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 [RUST]-15
홍 과장은 얼굴이 쪼개지는 것 같은 통증을 참고 손을 내밀었다.
귀신 같은 놈이었다. 칼날을 가로로 눕혀 던졌다면, 광대뼈를 뚫고 귀밑을 꿰었을 것이다. 귀 아래, 턱관절 근처에는 경동맥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니 칼날이 가로로 향하게 던졌다면 자신은 한 방에 죽었으리라.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건 칼날을 세워서 던졌다는 것. 이걸 어설프게 잘못 건드리거나, 잘못 움직여서 흔들리기라도 한다면, 신경이 나가거나 경동맥을 끊을 수 있는 절묘한 위치였다.
자신도 주먹으로 잔뼈가 굵은 몸이라지만, 잘못 건드리면 뒈질 곳에 칼을 꽂고 혈기방장하기엔 많은 나이었다.
무엇보다 그렇게 달려든다고 살 구멍이 보이지도 않았다. 칼을 던진 솜씨도 솜씨지만, 칼자루 끝까지 때려 넣다 못해 광대뼈를 함몰시킨 괴력도 무시무시했다. 따지자면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키운 최 실장과 백 실장을 생각하면 피가 솟구쳤지만, 자연재해로 아끼는 애들이 죽었다고 복수심을 불태울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홍 과장은 참아 넘길 수 있었다.
최 실장과 백 실장은 분명 최고 레벨의 전문가였다. 만나기 어렵지만, 그래도 힘들게 만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전문가.
최 실장만 하더라도 타격기로는 초일류에 가까웠다. 백 실장은 유술과 그라운드 기술로는 적수를 찾기 힘들었고. 하지만 둘의 능력은 이해 가능한 범주였다.
그에 반해 마루는? 재앙이었다.
지금 상황만 생각해 보더라도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퍼포먼스가 아니었다.
마루를 회유할 수만 있다면···, 회유에 그치지 않고 제대로 목줄을 채울 수만 있다면···, 남미 진출도 노려봄 직했다. 남미에 진출한다는 것은 거대시장 북미까지 갈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아시아에서 놀던 회사가 단숨에 세계 규모의 회사가 될 수 있었다.
음지에서 쓰는 제대로 된 칼 하나가 양지의 어설픈 돈이나 권력보다 더 무서운 법이니까.
지금 올라온 싹만 보더라도 마루는 천재지변이었다. 조금만 손을 봐, 괜찮은 애들 몇 명을 붙여준다면, 남미 갱단이니, 해방군이니, 혁명군이니 하면서 설치고 다니는 것들은 농장의 비료가 될 게 분명했다.
잡종들이 우글거리는 남미에 진짜배기 괴물을 풀어놓을 걸 생각하니, 홍 과장은 얼굴에서 느껴지는 아픔마저 열기로 변한 것 같았다.
‘잡아 삐라, 어서.’
홍 과장은 손을 내민 그 짧은 시간이 미치도록 길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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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는 홍 과장의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마루가 생각하기에도 이상한 일이었다. 음성은 들리는데 그냥 웅-웅- 거리는 느낌? 한국어가 아닌 외계어로 말하는 걸 듣는 기분이었다.
홍 과장이 무슨 말을 하든 마루의 생각은 오직 어떻게 하면 홍 과장을 확실하게 죽이고, 동생을 구할 수 있을까에 집중됐다.
홍 과장을 죽이면 동생도 죽는다. 어떻게? 누가 4 작업실에 연락해서? 김 양은 무력화됐다. 지금 홍 과장을 죽인다고 하더라도 4 작업실에서는 상황을 모를 것이다.
‘김 양이 있으니, 그냥 죽일까?’
김 양이 협조적으로 나오니까 시끄러운 홍 과장의 소리를 들을 필요가 없었다. 마루의 생각은 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어차피 죽일 사람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해서인지, 홍 과장의 말소리가 웅얼중얼로 들렸다. 간간이 뭔가 의미 있는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다.
4 작업실에 있는 인력은 무장한 조직원으로 최소 10명 이상. 공간의 특성상 흉기가 사방에 있으니 그곳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도 잠재적인 적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10명 최대 20명이라고 잡아야겠군.’
두 자리 숫자와 싸울 상황에도 마루는 무섭지 않았다. 그냥 처리하면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만 조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외국인 노동자들도 죽일 것인가?’
마루가 계획한 대로라면 목격자가 있어서는 안 됐다. CCTV 때문은 아니었다. CCTV 녹화본은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없었다. 김학인이라는 정치인의 스켄들이 터졌었다. 그의 얼굴이 완전히 공개됐어도, 증거로 인정받지 못했다.
대놓고 얼굴을 까도 증거가 되지 않는 판국에, 선글라스와 마스크까지 끼고 있는 인물을 마루로 특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마루가 동생 나루를 구하겠다고 하는 순간, 나루와의 대화를 들을 수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자신을 지목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럴지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전부 죽여야 할까?
‘아니지. 아니야. 살려둘 이유가 없어.’
마루는 죽여야 할 이유를 찾기보다, 살려야 할 이유를 찾는 것으로 생각을 바꿨다. 4 작업실에 나루가 잡혀있다. 사람이 납치됐음에도 그걸 보곤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자들이었다.
뻔히 납치된 사람을 봤으면서 그냥 있는 자들을 뭐라고 해야 할까?
공범?
그렇게 생각하자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그래. 그냥 깨끗하게 정리하자.’
생각을 대충 정리하고 호흡을 고르고 나서야. 홍 과장의 말이 조금씩 귀에 들어왔다.
대단한 놈이었다. 홍 과장은.
안면에 사시미가 틀어박혔고, 여차하면 뒤질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의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고 있었다. 듣다 보면 그럼직하게 들리는 홍 과장의 이야기.
마루는 살인귀가 되기 싫었다. 그럴 생각 자체가 없었다. 그저 집의 빚을 갚고, 남들처럼 잘 살고 싶을 뿐이었다. 홍 과장의 손을 잡으면?
일상과는 작별이었다. 저들에게서 가족들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빚도 변제될 것이고, 고액의 연봉이나 성과급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대가로 마루의 자유는 없어질 것이고, 모르는 사람을 썰고 다녀야 할 것이다.
저들이 시킨다면 남자든 여자든 노인이든 아이든 심지어 그들이 키우는 개나 고양이까지 작업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마루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재능, 사람 죽이는 재능이 문제였다. 거기에 일본에서 느낀 이상한 감각도 그랬다. 점차 강해지는 완력, 순발력, 본능적인 감각. 단 몇 개월 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피지컬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정신은? 친구와 놀기 좋아하고, 가족들 걱정하는 건 일반인이나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받는 스트레스에 대한 대처는 어떨까? 짜증 나는 상황에서도 일반인들과 같은 행동을 계속할 수 있을까?
운전하다 양아치와 시비가 붙었다고 생각하면 확실히 그랬다. 양아치가 지랄하면서 쫓아와 창문 좀 내려 보라는 둥, 보복 운전을 하며 차로 길을 가로막고 내려 보라고 하라는 둥.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할까?
예전이었다면 불안에 떨었을 것이고,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선택 장애에 빠졌을 것이다. 양아치가 때리면 쌍방을 피하고 일방 폭행으로 가기 위해 일방적으로 맞고 있든지, 더러워서 쌍방 가더라도 같이 치고받았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주변을 살필 것이고, 깔끔하게 정리할 수 없을까 고민할 것이 분명했다.
선을 넘어선 마루에게 있어 법이라는 허울로 통제되는 세상이란, 거추장스러운 무엇일 뿐이었다. 그 세상에서 눈앞의 폭력으로부터 즉시 지켜줄 수 없는 법에 의지하고 있는 인간이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존재였다.
[니 이리 사람 잡이 삘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카나? 피를 보기 전이라믄 몰라도, 피를 보고 난 뒤는 다른기라. 니도 느끼지 않나? 회사 말고 니를 케어할 수 있는 곳이 있을 끼라 생각하나?]
홍 과장은 그렇게 말했다. 피를 보고도 문제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그것을 알지 못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마루는 김 양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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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내민 홍 과장은 탄식했다. 말이 먹히는 놈이 아니었다. 분위기가 그랬다.
마루는 자신을 보지 않고 김 양을 보고 있었다. 뭔 생각일까? 대체 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마루를 협박하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봐도 한국에서 회사를 건드리고 살아남긴 불가능에 가까웠다. 설령 마루 본인은 어찌 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가족들은 아니었다.
결국엔 마루도 회사에 잡혀 죽거나, 잘해야 경찰에 잡혀 사형 또는 무기징역 맞고 감옥 엔딩이 있을 뿐이었다.
‘머리가 있는 놈이라고 했는데 아니었나?’
홍 과장의 눈동자가 김 양을 향했다. 본명 김영희 10대 탈북 소녀가 중국의 뒷거리에서 중국조폭, 공안, 밀고자들을 피해 살아남았다는 이야기에 중국까지 가서 스카웃 한 여자였다. 보기에는 순수해 보이는 미인형이지만, 총을 잡으면 180도 돌변했다.
총기 규제가 빡빡한 한국에서는 그다지 유용한 재능이 아니었지만, 향후 북미 시장 개척을 생각하면 필요한 재능이었다. 홍 과장이 회사의 미래를 생각해 약간의 위험을 무릅쓰고 중국에서 빼낸 여자였다.
‘왜 마루 놈이 김 양에게 관심을 보일까?’
‘김 양을 살려 줄 놈은 아닐 텐데.’
김 양이 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마루가 홍 과장 자신의 손을 잡는 것이었다. 마루가 자기 손을 잡지 않기로 마음먹고 김 양을 보고 있는 것이라면? 김 양에게 뭔가 원하는 것이 있다는 소리였다.
자신이 기절했을 때 김 양과 마루가 뭔가 이야기를 나눴을 가능성도 있었다. 김 양은 자신의 목숨에 너무나 연연했다.
누군들 죽고 싶겠는가만, 김 양은 생존 욕구가 너무 강했다.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라든지 8년 가까이 알고 지낸 홍 과장과의 '의리'라든지 그런 걸 찾기 힘든 김 양이었다.
그러니 목숨줄이 마루 놈에게 잡혔을 때 김 양이 살겠다고 마루에게 뭔가 제안을 했을 것이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홍 과장은 통증을 참으며 생각했다.
김 양과 마루가 손을 잡았다면, 그래서 자신의 제의에 시큰둥한 반응이라면? 좋게 말한 제의가 통하지 않는다면?
‘그걸 써야 하나?’
어차피 쓰려고 만든 거니, 쓴다면 아직 목숨줄이 붙어 있는 지금 써야 했다.
“와 그리 김 양을 뚫어지게 쳐다보노? 둘이 좋은 이야기라도 했나?”
마루의 침묵과는 달리, 김 양은 홍 과장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저 가스나 텄구마.’
홍 과장은 입맛이 썼다.
“날 찍이 삐고 김 양이랑 오순도순 뜰라고? 마루 니 진짜 동생 버릴 끼가? 내를 쭉이고 동생도 쭉일 끼가?”
“닥쳐.”
마루가 으르렁댔다. 본래 으르렁거리는 개는 무섭지 않은 법. 홍 과장은 그 모습에 피식- 웃었다. 광대뼈에 박힌 칼 때문에 썩소가 됐다.
“그래도 사람 껍데기는 쓰고 있다- 그래 생각 캤는데, 인제 보니 순 개새끼 아이가? 니 혼자만 살믄 되나? 응 애처롭게 울고 있는 동생은 터럭 만큼도 걱정되지 않나?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나?”
마루가 발작하기 전, 홍 과장이 절묘하게 끊었다.
“테이블 위에 노트북 열어보라.”
마루가 노트북을 끌어와 열었다.
“거기 들어있는 파일 보이나? 바탕화면에 sansam(산삼) 파일. 그거 열어 본나. 비번은 5882dolrido다.”
마루가 파일을 클릭하는 순간, 눈물에 떡이진 나루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빠! 마루 오빠! 살려줘-]
그 소리를 듣자마자 마루는 더 보지 않고, 탁 소리 나도록 노트북을 덮었다.
“우째, 표정이 좋다. 야.”
홍 과장이 다시 승부수를 던졌다.
계의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