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책을 읽은 남자 (31/31)

책을 읽은 남자


 

…축하드립니다, 레이몬드 경.

아니, 레이몬드 남작님.

마침내 끝이 났군요.

제가 그때 당신에게 말씀드렸던, 전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은 진실입니다.

분명히 그때 기록은 100만 번의 죽음을 가리키고 있었으며, 초대 성녀가 나타난 건 2천 년 전이었습니다. 캐런을 보셨다시피 죽음을 100번만 겪어도 사람의 정신은 황폐해집니다.

당신과 제가 겪었듯이 말입니다.

캐런의 선대들이 만 번가량의 죽음을 나누었다고 생각하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제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입니다. 제가 당신에게 기억을 되살리게 했던 방법. 당신이 제게 기억을 되살리게 했던 방법.

서로의 기억을 나누어 가지는 방법 말입니다.

…캐런이 백열일곱 살이 되어 살인을 저질렀을 때, 그때 저는 처음으로 제 죄의 일부분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글을 쓰기에도 부끄럽지만 전 그때서야 제 자식이 죽는다는 생각을, 제 손으로 죽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을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대로 가만히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기에는, 그 배 안에 있는 것이 제 자식이라는 사실이, 이미 100번이나 죽음을 반복한 상태에서 혼자 미쳐 날뛰는 캐런을 지켜보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그것은 죄책감이 아니라 두려움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캐런에게 사랑을 찾으라고 하고, 저는 필사적으로 단서를 찾아 헤맸습니다.

당시의 베르딕 에반스는 제게 딸의 목숨이 달려 있으니 금전을 아낌없이 지원했었고, 저는 그 돈으로 방법을 찾으며 추악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2000년 전의 기록들은 이미 산산이 흩어지고 야사로 변질되었지만, 그때의 저는 대공비의 무덤을 파헤치면서까지 단서를 찾아 헤매었습니다. 갖가지 야사와 전설과 기록을 조합해서 전 도박을 했습니다.

캐런의 자식을 죽이면 죽인 사람은 그녀가 겪은 무수한 죽음의 기억을 공유하게 됩니다.

…그것은 죽음을 그만큼 대신한다는 뜻입니다. 죽음은 죽음으로 갚아야 하는 것이니까요.

제게 닥치고야 깨달은 사실이었습니다. 모든 기억은 제가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는 족쇄가 되었고 당신도 알다시피 그 기억의 홍수는 보통의 사람이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캐런의 죽음.

그리고 당신의 죽음.

그리고 제 죽음.

그리고… 배 속의 자식이 겪은 죽음까지.

아직 많이 남았을 줄 알았던 죽음의 횟수는 거기까지였나 봅니다.

전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100만 번의 죽음이 끝났습니다.

캐런을 닮지 않은 딸이 태어났다는 걸 축하드립니다.

이제 다시는 보지 말고, 연락하지 마시고….

…행복하시기를.

레이몬드는 편지를 접었다. 이제는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그 다음 날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캐런이 보지 못했던 마지막 삶의 첫 번째 날을 기다리는 것뿐.

“남작님, 부인께서 찾으십니다.”

“그래, 곧 간다고 전해 줘.”

레이몬드는 일어났다. 캐런의 방문을 두드리자 캐런이 긴장한 얼굴로 레이몬드를 올려다보았다.

“오늘 밤이에요.”

“…예. 레베카를 이리.”

유모가 어르고 있던 아기를 안아 올려서 레이몬드에게 넘겼다. 레이몬드는 아기를 들고 캐런과 같이 한숨을 쉬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끝이다.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을까.

“일단 운동 삼아 걸을까요.”

“운동 진짜 좋아하네요.”

“그렇습니까.”

“…레베카도 좋아할 거예요.”

캐런은 그 말로 시작했다. 딸의 미래를 보게 된 어젯밤의 꿈.

내 딸은 날 닮지 않았지만 그래도 예쁘고 건강해요. 키는 아주 크고 말괄량이인데, 힘도 아주 세구요. 분명 레베카는 어렸을 때부터 걱정을 많이 시킬 것이 분명해요.

당신이 너무 열성적으로 가르쳐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네요.

아뇨, 안 가르쳐도 그건 방치니까…. 그냥 편한 대로 해요.

저택 안을 그런 대화를 하며 걸어 다닌다. 하인들과 하녀들은 급하게 인사하고 집을 치우고 장식한다. 테스 대저택은 하이어저보다 좀 더 추운 곳에 있어서, 초봄이지만 저택 안도 퍽 싸늘했다.

“톰이 보이지 않네요?”

캐런은 사용인들을 보다가 그 사이에서 잔심부름을 하던 소년 하나가 없어졌음을 깨달았다. 그 소년은 결국 이번에도 살아남지 못한 것일까.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입맛이 썼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고개를 저었다.

“톰은 듈란 신관님이 데려가셨습니다.”

“걔가 왜 그런 짓을…?”

“갖가지 병이 많이 걸려 있으니 꾸준한 치료가 필요할 것이라고 하더군요. 잔심부름할 아이도 하나 더 있어야 하고.”

캐런은 그 듈란이 나름의 선행 비슷한 것을 한다는 것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캐런이 직접 치료를 하라는 명령을 해도 더럽다고 싫어했으면서.

“저, 그리고… 내년 봄에 한번… 제 형을 뵈러 가시겠습니까?”

“아직 안 돌아가셨어요?”

그저 순수하게 놀란 캐런이 묻고선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레이몬드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예. 많이 호전되었다고 하시더군요. 결혼식에는 오지 못했지만…. 당신을 한번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레베카도 그렇구요.”

“그래요…. 또 여행 준비를 해야겠네요.”

“예.”

무슨 옷을 사야 할까. 캐런은 그런 생각을 하며 바쁘게 움직이는 사용인들을 보았다.

도나는 열심히 겨울옷들을 나르고 있었고 낸시는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어딘가에서 또 농땡이를 치고 있겠지.

아버지는 응접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계실 것이며 이셀라는 자신의 저택에서 사업 계획에 골머리를 앓을 것이다. 루이스 왕세손은 이른 나이에 받게 된 왕관을 버거워할 것이며, 팬케이르 후작은 그 옆에서 소년 왕을 다그치면서 가르치고 있겠지.

“얼마나 남았나요?”

“한 시간 정도 남았습니다.”

자정이 되기를 기다린다.

그 12시를 그녀는 백여 년간 넘지 못했다.

긴장으로 가슴이 답답해졌다.

“지붕 위로 올라가고 싶어요.”

“지붕은 좀….”

레이몬드는 고개를 숙이며 고민하다가, 꼭대기 층의 다락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작님! 마님! 다락방은 추워요!”

도나가 뒤에서 소리쳤다. 캐런은 뒤를 돌아보았다. 도나가 급하게 뛰어와서 나르던 겨울옷을 캐런에게 걸쳐 주었다.

“입고 가세요.”

“…고마워.”

캐런은 자연스럽게 나오는 도나의 선의에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다락방으로 올라가자 도나의 말대로 싸늘한 추위에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그냥 침실에서 기다리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래도 마지막 날은 꼭대기에서 지켜보는 것이 취미거든요. 전 원래 높은 곳을 좋아해요. 몰랐어요?”

“음…. 몇 번 탑에서 떨어졌으니 싫어할 줄 알았는데요.”

“그건 그거고….”

실없는 대화를 하며 창가에 걸터앉았다. 거대한 창문을 열자 달빛이 쏟아졌다. 바깥은 싸늘했지만 두툼한 모포가 있어 춥지는 않았다. 캐런은 레베카에게 팔을 뻗었다. 레이몬드가 레베카를 건네자 아기의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난로용으로도 좋네. 캐런은 약간 불량스러운 생각을 하면서 웃었다. 속도 모르고 아기도 따라 웃었다.

캐런은 고개를 들었다. 달빛 아래 숲에 둘러싸인 탁 트인 초원 위로 천천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캐런은 한 팔을 뻗었다. 눈이 손 위에 내려 순식간에 사라졌다.

“눈이 오네요.”

“이 날은 원래 한 번도 눈이 안 왔는데.”

레이몬드는 약간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차갑지만 시원한 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캐런은 레이몬드 옆에 몸을 붙였다.

무엇을 할까 이제는.

캐런은 초원 위로 쌓이는 눈을 본다. 눈은 천천히, 그렇지만 순식간에 초원을 덮어 온통 새하얀 백지의 세상을 만들어 냈다. 캐런은 당장이라도 거기에 뛰어내려 흔적을 남기고 싶어졌다. 저 위에 무엇을 새길까. 무슨 흔적을 남길 수 있을까.

그때 종소리가 들렸다.

종소리가 한 번, 두 번, 세 번… 열두 번을 쳤다.

마침내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캐런은 레이몬드를 올려다보았다. 레이몬드도 캐런을 내려다보았다. 상기된 두 뺨이 경련했다.

무엇을 할까.

수많은 순간들, 즐기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감격하는 그 모든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분명히 사랑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사랑만 하기에도 짧은 인생이 시작될 것이다.

바람이 불었다.

이제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나면 눈 위에 싹이 돋아날 것이고 훈풍이 불 것이며 휘날리는 꽃눈이 이 저택을 감쌀 것이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간다. 페이지는 넘겨져야 한다. 책장은 닫혀져야 한다.

그때 캐런은 세상이 넘겨지는 듯한 거대한 소리를 들었다.

두려움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였기 때문이다.

캐런은 기꺼이 그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았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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