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 [RUST]-16
공기가 내려앉았다.
무거운 침묵이 홍 과장, 김 양, 마루를 가득 채웠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는 기묘한 대치. 마루는 권총 그립을 쥐었다 피기를 반복했다.
지혈한다고 했지만, 지혈이 약간 늦어서인지 김 양의 상태는 시시각각 나빠졌다.
그녀에게 있어 살아있다는 기쁨을 주는 건 식도락이었다. 맛있는 것을 먹고 재밌는 것을 보고 가끔은 덕질도 하면서 편히 쉴 때, 그녀는 삶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은 입안에 그녀의 피 맛만 나고 있었다.
김 양이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든 말든, 홍 과장과 마루는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야- 이 개 종간나 새끼들아 나 죽어요. 나 죽는다고!’
김 양은 속으로 욕을 퍼지르게 하고 있었다. 그런 대치가 얼마나 이어졌을까?
마루가 권총에서 탄창을 뺐다. 17발 탄창에서 김 양이 5발 쐈으니 남는 건 12발. 약실에 한 발, 탄창에 11발 남았을 것이다.
탄창을 왜 빼지? 김 양은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마루를 봤다.
마루가 홍 과장의 제의를 받아 숙이기로 했다면 그녀는 재빨리 지혈제를 찾아 팔에 때려 붓고 바로 회사가 운영하는 병원으로 달려갈 생각이었다.
홍 과장도 마루가 권총에서 탄창을 분리하자, 미미하게 한숨 돌렸다는 반응이었다.
김 양의 살았다는 반응이 채 나오기도 전에 마루가 김 양을 노려봤다. 살기등등한 눈빛이었다.
‘왜? 미친 새끼야. 왜 또? 뭔 눈깔이 그런데?’
김 양 내면의 절규가 무색하게, 마루가 스치듯 김 양의 뒤로 돌아가며 그녀의 귓가에 아주 작게 속닥였다.
“당신이 홍 과장을 쏘면 어떻게 될까?”
“에- 예?”
김 양은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애초에 갑자기 자기가 왜 홍 과장을 쏜단 말인가? 그러거나 말거나 마루는 김 양의 뒤로 갔다.
김 양은 자기 등 뒤에서 사시미를 쳐든 마루가 떠올랐다. 소름 돋는 감각이 등과 목을 간질였다. 슬쩍 창문에 비친 그림자를 보니, 정말 사시미를 대고 언제든 찌를 자세를 취하고 있는 마루였다.
“살려 준다고···.”
홍 과장도 마루가 갑자기 김 양의 등 뒤로 가서 사시미를 꺼내자. 눈매를 좁혔다.
김 양과 홍 과장이 그러거나 말거나, 마루는 약실에 한 발 남은 총을 김 양의 왼손에 쥐여 주고 홍 과장을 향해 겨눴다.
권총을 쥐자, 왼쪽 등판을 뚫고 나온 칼이 흔들렸다. 김 양은 너무 아파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어- 어- 하는 순간, 홍 과장을 겨누고 있는 권총.
눈이 동그랗게 커진 홍 과장이 뭐라고 말하려는 찰라, 마루의 칼 끝이 김 양의 목 뒤를 살짝 찔렀다. 김 양은 화들짝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빠깡-
퍽!
틱-
둔탁한 소음과 함께 홍 과장의 미간에 구멍이 났다.
약실에 한 발인데도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두 번 당긴 김 양이 망연자실 유체이탈했다.
어쩌자고 그랬니.
왜?
어째서?
대체 나한테 왜 이래요?
난 이제 죽었다.
정말 다 끝이야.
다양하게 급변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 당신도 조직에 쫓기는 거야. 살려면 신분을 바꾸고 해외로 떠야겠지? 서로 쫓기는 처지인데 같이 가자고.”
‘이런 또라이 새끼가!’
차마 소리치지 못하는 김 양은 울고 싶었다.
“동생은 어떻게 하려고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건 신경끄고, 홍 과장 죽은 건 당장 알려지지 않을 거 아냐? 최소한 하루는 여유 있을 테니까 당신 팔부터 치료하자고.”
팔부터 치료하라는 말에 김 양의 울 것 같은 표정이 휙 변했다. 일단 어쨌든, 팔 병신 될 위험에서 벗어났다. 살았다. 살 수 있었다.
“회사에서 운영하는 병원이 차로 10분 안쪽에 있어요.”
“그래 다녀와.”
김 양은 이 팔로 어떻게 운전하라고? 하는 얼굴로 항변했지만, 마루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금고는 어딨고, 약은 어딨어? 관련 자료는 어디에 있고.”
“금고는 홍 과장 책상 밑에 숨겨져 있고요. 홍채인식과 지문인식 병용이요. 약은 홍 과장이 다 지하로 옮기라고 해서 지하에 있고요. 입구는 4 작업실, 11번 창고 두 곳이고, 비밀번호는 0492번이요. 자료는 홍 과장 노트북에 파일로 있어요.”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뱀 같은 홍 과장을 죽이고 김 양을 살리길 잘했다 생각했다.
“좋아 일단 병원부터 다녀와. 조직에 내가 죽였다고 말해봐야 소용없는 거 알지? 권총에 당신 지문 범벅에, 당신이 서서 죽인 게 확실한 각도까지, 조사하면 딱 다 나와. 내가 협박해서 쐈다고 해도 마찬가지지, 내가 보기에 이 조직은 배신자를 확실히 죽일 것 같은데, 김 양 생각은 어때?”
“······.”
살짝 뜨끔했던 김 양이지만, 좆까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근데 그럼 ‘그래?’ 그러고 쿡 찌를 것 같았다.
“병원이나 빨리 갔다 와. 혹시라도 탈주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탈주하면 조직에서는 김 양 잡겠다고 난리를 칠걸.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2년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일만 하던 일반인을 의심하겠어? 아니면 김 양 당신이 배신했다고 생각하겠어? 누구부터 쫓을까?”
김 양은 진짜 미치고 팔딱 뛰고 싶었다.
“살고 싶으면 병원 갔다 최대한 빨리 오는 게 좋을 거야. 최소한 금고에 들어있는 현찰이든 홍 과장이 가진 자료든 쥐고 있는 게 목숨줄 지키는 데 힘이 될 테니까. 아니라고 생각하면 알아서 하고. 뭐 해 빨리 가봐.”
김 양이 주섬주섬 엎어진 책상으로 가서 자동차 키를 찾았다.
‘난 망했어요.’라는 기운을 풀풀 풍기며 밖으로 나가는 김 양이었다.
마루는 미간에 구멍 난 홍 과장을 봤다. 얼굴에 칼이 꽂히고 미간에 구멍까지 난 홍 과장의 얼굴은 말 그대로 처참했다. 홍 과장의 손을 잡았다면, 결국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씨발.
마루는 낮게 욕을 하고, 홍 과장의 컴퓨터를 다시 열었다.
자동으로 멈춰진 동영상 속 나루의 모습은 낯설었다. 우는 모습이 왜 이렇게 낯선지. 마루는 동영상을 끄고 바탕화면에 있는 여러 파일들을 압축해 USB로 옮겨 담았다.
‘어차피 1~2시간 내로 나루에게 큰일이 생길 가능성은 없어.’
그러니 생각한 대로 움직이는 게 맞았다.
‘금고부터 확인하고, 다음에 4 작업장에 있는 나루, 마지막으로 4 작업장 지하에 있는 창고 순서대로.’
책상 바닥에 있는 금고 잠금장치를 해제하자, 계단으로 내려가는 출입구가 있었다. 금고문을 끝까지 열자, 철컥하고 고정되는 소리가 들렸다. 금고의 내부는 약 5평 정도 크기였다.
마루는 아찔했다. 홍 과장이 말한 회사의 규모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벽면을 빼곡하게 채운 현찰들. 비닐에 쌓인 돈 뭉텅이들이 ㄷ자 모양으로 쌓여있었다. 엔화, 달러, 원화에 위안화와 유로화 심지어 영국의 파운드화까지 있었다.
“하- ”
한숨과 욕이 같이 나왔다. 백 실장의 벤츠 트렁크엔 5만 원짜리가 다발로 있더니, 여기엔 세계 각국의 돈더미가 쌓여있었다. 약 파는 조직이라면 다들 이렇게 현금이 많은 건가? 일본 야쿠자들도 돈 많았는데, 여긴 더 많아 보였다.
제법 현금 쌓여있는 걸 본 마루였지만, 솔직히 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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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양은 10분 거리에 있는 병원을 5분 안쪽으로 주파했다. 회사와 연계된 병원인지라 김 양이 응급실로 들어가자 바로 치료와 함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을 요구했다.
‘상황 보고는 무슨 상황 보고, 죽다 살았구만.’
부분 마취를 한 김 양의 오른팔을 꿰매며 담당의가 말을 걸었다.
“이 정도 큰 수술이라면 본래 전신마취하고 하는 거 아시죠? 부분 마취를 요청해서 해드리기는 합니다만, 느낌이 이상하거나 통증이 생겨도 움직이면 안 됩니다. 그나저나 어쩌다 이렇게 됐습니까?”
김 양은 눈알을 도르륵 굴렸다. 오른팔 작살 난 거야 그렇다고 쳐도, 당장 왼쪽 등판에 박힌 찬란한 사시미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업장이 습격당했다고 말하기도 뭐했고.
‘그런 괴물이 혼자 들어와서 썰었다고 어떻게 말하냐고.’
당장 홍 과장도 뒈진 상황이었다. 그 순간 김 양의 머리에 불이 반짝 들어왔다. 홍 과장이 분명 마루에 대한 일을 보고했을 게 분명했다. 마루의 모친과 동생에게 그 약이 사용됐으니, 회사에서도 돌아가는 일을 알 것이다.
“신입 실력 좀 보려다 죽을 뻔했어요.”
“하하- 홍 과장님이 이번 신입 기대하라고 그렇게 자랑하고 다니시더니. 이거 상처를 보니까 정말 더러운 놈 같기는 하네요.”
“더럽다고요?”
“예. 뭐 아직 인체해부학 같은 걸 제대로 몰라서 그런지 약간 실수가 있기는 하지만, 상처를 아주 더럽게 냈어요. 뭣도 모르는 초짜가 이런 상처를 냈다는 건, 진짜 칼질 더럽게 한다고밖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네요.”
김 양은 쎄했다.
“그럼 후유증이 심할까요?”
상처 치료 후엔 수전증이라도 생기는 걸까? 하긴 사시미를 박아 뒤틀었는데, 뼈에 금이라도 갔거나 뼈가 작살이 난 건 아닐까? 마취했음에도 오른팔이 욱신거리는 느낌이었다.
“글쎄요. 일단 지금 문제가 되는 부분이 혈관, 신경, 뼈인데, 혈관은 진짜 천운이네요. 최대한 살렸습니다. 일부는 좀 위험했지만 급한 불은 껐고요. 신경을 걱정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신경이 끊어진 건 아니라서, 재활하면서 경과를 지켜봐야 할 것 같군요. 뼈도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칼을 헤집으면서 상처가 많이 생겼습니다. 주변으로 실금도 제법 갔고요.”
“치료 기간이 오래 걸릴까요?”
치료를 받자마자 탈주해야 할 판이었다. 재활이 오래 걸린다면 위험했다.
“음···. 일단 실밥은 2주 뒤에 풀고요, 이후 재활 문제나, 뼈에 대한 문제는 실밥 뽑으면서 다시 보지요.”
아- 망했어요. 김 양의 표정을 본 의사는 회사에서 일이 터지면 다 그렇지 했다.
“자 이제 뒤로 돌아누워 보세요."
김 양은 끙-하는 소리와 함께 돌아누웠다. 앞으로 삐져나온 칼날 때문에 수술대 밖으로 머리와 왼쪽 상반신이 약간 나왔다.
“움직이면 안 됩니다.”
의사는 김 양의 등판에 박힌 사시미를 보고 감탄했다. 견갑골을 초코파이 뚫듯 부드럽게 뚫고 들어간 칼은 만화나 영화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었다.
엑스레이 사진상으로 보면 정말 깔끔하게 관통한 칼이었다. 조금 아래나 옆을 뚫었으면 폐 상부를 찢었을 것이고, 그건 정말 심각한 중상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폐도 멀쩡했고 큰 혈관도 다치지 않았지만, 뼈가 붙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쪽도 다행이네요. 폐랑 혈관, 신경도 크게 다치지 않았습니다. 근데 잘린 뼈가 붙는 데 시간이 좀 걸리게 생겼네요. 약도 좀 길게 먹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업장에 가봐야 해서요.”
“며칠은 입원해서 쉬시는 게 좋을 텐데요?”
“최소한 인수인계는 해야죠. 직접 해야 할 것도 많고요, 이번에 홍 과장님이 작업하면서 벌인 일도 많아서 제가 맘 편히 입원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거든요.”
의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손가락 팔다리 잘리고 몸통에 구멍 난 사람들을 제법 본 의사였다. 손가락 접합 수술한 직원이 바로 당일부터 일하는 것도 심심치 않게 봤었다.
“약은 일단 보름치 드리겠습니다.”
“더 주세요. 일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요.”
의사는 흐음-하는 소리와 함께 한 달분 약으로 처방전을 바꿨다.
“오른손은 많이 부을 겁니다. 왼쪽도 뼈가 다친 거라, 제법 많이 부을 거고요. 붓기는 실밥 풀 때쯤 거의 다 가라앉을 거니까 퉁퉁 붓는다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홍 과장이 마음 먹고 일을 벌였으면, 지방이나 해외 출장 가야 할 상황이 생길지 모르니까 진단서 한글본, 영문본 떼어드릴테니. 챙겨가세요.”
“감사합니다.”
김 양이 고개를 푹 숙이며 인사했다. 의사는 그 풋풋한 인사에 눈매를 곱게 휘었다.
“그런데···. 우리 회사의 에이스 김 양이 이 정도로 다쳤는데, 신입은 멀쩡한가 보네요?”
훅-들어오는 의사의 질문에 김 양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의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