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 [RUST]-13
자동문이 열리자, 백 실장의 벤츠가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부드럽게 자기 자리를 찾아 주차한 벤츠.
차 문이 열리고 선글라스에 마스크를 쓴 사내가 내렸다. 최 실장처럼 보였다.
CCTV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직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백 실장님은 다른 사람에게 자기 벤츠 핸들 맡기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그냥 소문이 그랬다. 어쨌든 당당하게 정문으로 차를 몰고 들어 온 것도 그렇고, 백 실장이 주차하는 자리에 알아서 딱 주차한 것도 그렇고. 최 실장인 거 같기는 한데 긴가민가하는 직원이었다.
‘요즘엔 CCTV 화질 좋은 것도 많은데 좀 갈지.’
CCTV 할애비라고 하더라도 선글라스에 마스크까지 한 사람을 구별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직원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화면을 응시했다.
살짝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 차에서 내리고 나서도 제집에 온 것처럼 사무실로 직행하는 것을 보니 최 실장이 맞는 것 같았다.
체형도 최 실장 체형이었고. 위에 재킷도 최 실장이 즐겨 입는 재킷 모양이었다.
칙-
무전기에 불이 들어오고 홍 과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백 실장 벤츠 들어왔는데 보고 있나?]
“예. 보고 있습니다. 별다른 특이 사항 없습니다.”
[백 실장은?]
“아직 차에 있는 것 같습니다.”
[···최 실장도 내리지 않았고?]
“아뇨. 운전한 사람이 최 실장인 것 같습니다.”
[그래? 내려서 어디로 갔는데?]
“홍 과장님 계신 사무실로 바로 가던데요.”
[그럼 최 실장 맞네. 밖에 잘 보고 혹시라도 짭새가 뜨면 영장부터 확인해, 없으면 정문 열지 말고 버텨.]
“알겠습니다.”
경비실에 직접 연락한 홍 과장은 오전에 왔던 전화를 떠올렸다.
한 형사가 물었으니 조심하라는 전화였다. 아무리 한 형사가 꼴통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런 증거도 없이 들이받을까 싶었지만, 혹시나 싶어 준비를 철저히 했다.
마루 녀석이 이쪽으로 잡혀 오기 전 미리 신고했다고 하더라도 문제없었다. 일단 눈에 보일법한 것들은 싹 치웠으니 뭐가 나올 구석은 없었다.
데려온 산삼을 걸고넘어질 수도 있겠지만, 뭐 그 정도야 해외 파견 갔던 직원 귀국 환영을 가족과 함께하려고 데려왔다고 우기면 되는 거였고.
바싹 잡은 산삼이 거기에 초를 칠 일도 없었다. 그렇게 알아듣게 설명했는데.
‘아니에요. 이 사람들이 납치했어요.’ 이딴 소리를 하겠는가? 뭐 한다고 해도 큰 문제 없었다.
애미년이 약을 먹었는데 딸년이라고 약을 하지 않았겠는가? 심지어 예능계였다. 적당히 쓰면 감각이 좋아지고 집중력도 올라갔다. 한 번 써보면 그 맛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니 딴소리하면 혈액 검사 들어가자고 하면 끝이었다.
개념 없이 나대면 나중에라도 한 형사에게 경고하는 차원에서 갈아 버릴 수도 있고. 갈아서 다짐육으로 써버리면 이거고 저거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 거다.
미국이랑 맥시코 매그도나루도 다짐육 패티에서 가끔 인간 DNA가 검출됐다는 뉴스를 보면 사람이 생각하는 건 다 똑같았다.
미국의 그 유명한 과학수사로도 다짐육으로 변한 증거를 복구하는 건 불가능했다. 미국도 못 하는 판국에 한국이라고 다를까?
갈아버리고 한 형사가 지랄해서 네 동생이 패티가 됐다고 하면, 그것도 또 하나의 스토리가 되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한테 뭘 바랐는데? 짭새가 여기저기 들쑤시면 우리가 뭘 어떻게 하겠어? 상상이 안 돼? 되지? 그림이 그려지지? 그 상상대로 된 거잖아.’
‘그럼 그게 우리 탓인가? 우리가 그럴 줄 알면서 그랬다는 건데? 그게 우리 탓이야? 짭새를 부른 네 탓이고, 증거도 없이 들쑤신 한 형사 그 새끼 탓이지?’
‘우리는 너희들 생각대로 했을 뿐이야. 그냥 우리 하던 대로 그냥 한 거라고. 너도 알고 한 형사도 아는 일이었어. 알면서 그래놓고 우리 탓을 해?’
‘우리 같은 놈들은 그냥 개새끼야. 먹이가 보이면 앞만 보고 달리는 거지. 그럼 먹이를 던진 놈이 나쁜 놈일까? 먹이를 보고 좋다고 달려간 개새끼가 나쁜 개새끼일까?’
햐- 대사 좋고. 홍 과장은 머릿속에서 영화를 찍었다.
홍 과장이 좋아하는 영화에서도 실의와 분노에 빠진 검사를 혓바닥으로 타락시켰다.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이었던가?
‘근데 최 실장은 왜 사무실로 오지? 분위기 잡아 놓은 곳으로 데려오라고 했는데?’
뭔가 따로 보고할 일이 있나?
홍 과장이 의아함을 해소할 틈도 없이 사무실 문이 열렸다.
“최 실장. 수고 했······.”
문이 열리며 보인 얼굴엔 마스크와 선글라스가 씌워져 있었다.
마스크에 선글라스? 사무실에 들어오는데?
최 실장은 선글라스를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실내에서 쓰는 것을 싫어했다. 밖이라면 모를까 실내에서는 시야의 명확성이 떨어진다는 이유였다. 그것도 저렇게 짙은 선글라스는 야외에서도 쓰지 않았다.
누구?
갸름한 얼굴선, 최 실장을 흉내 낸 스타일이었지만, 길게 자란 머리카락.
홍 과장은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하마루? 그럼 백 실장은? 최 실장은?’
생각도 찰라, 문을 열고 들어온 마루의 어깨가 살짝 움직였다.
흐릿하게 보인 뭔가가 홍 과장의 광대뼈를 때렸다. 둔탁한 충격에 홍 과장은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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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가 2년 가까이 다녔던 월드 축산이었다. 당시엔 축산물 가공, 유통업체에 CCTV를 왜 이리 빼곡하게 달아놨나? 그리 생각하고 말았다.
근데 그게 아니었다. 월드 축산은 단순한 축산물 가공, 유통업체가 아니었다.
CCTV 사각이 거의 없었기에 마루는 정공법을 택했다. 체격이 비슷한 최 실장을 흉내 내서 정문으로 들어가 속전속결로 정리해 버리는 것이었다.
정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백 실장의 벤츠엔 전자키가 있어, 정문으로 향하니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백 실장의 벤츠가 주차하던 자리를 알고 있으니 의심을 살 여지도 없었다.
최 실장이 하듯 태연하게 사무실로 향했다. 막는 사람도 토요일이라 여타의 분주함도 없었다.
일을 치기 전까지는 미친 듯 두근거렸던 심장이. 막상 닥치니 고요하게 뛰었다. 빠르면서도 고요한 격류가 혈관을 타고 내달리는 것 같았다.
후-
가늘고 길게 호흡을 고른 마루가 사무실 문 앞에 섰다.
슥- 재킷 소매에 숨긴 길쭉한 사시미 손잡이가 손가락에 만져졌다.
마루는 멈춤 없이 사무실 문을 열었다.
확장된 시야와 감각이 사무실 안에 있는 사람을 보여줬다. 사무실 안에 있는 사람은 둘, 하나는 홍 과장 다른 하나는 경리와 비서를 겸하는 김 양이 시야에 들어왔다.
홍 과장은 소파에 앉아 뭔 상상을 했는지 밝은 얼굴이었다. 홍 과장의 맞은편에 앉은 김 양은 순둥순둥한 얼굴로 퇴근 시간을 기다리는 표정.
“최 실장. 수고 했······.”
마루는 홍 과장이 말을 잇기도 전에 소매 속에 숨긴 사시미를 냅다 던졌다.
일직선으로 날아간 사시미가 홍 과장의 광대뼈를 뚫고 소파에 박혔다.
턱- 소리와 함께 홍 과장의 눈이 까뒤집어졌다.
사시미를 던진 오른팔의 반동을 이용, 김 양의 머리가 있는 곳으로 왼손에 쥔 사시미를 던졌다.
실로 전광석화 같은 투척이었다.
티잉!
‘피했어?’
‘어떻게?’
순식간에 단발머리가 아래로 납작 사라졌다. 마루는 반사적으로 사무실 문 옆 옷걸이에 걸린 옷을 손에 쥐고, 사무용 의자에 뛰어올랐다.
다다닥!
사무용 의자를 밟고 책상으로 점프하면서, 쥐고 있던 옷을 김 양이 있던 책상 쪽으로 집어 던졌다.
빠깡!
빠깡!
숭숭 구멍이 뚫리는 옷. 소음기 특유의 낮은 총소리가 사무실을 울렸다.
총에 맞은 옷이 펄럭이며 떨어졌다. 옷으로 김 양의 시야를 가린 마루가 허리춤에서 사시미를 뽑아 던졌다.
피슉-
사시미가 뭔가를 뚫고 들어가는 소리를 냈다. 마루는 방심하지 않고 허리춤에서 새로 사시미를 뽑아 들었다. 5 자루를 들고 왔으니, 남은 건 2자루였다.
위?
아니면 아래?
상대방은 소음기가 달린 총을 들고 있었다. 그것도 숙련된 사수로 보였다.
‘한국에서 총이라니.’
마루는 속으로 욕했다.
째깍. 째깍.
사무실 벽면에 걸린 대형 시계 초침이 무심하게 움직였다.
시간을 끌면 불리했다. 김 양이 밖으로 통화를 시도할 수도 있었고, 어딘가에 비상벨이 있을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상대방은 소음기가 달린 권총을 들고 있었다. 시간은 마루의 편이 아니었다.
째깍. 째깍.
위?
아니면 아래?
마루는 본능대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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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달린 시계를 힐끗힐끗 보는 김 양이었다.
홍 과장이 경비실에 연락하는 것을 듣자 하니, 최 실장이 오고 있는 것 같았다. 최 실장이 와서 보고하고 나면 자신은 퇴근이었다.
‘그놈의 산삼. 산삼이라면 그냥 아주 환장을 해요. 환장을.’
웃기지도 않아. 누군 산삼이 아니었던가? 다 산삼이고 인삼이고 그런 꽃 같은 시절이 있었던 거다. 그렇게 김 양은 퇴근을 기다렸다. 누구 좋아하라고 회식에 끼겠나?
한우 투플 소고기가 아니면 찝찝한 회식 자리에 앉을 이유가 없었다. 여기 끌려온 여자들이 다 그렇듯 산삼은 국물을 뚝뚝 흘리고 있을 거고, 같은 여자랍시고 눈물 콧물 닦아줘야 하고 어르고 달래고, 한우 투플 소고기도 아닌데 감정노동은 사양이었다.
문이 열리고 최 실장을 반기던 홍 과장의 표정이 일순 변했다.
특유의 육감인지, 뭔지가 경종을 울렸다.
어린 시절 중국에서 느꼈던 위기감이 다시 올라왔다. 오도독 돋는 닭살.
김 양은 홍 실장의 얼굴에 뭔가 틀어박히는 순간 고개를 숙였다.
빠강!
사시미였다. 사시미가 자신의 머리통이 있었던 곳을 일직선으로 날아가 캐비닛에 박혔다. 아연도금 강판으로 만든 철제 캐비닛에 손잡이 끝까지 틀어박힌 사시미.
김 양은 책상 밑에 숨겨둔 글록을 떼어냈다. 사일런트 앤 뮤트사의 소음기를 단 권총이었다.
책상 아래로 놈의 정강이나 발목을 쏘려고 총구를 내리는 순간, 놈이 먼저 움직였다.
다다닥!
의자를 밟고 책상 위로 뛰어오르는 놈.
총구를 위로 올리는 순간 뭔가가 펄럭 움직였다.
뿌깡!
뿌깡!
그림자의 머리와 심장 어림에 연속으로 박아 넣은 두 발.
몸에 각인된 변형 모잠비크 드릴 샷이 쏘아졌다.
펄럭~
썅- 옷이었다. 시야가 가려졌다. 위험했다.
김 양은 옆으로 구르면서 다시 총구를 사선 위로 향했다.
뻐억!
왼쪽으로 구르는 순간, 왼쪽 등판 어깨 부분을 사시미가 뚫고 들어왔다.
구르는 게 조금만 늦었어도 어깨가 아닌 가슴에 박혔을 게 분명했다.
삐져나오는 비명을 삼키며 김 양은 잊고 있던 공포에 질렸다.
어린 시절 중국에서 탈출할 때의 공포. 그보다 진한 공포가 김 양을 휘감았다.
그 끈적한 죽음의 냄새가 등판에 박힌 사시미의 고통을 잊게 했다.
‘위로 올까?’
‘아니면 아래?’
왼쪽 등판을 관통한 칼 때문에 왼팔에 힘을 줄 수 없었다.
권총을 양손으로 파지 할 수 없으니 명중률이 떨어졌다.
그래도 아직 쏠 수 있었다.
그녀에겐 충직한 총이 있고 믿음직한 탄알이 남아 있었다.
김 양은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두려움을 떨쳐버리려는 듯 총을 꼭 쥐었다.
옛날 어린 나이, 그 지옥 같은 중국에서 김 양을 지켜준 건 총이었다.
째깍- 째깍-
초침 소리가 목숨을 재촉하는 것 같았다.
총만 있으면, 무서울 게 없었다. 두려울 게 없었다.
납탄은 공평하고 정의롭게도 질척이던 개새끼들을 한 방에 보내버렸으니까.
그러니까 지금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김 양은 입을 꾹 다물었다.
홍 과장이 이렇게 갈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그 홍 과장이. 고작 몇 초 만에 이렇게 허무하게 가다니.
마루라는 놈일 것이다.
최 실장과 백 실장이 데려오겠다고 한 놈.
불과 3~4달 전, 순박한 얼굴로 월급봉투를 받아 가던 녀석이었다.
곱상하게 생긴 얼굴이 떠올랐다. 바퀴벌레도 잡지 못하게 생긴 녀석이었다.
근데 그런 놈이 일본으로 간 지, 두 달 보름 좀 넘었다고 이렇게 변하나?
최 실장과 백 실장이 같이 오지 않았다는 건, 저놈이 잡았다는 소리였다.
아무리 방심했다고 하더라도 그 둘을 잡는 게 가능한가? 일반인이?
‘홍 과장은 대체 뭔 괴물을 깨운 거야?’
째깍- 째깍-
통증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총구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버텨.’
온몸이 생을 갈구했다.
김 양은 위로 총구를 두고, 책상 아래를 힐끗힐끗 살폈다.
‘내려와라.’
‘내려와.’
신경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계의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