. 떠돌이 생활을 할 때 바닷가에서도 살아 본 적이 있는 낸시로서는 그리 엄청난 풍경은 아니었으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다를 본 캐런에게는 정말로 엄청난 풍경이었다.
레이몬드를 따돌리고 마침내 도착했다.
거침없이 선택하고 밀어붙였지만 캐런 스스로도 연인을 속인다는 약간의 죄책감은 있었다. 그리고 바다가 시시할까 봐, 자신이 실망할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아침이 되고 캐런이 바다를 마주하자 그 두려움이나 실망감 등의 부정적인 감정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새파란 하늘에 눈높이에 깔려 있는 새하얀 뭉게구름들. 밀려오는 소금의 냄새는 처음 맡으면서도 그리 불쾌하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 호수와는 다른 짙푸른 물의 세상.
그 광경은, 정말로 모험을 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로열 루이스호에 타실 분들은 3번 선착장으로 와 주시길 바랍니다!”
“저 배예요. 어서 가요.”
캐런은 낸시와 같이 걸음을 옮겼다.
“이 배에 타라고?”
“네.”
분명 신문에 광고하던 배는 훨씬 더 크고, 층도 높았는데, 선착장에 있는 것은 2층짜리 나무로 만들어진 배였다.
‘설마 과대광고?’
머릿속으로 이셀라가 소리 높여 웃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어쩌면 이번 생의 이셀라는 속으로 앙심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배가 너무 작지 않아?”
“이 배를 타고 바다로 더 가서 옮겨 타는 거래요.”
“뭐? 왜 그렇게 해? 바로 옆에 있는 편이 더 좋잖아?”
캐런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묻자 배에 타라고 외치던 남자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럴 수 있는 크기의 배가 아닙니다. 그 정도 배를 띄우려면 수심이 상당히 깊어야 해서 그 배가 선착장에 들어오는 건 불가능해요. 로열 루이스호 정도 크기라면 여기에 정박을 시도하기만 해도 이 주변이 다 망가질 겁니다.”
“주변이 왜 망가진다는 거지?”
“보면 알게 될 겁니다. 어서 타시죠.”
캐런과 낸시는 안내하는 배로 올라탔다.
작은 배에는 사람이 꽤 많았는데, 캐런은 큰 배로 옮겨 탄 뒤에도 사람이 많아 좀 답답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꽤 긴 시간을 배에서 보내야 하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하다니.
“와.”
시종일관 별다른 호응을 하지 않던 낸시가 중얼거렸다.
“아가씨, 저거 봐요.”
“결혼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아가씨래.”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저거….”
캐런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이 한 걱정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그림으로 막연하게 느꼈던 크구나, 하는 감상과 실제로 보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캐런은 순간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바다를 보고 감탄에 휩싸여 환호했다면 배에 대한 감상은 공포에 가까웠다.
“뭐야 저게… 저게 배라고?”
저게?
저것을 배라고 불러도 되는 것일까?
저것이 바다에 있어도 되는 것일까?
저것은 떠다니는 작은 마을이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거대하고 새하얀 성. 배가 점점 가까워지자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크기였다.
“뭐야 저게….”
태어나서 배라고는 호수 위에서 노닥거리는 나룻배 정도만 탔던 캐런으로서는, 바다 위의 대형 선박을 보자 경악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나름대로 여러 가지 경험과 지식은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도 안 되는 것이 눈앞에 닥치자 웃기지도 않은데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 하하하하하….”
저것을 배라고 할 수 있을까. 저런 것이 물 위에서 떠다녀도 괜찮은 것일까. 캐런은 웃었다. 자제할 수 있는 웃음이 아니었다. 사람은 너무 황당해도 웃음이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
“마님, 정신 차리세요.”
“호호호호…. 미친… 저게 뭐야….”
“와하하하하! 저런 배는 처음 보나 보군요!”
“저게 뭐야….”
캐런은 혼이 나간 상태로 배에 올라탔다.
세상이 뒤집혀진 기분이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작은 배가 대형 선박 가까이에 다가가 위로 이어진 계단 앞에 섰다. 의도적으로 뽑은 것이 분명할 잘생긴 승무원이 캐런에게 손을 내밀어 잡아 올렸다. 눈을 찡긋거리는 것이 이셀라의 취향이었다. 캐런은 직원 한 명에게서 느껴지는 이셀라의 세심함에 감탄하며 갑판으로 올라갔다.
“어서 오세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단정하게 차려입은 여성이 캐런에게 물었다. 캐런을 대신해 낸시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 대답했다.
“캐런 하이어… 캐런 세이어테스 남작 부인이십니다.”
여직원은 바로 정중하게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에반스 사장님으로부터 언질 받았습니다. 남작 부인께서 방문해 주셔서 큰 기쁨입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그리고 짐은 더 없으신가요?”
“이것 하나뿐이야.”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사람을 불러 주세요.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안에는 상점 거리도 있으니 쇼핑에 짐꾼이 필요하시면 먼저 일러 주세요. 아니면 나중에 방으로 가져다 드리는 것도 가능합니다.”
배 안에 ‘거리’가 있다고.
하긴 뭐가 있어도 놀랍지 않았다. 이 정도의 규모에는 뭐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우선 방에서 쉬시겠어요? 아니면 안내를 먼저 해 드릴까요?”
“우선은… 방에서 쉬고 싶어.”
“네, 특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절 따라오세요.”
캐런이 움직이자 몇 명의 승무원들이 뒤를 따라왔다. 캐런은 방으로 올라가면서 거대한 배 안의 풍경을 보았다.
“저게 수영장이구나.”
갑판 위에 있는 수영장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가벼운 옷을 입고 있었다. 사람들은 수영장 안에서 놀거나, 선 베드에서 늘어져 햇볕을 즐기고 있었다.
“밤이 되면 매일매일 무도회가 열리고, 마술 쇼와 동물 쇼 등 다양한 볼거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극장에서는 매일 연극과 오페라가 열리고, 식당에서는 오케스트라가 신청곡을 받으니 원하시는 음악을 알려 주시면 순서대로 연주해 드려요.”
이셀라가 돈이 많다 많다 해도 사실 바로 옆에서 지내면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옷이 고급이거나 장신구가 값지거나 하는 것은 캐런도 원하면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마을이 한 사람의 소유라는 것을 눈앞에서 확인하자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영지나 성을 소유하는 것과는 또 달랐다.
“이 방입니다.”
‘이 집입니다’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방이라고 해도 탁 트인 넓은 공간과 높은 천장이 있는 복층이라 개인의 방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정면에는 햇살이 쏟아지는 탁 트인 거대한 창문을 통해 새파란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 낸 호화로운 내부가 대비되어 형언하기 어려운 감상을 주었다.
방 안에는 짙푸른 양탄자가 바닥에 깔려 있었고 여러 명이 쓸 수 있는 긴 원목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생화들이 솜씨 좋게 휘어지고 어우러졌다.
“푹 쉬시고 구경하고 싶으시면 바로 종을 울려 주세요. 대기하고 있는 승무원들이 바로 올 거예요.”
“그래, 고마워.”
“부디 편히 즐겨 주십시오, 세이어테스 남작 부인.”
승무원은 허리를 숙이고 물러났다.
탁, 하고 방문이 닫히고 캐런은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역시나 푹신하고 좋았다. 이런 호화스러움이 익숙한 이셀라일 텐데 잘도 하이어 저택에서 지냈구나. 캐런은 그 생각이 들자 웃음이 나왔다. 이런 도시 같은 배가 한 척도 아니고 세 척이라니.
캐런은 침대에서 중얼거렸다.
“돈 많은 건 좋은 것 같아.”
“이제 아셨어요?”
“응.”
캐런은 누워서 웃었다.
돈이고 사랑이고 우정이고 전부 다 의미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셀라는 사업을 계속할 것이고 자신이 볼 수 있는 새로운 것들은 더 많을 것이다. 세상은 넓었고 돈과 젊음이 있으니 할 일은 정말로 무궁무진했다.
가출하길 잘했다.
배 위에서의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났다.
금전적 고민이 없었기에 원하는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사고, 하고 싶은 유흥거리를 신나게 즐길 수 있었다.
출항한 지 얼마 안 된 로열 루이스호는 이름부터 왕실에서 따온 것답게 내부 또한 캐런의 눈에도 만족스러운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크루즈 여행이라고 해서 배가 내내 바다 위를 횡단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며칠씩 이동하면서 해안가의 도시들을 방문했는데, 캐런은 하나같이 처음 방문하는 나라들이라 매번 신나 있었다.
“마님! 천천히 좀…!”
“빨리 좀 와!”
“임신도 하셨으면서 뭐 그리 빨라요?”
“만삭도 아닌걸. 네가 너무 느린 거야. 나이 든 티 내지 말고 빨리 와.”
낸시는 숨을 몰아쉬면서 캐런의 뒤를 쫓았다. 캐런은 얼음을 넣은 붉은 산그리아를 마시면서 분수대에 기댔다. 뒤쫓아 온 낸시는 숨을 가다듬으며 분수대에 털썩 앉았다.
캐런은 거리의 건물들을 올려다보았다.
평생 보아 온 몇몇 지역들의 건물들과는 또 달랐다. 남부에 있는 이 해양 도시는 바다를 끼고 있는 사시사철 온화한 곳이었다. 도시 전체를 채운 새파란 지붕을 얹은 하얀 집들이 눈부셨다.
“여기서 뭐 사실 거 있으세요?”
“지금 고민 중이야. 시간이 어정쩡….”
“마님?”
“아, 아니야. 조금 있다가 돌아가자.”
헛것을 본 모양이었다.
캐런은 약간 오싹한 기분을 느끼면서 낸시를 끌었다.
“잘못 본 거야…. 응….”
“네?”
“아니 잠깐만. 움직이지 말고….”
캐런은 입을 닫았다.
세상에, 저 미친 인간이.
레이몬드가 입을 다물고 캐런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가씨… 뛰, 뛸까요?”
“늦… 었… 어.”
비명을 질러야 하나?
하지만 여기는 외국이었다. 도와줄 사람이 없다. 아니 그보다 누구라도 자신을 도와주는 것이 가능이나 할까? 저 레이몬드를 상대로?
꿀꺽.
캐런은 침을 삼켰다. 아니, 어쩌면 그냥 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레이몬드랑 그냥 닮은 다른 미남일수도 있지. 비록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고 다가오고 있지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저, 저는 배에 먼저 가 있을게요! 만약에 늦으시면 먼저 출발하라 말씀하셨다고 전하겠습니다!”
배신자!
캐런이 먼저 도망치는 낸시의 뒷모습을 보면서 손을 뻗었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턱.
드디어 잡았다.
레이몬드가 캐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시선은 피했지만 스산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저 없이 여행 다니니까 좋습니까?”
“대체 어떻게…?”
“배가 이미 떠났으니 미리 지나가는 곳에 가서 기다릴 수밖에요. 덕분에 산맥을 혼자 넘고 별별 수단을 다 썼습니다. 간발의 차로 앞선 도시 세 개에서 빌어먹을 루이스호를 놓쳐 버려서 얼마나 헤맸는데…. 아무튼 이번엔 늦지 않았군요.”
레이몬드가 이를 갈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이제 충분하지 않습니까? 덕분에 전 그동안 잠도 못 잤습니다. 몇 번이고 정말이지…. 이제 이럴 나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레이몬드의 목소리는 거칠었다.
캐런은 어깨를 잡은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돌아갑시다.”
“저, 아직 여행 일정이 남았는데요…. 한두 달 있으면 순항이 끝날 거예요.”
“철없는 소리 하지 말고.”
캐런은 레이몬드의 손을 떼어 냈다.
“내가 갑갑해서, 좀 새로운 거 보고 싶다는 게 진짜 그렇게 화낼 일이에요?”
“안전….”
“저 배가 위험하면 세상 어디든 다 위험해요.”
“지금 당신이 위험한 상황이니까,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살아요!”
캐런은 결국 소리를 높였다.
이대로 끌려가면 5년이다. 아니, 캐런은 5년도 믿지 않았다. 그의 논리는 세상이 위험하니 아무 곳도 가지 말라는 것이다. 1년 후가 아닌 5년 후도 그는 똑같은 소리를 할 것이다.
“‘이제 죽으면 끝납니다. 무조건 안전한 곳에 있어야 합니다.’ 이런 소리는 그만해요. 전부 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살아요. 나도 이 애가 태어나면 고작 백 년 살고 죽을 텐데. 그동안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사는 게 뭐가 문제인가요?”
“사람이 하고 싶은 걸 다 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환경이 허락하는 안에서 하고 싶은 걸 해야 사람이 사는 것 아닌가요.”
“논조에는 동의합니다만, 이 여행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캐런은 화난 얼굴로 레이몬드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면서 캐런은 레이몬드에게 쏘아붙였다.
“여기서 갈리네요.”
“예?”
“레이몬드 경에게는 이 여행이 허락할 수 없는 선이라는 거죠? 하지만 전 당신의 허락이 필요하지 않아요. 전 가겠어요. 이러다 죽으면 듈란 보고 계속 연구 더 하라고 하세요. 당신은 바로 따라오지 말고 한 50년 더 고민하다가 오고.”
“캐런!”
“바로 따라오면 저도 바로 또 죽을 거니까.”
레이몬드가 손목을 잡았다. 꽤나 강하게 잡아서 캐런은 통증을 느꼈다.
“이젠 힘까지 쓰려고 들어요?”
“이거 들고 가십시오.”
레이몬드는 캐런에게 꾸러미 하나를 안겼다.
“약 놓고 갔습니다.”
“이건….”
“듈란 신관님이 보낸 것입니다. 하루 세 번, 식후 30분 지나서.”
“…….”
레이몬드가 자신의 이마를 짚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화내고 싶은 건지 울고 싶은 건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아무튼 그는 복잡해 보였다.
“사실 당신이 가고 나서 생각을 해 봤습니다. 당신 말이 맞아요. 전 당신을 감금하고 싶은 것도 아니지만, 제 행동은 그렇게 나오고 있더군요. 그래서 약만 전달하려고 하긴 했는데…. 정말 그러려고 했는데.”
“…….”
“막상 직접 당신을 보니 역시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더군요.”
캐런은 약 꾸러미를 들었다.
복용법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출산 전에 7개월쯤 되어서 다시 의사에게 확인해 보고 문제가 있으면 연락하라는 글이 첨부되었다. 의사로서의 입장만 적혀 있는 지극히 건조한 물건이었다.
어느새 배는 눈에 띄게 불러 오고 있었다. 준비가 필요했다.
“잘 놀다 오십시오. 쫓아가지 않으려고 노력할 테니 뛰지 마시고.”
“…하아.”
캐런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당신 말이 맞네요. 임신 때 조심해야 하는 것도 맞아요.”
“그럼….”
“그렇다고 지금 가겠다는 건 아니에요.”
“…예.”
레이몬드가 눈을 번쩍 떴다가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캐런은 레이몬드에게 다시 약 꾸러미를 건네면서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내 옆에서 미리 음식이 정상인가, 아니면 이상한 사람들이 해코지하려는 건 아닐지 확인해 보면 좋을 것 같네요. 아, 그러니까. 같이 가자구요.”
“예?”
“안 와요?”
캐런이 툴툴거리면서 말했다.
혼자서 여행하는 것도 좋았다. 자신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곳에서 느끼는 해방감이나 난생처음 보는 거리, 환경, 음식들을 접하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매년 보던 사람들이 전과 다른 행동을 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환희였다. 그것은 살인조차도 따라올 수 없는 신선한 자극이었다.
하지만 그 나날이 반복되자 역시 동반자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혼자라서 느끼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1년 내내 혼자 있고 싶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방은 새로 잡을 필요 없어요. 방이 워낙 커서… 꺅!”
레이몬드는 캐런을 안아서 들어 올렸다.
“배가 떠나는 소리가 들리니까 빨리 갑시다. 낸시가 정말로 그냥 떠나자고 한 모양이군요.”
“…달려요.”
“예, 꽉 잡으십시오.”
레이몬드는 배를 향해 내달렸다.
긴 여행이 끝나고 저택에 돌아왔을 때의 모습은 떠날 때와 아주 달랐다.
급하게 떠나야 했던 탓에 가벼운 짐으로 집을 나섰지만 돌아오는 길은 육두마차(六頭馬車) 일곱 대도 짐을 싣기에 부족했다. 캐런은 갖가지 사치품들을, 레이몬드는 희귀한 식물들을 사들였기 때문이다.
저택 앞에 길게 늘어선 마차에 가득 실려 있는 물건들을 보며 집사는 목 뒤를 붙잡고 쓰러졌다.
“제논, 제임스를 잡아.”
“어이쿠. 정신 차리쇼, 영감.”
“주인님… 이러다간 파산합니다…. 제논…. 남작님을 말려… 억.”
제임스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놓았다.
제논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제임스를 들처 메었지만, 그 역시 눈앞의 상황이 걱정이 되는 것 같았다.
“남작님, 정말 괜찮습니까? 정말 너무 많이 사들이신 것 같은뎁쇼.”
“걱정하지 마. 알아서 할게.”
“…어이구, 그렇다면 이제 전 모릅니다요.”
당장 내년에 무슨 사업이 성공할지, 국제 정세가 어떻게 흘러갈지 다 알고 있는 레이몬드였다. 그 때문에 그는 별다른 걱정은 없었지만 남들에게 설명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봤어? 그리 총명하시던 남작님이 갑자기 취미 생활에 미치셔서….”
“저러다가 파산하는 거 아니야?”
“퇴직금은 챙겨 주겠지?”
저택의 고용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일하게 아무 걱정 안 하는 것은 캐런뿐이었다. 하지만 캐런도 레이몬드가 여행이 끝나기도 전부터 저택에 짓게 한 거대한 온실은 조금 걱정스러웠다. 물론 돈 걱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온실은 좀 위험해 보여요.”
“이런, 당신까지 그러는 겁니까. 괜찮다니까요.”
언제는 밖에 나가는 것도 말리더니. 이런 유리는 또 괜찮다고 호언장담을 한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건물인 데다가, 깨지기 쉬운 유리라니.
캐런은 유리가 어느 날 부서져서 사람들 사이로 떨어지는 상상을 하자 오싹해졌다. 캐런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죽음이었다.
“유리로 온통 만들어져 있는데 저렇게 가는 기둥이…. 후…. 내년 박람회에서 처음 나올 거라면서요?”
“예. 하지만 설계는 이미 올해 다 끝난 겁니다. 앞으로도 구조상 별문제 없을 겁니다. 몇 년 안에 대대적으로 보급되는 구조거든요.”
레이몬드는 내년에 수정궁을 발표할 정원 설계사에게 테스 대저택에 시범 설계를 의뢰했다. 만국 박람회라는 큰 행사 전에 먼저 실험해 볼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에, 설계사도 기꺼이 의뢰를 받아들였다.
“너무 혁신적이에요.”
캐런은 온통 유리로 뒤덮인 온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여행을 다녀오면서 레이몬드는 식물을 잔뜩 사다 들였고 그 식물들을 키울 온실 또한 건설하게 주문해 두었다. 당시에는 조그마한 정원이려니 생각했지만 막상 와서 보니 완전히 새로운 구조물이었다.
이론에 따르면 값비싼 유리로 통째로 둘러싼 건물은 태양의 빛을 그대로 받아 남쪽의 거대한 식물들을 키우기에 적합할 것이며 한겨울에도 장미가 피어오르는 광경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었다.
“막 출산하고 난 후에는 당신이 외출하고 싶어도 한계가 있을 겁니다. 그럼 최대한 구경거리가 많은 편이 좋겠죠.”
“레이몬드 당신 취미 생활은 아니구요?”
“아닙니다…. 아니 아주 조금….”
“네에. 아무튼 좋아요. 취미 생활에 뭐라 하고 싶은 건 아닌데, 기왕이면 바깥 정원에 분수도 설치했으면 좋겠네요. 내내 물 위에 있다 보니 물 구경을 더 하고 싶어요.”
“알겠습니다.”
캐런이 배를 쓰다듬었다.
나가기 전과 가장 다른 것이 그 배였다.
“아, 움직인다.”
“…기분이 이상하군요.”
“저만 하겠어요.”
캐런이 한숨 쉬듯이 말했다. 레이몬드도 캐런의 배 위에 손을 얹으면서 복잡한 얼굴을 했다.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 분명히 축복이건만 그들에게 와닿는 그 무게는 일반 부부와는 궤를 달리했기 때문이다.
“배가 유독 안 나오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그때는 태아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 작았었나 봐요.”
“그래도 아름답습니다.”
“그건 알아요.”
“뭐가 문제입니까?”
“…크면 더 아프겠죠?”
“아.”
캐런은 한숨을 쉬었다.
출산이 다가오자 산통이 무서워졌다.
“그러니까 수박만 한 게 아래로 나온다는 건데…. 으….”
“…죄송합니다. 저도 어렸을 적 우량아라 어머니께서 꽤 고생하셨다고 들었는데, 제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들일까요.”
“딸일 거예요.”
캐런은 잘라 말했다.
섣부른 기대를 안겨 주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을 포함한 모계는 항상 딸 하나만을 낳고 죽는다. 그리고 이것은 계속 되풀이된다. 캐런은 끝나지 않는 삶을 반복할 딸을 생각했다.
“어쩌면 이 아이에게 사과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태어난 것만으로도 자식은 부모에게 감사해야 하는 법입니다.”
“진심인가요, 레이몬드?”
“어차피 제 수명이 워낙 기니, 벌어 둔 돈도 많을 테고. 그렇다면 딸이든 아들이든 70대까지 제 재산을 펑펑 쓸 수 있을 것 아닙니까.”
“…돈을 말하는 게 아니잖아요.”
딸이 태어나겠지. 자신을 똑 닮은 딸이.
자신처럼 똑같이 17년 후에는 1년을 반복해서 살다가 죽고 최종적으로 자신에게 맞는 남자를 선택해 자식을 낳고 또 물려주는 삶을 살겠지.
17년을 주기로 되풀이되는 새로운 세대. 캐런의 어머니부터 외할머니나 증조외할머니 전부 오래 살지 못했다.
고조할머니라 할지라도 그리 오래 전의 사람이 아니건만, 캐런의 외가는 전부 일찍 죽었다. 사고사든, 병사든. 캐런의 외가 사람들은 죽음에 익숙해져 있었고 허술하게 살다가 곧 허무하게 죽는 일이 많았다.
“전 오래 살고 싶어요. 하고 싶은 것도 많구요.”
“제 소망 또한 그렇습니다.”
“그런데 제 딸의 인생을 생각하면 약간 부채감이 들어요.”
레이몬드가 캐런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영원히 반복할 수는 없다.
“자식에게 삶을 선사하는 것을 미리 물어볼 수 없는 것처럼, 죽음 또한 그렇습니다. 전부 그렇게 삽니다. 그러니 보통 사람들처럼 부모로서 아이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지 생각하는 게 맞습니다.”
“예를 들어?”
“세례식 가운을 만들어 준다거나.”
“낸시가 손재주가 좋죠.”
캐런은 눈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바느질을 그리 못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전에 바늘에 찔려서 파상풍으로 죽은 기억 탓에 그 뒤로 바느질하는 것은 기피하게 되었다.
“뭐, 꼭 옷을 만들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방법 중 하나를 제안하는 거죠. 무엇을 줄 수 있을지, 무엇을 가르치는 것이 좋을지 고민해 보세요.”
아이가 태어나면 뭘 할 수 있을까. 캐런은 사격을 좀 더 배워 보고 싶었지만, 소음기를 단 총은 너무 무겁고 자신이 들 만한 권총은 지나치게 시끄러워 출산 후로 미루었다. 레이몬드는 캐런 옆에서 틈틈이 군사학 책을 집필하고 있었다.
캐런이 고민에 빠진 그때 햇살이 온실 안을 비추었다.
레이몬드의 머리칼이 금처럼 빛이 났다. 유리로 감싸인 모든 공간이 빛났다. 캐런은 그 순간 그를 둘러싼 키가 큰 식물들에서 느껴지는 생명력과, 레이몬드의 손끝에서 나는 잉크의 냄새, 그 모든 것이 완벽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감사를 할 수 있었다.
살아 있어서 행복하다고. 삶을 준 것 자체로 감사하다고.
평생 광기 속에서 찾은 단 하나의 사랑이었다. 목숨을 걸기에 충분한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냉소나 고소가 아니라, 진짜 행복에서 나오는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자신은 이제 무엇을 하는 것이 좋을까.
그것은 지금부터 천천히 생각해 봐도 충분할 것이다. 평생 여행을 다니든, 아니면 틀어박히든. 무엇이든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용서는 미리 받았다.
자신의 잘못을 수습해야 한다.
듈란의 타고난 수명은 생각보다 꽤나 길었다. 길어서 한심할 정도였다. 그러나 원하는 만큼의 성취를 달성하기에는 빠듯한 시간이었다. 사람의 몸을 망치는 것은 쉬웠지만, 그것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은 어려웠다.
그것도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내에, 그것도 임신 중인 사람을 출산이 가능하도록 회복시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마침내 듈란은 방법을 찾아냈다.
약을 보냈다.
하지만 신체는 상황에 따라 워낙 상태가 다르기에 긴장을 놓을 수는 없었다.
직접 찾아가서 진찰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캐런이 부르기도 전에 그녀를 먼저 찾아가는 것은 그로서도 아직 두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듈란은 부름을 기다리면서 계속해서 연구했다.
의학을, 그리고 신학을.
“듈란 신관님.”
듈란은 기절해 있었다.
현실을 잊기 위해서는 학업에 집중하는 것이 좋았다. 듈란은 셀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다잡기 위해서 끊임없이 신학에 파고들었다. 조금 더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용서를 받으려면 미봉책이 아니라 완벽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보웬은 불러도 일어나지 않는 듈란을 흔들었다. 그는 학업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내내 수도원의 생활을 그대로 따랐다. 계속 수도원에 머무르지 않은 것은 어느 수도원에서도 듈란에게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듈란은 어디서 주문했는지 알 수 없는 수많은 고서들에 둘러싸여 연구를 하거나, 아니면 그를 부르는 수도의 저명한 의사들을 만나러 갔다 오고는 했다. 보웬은 그가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의사로서 그렇게 열의를 다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어도 영주 자리를 받을 수 있는데, 그는 항상 무언가에 쫓기듯이 살았다.
“괜찮으십니까?”
듈란이 눈을 떴다. 마른 가지가 눈을 뜨는 것 같은 기괴한 풍경이었다.
검은색의 눈은 동공이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새카맣고 커서 흡사 해골의 눈구멍 같았다. 안 그래도 마른 몸은 이제 거의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 더더욱 가벼워졌다. 하지만 다 죽어 가는 것 같다가도 어느새 눈에 불길이 이는 것처럼 미친 듯이 학업을 탐하고는 했다. 그것만이 그를 살게 하는 것 같았다.
“좀 더 주무시겠습니까?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됐다.”
듈란은 의자의 등받이에 허리를 댔다. 잠은 어느새 달아났는지 눈빛이 형형했다. 잔뜩 쉰 목소리로 듈란이 용건을 물었다.
“…무슨 일이지?”
“캐런 아가씨가 출산 때가 다 되었습니다. 오셔서 출산을 도와 달라고 전갈이 도착했어요. 영주님도 곧 출발하실 텐데, 준비가 얼마나 걸리시겠습니까? 지금은 많이… 힘들어 보이십니다만.”
“…바, 바로 가겠다.”
듈란은 일어나 커다란 가방을 챙기더니 서둘러 준비했다. 비쩍 마른 몸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알 수 없었다. 듈란은 일어나서 도구들을 가방에 재빨리 집어넣고 약들을 쑤셔 넣었다.
“저, 굳이 신관님이 갈 필요가 있을까요? 남작 가문에 시집가신 지도 꽤 되셨는데, 듈란 신관님이 거기까지 가서 진찰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거기에도 좋은 의사가 많을 텐데요.”
보웬은 가방에 물건을 쑤셔 박고 나갈 준비를 하는 듈란에게 말을 걸었다.
그로서는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미 귀족 집안의 전쟁 영웅과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결혼을 한 그녀였다. 아무래도 듈란에게 입은 은혜로 그가 더 신경 쓰이는 보웬은 듈란이 더 이상 캐런에게 집착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듈란은 파혼을 통보받은 뒤로 약간 미친 것 같아 보였다.
“이미 끝난 인연, 안 가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보웬은 스스로 말하고도 괜한 소리를 했다고 생각했다. 그와 자신은 계약 관계 아닌가. 도가 지나친 참견이었다. 듈란은 보웬을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빤히 쳐다보더니 대답했다.
“…자, 자네가 모르니까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예?”
“끝내기 위해 가야만 해.”
그러려고 이제까지 살았어.
듈란은 그 말을 끝으로 걸음을 옮겼다.
캐런은 긴 시간 끝에 마침내 자식을 낳았다.
그나마 듈란이 제때 도착해서 모르핀으로 진통을 줄였지만, 그렇다고 고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초반에는 말 그대로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어야 했다. 만약 캐런에게 총이 있었다면 못 해 먹겠다며 자신의 머리를 총으로 쏘아 버렸을 정도의 고통이었다.
마침내 핏덩어리 같은 아기를 낳고 혼절한 캐런이 눈을 뜬 것은 다음 날 새벽이 되어서였다.
어둠 속에서 눈을 뜨자 옆에는 평상시와 달리 두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하나는 레이몬드였고, 또 하나는 오랫동안 모든 것을 숨기고 있던 듈란이었다.
출산을 도와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차마 그 말은 입이 찢어져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진이 빠져 분노할 수도 없었다. 출산을 하고 나니 전부 다 지긋지긋하고 그냥 계속해서 약에 취해 잠들어 있고 싶었다. 온몸이 아팠다.
“아직 더 자도 괜찮습니다, 캐런. 아기는 무사히 태어났습니다.”
이제 다 끝났어요.
레이몬드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하지만 캐런은 확인해야 했다. 이미 전에 레이몬드에게 몇 번이고 말한 것이었지만, 어쩌면 모른다. 어쩌면….
“…아들인가요?”
캐런이 피곤하지만 약간은 기대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레이몬드는 순간 생각했다.
아들이라고 대답하는 것이 좋을까? 당장 어디서 갓난아기를 구해 와서 캐런에게 안겨 주고 여기에 당신 아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자식은 더 이상 고통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거짓말을 하면 캐런이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
캐런은 얼마 전에 당연히 딸이 태어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자신과, 자신의 조상과 같은 운명을 가진 딸이 태어날 것이라고. 자신의 어머니처럼, 어머니의 어머니처럼. 맨 처음 인류의 제물로 바쳐졌던 2000년 전의 성녀처럼.
하지만 지금 캐런은 대답을 갈구하고 있었다. 만약에 아들이 태어났다면, 그것은 마침내 핏줄로 이어져 왔던 기나긴 과업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들은 자신의 배로 자식을 낳을 수 없으니까.
만약에 태어난 것이 아들이라고 말해 주면 캐런은 편해질 수 있을 것이다.
레이몬드는 유혹에 시달렸다.
“…아니. 네 자식은 딸이야. 예상했으면서 그래.”
레이몬드 대신 대답한 것은 듈란이었다.
레이몬드는 듈란을 원망하듯 쳐다보았다가, 캐런이 자신을 보는 것을 알고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품에 안은 아기를 꽉 끌어안았다. 아직 눈도 뜨지 못한 갓 태어난 딸은 그냥 핏덩이에 가까웠다.
그러곤 자신이 순간 무슨 생각을 했는지 깨달았다. 거짓말을 하지 않기로 맹세했건만, 아직도 자신은 자꾸만 안 좋은 진실은 숨기고 싶어 하는 인간이었다.
레이몬드는 캐런에게 다가갔다.
아버지의 품에 안긴 갓난아기는 눈을 꼭 감고 잠들어 있었다. 캐런의 옆에 아기를 뉘여 보았다.
“예쁜 딸입니다, 캐런.”
“…딸이군요.”
캐런은 그 말을 듣자 혹시나 했던 기대가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레이몬드의 품에 있는 저것은 자신과 똑같이 자라 열일곱 살이 되면 첫 죽음을 맞이할 것이며, 그 후로 죽음을 반복할 것이다.
자신처럼.
캐런은 다시 산통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답은 하나밖에 없다. 어머니도 그랬고, 외할머니도, 증조외할머니도. 자신들은 전부 딸을 낳으면서 주어진 죽음을 넘겨주었다. 자신도 똑같이 하는 것이다. 누구 하나가 영원히 죽음을 반복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미 답을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하고 바라던 기적이 눈앞에서 부정당하는 것은 퍽 가슴이 아픈 일이었다.
“지금은… 보고 싶지 않아요.”
“캐런.”
“치워 주세요. 젖 먹일 유모는 구해 놓았으니 유모에게 데려다줘요.”
레이몬드는 딸을 다시 들어 올렸다. 캐런은 몸을 돌리고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예상했던 어쩔 수 없는 일이며 자신도 겪었던 일인데도 괴로웠다.
“…괜찮아요. 저도 예, 상했고…. 우리는 다 겪는 거니까….”
하지만 머리로는 체념한 사실이라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하지만 지금은 좀… 힘들어요.”
“…나갑시다, 신관님. 캐런, 푹 쉬고 괜찮아지면 다시 절 불러요.”
“…….”
듈란과 레이몬드는 문을 닫고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방 안에서는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앙…”
아기 역시 울기 시작했다. 엄마의 울음소리를 듣고 잠에서 깬 것이다.
“쉿….”
레이몬드는 아기를 들어 등을 토닥였다.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이 손을 내밀어 아기를 받으려 했지만 레이몬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기를 데리고 할 이야기가 있었다.
“신관님, 여기로.”
레이몬드는 듈란과 같이 걸음을 옮겼다. 저택의 1층으로 내려가, 남쪽의 문을 열자 새로운 공간이 나타났다.
“여기는….”
“예, 내년에 세워질 수정궁을 본떠서 만들었습니다. 에반스 저택에도 비슷한 것이 있기는 하지만 이정도 규모로 벽돌이나 석조를 전혀 쓰지 않은 것은 처음이지요. 기억하시나 봅니다.”
원래의 듈란이라면 보지 못했을 수정궁이었다. 하지만 듈란은 저번 생에서 약속대로 자살하지 않고 오랫동안 삶을 살아가야 했기에 이 광경을 알고 있었다.
밤이었고 밖은 추웠지만 온실의 안은 따뜻했다. 스산한 빈 가지들만이 있는 바깥과는 다르게 안은 갖가지 식물들이 자라 있었다. 세상과는 동떨어진 기묘한 공간이었다.
레이몬드는 온실의 의자에 앉으며 듈란에게도 앉을 것을 권했다.
듈란이 자리에 앉자 레이몬드는 입을 열었다.
“듈란 신관님, 당신이 많이 노력했다는 건 압니다. 그래서 이렇게 제 자식이 태어났군요. 우선…. 예,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레이몬드의 표정 또한 썩 밝지는 않았다.
자신 또한 예상한 것이었다. 밖에서는 가족들 앞에서 한없이 자식을 끌어안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였고, 자식을 얻었다는 것은 분명 기적과도 같은 행복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죽음의 그림자를 직감하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딸은 사랑 속에서 태어났지만 그만큼 철저한 계산 아래서 태어나기도 했다. 부모는 죽음에 도달하기 위해 생을 창조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캐런의 표정을 보자 레이몬드 또한 스스로 가라앉혀 두었던 어둠이 기어 올라오는 것을 더 이상 감추기가 힘들었다.
“듈란 신관님, 이제는 나이가 꽤 드셨겠군요. 저만큼은 아니시겠지만.”
“…….”
“어떻게 더 이상 방법이 없습니까?”
“…모릅니다.”
“노력을 안 하신 겁니까, 아니면 더 시간이 필요한 겁니까?”
“…전, 최선을 다했습니다.”
“시간이 더 필요하신 건가요.”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레이몬드는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귀엽지 않을 리가 없다. 사랑스럽지 않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아직 그날은 오지 않았습니다. 며칠 시간이 남아 있군요.”
“…….”
“만약에 그 전에 저희가 먼저 떠나면, 당신은 시간을 벌 수 있을 겁니다.”
듈란은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곧 깨닫고는 레이몬드의 팔을 잡았다.
“그만두십시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군요?”
자식은 태어났지만 그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캐런의 울음소리를 듣고 생각했다.
여기서 더 완벽한 미래를 원한다면 다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 모른다. 지금의 자식을 버리고 확실한 해피 엔딩을 찾을 때까지 다시 죽음을 반복하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 자신들이 죽고, 자식마저도 죽으면.
듈란이 완벽한 답을 찾을 때까지.
“레이몬드 경, 확실하지 않습니다.”
듈란이 다급하게 말했다. 레이몬드의 손이 아기의 목 위에 있었다.
듈란은 레이몬드의 팔을 잡았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듈란에게 일렀다.
“신관님을 지금 나무라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은 계속 후회하고 속죄하며 답을 찾으십시오.”
“반복한다고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듈란은 간신히 소리를 지를 수 있었다.
“으아아아앙!”
아기가 놀라 울음을 터트렸다. 온실 안의 새들이 푸드덕거리며 나는 소리가 들렸다. 레이몬드는 듈란을 내려다보다가 아이를 흔들며 달랬다.
“쉿…. 울지 마라, 얘야.”
듈란은 숨을 헐떡였다.
힘들었다. 사는 것이 힘들었다. 어디까지 답을 얻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언제까지 자신에게 삶을 강요할 것인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레이몬드 남작님…. 지금 당신이 다시 시작한다고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듈란이 숨을 몰아쉬었다.
인간에게는 원죄가 있었다.
태어난 것 자체가 죄였다. 첫 인간이 죄를 짓고 신의 정원에서 쫓겨났으며, 그의 모든 후손들은 죄인이 되었다. 사람이 아무리 선행을 해도 그것은 신에게 모자랐다. 사람이 속죄를 위한 어떤 제물을 신에게 바쳐도 그것은 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
사람들은 가장 흠 없이 아름답고 온유하며 신실한, 막 열일곱이 된 여자 하나를 찾아 바쳤다. 하지만 그녀 역시 신의 기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신은 여자에게 거듭된 죽음을 선사했다. 죽고 다시 태어나 흠 없는 자가 되어라. 그리고 또다시 죽음을 신에게 바쳐라. 단 한 번의 죽음으로서는 정결치 못하리니.
그리고 첫 번째 성녀는 그것을 기쁘게 받았다. 그 기쁨은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성인만이 알 수 있는 희열이다. 자만심이든, 극도로 발달된 동정심이든, 신앙심에 의한 희열이든.
그리고 여자들에게 주어진 죽음의 과제는 100만이었다.
“…100만 번.”
“예.”
듈란은 숨을 몰아쉬었다.
첫 번째 성녀가 죽은 뒤로 2000년이 지났다.
캐런은 117번째 성녀였다. 단순 계산으로도 한 사람당 8547번은 죽었어야지 끝이 난다.
“기록이 없습니다…. 이제까지 몇 번이나 죽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캐런은 백 번을 살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열일곱 번을 살았습니다. 백작 부인은 일곱 번, 그리고 카를라 대공비는 일흔일곱 번을 살았습니다. 그 위에는 더 이상 기록이 없습니다.”
카를라 대공비는 전쟁 중에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피란민 중 하나였다. 원래 어느 가문의 딸이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당시 장군 중 하나가 그녀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맞아들였다.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집시들 사이에서 태어나 글을 알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괜찮은 시대였다.
전쟁터의 장군은 똑똑한 아내를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출산 후에 장군의 아내는 죽었고, 딸인 카를라는 대공의 아내가 되었다.
대공비는 열일곱 살이 되고 나서야 처음으로 자신이 생을 반복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전설과 부와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운명을 추측할 수 있었다. 열일곱 살 생일의 며칠 전에 다시 반복되는 삶을 시작하는 이유와 그 횟수까지.
그리고 그녀는 대공의 아내라는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일흔일곱 번의 죽음 끝에서 얻어 낸 답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100만 번의 죽음 중에 얼마나 남았는지 모른다. 17세이라는 숫자를 통해 성녀로부터 선조까지 추측할 수는 있었지만 각 사람의 죽음의 횟수는 얼마인지 이어져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첫 번째나 두 번째 사람이 몇 만 년씩 하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캐런은 백 번 만에 미쳤지만,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면 만 년도 버틸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근거 없는 희망에 불과합니다.”
듈란은 일축했다.
“그 아이를 죽인다고 하더라도 제가 답을 얻지는 못할 겁니다. 모든 기록은 전쟁 중에 타 버렸으니까요.”
“…….”
레이몬드는 눈을 감았다.
이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었다.
캐서린은 생각했다.
‘내 인생은 뭐지?’
캐서린의 어머니 카트린 백작 부인은 그녀에게 충고했다.
“인생 뭐 있니? 난 충분히 운이 좋다고 생각해. 우리는 가장 ‘잘 팔릴’ 1년 동안 원하는 만큼 남편감을 고를 기회를 가진 거야.”
얼마나 운이 좋니?
1년 동안은 어떤 남자를 고르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어떤 사고가 일어나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어. 그 1년은 네 인생에서 최고의 황금기가 될 거야. 가장 아름다운 상태로 그 1년을 준비하고, 그 다음 1년은 재산을 몰래 쌓는 방법과 가장 좋은 남자를 잡는 것에 심혈을 기울이렴.
“난 널 낳고 나서 네가 수많은 귀족들과 왕족에게 둘러싸여 있는 미래를 봤어.”
카트린 백작 부인은 그녀의 남편을 꽤 마음에 들어 했다.
대공의 딸인 그녀와 비하면 처지는 사람이었지만, 그만큼 그는 장인을 두려워했고 부인의 심기를 거스르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항상 주눅이 들어 보였고, 딸의 앞에서는 곧잘 부인의 흉을 보았다.
그리고 곱상한 하녀들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쳐다보거나, 별일 아닌 것으로 잘난 척을 해 댔다. 장인인 대공이 죽고 나서는 그런 행동들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고 점점 더 노골적으로 변해 갔다. 캐서린은 그런 부친이 부끄러웠고, 그런 부친을 고른 모친도 실망스러웠다. 성녀의 후손이라면서 고작해야 저 정도의 선택을 하다니.
‘그럼 난 훨씬 더 멋진 남자를 고를 거야. 아빠 같은 사람은 절대 싫어.’
자신은 성공할 것이다. 무한한 기회가 있다. 캐서린은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처음에는.
하지만 생을 반복한 지 몇 번 되지 않아 그것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힘인지 깨달았다.
캐서린은 나라의 유일한 왕세자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곧 그의 연인이 되었다.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에게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미모가 있었다. 그가 자신을 정원으로 불러내었을 때, 캐서린은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폈다.
자신은 백작도, 대공도 불만족스럽다. 자신에게는 이 나라 최고의 자리에 오를 남자만이 합당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입이 벌어진 순간 꿈은 박살 났다.
“널 사랑하지만 너와 결혼하지는 않을 거야.”
개자식.
캐서린은 그 말을 들었을 때, 겉으로는 눈물을 흘리면서 속으로는 날짜를 계산했다.
귀즈 왕세자 말고 다른 사람을 어떻게 낚을 수 있을까. 다음에는 처음부터 귀즈 왕세자 눈에 띄지 말아야지. 저건 꽝이야.
어이없는 실수로 처음 죽고 다시 시작했을 때는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곧 한탄했다.
그와의 만남은 자신의 생을 반복하는 날보다 전이었다. 임신을 인생의 과제로 생각한 모친 탓에 캐서린이 사교계에 나가기 시작한 것은 15살부터였고, 귀즈는 그때부터 자신을 눈독 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왕세자의 애정에 들뜬 어린 캐서린은 두려움 없이 그를 받아들이고 말았다.
캐서린이 생을 반복하는 날은, 왕세자의 애첩을 승낙하고 난 다음날이었다.
“널 사랑하지만 너와 결혼하지는 않을 거야.”
“결혼하지 않아.”
“않아.”
몇 번을 반복해도 그 날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캐서린이 눈물을 흘리면서 ‘네, 알겠습니다. 전하께서 시키시는 대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하는 대답은 고정되어 버렸다.
어머니에게 상담하고 싶었지만 그때 어머니는 숨을 거둔 지 오래였다.
결국 캐서린은 몇 번을 시도한 뒤에 귀즈 왕세자의 애첩으로서라도 자리를 잡으려고 했다. 이미 승낙을 해 버린 뒤였기 때문에 좀처럼 헤어질 수 없었다. 이미 자신의 인생은 끝났다.
“내 비밀의 방에 초대하고 싶어.”
“우린 이제 하나니까.”
“어때?”
캐서린은 방 안에 걸린 수많은 시체들을 보았다.
처음에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귀즈 왕세자는 크게 실망하며 캐서린의 목을 베어 버렸다. 몇 번을 반복하자 놀라지 않고 덤덤해질 수 있었다.
“이 더러운 고자 새끼…. 넌 대체 할 수 있는 게 뭐냐?”
하지만 그가 자신을 임신시킬 능력조차 없음을 깨닫게 된 순간, 캐서린은 귀즈 왕세자를 노려보면서 죽었다. 그때 그는 자신의 목을 졸라 죽였다.
간신히 귀즈 왕세자에게서 벗어나 하이어 저택에서 출산을 하고 나자, 캐서린에게는 깊은 회의감이 밀려 들어왔다.
캐서린은 하이어 영주를 사랑하려고 노력했지만, 너무 오랫동안 귀즈 왕세자와 얽혀 있었던 탓에 그에게서는 안정과 평화 이상의 감정을 느끼기가 어려웠다. 차마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귀즈 이상으로 캐서린과 강하게 엮인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평생 그에게서 풀려나는 것만을 생각했다. 풀려나서 자식만을 낳는 것을 고대했다.
“이걸로 완전히 끝이구나.”
혹시 다른 성별이 태어나지 않을까 했지만, 자신이 낳은 것도 역시 자신을 똑 닮은 딸이었다. 캐서린은 캐런을 쓰다듬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열일곱 살로 수십 년을 살았다. 자신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은 사랑도 얻지 못했고, 안정도 찾지 못했다. 뭘 하고 살아야 하지?
“넌 왜 태어났니?”
캐서린은 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자신도 이렇게 생겼겠지. 캐서린은 어머니의 얼굴을 똑 닮았으며 어머니 또한 외할머니의 얼굴을 똑 닮았다. 그리고 대부분 그리 오래 살지 못했다.
저주든 축복이든 반복되는 죽음에서 벗어나고 나서 사람들은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해 자살하기도 했고, 어이없는 실수로 죽기도 했다.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몸에 배어 있는 탓이었다.
그리고 캐런을 낳은 며칠 후, 그녀는 자신의 앞날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끝없는 암흑.
멀리서 들리는 울음소리.
캐서린은 일어났다.
암흑이다.
“뭐야 이게….”
손을 뻗는다. 딸의 칭얼거리는 울음소리가 들린다. 캐서린은 숨을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자신의 미래는 끝없는 암흑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내가 그랬고, 너의 할머니가 그랬듯이 너도 모든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올 거야.”
어머니로부터 들은 미래에 대한 파편이 고작 이것이란 말인가?
그리고 깊게 생각한 끝에, 자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 순간 캐서린에게는 희망이 차올랐다.
자신은 보지 못했다. 어떠한 미래도 고정되지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캐런의 대에서 운명이 바뀌는 것이거나, 아니면 단순한 자신의 죽음이리라.
캐서린은 전자에 걸었다.
캐런은 100만 번의 끝을 낼 것이다. 하지만 캐서린은 그녀가 겪을 끊임없는 죽음을 생각하자 동정과 슬픔이 샘솟았다. 계속되는 죽음의 끝에서 자식이 그냥 죽고 싶어 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끔찍했다. 생각해 보자, 무엇이 캐런을 좀 더 살게 할까.
“…사랑을 하렴, 캐런.”
캐서린은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임신과 출산을 의무가 아닌 행복 아래서 하기를. 자신이 실패한, 어머니도 실패한, 그런 사랑을 하고 완벽하게 전부를 손에 넣기를.
캐서린은 캐런의 성공을 기도하며 준비했다.
그리고 캐런의 실패를 보고 싶지 않았기에 자신의 죽음 또한 미리 준비했다.
“엄마! 그만 좀 일어나요! 언제까지 주무실 거예요?”
조용히 좀 해. 아직 아침이잖니.
하지만 침대로 풀썩 뛰어드는 딸 때문에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지치지도 않는 딸이다. 자신보다 아버지를 닮기를 바라기는 했지만 이 정도까지 닮을 필요는 없는데. 그것도 하필이면 성격이 아니라 넘쳐 나는 힘을 닮을 것은 또 뭐란 말인가.
“레베카, 엄마를 방해하면 못쓴다. 당장 나와.”
“엄마는 아침 운동도 안 하니까 그렇게 잠도 늘고 하시는 거예요. 좀 더 체력을 기르시는 편이 어때요?”
이만하면 충분해. 타고난 체력이 다른 걸 어떻게 하라는 말이니?
하지만 레베카는 침대 옆에 누워서 다리로 탕탕 침대를 굴렸다. 온몸이 흔들려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다.
“아침부터 이게 무슨 소란이니, 레베카. 그리고 승마복을 입고 침대에 누우면 지저분해지지 않겠니?”
“아잉, 어차피 매일 세탁하잖아요.”
“그래도 그냥 세탁하는 것과 네가 신발 신고 올라온 이불을 세탁하는 게 같지는 않잖니. 일어났으니 내려가.”
레베카는 침대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아가씨! 침대!’ 하고 도나가 소리 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레베카는 깔깔거리면서 도망 다녔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캐런.”
“쟤는 또 아침부터 왜 망아지처럼 날뛰고 있는 걸까요.”
“넘쳐 나는 힘을 감당 못 하는지…. 아까 군에 입대하고 싶다고 해서 저와 한바탕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캐런은 벌떡 일어났다.
“걔가 입대는 왜 해요?”
“그러니까 말입니다.”
“당신이 전에 훈장을 자랑해 대서 이상한 동경 같은 게 생긴 건 아닌가요?”
“이상한 동경이라니. 그냥 보여 줬을 뿐입니다.”
레이몬드는 억울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캐런은 머리를 흔들었다. 요즘 레베카는 열일곱 살 생일을 앞두고서 한창 부모와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이 옷은 갑갑하니, 저 옷은 이상하니. 그냥 옷에 대한 불만인 줄 알았더니 아예 사교계 데뷔가 아닌 군 입대를 생각하고 있었단 말인가. 1년 동안 내내 전쟁터에서 뭘 하려고?
“미쳤네, 미쳤어…. 당장 준비하고 나갈 테니까 붙잡아 놓고 있어요. 조금만 잔소리하려고 하면 도망가려고 하니 원.”
“알겠습니다.”
레이몬드도 한숨을 쉬었다.
캐런은 일어나서 거울 앞에 앉았다. 눈을 감자 예쁘장한 하녀들 서넛이 와서 얼굴을 닦고 머리를 뒤로 젖혀서 감겼다. 그 후에 얼굴에 분을 얹고 연지를 바른다.
“엄마, 그냥 바르지 말고 나와요. 집 안에서 뭘 그렇게까지 해요?”
“…레베카도 잡아서 단장시켜.”
“꺄악!”
고개를 빼꼼 내밀고 캐런을 구경하던 레베카는 다시 잽싸게 나가 버렸다. 한참 뒤에 하녀가 헐떡이면서 돌아왔다.
“성공했니?”
“네.”
“그 애는 참, 누구를 닮아서….”
캐런은 한숨을 쉬었다.
도무지 자신을 닮지 않은 딸이다. 열일곱 살이 되면 죽음을 반복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고 그렇게 타일렀는데. 레베카는 도무지 귀담아듣지 않는 것이다. 듣기는 들었다. 깔깔거리면서 웃었을 뿐이다.
“그럼 제가 전쟁터 나가면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다시 살아서 영웅이 되면 되겠네요!”
“미쳤니? 지금은 전쟁도 안 일어나잖아!”
“캐런, 그게 문제가 아니라…. 아무튼 레베카, 이 나라에서 여군은 받지 않아.”
“그럼 폐하에게 가서 호위대에 넣어 달라고 할래요.”
어렸을 적에 분명히 자신처럼 로맨스 소설이나 읽게 하곤 했는데, 레베카는 로맨스 소설이랍시고 기사 문학을 읽었다. 문제는 거기서 연정이 아니라 기사들의 모험담에 홀딱 빠져 버렸다.
“그래서 기사님은 공주님을 구하고 결혼했답니다.”
“…멋지다….”
“레베카 님도 그런 기사님을 만나기 위해서 몸가짐을 바르게 하시고, 현명하고 아름다운 숙녀가 되셔야 해요.”
“네, 내일부터 단련을 해야겠어요.”
“네?”
“체력 단련과 공포심 극복부터!”
그러더니 사교계 데뷔 준비를 하라는 캐런의 말을 흘려버리면서 총을 들고 사냥터에 나가는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뛰어넘어 보려고요.”
레베카는 열다섯 살에 흑곰을 잡고 나서 그렇게 말했다.
레이몬드는 레베카에게 자신은 열 살 때부터 곰을 잡았으니 아직 멀었다고 응수했고, 캐런은 그 말을 듣고 기절했다.
“대체 뭐가 문젤까?”
분명히 난 저렇게 안 키운 것 같은데.
캐런은 단장을 끝내고 일어났다. 한숨을 내쉬어도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위험한 직업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좋은 남편을 찾는 데 힘쓰라고 설득할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한숨을 쉬고 온실로 내려가자 레이몬드와 레베카가 한창 대련을 하고 있었다. 말이 대련이지, 레이몬드가 일방적으로 레베카를 후려치고 있었다. 절대 자국이 남지 않고 치명적이지도 않지만 따가울 곳만 골라서 공격했다. 레베카는 잠시 뒤에 나자빠졌다.
“날 이기기 전까지 택도 없다.”
“아, 아빠 그게 말이 돼요?”
“돼.”
레베카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펜싱 마스크를 벗었다. 안에서는 땀에 흠뻑 젖은 어린 얼굴이 튀어나왔다. 레베카는 내려온 캐런을 향해 볼멘소리로 외쳤다.
“엄마! 아빠 좀 설득해 주세요.”
“나도 동의 안 한다고 했단다, 레베카.”
“이잉.”
“애처럼 굴지 마. 난 네 나이에 결혼했어. 너도 이제 철이 들어야지.”
레베카는 투덜거리면서 캐런에게 걸어왔다.
꽃보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딸은, 열일곱 살밖에 되지 않았으면서 머리 하나는 더 컸다. 늘씬하지만 단단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으며 시원시원하게 웃는 소년 같았다.
“하지만 제 생일에는 이번에 나온 리볼버를 사 주실 거죠? 엄마만 믿어요.”
“리볼버는 아직 이르잖니.”
“…캐런?”
“내 리볼버를 가져가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알았어?”
“캐런, 리볼버는 또 언제 샀습니까?”
“네?”
“캐런, 정신 차려요.”
어깨를 흔들었다. 캐런은 눈을 떴다.
어지러웠다. 지금이 몇 시지? 조금 전까지 분명 온실에 있었는데.
“레베카는 어디에 있나요?”
“레베카는 새로 온 유모가 젖을 물리고 있습니다.”
“…젖이라니요.”
걔 나이가 몇인데. 하지만 캐런은 기이한 감각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윽….”
“아직 좀 더 쉬어야 합니다. 누워 있어요.”
허리부터 온몸이 아팠다. 분명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몸이었다.
하지만 일어나야만 했다. 캐런은 빠르게 사라지는 꿈을 잊지 않기 위해 급하게 기억을 되새겼다. 꿈은 깨어나야 하나 이 꿈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신이 본 것은.
미래였다.
“레베카를… 데리고 와 줘요.”
“…괜찮겠습니까?”
“당장….”
“예, 알겠습니다.”
레이몬드가 나가서 품에 어린 아기를 안고 왔다.
벌써 시간이 좀 지났는지, 아기는 핏덩이가 아니라 사람 같아 보였다. 볼은 발그스름했고 눈을 뜨고 손을 내저었다. 눈은 선명한 보라색이었다.
“…아.”
캐런은 아기의 머리를 덮고 있는 털모자를 벗겨 냈다.
그 안에는, 밝은 금발의 머리칼이 있었다.
꿈속의 레베카와 같은 머리 색이었다.
“…아.”
캐런은 그 순간 자신의 핏줄로 내려오던 지긋지긋한 죽음의 고리가 완전히 끊어졌음을 깨달았다. 100만 번의 죽음은 자신 대에서 끝났다. 반복은 끝났다.
캐런은 레베카를 끌어안았다. 자신의 딸. 자신을 닮지 않은, 키가 크고 호쾌하며 승마복을 입고 칼을 휘두를 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