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스트-97화 (97/280)

러스트 [RUST]-97

빌딩 1층 한쪽, 자전거들이 빼곡하게 세워져 있었다.

김 양은 멋있게 빠진 자전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가, 내려놓은 짐을 보곤 한숨 쉬었다. 느릿하게 뒤에 짐을 실을 수 있는 자전거로 손을 뻗는 모습.

“이- 개-”

트퍽-크퍽-

꾸진 자전거 주제에 왜 이렇게 질긴 자물쇠를 달아놓은 거야? 김 양은 잠금장치를 향해 총알을 박았다. 영화나 소설 같은 거 보면 이런 자물쇠는 총알 한 방이면 금방 따지던데.

부그곽!

기괴한 소리에 총알을 박아 넣던 김 양이 움찔 마루 쪽을 봤다. 잠금장치뿐 아니라 자전거까지 토막 낸 백정이 날이 완전히 나가버린 칼을 들고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애달픈 표정.

그거 함부로 칼 뽑고 칼질하고 그러더니 쌤통이다. 김 양은 고소한 맛을 숨기지 않고 총질을 계속했다. 크직- 낮은 소리와 함께 연결부위가 부서진 잠금장치. 거봐 총이 짱이라니까.

쓰나미와 지진의 여파로 곤죽인 도로를 자전거 두 대가 나란히 달리는 모습.

걷는 것보다야 자전거가 훨씬 편하기는 했지만, 속도를 내긴 어려웠다. 날이 환해져 강제로 주변을 관람하며 이동하는 꼴이라 기분이 좋지 않은 두 사람이었다.

“······.”

“······.”

하늘에서 봤을 때는 폐허라고 생각했었는데, 엉망이 된 도로를 타고 가며 보는 풍경은 단순한 폐허가 아닌 끝이었다. 문명의 끝.

인프라가 무너져 부상자나 희생자를 수습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전자기파까지 터졌다, 전화나 인터넷을 쓸 수 없으니, 경고도 경보도 없었다. 쓰나미가 덮치는 순간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당한 흔적들, 진창에서 수습되지 않은 시체가 널린 풍경은 종말이 이곳에 강림한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전조 증상이 없던 게 아니었다. 마루가 업장에서 일할 때도 대지진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다뤄졌고, 대책을 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계속 있었다. 그런데 대비는 고사하고 이런 결과라니 어쩌자는 건가 싶었다.

뭔가 자연스럽지 않았다.

그래.

지금도 그렇다.

왜 이렇게 사람이 없지?

김 양도 뭔가 불안한지 주변을 살피며 갔다.

“쓰나미 때문에 다들 대피했을까?”

“모르겠음.”

거의 3시간 가까이 자전거를 타고 가는 동안 마주친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건 확실히 이상했다.

“아직도 멀었냐?”

“···다 왔음. 저기 유리창 반쯤 터진 빌딩.”

도쿄 번화가는 확실히 외곽지역과 달랐다. 주택가는 거의 70~80%가 무너졌는데, 빌딩들은 생각보다 많이 남아있었다.

“계단은 이쪽.”

김 양이 앞장서서 야쿠자 빌딩에 올랐다. 목적지는 7층과 8층. 김 양이 알기로 일본 야쿠자는 돈이 되는 일이면 뭐든 한다고 했다. 마약, 매춘, 도박, 유흥업은 당연했고 사설탐정, 흥신소, 직업 알선, 밀항과 밀수, 이민, 신분 세탁을 비롯해 드물지만, 신분 강탈도 있다고 했다.

계단을 올라 7층에 도착하자 복도와 사무실 전부 난장판인 모습이 드러났다.

“여기서 서류를 만들어서, 구청 서류 보관실에 넣으면 됨.”

“간단하네.”

서류 위조 장치에 도장까지 있었다. 심지어 사용하는 종이도 구청에서 사용하는 것과 같은 종이 회사의 제품이라나. 마루는 김 양이 하는 것을 따라 위조 서류를 만들었다.

“이름은 뭐로 하게?”

“스미레.”

난 뭐로 하지? 기순이는 알아듣기 쉬운 이름으로 해야 실수가 없다고 했는데. 슥슥- 이름을 쓴 마루가 도장을 찍어 서류를 만들었다.

진작에 서류를 만든 김 양은 금고를 찾았다.

금고라든지, 금괴라든지···. 그리고 결국 찾았다.

어떻게 가져가지?

아?

수륙양용차를 가져왔으면 가득 싣고 갔을 텐데. C4를 왜 챙겨왔겠는가? 그런데 그게 다 의미 없게 됐다. 자동차도 오토바이도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전자기파 그러니까 EMP 같은 게 터져서 그런 것 같다는데, 아깝고도 비통했다.

‘왜 먹지를 못하니, 주인도 없는데.’

“구청 가야 한다면서? 어서 가자. 점심 전에 끝냈으면 좋겠는데, 갈 때는 헬기 불러서 헬기 타고 가자.”

김 양은 마루를 보곤 애처롭게 금고를 돌아봤다. 그냥 이대로 떠나야만 하는가? 심지어 마루는 언제 어디서 챙겼는지 일본도와 롱소드를 합해 5자루나 챙기고 있었다. 희희낙락한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기는 다 챙겨 놓고서.’

어쩌겠는가? 저것도 다 능력이지. 김 양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뗐다.

구청도 엉망이었다. 컴퓨터는 먹통이고 사람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좋았다. 걸리적거리는 일이 생기지 않으니, 이렇게 빠를 수가.

“이걸로 끝인가? 너무 간단한데?”

“끝임.”

“전산망에 등록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전산망 날아가서. 공무원들 돌아오면 수작업으로 입력할 것이라 괜찮음.”

“여권은?”

“전기도 끊겼고 전산도 먹통이라 신청하기 힘듦.”

신분 만들었으니까, 여권도 같이 만들면 좋았는데 쉽지 않았다.

“신분 만들었으니까, 호적 등본이나 초본 같은 거 떼어서 교토 같은 대도시 가서 만들면 됨.”

“쿄토 쪽으로 가자고? 그건 아니지, 그리고 일본은 등록된 거주지에서만 신청할 수 있는 거 아니었어? 내가 알기론 그런데.”

일본은 거주지역에서만 여권 신청이 가능하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도쿄 거주자가 인근 지역으로 출퇴근할 경우, 회사 근처에서는 여권 신청이 불가능해 회사를 쉬고 거주지인 도쿄 여권 센터에서 신청하고 찾아야 했다.

“지금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도 그러겠음?”

어쩔지 알고, 여권도 따로 인쇄하는 곳이 있다던데, 거기가 무너졌거나 그래서 여권 업무가 마비됐으면?

“그냥 위조 여권 가자. 근처에 여권 센터 있을 거 아니야.”

“······.”

여권 센터에서 여권을 뭉텅이로 챙긴 뒤, 늦은 아침이라도 먹을 겸 편의점에 들렀다. 텅 빈 편의점. 음식이고 물품이고 텅 비어 있었다.

“편의점을 누가 털었겠냐? 사람들이 털었겠지.”

그러니까 보이지는 않더라도 어딘가에 사람들이 짱박혀 있을 거다. 마루가 가방에서 민수용으로 나온 전투식량 5개를 꺼내 하나를 김 양에게 던졌다.

“후딱 먹고 헬기 부르자.”

“하나 더.”

자기만 입인가? 마루가 옆에 꺼내놓은 전투식량 하나를 더 건넸다.

======

======

헬기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

“······.”

[치지지---이익]

[삐이이익-----]

위성 통신기라고 했는데 이러면 어쩌라는 건가?

심지어 샬롯 사장과도 연결되지 않고 있었다. 위성 통신이라면서 먹통이라니, 어쩐지 신분 만들 때 쉽게 넘어가더라. 마루가 뒷골을 잡았다.

방법은 둘. 하나는 여기서 바로 기순이가 있는 도난 병원으로 돌아가는 것. 다른 하나는 야마츠키 신약으로 가서 상황을 확인하고 중화제를 챙기는 것이었다.

“사장과 연락이 끊긴 걸 보니까. 그쪽에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거기 가볼까 아니면 그냥 병원으로 돌아갈까?”

“······.”

‘너 꼴리는 대로 할 거면서 뭘 물어보니?’ 표정으로 김 양이 쳐다보자 마루가 헛기침했다.

“귀찮더라도 호텔 사장이 간 야마츠키 신약에 가보는 게 좋을 것 같다.”

“······.”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 김 양이었다.

“혹시 모르니까 근처에 마트나 편의점 있으면 들렀다가 가자.”

“좋음.”

‘너만 3개 먹고. 배고프다고.’ 김 양은 배가 고팠다.

======

======

야마츠키 신약으로 가는 길목에서만도 벌써 편의점 4곳 마트 2곳에 들렀는데 음식류가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생수도 없었다. 과자나 사탕을 비롯해 껌까지 없었다. 김 양은 탄식했다. 어제저녁부터 오늘 점심까지 먹은 게 꼴랑 전투식량 2개. 그것도 양이 든든한 게 아니라 캠핑용으로 나온 전투식량 흉내 낸 그런 거.

김 양이 망연자실 칼로리 소모를 최소화하기 위해 축 늘어져 앉아있는 동안 마루는 냉동식품류가 있는 냉장고로 갔다. 다행히 냉동, 냉장 식품이 제법 남아있었다. 남아있는 냉동 피자를 전부 꺼낸 마루가 잡화 코너에서 가스버너를 찾아왔다.

철컥- 가스버너에서 불꽃이 피어오르자, 김 양의 두 눈동자에도 빛이 돌아왔다.

녹아버린 냉동 피자였지만, 상하지는 않았다. 상태를 확인한 마루가 치이익- 빈대떡 굽듯이 프라이팬에 냉동 피자를 굽기 시작하자 분위기 좋아졌다. 그렇게 열심히 먹어대고 있는데 멀리서 헬기 소리가 들렸다.

입안 가득 피자를 씹고 있던 마루와 김 양이 서로를 바라봤다. 마루가 눈에 힘을 줬다. ‘이거 다 누가 찾았어?’, 김 양이 남은 피자를 절반으로 잘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제법 가까운 곳을 지나가는 헬기였다.

‘우리 헬기는 아니고.’

닥터 헬기나 그런 헬기는 아니었다. 그냥 기업용 헬기? 옆에 붙어 있는 마크가 눈에 익었다.

‘저거 월드 그룹 헬기잖아?’

회사 헬기였다. 한국 회사 헬기가 왜 일본에 있지? 여기까지 추적한 거야? 설마. 김 양은 재빨리 들고 있던 피자를 입에 욱여넣고 마트 안으로 들어갔다. 마루는 피자를 다 먹고는 튀김을 하겠다고 기름을 붓고 있었다.

“회사 헬기. 월드 그룹 헬기가 지나감.”

“뭐? 월드 그룹 헬기? 그게 왜 여길 지나가?”

월드 그룹이랑은 휴전이라며? 근데 그게 왜 일본에 오고 있지? 월드 그룹도 치료제나 중화제 전투자극제를 원하나?

“어느 방향인데?”

“우리 가는 방향이랑 비슷함.”

그럼 월드 헬기도 야마츠키 신약으로 간다는 소리? 거의 그럴 확률이 높았다. 튀김까지 먹으려고 했는데.

“짐 챙겨. 야마츠키 신약까지 얼마나 남았냐?”

“30분 정도?”

엉망인 도로를 타고 두 대의 자전거가 부지런히 달렸다.

======

======

야마츠키 신약 본사엔 넓은 공터가 있었다. 그 공터에 나란히 앉아있는 두 대의 헬기. 마루가 타고 온 닥터 헬기와 월드 마크가 있는 헬기였다.

쌍안경으로 주변을 살핀 마루가 김 양에게 쌍안경을 건넸다.

“거기 헬기 근처를 봐봐. 이상한데?”

“?”

“보통 헬기 조종수는 헬기에 남겨두잖아. 근데 이쪽도 월드 쪽도 헬기 조종사가 근처에 없어.”

“······.”

“보초도 없지?”

쌍안경으로 주변을 살핀 김 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보초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마루가 고갯짓했다. ‘가라 김 양.’

김 양은 착하게 한숨 쉬고 장비를 챙겨 나갔다.

스윽

풀이 살짝 밟혔다가 올라왔다. 일렁이는 공간이 잠시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큼. 큼.

월드 헬기 안쪽에서 나는 희미한 탄 내. 뭔가 화재 현장에 있다가 나왔나 싶을 정도의 탄 내였다. 헬기 바닥에 묻은 핏방울. 닦지 않은 것도 그렇고 굳기도 그렇고 피 흘린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흔적이었다.

김 양은 닥터 헬기도 살폈다. 내렸을 때와 똑같은 모습. 별다른 문제는 보이지 않았다. 야마츠키 신약 본사 건물로 가자, 고장 난 CCTV가 보였다. 완전히 부서진 CCTV. 밖을 향한 CCTV가 전부 부서져 있었다.

김 양이 로브 밖으로 팔을 내밀어 흔들었다. 그걸 본 마루가 다다닥-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200m는 족히 넘을 거리를 순식간에 내달린 마루를 보곤 김 양은 질려버렸다. 오소소 돋는 소름.

“밖엔 사람이 없음.”

“좋아. 들어가자.”

마루와 김 양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선팅을 진하게 했는지 안쪽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자동문이 고장인지라 옆의 쪽문으로 들어가야 했다. 갑자기 느껴지는 살기. 마루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단순한 살기가 아니었다. 어디서 느껴본 감각.

김 양이 문을 열었다. 끼릭- 문이 열리는 순간, 마루는 은신 상태로 앞장서고 있던 김 양의 머리를 붙잡아 옆으로 밀어 쳤다. 파닥-소리와 함께 옆으로 엎어진 김 양.

쉬리리릭

김 양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칼날이 채찍 소리를 내며 어두침침한 안쪽으로 사라졌다.

“야- 멀리 떨어져.”

마루가 짊어지고 있던 짐을 툭 풀었다.

짐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내는 것과 동시에 화살처럼 찔러오는 칼날. 마루가 재빨리 칼을 뽑아 들었다. 팅-하고 막는 순간 칼날이 깨져 나갔다. 쩡! 마루의 칼을 깨뜨린 회백색 칼날이 뱀처럼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콰창- 쨍-

강화유리로 된 창문이 깨지고 창틀이 뜯어지고 찢어졌다. 마루가 다시 칼을 뽑았다.

투콱! 비웃듯이 쏘아진 칼날. 고무줄을 팽팽하게 당겼다가 놓은 것처럼 칼날이 마루의 머리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왔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심장 뛰는 소리가 느려지는 것처럼 길게 늘어지는 시간.

넓어진 시야에 회백색 칼을 붙잡고 있는 검은색 손이 들어왔다. 그 손이 달린 검은색 팔뚝은 근육도 털도 없이 오징어 다리처럼 미끈했다.

뽑은 칼을 깨뜨리겠다는 걸 숨기지 않은 일격.

같은 패턴으로 또 공격해? 마루가 이가 드러나도록 미소 지었다.

츠칵- 살짝 흘린 일격이 옆으로 미끄러지며 그대로 벽에 박혔다. 깊게 박힌 칼날이 철근콘크리트 벽을 잘라낼 것처럼 좌우로 찢어댔다.

툭 작게 내딛는 소리와 함께 마루가 길게 앞으로 뻗었다.

길게 번뜩이며 휘둘러진 빛이 번들거리는 검은 팔뚝을 스쳐 지나갔다.

[■■!!!]

철퍽 소리와 함께 회백색 칼날을 쥔 검은 팔뚝이 바닥에 떨어졌다. 검은색 피를 사방에 흩뿌리며 비틀어대는 검은 팔뚝.

낙지가 꿈틀거리는 것처럼 꾸물거리는 팔뚝을 칼끝으로 툭 공중으로 띄운 마루가 칼질을 시작했다.

후두두둑

잘게 토막 난 조각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콰직!

그 조각을 짓밟은 마루가 밖으로 나오라는 듯 칼끝을 까닥였다.

[■■■■■■■■!!!]

0