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스트-45화 (45/280)

러스트 [RUST]-45

룸으로 올라가는 김 양은 두 손 가득한 무게만큼 행복했다.

아- 이것이 묵직한 행복인가? 일할 때는 몰랐는데 생각해보니, 회사가 나쁜 회사 맞았다. 8년을 구르고 굴렀는데 총 좀 사고, 그런 거 빼고 전부 모았음에도 2억도 안됐다.

눈·비 맞아가며, 진흙탕과 똥창을 굴러가며, 지방에서 중국, 일본, 동남아까지 8년을 뺑이친 결과가 뒷자리 반올림해서 2억.

자기가 명품으로 도배를 하기를 했나, 그렇다고 여행을 다니기를 했나, 성형하기를 했나, 비싼 화장품을 쓰기를 했나, 하다못해 휴가 때 럭셔리 호텔에서 호캉스를 하면서 욜로를 즐기기를 했나.

진짜 구르고 구른 기억뿐이었다. 어쩌다가 맛집 가서 먹는 것과 소소한 덕질 외에는 낙이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낙을 만들 여유가 없었다. 8년을 목숨 걸어 번 돈이 2억. 서울에 오피스텔은커녕 전세도 힘든 상황이었다.

근데 백정 마루랑 엮이고부터 벌써 얼마인가? 저번에 비닐봉지 가득해서 1억 5천, 심지어 배 구하라고 또 비닐봉지 가득 받았는데 그건 ‘그저 감사합니다.’가 됐다. 그래서 또 1억 5천, 합해서 3억.

이런저런 고생도 했고 위험한 일도 겪었지만, 한 달도, 일주일도 아닌, 단 이틀 만에 3억이었는데 이제는 그게 순식간에 6억에서 7억이 될 판이었다. 고작 이삼일 만에 회사에서 24년을 굴러야 간신히 모을 수 있는 돈이 생긴 것이다.

김 양은 고급스러운 가죽으로 만든 가방을 쓰다듬었다. 촉감도 마음에 들었다.

역시 샬롯 호텔 사장의 안목, 가방 하나도 허 투르지 않았다. 과연 이것이 명품이란 것인가?

안에 들어있는 게 얼마일까? 3억일까? 설마 진짜 4억? 부의 상징 금괴가 오롯이 내 것이라니. 은괴도 아니고 무려 금괴였다. 어쩐지 가슴이 미어터질 것 같고, 이제 신분만 정리하면 행복할 거 같고. 눈을 바라봐야 할 것만 같고.

김 양은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서류 가방을 열었다. 서서히 서류 가방이 열리고 튼실한 현금 뭉치들과 찬란한 골드바가 김 양을 반겼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마이 프레···

두근두근두근두근

세근세근세근세근

삐-이—?

삐√ 삑-삑-삑-

아? 아?! 아아아아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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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조식,

멍-하니 있는 기순과 김 양은 무언가 하얗게 불태운 표정이었다.

어쩐지 두 사람 모두 머리카락이 조금 탈색된 것도 같았다. 스트레스를 극심하게 받거나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들 가운데 하룻밤 만에 머리가 하얗게 탈색됐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기순과 김 양은 어제 점심, 서로 좋지 않게 해어진 것도 잊은 것처럼 그냥 멍하니 있었다.

“뭐해? 밥들 먹지 않고?”

마루는 아침에도 까딱없다는 것처럼 고기를 덮은 고기에, 베이컨을 돌돌 말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기순은 휑한 눈으로 마루가 먹는 것을 보고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씨리얼을 깨작거렸다. 김 양은 해탈한 표정이면서도 먹지 않아도 배불러요. 어딘가의 마이 프레··· 같은 눈빛으로 실실거렸다.

“어제 누구랑 밥 약속이었는데?”

마루가 무심하게 김 양에게 묻자, 마이 프레···를 뺏기는 그런 표정을 지었다가, 순식간에 ‘선생님 오해이십니다.’하는 표정으로 전환한 김 양이 오렌지 주스로 입을 축이고 답했다.

“어-음 여기 호텔 사장?”

“그 억양은 뭐지? 사장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다는 건가? 아니면 여기 사장도 조직이랑 연관된 사람이란 소린가? 설마?”

마루가 예민하게 나왔다. 오늘이었다. 밤이 되더라도, 바다에서 자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출항하기로 했기 때문에 꼬이는 건 질색이었다.

마루의 날 선 반응에 김 양이 화들짝 대응했다.

“아니! 그 ‘설마?’는 절대 아니고, 굳이 따지자면 회사랑 적대적인 상황에 놓인 사장이라고 할까?”

“조직이랑 적대적? 굳이 따지자면? 지금 말장난하는 건가? 은근슬쩍 넘어갈 생각 말고 어제 호텔 사장이랑 뭔 일이 있었는지 다 말해. 전부.”

가방에 묵직하게 들어있는 건 빼고 말해도 될까? 체크아웃하기 전까지는 돕기로 했잖아. 그거 말하지 않다가 혹시라도 뭔 일이 생기면 여기 호텔 직원을 백정이 썰어버리는 참사가 생길지 몰랐다. 눈물을 머금고 김 양은 모든 것을 토설하고야 말았다.

마루는 눈을 감고 김 양의 고해성사를 받았다. 그깟 금괴 2덩이쯤이야 아무 의미가 없었다. 새벽에 요트로 옮겨 실은 금괴의 양이 얼만가. 돈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지금 여기 샬롯 호텔의 상황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김 양이 어그로를 끌었는데, 거기에 샬롯 호텔 후계자 혈투라는 어그로가 하나 더 추가된 상황이었다. 서울에 있는 본사랑 부산에 있는 지사랑 한 판 붙을 기세인데, 이게 돈이나 명분으로 하는 게 아닌, 진짜 피 튀기는 싸움이 될 상황이었다.

“나랑 기순이는 요트에서 챙길 거 챙기고 정리할 거 정리하고 있을 테니까. 넌 알아서 하고 있다가 내가 문자 보내면 바로 튀어와, 늦으면 두고 간다.”

김 양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는 벽치기 무거운 현금으로 분위기를 잡더니, 이번에는 쿨하게 묵직한 가방 따위는 됐다는 듯한 시크함을 보여주는 백정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백정이 호텔 밖에 있는 게 차라리 좋았다. 적아 구분 못 하고 칼춤 추는 것보다, 그냥 눈 밖에 있는 게 심신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번에도 그냥 막 썰어버리는 걸 보면 꿈자리 나올까 싶었다. 솔직히 쫄렸다.

마루와 김 양의 대화가 끝날 무렵 정신을 차렸는지 기순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야- 이제 말해봐. 오늘 새벽에 볼 거 다 봤잖냐. 설마 또 봐야 할 게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다 까봐. 우선 이 여자분은 뭐 하시는 분이냐? 어떻게 알게 됐어?”

마루는 기순의 질문을 그대로 김 양에게 토스했다. 마루가 우묵한 눈빛으로 네 입으로 직접 말하라고 신호를 보내자, 김 양이 재깍 대답했다.

“회사에서는 절 히트맨으로 불렀어요. 누구는 힛-걸이라고 하기도 했고요. 아- 보디가드도 했네요.”

“네?”

기순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러니까 그··· 킬러?

기순이 흔들리는 동공으로 마루를 쳐다봤다.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끄덕.

대체 어쩌다가 이런 킬러···님과 엮이게 된 거냐?

기순은 필사적으로 눈빛을 보냈다. 그 또한 김 양에게 토스하는 마루였다.

“마루 씨랑 알게 된 건, 죽이겠다고 총질했는데 역으로 털려서 칼 맞고 뒈질 뻔하다 알게 됐어요. 아 그때 진짜 죽을 뻔했죠. 지금 생각해도 정말 위험했어요. 여기 마루 씨가 얼마나 칼을 잘 쓰시는지, 그냥 샥하면 착-, 착하면 싹-, 뼈와 살을 분리한다니까요···.”

어떤 트리거가 당겨졌는지 김 양의 봉인이 풀렸다.

좋아- 예상대로군. 바다 위에서 풀렸으면 좋았겠지만, 지금도 나쁘지 않았다. 친구에게 나 칼 좀 씀. 사람 좀 잡았음. 이렇게 직접 말하기보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알게 하도록 하는 게, 좀 덜 충격적이지 않을까?

마루는 두 사람이 벌이는 투머치를 피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기를 좀 더 먹다 보면 어느 정도 각이 보이지 싶었다.

기순과 김 양은 어쩐지, 상대방을 싫어하는 게 보였지만, 또 나름 투머치들 사이의 끈끈한 무엇이 있는 것처럼 대화를 이어나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정도 정리가 됐는지, 기순이 혼자 처묵처묵하고 있는 마루를 불렀다.

“왜? 다들 밥은 먹었고?”

“하- 씨발 밥이 넘어가냐?”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먹어야지. 조식이잖아.”

호텔비에 조식이 포함됐으니 개의치 않고 먹겠다는 소리였다.

“아- 그래- 부족하면 좀 있다 더 먹고. 그래서 마루야. 너 진짜 사람한테 칼질하고 다닌 거냐?”

뜬금없이 훅 들어오는 말에 마루는 당황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꼭··· 반드시. 칼질해야겠다. 그렇게 마음먹고 다닌 건 아니었고 그러니까 맞다. 정당방위. 그래 그거 정당방위였다니까. 비무장·무저항인 사람을 먼저 죽인 적은 없어요. 정말.”

마루의 말을 기순이 바로 받아쳤다.

“좆을 까세요. 어디서 약을 팔아?”

“아니, 진짜라니까? 정말. 레알!”

하- 한숨인지 웃음인지 회한인지 모를 탄식을 내뱉은 기순이 담담하게 물었다.

“너. 그 홍 과장이라는 사람도 무장하고 있었냐?”

“······.”

마루는 순간 대답할 수 없었다. 단지 쥐어짜듯 대답했다.

“홍 과장은 나루를 납치했다고! 거기에 무장한 조직원들이 20명은 있었고!”

“그래···. 그건 김 양에게서 들었다. 그래서 먼저 친 거냐?”

“······.”

기순이 마루를 정면으로 보며 물었다. 올곧은 눈빛이 마루를 향했다. 그래. 이 녀석은 언제나 이랬었지, 어린 시절부터 이 녀석은 이랬었다. 기순과 함께했던 일들이 빛바랜 사진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렇구나- 그땐 그랬었지, 그래 자신도 그랬었다.

이 녀석은 뭘 말하고 싶은 걸까?

가족을 구한다는 명분, 백정의 삶에서 벗어나겠다는 명분, 홍 과장이 나루를 납치해 자신을 엮으려고 했다는 명분. 최 실장과 백 실장이 자기를 잡아가기 위해 왔다는 명분.

그 명분을 이용해 법이 아닌 칼로 해결을 본 시점에서, 자신은 이미 평범한 일반 시민은 아니었다는 것을, 열심히 일해서 가정을 일으켜 보겠다던 그런 청년이 아니게 됐다는 것을, 마루는 기순의 눈빛을 통해 깨닫게 됐다.

마루의 침묵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기순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정신 차려 병신아. 널 탓하려는 게 아니야. 네가 사람을 죽였다고 내가 지랄하는 게 아니라고.”

“······.”

“너 어버리 타다가 뒈질 것 같아서 하는 말이라고. 김 양한테 방금 들었다.”

“······.”

뭔 소릴?

“홍 과장 때를 생각해봐. 어리바리했었냐? 안 그랬잖아. 홍 과장이 총을 들고 있었냐? 칼을 들고 있었냐? 아닌데도 과감하게 했잖아. 주저했었냐? 아니잖아. 근데 왜 얼 타는데? 홍 과장이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만, 그런 사람 말에 얽매어서 흔들리면 너 뒈진다.”

“······.”

“씨발 어쩌겠냐? 하나뿐인 불알친구가 하필 백정 새끼라는데······. 인간 백정이든 뭐든 얼 타다 뒈지지는 않게 해야지.”

“······.”

마루의 표정이 흔들렸다.

“씨발 그 표정은 뭐냐? 너 새끼가 백정 새끼라고 하면 내가 연 끊자고 할 것 같았냐? 입장을 반대로 해서, 내가 백정 새끼면 넌 연 끊을 거냐? 아니잖아? 근데 뭘 그렇게 전전긍긍 씨발. 존나 마도중 작은 하마는 어디서 굶어 뒈졌는지. 너 존나 뻔뻔한 새끼였으면서 안 하던 짓 하지 말고 그냥 쿨하게 하세요. 뒈지지 말고.”

“······.”

옆에서 지켜보던 김 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래야지’, ‘그렇지’, 추임새를 넣는 끄덕임이었다. 정말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본 마루의 입에 피식- 미소가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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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공장 작업창고

꺼이꺼이 울부짖던 소리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깜깜한 침묵이 창고를 가득 채웠다.

이 실장은 기분이 더러웠다. 좆 같은.

카아아악- 퉤!

더러운 기분을 끌어모아 뱉기라고 하는 것처럼 가래침을 뱉은 이 실장이 손을 털었다.

“다들. 입단속 잘하고, 부산으로 출발하게 1시간 안에 차량, 장비, 점검 끝내고 모이라고 해.”

“저 실장님.”

안쪽 방에서 통화하고 나온 안 팀장이 이 실장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어- 안 팀장 무슨 일인데?”

“최 전무 말대로 부산에 가실 겁니까?”

“씨발. 안 가면? 이제까지 뺑이 친 건 어디서 보상받고?”

“위험합니다. 최 전무 지금까지 한 거로 봐서는 약속을 지킬 사람이 아닙니다.”

이 실장은 폭발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최 전무 라인에 꽂힌 이상 벗어날 수 없었다.

라인이 달라야 나중에 두 라인에 힘을 쓸 수 있게 된다고?

근데 이건 뭔가? 김 실장은 유 이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데 비해, 자신은 지원은커녕, 최 전무의 뒤치다꺼리나 하면서 삽질하고 있었다. 오늘은 이 산, 내일은 저 산.

이 실장은 자신을 스카우트한 유 이사를 떠올렸다. 최 전무의 라인으로 가서, 크게 성장하라고. 자기 밑에 있으면 크기 힘들다고.

“하- 그래서?”

“실장님. 아니, 형님. 지금 애들 분위기 정말 안 좋습니다.”

“좋겠냐? 삽질에 똥 푸고 있는데?”

“그게 아니라. 우리 애들 2달째 월급이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 실장이 당황했다. 이 무슨 미친 소린가? 분명 자기에게는 꼬박꼬박 월급이 들어오고 있었다.

“야- 진짜냐? 너도? 다른 팀장들도?”

“팀장급까지는 월급이 들어왔는데, 아래 애들이랑 신입 애들은 월급이 나오지 않았답니다. 수습 기간이라 월급이 없는 거로 그렇게 알고 있는 애들도 있고요.”

이 실장은 골이 띵했다. 아니 씨발 이게 말이야, 밥이야.

“수습 기간? 이 일에 뭔 수습 기간? 손 씻고 입사하면 회사에서 월급 주기로 했잖아. 어? 그런 거 아니었어? 그러기로 하고 애들 데려왔잖아. 넌 언제 알았는데?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는데!”

“형님이 어떡하든 참고 버티시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전부···.”

이 실장이 참지 못하고 소리 질렀다.

“야- 씨발. 너 나 엿 먹이는 거냐? 그걸 왜 니가 판단해? 엉? 애들 데려온 사람은 난데, 니가 왜 그걸 판단하냐고?”

이 실장의 손이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했다. 부들부들 떨던 이 실장이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닥치고 있을 거면 끝까지 닥치고 있지. 왜 지금 와서 말하는데?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이대로 부산으로 내려가 샬롯이든 야쿠자든 걔들과 싸우라고 하면 되지도 않는 싸움에 애들만 죽어 나갈 겁니다. 싸우다 죽는 건 차라리 낫죠. 다들 밥 먹고 살자고 회사 들어온 애들인 거 아시지 않습니까? 월급도 없이 수습이라고 굴려 놓고, 나가 죽으라고 하면 총이든 칼이든 거꾸로 잡을 겁니다.”

“그래서?”

“회사는 우리 애들 고기 방패로 쓰려고 하고 있습니다. 형님도 키워줄 생각 없고요. 키울 사람을 뺑이만 돌리고 그러겠습니까? 애들 수습이랍시고 월급도 안 주고요? 애들 월급 누가 슈킹했겠습니까? 형이랑 저희 팀장들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누가 중간에서 뺐겠습니까?”

이 실장의 목소리가 낮게 내려앉았다.

“그래서?”

“형님.”

안 팀장이 이 실장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 실장은 무릎 꿇고 앉은 안 팀장의 머리통을 가만히 내려봤다.

“저 형님 때문에 살았습니다. 개망나니였고 동네에서 쓰레기 짓이나 하던 양아치, 팀장이랍시고 여기까지 온 거 다 형님 덕이었습니다. 저희 어머니 말년에 그나마 편하게 보내드릴 수 있던 것도 전부 형님 덕이었습니다. 이 좆 같은 세상에서 의리 지키고 약속 지킨 분은 제 주위에서 형님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실장이 골프 가방을 열어 마체테를 꺼내 들었다. 그걸 보고도 안 팀장은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이었다.

“저 따라온 애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저도 아직 확답하지 않았습니다. 명함 받은 게 문제가 된다면 저 하나로 끝내주십시오.”

“······”

“그냥 이대로 내려가시면 형님도, 애들도 전부 개죽음인 거 아시지 않습니까. 김 실장네 고기 방패가 될 뿐인 거 아시지 않습니까?”

“······”

“부산에 가서 최 전무 말대로 일하시기 전에, 이 명함으로 먼저 한 번 만나보시고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안 팀장이 주머니에서 고급스러운 명함을 하나 꺼내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플라스틱인지 금속인지 종이가 아닌 다른 재질로 만든 명함. 호텔 샬롯 사장 심은영이 적혀 있는 명함이었다.

이 실장은 들고 있던 마체테를 내려놓고 힘이 빠진 듯 벽에 기댔다.

몸 만든다고 끊은 담배가 절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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