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 [RUST]-28
김 양도 뭔가 낌새를 챈 것 같았다. 그나마 촉이 있는 여자라서 다행이었다.
마루는 잘 먹어서 윤기가 반질반질 흐르던 김 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기 전 식당 밖으로 끌고 나왔다.
말없이 턱 끝으로 스타박스를 가리킨 마루가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 기순에게 전화를 걸자, 씹혔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가 돼서야 전화를 받는 기순.
[여보세요.]
“나다. 마루.”
[아니 이게 누구시라고요? 친구를 종일 PC방에 박아 넣으시고, 이래라저래라 노비 굴리듯 굴리신 위대한 마루님이시라고요?]
“하- 미안하다. 근데 너밖에 없네. 지금 의지할 사람이.”
그 말에 수화기 저편 기순이 숙연해지는 느낌이었다.
[지랄도 풍년이네. 어디서 말발로 조지려고, 씹새 분위기 잡지 말고 말해. 이번엔 뭔 리퀘스트냐? 뭔 거창한 심부름인데 혓바닥이 길어?]
그래. 이런 새끼였지. 마루도 픽- 웃었다.
“그건 아니고, 너 요트 동아리였지?”
[맞아. 심지어 이 몸은 요트 자격증까지 있다는 말씀. 더해서 인천에서 제주까지 장거리 주행도 왕복 5번이나 했고, 부산에서 인천까지도 3번이나 왕복한 경력자란 말씀.]
“씨발 기순아 네가 날 살렸다. 형이 뭘 해줄까? 두 손 무겁게 현찰로 줄까?”
[왜 또 오버하고 난리야. 무슨 일인데?]
“하- 내일이나 늦어도 3~4일 안쪽으로 일본에 가야 할 상황이 됐다.”
[뭐? 미쳤냐? 오늘 새벽에 일본에서 탈출해 놓고 다시 일본 간다고? 지금 일본 지진으로 개판인데? 그냥 개판이 아니라고 완전 씹창 아포칼립스 터졌는데, 간다고? 뉴스도 안 봐?]
마루는 진이 빠진 얼굴이 됐다.
“일본만 좆 된게 아니라, 내 인생도 만만치 않게 좆 됐거든. 하아- 인천에서 부산까지 운행 가능한 요트면 좀 큰 요트겠네? 그거 좀 빌릴 수 없겠냐?”
[10월 중순이라 겨울 낚시 전까지는 좀 여유가 있긴 있는데, 가을 낚시도 제법 많이 해서. 그보다 요트 빌리는데 그냥 렌트카 생각하면 안 된다. 존나 비싸요. 요트 렌트비.]
“현찰로 꽂아준다고 하고 두 달 렌트하는 걸로 해서 좀 해주라.”
[미친. 이삼일 길어야 일주일 렌트하는 요트를 두 달? 진짜냐? 실화?]
“일본에 들렀다가, 캐나다 아니면 미국 서부까지 가려고.”
[와 씨발- 너 돌았구나? 그렇게 장거리 항행하려면 요트가 존나 100ft(대략 30m)급은 돼야 하고, 요트 다룰 줄 아는 사람도 3~4명은 있어야 할 텐데? 다큐 같은 데서 혼자 대서양 횡단했다 태평양 건넜다. 그런 거 전부 지랄이다.]
“그냥 너랑 나, 아- 한 사람 더해서 3명이 3교대로 갈 수 있는 건 없냐?”
[나 혼자만 요트 경험 있고, 나머지 2명은 깍두긴데, 일본 찍고 미국? 뭔 뉴투브를 봤는데? 너 그런 거 보고 따라 할 생각이라면 절대 반대다. 장거리 항행 진짜 위험한 거라고. 그 누구야 혼자 배낭여행하고 다닌 여자. 바람의 여자인가 그 사람. 그거 보고 배낭여행 따라 했다가 돌아오지 못한 여자들을 트럭에 담자면 덤프트럭도 부족할 걸.]
“나도 아는데, 지금 내가 좆된 상황이라서 다른 방법이 없다. 비행기를 타고 일본 갔다가 일본에서 미국이나 캐나다 가는 건 불가능하잖아.”
[그렇지. 당장 일본에서 우리나라로 오는 것도 이젠 힘드니까.]
“자세한 이야긴 이따 새벽이든 내일이든 만나서 하고. 아- 그러고 보니까 너 키우는 고양이 캐쉬. 걔 다니는 동물병원 있지?”
[있지.]
“거기 동물병원 원장님 실력 좋아? 수술도 직접하고 그래?”
[그럼, 거기 원장님 실력 짱 좋지, 시설도 좋고 심야 응급 수술도 하시고 그래.]
“엑스레이 큰 거랑 그런 거 다 있다고?”
[엑스레이가 뭐냐 엑스레이가, CT랑 MRI도 있다. 그거 말고도 초음파, 내시경 어지간한 사람들 검사하는 기계는 다 있다. 요즘 동물병원들은 시골 후진 병원보다 시설 좋은 곳도 많아.]
마루의 표정이 한결 풀렸다. 지금부터는 무조건 최악을 가정하는 게 맞았다.
“그래 거기 위치랑 전화번호 알려줘. 그리고 네 이름으로 응급 신청도 좀 해주고”
[뭐? 내 이름으로? 아니 되긴 하는데. 너 반려동물 키우지 않잖아.]
“오늘 점심쯤 하나 주웠는데, 오른쪽 앞다리 병신 될 거 같아서 급히 좀 치료해야 할 상황이다.”
[뭔. 교통사고 난 길냥이냐? 고양이 키워서 아는데···, 캐바캐지만 대부분 고양이 진짜 냥아치다. 그게 매력이긴 한데···]
고양이에 대한 예찬인지 푸념인지, 회한인지 모를 설교를 5분 넘게 듣고 나서야 동물병원 번호와 위치를 알려준 기순이었다.
마루가 기순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마친 뒤, 김 양이 기다리고 있는 스타박스 주변을 배회했다. 양복을 입었거나, 특히 검은 정장이거나. 배달 오토바이가 한 곳을 배회하고 있는 건 아닌지, 손님을 태우지 않고 ‘예약’ 걸어 놓고 대기하고 있는 택시는 없는지 확인했다.
다행하게도 딱히 걸리는 게 없었다. 그래도 마루는 김 양이 앉은 뒷좌석으로 갔다. 등을 마주 댄 채, 모르는 사람인 척 냅킨을 넘겼다.
-대충 감을 잡았겠지만, 위치추적이나 도청당하고 있을 가능성이 커-
-그러니까 여기 적힌 주소로 가, 내가 먼저 택시를 타고 갈 테니까, 넌 대중교통 이용해서 가도록 해.-
-병원 정문 근처에 들어가지 말고 있어, 거기서 만나-
김 양은 마루가 준 냅킨을 보고 창백하게 질렸다.
회사가 자길 추적하고 있다는 소리 아닌가?
김 양도 나름 CCTV 생각하면서 이동했고, 안 형사 정리할 때도 현악기 학원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작업했다. 이동도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추적을 회피한다고 했었다.
근데 나한테 도청 장치가 붙었다고? 어디에? 어떻게? 어디서? 거기에 위치추적기까지 달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마루 놈은 어떻게 알았지? 아니, 위치추적에 도청 장치까지 한 회사에서 왜 날 잡아가지 않은 거지? 마음만 먹으면 진작 잡았을 것을?
김 양은 묻고 싶은 게 많았다. 하지만 정말 도청 장치가 달렸다면, 말하는 건 병신 인증이나 마찬가지.
[로얄블루 동물병원]
근데 왜 여기로 가라는 거지?
김 양은 불안하고 이상했다.
======
======
마루는 동네 놀이터 뒤쪽 배수로 부분을 뒤적였다. 가림망을 들어 올리고 흙을 좀 털어내자, 두껍게 포장된 시커먼 봉투가 살짝 드러났다. 일본에서 탈주하면서 가져온 9만 불 가까운 현찰이 있었다.
기순이 없었으면 정말 힘들었다. 기순이 놀이터에 묻어둔 마루의 휴대폰을 가지고 PC방에서 죽쳤기 때문에, 알리바이가 생겼다. 거기에 돈도 묻어 줘서, 마루의 집을 탈탈 턴 경찰들에게 걸리지 않을 수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김 양에게 배를 수배하라고 했는데, 도청기나 위치추적기가 붙었다면 그대로 걸렸을 것이 분명했다. 기순이 요트 동아리에 요트 자격증까지 있다는 건 정말 천운이었다.
기순에게 사륜구동 오토바이 2대, 제트스키 1~2대, 물과 연료까지 넉넉하게 적재해서 북미까지 항행 가능한 요트를 수배해 달라고 했으니. 2~3일 안짝에 수배할 수 있으면 됐다. 월드 축산에서 챙겨온 돈이면 넉넉하게 챙길 수 있지, 싶었다.
일본에 가서 바닥에 깔린 돈을 건지면, 액수는 더 늘어날 테니 돈 걱정은 없지 싶었다. 마루는 신분을 만드는 김에 기순의 것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PC방으로 향했다.
======
======
[로얄블루 동물병원]
깔끔한 9층 빌딩에서 1~2층을 통으로 사용하는 동물병원이었다. 기순이 예약했기 때문인지, 응급진료 중이라는 간판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마루는 동물병원 근처에서 진자운동을 하는 김 양을 봤다. 스타박스에 들어가기 전에 했던 것처럼, 주변을 살폈다. 10분 정도 주변을 살핀 뒤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마루가 김 양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가 먼저 병원으로 들어갈 테니까. 들어가서 나오지 않으면, 10분 뒤에 들어와]
[근데 왜 동물병원이야?]
김 양이 바로 문자를 보냈다. 구구절절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그건 나중에 설명하고, 농아 알지? 말 못 하는 사람. 그걸로 컨셉 잡고. 입 꾹 다물고 무조건 울먹울먹한 눈빛으로 의사를 쳐다봐.]
[아니 왜?]
[도청 장치 있으면? 네가 말하는 거 조직이 다 듣게 하려고? 그냥 확인 좀 하자. 도청장치고 위치추적기고 없으면 그때 말해도 되잖아. 시간이 없다고 시간이.]
[알았어.]
[다시 말하지만 넌 벙어리야. 귀머거리고. 알았지?]
[ㅇㅇ]
김 양에게 다짐받은 마루가 동물병원으로 들어갔다.
찰스 박, 그러니까 동물병원 박 원장은 난감했다. 마당발 단골고객인 김기순씨가 전화해서 말하길, 절친한 친구가 교통사고를 당한 길고양이를 데려갈 것이라고 해서 응급 수술 준비를 하고 기다렸는데.
사고당한 길고양이는 없고, 멀쩡한 청년이 쑥 들어와서는 고개부터 숙이는 게 아닌가?
“아 연락은 미리 받았는데요? 교통사고 난 길고양이는 오다 떠났나요?”
박 원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애묘인들에게 고양이가 죽었다니 직접적으로 그러는 것보다 고양이 별로 떠났냐고 간접적으로 묻는 방식이 좋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선생님. 제가 듣기는 듣는데, 사고로 말을 못 하게 돼, 이렇게 종이에 인쇄를 해왔습니다. 선생님. 제 부인 좀 부탁드립니다.]
마루가 인쇄한 종이 가운데 하나를 꺼내 박 원장에게 내밀었다.
“네 부인이라고요?”
종이를 받은 박 원장이 이게 뭔?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반려동물을 자식으로 부르는 사람들은 넘쳤다. 가끔 여자들 가운데는 중형견 수컷을 자기로 부르는 사람도 있었고, 고양이를 부인이나 남편, 애인으로 부르는 사람도 없지는 않았다.
“흠- 아닙니다. 아니고요. 그래서 어디가 아픈가요?”
박 원장의 물음에 마루가 주섬주섬 종이 뭉치에서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오른팔을 다쳐서, 봉합하고 깁스를 했는데 안에 뭔가 들어간 채 봉합이 된 거 같습니다.]
박 원장은 기계적으로 끄덕였다. 말 못 하는 고양이가 얼마나 괴로웠을까.
“어서 데려오시죠. 일단 깁스 풀고 엑스레이 찍을 준비해 놓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마루가 크게 굵은 폰트로 적은 종이를 보이며 머리와 허리를 푹 숙였다.
잠시 뒤, 박 원장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순둥순둥 아방 귀염스럽게 생긴 단발 여자가 울먹울먹하는 눈동자로 박 원장을 보고 있었다.
“아니 선생님. 고양이가 아니라 사람이지 않습니까?”
마루가 들고 있던 인쇄물 뭉치를 뒤적이다. 길게 적힌 종이를 꺼내 들었다.
[부인은 말을 못 하고 듣지도 못하는 농아입니다. 낮에 병원에 갔더니 말 못 하는 사람이라고 이렇게 대충해놓고 내보냈습니다. 119에 문자로 문의했더니, 코로나 사태라고 PCR 검사하고 하루 동안 기다리라고 합니다. 당장 죽을 상황 아니면 응급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런 상황입니다. 아무리 듣지 못하고, 말 못 하는 사람이라지만 뭔가 팔 속에 박혀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 동물병원에서 진료는 불법입니다. 안타깝지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찰스 박 원장은 냉정했다. 불쌍하다고 돕다가 간판 내릴 수도 있었다.
[치료한 병원에 전화했더니, 잘못 없다고 이상 없다고, 증거 있냐고? 하더군요. 큰 거 바라지 않습니다. 그냥 엑스레이 찍어주시고. 팔에 뭐가 있다는 것만 확인하면, 확실히 증거가 있으니까 바로 신고를 하든 어떻게 하든 대책을 세울 수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제발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김 양은 마루가 꺼낸 종이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울먹울먹 주루룩 선즙필승을 시전했다.
박 원장이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엑스레이만 찍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마루가 굵은 글씨로 크게 적은 종이를 꺼내 들었다.
박 원장이 전동 기구를 이용해 깁스를 잘라 냈다. 마루는 그걸 도왔다. 잘라 낸 깁스를 치우려는 박 원장에게서 넘겨받아, 김 양의 몸통 주위에 두는 마루였다.
지이이잉-
엑스레이 돌아가는 소리가 지나고, 모니터에 김 양의 팔이 보였다.
“흠. 이게 뭐죠?”
박 원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확실히 김 양의 오른팔 엑스레이 사진에 뭔가 있었다.
좀 큰 알약 크기의 뭔가가 박혀있었다.
계의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