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스트-61화 (61/280)

러스트 [RUST]-61

마루는 칼을 꼭 끌어안았다.

딱딱한 칼집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 단단함 속에 숨겨진 차가운 칼날의 느낌. 언제라도 슥-하고 뽑아 들면 어디서든지 살아남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 살아있다는 감각. 살 수 있다는 감각. 그게 칼이 주는 감각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어째서 알려주신 거죠?’

‘본인은 은원을 잊지 않습니다. 마루씨께서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김수현 실장을 잡는 데 도움을 주셨고, 최 전무와 직속 부하들을 정리해 주셨기 때문에, 전력을 많이 아낄 수 있었던 건 사실이니까요.’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했다. 말 그대로 중간에 치료를 멈췄으면 자신은 죽었을 것이다. 사이토카인 폭풍이라는 낯선 증상으로 인해 허망하게도.

‘호텔 샬롯은, 이 심은영이는 은원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은원을 기억했듯, 상대방도 저에 대한 은원을 기억하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거랍니다.’

마루는 칼을 조금 뽑았다.

스킹- 소리를 내며 뽑힌 칼날이 이이잉-하며 울었다.

아재의 칼은 확실히 좋은 칼이었다. 아마도 특수강을 사용해 주문 제작한 칼이겠지. 이가 나간 곳이 없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나가버려 쓸 수 없을 정도까지 망가진 것은 아니었다.

이이이-잉-

심은영 사장의 모습이 흔들리는 칼날 위로 비치는 것만 같았다.

‘검사 결과. 마루씨는 일반인들과 비교해 3~4배의 힘을 낼 수 있더군요. 아마 단기적으로는 더 강한 출력을 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강력한 신체 능력 상승의 대가로,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죠.’

갑작스럽게 늘어난 식사량의 비밀이었다.

‘식사량이 늘어난 것이라면 큰 문제가 아니에요. 중요한 문제는 일정 시간 이상 힘을 쓴다면 극도로 위험한 상황에 빠진다는 것이죠. 설명하자면, 신체 능력을 높인 시간이 길어져 일정한 선을 넘어 버리면 신체가 스스로 붕괴한다는 겁니다.’

횡문근 융해증이라고 했던가? 운동을 극심하게 했을 때 발생하는 증세 명칭이. 그보다 심각한 증세가 급속도로 진행된다는 것이었다. 근육이 녹고, 장기가 손상되고 망가져 순식간에 신체가 무너진다는 것.

‘그것도 문제지만, 면역력과 재생력이 갑작스럽게 널뛰는 것도 문제고요. 아슬아슬하게 평형을 이루는 균형이 틀어지는 순간, 강력해진 면역력은 자기 신체를 공격하고, 재생력은 상처 입은 곳을 과다하게 재생하게 되는 거죠.’

‘예를 들면, 혈관 세포가 백혈구에 공격당해 다쳤을 경우를 생각해 보죠. 강력해진 재생력이 다친 혈관을 순식간에 재생시키면서 두꺼워지면 어떻게 될까요? 혈관이 좁아지는 결과가 되겠죠? 결국엔 혈관이 막혀 버리게 될 거고요.’

그러니까 강해진 면역력이 스스로를 공격하고, 마찬가지로 강해진 재생력이 엉망으로 재생시켜 자멸에 이른다는 소리였다.

마루는 조금 뽑았던 칼을 전부 뽑아 들었다.

촤릭!-

이이이이잉-

투명한 검명이 방안에 흩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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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 과장은 여사장님의 의중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분명 좋은 기회였다. 그것에게 목줄을 채울 기회, 아니면 그것을 제거할 기회.

근데 그렇게 선선히 ‘정보’를 알려주다니, ‘은원’이 확실한 것은 좋았다. 그건 ‘상벌’도 확실할 것이라는 소리니까. 하지만 ‘상벌’은 한 지붕 아래에서만 확실한 게 좋았다. 같은 식구가 아닌데 굳이 상을 줄 필요가 있을까? 그것도 목숨이 달린 정보를?

적은 아니라지만, 언제 칼을 휘두를지 모를 그것에게 정보를 그렇게 쉽게 넘겨준 이유가 무엇일지, 그는 조금 답답했다. 이 과장의 답답함을 읽었는지 심은영이 나긋하게 말했다.

“그렇게 답답한가요?”

“네? 아닙니다. 그저 이해되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이해라···. 그렇죠, 이해겠죠.’

인간이란 이해와 오해 사이에서 표류한다는 말이 진실일까? 심은영은 샬풋 웃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해와 오해는 사태의 본질이 아니었다. 이해와 오해보다 앞선 본질. 그것은 이익과 손해였다. 이익이 되면 이해한다. 손해가 된다면 오해한다. 그러니 조금은 올드한 가신에게 심은영은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과장님께서 이야기하셨던 대로 그 사람을 ‘그것’이라고 지칭한다면, ‘그게’ 목줄을 차고 얌전히 있을 것으로 보이셨나요?”

심은영의 질문에 이 과장은 생각했다. 그게 목줄을 차고 가만히 있다고? 아- 이 과장은 납득했다. 그것에게 목줄을 채우는 순간, 시한폭탄을 설치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더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가 언제까지 유효할 것으로 생각하시나요? 얼마 지나지 않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될 거고, 치료를 위해 검진을 했던 우리에게 생각이 닿을 겁니다. 그때 그가 이렇게 오해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호텔 샬롯에서는 뭔가 알고 있으면서 숨겼다.’ 이렇게 말이죠.”

허허허허- 이기영 과장은 속으로 헛웃음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최악이다. 약점을 알면서도 숨겼다고 생각한다면? 왜 그랬을까? 뒤통수를 치기 위해서가 아닐까? 아마도 그렇게 판단하겠지.

“더해서 만약, 그가 월드든, 한국의 다른 재벌이나 정부 기관과 접촉해 검진을 받게 되어 자신의 상태를 알 수 있게 된다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호텔 샬롯을?”

“그렇군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래요.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는 그에게 사실대로 말하는 것. 저는 그것이 최고의 방법이라고 판단했답니다.”

“때로는 말이죠, ‘정직이 최선의 방책.’ 이기도 한답니다.”

심은영의 살그막한 목소리에, 이기영 과장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마냥 손을 놓고 있을 필요는 없죠. 제안을 전했으니 이제 저쪽이 어떻게 대응할지 지켜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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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나- 어이가 없어서.”

칼 춤추고 총알 날아다니는 곳에서도 잘만 살아있던 놈이 갑자기 싸이코카인 폭풍에 맞아 요단강을 건널 뻔했다고? 기순의 패닉을 마루가 정정했다.

“싸이코카인이 아니라 사이토카인. 그리고 요단강이 아니라 삼도천.”

기순의 실눈이 게슴츠레해졌다.

“그러니까, 싸이코카인이든 사이토카인이든 너 재수 없었으면 죽었을 거라는 소리잖아.”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그래.”

마루의 담담한 대답에 기순이 자기 가슴을 토닥토닥 쳤다.

“그래 계속해서 힘내라. 조금만 더 하면 내가 제 명에 못 살고 미쳐 죽겠다. 어쨌든 잘 먹어야 한다는 소리지? 무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고. 무슨 무협이냐? 3할은 숨겨야 하게.”

그나마 호텔 샬롯에서 식량 수배와 선적을 도와줘 계획보다 풍성한 식탁을 오래 유지할 수 있게 됐다.

“그보다 이거나 읽어봐.”

마루가 서류철을 기순에게 넘겼다. 서류철을 열자마자 읽으면서 기순이 잔소리를 시작했다.

“죽을 뻔했다는 놈이 왜 이렇게 일찍 나왔냐? 오늘 하루 그냥 병실에서 요양했어야 하는 것 아냐?”

마루는 팔뚝을 매만졌다. 언제 상처를 입었냐는 듯 깨끗한 팔뚝. 20바늘은 넘게 꿰맸어야 할 깊은 상처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허벅지와 정강이 어깨에 있던 상처도 마찬가지였다. 은원을 기억해 달라? 마루는 은원이란 거, 만만치 않구나. 생각했다.

“제안? 샬롯 호텔 심은영 사장이 우리한테 의뢰를 맡기고 싶다고? 우리는 그냥 그쪽을 적대하지 않는 것으로 끝내는 거 아니었어?”

“그냥 제안일 뿐이고, 왜 그런 제안을 했는지도 다 적혀있으니까 끝까지 읽고 생각해 봐. 나도 복잡하니까.”

기순의 눈동자가 좌우로 휙휙 움직였다. 팔랑팔랑 넘어가는 서류들 감탄사와 탄성이 몇 번이나 나왔을까. 기순이 서류철을 덮더니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와- 사장 누님 장난이 아니네. 존나 무서워- 씨발. 샬롯 그룹 사장쯤 되면 이렇구나. 와 내가 진작 때려치웠으니 망정이지. 나도 이렇게 머리 굴리고 살았을 거 아냐?”

기순이 서류철을 무슨 끔찍한 뭔가를 보듯 슬슬 밀어냈다.

“그래서 네 생각은 어때?”

“아니- 씨발. 이 누님 앞뒤 다 짜놓고 어떻게 하시겠어요? 이러고 있는데 뭔 생각이야 생각은.”

그런가? 마루는 이럴 때 기순에게 공감해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마루가 고개를 끄덕이자, 기순의 입이 폭발했다.

“그 뭐라고 하지? 그래 한계상태. 그거 왔을 때 위급상황 벗어나려면 해독제? 정화제 먹어야 하는데, 그 약은 얼마 없고, 레시피 구하려면 일본 도쿄에 있는 제약회사 본사에 가야 한다? 너 먹을 약 레시피라 구하긴 해야 하는데, 일본 가는 김에 가보라고 하는걸. 안 감. 이럴 수도 없는 거잖아.”

“······.”

“그리고 그 제약회사 지하 기밀 보관실 문 열려면, 한 사람을 데려가야 하고.”

“······.”

아- 진짜. 대단한 누님이셔. 정말. 기순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근데 또 다른 부분에는 매리트가 있었다.

“이거 요트를 선배한테서 매입해서 호텔 샬롯 법인으로 해준다는 건 진짜. 와 이 짧은 시간에 거기까지 생각하다니.”

샬롯 그룹의 배가 되면, 일본에서 돌아다니기 쉬워졌다. 일본 순시선과 마주쳐도, 샬롯 그룹 배를 어쩌겠다고 하긴 어려울 테니까. 샬롯 그룹에서 구호품 가져가는데요? 이거랑 한국인 개인이 구호품요. 이거랑 패스 난이도가 엄청 차이 날 것이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현금 가지고 있던 한국인을 조졌던 일본 경찰들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랬다. 그렇다고 짐 까보라고 하는 일본 경찰을 그냥 둘 수 없을 거고, 그럼 칼질 시작이었다.

“당장 일본 치안이 씹창 났다고 하니까 마주칠 일이 없겠다 싶지만, 그러다가 꼭 마주친다니까. 자위대든 경찰이든. 그럴 가능성을 생각하면 샬롯 명함이 필요하긴 하지.”

거기에 함께 태우고 가라는 여자의 신분이 무려, 그림자 무사. 그러니까 심은영 사장 대역이었다. 일본에 내리는 순간부터 심은영 사장 자신이라고 생각하라는 것을 보아, 대역을 일본에 보내 내부 단속을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겸사겸사 제약회사 기밀 보관실도 따고.

그쪽이야 어쨌든, 표면적으로 심은영 사장을 호위하는 경호원 포지션으로 일본에 가면 여러모로 움직이기 편한 건 사실이었다.

“사장님 휘하에 있는 야쿠자들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여차하면 이쪽도 쪽수를 동원할 수 있으니까 우리가 위험할 일도 줄어들고.”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의뢰를 거절할 이유가 딱히 없다는 게 문제였다. 이쪽의 상황을 손금보듯 보면서, 의뢰했다는 느낌.

“아- 이거. 딱히 트집 잡을 구석도 없고.”

기순이 다시 머리를 긁적였다. 근데 이게 참. 뭔가 참. 꺼림칙하단 말이지. 여사장님 하는 걸 보니까 속여 먹지는 않는 타입이겠지만, 그렇다고 전부 까발릴 타입도 아닌데.

우우우웅

우우우웅

기순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샬롯 호텔 비서실이었다.

“네. 김기순입니다.”

[말씀하셨던 수륙양용 차량 아르고 2대, 수륙양용 쿼드스키 2대 확보됐습니다. 바로 배송해 드릴 테니, 수령 하시면 확인 바랍니다.]

오- 진짜 반나절 만에 되네?

[사장님께서 추가로 의약품과 구급품, 비상 발전용 태양광 충전기까지 보내셨습니다. 같이 확인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사장님 진짜 화끈하고 빠르기는 한데···.

“그래서 네 생각은 어때?”

“와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사장 누님 만렙이네.”

기순이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까지 대우받고 입 닦기도 그렇고 참. 그건 그렇고 너 위급할 때 쓰라는 약은 안전한 거 맞냐? 그 약으로 코 꿰이고 그러는 건 아니지?”

“네 말처럼 한 3할 정도 여유 두고 움직이면 크게 문제는 없으니까, 약을 쓸 일도 없지 않겠어?”

“자세히 설명은 해줬고?”

“그래. 일종의 중화제, 해독제 같은 거다. 지금도 이거 써서 많이 좋아진 거고.”

마루의 대답에 기순이 끄덕였다.

“중독되는 건 아니지?”

“약 부작용 해독하고 중화하는 거다. 내 상태가 약 부작용이랑 비슷하다고.”

기순의 눈이 가늘어졌다.

“씨발- 어쩐지. 너 하는 짓이 맨정신은 아니다 싶었다. 어디서 약을 처먹었구나. 불 싸지르고 슈킹하고 지랄했을 때, 딱 약이라고 알아봤어야 했어.”

*살그막한

뭔가 ‘부끄러워 살짝 머뭇거리는’, ‘부끄러워 살짝 숨기는’ 의미를 가졌습니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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