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 [RUST]-42
월드 호텔 컨벤션 룸은 어느덧 살기로 가득 찼다.
콜트 파이슨이 테이블 위에서 휙휙 돌아가는 소리를 냈다.
“그래서, 샬롯 그룹의 공식적인 입장은 우리에게 샬롯 호텔을 넘길 수 없다는 소린가?”
권총을 돌리며 흉터 단발 여자가 말했다. 마치 짙은 혈 향을 목소리로 만든 것 같았다. 그 짙은 혈 향을 뱃살로 뭉갰는지, 후덕한 샬롯의 임원이 소리를 높였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샬롯 호텔 사장인 심은영이가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도 불분명하지만, 설령 샬롯 호텔 사장이 문제를 일으켰다고 하더라도 호텔 사업을 통째로 가져가겠다? 그룹 전체가 책임지라고? 지금 당신네 김 실장이 한 짓 영상에 있는 거 못 봤어? 제압해 놓고 확인 사살하는 장면? 그럼 이쪽에서는 그 책임을 물어, 월드 시큐리티와 월드 PMC를 달라고 하면 되는 건가?”
“그게 무슨 개소리야. 야쿠자 하나 죽였다고 월드 시큐리티와 PMC를 거들먹거려?”
조직원으로 보이는 월드쪽 사람이 소리 질렀다.
소란에도 침묵하고 있던 샬롯의 한 임원이 몸을 움직였다. 그가 숱이 적은 머리카락을 올백으로 넘기며, 낮게 말했다.
“그 영상에서 처참하게 살해된 사람이 심가 혈족이다. 그래서 월드는 우리에게 뭘 원하지?”
“······.”
“······.”
“······.”
“우리가 원하는 건 목이다. 김 실장의 목, 그리고 김 실장이 저렇게 행동할 수 있게 한 그 위의 목, 그리고 생포가 가능한 일방적인 상황에서도 사상자를 만든 월드 시큐리티와 월드 PMC의 목. 호텔? 원한다면 주지. 대신 우리가 원하는 건 목이다. 합의하겠나?”
“······.”
“······.”
“······.”
흐흐흐흐하하하하
단발머리 여자의 높은 웃음소리가 컨벤션 룸을 채웠다. 여자의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뱀처럼 꿈틀거렸다.
“그래? 내 목을 원한다고? 내 목과 우리 애들 목을 주면 호텔을 주겠다? 이거 이런 식으로 짠 건가? 홍 과장, 최 실장, 백 실장을 쳐내더니 이렇게 함정을 팠어?”
“유 이사님 일단 진정을···.”
검은색 정장을 입은 40대 후반의 최 전무가 쩔쩔맸다. 철컥, 콜트 파이선의 방아쇠가 당겨지는 소리. 양측 경호원들의 얼굴에는 서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나를 어떻게 봤으면 이런 장난질을 쳤지? 밖에서건 안에서건 다들 장난질을 치는데···, 지금, 여기서. 내가 방아쇠를 당기면, 몇 명이 살아나가는지 내기나 할까?”
“원한다면.”
올백으로 머리카락을 넘긴 중후한 중년 임원이 담담하게 말했다.
“잠시 쉬었다가 하지요.”
샬롯의 후덕한 임원이 재빨리 분위기를 환기했다. 양측은 서로 불붙은 두 사람을 각기 떼어내 휴게실로 향했다.
샬롯 임원진들의 휴게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올백 임원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서렸다.
운이 좋았다. 하필 김 양이 그년이 운영하는 제주도 호텔로 갔었을 줄이야. 그나저나 그년도 무력을 준비하고 있었군. 방계를 끌어들이다니, 심지어 방계가 죽어버려 월드와 교섭할 카드까지 됐다. 그저 고마웠다. 이걸 이용하면 그 되바라진 년의 멱을 딸 절호의 기회였다.
“호텔이든 건설이든 누구에게도 줄 수 없지, 그건 내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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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 보니, 제법 살 게 많았다. 가방도 그렇고 옷이랑 속옷도 그랬다. 넉넉하게 30벌은 있어야 했다. 저렇게 있어도 뒹굴면 금방 버려야 했다. 거기에 김 양이 입을 만한 옷도 대충 집어넣었다. 대형 SUV를 렌트한 보람이 있었다.
어떻게 가야 할까?
고속도로 타고 그냥 달려야 할까? 혹시라도 눈치를 챈 조직에게 걸리면? 포장 택시 이후 트라우마가 생긴 마루는 빙빙 돌아서 가기로 했다. 라디오 뉴스에서는 일본 대지진, 일본 화산 폭발이 대세였다.
[···큐슈에서 화산이 터져, 큐슈를 비롯해 혼슈 서부지역 항공편도 결항이 된다고 하죠?]
[그렇습니다. 현재 큐슈에서 터진 화산의 여파로 큐슈 전지역이 비행 제한 구역이 됐습니다. 사실상 큐슈와 일본 서부지역의 하늘길이 막힌 것인데요···]
[···어제 대지진의 참상을 보내드렸는데요. 특파원과 연락이 끊기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연결할 수 있는가요?]
[···외신기자들도 연락이 끊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원인은 도쿄뿐만 아니라 그 주변 지역까지 지진으로 초토화가 되면서, 많은 기지국이 무너진 여파로 보입니다. 이런 통신 불가 지역이 주변으로 확산하고 있으며, 현재 통신 불가 지역은 도쿄를 포함한 인근···]
고속도로 탔다가 빠져서 국도로 갔다가, 다시 고속도로 탔다가 ‘내일이면 떠나는데 내가 이게 뭘 하는 짓이지?’ 뺑뺑이 돌던 마루가 급 빡쳤다.
“씨발. 다 오라 그래.”
고속도로를 탄 마루가 미친 듯 액셀을 밟았다.
과속딱지를 떼든 말든 몰라 이제. 어차피 명의도 내 것이 아닌데.
“가자- 내일이면 간다-”
“가즈으아! 가으으은다아아!”
고함을 내지르면서 고속도로를 달리는 마루였다.
그렇게 탑차를 짱 박아둔 곳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5시 언저리, 10월 산속이라 어둑어둑해지는 시간이었다. 탑차는 하루 동안 무탈하게 잘 있었다.
마루는 화물차에 짐 좀 실어 가니까, 공간 좀 넉넉하게 비워놓으라고 기순에게 전화했다. 전화를 받은 기순이 무슨 짐이냐며 슬슬 발동을 걸려고 했지만, 마루는 태연하게 가서 보면 된다고 답하고 짐 옮겨야 한다며 끊었다. 그렇게 렌트카에 실었던 짐을 탑차에 옮겨 싣고, 부산을 향해 탑차를 몰았다.
우우웅
탑차를 추월하는 자동차들 소리.
위이이잉
심지어 다른 화물차도 마루가 운전하는 탑차를 유유히 추월했다.
지렁이가 기어가는 속도감에 마루는 미칠 것 같았다. 탑차에 짐을 끝까지 때려 넣어서 그런지 속도가 참 그랬다. 밟아도 밟아도 나가지 않는 그 느낌. 아시나요.
‘아 짜증나.'
'아 좀. 달리자.'
나가지 않는 차 안에서 공황과 싸우던 마루에게 기순이 전화했다.
[야- 언제 도착하냐?]
“지금 6시 반이지? 이거 속도 보니까 10시 넘어 11시는 돼야 도착할 거 같은데?”
[밥은 먹고 출발했고?]
“아니. 기순아 나 짜증나 미칠 것 같아.”
[아니. 왜?]
“온종일 운전한 것도 지랄 같은데, 밟아도 차가 안 나가. 으허허허허.”
[병신이냐? 그럼 꽉 찬 화물차가 밟으면 밟는 대로 나갈 줄 알았어? 한 시간마다 쉬기 힘들면 두 시간마다라도 좀 쉬어, 지금 저녁 시간이니까 무조건 휴게소 들어가서 밥 먹고 쉬라고. 어차피 빨리 와야 11시 넘겠네. 피똥 싸게 밟지 말고, 그렇게 밟다 사고 나면 나가리다.]
“아 미치겠어. 막 손이 떨린다.”
[지랄 말고 휴게소 들어가서 밥이나 먹어 새꺄. 배고프니까 손이 떨리지, 여기는 일단 작은 객실 2개 침대 빼고 냉장고, 냉동고 넣는 것까지는 끝났다. 그러니까 조심히 운전해서 와라.]
“김 양은?”
[그 여자는 아까 밥 먹고 방에 들어간 뒤로 방콕 상태다. 문자도 없고, 필요한 물품 사러 나갔다 오라고 했더니, 호텔 직원 시키더라. 뭐냐 진짜 그 여자.]
호- 밖에 나가지 않았다? 정신을 좀 차린 건가? 좋은 판단이었다. 나가지 않으면 엮일 확률이 확 줄 테니까. 그나저나 밥 약속은 누구랑 하길래 엮일지도 모른다고 했을까? 계속 궁금하네.
“됐어. 그냥 내버려 두면 되는 여자야.”
[그러면야 편하기는 한데, 진짜 뭐 하는 여자냐?]
“가서 이야기해, 가서.”
[그려. 난 여기 일보고 잘 테니까, 형 깨우지 마라]
“알따.”
전화를 끊자마자 마루가 소리 질렀다.
으으으으아아아아
아니, 일본에서 그 지랄을 떨고 한국으로 탈주했는데, 그렇게 들어온 한국에서 다시 일본으로 탈주가 실화냐? 실화야? 대체 나한테 왜 이러시는데?
[···피해 지역에서 대규모 약탈과 범죄가 성행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가운데, 일본의 임시재난 정부에서는 이른 시일 안에 소요사태가 진정되지 않을 경우, 계엄을 선포할 것을 예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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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외곽 시골길.
시골길이라기엔 널찍하게 포장된 길 한쪽. 승합차 여러 대가 줄지어 주차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논이 많아 시야가 탁 트인 곳이었지만, 이 주변은 비닐하우스와 작은 숲처럼 나무들이 제법 있어 시야가 막혀있었다.
“햐- 김 양 진짜-”
김 실장이 현장을 둘러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거 보라고 이거. 우리도 뭣도 모르고 달려들었으면 좆 됐겠는데?”
김 양의 기록을 보면, 더블 탭과 변형 모잠비크 드릴을 섞어 쓴다고 했다. 김 양이 회사 편이었을 때는 그렇게 편했던 것이, 추격하는 쪽이 되다 보니 참 지랄 같았다.
“확실히 기존 정보와는 다릅니다.”
기존 김 양 기록과 영등포 고시원에서 발견된 흔적이 달랐다. 고작 2명 뿐이기는 하지만 하체를 먼저 공격했다. 마치 방탄복으로 가려지지 않은 곳만 노린 것처럼. 그래도 고시원은 시가전 개념에 좁은 방안이라서 그냥 넘어갔었다.
하지만 지금 현장은 달랐다. 이런 필드에서도 집요하게 무릎이나 골반, 거기를 노려서 쏜다면? 김 실장이 기본으로 준비했던 방탄복과 방탄 마스크만으로 김 양을 잡기 힘들다는 결론이 났다.
심지어 뒤처리도 냉혹했다.
“햐 진짜- 독한 년이네. 이거 나중에 죽인 거 맞지?”
5구의 시체는 확실히, 처형 같았다.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을 대놓고 해드샷을 해버렸다.
“예. 사용한 총기는 발터 P22로 예상되며, 22구경 총탄으로 확인됐습니다.”
“그건 그런데··· 여기는 왜 이 꼬락서니냐?”
김 실장은 지독한 위화감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6구-아니 7구의 시체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정보 담당도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주변을 살피고 또 살폈다.
김 실장이 보기에도 이곳에 있는 시체들은 뭔가 이상했다. 팔뚝이 잘리고 목이 잘렸다. 그냥 그랬다면 이해를 했을 거다.
문제는 총이었다. 보안팀은 총화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어이없게 당했다? 도망친 흔적도 없었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흔적. 단체 패닉이라도 빠진 건가?
“김 양이 이곳으로 유인한 것 같습니다.”
“유인?”
“네, 교전한 흔적을 보면 김 양이 혼자 있다고 생각해 넓게 포위한 뒤 잡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김 양이 한 명씩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자, 각개격파를 피하려고 하나로 뭉쳤습니다. 그렇게 뭉치는 순간. 칼을 든 놈들이 달려든 것이죠.”
“칼을 든 놈들이라, 상대방 피해는?”
“······.”
“확실치 않지만, 저쪽이 방탄복을 입고 달려들었으면 일방적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저쪽 수준은 어느 정도지?”
정보 담당이 잠시 침묵했다. 확실히 이정도 칼잡이라면 흔한 건 아니었다.
“상당한 수준입니다. 여기를 보면 두개골이 갈라졌습니다. 이쪽은 목이 날아갔고요. 이렇게 한 방에 머리뼈를 자르거나 목을 칠 수 있는 건, 일본에서도 음지쪽 애들이 선호한다는 고류 검도 ‘시현류’ 정도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시현류가 아니더라도, 칼로 이렇게 할 수 있는 건 아무래도 검도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면 어렵습니다.”
아랍 테러리스트가 포로를 참수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여러 번 내리쳐서 간신히 잘라내는 게 사람 목이다. 여기 보이는 흔적처럼 깔끔하게 자르려면 수년간 검기를 연마한 달인급 칼잡이가 아니면 불가능했다.
“그것도 한둘이 아닐 겁니다. 총을 든 7명을 압도적으로 썰어버리려면 최소한 그 배의 숫자가 필요합니다. 이곳도 그렇지만 저 위쪽에 있는 10구의 시체들도 전부 칼에 당했습니다. 그걸 고려하면 아마 여기서 당한 보안팀의 3배수 많게는 4배수가 포위한 채 급습했을 겁니다. 그렇게 포위당해 패닉에 빠진 보안팀을 정예 칼잡이들이 대놓고 도륙한 것이죠.”
“하- 씹새끼들 총으로 하든지, 압도적으로 숫자가 우위에 있으니 생포해도 될 걸 왜 이렇게까지 한 거지?”
“기선제압으로 보입니다. 이걸 본 우리 직원들 사기를 보시면···.”
총에 맞아 깔끔하게 죽은 것도 아닌, 사지 가운데 하나씩 절단된 사체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들까? 심지어 총으로 무장한 보안팀이 이렇게 칼질당한 걸 본 직원들 멘탈이 정상일 리 없었다.
멘탈빵인가?
김 실장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김 양 잡으러 왔다가, 시체가 쌓일 뻔했군.”
견적을 보니 확실했다. 꼴랑 칼이나 든 일반 야쿠자들이 총화기로 무장한 보안팀에 비빈다고? 그럴 리가, 이건 샬롯이 아니라면 생길 수 없는 흔적들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이거 전부 찍어서 유 이사님께 보내, 아까 네가 했던 말도 보고서에 전부 쓰고.”
“김 양은 어떻게 할까요? 김 양이 탄 자동차 번호는 확인됐습니다. 추적할까요?”
김 실장이 주변을 살폈다.
피바다.
야쿠자 새끼들과 피 칠갑하게 생겼다. 견적으로 봐서는 샬롯이 확실했고 심지어 일본에서 피난 온 단순 야쿠자가 아닐 가능성이 컸다. 열도에서도 알아주는 무력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숫자로는 힘들었다. 뭣보다 이쯤 되면 김 양을 생포할 이유가 없었다. 샬롯의 개입 아니면 생기기 힘든 흔적들이 넘치는데, 여기서 김 양을 생포해서 뭘 하겠다고.
“지금은 여기 처리하는 게 먼저다. 그리고 김 양 생포 작전을 척살로 변경하는 걸 건의한다고 올려. 내 이름으로.”
“예.”
“아- 부산지부 보안팀이라고 했던가? 남은 애들 지휘권 이양받고.”
“알겠습니다.”
김 실장의 머릿속이 차갑게 식어갔다.
“우리가 먼저 쳐야 승산이 있다고, 부산에 있는 야쿠자 은신처랑 놈들 업장까지 동시에 날려버리려면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한다고 해. 유 이사님께 빨리 결정하셔야 한다고 덧붙이고.”
“예.”
이런 건, 선빵이 중요했다. 선빵으로 궤멸 시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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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초대에 안내받아 들어가는 김 양은 태연한 척했지만, 잔뜩 긴장했다.
대체 돈을 얼마나 처바르면 이런 인테리어가 되는 거지? 대리석에 금칠한 것도 아니고, 아 저기엔 진짜 금칠한 대리석도 있구나.
바닥, 벽, 천장으로 이어지는 면과 라인 하나하나가 예술이자 압박이었다. 숨 쉬면서 처음 보는 재질에, 스타일에,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는 자본주의의 포스가 느껴졌다.
‘날래 정신 차리라.’
티 안 나게 숨을 몰아쉰 김 양이 팔뚝을 매만졌다. 심전도와 연동된 기폭장치, 여차하면 김 양은 ‘시밤 쾅!’ 해버릴 생각이었다. 죽긴 싫지만, 그래도 죽게 된다면 혼자 죽지 않겠다. 다짐했다.
사람 기죽이는 전실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니 또 묘한 동양풍 색채가 있는 공간이 있었다. 거기도 지나서 들어가서야, 널찍한 다이닝 룸이 있었다.
김 양은 신경이 곤두섰다.
방 안에 있는 것은 20대 초반 잘해야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샬롯 호텔 사장은 분명히 30대 초중반을 넘었다고 들었는데, 지금 겉으로 보이기에는 김 양 또래처럼 보였다.
어두운 느낌의 정장을 입고 있는 그녀, 로즈 골드로 포인트를 준 자수가 수놓아진 재킷은 마치 아름다운 군복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군인이 입는 정복 같은 느낌? 확실히. 저건 정장이라기보다는 군복에 가까웠다. 긴 생머리와 군복 같은 정장의 조합은 현실적이 아니었다. 뭔가 화보?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김 양의 신경을 긁는 건 따로 있었다. 분명 다이닝 룸에는 저 여자와 자신 둘밖에 없었지만, 주변에 풍기는 기운은 달랐다. 중국에서 한 부호를 암살할 때 느꼈던 그 분위기. 어린 시절 경험했던 잊지 못할 분위기가 여기서도 느껴지고 있었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기 시작했다. 후- 태연해야 했다.
김 양이 필사적으로 마음 가다듬기를 하고 있을 때, 여자가 먼저 인사했다.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호텔 샬롯의 사장 심은영이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김 양이라고 합니다. 어쩐 일로 부르셨는지···.”
시간을 끌기는 개뿔. 김 양은 이런 신경 곤두서는 곳에서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김 양의 ‘님아 본론만’이라는 말에, 여자는 호호호홋 하는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그렇게 급하게 ‘용건만 간단히.’ 그러시면 초대한 제가 무안하죠. 김 양이 식도락을 즐긴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정찬으로 준비했으니, 긴장하지 마시고 천천히 들죠. 우리. 자세한 이야기는 먹고 나서 해요.”
여자가 오른손을 살짝 들자, 아주 조용히 자연스럽게 문이 열리고 카트 트레이를 끌고 들어온 직원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김 양에게 말했다.
“아페리티프는 어떻게 준비해 드릴까요?”
뭐드래티프? 김 양의 동공이 흔들렸다.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연기한 김 양이 저 앞에 앉은 여자가 고르는 것을 눈짓하며 말했다.
“같은 거로···.”
맞은 편의 여자가 빙긋 웃으며, 미친 듯이 독해 보이는 술이 담긴 술잔을 들어 올려 김 양에게 인사했다.
언제 뭐가 터질지 모르는 긴장 오지는 공간에서, 얼떨결에 독한 술을 받게 된 김 양이 마주 잔을 들어 올리며 속으로 외쳤다.
씨발.
계의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