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스트-81화 (81/280)

러스트 [RUST]-81

호텔 샬롯 사장의 얼굴은 초췌했다.

서로 찢어지고 고작 며칠 지났을 뿐인데, 무슨 한 달 넘게 고생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마루를 보곤 머리를 숙여 고맙다고 감사 인사부터 했다.

그래 이게 정상이지. 경호원2년이 비정상인 거고.

마루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감사 인사를 받았다.

“바로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위급환자가 있어서 조금 급하게 됐습니다.”

위급환자가 누구인지 주어가 없다는 건 이제 관용적인 표현 아닌가? 그러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뭐 주어를 말해줘도 사실이기도 하고. 꼭 두 사람이라고 할 건 아니지 않은가?

“저쪽으로 보낸 경호원이 심각한 중상을 당했는데 말입니다. 하츠네 아야코인가? 그 사람이요.”

경호원2의 얼굴과 대역 사장의 표정에 미세한 금이 갔다.

“작살이 영 좋지 않은 곳을 뚫고 가서요. 출혈이 잡히지 않아서 일단 고성능 순간접착제를 뿌려서 출혈을 막아 놓고 급한 대로 수혈하기는 했는데,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네요.”

그러니까 그 약이 있으면 꺼내 봐요. 어서.

그 약을 꺼내 준다고 바로 팽하거나 그러지 않아요. 마루는 착하고 조용한 걸 사랑한답니다. 무엇보다 주면 받고 받았으면 주고 그렇게 순리대로 사는 마루랍니다. 그냥 평화를 사랑하는 작은 하마루에요.

일단 기순이랑 김 양이랑 치료하고 경호원1도 치료하고 얼마나 좋아요. 우리 모두 환자부터 치료하고 손에 손잡고 도쿄로 가는 겁니다. 자- 어서 그 약을 꺼내 보아요. 어서!

“······.”

“······.”

“사장님. 이 사람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이 아저씨는 또 누구? 아저씨 한 명이 아니라 여럿이 있었다. 그 가운데는 제법 심각한 상처를 입은 사람도 있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그 약을 꺼냈다가는 눈치가 보인다는 건가?

“이 사람이 구하러 오지 않았으면 우린 여기서 잡혔어요.”

“하지만 이것도 저쪽의 작전···.”

마루가 활짝 웃으며 한 걸음 내디뎠다. 바닥에 깔리듯 떠올라 3m 거리를 단 한걸음에 이동하는 건, 착시나 마술 같았다.

“작전? 무슨 작전이요? 뒤통수 맞아서 기분이 나쁜 건 이해를 하겠는데요. 그래도 대놓고 앞에서 이러는 건 좀 아니죠. 작전이고 나발이고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푹 쉬게 하는 데 1분이면 충분하겠는데, 뭐가 아쉬워서 작전이랍니까?”

남자의 얼굴 바로 앞까지 간 마루가 환한 미소를 지우지 않고 말했다. 1분도 많이 잡았다. 작심하고 힘을 풀로 쓰면 이 좁은 공간에서는 도망치지도 못하고 순식간에 피바다 각이니까.

“아저씨 그냥 편히 쉬고 싶어서 그러세요? 어깨에 짐이 무거우면 이야기를 해요. 짐이 너무 무거워서 내려놓고 좀 쉬고 싶다고. 제가 무료로 도와드릴게. 괜히 옆에서 딴지 걸어서 여러 사람 피곤하게 하지 말고요. 그냥 편하게 말해요. 이제 푹 쉬고 싶다고.”

활짝 웃는 얼굴. 초점 없는 눈동자가 사내를 바라봤다. 그건 살아있는 사람을 보는 눈동자가 아니었다.

꿀꺽.

남자의 입이 한일자로 다물어졌다.

“뭐 여기 있는 사람들 믿고 이 사람들하고 계속 가신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만, 저쪽에 있는 경호원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한가한 사람은 아니고요.”

“그새 변했군요. 많이 변했네요.”

사장의 말에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변해야 하면 변해야죠.”

“그렇군요.”

사장은 뭐가 그렇게 고민이 많은지 말을 아꼈다.

자, 이제 판을 깔아 줬으니까. 약을 꺼내. 그 약을 꺼내라고. 여기 보는 눈이 많으면 따로 나가서 꺼내면 되잖아.

천진한 얼굴을 본 사장이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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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대로 약을 가지고 있었다. 작은 앰풀에 담긴 핑크빛 약.

두통이 생겼다. 남아있는 양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 앰풀인데 절반 정도 남아있는 양을 보니,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치료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부족해 보였다.

기순이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팔도 팔이지만 내상이 문제였다. 내상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갑자기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들었다. 약을 내놓으라고 핑계를 댄 경호원1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막말로 순간접착제로 지혈하고 수혈해서 목숨줄 붙여 놓고 있었다.

저 약을 전부 쓴다면 목숨줄이야 잡겠지만, 완치는 어려워 보였다. 뭣보다 약을 경호원1에게 다 써버리면? 그럼 기순이는? 반대로 기순이에게 쓴다면 내상 정도는 고칠 수 있겠지만 팔까지 치료하기는 부족해 보였다. 대신 경호원1은 푹 쉬게 될 거고.

골치가 아팠다.

“이걸로는 턱없이 부족해 보이는데요.”

직접 써봐서 알았다. 적은 양으로도 괄목할 만한 효과를 본다지만 양이 너무 적었다. 그렇다고 다른 의료시설이라든지 전문의가 있는 것도 아닌 상황이니, 그걸 대체하려면 더 많은 양이 필요했다.

사장은 말이 없었다.

더 없나? 정말? 배신의 위험이 있다는 걸 알았다며? 그럼 비상약은 더 챙겨왔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면 벌써 다 써버린 거? 약이 더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제일 간단한 방법은 찔러 보면 알 일이었지만, 진짜 없다면 뒷감당이 힘들었다.

정말 없어? 진짜? 사장을 바라보자. 경호원2가 사장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니, 뭘 그렇게 민감하게 그러시나 민망하게. 하- 가벼운 웃음처럼 숨을 뱉고 물었다.

“방법이 없겠습니까? 약이 부족하니, 수술을 하든 치료하든 가능한 방법이 있어야 할 텐데요.”

“···누가, 어느 선까지 배신했는지 확인하기 힘든 상황이라, 인근에 있는 병원을 이용하기는 힘들겠어요.”

사장이 지친 듯 말했다. 이거 정말 사장일까? 다시 본 그녀는 아무래도 위화감이 있었다. 그리고 초기에 약간 긴가민가했던 느낌도 조금 더 그랬다.

무엇보다 약. 그건 감출 수 없었다. 정말 사장이라면 1인분 아슬아슬한 분량만 가지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썼다고 하더라도 1인분 이상은 유지하고 있었겠지. 그러니까 남은 약은 대역이 마치 대역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할 미끼 같은 것일지도···. 글쎄 너무 나갔나?

“그래서 근처에 병원이 있기는 한다는 거죠?”

“샬롯이 후원하는 병원이 있어요.”

개판이 터졌어도, 병원이 남았다면 VIP실이나 수술실 같은 건 유지되고 있겠지. 그럼 가 볼 만 했다. 수술을 할 수 있다면 부족한 약을 나눠 써도 됐다. 직접 경험하지 않았는가? 치료받고 환부에 직접 사용했더니, 적은 양으로도 굉장한 효과를 봤었다.

“일단 그쪽으로 가지요.”

배신자들이 어쨌건 병원인데 수십 명 넘게 대기하고 있고, 막 그러지는 않을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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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마란 3층 콕핏. 김 양은 스코프를 통해 주변을 경계했다.

12.7mm 탄도 얼마 남지 않았고, 7.62mm 탄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까지 총을 쓸 일이 많을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 회사에 있을 때는 아무리 격한 임무라고 해도 탄창 하나 또는 둘 정도면 충분했다. 많아 쏴 봐야 20발 언저리?

총알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뒤부터 막 몸이 저리는 것 같았다. 하나둘, 하나둘 김 양은 왼팔을 옆으로 펼쳤다가 오므리며 나름대로 몸풀기 운동 비스므리한 행동을 했다.

[···에. 또··· 저기, 그··· 레이더?에 뭔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하는데요?]

이건 또 뭐 하는 거지? 김 양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느 방향입니까?”

[엣? 어느 방향이라니요?]

“뭔가가 어느 방향에서 오고 있습니까?”

[그러니까···]

“시계 방향으로 말하면 됩니다.”

[아- 네. 9시에서 10시 사이요.]

백정이 갔던 방향이었다. 김 양이 스코프로 9시 방향 어림에서 10시 방향을 살폈다. 멀리서 요트가 하나 접근하고 있었다. 지금 타고 있는 카타마란보다 훨씬 커 보이고 좋아 보이는 요트. 확실히 이쪽으로 직진하고 있었다.

도망쳐야 하나? 문제가 생기면 먼 바다로 나가라고 했는데.

[에엣!- 저기 오고 있는 거에 마루 상 타고 있다고 해요.]

뭔가 놀라는 듯한 간호사의 목소리, 김 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정이라면 배를 하나 잡아 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메가 요트에 탄 인원은 12명, 제법 많이 살아남았다. 사장과 경호원2를 제외하면 10명, 중상자는 3명, 경상자 2명. 5명은 멀쩡했다. 그리고 멀쩡한 사람들 전부 요트를 몰 줄 아는 승무원이었다. 일단 한 명을 카타마란으로 불러 운항을 맡기기로 했다.

그렇게 잠시 뒤, 메가 요트와 카타마란이 부유물로 복잡한 바다를 서서히 밀고 올라갔다.

샬롯이 후원하는 병원은 일본 전역에 많이 있었다. 지금 가는 곳은 근처 도시에 있는 병원이었다.

“여기도 쓰나미에 쓸렸나 봅니다.”

마루에게 강제 휴식을 당할 뻔했던 남자가 심 사장에게 말했다.

“그렇겠지요.”

직접적인 남방 대지진의 영향권, 그러니까 난카이 드래프트의 영향권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쓰나미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항구도시는 반파됐고, 콘크리트 건물 3~4층에 묻은 흔적으로 보면 8~10m는 될 법한 쓰나미가 덮쳤다고 봐야 했다.

“시게사키 병원은 힘들 것 같습니다.”

바다에 가까운 병원은 힘들다고 봐야 했다.

“도난 병원으로 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군요.”

쓰나미로 진흙탕이 된 곳이 많았다. 들어찬 바닷물이 빠지지 않았기에 가기도 힘들었다. 안으로 더 들어가야 한다는 소린데···. 솔직히 불안했다.

“뭐. 수륙양용차가 있으니까 충분히 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럴 때를 대비해서 힘들게 싣고 온 거 아니겠는가?

사장이 함께 가니, 마니 잠시 실랑이가 있었지만, 사장과 경호원2는 배에 있는 것으로 이야기됐다. 문제가 생기면 사장의 지휘 아래 바다로 도주, 이후 병원팀과 합류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그렇게 도시로 향한 수륙양용차량은 두 대. 이쪽은 마루, 김 양, 기순, 경호원1 그리고 차량을 운전할 사람으로 호텔 샬롯 아저씨 하나. 이렇게 5명. 저쪽은 운전사 1명, 중상자 3명, 경상자 1명. 이렇게 5명. 모두 10명이 병원으로 이동했다.

근접 호위는 마루가, 경계는 김 양이 맡기로 해, 마루가 탄 차량이 먼저 출발했다.

철퍽-푸르륵

부루루루루룩

반쯤은 물이고 반쯤은 흙탕인 곳을 수륙양용차량이 헤집고 지나갔다. 한참 진창을 굴러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자, 저 멀리 바다에 배가 보였다. 조금 멀찍한 곳에 메가 요트와 럭셔리 카타마란이 나란히 정박한 풍경은 사뭇 평화스러워 보였다.

고개를 돌리자 반대쪽 풍경이 보였다. 평화로운 바다와는 달리 처참한 광경이 언덕 아래 펼쳐져 있었다. 목조 건물은 거의 전부 폭삭 주저앉아 있었고, 물이 빠지지 않은 곳은 그대로 진창이었다.

바닥은 물바다인데 위는 불이 붙어 타오르는 곳도 있었다. 뭔가 이상한 점은 사람들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작지 않은 도시인데 언뜻 봤을 때 사람이 없어 보였다.

“사람이 없는데요?”

“전부 대피했을 겁니다.”

전부 대피소로 이동했거나 지대가 높은 곳에서 경과를 보고 있을 거라고 운전사가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사람이 없나?

“병원은 어느 쪽이죠?”

“저쪽입니다. 여기서도 보일 겁니다. 근방에서 제일 큰 건물이니까요. 아- 보이네요. 저 건물입니다. 15층짜리.”

저 멀리 큰 건물이 보였다. 7~8층짜리 아파트 건물? 일본에서는 맨션이라고 하나? 그런 건물들 사이에 있는 건물이었다.

“이 속도라면 3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겠습니다.”

수륙양용차량이 잔해와 흙탕을 헤치고 병원으로 향했다. 도난 병원은 약간 높은 지대에 있어 피해를 피한 것 같았다. 간호사를 납치했던 병원에서 봤던 풍경이 비슷하게 펼쳐져 있었다. 오면서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여기 다 있는 것처럼 바글바글했다.

“응급실이 폐쇄됐군요.”

운전사가 골치 아프게 됐다는 듯 말했다. 응급실도 응급실이지만 주 출입구도 완전히 닫혀있었다. 병원 관계자도 보이지 않았고, 방화벽과 셔터까지 내려져 있었다.

조용하다던 일본인들이 셔텨를 두들기며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여차하면 폭력 사태로 번질 것 같은 분위기. 이미 저쪽 구석에서는 패싸움하고 있었다. 이미 폭력 사태인가?

1층은 글러 보였다. 그럼 지하는?

“지하로 가보죠.”

“물이 들어차지 않았을까요?”

마루는 대답 대신 타고 있는 수륙양용차량은 툭- 쳤다. 물이 적당히 찼다면, 오히려 지하엔 사람이 없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하라면 문을 따고 들어가도 다른 사람들까지 따라 들어올 가능성도 적었고.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도 차단 셔터를 내리려고 했던 흔적이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지하에서 밖으로 나오려던 차량이 중간에 걸려 셔터가 중간에 멈춰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들어간 지하는 생각대로였다. 여기저기 물이 들어찼다 빠진 흔적이 역력했다. 그리고 지금도 아주 느리게 물이 빠지고 있었다. 배수펌프가 작동되고 있다는 소리. 배수펌프가 작동하고 있다는 소리는 비상 발전이든 뭐든 전력이 유지되고 있다는 의미였다.

“방화차단벽이 내려가 있군요.”

“이쪽도 잠겨 있습니다.”

지하를 한 번 돌았지만, 열린 출입구가 없었다. 밖에서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완전히 폐쇄한 것 같았다. 간호사를 데려온 병원에서는 그나마 관계자가 나와서 교통정리를 하려는 시늉이라도 했었다. 근데 여긴 지하까지 완전히 닫아걸고 있었다.

“김 양. 이거 열 수 있지?”

김 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작은 C4를 꺼내 들었다. 굳게 닫힌 방화문이었지만, 김 양의 작은 C4 앞에서는 어림도 없었다.

낮은 폭음과 함께 방화문 문고리가 깨끗하게 날아갔다.

역시 김 양.

마루가 엄지손가락을 척 올렸다.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G···.’

조그맣게 중얼거리던 김 양이 고개를 휙- 돌렸다.

방화문 안쪽은 조용했다.

녹색과 하얀색 비상등만 켜져 있고 복도의 불은 전부 꺼져있었다. 톡톡- 김 양이 깁스한 오른팔을 권총으로 살짝 두들겨 낮은 소리를 냈다. 김 양이 고갯짓으로 천정을 가리켰다. CCTV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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