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 [RUST]-26
핸들이 꺾이면서 뭘 들이받았는지, 아니면 밟았는지
1.5t이 넘어가는 택시가 가벼운 쇳소리와 함께 붕 떠올랐다.
팅!
휭휭-
허공에서 한 바퀴 도나 싶더니, 한 바퀴하고도 반을 더 돌아 옆으로 떨어졌다.
쿵!
콰지지지직!
옆으로 착지한 택시가 달리던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측면을 갈면서 서서히 멈췄다.
“씨발! 개-”
죽다 살아난 마루가 욕설과 함께 안전벨트를 풀려 했다.
크릭- 크릭-
풀리지 않았다.
억지로 힘으로 풀려고 성질을 부리던 마루가 안전벨트를 자세히 봤다. 열쇠 같은 것을 넣어야 풀리게 만든 잠금장치였다.
‘하- 뭐 이런 개새끼들이 다 있어.’
마루는 박살 난 도청기 케이스를 뜯었다.
날카롭게 뜯어진 면으로 안전벨트를 찢어내듯 잘랐다.
생각보다 잘 잘려서 다행이었다.
운전사는 죽지 않았는지 허우적거렸다. 살았지만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 같았다. 마루는 운전사를 족쳐 이런 일을 꾸민 새끼들이 누군지 알고 싶었지만, 입을 꾹 다물고 안전벨트를 자르는 데 집중했다.
강한 힘으로 찢어내듯 자른 게 효과가 있었는지, 순식간에 반이 넘게 잘렸다.
이익
힘들 줘 나머지 부분을 잡아 뜯었다.
부부북-하는 소리와 함께 끝 조금을 남기고 찢어졌다.
"하 이게 안 끊기네."
끝 부분은 힘으로 뜯기 어려웠다.
다시 날카로운 조각으로 남은 끄트머리를 갈아댔다.
북북
마루의 본능이 계속 경종을 울렸다. 쉽게 죽였으니 쉽게 죽을 수 있다는 걸 마루는 깨달았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이렇게 갇혀 있다가 다른 놈들이 어디서 휙- 나타나 테이저 건이라든지 마취총을 쏘면 피하지도 못하고 엔딩이었다.
당장 택시 운전사를 족치고 싶고, 당장 여기서 나가고 싶고, 당장 눈에 보이는 걸 전부 조져 버리고 싶은 분노가 끓어 올랐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마루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안전벨트 조지는 것에 쏟았다.
뚝-
안전벨트를 자르고 자유를 되찾은 마루는 먼저 블랙박스부터 살폈다. 버스 기사, 택시 기사에 대한 보호를 강화하는 일환으로 외부 블랙박스뿐만 아니라 내부에도 블랙박스가 있었다. 마루는 손을 뻗어 블랙박스 메모리 칩을 꺼냈다.
택시 운전사가 알아 들을 수 없는 발음으로 중얼중얼거리며 비척비척댔다.
마루가 택시 운전사의 반쯤 부러진 목을 잡아채고 무겁게 말했다.
“너 뭐냐? 누가 시켰어? 엉? 누가 시켰냐고?”
짙은 살기가 흘러나왔다. 그 살기가 우습다고 하는 것처럼 평범한 얼굴의 택시 운전사가 키득키득 웃었다.
'웃어? 이 상황에서?'
그 웃음이 어쩐지 불길했다.
목이 반쯤 부러진 주제에 웃다니. 약이라도 한 건가?
순간 떠오른 기억.
김 양이 했던 말이었다.
'그냥 어설프게 불 지르지 말고 여기 발화장치 있으니까 그걸로 하자니까. 조직에서 증거 인멸 확실하게 하게 다 장치를 해놨다고. 어설프게 불 지른다고 하다가 장치가 망가지면 그게 더 골치 아파 그냥 가만히 좀 있어.'
수천 억대 재물이 있는 업장도 여차하면 날릴 준비를 한 조직인데, 택시 하나쯤은 그냥 날려버릴 게 뻔했다.
그 생각이 맞았다는 것처럼 심장이 맹렬하게 경고했다.
“씨발! 개-”
마루는 바로 자동차 뒷 유리창을 양발로 걷어찼다.
뻥-소리와 함께 유리창이 깨끗하게 떨어져 나갔다.
씨발씨발씨발
마루가 허겁지겁 밖으로 몸을 빼는 순간,
치지직-팍-하는 스파크 튀는 소리와 함께 옆으로 드러누운 택시가 화염에 휩싸였다.
끄아아아아아아악!
온 몸에 불이 붙은 택시 기사의 비명이 끔찍하게 터져 나왔다.
“하- 존나- 이게 무슨.”
설마 했더니 진짜 터졌다.
택시 운전사에게 답을 듣겠다고 10초 아니, 5초만 더 시간을 끌었으면 자기도 타죽었을 것이다.
마루는 119나 렉카가 오기 전, 가드레일 너머에 있는 아파트단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김 양은 한 탄창, 그러니까 딱 20발을 쏘고 미련 없이 총기를 분해했다.
본래 한 번 쏜 총은 분해해서 버리는 게 맞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아니었다. 버리면 다시 구할 수 없을 테니.
순식간에 분해한 총기를, 위장한 첼로 케이스에 챙긴 김 양은 꼼꼼하게 탄피 스무 개도 전부 회수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유롭게, 옥상에서 1층으로 내려온 김 양이 비상구 근처에서 뭔가를 기다렸다. 그렇게 5분쯤 지나자 음악학원 학생들이 우루루 나왔다.
현악기 학원인지라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 가방을 든 수십의 학생들 사이로 김 양이 스치듯 스며들었다.
‘뭐 알아서 하겠지.’
김 양은 마루에 대해선 신경을 껐다.
꼴리든, 뒈지든, 싸든, 내 책임 없음.
아 손 아퍼. 무리했다.
그래도 분위기를 보니 속사를 해야 할 상황이었고.
간만에 무리했더니 어깨랑 등도 좀 결리는 거 같고.
신성한 로동을 했으니 이제는 열심히 일한 자신에게 상을 줄 시간이었다.
이왕 상을 주는 김에 한우 투쁠을 줘야겠다. 혼자 먹기 좀 청승맞지만 2인분이면 될 거야. 먹는 김에 4인분? 조금 더 써서 5인분?
김 양은 근처 한우 맛집을 검색한 뒤, 방향을 틀었다.
역시 맛집은 진리다.
유명한 집은 이유가 있었다.
숯불에 달궈진 구리 석쇠가 한우 투쁠 소고기를 받들며 소리쳤다.
치이이익-
꽃등심 1인분, 갈비살 1인분.
먼저 갈비살부터. 꽃등심을 먼저 먹었다가, 갈비살을 차갑게 대하면 너무 슬플 것 같았다.
화아아아악-
참나무 훈연 향이 살짝 입혀지는 것과 동시에 고소한 냄새가 유혹했다.
이 두께라면 일단 10초씩 사방을 살짝 지져서 육즙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고 약간 외곽으로 이동, 잔열로 익히면서 가둬둔 육즙이 골고루 퍼지게 한 뒤···.
김 양은 게랑드 플뢰르 드 셀 소금에 화이트 페퍼가 뿌려진 곳으로 첫 점을 옮겼다. 왼손이라서 약간 덜 경건한 느낌이었지만, 눈앞에 있는 찬란한 한 점은 김 양에게 아낌없는 축복을 내려주고 있었다.
아삭-
참나무 훈연향이 은은하게 풍기는 크리스피한 식감
스윽-
약간 바삭한 느낌이 깨지는 것과 동시에 풍부하게 흘러나오는 육즙.
꾸욱-
부드럽지만 결코 부드러운 것으로 끝나지 않은 탄력 있는 조직감.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게랑드 플뢰르 드 셀 소금과 화이트 페퍼의 조화.
‘기레 이기야.’
김 양은 눈물이 찔끔 났다.
세계화 시대 만세! 자본주의 만세! 다 필요 없어!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자본주의의 맛은 다양하고 건재했다.
김 양은 조심스럽게 트뤼프 오일 소금장으로 젓가락을 이동했다. 통통하게 육즙을 가둔 완벽한 한 점이 트뤼프 오일 소금장과 랑데부를 했다.
젓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떨림.
이것이. 이것이 트뤼프 오일이란 말인가?
한우 투쁠과 이렇듯 농후한 만남이라니?
역시 맛집에서는 이런 것을 쓴단 말인가?
입안에서 은은하게 퍼지는 트뤼플의 향기,
한두 투쁠 갈빗살의 통실한 부드러움. 그리고······
띠리리리리릭
띠리리리리릭
대포폰이 몸을 떨며 울었다.
감동이 무너지면서 맛의 향연이 깨져버렸다.
입안의 고기를 껌처럼 질겅질겅 씹어 삼킨 김 양의 기름진 입술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
======
아파트단지, 야외 운동코스 공용화장실
화장실 변기에 앉은 마루가 찢어진 옷을 대충 주섬주섬 챙겼다.
옷을 새로 사야 하겠는데, 벗고 다닐 수는 없으니 어떻게 조각조각이라도 입고 옷가게로 가야 할 판이었다. 서강로 인근이니까 코앞이 신촌이었다. 조금만 가면 옷을 파는 곳이 제법 있었다.
“젠장 뭐냐고.”
골목 나와서 처음 잡은 택시가 조직에서 보낸 택시라고?
그럼 혹시라도 내가 빠져나와 택시를 잡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는 소리잖아?
어떻게?
15~16명을 뚫고 내가 큰길로 나올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그래서 날 납치할 택시를 대기하고 있었다고?
무슨 제갈량이라도 있는 건가?
그 타이밍에 골목에서 빠져 나갈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주변에 감시자가 있었나?
아니면 진짜 예측이라도 한 거야?
마루는 반창고로 붙인 박살 난 도청기를 떼며 생각에 잠겼다.
‘도청기?’
혹시 탐지기나 위치 추적기 같은 걸 누가 붙인 건 아닐까?
누가? 어디에서? 언제?
마루는 경찰서 화장실에서 안 형사가 멱살을 잡았던 것이 떠올랐다.
자연스러운 상황이라 그냥 지나갔지만, 따지고 보면 경찰서에서 안 형사가 무리하게 마루의 몸 위로 올라앉아, 마운트 포지션을 잡을 이유가 없었다.
찢어져 주섬주섬 끌어모은 재킷을 펼쳐 멱살이 잡혔던 부분 뒤쪽을 살펴보니, 작고 네모난 것이 박혀있었다.
“씨발.”
마루는 작고 네모난 것을 뜯어 변기에 던져 버리고 물을 내렸다. 지금 이 위치까지 보내졌을 테니 최대한 빨리 벗어나야 했다.
누더기 재킷을 들어 아파트단지에 있는 의류 재활용함에 던져 넣고, 와이셔츠 양팔을 떼어 민소매로 만든 것을 걸친 마루가 신촌 방향으로 달리기를 시작했다.
후딱 옷부터 사고, 김 양에게 회사의 보안이라든지 위치추적 같은 걸 자세히 물어볼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김 양의 대포폰으로 전화를 걸자마자, 전화기에서 사자후가 터졌다.
[뭔 소리든. 뭔 일이든. 닥치라우! 내레 기렇게 만만해 보였어?]
“무슨.”
뭔 말을··· 아니 입도 뻥긋하지 않았는데.
마루는 어이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 양의 극대노가 터져 나왔다.
[밥을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고 했어. 근데 너는 뭐니? 너는 뭐야? 니가 사람이야? 니가 인간이네? 굶겨 죽일 생각이니? 말려 죽일 생각이야?]
“8시가 넘었는데 밥 먹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지.”
[야! 이렇게 늦게 저녁 먹는 것도 너 때문이잖아. 너. 니가 6시쯤 전화해서 뭐라고 했니? 이사하고 정리하고 배 수배해서 내려가라며? 이 간나 새끼가. 그래서 좆도 없는 년이 좆 뺑이쳐서 이사하고 짐 정리하면서 허덕허덕하는데 니가 또 뭐라고 했니? 1시간 안에 나오라며? 니가 말해 놓고 또 지랄이니? 삼계전복죽도 다 못 먹고 뺑이치게 해놓고 또 지랄이야!]
“아- 그건 미안.”
[미안? 미이안? 미안하다고 말만 하면 다야? 진짜 미안하면 이제 나 밥 좀 먹자.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 아니니? 내레 너보고 밥을 사달라고 했니? 아니면 밥을 같이 먹자고 했니? 그냥 제때 밥 좀 먹고 살자.]
뚝-
김 양이 전화를 끊었다.
허- 마루는 허탈한 심정이었다.
혹시 그 날인가?
마루는 일단 대포폰에 설치한 위치추적 앱으로 김 양이 있는 곳을 찾아 움직였다.
근데 슬슬 열이 받기 시작했다.
“근데 이 년이 그래도 그렇지.”
당장 뒈질 뻔한 마루였다.
근데 고작 밥 때문에 소리를 질러?
상황이 심각했으면 어쩌려고 전화도 일방적으로 끊고.
밥그릇에 수저를 세워줄까?
마루는 일단 신촌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마루도 배가 고팠다.
이년이 뭘 먹는데 그렇게 지랄인지 찾아가기로 했다.
일단 옷부터 사고.
신촌에는 늦게까지 영업하는 옷집이 제법 있었다.
이 시간에 파는 옷들은 제대로 된 정장이 아닌 세미 정장이었지만, 그런 걸 따지면서 고를 여유가 없었다. 마루는 신축성이 좋은 정장 하나를 골라 입었다. 정장을 입고 축구를 하고, 농구를 하는 광고를 한 브랜드였다.
굳이 왜 정장이냐고 한다면, 정장을 갖춰 입은 사람을 범인이나 악인으로 인식하는 비율이 적다는 어떤 심리조사 결과가 떠올라서였다.
구두와 양말, 팬티까지 전부 새로 산 마루는 서류 가방까지 하나 챙기고. 두꺼운 뿔테 안경까지 맞췄다. 렌즈에 색도 그레이로 살짝 넣어, 안경을 끼면 마루의 인상이 확 달라 보였다. 자연스러운 변장에 거울을 본 마루는 만족스러웠다.
완전히 새로 갖춰 입은 마루가 주방용품-잡화 코너로 가, 5천 원짜리 회칼 3자루와 두꺼운 테이프 하나를 샀다.
마루는 이제 익숙해진 화장실 변기에 앉아 회칼을 포장한 폴리 껍데기를 자르고 다시 테이프로 붙여 칼집을 만들었다. 마루가 회칼을 급조한 칼집에 넣었다 뺐다 시험했다.
슥-
척-
좀 빡빡하긴 하지만 어이없게 흘러내리는 것보다 나았다.
자- 이젠 어쩌지?
이번 일로 조직에서는 마루를 이상하게 생각할 게 분명했다.
어쨌든 마루를 잡겠다고 조직원들 15~16명을 보냈는데 어쩌면 다 죽었고, 안 형사도 죽었다. 그 총알 쏟아지는 곳에서 민간인 마루가 상처 없이 탈주해 빠져나왔다.
안 형사가 위치추적기를 달아서, 택시로 포장 납치를 했음에도 마루는 극악의 포장을 풀고 도주했다. 포장 택시 기사는 불타 죽었는데, 민간인 마루는 또 멀쩡하게 탈주에 성공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마루를 데려간다고 한 최 실장과 백 실장도 죽었다. 근데 마루는 살아 있었다. 마루를 스카웃 한다던 홍 과장은 연락이 끊겼다. 김 양은 도망쳤는지, 배신했는지 조직과 연락을 끊고 잠수하고 있었다.
마루가 저 모든 일의 원흉이라는 증거는 없지만, 조직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마루는 확실히 이상한 존재였다. 민간인이 저렇게 엮이고 살 수 있을까? 운이 얼마나 좋으면 저럴 확률이 있을까? 탈주의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마루는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갔다.
이쯤 되면 증거고 나발이고 일단 마루를 잡아 족치자는 분위기가 될 가능성이 컸다.
마루의 계획은 이번 저격으로 어그로를 김 양에게 끌고, 여유만만 유유자적하게 움직일 생각이었는데, 최악은 피했다고 생각했던 일이 더럽게 꼬였다.
슥-
척-
사시미가 뻑뻑하게 뽑혔다가, 조악한 임시 칼집에 뻑뻑하게 들어갔다.
칼을 잡으니 짜증이 좀 가시는 마루였다.
계의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