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 [RUST]-7
하네다 공항 인근 도로는 북새통이었다.
도쿄 인근에 3.8~4.1 지진에 이어 금방 5.0이 넘는 진도의 지진이 났다는 게 사람들의 불안을 자극했다. 심지어 도쿄 외곽에서 도심부 쪽으로 진앙지가 이동하고 있었다.
다음에 지진이 터진다면 6.0? 7.0? 누가 알겠는가? 그렇게 새벽 2시임에도 하네다 공항으로 가는 도로는 차들로 미어터졌다.
[와 전좌석 매진이다. 예약하지 않았으면 주말 내내 일본에 있어야 했을 뻔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한국행 비행기 좌석 텅텅 비었었는데, 그냥 눈앞에서 매진되는 걸 보니까. 이게 무슨 129 느낌이다.]
한일관계가 파탄 직전에 코로나까지 겹쳐서 인천-하네다 운항편이 대폭 줄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전좌석 매진은 의외였다.
일본이 한국에 대해 무비자를 철폐하면서 상호호혜 원칙에 따라 한국도 일본에 대해 무비자를 철폐했다.
그러니까 지금 한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일본인들은 한국 비자를 가지고 있다는 건데. 미리 가지고 있었나? 혐한이라며 한국 비자는 미리 준비중?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지진 때문에 주말에 일시 귀국하는 한국인들이 몰린 건가?
“체크인은 했고?”
[그래 딴소리 할까 싶어 오자마자 했다. 6시 비행기인데 4시간 전에 체크인 처음이다.]
“나도 지금 택시 타고 가고 있다.”
[택시? 일본 택시? 돈이 어디서 나서? 아니, 돈은 네가 잘 벌었지만···.]
“새벽 2시 넘어서 뭘 타고 가냐? 최대한 빨리 가야지.”
[그렇기는 한데. 길도 많이 막히는데 택시라서, 여튼 공항에 사람들 진짜 넘친다. 밖에서 보자. 도착하면 전화하고.]
“그래.”
어쨌든 지진이 좋은 핑계였다. ‘왜 말도 없이 돌아왔냐?’ 그러면, ‘지진이 계속 터지는데 무서워서 도망쳤다.’고 하면 어쩔 건데?
“야. 어쩌긴 뭐가 어째? 너 일본에 두 달 있더니 머리가 빠가가 됐냐?”
기순이 마루을 쪼더니, 속 터진다는 얼굴로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을 씹어 먹었다.
“아니, 왜?”
“아니, 왜에? 너 작업하다가 마약 들어있는 갈비뼈 보고, 불 싸지르고 튀었다며?”
“어- 진짜 놀라서 도망치는데···. 추노 당할까 싶어서 불 지르면 정신없을 테니까.”
기순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야 씨발 생각을 좀 해라. 거기가 야쿠자 마약 작업장이면 마약이 많이 있었겠지?”
“그렇지.”
마루는 금고 하단에 쌓인 반투명한 결정 뭉치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거기에 마약만 있었겠냐? 축산물 가공업체로 위장하고 있었다며.”
“응”
“아이 진짜 무슨 뭐가 응이야 뭐가. 야쿠자들이 뭐가 아쉬워서 축산물 업체 운영했겠어, 마약유통도 유통이지만 자금 세탁 목적도 있었을 거 아니야?”
“아- 자금 세탁.”
마루는 금고 상단과 중단에 있던 돈뭉치 금괴가 떠올랐다. 보관함에 두고 온 80억은 넘어 보이는 돈. 보관함에 남겨진 80억. 내 새끼들···. 씨발.
기순은 마루의 댕청한 표정을 보곤 다시 얼음을 씹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에서 아이스가 빠진 아메리카노 컵을 탁 내려놓고 기순이 말을 이었다.
“야. 진짜 내 친구지만 어쩌다 이렇게 됐냐? 응? 뇌에 주름 펴진 것도 정도 것이지.”
“아 왜 또.”
“역지사지 몰라 역지사지. 한 2년 고기만 잡다 보니 아이큐가 한우급으로 변했냐? 소 잡다 보니 소가 됐어?”
“······,”
이 새끼 80억 챙기면 국물만 준다. 개시키. 자존심 상한 마루가 입을 꾹 다물었다. 쯧- 혀를 찬 기순이 한숨을 푹 쉬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자, 마루 네가 야쿠자 대빵이야. 자금 세탁하고 마약 굴리던 곳에 불이 났어. 무슨 생각을 할까?”
“다른 조직이 쑤셨나 싶겠지.”
기순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아니 친구님. 제발요. 너 이런 캐릭터 아니었잖아. 응 머리 졸라게 잘 굴리던 놈이 어쩌다 이지경이 됐어. 군대 2년 칼잡이 2년 4년 만에 머리까지 롤백한 거냐? 롤백이야!”
“아- 씨- 뭔 소린데 그냥 쭉 해. 사람 짜증나게 하지 말고.”
기순은 가슴이 답답하다는 것처럼 남은 커피를 단숨에 마시곤 말했다.
“야쿠자들이 그렇게 다른 야쿠자 거점을 대놓고 쳐들어가서 불 싸지르고 그랬으면 국제뉴스든 일본 뉴스든 매일매일 야쿠자 항쟁 기사로 넘쳤을 거다. 네가 일한 장소에서 자금 세탁, 마약 유통을 위한 축산업체가 돌아가고 있다는 건, 거기가 야쿠자 조직의 나와바리라는 거고. 이제까지 문제가 없다는 건 다른 야쿠자들도 거기를 그쪽 나와바리라고 인정하고 있다는 소리라고.”
마루는 그제야 위기감이 들었다.
“그럼?”
“그럼 뭐긴 뭐야. 다른 조직이 건드린 게 아니면, 내부 문제라는 거지.”
“내부 문제.”
“그래 내부 문제. 야쿠자 오야붕이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라면, 일단 내부 관련자를 찾으려고 할 거야.”
아-
그럴 줄 알았으면 야마츠키나 모리노의 시체를 유기했을 것이다. 둘 다 치웠으면 더 좋았고. 일단 두 사람이 사라졌다면 야쿠자들은 그 둘을 찾으려고 할 테니까.
불을 질렀으니 혈흔도 지워졌을 거고. 대충 차에 싣고 바다로 던져 버렸으면···.
뭔가 범죄지능이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마루는 탄식했다. 그저 어떻게든 발버둥 치면서 살아보겠다고 했을 뿐인데 여기까지 왔다. 돈 벌어보겠다고 변이 바이러스 득실대는 일본까지 와서 소를 잡았을 뿐인데. 어느 순간부터 피 튀고 화광 충만한 탈주극을 찍고 있었다. 현재 진행형이라는 게 더 암울했다.
마루의 기분이 바닥을 치거나 말거나 기순의 이야기가 계속됐다.
“···업체 관련자들을 찾아서 조지겠지. 그리고 조지고 조져도 나오지 않으면 불나기 전에는 있다가 불이 난 뒤 없는 놈을 찾겠지.”
“있다가 없는 놈?”
“그래 있다가 런한 놈.”
“씨발···.”
기순이 말이 맞았다.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진짜 간단한 생각인데. 마루는 절로 욕이 나왔다. 그렇다고 일본에서 도망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계속 시간 끌다 관광비자 끝나면 어떻게 될 줄 알고? 심지어 총까지 소지하고 다니는 마약 야쿠자들이었다.
문득 노란 봉투에 있었던 여자들 비자와 여권이 떠올랐다. 경황이 없어서 자신 것만 찾았는데 이게 그냥 그럴 일이 아니었을지 몰랐다.
마루는 생각을 지웠다. 그게 문제가 아니고.
당장 마루 자신이 문제였다. 야쿠자들이 한국까지 찾아오면 어쩌지?
아니, 당장 월드 축산이 거기랑 연결된 회사잖아. 그럼 월드 축산도 한국 조폭 자금 세탁 회사 그런 건가?
“뭐 숙소까지 정리했고, 사무실 태웠다니까 며칠 동안은 괜찮겠지만, 그 뒤는 어떻게 하려고 최소한 년 단위로 숨어 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숨어 다니면 집은 어떻게 하고? 아니다. 조폭이나 야쿠자들이 네가 튄 걸 안다면 무조건 너희 집까지 조지려고 들 텐데.”
“일단 잠깐만 이게 지금 줘야 할 것 같아서.”
마루는 쇼핑백에서 자켓이랑 장지갑을 꺼내 기순에게 내밀었다.
“옷? 지갑? 왜?”
기순이 선물이냐? 싶은 표정으로 언제 심각했냐는 듯 재킷을 걸쳤다. 마루와 비슷한 체격이라 사이즈는 딱 맞았다.
“오 센스 좋은데.”
기순이 장지갑을 열곤 표정을 굳혔다. 100달러짜리 지폐 100장이 들어가 빵빵한 장지갑이 헤벌죽 벌어져 있었다.
“너 설마. 거기 불 지르다 못해 털었냐?”
끄덕
기순의 표정이 울 것처럼 변했다.
마루는 정말 억울했다. 목숨을 걸고 싸웠고, 그렇게 살아남은 전리품이라면 전리품인데.
“너 미쳤지? 미쳤구나. 미친거지? 그래. 미친거야.”
기순은 정말 눈물을 쏟을 기세였다. 어쩌라고. 마루는 순간 느껴지는 미묘한 냄새에 코를 찡긋거렸다.
“야- 지금 이상한 냄새 나지 않냐?”
“냄새? 무슨 냄새?”
“뭔가 비릿하면서도 타는 냄새? 생선타는 냄새는 아닌데.”
“커피숍에서 무슨 냄새. 말 돌리지 말고.”
“아니 말 돌리는 게 아니고. 뭔가 바닥이 물렁물렁한 느낌도 들고.”
“바닥이 무슨 물렁물렁해. 너 진짜 이러기야? 나 뺑이치게 하고?”
“아니. 진짜 그게 아니라.”
마루는 세상 억울했다. 막 강하게 냄새나는 건 아니었지만 분명히 냄새가 났다. 바닥도 뭔가 미묘하게 물렁거리는 같고. 공항 커피숍인데 그럴 리가 없다 싶다가도. 미묘하게 불안한 느낌도 있고.
기순은 마루의 표정을 뭔가 비밀을 토설하기 직전의 그런 표정으로 보고 닦달했다.
“그러니까 자세하게 다 말해봐. 지금 나한테 뭘 감추는 건데? 씨발 일본에서 달러가 줍줍해달라고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지는 않았을 것 아냐?”
어디까지 말해야 하지?
싸우다 사람 죽인 걸 말하는 건 아닌 거 같았다.
아무리 불알친구라고 하더라도 대뜸 ‘야쿠자 두 명 죽였다. 칼 빵 놓고 베레타로 쐈어.’ 이건 너무 나가는 것 같았다.
‘킬한 뒤 시체 뒤져서 금고 열쇠 찾아서 금고 털었다. 대충 금이랑 현찰이랑 무게로 65kg쯤?’
이것도 아닌 것 같고.
마루가 입을 다물고 침묵하자. 기순이 자기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고 깊게 한숨을 뱉었다.
“하- 좋아. 말 못 할 사정이 있다고 치자. 야- 이- 말 못 할 사정은 무슨. 서랍에 있든 금고에 있든 돈통에 있든 어디 있는 걸 털은 거잖아. 흔적은?”
“불 질렀다니까.”
어흐어흐어으아아아.
이제 숫제 괴기한 소리를 내는 기순이었다.
“서랍은 닫고 불 질렀냐? 금고나 돈통이면 뚜껑이라도 닫으시고 불 싸지르셨어요? 닫고 불 질렀으면 안에 탄 재가 남았어야 할 거고. 활짝 열어놓고 불 질렀는데 안에 탄 재가 없으면 ‘어떤 씹새가 털고 불 질렀어요.’ 인증한 거잖아. 너 대체 왜 이러는데 응.”
‘아니 진짜 당시에는 너무나 급박하고 정신없었다니까. 막 총격전도 하고 진짜 죽는 줄 알았다니까.’ 라고 마루는 생각만 했다.
뭔가 설명하기에는 이미 스틱스를 넘어 요단강 언저리를 배회하는 상황이었으니까.
“좋아. 다 좋아. 어쨌든 운이 좋았어. 때맞춰 지진도 터졌고, 뭐가 됐든 불까지 싸질렀으니까. 근데 아까 말하다 말았지만, 한국에 있는 협력업체는 어쩔 거야? 일본에 있는 업체도 야쿠자 위장 사업장이니까 거기 월드 축산도 조폭 위장 업체 확률이 백 퍼센트인데.”
마루는 깜박 까먹고 있던 걸 떠올렸다. 불 지르고 바로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었는데 어쩌다 보니 까먹고 있었다. 지금은 늦었고. 하네다 공항 인근 공중전화로 걸면 빼박 하네다 공항 쪽으로 경찰이 촉을 세울 것이다. 여기는 늦었고 월드 축산을 찌르면 어떨까?
“월드 축산을 경찰에 신고하면?”
기순은 이제 세상 망한 표정이었다.
“아니 진짜 심각하게. 일단 마약단속반에 익명으로 신고하면 그쪽도 정신이 없을 거 아니야.”
“그 뒤엔?”
“그 뒤는 뭐, 그냥 지방으로 이사 가서 조용히 잠수타고 살면 되는 거 아니겠어?”
“너 진짜 조폭이 뭔지 모르는구나? 영화에서 조폭이 웃기게 나오니까 웃긴 거 같지? 덩어리들이 안면에 힘 빡 주고 각목이랑 사시미들고 설치고 그냥 액션 쩌네 그런 느낌이지?”
“야 뭔 말이 좀 그렇다.”
마루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기순은 어이없다는 듯 계속 말했다.
“진짜 충고하는데 조폭 우습게 보지 마라. 조폭이 우스웠으면 조폭에게 시달리다 자살하는 사람들이 왜 있겠냐? 실종되는 사람들은 왜 있겠고. 경찰이든 마약반이든 신고를 하는 건 좋은데, 경찰 믿지 말고. 너 살 궁리는 따로 좀 해라. 너희 집안 사람들도 살 구멍은 좀 챙겨 놓고.”
좋아. 이렇게 말하는 것 보니, 질러도 됐다.
마음의 짐은 벗어버리자. 마루는 가방에 있던 뭉치를 테이블에 올렸다.
“그래. 그래서 나도 우리 집안도 살 구멍 좀 만들려고, 아까 지갑에 든 그거 너 주는 거 아니다. 이것까지 합해서 좀 날라 주라.”
그러니까 합해서 달러로 4만 불 정도.
마루가 테이블에 올려놓은 100달러짜리 뭉치 3개를 건넸다.
기순은 이제 해탈한 표정이 됐다.
계의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