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스트-32화 (32/280)

러스트 [RUST]-32

제주 샬롯 호텔 복도.

여기저기 피 묻은 흔적이 비명처럼 남아 있었다.

피와 살, 뼈가 꺾인 열기가 복도를 가득 채워 찐득거렸다.

“야- 야쿠자는 야쿠자네. 새끼들 존나 털리면서도 좆같이 가오를 잡네?”

김 실장이 피와 살점이 묻은 작업용 장갑을 풀며 목을 좌우로 꺾고 어깨도 돌렸다. 뚝-하는 소리 없이 자연스럽게 돌아가는 목. 어깨 관절도 잘 돌아갔다. 살풀이를 시원하게 했더니 관절도 시원했다.

“샬롯에서 야쿠자들 데려다 멀티 까려고 한 것까지는 이해가 돼.”

“······.”

스트레스가 풀렸는지 김 실장은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근데 말이지, 내가 애들 왕창 데려오지 않고 한 팀이나 두 팀 정도만 데려왔으면 당하는 건 우리였겠지?”

“그렇습니다.”

안경을 언제 고쳤는지 테이프로 부러진 부분을 때운 정보 담당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확실히 그랬다. 김 실장이 김 양을 조진다고 애들 왕창 데려오지 않았는데 시비가 붙었다면 위험했다.

“회사 애들 움직이는 단위를 빠끔하게 아는 김 양이 그걸 몰랐을까?”

“그 말씀은?”

김 실장이 히죽 웃었다.

“씨발년이 자길 추적하는 우릴 담그려고 했다는 거지. 여기 호텔 좋잖아? 방음도 잘 되고, 수십이 뒈져도 깨끗하게 정리하기 편하고, 코로나로 사람도 통제하기 쉽고. 아주 좋지 않아?”

“······.”

확실히 그랬다. 미끼를 던지지 않고, 본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김 양에게 유리한 전장이었다. 소음기를 단 권총이라면 호텔 밖으로 소리가 새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잡히면 죽는다고 생각한 김 양이 폭탄에 수류탄까지 터트리면서 날뛴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사상자든 뒤처리든.

“지랄하고 날뛰는 꼴을 보지 않았다는 건 좋은데, 김 양이 야쿠자들을 이용해서 우릴 제끼려고 했다는 것도 가능한 시나리오잖아? 그게 걸리네. 야쿠자랑 샬롯이 엮여있다면···. 샬롯이 김 양의 뒷배일 수도 있다. 그런 가능성도 있잖아?"

“······.”

"그렇지 않아? 그러니까 우리가 김 양을 미끼로 뒷배를 잡으려고 한 것처럼, 그쪽은 김 양을 미끼로 회사에 타격을 주려고 했다. 이런.”

“확실히. 그냥 지나가긴 어렵군요.”

“이거 재밌게 돌아가네.”

“······.”

한 층에 야쿠자들과 김 양만 방을 잡고 있었다.

코로나 시국이라 텅 빈 객실이 넘치는데 야쿠자랑 같은 층에 여자 혼자 묵는 객실을 넣는다?

넣지 않았으면, 여자가 하필 그 층의 객실을 예약했다는 건데.

17층이나 있는 호텔 층수 중 여기를 콕 찍어서, 하필 딱 주변에 야쿠자들이 묵고 있는 객실을 예약했다. 그래 놓고는 위치추적기가 담긴 캐리어를 방으로 배달시켰다.

객실 문 따고 들어가서 자신이 소리 좀 질렀다고 기다렸다는 듯 몰려나온 야쿠자들, 정말 머리를 잘 썼다.

김 실장의 히죽이던 미소가 점점 커졌다.

소리 없이 웃는 미소. 입꼬리가 점점 길게 찢어졌다.

“김 실장님. 지금 출발해야 비행기 예약 시간에 갈 수 있습니다.”

“그래. 여기는 네가 잘 정리하고. 유 이사님께는···. 뭐 내가 깨져야지.”

이 생각을 말하면 과연 깨질까? 김 양이 샬롯이랑 붙어먹었을 수도 있다는 건데? 그러니까 더 크게 보면 샬롯은 야쿠자들 데려와 멀티를 까겠다고 하고 있고, 거기에 요즘 좀 컸다고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는 크리스털과 연합해서 회사를 노리고 작업 들어가는 중이라는 이야기도 가능한데, 과연?

“아- 몇 년 조용했지, 한 2년 조용했었냐? 한 번 크게 일이 터질 때가 되긴 했어.”

김 실장이 소파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밖에서 직원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김 실장님. 김 양으로 보이는 여자를 찾았답니다.”

“뭐야? 진짜야?”

“지금 확인하려고 2팀 애들이 갔답니다.”

“김 양이면 2팀 하나로는···.”

4명으로 이뤄진 팀 하나로는 부족하다고 말하려던 김 실장이, 씨발-하고 욕했다.

나머지 애들을 죄 끌고 제주도를 내려왔네?

“하 젠장- 이걸 여기서 이러네.”

만약 시나리오가 진짜라면? 샬롯이 김양의 뒷배라면? 제대로 돌아가는 무력 전담 부서는 꼴랑 둘이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거의 전부 제주도로 내려온 상황. 자기를 물 먹이고, 김 양은 뭘 하려는 걸까? 아니 샬롯이랑 크리스털이 노리는 건 뭘까?

“아- 씨발. 상황이 진짜.”

이기영 씹새끼한테 먹이 주고 싶지 않은데, 이런 정보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밥그릇 챙기겠다고 입 닦은 걸 걸리면 진짜 좆됐다.

김 실장의 표정이 지랄 같게 변하는 걸 본, 정보 담당이 나지막하게 권했다.

“일단 공항으로 가시면서 생각하시죠.”

“그래. 아- 미치겠네.”

“아쉽더라도 유 이사님께 연락하시는 게 좋지, 싶습니다. 애들도 의심된다고 했지 김 양이 아닐 수도 있고요. 설령 진짜 김 양이라면 2팀 애들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뒷배를 알려면 일단 목숨줄은 붙여서 잡아야 하는데 김 양을 생포하기가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겠습니까? 아쉬우시겠지만 좋게 넘기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보 담당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김 실장도 그 표정이 의미하는 걸 이해했는지 지랄 같게 구겨졌던 인상이 좀 펴졌다.

김 양이라면 이 실장 그 새끼 힘도 좀 빼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년을 생포하려면 압도적인 무력을 보여줘야 하는데, 이 실장 그 칼잡이가 그럴 깜냥이 될까?

직원들 갈아 넣어서 잡으면 실적 떨어지는 건 당연한 거고. 어설프게 뭘 해보겠다고 깝치다간 대가리에 구멍이 뚫릴 게 뻔했다.

자기가 김 양 생포하겠다고 방탄복을 기본으로 이런저런 장비 맞추느라 얼마나 고생했던가? 당장 이 실장에게 정보가 넘어간다고 해도 방탄복과 이런저런 장비 없이 김 양에게 접근할 수 있을까?

“뭐 생각해 보니 괜찮겠네. 우리만 깨끗하면 그것도 또 그림이 나오지 않으니까. 유 이사님께는 내가 보고할 테니까, 여기 일만 처리하고 바로 올라와.”

“네.”

김 실장이 정보 담당의 배를 툭-쳤다.

“씨발. 진작 좀 이러지. 어야- 먼저 간다.”

“올라가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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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에 총과 총알을 꾹꾹 넣은 뒤, 탄띠 조끼를 입은 김 양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저 지금 나가려고 씻던 중이라서요.”

방금 뭘 하고 있었다고 했으니, 그게 씻는 것으로 변했을 뿐이다.

[오래 걸리시나요? 여기 형사님들 계속 입구에 세워두기가 좀 그래서요.]

그래서 어쩌라고?

김 양은 코웃음 쳤다. 진짜 형사든 아니든 여성 전용 고시텔이라며?

형사라는 것들이 남자였다면 막았어야지, 들여놓고 어쩌라고.

“제가 씻는데 좀 오래 걸려서 빨리 씻어도 30~40분은 걸릴 거 같아요. 머리도 감고 말려야 해서요.”

김 양이 권총을 점검했다.

철컥-

발터 P22의 슬라이드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탄창도 부드럽게 빠지고 들어가고.

역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총기 관리하는 건 좋은 습관이었다.

김 양은 양쪽 허리에 2자루, 겨드랑이 사이에 2자루 이렇게 4자루와 탄띠 조끼에 탄창 10개를 주렁주렁 매달았다. 가벼운 발터 P22였지만 4자루에 탄창 10개는 확실히 묵직했다.

본래는 2자루만 썼지만, 오른팔이 이래서 탄창을 빨리 갈 수 없으니 어쩌겠나? 더 많은 총으로 때울 수밖에.

[그냥 머리에 수건 두르시고 잠깐 나오시면 안 될까요? 다른 분들이 불편해하셔서.]

김 양은 살포시 무시했다.

“저 지금 거품이 흘러서. 얼른 씻고 나갈게요. 좀 기다리라고 하세요.”

계속 기다리면 더 좋고.

슥- 김 양이 주변을 찍은 사진과 항공사진을 휴대폰으로 확인했다.

항상 이동 경로를 확인하는 습관이 또 도움됐다.

어디로 가지? 배를 수배한다고 했는데.

이왕 움직일 거, 이동 거리를 좁히는 게 좋았다.

김 양이 ‘거기 어디야?’, ‘배는 구했고.’ 등의 문자를 쓰고 지우고를 반복했다.

지금 상황을 말하면 버리지는 않을까? 그래도 상황을 말해야 했다. 괜히 숨겼다가 푹! 찍! 엔딩은 사양이었다.

[나 쫓기는 거 같음.]

김 양이 문자를 보낼까 말까 고민하다. 꾹 전송을 눌렀다.

문자 확인 표시가 사라지며 바로 답문이 왔다.

[어딘데?]

[그, 총하고 총알 챙기려고 얻은 고시텔]

김 양은 소심하게 총이랑 총알 핑계를 댔다.

[그게 어디야? 위치.]

문자가 딱딱했다. 개놈. 김 양이 문자를 노려보면서 모자를 꾹 눌러썼다.

[영등포]

[영등포역이랑 가까워?]

[택시 타면 5분? 밀려도 10분?]

김 양의 문자가 읽히기가 무섭게 답문이 왔다.

[택시는 아니야. 택시는 절대 타지마. 대중교통 이용해서 가고. 부산 가는 열차 타.]

[나 쫓긴다니까.]

뭔가 핀트가 맞지 않는 거 같았다.

[도청기, 위치추적기 뺐으니까. 따돌리면 돼.]

[나 쫓긴다고.]

탈출을 어떻게 하고, 추적을 어떻게 따돌리라고 힌트를 주든지, 하다못해 응원이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꼭 도와달라고 해야 하나?

[여기 부산이다.]

그러니까 이건 도와줄 수 없으니 알아서 하라는 거지?

김 양이 마스크까지 쓰고 백팩을 들쳐 맸다.

[알아서 한다?]

[그래.]

[잡히지만 마]

OK.

내 책임 없음.

전부 백정 놈 책임.

서울 피바다는 전부 백정탓

회사 직원들 골로 가는 것도 전부 백정탓

원한은 전부 백정이 가져가라.

수류탄도 한 2발 꺼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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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 관리인이 복도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덩치들을 막고 있었다.

“아니, 형사님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된다니까요. 여기 여성 전용 고시텔이라서, 남자분들은 들어오실 수 없다니까요.”

“범인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지금 수사 방해하는 겁니까?”

관리인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인터폰을 눌렀다. 30분이면 다 씻는다더니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1102호가 정말 범인일까? 조그맣고 순둥하게 생긴 단발머리 여자가 떠올랐다. 무슨 범죄를 저질렀길래 덩치가 큰 형사 3명이 출입구를 막고 있을까.

나가요 쪽이라면 여자 경찰이 왔을 텐데, 남자 형사가 왔으니까 강력범? 마약? 관리인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덩치 큰 사내들이 복도를 막고 있으니, 고객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인터폰에 불이 났다.

[그냥 남자들이 아니라 형사들인데요.]

[조사할 사람이 있다고.]

사태가 더 악화됐다. 형사들이 찾아올 정도로 위험한 범죄자가 있다는 것 아닌가? 벌써 몇 명은 환불해 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아니, 범죄자라고 확정된 게 아니라요. 조사만 한다고···.]

쏟아지는 민원을 견디다 못한 관리인이 다시 1102호를 눌렀다.

띠리- 띠리- 띠리리-

인터폰을 받지 않았다. 그것을 우묵하게 지켜보던 사내가 관리인을 향해 얼굴을 쑥 들이밀었다.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야? 시간 끌려고 그러는 거지?”

“네? 시간을 끌어요?”

그렇지 않아도 분위기 험악한 사내가 인상까지 쓰자, 관리인은 기절하고 싶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몸통을 절반가량 밀어 넣은 사내가 인터폰 재다이얼을 눌렀다. 1102호라는 표기가 액정에 떴다.

“1102호.”

뒤에 있던 두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리 없이 복도로 진입했다. 세탁실에 있던 여자들이 꺅-소리를 지르며 호들갑을 떨었다.

‘망했다.’

잘리는 것 확정이었다. 관리인이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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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경찰입니다. 김희영씨 잠시 나와보십시오.”

쿵-쿵-

“김희영씨 안에 계신 것 알고 있습니다. 문 열어보세요.”

반응이 없었다.

문을 두들기던 사내가 뒤따른 남자와 눈빛을 교환했다.

끄덕.

덩치 큰 남자가 문고리 부분을 발로 걷어찼다.

쾅! 쾅! 콰직!

문짝과 문고리가 박살 나면서 터지듯 문이 열렸다.

옆에 대기하고 있던 남자가 한 손으로 테이저건을 들고, 다른 팔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방탄복을 믿고 방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낮은 소음과 함께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에 반사적으로 소리 질렀다.

퉁! 퉁!

끄악

종아리와 무릎 관절에 박힌 총격으로 앞으로 쓰러지는 남자의 눈에 보이는 건 총구였다. 침대 매트리스를 길게 세워놓은 틈에 몸을 숨긴 김 양이 쓰러진 사내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아··· 잠···”

퉁!

계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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