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스트-92화 (92/280)

러스트 [RUST]-92

헬기 안이 적막에 빠졌다.

김 양도 순간 놀랐는지 뻣뻣해지며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쓰나미는 지랄.’ 낮은 독백을 뒤로 마루가 느긋하게 말했다.

“그거 뽑으면 사장이랑 같이 죽는다?”

일렁이던 그림자가 딱 굳었다.

[치직- 지··· 지금 뭡니까? 방금 소리.]

“아, 별일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헬기 조종사가 뒤를 보더니 경악했다.

[신경 쓰지 말라니, 무슨 말입니까? 사장님은 어디에···? 설마···.]

“설마는 무슨 설마요.”

그림자에서 분노를 억누른 목소리가 나왔다.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경고.”

잠시 뻣뻣하게 굳었던 김 양이 ‘역시 백정.’, ‘망설임 없지.’ 이런 표정으로 마루를 힐끗 보고는 아래 검은 바다 위에서 흔들리는 주황색 조끼를 살폈다.

“당신 미쳤습니까···?”

“안 미쳤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죽일 생각이었으면 이러지 않았지, 그러니까 눈에서 힘 빼. 아저씨 야마츠키 신약 본사 위치 알죠?”

[······.]

“대답이 없으시네.”

김 양이 자기도 모르게 마루의 바지를 잡았다. ‘참으셈.’, ‘여기서 헬/기를 해 버리면 안 된다고.’ 필사적인 눈빛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루가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사장님만 비밀 연구실 들어갈 방법을 아십니다.”

“알아.”

“알면서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조용히 해. 알고 있으니까. 아니면 너도 지금 내릴래?”

“······.”

“좋게 말로 할 때, 사람 말을 들읍시다.”

“······.”

“이제 다시 경고 안 합니다. 알았죠?”

“손에 머리 들고 푹 쉬고 싶지 않으면 약속대로, 계획대로, 머리 굴리지 말고 하기로 한 대로, 그냥 하면 되는 겁니다. 아셨죠? 들이대지 말고.”

“······.”

“대답?”

“···알았습니다.”

“좋아. 믿어 봅니다? 아저씨 헬기 고도 낮춰요. 빨리 내려가지 않으면 위험하니까 서두르시죠.”

헬기가 고도를 낮췄다. 검은 바다 위에 동동 떠 있는 형광 구명조끼가 눈에 들어왔다.

“그거 벗고 이거 타고 내려가서 건져야지? 저 양반 안 건져?”

일렁이던 공간에서 머리가 쏙 나왔다. 분함이 가득한 얼굴. 조막만 한 얼굴이 빨갛게 변해있었다. 마루가 무심하게 호이스트 케이블에 달린 삼각 벨트를 내밀었다. 광학 은신 로브를 벗은 경호원이 팍- 소리가 나도록 삼각 벨트를 잡아챘다.

“내려 줄 테니까 알아서 잘 잡고. 아저씨 지금 아래 주황색 조끼 보이죠? 건져 올릴 테니까 계속 최대한 내리세요.”

[치직······]

헬기가 위치로 이동하자, 마루가 호이스트를 움직여 경호원을 아래로 내렸다.

“김 양아.”

갑자기 부르는 목소리에 김 양이 화들짝 놀랐다.

“이거 챙겨. 쓰는 법은 이따 알려줄게.”

경호원이 벗어 놓은 광학 은신 장비를 발로 슥- 김 양 앞으로 밀었다. ‘이거 괜찮은 건가? 대놓고 슈킹인데?’

“괜찮아. 괜찮아. 죽을 걸 살려줬는데, 이런 거 하나는 받아야지.”

설마, 이걸 노리고 사장을 던진 거? 죽이고 뺏으려면 망가지니까? 정말 그런 거? 김 양의 눈이 팽글 돌았다.

경호원이 아래에서 사장을 잡았다고 손을 흔들었다. 위잉- 낮은 모터음과 함께 사장과 경호원이 올라왔다. 콜록-콜록- 기침하는 사장, 입에서 조금 피를 흘리고 있었다. 기절했을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독한 사람이었다. 한참을 숨 고르던 사장이 입을 열었다.

“···왜죠?”

“사장님은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요. 그에 대한 경고입니다.”

이게 무슨 소린가? 헬기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진짜 미쳤나? 감염됐나? 뇌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니지? 사장과 경호원과 김 양이 서로를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루가 헬기 조종사를 다그쳤다.

“아저씨 도쿄로 가자니까요.”

[치직······.]

헬기 조종사가 고개를 돌려 사장을 봤다. 안 가면 진짜 뭔 짓을 할지 몰랐다. 사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헬기가 도쿄 방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제가 무슨 모욕감을 줬다는 거죠?”

“간 보지 마세요. 제가 호구로 보입니까? 하기로 한 거 하면 되는데 왜 자꾸 간을 보려고 그럽니까? 아까 경호원에게도 말했지만, 이제 다시 경고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냥 하기로 한 거 하고,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으면 되는 겁니다. 예? 괜히 목숨 걸지 말자고요.”

까득- 손톱을 뜯은 사장이 다시 기침했다. 낮게 울리는 기침 소리.

“아저씨 야마츠키 신약이 아니라 다카이치 제약부터 가야겠는데요? 거기도 위치 알죠?”

‘이거 어쩌나? 본의 아니게, 치료제가 필요할 거 같은데?’

마루가 매우 걱정스럽다는 말투로 조종사에게 말했다.

[··· 치직- 다카이치 제약 본사로 방향을 바꿉니다.]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 양은 이게 설마 전부 백정의 설계인가? 기순이랑 치료제가 아쉽다고 그러더니 정말? 뭔가 내가 알던 백정은 그런 백정이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얼굴로 광학 은신 장비를 가방에 쑤셔 넣다가 경호원과 눈이 마주쳤다. 뭔가 대놓고 훔치다가 걸린 것 같은 뻘쭘함에 쑤셔 넣던 손이 느려졌다.

“어. 이건 전부, 어 그러니까.”

“아- 괜찮다니까. 괜찮죠?”

안 괜찮으면 어쩔 건데? 마루가 경호원을 가늘게 쳐다봤다. 잠깐 눈싸움하던 경호원이 고개를 돌렸다.

“거봐 괜찮다잖아.”

‘어. 그게 괜찮다는 뜻은 아닌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면서 은신 장비를 가방에 후딱 쑤셔 넣는 김 양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실 엄청나게 갖고 싶었던 템이었다. 은신에 저격 조합 총잡이의 로망 아닌가?

힐끗 경호원을 봤다가도, 가방 속에 담긴 걸 생각하면 뿌듯해졌다가도, 백정을 보면 ‘이 백정이 왜 갑자기 이럴까.’ 싶기도 했다가도. 표정을 관리하느라 얼굴에 쥐가 날 판이었다.

콜록- 콜록- 기침 소리가 낮게 울렸다.

“얼마나 걸립니까? 최대한 빨리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삐익- 최고 순항 속도로 가고 있습니다. 다카이치 제약 본사까지 걸리는 시간은 35~40분 정도입니다.]

혹시라도 모를 위험을 피하고자 고도를 높여 이동했다.

고도를 높이자 기침이 조금 더 잦아진 사장이었다. 낙하에 의한 충격이 생각보다 컸던 모양. 그래도 다행인 것은 수평으로 철퍼덕 빠졌다면 내장 파열로 골로 갔을 텐데, 용케 치명상은 피한 것 같았다.

“콜록- 그래서, 병원장과 사람들은 왜 그런 거죠? 콜록-”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경호원이 힘쓰지 말고 쉬라고 말렸지만, 사장은 마루의 대답을 듣겠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사장은 그 병원에서 벌어진 일을 모르나?’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통신 끊기고 사실상 교통편도 끊긴 상황이었으니까. 병원장과 연구진들의 독단이었을지도.

마루는 담담하게 병원을 안전지대로 만든 일, 감염자의 변이 상황이 드러난 사건, 그걸 이용하고 연구하겠다고 병원 1층에서 벌어졌던 미친 사태를 설명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사장은 잠시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생각을 마쳤는지 눈을 뜬 사장이 묘한 얼굴로 마루를 봤다. 이해가 간다는 듯한 표정이기도 했고, 약간 이상한 사람을 보는 눈빛이기도 했다. 사장이 뭐라고 하는 것이 듣기 싫었던 마루는 사장의 눈빛을 피해 창문 밖 어두운 도시를 내려봤다.

‘이게 도쿄 인근이라고?’

불빛으로 가득했어야 할 대지가 까만 어둠에 잠겨 있었다. 간혹 보이는 불빛은 화재로 건물이 타오르는 불빛이 대부분. 전기가 복구되지 않았다는 점도 이상했고, 사람들이 불을 켜지 않고 있는 것도 이상했다.

‘등화관제는 아니겠고, 전자기장 터졌다고 하는 게 여기까지 영향을 줬나?’

그러면 터진 범위가 좀 이상한데?

깜깜한 도시는 마치 종말에 잠긴 것 같았다.

[잠시 후, 다카이치 제약 본사 인근 상공에 도착합니다.]

마루는 가만히 칼손잡이를 잡았다. 찝찝했던 기분이 조금은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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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중심부에서 조금 떨어진 항만 근처에 다카이치 제약 본사가 있었다.

주변은 쓰나미와 대지진으로 초토화된 상황이라 착륙할 장소를 찾기 어려웠다. 다카이치 제약 본사 건물은 겉으로만 봐도 붕괴 위험이 있었고, 인근의 높은 건물들도 마찬가지였다.

“최대한 가까운 건물에 헬기를 착륙시키고, 움직이죠. 층수가 낮은 건물로 튼튼한 건물 주변에 없습니까?”

헬기가 고도를 낮춰 주변을 살폈다.

“저기. 오른쪽. 3층 마트 건물 옥상에 착륙하죠. 가능합니까?”

[가능합니다. 지대가 낮아서 물이 안 빠진 것으로 보이는데 괜찮겠습니까?]

“상관없습니다. 내리고 나면, 주변에 높은 건물로 가세요. 일 끝나면 연락하겠습니다.”

[치- 알겠습니다.]

착륙할 건물 찾는다고 주변을 돌아서 그걸 본 사람들이 몰릴 가능성도 있었다. 헬기는 다른 곳으로 가는 게 맞았다.

쓰나미로 밀려왔던 물이 전부 빠지지 않은 틈에 움직이는 게 좋았다. 쓰나미를 피하려고 도망쳤던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으려면, 물이 완전히 빠지지 않은 지금 이동하는 게 맞았다.

쿨럭-

큭-

경호원이 사장을 부축해서 이동했지만, 점점 느려졌다. 고작 100m 남짓한 거리를 걷는데 10분이 넘게 걸렸다. 그래도 마루는 사장을 업거나 경호원을 도와서 부축하지 않았다. 찝찝함이 더 진해졌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어디로 갑니까?”

다카이치 제약 본사 건물이 바로 보이는 교차로. 사장은 힘겹게 고갯짓했다. 그걸 알아들은 경호원이 사장을 부축해 다카이치 제약과 마주한 작은 빌딩으로 들어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폭이 좁고 길게 생긴 빌딩이었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안내데스크 뒤로 폭이 넓은 계단과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계단은 중간 부분이 차단벽으로 완전히 막혀 깊게 물이 고여있었고, 엘리베이터도 발목 위까지 올라온 물로 가동이 불확실해 보였다.

“쿨럭- 이걸로-”

사장이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풀어 경호원에게 줬다. 펜던트인 줄 알았더니 일종의 열쇠였나 보다. 경호원이 엘리베이터가 있는 벽면 한쪽을 누르자 키패드가 튀어나왔다. 사장이 미리 말해줬는지 순식간에 16자리 비밀번호를 누르는 경호원. 조금 뒤 낮은 소리를 내며 열쇠 구멍이 열렸다.

철컥.

경호원이 열쇠를 돌리는 것과 동시에 열린 엘리베이터 안쪽으로 아직 빠지지 않은 물이 밀려들어 갔다. 경호원은 마음이 급했는지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열쇠로 엘리베이터를 조종했다.

윙-윙-

지하로 깊게, 깊게 내려가는 탄광용 승강기를 탄 느낌. 지하로 내려갈수록 그래, 더럽다고밖에 달리 표현할 도리가 없는 그런 기분.

‘기분 진짜 줫같네.’

대지진이나 쓰나미가 왔을 때와는 다른 느낌에 마루의 신경이 곤두섰다. 커다란 엘리베이터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던 김 양이 가방에서 주섬주섬 광학 은신 로브를 꺼내 들고서 살랑살랑 마루의 앞에 흔들었다.

광학 은신 로브를 열심히 흔드는 김 양. 언제 방독면을 꺼내 썼는지 방독면까지 챙겨 쓴 모습이었다.

“아- 이거 쓰는 법 알려준다고 했지. 안쪽 중간쯤 보면 조작 패널이 있어. 그래 거기. 휘어지는 패널이라 그 부분이 밖에서 보면 조금 위화감이 있으니까. 최대한 아래쪽이나 그림자가 있는 쪽으로 향하도록 하고, 후면에는 카메라 때문에 티 나니까 이동할 때 조심하고.”

“알겠음.”

김 양이 팔을 쭉 뻗어 엄지척을 하려다가 슥-내리곤 광학 은신 로브를 뒤집어썼다. 이윽고 마루의 그림자 근처가 일렁거렸다. 확실히 이런 쪽으로는 적응이 빠른 김 양이었다.

“뭔가 느낌이 더러우니까, 준비 단단히 해. 내가 섬. 하면 바로 섬광탄 던지고. 최. 하면 최루탄 까는 거다.”

“수류탄은? 수?”

“여기서 수류탄을 터트리자고?”

“아-?! 실수임.”

지하로 쑥 내려간 엘리베이터는 문이 열린다는 안내 방송도 없이, 낮은 금속음을 토하며 문을 열었다. 영화에서처럼 뭔가 환하고 밝을 거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붉은 비상등이 켜져 있는 침침한 터널이 펼쳐졌다.

후-

뭔가 붉은 비상등 불빛에 섞여 공기 중에 떠다니는 것 같았다.

“사장님. 사장님!”

다 왔는데 사장의 의식이 깜박깜박하는 것 같았다. 다 왔다고 긴장을 풀었나? 확실히 눈이 점점 풀려가는 게, 정신을 잃을 듯 보였다.

사장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경호원은 마루를 한번 찐하게 노려보곤. 사장을 둘러업었다. 작은 몸집의 경호원이 자기보다 머리 반개는 더 큰 사장을 업고 앞장섰다.

‘저쪽으로.’

마루가 김 양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마루 근처에서 일렁이던 그림자가 복도 한쪽으로 스며들었다. 폭이 6~7m는 될 법한 터널을 ㄹ자 형태로 돌아가자, 원형 금고문 같은 커다란 문이 나왔다.

경호원이 비밀번호를 찍고 열쇠까지 꽂은 뒤, 사장의 손바닥과 눈동자까지 스캔하자 모터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풀렸다.

“잠깐. 여기 경비원 같은 건 원래 없었나?”

주변을 경계하던 마루가 경호원을 부르는 순간, 끼이이- 금속음과 함께 두꺼운 문이 열렸다.

덜컹.

활짝 열린 동그란 문 안쪽은 캄캄한 어둠이었다.

사사사사

사각사각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깊은 어둠 저쪽에서 밀려왔다.

“씨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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