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스트-41화 (41/280)

러스트 [RUST]-41

마루는 김 양이 보낸 문자를 보고 생각했다.

일단 쿨하게 그러라는 것으로 보아, 아주 심각한 상황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엮일 가능성이 컸으면 ‘언제 오냐?’ ‘밤에 오냐?’ 등 뭔가 초조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뭐. 늦는다고 했으니, 알아서 하겠지.’

만약 회사랑 엮일 기미가 보였다면, 대책 없이 모른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마? 아니겠지.’

김 양이 좀 어리숙한 면이 있지만 멍청한 건 아니었다. 결단력 있고, 눈치도 빨랐다. 그렇다는 건 진짜 모르겠다는 소린데. 대체 밥 약속을 누구랑 했길래···.

엮이기 싫어서 늦는다고 했지만, 일이 없는 건 아니었다. 우선 액수를 모를 정도로 실어놨던 냉동탑차. 그거 챙겨와야 했다. 돈이랑 금괴, 외화도 그렇지만 장비도 중요했다.

총화기류 방호구류를 비롯해 도검류에 비상식량까지. 냉동탑차가 가득 찰 정도로 때려 넣었는데 그걸 버리고 갈 건 아니었다. 외국으로 가서 빈손으로 시작할 건 아니지 않은가?

근데 기순이 알면 또 뒷목 잡을 텐데. 짐의 양이 양이니만큼, 기순 몰래 실어 넣을 수도 없고··· 일단 가져와서 말해야겠지··· 쿨하게 분배하기로 마음먹은 마루가 기순에게 말했다.

“야 기순아. 배 계약하고 나 경기도 좀 갔다가 늦게 온다.”

“경기도? 거기까지 왜?”

“좀 가져올 게 있어서.”

“그래? 경기도에? 분당이랑 성남에 사는 친척들이랑도 다 인연 끊었다면서?”

마루의 얼굴을 미묘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기순이었다. 젠장 관심법이냐? 독심술이야? 마루는 태연하게 기순을 마주 봤다. 효과가 있었는지 기순이 긴가민가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호텔 체크인은 내일 오전 11시에 맞춰 놨다. 시간 기억하고. 그런데 체크아웃하면서 밥 먹고 어쩌고 하고 오후에는 종일 배 점검하고, 물건 사다 나르고, 택배 받고 그러다 보면 내일도 다 갈 것 같다.”

“그럼 내일 밤에 출발하자고?”

“전에도 말했지만, 야간 항행은 어지간하면 피하는 게 맞아. 그래서 내일 출항하기로 했던 거 모레로 미루는 게 낫겠다 싶어서··· 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이게 부산에서 제주 가는 것도 아니고, 인천 가는 것도 아니고 일본, 그것도 도쿄만까지 가서 거기서 또 북미든 남미든 돌아야 할 판이면, 하루 점검하고 챙겨서 될 일이 아니더라.”

“그냥 일단 후딱 출발해서 일본 항구에 들를 때마다 조금씩 챙기면 안 될까?”

지금까지는 기순에게 사람 써는 걸 들키지 않았지만, 이렇게 기순과 같이 있을 때 회사랑 부딪치면 답이 없었다. 친구에게 사람 써는 모습 들키기 싫다고 친구랑 같이 손에 손잡고 강 건너는 건 아니지 않나?

일단 배를 타고 뜬 뒤에, 김 양이 총 좀 쏘는 여자다, 김 양은 마루에 대해 칼 좀 쓰더라. 이렇게 김 양과 상부상조하는 느낌적인 느낌으로 기순에게 말하면 어떨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너 뉴스 속보 안 봤냐? 아- 그 여자 픽업한다고 나갔다 왔지? 너 나간 사이에 일본에서 또 하나 터졌다. 쿠마모토 화산인가? 아니다, 쿠마모토 근처에 아소 화산이라고 큰 게 있는데, 그게 터져서 큐슈가 난리 났다. 동일본은 도쿄를 비롯해 주변 지역 지진으로 터졌고, 서일본도 큐슈 화산을 시작으로 화산 터지기 시작한다고 지랄 나기 시작했는데 물자를 구하기 쉬울까? 물자 구하겠다고 항구에 입항했는데 물자 구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려고?”

기순의 말대로라면 일본에서 물자 구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럼 오늘·내일 이틀이면 확실하게 준비할 수는 있는 거고?”

“야- 아까 내가 뭐라고 했어, 본래 장거리 항해할 때는 일주일이고 보름이고 계획 짜서 가는 거야. 이틀도 짧지, 진짜 너 쫓기지만 않았으면 이런 항해는 안 해야 하는 거라고. 그냥 큐슈 가까운데 들러서 거기서 잠적하는 거면 모를까, 북미라며? 아니면 남미까지 가자며? 손톱깎이 하나까지 꼼꼼하게 챙겨야지.”

마루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순의 말에 반박했다.

“그래 준비가 중요하다는 거 인정, 근데,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실시간으로 좆되는 중이라니까··· 진짜다 레알, 진짜 좆되고 있다고. 부족해도 뒈질 정도만 아니면 일단 뜨자. 밤이고 새벽이고. 일단 떠서, 제주도 가서 구하든 영 힘들면 여수나 통영으로 돌아서 거기서 구하든, 부족한 건 다른 항구 가서 구한다고 생각하고 일단 최대한 빨리 뜨자.”

마루의 말에 기순도- 한숨을 폭 쉬고 동의했다.

“항해 용품이든 물자든 부산이니까 쉽게 구하는 거야. 부산이나 인천 같은 대도시나 쉽게 구하고 빨리 구하고 그러는 거지, 작은 도시에 가면 구하는 데 또 하루 걸린다. 어쨌든 니가 실시간으로 좆되고 있다는데 어쩌겠냐? 최대한 내일 출발하는 거로 잡고, 오늘, 내일 뺑이쳐야겠네.”

“새벽이든 밤이든 힘쓰는 일 있으면 언제든 부르고.”

“당연하지, 부르면 바로 튀어나와라, 안 나오면 나도 짼다?”

“알았어. 알았어.”

기순이 시간을 보곤 빨리 계약하러 가자며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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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게 흔들리는 요트들이 정박해 있는 로얄 마리나.

날렵하게 빠진 럭셔리 요트들을 구경하는 마루의 모습에 기순이 낄낄거렸다.

“사진으로 보는 거랑 아주 다르지?”

“그러네. 진짜 좋아 보인다.”

“여기랑 인천, 송도 쪽에 새로 생긴 마리나들이 고급이지. 부산에 100ft 이상급 럭셔리 요트 전문 마리나는 여기 하나뿐이라 이쪽으로 럭셔리 요트들이 몰려서 구경하는 맛이 있어.”

집안이 망하기 전 나름 잘나가던 부친이 가지고 있던 보트와 여기 계류하고 있는 요트들을 비교하면 부친의 보트는 여기 계류 기준 미달이었다. 아마 40ft? 아니 50ft급 보트였나? 그것도 당시에는 크고 좋아 보였는데.

“진짜 운이 좋았다. 선주인 선배가 관리업체에 위탁 맡겼는데 마음에 차게 관리하지 않았다고 업체 바꾼다고 하던 참이라서 이야기 꺼내기 쉬웠어. 일단 2개월 60일 빌리는 거로 하고, 그 이상 쓰면 하루씩 자동으로 연장계약 들어가서 나중에 정산하는 거로 이야기 끝났으니까. 다행이지.”

“다행이다. 진짜 쫄렸거든.”

말은 안 했지만, 여러모로 쫄리고 있었다.

마루의 말에 기순이 킥킥 웃었다.

“쫄기는. 것보다 100ft급 카타마란 실물로 보면 진짜 엄청나다. 30m가 작은 거 같지? 카타마란으로 30m 세일링이면 그냥 우와 소리 난다니까.”

“네 말만 들어도 우와-하게 생겼다.”

말하는 기순의 표정 자체가 우와-였다. 우왁에 가까운.

그렇게 계약하기로 한 배에 들어서자, 기순의 선배가 반갑게 맞았다. 그리고 기순의 선배답게, 자기 요트에 대한 탄생 비화를 시작으로 건조 기간 중에 발생했던 에피소드, 부품 하나하나 장인을 갈아 넣고자 했던 일들에, 동남아까지 요트를 타고 여행한 것을 끝으로 계약이 성사됐다.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선배, 제가 같이 가잖아요.”

기순의 말에 선배가 빙긋이 웃었다.

“걱정은 무슨 좋은 보험이 있는데.”

하하하핫- 웃은 선배가 마루에게 말했다.

“60일분을 선납. 현찰로 주신다고 했죠?”

“아- 네.”

“좋네요. 원화? 달러? 엔화? 유로?”

“엔화나 달러로 하려고 합니다.”

선배가 음- 하고 고민하더니 엔화 반, 달러 반으로 받겠다고 했다.

“선배 손해 아니에요? 일본 지진에 화산까지 터져서 엔화 떨어지지, 싶은데요?”

“기순이 네가 몰라서 그래, 우리 집안이 벌써 2번이나 물 먹었거든. 옛날 고베 대지진 때도 엔화 팔았더니 올라서 물드셨다더라, 동일본 대지진 때도 이젠 떨어지겠지 해서 팔았는데 다시 꾸역꾸역 오르고, 거긴 정상이 아닌 동네라. 이번에 잔돈 생긴 김에 반대로 해보려고.”

환율은 일괄적으로 백 엔/천 원, 1달러/천 원으로 계산하고, 대신 기름값은 따로 받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 마루야 뭐 반값으로 요트를 빌리는 꼴이라 했으니, 큰 불만은 없었다. 어차피 경기도에서 탑차 끌고 오면 현금이야 넘치니까.

그렇게 요트 렌트 거래는 쿨하게 끝났다.

신난 기순이 벌써 업체를 불러서 고칠 것 준비하겠다고 바빴다.

“야- 그럼 난 잠깐 경기도 갔다 온다. 왔다 갔다 하면 지금부터 8~10시간 걸린다고 생각하고,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일단 배 타고 바다로 나가서 연락해. 갔다 와서, 어떻게든 정리할게.”

“그러니까 너 쫓는 새끼들 왔다 싶으면 일단 바다로 ‘런’ 하라는 거지? ‘런’ 하면 또 이 킹기순 아니겠냐?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셔. 참- 공동으로 쓸 건 내가 알아서 챙기겠지만 너 필요한 건, 네가 알아서 챙겨야 한다? 옷이랑 기타 등등 알지?”

기순의 말에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루는 렌트카를 반납하고, 교외에서 정리한 직원의 신분증으로 다시 자동차를 렌트했다. 이게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김 양이 탄 걸 찍힌 렌트카를 타고 돌아다니는 것은 아니지, 싶었다.

조직에서 죽은 조직원이 렌트카를 빌렸다는 걸 알고 그걸 쫓는다고 하더라도, 경기도에 숨겨둔 트럭으로 갈아탈 테니 문제없었다. 그냥 오늘하고 내일, 만으로 딱 하루만 넘기면 되는 일이었다.

“햐- 진짜 빡세네.”

대형 SUV를 렌트한 마루는 아울렛에 들려 옷을 쓸어 담았다. 한 번 조직이랑 엮일 때마다 옷을 버리다시피 했으니, 헬 게이트 터진 일본에 가면 불을 보듯 뻔했다.

옷과 필요한 것들을 바리바리 챙긴 마루가 주방용품 코너를 기웃거렸다. 탑차를 가져오면 거기에 군용 단검을 비롯해 무기가 가득 있으니, 주방용품으로 썰고 다닐 일은 없겠다 싶기는 했지만, 당장 빈손이라 기분이 그랬다.

부산 시외에서 조직원들이랑 푸닥거리하면서 사시미 하나는 맛이 가버렸고, 딱 한 번 쓴 칼도 어딘가 잘못 썼는지 칼자루가 흔들렸다. 그럼 남은 건 지금 가지고 있는 건 칼 한 자루인데.

미적거리던 마루가 한숨과 함께 주방용품 코너에서 칼을 골랐다.

이 브랜드에서 나온 칼은 이번에 써보니까 칼자루가 약했고, 이쪽 브랜드건 날이 금방 상했다. 그럼 이걸 써볼까? 서울에는 없던 건데? 마루는 알록달록 장미가 그려진 칼을 살펴봤다. 그러고 보니 홈쇼핑에서 많이 광고했던 것이었다. 광고도 광고지만, 장미무늬 사시미라니 이건 또 희귀했다.

‘하나는 이걸로 하고.’

부산이라서 그런가? 회칼의 종류가 다양하고 숫자도 많았다.

칼들을 고르고 잡으니, 어쩐지 기분이 풀리는 마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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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호텔, 컨벤션 룸.

한쪽에는 후덕한 인상의 중년들이 반대편 방향에는 어두운 정장을 입은 조직원처럼 보이는 남자, 군인처럼 일종의 특수 전투복을 입은 남자, 얼굴에 대각선으로 긴 흉터가 있는 단발머리 여자가 앉아있었다.

“우리 샬롯 그룹이 한 일이 아니오.”

“이렇게 증거가 있는데?”

제주 샬롯 호텔에서 벌어진 사건 영상이 담긴 파일이 재생됐다. 야쿠자들이 김 실장과 팀원들에게 시비를 거는 것을 시작으로, 죽고 진압되는 모습이 담겨 있는 영상이었다.

“제주 샬롯 호텔에 야쿠자들을 데려온 이유가 뭡니까? 비집고 들어오겠다고 한 짓 아닙니까?”

“본사는 정말 모르는 일이외다. 호텔 사장의 독단이오.”

샬롯 임원진의 말에 조직원이 목소리를 높였다.

“독단? 정말 독단이란 말입니까? 김 양이 제주 샬롯에 방을 예약한 것도 샬롯 호텔 사장의 독단이란 말이고요?”

“그렇소. 샬롯 그룹은 예나 지금이나 월드 그룹과 척질 생각이 없소.”

전투복을 입은 남자가 월드 축산 화재 현장 사진을 테이블 앞으로 던졌다. 완전히 전소되어 남은 것 하나 없는 폐허.

“우리 월드 그룹은 은혜는 잊어도, 원한은 열 배, 백 배로 갚으면서 커왔소. 근데 누가 수도권에서 제일 큰 업장을 날려 버렸네?”

“우리 샬롯 그룹은 결코 아니오.”

“그럼 그 화재랑 관련된 년이 왜 제주 샬롯 호텔에 예약했고, 그 야쿠자들이 왜 김 실장과 팀원들을 포위했냐고! 김 실장이 애들 전부 데려가지 않았으면 거기서 우리 애들 다 죽었어. 근데도 아니라고!”

“아니오! 샬롯 그룹 본사와는 결단코 관련이 없는 일 이오!”

쇳소리와 함께 테이블에 권총 한 자루가 놓였다. 콜트 파이슨 로열블루 피니싱. 깊은 군청색 총신이 서늘한 살기를 은은하게 뿌렸다. 얼굴에 사선으로 긴 흉터가 있는 단발머리 여자가, 담뱃불을 비벼 끄며 입을 열었다.

“샬롯 호텔 독단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입은 손해에 대한 배상으로 샬롯 호텔을 받으면 되는 일인가?”

“그게 무슨 날강도 같은 소리요!”

샬롯의 중역이 참을 수 없다는 듯 외쳤다. 여자가 나른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니면? 무엇으로 우리가 입은 손해를 벌충해야지?”

“이건 폭거요! 제대로 된 증거도 없이 우리를 이렇게 겁박해 회사를 통째로 빼앗으려고 한다면 우리도 어쩔 수 없소! 그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오!”

널찍한 컨벤션 룸이 고함과 살기 그리고 분노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계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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