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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스트-3화 (3/280)

러스트 [RUST]-3

언제부터였을까? 현석이 부인의 목소리에 속이 답답해진 것이.

부인이 처제 보증을 섰어도, 사실 그깟 십몇억짜리 보증을 서니 마니 할 것도 아니었다. 그냥 주고 나중에 받으면 될 일도 아니었다. 그놈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만 아니었으면 갑작스럽게 무너질 사업이 아니었다.

다시 사업을 시작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처남이 도와달라는 거 그거 얼마나 한다고 그랬겠는가? 하지만 동일본 대지진이 터지면서 일본이랑 거래하던 것이 틀어지면서 갑작스럽게 현금이 마르더니 일본 거래처가 부도가 났고, 덩달아 간신히 재기하나 싶던 사업도 졸지에 부도가 나버렸다.

그 뒤로 2년, 현석 자신은 암에 걸렸고, 남은 재산도 곶감 빼먹듯 빼먹었다. 한남동 단독주택을 빼고 강남 아파트로 이사했고, 강남 아파트를 팔고 전세로 들어갔다.

지방에 있던 땅들도 하나둘씩 줄어들었다. 지키고 10년만 있으면 확실히 돈이 될 땅들이었지만, 야금야금 뜯어졌다. 전세를 빼고 월세로 들어갔다. 그렇게 지상에서 반지하로.

집이 망했다고 장남인 마루가 공부를 포기하고 돈 벌겠다고 했을 때, 현석은 가슴이 쥐어짜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얼마나 번다고. 하지만 자식새끼가 벌어온 돈이 없다면 생활을 유지하기 쉽지 않았다.

최소한 고등학교 3학년인 딸이 졸업할 때까지만이라도. 이런 생각 자체가 비참했다.

뿌득-

옆에서 바이올린 옆구리 터진 소리를 내는 부인이 보였다. 이 사람 이러지 않았는데,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행복한 가정이었다. 어째서 이렇게 됐을까? 돈이 있을 때는 당연했던 것들이 이제는 당연하지 않았다.

“당신도 당분간 마루한테 전화하지 마세요.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마루도 알아야 해요.”

“하-아- 그래.”

“말로만 그러지 말고요.”

“알았어.”

코를 흥하고 푼 부인이 딸에게 톡을 보내고 있었다. 띠링- 띠링- 울리는 톡소리.

재기해야 했다. 어떡하든.

=====

=====

[전화기가 꺼져있어···.]

“하아- 씨- 진짜.”

마루가 한숨을 쉬었다. 분명히 모친 오미예 여사에게 새벽에 출발한다고 문자도 보내고 카톡도 보냈는데 응답이 없었다. 어제부터 계속 전화를 피하는 것 같았다.

‘이 시간이면 나루도 잘 시간이고.’

일본에 도착해서 다시 전화해 보고, 동생한테 계속 톡을 쌓아서 엄마 좀 달래라고 해야겠다 생각한 마루였다.

공항리무진에 달린 TV에서는 새벽 뉴스가 한창이었다.

[마약에 중독되는 사건이 급증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동안 한국은 마약 청정국이었는데 최근 마약을 유통하는 중간 지점이 되면서···.]

[주부를 비롯해 회사원, 학생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는 것으로···.]

‘쯧- 약도 돈이 있어야 하지. 쫄쫄 굶어 봐 약할 생각이 드나.’

공항까지 2시간은 족히 걸렸다. 마루는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빼고 눈을 감았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한 학기 만에 휴학했다. 바로 군대에 입대, 22살 겨울에 전역한 마루는 무조건 돈이 되는 일을 찾았다. 최저임금보다 많이 받을 수 있는 일자리. 당시 마루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건 돈이었다.

그렇게 알게 된 곳이 월드 축산이었다.

주변에서 들은 평은 좀 애매했다. 돈은 제대로 챙겨주지만, 조폭과 연관된 것 같다든지, 직원이 자주 바뀐다든지 뭔가 좀 그렇다는 평.

그래서 어쩌라고? 마루는 월급만 많이 준다면 그깟 평은 상관없었다.

처음에는 고기를 나르고 청소하는 잡일이었지만 어깨 넘어 칼질을 배웠고, 바쁠 때 칼질을 조금씩 돕고 일당을 조금씩 더 챙겨 받았다. 그러다 보니, 정형사 자격증을 따게 됐다.

소 잡다가 일본 파견근무라니

집안이 기울기 전, 중고등학교까지만 하더라도 마루네 집은 매년 해외여행을 다녔었다. 일본으로는 자주 온천여행을 다녔었다. 그때의 기억과 지금 월드 축산 파견근무원으로 고기를 써는 자신을 생각하면 어쩐지 입맛이 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모친 오미예 여사와는 거의 한 달이 지나서야 통화할 수 있었다. ‘한 달 가까이’라는 기간에 마루는 쓰게 웃었다.

[그래 일본에서 일은 힘들지 않고?]

“네.”

[원래 파견 나가면 이것저것 챙겨준다는데 거기도 그러니?]

역시.

마루는 쓴맛이 조금 더 진해지는 것을 느꼈다. 혀끝에서 점차 입안 전체로 퍼지는 쓴맛, 돈을 입에 넣었을 때 느껴지는 맛.

하아-

하긴 그럴 것이다. 지금 집에서 벌고 있는 건 자기 혼자니까.

“네.”

[그래. 그럼 밑반찬이라도 좀 보내줄까?]

“아니요. 괜찮아요.”

밑반찬이라고 해도 모친 오미예 여사의 손맛은 아닐 것이다. 파출부를 쓰던 모친이 무슨 반찬을 하겠는가? 근처 반찬가게에서 샀거나 인터넷으로 주문한 것을 보낼 것이다.

일본에서의 일당은 생각보다 그랬다. 대충 유통판매업 하는 애들 월급이 40만 엔선, 정형하는 애들 일당은 하루 1만5천에서 2만 엔. 물론 숙련자들은 더 많이 받겠지만, 경력 짧은 애들은 대충 2만 엔 안짝이었다.

그렇게 따지자면 한국에서 하는 거나 일본에서 하는 거나 기본만 친다면 비슷했다. 순수하게 돈만 따진다면 물량 처리하면 물량대로 찍어주는 한국 업장이 마루에게는 더 좋았지만, 모친 오미예 여사의 급작스러운 출몰을 보지 않는 메리트를 생각하면 일본행도 나쁘지 않았다.

더해서 생활 경비를 대준다는 점에서 괜찮았고. 모텔인지 호텔인지 분간 애매한 숙소도 생각보다 괜찮았다.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하고.]

“네. 걱정하지 마시고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할게요.”

뚜-

후-

전화가 끊기는 소리와 함께 마루는 폐에서 숨을 뱉었다. 엔 환율이 어떻더라, 환전해서 원화로 보내야 하나?

야간, 주말을 마다하고 일했더니 제법 돈이 모이긴 했다.

‘나루 레슨비를 생각하면.’

마루도 사람인지라. 동생 레슨 생각을 하면 울컥하기도 했다. 오라비는 학교도 때려치우고 일하고 있는데 레슨이라니. 공주처럼 지낸 동생이라지만 그럼 마루는 거지처럼 지냈었나?

나름 부잣집이었으니 더블 크리티컬 맞지 않았으면 그냥 남은 돈으로 살살 현금 관리하면서 작게 건물이나 사서, 임대료 받았으면 가족, 건강, 건사하고 살 수 있었을 것을 ······.

다시 사업을 하겠다고 회사를 차리시더니, 기어이 국밥을 말아 잡수시다 암 걸리신 부친이나, 잘나갈 때를 잊지 못해 보증을 서주고, 체면 소비 줄이지 못한 모친이나. 물정 모르고 하던 음악 못하면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짓던 동생이나.

끝내 반지하 행을 하면서도 그놈의 서초 강남 송파를 벗어나지 못하는 가족들을 생각하면

“빌어먹을···”

나라고 피 보면서 고기 잡고 싶겠냐고.

마루는 휴대폰 화면 속 덩그랗게 떠 있는 이체버튼을 눌렀다.

띠링-

가벼운 소리와 함께 통장 잔고가 훅 빠졌다.

처음에는 장남이니까,

행복했던 가정을 다시 만들고 싶었으니까.

젊으니까. 노력하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벌써 2년. 22살 제대한 마루는 24살이 되었다. 이제 곧 25살. 잔고는 31만 어쩌고.

벗어날 수 있을까?

암에 걸린 부친, 청순한 모친, 순정한 동생.

아--

“탈주하고 싶다.”

존나게 탈주하고 싶다. 존나게 뛰고 싶다. 런하고 싶다.

속에서 터지는 울화를 꿀꺽 삼키며 마루가 칼을 갈았다.

스윽- 삭-

사으륵- 삭-

잘 갈리네. 시발.

존나 숫돌. 한국 회사들은 뭐하나 몰라 숫돌이나 국산으로 좀 잘 만들지. 시발.

=====

=====

[여 브로. 세끈한 일본산 AV 여신은 좀 만났고?]

“너 씨발 욕 처먹고 싶지? 응 그렇지?”

우끼끼거리며 나대는 기순의 말에 마루가 피식 욕을 박았다.

그렇게 먹고 싶었냐? 욕을? 멕여주마.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아무래도 좀 그래서, 내가 좀 알아봤는데···]

“뭔데 뭘 알아봤는데?”

기순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는 교수님이랑 애들이랑 술 먹다가 일본 방사능 얘기가 나왔는데.]

“아 진짜- 재수 없게 왜 그러는데.”

마루는 확 짜증이 났다.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뭣 같은데 간만에 전화 걸어서 방사능 타령이라니. 일본에서 일하는 사람 심정 좀 생각해 주라.

[도쿄전력 윗대가리들이랑, 도쿄대 교수들 몇 명이긴 한데, 그 사람 가족들 다 외국으로 진작에 런했다고 하더라]

“카더라 아니냐?”

[카더라는 무슨 카더라. 기사 찾아보면 다 나오는데 2012 이후 도쿄대 세계 대학순위 순간적으로 급락한 거 교수들 런 때문이라고 하던데. 도쿄전력 임원진 가족들 런은 기사가 내려갔는지 ···.]

“씨발- 그래서 어쩌라고. 나도 그놈의 돈이랑 회사 사정만 아니었으면 안 왔어. 나도 외노자 생활이라고 여기서.”

쌔끈한 일본 여친이라니 그거 환상속의 생물이다. 도쿄에서 작업하는지라 시급이 쎈 편이긴 한데, 나갈 시간이 있어야지.

도쿄 올림픽 망하고 언론에서 혐한 몰이를 계속했는데도, 한인타운으로 몰리는 일본인들이랑 외국인들이 많아서, 물량 대려면 매번 야근에 특근에 주말까지 갈려 나가고 있었다.

게다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베트남인 3명, 인도네시아인 2명에 울긋불긋한 문신이 언뜻 보이는 일본 아재들 3명이었다.

처음엔 실화냐 이거? 기술자가 나 하나라고? 심지어 일본 아재들은 낮엔 뭔 일을 하는지 야밤에 야근할 때 와서 갈비 붙잡고 씨름하던데. 사실상 제대로 정형하는 사람은 마루 혼자였다.

[···이제 한 달 됐지 않냐? 사정이 그래서 그러는 건 알겠는데, 그렇게 쉬지 않고 일하다 진짜 쓰러진다. 외국에서 혼자 일하는데 병나면 진짜 큰일 나. 위에서 일거리 줘도 적당히 하고 빠져야지.]

그걸 몰라서 그러나?

“그래. 안 그래도 이번 주는 쉬려고 했어.”

[굳- 밖으로 좀 돌아다니기도 하고. 진짜 일본 가기 뭐 같아졌는데 일단 갔으니까 돌아는 봐야지, 근데 일본은 올림픽 끝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백신도 못 맞고 그러냐?]

“내가 알리? 난 지금 당장 밥 먹고 살기도 힘들다.”

[엄살은···. 야근에 주말까지 일하면 돈이 얼마냐?]

“그렇게까진 아니고. 나도 이렇게 자비 없이 갈릴 줄 몰랐다. 수당 떨어지는 건 좋은데, 그래도 이건 아니지. 사람은 많은데 같이 일하는 사람이 없어. 진짜 쌩초보 베트남 애들이 물건 조지고 있는 걸 그냥 두기도 뭣하고, 내 일하기도 바쁜데 붙잡고 알려주기도 뭐하고. 아니 씨발. 일본어가 아니면 영어라도 통해야지···.”

마루는 간만에 쌓인 울화를 풀었다. 집안 망하고도 변함없이 대한 친구는 기순이 뿐이었다. 물론 그 뒤에는 동생년도 1%쯤 지분이 있겠지만.

“하-상 물건 밀리고 있습니다.”

“아. 예- 금방 갑니다.”

[와 실화냐? 지금 쪼는 거지? 지금 점심 먹고 휴식시간 아니냐? 1시간 휴식이라고 치면 10분은 남았을 텐데.]

“이게 그 유명한 블랙 기업인가 뭔가 하는 거 같다. 아주 눈치를 존나게 줘요. 존나게. 밤에 통화하자. 오늘 정시 퇴근하련다. 닥치고 계속했더니 아주 당연한 줄 알아요.”

[호의가 계속되면 호규로 알지. 뭐. 그래 이따 이야기하고. 고생해라.]

“그랴-”

마루가 휴대폰을 끄고 작업실로 들어가자, 베트남 사람 한 명이 살치살이랑 목살이 만나는 곳에 얼굴을 비비고 있었다.

“햐- 진짜 돌아버리겠네. 지금 뭐하는 거냐.”

응 짜응인지 응 씨엔인지 베트남 사람 하나가 코박고 죽겠다는 것처럼 소고기 위에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근데 옆을 보니 뭔가 미묘했다. 같은 베트남 사람인 두 사람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응에게서 물러나고 있었다.

마루는 느낌이 쎄했다. 일단 인터폰을 들었다.

뚜-

“야마츠키상. 베트남 직원 상태가 좀. 응상이 이상합니다. 119 구급대···.”

마루가 인터폰을 들고 말을 잇기도 전에

철푸덕-

고깃덩이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계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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