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 [RUST]-86
바리케이드를 밀어낸 자국.
그 끝에는 사지를 결박하는 찍찍이가 떨어져 나간 채, 나뒹구는 병상이 있었다.
어떤 개 병신이···.
자세히 살펴보니 구속하겠다고 붙여둔 찍찍이가 그냥 떨어진 게 아니었다. 날카로운 것으로 부분부분 잘려있었다. 그러니까 누군가 일부러 구속 벨크로를 찢었다는 건데.
병신이 아니라 사이코패스인가?
좋지 않았다. 사이코패스가 기껏 만들어 놓은 거점을 지랄 내고 있었다. 1~3층에 안전 구역을 만들어 놓고 15층까지 엘리베이터로 이동해서 헬기 구조까지 기대할 수 있게 되자, 이런 사단이 터졌다.
일단 사건 발생 당시 1층에 있지 않았던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감염자가 1층에 들어와서 5명 아니, 6명을 죽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의료진들과 직원들이 웅성거렸다. 방송으로 코드 블랙이니 그레이니 했던 게 감염자가 들어와 사람들을 해친 일이었다니.
“감염자가 바리케이드를 뚫고 들어왔다는 소립니까?”
“질문 잘하셨네요. 그건 아니고요. 어떤 미친놈이 감염자를 잡아 와서는 풀어줬더라고요.”
“예?”
“그게 사실입니까?”
“설마. 사람이 그럴 리가···.”
“그렇게 말하는 증거. 증거는 있습니까?”
마루가 날카로운 것으로 잘린 벨크로를 앞으로 던졌다.
“거기 보면 알겠지만, 구속 벨크로를 날붙이로 자른 것 보이죠? 사건 근처에서 발견한 병상에 있던 겁니다.”
“큼- 아니, 말은 그렇지만, 이것만 가지고 뭘 어떻게 압니까?”
“이건 고정용 벨크로 아닙니까? 병상에 고정할 때 쓰는.”
“대제 누가? 이런 짓을···.”
“이것만으로는 알 수 없지 않습니까?”
“6명이나 죽은 사건인데 미친놈의 짓이라는 증거가 이거 하나라면, 너무 확대하여 해석한 것 같습니다.”
증거를 눈앞에 들이밀어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마치 조작된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무력에 기대도록 만들려고 자작극을 벌인 것은 아닌지 속닥이는 사람도 있었다.
반응이 좀 뭐라고 할까 더럽다고 할까. 기순이랑 경호원이 치료될 때까지만 버티면 되는 건데, 그냥 기순이랑 경호원을 1층으로 옮긴 뒤 막아버릴까?
수륙양용차량이 지하 1층에 있었고, 통제실과 기계실이 1층에 있었다. 식당은 3층과 1층에 있으니, 1층과 지하 1층을 차단해 버리고. 엘리베이터 하나는 2층, 3층, 15층 이렇게 운행하게 하고 다른 하나를 지하 1층, 1층, 옥상. 이렇게 운행하도록 하면 서로 엮일 일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어쩔까.
“아- 뭐 다른 말 하려고 하는 건 아니고요. 여기 계신 분 말고는 믿지 말라는 소리를 하고 싶었던 겁니다. 1층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니까 말이죠. 지금 여기 계신 분들은 1층에 있지 않았던 분들입니다. 서로 얼굴들 확인하시고. 알아서 대책들 세우세요. 이렇게 하겠다 하는 게 있으면 지금 말하세요.”
“?”
“!”
사람들이 마루만 쳐다봤다.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왜 이렇게 답답하지?
“아니 어쩌라고요. 제가 뭐라도 되는 사람도 아니고. 여러분들 인생은 여러분들이 사는 거 아닙니까? 안전 구역 만들었더니, 웬 미친놈이 감염자 잡아다가 풀어 놓는 마당에.”
“······.”
“······.”
판을 깔아 줬더니 다들 합죽이가 됐나? 조용하네, 이거야 원.
“왜들 조용합니까? 이야기들 나누시라니까요.”
“······.”
“······.”
아- 갑갑하네, 정말.
“미친놈 혼자서 그랬겠습니까? 바리케이드 혼자 밀 수 있는 거 아니죠? 거기에 감염자 잡아서 병상에 눕혀서 끌고 오려면 누군가 도운 사람이 있겠지요? 그래서 1층에 있던 사람들 전부 용의자라 이겁니다.”
“······.”
“······.”
“그걸 말해줬더니 뭐 증거가 있네, 없네. 그럴 리가 있네, 없네. 저한테 매달리게 하려고 자작극 이내 어쩌네. 수군거리는데 어이가 없어서. 제가 무슨 돈 받고 이랬답니까? 뭐 일단. 범인이 미친놈이든 사이코패스든 뭐든 알아서들 하시고요. 다른 의견은 없는 것 같으니, 1층은 지금부터 출입제한 들어가겠습니다.”
“뭐요? 1층이면 기계실과 통제실, 방송실이 있는데 거길 통제한다는 건 병원 시설 전체를 통제하겠다는 소리요?”
“맞습니다. 1층을 통제하면 전체를 통제하는 것 아닙니까? 방송실도 1층에 있는데 말입니다.”
“아?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출입제한이 아니라 통제하면 되겠네요. 지금부터 통제하겠습니다. 불만 있으신 분은 4층이랑 5층 감염자 정리해서 안전지역 만들어 놓고 말씀 하시면 됩니다.”
좋은 생각이었다. 사이코패스든 미친놈이든 범인 찾는다고 그럴 거 없이 간단하게 해결하면 될 일이었다.
“사이코패스든 미친놈이든 뭔 짓을 할지 모르니까, 통제 들어갑니다. 통제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제가 오기 전으로 돌아가는 거로 생각하시면 서로 편합니다. 아셨죠? 어차피 저 없었으면 15층에 모여 있었을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전부 15층으로 올라가서 내려오지 마세요.”
2층이랑 3층은 두려고 했는데, 그냥 원래 있던 대로 15층에 몰아놓고 엘리베이터를 끊어버리자. 그럼 문제없겠지. 사이코패스든, 범인이든, 꼬운 사람이든 할 말 있으면 바리케이드 치우고 감염자들 사이를 뚫고 한 층씩 걸어서 내려오든가.
“전부 15층으로 갑니다. 지금.”
마루가 칼을 뽑아 들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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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직- 그러니까 2층 안전 구역을 전부 확인하는 겁니까?]
“그래. 아직 15층으로 가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잡아놔.”
[예? 올려보내-치직- 말고 잡아두란 말입니까?]
“어. 묶어놔. 여차하면 무릎을 쏴버려. 죽여도 되는데 왜 그랬는지 이유나 알고 죽이고.”
뭔가 찜찜했다.
[알겠습니다.]
“무조건 두 번 말하지 말고, 쏴. 또라이 새끼가 있는 거 같으니까. 낌새가 이상해도 쏴.”
[···알겠습니다.]
“좋아. 수고하고.”
김 양도 감이 좋으니까 어디에 짱박혀 있어도 찾아낼 것이다. 부산 샬롯 아저씨들이랑 같이 돌면 여차할 일도 없었다.
마루는 1층 통제실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지하 1층, 2층, 3층만 왕복하도록 바꾼 뒤 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도 방화벽을 내려 막았다. 이제 1층은 완벽히 차단된 상황.
통제실 문을 열쇠로 잠근 뒤, 1층 로비에 있는 기다란 벤치를 가져와 통제실 앞에 쌓았다. 안쪽에 빈 깡통도 살짝 끼워 넣어, 통제실에 놓인 벤치를 치우면 소리가 나도록 했다.
1층에 뭔 놈이 있는지 보자고.
마루가 후- 작게 가늘게 숨을 뱉었다. 고요하게- 느리게- 집중해서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걷자, 그림자가 걷는 것 같았다.
재난 구호품 보관실 바닥엔 시체가 있었던 흔적이 채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피 냄새가 빠지지 않아 후각이 자극됐다.
감각에 집중했다. 옅게 느껴지는 무엇. 사람인가? 느낌이 달랐다. 사람은 아니다. 그럼 뭐지? 시체를 정리한 의료진과 직원들, 구호품 보관실을 청소했던 직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재난 구호품 더미 속에서 느껴지는 무엇, 분명히 뭔가 이 아래 있었다. 마루는 쌓여있는 비상 배낭을 치웠다. 그 아래 숨겨진 것이 드러났다. 병상에 묶인 감염자. 한 명도 아니고 무려 넷이나 있었다.
“씨발. 아주 본격적이었네.”
푹- 푹- 푹- 쑥-
병상에 묶여있던 감염자 시신을 밖으로 빼낸 뒤, 마루는 조용해진 보관실 문을 잠갔다. 그렇게 확인하고 문을 잠그기를 반복하던 중, 복도 밖 로비에서 바스락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마루는 조용히 발소리를 죽이고 움직였다. 1층 외래진료 접수대 아래에서 느껴지는 기척. 고양이가 점프하는 것처럼 소리 없이 떠오른 마루가 접수대 위로 올라섰다.
슥-
이것저것 뭔가를 정리해서 배낭에 넣고 있는 여의사의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물건을 배낭에 넣은 여자가 고개를 드는 순간을 노렸다.
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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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그랑!
깡통이 튕긴 소리가 복도를 찔렀다. 그래. 여자 하나만 있을 리가 없지.
[치익- 1명 사살, 2명 사로잡음.- 2층- 총 3명.]
“수고했어. 3층 정리도 부탁해. 1층에 지랄이 좀 나서.”
[···삐- 알겠음.-칙-지지ㅁ-]
김 양이랑 아재들이 가니까 3층도 됐고.
가운을 입었으니까 의사겠지? 아니, 의사가 아닐 수도 있겠다. 그냥 일반인 여자라면 15층에 올라가라는 반쯤 협박을 무시하지 못했을 테니까. 사이코패스인지 범인인지 돌아다닐지도 모르는 1층에 혼자 남아서 뭘 챙기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의심스러웠다.
병원에 임상병리학실과 이런저런 실험실 연구실이 붙어 있어서, 산학협동인지 산의협동인지 하는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생각보다 지랄 같은 건가? 이것저것 할 게 많아지면 짜증 나는데 계속 뭔가 기어 나왔다.
“어이, 너희들은 15층에 있지 않고 뭐냐?”
양복을 입은 두 사람이 통제실 문 앞에 놓인 벤치를 치우겠다고 낑낑대고 있었다.
“······.”
“······.”
칼질 소문을 들었을 텐데도 반항을··· 하네?
철제 3단 봉과 테이저건을 뽑아 들고 자세를 잡는 두 사람. 폼을 보니 허당은 아닌 것 같았다. 칼질하는 소문들 듣고도 저런다는 건 자신 있다는 건가? 죽이지는 말아야 하는데, 어떻게 힘을 빼나 고민하는데 두 사람이 앰풀 주사기를 꺼내 자기들 목 부분에 꽂았다.
푹-
'어? 저거 뭐야?'
순식간에 변한 분위기, 기운, 느낌.
마루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혀로 축였다.
오싹오싹한 느낌. 뭔가 약쟁이들 느낌도 나면서 이게 뭐지?
그거 같은데?
버서커 폴이라고 했던 샬롯 그 약하고도 비슷한 거 같고. 제 정신인 걸 보면, 항구에서 만났던 약쟁이들이랑은 다르고.
눈이 아주 충혈된 건 아니었지만, 동공의 확장과 수축이 비정상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열쇠 내놓고 꺼져.”
삼단봉을 든 남자가, 낮게 으르렁댔다.
마루가 빙글, 한 단어로 대답했다.
“조까.”
대답과 동시에
팍!
남자가 휘두른 삼단봉이 바로 마루의 머리 위로 튀었다.
까딱, 고개를 흔들어 피하자 수직으로 내리꽂히던 삼단봉이 직각으로 방향을 틀었다. 슥- 미끄러지듯 옆으로 움직이는 마루, 그걸 쫓아오는 삼단봉의 동그란 끝. 한쪽 벽으로 몰고 있었다.
벽으로 몰리자, 테이저건이 발사됐다. 파직- 얇은 전선을 끝에 달고 쏘아진 바늘. 마루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커지며 전신의 신경이 하나로 연결된 것처럼 찌릿했다. 후우웅- 날아오는 테이저건의 바늘. 피할 곳을 막는 것처럼 휘둘러진 삼단봉. 피할 곳이 막힌 벽.
하-아- 짧게 끊기는 숨소리와 함께, 마루의 다리가 옆의 벽을 밟았다. 탁- 가벼운 소리. 첫 발걸음으로 벽을 타서, 탁- 두 번째 걸음으로 천장을 밟아, 공중에서 아래로 내려찍듯 내려왔다.
고기 썰리는 소리와 함께 테이져건을 쥐었던 손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손목을 자른 칼날이 다음 목표를 향했다. 휘둘러진 삼단봉의 끝, 삼단봉을 쥔 사내의 오른팔을 향해 미끄러지는 칼날.
팅! 칼이 막히는 소리. 삼단봉에서 불꽃이 튀었다.
탱! 탱! 팅!
손목. 머리. 손목. 이어지는 연격. 놈이 노리는 건 마루가 아닌, 마루가 들고 있는 칼이었다. 뭐로 만든 삼단봉인지 칼날이 깨지고 있었다.
‘이 새끼가.’
약을 처맞아서 그런지 반사신경, 반응속도, 힘이 좋았다.
‘아주 그냥 풍년이야 풍년.’
지랄도 풍년이고 시발도 풍년이고 이래서 일본에 지진도 쓰나미도 태풍도 풍년이었나 보다.
‘벤다. 힘을 빼고. 더 살짝.’
힘을 빼고,
팅! 강하게 두들기는 삼단봉의 끝을 살짝 옆으로 밀어내면서 한 걸음.
가볍게.
더 빠르게.
티이이이이이- 두들겼던 삼단봉을 회수하는 것을 따라가는 칼끝.
크읏! 사내는 회수했던 삼단봉을 좌우로 흔들며 칼끝을 뿌리치려 해보지만, 스윽스윽 삼단봉을 피해 뱀처럼 좌우로 미끄러져 내린 칼끝이 삼단봉을 쥔 팔뚝에 닿았다.
살짝 폭-하고 닿은 칼끝이 독사처럼 팔뚝을 물더니 순식간에 팔뚝을 휘감았다. 손목에서 팔꿈치로 휘릭 감겨버린 칼날.
팔뚝에 붙은 살덩이가 토시처럼 발라져 떨어졌다.
끄아아아악!
뻑!
비명 지르는 주둥이에 훅을 꽂았다. 턱이 니은 모양으로 틀어지며 잠잠해졌다. 팔뚝이 발골된 것처럼 변한 동료의 모습을 본 사내가 딸꾹질하기 시작했다.
“야. 손목. 거기 지혈부터 해.”
딸꾹. 딸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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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종합병원이니까 빨리 치료하면 손목이든, 살 좀 발라낸 팔뚝이든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희망을 줘야겠지, 비닐 팩에 손목이랑, 팔뚝 살을 포장해 아이스박스에 넣었다.
“묻는 걸 제대로 대답하면, 잘린 손목 치료받게 해주지.”
“······.”
“대답 잘해야 할 거야. 저기 기절한 새끼 일어나면 같은 질문 할 거거든 대답이 다르면 수술해야 할 손목이 두 개가 될 거다. 재수 없으면 발목까지 덤으로 할 수 있겠고.”
“······.”
“좋아. 감염자들 너희들이 잡아 왔냐?”
“그래.”
“왜?”
“······.”
시작부터 힘들게 가네, 그림이나 뭐 글씨를 써야 할지 모르니까 발목부터.
“···잠깐. 잠깐만.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빨리해야 할 거야. 절단된 부위 봉합하는 건 빠를수록 좋은 거 알지?”
“감염자들이 이성을 잃고 쉽게 흥분하는 일들이 빈번해졌다는 건 알고 있나?”
“계속해. 되묻지 말고. 그냥 쭉-.”
“칙쇼- 감염자들 가운데 치매 현상을 일으키는 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변이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이 또 다른 변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면서 나타난 증상이었다. 그 증상이 처음에는 단순한 치매인 줄 알았지.”
분노조절 장애에 지능 저하도 지랄인데 이젠 치매까지?
“단순한 치매가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감염된 뇌가 물리적으로 변형됐다는 증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뇌에서 분비되는 호르몬도 변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도 나왔지. 그리고 호르몬이 변했다는 건, 그 변한 호르몬이 인체에도 영향을 준다는 의미다. 치매는 그 변화가 시작됐다는 초기 증상이었을 뿐.”
얼씨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