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 [RUST]-83
따끔한 살기.
살기 크기로 보면 작은데, 농도가 진하다고 해야 할까? 손톱 밑에 가시처럼 껄끄러운 기운이 콕콕 찔렀다. 찌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명치에 카운터를 꽂아줬던 젊은 의사가 노려보고 있었다.
이름이 구리다였던가? 구라다였던가? 이름도 꼭 그런 놈이 눈빛 보소. 내가 죽였나? 지가 죽였지. 왜 지랄인지 모르겠네, 마루는 고개를 까딱였다.
원독에 찬 눈빛. 저런 눈빛을 한 사람은 영 찝찝했다. 최 실장이 그랬다. 뭘 잘한 게 있다고 그렇게 노려보는지.
저거 저러다가 사고 치는 건 아니겠지? 애인을 제 손으로 보내고는 힘든가 본데, 이산 애인 상봉회 열어주는 게 좋을까?
치익-
[지금 올라가겠음.]
“O.K. 대기중.”
2층 엘리베이터 앞, 중상인 간호사가 먼저 1 수술실에 들어갔고, 이쪽은 2 수술실, 3 수술실이 대기중에 있었다. 나머지 의사들은 뭐라고 할까 딱히 믿음이 가는 스타일로 보이지 않았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수술 실적은 열혈 중년 의사보다 좋다고 했다.
이래서 아이러니하다. 인성과 실력이 항상 정비례하는 건 아니라는 것. 수술 잘하는 의사가 인성도 좋으면 얼마나 좋겠냐만, 사실 그게 그리 쉬운 건 아니었다. 하긴 지금 상황이라면 인성보다 실력이 더 중요한 상황이긴 했다.
띵-
[문이 열립니다.]
엘리베이터 2개가 동시에 열리며 김 양이 나왔다. 기순이도 정신을 차렸는지 약간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뭔 인상을 쓰고 그래. 병원에 왔으면 웃어 인마.”
“진통제. 진통제 놨는데도 이러는 거냐?”
“왜? 아프냐?”
“졸라 죽겠다.”
“어디가 아픈데?”
“씨발- 배랑 등이랑 팔이랑 전부 아프다.”
“그러게 폼은 왜 잡고 지랄이야.”
“몰라. 씨발···.”
얼굴빛이 좋지 않은 걸 보니, 좀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병원에 왔으니, 다행이었다.
“엑스레이 찍고 바로 CT 찍겠습니다.”
의사랑 간호사랑 기순이를 데려갔다. 저쪽에 있던 경호원 1도 같이 이동했다. 중상자 3명은 그나마 여유가 있는지, 다음 순서로 들어간다고 했다.
김 양은 기순이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보곤 뻘쭘한 자세로 있었다. 뭐 좀 뻘쭘해도 됐다. 이유야 어쨌든 기순이한테 헤드샷 때리지 않았는가? 방탄모에 22구경이라서 망정이지 본래 김 양이 즐겨 쓰던 9mm 철갑탄이었으면, 뭐.
“······.”
“······.”
“···저.”
“너···.”
“먼저···.”
“뭔데···.”
아- 타이밍이 왜 이래?
“너 팔도 치료하라고. 그거 보기에 영 불안불안하네.”
“아. 네.”
“그럼 할 말이 뭔데?”
“그 기순 씨 말입니다.”
“기순이가 왜?”
“그 제가 꼭 관심 있다는 건 아닌데 말입니다.”
마루의 눈매가 좁아졌다. 김 양이 화들짝 깁스한 오른손을 흔들며 부정했다.
“정말이지 말입네다. 아니, 진짜로 말입니다.”
“그거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 하던데?”
“진짜. 정말 아닙니다. 그저 자기 취향이 확고하다고 해서, 어떤 취향인지 궁금해서 그냥 그랬습니다. 정말입니다.”
“기순이 취향? 여자?”
김 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참. 여자가 남자들 여자 취향을 알아서 뭐 하게. 아? 여자니까 남자의 여자 취향을 알아야 하는 건가? 뭔가 그럴 듯한데? 하는 표정이 된 마루였다. 하긴 남자도 여자의 남자 취향을 알아야···. 그렇군.
“그건 걔한테 직접 물어봐.”
“아- 예.”
어딘가 푹- 삭은 숨을 쉰 마루가 밖을 봤다. 해가 중천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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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순과 경호원1이 검사하는 동안, 마루와 김 양 그리고 운전사 2명은 병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검사실, 수술실, 채혈실을 비롯해 제약실, 임상병리실 같은 구역을 확보하고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감염자들은 일단 바리케이드가 쌓인 쪽으로는 어지간해서는 달려들지 않았다. 큰 소리가 나거나 뭔가 강한 자극을 받지 않으면 그저 무시하고 자기가 있던 자리 근처를 배회하거나 제자리에 서 있거나 그냥 그랬다.
“이상하네요.”
“그러게.”
뭔가 영화에서 나오는 좀비 같은 것도 아니고, 자극받으면 미쳐 날뛴다는 점을 생각하면 순간적으로는 좀비보다 더 지랄 같기는 한데, 어떻게 보면 훨씬 나은 거 같기도 하고.
좀비는 뚝배기를 깨야 무력화됐지만, 감염자들은 과다출혈이라든지 다른 일반적인 급소를 공격해도 무력화됐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은 부분은 또 비슷했고.
“굶어 죽지는 않는 걸까요?”
김 양은 역시 그쪽이 궁금했다. 굶어도 될까?
“그건 확실히 이상하네.”
마루도 동의했다. 보통 인간은 공기 없이 3분, 물 없이 3일, 식량 없이 3주 정도를 버틸 수 있다고 했다. 감염 사태가 터지고 3일은 더 지났으니, 물 없이 3일 법칙은 깨진 상황. 감염자들은 이제 인간이 아니란 건가?
“입을 보면 뭔가 먹기는 먹었을 겁니다.”
운전사가 말했다. 그렇게 보면 입 부분에 뭔가 거하게 흔적이 있는 거로 봐서는 먹기는 먹은 거 같았다. 안 보고 있을 때 몰래 먹나? 어쨌든 큰 자극만 주지 않으면 별일 없으니까 다행이었다.
“구경은 여기까지 하고요. 3층 MRI 검사실이랑, 그 근처까지 정리합시다.”
마루가 사람들을 이끌고 3층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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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미.
김 양은 마루의 칼질을 보곤 살이 떨렸다. 그냥 저건 살 떨렸다. 평화롭게 배회하고 있는 감염자 근처로 슥- 가더니 푹-하면 감염자가 얌전하게 누웠다. 심지어 피도 별로 나오지 않았다.
칼질도 발전할 수 있는가? 누군가 묻는다면 고개를 들어 백정을 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아니 애초에 저걸 칼질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도 의문이었다.
목뼈를 끊는 것 같은데, 신경만 딱 끊는 게 가능한지 저걸 보고 알았다. 칼질을 두 번 하는 것도 아니었다. 감염자들은 눈을 몇 차례 껌벅거리다 잠잠해졌다. 그전에도 사람 새끼 같지 않았지만. 점점 뭔가, 뭔가·· 뭔가··· 여하튼 그랬다.
‘저, 저걸 보라니까.’
처음에는 동물적인 반사신경에 장난 아닌 힘으로 썰고 다녔다면, 점점 발전하더니 탈인간급 힘과 운동능력을 보여줬다. 얼마나 무식하게 썰어댔는지, 칼날이 부러지고 요/트를 해버리다 못해 막 붕붕 날아다녔다.
오죽하면 백정 스스로 자기 몸이 붕괴된다고 할 정도로 그랬었다. 듣고 바로 이해했다. 그러고도 멀쩡하면 그건 생명체가 아니었다. 그렇게 이 세상 사람의 칼질이 아닌 저세상 칼질을 보여준 백정이었다.
근데, 지금 저 모습을 보라.
저건 그냥. 뭔가, 이질적이었다. 저것도 칼질이 늘었다고 해야 하나?
무슨··· 푹-하고 찌르곤 뒤에서 살짝 받아준다. 조용히 눕는 감염자. 다시 옆에 있는 놈을 푹- 그리곤 옆에 뉘어준다. 살기는 없었다. 소리도 없었다. 반항도 없었다.
그냥 농부가 밭에서 지나가다 옆에 있는 방울토마토 하나 똑 떼는 느낌.
아- 또 소름 돋았어.
간혹 선공형 감염자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큰 위험이 없는 이유라면 칼 하나는 미친 듯 잘 다루는 백정이 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막 선공형 감염자가 ‘크아아아!’ 비명 지르고 달려들려고 한다 치면, 앞에 ‘크-’도 하기 전에 푹- 하고 조용하게 만들었다.
아- 눈 마주쳤다.
놀면 안 됐다.
퉁-퉁-
아니, 잠깐 구경한 거라고-요. 진짜.
퉁-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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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소리 지르려고 입 벌리는 감염자를 정리했다.
이런 건 뒤에서 백업하는 김 양이 먼저 처리했었는데, 혹시 문제가 생긴 건가? 슬쩍 돌아보자. 김 양이 열심히 여기저기 총질하고 있었다. 발터 P22가 부지런히 탄피를 뱉었다.
기분 탓인가?
음.
일단 3층에서 중요한 시설은 확보됐다고 봐야 했다. 간호사들 말대로 진료실과 환자들이 대기하는 복도에는 감염자들이 많았다. 이건 좀 이상했다. 환자들과 보호자들은 거의 다 감염됐는데, 감염된 의료진은 아직 보지 못했다. 감염된 의료진은 진료실 안에서 나오지 않나? 아니면 초기 사태 당시 맞아 죽었거나?
일단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이쪽 복도 막고 여기까지 하죠.”
[치직- 예. 이쪽도 거의 마무리됐습니다.]
3층 MRI실과 분석실, 신장투석실, 인공심폐 수술실이 있었다. 여기까지 확보했으니 수술이 커지더라도 큰 문제는 없겠지.
저쪽 복도를 막은 사람들이 막 정리를 끝내 놓은 이쪽 복도로 왔다. 감염자를 정리하면 사람들이 복도 안쪽으로 시체를 밀어 넣고, 바리케이드를 쌓는다. 그럼 끝이었다.
“자 먹고 합시다.”
식자재가 많이 남아있어 풍성하게 먹을 수 있다고 하더니 확실히 이것저것 많이 나왔다.
흐미.
김 양은 다시 기묘한 감탄사를 낼 수밖에 없었다. 백정은 먹는 속도도 속도지만 양이 어마무시했다. 아 저렇게 먹어야 저럴 수 있는 건가?
백정이랑 눈이 마주치자, 어쩐지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래. 먹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폭풍 같은 식사 시간이 끝나고, 바리케이드를 쌓던 병원 사람들이 뭔가 할 말이 있는지 머뭇거렸다.
“예? 무슨 일이죠?”
“바리케이드 밖으로 밀어 놓은 시체들이 계속 사라집니다.”
밀어 놓은 시체들이 잠깐 다른 곳을 작업하러 갔다 오면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아- 이 사람들은 아직 모르고 있나?
“그거 걱정할 거 없습니다. 건너편 감염자들이 어디론가 치운다고 하더라고요.”
“예? 감염자들이 시체를 치운다고요?”
“어디로 말입니까?”
그게 왜 궁금한지 모르겠지만, 마루도 몰랐다.
“뭐 어디로든 치우지 않겠습니까? 바리케이드는 다 쌓으셨고요?”
“3층은 다 쌓았습니다.”
“저, 확실하게 안전을 확보하려면 엘리베이터 층수를 조절해 놓는 게 좋지 않을까요?”
15층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불안한지, 15층 엘리베이터 앞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지만, 어쩌겠는가?
“엘리베이터 층수 조절이요?”
“예.”
그러니까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층수를 조절할 수 있다고 했다. 수동으로 할 때는 마스터키를 이용해 각층을 잠가 버리면 잠긴 층은 엘리베이터가 서지 않고 그냥 통과한다고 한다. 아니면 통제실로 가서 엘리베이터 운행 변경시키면 된다고 했다.
1층부터 15층까지 다니면서 마스터키로 일일이 잠그고 열고 할 건 아니었다. 뭣보다 마스터키가 있는 곳이 1층 통제실인데, 가면 해결될 일 아니던가? 문제가 있다면 1층은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는 건데.
올망졸망 쳐다보는 병원 사람들을 보니, 급 귀찮아졌다.
2층 3층 확보했으니까 수술하는 데는 문제 없었다. 수술 끝나면 바로 뜰 텐데, 여기다 뭘 더 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여기서 버티고 있을 것도 아니고.
“아니, 뭐 지금까지 별일 없지 않았나요? 감염자들이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온 적 없었다면서요?”
그래서 엘리베이터가 올라오자 화들짝 놀라서 창으로 푹-했다면서? 뭔 겁이 그렇게 많은지, 확인도 하지 않고 찔러 놓고는 감염자는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오지 않았었다? 그럼 왜 푹-했는데? 아무리 경황이 없다지만, 제정신들이 아니었다.
귀찮아하는 모습을 대놓고 보이자, 병원 사람들이 전전긍긍했다.
김 양도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수륙양용차를 운전한 운전사 생각은 달랐다.
“중간 거점을 하나 만든다고 생각하면 괜찮지, 싶습니다. 무엇보다 옥상에 있는 헬기 착륙장은 좋은 시설이더군요.”
중간 거점이라. 여기서 도쿄로 간다고 생각하면 중간 거점이 될 거 같기도 했다. 옥상에 있는 헬리콥터 착륙장. 최대 4대의 헬기가 동시에 이착륙할 수 있고, 항공유 보급과 간단한 수리까지 가능한 정비창이 있는 곳은 흔하지 않았다.
그렇다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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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른 문제 없이 도착한 1층 통제실, 손잡이를 돌리자, 역시 잠겨 있었다.
똑-똑-
음.
똑-똑-
아무도 없는 건가? 있기는 있는 거 같은데.
감각을 집중하니, 문 안쪽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뭔가.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기존에 느꼈던 살기와는 조금 다른 찝찝한 느낌이었다.
일단 문을 따봐야 상황을 알겠다.
통제실이라고 특별히 강한 문은 아니었다. C4로 김 양의 흉내를 내, 문을 땄다. 뻑-하는 폭발음과 함께 문짝이 날아갔다. 뽀얀 먼지와 함께 안에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반사적으로 칼이 먼저 나가버렸다.
푹-
휘리릭-
찌르고, 내리 가르자.
후두둑.
잘리는 소리와 함께
털썩.
조용히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