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 [RUST]-96
김 양은 어쩐지 하늘이 보고 싶었다.
눈을 들어보니 깜깜한 하늘이 웃고 있었다. 그래 고개를 들어도 깜깜하구나. 대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그냥 찢어지자고 한 거냐? 백번 양보해서 찢어지는 건 좋은데, 헬기 타고 같이 가다가 중간에 내렸으면 큰일 나는 거였니? 응?
“뭐가 불만이야?”
“······.”
존나게 걷는 것도 불만이고, 너님이 꼴리는 데로 한 덕에 뺑이치는 것도 불만이고. 그냥 내 인생이 불만이세요. 그러니까 그만 볶아.
“그래서 야쿠자 빌딩까지는 얼마나 걸리는데?”
“그냥 계속 걷다 보면 나옴.”
닥치고 걸으셈!
도쿄 번화가까지 가야 한다고 보면, 도쿄 항만 근처에서 거기까지 지하철로 10~12정거장쯤 되니까 한 20~25km 정도만 걸으면 되겠네. 5~6시간 쭉 걷다 보면 나옴. 이게 다 백정 탓임. 헬기로 가면 10분도 안 걸릴 거리를···.
‘무거움.’
‘개 무거움.’
그나마 수류탄이랑 섬광 폭음탄 무게가 줄어서 다행이었다.
마루는 봉인된 금속 상자를 생각하면서 걷고 있었다.
[···도와주세요···]
[···구해주세요···]
뇌리에 직접 꽂히는 소리.
귀를 통하지 않고 뇌에 직접 생각을 전달하는 능력을 텔레파시라고 한다면 분명 그것은 텔레파시였다. 어쩐지 위험하지 않을 것 같은··· 꼭 도와줘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드는 텔레파시.
그래서 문제였다. 정말 위험하지 않다면 접근금지라든지 위험이라든지 그런 딱지들을 덕지덕지 붙여 놓지 않았을 테니까. 왜 볼 수도 없게 꼭꼭 밀봉해 버렸을까?
말이 통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텔레파시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것을 어째서 위험하다고 했을까? 왜 그렇게 봉인하듯 금속 상자에 가둬놨을까?
마루는 단순하게 생각했고 판단은 빨랐다. 그리고 그 판단을 바퀴들이 도와줬다. 바퀴를 핑계로 연구소 전체를 소각해 버렸으니까.
‘죽었을까?’
소각은 증거 인멸을 위한 장치일 테니 전부 태워버렸을 것이다. 사실, 살았든 죽었든 그게 뭐든 무슨 상관인가? 마루는 마음 편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근데 언제까지 걸어야지?
“앞으로 얼마나 걸어야 하냐?”
“···한참. 오래···.”
“오래 걸리면, 저기서 좀 쉬었다 가자.”
사방이 폐허였지만 길가에는 무너지지 않은 빌딩이 제법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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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졌다.
두 대의 헬기가 폐허가 된 도쿄 상공을 지나가고 있었다. 날이 환해지면서 보이는 도쿄의 모습. 폭격이라도 맞은 것 같은 도시가 드러났다. 주택가에 붙은 불이 사방으로 번져서 마치 산불이 난 것처럼 변한 지역도 있었다.
‘끝났군.’
최 전무는 회백색으로 번들거리는 칼을 닦으며 생각했다. 이 정도로 초토화됐다면, 재건하기 어려웠다. 인프라 전체를 재건해야 할 판인데, 재건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또 다시 지진이나 쓰나미가 터지면?
[치- 3시 방향! 3시 방향 확인 바람!]
최 전무가 창문을 통해 3시 방향을 확인했다. 멀리 먹구름 같은 것이 몰려오고 있었다.
“저게 뭐야?”
최 전무의 중얼거림에 옆에 앉은 직원이 쌍안경을 건넸다. 거리가 좀 있어서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새 같았다.
“까마귀? 까마귀 떼다.”
[까마귀가 저렇게 몰려다닌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습니다.]
직원들도 신기하다는 듯 까맣게 몰려다니는 까마귀 떼를 구경했다. 그렇게 잠시 쌍안경으로 검은 구름을 보던 최 전무가 갑자기 외쳤다.
“고도 높여!”
[예?]
“당장 고도를 높이라고! 지금 당장!”
[알겠습니다. 고도 높입니다.]
헬기가 휙 기울어지며 높이 날아올랐다. 따라오던 헬기가 어리둥절하다가 무전을 받고 뒤따라 고도를 높이기 시작했지만 늦었다.
까아아악
깍까아악
벌떼가 덮치는 것처럼 까마귀 떼가 고도를 채 높이지 못한 헬기를 덮쳤다. 헬기 프로펠러가 수백 마리의 까마귀를 갈아버렸지만, 까마귀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헬기에 달라붙었다.
순식간에 그대로 추락하는 헬기. 까마귀 떼에 묻혀버린 헬기에서 질러대는 비명이 통신라인을 가득 채웠다.
[으아아악]
[살려줘!!!]
쿠웅-
추락한 헬기에 시꺼멓게 달라붙은 까마귀들.
‘뭐야···. 저건.’
‘까마귀들이 방사능을 처먹고 단체로 돌았나?’
‘저런 거 본 적 있으십니까?’
고도를 높여 까마귀 떼를 피한 직원들이 나지막하게 웅성댔다. 최 전무가 쌍안경으로 추락지점을 살폈다. 생존자가 헬기 밖으로 나왔다가 산채로 까마귀밥이 되는 모습이 보였다.
‘이건 또···.’
최 전무는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시체도 아니고 산 사람을 까마귀가 공격해? 까치나 까마귀가 사람 머리를 때리고 도망쳤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살아있는 사람을 뜯어 먹는다는 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 충격적인 모습에 헬기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이제 곧, 다카이치 제약 인근입니다.]
“샬롯에서 연락 없었고?”
아무도 추락한 헬기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최 전무도 마찬가지였다.
[예. 도쿄쪽 라인과 통신이 끊겼다고 연락이 온 것 빼고는 없었습니다.]
“하- 정말- 답답하네.”
어쩌다 이렇게 됐나? 통신이 끊겼으면 단가? 지원해주기로 했으면 무슨 방법을 쓰든 지원을 해줘야 할 것 아닌가?
“지금부터 작업 들어가려고 하니까 무슨 방법을 쓰든 인원 보충해 달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그럼 착륙하겠습니다.]
다카이치 제약 본사 건물은 지진으로 타격받은 흔적이 너무 커서, 헬기가 착륙하지 못했다. 주변을 배회하던 헬기가 낮은 건물에 착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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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눈을 붙였더니 피곤이 좀 가신 김 양이었다. 백정이 왜 쉬었다 가자고 한 걸까? 백정 체력이면 계속 갔어도 됐을 텐데. 아니지 아니야. 김 양은 도리도리 흔들었다.
‘저건 백정이다. 저건 백정이다.’
마음이 착해지고 영혼이 평안해졌다. 그렇게 백정 놀이하고 있는데 어스름한 하늘 저 멀리 헬기가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방향이 막 걸어온 쪽이었다. 그러니까 다카이치 제약 방향? 김 양은 다리를 쭉 뻗어 발가락 끝으로 마루의 엉덩이를 쿡 찔렀다.
‘오-’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펄떡 일어나 칼을 뽑은 마루가 주변을 살피더니 ‘왜 깨웠냐?’ 얼굴로 김 양을 봤다.
‘저쪽. 저거 슈킹?’
김 양의 눈빛을 본 마루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왜?’
‘거기까지 돌아가는 도중에 헬기 뜨면? 다시 여기까지 터덜터덜 돌아오게?’
그렇기는 하지만, 헬기인데?
“자동차는 도로가 개판이라 쓰기 힘들 거 같다. 아까 올라오면서 봤는데 여기 밑에 자전거 있더라 그거 타고 가자.”
그렇다면야.
김 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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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이치 본사 건물.
지하 실험실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사람들이 무장을 점검하고 있었다.
“샬롯 애들은?”
“곧 도착한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몇 명이야?”
“4명입니다. 아- 저기 저 사람이 보안과장입니다.”
고작 4명? 10명도 아니고? 최 전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4명을 더해야 간신히 10명인데, 이 인원으로는 그놈을 잡는 건 어려워 보였다. 놈의 힘을 빼놓으려면 최소한 40~50명은 필요했는데. 이대로 놈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위험했다.
“다들 조끼 입었지?”
최 전무의 말에 직원들 표정이 어두워졌다.
“왜 대답이 없어! 다들 입었어?”
“예.”
까보라는 말에 직원들이 하나씩 입고 있는 조끼를 보였다. 네모난 찰떡처럼 생긴 것들이 조끼에 달려 있었다.
“좋아. 여차하면 알지?”
“···예.”
“엘리베이터 열어.”
윙- 낮은 소리와 함께 열리는 엘리베이터. 훅- 뜨거운 열기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뿜어졌다.
바스락-
후둑-후두둑-
엘리베이터 전장 틈으로 떨어지는 손바닥만 한 바퀴들. 바퀴들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버르적 알집을 떨어뜨렸다.
콰직-
최 전무가 그대로 바퀴와 알집을 한 번에 짓밟았다. 뭐야 이건? 바퀴가 왜 이렇게 커? 그리고 엘리베이터는 왜 이렇게 뜨거운 건데?
“아무래도 비상 소각 장치가 가동된 것 같습니다.”
보안과장이라는 사람이 말했다.
“소각 장치?”
“예. 아무래도 비밀 실험실인지라···.”
최 전무도 알고 있었다. 홍과장이 운영하던 영업장에도 그런 걸 해놨었으니까. 그럼 이미 늦었다는 건가? 샬롯 호텔 그년이 먼저 먹고 튀었다고?
“나가린가?”
“아-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것을 보면, 소각 장치가 가동된 지 얼마 안 됐을 겁니다.”
“그래서?”
“코드를 입력하면 소각 처리를 멈추고 소화 장치를 켤 수 있습니다. 서버실이야 이미 늦었겠지만, 비상용 서버와 핵심 시설 쪽은 아직 괜찮을 수 있습니다.”
“좋아. 다행이네. 할 수 있나?”
“코드만 알면 가능합니다. 이쪽 시설 보안은 제가 손봤거든요.”
일이 풀리려나? 최 전무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전기를 보안과장에게 건넸다. 보안과장은 본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더니 엘리베이터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잠시 뒤 안내데스크에서 불쑥 패널이 솟아올랐다. 비상 패널에 코드를 입력하고 또 뭔가를 계속 입력한 보안과장이 무전기를 최 전무에게 돌려줬다.
“됐습니다. 소각 절차가 중지됐고 지금 소화 중입니다. 열기가 빠져나갈 때까지 잠시 기다리시면 됩니다. 확인해보니, 일반 실험실과 숙소, 식당, 휴게실, 통제실, 서버실은 늦었지만, 비밀 실험실과 비상 서버실은 절반 이상 건졌습니다.”
“좋아. 가자.”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열기가 식겠지.
바삭-
콰직-
바닥에 밟히는 소리와 함께 대형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는 직원들이었다.
“다들 무장은 점검했지?”
“예.”
“소각 절차가 진행 중이었으니 별다른 위험은 없겠지만, 오인 사격하지 않도록 정신 똑바로 차리고.”
“예!”
위이이잉- 낮은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스로 급속 소화를 시켰는지, 열기와 냉기가 뒤섞인 공간. 사방에 탄 흔적이 가득했다. 반쯤 숯이 된 시체와 바삭하게 구워진 바퀴벌레들이 사방에 널려있었다.
“바퀴가 왜 이렇게 많아?”
“사람들이 있는데도 그냥 소각해 버린 겁니까?”
“미친년이네.”
“와, 이거 정말.”
끔찍한 광경에 직원들이 한마디씩 던졌다.
“다들 지도 확인했나? 2인 1조로 전부 훑고, 중요하다 싶은 게 있으면 싹 쓸어온다.”
직원들을 보낸 최 전무가 회백색 칼을 뽑아, 반쯤 타버린 시체를 쿡 찔렀다. 살이 익어서 그런지 뻑뻑한 감촉이었다. 푹- 푹- 서걱- 찌르고 자르고를 몇 번 반복한 최 전무가 칼날을 살피곤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저번에 쓰던 칼보다 훨씬 좋았다.
전에 쓰던 칼도 좋았지만, 신소재로 만든 이 칼은 차원이 달랐다. 이 칼이라면 놈을 잡을 수 있었다.
[치직- 최 전무님- 여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와 보셔야 하겠습니다.]
“어딘가?”
[A-1 실험실입니다.]
“지금 가지.”
투명한 유리방에서 철창이 있는 방으로, 철창으로 된 방에서 완전히 사방이 폐쇄된 방으로 그리고 마지막에 있는 금속 상자. 소각 대상이었는지 고온의 불꽃으로 인해 얼룩덜룩 변색되어있었다.
“뭐가 이상한가?”
“여기 안에서 뭔가 소리가 납니다.”
“소리?”
최 전무가 금속 상자 쪽으로 가까이 갔다. 순간 뇌를 휘젓는 느낌. 뭐라고 알 수 없는 의미가 머릿속을 흔들었다.
[···■■■!,■■!,■■■■■!!!]
큭-
“이건?”
증오인가?
증오 하나가 아니었다. 분노, 살의, 갈망이 뒤섞인 감정. 최 전무는 머리를 흔들며 뒤로 물러섰다. ‘뭐야 이건.’ 최 전무가 눈살을 찌푸렸다.
“거기 뭐 하는 건가?”
직원 하나가 멍한 표정으로 금속 상자를 향해 팔을 뻗었다.
“야! 거기! 멈춰!”
최 전무가 칼을 뽑으며 외쳤다. 그러자 옆에 있던 직원이 최 전무의 팔에 매달렸다. 최 전무는 반사적으로 팔에 매달린 직원의 얼굴에 주먹을 때려 넣었다.
팍- 한 방에 코뼈가 주저앉고 코피가 흘렀다.
“안 놔?”
퍽- 퍽- 빠악-
주먹질과 엘보우에도 최 전무의 팔을 물고 늘어지는 직원. 얼굴이 피떡이 됐는데도 무표정했던 직원의 얼굴이 변하기 시작했다. 길게 찢어지는 입꼬리. 기괴하게 웃는 표정으로 변하는 모습.
“이 새끼가!”
섬뜩한 느낌. 쌔한 느낌에 최 전무가 힐끗 주변을 살폈다. 금속 상자에 손을 뻗은 직원이 꿈틀대고 있었다. 우직쿠직-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나며 팔부터 조금씩 금속 상자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최 전무가 쥐고 있던 칼을 놓았다. 툭 떨어지는 칼을 발등으로 쳐 왼손으로 잡은 최 전무가 오른팔에 매달린 직원의 목에 칼을 박아 넣었다.
‘이래도 안 놔?’
목에 칼이 박혔는데도 점점 강해지는 악력으로 최 전무에게 달라붙은 직원. 손가락 끝이 조금씩 최 전무의 근육을 파고들었다. 마치 목숨을 불태워서 팔을 잡아 뜯겠다는 듯했다.
“씨발!”
부욱- 칼을 지렛대처럼 써서 직원의 목을 썰어낸 최 전무가 욕설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