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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스트-8화 (8/280)

러스트 [RUST]-8

한 달하고도 보름에 걸친 탈주가 눈앞에 다가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루는 불안해졌다. 순식간에 개판 터진 일이 떠올랐다.

하필 지진이 나서 모리노가 허우적대다 마약을 숨긴 갈비뼈를 떨어뜨리고, 총을 잡으려고 해서 자기도 모르게 칼질을 해버렸다.

사무실로 갔더니, 지진 나서 대피했어야 할 야마츠키는 총질부터 하지 않나.

당시에는 냉정하게 행동했다고 했던 행동들이 반쯤은 패닉에 빠져 허둥지둥했던 것이었다.

경찰이나 야쿠자들이 냄새를 맡고 공항을 뒤지지는 않을까?

뭔가 놓친 결정적인 증거가 걸려서 출국 직전 잡히는 건 아닐까?

“다리 좀 그만 떨어. 괜찮다고. 한국 가서가 문제지 지금은 괜찮다고.”

“괜찮겠지?”

“아오. 가는 건 괜찮다고. 나중에 이게 문제지.”

기순은 재킷의 안주머니 부분을 두들겼다. 툭툭- 돈뭉치 소리가 났다.

“나중에 문제가 될까?”

“돈이 달렸는데 야쿠자든 조폭이든 그냥 있겠냐? 최소한 확인이라도 하고 그도 아니면 근처에 있던 사람들 잡아다 족치겠지.”

기순의 말에 마루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일단 현금은 숨겨두고 필요한 만큼만 조금씩 써.”

“내가 그것도 모르겠냐?”

“잘 아시면서 이렇게 일을 키우셨어요?”

“됐고.”

“되긴 뭐가 돼. 무조건 밖에서 보면 쪼들리게 보여야 한다. 집에 돈 줄 때도 아주 간당간당하게.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1억도 안되는 돈으로 참.”

마루의 말에 기순이 진짜 못 말린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야 1억이 뉘 집 개 이름이냐? 당장 1억을 물 쓰듯 그렇게 써봐라. 조폭들이 눈치채면? 일본에서 탈주한 놈이 집구석에 돈을 푼 것 같다? 그럼 어떻게 나올 거 같냐? 그러니까 그냥 없는 셈 치는 게 제일 좋고, 꼭 써야 할 상황이면 딱 맞춰서 써.”

“알아. 아는데. 그냥.”

도쿄 아케이드 보관함에 넣은 80억이 떠올랐다.

‘최소 80억인데 그거.’

마루는 입맛이 썼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경찰도 야쿠자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몰려든 인파뿐. 공항 외곽에 있는 카페까지 나왔는데도 사람들이 많았다.

거기에 뭔가 계속 거슬렸다. 처음에는 긴가민가 싶더니. 확실히 뭔가 미묘해진 감각이었다.

“야 기순아. 진짜 여기 바닥. 좀 물컹거리는 느낌 없어?”

“닥쳐. 사람들이 쳐다본다고.”

재킷 안주머니에 들어있는 4만 불에 간이 콩알만 해진 기순이 조용히 하라고 속닥였다.

마루는 바닥을 탁탁 밟았다. 단단한 거 같은데 뭔가 물렁물렁한 느낌. 냄새도 그렇고 고주파가 삐-하는 것 같은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이상했다.

공항에서 몰린 사람들이 이제 공항 외곽 커피숍까지 밀려 나오는 추세였다.

“야- 밖으로 가자. 저쪽에 벤치 있다.”

기순과 마루는 잔을 들고 나섰다.

밖에는 사람들을 피해 나온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옆 벤치에 앉아 옆구리 시리게 하던 커플이 소란스러워졌다.

여자가 꺄- 소리와 함께 머리를 털었다. 엄지손가락보다 큼직한 바퀴벌레가 떨어졌다.

“워- 뭔 바퀴가 무슨 손가락보다 크냐?”

“방사능의 위엄인가? X-바퀴?”

마루와 기순은 바퀴벌레에게 응원을 보냈다. 젠장 커플지옥 솔로천국. 둘은 의기투합하며 킬킬거렸다.

“6시 정각 비행기지?”

“어-”

“슬슬 일어나자.”

“그래.”

기순이 먼저 일어난 순간, 마루는 보았다. 기순의 등판에 빼곡하게 바퀴벌레들이 붙어 있는 모습을.

“야- 야?”

그걸 본 마루가 기순을 부르다 말고 뭔가 떠올랐는지, 화다닥 일어나 자기 등을 털어댔다.

“야 뭐하는데? 왜 혼자 생쇼야.”

마루가 호다닥 거리는 모습을 본 기순이 ‘지랄을 해요. 지랄을···.’ 말을 잇기가 무섭게 뭔가 목덜미 근처를 핥고 기어가는 느낌에 괴기한 소리를 내며 파닥파닥 뛰었다.

쿠직-

콰직-

뿌직-

펄떡 뛸 때마다 뭔가가 신발 아래서 터졌다. 마루와 기순이 탭댄스를 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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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 끔찍하다. 일본. 손가락보다 더 굵은 바퀴에 팔뚝 사이즈 쥐에. 그래도 하네다 공항인데 뭔 바퀴랑 쥐랑···. 멀리 까마귀들은 막 구름처럼 날아다니고. 이륙하다 사고 날까 무섭다.”

기순은 진저리가 난다는 듯 몸을 떨었다. 마루도 동의했다.

“야 이거 진짜 괜찮은 거 맞지?”

4만 불을 가슴에 품은 기순이 로봇처럼 버벅거렸다.

아까 마루가 불안했었던 것이 지금은 반대였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

“괜찮아. 괜찮아.”

어딘가 뻔뻔해진 마루는 497만3천7백 엔이라는 미묘한 금액을 품에 넣은 채 당당하게 검색대를 통과했고 비행기에 올랐다.

“거봐 괜찮지.”

“아 진짜 쫄리는 줄.”

“어이, 킹기순이 간이 쫄?”

“그래. 그래.”

마루가 좌석에 앉아 활짝 웃었다.

“자유다. 마루는 자유예요.”

“탈주의 현장에서 노비 마루에 소감을 묻겠습니다. 추노에서 벗어난 소감은 어떠십니까?”

기순이 팸플릿을 돌돌 말아 마루에게 댔다.

“졸나 좋아영.”

“크게 쏴라.”

“레프트 라이트 스트레이트에 훅까지 다 때려 넣어주마.”

몇 시간 지나지 않았는데, 살인에 대한 죄책감보다 탈출했다는 기쁨이 더 커졌다. 모리노나 야마츠키나 그렇게 쉽게 죽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조금 머뭇거렸다면 죽는 건 마루 자신이었을 것이다.

찰나에 생사가 갈렸다. 그만큼 쉽게 갈리는 게 삶과 죽음이었다. 그저 하찮고 가련한 것이 인간의 생명이라는 느낌. 덧없이 죽어버리는 인생. 이제까지 중요하게 생각했던 가치관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고작 비행기 좌석에 앉았다고, 탈출했다고 안도하자마자 이런 생각이라니.

마루는 모든 것을 하얗게 불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기순을 바라봤다. 아마 자신의 표정도 저와 같지 않았을까 싶었다.

기장의 안내방송과 함께 항공기가 이륙을 위해 서서히 속도를 높였다. 드디어 진실로 탈주 성공이다. 기쁨도 잠시.

윙- 윙-

무슨 전자파 같은 것이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느낌.

마루는 울렁이는 속과 콕콕 쑤시는 두통에 기순을 봤다.

기순은 별다른 느낌이 없는지 그냥 태평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좌우를 살펴봐도 이상한 느낌을 받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점점 커지는 이상한 느낌.

전신을 훑던 뭔가가 이제는 온몸을 두들기고 쥐어짜는 것 같았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속이 울렁거렸다.

심장과 위장이 간장을 밟고 춤추는 것 같았다.

우욱-

갑자기 구토가 올라왔다. 마루는 구토 봉투를 열고 구역질을 했다.

쿠엑.

핑- 현기증이 돌았다. 현기증과 함께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두통이 엄습했다.

이륙하는 순간이라 승무원들도 자리에 앉아 있어, 옆에 있던 기순만 갑자기 왜 이러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 순간. 창가에 앉은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악

하느님 맙소사.

홀리-

기순도 창밖을 보곤 그대로 굳었다.

하네다 공항 관제탑이 엿가락처럼 흔들리다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공항 활주로가 파도처럼 춤추다 붕괴했다. 길고 깊은 구덩이가 실시간으로 생기고 있었다.

상수도는 터져서 분수가 됐다.

펑-

밝은 불꽃과 함께 터져버린 유류저장소.

비행기의 고도가 올라가면서 도쿄의 전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도시는 벚꽃이 마지막으로 흔들리는 벚나무처럼 너울거리고 있었다.

땅 전체가 울렁이는 믿을 수 없는 광경.

위태롭게 균형을 잡으려던 고층 건물이 휘청이다 끝내 부러져 무너지는 모습. 폭삭 주저앉은 주택가는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곳곳에 폭발이 이어지고, 자동차들이 고가 도로에서 난간을 뚫고 추락했다.

거대한 싱크홀이라도 생긴 것처럼 도시 일부가 지면 아래로 꺼져버렸다.

비행기에 타고 있던 몇몇은 울음을 터뜨렸고, 몇몇은 휴대폰을 누르고 또 눌렀다. 발작증세를 보인 사람도 있었고 견디다 못해 기절한 사람까지 생겼다.

비행기가 고도를 높였음에도 승무원들은 얼어붙은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마루도 구토 봉투를 쥔 채. 창밖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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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항은 난리가 났다.

일본으로 향하던 비행기 대부분이 한국으로 방향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탑승객들은 말이 없었다. 대부분 일본에 사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공항에 내리기 전까지, 내리고 나서도. 탑승객들은 어디론가 계속 전화를 걸었고 문자를 보내며 울고 있었다.

마루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루만 늦었어도 대지진에 휘말려 죽었을 것이다.

탈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분명 죽었을 것이다.

하아-

그렇게 주먹을 쥐락펴락하면서 심신을 안정시키는 마루였다.

응?

한참을 쥐락펴락하는데 뭔가 손에 들어가는 힘이 좀 이상했다.

악력이 강해졌나? 시력도 좋아진 것 같고. 마루는 불끈 힘을 준 복근을 슬쩍 눌러봤다. 확실히 단단해졌다.

‘흠. 열심히 일했더니 복근이 생겼나?’

뭐 좋은 거지. 마루는 이것저것 챙긴 캐리어를 챙겼다.

입국 수속도 별다른 일 없었다. 일본 수도권 대지진으로 난리가 났기 때문인지, 밀려드는 사람들을 관리하기 위해 절차가 대폭 간략해진 것 같았다.

“와- 진짜 이게 되네 4만 불인데.”

기순은 놀랐다. 일본이야 그렇다 치고 입국하는데 4만 불 현찰로 들여오는 게 다이렉트로 통과라니.

“일본 지진 때문에 운이 좋은가 보다.”

“뭐 그럴지도.”

기순의 감탄에 마루는 쓰게 웃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돈을 좀 더 챙겨올 것을. 차라리 금을 뭉텅이로 가져와서 신고하면 되는 거 아니었나? 어차피 달러랑 엔화도 있는 판국에.

‘아- 내 돈.’

도쿄가 지진으로 박살 났으니 아케이드 보관함도 같이 결딴났을 게 분명했다. 박살이 나지 않더라도 복구작업 들어가면, 보관함 뜯어내겠지.

탈주의 기쁨도 잠시 마루는 급격하게 우울해졌다.

‘최소 80억인데 최소 80억.’

“야 뭔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운이 좋기는 좋다 너. 대규모 지진 때문에 네가 사고 친 거 그냥 묻힐 거고. 온 동네가 지진으로 박살 났으니 야쿠자 사무실이고 뭐고 다 무너졌을 거 아니냐? 야쿠자들도 많이 죽었을 테고.”

“월드 축산이 문제라며?”

마루의 대답에 기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긴 한데, 이렇게 일본이 지진으로 박살 났으니, 처음이랑은 좀 다르지. 네가 지진 무서워서 탈주했다고 꼬투리 잡기는 뭐할 거 같고. 돈 가져온 것만 걸리지 않으면 그냥저냥 넘어갈 것 같기도 싶고. 일단 일본 쪽이랑 제대로 연락되기 전까지는 별일 없지 않겠냐?”

“······.”

“뭐 일본 야쿠자들은 일본이 본진이니까 거기서 지지고 볶겠지만, 한국으로 넘어오려는 놈들도 있을 거고. 한국으로 넘어오려는 놈들은 한국에 비빌 곳이 있으니까 오는 걸 거고.”

“그러네. 그럼 또 엮이겠구나?”

“엮이면 좆 된 거지. 네가 불 지른 곳이랑 연관된 놈이 살아서 한국에 들어오면 너부터 찾지 않겠냐? 타이밍도 그렇고.”

“······.”

엮이지 않으면 좋겠다. 마루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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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순과 헤어져 반지하 집으로 들어서자,

현관 정문에서 보이는 TV에서 아나운서가 심각한 표정으로 기사를 읊으며 반겼다.

[··· 오늘 새벽 6시 8분 규모 8.8에서 최대 9.0의 지진이 도쿄를 덮쳤습니다.]

[출근 시간 전에 덮친 대규모 지진에 도쿄의 시민들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폐허가 된 도쿄를 보여주는 영상, 화면 속 도쿄는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도로가 마비됐고 소방차도 출동하지 못했다. 불이 붙은 곳은 진화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도시 곳곳에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마치 폭격을 맞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이고 마루야. 내 새끼. 어디 다친 데는 없고?’

호들갑을 떨어야 할 오미예 여사가 우두커니 벽만 쳐다보고 있었다.

계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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