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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스트-29화 (29/280)

러스트 [RUST]-29

뭘 이딴 걸 넣었지? 의료기구로 보이지는 않는데?

찰스 박 원장은 황당했다. 대체 어디 병원에서 이랬는지 어이없었다. 그냥 엑스레이만 찍어 확인시켜 주고 보내려고 했는데, 그 병원이 괘씸했다.

“이거 엑스레이 사진 출력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박 원장이 마루를 돌아보며 말하는 데, 마루가 100달러 지폐 뭉치를 꺼내 들고 박 원장에게 고개를 푹 숙이며 인쇄물을 내밀었다.

[선생님 부족하지만 1만 달러입니다. 저희가 월요일 날 병원에 간다고 해서 바로 치료받을 수 있겠습니까? 엑스레이 사진이 있어도 자기 병원에서 들어간 게 아니다. 증거 있냐? 어디 가서 넣고 돈 뜯으려고 그러는 건 아니냐? 그러면서 어디서 엑스레이 찍었냐고 그러겠죠.]

“······.”

[선생님. 말 못 하고 듣지 못하면 정말 많이 힘들더군요. 부디, 제 부인이 하루라도 빨리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말 못 하는 짐승들도 치료해 주시는 선생님께서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부디 말도 못 하고 그저 고통을 참아내는 이 사람 제발 도와주세요, 부디 부탁드립니다.]

“······.”

김 양은 선즙필승을 넘어 세상 서럽게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박 원장을 봤다.

그 모습에 박 원장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마루의 말이 일리 있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그냥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돈이었다. 심지어 현찰에 무려 달러였다. 일본 대지진 때문인지 달러가 치솟고 있는 상황.

슬쩍 엑스레이와 김 양의 오른팔 봉합 부위를 보니, 부분 마취하고 10~15분이면 뜯어서 이물질 제거하고 봉합까지 가능해 보였다. 빠르면 10분 안쪽에도 가능할 거 같았고.

박 원장은 마루가 내민 종이를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10분에 1만 불이면···. 나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김 양은 오른팔 봉합한 부위를 뜯었다, 다시 꿰맸다.

마루는 뜯어낸 깁스와 김 양의 오른팔에서 빼낸 작은 캡슐을 뽁뽁이로 꼭꼭 포장했다.

“여기 앱에서 제주도 호텔 목록 검색해. 공항에서 먼, 외딴 호텔 있지? 거기 2박 예약하고, 지금 포장한 짐 받게 해.”

“으- 응-”

김 양이 고분고분 말을 들었다.

예약 주소를 확인한 마루가 꽁꽁 포장한 것을 20인치 캐리어에 재활용 의류랑 같이 넣은 뒤, 인천공항 1 라운지에 있는 국내선 여행짐 운송센터를 향해 퀵 서비스를 보냈다.

김 양이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어- 으 음- 고마워.”

충성심 제로, 생존력 충만인 김 양이지만 나름대로 염치는 있다고 자부하던지라 고맙다고 말했다.

처지를 바꿔서 생각하자면 자기는 마루를 버리고 갔을 것이다. 그게 더 유리하니까. 회사는 위치추적기를 달아 놓은 사람을 쫓아갈 테고 그만큼 자기는 안전해질 테니까.

‘간나새끼··· 백정이래도 의리는 있는 기야?’

김 양은 이런 게 조금 낯설기는 했다.

마루도 자신을 이용해 먹을 게 있으니까 도왔겠지만, 장애 있는 부인 연기를 폭풍같이 했던지라 기분이 삐리리-했다. 인쇄한 종이에 쓴 글도 그렇고.

“됐어. 다 나 좋자고 한 건데.”

김 양의 조그마한 감사에, 무뚝뚝하게 대답하는 마루.

이게 그 드라마에서 가끔 나온다는 츤츤? 그런 건가? 드라마 보면 그런 애들 잘 죽던데. 김 양은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지금 같은 분위기면 마루의 시체를 보면서 엉엉 울어줄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냥 기분이 삐리리 했다.

마루는 진이 다 빠졌다. 진짜 김 양의 오른팔에 뭔가 있는 걸 보고나니 이 새끼들이 그냥 조폭이 아니구나. 마약 파는 약쟁이들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같은 데 보면 타락한 경찰, 마약 조직, 뭐 이딴 거 등장하는 게 제법 있지 않은가? 그러니 안 형사 같은 애들을 봤을 때도 막 아주 미칠 지경이고 그러지는 않았다.

그냥 ‘아 재수 없어. 또 똥이냐?’ 이 정도 감상이었다면, 작업장 하나 날려버릴 장치를 해둔 것 하며, 안 형사가 위치추적기 붙인 거, 포장 납치 택시 타고 삼도천 드라이브했던 거, 그리고 지금 김 양 오른팔 도청기, 위치추적기를 생각하면 이게 그냥 단순히 돈 많은 조직이라고 넘어갈 수 없었다.

“그러니까 그 회사라는 게 대체 뭘 하고, 어느 정도 규모냐? 혹시 본사가 미국 버지니아 있고 그래?”

김 양은 ‘버지니아가 어디래?’ 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미국 버지니아에 있는 유명한 회사. 몰라? 그런 회사로 진짜 유명한 동네인데.”

도리도리 김 양이 고개를 저었다.

“버지니아에 있는 미국 애들 조직인데, 걔들이 주로 자기들을 회사원이라고 하고 자기들이 일하는 곳을 회사라고 불러. 첩보, 교란, 암살, 밀수, 마약 그쪽 전문이고. 도청기랑 막 위치추적기 달고 그러는 거 보니까. 그 회사가 떠올라서. 너도 회사라고 그랬잖아. 처음에는 운이 나빴나 싶었는데 지금까지 겪은 일을 생각해 보면 우연은 아닌 거 같고 일 터지는 사이즈도 그렇고.”

김 양은 모르겠소요 표정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그냥 아시아에서 규모 있는 회사인데···. 홍 과장이 남미랑 북미에 진출한다고 그랬고, 그래서 나도 스카웃하고, 회사가 이름처럼 글로벌하게 나갈 때가 됐다고 그러기는 했는데 미국 버지니아까지는 잘···.”

아시아 지부가 반역을 노리는 건가? 본사를 계승하려고 하는 건가? 아니지 이건 너무 나갔다. 진짜 버지니아 회사였으면 더 작은 장치를 썼을 것이다. 요즘엔 쌀알 만한 칩도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진짜 작심하면 인공위성도 동원하는 게 미국 스케일이고. 그건 아닌가? 일반인 A씨가 칼을 좀 잡았다고 인공위성까지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버지니아에 본사가 있는 회사는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 했다. 그렇더라도 지금까지 터진 일을 보면 단순한 조폭이 할 사이즈는 지났다.

‘사건이 이렇게 크게 터졌는데.’

마루가 12시 자정 뉴스를 켰다.

월드 축산 화재라든가, 서강로 택시 전복 화재 사건, 반지하 살인사건, 총기 난사 사건으로 조폭 15명 이상이 사망한 사건까지, 굵직한 사고가 넘쳤으니 뭔가 하나는 나올 것이다.

마루의 기대와는 달리 메인 뉴스는 일본 대지진 뉴스였다.

[···현재 일본의 도쿄와 그 인근 현은 사실상 무정부 상태입니다. 수천 곳이 넘는 곳에서 화재가 발생했고, 건조한 가을 날씨에 바람까지 붙어 대규모 화재로 번진 곳이 수십 곳이 넘습니다. 도로와 철도가 파괴된 터라 119구조대도 움직이지 못하고, 119구조대 건물마저 붕괴되 사실상 방재능력을 상실한 지역도 많습니다.]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은 지역에서는 자경단을 조직해 외지인들과 외국인들을 강제로 구속, 폭행했다는 내용이 SNS를 통해 퍼지고 있는 가운데···]

[외국인이 대화재의 원인이라는 괴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괴담이 떠돌아 흉흉한 분위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외국인에 대한 테러 사건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임시 일본 정부에서는 국제사회의 구호와 원조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지진 전문가들은 도쿄 대지진의 여진이 언제든 발생할 수 있어, 도쿄 수도권에서 피난할 것을 경고했습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번 도쿄 대지진이 남방 플로트 대지진 그러니까 난카이 드래프트 지진을 연쇄적으로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습니다.]

[오늘 국회에서는 일본 대지진 피해 지원방안과 긴급 구호예산 편성 동의에 실패했다죠?]

[그렇습니다. 일본에서 피난하는 난민들에 대해 무조건 무제한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는데요. 이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당시 대통령인··· ]

[일본 대지진의 영향으로 부산과 수도권, 대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아파트 가격이 급등하고 있다는 주장이 나왔는데요. 외국인들이 인프라가 잘 구축된 곳에 부동산을 구입해, 한국 영주권을 얻으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 실제로 그렇습니까?]

[시기가 맞지 않지만 현재 상황은 그렇습니다. 부산의 한 아파트 가격을 예로 들면, 2018~2019년도 84m² 평수로는 30평대 아파트 가격이 4~5억 정도에 거래됐었는데요. 지금은 15억을 호가하고 있습니다. 재건축 호재 때문이라고 알려졌지만, 그 이면에는 이전부터 외국인들의 매수세가 강했기 때문이라는 전문가의 의견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전에도 외국인들의 매수세가 강세였는데, 이번 지진으로 더욱 강세가 될 것으로 예측하고 시장이 반응하고 있다는 것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일본 재난 보도가 된 직후부터 매물이 거의 다 빠졌고, 남은 매물도 호가를 올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거의 20분에 걸쳐 일본 재난 특집 방송을 하는 것을 보자, 마루는 여기가 한국인지 일본인지 모르겠다 싶었다. 인터넷 포탈에서도 대부분 기사는 일본 재난이었다.

서울에서 총기로 조폭이 15명 넘게 죽었는데, 메인으로 기사 하나 없다니. 이게 진짜 실화인가 싶었다.

아니면 조직이 언론이나 정부까지 끈을 대놨거나. 아예 조직이 대기업, 정부의 어두운 면일 가능성도 있었다. 미국 버지니아에 본사가 있는 어떤 회사처럼.

씨발

저절로 욕이 나왔다.

마루가 TV를 끄고 일어섰다. 최대한 빨리 기순이랑 만나서 계획을 잡든 해야 했다.

“뭔 일 있으면 탈출하고, 네가 배 알아보는 건 그만둬 우리가 통화 했던 내용은 도청기로 다 들어가서 아마 조직에서 대기하고 있을 가능성 있으니까.”

“그럼. 배는 어떡하고?”

“배는 내가 나가서 알아볼 테니까. 넌 여기서 좀 쉬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 무인 모텔 같은 곳이면 그나마 괜찮지 싶고. 마스크를 쓰니까 어쩔까 싶기는 한데, 안경이나 가발 같은 거 있으면 그거 더 하고.”

김 양이 꾸벅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순순한 느낌이라 마루도 기분이 좀 그랬다.

‘저렇게 순순한 년이 아닌데.’ 그렇지 않아도 순둥 아방한 얼굴이었는데 순순하니까 백치미까지 얹어진 느낌이었다.

“그럼 간다. 뭔 일 있으면 문자로 해. 나도 그럴 테니까.”

“응.”

그러면, 그렇지

김 양의 짧은 대답에 마루가 하-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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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탈출할 때는 기순에게 최대한 숨겼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하더라도 사람 잡고 도망치는 데 그걸 그대로 이야기하기엔 그랬다. 하지만 한국에 와서 별 거지 같은 일들을 연달아 겪고 보니, 어느 정도까지는 말하는 게 맞다 싶었다.

일단 나름 한다고는 했다. 기순이 드러나지 않게 통화는 공중전화를 주로 이용했으니까. 그래도 기순이 일본에서 14일 동안 격리되면서까지 마루를 도운 기록을 없앨 수는 없었다. 그 미친 조직이 마루를 각 잡고 조사하면 기순이 드러날 수밖에 없어 보였다.

‘기순이도 위험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냥 일본 마약 야쿠자한테서 탈주하려고 했을 뿐인데, 한국 오자마자 개판 나버렸으니···.

“정말 더럽게 엮였네?”

“그래.”

“네가 일했던 월드 축산이 너를 쪼기 시작했고?”

“하아- 그래. 그래서 오늘 뒈지는 줄 알았다.”

기순의 표정이 구겨졌다.

“아- 좆됐네.”

“맞아. 네 말이 진짜 맞더라. 조폭이 그냥 영화 속 애들이 아니더라고, 첨단 조직? 그냥 무슨 버지니아 그 회사 한국 지부 보는 줄 알았다.”

기순의 얼굴이 누렇게 떴다.

“그 버지니아? 미국 형님들이 변비 생겼을 때, 자주 애용한다는?”

역시 기순은 바로 알아들었다. 마루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와- 놔- 지금 너랑 엮인 조폭들이 버지니아 그 회사에 비빈다고? 레알? 혼또?”

“너도 대충 내가 좆같이 엮였다는 건 짐작하고 있지 않았냐?”

“대충 눈치는 까고 있었지, 휴대폰 동네 놀이터에 묻어 놓지 않나, 네가 자주 입던 옷 입고 PC방에 죽치고 있으라고 할 때 딱 감이 오더라. 그거 알리바이 만들려고 한 거잖냐? 현찰도 놀이터에 숨겨 놓으라고 그랬을 때, 진짜 더럽게 엮였나 보다 그 정도 눈치는 있지. 그래서 내가 말했잖냐? 조폭 무시하지 말라고, 영화처럼 덩어리들이 각목이랑 사시미만 휘두르고 그러지 않는다고 했잖아!”

마루가 어디까지 어떻게 말해야 하나 고민하다, 일본으로 배 타고 튀고 신분 다시 만드는 것까지는 말해야겠다. 결정했다. 그래야 기순도 미리 신분 다시 만들어 놓자고 이야기하기 편했다.

“그냥 넘어가나 싶었는데, 조직이 자꾸 엉겨서, 월드 축산에 불 질렀다.”

“뭐? 거기 업장에 불을 질렀어? 조폭이 운영하는 업장 느낌이고 거기 자금 세탁 그런 거 하는 거 같다고 내가 말했잖아?”

“그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돼서, 당장 일본으로 배 타고 튀어야 할 판이 됐다.”

“야 이 미친놈아, 너 일본에서도 야쿠자 업장 불 질렀잖아? 근데 또 질러? 불 지르는 게 본능이냐? 막 조폭이든 야쿠자든 업장만 보면 불을 막지르고 싶어 근질근질해? 한국에 왔으면 조용히 잠수타고 있어야지 왜 또 한국에서도 그 지랄인데?”

누렇게 떴던 기순의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마루는 일단 기순을 진정시키고자 했다.

“아니. 내가 불 지르고 싶어서 지른 것도 아니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씨발, 불 싸지를 생각으로 알리바이 만든 거잖아. 그치? 맞지? 아오- 이 미친 새끼가 내 친구라니! 휴대폰 파묻고, PC방에 짱박아 넣더니. 알리바이 만들어 놓고 내려가서 불 지른 거잖아. 이 또라이 새끼가! 조폭 더럽다고 그렇게 말했으면 엮이지 않게, 조용히 짱박혀서 ‘나 죽었소.’ 해야지 거길 또 왜 불을 질러!”

기순의 발광에, 마루가 특효약을 뿌렸다.

계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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