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스트-71화 (71/280)

러스트 [RUST]-71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사람에게 있어, 과거는 언제나 현재가 된다.

시체가 둥둥 떠 있는 바다는,

시체가 둥둥 떠 있던 강과 놀랍도록 닮았다.

짙은 화산재가 안개처럼 껴있어 더욱 그랬다.

그래, 그때.

차가운 바람이 불었던 그 순간.

“······.”

“?”

마루는 김 양의 동공이 서서히 맛 가는 것을 보았다.

철컥-스르르-릭?

칼집에서 아재칼이 빠져나오며 끄트머리 잘린 소리를 냈다.

스리리링-

그 서늘한 소리와 함께 김 양의 눈에 초점이 빡! 돌아왔다.

음- 마루는 고개를 끄덕이곤 랜턴을 들고 배 주변을 살폈다.

둥둥 떠다니는 시체들 사이로 부유하는 물건들은 딱히 분류하기 미묘한 잡동사니들이었다.

마루는 숨을 골랐다. 피곤했다. 시체를 보는 것도.

후-욱-

방독면이었다면 벌써 필터가 막혀버렸을 것이다. 산소통을 매고 있어서 그게 좀 그래서 그렇지, 확실히 이런 상황에서는 산소마스크가 훨씬 유리했다.

[야 뭐 좀 찾았냐?]

왼쪽으로 간 기순이었다.

“아니, 이쪽도 그냥 아까 본 거랑 똑같아. 시체랑 부유물이 널렸다. 이거 이대로 일본으로 가도 될까 싶은데.”

[일단 시코쿠 도쿠시마 항구로 가보자. 그쪽은 내가 알기로 화산이 없으니까, 큐슈 남동부보다는 낫겠지, 일단 본토 상황이 어떻게 됐는지 좀 알아보고, 기름 좀 미리 더 채울 수 있으면 채우자.]

“OK. 앞에 뭔가 위험한 거 있는지 볼 테니까. 슬슬 움직여.”

[그려.]

돛을 내리고 엔진을 켠 요트가 슬슬 전진하기 시작했다.

퉁- 툭- 낮고 작은 충돌음을 내며, 배가 부유물과 파도를 헤치고 전진했다.

화산재와 섞인 안개는 짙어지고 옅어지고를 반복했다.

그래도 점점 옅어지는 추세라 희망이 보였다. 화산재 뒤섞인 안개가 옅어짐에도 레이더와 GPS가 자주 오작동 됐기 때문에, 느릿한 속도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서야 간신히 시코쿠 도쿠시마 인근에 진입했다.

도쿠시마 항구 근처는 미친 듯이 혼잡했다.

“이거 항구에 댈 자리가 없겠는걸.”

“그러게.”

항만관리소도 제대로 운영되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본래대로라면 항구 근처로 오기 전에 무전으로 항구에 간다고 연락도 해야 하고, 배에서 하지 않고 접근하면 항만관리소에서 무전이 왔어야 했는데 조용했다.

특히나 외국 국적 선박이라면 입항 신고도 확실히 하고 받고 그랬는데, 항만관리소에서 여타의 무전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은, 상황이 좋지 않다는 의미였다. 어쨌든 어디로 가라 와라 할 게 없으니, 알아서 해야 할 판이었다.

“상태를 보니, 방파제 안쪽으로 비집고 들어가서 적당한 자리에 그냥 정박해야겠는데?”

상당히 넓어 보이는 항구였음에도 크고 작은 배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고, 사람들로 가득했다. 여기저기 말다툼에 주먹질까지 벌어지는데도 경찰이나 관리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항만 전체가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저기 싸우는 거 봐라. 관리소도 손 놨다. 뭔가 뜯어 먹겠다고 오면 그게 더 골치 아파. 그냥 조용히 챙길 거 챙겨서 뜨자.”

여차하면 배를 빼야 할 상황이 생길지 모르니, 기순과 김 양이 남기로 했다.

“일단 필요한 건 기름이지?”

“그래 출발할 때 넉넉하게 실었는데, 중간에 우리가 이틀 넘게 옆으로 새서, 채울 수 있으면 채우는 게 좋을 것 같다.”

“일단 기름배달 접수했고, 신문이나 그런 거 있으면 가져올게.”

“챙길 수 있는 건 전부 챙겨.”

마루는 김 양을 봤다. 눈동자 이상 없고, 분위기도 정상이었다. 마루가 기순에게 살짝 속닥였다.

“기순이 만약에 안개가 끼거나 연막탄이 터지거나 하면 일단, 김 양 근처에서 좀 떨어져서 몸 사려.”

“왜? 무슨 일인데?”

“혹시나 해서 봤는데, 아까 보니까 안개나 연막? 그런 거에 트라우마가 있는 거 같더라. 멀리서 피어오르는 건 괜찮은데, 안개나 연막 안에 있으면 눈동자가 풀리고 살짝 발작할 거 같더라고, 총기 사고 날까 싶으니까. 접근하지 말고, 멀리서 말로 해. 말로.”

“그래.”

기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어지간하면 좋게 가자 좋게.”

실뜨기했던 기억이 떠올랐는지, 기순이 찌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그때는 뭐 별수 있었나? 마루는 심드렁했다.

“그래. 무리하지 않을 테니까 얼음이나 얼려둬.”

“얼음? 야- 무리하지 않는다며?”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그럼 간다.”

엔화가 가득 든 캐리어 2개를 싣고, 수륙양용차량이 두두둥-소리를 내며 도쿠시마 항만을 향해 나갔다.

마루가 수륙양용차량으로 항만에 진입하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노려보든지 말든지, 물에서 뭍으로 자연스럽게 오르는 수륙양용차량. 8개의 바퀴가 힘차게 시멘트 바닥을 내달렸다.

마루는 뭍에 오르고 바로 선박 전용 주유소를 찾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처리해야 할 건 기름이었다. 한쪽에 높은 간판이 있어, 선박 전용 주유소를 찾기가 쉬웠다. 다만 기다리는 배들이 너무 많았다.

이대로라면 기름을 채우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몰랐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덜컥 기름이라도 떨어진다면 낭패였다.

때로롱-때롱-

“아- 기다리세요. 들어오지 마시고 밖에서 기다리시라고요. 문 앞에 적어 놓은 거 못 보셨습니까? 밖에서 기다리세요.”

마루가 선박 전용 주유소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들은 소리였다. 슬쩍 입구를 돌아보니 A4용지에 자필로 쓴 안내문이 적혀있었다.

“주유소에서 주유하는 게 아니라, 연료 공급선을 사용해서 받으려고 합니다만.”

마루는 모르는 척, 1만 엔짜리 10장을 테이블에 슬쩍 올려놓으며 말했다. 현금을 본 직원이 주변을 살피더니 고개를 살짝 숙이며 물었다.

“대형입니까?”

“100ft짜리 대형 카타마란인데. 1만에서 1만2천 리터 정도 채우고, 비상 연료통 45리터짜리 20개 채워서 싣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물론 전액 현금으로 결제하고요. 현 시가보다 30% 더 쳐주죠, 배송 즉시 현금 결제 조건으로. 지금 당장. 가능합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직원이 바로 저쪽에 있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이어서 좀 바짝 마른 중년 남자가 마루를 향해 인사했다.

“현재 시가가 많이 오른 건 알고 계시지요.”

“예.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30% 추가로 계산해서 드리지요.”

“대형 카타마란이라고 들었습니다. 어디에 계류하셨는지요?”

“항만이 복잡해서, 동쪽 방파제 인근에 정박 중입니다. 그쪽에 대형 카타마란은 한 척뿐이니, 바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마루가 말을 길게 하자 발음이 좀 티가 났는지, 바싹 마른 중년 남성의 얼굴이 아주 잠깐, 살짝 굳었다 풀어졌다.

“외국 분이십니까?”

“한국에서 왔습니다. 샬롯 그룹 배고요.”

마루는 한국이라는 말에 얼굴이 굳는 것을 보곤 샬롯 그룹 이름을 팔았다. 일본에서도 샬롯 그룹은 유명하니까. 확실히 효과가 있었는지, 중년 남성의 대응이 다시 부드러워졌다.

“아- 샬롯 그룹이요. 알겠습니다. 바로 연료 공급선을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추가 주문하신 것으로 비상 연료통 45리터짜리로 20개. 그렇게 해서 선수금으로는 얼마를 주시겠습니까?”

“일반적으로 선수금은 10%인데 20% 드리지요. 빨리 처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주시면 좋지요. 감사합니다. 최대한 빨리 보내드리겠습니다.”

마루는 캐리어를 열어, 1만 엔 묶음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놨다. 중년 남성이 끈으로 묶인 1만 엔 뭉치들을 보곤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영수증. 안 주십니까?”

“아. 네 죄송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중년 남성이 허겁지겁 영수증을 작성했다. 수기로 작성한 영수증에는 도장이 쿡. 찍혀 있었다. 거래를 끝낸 마루가 테이블에 놓인 신문 몇을 들며 가져가도 되냐고 묻자, 당연히 된다고 말하는 중년 남성이었다.

선박 주유소 사무실을 나오자, 사람들이 수륙양용자동차를 에워싸고 있었다. 예전이었으면 구경하는가 보다 하겠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좀 그랬다. 마루는 살짝 말라가는 입술을 슬쩍 축이며 말했다.

“실례합니다. 지나갑니다.”

말을 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허리춤에 꽂아 넣은 장미무늬 사시미와 중식도 손잡이로 손이 갔다. 마루는 한 번 꾹 쥐었다가 뗐다. 묘한 흥분이 조금 진정됐다.

‘좋게 하자. 좋게 가자. 좋게 한다.’

일이 터져도 주먹다짐으로만 끝나기를.

“어이. 이거 당신 거요?”

“그렇습니다만.”

마루의 고저 없는 대답에, 머리에 왁스를 발라 올백으로 넘긴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우리한테 팔지? 돈은 넉넉하게 줄 테니까.”

“파는 물건이 아닙니다만, 그래도 꼭 사고 싶으시다면 샬롯 그룹으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남자의 인상이 확 변했다.

“샬롯 그룹? 당신 샬롯 그룹 소속인가?”

“소속은 아니고, 샬롯으로 물건 배달 가는 사람입니다. 이것도 그쪽 물건이고요.”

“그래? 배달이라? 뭐 그렇다면야.”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양옆으로 비켜섰다. 마루는 수륙양용차량에 캐리어를 싣고 대형 전자제품 판매점으로 향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전자제품 판매점에는 사람이 없었다. 마루는 현재 쓰고 있는 공기청정기와 호환되는 필터를 넉넉하게 샀다. 이후 소방 용품점에 들러, 산소통을 구매했다. 생각보다 너무 비쌌고, 살 수 있는 수량도 적었다.

“코로나 때문에 산소 수요가 폭증해서 그렇게 됐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수량의 문제였기에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대형 산소통 4개를 추가로 구하는 데 성공했다. 충전 장비까지 샀으니 작은 산소통에 연결해서 충전하면서 쓰면 됐다.

‘연료 됐고, 산소 됐고, 공기필터 됐고, 방독면 정화통은 구하기 힘들고.’

짐칸을 정리한 마루가 수륙양용차 짐칸에 걸터앉아 신문을 펼쳤다. 대충 읽어보고 필요한 게 있으면 마저 살 생각이었다.

[큐슈 화산프론트, 연쇄 대분화!]

[큐슈에 있는 화산 연쇄적으로 분화. 큐슈에서 사상자, 실종자 다수 발생! 수색작업 난항!]

[지역 정부의 대책 미온적. 임시재난 정부와 연락 끊겨.]

[각자도생의 길로 가는 일본. 시코쿠 지역의 선택은!]

[큐슈 남부 관할 해상보안청 고속 순시선 침몰의 진실!]

[대재난을 틈타 중국이 일본을 침략하려고 하고 있다!]

크고 작고 빽빽한 글씨들이 신문 전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큐슈 지역에 있는 화산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항공 운항이 중단됐고, 큐슈 지역에서 전자기기와 자동차의 고장이 잦아졌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큐슈의 화산들이 터졌으니, 본토 쪽의 화산들도 언제 연쇄적으로 터질지 몰랐다. 필터를 넉넉하게 사길 잘했다 싶었다. 순간 사방에서 살살 느껴지는 불쾌한 감각. 마루는 신문을 접어 짐칸에 밀어 넣고 몸을 일으켰다.

그걸 본 올백 머리 남자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오- 눈치 좋은데?”

올백은 재킷 상의를 살짝 펼쳐, 안쪽에 있는 38구경 리볼버를 자랑하듯 내비치며 말했다.

“그거 열쇠 놓고 꺼져. 살려는 드릴게.”

마루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축였다. 느껴지는 것은 대략 올백을 포함해 7명. 멀리 느껴지는 건 이쪽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구경하는 사람일 가능성도 있었고.

무력화시키는 법은 모른다. 이제까지 손을 쓰면 반드시 죽였으니까. 마루가 손을 쓰고도 살아남은 사람은 유일하게 김 양 하나였다. 마루는 허리춤 뒤에 꽂아 놓은 사시미로 가려는 손을 억지로 멈춰 세웠다.

마루의 표정을 본 올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놈이!”

올백의 ‘고노래!’하는 외침과 함께 놈들이 달려들었다.

‘그래. 뽑지만 마라. 뽑지만.’

칼이든 총이든 뽑지 마라.

부웅-

크게 훅을 그리며 날아오는 주먹을 반걸음 다가서는 것으로 무력화시킨 마루가 무릎을 세웠다.

물컥?!

기괴한 소리를 낸 가랑이를 부여잡고 제자리에 주저앉은 올백. 말린 곶감처럼 쭈그러든 얼굴을 한 올백이 울부짖었다.

어어어엉!

막 달려들던 놈들이 그 모습을 보곤 뭐라 뭐라 외치며 뛰어들었다.

“죽어!”

‘시누’하면서 뛰어온 그 속도 그대로 날아올라, 이단 옆차기를 하는 놈. 마루는 슬쩍 중심을 옮겨 몸을 틀었다. 그리고 팔꿈치를 고이 접어 나빌레라 옆으로 휘둘렀다.

스핀 엘보우.

허망하게 지나가는 이단 옆차기의 중심을 스핀 엘보우가 크우직- 소리를 내며 스쳤다.

퍽-소리와 바닥에 처박혀 구른 놈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갔다.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꿈틀거리는 모습.

끄어- 으어- 우

‘이게 아닌데.’

마루는 해놓고도 이건 아닌 느낌이었다.

“이 새끼가!”

“죽어!”

두 사람이 널브러져 버둥대자, 마구잡이로 달려오던 녀석들이 갑자기 나이프와 베레타를 뽑아 들었다.

강한 살기!

마루는 반사적으로 몸을 빙글 회전시켜, 허리춤 뒤로 갔던 손을 휘둘렀다.

빡-

해골이 구멍 뚫리는 소리를 내며, 사시미가 한 놈의 머리통을 뚫고 들어갔다.

쩍-

빙글 회전한 중식도가 머리통 반절 가량 틀어박혔다.

막 마루를 공격하려던 나머지 3명이 순간 얼어붙었다.

마루가 ‘씨발 좆됐네.’ 하는 표정으로 사시미를 뽑아 들었다.

장미무늬 화사한 사시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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