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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스트-6화 (6/280)

러스트 [RUST]-6

야마츠키의 머리, 어깨, 가슴, 팔에 붉은 자국이 튀었다.

떠벅!

야마츠키가 쓰러지면서 쇼파 테이블 모서리에 뒤통수부터 박았다. 머리통이 깨지는 소리가 느릿하게 들렸다.

학- 하악- 학-

마루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사무실을 훑었다.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 총구. 뭔가 보이면 쏠 기세였다.

다른 사람은 없나? 밤 9시가 넘은 시간.

있어도 외국인 노동자들일 테다. 외국인 노동자들이라도 지진을 피해 밖으로 나갔을 것이다.

아니. 섣불리 단정하는 건 위험하다.

그래도 만약 나가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증인이 있다면? 죽여야 하나? 마스크랑 모자를 썼으니까 그냥 지나갈 수 있지 않을까?

‘씨발.’

제발 아무도 없어라. 제발.

마루는 복도를 살폈다. 지진으로 삐걱대는 건물 소음 말고는 다른 소리는 없었다.

작업실은 완전히 밀폐된 공간이라 방음이 잘됐다. 그래서 인터폰을 썼고. 그러니까 총소리는···. 아마 어느 정도는 났겠지만 지진 여파를 생각했을 때 막 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멍- 때리지 말고. 빨리.’

긴장으로 굳은 팔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빳빳하게 굳은 건 팔다리뿐만 아니었다.

하아아-

깊게 심호흡을 한 마루가 성큼 걸어 지진으로 엉망인 책상 서랍을 열었다. 노란 봉투가 여럿 있었다.

봉투 하나를 열어보니 인도네시아 국적인 사람들의 비자 붙은 여권이 들어있었다.

다른 봉투에는 국적별로 사람들의 여권이 들어있었다.

베트남, 필리핀, 미얀마, 라오스,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그리고 한국 국적.

마루가 한국 국적만 모아 놓은 봉투를 쏟았다. 20개가 넘는 비자 붙은 여권이 나왔다.

여자. 여자. 여자. 여자. 남자. 여자. 여자.

‘아니 무슨?’

한국 여자들 여권이 쏟아져 나왔다. 뭐하는 거지?

‘찾았다.’

마루는 자신의 비자를 찾고 나머지를 전부 봉투에 넣은 뒤, 서랍을 닫았다. 이제 CCTV를 처리하고 경찰에 신고해야 했다.

‘총은···.’

일단 챙기자. 혹시 모르니까 야마츠키가 들고 있던 총과 여분 탄창도 챙겨 넣었다.

공조실 한쪽에 놓여있는 CCTV 본체는 DVD롬에 저장하는 형식이었다. 마루는 기존에 저장된 DVD롬과 안에 들어있는 DVD까지 몽땅 가방에 챙겨 넣었다.

‘가자.’

막 문을 열려는 순간. 이건 아니지 싶었다. 야쿠자 항쟁으로 보이게 한다고 해놓고 금고를 그냥 둔다고?

일단 금고를 살피자, 열쇠 방식의 금고였다. 야마츠키의 시체를 다시 뒤졌다. 금목걸이에 금고 열쇠가 매달려 있었다.

끼릭-

허리춤 정도 오는 금고인데도 문이 묵직했다.

“이게 무슨-”

마루는 할 말을 잊었다. 금고의 내부는 3단으로 이뤄졌다. 맨 윗단에는 엔화가 다발로 쌓여 있었다. 중간 단에는 달러와 금괴 그리고 마지막 단에는 꼼꼼하게 포장된 반투명한 결정들.

잠시 멍했던 마루는 공조실에서 봤던 캐리어와 세탁물 가방을 가져와 금고에 있는 돈을 쓸어 담았다. 순식간에 캐리어가 가득 찼다. 거진 35kg에 육박하는 무게. 어깨에 메는 세탁물 가방도 빵빵하게 들어찼다. 이것도 거의 28~30kg에 육박했다.

현찰과 금괴만으로 60~65kg이라니. 움직일 수 있을까?

일단 캐리어는 끌고 갈 수 있으니까.

마약은 어떻게 하지?

불을 질러?

야쿠자 항쟁으로 보이길 바란다면서 마약을 태운다고?

대놓고 이상하잖아.

야쿠자들이라면 마약을 쓸어 갔겠지.

그런데 마약을 태우면 좀 이상하잖아.

야쿠자들 항쟁에서 불 지른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 없고

그렇다고 흔적을 남기는 건 또 그렇고

흔적?

출퇴근 기록지.

아- 그러고 보니 야마츠키 휴대폰에도 통화 기록이 남았을 거고.

통신사 기록은 어떻게 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휴대폰 통화 기록은 없애야 하는데

사무실 서류에도 출퇴근 기록이나 작업 흔적이 남았을 지도.

시간은 지나가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여기저기 자신의 흔적이 있을 것 같았다.

범인은 흔적을 남긴다. 공개수사 프로그램에서 프로파일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완전범죄를 치밀하게 계획하고 범죄를 저질러도 흔적이 남는데, 지금 자신이 하는 행동을 보면···.

총체적 난국이었다.

순간, 모리노와 야마츠키의 시신이 떠올랐다.

‘정당방위였어. 정당방위. 마약 조직 야쿠자 새끼들이 날 죽이려고 했는데 그냥 죽으라고?’

마루는 고개를 털었다.

지금 다른 생각은 사치다.

하나에만 집중해야 했다. 하나에만.

‘새벽에 일본을 뜬다.’

그러니까 새벽까지만 출국 금지라든지, 경찰이든지에 걸리지 않을 정도만 되면 된다. 일단 한국으로 가서 모르쇠를 시전하면 결정적 증거가 없는 한, 어쩔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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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르르륵!

사무실 열린 창문 안쪽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시간에 쫓기던 마루가 할 수 있는 건, 병신 같지만 불을 지르는 방법밖에 없었다. 일단 불을 지르면 서류라든지 수첩이라든지 자료가 될 만한 것들이 전부 불탈 것이다. 언제 사무실을 뒤져서 찾고 그러고 있겠는가?

야마츠키의 휴대폰을 열려고 했더니 지문인식이 아니라 비밀번호 인식이었다.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비밀번호 방식인가? 순간 맨붕에 빠진 마루가 그냥 불 싸지르고 말자고 결정한 계기였다.

휴대폰이고 뭐고 일단 모조리 타버리면 어쩔 수 없겠지. 괜히 영화에서 불 지르는 게 아니었구나 싶었다.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모리노의 벤츠에 마약을 옮겨 싣고, 야마츠키의 자동차에 짐을 싣고 튀었다.

그나마 스프링클러 밸브를 잠그고, 비상벨로 연결되는 전원을 끊어서 소방서로 가는 신호를 끊는 것까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모리노 벤츠는 사무실에 바짝 댔으니까 사무실이 타면서 벤츠까지 정리할 수 있을지 몰라.’

마루는 숙소로 향했다. 그저 빨리 샤워를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몸을 씻고 차가운 음료수를 마시니 조금 진정됐다, 마루는 숙소를 청소하기 시작했다. 손이 닿는 부분을 닦아 지문을 지우고, 바닥을 세 번이나 닦아 머리카락이라든지 털을 전부 치웠다. 입었던 옷가지, 빨래통에 넣었던 옷들 전부를 비닐 봉투에 담았다.

순식간에 방이 휑해졌다. 사람이 살던 흔적을 싹 지운 마루가 에어컨을 틀어 땀을 식혔다. 아무리 경황이 없다지만 이렇게까지 굳었나? 치우고 씻었으면 되는걸.

마루는 차가운 음료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시원한 맥주가 먹고 싶었다.

숙소에서 나오자, 새벽 12가 넘어 1시 즈음인데도 사람들이 밖으로 나돌고 있었다. 지진이 일어난 지 3시간이나 지났음에도 경보장치가 울리는 차들이 간간이 있었다.

마루는 내비게이션 켜 도쿄 도심부로 운전했다. 일단 도쿄 긴자라든지 24시간 매장이 몰려 있는 곳으로 가서, 차를 대고 필요한 물품을 산 뒤. 택시를 이용해 하네다 공항으로 가기로 했다.

기순이 예매한 항공편은 아침 6시 하네다-인천공항 편이라고 했다. 5시까지 공항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4~5시간 정도만 버티면 됐다.

밤 1시가 가까웠는데 도쿄의 도로는 혼잡했다. 구급대 차량이 돌아다니고, 소방차가 바쁘게 움직이는 걸 보면 불이 난 곳도 제법 있어 보였다.

지난번 터졌던 지진이 진도 3.8~4.0 사이였다면 이번에는 4.8~5.1이라고 했다. 한 등급 차이였는데 저번보다 피해는 10배가 넘었다며 긴급속보에서 떠들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공원, 공터를 보면 인파가 가득했다. 사람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다 뛰쳐나온 것만 같았다. 주말이라서 그런 것 같기도 했고. 지진 때문에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다시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공원에서 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마루도 지진을 자주 겪는다면 정신적으로 불안 증세에 시달릴 거 같았다. 한 달 사이 지진만 두 번이었다.

[야 임마- 왜 전화를 안 받고 그래? 지진 났는데 전화도 안 받으면 내가 무슨 생각이 들겠냐?]

“아- 미안. 나도 지진 때문에 일이 생겨서 정신없었다. 자세한 건 이따 만나서 얘기하자. 5시 말고 4시. 4시까지 공항에서 보자.”

[4시? 그래. 와- 지진이 그런 건 줄 몰랐다. 진도 5.1이라는데 이게 진도 5.1이면 7~8은 진짜 건물이고 뭐고 전부 무너지겠다.]

“나도 처음에 진도 4.0짜리에도 식겁했었다. 다친 데는 없고?”

[다치긴. 호텔이라 책장이니 그런 게 없어서 쓰러질 것도 별로 없고. 그래도 아주 개판 났다. 사람들 다 대피한다고 난리였고.]

“다친 데 없으면 다행이네. 그럼 조금 있다, 공항에서 보고. 지금 도로 상황 좋지 않으니까 미리 여유 있게 출발해라.”

[여기 호텔이 공항에서 차로 5~10분 거리야. 뭐냐 이게. 한 달 걸려서 비자 받았는데 호텔에서 14일 격리하고 있다가 격리 해제 당일 귀국이라니. 이거 실화냐? 큭큭]

“진짜 미안. 전에도 말했지만 내가 진짜 이상한 회사랑 엮여서 이렇게라도 튀지 않으면 좆되는 거라. 정말 미안하다. 야. 혹시 지진 때문에 사람들이 공항으로 몰릴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 네 말을 들고 보니 그런데?]

“어. 돈 좀 있는 애들은 일단 한국이든 중국이든 대만이든 일단 잠깐이라도 뜨고 싶어 할 것 같은데. 지진이 연속해서 온 것도 있고 주말 연휴잖아. 한 이틀 밖에서 기분 전환한다고 나가겠다고 하면, 우리 항공권도 빨리 체크인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럼 일단 내가 3시 전에라도 가볼게. 아씨 일본 공항에 사람 바글거리면 변종 코로나도 그렇고. 최대한 늦게 가려고 했는데.]

“여러모로 미안하다. 나도 일보고 바로 갈게.”

[그려 이따 봐.]

“쏘리.”

우한 코로나로 인한 규제 정책 때문인지, 관광객이 대폭 줄어서인지 많은 가게가 문을 닫았지만, 그래도 몇몇 문을 연 가게들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마루는 재킷, 선글라스, 장지갑, 신발, 서류가방 등을 샀고. 숙소에서 가져온 옷은 하나씩 갈아입으면서 쓰레기통이나 화장실에 버렸다.

신발도 키높이 깔창을 넣기도 하고 굽이 낮은 신발로 갈아 신기도 하면서 돌아다녔다.

도쿄 지하철과 인근에는 무인 보관함이 있다. 하루에 소형이 300엔 대형이 500~600엔 정도의 보관료를 받고 충전 기간이 끝나면 추가 요금을 내야 짐을 찾을 수 있는 방식이었다.

대부분이 지하철과 연결된 방식인지라 지하철이 끊긴 새벽에는 찾을 수 없지만, 몇몇은 지하철과 연결된 아케이드에 보관함이 있어서, 그곳에 짐을 넣기로 했다.

마루는 보관함 4곳에 나눠 꼼꼼하게 포장한 돈과 금괴를 밀어 넣었다. 얼추 짐작해도 한화 80억은 넘게 나올 법했다.

당장 가져갈 돈은 엔화로 4백만 엔, 달러는 4만 불. 기순과 반반씩 나눠 가지고 들어가면 그렇게 큰 액수는 아니었다. 재킷 양쪽 주머니에 2묶음씩 넣으면 꼬투리를 잡지 않는 이상 별문제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세관에 신고만 하면 되는 거라. 크게 트러블 날 일은 없었다. 일본에서 출국할 때도 꼬투리 잡으면 빠칭코에서 땄다고 하면 될 것이다.

일본에서는 다른 건 몰라도 ‘행운에는 세금이 없다.’면서 로또 같은 것도 세금이 없다고 했으니, 문제가 되면 세금을 내면 되는 것이고. 달러로 따지면 1인당 4만 불 정도인데 그 정도면 별일 없을 것 같았다.

한화 8천이면 이제 몇 달 남지 않은 나루 입시. 레슨 비용과 생활비용으로는 충분할 것이다.

보관소에서 나오면서 마루의 눈앞에 80억이 아른거렸다.

한국에 갔다, 일본에 다시 들어올 수 있을까?

시간이 있었다면 밀수하는 사람들이랑 연결해서 돈을 들고 올 수 있지 않았을까?

밀수하는 애들이면 야쿠자나 조직폭력배랑 엮여야 하는데 대충 봐도 80억 넘는 현물을 옮기는 걸 안다면 그놈들이 그냥 둘까?

차라리 요트를 빌려서 옮기는 건? 그게 그렇게 쉽다면 개나 소나 다 그러고 있겠지.

대마도 쪽에서 밤낚시 하는 사람들이랑 어떻게 하면 옮길 수도 있을 거 같기는 했다.

80억이면 집구석 빚도 갚고 좀 편하게 살 수 있을 텐데.

‘씨발.’

마루는 미련을 억지로 끊었다.

나중이야 어쨌든 지금은 튀는 게 정답이었다.

계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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