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 [RUST]-11
“아이고 이렇게 미리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홍 과장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미간 사이를 꾹 누른 홍 과장이 수더분한 목소리로 통화를 이어갔다.
“그럼요. 그럼요. 다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미리 걱정까지 해주시는데, 큰 문제 있겠습니까? 잘 정리한 뒤에 연락 드리겠습니다. 예- 예-”
후-
이게 참 틀어지기 시작하니까 조금씩 계속 틀어지고 있었다.
홍 과장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본에 대지진이 터진 것도 그렇고,
그걸 피해 들어온 것도 그렇고.
아니, 피해서 들어 온 건 잘한 건가?
지진으로 죽었으면 나가리니까 그건 아니고.
녀석이 바로 119에 신고한 것도 그렇고.
하필 냄새를 맡은 짭새가 한 형사라는 것도 그렇고.
그렇고 그런 게 모이면 똥이 되는 법이었다.
그리고 똥이 되는 일에는 전조가 있는 법이었다.
“이걸 어쩌나.”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여서 작품 하나 만들어 보려고 했는데, 속성으로 끝내야 할 판이었다.
그것도 놈의 운이지.
속성으로 가려면 임팩트가 적었다.
홍 과장이 전화기를 들었다.
“어- 야- 이따 점심까지 산삼 좀 잘 포장해서 가져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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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는 눈을 감았다.
‘백정으로 만들겠다?’
나를?
그러기 위해서 가족을 인질로 잡고 휘두르겠다?
잃을 게 없는 놈이 제일 무섭다고 했든가? 하지만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한계 이상의 힘을 내는 부모도 있었고 자식들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 마루는 선택해야 했다.
그놈들이 하자는 대로 끌려갈 것인가?
아니면 가족의 목숨과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생사결을 낼 것인가?
마루는 손에 쥔 명함을 탁자 위에 던졌다. 한 형사가 주고 간 명함이었다.
‘경찰 믿지 말고···.’
기순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경찰을 믿을 수 있다면 월드 축산을 급습해서 마약 관련된 증거를 찾을 수도 있겠지. 월드 축산도 일본과 같은 부위, 갈비뼈 속에 마약을 숨겼을까?
마약 유통이 아니라 단순하게 자금 세탁용으로 굴러가는 업장이라면? 그래서 경찰에 신고했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면?
제일 좋은 방법은 외국으로 이민 가면서 신분을 바꿔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기엔 돈이 필요했고. 단순한 노동으로 그 정도의 돈을 벌기란 불가능했다.
‘최소 80억.’
지진으로 파괴된 도쿄 아케이드 보관함에 묻어둔 돈만 찾을 수 있다면. 풍족하게는 살지 못해도 이민 가기에 충분한 액수이리라.
마루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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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직한 벤츠가 조용하게 움직였다. 덩치 큰 운전사가 핸들을 돌릴 때마다 팔뚝에 그려진 그림이 꿈틀댔다.
“아따 최 실장님하고 나가 이렇게 일 나가는 것이 참으로 오랜만인지라. 요로코롬 불러 부러 허벌라게 고맙소잉.”
불러줘서 고맙다는 건지, 불러줘서 고맙다는 반어법인지 그도 아니면 그냥 비꼬는 건지 모를 말에도 뒷자리에 앉은 최 실장은 묵묵부답이었다.
“터고 말해 불면. 쪼매 섭하지라. 핏덩이 하나 데려올라치면 거시기한 아그들도 많은데 갸들 불러도 됐지 싶은데, 시방 꼭 내를 불렀어야 했어라?”
“홍 과장님 지시다.”
“···아따 홍 과장님도 참.”
“······.”
홍 과장이라는 말에 백 실장이 입맛을 다셨다. 백석호 실장.
중학교 시절 씨름부에서 폭행하는 선배들을 메쳐서 하나는 골반을 부수고 또 하나는 어깨를 탈골 시켜 습관성 탈골로 만들어버려 전학.
유도로 전향, 씨름하다 왔다는 말에 갈구는 선배들과 대련, 전국체전 메달 유망주인 선배들의 척추를 무너뜨리고 팔꿈치 관절을 부숴 다시 전학.
레슬링으로 전향, 금수저라고 지랄 떠는 후배를 스파링을 핑계로 허리를 비틀어 반신불수로 만듦. 퇴학.
갈 곳 없는 꼴통으로 방황하던 백석호를 발굴해 회사로 스카웃 한 게 지금의 홍 과장이었다.
이후 회사 입사한 뒤, 크고 작은 항쟁에서 두각을 나타낸 백전연마의 맹장인 백 실장이었다. 그가 병신으로 만든 사람 숫자만 해도 손가락 발가락 숫자를 넘은 지 오래였다.
‘백 실장이 있으면 충분하겠지.’
홍 과장이 혹시 모르니까 애들 데려가라고 했다. 그 홍 과장이 혹시 모른다고 했다면, 일반인은 넘었다고 봐야 했다. 최악의 경우를 생각한다면 최 실장 자신과 비슷하거나 동급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어쟀든 홍 과장은 마루를 확실히 데려오라고 했다. 홍 과장이 마루에게서 뭘 봤는지 알 수 없지만, 그가 스카웃 한 사람이 백 실장과 최 실장 자신이었다.
그렇다면 마루도 뭔가 싹수가 있다는 것. 어설픈 애들 둘 셋 데려가는 것보다 확실한 백 실장을 데려가는 것이 나았다. 여차하면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할 수도 있었고.
“고것이 나대면 콱 조사부리면 되는지라?”
“깔끔하게 뼈만.”
관절이나 척추 같은 곳이 나가면 쓸모가 없어진다. 깔끔하게 뼈만 부수면 될 터. 최 실장의 말에 백 실장이 입맛을 다셨다.
겁 없는 새끼는 휠체어에 앉게 만들든 목발을 짚게 만들든 그래야 겁이 생기는 법인데. 뜨뜻미지근 허니 수수깡이나 쪼개야 한다니, 그럴 거면 굳이 자기를 왜 불렀나 싶었다.
“뭐- 스카웃 대상이라도 되는가?”
“그래.”
쩝-
“설마. 나나 최 실장 같은 케이스는 아니겠지라?”
“보통은 아니라고 생각해.”
최 실장 입에서 보통은 아니라는 소리가 나왔다. 근 몇 년 만인가? 그럼 수수깡도 부수는 맛이 있다는 소리였다.
백 실장은 고것을 어떻게 조사야 잘 조샀다고 소문이 날까? 입맛을 다셨다.
하긴 요즘 너무 힘쓸 일이 없어서 긴장이 풀어진 감도 있었다.
적당히 몸도 좀 풀고, 새로 들어올 후배 교육도 좀 하고 그러면 좋겠다 싶었다.
휴일엔 여자 허리를 붙잡고 흔드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이렇게 기분 전환도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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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씨부럴! 최 실장! 괜찮아?‘
백 실장이 유도식 잡아채기를 하려다 화들짝 손을 뒤로 뺐다.
잠시 뒤에야 뜨끔한 감각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방검복과 방검장갑을 챙겼어야 했다.
아니, 씨발 애초에 이 새끼가 칼잡이라고 말을 했어야지.
휘끽-
사각에서 꺾이는 식칼.
‘사시미도 아니고 식칼인데 이 지랄이라고?’
백 실장의 얼굴에 홍수라도 난 것처럼 땀이 흘러내렸다.
눈꺼풀에 매달린 땀방울이 흔들리며 뿌옇게 시야를 흐렸다.
칼침을 맞아 본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팔뚝을 옅게 가르며 지나간 자리로 핏물이 픽픽 나오기 시작했다.
근육 결을 따라 매끈하게 가르다 힘줄과 핏줄이 있는 곳을 째는 칼질.
이런 칼질에 당하면 힘을 주는 것만으로는 출혈을 막기 힘들었다.
이딴 게 초짜라고? 이건 숫제 괴물이잖아.
자신이나 최 실장이 사람 잡는 짐승이라면
이건 그냥 괴물 그 자체였다.
“씨발. 미친 새끼가 너 이러고 나중에 감당할 수 있냐? 어?”
“······.”
상대방은 대답이 없었다. 키는 제법 컸지만 어려 보였다.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했거나 대학교에 입학한 새내기처럼 보이는 얼굴. 칼은 고사하고 주먹 한 번 쥐어보지 않아 보이는 선량하고 귀티 나는 얼굴.
“이딴 괴물새끼였으면 연장 챙겨서 애들이랑 같이 왔어야지 딸랑 둘이 맨손으로 와서 어쩌라고.”
사투리는 어디 갔는지,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옆으로 빠지는 백 실장이었다.
반지하라 유리창을 깨고 도망칠 수도 없다.
백 실장은 고개를 순간적으로 흔들어 눈꺼풀에 맺힌 땀을 털어냈다. 땀을 닦는다고 손을 올렸다가는 어디가 쑤셔질지 몰랐다.
스텝을 옆으로 밟아. 녀석을 유인했다. 초짜 칼잡이들은 이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달려들기 마련이었다.
녀석은 반응이 없었다. 마치 밖으로 나가는 현관을 지키고 있는 모양새였다.
미치도록 영악했다.
거실 바닥을 구르는 손가락 하나.
처음에 반사적으로 옷깃을 잡아채려고 했던 순간 잘려나간 손가락이었다.
절단기로 자른 것처럼 깨끗하게 잘린 단면에서는 피가 멈추지 않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저렇게 깔끔하게 뼈까지 가를 수 있는 건지 백 실장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도, 납득도, 해석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확실한 것은 하나였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결국 잡히는 것은 백 실장 자신이라는 것.
사시미 들고 설친 새끼들 족친 숫자만 하더라도 대형버스 3대에 채울 정도인 백 실장이었지만 이런 놈은 처음이었다. 놈이 든 칼에 닿는 족족 뼈고 살이고 분리될 것만 같은 느낌.
백정 앞에 끌려간 누렁소가 된 기분이었다.
어떻게 1분만 틈을 내서 휴대폰을 누를 수 있으면 되는 데···.
백 실장이 곁눈질로 최 실장의 상태를 살폈다. 지원요청은 글러 보였다.
최 실장은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폐에 칼빵을 맞고 색색거리고 있었다.
태권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상대 선수의 안구를 타격해 실명시키고는 그 죄책감으로 은퇴, 누나와 동생이 사고 친 것을 갚기 위해 시골의 태권도장 무에타이 도장을 전전하다 홍 과장을 만나 회사에 입사한 최 실장이었다.
회사에 입사한 뒤, 크고 작은 항쟁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일반적으로 6~7년은 걸린다는 회사 실장 자리를 단 2년 만에 꿰찬 사람이 최 실장이었다.
처리 깔끔하고 확실한 최 실장이 애새끼의 살기를 감지하지 못했다. 심지어 여타의 낌새를 차리지도 못해 첫 칼질을 피하지 못했다. 심지어 급소였다. 이게 초짜란 말인가?
“저기 최 실장 저거 오래 못 버틴다. 지금이라도 구급차 부르면 명줄은 잡을 수 있어. 최 실장 죽으면 너도 그렇고 네 가족도 그렇고 끝인 거 알지?”
“······.”
“야- 이 씨불럼아 말을 혀!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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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말을 해. 말을 하긴.’
마루는 가늘고 옅게 숨을 쉬었다. 겉으로 봐서는 숨을 쉬고 있는지 표시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두근거렸던 심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하게 뛰고 있었다. 규칙적이고 조용한 움직임.
뒤탈? 그딴 걸 생각해서 어설프게 나갔다가는 코가 꿰일 뿐이다.
홍 과장이 좋게 스카우트하겠다고 한 짓이. 마루를 일본으로 보낸 뒤, 모친 오미예 여사에게 억 단위 마약을 먹인 것이었다.
홍 과장이 했던 말로 미루어 볼 때, 부친이나 여동생에게도 이미 마수가 뻗쳐 있을 게 분명했다.
이 상황에서 홍 과장도 아니고 그 밑의 덩어리랑 대화?
여길 빨리 정리하고 월드 축산에 가야 했다. 늦게 도착하거나 여기에서 문제가 생긴 것을 알아차린다면 아버지나 동생이 위험할지 몰랐다.
그리고 설령 아버지나 동생이 위험해진다고 하더라도 방법이 없었다. 여기서 멈추면 정말 마루의 가족과 마루 자신은 조직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럴 바에야 사생결판을 내는 게 나았다.
이렇게 결정한 데에는 마루가 내심 믿는 게 있었다. 일본에서 지진을 겪고 난 뒤, 어쩐지 감각과 육체적 능력이 좋아진 것 같았다. 악력이라든지, 순발력이라든지 체력도 그렇고.
체력 측정을 해야 확실한 걸 알겠지만, 확연히 달라졌다는 게 느껴졌다.
슬쩍-
백 실장이 옆으로 돈다. 백 실장의 얼굴을 보고 있는데도 백 실장의 다리까지 보였다. 시야가 넓어졌다고 표현하기엔 너무나 이상한 감각이었다.
백 실장이 육수를 뽑아내며 탈진할 것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속에 담긴 위화감. 페이크다.
마루는 자신의 감각대로 움직였다.
“너··· 이···개새끼··· 느그 애미···, 애비, 일가친척 할 것 없이··· 다 뒤-진겨. 이제.”
“······.”
백 실장이 거친 숨을 들이쉬며 이죽였다.
“씨발새끼 느 여동생이 향긋한 산삼이라며. 내가 칼침 좀 맞았다고 여기서 요로코롬 뒤질 것 같냐? 갈 땐 가더라도 산삼 맛은 보고 뒤져야제.”
마루가 휙-하고 달려드는 순간, 백 실장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슬며시 올라갔다.
역시 어렸다.
이런 가벼운 도발에 걸려들다니.
백 실장의 중심이 뒤에서 대각선으로 옮겨지는 것과 동시에, 네 손가락 남은 오른팔로 경동맥을 가리면서 왼손으로 마루의 소매를 잡아챘다!
백 실장의 허리가 부드럽게 튕겼다.
이대로 바닥에 꽂아 버리면 놈의 대가리가 터질 것이다. 목이 부러지든.
‘끝이다!’
잡아챘다···
잡아챘다?
백 실장은 자신의 왼팔에 힘을 줬다.
힘이 들어간 느낌이 없었다.
놈을 잡아챘는데······.
분명히 잡아챘는데.
쿡-
무릎이 굽혀지는 게 느껴졌다.
털썩-
무릎 꿇었던 몸뚱이가 앞으로 무너져 내렸다.
바닥을 흐르는 핏물. 나뒹구는 자신의 손가락.
색색거리며 숨을 내쉬던 최 실장은 허망한 표정으로 자길 쳐다보고 있었다.
‘일어서 씨발. 일어나라고.’
백 실장의 다그침에도 그의 몸은 꼼짝하지 않았다. 자신의 몸이 자기 몸 같지 않았다.
이어서 느껴지는 뜨거운 감각.
목에 뜨거운 쇠꼬챙이를 박아 넣은 것처럼 뒷목이 뜨거웠다.
아- 당했구나.
어떻게 당했지?
분명히 잡아챘는데.
백 실장의 동공이 서서히 풀렸다.
계의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