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 [RUST]-19
얼굴에 검댕을 여기저기 묻힌 한 형사가 마루네 반지하로 향했다.
“아니 한 형사님? 이게 무슨 일이래요. 어디 다친 데는 없으시죠?”
이 순경이 한 형사를 보고 호들갑 떨었다. 퀭한 눈동자의 한 형사가 고개를 까딱였다.
“그래서 현장은? 누가 누굴 죽였어? 그 청년이 약 팔이 조폭이라도 죽인 거야? 아니면 사채업자라도 찌른 거야?”
“그게 아니라 좀 이상합니다.”
이 순경이 침을 꼴깍 삼켰다.
“죽은 사람이 월드 그쪽 최 실장이랑 백 실장입니다.”
“뭐? 확실해?”
최 실장과 백 실장이 한날 한곳에서 죽었다? 한 형사의 촉이 전두엽을 콕콕 찔렀다.
바로 현장으로 들어간 한 형사였다.
이 순경이 감식반을 막았는지 폴리스 라인에 옹기종기 있는 감식반이 개와 소, 닭까지 찾고 있었다. 후딱 보고 나가야 할 분위기였다.
‘이건······.’
거실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최 실장이 늘어져 있었다. 사인은 단 한 방의 칼자국. 간을 뚫고 사선으로 폐까지 한 방에 뚫었다. 출혈로 보아 큰 혈관을 다친 것 같았다. 칼에 맞은 최 실장은 다리가 풀려 바로 쓰러졌고, 뒤따라 들어오던 백 실장이 반사적으로 반격했지만······.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넘어간 백 실장의 뒷목에 선명한 칼자국. 백 실장의 표정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프로다.’
최 실장과 백 실장 모두, 월드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였다. 그 둘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다니. 어디지? 누구지?
한 형사는 마약 전담이지만 마약은 조폭과 관계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조폭 관련 정보도 제법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 형사가 아는 한에서 최 실장과 백 실장 둘을 한 번에 보낼 칼잡이는 없었다.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인지, 아니면 불길에 다 날아가 버린 증거들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가 원인인지, 전두엽을 쿡쿡 찌르던 촉이 더는 발동하지 않았다.
잠깐이라고는 하지만 감식반을 막아 세웠으니 그쪽에서 위로 올리면, 또 깨지게 생겼다.
‘깨지거나 말거나 증거가 날아갔는데 꼴리는 대로 하라고 해.’
한 형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 순경이 고개를 숙이면서 감식반 사람들에게 미안함을 표시했다. 기다린 지 몇 분 지나지 않았지만, 감식반 사람들은 뿔이 단단히 났다.
“거 뭘 본다고 감식반도 막고 그러시나? 마약반이?”
“아닙니다. 제가 굳이 먼저 보고 싶어서 실례했습니다.”
“허 참. 이거 규정 위반인 거 알고 계시죠?”
“미안합니다. 앞으로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여기가 제가 맡은 사건이라서 욕심이 과했습니다.”
“큼. 큼. 앞으론 이러지 맙시다. 규정대로 해야지, 우리도 형사들이 헤집고 난 뒤 들어가면 난감해요.”
한 형사는 아직도 멍했다. 제대로 된 증거였다.
익명의 제보자는 음성변조를 했는지 텍스트 음성변환을 했는지 목소리를 특정할 수 없었다.
음성변조기를 써서 특정 불가능한 익명의 제보자.
비상식적인 신체 능력을 갖춘 범인.
대량살상한 흔적뿐 아니라 마약 관련 흔적까지 깔끔하게 지워버린 화재.
119 소방관이 화재 현장을 보고 말했다.
인화물질이 너무 많고 유독가스가 심하게 나와, 소화전으로는 끄기 어렵다고 했다. 소화전으로는 주변에 물을 뿌려, 엄한 곳으로 번지지 못하게 막고 화재 현장은 전부 타도록 그냥 두는 게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했다.
‘내 증거들이.’
월드 축산에 월드 그룹이 관련됐다는 증거를 확실히 잡는다면, 월드 그룹을 조금씩 몰아갈 수 있었다.
수천 억대 마약만 증거로 잡았어도, 어떻게 가능했다. 하다못해 총상으로 죽은 시신 한 구만 건졌어도 사건을 크게 만들어 지원받아 낼 수 있었다. 근데 그게 전부 날아갔다.
화재가 이틀 이상 계속될 거라 119 소방관은 예측했다. 인화성 물질이 많고 층고가 높은 작업장이 가마 역할을 해서 내부 온도는 1000도가 넘게 올라갈지 모른다고 했다. 48시간 넘게 1000도 이상이면 시체고 뭐고 다 타서 잿가루가 될 게 뻔했다.
익명의 제보자가 숟가락까지 들어서 떠먹여 준 걸 홀라당 날려버린 꼴이었다.
그 익명의 제보자가 다시 도와줘 다른 업장을 뒤진다고 한들, 이번과 같이 발화 장치가 설치됐다면 사실상 증거를 확보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증거 꺼낸다고 어물거리다 타죽을 일은 없지 않은가?
한 형사는 지하 창고에서 봤던 물건들이 떠올랐다. 골동품 유물 가격이 얼마나 할까? 백억? 이백억? 분명히 수백억은 넘을 것이다. 거기에 다량의 마약, 다양한 장비들까지. 자금 세탁 업장이라는 특성상 현찰도 엄청나게 날렸을 것이다.
‘조폭 새끼들이 그런 손해를 보고 있지는 않겠지.’
그럼 그놈들이 노리는 사람이 익명의 제보자일 가능성이 컸다. 아니면 괴물 같은 대량학살자든지. 죽을 짓을 했으니까 죽였을 것이고, 맞은 놈은 때린 놈이 누군지 짐작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월드 놈들을 잘 감시하면 제보자든 범인이든 연결될 것이다.
한 형사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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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t 탑차가 흔들거리며 산길을 이동했다. 월드 축산 뒷동산을 통과하는 임도(林道)였다. 본래 임도는 국고와 지방비에 사비를 더해 만들고 이용은 공용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조직에서는 비상시 사용하기 위한 임도를 사비로 만들었다. 나무를 베어내고 잡석을 깔아 만든 임도의 끝은 지방도로와 이어져 있었다. 갈대와 긴 잡초들이 무성해 임도를 숨겨주고 있었다.
‘김 양을 죽이지 않기를 잘했어.’
마루는 자신의 선택이 흡족했다. 김 양은 마루의 예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조직 전반적이라기보다는 홍 과장이 운영하는 업장에 관한 내용이었지만, 그걸로도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발화 장비를 이용해 증거를 몽땅 태울 수 있는 비상 장치라든지, 지금처럼 몰래 만든 비상용 탈출 도로라든지, 근처에는 비상시 숨을 수 있는 안가까지 있었다.
‘안가로 가는 건 좀 위험할 거 같고.’
업장에 불이 났다는 정보가 조직에 들어가면 안가(安家)에 조폭들이 몰려올 가능성이 있었다. 홍 과장이 살아있든 죽었든, 안가에 온 사람이 빈손으로 오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할 테니까.
마루는 갈대로 만들어진 벽을 넘지 않고 차를 세웠다. 조수석에는 기절한 나루가 앉아있었다. 나루의 얼굴에 튄 핏방울. 마루는 동생의 얼굴에 튄 핏자국을 지우기 위해 물티슈를 뺐다.
마루가 조심스럽게 핏방울을 닦아주고 있는데 나루가 정신을 차렸다. 마치 악몽이라도 꾼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며 몸서리를 치던 나루의 눈꺼풀이 올라갔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돌고래가 고주파를 쏘는 것처럼 높은 고음이 터졌다. 초고음을 바로 코앞에서 직격당한 마루가 귀를 막았다.
“야- 고막 터지겠다. 귀먹겠어.”
한참을 소리 지른 나루가 마루를 보곤 몸을 문 쪽으로 웅크렸다.
딸깍딸깍- 마루의 눈치를 보며 안전벨트를 풀려고 하는데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헛손질하고 있었다.
“나루야 뭐 해?”
“오- 오지마. 저리 가- 저리.”
무슨 역병이라도 되는 것처럼 오빠를 피하는 나루였다. 마루는 기분이 좀 나빠졌다. 뭐 그래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모습을 봤으니 트라우마가 생겼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루야 진정해. 진정하고.”
마루의 그 말이 트리거가 됐는지 나루의 목소리가 뾰족하게 높아졌다.
“진정? 진정하라고? 지금? 나한테 진정하라고 한 거야?”
“그래 심호흡하고, 밖을 봐 여긴 안전해. 안전하니까 천천히 숨 쉬고.”
밖으로 보라는 마루의 말에 나루의 눈동자가 휙휙 사방을 훔쳤다. 이윽고 안전하다고 생각했는지 나루의 목소리가 더 높아졌다.
“오빠 미쳤어? 진짜 미친 거지! 내가 영상 편지 보낸 거 안 봤어?”
“봤지.”
“봤어? 봤는데 그런 거야? 봤으면서? 진짜 보고도 그런 거야?”
나루는 뭐가 그리 서럽고, 흥분되는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마루는 당황했다.
“내가 살려달라고 그랬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지금 오빠가 뭔 짓을 한지 아는 거야? 알면서 그런 거냐고!”
“나루야 조폭 같은 사람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아. 너한테 뭐라고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놈들 말을 어떻게 믿겠어? 놈들이 널 협박해서 날 잡으려는 걸 알았는데, 내가 어떻게 뭔 협상을 해? 수틀리면 널 죽이겠다고 한 놈들인데, 먼저 치면 쳤지 그냥 놈들 하자는 대로 끌려다니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 내가 그런 건, 오빠는 무조건 널 구하려고 그런 거야.”
마루의 말에 나루는 더 발작했다.
“나 때문이라고? 나 때문에 사람들을 그렇게 죽였다고? 사람 죽이고 내 핑계야? 한두 명도 아니고 거기 있던 사람들 전부 오빠가 죽였지? 그런 거지?"
“······.”
마루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놓고 나 때문이라고? 내가 영상 편지에서 뭐라고 그랬어. 나 살려달라고 했지? 가족을 생각해서 참으라고 했지?”
“······.”
“내가 뭐라고 그랬어. 그 사람들 말대로 해주라고 했지? 근데 오빠 맘대로 해놓고 나 때문이라고? 대체 왜 그랬는데? 이제 거기 회사에서 가만히 있겠어?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건데? 우리 추격하는 회사 사람들 수십 명, 수백 명 다 죽일 거야? 다 죽일 거냐고!”
나루의 말에 마루는 입술을 질근 씹었다. 딴에는 목숨을 걸고 동생을 구한 오빠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는 말 정도는 들을 줄 생각했던 마루였다.
“엄마는 어떻게 하려고 그랬어? 엄마가 왜 약을 하게 됐는지 물어나 봤어? 아니지? 엄마 정신없을 때 그냥 신고해서 보내버린 거지?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아빠는 어딨는지 알면서 그랬어? 최소한 아빠랑 이야기는 하고 그랬어야 하는 거 아니야?”
“······.”
“이제 엄마랑 아빠는 누가 지켜주는 건데? 조직인지 회사인지 조폭인지 그 사람들한테 누가 지켜주는 건데? 오빠가 엄마 아빠 다 지킬 수 있어? 요양병원으로 가신 아빠. 마약중독치료센터로 보내버린 엄마 두 사람 모두 오빠가 지켜줄 수 있냐고?”
“······.”
“아빠가 왜 요양병원으로 가셨는지 알아? 모르지? 오빠가 전화할 때는 돈 넣었다. 그때뿐이니까. 알 리가 없지. 아빠 암이 허리 척추 있는 쪽으로 전이되어 하반신 마비됐다는 거.”
마루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나루의 말이 길어졌다.
“아빠는 오빠가 걱정한다고 한국에 들어오면 알 테니까 알리지 말라고 그렇게 하셨어. 근데 오빠가 자주 아빠한테 전화했거나 엄마한테 전화했으면 몰랐을까? 한 달에 한 번, 돈 보냈다는 전화가 끝인데 거기에 아빠 하반신 마비 와서 요양병원 갔다고 말할 시간도 안 줘 놓고 나 구하겠다고 수십 명을 죽인 오빠한테 내가 뭐라고 해야 해? 어?”
“······.”
“엄마도 그래. 엄마가 왜 약을 하게 됐는지 생각이나 해봤어? 엄마 손에 물 한 방울도 묻히지 않고 사신 분이야. 그런데 집안이 망한 뒤로 그냥 자식 걱정만 하고 사신 엄마라고, 우울증이 오고 불면증이 겹치고 진짜 큰일 나겠다 싶은 찰나에 그 약 먹고 그나마 기운 차리신 거라고.”
마루는 기막혔다.
“야- 너 그 약이 얼마짜린지 알고 그러는 거냐?”
“그게 얼마짜리든! 그게 얼마나 비싸던 엄마보다 중요해? 중요하냐고? 중요하지 않잖아.”
“중요하지 않지, 근데 꼭 그런 약을 드셔야만 했냐? 그냥 일반 병원에서 진료하고 처방받아도···.”
“봤어? 오빠가 곁에서 엄마 봤냐고? 일반 병원 안 가봤겠어? 아니 애초에 엄마가 우울증을 앓고 그런 게 몇 년이나 됐는지 알아? 그냥 엄마가 귀찮게 하는 거 같으니까 집 나가서 돈이나 던져주고는. 그게 지금 할 말이야?”
계의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